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장
감히, 이렇게나 귀중하디 귀중한 여자에게.
도저히 인내할 수 없는 치열한 분노가 그의 가슴속에서 꿈틀거렸다. 살의가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라 견딜 수 없었다.
알폰스, 그는 자신의 부친을 증오하고 있었다. 그와 그의 친부의 관계는 어그러질 대로 어그러졌다. 친부는 그에게 오랜 학대를 행했고 그는 친부를 용서하지 못했다. 친부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 지금까지도.
그러나 자신의 아내는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세상 누구보다도 맑고 사랑스러운 여자가 아닌가.
사랑과 정이 많은 그녀라면 틀림없이 가정에서 소중한 보물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부모로부터 사랑과 아낌을 받고 자랐으니 남을 사랑할 줄 아는 것일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랬기에, 그녀의 부모가 그녀를 소중히 대해 주었을 것이라고 믿었기에 그들을 귀하게 대접했던 것이었는데. 그들과 그녀의 만남을 주선한 것이었는데…….
설마 이런 쓰레기들이었을 줄은, 정말 예상하지 못했다. 알폰스는 이를 으득 갈았다.
이래서야, 그녀에게 괜한 상처만 준 것이 아닌가. 멍청하게도.
낮디 낮은 목소리가 그의 잇새에서 새어 나왔다.
“감히 바텐베르크의 안주인에게 손을 대려 하다니, 간담이 대단하군. 그 만용을 평생 후회하도록 만들어 주겠다. 바텐베르크는 이 일을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클로에를 보호하듯 끌어안았다.
한편 백작 부부는 경악했다. 그들은 바텐베르크 공작이 자신들의 딸을 진심으로 아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공작이 어떤 사람인지, 그를 둘러싼 파다한 소문은 많이 들어 왔었고, 클로에와 혼인할 때 직접 만나 보았기에 백작 부부는 공작의 성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아무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모두가 말했다. 누구에게도 정을 주지 않는 그의 혈관엔 뜨거운 피가 아니라 수은이 흐른다고 사람들은 쑥덕였다.
하물며 상대가 그들의 딸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20여 년간의 경험으로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자신들의 딸이 얼마나 아둔하고 멍청하게 행동하는지. 사교계의 놀림거리가 되고 있는지. 몇 번이나 혼쭐을 내주었지만 결코 고쳐지지 않았던 것이었다.
백작령에 돌아간 뒤로, 딸 클로에가 사업을 하고 있다느니, 그 사업이 꽤 잘되고 있다느니 하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그들의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그 아둔한 딸이 사업 같은 고차원적인 일을 해낼 수 있을 리 없었다. 그저 남편이 운영하는 사업의 명의만 클로에일 것이라고 그들은 믿었다.
그랬기에, 그런 공작이 그런 딸아이를 진심으로 아끼고 소중히 여길 수 있을 리 없었다. 비록 이곳에 온 첫날부터 묘하게 다정한 모습을 보여 주긴 했지만, 딸아이를 무엇보다 소중히 여긴다고 말했지만, 전부 예의상이겠거니 했다.
그러니 백작 부부는 더더욱 딸아이에게 함부로 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레이 백작은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냉혈한 공작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뜨거운 분노는 예의상 따위가 아니었다. 그의 눈빛도, 그가 뿜어내는 위압감도 거짓이 아니었다.
그는 딸아이를 진심으로 소중히 여기고 있었다.
“가, 각하…….”
풀밭에 누워 있던 그레이 백작은 공작의 발치로 엉금엉금 기어갔다. 지팡이는 저 멀리에 나뒹굴고 있었고, 제압당한 팔의 근육 하나하나가 비명을 질렀지만 개의치 않았다.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가, 각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제가 무엇에 씌었나 봅니다.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각하.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 뒤에서 창백한 얼굴로 덜덜 떨고 있던 백작부인 역시 빠르게 달려 나와 무릎을 꿇었다.
“각하! 정말 송구합니다! 부디 노여움을 거둬 주세요.”
알폰스의 차가운 시선이 그들을 건성으로 훑었다. 제대로 봐줄 가치조차 없다는 투였다.
그런 후 그의 시선은 자신의 품에 안긴 아내를 향했다. 백작 부부를 볼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다정함과 걱정스러움을 품은 채.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부인.”
클로에는 다소 창백하지만 담담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충격적인 일을 겪긴 했지만 의연하게 버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알폰스를 향해 눈을 맞춘 채 고개를 끄덕였다.
“네, 덕분에요. 정말 고마워요, 알폰스.”
이렇게 건드리면 부러질 듯 연약한 몸 어디에 그런 강함과 의연함이 숨어 있는 것일까. 그녀의 강함에 알폰스는 새삼 감탄했다. 정말이지 대단한 여자였다.
그녀에게 감탄할수록, 그녀를 소중히 여길수록 더더욱 화가 났다. 부모의 탈을 쓰고 이런 귀한 여자를 함부로 대한 저들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는 클로에를 더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곤 그가 말했다.
“다행입니다. 안으로 들어갑시다. 걸을 수 있으십니까?”
“네.”
알폰스는 머리를 조아린 백작 부부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클로에를 데리고 저택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중에 클로에는 심장이 뛰어 견딜 수 없었다. 아까 있었던 일의 충격 때문이기도 했지만, 감동 때문이기도 했다.
‘언제나 내 곁에서…… 나를 지켜 주는 사람.’
클로에가 알폰스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의 옆얼굴은 아름답지만 어두웠다. 아직도 아까의 일이 신경 쓰이는 것 같았다.
클로에는 그가 그런 얼굴을 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팠다.
‘이 세상 누구보다…… 믿을 수 있는 사람.’
언제나 그녀의 곁에 있어 주고, 그녀를 지켜봐 주고, 그녀를 소중히 여겨 주는 사람.
이런 사람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런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 이런 사람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것이 이 세상에서 무엇보다도 기뻤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를 사랑하고 있다. 그에게 보호받는 것도, 그가 곁에 있어 주는 것도 너무나 기쁘지만 그것만으론 충분하지 않았다. 자신도, 그를 지키고 싶었다. 힘들 때나 기쁠 때나 그의 곁에 있어 주고 싶었다.
‘그런 내가…… 그를 속여도 괜찮을까.’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누구보다 소중한 그이니까, 이렇게나 자신을 소중히 여겨 주는 그이니까. 그에게만은 언제나 진심이고 싶다. 남의 자리를 빼앗았다는 죄책감 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싶지는 않았다.
클로에는 깨달았다. 더 이상은 이런 마음을 피할 수 없었다. 그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빨리 행동해야 했다.
그들이 현관으로 들어서자 심상치 않은 낌새를 눈치챈 집사 키엘이 달려 나왔다. 알폰스가 키엘을 향해 말했다.
“백작 부부의 짐을 대문 밖으로 던져 놓도록. 한시라도 빨리. 단 일 초라도 더 그들을 이 집에 들여놓고 싶지 않다.”
“알겠습니다, 각하!”
깍듯하게 대답한 키엘은 일꾼들을 부르러 갔다.
알폰스는 클로에를 그녀의 침실에 데려다주었다.
두 사람은 침대에 나란히 앉았다. 알폰스는 그녀의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조금이라도 다친 곳이 있는지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고, 그녀의 얼굴 곳곳과 머리카락에 입 맞추고, 그녀를 안쓰러운 얼굴로 들여다보았다.
좋지 않은 부모의 존재가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이니까 그녀를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런 괴로움은 그 자신이 겪은 것만으로도 충분했는데. 이런 순수하고 귀한 여인마저 그런 일을 겪는 건 원치 않았는데.
아니, 자신에게는 메이슨 부인이라도 있었지만 그녀에게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 아닌가. 소중한 그녀가 어린 시절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자랐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다.
그런 어린 시절을 겪고도 어떻게 이렇게 밝고, 강하고, 아름답게 자랐을까. 그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 위를 부드럽게 덮었다.slakpwkjmdml 클로에의 눈이 감겼다. 그녀는 부드러운 손길에 의해 침대 위에 눕혀졌다.
* * *
마음 같아서는 백작 부부가 다시는 클로에 근처에는 얼씬도 할 수 없도록 귀족 신분을 빼앗고 제국에서 추방해 버리고 싶었지만 알폰스는 그러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들이 그녀의 부모라는 것은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공작가의 입김에 의해 백작 부부는 온갖 죄명을 뒤집어썼다. 그나마 선처를 베푼 결과가 재산과 영지의 몰수였다. 그들은 귀족이라는 명맥만 겨우 유지한 채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것이다.
한편, 클로에에게는 또 다른 일감이 생겼다.
‘다른 사람의 몸, 그것도 다른 세계에 있는 다른 사람의 몸에 이동한다는 것이 실존하는 현상이라면, 경험한 사람이 나 말고도 분명 더 있을 거야.’
그렇게 생각한 클로에는 조사를 시작했다. 자신이 겪었던 이 믿을 수 없는 현상에 대한 조사를.
그녀는 짬이 날 때마다 황궁 도서관을 뒤졌다. 차마 남에게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니 사람을 시킬 수도 없었다. 제 발로 뛰며 책을 하나하나 뒤지고 읽어 보았다. 단 한 줄의 실마리라도 찾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전의 클로에는 어떻게 되었는지가 궁금해.’
조사를 하며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의 행방을 찾지 못하면 내 죄책감은 영영 해결되지 않을 거야. 분명, 어디엔가는 실마리가 있을 거야. 힘을 내자.’
그러나 한동안은 아무리 조사를 해도 단서가 잡히지 않았다. 그때까지는 말이다.
물론, 그녀는 빙의 현상에 대한 조사 외의 일도 열심히 했다.
티 하우스를 운영하는 데에는 비품이 많이 필요했다. 특히나 예쁘고 튼튼한 도자기가 많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녀는 종종 도자기 공방에 들락거렸다.
이번 역시 마찬가지였다. 도자기 공방에 새로운 발주를 넣으러 가야 해서 클로에는 나갈 채비를 했다. 그녀를 수행하기 위해 하녀 엘리가 함께했다.
* * *
“어서 오십시오, 공작부인.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공방 대문 앞까지 마중 나온 도자기 장인 멘디스가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했다.
클로에는 자신보다 40살은 많아 보이는 노인이 그러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전생을 겪은 그녀는 귀족으로서의 특권 의식이 거의 없는 편이었다. 그녀가 손사래를 쳤다.
“그러지 마세요.”
“하지만 제가 공작부인께 어찌…….”
“저는 정말 괜찮아요. 부디, 조금 더 편히 대해 주시면 좋겠어요.”
클로에가 멘디스에게 ‘제국 최초의 다구’를 의뢰한 것이 바로 몇 달 전의 일이었다. 그때 이후 클로에는 여러 번 이곳을 방문했다.
클로에가 공작부인임을 알게 된 뒤로 멘디스는 클로에가 방문할 때마다 계속해서 그녀에게 부담스러울 정도의 예의를 갖추고 있었다.
한편 멘디스는 그녀의 인품에 감탄하는 중이었다.
‘공작부인씩이나 되는 분께서 어떻게 이렇게 나 같은 평민에게 관대하실까.’
수도 최고의 도자기 장인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그는 온갖 귀족을 만나 보았다.
제국의 귀족은 물론이고 외국의 귀족, 왕족, 심지어는 황족까지 만나 보았지만 그 어디에도 이런 사람은 없었다.
본디 귀족이란 날 때부터 고귀하게 태어난다. 제국의 건국신화에 따르면 제국의 귀족은 평범한 인간과 달리 신이 각별한 정성을 들여 만든 피조물이라고 했다.
그래선지 귀족들은 자신의 출신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다. 상대가 나이 지긋하고 뛰어난 솜씨로 명성이 높은 도자기 명장 멘디스라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점잔 빼는 귀족이라도 전부 똑같았다. 멘디스, 그를 보는 모든 귀족들의 시선에 깔봄과 괄시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그는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눈앞의 이분은 달랐다.
‘이분만은 단 한 번도 나를 업신여기지 않으셨다. 이분이 나를 대하는 것은 진심이야.’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이렇게나 높은 지위의 귀족이 이렇게 투명하고 다정한 눈빛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그는 과거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숱한 연륜과 경험으로 이제 제법 사람 보는 눈이 생겼다고 자부하는 그였다. 그런 그의 눈에는 보였다. 공작부인의 태도와 눈빛은 가식이 아니라는 걸.
더군다나, 사람을 시켜서 주문을 넣어도 되는 것을 매번 직접 찾아오는 것도 대단했다. 그녀가 매번 바쁜 시간을 쪼개 그를 찾아오는 것은 자신의 의사를 잘 전달하고 만들어지는 도자기들의 모습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그의 고객 중 이렇게나 그의 작품에 관심과 정성을 들이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녀를 대하면 대할수록 존경스러웠다. 만나면 만날수록 인간적인 호감이 갔다.
이러니 그녀의 주문에는 더더욱 진지하게 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멘디스는 그녀를 위한 작품을 만들 때면 언제나 심혈을 쏟아붓곤 했다.
멘디스는 존경심을 담아 그녀를 정중하게 공방 안쪽으로 안내했다.
공방 안쪽, 멘디스의 작업실로 들어가던 클로에는 뜻밖의 물건을 발견했다.
“어머! 이건…… 온의 다구인가요?”
멘디스의 작업용 테이블에 온의 다구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개완, 다완, 문향배, 다호…….
처음에는 멘디스마저 차에 맛을 들였나 했는데 아니었다. 가만 보니까 그가 가지고 있는 다구들은 전부 도자기로 된 것들이었다.
“설마 연구를 위해서 가지고 계신 건가요?”
“그렇습니다, 부인.”
멘디스가 한숨을 푹푹 쉬었다.
“아시다시피 최근 온의 도자기가 많이 수입되고 있지 않습니까.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온의 도자기 제작 기술은 매우 뛰어납니다. 견고하고 곡선이 아름다우며 무늬가 섬세하죠. 게다가 보온성이 높아 차 우리는 데 좋다고 합니다. 이제 곧 사교계에서 온의 도자기가 유행할 것이라는 소문도 돌더군요.”
물론 클로에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온과의 무역을 활발하게 해서 최근 제국 시장의 온의 물건들이 자주 돌아다니게 된 건 바로 클로에 그녀 덕분이었으니까.
“저야 할 줄 아는 재주가 그저 도자기 굽는 것밖에 없는데, 시장에서 온의 도자기에 밀릴까 봐 걱정이 큽니다. 그래서 온의 도자기 제작 방법에 대해 연구를 하고 있었답니다. 더 좋은 도자기를 만드는 데에 혹시 도움이 될까 해서요.”
클로에는 감탄했다.
멘디스처럼 연배가 많은 사람은 자기 고집이 세거나 최신 정보를 습득하는 데에 무관심해지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그는 인상이 좋지 않은 국가인 온의 도자기를 연구하면서까지 더욱 좋은 도자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클로에 덕분에 온의 이미지가 많이 개선되긴 했지만 여전히 온에 대한 대중적인 인상은 좋지 않았다.) 자신의 일에 진심 어린 열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클로에는 그런 사람을 좋아했다. 무언가를 각별히 좋아하고 끊임없이 연구하는 사람을 보면 그녀는 동질감을 느꼈다. 일종의 동지 의식이라고나 할까.
그녀가 진심을 담아 칭찬했다.
“정말 대단하시네요. 연구를 위해 무척 노력하시는군요.”
이 말을 들은 멘디스는 깜짝 놀랐다.
세상에, 이런 칭찬이라니!
그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귀족에게서 대단하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얼굴이 목까지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그런 얼굴을 숨기기 위해 몸을 돌리고 뒷짐을 지며 헛기침했다.
“크흠, 흠.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 아니겠습니까.”
클로에는 빙긋 웃었다. 그녀가 물었다.
“연구의 성과는 많이 나왔나요?”
대화가 도자기에 대한 주제로 돌아가자 멘디스가 진정했다. 그가 다시 몸을 돌려 클로에를 보고 말했다.
“예. 기존에 서방에서 도자기를 만들 때 쓰는 재료는 점토와 유리 가루였습니다. 프란시아 공화국에서 유래된 것이지요. 하지만 온의 도자기의 재료는 고령토(高嶺土)라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고령토라고요?”
“예. 제가 실험해 보았는데 고령토로 도자기를 만드니 확실히 백색의 색상이 아름답고 튼튼하더군요.”
그러더니 멘디스가 또 한숨을 푹 쉬었다.
“하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멉니다. 여전히 온의 도자기의 품질을 따라가기는 힘들어요.”
그 말을 듣고 클로에는 잠시 고민했다.
그를 도와주고 싶었다. 그에게 호감이 가기도 했고, 그가 더 뛰어난 품질의 도자기를 만들어 낸다면 그것은 그녀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기도 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도자기는 제 전공이 아니라 조심스럽지만……. 혹시 골회(滑灰)를 사용해 보면 어떨까요?”
“골……. 예? 죄송하지만 뭐라고 하셨는지?”
클로에가 또박또박 말했다.
“골회요. 소뼈를 구워서 잘게 갈아 가루를 낸 것을 고령토에 섞는 거예요. 약 4할이나, 5할 정도의 비율로요.”
“예? 소뼈 말입니까?”
멘디스는 기겁했다.
그야 당연했다. 식기로 쓰는 도자기에 소뼈를 넣는다니? 듣도 보도 못한 소리였다.
클로에는 민망해졌다. 역시 주전공이 아닌 주제에 대해 괜히 오지랖을 피웠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소뼈를 넣어 만든 본 차이나(Bone China)는 굉장한 발명품이었다.
그녀의 전생에서 식기로 쓰이는 도자기는 대부분 본 차이나였다. 1748년 영국의 회사 보 요업에서 최초로 발명된 것으로 고령토와 소뼈 가루를 주재료로 한다.
이름의 본(Bone)이라는 단어는 그 때문에 들어간 것이다.
클로에가 진지하게 말했다.
“해괴하게 들리시겠지만 속는 셈 치고 한 번만 시도해 보세요.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그, 그렇지만…… 공작부인…….”
멘디스가 갈등했다.
사실 문외한의 헛소리라고 치부해도 이상하진 않을 것이었다. 딱히 클로에가 명령을 내린 것도 아니었고, 그녀가 자신의 제안을 무시한다고 처벌을 내릴 사람도 아니었다.
그리고 사실 누가 봐도 도자기에 대해서는 그녀보다 멘디스, 그가 더 잘 안다.
세상에, 약 절반 정도가 뼛가루로 된 도자기라니?
평생을 도자기 제조와 연구에 바쳐온 그로서도 받아들이기가 힘이 들었다.
그리고 클로에는 그의 기분을 이해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더니 이렇게 말했다.
“강제하는 것은 아니니 부담 갖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그럼, 의뢰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요.”
“무, 물론입니다. 역시 이번에도 티팟과 티 잔을 주문하러 오신 겁니까?”
“맞아요. 아, 그리고 찻잎을 담을 만한 티 트레이와, 또…….”
의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멘디스는 재빨리 그녀에게 의자를 가져다주었다. 두 사람은 의뢰에 대해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다.
클로에가 돌아간 뒤, 멘디스는 홀로 남아 생각했다.
‘도자기에 소뼈라니.’
생각만 해도 놀라운 이야기였다.
만일 이게 잘 된다고 해도 소비자들이 받아들일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소뼈로 만든 접시에 음식을 올려 두고 먹고 싶은 귀족이 몇 명이나 될까?
‘만일 다른 사람이라면 조금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바텐베르크 공작부인이 아닌가.
사실 그녀를 완전히 도자기 문외한이라고 치부하기는 어려웠다. 놀랍게도, 다른 의뢰자들과 다르게 그녀는 도자기에 대해 약간의 상식을 가지고 있었다.
제국 최초의 다구를 제안한 사람도 바로 그녀가 아니던가.
‘그리고, 설령 그녀가 아예 문외한이라고 해도…….’
멘디스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는 공작부인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었다. 만일 그녀가 아무리 이상한 물건을 의뢰해도 그는 최선을 다할 것이고, 그녀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믿고 싶었다.
그러니, 한 번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소뼈 도자기라는 괴상한 물건이라고 해도.
그래서 멘디스는 그녀의 말대로 했다.
사실 처음에는 별로 신통치 않았다. 고령토에 골회를 넣는다고는 해도, 그 정확한 비율도, 적절히 혼합하는 방법도 알 수 없었다. 또한 재료가 바뀌니 도자기를 굽는 온도와 방법도 달라져야 했다.
심지어 골회를 만드는 방법도 걸렸다. 어떤 소의 뼈를 어떻게 처리해서 어떤 온도에 얼마만큼 구워야 하며, 어떻게 갈아야 하는가?
클로에는 ‘고령토에 골회를 넣어 보라’는 짧은 조언만 해 주었을 뿐 자세한 것은 알려 주지 않았다. 사실 그녀도 좀 더 자세히 알려 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는 차를 좋아해서 다구를 좀 모아 봤을 뿐, 도자기를 제작해 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최초의 시도 끝에 신통치 않은 결과물을 만들어 낸 멘디스는 고민했다.
‘공작부인도 한 번만 시도해 보라고 했지. 나는 그분의 부탁대로 했다. 성의는 충분히 다해 본 셈이지. 이 이상 해 보아야 할 이유는 없어.’
굳이 이 이상 고생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그도 알고 있었다. 그가 노력했다는 사실만 보이면 클로에도 섭섭해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공작부인이신데…… 분명 그분의 말씀에는 깊은 뜻이 있지 않았을까? 방법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단지 내가 부족했던 것이 아닐까?’
멘디스는 머리를 싸맸다.
‘만일 내가 성공한다면 분명 기뻐하실 터. 나는 그분의 덕을 여러 번 보았다. 그런 분께서 내게 그렇게 대해 주신 건 틀림없이 큰 은혜야.’
만일 다른 사람의 제안이었으면 처음부터 무시했거나, 해 보더라도 한 번 정도의 시도에 그쳤을 것이다.
하지만 생전 처음 존경하게 된 공작부인이 아닌가. 멘디스는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리고 싶었다. 그분의 의도대로,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 내 의뢰 마감일에 내어드린다면 얼마나 좋아하실지에 대해 생각했다.
끙 앓는 소리를 내던 그가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딱 한 번만, 딱 한 번만 더 해 보자. 이번에도 안 된다면 그땐 괜히 힘쓰지 말고 그만두는 거야.’
그리고 딱 한 번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실패하고 또 실패했다. 도자기 명장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그에게는 자존심의 상처가 되었다. 나이가 든 그에게는 체력과 기력이 많이 소모되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만둘 수가 없었다. 왠지 확신이 들었다. 한 번만 더 한다면 이번에야말로 잘될 것 같았다. 공작부인이 원하던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렇게 해서 그녀를 만족하게 하고, 기쁘게 한다면 그것은 또 얼마나 보람 있는 일이겠는가?
실패할 때마다 멘디스는 이런 생각을 했다.
‘나에게 큰 은혜를 베푸신 분이다. 내 인생에 이런 분을 과연 또 만나겠나 싶을 정도로 훌륭하신 분이다. 그런 분을 위해 한 번 정도 더 시도하는 것은 나쁘지 않지 않을까?’
그래서 멘디스는 계속해서 골회 도자기를 만들었다. 매번 새로운 시도를 했다. 골회를 만드는 법, 고령토에 조합하는 비율, 굽는 방법을 조금씩 달리해 가며 시도해 봤다.
그의 제자들은 기겁했다.
“선생님, 그 일을 굳이 선생님께서 하셔야 할까요? 선생님은 평범한 그릇만 만드셔도 귀족들이 앞다투어 돈을 지불하려 하는 제국 제일의 명장이시잖아요.”
“맞아요. 이건 시간 낭비, 체력 낭비예요. 언제 성공할지, 아니 진짜로 성공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에 몰입하시는 것은 선생님께 손해가 아닌가요?”
그들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단지 컵 하나만 만들어도 경매에 부쳐져 값비싸게 판매할 수 있는 그가 이런 쓸데없어 보이는 일에 시간과 노력을 쏟는 건 누가 봐도 손해였다.
그러나 멘디스는 개의치 않았다. 그가 제자들을 향해 호통을 쳤다.
“이 녀석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한다! 어디 스승님 앞에서 건방지게. 가서 흙을 반죽할 물이나 길어 와! 애쉬, 넌 공방 안을 청소하고.”
“네, 네에…….”
그러자 제자들은 허겁지겁 시킨 일을 하러 도망갔다.
다시 자리에 쭈그려 앉아 소뼈를 넣은 가마를 지켜보며 멘디스는 생각했다.
클로에 바텐베르크 공작부인. 그녀는……. 다른 고객들과는 달랐다.
그의 고객들은 물론 돈을 잘 썼다. 전부가 부자였고, 멘디스의 명성은 비싼 값을 얼마든지 치를 만큼 뛰어났다.
그중 공작부인은 그의 작품을 각별히 값비싸게 쳐주긴 했다. 하지만 단지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의 고객들은 언제나 그랬다. 그의 작품들을 사랑해 얼마든지 돈을 썼지만 정작 작품을 만든 그는 멸시했다. 점잖은 척하며, 심지어 가끔은 노골적으로, 그들 모두가 그를 평민이라는 이유로 깔보고 업신여겼다.
제국 최고의 도자기 장인이라는 이름이 붙은 지금까지도 그들의 깔보는 눈빛은 그를 평생 따라다녔다.
그러나 그분만은 그러지 않았다.
멘디스는 귀족이 그런 눈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난생처음 알았다. 그를 진심으로 존중하고 존경해 준다는 사실이 느껴지는 그녀의 시선. 그의 작품은 물론, 멘디스라는 인물 자체를 인정하고 대우해 주는 그녀의 태도.
‘그런 분은…… 평생 가도 다신 없지. 아마 한 번 더 태어나도 그런 분은 만날 수 없을 거야.’
피곤하고 힘들고, 왜 내가 이런 일을 하고 있나 싶은 생각이 들다가도 그분을 생각하면 다시 힘이 났다. 그녀가 그를 향해 드러내던 존중과 존경심, 진심 어린 인정을 생각하면 의욕이 났다.
‘그런 분의 말씀에 의미가 없을 리 없다. 분명 결과는 나올 거야.’
그래서 멘디스의 ‘딱 한 번만 더’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하루, 이틀, 며칠이 지나 몇 주가 되도록 계속.
한 편, 몇 주가 지나 의뢰 시일이 다가왔다. 클로에는 자신이 멘디스에게 했던 말에 대해 생각했다.
‘골회를 넣어 보라고 말씀드렸는데, 과연 해 보셨을까?’
잘 모르겠다. 사실 도자기가 전공이 아닌 그녀의 말은 문외한의 헛소리로 들렸을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그녀는 단골인 데다가 지위가 높기까지 하니 한 번 정도는 시도해 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 역시 알고 있었다. 고작 ‘고령토에 골회를 넣어라’라는 말 한마디 덕에 한 번에 멋진 본 차이나를 만들어 낼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래서 클로에는 멘디스가 아예 시도 자체를 안 해 봤거나, 한 번쯤은 해 보았더라도 실패했을 거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실망스럽지도 않았다. 본 차이나가 아니더라도 멘디스의 도자기는 정말 뛰어나니까.
그는 온의 도자기에 밀릴까 봐 걱정된다고 했지만, 클로에가 생각하기에 그럴 일은 없을 것이었다. 온의 도자기와 비교해 보아도 그의 도자기는 정말 훌륭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향상심을 가지고 있는 멘디스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힘내서 훌륭하고 맛 좋은 차를 많이 만들어야지.’
클로에는 다짐했다.
‘그러고 보니 찾아가기로 했던 날이 내일이었지. 늦지 않게 가야겠다.’
다음 날이었다. 클로에는 채비를 하고 하녀와 함께 멘디스의 공방을 찾아갔다.
한데 오늘은 멘디스가 마중을 나오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공작부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로는 언제나 일찍부터 마중을 나와 그녀를 기다리곤 했다.
‘뭐, 그럴 수도 있지.’
그렇게 생각한 클로에는 하녀 엘리와 함께 공방에 들어갔다.
정말 이상했다. 공방 내부에서도 멘디스가 보이지 않았다.
‘설마 오늘 약속이 있다는 걸 잊으셨나?’
그런 불길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녀는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 떨쳐냈다. 멘디스는 프로 의식이 투철한 사람이니 그런 일은 없을 것이었다.
그녀는 공방 안쪽에 들어가서 작업실의 문을 두드렸다.
“계세요?”
대답이 없었다.
“마님, 문이 안 잠겨 있어요.”
옆에서 엘리가 말했다. 클로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의 작업실에 허락 없이 들어가는 건 예의가 아니지만 이 경우는 어쩔 수 없는 것 같았다. 클로에는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돌렸다.
“계신가요?”
문을 열며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그녀가 본 것은 정말이지 뜻밖의 것이었다.
“아니, 멘디스!”
그 안에는 멘디스가 있었다.
며칠은 자기 자신을 돌보지 않은 것처럼 산발에 덥수룩하게 자란 수염, 갈아입지 않은 더러운 옷. 그리고 옆의 작업상에 수북이 쌓인 다 태운 궐련.
클로에는 단 한 번도 이런 꼴의 멘디스를 본 적이 없었다.
그가 클로에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충혈된 눈 밑에 검게 그늘이 진 그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아, 이럴 수가. 공작부인께서 오시는 날이었던 것을 깜빡하다니. 공작부인, 이쪽으로 오십시오. 마침 말씀하셨던 것을 완성한 참입니다.”
“무…… 무엇을요?”
멘디스의 초췌한 모습에 당황한 클로에가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그러자 멘디스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 순간만큼은 눈 밑의 그림자도, 충혈된 눈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환한 웃음이었다.
그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부인께서 말씀하셨던, 골회 도자기 말입니다! 자, 이걸 보십시오. 제 평생의 역작입니다!”
클로에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지나가듯이 말한 골회를 넣은 도자기를 그가 완성했단 말인가? 저 꼴이 될 정도로 고생해서?
그녀는 울고 싶었다. 그를 도와주고 싶었던 거지, 고생을 시키려던 것이 아니었는데.
“멘디스, 어떻게 그런…….”
“어서 이리 오십시오, 공작부인! 분명히 공작부인께서도 만족하실…….”
쭈그리고 앉아 있던 그가 몸을 일으켰다. 그는 작업 테이블에 놓여 있던 무언가를 두 손으로 쥐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였다. 그의 몸이 기우뚱하고 기울어졌다. 마치 무력한 목각인형처럼 그는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쨍그랑!
“멘디스!”
클로에와 그녀 옆에 있던 엘리가 기겁했다.
멘디스가 쓰러지자 클로에는 굉장히 놀랐다.
곁에 있는 엘리도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어린 아이인지라 엘리는 거의 기절하기 직전으로 보였다.
그 모습을 본 클로에는 패닉에서 빠져나와 평정을 찾을 수 있었다. 공작부인으로 살아온 지난 몇 달간의 삶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지난 시간 동안 자신이 자신도 모르는 새 조금씩 강해졌음을 깨달았다.
클로에는 엘리를 진정시키고 멘디스를 근처 소파에 눕혀 놓았다. 다행히 멘디스는 숨을 쉬고 있었고 호흡도 규칙적이었다.
“엘리, 가서 의사를 불러오렴.”
“네, 네! 그럴게요, 마님!”
클로에의 말에 엘리가 벌떡 일어나 밖을 향해 달려 나갔다.
의사를 찾아 달리며 엘리는 생각했다. 어린 그녀는 다른 사람이 쓰러지는 모습을 난생처음 보았다. 그래서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놀랐다. 클로에가 그녀를 진정시켜 주기 전까지는.
‘어떻게 마님은 그렇게 의연하실 수가 있을까?’
엘리는 클로에의 차분한 모습을 떠올렸다. 보통의 귀부인들이라면 질겁해 달아날 정도로 놀라운 상황에서도 빠르게 대처하던 그녀의 모습.
엘리는 알고 있었다. 그녀의 주인마님은 마음이 여리고 수줍음을 많이 탔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누구보다도 훌륭한 상황 대처 능력과 차분함, 타인을 배려하는 이타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훌륭하신 분이 계신지. 게다가 자신은 어떻게 이렇게나 멋진 분을 모실 수 있게 되었는지.
‘이런 멋진 마님을 만나서 정말로 다행이야!’
엘리는 마님이 정말로 존경스러웠다. 그리고 자신 역시 그런 멋진 여성이 되고 싶었다.
한편, 엘리가 나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멘디스가 깨어났다.
“으음…….”
“정신이 드세요?”
다정하면서도 걱정이 듬뿍 묻어 있는 목소리에 멘디스는 깜짝 놀랐다. 자신에게 이런 목소리로 말을 건네는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공작부인.”
“네, 저예요. 갑자기 쓰러지셔서 놀랐어요. 몸은 좀 괜찮으세요?”
“괜찮습니다. 제가 많이 피곤했나 봅니다.”
비척비척 소파에 일어나 앉은 멘디스는 불현듯 소리쳤다.
“내 도자기!”
그는 벌떡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몸을 다 일으키지도 못하고 주저앉고 말았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클로에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무리하지 마세요. 도자기는 무사해요.”
그녀가 작업 테이블 쪽을 가리켰다. 그의 작품은 그곳에 무사히 잘 있었다.
비록 ‘쨍그랑’ 하는 큰 소리가 나긴 했지만 살짝 부딪혀서 난 소리일 뿐, 다행히 깨지진 않은 것 같았다.
그제야 긴장이 탁 풀린 멘디스가 한숨을 쉬었다. 그가 머리를 감싸 쥐었다.
“공작부인께 이런 꼴을 보여 드려 제가 무척 면목이 없습니다.”
“아니에요. 오히려 저야말로 죄송하죠.”
“예?”
“제가 과한 부담을 드린 것 같아요. 제 의뢰 때문에 설마 이렇게나 고생을 하셨을 줄은……. 죄송해요. 고생 많으셨어요.”
클로에가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멘디스의 눈이 커졌다.
그의 삶에서 이런 이유로 그를 걱정하고, 미안해하는 귀족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었던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부끄럽게도, 60년 인생에서 부모님 돌아가신 뒤 처음으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런 분을 위해서라면 고생이 무슨 대수냐. 이 정도의 일은 몇 번이든 할 수 있지.’
그는 틀림없이 붉어졌을 눈시울을 감추기 위해 피곤한 척 눈을 비볐다. 그가 말했다.
“도자기를 보셨습니까?”
“아니요, 경황이 없어서 자세히는 보지 못했어요.”
“어서 보십시오. 이건 제 평생의 역작이라고 할 만합니다.”
그 말에 클로에가 멘디스의 작품을 가져왔다.
그것은 찻잔이었다. 어차피 실험용이니까 아무거나 만들기 쉬운 것을 만들어도 될 것을, 멘디스는 소뼈 도자기를 만드는 모든 시도에서 만들기 번거로운 찻잔을 고집했다. 그가 클로에를 염두에 두고 이것을 만들었다는 증거였다.
클로에는 깜짝 놀랐다. 만개한 작약처럼 풍성하게 벌어진 형태의 찻잔은 전에 본 적 없이 아름다웠다.
찻잔은 투명한 유백색으로 빛났다. 이것은 기존의 도자기 찻잔들보다 두께가 훨씬 얇았고, 따라서 무게 역시 가벼웠다. 훨씬 세련되고 우아한 아름다움이 있으면서도 실용성도 좋은 것이다.
“이것은 기존의 도자기보다 가볍지만 훨씬 튼튼합니다. 이 맑은 우윳빛을 보십시오. 기존의 흰 도자기들은 미묘하게 회색이 돌았습니다만 이것은 오로지 투명하기만 합니다. 이런 것을 제가 만들다니…… 이건 신의 축복입니다.”
“신의 덕이 아니에요, 멘디스.”
클로에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건 당신이 노력한 결과예요. 건강을 해칠 정도로 오랜 시간 전념해서 노력한 거잖아요. 멘디스, 당신은 정말 훌륭한 도예가예요.”
그 말은 멘디스의 가슴을 감동으로 울렁이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잠시 대답하지 못하던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이건 공작부인의 덕입니다.”
“네?”
“공작부인의 말씀이 없었다면, 아니, 공작부인이 아니었다면……. 저는 이것을 결코 만들지 못했을 겁니다. 기껏해야 한두 번 시도해 보았다가 포기하거나 했겠지요. 공작부인이 있으셨기에 저도 이것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겁니다.”
멘디스가 진지하게 말했다.
“공작부인, 보잘것없지만, 저는 이 소뼈 도자기를 공작부인께 헌정하고자 합니다. 이 훌륭한 발명품이 사람들의 입에서 회자될 때엔 공작부인의 존함 역시 함께했으면 합니다. 제가 공작부인께 헌정하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아니, 멘디스!”
클로에는 깜짝 놀랐다.
헌정이라는 것이 실질적 이익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훌륭한 명예임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었다. 헌정한 물건이 훌륭한 역작일수록 더더욱 그렇다.
그리고 클로에는 이 본 차이나가 이후 수백 년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할 굉장한 발명품임을 알고 있었다.
클로에는 넘실대는 감동의 바다에 두둥실 떠서 흘러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런 바다라면 매일 표류해도 좋았다.
그녀는 아름다운 본 차이나 찻잔을 들여다보았다. 찻잔은 아무런 무늬도 없는 단순한 흰색이었지만 그 단순함이 오히려 우아해 보였다.
그녀는 정말 소중한 물건을 대하는 것처럼 찻잔을 쓰다듬었다. 그것을 가슴에 품으며 클로에가 말했다.
“정말 감사해요, 멘디스.”
멘디스는 주름진 얼굴을 움직여 웃었다. 턱까지 닿을 듯한 눈 밑의 그림자는 그대로인데도 일순간 그의 얼굴이 환해 보였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의 이름을 공작부인께서 정해 주셨으면 합니다. 언제까지나 소뼈 도자기라고 부를 수는 없으니까요.”
“이름이라고요?”
클로에가 되물었다.
유감스럽게도 그녀는 이름을 짓는 일에 자신이 없었다. 안 그래도 지난 몇 달 동안 이름 짓는 능력이 사업가에게 얼마나 중요한 능력인지를 깨닫고 있던 중이었다.
자신의 첫 오리지널 블렌딩에게 ‘붉은 입술’이라는 민망한 이름을 붙여 줬다가 곤욕을 치른 것도 겨우 작년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런 고마운 호의를 거절하기도 어려웠다. 클로에가 조심스레 말했다.
“음…… 본 차이나가 어떨까요?”
“본 차이나 말입니까?”
평범하게 전생의 세계에서 쓰던 이름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그녀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그녀가 겪었던 전생의 세계에서는 중국이라는 국가가 있었고 그 국가의 특산품인 도자기를 일반 명사 차이나(China)로 일컫는 일이 자연스러웠지만, 이곳에는 중국이 없었다.
따라서 이곳 세계 사람들에게 ‘본 차이나’라는 이름은 의미를 알 수 없는 이상한 말이었다.
멘디스는 생각했다.
‘음……. 좀 이상한 이름이군. 하지만 공작부인께서 지어 주신 이름이니 아무래도 좋아.’
“알겠습니다. 이름을 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때였다. 엘리가 의사를 데리고 공방으로 돌아왔다. 멘디스는 자신은 건강하다고 주장했으나 클로에는 한사코 의사에게 진찰을 받게 했다. 다행히 피로와 노환 외에 눈에 띄는 증상은 없었다.
클로에는 멘디스에게 피로 해소와 노환에 좋다는 약을 지어 보내 주었다.
장인 멘디스가 제작한 본 차이나는 엄청난 화제가 되었다.
“그거 들었어요? 이번에 멘디스가 뼈로 만든 도자기를 발표했다고 해요.”
“뼈라고요? 정말 끔찍하네요!”
처음에 사람들은 뼈로 만들었다는 사실에 거부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 거부감이 종식된 것은 그들이 본 차이나를 직접 보게 되었을 때였다.
다양한 디자인의 아름다운 본 차이나 다구들이 클로에의 티 하우스에 납품되었다. 티 하우스의 고객들은 뼈로 만든 것이라는 사실조차 잊을 정도로 이 놀랍고 새로운 도자기에 매료되었다.
“정말로 아름다워요!”
“어떻게 도자기가 이렇게 투명하고 반짝이는 흰색일 수가 있죠? 제가 가지고 있는 흰 도자기들은 전부 잿빛이 섞여 있는데…….”
“어머, 잔이 정말 얇고 가볍네요.”
“저도 이런 것을 갖고 싶어요!”
그 압도적인 아름다움과 실용성에 모두가 감탄했다.
특히, 반짝이는 본 차이나 찻잔은 찻물을 담았을 때가 가장 보기 좋았다. 회색이 없는 흰 찻잔은 투명한 주홍빛의 수색을 돋보이게 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새로운 다구를 손에 넣으려 애썼다. 가지고 있는 모든 식기를 본 차이나로 바꾸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클로에는 트리플 스위트에서 본 차이나 티 세트를 판매했고 이것은 큰 이윤을 낳았다.
‘역시 본 차이나는 색상이 아름다워서 식기로 잘 어울리는구나. 기존의 약간 잿빛이 도는 접시 위의 요리보다 새하얗고 투명한 본 차이나 위의 요리가 더 맛있어 보이는 것은 당연하지.’
그때 클로에는 무척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티 하우스에서 차가 아닌 티 푸드에 초점을 둔 메뉴를 출시해 볼까? 이른바 애프터눈 티 세트인 거야.’
애프터눈 티 세트. 샌드위치부터 달콤한 케이크까지 다양한 티 푸드를 차와 함께 즐기는 메뉴이다.
‘먹음직스러운 티 푸드를 본 차이나 3단 접시 위에 풍성하게 올려 두면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를 거야.’
애프터눈 티 세트는 맛도 좋지만 그 압도적인 비주얼이 장점이었다. 클로에의 전생에서만 해도, 차 애호가가 아닌 사람들도 애프터눈 티 세트만은 티 하우스를 찾아다니며 맛보곤 했다.
애프터눈 티 세트는 차 애호가가 아닌 사람을 애호가의 길로 끌어들이는 데에 일등 공신이었다.
아이디어가 있다면 실천에 옮겨야 한다. 클로에는 멘디스의 공방에 3단 접시를 주문했다.
이곳 세계에서는 3단 접시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멘디스는 클로에가 처음 다구를 주문했을 때처럼 새로워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아주 예쁘고 사랑스러운 3단 접시를 얻을 수 있었다.
3단 접시가 제작되는 동안 클로에는 애프터눈 티 세트의 메뉴를 연구했다. 이런저런 다양한 메뉴를 시도하고 조합한 끝에 결국 맛이 좋고 서로 잘 어우러지는 메뉴를 완성할 수 있었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클로에는 트리플 스위트의 앞에 입간판을 가져다 놓았다. 애프터눈 티 세트를 시범 판매한다는 내용의 글귀와 애프터눈 티 세트를 먹음직스럽고 사랑스럽게 그려 놓은 삽화가 들어 있는 간판이었다.
이 입간판은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지나가다가 보았는데, 애프터눈 티 세트가 뭔가요?”
“한번 맛볼 수 있을까요?”
지나가던 사람들조차 애프터눈 티 세트의 놀라운 비주얼에 끌려 티 하우스에 방문하는 일이 예사로 일어났다. 클로에는 귀부인들에게 설명했다.
“애프터눈 티 세트는 샌드위치나 케이크 등, 다양한 티 푸드를 차와 함께 즐기는 메뉴예요. 배가 고프거나 입이 심심한 오후를 달래 드릴 거예요. 2인 세트 가져다드릴까요?”
“네, 부탁드릴게요.”
직원들의 안내에 따라 귀부인들이 자리에 앉았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풍성한 티 푸드가 가득 담겨 있는 3단 접시가 나왔다.
클로에가 설명했다.
“맨 아랫단은 식사 대용의 샌드위치, 두 번째 단은 스콘과 클로티드 크림, 잼. 맨 윗단은 달콤한 디저트류예요. 맨 아랫단부터 위를 향해 차례대로 드시면 되어요.”
“어머, 정말 맛있겠네요!”
“감사해요!”
애프터눈 티 세트의 맨 아랫단은 달지 않은 식사 대용의 요리가 나오고, 위로 올라갈수록 달아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먹는 순서는 아래부터 위를 향하는 것이 정석이다.
애프터눈 티 세트는 오래지 않아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요리에 치중한 메뉴이다 보니 차를 즐기지 않거나 마셔 본 적 없는 사람들에게도 호평이었다.
맛과 보는 즐거움 두 가지 전부를 충족시키는 애프터눈 티 세트는 귀족 여성들의 마음속에 쏙 들었다. 클로에의 티 하우스의 애프터눈 티 세트를 먹어 보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먹어 본 사람은 없다는 농담마저 생겼다.
게다가 애프터눈 티 세트 덕에 차를 마셔 본 적 없는 사람들이 더 쉽게 차에 익숙해지는 부가 효과도 있었다. 애프터눈 티 세트의 시범 판매 기간 동안 트리플 스위트의 홍차 판매량이 확연히 증가했을 정도였다.
시범 판매는 약 한 달 정도의 기간 만에 종료되었다.
‘인기가 기대보다 좋았으니 정식 메뉴로 올려 두어야겠다. 하지만 정식 메뉴로 하면 예약제로 바꾸는 것이 좋겠어. 들어가는 요리가 많다 보니 주문 시간이 너무 길다는 지적이 있었으니까.’
클로에가 그런 생각을 하며 사업 장부를 확인하던 와중이었다.
“실례합니다, 공작부인.”
“무슨 일인가요? 여진.”
클로에가 물으며 고개를 돌렸다. 여진의 달덩이처럼 둥근 얼굴이 빨갛게 되어 있었다. 뭔가 엄청나게 용을 쓰는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여진, 무슨 일…….”
“애프터눈 티 세트가 언제 다시 개시되느냐는 내용의 편지가 이렇게나 많이 왔습니다.”
여진이 낑낑대며 들고 온 상자를 내려놓았다. 커다란 상자 안에는 온갖 곳에서 온 편지가 가득 들어 있었다.
“어머나…….”
“많은 사람들이 애프터눈 티 세트를 기다리고 있나 봅니다.”
여진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말했다. 클로에가 기쁜 듯이 웃었다.
애프터눈 티 세트가 정식 메뉴에 이름을 올린 뒤의 일이다. 수도의 귀족들은 애프터눈 티 세트의 중요한 효용을 알아냈다.
애프터눈 티 세트는 단순히 맛있고, 예쁘기만 해서 인기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마나 등이 개발된 지는 오래되지 않았다. 겨우 5년 전, 마탑의 마법사들은 마나를 이용해 빛을 내는 마나 등이라는 물건을 개발해 상용화시켰다.
이 편리함으로 인해 제국 내의 대부분의 귀족과 부유층들은 마나 등을 저택에 수십 개씩 설치했다.
밤에는 촛불이나 기름 등의 불빛에 의지해야 했던 과거에 사람들은 해가 지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편리하고 멀리까지 빛을 비추는 마나 등이 상용화된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제국의 낮이 길어졌다. 제국인들은 밤에도 일을 하거나 놀 수 있었다. 무도회는 밤늦게까지 이어졌고 제국인들의 평균 취침 시간이 늦어졌다.
마나 등이라는 발명품은 고작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제국인들의 삶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다만 문제가 하나 생겼다. 취침 시간이 늦어지면서 제국인들의 저녁 식사 시간 역시 늦어졌다. 6~7시에는 저녁을 먹었던 전생의 세계와 달리 제국의 평균 저녁 식사 시간은 9~10시였다.
이러다 보니 점심 식사 시간과 저녁 식사 시간의 간격은 한없이 길어졌다. 늦은 오후가 되면 누구나가 할 것 없이 배가 고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식사를 하기에는 뭐하니 그냥 참는 수밖에.
그런데 이런 때에 나타난 게 애프터눈 티 세트였다.
클로에의 티 하우스에서 애프터눈 티 세트는 오후 3~6시에 한정 판매된다. 애프터눈 티 세트라는 이름 그대로였다.
압도적인 비주얼에 끌려 이 티 세트를 즐긴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요리의 가짓수가 많고, 특히 샌드위치가 있어서 은근히 속이 든든해요.”
“정말 그래요. 배가 고프던 참이었는데 딱 알맞게 먹은 것 같아요.”
“식사를 하기에는 뭐한 시간인데, 애프터눈 티 세트를 먹으니까 적당히 배가 차네요.”
코스식으로 나오는 정찬을 먹기에는 그렇고, 무언가 먹고 싶기는 한 제국의 오후에 애프터눈 티 세트는 딱 알맞은 메뉴였다.
이러한 이유로 애프터눈 티 세트는 제국 귀족들의 열렬한 반응을 얻었다. 클로에의 티 하우스에서도 날이 갈수록 많이 팔려 나갔다.
심지어 각자 자신의 집에서 애프터눈 티 세트를 흉내 내는 사람들도 생겼다. 차와 샌드위치, 다양한 디저트를 잔뜩 차려놓고 먹는 것이다.
이른바 애프터눈 티타임의 시작이었다.
“애프터눈 티타임이라니, 이렇게 훌륭한 문화를 누가 생각해 낸 건지 모르겠네요. 누군지는 몰라도 정말 대단한 분이 분명해요. 그렇죠? 공작부인.”
로네펠트 부인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찻잔을 들어 마시던 클로에의 뺨이 붉어졌다.
클로에가 칭찬에 약하다는 사실을 로네펠트 부인은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클로에에게 장난을 치는 데에 완전히 재미가 들렸다. 그녀를 만날 때마다 클로에는 한 5번 정도는 얼굴을 붉혔다.
로네펠트 부인은 클로에가 쑥스러워하는 것을 모르는 척하고 말했다.
“이 피칸 파이를 드셔 보세요. 저희 셰프의 자랑이랍니다. 어머, 왜 얼굴이 붉어지셨어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음, 파이가 정말 맛있네요.”
파이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면서 클로에가 말했다.
애프터눈 티타임에 귀부인들은 주로 제일 친한 친구들을 초청해 함께했다. 식사이면서도 일종의 사교활동인 것이다.
부끄러움이 서서히 가셨다. 클로에는 뒤늦게 로네펠트 부인이 자신에게 이것저것 먹을 것을 권하기만 하고 정작 본인은 먹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더 드시지 않으세요? 로네펠트 부인.”
로네펠트 부인이 부채를 산들산들 부치며 대답했다.
“저도 더 먹고 싶지만, 코르셋이 조여서요.”
그 대답에 클로에는 뭔가 기시감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그것은 클로에 그녀가 자주 하던 말이기도 했다.
제국에서 코르셋은 상류층 여성들의 필수 속옷이었다. 허리 라인을 예쁘게 만들어 주기 위한 것이지만 사실 엄청나게 불편했다. 배와 허리를 너무 조여서 식사를 불편하게 만들뿐더러 심하면 숨도 쉬기 어려웠다. 무도회에서는 가끔 코르셋 때문에 숨이 막혀 기절하는 여성도 있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코르셋은 아주 중요한 것으로 여겨졌다. 제국 여성들은 코르셋을 입지 않으면 외출도 하지 않았다. 허리선을 그대로 드러내면 스스로도 부끄럽게 느낄뿐더러 남들에게도 손가락질을 받았다.
제국 문화이니 따르고 있기는 했지만 클로에는 내심 코르셋을 싫어했다. 아무래도 전생을 겪은 그녀이기 때문에 더 그랬다.
클로에가 조심스레 말했다.
“하지만 지금 충분히 먹어 두지 않으면 석찬 시간까지 배가 고프실 거예요. 음……. 코르셋의 매듭을 조금 풀어 보시는 건 어떨까요?”
“네에? 코르셋을 풀라고요?”
로네펠트 부인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말했다.
상대가 쉽게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기대보다도 더 격한 반응을 보이니 클로에는 약간 당황했다.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녀의 전생에 비추어 본대도, 다른 사람에게 “속옷을 입지 말아 봐라.”라고 말하면 누구든 깜짝 놀랄 것이다.
그렇지만 클로에는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코르셋은 몹시 불편할뿐더러 건강을 해쳤다. 그녀는 코르셋을 입고 밥을 굶느니 코르셋을 풀고 충분히 먹는 것이 훨씬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네. 지금은 우리 둘밖에 없잖아요? 혹시 혼자 코르셋 매듭을 풀고 있는 것이 부끄러우시다면 저도 풀게요. 지금은 휴식 시간이니 함께 편하게 식사를 해요.”
로네펠트 부인은 부채를 부치던 손을 멈추고 당혹한 얼굴로 고민했다.
역시, 공작부인은 참 특이한 사람이었다. 매우 순하고 마음이 여린 듯하면서도 가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서는 물러나지 않는 강단이 있었다.
‘예전부터 느껴왔던 거지만, 공작부인의 사고방식은 정말 독특해. 꼭 제국인이 아닌 것 같단 말이야.’
사실 로네펠트 부인 역시 언제나 코르셋이 불편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의 눈 앞에 허리선을 그대로 드러내다니! 태어날 때부터 제국인이었던 그녀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점이 매력이긴 하지만.’
클로에가 계속해서 설득했다.
“같은 여자끼리잖아요. 게다가 우리는 가까운 사이니까 이 정도는 괜찮아요. 안 그런가요?”
당당하게 말하다가, ‘가까운 사이’라는 말을 꺼내놓고는 슬쩍 이쪽의 눈치를 본다. 그녀는 예전부터 일관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없었다. 안쓰러우면서도 이쪽의 눈치를 보는 모습은 꽤 귀엽다. 어쩐지 지켜 주고 싶어진다고나 할까.
로네펠트 부인은 마음을 정한 얼굴을 했다. 다시 부채를 부치며 그녀가 말했다.
“좋아요. 하지만 공작부인도 코르셋을 풀어 주세요. 저 혼자는 민망하니까요.”
“물론이죠. 잘 생각하셨어요, 로네펠트 부인.”
클로에가 정말로 기쁜 듯이 웃었다. 그녀의 웃는 얼굴은 정말로 밝고 사랑스러워서 로네펠트 부인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은 같은 여자고, 게다가 무척 친했지만 그래도 서로에게 코르셋을 푼 모습을 보이는 건 몹시 긴장됐다. 로네펠트 부인은 10살 이후로 사용인과 남편 외의 사람에게 맨 허리선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코르셋은 혼자서 입고 벗을 수 없는 물건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서로의 코르셋 매듭을 풀어 주기로 했다.
‘진짜 이래도 괜찮은 건지 모르겠네.’
클로에의 손가락이 자신의 허리 근처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느껴졌다. 로네펠트 부인이 떨리는 마음으로 생각했다.
“그럼, 풀게요.”
클로에의 목소리에 로네펠트 부인이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심장이 말발굽 소리처럼 강하게 뛰었다. 쿵쿵, 쿵쿵, 쿵쿵 하는 자신의 심장 박동 소리에 맞추어 로네펠트 부인이 카운트다운을 했다.
하나…… 둘…… 셋!
“됐어요.”
“……!”
클로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와 함께 로네펠트 부인은 놀란 숨을 들이켰다.
허리와 갈비뼈를 아프도록 조이던 압박이 사라졌다. 긴장이 한꺼번에 풀리면서 놀랄 정도로 숨 쉬는 것이 편해졌다. 공기가 이렇게나 달콤했나 싶을 정도로 호흡이 기분 좋았다.
“어머…… 정말, 정말 편하네요.”
“그렇죠?”
클로에가 기쁜 듯이 말했다. 로네펠트 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좀 부끄럽고 창피하긴 하지만…… 왜 이걸 이제야 했나 싶을 정도로 편하고 좋았다.
로네펠트 부인은 몸을 돌려 클로에를 보았다. 그녀가 고개를 까딱였다.
“자, 공작부인도 이리 오세요. 제가 풀어 드릴 테니까요.”
클로에는 얌전히 그녀에게 등을 맡겼다. 로네펠트 부인은 조심스레 그녀의 코르셋의 매듭을 풀었다.
“됐어요!”
클로에가 쑥스러운 듯이 말했다.
“괜찮죠?”
그녀는 로네펠트 부인을 향해 몸을 돌리더니 자신의 허리와 옆구리를 확인했다. 혹시 살이 튀어나온 부분은 없나 확인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로네펠트 부인의 얼굴이 떫어졌다.
‘허리…… 엄청 가늘잖아.’
클로에의 맨 허리는 놀랄 정도로 가늘었다. 로네펠트 부인이 코르셋을 있는 힘껏 조였을 때와 똑같지는 않지만 꽤 비슷할 정도였다.
이래서야 둘 다 코르셋을 풀었다고 해도 같지는 않았다.
‘왜 이렇게 속은 기분이 들지…….’
하지만 이미 늦은 것을 어쩌랴.
그런 로네펠트 부인의 씁쓸한 마음은 꿈에도 모르고 클로에가 말했다.
“어떤가요, 후작부인? 이제 더 드실 수 있으시겠죠?”
씁쓸한 기분에서 깨어난 로네펠트 부인이 호언장담했다.
“물론이에요. 앞으로 2그릇 정도는 더 먹을 수 있어요.”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은 편안하게 티타임을 가졌다. 기분 탓인지 더 입맛이 잘 돌고 맛이 좋아서 평소보다 훨씬 많이 먹었다.
클로에는 로네펠트 후작부인 외의 다양한 귀부인들과 애프터눈 티타임을 가졌다. 자신이 초대를 받든, 혹은 초대를 하든, 그녀는 그때마다 코르셋을 풀 것을 제안했다.
“코르셋을 풀고 편안하게 먹으면 더 맛도 좋고 기분도 편안하고 즐거워요. 같은 여자끼린데 어때요.”
이것이 클로에의 주장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주장을 들은 귀부인들은 처음에는 모두 거부감을 느꼈다. 마치 로네펠트 부인처럼 말이다.
하지만 클로에의 주장이 워낙 강건했을뿐더러, 그녀는 언제나 시범을 보였다. 앞장서서 코르셋의 매듭을 푼 것이다.
그녀가 이렇게 나오는데 거절하기도 애매했다. 무엇보다, 귀부인들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코르셋이 얼마나 불편하고 번거로운지 말이다.
달콤한 향이 피어오르는 홍차와 맛좋은 샌드위치, 스콘, 과자들. 이런 것들을 앞에 두고 코르셋 때문에 조금밖에 먹지 못한다면 그것은 또 얼마나 큰 손해인가.
결국 귀부인들은 클로에가 제안하는 티타임의 유혹에 넘어가 버렸다.
“어머!”
“이렇게 편할 줄이야.”
“진작 이렇게 할 걸 그랬어요.”
그리고 모두가 반응이 좋았다. 시작이 어렵지 그다음부터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클로에는 가까운 사람들과 편안한 기분으로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 무척 기뻤다.
이러한 ‘애프터눈 티타임 때 코르셋 풀기’ 문화는 클로에와 그녀의 친한 귀부인들 사이에서 생겨나 점차 사교계 전체로 퍼져 나갔다. 애프터눈 티타임에는 아예 코르셋을 입지 않고 오는 여성들도 늘어났다.
조금 더 나중의 일이지만, 이 일을 계기로 귀족 여성들 사이에서 코르셋처럼 불편한 속옷을 굳이 입어야 할지에 대한 의문이 생겨났다. 애프터눈 티타임뿐만이 아닌 평소에도 코르셋을 입지 않는 여성들이 늘어났다. 그리하여, 제국의 여성들은 수도부터 시작해서 점차 코르셋을 입지 않게 되었다.
아리아나 바넷은 여전히 알폰스 바텐베르크 공작을 사랑하고 있었다.
친구와 공작부인에 대한 험담을 하다가 공작에게 걸려 큰 곤욕을 치르고, 공작부인에게 공작과 자신의 과거 관계를 날조해 시비를 걸다가 사실이 들통나 망신당했지만 그녀의 사랑은 변하지 않았다.
심지어 공작이 자신의 아내를 사랑한다고 선언하는 것을 자신의 눈으로 보았음에도 여전히 그랬다.
그녀는 알폰스를 포기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녀의 가슴속에서 갈망은 나날이 커져만 갔다.
“밀크티야, 아리아나. 식기 전에 마셔.”
아리아나의 친구 미리엄이 말했다. 그녀는 아리아나를 초대해 간단한 다과를 대접했다. 대부분이 트리플 스위트에서 구매한 것들이었다.
예쁜 본 차이나 찻잔에 담긴 따뜻하고 달콤한, 맛깔스러운 갈색을 띤 밀크티. 우유에 찻잎을 넣어 팔팔 끓여 만든 진짜 로얄 밀크티였다.
미리엄은 자신의 친구 아리아나가 최근 수심에 잠겨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맛있고 따뜻한 밀크티라도 한 잔 마시면 기분이 풀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리아나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자신의 눈앞에 내밀어진 밀크티를 침잠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던 그녀가 차갑게 말했다.
“나보고 그 여자의 가게에서 파는 것을 먹으라는 거니?”
“그 여자라니! 공작부인이셔, 아리아나!”
미리엄이 당황해 소리쳤다.
“그리고 아직도 그 소리를 하는 거니? 요즘 공작부인의 가게에서 파는 것을 먹지 않는 사람은 없어, 아리아나. 너 한 명 빼고는!”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트리플 스위트의 상품이 수도 사교계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을 때 아리아나만은 그곳에서 파는 것을 단 한 번도 입에 대지 않았다. 입에 대긴커녕 눈에 담기만 해도 속이 뒤틀렸다.
아리아나가 비꼬듯 말했다.
“너는 자존심도 없니? 야만국에서나 마신다는 차를 좋다고 넙죽넙죽 사 마시다니.”
“야만국이라니! 대체 언제 적 이야기를 하는 거야? 온이나 바라트는 야만적이지 않아. 그냥 제국과는 좀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을 뿐이야!”
“아주 공작부인 친위대가 다 됐구나? 미리엄.”
아리아나는 미리엄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과거 무도회에서 클로에에 대한 험담을 나누던 친구가 바로 그녀였으니까.
그때만 해도 미리엄은 분명 클로에를 싫어했다. 그런 한심한 여자가 공작님의 사랑을 받을 리가 없다고 말했다. 그랬던 그녀가 이제 와서 클로에의 편을 들고 클로에의 가게에서 그 한심한 것들을 구매해 주다니.
모욕적인 말에 미리엄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가 아리아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아리아나, 너란 애는 정말……. 네가 차를 싫어하는 이유를 알아. 네가 공작부인께 반감을 가지고 있어서잖아. 안 그래? 공작님의 사랑을 받는 공작부인을 질투해서. 공작부인만 아니었으면 공작님을 네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는 허황된 꿈에 빠져서!”
“미리엄, 말 조심해!”
아리아나가 눈을 부릅떴다.
“공작 각하는 그 여자를 사랑하는 게 아니야! 각하께서 그 여자를 사랑하실 리가 없어. 그런 한심하고, 모두가 우습게 여기는 여자를……!”
“정말 언제 적 이야기를 하는 거야, 아리아나! 공작부인은 더 이상 한심하지 않아! 그분은 이제 공작가의 안주인이자 사업가라고! 모두가 공작부인을 좋아하고, 특히 공작님은 공작부인을 매우 사랑하셔. 이제 그만 이 사실을 받아들여, 아리아나!”
“아니야!”
아리아나가 신경질적으로 팔을 휘둘렀다. 그녀의 팔에 휩쓸려 나간 찻잔이 멀리 날아가 와장창하는 높은 소리와 함께 박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