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장 (24/39)

24장

모든 손님의 식사가 끝나자 테이블이 치워졌다.

사절 단원들은, 디저트까지 먹었으니 이제 만찬이 끝났겠거니 했다.

사절단장이 큼큼 헛기침을 하곤 황제를 향해 예의상의 인사를 했다.

“훌륭한 대접 고맙습니다. 온에서는 이러한 마음 씀씀이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물러나 보겠…….”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바로 그때, 문이 열리고 여러 명의 하녀들이 줄을 지어 들어왔다. 객을 맞이하기 위해 평소보다 고급스럽게 차려입은 그들은 각자 쟁반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하녀들이 내려놓는 것은 말린 과일을 비롯한 향이 적은 과자류였다. 사절 단원들은 의아해졌다. 디저트는 이미 먹었는데 이런 것은 왜 내놓는 거지?

그러한 의문의 해답은 곧 밝혀졌다. 줄의 맨 끝에 있던 하녀의 모습이 드러났던 것이다. 그녀는 찻주전자를 들고 있었다.

사절단장은 내심 놀랐다.

‘아니, 찻주전자잖아? 제국에서는 차를 마시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게 무슨 일이지?’

그런 그의 낌새를 눈치챈 황제가 껄껄 웃었다. 그가 말했다.

“멀리서 온 손님들을 위하여 준비해 보았다오. 모쪼록 식사처럼 편안히 즐겨 주었으면 좋겠소.”

그 말에 사절단장은 무언가 깨닫는 것이 있었다.

‘그렇군. 온에서 차를 즐겨 마신다는 것을 알고 차를 구해 내온 것이로군? 그래 봤자 원래 차를 마시지 않는 제국에서 온의 깊이 있는 차 문화의 발끝만큼도 따라올 수 있을 리가 없지. 외국 상인에게서 수입한 질 낮은 홍차나 내올 것이 분명해.’

그렇게 생각한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까. 매우 기대가 됩니다.”

황제의 신호에 따라 하녀들이 각각의 찻잔에 차를 따랐다. 아름다운 백자 찻잔 위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김과 함께 피어오르는 향을 맡은 사절단장을 눈을 크게 떴다. 수색도, 차향도 그가 생각하던 저질의 서방 홍차와는 전혀 달랐다. 이건 설마…….

“백호은침(白毫銀針)이오.”

황제가 말했다.

“온에서 온 손님들을 위해 준비한 온의 최상등급 백차이지.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소.”

백호은침. 차나무의 가장 작고 여린 새싹으로만 만든 백차. 모든 찻잎이 여린 새싹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흰 솜털로 뒤덮여 있는 것이 특징이다. 너무나 뚜렷하고 향긋한 꽃향기가 난다.

사절 단원들은 모두 기함해 황제를 보았다.

백호은침은 온에서조차 마시기 어려운 귀한 차였다. 설마, 이 멀디먼 제국에서 이런 차를 마셔 보리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사절단장이 제일 먼저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들었다. 찻잔을 입에 대었다. 도무지 나무의 잎으로 만들었다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향긋한 꽃향기가 입 안을 채웠다.

이것은 백호은침일뿐더러 그중에서도 좋은 차였다. 최상등급이라는 말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사절단장은 알고 있었다. 이렇게 좋은 차를 구매하는 데에 필요한 건 단순한 금력뿐만이 아니었다. 그만큼이나 뛰어난 안목이 필요했다.

‘대체 제국인이, 어떻게 이런……?!’

믿어지지 않았다. 좋은 차를 알고, 고르고, 우릴 줄 아는 사람이 제국에 있다니 가당키나 한 말인가.

그러나 그의 놀라움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후로 약 6종류의 차가 코스별로 나왔다. 온의 차뿐만 아니라 온의 이웃 나라인 청의 차, 그리고 서방의 차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가 내심 우습게 여겼던 서방의 차마저도 전부 뛰어난 안목으로 골라낸 최상급이었다. 도저히 트집을 잡으려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훌륭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각 차가 나올 때마다 차에 곁들이는 다식 역시 달라졌다. 그런데 이 다식 역시 완벽했다. 다식을 잘못 고르면 차의 향미를 방해하곤 했지만, 그러기는커녕 서로의 향미를 돋우어 주는 뛰어난 조합이었다.

차를 마시지 않는다고 해서 내심 깔보았던 제국인들에게서 이런 대접을 받게 되다니.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온에서는 술과 담배, 차에 능통하지 않은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다. 이것은 달리 말하자면 술과 담배, 차에 능통한 상대는 인정한다는 뜻이다.

‘내가 오해를 하고 있었구나.’

사절단장은 생각했다.

‘제국에도 이런 훌륭한 차와 차의 전문가가 있었다니. 제국의 문화 수준도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뛰어나겠군.’

이렇게나 훌륭한 대접을 받았으니 더 이상 색안경을 끼고 상대를 깔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사절단장은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

“정말 융숭한 대접이었습니다. 제국에서는 차를 마시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제가 잘못 생각했나 봅니다. 이렇게 좋은 대접을 받은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그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황제가 소탈하게 웃었다.

“만족스러웠다니 다행이오.”

사절 단원들은 생각지도 못한 대접을 받아 기쁜 마음으로 숙소인 별궁으로 돌아갔다.

* * *

클로에가 이 소식을 듣게 된 것은 다음 날 저녁, 알폰스의 입을 통해서였다.

그녀가 코디네이팅한 다과 코스가 매우 반응이 좋았다는 말에 클로에는 무척이나 기뻐했다.

그녀가 고른 차를 남이 맛있게 마셔 주었다는 것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평소 사이가 좋지 않던 제국과 온의 대표 사이의 분위기가 전례 없이 부드러웠다는 말이 기뻤다. 그녀는 언제나 서방과 동방의 관계가 좋지 않은 것을 신경 쓰여 했다.

“사절단이 무슨 일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을 계기로 좋은 대화의 장이 마련되었으면 좋겠네요.”

“저도 그러길 바랍니다. 사절단이 온 이유가 밝혀진다면 부인께도 알려드리겠습니다.”

“정말요? 고마워요, 알폰스!”

클로에가 기뻐했다.

제국의 남자들 중에서는 아내나 딸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면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건 전혀 숙녀답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그에 반해 알폰스는 클로에가 정치에 관심을 갖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가 궁금해할 때마다 잘 설명해 주는 것은 물론 자료를 가져다주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클로에는 그녀만을 위한 신문 구독도 여러 종류 하고 있었다.

다시 다음 날이었다. 입궁했던 알폰스가 돌아왔다. 돌아온 그를 안아 주면서도 클로에의 눈은 기대와 호기심으로 빛나고 있었다. 오늘이 사절단이 황제와 공식 접견을 하기로 되어 있는 날이라는 사실을 그녀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잘 다녀오셨어요?”

“예.”

알폰스는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 맞췄다. 눈을 빛내는 클로에는 정말 사랑스럽지만, 그녀의 관심이 돌아온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져온 소식에 가 있는 것이 너무나 뚜렷하게 보여서 좀 아쉽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겉으로는 그런 티를 조금도 내지 않았다. 외투와 가방을 하녀와 집사에게 건넨 그는 그녀의 어깨를 감싼 채 자연스럽게 응접실로 자리를 옮겼다.

곧 하녀들이 차를 내왔다. 클로에는 너무 묻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렸던 질문을 꺼냈다.

“오늘이 공식 접견 날이었죠? 접견은 어땠어요? 분위기는 좋던가요? 사절단이 온 이유는 뭔가요?”

질문을 하나씩 하면 좋을 텐데. 입에 물고 있던 시가를 내려놓고 찻잔을 들어 올린 알폰스가 말했다.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한데 그들이 가지고 온 요청이 뜻밖이더군요.”

“어떤 거였나요?”

찻잔을 입술에 대어 한 모금을 마신 알폰스가 나직하게 말했다.

“아편 수입을 막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클로에는 잠시 눈을 깜빡였다. 그녀가 자신이 들은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아편……이요? 양귀비에서 추출한 마약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예, 맞습니다. 사절단의 주장에 따르면 제국을 통한 아편 밀수입이 너무 많아 골머리를 썩이고 있다고 합니다. 항구 도시를 중심으로 아편 중독자들이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어, 제국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더군요.”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제국의 밀수업자들이 온에 아편을 공급하고 있었다니……. 클로에가 느끼기에 그것은 분명히 옳지 못한 일이었다.

“그런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그 요청에 대해 황궁에서는 어떻게 반응하던가요? 당연히…… 막아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하겠죠?”

알폰스가 차를 한 모금 더 마시고 말했다.

“이 문제로 오늘 정무 회의가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귀족들은 중립을 선언한 반면, 주요 귀족들 중 밀수출을 막지 말아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클로에는 깜짝 놀랐다. 아편 수출을 막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유는 뭔가요? 역시 경제적 이익인가요?”

“그렇습니다. 아편 밀수출로 인한 경제적 이익이 상당한 데다가, 아편의 특성상 앞으로는 이익이 더욱 증대될 것이라는 것이 그들의 의견이었습니다.”

“하지만……! 아편 수출은 경제적 이익 이상으로 비윤리적인 일이에요. 제국인들의 배를 불림과 동시에 온의 사람들은 마약 중독과 사회적 문제로 고통받겠죠. 알폰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알폰스가 나직하게 대답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녀가 그렇게 주장할 것을 알폰스는 알고 있었다. 클로에가 마음이 여리고 남에게 강한 공감 능력을 보여 준다는 것은 여러 번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던 사실이다.

솔직히 말해서 이번 사안은 그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는 타인의 고통에 극도로 무감정하다. 온의 사람들이 고통을 겪건 어떠하건 그는 관심이 없었다. 만일 이전의 그였다면 그 역시 이 사안에 대해 중립을 표시하거나 밀수출을 막는 것에 반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의 본심이 그녀에게 상처를 주리라는 것을, 자신의 이기적인 성향에 그녀가 실망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제국의 경제적 이익이나 온의 사람들의 고통 따위가 아니라.

그래서 알폰스는 클로에의 의견에 동의하는 척했다.

잠시 고민하던 클로에가 물었다.

“밀무역을 막는 것을 반대하는 분들은 누군가요?”

“로네펠트 후작과 황자 전하입니다.”

우연히도 그녀가 잘 알고 있는 자들이었다. 클로에는 로네펠트 후작부인과 무척 친할뿐더러, 최근 아서 황자와 마주치는 일이 빈번해지고 있던 차였다.

클로에가 안타깝게 말했다.

“알폰스와 의견이 같아 다행이에요. 부탁이에요, 알폰스. 이 사안이 그냥 넘어가지 않도록 힘써 주셨으면 좋겠어요. 저는 이게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알폰스에게는 윤리니 국가적 이익이니 뭐니 하는 문제보다 그녀가 미소 짓는 것이 훨씬 중요했다.

그가 일어나 클로에의 곁에 가서 앉았다. 안심시키려는 듯 어렴풋한 미소를 지으며 그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부인.”

그의 큰 손이 부드럽게 뺨을 덮었다. 세상에서 제일 믿을 만한 사람인 그의 말에 클로에는 안심이 되었다.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정말 고마워요, 알폰스.”

그 사랑스러운 미소에 알폰스는 가슴이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그는 그녀의 입술 위로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클로에는 모르는 사실이었지만, 사실 그녀는 이미 이 사안에 대해 큰 영향력을 미친 바 있었다.

서방과 동방의 관계는 좋지 않다. 오랜 시간에 걸쳐 온 갈등과 서로에 대한 편견으로 인한 것이었다.

만일 클로에가 없었더라면 이 사안은 오래 끌 것도 없이 ‘우리는 모르는 일이다’라며 사절단의 요구를 거절하는 것으로 끝났을 것이었다. 제국 황실은 지독히도 제국 중심적이다. 동방의 야만인들이야 마약에 중독이 되든 말든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것이 이전까지의 제국 귀족들의 인식이었다.

그러나 클로에와 그녀의 노력이 있었기에 현재 제국에서 동방에 대한 편견이 많이 줄어든 상태였다.

그녀는 몇 번이고 동방의 문화와 차를 제국에 알려 왔고, 그 결과 제국 귀족들 사이에서의 동방의 이미지는 상당히 좋아졌다. 그렇기에 이 일이 쉽게 넘어가지 않고 논의의 여지라도 생긴 것이었다.

그러나 제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위정자들의 의견이 분분해 소귀족들은 눈치만 보고 있는 형편이었다.

아편 밀수출을 적극적으로 막는 일에 반대하는 인사는 두 명, 로네펠트 후작과 제1 황자. 한편 찬성하는 인사는 바텐베르크 공작이었다.

로네펠트 후작과 아서 황자의 주장 근거는 물론 그것이었다. 첫째로 제국에 피해가 오는 것도 아닌데 다른 국가를 위해 굳이 그만한 인력과 금력을 투입할 필요가 있냐는 것, 둘째로 밀수출로 인한 국가적 이익이 상당하다는 것.

비록 클로에는 위정자가 아니었지만, 그녀도 할 수 있는 일은 하고 싶었다.

제일 먼저 그녀가 한 일은 로네펠트 부인을 부르는 일이었다. 티타임을 함께하면서, 분위기가 무르익자 클로에가 살짝 말을 꺼냈다.

“이렇게 부른 이유는 다름이 아니에요, 부인. 혹시 요즘 황실에서 어떤 논의가 오가고 있는지 아시나요?”

“황실에서요? 글쎄요, 혹시 정원 분수대를 교체하는 문제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안타깝게도 로네펠트 부인은 이번 사안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그녀의 부군이 그 사안에서 꽤 중요한 위치를 선점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클로에는 정치에 대해 문외한인 로네펠트 부인도 이해할 수 있게끔 쉽게 풀어 설명해 주었다. 온의 사절단이 했던 요구와, 아편이라는 것은 무엇이며 어떤 심각성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사회에 유입되면 어떤 피해를 입을지에 대하여.

로네펠트 후작부인은 클로에의 설명을 듣고 깜짝 놀랐다.

“어머! 그런 일이 있었다니……. 저는 전혀 몰랐어요. 게다가 그런 위험한 마약이 제국을 통해 유통되고 있다니 큰일이네요.”

“맞아요. 제가 이 이야기를 후작부인께 말씀드린 이유는, 조심스럽지만, 마약 밀수출을 막는 일에 제일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사람이 바로 부인의 부군이시기 때문이에요.”

“네? 뭐라고요?”

놀라는 후작부인에게 클로에는 반대파와 찬성파의 의견에 대해 소상히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저는 어떠한 경제적 이익이 있더라도 마약 밀수출은 막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경제적 이익보다는 사람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니겠어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공작부인.”

“그런 의미에서 저는 로네펠트 부인께서 부군을 설득해 주셨으면 해요. 부탁드릴게요, 부인.”

로네펠트 부인은 고민했다. 그녀는 여자가 정치에 끼어드는 것은 숙녀답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거절하기에는 그동안 상대에게 진 빚이 너무 많았다. 로네펠트 부인은 클로에에게서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티 푸드를 고르는 법이나 차를 우리는 법은 당연하고, 두 번이나 자신의 친구들에게 강의를 해 주지 않았던가.

그런 상황에서 거절을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클로에의 의견이 옳은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그래서 로네펠트 부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알겠어요, 공작부인. 걱정 마세요. 제가 확실히 설득해 놓을 테니까요.”

“정말 고마워요, 로네펠트 부인.”

로네펠트 부인에게 부탁을 한 것이 끝이 아니었다. 클로에는 다과회를 열어서 친한 부인들에게도 이 사안에 대해 이야기했다. 여론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현재 사교계의 떠오르는 별이자, 황족 다음으로 높은 지위의 여성인 그녀의 말에 대부분의 여성들이 동의했다. 비록 정치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남자들을 설득하는 것만은 못하겠지만 클로에는 대중의 여론 또한 중요한 것이라고 믿었다.

클로에와 알폰스의 노력으로 제국 귀족들 사이에서는 이런 여론이 형성되었다.

“마약을 수출하다니, 저는 꿈에도 몰랐어요. 온도 사람 사는 곳인데, 너무 비윤리적인 것 같아요.”

“윤리도 그렇지만, 제국에서 마약을 수출한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 같습니다.”

“아편 밀수출은 영광스러운 제국에 어울리지 않소.”

여론이 이렇게 되니 로네펠트 후작과 아서 황자도 자신의 의견을 고수할 수가 없었다. 결국 황실에서는 아편 밀수출을 근절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다만, 로네펠트 후작과 아서 황자의 의견을 반영하여 적당한 수준의 외교적 이익을 요구했다. 사절단 역시 이 정도는 합리적인 요구라고 생각하여 그것을 받아들였다.

이후 대규모의 수사가 시작되었다. 아편 밀매단을 찾아내고 일망타진한 데에는 알폰스의 공이 컸다. 그가 많은 인력을 지원하고 이 일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지휘했기 때문이다.

그가 개입하자 치안 유지대 관할의 감옥은 아편 밀수업자들으로 북적거리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 일을 두고 그에게 크게 감탄했다.

“과연 바텐베르크 공작이야! 정말 대단도 하지.”

“어떻게 이렇게나 빠르게 밀매단을 체포할 수 있었을까요?”

“그분의 능력은 정말 천부적이야.”

그가 이렇게까지 이 일에 전력을 쏟아부은 이유는 사실 자신의 아내에 대한 팔불출 기질 때문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꿈에도 몰랐다. 그저 공작의 뛰어난 능력과 놀라운 공에 대해 떠들어 댈 뿐이었다.

한데 이 일에 대해 누구보다 놀란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온에서 온 사절들이었다.

“뭐, 벌써 아편 밀수업자들을 체포했다고? 제국에서 이 일에 그렇게나 빨리, 적극적으로 개입했단 말인가?”

사실 그들도 제국이 자신들의 요구를 탐탁지 않아 할 것을 알고 있었다. 워낙에 좋지 않은 관계였다. 그런 온이 피해를 입든 말든 제국에서 관여할 일은 아닌 것이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들이기에 한 번의 요구로는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데 지금 이 상황은 뭐란 말인가? 고작 한 번의 접견과 요청이 있었을 뿐이다.

비록 일종의 거래로서 제국 측에서 외교적 이익을 요구해 오긴 했지만 그 정도는 예상 내의 일이었다. 외교적 이익보다는 밀수출을 방치했을 때의 경제적 이익이 훨씬 크다는 것을 온의 사절들 역시 알고 있었다.

‘비록 제국을 통한 아편 밀수업자들이 생겨난 것은 제국의 책임이긴 하지만,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설 줄은 생각도 못 했어.’

사절단장이 진심으로 감탄했다.

‘오랑캐라고만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깊이 있는 문화력은 물론 아편 밀수업자를 일망타진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한 국력과 이웃 나라의 어려움을 두고 보지 않는 관대함도 가지고 있군.’

모든 일이 마무리되자 오래지 않아 사절단 역시 떠나게 되었다. 떠나는 날, 그들은 제국의 황제 앞에서 진심을 담아 머리를 숙였다.

“이번의 일은 몹시 감사했습니다. 온에서도 이 은덕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마약 밀수 같은 해악을 근절하지 못하고 방치한 잘못은 제국에 있지. 다시는 이러한 일이 없을 것이오.”

이번 사절단의 방문은 700년 제국 역사상 동방과의 외교적 접촉 중 제일 호의적이고 평화롭게 마무리되었다.

사절단이 돌아가고 몇 달이 지난 뒤의 일이지만, 온에서는 이번 일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보석과 말, 도자기와 비단을 포함한 다양한 선물을 제국 황실에 보냈다.

온과 제국 사이의 관계가 개선된 것에 대한 영향으로 교역 역시 활발해졌다. 그리고 이것은 클로에에게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차 값이 많이 내린 것이다.

“차의 원가가 많이 내렸습니다, 공작부인. 판매가는 그대로 유지할까요? 판매가를 유지한다면 수익이 크게 증가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여진이 국제 시장의 차 원가에 대한 보고서를 내밀며 말했다.

그 보고서를 읽어 본 클로에가 말했다.

“차의 값이 내리다니, 기쁜 일이네요. 저는 그만큼 판매가도 내렸으면 해요.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이 차를 마실 수 있도록이요.”

“알겠습니다, 공작부인.”

여진은 내심 감탄했다.

‘판매가를 유지한다면 큰 이익을 볼 수 있을 텐데, 그것을 포기하시다니. 이분 이상으로 차를 진심으로 아끼고 좋아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원가가 내린다고 해도 판매가를 함께 내리는 경우는 정말 드문 일이었다. 그러나 클로에는 그렇게 했다. 그녀는 당장의 경제적 이익보다 차의 대중화를 더 중요시 여기고 있었다.

비록 서민까지는 무리지만 여유 있는 사람들은 차를 맛볼 수 있을 정도로 원가가 많이 내렸다. 그리고 클로에는 이 현상을 무척 기쁘게 여겼다.

‘앞으로도 가격이 더 많이 내린다면 좋을 텐데. 원가를 내리는 방법에 대해 나도 함께 고민해 보아야겠어.’

그녀가 생각했다.

귀족의 문화는 일반 시민들에게 언제나 동경의 대상이다. 재력을 가진 평민의 경우 그들의 고귀함을 동경해 귀족의 일거수일투족을 흉내 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차 역시 다르지 않았다. 최근 귀족계에 차의 뜨거운 돌풍이 불고 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 때문에 차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에게 차의 가격이 내린다는 것은 대단히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거 들었나? 제국에서 차를 처음으로 유행시킨 가게 트리플 스위트에서 차의 가격을 전면적으로 하향 조정한다더군.”

“그게 정말인가? 안 그래도 마누라가 차를 사 달라고 했는데, 반가운 소식이야.”

“그건 그렇고 가격을 내린다니 정말 대단하지. 물가는 오르고 가계는 어려워져 가는데 이렇게 양심적으로 장사를 하는 곳이 있다니.”

“그러게나 말일세. 원가가 오르면 그걸 핑계로 판매가는 올리면서, 원가가 내리면 모르는 척하는 곳이 대부분이지 않나.”

사실 귀족들에게 판매가를 조금 내리는 것 정도는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애당초 그들은 저렴함을 기준으로 물건을 구입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클로에의 판매가를 내린다는 결정에 열광한 것은 부유한 평민을 비롯한 평민층이었다.

“그 가게의 대표가 바텐베르크 공작부인이라고 했던가? 정말 훌륭하신 분이야. 앞으로 차는 꼭 그분의 가게에서만 사야겠어.”

“공작이 아니라 공작부인께서 가게를 운영하신다고? 그거 놀랍군. 정말 보기 드문 여성이야.”

그들은 클로에의 결정에 큰 지지를 보냈다. 대부분의 중산층들은 저렴한 차를 많이 구비하고 있는 트리플 스위트를 이용했다. 이로써 트리플 스위트의 고객층은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

* * *

트리플 스위트의 2층에 위치한 클로에의 티 하우스가 완공된 것도 이 시기 즈음이었다.

뛰어난 솜씨로 우려낸 차를 마실 수 있으며, 여성들도 편안한 분위기에서 사교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인 티 하우스의 개업을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고 있었다.

마침내 티 하우스의 개업 당일.

개업을 축하해 주러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제일 가까운 친구들과 차례차례 인사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계단 아래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란의 원인이 밝혀지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세상에, 알폰스!”

클로에가 종종걸음으로 달려갔다. 계단을 걸어 올라오고 있던 알폰스는 맨 윗단에 서 있는 클로에를 끌어안았다. 한참이나 차이가 나던 두 사람의 키가 비슷해졌다.

반가운 남편을 꼬옥 마주 안아 주던 클로에가 물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오신다는 말은 하지 않으셨잖아요.”

알폰스는 그런 아내를 빤히 보았다. 그녀의 하얀 얼굴이 복숭앗빛으로 상기되어 있었다. 진녹색의 눈은 기쁨으로 반짝반짝 빛났다. 그가 픽 웃었다.

“놀라게 해 드리고 싶었기에.”

“어머?”

클로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놀라게 해 주고 싶었다고? 유머 감각이나 장난기라고는 단 한 톨도 없고,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전달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빙빙 돌리지 않고 본론만 말하는 그다.

누군가를 축하해 주고 싶다면 “축하합니다.”라고 한 마디 말하는 것으로 자신의 본분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바로 그였다.

그런데 그런 그가 그녀를 축하해 주기 위해 이런 깜짝 선물을 준비하다니.

클로에는 진심으로 기뻤다. 무뚝뚝하고 무감정한 그가 오직 그녀를 대할 때만은 많은 감정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 정말 좋았다.

깊게 감동받은 클로에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얼른 손수건으로 눈가를 찍어 내고 그녀가 말했다.

“와 주어서 정말 고마워요. 무척 기뻐요.”

알폰스는 그런 그녀를 계속해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가가 붉어지는 것과 몰래 손수건으로 눈가를 찍어 내는 것도.

그가 한 별거 아닌 일에 이렇게나 기뻐하고, 그것을 표현하는 그녀는 무엇보다 사랑스럽다. 그녀가 이렇게 기뻐해 준다면 무엇이라도 해 줄 수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계단 맨 위층에 서 있는 클로에의 등을 팔로 감싸 안아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그녀의 붉은 눈가에 한 번, 입술에 한 번 입을 맞추었다.

순간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다, 당신도 참…….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아닌 게 아니라 2층은 개업을 축하해 주기 위한 사람들로 빈틈없이 들어차 있었다. 그들 전부가 공작 부부가 하는 일을 관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고 있음은 물론이다.

클로에는 슬쩍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부끄러움을 지우기 위해 흠흠 헛기침을 하곤 자기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가 버렸다.

알폰스는 품이 허전함을 느꼈다. 아무튼, 그의 귀여운 아내는 수줍음이 많았다. 특히나 남들 앞에서의 스킨십을 너무나 부끄러워했다. 그는 그 사실이 못내 아쉬웠다.

한편 그들이 그러는 동안 귀부인들은 이런 대화를 하고 있었다.

“두 분 좀 봐요. 어쩜 저렇게 뜨거운지.”

해로즈 백작부인이 포트넘 자작부인과 로네펠트 후작부인에게 속삭였다.

“어쩜 저럴 수 있나 싶다니까요. 우리 남편은 사람들 앞에서는 손도 안 잡으려고 하는데 말이에요.”

사실 해로즈 부인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귀족들이 그랬다. 제국의 귀족들은 부부간의 연정을 드러내는 걸 아주 부끄럽고 채신머리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니까.

포트넘 부인이 킥킥거렸다.

“그러게나 말이에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세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알폰스를 발견하고 한달음에 달려 나가는 클로에의 얼굴이 얼마나 기쁨으로 반짝였는지. 그런 그녀를 안아 주는 알폰스의 얼굴엔 어느 정도의 만족감과 자상함이 묻어났는지.

“저 부부가 저렇게 되리라고 누가 생각을 했을까요?”

해로즈 부인이 말했다.

정말 그랬다. 한때 그들은 최악의 부부 관계, 특히나 클로에는 냉대받는 아내의 대명사였다. 제국에서 최고로 어울리지 않는 커플을 꼽으라면 그들만 한 커플이 또 없었다.

그랬던 그들이 이렇게나 뜨거운 애정을 과시하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어쨌든 저는 공작 부부를 보면 기분이 좋아요. 뭐랄까…… 대리만족이 된달까요. 두 분이 앞으로도 계속 사이가 좋았으면 좋겠네요. 그럴 것 같지만요.”

포트넘 부인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때였다. 클로에가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보고 귀부인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었다.

클로에의 얼굴은 삶은 토마토처럼 새빨갛게 익어 있었다. 그녀가 흠흠 헛기침을 했다.

“음…… 곧 개장식을 해야 할 것 같네요. 여진, 정오까지는 얼마나 남았나요?”

“4분입니다, 공작부인.”

“제가 딱 적당한 시기에 왔군요.”

귀부인들은 클로에의 붉은 얼굴과 눈에 다 보이는 화제 돌리기를 모르는 척해 주기로 했다. 친한 친구에 대한 의리였다.

곧 평소와 같은 무표정이지만 왠지 모르게 아쉬움이 묻어나는 얼굴의 알폰스가 다가왔다. 클로에는 여진이 건네주는 가위와, 티 하우스 입구에 둘러쳐져 있는 리본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10초 남았습니다, 공작부인.”

여진이 말했다.

“카운트다운 하겠습니다. 7, 6, 5, 4…….”

클로에가 가위의 날을 리본에 가져다 댔다. 그녀의 곁에는 알폰스가 서 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3, 2, 1.”

클로에는 가위를 든 손에 힘을 쥐었다. 서걱하는 시원한 소리와 함께 리본이 잘려 나갔다.

그와 동시에 주변에서 기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개업 축하해요!”

“축하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손에 든 찻잔을 들어 올렸다. 샴페인 잔 대신 모두에게 제공된 것인데, 물론 클로에의 아이디어였다.

포트넘 부인이 달려 나와서 클로에를 끌어안았다. 여진은 덤덤한 얼굴로 손뼉을 쳤지만 그녀의 얼굴은 숨길 수 없이 상기되어 있었다. 로네펠트 부인 역시 클로에의 곁에 바짝 붙어 서며 웃었다. 그 외의 많은 사람들이 그녀에게 몰려들었다.

클로에가 기쁜 듯이 웃었다.

“축하해 주어서 정말 고마워요. 감사합니다.”

그때,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고 있던 알폰스가 허리를 숙였다.

클로에가 상황을 인식하기도 전에 그가 입술과 입술을 겹쳤다. 두 사람 사이에서 뜨거운 살덩이와 타액이 오가게 된 것은 순간이었다.

입술이 떨어져 나간 뒤, 알폰스가 속삭였다.

“축하합니다, 부인.”

클로에는 정신적 충격에서 뒤늦게야 빠져나왔다.

“당신, 정말……!”

다시 토마토가 된 그녀가 알폰스의 어깨를 내리쳤다. 하지만 알폰스에게는 그저 귀여울 뿐이었다.

그때였다.

“미안, 클로에. 내가 좀 늦…….”

익숙하지만 그다지 반갑지는 않은 목소리가 계단 쪽에서 들려왔다.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었지…….”

몹시 떨떠름한 얼굴을 한 아서가 서 있었다. 표정을 보아 하니 아무래도 그들이 무엇을 했는지 짐작한 낌새였다.

‘정말, 창피해 죽겠어. 이러다가 우리가 키스하는 모습을 동네방네 모든 사람들이 보고 말 거야.’

클로에가 고개를 푹 숙였다. 공교롭게도 그녀를 반쯤 끌어안고 있는 알폰스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모습이 되어 버렸다. 클로에의 귓가로 알폰스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해서 클로에의 티 하우스가 개장되었다.

트리플 스위트를 처음 열었을 때에도 기뻤지만 클로에는 이 일이 뛸 듯이 기뻤다. 차 애호가 중 자신의 티 하우스를 여는 것을 꿈꾸지 않아 본 사람이 있을까?

“어머나!”

“가게가 정말 예쁘네요.”

그녀가 각별히 신경을 쓴 인테리어와 분위기에 놀라지 않는 손님이 없었다. 특히 가게의 분위기는 젊은 귀족 여성들의 감성에 완벽히 맞아떨어졌다.

티 하우스는 정말로 놀라운 공간이었다. 이제껏 제국에서 식사를 위한 공간은 있었어도 여성들의 사교와 휴식을 위한 공간은 없었다.

커피 하우스는 오직 남성들만의 공간이었고, 따라서 티 하우스를 원하던 잠재적 수요는 무척이나 많았다. 대부분의 귀족 여성들이 티 하우스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높은 굽의 구두에 지친 발을 쉬게 하고 싶은 여성, 친구와 만날 장소가 필요한 여성, 잘 우린 차를 맛보고 싶은 여성, 자신만의 시간이 필요한 여성 등이 티 하우스를 찾았다.

들어오는 순간 첫 번째로 인테리어와 분위기에 감탄한 손님들은, 자리에 앉은 뒤 다시 한 번 감탄했다.

벨벳으로 감싼 메뉴판을 열면 어느 곳에서도 맛볼 수 없는 차와 맛좋은 티 푸드들이 가득했다. 엄밀히 말해 메뉴의 수가 아주 많지는 않았지만 클로에는 그편이 좋다고 생각했다. 소수의 메뉴에 집중하고 싶기 때문이었다.

가끔 VIP 손님이 올 때면 클로에가 직접 차를 우렸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차를 우리는 것은 직원들의 몫이었다. 손님이 너무나 많기에 그녀가 모든 차를 우릴 수는 없었다.

맛이 좋고 차에 잘 어울리는 티 푸드를 제공하기 위해 파티쉐 역시 따로 고용했다.

손님들이 자리에 앉아 주문을 하면, 곧 따뜻한 차와 티 푸드가 나오곤 했다.

“어머, 귀여워라!”

“정말 예뻐요!”

고운 수색의 차, 예쁘게 데커레이션 된 티 푸드, 그리고 완벽한 티타임을 위한 준비의 마지막으로 우아하고 고상한 특별 주문 티 세트까지.

클로에는 손님들이 맛은 물론 눈으로 보는 즐거움도 충분히 즐길 수 있게끔 신경을 썼다.

그리고 클로에의 섬세한 노력은 빛을 보았다. 손님들은 이 공간에 대단히 만족했고 티 하우스는 금방 인기를 끌었다.

결과적으로, 원래도 별로 작지 않은 티 하우스는 곧 손님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녀의 의도대로 처음 티 하우스의 손님은 대부분이 여성이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티 하우스의 고객들은 깨닫게 되었다. 이 우아하고 로맨틱한 분위기의 가게는 데이트 장소로도 아주 훌륭했다.

향긋한 차와 달콤한 티 푸드와 함께하는 티타임은 연인과의 추억을 만드는 데에 아주 적격이었다.

곧 클로에의 티 하우스는 여성들의 휴식처는 물론 데이트 코스로도 각광받게 되었다. 그것이 어느 정도였냐면…….

“어머.”

“앗, 죄송합니다.”

어느 무도회에서나 흔히 일어나는 일이었다. 젊은 영식 하나가 영애의 드레스를 밟았다.

영식이 머쓱하게 말했다.

“이런, 제가 영애께 실례를 범했군요. 사과의 의미로 제가 차라도 한 잔 사겠습니다. 함께 이번에 생겼다는 티 하우스에서 차 한잔하시지 않겠습니까?”

드레스를 밟힌 영애는 그런 영식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그녀의 뒤에서 친구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녀가 웃으며 대답했다.

“좋아요.”

드레스를 실수로 밟은 척했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수도의 영식들 사이에서 새로운 유행이 생긴 것이다.

바로, 관심 있는 영애의 드레스를 실수로 밟은 척하고 티 하우스에서의 데이트를 신청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티 하우스의 운영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던 와중이었다.

바텐베르크 공작가에 한 통의 편지가 왔다. 수신인은 클로에였다.

록우드 부인이 읽어 주는 편지 내용에 클로에는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너무나 뜻밖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친정 부모님이 오신다고?”

“그렇습니다, 마님.”

편지를 보낸 사람은 클로에의 친부모였다. 그레이 백작령에서 지내던 백작 부부가 이번에 일이 있어 수도에 올라왔는데, 그 김에 딸을 보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였다.

혼자 알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클로에는 자신에게 온 편지에 대해 알폰스에게 이야기했다.

알폰스 역시 이 소식에 내심 의아해했다. 결혼한 지 어느덧 2년이 되었는데, 처가에서 연락이 온 것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는 아내가 자신의 부모님을 보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했다. 2년 만에 연락이 닿은 부모였으니 더욱 그럴 것이 틀림없었다.

알폰스, 그는 본디 부모에 대한 애틋한 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친모를 기억하지 못하고 친부를 혐오했다.

하지만, 자신의 아내는 다를 것이 분명했다. 대부분의 사람이 자신의 부모를 그리워한다는 것 정도는 머리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녀의 일이라면 무엇이든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잘되었군요. 장인 부부께서 수도에 계시는 동안에는 공작저에서 지내셔도 좋습니다.”

그가 시가를 재떨이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러나 정작 클로에의 심정은 그의 생각과 달랐다.

그럴 만도 했다. 우선 첫 번째로 그레이 백작 부부는 그녀의 부모가 아니었다. 엄밀히 말해 백작 부부는 이전의 클로에의 부모이지 지금의 클로에의 부모가 아니었다. 지금의 클로에도 물론 친정 부모에 대한 기억은 가지고 있지만, 그들을 직접 만나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당연히 부모님에 대한 정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두 번째로…… 그녀가 가지고 있는 친정 부모에 대한 기억은 별로 좋지 않았다.

이전의 클로에가 어릴 때부터 그들이 항상 입에 달고 살던 말이 있었다. ‘딸은 출가외인’이라는 말이었다.

그들은 그녀를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식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클로에의 행복보다는 시집보내서 얻을 이익에 더 관심이 많았다. 지참금과 사위의 후광으로 얻을 정치적 위세와 명예 등등.

그렇게 노력해서 결국 장녀를 공작가에 시집보냈으니, 결과적으로 그들은 큰 이익을 본 셈이다.

이런 이유로 클로에는, 솔직히 말해 그다지 친정 부모를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딱히 반대할 명분이 없어.’

친부모와 사이가 좋지 않다는 사실을 알폰스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녀는 여전히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남의 자리를 부당하게 빼앗은 것만 같고, 그 사실을 들킬까 봐 불안했다.

특히나 두려운 것은 그에게 들키는 것이었다. 이기적임을 알지만,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그의 곁에 언제까지나 있고 싶었다.

그러니 친딸이 친부모와의 만남을 거부하는 모습을 보여 그에게 의심을 사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한 클로에는 불안감을 숨기고 웃었다.

“그럼, 그렇게 편지를 쓸게요.”

백작 부부가 공작저에 도착한 것은 바로 다음 날이었다.

“아이고, 우리 딸! 정말 오랜만이구나.”

손님들을 맞이하러 현관에 나와 있던 클로에는 엉겁결에 백작부인에게 끌어안겼다.

“오랜만이구나. 정말 보고 싶었단다, 클로에.”

그레이 백작 역시 사람 좋은 얼굴로 웃으며 클로에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고 물론 클로에는 이 상황이 무척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그녀는 어렵게 웃으며 백작부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그런 그녀를 따스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던 알폰스가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장인어른. 그리고 장모님.”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공작 각하. 우리 딸과 만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을 편히 하십시오. 장인어른이 아니십니까.”

클로에는 자신의 남편이 드물게도 호의적인 기색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내의 부모라서 그런지 최대한 배려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알폰스는 조금 긴장하고 있었다. 황자나, 심지어 황제를 알현할 때에도 이렇게 긴장되지는 않았다.

당연하지만 아무리 장인어른이라고 한들 그가 특별히 잘 보여야 할 이유는 없었다. 혼인 성사 이전도 아니고 이후이니 그가 잘못 보인다고 한들 장인이 어찌할 도리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왠지 모르게 잘 보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인의 시선을 거의 신경 쓰지 않고, 자존심이 센 그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또 아내의 시선이 신경 쓰였다. 그녀의 부모를 잘 대접해야 아내가 기뻐할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알폰스는 정중한 태도로 말했다.

“이곳이 백작저라고 생각하시고 편히 지내십시오. 석찬 시간이 되면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각하.”

“말을 편히 하셔도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시다면, 알겠소. 이따 보자꾸나, 아가.”

백작 부부는 만면에 미소를 띤 채 클로에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그러고는 집사의 안내를 받아 자리를 떴다.

알폰스가 클로에를 향해 다정한 시선을 보냈다.

“식사는 부인의 관할이지만, 이번 석찬은 특별히 신경 써서 준비하라고 제가 일러두었습니다.”

“고마워요, 알폰스.”

클로에가 대답했다. 그가 특별히 신경 써 주는 것이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다. 그를 속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한데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백작 부부가 원래 저렇게 자상했던가?’

알폰스와 함께 홀을 가로지르며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의 기억 속에서 백작 부부는 언제나 냉랭했다. 그들에게 클로에는 자식이 아닌 팔아 치울 상품이었다.

‘어쩌면…… 2년 동안이나 못 봤으니 딸이 그리워진 것일 수도 있겠지.’

클로에는 적당히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알폰스가 언급했다시피 그날의 석찬은 각별히 준비한 것이 느껴졌다. 백작 부부는 무척이나 감탄하고 만족스러워했다.

“수도에 올라오신 것은 2년 전 혼인 때 이후로는 처음입니까?”

알폰스가 물었다.

백작이 대답했다.

“그렇소. 2년 전 이후로 처음이라오.”

백작부인 역시 거들었다.

“2년 전 클로에가 결혼한 뒤 백작령에 도로 내려간 뒤로는 계속 그곳에서 지냈답니다. 그래서 소식이 많이 늦곤 하지요.”

클로에가 기억하기에도 백작령은 수도에서 꽤 먼 북서쪽에 있었다.

알폰스가 말했다.

“긴 여정 동안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이번에 수도에 올라온 것은 어떤 용무 때문이십니까?”

“아, 별건 아니오.”

아까만 해도 말을 잘 하던 백작과 백작부인이 눈에 띄게 어물거리기 시작했다. 알폰스는 그들이 대답하기 어려워하는 것을 눈치채고, 화제를 돌려 주었다.

식사를 마친 뒤 그들은 응접실로 자리를 옮겼다. 환영의 의미를 담아 와인을 한 잔씩 마셨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알폰스와 클로에, 백작과 백작부인이 각기 나란히 앉았다.

와인을 마시며 한담을 나누는 동안에도 알폰스의 팔은 클로에의 허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심지어 가끔은 그녀의 등을 어루만지거나 허리를 쓰다듬거나 했다.

이건 오랜 습관 같은 것이라, 두 사람 다 조금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이상함을 느낀 것은 백작 부부 쪽이었다.

“공작께서는 제 딸아이를 많이 아껴 주시나 봅니다.”

알폰스가 백작을 돌아보았다. 백작의 얼굴에 묻어나는 감정은…… 뜻밖에도 의아함이었다.

자신의 딸과 사위의 사이좋은 모습을 보면서 왜 의아해하지?

잠깐의 의문은 가볍게 넘기고 알폰스가 대답했다.

“안사람은 제게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입니다. 이런 사람과 만나게 해 주신 장인어른과 장모님께는 늘 감사를 느끼고 있습니다.”

백작 부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들도 바텐베르크 공작의 성격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2년 전 혼인 때에는 몇 번 직접 만나기도 했고.

그들 역시 알고 있었다. 바텐베르크 공작이 얼마나 냉정하며, 무뚝뚝하고, 감정 표현에 인색한지.

2년 전 백작 부부가 만나 본 공작은 그야말로 냉혈한이었다. 뼛속까지 무관심과 오만함으로 가득 찬, 예의와 정중함을 가장한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폭군.

그랬는데, 그런 남자가 눈 한 번 깜짝하지 않고 저런 낯간지러운 말이라니?

제국 귀족들 사이에서 공개적으로 부부간의 애정을 드러내는 것은 채신머리없는 짓이다. 백작 부부 역시 같은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긴 하지만 신체 접촉은커녕 손끝 하나 닿아 있지 않았다.

백작이 흠흠 헛기침을 했다.

“그…… 그렇게나 모자란 여식을 좋게 봐주시다니 기쁘오. 어릴 적부터 유난히 아둔했던 아이라 어찌 될지 걱정했는데 이리 좋은 짝을 만나다니 이것도 복…….”

그때였다. 쾅 하는 소리가 백작의 말을 끊었다.

놀란 백작과 백작부인이 돌아보니 소리의 근원은 알폰스였다. 그가 들고 있던 와인 잔은 테이블에 소리 나게 내려놓은 것이다.

미간이 확연히 좁아진 알폰스는 그들을 향해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보통의 간담을 가진 백작 부부로서는 뒷골이 서늘해질 정도로 위압감 있는 시선이었다.

“모자라다니, 겸양이라도 그런 말씀은 마십시오. 안사람을 제 이상으로 아껴 주셔야 할 분들이 아닙니까.”

그가 말했다.

백작 부부는 그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도 하지 못한 채, 무조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암요, 물론이죠.”

“마, 말실수를 했나 보오. 공작의 말씀이 맞소.”

당황한 사람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클로에 역시 마찬가지였다. 알폰스는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느껴졌다.

‘괜히 그녀를 놀라게 했군.’

그녀를 깎아내리는 말에 순간적으로 화가 났다. 사실은, 그녀의 부모이기 때문에 최대한 화를 참은 결과가 이것이었다.

사실 생각해 보면 그들의 말이 특별히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저 정도의 말은 귀족들이 겸양을 위해 흔히 사용하는 화법이니까.

‘그렇지만 어쩐지…….’

그 사실을 알면서도, 어쩐지 불쾌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알폰스는 의식적으로 미간 주름을 풀고 표정을 정돈했다. 어쨌든 상대는 아내의 부모였다. 그는 이 귀한 손님들을 잘 대접해 주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날 밤, 마침내 자리를 파하고 침실로 돌아가며 클로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무척이나 불편했다. 그녀를 자신의 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자신의 부모가 아닌 사람들을 상대하는 일이라는 건.

‘역시 나는 남의 자리를 빼앗은 걸까.’

그들이 진짜 딸을 잃어버리는 데에 자신이 일조한 듯한 기분이 들어 마음이 편치 않았다.

다음 날이었다.

침실에서 업무를 하고 있는데, 하녀가 노크를 하고 들어왔다.

“백작부인께서 마님을 뵙고 싶다고 하십니다.”

2년 만에 만난 딸과 단둘이 있고 싶은 걸까? 클로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백작부인을 모시고 오렴.”

곧 백작부인이 침실에 나타났다. 클로에는 그녀를 침실에 딸려 있는 작은 개인 응접실로 모셨다.

하녀가 간단한 다과를 내오자 백작부인이 호들갑스러운 태도로 말했다.

“클로에, 내 딸! 2년 만이구나. 정말 오랜만이야. 이 엄마는 네가 무척 보고 싶었단다.”

그 말을 들은 클로에는 조금 의아해졌다. 그렇게나 딸이 보고 싶었다면, 왜 2년 동안 한 번도 방문은커녕 편지 한 통 보내지 않았을까?

그녀가 대답했다.

“……저도요, 어머니.”

무척 민망하고 어색했다. 연기를 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무리 좋게 생각해 보려 해도 이 백작 부부에게는 유난히 정이 가지 않았다.

“사실 있잖니, 수도에 올라온 것은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란다.”

“하고 싶으셨던 말씀이요?”

“그래. 사실은 말이다…….”

하고 싶은 말이라면 그냥 편지를 써도 됐을 텐데. 클로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차를 한 모금 마신 백작부인이 말했다.

“너도 알다시피 우리 그레이 백작가는 영세한 편이잖니. 그래서 네 아버지가 백작가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사업을 준비했는데 안타깝게도 전부 실패하고 말았단다.”

이 시점에서 클로에는 왠지 모를 불길함을 느꼈다. 백작부인이 말하고 싶은 것이라는 것은, 설마…….

그리고 설마는 역시나였다.

“……한데, 얼마 전에 네가 요즘 사업을 하고 있고 그게 뜻밖에도 잘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지 않았겠니? 그래서 말인데, 네가 네 아버지 사업 자금을 좀 대 드렸으면 좋겠구나. 만약 가능하다면, 공작님께도 말씀드려서 보태 주신다면 더 좋겠고.”

클로에는 충격을 받았다.

그러니까 결국 이거였다. 시집간 딸에게 2년 동안이나 연락이 없던 백작 부부가 갑작스레 자신들의 딸을 보러 온 까닭은, 난데없이 부모로서의 정이 생겨서가 아니었다.

단지 물주가 필요했을 뿐이다. 조건 없이 그들에게 금전적 지원을 해 줄 물주 말이다.

그런 그녀의 기분은 생각지도 못한 채 백작부인이 계속해서 떠들어댔다.

“나이 먹어서도 가문을 위해 일을 하시는 네 아버지가 안쓰럽지 않니? 한번 효도하는 셈 치고 도와드리렴. 네 사업이 잘되고 있다고 하니, 여유 자금도 좀 있지 않겠니?”

클로에는 이전의 클로에에게 강한 안타까움을 느꼈다.

물론 이전의 클로에는 착한 사람은 아니다. 소심함이 지나치다 못해 무책임하고, 인정욕이 과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많은 피해를 끼쳤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그녀의 부모가 이런 사람들이라는 것은 무척 마음이 아팠다.

클로에는 기억하고 있었다. 백작 부부는 단 한 번도 이전의 클로에에게 따스한 시선을 보내 준 적이 없었다. 그녀를 끌어안아 주거나, 그녀에게 입을 맞춰 준 적도 없었다.

백작 부부 슬하에는 딸이 하나, 아들이 하나 있었다. 딸은 클로에였고, 아들은 그녀의 동생이었다.

클로에도 한심했지만 그녀의 동생도 한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소심하고, 눈치를 보고, 타인의 인정과 애정을 갈구하는 그녀와 정반대로 동생은 안하무인의 망나니로 자라났다.

그래 봤자, 백작 부부에게 자식은 오로지 아들 하나뿐이었다. 아들은 백작가의 하나뿐인 후계자였지만 딸인 클로에는 출가외인, 시집보내서 가문에 보탬이 되게 할 밑천이었을 뿐이다.

클로에는 이전의 클로에가 가여웠다.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어릴 적부터 오로지 상품 취급, 돈줄 취급이나 받았던 그녀의 처지가 불쌍했다.

어쩌면 그녀의 성격이 그렇게 된 데에는 부모의 탓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치밀었다.

자신은 이전의 클로에가 아니었다. 그들의 무관심 속에 방치당하고 구박받았던 클로에는 그녀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클로에가 말했다.

“2년 만에 본 딸에게 하고 싶으셨던 말씀이 고작 그건가요?”

“만약 그러면 네 아버지도…… 응?”

백작부인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녀를 돌아보았다. 백작부인의 기억 속에서, 그녀의 딸 클로에가 그들 부부에게 말대꾸를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돌아본 클로에의 얼굴에는 명백한 노기가 담겨 있었다.

“크…… 클로에?”

“2년 만에 본, 결혼한 뒤 연락 한 번 없었던 딸에게 하고 싶으셨던 말이 그것뿐인가요? 만일 제가 어머니였다면 이런 말을 했을 거예요. 그동안 어떻게 지냈느냐, 혹시 힘들지는 않았느냐, 남편은 잘해 주느냐.”

클로에가 차갑게 말했다.

“2년 만에 만난 딸에게 제일 먼저 할 말이란 그런 안부가 아닌가요? 돈을 달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백작부인은 입을 떡 벌렸다. 자신의 딸이 한 말을 믿을 수가 없다는 얼굴이었다.

백작부인은 한 마디도 대답하거나 반박하지 못했다. 클로에는 한숨을 쉬었다. 과거의 클로에는 자신의 부모의 눈치 역시 어마어마하게 보았던 게 틀림없었다.

백작부인은 한껏 당황했다는 사실을 숨기지 못했다. 말문이 막힌 그녀는 한참을 더듬었다. 그러다가 겨우 이런 말을 내뱉었다.

“그, 그래서 서운했어, 우리 딸? 정말 미안하구나. 그래, 잘 지냈니? 공작님은 잘 대해 주시고?”

늦어도 한참을 늦었다.

이런 옆구리 찔러 절 받기 같은 안부 인사로 기분이 좋아질 리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나빠지기만 했다. 클로에는 골이 지끈지끈 아팠다.

더 이상 백작부인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클로에가 냉정하게 말했다.

“네, 저는 잘 지내요. 공작님도 잘 대해 주신답니다. 하실 말씀 다 하셨으면, 이만 돌아가 주셨으면 해요. 저는 하던 일을 마저 해야 해서요.”

“클로에, 너 정말……!”

백작부인은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클로에의 태도가 워낙 단호해서 어찌하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그녀가 납득을 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방에서 떠날 때까지도 클로에 쪽을 미련 남는 눈으로 힐끔거렸던 것이다.

‘아무래도…… 다음 기회를 기약하는 것 같은 태도인데.’

클로에가 유쾌하지 않은 기분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로선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내일 걱정은 내일 하는 것이 좋았다. 만일 백작부인이 금전을 요구하러 다시 온다면, 대책은 그때 생각해도 늦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클로에는 다시 자신의 일로 돌아갔다. 곧 철필이 종이 긁는 사각거리는 소리가 그녀의 침실에 가득 찼다.

그리고 클로에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백작부인은 다시 한 번 그녀에게 찾아왔다.

다만,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었다.

백작부인이 처음으로 클로에를 찾아온 다음 날이었다.

어쩐지 요 며칠 동안 일이 몰렸다. 며칠 동안 서류에 코를 박고 있던 클로에도 이제 슬슬 답답해졌다.

‘바깥 공기가 필요해.’

그렇게 생각한 클로에는 정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이제는 겨울이 지나 봄이 무르익는 계절이었다. 산책을 하기에 딱 좋은 날씨였다.

시녀인 록우드 부인과 전속 하녀들이 그녀를 따라나서려고 했지만 전부 물렸다. 클로에는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는 편이었다. 바쁜 일에 쫓기다가 머리를 비우기 위해 하는 산책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정원사가 정성스레 꾸며 놓는 정원은 봄을 맞아 한껏 사랑스러움을 뽐내고 있었다. 클로에는 봄꽃의 향기를 맘껏 즐기며 홀로 거닐었다.

그녀가 정원의 정중앙에 있는 분수대에 다다랐을 즈음이었다. 어디선가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클로에! 여기 있었구나.”

그다지 반갑지 않은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리자,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는 백작부인이 서 있었다.

“네 시녀에게 물으니 네가 정원에 있다고 하지 않겠니? 한참을 찾았는데 이제야 겨우 만났구나.”

문제라면, 백작 역시 함께였다는 점이다.

산뜻한 봄바람에 들떠 있던 클로에의 얼굴이 가라앉았다.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이신가요?”

“무슨 일이냐니, 친딸을 만나는 데에도 이유가 필요하느냐?”

백작이 허허 웃으며 말했다. 그는 클로에의 손을 덥석 잡았다.

“우리 딸, 지난 2년이나 연락이 없었지. 많이 보고 싶었단다. 어떻게 지냈는지도 궁금했고. 어때, 몸은 건강하느냐? 별일은 없었지?”

클로에는 무덤덤한 시선으로 백작에게 붙잡힌 손을 내려다보았다.

꽤 다정한 말과 손길이었지만 별 감흥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들이 무엇을 원해서 그녀에게 이러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담담하게 말했다.

“네, 저는 건강해요. 별일도 없었고요.”

“그거 다행이구나. 우리는 우리 하나밖에 없는 딸이 어디 아프기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했지! 뭐, 그건 그렇고 말이다. 어제 네 엄마를 만났다면서?”

클로에가 백작의 뒤에 서 있는 백작부인을 힐끔 보았다. 그녀가 대답했다.

“네.”

“흠흠, 그래. 네 엄마가 다 이야기해 주었겠지만 요새 우리 가문이 많이 위태롭단다. 나는 가장으로서 가문의 안위를 위해 물심양면 노력하고 있기는 하지만, 잘 안 됐어. 그래서 말이다. 얼마 전에 네가 사업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단다.”

그제야 클로에는 깨달았다. 백작 부부가 방문한 첫날, 석찬 시간에 백작부인이 말했던 ‘백작령에 있느라 소식이 늦었다’는 말의 진의를.

그들이 클로에를 찾아온 것은 그녀의 사업에 대한 소식을 뒤늦게 들어서였다. 만일 그들이 그 소식을 듣지 못했더라면 그들은 영영 자신들의 하나밖에 없는 딸을 찾지 않았을 것이다.

“여자인데 사업주라니 대단하다고 생각했단다. 그런데 말이다, 사업을 하고 있다면 어디 묵혀 둔 비자금이라도 있지 않겠니? 네 가문인 그레이 백작가를 위해 네가 좀 도와주는 것이 어떻겠느냐?”

네 가문이라니? 클로에는 기가 찼다.

그레이 백작은 딸은 출가외인이라면서 백작가의 일원 취급도 해 주지 않았다. 가문 행사에 끼워 주지 않았던 것은 당연했다. 동생은 유학까지 보내 줄 때, 그녀는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했다. 여자가 교육을 받아 봤자 시집가는 데에는 하등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랬던 그의 입에서 ‘네 가문인 그레이 백작가’라는 말이 나오니 그만큼이나 어울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너는 우리 딸 아니냐? 하나밖에 없는 딸 말이다. 우린 네 부모야. 넌 우리의 말을 따라야만 할 의무가 있어.”

클로에는 저절로 얼굴이 굳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백작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냈다. 그녀가 차분히 말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네요. 딸은 출가외인이라 백작가의 사람이 아니라고 제가 3살이었을 때부터 귀에 인이 박이도록 말씀하신 분이 바로 아버지 아니었던가요? 저는 어릴 적부터 모든 가문 행사에서 배제당했고, 가문으로부터 최소한의 지원도 받지 못했어요. 공작가에 시집온 뒤로는 지지는커녕 편지 한 통 받아 보질 못했죠.”

클로에가 냉정하게 말했다.

“아버지, 어머니의 교육에 따라 출가외인인 저는 제가 백작가의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는 바텐베르크 공작가의 사람이에요.”

“뭐, 뭐라고?”

백작은 한눈에 봐도 화가 난 것 같았다. 그것도 아주 많이.

백작은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클로에를 향해 삿대질했다. 매우 무례한 태도였다.

“아니, 너! 대체 어쩌다가 그렇게 불손해진 거냐? 공작가가 너를 아주 망쳐 놨구나! 예전의 너는 이렇지 않았는데!”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과거의 클로에는 단 한 번도 부모의 말에 토를 달거나 말대꾸를 하지 않았으니까.

부모가 호통을 치거나 무언가를 요구하면 “네, 네.” 하는 대답과 함께 그저 따를 뿐이었다.

클로에는 한 치도 져 주지 않고 단호한 얼굴로 백작을 향해 말했다.

“네, 맞아요. 과거의 저는 이렇지 않았죠. 언제나 아버지와 어머니의 눈치를 봤고 저 자신의 자아란 없었어요. 하지만 이제는 달라요. 지금의 저는 클로에 그레이가 아니라, 클로에 바텐베르크니까요.”

“이 자식!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냐? 하나 있는 딸이라는 게 이 모양이라니……!”

“말을 조심하세요, 그레이 백작!”

클로에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저는 바텐베르크 공작부인입니다. 그에 걸맞은 예의와 존중을 갖추도록 하세요!”

“이, 이, 이 녀석이……!”

백작의 잘 기른 콧수염이 춤을 추듯 씰룩거렸다. 눈 깜짝할 새에, 그가 지팡이를 쥔 손을 치켜들었다.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무리 아버지라고 해도 그렇지, 공작부인을 향해 폭력을 행사하려 하다니. 그것도 그 공작부인의 집에서.

클로에의 결혼 전, 그레이 백작은 종종 그랬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딸이고 아내고 손찌검을 하곤 했다.

그는 아직도 클로에가 자신의 딸인 줄 아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부당한 대우를 당해도 찍소리도 할 줄 모르는 유약하고 바보 같은 그의 딸.

도망치기에는 너무나 짧은 순간이었다. 이후 죗값을 치르게 한다손 쳐도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생각한 클로에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였다.

“악…… 아악!”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클로에 그녀의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분명…… 그레이 백작의 것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클로에가 눈을 떴다.

눈앞의 상황은 생각지도 못한 풍경이었다. 조금 전만 해도 지팡이를 휘두르려 하던 백작은 자신의 팔을 붙들고 풀밭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그런 그의 뒤에서는 백작부인이 새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곁에…… 알폰스가 있었다.

“알폰스!”

클로에가 소리쳤다.

보지는 못했지만 어떤 상황이 일어난 건지 짐작이 갔다. 때마침 지나가던 알폰스가 백작이 하는 것을 보고 그를 제압해 놓은 것이 분명했다.

알폰스는 백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차가운 불과 같았다. 서리처럼 차가운 시선이 불꽃을 튀겼다.

그가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을 클로에는 처음 보았다. 당연했다. 그녀의 여린 마음에 충격을 줄까 봐 알폰스는 그녀의 앞에서 화를 내는 것을 극히 자제했으니까.

알폰스는, 평소의 단정하고 귀족적인 행동거지는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우악스러운 손길로 백작의 멱살을 쥐었다. 그가 멱살을 거칠게 들어 올리자 목이 졸리는지 백작이 꺽꺽거렸다.

“내가 사람을 잘못 봤군.”

그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내의 아버지인 줄 알았는데, 설마 밟아 죽여도 시원찮을 버러지였을 줄이야.”

“크헉…… 컥! 가, 각하…… 컥!”

백작이 퍼렇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알폰스는 방금 자신의 눈앞에 펼쳐졌던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건드릴 곳도 없을 정도로 가녀린 자신의 아내에게 감히 폭력을 휘두르려고 했다. 저 더러운 버러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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