소설리스트

27장 (27/39)

27장

“하! 말도 안 돼.”

아서가 웃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하지만 클로에는 발끈하지 않고 말했다.

“정말이에요. 저는 황자 전하도 보이 숙차를 정말 맛있게 드시게 할 수 있어요.”

“자신감이 아주 대단한데. 내기할래?”

“내기요?”

아서가 씩 웃으며 말했다.

“그래, 내기. 네가 우린 보이 숙차를 특별히 한 잔은 먹어 주도록 할게. 만일 내가 그걸 먹고 맛있다고 느끼면 네가 이기는 거고, 역시 별로라고 느끼면 내가 이기는 거야.”

“흐음…….”

클로에가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서는 괜히 안달이 났다. 클로에가 이렇게나 그에게 호의적으로 나온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계속 그가 접근하거나 말 한마디만 걸어도 거부당하지 않았던가.

이것이 기회였다. 조금이라도 더 그녀의 관심을 끌고 싶었다.

아서는 너무 안달한 나머지 여유를 잃어버렸다. 그가 유치하게 도발을 시도했다.

“역시, 천하의 클로에 선생도 내기까지는 좀 무서운가 보지? 하기야 저런 차를 어떻게 나한테 맛있게 먹이겠어. 그런 건 아무리 너라도 힘들…….”

“그래요, 할게요.”

듣다 못한 클로에가 말했다. 아서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넘어왔다!’

그는 자신의 도발에 클로에가 걸려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 클로에는 딱히 발끈하지 않았다. 다만 황자씩이나 되어서 너무나 유치하게 도발하는 그의 모습이 안쓰러웠을 뿐이다.

그러니까 굳이 말하자면 ‘이거나 먹고 떨어져라’일까.

‘남에게 새로운 차를 맛보여 주는 건 내가 좋아하는 일이기도 하고 말이지. 딱히 손해 볼 건 없어.’

아서는 관심 있는 여자애를 괴롭혀서 관심을 끈 초등학생 남자애처럼 신이 났다. 그는 응접실 소파에 편안하게 몸을 묻으며 팔짱을 꼈다.

“좋아, 그럼 어디 한번 맛 좀 보실까? 클로에 선생님의 특별 레시피를.”

안달하던 아까와 달리 지금의 그의 말과 몸짓에서는 여유가 묻어났다.

그는 자신의 승리를 백 퍼센트 확신하고 있었다.

그야 당연했다. 이 승부의 심판은 바로 자기 자신이니까. 애초에 보이 숙차가 맛있게 느껴질 리도 없겠지만, 설령 클로에가 뭔가 마술을 부려서 좀 먹을 만한 것을 만들어 내도 자신이 맛없다고 해 버리면 그만이다.

‘이거 재밌는걸. 내가 이기면 뭘 요구할까나.’

아서는 생각했다.

‘역시 아무리 똑똑한 척해도 순진해 빠졌다니까. 나라면 이렇게 불리한 내기는 죽어도 안 할 텐데 말이지.’

한편 클로에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분명 자기가 백 퍼센트 이겼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어차피 평가하는 것은 자신이니까, 맛이 어떻든 간에 맛없다고 해 버리면 그만이라고 말이야.’

그녀는 측은함을 담은 눈빛으로 아서를 바라보았다. 어쩜 이렇게나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지, 참으로 단순한 정신세계를 갖고 있는 작자다.

‘하지만 과연 본인 마음대로 될까 모르겠네.’

상대방이 자신보다 한 수 위라고는 조금도 깨닫지 못한 불쌍한 아서는 신이 나서 말했다.

“뭐해? 얼른 차 가져오지 않고.”

“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클로에는 보이 숙차와 이런저런 준비물들을 가지고 탕비실에 들어갔다.

혼자 있는 동안 아서는 자신이 이기면 클로에에게 무엇을 요구할지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었다.

‘그놈의 황자 전하라는 호칭, 마음에 안 들었단 말이야. 쓸데없이 거리 두는 것 같아서. 이참에 아예 아서라고 부르게 할까? 그 짜증 나는 알폰스 녀석이 무슨 표정을 지을지 기대되는데. 그래, 아예 말을 편하게 하라고 하는 것도 좋겠어. 아니면 나를 위해 하루쯤 시간을 내게 하는 것도…….’

그가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 동안 클로에가 돌아왔다. 쟁반을 들고 있는 하녀와 함께였다.

하녀는 쟁반에 담긴 것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꾸벅 인사를 한 뒤 다시 벽에 붙어 섰다. 소파에 반쯤 누워 있던 아서가 몸을 일으켰다.

“드디어 다 됐구나.”

그가 말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보이차이니만큼 동방 다구에 우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클로에가 가져온 것은 서방풍의 찻주전자였다. 아서가 호기심을 담은 눈으로 말했다.

“이번에는 서방식으로 우렸나 보네.”

“맞아요, 황자 전하.”

클로에가 말했다.

그녀가 아서의 찻잔에 차를 따랐다. 찻잔 안에 차오르는 찻물을 보고 아서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건, 설마……!”

“맞아요.”

클로에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밀크티예요, 황자 전하.”

아서의 찻잔 안에 가득히 차오른 것은 마치 초코 우유 같은 느낌의 밀도 높은 액체였다. 이름하여 보이 밀크티.

아서는 어안이 벙벙했다. 세상에, 이런 레시피는 생각도 해 본 적 없었다. 여태까지 밀크티는 홍차로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말도 안 돼……. 보이차로도 밀크티를 만든단 말이야?”

“네. 약 4.5 : 5.5 정도의 비율로 아쌈 홍차를 블렌딩하긴 했지만요.”

“하지만…… 나도 홍차가 아닌 차에 우유를 타 보긴 했어. 녹차에 우유를 탔을 땐 정말 더럽게 맛이 없었는데…….”

“맞아요. 녹차로는 밀크티를 만들 수 없어요. 하지만 보이차는 다르죠.”

클로에가 검지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보이차뿐만 아니라, 대홍포, 수선 등의 농향 우롱차에 우유를 넣어도 맛있답니다. 이런 건 모르셨겠죠?”

“뭐라고, 우롱차도?”

아서는 당황했으나 곧 평정을 찾았다. 비록 놀라긴 했지만 여전히 자신이 유리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뭐, 클로에답게 나를 놀라게 하긴 했지만. 그래 봤자 여전히 심판권은 나에게 있으니까 말이야. 이건 빼도 박도 못하게 나의 승리라고.’

그는 조금 우쭐한 마음으로 생각했다. 그가 찻잔을 들어 올리며 여유롭게 말했다.

“좋아, 보이 밀크티라니……. 네 덕분에 정말 새로운 걸 다 맛보는걸. 잘 먹을게.”

그렇게 말하고, 무심코 찻잔을 입에 댄 그 순간이었다.

‘……!’

그건 정말 새로운 경험이었다.

밀크티 특유의 밀도 있고 보드라운 찻물이 혀를 감쌌다. 목 뒤로 넘어가서 뱃속을 덥히는 따뜻하고 달콤한 밀크티의 맛.

여기까진 익숙한 밀크티니까 그렇다고 치자. 한데 다른 밀크티와의 명백한 차이가 있었다.

보이 숙차를 처음 마셨을 때 느꼈던 끔찍한 곰팡내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있긴 있었다. 우유와 설탕, 블렌딩한 아쌈에 덮여 은은해진 숙향은 전혀 괴롭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향미가 느껴졌다. 설마 이것은…….

‘……초콜릿?’

목을 통해 비강을 채우는 이 풍부한 향은 명백한 초콜릿의 향이다.

믿을 수가 없었다. 이런 것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보이 숙차는 초콜릿 향이 나는 차가 아니다. 그렇다고 따로 초콜릿 가향 차나 초콜릿을 블렌딩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뚜렷한 향을 느낄 수 있다니.

아서는 아쌈만으로 만든 단순한 밀크티도 꽤 좋아했다. 하지만 이것은…… 정말, 정말 맛있다. 혀를 도화선 삼아 머릿속에서 폭죽이 터지는 것만 같다.

보이차를 넣어 만든 밀크티는 평범한 홍차 밀크티보다 몇 배는 깊이감이 있다. 보이차 특유의 풍부한 향은 덤이다. 얼 그레이나 우바처럼 풍부하고 섬세한 향을 좋아하는 아서의 입맛에 그대로 적중할 수밖에.

한 모금 맛을 본 아서는 할 말을 잃었다. 그가 당황을 숨기지 못하는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이거 어떡하지? 너무 맛있잖아.

그런 그의 모습을 즐거운 듯 지켜보고 있던 클로에가 말했다.

“전하, 어떠세요? 입맛에는 좀 맞으시나요?”

“아…… 아! 자, 잠깐만 기다려, 클로에. 한 입으로는 잘 모르겠어. 더 마셔 봐야 판단이 서겠는걸.”

아서가 다급히 말했다. 차마 여기서 솔직하게 맛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클로에가 자신을 부르는 호칭을 바꿔 버리겠다는 장대한 계획이 통째로 물거품이 되고 만다.

어떻게든 시간을 끈 아서는 클로에 몰래 휴 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는 생각했다.

‘설마 이렇게 맛있을 줄은 몰랐는데……. 아니야, 어쩌면 다시 먹어 보면 다를지도 몰라. 아까의 한 입은 그냥 분위기 때문에 맛있게 느껴졌던 걸지도 모르지. 그래, 다시 한 번 먹어 보면 분명 그렇게 맛있지는 않을 거야.’

그렇게 생각한 그는 다시 찻잔을 들어 한 입을 더 마셨다.

또 한 번 머릿속에서 폭죽이 튀었다. 도저히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명백하게.

찻잔을 입에서 뗀 아서는 번뇌했다.

‘젠장……! 이렇게 맛있을 일인가?’

사실 보이 밀크티가 아무리 맛있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여전히 내기의 승패 여하는 그의 손에 걸려 있고, 그가 ‘맛없어.’라고 딱 한 마디만 하면 승리는 그에게 돌아가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아서, 그라고 해도 그렇지, 이건 양심에 찔려도 너무 찔린다. 인간적으로, 이것보다 조금만 덜 맛있었어도 맛없다고 거짓말할 수 있었을 텐데.

‘이걸 어떡하지? 맛있다는 말을 맛없다는 뜻으로 들리게끔 빙빙 돌려 말해 볼까? 아니야, 그 정도도 못 알아들을 정도로 클로에가 바보는 아니야. 분명 무슨 뜻인지 알아챌걸.’

게다가 문제가 더 있다. 그는 보이 숙차를 꼭 사고 싶었다. 하지만 맛없다고 해 버리면 클로에는 결코 그에게 보이 숙차를 팔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은근히 자존심이 세니까.

‘젠장……. 이걸 어떡하지. 생각해라, 아서. 생각해. 분명 어디엔가 방법이 있을 거야. 거짓말은 하지 않고 내기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 그러면서도 보이 숙차는 살 수 있는 방법이…….’

공부는 안 해도 머리는 제법 좋다고 자부하는 그였다. 아서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머리가 아프도록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그런 방법이 있을 리가 없잖아!’

오히려 머리가 좋으니까 결론이 더 빨리 나온다. 그리고 결론은 ‘그런 거 없다’였다.

결국 아서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됐어! 네가 이겼어, 클로에. 너는 정말 못 당해 내겠다.”

클로에가 뿌듯하게 웃었다.

“그러실 줄 알았어요.”

그렇게 아서의 ‘클로에의 호칭 바꾸기 프로젝트’는 물 건너 머나먼 곳으로 가 버렸다.

아서는 과장스럽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기를 걸었으니까 내가 뭔가 해 주어야겠지. 뭘 원해?”

하지만 완전히 손해 본 것만은 아니었다. 아서는 그렇게 생각했다.

‘사실, 클로에가 나에게 뭘 요구할지 궁금하기는 해.’

계기야 뭐건 간에, 클로에가 소원을 말하고 자신이 그것을 들어준다. 이것은 사이가 가까워질 좋은 기회였다. 예전처럼 클로에는 일방적으로 벽을 치고 자신은 벽에 부딪히기만 하는 상황보다는 훨씬 나았다.

아서는 가슴이 기대감으로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클로에가 나에게 원하는 게 뭘까?’

참 이상한 일이다. 여태까지 수많은 여자들을 끼고 다니면서, 여자가 뭔가를 요구하면 늘 귀찮기만 했는데. 남에게 무엇을 해 주는 일에 이렇게 가슴이 설렌다니.

‘클로에의 성격에 비싼 선물 같은 것은 아닐 테고. 기왕이면 좀 더 친해질 만한 무언가였으면 좋겠는데. 예컨대 같이 어딘가에 간다든가, 어디서 시간을 보낸다든가…….’

허황된 꿈을 꾸고 있는 아서에게 클로에가 방긋 웃어 보였다.

“아니요, 괜찮아요.”

“그럼, 그 정도야 당연히 해 줄 수……가 아니라 뭐라고?!”

아서가 뜨악했다.

“무……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 클로에. 서, 설마…… 아무것도 해 주지 않아도 된다는 건 아니지?”

“네, 그거예요.”

“뭐라고! 말도 안 돼. 클로에!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이건 기회야! 이 제국의 유일한 황자를 마음대로 할 기회라고?”

아서가 최선을 다해 설득했다.

“너도 알잖아. 나, 이래 봬도 꽤 인기 많아. 나를 마음대로 할 기회가 생겼다고 하면 다른 여자들이 얼마나 부러워하겠어? 이런 기회를 얻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여자가 널리고 깔렸다고. 그런 귀중한 기회를 네가 얻은 거야!”

“그렇다면 다른 여자분께 기회를 양도할게요.”

“뭐라고! 절대 안 돼! ……그러니까, 내기를 한 건 너와 나, 둘이었잖아? 내 말은, 우리 선에서 해결하는 게 좋다는 얘기야. 다른 사람 끌어들이면 쓸데없이 귀찮아지잖아.”

그러나 클로에는 정말로, 진심으로, 아서에게 원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원하는 게 있다는 것은 그만큼 기대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관심도.

그러나 안타깝게도 클로에는 아서에게 티끌만큼의 기대도 관심도 없었다. 그러니 원하는 것도 없을 수밖에.

그녀가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전 정말 괜찮아요, 전하. 무리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니! 무리가 아니야! 나, 나는 그냥…… 내기를 했는데 얼렁뚱땅 넘기면 재미없으니까……!”

“하지만 전 정말 전하께 원하는 것이 없는걸요.”

그렇게 말한 클로에는 힐끔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시곗바늘은 어느덧 오후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요. 그럼 저는 다음 일정을 위해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전하. 옥체 강녕하세요.”

클로에는 예의를 차려 인사하곤 응접실을 떠났다.

결국 응접실에는 나라 잃은 얼굴의 아서만이 남았다.

* * *

클로에가 최선을 다해 아서에게 보이 숙차의 매력을 알려 준 덕에 결과적으로 황궁에 납품하는 보이차는 생차와 숙차, 두 가지가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클로에는 제국에서도 보이차가 생각 외로 먹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트리플 스위트에서 보이차의 출시를 염두에 두게 되었다.

‘보이 밀크티가 특별히 반응이 좋았지.’

아서뿐만 아니었다. 공작저의 사람들도 보이 밀크티를 무척 좋아했다.

“정말 좋은 향기가 나요!”

“홍차 밀크티보다 맛에 깊이가 있는 것 같아요.”

“초콜릿 향이 나는 밀크티라니!”

클로에는 트리플 스위트에 구비하기에 스트레이트(아무것도 섞지 않은) 보이차는 조금 매니악하다고 생각했다.

트리플 스위트의 판매 목록에 제품을 올릴 때 클로에는 대중성을 엄격하게 고려했다. 황궁 납품과 달리 트리플 스위트의 고객은 평범한 귀족(특히 여성)이다.

황제와 아서는 황족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유난히 입맛이 까다로운 편이기에 품종이 매니악하더라도 최상급 차를 공급했다. 반면 트리플 스위트에는 품질이 다소 낮아지는 한이 있더라도 대중적으로 무난히 먹힐 만한 차를 구비하는 편이었다.

물론 몇몇의 VIP 고객을 위해서는 특별 주문도 받아 주기는 했지만 그것은 극히 일부였다.

‘어쨌든, 트리플 스위트에 스트레이트 보이차를 비치하기에는 아직 일러. 가게에서 소개하는 것은 보이차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도 편히 먹을 수 있는 보이 밀크티부터 시작해 보자.’

그렇게 생각한 클로에는 보이 밀크티의 출시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오래지 않아 트리플 스위트에 보이 숙차 잎과 홍차 아쌈 잎을 4.5 : 5.5의 비율로 블렌딩한 것으로 만든 밀크티가 유리병에 담겨 출시되었다.

보이차의 효능과 시음회를 마케팅에 이용하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마침 점차 더워지는 계절이었다. 얼음을 넣어 차게 만든 보이 밀크티는 무척 반응이 좋았다.

특히 특유의 신비스러운 초콜릿 향이 귀부인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보이 밀크티는 출시 초반부터 순조로운 호조를 올렸다.

‘벌써 초여름이네.’

날씨가 더워지니 티룸에만 틀어박혀 차를 마시는 것은 답답하게 느껴졌다.

클로에는 찻잔과 잔 받침만 달랑 들고 나와 저택의 복도를 걸었다. 혼자 있는 느긋함을 느끼기 위해 시녀나 하녀도 대동하지 않았다.

티룸이 있는 3층에서 1층까지 계단을 걸어 내려와 응접실 쪽으로 이어져 있는 저택 본관 복도를 거닐었다. 딱히 목적지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산책하듯 발 닿는 대로 걸었을 뿐이다.

그렇게 걷는 동안 하녀나 시종을 여러 번 마주치기도 했다. 주인마님과 마주친 하녀들이 예의를 차려 인사했다. 클로에는 가볍게 미소 지으며 눈인사만 해 주었다. 자신은 신경 쓰지 말고 하던 일을 계속하라는 뜻이었다.

1층 복도 한복판에 도달했을 때는 찻잔에 담아 온 홍차를 다 마셨다. 클로에는 창틀에 빈 찻잔을 내려놓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직 이른 오후였다. 창밖에는 햇살의 샛노랑과 초목의 신록이 뒤섞여 눈이 부셨다.

‘이곳에 온 지도 벌써 일 년이구나.’

이곳에 처음 온 시기도 초여름이었다. 생기 어린 초록을 올려다보며 클로에가 생각했다.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처음 이곳에 떨어졌을 때의 혼란과 두려움과 당황스러움을.

적응력은 워낙 좋은 데다가 클로에가 겪은 이전의 기억이 있어서 도움이 되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공작부인으로서의 삶은 쉽지 않았다. 저택 내의 사람들에게조차 배척받았던 시기가 있었으니까.

그때를 생각하면, 좋은 사람들과 차 한 잔씩 하면서 웃을 수 있는 지금이 더 행복하게 느껴진다.

일 년 전을 회상하던 클로에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처음 왔을 때는 알폰스의 첫인상이 좋지 않았지.’

그때를 생각하면 공연히 웃음이 나왔다. 처음에는 알폰스가 무서운 것까지는 아니어도 불편했다. 너무 차갑고 무뚝뚝하고 정이 없어 보였던 것이다.

‘처음에는 그랬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클로에는 눈앞에 알폰스의 얼굴을 그려 보았다. 세상에서 제일 무뚝뚝한 그녀의 남편. 하지만 세상에서 누구보다 사랑스러운…….

‘정말로, 여기에 올 수 있어서 다행이었어.’

그때였다. 그녀의 몸을 누군가가 끌어안았다.

하지만 클로에는 놀라지 않았다. 이 팔뚝이 누구의 것인지를 알고 있었다. 알 수밖에 없었다. 수백 번도 더 안겼던 그 팔이니까.

“알폰스!”

클로에가 탄성처럼 말했다.

클로에도 결코 키가 작지 않은데, 알폰스는 그녀보다도 훨씬 커서 이렇게 가까이 붙어 있으면 한참을 올려다보아야 했다.

올려본 그의 얼굴은 언제나 그랬듯 표정이 적었다. 하지만 클로에는 알 수 있었다. 엷게 떠오른 그의 입꼬리가, 따뜻한 빛을 품고 있는 눈동자가 어떤 감정을 비치고 있는지.

그는 대답 없이 그녀의 이마와 코끝, 입술 위에 차례로 입 맞추었다. 그러고도 모자라는지 얼굴 이곳저곳에 자꾸만 입을 맞춰서 클로에는 간지러움에 까르르 웃어야만 했다.

클로에가 물었다.

“잘 다녀오셨어요?”

“예.”

“일찍 오셨네요.”

알폰스가 외근을 나가면 보통 저녁쯤에 돌아오는 편이다. 지금은 오후 2시도 채 되지 않았으니 매우 일찍 온 셈이다.

그 사실을 알폰스 본인이 모르지 않을 텐데도, 그는 눈을 두어 번 끔뻑끔뻑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렇습니까?”

“네. 일찍 오셨잖아요?”

클로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그 모습이 귀엽다는 듯 알폰스의 눈매가 더더욱 부드럽게 휘었다.

그가 나직하게 말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어머?”

“부인을 너무 오래 떠나 있었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가 조심스레 클로에의 뺨을 쓸었다. 그의 손길이 스쳐 지나간 뺨이 능금빛으로 달아올랐다.

고작 아침 먹고 지금까지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그 시간이 너무 길었다는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무뚝뚝한 듯 보이면서도 이렇게 가끔 보이는 직접적인 언행을 클로에는 견딜 수가 없이 부끄러워했다. 그녀의 올리브빛 눈동자가 데굴 굴러 다른 쪽을 향했다.

그 모습이 귀엽다는 듯 알폰스가 픽 웃었다. 그가 물었다.

“부인께서는 그러지 않으셨습니까?”

“네?”

“부인께서는 제가 그립지 않으셨냐는 말입니다.”

심장이 숨길 수 없이 빠르게 뛰었다. 우물쭈물하던 클로에는 다시 그에게 눈을 맞추었다. 남들은 두려워하기까지 하는 붉은 눈동자가 그녀의 눈엔 한없이 예쁘기만 했다.

‘그립지 않았냐니.’

그럴 리가. 사실은 보고 싶었다. 대체 어떻게 아침에 실컷 봐놓고 헤어지자마자 또 보고 싶은지 클로에 자신도 신기할 정도였다.

매일 보는데도 매일 새로운 그리움을 경신하고 있었다. 단지 할 일과 신경 쓸 일이 많아서 묻어놓고 있을 뿐이었다. 이렇게 그를 다시 볼 때마다 매번 실감했다. 그를 다시 볼 때마다 심장이 행복의 비명을 질렀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남자친구가 없었던 것도 아닌데, 이런 느낌을 처음으로 느껴 본다는 건.

‘알폰스, 그거 알아요? 사람이 사람을 이렇게나 좋아할 수 있다는 걸 저는 미처 몰랐어요.’

알폰스와 다르게, 클로에는 감정 표현에 인색하지 않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정직하게 표현했다.

하지만 그의 앞에만 서면 더 이상 그럴 수 없어진다. 말만으로 이 마음을 전부 전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클로에는 알폰스의 손을 조심스레 잡아 쥐었다. 알폰스의 눈앞에서 그의 손에 가는 손이 깍지를 낀다.

클로에는 행복하게 웃었다.

“보고 싶었어요, 알폰스. 정말 보고 싶었어요.”

이 이상 그에게 구원처럼 느껴지는 말이 또 있을까?

초여름의 햇살이 샛노랗게 반짝였다. 초목의 잔 그림자와 뒤섞인 햇살이 그녀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타래처럼 땋아 내린 진갈색의 머리카락이, 티 없이 맑게 웃는 아내의 얼굴이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알폰스는 한 팔로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꺄악!”

그는 클로에를 인형처럼 안아 든 채 성큼성큼 창틀로 걸어갔다.

그녀를 창틀에 앉혔다. 알폰스는 클로에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얽으며 그녀를 갈증 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다.

샛노란 햇살과 나뭇잎 그림자 아래의 아내. 의아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쪽을 바라보는, 뺨을 능금빛으로 물들인 아내.

알폰스는 이 세상에 그녀 이상으로 아름다운 여자는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말 한마디로 자신을 구원할 여자 역시 그녀 외엔 없을 것이다.

놀라서 눈을 깜빡거리던 클로에는 그의 얼굴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그의 입술이 입술을 부드럽게 덮을 때 클로에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녀의 속눈썹이 사뿐히 내려앉았다.

이 정도 붙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듯이 알폰스의 몸이 자꾸만 그녀에게 기울어져 클로에는 유리창에 등을 기댈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그녀를 탐해도 만족할 수 없다는 듯 그의 입맞춤은 길고 진득하게 이어졌다.

숨이 찼지만 너무나 달콤했다. 그 달콤함에 취해 있던 클로에는 그의 입술이 점차 다른 곳을 탐해 오는 것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그녀가 상황을 깨달은 것은 그의 입술이 흰 목덜미를 거쳐 쇄골까지 내려온 이후였다.

“어맛, 알폰스! 잠깐, 여기서는 안 돼요!”

클로에가 그렇게 말하는 동안에도 그녀의 쇄골 위에 붉은 자국이 몇 개나 더 생겨나고 있었다.

“여기는 복도라고요! 게다가 창가란 말이에요. 누가 밖에서 보면 어떡해요?”

“괜찮습니다.”

“괘, 괜찮다니요!”

크게 소리치면 누가 듣고 달려올까 봐 목소리를 크게 키우지도 못했다. 클로에는 드레스 카라 위로 새겨진 붉은 자국들을 흘끗 보고 울상을 지었다.

‘저번에 생긴 게 없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또 한동안 목이 파인 옷은 못 입겠네.’

알폰스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곳에 이 시간에 올 사람은 없습니다. 보는 사람은 결코 없을 겁니다.”

“하, 하지만…… 응…….”

클로에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가 그 말을 하고 그녀의 귓불을 물어 버린 것이다. 그녀의 약한 부위였다. 그곳을 공략하면 그녀가 잠잠해진다는 것을 알폰스는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클로에는 가슴이 마구 두근거렸다. 누구한테 들킬지 몰라 조마조마한데, 이런 곳에서조차 자꾸만 달아오르는 몸이 야속했다.

알폰스가 앞섶을 풀어 내리려고 하는 것을 느낀 클로에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으로 그의 소매를 간신히 잡아 쥐었다.

“알폰스, 우리 적어도 방에 들어가서 해요. 네?”

클로에가 간절히 말했다.

“응접실에서요. 저…… 그곳에서라면, 원하는 거 다 해 줄 테니까…….”

살다 살다 이런 말까지 하다니, 창피해 죽을 것 같다. 클로에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러는 클로에의 모습을 보는 알폰스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는 그녀의 붉어진 이마에 가볍게 입 맞추곤 말했다.

“원하신다면.”

알폰스는 클로에를 안아 들고 응접실로 향했다.

방에 들어가 문을 잠근 뒤, 알폰스는 그녀를 긴 소파 위에 눕혔다. 그는 다시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며 그녀의 긴 머리를 땋아 묶은 끈을 손끝으로 풀어 내렸다.

알폰스의 긴 손가락 끝에 풀린 머리카락이 하늘하늘 흩어졌다. 자신의 머리가 풀리는 것도 알지 못한 채 클로에는 그의 어깨를 잡아 쥐었다.

“으응…….”

아마 자신조차 눈치채지 못한 새에 한 행동일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기대 오는 그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알폰스는 안 그래도 뜨겁던 열정에 불이 붙는 것만 같았다.

그녀의 입 안을 탐하면서도 알폰스는 눈을 완전히 감지 않고 클로에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서툴게나마 그의 입맞춤에 응해 오는 그녀가, 이쪽의 어깨를 팔로 감은 채 뺨을 붉히는 그녀가 이보다 더 색스러워 보일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잡아먹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알폰스는 친부의 유산인 인내심으로 참아냈다. 그것은 방금 클로에가 했던 말 때문이었다.

알폰스는 그녀의 입술에서 입술을 떼어낸 뒤 속삭였다.

“원하는 것은 다 해 준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에 클로에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그랬다. 차마 복도에서 낯부끄러운 짓을 할 수가 없어서 자리를 응접실로 옮기려고 한 말이었는데.

하지만 이제 와서 한 입으로 두말할 수는 없었다. 그의 뜨거운 붉은 눈동자를 마주한 채 그런 말을 듣고 있자니 마치 짐승의 쩍 벌린 주둥이 앞의 작은 초식동물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불안함, 불길함, 이런저런 감정으로 가슴이 뛰었다. 하지만, 그 두근거림엔 기대감도 섞여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클로에는 부끄러워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래요. 원하시는 것은 다 들어드릴게요. 약속했으니까요.”

“약속이라.”

알폰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 단어를 다시 한 번 반복하곤 웃었다.

그의 눈에는 클로에의 마음이 훤히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녀가 이렇게 순순히 나와 주는 것은 그를 믿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원하는 것은 뭐든 들어준다고 해도, 알폰스 그라면 자신을 상처입히거나 정말로 힘든 일은 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그것은 전부 알폰스의 속이 얼마나 검은지 모르는 순진한 그녀의 착각이었다. 겉으로는 누구보다 고결한 귀족의 가면을 쓰고 있으나 그 속은 누구보다 음흉한, 그것이 바로 알폰스 바텐베르크의 정체였다.

클로에, 그녀는 알폰스가 자신을 볼 때마다 얼마나 음흉하고, 음탕한 생각을 하는지 상상도 못 하기에 그런 조건을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이리라.

알폰스는 클로에의 등허리를 받친 손가락으로 그녀의 허리를 간질였다. 어떤 욕망을 충족해 볼지 생각하기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후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후회하지 않아요.”

클로에는 제법 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한없이 부끄러워하던 아까보다는 꽤 단호한 눈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꽤 자존심이 센 편이었다. 그런 점마저 사랑스럽고, 매력적이었다.

알폰스는 여유로운 얼굴로 그 녹색 눈을 감상하다가, 그녀의 뺨을 간질이며 말했다.

“뜻이 그러시다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그렇다면 첫 번째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무…… 물론이죠. 뭔데요?”

클로에는 심장이 더더욱 세차게 뛰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마치 북소리 같아서, 상대에게 들릴까 봐 걱정이 될 정도였다. 묘한 긴장감에 저도 모르게 침이 꼴딱 넘어갔다.

알폰스는 아주 가볍게 말했다.

“옷을 벗어 주십시오. 제 눈앞에서.”

그렇게 말하는 어조는 꼭 ‘오늘 저녁은 뭘 먹을까요’ 같은 일상적인 말을 하는 것만큼이나 가벼워서, 클로에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벗…… 으라고요? 알폰스의…… 눈앞에서요?”

클로에의 얼굴이 단숨에 달아올랐다. 하지만, 알폰스는 여전히 담담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대답하는 그의 얼굴은 입가에 띤 가벼운 미소를 제외하곤 무척이나 단정하고 담담했다. 자신이 내린 음란한 명령에 대한 수치심이나 부끄러움 같은 것은 추호도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반면에 클로에는 얼굴을 잔뜩 붉힌 채로 머뭇거리고 있었다.

사실 알폰스는 꽤 자중한 편이었다. 훨씬 음란한 욕망이야 얼마든지 있었으나 아쉽게도 그의 아내는 부끄러움이 많았고 마음이 여렸다. 아무리 욕망이 들끓는다 한들 사리 분별은 할 줄 알았다. 아무리 클로에가 허락했다 한들 그녀를 상처 주거나 미움받게 되면 곤란하지 않은가.

알폰스는 머뭇거리는 클로에의 허리에 팔을 감아 끌어당기곤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왜 그렇게 부끄러워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미 제게 벗은 몸은 한두 번 보여 주신 게 아니지 않습니까. 눈을 감으면 부인의 몸이 하나하나 그려질 정도입니다만.”

“네, 뭐, 뭐라고요?”

그의 말에 클로에는 얼굴이 더욱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의 팔이 닿은 몸의 부위마저 뜨겁게 달아올라서 금방이라도 타오를 것만 같았다.

하지만 복병은 마지막에 있었다.

“아니면, 역시 제가 벗겨드리는 것을 원하시는 겁니까?”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아서 클로에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가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아니, 그런 게 아니에요! 하, 할 수 있어요. 잠시만요…….”

클로에는 알폰스의 팔을 푼 뒤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스타킹부터 조심스럽게 벗어 내리기 시작했다.

먼저 가터벨트를 풀고, 왼쪽 스타킹을 당겨 벗어 협탁에 떨어뜨렸다. 그리고 오른쪽도. 스타킹을 벗기 위해 들어 올린 치맛자락 아래로 그녀의 하얗고 매끈한 다리가 드러났다.

알폰스는 소파에 몸을 묻은 채 그런 그녀를 여유로운 얼굴로 지켜보았다. 얼굴만은 여유로웠으나 그의 눈빛은 강렬해서, 클로에는 그의 눈길이 닿는 곳마다 불이 붙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클로에는 앞섶의 리본을 풀어 내리고, 조심스럽게 상의 부분을 끌어올려, 드레스에서 빠져나왔다. 혼자 드레스를 입고 벗을 줄 알아서 다행이었다.

마침내 그녀의 하얀 상체가 드러나고, 몸에 걸친 것은 가터벨트가 달랑거리는 아래 속옷밖에 없게 되었다.

클로에는 목까지 얼굴을 붉힌 채, 두 팔로 가슴을 가리며 머뭇거렸다. 여전히 알폰스는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비록 그를 똑바로 바라볼 수는 없었으나, 그의 뜨거운 눈길이 와 닿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가 머뭇거리고 있자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그러십니까? 주저하고 계시군요.”

왜긴 왜겠어. 클로에는 붉어진 얼굴로 그의 쪽을 흘겨보았다. 하지만 이제 와서 못하겠다고 하거나, 벗겨 달라는 말을 할 용기는 더더욱 나지 않았다. 그녀는 한 입으로 두 말 하는 것을 싫어했다.

‘그래, 몸을 처음 보여 주는 것도 아니고……. 이미 수십 번, 아니 수백 번은 본 것 같은데.’

마침내 클로에는 심호흡을 하곤 가슴에서 팔을 떼고, 속옷을 조심스럽게 내리기 시작했다. 그의 눈길이 더더욱 강렬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수치심과 떨림, 두근거림 때문에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클로에가 속옷까지 벗어 버리자, 알폰스는 잘했다는 듯 무척이나 다정한 눈길로 이쪽으로 팔을 뻗었다. 그의 앞섶은 바지가 견디고 있는 게 용할 정도로 팽팽하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정말, 몰라요.”

클로에는 토라진 듯 퉁명스럽게 말하면서도 그의 품에 안겼다. 알폰스는 품에 안긴 그녀의 얼굴 이곳저곳에 키스를 퍼붓다가 쇄골에 몇 개나 되는 자국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조급한 움직임에서 그 역시도 참을 만큼 참았다는 것이 느껴졌다.

단지 자신이 옷을 벗고 몸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그가 이렇게 흥분하다니. 그렇게나 냉혈하고 어떤 것에도 동요하지 않을 것 같은 그가. 그 사실에 클로에는 왠지 모를 만족감을 느꼈다.

“아앗, 으, 흐읏…….”

그의 손이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꽤나 젖어 있군요. 제게 보이는 것에 흥분하셨던 겁니까?”

클로에는 화들짝 놀라 그의 가슴팍을 팍 밀쳤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더 단단히 안아 와서, 조금도 밀려나지 않았다.

“정말! 아니에요. 그건 그냥…… 당, 신이 날 만져서, 아흣…….”

황급한 변명에 그의 나직한 웃음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클로에는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것을 느꼈다. 사실 정곡을 찔려, 도둑이 제 발 저리듯 강한 반응을 보인 것이지만 그것은 그에게는 영원히 비밀로 하기로 했다.

그가 작은 구슬을 둥글게 비비자 클로에의 허리가 튀어 올랐다. 입구에 손가락을 한 개, 두 개까지 넣어 길을 들이자, 뜨거운 내벽이 이런 것을 바랐다는 양 손가락을 조이며 오물거렸다.

내부가 이완과 수축을 반복할 때마다 알폰스는 미칠 것만 같았다. 어서 이 뜨겁고 촉촉하게 젖어 있는 길로 들어가고 싶어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다치거나 놀라지 않도록, 극도의 인내심을 쥐어 짜내며 충분히 애무하기를 계속했다.

마침내 그녀가 충분히 젖어 들자, 알폰스는 미미하게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그는 앞섶을 풀어헤쳐 물건을 꺼내고는 말했다.

“이제, 직접 넣어 보십시오.”

“네?”

클로에는 다시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의심이 갔지만, 알폰스는 소파에 길게 드러누웠다. 정말로 스스로 해 보라는 식이었다.

직접 넣는다니. 그것도 그의 위에 올라탄 상태로……. 생각만 해도 부끄러웠으나 어쩔 수 없었다. 그녀가 그를 응접실로 끌어들이기 위해 했던 말은 아직도 유효했다.

평소라면 부끄러워서 할 수 있을지 없을지 확실치 않지만, 열감과 흥분에 잔뜩 달뜬 클로에의 머릿속이 이성을 마비시켰다. 자신이 약속했으니 어쩔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녀는 뜨겁게 달아오르는 얼굴을 손으로 반쯤 가린 채, 그의 몸 위에 조심스럽게 자신의 몸을 얹었다. 그리고, 천장을 향해 우뚝 선 그의 것을 손에 쥐곤 자신의 입구에 맞추어…… 심호흡을 하곤, 천천히 밀어 넣었다.

“으, 으응……!”

그것은 정말이지 힘이 드는 일이었다. 커다란 것이 아랫배에 가득 차오르는 감각과, 숨이 턱턱 막히는 감각이 생생했다. 게다가 중력을 따라 더욱 깊이 들어온 그것은 클로에의 입구를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잘못 움직이면 찢어지기라도 할 것 같았다.

“하아, 하아…….”

그저 넣는 것만으로도 녹초가 되어 그의 몸 위에 엎어진 클로에가 숨을 몰아쉬었다. 떨리는 손으로 그의 상체를 짚었다. 와이셔츠로 덮여 있는 몸이었지만, 단단하고, 근육의 윤곽이 손끝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알폰스는 그녀의 탐스러운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그녀가 숨을 고를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마침내 클로에가 삽입에 적응하자, 그가 속삭였다.

“이제 움직여 보십시오.”

클로에는 그의 말대로 했다. 기억 속의 그의 움직임을 떠올리려 애쓰며, 최대한 허리를 움직여 보았다.

“앗, 흐읏. 후우우……!”

그가 아닌 자신이 움직이는 감각은 정말 묘하고 생경했다. 그의 물건의 끄트머리가 내벽을 비비며 문질러 오는 감각이 생생했다. 그의 것이 축축하게 젖은 내벽을 미끄러지듯 움직일 때마다 몸이 움찔거렸다.

어쩌면 이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힘들어서 문제지만.

클로에는 최선을 다했다. 그녀는 헐떡이며 숨을 몰아쉬면서도 조심스럽게 알폰스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도 자신만큼 기분이 좋은지 궁금했던 것이다.

하지만 알폰스는 그저 여유로운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클로에의 얼굴에 의아함이 번졌다.

“아…… 움직이고 계셨습니까?”

“정말, 알폰스!”

클로에가 허리를 움직이다 말고 빽 소리 질렀다. 정말이지, 수치스러워 죽을 것 같았다. 이쪽은 최선을 다하고 있었는데 저런 말이라니!

언제나 그가 자신을 기분 좋게 해 주니만큼, 이번엔 그를 기분 좋게 만들어 주고 싶었는데 이것도 실력이 필요한 일인 모양이었다. 클로에는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그대로 멈춰버렸다.

나직한 웃음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히는 게 느껴졌다.

“제가 아무래도 부인께 과도한 것을 부탁드렸나 봅니다.”

그가 상체를 일으키더니 달래듯이 클로에의 손 옆으로 드러난 얼굴에 몇 번이고 입을 맞추었다. 하지만 클로에는 그것만으로 기분을 풀지 않았다.

“몰라요. 알폰스 정말 미워요.”

“이거 곤란하게 됐군요. 저는 부인을 이토록 사랑하는데, 미움을 사버리다니 말입니다.”

알폰스는 키스를 멈추지 않고 속삭였다. 그런 그의 목소리가 너무나 달콤해서, 클로에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조금 내렸다.

그런 그녀가 귀여운 듯, 클로에의 양쪽 눈꺼풀에 키스하곤 알폰스가 속삭였다.

“대신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이것으로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네? 뭐를…….”

클로에가 의아한 얼굴로 묻던 그 순간이었다.

퍼억 하는 거친 소리와 함께, 그의 골반이 그녀의 골반을 올려쳤다.

“하으!”

갑작스러운 기습에 클로에의 허리가 저절로 비틀렸다. 하지만 한 번으론 끝나지 않았다. 알폰스는 몇 번이고 그녀를 찍어 올렸다. 찰방, 찰방, 쉴 새 없이 젖어 드는 그녀의 안쪽에서 물소리가 연이어 났다. 쿠퍼액과 애액이 뒤섞인 액체가 클로에의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렸다.

“아앗, 아! 으응!”

클로에는 좀 전에 자신이 했던 것은 어린애 장난 수준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진짜 힘을 쓰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 주겠다는 양 그녀를 마구 몰아붙였다.

미칠 것 같았다. 갑작스럽게 올려붙이는 그의 힘을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 조금쯤 스스로 움직여서 그에게 맞추어 보고 싶었지만 버티는 것만으로도 역부족이었다.

허리와 목이 뒤로 젖혀졌다. 그의 거미 같은 긴 손가락이 허리를 타고 올라 척추를 따라 더듬는 감각이 생생했다. 척추를 따라 찌르르 강렬한 전기가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발가락 하나하나가 관절이 하얘질 정도로 구부러들었다. 그의 물건이 빠르고 거칠게 긁어내리는 내벽이 불타오르는 것만 같이 뜨거웠다.

“하아, 흐윽! 알, 폰스! 아아, 더는……! 아흐으!”

클로에는 사지를 후들후들 떨면서도 그의 품속에서 버티려고 안간힘을 썼다.

알폰스는 그런 클로에가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저 가는 팔다리로 애써 버티는 그녀가 이토록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그는 그녀의 몸을 단단하게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끝을 보여 주기 위하여 골반을 최고조로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아응, 아! 알, 폰스! 아! 하앙! 아아앗!”

클로에는 그에게 단단히 안겨서, 옴짝달싹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강제로 높은 곳으로 끌려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것이 싫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행복했다.

알폰스는 그런 그녀의 입술 위에 몇 번이나 버드 키스를 퍼붓고는 물었다.

“후우, 부인. 말씀해 보십시오. 여전히 제가 밉습니까?”

클로에는 혼절할 것만 같이 폭력적인 쾌감에 끌려가는 와중에도 마구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땀에 젖은 밤색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녀가 울먹이면서 말했다.

“아니, 아! 안, 미워요. 사랑해요, 알폰스. 으응! 응! 사, 사랑해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로 그녀는 그 말만을 연거푸 되풀이했다. 마치 지푸라기에라도 매달리듯이, 애타게.

알폰스는 그런 그녀의 눈물 고인 녹색 눈을 빤히 보았다. 울먹이면서, 폭력적인 쾌감에 몸부림치면서도 그 마음을 전하려고 하는 그녀는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는 그녀의 입술 위에 입을 맞추었다.

“저도 그렇습니다.”

절정의 전조를 느끼며, 그가 속삭였다.

곧 두 사람은 가장 높은 곳에 올랐다. 알폰스는 그녀의 가장 깊은 곳에 사랑과 소유욕의 증거를 퍼붓고도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클로에는 그의 사랑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 * *

자신이 겪은 빙의 현상에 대한 조사를 거듭하던 클로에가 실마리를 찾아낸 것은 황궁 도서관의 서고를 대부분 뒤져 본 뒤였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녀는 눈 앞에 펼쳐진 문장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있었구나. 나 말고도, 이런 현상을 겪은 사람이.’

그 책은 어떤 사람의 수기였다. 그 사람은 자신이 다른 세계에서 왔으며, 어느 날 눈을 떠 보니 이곳 제국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고 주장했다.

물론 그의 주장을 믿어 주는 사람은 없던 것 같았다. 이 책 역시 사람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먼지가 두껍게 쌓인 채 방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클로에만은 믿을 수 있었다. 그야 당연했다. 그가 겪은 일은 그녀가 겪은 일과 정확하게 일치한 데다가, 무엇보다, 그가 왔다는 세계의 묘사 역시 그녀가 온 세계와 동일했던 것이다.

‘다른 것은 꾸며 낸 이야기일 수 있어도, 전생의 세계를 묘사한 부분은 꾸며 낸 것이 아니야. 틀림없어. 이 사람은 나랑 같은 곳에서 왔어. 나와 같은 현상을 경험한 사람인 거야.’

이러한 중요한 실마리를 찾아냈다는 사실이 클로에는 너무나 기뻤다. 신에게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두려웠다. 그동안 회피해 오기만 했던 진실을 마주하는 것이. 그 진실이 그녀에게는 결코 반갑지 않은 내용일 수도 있다는 것이.

그녀는 책을 덮고 생각에 잠겼다.

‘이 현상에 대해 꼭 파헤쳐야만 할까? 나는 지금 이대로도 행복한데. 그냥 이렇게 모른 채 살면 안 되는 걸까?’

그녀는…… 전생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알폰스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남의 몸을, 자리를, 인생을 빼앗았다는 죄책감은 언제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뼈아픈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원주인에게 이 몸을 돌려주고 싶지 않다는 사실에 대한 죄책감이다.

‘만일 이 현상에 대해 파헤친 결과가, 내가 원래의 클로에에게 자리를 돌려주고 나는 전생의 세계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것이라면…….’

생각만 해도 가슴이 미어졌다. 과연 자신은 미련 없이 이전의 클로에에게 이 자리를 돌려줄 수 있을까? 알폰스의 옆자리를 그녀에게 내어 줄 수 있을까?

클로에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오랜 시간을 고민했다. 하지만, 결국 그녀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단 하나뿐이었다.

‘나는 더 이상 그를 속이고 싶지 않아. 남의 자리를 부당하게 빼앗았다는 죄책감에 짓눌린 채 살고 싶지 않아.’

그녀는 이 현상에 대해서 알아야 했다. 자신은 왜 이곳에 왔는지, 이전의 클로에는 어떻게 된 것인지 알아야 했다.

그래야만 미래를 생각할 수 있었다. 알폰스에게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이후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자신이 먼저 이해해야만 알폰스 역시도 이해시킬 수 있다. 그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클로에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서랍에서 편지지와 철필을 꺼내어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책의 저자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이 책의 저자가 외국인이 아니라는 사실은 다행이었으나, 그는 수도에서 먼 지역에 살고 있었다. 그래서 편지를 보내는 데에도, 그의 답장을 받는 데에도 꽤 긴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답장이 도착했을 때 클로에는 떨리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녀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꾹 누르며 진정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페이퍼 나이프로 조심스럽게 편지를 뜯었다.

그녀는 책의 저자에게 자신 역시 같은 현상을 겪었으며, 그의 말을 믿는다는 뜻을 전했다. 그러니 혹시 이 현상을 먼저 겪은 선배로서 자신을 만나 조언을 해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책의 저자는 그 제안을 수락했다.

답장을 확인한 클로에는 곧바로 저자를 찾아갈 준비를 시작했다.

업무 쪽의 문제는 없었다. 이때를 대비해서 며칠 분의 일은 미리 해 두었기에 여유가 있었다.

안전 등의 문제도 하녀와 기사를 몇 명 데려가면 괜찮을 것이었다.

그러나 복병은 따로 있었다. 알폰스였다.

“지방에 내려간다는 말씀이십니까?”

석찬 시간이었다. 테이블 반대편에 앉아 있는 알폰스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네.”

클로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폰스는 평소 감정의 표현이 적은 편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그는 뚜렷하게 동요하고 있었다. 그가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갑자기 출장이라니…….”

클로에는 그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과거, 그녀가 클로에가 되기 전의 알폰스는 외근도, 출장도 잦았다. 하지만 그녀가 클로에가 된 뒤 그의 출장은 점점 줄어들어 이제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녀를 두고 어딘가에 갈 일을 무리해서라도 피하고 있는 것이다.

그랬는데 정작 그녀가 출장을 간다니. 알폰스가 당황할 만도 했다.

게다가 열흘이었다. 오전에 잠깐 외근 다녀온 것만으로도 서로를 그렇게 그리워했는데 열흘을 못 보고 지내야 하는 것이다.

굳은 얼굴을 하고 있던 알폰스가 가까스로 말했다.

“중요한 업무인 줄은 이해합니다만, 부인 혼자서는 위험합니다. 그 험한 길을 어떻게 견디려고 그러십니까.”

‘빙의 현상을 겪은 사람에게 상담하러 간다’고 대놓고 말할 수는 없으니 클로에는 적당히 업무의 구실을 댔다. 트리플 스위트의 분점 개업을 위한 사전 조사라든가 뭐 그런 걸로.

그리고 알폰스의 걱정은 지나친 것이었다. 그녀가 찾아가야 하는 지역인 밀턴케인스는 거리상으로는 매우 멀지만 수도에 버금가는 대도시였다. 가는 길도 잘 닦여 있고, 언제나 상단의 마차가 끊이지 않을뿐더러 도시 내부의 치안도 좋다.

클로에가 대답했다.

“하녀들과 기사들을 데려갈 거예요. 그리고 밀턴케인스는 대도시인걸요. 가는 길도 잘 닦여 있고, 도시의 치안도 좋아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알폰스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가 말했다.

“제가 함께 가겠습니다.”

“안 돼요.”

클로에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알폰스도 요즘 중요한 업무를 수행하고 계시잖아요.”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하필이면 이 시기에 그에게 수도를 떠날 수 없는 업무가 쏟아졌다.

클로에의 덕택으로 더 이상 괴혈병은 선원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아니게 되었다. 장기 항해 시 최다 사망 원인이 사라졌으니 자연스럽게 해상 무역이 몇 배는 활발해졌다. 항구 도시이기도 한 수도에 온갖 수입품과 외국인이 쏟아져 들어왔다. 밀무역과 밀입국자도 늘었다. 중앙부 위정자들의 업무량 역시 늘었다.

알폰스는 한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정말이지 이 일만 아니었으면 백 번이라도 더 따라나설 텐데. 아니, 그녀가 반대하지만 않으면 무리를 해서라도 따라나설 것이다.

‘몰래 따라갈까.’

그가 진지하게 고민하던 그때였다.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이지만, 몰래 따라오시면 안 돼요.”

“…….”

“업무에 집중하세요. 중요한 일이잖아요.”

알폰스는 속으로 탄식했다.

‘제길.’

업무 따위가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연약한 아내가 혼자서 먼 지역에 간다는데!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의 연약한 아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녀의 태도는 너무나 단호해서 회유나 설득이 통할 것 같지 않았다.

그녀의 한없이 부드러운 듯하면서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강단과 고집이 있는 면모도 사랑한다. 하지만 이럴 때만은 좀 덜 강단과 고집이 있어도 괜찮을 텐데.

오랜 고민 끝에서야 그는 간신히 그녀의 말대로 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것은 정말 큰 결단과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한참이나 시가를 피우며 마음을 정돈한 뒤에 알폰스가 말했다.

“부인의 결정에 따르겠습니다.”

클로에가 흐리게 웃었다. 그녀는 테이블을 빙 돌아가서 남편의 넓지만, 왠지 기운 없어 보이는 어깨를 꼬옥 안아 주었다.

“이해해 주어서 정말 고마워요.”

그녀가 말했다.

“저, 얼른 다녀올게요. 선물도 많이 사 올게요.”

알폰스는 그녀가 스쳐서 데이기라도 할까 봐 얼른 시가를 치웠다. 그러고는 그녀의 등을 팔로 감싼 채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며칠 동안 만나지 못할 그녀를 미리 잔뜩 느껴 놓겠다는 듯이.

알폰스는 여러모로 클로에의 출장 준비를 도왔다. 그는 특히 클로에를 수행할 수행원들에게 신경을 많이 썼다. 그는 공작가 기사단의 거의 8할을 딸려 보내려고 시도했으나 그 사실을 눈치챈 클로에에게 혼나기만 했다.

결과적으로 클로에를 따라가는 사람은 그녀의 전속 하녀들과 (시녀인 록우드 부인은 클로에가 없는 동안 저택을 관리해야 했다.) 기사 12명이었다.

클로에가 출장을 떠나는 날 전날 밤. 그녀의 침실을 찾아온 알폰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녀의 침실 한쪽에 쌓여 있는 출장용 옷 가방들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보고 클로에가 웃었다.

“당신도 참, 일 년 못 보는 것도 아닌데 뭘 그래요. 고작 열흘인걸요.”

고작 열흘이라니. 외근 다녀오는 데 걸리는 한나절도 참기 힘든데.

알폰스는 무척 심란해졌다. 어쩌면 이 열흘이 그의 인생에서 가장 긴 열흘이 될지도 모르겠다. 벽장 속에 갇혀 있었던 때보다도 더.

클로에는 챙겨야 할 것 목록을 다시 한 번 체크했다. 그런데 등 뒤에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부인.”

“네?”

무심코 돌아본 클로에는 입술이 입술로 막힌 탓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큰 손이 그녀의 손목을 쥐고, 다른 손이 그녀가 쥔 목록표를 빼앗아서 멀리 치웠다. 그러고는 그녀의 몸을 침대로 끌고 가 그대로 눕혀 버렸다.

“후아……!”

입술이 떨어져 나가고 클로에가 크게 숨을 내쉬었다. 입술과 입술 사이로 타액이 긴 실을 이뤘다. 여전히 그의 손에 붙잡힌 손목은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응, 알폰스…….”

그녀의 두 손목은 알폰스의 손 하나에도 충분히 잡혔다. 마치 결박당한 것 같은 모양새의 클로에가 당황한 얼굴을 했다. 어, 하는 사이에 네글리제가 들춰 올라왔다. 그녀의 하얗고 매끈한 몸 선이 드러났다.

“당신, 정말……!”

클로에가 부끄러워하면서 타박을 주었지만, 알폰스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클로에의 두 손목을 한 손으로 쥔 채로 그녀의 드러난 가슴을 부드럽게 핥아 내리기 시작했다.

“아, 아직, 일이 다 안 끝났는데…… 으응!”

알폰스는 그 한순간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녀의 생크림처럼 희고 부드러운 가슴을 한 손으로 부드럽게 매만지며 그 끝을 가볍게 빨다가 앞니 끝으로 긁어내렸다. 그러자 반응이 곧장 오기 시작했다. 클로에의 뺨이 붉어지면서, 몸이 움찔움찔 떨리기 시작했다.

“아아, 으음…….”

그녀가 어쩐지 얌전해지자, 그 변화를 눈치챈 알폰스가 픽 웃었다. 그는 타액에 젖은 유두를 한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클로에를 향해 미소지었다.

“어쩐지 조용해지셨습니다.”

“아, 아니에요…….”

클로에가 부끄러워하면서 부정했지만, 그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없었다.

그녀의 속마음이 훤히 보인다는 듯 쿡쿡 웃으며 알폰스가 속삭였다.

“사실은 싫지 않으신 거 아닙니까.”

“…….”

클로에가 시선을 피했다.

알폰스는 그런 그녀의 아래 속옷 위를 문지르며 말했다.

“이곳도 싫지 않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이미 실크로 된 속옷은 축축하게 젖어서 반투명해져 속이 들여다보일 정도였다.

차마 부정할 수 없는 증거를 들이대니 클로에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어졌다.

“모, 몰라요.”

그녀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웅얼거렸다.

알폰스는 나지막한 소리로 웃었다. 이 귀여운 여자를 당장이라도 잡아먹고 싶어져서 참을 수가 없었다. 마침 앞섶은 팽팽하게 부풀어 올라 아플 지경이었다.

그는 클로에의 동그란 이마 위에 입을 맞추었다. 그의 키스는 조금씩 아래로 내려왔다. 그녀의 코, 입술, 턱, 쇄골, 가슴, 배.

그리고 마침내, 그의 입술이 클로에의 음문에 와 닿았다. 클로에는 화들짝 놀라며 몸을 떨었다. 이미 그곳을 그의 입술로 애무받은 적이 몇 번이나 있었지만, 여전히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더럽거나 안 좋은 냄새가 날까 봐 신경이 쓰이는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런 걱정을 눈빛으로도 종식시킬 수 있을 정도로 그는 다정했다. 알폰스는 보란 듯이 그녀의 다리 사이에서 미소짓더니, 곧 그녀의 음부를 들여다보았다. 살에 덮여있는 작고 귀여운 구슬과 액체를 흘리고 있는 입구를 사랑스러운 듯한 눈으로 살펴보던 그는 곧 구슬을 입에 머금었다.

“아응!”

클로에는 몸을 파드득 떨었다. 전신의 근육이 경직되고, 두 다리로 그의 머리를 꽉 조였다.

답답할 만도 한데 알폰스는 조금도 그런 티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더 흥분한 듯이, 그녀의 구슬은 물론 입구까지 혀로 핥으며 넓혀나가기 시작했다.

“앗, 흐윽! 알, 폰스. 거기는……!”

그의 축축하고 말랑말랑한 혀가 입구에 깊이 들어오자 클로에는 마치 감전당하는 듯한 전율을 느꼈다. 그의 혀가 들어왔다가 나가기를 반복하자 허리가 미친 듯이 경련했다.

“아흑, 흐으윽……! 으응! 앗, 알폰…… 스. 아아!”

애액이 줄줄 흘러 알폰스의 입술은 물론 턱과 목까지 적셨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더욱 맛있다는 듯이 열정적으로 혀를 놀렸다. 찰방, 찰방, 후르릅, 물기 가득한 음탕한 소리가 침실 가득 울려 퍼졌다. 클로에는 그것이 더더욱 부끄러워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부끄러운데, 이렇게나 부끄러운데도 달아오르는 자신의 몸이었다. 그의 혀는 크고 단단한 물건과는 다른 짜릿함을 선사했다. 클로에는 목이 아프도록 교성을 지르다가 마침내 그의 뒷머리를 쥐고 절정에 다다랐다.

“하아아…….”

그녀가 축 늘어졌을 때는 침대의 시트는 물론, 알폰스의 옷까지 잔뜩 물 자국이 생긴 뒤였다. 그것을 뒤늦게 발견한 클로에는 깜짝 놀라며 부끄러워 어쩔 줄을 몰랐다. 클로에는 침대 옆 협탁에서 손수건을 꺼내 알폰스의 얼굴과 옷을 닦아 주려 애썼다.

“죄, 죄송해요. 이를 어쩐담…….”

그는 결벽증을 의심받을 정도로 깔끔을 떠는 남자였다. 하지만, 놀랍게도 알폰스는 자신의 옷이 더러워진 것을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는 클로에를 향해 다정히 미소지었다. 그리고는 미련 없이 상의를 훌훌 벗어 던졌다.

알폰스의 미려한 몸을 본 클로에는 새삼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절정에 다다른 게 바로 방금인데도 아랫배가 찌르르 울렸다. 언제나 목까지 가리는 옷에 숨겨져 있던 탄탄한 근육은 마치 조각상을 연상케 했다.

상의를 벗은 알폰스는 마침내 앞섶을 풀어헤치고 그 뜨겁고 거대한 물건을 꺼내 들었다. 정말이지 귀족 그 자체인 단정한 얼굴에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의 흉기였다. 하지만 알폰스의 몸이라서 그런지, 클로에의 눈에는 이제 그것마저 사랑스럽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알폰스는 클로에의 몸에 걸려 달랑거리던 네글리제를 완전히 벗겨 준 뒤 그녀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녀의 얼굴에 몇 번이나 키스를 퍼붓던 그는, 그녀의 안으로 천천히 진입해 들어갔다.

“으…… 으응……!”

클로에가 신음을 토했다. 이미 몇 번이나 그와 몸을 섞었지만, 그의 거대한 물건은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여전히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버거워 클로에는 숨을 할딱였다.

그런 그녀가 사랑스러운 듯 양 눈꺼풀 위에 번갈아 가며 입 맞춘 알폰스는 천천히 그녀의 몸을 들어 올렸다.

갑자기 삽입된 상태로 들어 올려진 클로에는 기겁했다. 그가 일어나자 삽입된 입구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클로에는 저도 모르게 그의 목에 힘껏 매달렸다.

“가, 갑자기 뭐예요?”

하지만 질문을 막아버리듯이, 알폰스가 그녀의 입술 위에 입술을 포갰다. 그녀의 당황스러움도, 의아함도, 전부 먹어버리듯 그는 그녀의 혀를 삼키고 입안의 여린 살을 농락했다.

클로에는 키가 조금 큰 편이었지만 알폰스는 조금도 힘든 기색이 없었다. 그는 몹시 안정적으로 클로에의 몸을 받쳐 든 채,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으, 으음…….”

천천히 밀려오는 쾌감에 클로에가 뭉개진 신음을 뱉었다. 그제야 그녀는 알폰스의 의도를 직감했다. 그는 그녀를 이렇게 받쳐 든 채 행위를 이어가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제일 먼저 그가 힘들지 않을까 싶은 걱정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곧 예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함께 휴가를 갔던 때에, 알폰스가 그녀를 안아 든 채 언덕을 올랐던 기억. 그때 그는 거의 등산을 해놓고도 힘든 기색이 거의 없었다.

그런 괴물 같은 체력이라면 조금쯤 안심해도 될 것 같았다. 떨어지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매달리던 팔에서 힘이 풀렸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진 않았다. 곧 쾌감이 전신을 강타했다. 사지가 부들부들 경련하고 땀이 비 오듯 흘렀다. 그의 움직임을 따라 의도치 않게 허리가 튕겨 올랐다. 그는 어찌나 힘이 좋은지, 그녀를 매단 채로도 허리의 움직임에 조금도 장애가 느껴지지 않았다.

몸을 주체할 수가 없는데, 공중에 떠 있으니 이 세상에 기댈 곳은 오로지 그뿐인 것 같았다. 클로에는 알폰스에게 힘껏 매달렸다.

“아아, 응! 흐으, 읏, 응! 아! 아!”

곧 강렬한 절정이 몸을 때렸다. 허공에서 맞이한 절정은 정말 묘한 느낌이 들어서, 그것을 전신으로 견딘 클로에는 알폰스에게 기댄 채 축 늘어지고 말았다.

“하아아…….”

그녀의 귓불을 가볍게 물면서 알폰스가 속삭였다.

“오늘 밤은 순순히 놓아드리지 않을 겁니다.”

그 말이 빈말이 아님을 증명하듯, 클로에가 두 번이나 절정에 달한 뒤에도 그의 물건은 여전히 굳건한 기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클로에는 푹 자고 내일 완벽한 컨디션으로 밀턴케인스로 떠나겠다는 계획은 진작 물 건너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 *

자긴 잤는데 잔 것 같지가 않았다. 지난밤에 지나치게 무리를 한 탓이다.

‘정말이지, 멀리 간다는 사람 붙잡고 이게 뭐야.’

클로에가 욱신거리는 허리를 주먹으로 콩콩 두드리며 생각했다.

‘물론, 앞으로 열흘은 못 만날 거니까……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그녀도 알고 있었다. 앞으로 열흘씩이나 만나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벌써부터 그리워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니 미리 실컷 해 버리겠다(?)는 발상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그녀도 조금은…….

‘정말 내가 미쳤나 봐.’

그녀가 레이스 장갑을 낀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얼굴은 물론 귀까지 뜨끈하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원래는 정말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다 알폰스 때문이야.’

그러고 있는데 방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엘리였다.

“출발할 준비가 다 되었어요, 마님.”

“그래, 고맙구나.”

클로에는 엘리를 따라 현관으로 갔다. 그곳에는 그녀와 함께 출발할 사용인들도, 그녀를 배웅하기 위해 모인 사용인들도 있었다. 그리고 알폰스 역시 있었다.

사용인들의 인사를 받은 클로에는 알폰스를 보았다. 알폰스 역시 그녀를 보았다. 허공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다.

“다녀올게요.”

그녀가 먼저 말했다. 알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몸조심하십시오. 부디.”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에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클로에는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을 보니 더욱 가슴이 울렁거렸다. 자신이 빙의자인지라 하게 된 이별에 대해 죄책감과 미안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가 너무 아쉬워해서 클로에는 티를 잘 못 냈지만 그녀라고 아쉽지 않을 리가 없었다. 정말로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와 계속 함께 있고 싶었다.

아직 헤어지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그리워지는 기분이었다. 보고 있을 때도 계속해서 보고 싶은데, 어떻게 열흘이나 보지 않고 견딜 수 있을지.

“보고 싶을 거예요.”

이런 감정을 한 음절 한 음절에 꾹꾹 눌러 담아가며 그녀가 말했다.

알폰스는 그런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러고는 그녀의 이마에 조금 길게 입을 맞추었다. 그가 대답했다.

“저 역시도.”

클로에는 그의 등을 끌어안았다. 시간이 너무나 짧게 느껴졌다.

한편 그런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하녀 로지가 다른 하녀 엘리와 니나에게 속삭였다.

“두 분 열흘 헤어지시는 거 맞지? 10년 아니지?”

“…….”

“…….”

얼핏 보면 열흘 출장이 아니라 이산가족의 기약 없는 작별 정도로 보이는 상황이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다른 사용인들 중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사람도 있었다.

어쨌든, 클로에는 마침내 마차를 타고 떠났다. 그녀와 그녀의 사용인들을 태운 마차의 행렬이 길게 이어져 공작저를 빠져나갔다.

밀턴케인스까지는 마차를 타고 하루 종일 달려 나흘이 걸린다. 이번 일정도 최대한 빨리 돌아갈 수 있도록 아주 빡빡하게 짠 셈이다.

다행히 길이 매우 잘 닦여 있고, 가는 길에 상인과 여행객 등을 위한 숙박업소가 많았기에 여행은 평탄한 편이었다.

흔들리지 않는 큰 마차에 타서 편안하게 이동했으며, 호텔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목욕을 하고 나쁘지 않은 방에서 잤다.

숲에서 노숙을 하거나 산짐승을 구워 먹거나 강도를 만나는 등의 사건은 없었다. 기사들이 심심하다고 투덜거릴 정도였다.

가는 길이 지루한 게 제일 큰 사건이었던 여행의 끝에, 마침내 밀턴케인스에 도착했다.

“우와! 구름이 가까워요!”

“정말 산이 높네요!”

드디어 도착을 했다는 사실과 난생처음으로 수도 밖으로 나와 봤다는 사실에 들뜬 하녀들이 재잘거렸다.

밀턴케인즈는 산악 지방이기에 도시 자체의 고도도 높고, 산이 많았다. 평탄한 지형의 수도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클로에는 숙소에 짐을 풀고 책의 저자에게 도착했다는 내용의 전보를 보냈다. 그러고는 자신 역시 그를 만나기 위해 출발했다. 되도록 빨리 수도로 돌아가기 위한 노력이었다.

마차는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산 중턱에서 멈추어 섰다. 그곳에는 작은 벽돌집이 하나 있었다.

사람이 잘 오고 가지 않는 산길에 커다란 마차가 멈추어 서자 눈치를 챈 듯 집주인이 나왔다.

“아멜리 마운트배튼 부인이십니까?”

클로에는 ‘클로에 바텐베르크 공작부인’이라는 이름이 지나치게 눈에 띄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편지를 쓸 때 가명을 썼다.

그녀가 말했다.

“네, 맞아요. 윌리엄 리버우드 씨인가요?”

반백의 머리에 구식 안경을 쓴 남자는 눈을 가늘게 뜨고 클로에를 바라보았다. 마침내 그가 말했다.

“네. 제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가 클로에와 그녀의 수행원들에게 길을 안내하며 말했다.

“이쪽으로 들어오시지요.”

그는 클로에를 응접실이 아닌 자신의 서재로 안내했다. 하녀들과 기사 제이콥이 당연하다는 듯이 그녀를 따라 들어가려고 했으나 클로에가 제지했다.

“제이콥, 아이들과 서재 밖에서 대기해 줄래요?”

제이콥이 입을 떡 벌렸다.

“느에에에? 하, 하지만! 공…… 부인 혼자서 모르는 남자와 단둘이 계시는 것은 위험합니다!”

“저분과 긴히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래요.”

“아, 아, 안 됩니다!”

제이콥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제가 부인을 외간 남자와 단둘이 계시도록 두었다는 사실을 주군께서 아신다면…… 제 목숨은 끝장이라고요!”

그 말에 클로에는 고개를 갸웃했다.

‘알폰스가 걱정이 많은 편이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할까.’

그녀는 자신의 남편에 대해 큰 오해를 하고 있었다. 이것은 알폰스가 그녀의 여린 심성을 염려해 그녀의 앞에서는 집착을 철저히 숨기기 때문이었다.

제이콥이 과도한 걱정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 클로에는 말했다.

“걱정 마세요. 제이콥은 저의 지시에 따랐을 뿐이니 책임이 없어요. 정 걱정이 되신다면 문 앞에서 대기하고 계시면 되잖아요? 무슨 일이 생기면 제가 바로 큰 소리로 부를게요.”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부인! 그러니까 저는……! 제 목숨은!”

제이콥이 하얗다 못해 시퍼렇게 뜬 얼굴로 말했다.

그는 오랜 기사단 생활로 인해 자신의 주군의 성격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주군이 공작부인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라면 특히나.

아니, 굳이 제이콥이 아니더라도 공작저의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잘 알고 있을 것이었다. 그만큼이나 알폰스의 클로에에 대한 집착은 명확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오히려 모르는 사람은 클로에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클로에는 제이콥의 말을 들어 주지 않았다. 그녀는 괜찮다는 말과 함께 부드럽게 웃으며 제이콥의 눈앞에서 서재 문을 닫아 버렸다.

그녀는 은근히 한 번 정한 것을 무르지 않는 고집이 있었다.

“으아아, 부인!”

제이콥이 서재 문 앞에서 머리를 감싸 쥐고 절규했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그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하는 하녀들만이 그런 제이콥을 손가락질하며 수군거릴 뿐이었다.

한참이 지나서 겨우 진정한 제이콥은 생각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주군의 귀에 오늘 있었던 일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해야겠다. 그렇지 않으면 내 기사 생명은…… 아니, 진짜 생명도 끝장이야!’

서재 문에 등을 기댄 그의 눈에 강한 결의의 빛이 번쩍였다.

한편, 리버우드의 서재에 따라 들어간 클로에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서재에서는 먼지와 낡은 종이의 냄새가 났다. 공작저의 서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규모의 낡은 장소였다.

하지만 책 한 권 한 권마다 손때가 가득 낀 것이 주인의 많은 정성과 애정이 들어간 장소라는 것을 클로에는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서가의 책들을 훑어보았다.

‘대부분이…… 종교에 대한 서적이잖아?’

클로에는 깜짝 놀랐다. 리버우드라는 남자가 갖고 있는 책들의 대부분은 제국의 국교에 대한 서적이었다.

이전의 클로에에게서 이어받은 기억과 이곳에 온 뒤의 공부 덕택에 클로에는 제국의 국교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제국 국민 대부분은 유일신을 섬긴다. 그리고 이 종교의 근거지는 바로 신성국이었다. 신성국 수도에 위치한 교황 성에서 거주하고 있는 교황이 그 종교의 지도자였다.

그리고 교황 성의 수많은 사제들이 바로 그 교황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설마 이 사람도 사제인 걸까?’

클로에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리버우드를 바라보았다.

리버우드는 클로에에게 서재 중앙의 테이블 자리를 권했다. 클로에는 다 낡아빠져서 몇 번이고 수리해서 쓰고 있는 듯한 테이블에 앉았다.

“멀리서 온 손님이신데, 아무것도 대접해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리버우드가 진심인 듯한 기색으로 말했다. 클로에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자리에 마주 앉자 클로에는 리버우드의 눈빛이 특이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의 눈빛은 꼭 구식 안경의 두꺼운 알도 뚫고 그녀의 속마음마저 꿰뚫어 보는 것만 같았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마운트배튼 부인이라고 하셨지요. 부인께서는 매우 의연하신 것 같습니다.”

“제가…… 그런가요?”

“예. 여러 명의 ‘빙의자’를 보아왔지만 모든 사람들이 또 다른 빙의자를 만날 때는 매우 긴장하거나 떨고는 했습니다. 다른 빙의자를 만나는데도 불구하고 부인처럼 차분한 사람은 처음입니다.”

그의 말에 클로에는 깜짝 놀랐다.

물론 그녀라고 조금도 긴장하거나 떨지 않은 것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정말로 많이 긴장했고, 여기까지 오는 데에도 무척 많은 각오가 필요했다.

그야 당연한 일이었다. 그에게서 어떤 말을 들을지, 그녀가 어떤 진실과 마주하게 될지 알 수 없는데 떨리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녀가 긴장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저 그녀가 표정을 숨기는 것을 잘하기 때문이었다. 오랜 직장 생활 경험으로 인해 클로에는 의도적으로 감정을 감추는 일에 능숙했다.

하지만 그녀가 놀란 것은 이 부분 때문이 아니었다.

클로에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빙의자……라고요? 저와 당신 같은 사람들이 이 세계에는 여러 명 있나요?”

리버우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클로에는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리버우드 씨께서는 이 현상에 대해 저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계신 것 같아요. 저는 이 현상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저는 정보가 필요해요. 괜찮으시다면 알고 계신 것을 제게 가르쳐 주셨으면 해요.”

리버우드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는 차분하게 말했다.

“지금부터 제가 부인께 알려 드릴 것은 전부 이 세계의 일반 시민들에게 알려서는 안 되는 것들입니다. 사실 부인께 가르쳐드리는 것도 금지된 일이지만 저는 저와 부인과 같은 빙의자들에게만 개인적으로 제가 알고 있는 것을 전부 가르쳐드리고 있습니다.”

그의 말은 느리지만 막힘이 없었다. 아마 이러한 말을 하는 상대가 클로에가 처음이 아니라는 것은 사실인 것 같았다.

“그러니 제가 알고 있는 것들을 가르쳐드리기 전에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부인께서도 빙의자가 아닌 사람들에게 제가 가르쳐드린 사실에 대해 함구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 말에 클로에는 멈칫했다.

그녀는 되도록 알폰스에게 모든 것을 말하고 싶었다. 사랑하는 그를 더 이상 속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보를 듣지 않을 수는 없어. 어떻게 하지?’

그러나 그녀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리버우드가 그녀의 대답을 듣지 않고 말을 이었던 것이다.

리버우드는 자신의 안경을 벗어 들고 손수건으로 문질러 닦았다. 다시 안경을 쓴 뒤 그가 말했다.

“먼저 제가 이 현상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된 경위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성국의 사제입니다. 아니, 사제였었죠. 지금은 은퇴해 고향인 이곳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클로에의 추측이 맞았다. 그녀는 상대의 말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저는 전생에는 부인과 같은 세계에서 태어난 청년이었습니다만 어느 날 눈을 뜨니 이곳 제국의 어린아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장 과정 내내 이 불가사의한 현상의 해답을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우연히 알게 된 것입니다. 그 해답이 교황청에 있다는 사실을요.”

“교황청……이라고요?”

“그렇습니다. 놀랍게도, 부인, 교황청에서는 이 세계뿐만이 아닌 다른 세계들의 존재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드물게 각 세계 사이를 이동해 오거나 이동해 가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도요.”

리버우드가 말했다.

“물론, 교황청에서도 교황과 성녀, 그리고 일부의 고위 사제들에게만 허락된 사실입니다. 이 때문에, 저는 빙의 현상에 대해 더 깊이 탐구하기 위해 종교에 귀의하기까지 했죠.”

클로에는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이제껏 내내 고민하던 것을 성국의 교황청은 이미 전부 알고 있었다니!

“실제로,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의 이면에는 또 다른 세계들이 여럿 존재합니다. 저와 부인이 이전에 살았던 세계와 현재의 이 세계는 물론이고 그 외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계들까지도. 그리고 영혼이란 물리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한 세계에 소속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영혼과 신체의 결합이 약해졌을 때, 즉 자고 있거나 의식을 잃었을 때에 우리의 영혼은 다른 세계를 돌아다니고는 합니다. 이것이 바로 꿈입니다.”

리버우드가 설명했다.

“잠에서 깨어나거나 의식이 돌아오는 순간 다른 세계를 떠돌던 영혼은 제자리인 원래의 육체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러나, 극히 드물게 영혼이 돌아가지 못하고 떠돌던 세계에 그대로 남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럼, 설마…….”

“그렇습니다.”

리버우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영혼이 원래의 몸에 돌아가지 못하고 다른 세계의 타인의 육신에 들어가는 현상, 그것이 바로 저와 부인이 겪었던 빙의입니다.”

클로에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사실 어느 날 갑자기 이 세계에 떨어진 일을 겪은 뒤로는 이제는 무엇이든 믿을 수 없는 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이 세계가 마법과 환상의 생물이 존재하는 세계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에는 더더욱 그랬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믿을 수 없는 것이 설마 또 있을 줄은 몰랐다.

제 몸으로 직접 겪어 놓고도 다른 세계니, 영혼이니 하는 이야기들은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았다. 심지어 잠을 자는 동안 다른 세계를 떠돌아다닌다니?

타인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것부터가 그녀는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어쨌든 그녀가 빙의 현상이라는 놀라운 일을 겪은 것은 사실이었다. 게다가 상대 역시 빙의자라는 것도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녀는 숨을 길게 쉬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켜 보려 노력했다.

물론 이러한 것들도 그녀가 궁금해하던 것들이긴 했다. 하지만 사실 그녀가 제일 알고 싶은 것은 이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랬군요. 가르쳐주셔서 감사해요, 리버우드 씨. 그런데, 하나 궁금한 것이 있는데요…….”

“무엇이든 물어보십시오, 부인.”

클로에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이제껏 자신이 제일 궁금해하던 질문에 대해서였다.

“혹시…… 우리 같은 빙의자들이 다시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게 되는 일도 있나요?”

입술 밖을 벗어난 질문을 다시 주워 담을 수 없게 되었음을 깨닫자 심장이 두근두근 박동했다.

클로에는 이 질문의 답이 너무나 알고 싶었고 또 알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 돌아가게 되는 거라면 어떡하지.’

그것이 그녀의 솔직한 생각이었다.

그녀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사랑하는 알폰스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옛날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갔던 그 세계가 지금은 그가 없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너무나 차가워 보였다.

알폰스와, 그의 사랑을 알게 된 지금 그녀가 그곳으로 돌아가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아니, 그럴 리가 없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라는 온기 없이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틀림없이 고독과 그리움으로 하루하루 말라갈 것이었다.

리버우드가 대답을 하기 위해 입술을 떼는 그 짧은 순간이 영겁처럼 느껴졌다. 심장이 죄어들었다. 그가 ‘네.’라는 대답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가 말했다.

“아니요. 그런 일은 없습니다.”

순간 클로에는 심장이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안도감 때문이었다.

클로에는 뒤늦게 레이스 장갑 안의 자신의 손에 땀이 가득 찬 것을 깨달았다. 양손을 비벼 그것을 닦아내며 그녀가 숨을 골랐다.

“확실한가요?”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리버우드가 재차 대답했다.

“단순히 빙의 이전의 몸으로 돌아가게 되는 일은 없습니다. 과거의 세계에 돌아갈 방법이라면 한 번 겪었던 빙의 현상을 다시 한 번 겪는 것뿐인데, 벼락 맞을 확률보다 더 적은 빙의 현상을 두 번이나 겪는 것은 불가능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 대답에 클로에는 안도감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눈시울이 달아올랐다. 하지만 눈물을 흘리는 것만은 간신히 참아낼 수 있었다.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보고 그녀의 심정을 잘못 이해한 리버우드가 위로했다.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실 수 없게 된 건 매우 유감입니다.”

클로에는 너무나 안도감을 느꼈지만, 한편 자신이 안도감을 느낀다는 사실에 대해 죄책감도 함께 느꼈다. 남의 몸을 빼앗고는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낀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때였다. 리버우드가 이 말을 꺼낸 것은.

“만약 원래의 세계가 정 그리우시다면…… 그곳으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연락할 방도는 있습니다.”

“네……?!”

클로에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리버우드는 자신이 이 말을 해도 되는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는 것 같았다. 그는 머리 아픈 사람처럼 손가락으로 미간을 꾹꾹 누르더니 말했다.

“아시다시피, 성녀께서는 신과 소통이 가능한 유일한 존재이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은 수많은 세계를 전부 아우르시죠.”

그가 망설이다가 말했다.

“성녀께서는 이 세계뿐만 아니라 다른 세계도 전부 지켜보고 계십니다. 소통도…… 가능하시고요.”

“그, 그렇다면…….”

“만일 두고 오신 가족이 그립다거나, 전생의 ‘몸’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시다면…….”

거기까지 말하던 리버우드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론상 그렇다는 거지, 실제로 하기엔 어려우실 겁니다. 저도 두고 온 가족과 연락을 취하고 싶어서 성녀께 요청드렸지만 거부당했으니까요.”

그의 말에 클로에는 고민했다.

‘전생의 세계와 연락을 할 수 있다고……?’

사실 그녀는 전생의 세계에 그다지 미련이 없었다. 전생에 그녀는 가족이 없었기에 연락을 취하고 싶은 상대도 없었다.

아니, 단 한 사람을 제외한다면.

‘클로에…… 그러니까, 이전의 클로에.’

클로에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건 그녀였다. 이전의 클로에 바텐베르크.

이 몸의 원주인이자, 아마 전생의 세계로 넘어간 것으로 추정되는 그녀. 그리고 현재 클로에가 제일 죄책감을 느끼는 상대…….

‘그녀와 대화를 나누어 볼 수만 있다면…….’

어쩌면 그녀의 길고 긴 죄책감의 해결 방법은 거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희망의 빛이 가슴속에 비쳐들던 그때였다. 마음 한구석에서 다른 걱정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녀가 날 원망하고 있다면 어떡하지? 자신의 자리를 빼앗았다고 화를 내거나 한다면…….’

과거의 기억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클로에 바텐베르크는 나야! 네가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게 내 거란 말이야!’

그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아 클로에는 눈을 질끈 감았다.

과거 그녀가 꾸었던 꿈의 기억. 이전의 클로에가 지금 그녀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은 자기 거라며 화를 내던 꿈. 그 기억이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하지만…… 지금은 고민해 보아도 소용없어. 성녀님이 이전의 클로에와 연락하게 해 달라는 내 요청을 들어주실지도 확실치 않으니까.’

그렇게 생각한 그녀가 말했다.

“알고 계신 것들을 가르쳐주셔서 정말로 감사드려요, 리버우드 씨. 이곳에 온 뒤로 내내 혼란스러웠는데, 덕분에 큰 도움이 되었어요.”

“아닙니다. 부인께 도움이 되었다니 기쁩니다.”

클로에는 몇 번이나 진심을 담은 감사 인사를 했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 리버우드가 말했다.

“그건 그렇고, 여러 빙의자들을 만나 왔지만 부인과 같은 분은 처음 봅니다.”

“저 같은 사람이라고요?”

클로에가 의아함을 담은 눈을 그에게 돌렸다. 리버우드가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네. 대부분의 빙의자들은 이 세계에 적응하지 못합니다. 몸의 원주인의 기억은 가지고 있다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지요. 전생의 세계의 가치관, 추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이 세계에서는 괴짜, 정신병자 취급을 받기도 합니다. 그래서 더 이전의 세계를 그리워하며 이 세계에 애정을 붙이지 못하는 악순환이지요. 결과적으로 대부분이 가난하고 어렵게 살거나, 혹은 종교에 귀의합니다. 저처럼 말입니다.”

그때, 클로에는 그의 눈이 또다시 자신을 꿰뚫어 본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부인께서는 이곳에 정말 잘 적응하신 것 같습니다. 차림새와 몸가짐은 물론이고, 용서해 주십시오, 일부러 들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하녀들과 기사들의 말까지.”

이곳에 들어오면서 하녀들과 기사 제이콥이 말했던 말을 이야기하는 모양이었다. 낡아 보이긴 했지만 이 집의 방음은 확실히 안 좋은 모양이었다. 쑥스러워진 클로에가 얼굴을 붉혔다.

“그건…… 다들 걱정이 너무 많을 뿐이에요. 리버우드 씨께서 기분이 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리버우드가 소탈하게 웃었다.

“아닙니다. 오히려 감탄했습니다.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의 걱정을 받고 계신 부인께요. 저는 빙의자들이 이곳에 와서 좋은 인간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외톨이가 되는 것을 많이 봐왔습니다. 부인께선 제게 있어 충격이었습니다. 아, 빙의자에게도 이런 일이 가능하구나, 라고요.”

그의 말 그대로였다. 리버우드는 클로에를 보며 큰 충격을 받았다.

그녀의 하녀들은 그녀를 친근감과 존경을 담은 태도로 대했다.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를 대하는 기사들의 존중과 호의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게다가, 그들이 언급하는 그녀의 남편이라는 존재까지…….

평생을 빙의자들을 만나고 그들을 도우며 살아왔던 리버우드에게 그녀는 충격이자, 희망이기도 했다.

빙의자에게 불우한 삶만이 약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잘 적응하고, 많은 사람들과 긍정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그런 삶 역시 가능한 것이다.

양쪽 모두에게 좋은 경험이 되었던 만남을 마무리하고, 클로에는 하녀들과 기사들과 함께 마을로 돌아갔다.

다시 수도로 출발하기 전에 이곳 밀턴케인스에서 휴식을 취하며 여독을 풀어야 했다. 클로에는 마차를 탄 채 호텔로 향했다.

* * *

클로에가 그러는 동안, 알폰스는 세상에서 제일 긴 5일을 보내고 있던 참이었다.

그가 한숨을 쉬었다. 철필을 내려놓자 흰 종이 위로 약간의 잉크 얼룩이 튀었다.

철필을 다시 펜 꽂이에 잘 꽂아 놓은 뒤, 입에 물고 있던 시가를 재떨이 위에 올려놓고 알폰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무실이 조용하군.’

사실 일을 하는 곳이니만큼 집무실은 조용한 게 당연했다.

그런데도 그에게는 집무실이 이상할 정도로 고요하게 느껴졌다. 너무나 고요해서 오히려 집중력을 깨뜨리고 심기를 불편하게 할 정도로.

아니, 집무실뿐이 아니다. 공작저가 온통 적막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의 붉은 눈이 집무실 내부를 길게 훑었다. 그의 눈길이 닿는 곳마다 기억이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이번에 새 거래처에 대해서 조사해 봤어요. 알폰스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오늘은 정말 재미있는 일이 있었어요. 티룸으로 가실래요?’

‘알폰스, 침실 밖에서는 안 된다니까, 이 사람이 또……!’

알폰스는 집무실을 나서 복도로 향했다.

복도를 가로질러 어딘가로 향하는 동안 내내 사용인들과 마주쳤다. 사용인들은 언제나 자신들의 엄한 주인을 두려워하고 어려워했다.

그들이 허리 숙인 채 소리 높여 인사했고, 알폰스는 거의 본 체도 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저택이 너무 조용해.’

5일 전, 그녀가 이 저택을 떠난 뒤로 그녀가 그립지 않은 순간이 없었고, 그녀가 절실하지 않은 순간이 없었다.

그녀의 웃는 얼굴도, 몸짓도, 입에 물면 솜사탕처럼 녹아내릴 것만 같았던 살결도, 모든 것이 그리웠다.

하지만 그녀가 제일 절실하게 그리워지는 순간은 뜻밖에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