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장
오히려 진짜 바쁜 쪽은 알폰스임이 분명하다고 클로에는 생각했다. 클로에는 함께 일하는 사람이라도 있지, 그는 모든 일을 혼자서 하니까 더 그랬다.
어쨌든 그랬기에 자정이 가까워지는 이 시간에도 클로에는 견딜 만했다.
클로에는 자신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알폰스가 팔로 허리를 감아오는 것을 느꼈다. 소중한 유리 세공품을 다루듯 다정한 손길이었다.
알폰스는 오로지 클로에만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흰 얼굴에, 녹색 눈동자에 모닥불이 비쳐서 반짝거리는 것이 보기 좋았다.
어쩌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사람을 만나게 되었나. 자신이 떠올렸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감상적인 생각이 머릿속에서 일렁였다.
열 살의 그때부터 이제껏 내내 그의 등에는 아버지의 망령이 붙어 있었다. 친부가 남긴 유산인 벽장의 검은 그림자는 계속 그의 곁에 있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다. 어떠한 방법으로도 떨쳐낼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그것들은 그녀의 앞에서 옅어졌다. 그녀의 곁에서는 힘을 잃었다.
한없이 여리고 무르기만 한 여자인데. 벌레 한 마리 죽이지 못할 정도로 연약한 여자인데, 대체 그녀의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 건지.
그녀를 만나기 전 그는 자신을 과신했다. 오만한 그는 자신보다 강인한 마음을 가진 자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이 아니었다. 그라면 결코 하지 못했을 일도 너무나 간단하게 해내고 마는, 영원히 나갈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벽장 밖으로 그를 아무렇지도 않게 끌어내고야 마는, 이 여성이야말로 진정으로 강인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과분한 복을 만났다.’
이런 사람을 만났다는 것은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행운이다.
어깨 아래로 구불구불 떨어지는 클로에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겨 주던 알폰스는 충동적으로 그녀의 몸을 끌어안았다. 좋은 향기가 나는 그녀의 머리카락에 코를 박고 두 팔로 그녀를 단단히 가두었다. 클로에가 까르르 웃었다.
“아이참. 답답해요.”
바둥거리던 그녀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알폰스는 허전해진 품에 아쉬움을 느끼면서 그녀를 보았다. 클로에가 고개를 기울이며 생긋 웃었다.
“아직 자정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았으니까…… 한잔할래요? 잠도 깨울 겸.”
‘한잔하자’라는 말은 보통 술을 마시자는 뜻으로 쓰이지만 두 사람 사이에서는 차를 마시자는 뜻으로 쓰였다.
알폰스는 옅은 미소를 얼굴에 띄운 채 고개를 끄덕였다.
클로에가 기쁜 듯이 말했다.
“오늘을 위해서 제가 준비한 차가 있어요. 아마 마음에 드실 거예요.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그러더니 몸을 돌려 차 우리는 공간을 향해 종종걸음으로 걸어갔다. 알폰스는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뒷모습을 계속 지켜보았다.
잠시 후 클로에가 돌아왔다. 그녀가 가지고 온 것은 제국풍 다구가 아닌 동방풍의 다구였다.
혼자서 시가를 피우고 있던 알폰스는 그것을 얼른 재떨이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클로에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그녀가 들고 오던 쟁반을 대신 들어 주었다.
그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연약한 클로에가 들기에는 힘들 것 같았다. (물론 그만의 생각이었다. 아무리 클로에가 허약하다고 해도 찻주전자 하나 못 들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쟁반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그가 타박했다.
“이런 것은 사용인에게 시키시면 되지 않습니까.”
클로에가 민망하다는 듯 웃었다.
“밤이 늦어서, 하녀를 부르기가 미안해서요…….”
공작부인씩이나 되어서, 고작 밤이 늦어 하녀를 부르기가 미안했다고? 하여간에 저렇게 물러서야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는지.
이런 그녀를 지킬 사람은 세상에 자신밖에 없다고 알폰스는 생각했다.
그들은 다시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클로에가 말했다.
“이번 차는 제가 블렌딩 한 거예요. 내년 한 해를 잘 보내자는 의미에서, 내년을 콘셉트로 만들어 봤어요.”
알폰스가 클로에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내년’을 콘셉트로 차를 블렌딩했다고? 특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해’를 콘셉트로 만든 차 같은 것은 들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내년의 어떤 부분을 표현하셨습니까?”
클로에의 눈썹이 살짝 찡그려졌다. 무어라고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 자신의 입술을 꾹꾹 누르던 그녀가 설명했다.
“음…… 동방에서는 말이에요, 일 년마다 그해의 동물이 있어요. 올해는 닭의 해, 작년은 원숭이의 해, 이런 식으로요. 이런 동물은 12종류가 있어서 12년마다 같은 동물이 돌아오곤 하는데, 이걸 12간지라고 해요.”
클로에가 말을 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내년은 1766년이니까, 개의 해거든요. 그래서 그걸 콘셉트로 삼아 봤어요.”
실제로 클로에의 전생에서 차 브랜드들은 매해의 연초마다 해당 해의 12간지를 콘셉트로 한 한정 차를 출시하곤 했다. 이번에 클로에가 해 본 블렌딩도 그것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었다.
설명하는 클로에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던 알폰스는 이렇게 내뱉었다.
“부인께서는 동방의 문화를 잘 아시는 것 같습니다.”
클로에는 뜨끔했다. 그야 물론 클로에의 전생 때문에 그랬다. 하지만 평범한 제국의 귀족 여성이 동방에 대해 지나치게 잘 아는 것은 특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클로에는 여전히 자신이 부정한 방법으로 새 삶을 시작했다는 죄책감을 지우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알폰스가 자신의 이상한 점을 눈치챌까 봐 두렵기도 했다.
그녀가 두 손을 내저으며 변명했다.
“아, 어릴 때 조금 흥미가 있었어서, 동방에 대한 책을 많이 읽었거든요……. 그뿐이에요.”
“그렇습니까.”
다행히도 알폰스는 그녀의 말을 믿는 것 같았다. 클로에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럼, 따라드릴게요.”
화제를 돌리기 위해 클로에가 말했다. 그녀는 다관을 들어 올려 알폰스의 손잡이 없는 잔에 차를 따라 내었다.
알폰스가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한데…… 뭔가 이상했다. 이젠 제법 그녀를 따라서 다양한 차를 마셔 봤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처음 보는 수색이었다.
동방의 다구를 가져왔으니 동방의 차일 것이라고 생각하긴 했다. 그렇다면 녹차인가 했는데 녹차라기에는 찻물은 확연한 갈색의 빛을 띠었다.
그렇다고 홍차라고 하기에는, 홍차는 갈색을 띠는 오렌지빛에 가까운데 이 찻물에는 붉은 기가 거의 없었다.
그가 다시 클로에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그의 궁금증을 예상하기라도 했다는 양 클로에가 뿌듯하게 웃었다.
“처음 보셨죠? 이건 호지차라는 거예요.”
“호지차……?”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호지차는 녹차의 일종이에요. 온과 청의 바다 건너 있는 섬나라에서 마시는 차인데, 특이하게도 녹차 잎을 불에 볶아서 만들어요.”
“찻잎을…… 불에 볶는단 말입니까?”
알폰스가 그녀의 말을 되풀이했다. 그만큼이나 호지차의 제조법은 특이했다.
상대의 그런 반응이 만족스러웠는지 클로에가 뿌듯한 듯한 얼굴을 했다.
“네. 그렇게 하면 녹차 특유의 맛과 향은 사라지지만…… 대신 호지차 특유의 독특한 풍미가 생기죠. 아주 구수하고, 쓰거나 떫은맛이 거의 없어요. 곡식 차와도 비슷한 맛이랄까요.”
그러더니 클로에는 검지를 하나 치켜들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에요. 블렌딩 했다고 했잖아요? 호지차에 무언가를 더 넣었어요. 그게 무엇인지 맞혀 보세요.”
클로에의 장난기 어린 얼굴에 알폰스가 따라 픽 웃었다. 하여간에, 남의 유치한 놀이에 어울려 준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그녀와 하는 일은 무엇이든 예외가 된다.
그가 말했다.
“맞히면?”
“네?”
“맞힌다면 상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클로에가 기쁜 듯이 손뼉을 한 번 쳤다.
“아, 그거 재미있네요. 그럼, 상은…… 소원 들어주기로 할까요?”
소원 들어주기라. 그게 얼마나 위험한 건지 알고 저런 말을 하는 걸까. 뭣 모르고 즐거워하는 클로에의 모습이 하룻강아지처럼 보여서 알폰스의 입꼬리가 가볍게 호선을 그렸다.
그런 그의 검은 속내는 모른 채 클로에가 즐거운 듯 말했다.
“힌트, 제가 넣은 것은 두 가지예요. 자, 그럼 얼른 들어 보세요. 이러다 식겠어요.”
그 말에 알폰스가 찻잔을 들어 올려 입에 대었다.
과연, 녹차 특유의 풋풋함이나 산뜻함 같은 것은 온데간데없었다. 오히려 약간의 탄 맛이 섞인 푸근하고 구수한 맛이 혀를 휘감았다. 설명을 듣지 않았다면 녹차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개란 이런 이미지인가.’
알폰스의 머릿속의 개는 도베르만이나 셰퍼드처럼 강건하고 늠름한 사냥개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녀가 생각하고 있던 것은 그게 아닌 것 같다. 차라리…… 수더분하고 수수한 종류의 개라고나 할까.
이렇게 푸근한 느낌의 개라면 틀림없이 사냥개와 같은 이미지는 아닐 것이다. 날렵하고 집요하고 주인에게만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사냥개와는 정반대로, 순하고 정이 많고, 누구하고나 두루두루 잘 지내는…….
‘조금…… 그녀와 닮았을지도.’
거기까지 생각하니까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차를 마시던 알폰스가 난데없이 피식 웃고 있으니 클로에는 깜짝 놀랐다.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웃으세요? 이상해요?”
“아, 아닙니다. 맛이 독창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클로에를 안심시킨 알폰스는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녀가 생각한 개의 이미지는 느꼈으니, 이제는 퀴즈를 풀 차례였다.
소원이 걸린 퀴즈의 정답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의 그리 예민하지 않은, 니코틴에 절은 혀로도 쉽게 느낄 수 있었다.
코를 살짝 찌르는 향신료의 향. 혀에 와 닿는 매콤한 맛. 이것이라면 분명히…….
“계피와…… 생강입니까.”
알폰스의 나직한 말에 클로에의 얼굴이 반짝 빛났다. 정말로 기쁜 듯한 기색을 띠며 그녀가 소리쳤다.
“맞았어요! 어떻게 아셨어요?”
어떻게냐니, 차에서 계피와 생강의 향이 뚜렷하게 나서 모르기가 오히려 더 어려웠다. 그 사실도 모르고 마냥 기뻐하는 클로에가 귀여워 알폰스의 눈가가 미미하게 구부러졌다.
“말린 계피와 생강을 조금 다져서 넣었어요. 향신료의 맛이 지나치게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게 만드느라, 하루 만에 일 년 먹을 치 생강 맛을 다 본 것 같아요.”
“고생하셨겠습니다.”
“그럼요. 그 냄새를 지우느라고 양치질을 얼마나 했는데요.”
그녀가 귀엽게 엄살을 피웠다. 이 역시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그녀가 보이지 않는 모습이다. 알폰스는 가슴 속을 퍼져 나가는 흡족함을 느꼈다.
차를 마시고 있자니 어느새 그들이 기다리던 시간도 다가왔다.
“쉿.”
클로에는 잡담을 하느라고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그래서 그녀의 입술 앞에 검지가 들이 대어졌을 때 그녀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시선이 와 닿자 알폰스가 눈짓을 했다. 그는 티룸 벽면의 괘종시계를 가리키고 있었다.
11시 58분. 어느샌가 자정으로부터 2분도 채 남지 않은 시간이었다.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아마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이었을 것이다.
클로에는 괜히 숨을 죽이며 긴장했다. 그녀가 어깨를 감싸고 있던 숄을 추스르며 남편에게 바짝 붙어 앉았다.
전생에서는 한 번도 밤을 새워 신년을 기다려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어째서 오늘은 이렇게나 기다려지고 떨리는지.
그리고 오래지 않아.
뎅― 뎅― 뎅― 뎅― 뎅― 뎅― 뎅― 뎅― 뎅― 뎅― 뎅― 뎅―.
분침과 시침이 째깍 하고 움직였다. 자정을 알리는 열두 번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숨죽이고 있던 클로에의 긴장이 탁 풀렸다.
아마 지금 이 시간, 제국 수도의 어느 곳에서는 수백 명의 귀족들이 모여 신년회를 즐기고 있을 것이었다. 다 함께 큰 소리로 신년을 향한 카운트다운을 했을 것이었다. 셋, 둘, 하나! 소리친 다음에는 모두가 웃음을 터뜨리며 이렇게 말하고 있겠지.
“새해 축하해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행복하세요!”
그런 시끌벅적한 신년은 아니다. 많은 친구들에게 둘러싸여서 맞이하는 신년도, 하인들이 부지런히 날라주는 음료와 맛있는 핑거푸드, 화려한 파티와 함께하는 신년도 아니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나 적막하고 고요한, 향긋한 차향이 피어오르는 작은 공간에서 단둘이 맞이하는 신년이 클로에, 그녀에게는…….
이렇게나 벅차고 가슴 울렁이도록 기쁘게 느껴지는지…….
새해가 시작되었다. 작년의 새해에는 생각도 하지 못했던 장소에서, 생각도 하지 못했던 사람과 함께 또 다른 새해를 맞이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클로에는 곁에 앉은 사람을 돌아보았다. 앉은키가 자신보다 크기에, 조금 올려다봐야만 하는 그의 얼굴에는 한없이 다정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는 말없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린 뒤, 그녀의 이마에 입 맞추었다. 쪽 하는 사랑스러운 소리와 함께 이마 가득 온기가 퍼져 나갔다. 그 사실이 부끄럽지만 기분이 좋았다.
클로에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새해 자정을 기다려 본 적이 없었다. 어릴 때는 잠을 자느라 바빴고 어른이 되어서는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는 것이 싫기만 했다.
그런데 어째서 오늘은 새로 다가올 한 해가 이토록 기쁘게, 신기하게, 심지어는 경이롭게까지 느껴지는지…… 그녀는 어쩐지 알 것 같았다.
그와 함께 시작하는 한 해였기 때문이었다. 또다시 주어진 이 한 해의 시간을 그와 함께 가득 채워 나갈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런 마음을 담아, 클로에가 웃으며 말했다.
“올 한 해에도 잘 부탁해요, 알폰스.”
알폰스는 말없이 그런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이렇게 사랑스러운 사람을 만나게 되었을까. 그녀와 한 해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것에 태어나서 한 번도 기도해 본 적 없는 존재에게 감사했다.
무어라고 대답을 해 주고 싶었다. 저도 잘 부탁한다든가, 작년 한 해도 감사했다든가, 그런 말들.
하지만 어떤 말로도 이 벅찬 감정을 담을 수 없었다. 그래서 알폰스는 말없이 그녀를 보았다. 한없이 사랑스러운 듯한 눈빛이었다.
다행히도, 클로에는 눈치가 좋은 편이었다. 부끄러운 듯 주저하던 그녀는 붉어진 뺨으로 눈을 감았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런 그녀의 입술 위로 입술이 포개어졌다. 숨결과 숨결이 얽히고 타액이 두 사람 사이를 오갔다.
말보다 더 많은 감정을 실은 입맞춤이 끝난 뒤, 클로에가 푸스스 웃었다.
이런 그녀의 모습은 뜻밖이었다. 그녀는 수줍음을 많이 타고, 키스를 하고 나면 으레 부끄러워하지 웃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알폰스가 물었다.
“왜 웃으시는 겁니까?”
클로에의 웃음은 점점 커져서 종래에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는 모양새가 되었다. 깔깔 웃던 그녀가 상기된 얼굴로 마침내 말했다.
“알폰스한테서…… 생강 맛 나요. 계피랑…….”
알폰스는 충격을 받았다. 이런.
평소의 그라면 죽어도 하지 않을 실수였다. 입맞춤 같은 것을 하기 전에 무슨 일이 있어도 양치질을 하고 왔을 것이다. 아니면 최소한 민트와 레몬그라스를 혼합한 구취제거용 환약을 먹거나. 그러기 전에는 목에 칼이 들어오더라도 입맞춤을 하지 않을 사람이 바로 그였다.
그녀에게 지나치게 취해 있었다. 그녀의 견디지 못할 사랑스러움에 취해 인생에 다시없을 실수를 하고 만 것이다.
그렇게나 깔끔하고, 단정하고, 귀족적인 알폰스 바텐베르크에게서…… 생강 맛과 계피 맛이라니?
알폰스는 내심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으나 티를 내지 않았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눈가에 눈물이 맺힌 클로에의 이마에 다시 한 번 입 맞췄다. 그리고는 잠시 어디엔가 다녀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양치질을 하러 간 것이었다.
양치질을 하고 겸사겸사 매무새도 정돈하고 돌아온 알폰스는 클로에의 여전히 장난기 어린 얼굴과 마주해야 했다. 클로에가 생글생글 웃으며 물었다.
“양치질 잘 하고 오셨어요?”
알폰스는 그런 아내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보다가, 그녀의 뺨을 가볍게 꼬집었다.
“아야.”
클로에가 눈을 흘기자 그제야 그가 픽 웃었다. 그리고는 그녀를 가볍게 끌어당겨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그녀의 아랫입술을 핥아 올리고 입술로 가볍게 물었다. 클로에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무엇을 위해 양치질을 하고 온 것이겠는가.
아까보다 긴 입맞춤이 끝나고, 클로에가 달뜬 숨을 할딱일 때, 그가 귓가에 속삭였다.
“아까의 소원, 지금 사용해도 되겠습니까.”
“소……원이요?”
“예.”
다음 순간, 클로에는 무언가를 직감했다.
“부인과 새해의 일출을 보고 싶습니다.”
자신이 오늘 밤 단 한숨도 잘 수 없으리라는 예감을.
클로에는 자신을 무릎 위에 앉힌 알폰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너무나 담담하고 음흉한 속내라곤 한 톨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클로에는 뭣도 모르고 소원 따위를 입에 담은 신중하지 못했던 아까의 자신을 후회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소원 같은 것이 없었더라도 그가 이렇게 나오지 않았을 것 같지가 않았다.
클로에는 허락의 뜻으로, 달아오른 얼굴을 그의 목덜미에 묻었다. 낮게 울리는 웃음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가슴이 주체할 수 없이 뛰었다.
* * *
“아, 아야…….”
“괜찮으세요, 마님?”
“정말 죄송해요, 마님. 제가 잘못 건드렸나 봐요.”
클로에는 전속 하녀 니나를 향해 애써 웃어 보였다. 괜찮은 척하며 그녀가 말했다.
“아니, 난 괜찮단다. 너무 염려하지 말렴.”
“하지만…….”
니나는 우물쭈물거렸으나 주인이신 마님께서 저렇게 말씀하시는데 어찌할 방법도 없었다.
결국 니나는 계속해서 하던 일을 했다. 저택 상주 의사 샨탈이 주고 간 약초로 클로에의 허리를 온찜질 하는 일이었다.
클로에는 하녀들 몰래 한숨을 쉬었다.
신년, 새해부터 허리가 아팠다. 그것도 매우 많이. 이게 대체 무엇을 뜻하는 걸까.
그야 당연히 남편이 지나치게 힘을 썼다는 것이다.
‘정말이지, 해가 뜰 때까지는 무리라고 말했는데…….’
결국 무리라고 생각했던 새해의 일출을 보고야 말았으니 그의 압도적인 체력에 감탄해야 하는 걸까, 원망해야 하는 걸까.
사실 방금 다녀간 의사 샨탈은 클로에에게 오늘은 푹 쉴 것을 권했다. 몸이 지나친 노동(?)으로 무리했으니 휴식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새해 정초부터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누워 보내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평소 부지런히 사는 편이었던 그녀에게는 몹시 좀이 쑤시는 일이었다.
게다가 할 일도 있고, 해서 클로에는 얼른 찜질을 해서 급한 불을 끈 뒤 업무를 보러 갈 생각이었다.
‘아무튼…… 이게 다 알폰스 때문이야.’
속으로 혼자 투덜거려 보아도, 정작 문제의 원흉은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클로에는 아마 그가 일을 하러 갔겠거니 했다. 그 역시 바쁜 것은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어머, 공작 각하!”
“각하!”
갑자기 나타난 사람의 존안에 클로에의 허리를 마사지해 주던 하녀들이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약초의 녹색 풀물이 손톱 밑까지 든 채였다.
“알폰스!”
클로에 역시 깜짝 놀랐지만 그녀는 일어날 수가 없었다. 허리에 약초를 얹고 있기 때문이었다.
“위문차 들렀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도 한없이 담담한 얼굴을 한 알폰스가 말했다.
그 말을 들은 클로에는 황당해졌다.
위문차 들렀다고? 나를 이렇게 만들어 놓은 당사자가 누군데?
하지만 그것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녀는 허리 찜질을 하느라 드레스를 벗고 속치마만 입고 있는 상태였고, 그마저 윗도리는 젖혀져 상체를 드러낸 상태였다. 게다가 허리에는 녹색의 풀물이 들어 있을 것이었다.
이런 모습을 그에게 드러내는 것은 몹시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젖힌 윗도리를 끌어올렸다. 양 뺨이 뜨끈뜨끈하게 달아올랐다.
하녀들과 클로에가 하던 일을 멈추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것 같자, 알폰스가 물었다.
“제가 있는 게 불편하십니까?”
“음, 그런 건 아니에요. 단지…….”
“단지?”
클로에는 하녀들 쪽을 슬쩍 살폈다. 그들에게는 언제나 어른스럽고 멋진 주인마님으로 보이고 싶은 것이 그녀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그래서 하녀들이 보는 눈앞에서는 약한 모습을 보이기가 싫었다.
그녀가 하녀들 눈치를 보는 것을 눈치챈 알폰스가 말했다.
“너희들은 잠시 나가 있어라.”
“아, 알겠습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하녀들이 예를 갖춰 인사하고는 도망치듯 침실에서 빠져나갔다.
그런 뒤에 알폰스가 클로에에게 눈짓을 했다. 하던 말을 마저 하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클로에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판을 깔아 주니까 오히려 더 민망해졌다. 별 이야기도 아닌데.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단지…… 부끄러워서요.”
그녀는 이불을 끌어당겨 상체를 가리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허리 위에 아직도 약초가 얹어져 있었다.
그런데 알폰스가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잠시 멈칫한 그가 물었다.
“어째서입니까?”
“네? 어째서냐고요?”
클로에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무리 그가 감정에 둔감하다지만 이건 좀 심하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뻔히 민망한 꼴을 하고 있는데 왜 부끄럽냐니?
“그야……. 부, 부끄러운 꼴을 하고 있으니까요.”
“부끄러운…… 모습이라고 하셨습니까?”
알폰스가 클로에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마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 내리는 듯한 그의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그것이 부끄러워, 클로에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말았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그에게선 말이 없었다. 그것이 의아해진 클로에는 다시 두 손을 내리고 그를 흘끗 보았다.
한데, 뜻밖에도…… 그는 의아한 듯한 기색을 하고 있었다. 마치…… 대체 어디가 부끄러운 꼴인지 조금도 모르겠다는 것처럼.
“제가 보기에는…….”
그가 이쪽을 향해 상체를 기울이며 말했다.
“아름다우시기만 합니다.”
세상에, 이 사람 미친 거 아냐?
옷도 제대로 안 입고 속치마만 입고 있는데 그마저 제대로 입은 건 아니고, 허리에는 풀물이 든 꼴이 아름답다고? 게다가 그런 부끄러운 말을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하다니?
클로에는 그제야 깨달았다. 상대의 눈에 씌어 있는 콩깍지는…… 평범한 수준이 아니었다. 아마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대왕 콩깍지가 씌어 있는 게 틀림없었다.
클로에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금방이라도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그녀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두 팔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
“당신, 정말……! 어떻게 그런 말을 입에 침도 안 바르고 해요?”
그녀가 웅얼거렸다. 귓가에 알폰스 특유의 낮게 울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저는 사실만 말합니다.”
“아, 정말……. 어련하시겠어요!”
부끄러워하는 클로에를 한없이 귀엽다는 듯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던 알폰스는, 뒤늦게 그녀의 허리 위에 얹어져 있는 강보에 싸인 약초를 발견했다.
“그건 그렇고…… 허리는 많이 불편하십니까?”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도 늦게 뜨는 한겨울에 일출을 볼 때까지 괴롭혀 댄 사람이 누군데. 그녀가 토라진 듯이 말했다.
“네, 많이 불편해요.”
‘토라진 모습도 귀엽군.’
그렇게 생각한 알폰스가 픽 웃었다.
“제가 주물러 드려도 되겠습니까?”
“네?”
뜻밖의 말이었다. 지금 제대로 들은 것이 맞단 말인가? 세상에, 그 알폰스 바텐베르크 공작이 친히 안마를 해 주시겠다고?
글씨 쓰는 것과 식사하는 것 말고는 손을 써 본 적도 없을 것 같은, 과연 평생 손에 물 한 방울 묻혀 본 적이 있을까 싶은 그 공작님께서?
“저, 정말요? 안마를, 알폰스가요……? 할 줄 아세요?”
저도 모르게 더듬거리던 클로에는 자신이 한 말에 자신이 깜짝 놀랐다. 그녀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니, 당신의 능력을 의심한 것은 아니고요…….”
알폰스가 코웃음을 쳤다.
“해 본 적은 없지만, 잘할 겁니다.”
대체 저런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사실 조금 부럽기도 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어쨌든 나쁠 것은 없었다. 사랑하는 남편이 친히 해 주는 마사지라니, 이 이상 호사스러운 일도 없을 것이었다. 특히나 그 남편의 손이 제국에서 황족 다음으로 귀한 손이라면 더더욱.
“그, 그러시다면……. 부탁드릴게요.”
그렇게 말한 클로에는 저도 모르게 긴장하고 있던 몸에서 힘을 빼고 좀 더 편안하게 엎드렸다.
그러면서도 내심 걱정이 되는지 알폰스를 흘끗거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알폰스는 클로에의 허리 위에 얹어져 있던 약초를 치웠다. 그리고는 옆에 놓여 있던 헝겊을 대야에 적셔 짠 뒤 그녀의 허리를 조심스레 닦아 냈다.
그리고는 피아노를 치듯 조심스럽게 손끝을 그녀의 허리 위에 얹었다. 그리고는 살짝 눌렀다. 보드랍고 매끄러운 하얀 살결의 감촉이 손끝에 감겼다.
“아!”
클로에가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손힘이 너무 강했던 것이다. 안 그래도 끊어질 듯 아픈 허리를 지나친 힘으로 건드리자, 마치 찌르르 감전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클로에가 알폰스를 돌아보았다. 그는 당혹한 것 같았다.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보여 주지 않을 모습으로 쩔쩔매는 것은 조금 귀여웠다.
“죄송합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아요. 그냥, 조금만 약하게…….”
알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더 조심스럽게, 강도 조절에 지극히 유의하면서 클로에의 허리를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적당히 강한 힘이 허리를 압박했다. 클로에는 손과 발에 절로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정말로, 생각 외로……. 그는 마사지를 꽤 잘했다. 손가락 끝과 손바닥을 사용해서 주무르는 그의 손길은 상당히 시원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찌릿한 감각이 내달리며 이상한 쾌감이 느껴졌다.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듯한 그런 쾌감.
처음에는 절로 몸이 긴장되었지만, 몇 분 동안 계속 마사지를 받고 있자니 익숙해져 갔다. 몸이 나른하게 이완되고 경직된 근육이 풀렸다.
그와 함께 입도 열렸다. 그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끙끙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 아아…….”
“응, 흐으으…….”
“앗, 으응, 으윽…… 하아아…….”
나른함에 취해서, 한참 열락에 빠져 있던 그때였다. 클로에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그의 손길이 점점 내려가고 있었다. 이젠 시원한 지점을 꽤 벗어났다. 그녀가 당황해서 말했다.
“알폰스, 거기가 아니라…….”
그때였다. 그의 손이 그녀의 둔부에 와 닿았다. 실수가 아니라는 것은 명백했다. 그의 손바닥이 명백한 의도를 가지고 둔부의 동그란 부분을 감싸 쥐었다.
“앗……!”
클로에가 놀라 베갯잇을 쥐었다. 그의 손길이 야릇한 움직임을 시작하는 것이 느껴졌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부끄럽지만, 그가 하필 엉덩이를 들여다보고 있다는 점이 제일 부끄러웠다.
게다가 여전히 허리도 아팠다. 과로를 한 지 이제 고작 한나절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또 그런 일을 하려고 하다니, 그의 체력은 대체 어떻게 돼먹은 걸까?
클로에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아, 안 돼요!”
그 순간, 그가 손길을 멈추었다. 그의 시선이 둔부에서 그녀의 얼굴로 이동해 온 것이 느껴졌다. 클로에는 귀까지 달아오른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때였다.
“정말 안 됩니까?”
그가 속삭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지극히 낮은 목소리. 화난 것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클로에는 알고 있었다. 저건 그가 흥분했을 때의 음성이다. 그 사실에 어쩐지 야릇한 기분이 들어, 클로에는 움찔 몸을 떨었다.
“그, 그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시점에서 딱 한 마디만, ‘정말 안 돼!’라는 말만 하면 그는 더 이상 그렇고 그런 일은 하지 않을 것이었다.
만일 지금 그 일을 해 버리면…… 정말 힘들 것 같았다. 완전히 녹초가 되어 버릴 것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호하게 ‘정말 안 돼!’라고 말하고 싶은 기분은 들지 않는 것은 왜일까.
‘난 몰라, 내가 정말 왜 이러지? 미쳤나 봐.’
창피해서 죽을 것만 같았다. 그걸 실컷 한 게 고작 한나절 전인데.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되어 버린 건지.
‘다 그의 손길이 너무 야해서야. 그가 지나치게 잘해서…….’
전 남자 친구들과 한 번 하는 것도 귀찮아하고 지겨워했던 과거의 자신은 어디로 가 버린 건지.
그리고 그는, 그녀의 그런 마음을 눈치챈 것 같았다. 말없이 그녀의 옆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감고 있던 그가 그녀의 드러난 어깨에 입을 맞추었다. 클로에는 참지 못하고 파르르 떨었다.
뚫을 듯 강렬한 그의 눈빛에 견딜 수 없이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가 참을 수 없이 좋았다. 그의 강렬한 눈빛도, 낮은 목소리도, 부드러운 입술도, 달콤한 손길도…….
정말 부끄럽지만, 도저히 거부할 수 없었다.
그녀가 거부하지 않자, 알폰스는 조심스레 그녀를 돌려 눕혔다. 그가 속삭였다.
“다정히 다뤄 드리겠습니다.”
* * *
도톰한 눈송이가 쏟아져 내렸다. 공작저의 저택과 정원 위는 물론, 거리마다 마을마다 흰 눈이 사락사락 쌓여 갔다. 여름이나 가을과는 또 다른 절경이었다.
‘설경(雪景)을 지켜보면서 마시는 차는 얼마나 맛있을까.’
창밖을 바라보면서 클로에는 생각했다.
모든 계절이 그렇지만 겨울은 특히나 차가 그리워지는 계절이다. 두꺼운 코트와 장갑으로 중무장을 해도 오들오들 떨리는 날씨였다. 뺨과 귀가 빨갛게 얼어붙으면 얼은 몸을 녹여 줄 밀크티 한 잔 생각이 간절해진다.
그런 계절이다 보니 클로에는 밀크티나 밀크티와 관련된 상품에 특별히 신경을 썼다. 그리고 그녀의 사업 전략은 옳았다. 날씨가 추워지면 추워질수록 밀크티 상품은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특히 고구마 밀크티의 반응은 열화와 같았다. 고소하고 부드러운 우유와 홍차, 그리고 달콤하고 묵직한 고구마의 조합은 그야말로 완벽했다.
장부 검토를 하다 말고 창밖을 내다보던 클로에에게 누군가가 찾아왔다. 여진이었다.
“공작부인, 해로즈 백작부인께서 찾아오셨습니다.”
해로즈 백작부인은 트리플 스위트의 VIP 고객이었다. 사업 초창기부터 클로에의 아이디어에 매료되어 지금까지 트리플 스위트의 열렬한 추종자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클로에는 VIP 고객에게 각별히 신경을 썼다. 어지간히 바쁘지 않은 이상 고객을 직접 접대하곤 했다.
클로에가 빙긋 웃었다.
“지금 갈게요. 고마워요, 여진.”
“아닙니다.”
클로에는 해로즈 백작부인이 앉아 있는 VIP실로 찾아갔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 역시 밀크티를 원하고 있었다.
그래서 클로에는 간단한 서비스를 했다. 직접 은제 다구에 아쌈을 진하게 우려 밀크티를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6배로 진하게 우린 홍차에 우유와 설탕을 섞어 마시는, 전생에 영국식 밀크티라고 불렸던 그것이었다.
그리고 백작부인의 반응은 뜨거웠다.
“정말 맛있어요, 공작부인! 이런 귀한 서비스를 받게 되다니 꿈만 같네요. 제가 직접 밀크티를 만들면 이 맛이 안 나던데. 역시, 차를 우리는 솜씨는 공작부인을 따라갈 사람이 없는 것 같아요.”
“과찬이세요.”
“게다가 겸손하시기까지! 아, 이런 맛있는 차를 매일 마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해로즈 백작부인이 진심을 담아 말했다.
밀크티를 대접받은 백작부인은 진심으로 감동했는지 평소보다도 많은 양의 차를 주문했다.
“정말 이곳에 오면 나가기가 싫단 말이에요. 하지만 약속이 있어서 가야만 해요.”
해로즈 백작부인이 아쉬운 듯 말했다. 클로에가 웃었다.
“어딜 가세요?”
“아그네스 자작저요. 함께 차를 마시기로 했거든요. 솔직히 너무 멀어서 가기는 힘들지만, 어쩌겠어요.”
백작부인이 수다스럽게 떠들었다.
“이런 목 좋은 대로변에 편히 앉아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 생긴다면 좋겠어요. 왜, 남자들의 커피 하우스처럼 말이에요.”
그녀의 말에 클로에는 이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자신의 생일 연회 직후 알폰스와 함께 커피 하우스를 방문했던 일이었다.
그때는 잘 몰랐지만 제국에서 커피 하우스는 남자들만의 공간이었다. 입장료와 음료값을 내면 커피 하우스에 모여 있는 다양한 직군과 계급의 사람들과 대화를 하며 편히 쉴 수 있었다. 커피 하우스는 남자들만의 사교의 장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커피 하우스를 다녀온 다음 클로에 역시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던가. ‘여자들도 커피 하우스 같은 공간이 필요하다’고.
백작부인이 떠난 뒤, 클로에는 가게의 내내 비워 두었던 2층으로 올라가 보았다.
“콜록, 콜록.”
클로에가 손수건으로 입을 막고 기침했다. 2층에는 사람이 드나드는 일이 적어 먼지가 쌓여 있었다.
기침이 좀 잦아든 뒤 클로에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금까지 2층은 거의 창고로 쓰이고 있었다.
‘그래, 내가 왜 이 생각을 못 했을까?’
그녀의 눈앞에 이제껏 보이지 않았던 청사진이 펼쳐졌다. 짐과 먼지만 쌓여 있는 2층의 삭막한 풍경 위로 숙녀들이 차와 수다를 즐기는 모습이 떠올랐다.
이른바 커피 하우스가 아닌 티 하우스였다.
제국에서 티 하우스라니! 클로에가 감탄했다. 얼마나 사랑스럽고 가슴 뛰는 생각인지! 그녀는 이 아이디어를 당장 실천에 옮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제일 먼저 이 생각을 알폰스에게 알렸다.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리고 그의 반응 역시 좋았다.
티 하우스라니! 알폰스가 생각하기에도 이것은 무척 훌륭한 발상이었다.
이제껏 귀부인들은 대부분의 사교 생활을 서로의 응접실에서 해결했다. 하지만 공공의 사교의 장은 성별과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필요했다.
잘만 된다면 이것은 귀부인들의 일종의 공공 살롱(salon)이 될 것이 분명했다.
“좋은 생각입니다. 혹여나 투자가 필요하시다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클로에가 배시시 웃었다. 세상에서 제일 믿음이 가는 그가 좋은 생각이라고 해 주는 것이 기뻤다. 얼마든지 도와주겠다는 의사를 피력한 것도.
그렇지만 그녀는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고 싶었다. 갓 트리플 스위트를 창업할 때와 달리 지금은 그녀에게도 충분한 자금이 있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알폰스를 꼭 안아 주었다.
“투자는 필요 없어요, 알폰스. 하지만, 정말로 고마워요.”
그녀의 품에 안긴 알폰스가 은은하게 미소 지었다. 그의 손가락이 클로에의 결 좋은 밤색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클로에는 여진에게 부탁해서 건축가를 수소문했다.
클로에, 그녀는 전생에 온갖 티 하우스를 섭렵한 바 있다. 서울은 물론이고 좋은 티 하우스라면 타 지역까지 가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티 하우스의 인테리어에 대해서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어떤 구조가 차를 만들고 마시기에 편리한지, 또 티 하우스의 소비자들은 어떤 분위기를 선호하는지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문제가 없어. 하지만…… 이것을 어떻게 전달하느냐가 문제인데.’
클로에가 알고 있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이 지식을 건축가에게 전달해야만 했다.
물론 디자인을 전달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역시 시각적 매체일 것이다. 그림이나 도안 등의.
하지만 지난 몇 번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대 자신에게 그것은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사실을 클로에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림 대신 말로 원하는 인테리어에 대해 설명한 서류를 준비해 두었다.
마침내 여진과 함께 건축가와 만나기로 한 날이 되었다. 클로에는 자신이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준비한 서류를 건축가에게 내밀었다.
“이, 이건 뭡니까?”
난데없이 눈앞에 들이 밀어진 두툼한 서류 더미에 건축가가 소스라쳤다. 놀랄 만도 했다. 거의 책 한 권가량의 어마어마한 분량이었으니까.
클로에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담담히 말했다.
“제가 원하는 인테리어에 대한 지시서와 참고 자료예요.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이, 이게 다 지시서란 말입니까?”
건축가가 말까지 더듬었다. 그야 당연했다. 그는 이런 상황은 추호도 예상하지 못했다.
웬 귀부인께서 자신의 가게의 2층을 개조해 달라고 의뢰했다. 솔직히 말해서, 그는 이 일에 대해 진지하게 임하지 않았다. 돈 많은 마나님께서 취미로 하시는 가게의 가구 배치를 바꾸는 정도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여성이 그 이상의 일을 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제국에서 여성이 사업을 한다는 것에 대한 인식은 딱 그 정도였다.
당연하지만 일에 임하는 마음은 거래처의 자세에 따라 달라진다. 거래처가 뭣도 모르는 문외한에 의뢰한 일에 관심도 없을 때는 자신도 게을러지고, 거래처가 의뢰한 일에 관심이 많고 열의에 넘친다면 자신 역시 더 주의하게 될 수밖에 없다.
썩어 나는 돈을 주체하지 못해 취미로 가게를 차렸지만 여자란 근본적으로 드레스와 보석, 사교 활동에만 관심이 있는 존재다 보니 사업 같은 공적인 일엔 적성이 맞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니 자신의 가게에도 큰 관심은 없을 것이 뻔했다.
……라는 것이 이 건축가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의 예상은 완전히 산산조각 났다.
그가 서류를 집어 훑어보았다. 놀랍게도, 한 장 한 장이 정성스러운 내용으로 가득했다.
지금까지 그가 만나왔던 클라이언트들은 대개 거의 지시를 하지 않거나 지시를 해도 ‘고전적이지만 현대적으로’ ‘부드럽지만 강인하게’ ‘차갑지만 따뜻한 색으로’ 수준의 애매하기 짝이 없는 내용이 고작이었다. 솔직히 자신들이 뭘 지시하고 있는 건지 이해는 하고 있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그러나…… 눈앞의 이 여성의 요구는 명백했다.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제대로 알고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아주 직관적이고 뚜렷한, 애매한 지점이라고는 한 군데도 없는 문장으로 전달하고 있었다.
심지어 온갖 문헌에서 조사해 인용한 듯한 참고 자료까지 충분히 구비되어 있었다. 하다못해 커튼의 무늬라든가 계단 난간의 돋을새김, 장식품의 종류와 배치까지 섬세하게.
건축가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이 지시서를 쓴 사람이 정말로 눈앞의 이 여성이 맞단 말인가? 이 여리고 한없이 순진하게만 생긴 여성에게 이런 일이 정말로 가능하단 말인가?
“이보시오, 뭘 하시는 겁니까. 귀부인을 그렇게 보는 것은 무례합니다.”
건축가가 퍼뜩 놀랐다. 귀부인의 옆에 있던 동방에서 온 듯한 특이하게 생긴 여자가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건축가는 그제야 자신이 무례할 정도로 타인을 뚫어져라 보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너무 놀라서 그만.”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건축가가 쩔쩔맸다. 여진이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고 클로에가 가볍게 웃었다.
클로에가 요구한 인테리어는 놀라운 것이었다. 그녀는 제국인들이 무리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끔 제국에서 유행하는 고풍스러운 디자인을 바탕으로, 전생의 기억이 있는 자신 특유의 현대적 미감을 접목시켰다.
그것은 충분히 독창적이면서도 지나치게 특이해 제국인들의 미감과 어긋나지 않았다. 클로에는 독창적이고 남들과는 다른 매력을 보여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것이 과해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녀는 대상 고객층을 섬세하게 따졌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티 하우스의 주 고객층은 당연히 여성이었다. 그것도 약 2~30대가량의, 최신 유행에 민감한 젊은 여성들.
사업에 있어 최고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대상 고객층이다. 클로에는 가게의 모든 것을 2~30대의 귀부인들의 취향에 철저하게 맞췄다.
하다못해 메뉴판조차 그랬다. 일반적으로 커피 하우스에는 메뉴판이라고 할 만한 게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클로에는 티 하우스의 메뉴판을 보드라운 벨벳으로 감싸고, 안에는 아기자기한 그림을 그려 넣고자 했다.
일반적인 커피 하우스는 인테리어나 분위기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다. 세련되지 않은 나무테이블과 나무 의자 정도가 고작인 것이다. 하지만 클로에는 티 하우스를 위해 고풍스러운 티 테이블과 의자, 희고 반질거리는 테이블보를 특별 주문했다.
심지어 그녀의 지시서 내에는 테이블마다 올려놓을 꽃병의 꽃의 종류까지 적혀 있었다. 가게의 테이블을 생화로 장식하다니, 그 가격과 관리의 어려움 때문에 드문 일이었다. 그녀는 그 정도로 분위기에 신경을 썼다.
여자치고는 대단했다. 아니, 어지간한 남자들보다도 굉장했다. 건축가는 기함했다.
‘이렇게 당황스러운 고객은 난생처음이야.’
그는 눈앞의 이 고객이 쉬운 상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리고 그만큼이나 자신이 이 의뢰에 대해 열과 성을 다해 공을 들여야만 상대를 만족시킬 수 있다는 것도.
건축가를 깜짝 놀라게 한 클로에는 미팅을 마친 뒤 저택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뜻밖의 소식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황궁으로부터의 전언입니다, 마님. 대단히 중한 일이 있으니 내일 입궁해 주셨으면 한다고 합니다.”
“내일?”
“그렇습니다.”
록우드 부인의 말에 클로에는 깜짝 놀랐다.
대체적으로 만남이 필요할 때에는 되도록 며칠 전에 약속을 정하는 것이 제국의 관례였다.
그런데 황궁 같은 곳에서 일주일 전도, 사흘 전도 아니고 고작 하루 전에 입궁을 요청하다니? 대단히 중요한 일임이 분명했다.
다음 날이 되자 클로에는 마차를 타고 황궁으로 향했다.
마차를 타고 가는 길, 클로에는 황궁에서 무엇을 위해 자신을 불렀을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황궁에서 부른 사람이 그녀가 아니라 그녀의 남편, 알폰스였다면 차라리 이해할 수 있었다. 알폰스는 제국을 위해 일을 하는 중앙의 위정자니까.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그녀는 그저 찻잎을 납품하는 사업가일 뿐이 아닌가. 그런데 그런 그녀를 이렇게 다급히 부를 일이 대체 뭐가 있을까?
아무리 고민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마침내 황궁에 도착했을 때, 그녀를 맞이한 사람은 다름이 아니고 황제였다.
클로에는 이제껏 황제를 여러 번 만났다. 공식적인 행사들 때문이기도 했고, 황제와 거래를 하는 거래 상대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지위 때문일까, 그 특유의 위엄 있는 분위기 때문일까. 역시 아무리 봐도 적응되거나 편하게 느껴지는 상대는 아니었다. 클로에가 예를 갖추어 인사를 올렸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허허, 고개를 들어도 좋소.”
황제가 소탈하게 웃었다.
“공작부인은 언제 보아도 예법이 뛰어나군. 과연 뭇 귀부인들의 귀감이 될 만하오.”
“과찬이십니다.”
“겸양한 모습도 여전하시구려.”
두 사람은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본궁 응접실에서 잠시 몇 마디 안부의 말을 나누었다.
그러고 있자니 차가 나왔다. 클로에 그녀가 납품한 온의 녹차 용정이었다. 산뜻하고 여린 향이 특징인 차였다.
‘이제 황궁 사람들도 차를 제법 잘 우리는구나.’
차를 홀짝이며 클로에가 생각했다. 직접 황궁의 사람들을 가르친 보람이 있었다.
어찌 됐건 자신을 부른 이유가 궁금해지던 차였다. 황제가 적당한 때에 본론을 꺼냈다.
“부인을 이리 급하게 모신 것에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오. 하지만 굉장히 시일이 급한 일이라 어쩔 수 없었소. 혹시 보름 뒤에 어떤 손님이 오시는지 아시오?”
황궁에 보름 뒤 오는 손님이라면, 클로에도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제국의 정치 외교 상황에 대해서도 관심이 있기 때문에 최신 정보까지 알폰스를 통해 듣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말했다.
“온에서 사절들이 오는 게 아닌지요?”
“과연, 부인께서도 잘 알고 계시구려.”
이곳에서 제국을 비롯한 서방과 온을 비롯한 동방의 외교 관계는 좋지 않다. 각자가 고유의 독특하고 깊이 있는 문화를 가지고 있음에도 서로를 오랑캐 취급하고 멸시하기 일쑤였다.
관계가 좋지 않은 온에서 이렇게 공식적으로 제국에 사절을 보내는 것은 무척이나 오래간만의 일이었다. 황궁에서도 이것을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고 들었다.
그런데 사절들이 오는 것과 클로에 자신이 무슨 관계란 말인가? 그녀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녀가 궁금해하는 것을 잘 알고 있는지 황제가 말을 이었다.
“부인께서도 이번 사절과의 접견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이해하고 계시리라 믿소. 무려 60년 만의 공식 사절이오. 어쩐 이유로 오는 것인지는 아직 알지 못하지만, 온의 왕궁에 우리 제국의 국력을 보여 줄 좋은 기회라 할 수 있소.”
클로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절을 잘 접대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다. 나라와 나라의 공식적인 만남이다. 사절단에 대한 대접은 그 국가의 얼굴이 되는 것이다.
특히나 서로 자존심 경쟁만 하고 있는 온에게 제국의 강대한 국력을 보여 주어 콧대를 납작하게 눌러주겠다는 것이 현재 황궁의 목표였다.
“그래서 황궁의 인재들이 머리를 모으고 온의 사절들에게 최상의 접대를 할 방법을 궁리해 보았다오. 한데 대단히 좋은 의견이 나왔소. 사절들에게 차를 대접하자는 거였소.”
“차…… 말인가요?”
클로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태껏 제국에서 공식 행사에 차를 활용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차를 잘 음용하지 않는 국가이니 당연했다.
하지만 이번은 좀 달랐다. 황제부터가 차에 관심을 가지고 여러 종류의 차를 섭취하고 있을뿐더러, 무엇보다 온은 차의 대국이었다. 전 대륙에서 최초로 차를 음용하기 시작한 최초의 산지이기도 했고, 현재까지도 대단히 다양한 차를 다양한 방식으로 즐기는 국가였다.
클로에가 저도 모르게 말했다.
“좋은 생각이네요. 온에서는 술, 담배, 차, 세 가지에 능통하지 않은 상대는 신뢰하지 않는다고 하니까요.”
순간 황제의 눈이 둥그레졌다. 그럴 만도 했다. 제국의 일반적인 귀족 여성이 알기에는 어려운 사실이었으니까.
“호오, 부인께서 그런 것까지 알고 계시다니 놀랍구려. 과연 부인은 제국 최고의 차 전문가요.”
클로에가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그녀가 전생에 살았던 세계의 중국과 이곳의 온이 대단히 닮은 점이 많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중국에서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타인을 접대할 때에 차를 결코 빼놓지 않는다. 술, 담배, 차, 세 가지에 전부 능통하지 않으면 중국에서 사업을 할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클로에는 가슴속 어딘가 양심이라는 부위가 따끔따끔해져 옴을 느꼈다. 그녀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보고 황제가 웃었다. 그가 말했다.
“제국에 술과 담배의 전문가는 많지만 차의 전문가는 결코 흔치 않지. 따라서 차에 대해 자문을 구할 상대 역시 부인밖에는 없었소.”
“영광입니다, 폐하.”
“어쨌거나, 우리는 사절의 방문을 대비해 훌륭한 만찬을 준비하고 있었소. 차 역시 부인에게서 다양한 종류의 최상급 차를 납품받고 있으니, 이것으로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소.”
클로에는 내내 느긋한 태도를 유지하던 황제의 눈빛이 순간 차분해진 것을 눈치챘다. 그가 말했다.
“한데 문제가 생겼다오.”
“아뢰옵기 황공하지만, 어떤 문제인지요?”
황궁에서 차를 준비하다가 문제가 생겼다면 그건 클로에와도 무관하지 않았다. 차를 납품한 사람이 바로 그녀이니까 말이다.
그녀는 언제나 차를 고를 때 최선을 다한다. 황궁에 납품하는 물건이라면 특히 고품질이어야 하니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 사실에는 자부할 수 있지만, 행여나 그녀가 어딘가에서 작은 실수라도 했다면……. 몸이 긴장되고 심장이 콩콩 뛰었다.
황제가 말했다.
“차의 맛이 변질되었소. 여러 종류의 차를 전부 다양한 방식으로 우려 보았지만 해결되지 않았소. 찻잎의 품질에는 문제가 없다는 것을 이전에 몇 번이고 검사해 보았으니 알고 있지만…….”
이 말을 듣던 클로에는 무언가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그녀가 물었다.
“여러 종류의 차……라고요? 여러 종류의 차를 코스로 준비하신 건가요?”
“그렇소.”
“그 목록을 제가 볼 수 있을까요?”
“물론이오.”
황제는 사람을 불러 사절단 맞이 만찬의 다과 목록을 가져오게 했다.
과연, 목록의 모든 차들은 클로에가 납품하는 것이었다. 즉 그녀도 마셔보았으며 잘 아는 것들이었다. 다행인 일이었다.
한데…… 목록을 보자마자 분명하게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그녀는 ‘아’ 하는 신음을 삼켰다.
목록의 내용은 이러했다.
1코스 : 운남금홍(홍차)
2코스 : 백호은침(백차)
3코스 : 철관음(우롱차)
4코스 : 대홍포(우롱차)
5코스 : 신양모첨(녹차)
그리고 그 아래에는 차에 곁들어 준비되는 음식들이 적혀 있었다.
얼핏 보면 나쁘지 않은 구성이다. 그녀가 납품하는 온의 차 중에서도 최고로 값진 고급의 것들이었으니까. 등급이 너무나 높아 단가상 트리플 스위트에서 판매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클로에는 이 목록을 보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그녀가 물었다.
“어찌하여 이런 구성이 나온 건지 여쭈어봐도 될까요?”
“물론이오. 차의 종류는 부인이 납품하는 차 중 제일 값진 상급품으로 구성했소. 또한, 코스의 순서 역시 등급을 기준으로 배치했소. 비교적 등급이 낮은 것부터, 등급이 높은 것으로 올라가도록 구성했지. 그리고 마지막은 입맛을 깔끔하게 해 줄 산뜻한 녹차로 마무리한 것이오.”
심지어 나름대로 머리를 쓴 구성이었다.
하긴, 어쩌면 상식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일반적인 식사 코스의 경우에도 비교적 가격대가 낮은 재료를 사용한 간단한 요리부터 시작한다. 제일 비싼 재료를 사용한 메인 요리는 거의 마지막에 나오다시피 한다. 비싼 재료를 먼저 먹은 입맛에 저렴한 재료는 맛이 덜하게 느껴질 테니까.
하지만 이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일반적인 요리와 차는 다르다는 것이었다. 클로에가 말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폐하. 차 자체에는 문제가 없는 듯합니다. 문제는 차를 내오는 순서에 있습니다.”
“순서라고?”
“네. 여러 종류의 차를 내놓을 때에 제일 중요시 해야 하는 것이 바로 각각의 차를 내놓는 순서입니다.”
“호오, 그렇다면 어떤 순서로 배치해야 한단 말이오?”
클로에가 공손하지만 확신에 찬 어조로 대답했다.
“바로 산화도입니다.”
차를 제조하는 방식 중 하나인 산화는 찻잎이 산소와 닿아 일으키는 화학 작용을 뜻한다.
이 산화를 전혀 시키지 않은 차가 녹차, 완전히 시킨 차가 홍차, 그 중간쯤에 있는 것이 우롱차라고 할 수 있다.
녹차와 홍차의 맛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시피, 산화를 시킬수록 차의 향은 강하고 진해진다.
“여러 종류의 차를 내놓을 때에는 산화도가 낮은 차부터 높은 차의 순서로 배치해야 합니다. 이전의 차를 마셨을 때의 향과 맛은 생각보다 입 안에 오래 남아 있거든요. 만일 산화도가 높은 차를 먼저 마시고 낮은 차를 마신다면 이전에 마신 차의 맛과 향에 영향을 받게 됩니다.”
황제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아니, 겨우 그런 이유란 말이오? 차라는 것의 맛과 향은 어떤 순서로 마시느냐에도 영향을 받는다는 말이오?”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렇습니다. 차는 무척이나 민감한 것이라 사소한 것에도 큰 영향을 받곤 하지요.”
그녀가 막힘없이 설명했다.
“백호은침은 차나무의 여린 싹으로만 만든 차이기에 맛과 향이 매우 약하니 맨 앞으로 와야만 해요. 그래야만 백호은침의 맛과 향을 제대로 느낄 수 있어요. 그다음은 녹차인 신양모첨이 좋고요. 철관음과 대홍포는 같은 우롱차이지만 산화도에 큰 차이가 있어요. 연둣빛 수색에 청량한 꽃 향이 느껴지는 철관음이 더 산화도가 낮고, 검붉은 빛의 수색에 농후한 과일과 향신료의 향이 느껴지는 대홍포가 더 산화도가 높아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강렬한 맛의 홍차인 운남금홍을 배치하는 게 좋겠어요.”
즉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적절한 코스 배치는 이렇게 된다.
1코스 : 백호은침(백차)
2코스 : 신양모첨(녹차)
3코스 : 철관음(우롱차)
4코스 : 대홍포(우롱차)
5코스 : 운남금홍(홍차)
황제는 대단히 놀라워했다. 설마 문제가 고작 이런 데에 있을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차를 우리는 법에 문제가 있는 줄 알고 우리는 시간과 도구, 찻잎의 양만 계속해서 바꿔 보았지만 해결이 되지 않았던 문제였다. 그런데 그것을 이렇게 쉽게 해결하다니……. 그가 감탄 어린 어조로 말했다.
“이렇게 된 이상 시험해 볼 수밖에 없겠소. 내 수정한 목록대로 차를 가져오게 하리다.”
그가 지시하자, 곧 차가 한 종류씩 대령되었다.
클로에는 묵묵히 차를 마셨다. 역시나 맛이 좋았다. 그녀가 직접 고른 것이니 당연했다. 그녀는 만족스러움과 함께 내심의 뿌듯함을 느꼈다.
한편 황제는 계속해서 놀람의 연속일 수밖에는 없었다. 이전의 방식으로 차를 내왔을 때와는 달리 각각의 차들의 맛과 향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이전에 맛본 맛과 향이 지금 마시고 있는 것을 침범하거나 영향을 주지 않았다.
모든 차를 마셔본 황제가 말했다.
“정말 훌륭한 차요. 하나하나가 각자의 뚜렷한 개성을 가지고 있고, 맛과 향이 조화롭군. 특히 녹차와 백차의 변화는 정말이지 놀라웠소. 이전에는 이 차들이 이런 맛이리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소.”
그가 만족스러운 듯이 말했다.
“이건 다 공작부인의 덕택이오. 덕분에 사절단을 맞이할 때 그들을 깜짝 놀라게 해 줄 수 있겠군.”
클로에가 수줍게 얼굴을 붉혔다.
“아니에요.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인걸요.”
그때 클로에의 머릿속에 목록을 보았을 때 느꼈던 것이 하나 더 떠올랐다. 그녀가 말했다.
“황공하지만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차에 곁들어 내놓는 다과 역시 신경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산화도에 따라 차의 향미가 매우 다르니만큼 모든 차에 같은 다과를 내어놓는 것보다는 각 차에 어울리는 다과를 배치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같은 차라도 백호은침과 대홍포는 천지 차이다. 그러니 각자 다른 다과를 곁들이는 것이 차의 향미를 최고로 끌어올리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황제가 흥미롭다는 듯한 얼굴을 했다.
“그렇구려. 그렇다면 부인께서 각 차에 어울리는 다과를 골라줄 수 있겠소? 내 대가는 후하게 치르리다.”
이 말에 클로에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중요한 행사와 관련된 일을 담당하게 되다니!
황제가 치러줄 대가도 대가지만 정말 큰 영광이었다. 그녀 외에 제국의 그 어떠한 여성도 이런 영광을 누려 본 적이 없었다. 클로에가 기쁜 마음으로 말했다.
“영광입니다, 폐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때였다.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차의 구성 역시 조금 수정해도 될까요? 부족하지만, 온의 사절단에게 제국의 차 문화 수준과 자존심을 보여 줄 수 있는 작은 아이디어가 하나 있습니다.”
“물론, 공작부인이라면 얼마든지 믿고 맡길 수 있지. 제국을 위해 수고해 주길 바라오.”
“감사합니다, 폐하.”
* * *
보름 뒤, 온의 사절단이 입궁하는 당일.
“그 소식 들었어? 사절단이 도착하는 날이 바로 오늘이래.”
“정말 재미있겠는걸. 우리도 보러 가자!”
황궁은 물론 그 앞의 긴 거리가 전부 소란스러웠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60년 만에 찾아온 온의 사절단을 보기 위해 야단이었다.
황궁에서도 제국의 국력을 보여 주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다지만, 온에서 신경 쓴 것 역시 뒤지지 않았다. 수십 명의 사절단과 시종, 말과 마차가 이어진 화려한 행렬이 끝도 없었다.
특히나 동방의 사람을 만나 볼 일이 거의 없는 제국인들에게 이것은 아주 재미있는 구경거리였다.
“저 사람들 봐 봐! 정말 특이하게 생겼어.”
“모든 사람이 전부 머리카락은 흑단처럼 검고, 피부는 황금색이잖아?”
이러한 제국인들의 반응을 보고 마차에 타고 있던 사절단장이 코웃음 쳤다.
‘역시 제국 놈들은 한심한 우물 안 개구리들이군. 이번 접대를 위해 황궁에서도 나름대로 신경을 썼겠지만, 우리에게는 당해내지 못할 게 분명해. 세계에서 제일 역사 깊은 문화를 가진 우리에 비하면 제국은 서방 오랑캐일 뿐이야.’
그렇게 생각하는 사절단장을 태운 행렬이 황궁을 향해 나아갔다.
“어서 오시오. 기다리고 있었소.”
60년 만에 찾아온 그들을 황제는 직접 맞아 주었다.
“멀리서 온 이방인들이여, 별궁에 자리를 내어줄 테니 모쪼록 여기 있는 동안에는 편히 지내길 바라오.”
사절단의 숙소는 서쪽 별궁의 일부로 지정되었다. 몇 달 전부터 그들을 위해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에게 제국의 국력을 보여 주기 위해) 쓸고 닦고 장식하며 온갖 준비를 해 둔 곳이었다.
그것을 감안해도 황궁의 규모와 화려함은 대륙의 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사절단들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얄팍한 문화 수준을 숨기기 위해 인구와 금력만을 앞세워 거창하게 꾸며 놓았군. 과연 천박하기가 오랑캐다워!’
짐을 풀고 별궁에서 휴식을 취하면서도 사절단장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날 저녁이었다. 공식 행사인 만찬을 위해 사절 단원들은 본궁의 홀에 모였다.
만찬은 제국의 진미로 구성되어 있었다. 최고의 재료와 최고의 솜씨로 만들어 낸 요리들은 비록 제국의 요리일지언정 온의 사람들의 입맛에도 맛이 아주 훌륭했다.
또한 요리와 어울리는 미주(美酒)까지 곁들여져 있어 고생하며 멀리서 온 사절 단원들의 긴장을 절로 풀리게 했다.
사절단 아래 계급의 구성원들 중에는 이미 만찬에 푹 빠져 있는 사람도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을 본 사절단장은 속으로 혀를 찼다.
‘배알 없기는. 제국의 요리 따위가 맛이 좋아 봤자 얼마나 좋다고……. 온의 요리에 비하면 그저 자극적이기만 하고 깊이는 한참 떨어지는 것을.’
식사를 마친 뒤였다. 사절단장이 곁에 있던 다른 단원에게 말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차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군. 제국인들은 차의 맛도 모른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일 줄이야.”
“제국인들은 차를 마시지 않는다고요? 그게 정말입니까?”
“그래. 차의 맛도 모르는 국가의 문화가 깊이가 있으면 얼마나 있다고 할 수 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