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부인의 50가지 티 레시피 4권22장 (22/39)

공작부인의 50가지 티 레시피 4권

목차

22장

23장

24장

25장

26장

27장

28장

22장

클로에는 빠르게 다과회를 준비했다.

이미 몇 번이나 열어보았기에 다과회 준비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평소보다 조금 큰 규모로 준비했지만 힘들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어떤 다과를 내갈지 상상하다 보면 꽤 즐거울 정도였다.

‘이번 다과회의 주인공은…… 역시 고구마지.’

이것은 꽤 독특한 경험이었다. 여태까지는 언제나 차를 소개하기 위해, 차를 고려해서 어울리는 티 푸드를 골랐는데 이번에는 반대였다.

고구마에 어울리는 차라면 무엇이 있을까? 클로에는 신중하게 고민해 보았다.

마침내 다과회 당일.

“어머, 오랜만이에요. 아커만 부인.”

“오랜만이네요, 타임 부인.”

귀부인들이 속속들이 공작저 응접실에 모였다.

응접실은 이미 다과회를 위해 멋지게 꾸며져 있었다. 귀부인들은 응접실을 장식한 재스민과 수국을 보고 감탄했다.

특히나 재스민 같은 경우 수입 향신료이기 때문에 값이 굉장히 비쌌다. 그런 값진 꽃으로 응접실을 장식하다니, 귀부인들로서는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과연, 바텐베르크 공작부인다워요.”

“멋진 사업을 이끌고 계시기도 하니까요.”

“향이 정말 좋아요. 저도 재스민으로 방을 장식하고 싶네요.”

응접실의 장식과 테이블 위를 아름답게 수놓은 각종 다구들에 대해 한담을 나누던 가운데, 한 귀부인이 이렇게 말했다.

“그건 그렇고 오늘 다과회에 나오는 메뉴가 무엇인지 알고 계신 분이 있나요?”

사실, 클로에가 주최한 다과회에서 나오는 메뉴는 사교계의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였다.

지난여름 이래로 클로에는 다과회를 두 번 주최했다. 그리고 한 번은 청화백자와 밀키 우롱을, 다른 한 번은 서양풍 다구와 로얄 밀크티를 선보였다.

그녀가 다과회에서 보여 주는 것은 언제나 놀랍고 신선한 것이었고, 이후 그것들은 사교계를 돌풍처럼 휩쓰는 유행이 되었다.

그러니 이번 다과회에서 나오는 것들이 모두의 관심과 호기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무엇이 나올지는 몰라도 이번에 나오는 것 또한 유행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런 최신 유행을 누구보다 먼저 접해 보는 것이야말로 귀족들의 자랑거리이자 자긍심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아무도 아는 바가 없었다. 클로에는 꽤 단단히 비밀 단속을 해서, 그녀의 단짝 친구인 포트넘 부인조차 오늘 나오는 것에 대해 알지 못했다.

마침내 정시가 되었고, 모든 귀부인들이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다과회치고는 꽤 대인원이 모인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지각을 하지 않았다. 그만큼이나 클로에의 다과회는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정시에 딱 맞추어 클로에가 나타났다. 자기들끼리 잡담을 나누던 귀부인들이 입을 다물었다.

단정한 연보라색 드레스를 입은 클로에는 모여 있는 손님들을 둘러보았다. 고구마 꽃을 달고 온 사람이 상당히 많다는 사실에서 그녀는 용기를 얻었다.

클로에는 과거 프레젠테이션을 하던 시절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어서 오세요, 모든 분들이 빠짐없이 와 주셨군요. 아마 많은 분들이 오늘 제 다과회에서 나올 메뉴를 궁금해하셨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죠?”

“맞아요!”

포트넘 부인이 맞장구를 쳤다. 클로에는 친절한 친구에게 웃어 준 뒤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보여 드릴게요. 그럼, 편안하고 즐거운 시간 되셨으면 좋겠군요.”

클로에가 손뼉을 두 번 치자 기다렸다는 듯이 하녀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각자 티 푸드가 담긴 접시를 들고 있었는데, 귀부인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보지 못했다.

접시가 테이블 위에 질서 정연히 놓였다.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이건 뭐죠?”

“모르겠어요. 저게 케이크고 그건 타르트라는 건 알겠는데, 그 외에는 전혀 모르겠군요.”

“푸딩인가요?”

“아마 무스 종류의 무언가인 것 같은데…….”

그들이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들 대부분은 태어나서 한 번도 고구마를 먹어 보지 못했다. 심지어 어떤 종류의 덩이줄기 식물도.

클로에가 빙긋 웃으면서 설명했다.

“이것들은 전부 한 가지 재료로 만들었어요. 그 재료는 여러분의 가슴에 달려 있는 것이랍니다.”

서로의 가슴을 흘끗거리던 귀부인들 중 한 사람이 말했다.

“설마, 고구마인가요?”

“네?”

“이게 고구마라고요?”

귀부인들이 깜짝 놀랐다.

“하지만…… 고구마라는 건 적색을 띠고, 울퉁불퉁하게 생기지 않았던가요? 이건…….”

이런 의문을 가지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클로에는 그들이 가진 고구마의 외형에 대한 거부감을 줄이기 위해, 모든 요리를 고구마의 형체를 없애는 방향으로 준비했던 것이다.

그들이 아는 칙칙한 적색에 울퉁불퉁 못생긴 고구마는 그 자리에 없었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것은 노르스름한 빛을 띠고, 표면은 매끈하고 생크림처럼 부드러워 보이는 무언가였다. 거부감은 느껴지지 않았고 오히려 무척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클로에는 요리에 대해 하나씩 설명했다.

“이것은 고구마 케이크, 이것은 고구마 타르트, 이것은 고구마 양갱이랍니다. 고구마란 달콤하고 부드러워 맛이 좋고, 서방의 차와 동방의 차 모두에 잘 어울리는 티 푸드예요. 또한 식이섬유가 많고 포만감이 있어 체중 감량에도 좋죠. 아주 매력적이고 차에도 잘 어울리는 식재료이기에 모든 분들께 소개하고 싶었어요.”

흰 보를 깐 테이블 위에 색색의 티 푸드들이 놓여 있었다.

부드러운 생크림에 으깬 고구마를 섞어 달콤한 맛을 내는 고구마 케이크, 타르트지 위에 고구마 무스를 듬뿍 올린 고구마 타르트, 그리고 고구마와 자색 고구마로 노란빛과 분홍빛, 두 가지 층을 낸 고구마 양갱이었다.

“어머, 너무 예뻐요!”

“케이크와 타르트는 알겠는데, 다른 하나는 뭘까요?”

“정말 신기하네요.”

특히 모두의 시선을 끄는 것은 양갱이었다. 꼭 푸딩 같기도 하고, 젤리 같기도 한 것이 색깔도 층층이 알록달록하고, 모양 틀에 찍어 내어 아기자기하고 예쁜 모양새를 자랑했다.

고구마로 만든 요리라면 고구마 맛탕, 건고구마 칩, 고구마 피자(?) 등이 있겠지만 클로에는 제국인들이 좋아하는 부드러운 식감 위주로 티 푸드를 선정했다.

사실 클로에는 제일 맛있는 고구마는 직화에 구운 군고구마라고 생각했으나…… 다과회에 어울리는 요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정말 예쁘지만, 역시 고구마는 좀…….”

“아무래도 고구마는 천한 평민들이 먹는 것이라…….”

귀부인들이 선뜻 티 푸드에 손을 대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아직도 고구마에 대해 거부감이 남아 있구나.’

클로에는 조금 당황했다. 고구마 꽃으로 인해 귀족들 사이의 고구마에 대한 거부감이 많이 줄어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직 부족한 모양이었다.

그녀가 어떻게 수습을 해 보려던 찰나였다. 한 부인이 이렇게 말했다.

“고구마가 뭐가 어때서 그러시는지 모르겠네요. 정 꺼려지신다면 제가 먼저 먹어 보겠어요.”

바로 포트넘 부인이었다.

클로에는 깜짝 놀랐다. 언제나 그녀를 도와주는 좋은 친구인 포트넘 부인이지만, 설마 이렇게 나서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어머, 무리하지 마세요, 포트넘 부인.”

“맞아요. 홑몸도 아니시잖아요.”

“걱정 마세요. 그냥 케이크일 뿐이잖아요? 전 바텐베르크 부인을 믿어요. 분명 맛있을 거예요.”

포트넘 부인이 호언장담했다. 클로에는 가슴이 짠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하여 포트넘 부인이 티 푸드의 첫 스푼을 떴다. 그녀의 선택은 고구마 무스가 가득 들어간 고구마 타르트였다.

포트넘 부인은 포크로 타르트를 조금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모두의 이목이 그녀의 입에 집중되었다.

타르트를 입에 넣기 직전에 그녀의 이맛살이 약간 찡그려지는 것을 클로에는 보았다.

포트넘 부인 역시 귀족인지라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의 다과회가 성공적으로 끝나도록 일부러 나서준 것이다.

마침내 포트넘 부인이 타르트를 입에 넣고 씹었다.

자리에 모인 모두의 목구멍 너머로 침이 꼴딱 넘어갔다.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포트넘 부인은 제국에서 클로에를 빼면 최초로 고구마를 맛본 귀족이 되었다.

어떻게든 평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포트넘 부인이 말했다.

“이건…… 음…… 흐음…….”

그녀가 입안의 것을 꼴딱 삼켰다. 그러더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머…… 이건……! 정말 새로운 맛이네요. 정말로, 정말로……. 그러니까, 정말 고소해요!”

깜짝 놀란 포트넘 부인이, 난생처음 먹어 보는 덩이 식물 채소의 맛에 대해 묘사하느라 애를 썼다.

“그러니까, 아주 고소해요. 꼭 견과류 같기도 하고, 곡식 같기도 해요. 하지만 견과류와 달리 느끼한 느낌은 전혀 없이 담백하고, 아주 부드럽고 혀에 착착 감기는 게, 꼭 무스(mousse) 크림 같기도 하고…….”

“그래서 맛이 있다는 건가요, 없다는 건가요?”

다른 부인 하나가 끼어들었다. 포트넘 부인이 활짝 웃었다.

“물론, 아주 맛있어요!”

그녀가 전투적인 태도로 포크를 고쳐 쥐었다. 포트넘 부인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이거 정말로 안 드실 건가요? 만약 그러고 싶다면 말리진 않겠어요.”

그제야 다른 귀부인들도 이 새롭고 신선한 식재료에 도전해 볼 마음이 생겼다. 그들이 하나둘 포크를 쥐었다. 그리고는 준비된 티 푸드를 맛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귀부인들 사이에서 하나둘 탄성이 터져 나왔다.

“어머!”

“정말 고소하네요. 그런데 고기나 곡식, 견과류의 고소함과는 달라요.”

“고소하지만 기름지지 않아서 맛있는걸요!”

그제야 클로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녀는 포트넘 부인을 향해 고마움의 뜻이 담긴 눈인사를 했다. 포트넘 부인은 윙크를 해 화답했다.

‘나중에 포트넘 부인이 좋아하는 잼을 잔뜩 선물해야겠어.’

“그런데 공작부인, 이 요리는 뭔가요?”

어느 부인이 고구마 양갱을 가리키며 말했다. 분홍색과 노란색으로 층을 이루고 있는 양갱은 반질반질 윤이 났고, 한입 크기로 작아 귀엽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클로에가 막힘없이 설명했다.

“그건 양갱이란 것이에요. 고구마를 젤라틴으로 굳혀 만드는 동방의 간식이죠. 고구마가 서방의 요리에도, 동방의 요리에도 어울린다는 사실을 알려 드리고 싶어 선정해 보았어요.”

사실 양갱이란 한천으로 만드는 것이 기본이지만 제국에서는 한천을 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클로에는 한천 대신 구하기 쉬운 젤라틴을 사용했다.

그리고 그건 훌륭한 선택이었다. 제국 사람들의 입맛에는 젤라틴 양갱 특유의 식감이 친숙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귀부인들이 깜짝 놀랐다.

“공작부인은 동방의 요리에 대해서도 잘 아시는군요!”

“정말 대단하세요!”

그들이 경험해 본 동방의 요리라곤 온 레스토랑에서 먹어 본 것뿐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동방의 요리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클로에가 놀라워 보일 수밖에는 없었다.

물론 클로에는 전생을 경험했기에 양갱의 요리법을 알고 있었던 것이지만……. 클로에는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정말 달콤하고 맛있어요!”

“젤리도, 푸딩도 아닌 게 식감이 정말 특이하네요.”

“쌓아 두고 먹고 싶을 정도예요!”

예상했던 대로 고구마 요리에 대한 반응이 좋은 것에 클로에는 안도감과 만족감을 느꼈다. 그녀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티 푸드가 있다면 차도 있어야 하는 게 당연하겠죠. 오늘은 두 가지의 차를 준비했으니 취향 따라 골라 드세요.”

“어머, 두 가지나요?”

클로에가 손으로 가볍게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이번엔 하녀들이 티 코지로 덮인 티팟 여러 개를 날랐다.

클로에가 중요시 여기는 것이 있었다. 바로 차와 티 푸드의 마리아쥬(mariage)였다.

이것은 원래 와인 용어지만 차에 쓰기에도 어울리는 말이었다. 마리아쥬란, 차와 티 푸드의 어울림을 뜻하는 말이다.

클로에가 이미 로네펠트 부인에게 알려 준 적이 있다시피 차와 티 푸드 사이에는 조화가 중요했다.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누르거나 방해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방해하지 않는 정도’의 마리아쥬가 중급이라면 ‘훌륭한 조화를 이뤄 서로가 서로를 북돋아 주는’ 마리아쥬가 바로 상급이다.

다른 것도 아니고 고구마를 소개하기 위한 다과회였다. 클로에는 고구마와 차, 둘 다 최고의 잠재력을 끌어낼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를 북돋아 주는’ 마리아쥬를 위해 고민했다.

“그래서, 어떤 차인가요?”

위타드 부인이 호기심과 관심 넘치는 눈으로 물었다. 클로에가 보조개가 파이도록 미소 지으며 두 종류의 티팟 중 한 종류의 티 코지를 벗겼다. 하녀가 얼른 티팟을 집어 들어 부인들의 잔에 따라 내었다.

잔에 따라 내기만 해도 구수하고 풍부한 몰트 향이 흐르는, 호박빛의 아름다운 찻물. 이 차는 분명…….

“아쌈이로군요!”

포트넘 부인이 정답을 말했다. 아쌈은 그녀가 처음으로 구입했던 홍차였다.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홍차 중 바라트 왕국에서 나는 아쌈은 특유의 풍부한 몰트 향으로 유명해요. 이 몰트 향은 엿기름 냄새, 혹은 고구마 냄새로 자주 비교되곤 하죠.”

“아하, 그래서 고구마 티 푸드에 아쌈을 고르신 것이로군요.”

“맞아요. 아쌈의 풍부한 몰트 향과 고구마는 서로의 향미를 북돋워 줄 거예요.”

클로에가 손뼉을 한 번 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럼, 한 번 시험해 보시겠어요?”

마침 모든 손님들의 잔에 빠짐없이 아쌈이 차오른 시점이었다. 부인들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아쌈과 고구마 티 푸드의 맛을 음미했다.

달콤한 고구마 크림이 가득 올라간 고구마 케이크, 그리고 따끈한 아쌈 한 잔. 이 이상 구수할 수 있을까? 그 풍부한 향에 감탄하고 있자면, 입 안에 남은 고구마의 텁텁함을 아쌈이 말끔하게 씻어 준다.

게다가, 묵직한 향미를 가진 고구마와 마찬가지로 묵직한 바디감을 가진 아쌈은 상당히 잘 어울렸다. 어느 한쪽이 눌리거나 하지 않고 좋은 조화를 이루었다.

“정말 맛있어요. 아쌈과 고구마 케이크는 정말 잘 어울리는군요.”

그때 한 부인이 물었다.

“그런데 공작부인, 아까 고구마는 서방의 차와 동방의 차 모두에 잘 어울린다고 하셨잖아요. 이렇게 동방의 차와 잘 어울리는 식재료가 과연 정말로 서방의 차에도 어울릴까요? 전 잘 모르겠어요.”

마치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클로에의 눈이 기쁜 빛을 띠었다. 그녀가 말했다.

“좋은 질문이에요. 그럼 한 번 직접 체험해 볼까요?”

클로에가 한쪽에 있던 다른 티팟에서 티 코지를 벗겼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건…….

“어머나!”

“처음 보는 형태의 다구네요.”

바로 옆구리에 긴 손잡이가 달린, 청에서 수입한 다관이었다.

전생에 살았던 국가, 한국의 전통적인 다구의 형태를 띠고 있는 다관은 사소한 장식 하나 없이 굉장히 단순한 모양의 연한 옥색이었다.

“이것은 청에서 수입한 티팟이에요. 단순하지만 깔끔하고, 우아한 곡선을 가졌죠. 예로부터 동방에서는 집정관들의 청렴함을 매우 중요시 여겼어요. 높은 지위의 사람이라면 그만큼 자신이 아니라 백성을 신경 써야 한다고 여긴 거죠.”

클로에가 설명했다.

“이 장식 하나 없지만 우아함이 있는 다관에는 그러한 청렴결백의 정신이 그대로 담겨 있어요. 청의 귀족들은 이것으로 차를 마시며 그러한 정신을 되새겼을 거예요.”

귀부인들은 깜짝 놀랐다. 청렴결백? 자신이 아니라 백성을 위하기 위해 일부러 단순한 형태의 다구를 사용한다고?

예로부터 제국의 귀족들은 화려함을 중요시했다. 자신의 부와 권력을 과시하는 것이 그들의 오랜 삶의 방식이었다.

이 자리에 모인 손님들도 그러했다. 그들 모두가 평생을 그러한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 왔다. 그랬으니, 그들 모두가 바다 건너편 먼 동방의 국가의 귀족들의 정신에 놀라움을 느낄 수밖에는 없었다.

귀부인들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서로의 얼굴을 한 번씩 보더니, 뒤늦게야 하나둘씩 말문이 트였다.

“백성을 위하기 위해 검소하게 산다고요?”

“그렇게까지 자신을 희생하다니…….”

“그렇게 살면 아주 자비롭고 백성들을 위하는 지도자가 될 수밖에 없겠군요. 정말 놀라워요.”

그들로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생활 방식이었기에 더더욱 놀라움이 배가 되었다.

특히 귀부인들 중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동방의 사람들은 전부 야만인인 줄로만 알았는데……. 훌륭한 문화와 미덕을 가지고 있었군요.”

“그러게요. 제가 잘못 생각했어요.”

클로에가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말했다.

“맞아요. 동방에는 서방과는 다른 독자적이면서도 깊고 훌륭한 문화가 있어요. 우리 서방인들은 그러한 독특한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종종 야만적이라고 평가하곤 하지만, 저는 그들이 잘못된 게 아니라 그저 우리와 다를 뿐이라고 생각해요.”

동방에 대한 차별과 오해가 만연한 제국 내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진보적인 생각이었다.

귀부인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국의 공작부인이었다. 비록 젊기는 하지만 황족 다음으로 높은 지위를 가진 여성이 아닌가.

제국의 누구보다 보수적이어도 이상하지 않을 지위를 가진 그녀가 그렇게나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다니.

물론 클로에가 그렇게나 개방적인 성격이 된 데에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나고 자랐던 그녀의 전생이 한몫했다.

어쨌든, 이런 상황에서 감히 동방에 대한 편견이나 차별적 의식을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동안 말은 안 해도 내심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귀부인들이 숙연해졌다.

그런 그들을 따스한 눈으로 지켜보던 클로에가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깼다.

“그럼, 동방의 독자적인 문화를 즐겨 볼까요?”

그녀가 손뼉을 두 번 치자 다시 하녀들이 다관을 들고 손님들의 찻잔에 차를 따라 주기 시작했다.

찻잔에 연한 녹색의 찻물이 차올랐다. 노란색을 띠는, 봄날의 새싹처럼 밝고 부드러운 연둣빛의 찻물.

“어머, 이건 홍차가 아닌 건가요?”

“수색이 정말 우아해요!”

아직 홍차 외의 차를 접해 보지 않은 귀부인들이 감탄했다.

그와 동시에 찻잔에서 올라오는 뚜렷한 향. 풍성히 익은 호박처럼 달큰한 홍차와 달리, 풋풋한 봄내가 느껴지는 정취…….

“이건 청의 녹차, 세작이라는 것이에요.”

클로에가 말했다.

“청의 녹차는 우전, 세작, 중작, 대작 등으로 나뉘어요. 모든 구분이 찻잎의 채취 시기를 기준으로 한 거죠. 우전은 4월 20일 (곡우) 이전, 세작은 5월 5일 (입하) 이전, 중작과 대작은 각각 열흘 정도 뒤에 채취한 것이에요. 물론 일찍 채취할수록 여린 새싹이기 때문에 맛과 향은 부드럽고 가벼워져요. 제가 청의 녹차 중 세작을 선정한 것도 그래서예요.”

클로에가 찻잔을 하나 들어 올렸다. 단내 없는 고소한 향이 찻잔에서 피어올라 비강을 적셨다.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청에서는 찻잎이 여릴수록 고급으로 쳐요. 그렇지만 제일 고급인 우전은 향이 지나치게 여려 묵직한 고구마에는 어울리지 않죠. 고구마가 차의 향을 완전히 덮어 버릴 가능성이 있으니까요. 그에 반해 한결 자란 잎인 세작은 우전보다 강한 향미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청의 녹차의 매력인 봄의 향을 닮은 풋풋함과 여린 젖내, 곡식 같은 고소함을 그대로 가지고 있어요.”

클로에는 전생의 일을 떠올려 보았다. 추운 겨울날 먹던 군고구마와 따스하고 고소한 녹차 한 잔. 고구마의 퍽퍽함과 단맛을 헹궈 주는 것으로 향긋한 녹차만 한 게 또 없었다.

“그럼 한번 들어 보시겠어요? 세작은 양갱과 함께 들어 보세요.”

클로에의 말에 귀부인들이 차와 양갱을 함께 먹었다.

서방의 차에는 서방의 티 푸드가 어울리듯 동방의 차에는 동방의 다과가 어울린다. 잘 익은 호박고구마처럼 달큰한 홍차와 달리, 달지 않고 산뜻한 녹차 한 모금. 여기에 달달한 고구마 양갱을 한 조각.

“어머……!”

“어떻게 이런 맛이!”

“정말 맛있어요! 차와 티 푸드가 아주 잘 어울려요.”

귀부인들의 행복한 듯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고구마 양갱의 끈적한 단맛을 씻어 주는 산뜻함은 홍차는 흉내 낼 수 없는 녹차만의 특별한 점이었다. 미뢰를 자극하는 고구마 양갱의 강렬한 맛을 마무리하는 고소하고 풋풋한 향이라니. 이렇게 깔끔할 수가 없다.

클로에가 기쁜 듯이 웃었다.

“제가 준비한 것들이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에요.”

분위기는 순조로웠다.

클로에는 홑몸이 아니기에 홍차나 녹차를 마실 수 없는 포트넘 부인을 위해 옥수수 수염차를 준비해 주기까지 했다. 이러한 꼼꼼함과 세심함 덕에, 다과회에 참석한 모든 사람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테이블 위의 접시들이 바닥을 보이자 클로에가 말했다.

“역시 마지막은 달콤한 것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좋겠죠?”

그녀가 신호를 보내자 하녀들이 또 다른 티팟을 가지고 왔다. 손님들의 빈 잔에 채워지는, 뽀얀 모랫빛의 그것은…….

“밀크티군요!”

귀부인들은 그것을 바로 알아보았다. 모를 수가 없었다. 겨울을 맞이하여 사교계에서 최고로 유행하는 음료였으니까 말이다.

찬 공기에 코와 뺨과 귀가 얼어붙은 채 집에 돌아와, 벽난로 앞에 앉아 마시는 진한 밀크티 한 잔. 뜨겁고 밀도 높은 액체가 배 속을 채울 때 함께 비강을 채우는 진득한 홍차 향, 달콤하고 부드러운 그 맛…….

제국 사교계에 차를 소개하려고 애쓰는 클로에의 노력과 말미암아 그 맛은 도무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맛이었다.

“홍차와 녹차로 시작해서 밀크티로 마무리하다니, 공작부인은 센스가 정말 뛰어나신걸요.”

“맞아요.”

귀부인들은 누가 먼저 할 것 없이 반가워하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찻잔을 입술에 가져다 댄 부인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들이 말했다.

“어머! 공작부인. 이건, 설마…….”

“네, 맞아요.”

클로에가 기쁜 듯이 말했다.

“고구마 퓨레를 넣은, 고구마 밀크티랍니다!”

* * *

클로에의 세 번째 다과회는 성황리에 끝났다. 그녀의 다과회에 초대되는 행운을 얻은 귀부인들은 누구나가 할 것 없이 이렇게 떠들어 대곤 했다.

“정말 굉장한 것을 맛봤어요! 그런 맛은 난생처음이었어요.”

“차와 티 푸드의 마리아쥬라니…… 대단한 것을 배웠어요. 그 궁합은 정말 완벽했어요.”

“이건 틀림없이 새로운 유행이 될 거예요. 그런 굉장한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워요.”

다과회에 가지 못한 사람들을 포함해, 모두의 관심과 시선이 모였다. 바로 트리플 스위트로 말이다.

이제껏 클로에의 다과회에서 소개되었던 것들은 대부분 트리플 스위트에서 출시되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12월 1일.

‘고구마 사과 잼’, ‘밤 잼’과 함께 고구마 퓨레가 듬뿍 들어 있는 트리플 스위트의 겨울 한정 상품 ‘고구마 밀크티’가 출시되었다.

그 결과는…….

“너~ 무 맛있어! 내가 예전에는 왜 이 맛있는 것을 몰랐었을까?”

고구마 밀크티를 비롯해서, 온갖 베이커리와 식당 등에서 뒤이어 출시하기 시작한 고구마 요리들에 푹 빠진 사람 중에는 윈체스터 공작 영애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그녀는 이미 한정 상품이라는 말에 홀려 값비싼 고구마 밀크티를 수십 박스 쟁여 놓은 상태였다.

수도 사교계 사이에서는 이미 고구마 돌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못생기고 천박하다’라는 색안경을 벗고 보니 고구마는 꽤나 괜찮은 식재료였다. 달콤하고, 식감도 입에 착착 달라붙을뿐더러, 요리할 수 있는 방법도 다양하고, 무엇보다 키우기가 쉬웠다.

고구마는 아무 데서나 잘 자랐다. 토양도 가리지 않고, 병충해에도 강하며, 비바람에도 강했다. 심지어 심을 때부터 수확할 때까지의 기간도 짧았다. 온실을 가진 귀족들의 경우 취미로 재배하기도 할 정도였다.

귀족들과 부유층이 찾기 시작하면서 고구마의 값이 갑자기 오르는 사태가 발생하긴 했지만, 그것도 금방 안정되었다. 키우기가 워낙 쉬웠기 때문이다.

“아가, 뭘 하고 있니?”

“아빠!”

윈체스터 공작 영애가 응접실에서 고구마 밀크티와 고구마 밀푀유로 다과를 즐기고 있는데, 그녀의 친부인 윈체스터 공작이 나타났다.

그는 자신의 아내와 딸에게, 특히 딸에게 아주 지극하기로 유명했다. 하나밖에 없는 어여쁜 딸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해 줄 정도였다.

“아빠, 나 소원이 하나 있어요.”

“소원이라고?”

공작이 냉큼 다가와 딸의 옆자리에 앉았다. 윈체스터 공작 영애가 애교스럽게 말했다.

“아빠도 요즘 고구마가 엄청 유행하는 건 알죠?”

“그럼, 알다마다. 우리 아가가 제일 좋아하는 거잖니?”

“나, 이 맛있는 것을 혼자 먹기는 싫어요. 다른 사람들도 맛있는 것을 먹었으면 좋겠어요.”

“아이고, 우리 아기는 예쁜데 착하기까지 하지!”

“그런 의미에서…….”

공작의 부담스러운 반응을 매우 자연스럽게 넘기며 윈체스터 공작 영애가 말했다.

“아빠 영지에서도 고구마 나무 (윈체스터 공작 영애는 고구마가 자라는 것을 본 적이 없어 고구마가 나무에서 열린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키우면 안 돼요? 영지민들도 마음껏 먹을 수 있게요.”

“으응?”

“제발요, 아빠. 내년 생일 선물 대신으로 해도 돼요.”

딸이 한껏 귀여운 척을 하며 아빠의 품에 안겼다. 순간 공작의 눈이 번쩍 뜨였다.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고구마는 키우기가 아주 쉽고 값이 저렴하다. 심지어 보관도 쉽다. 귀족들이 먹어도 맛이 좋지만, 사실은 빈곤한 영지민들이 식량으로 사용하기에도 훌륭한 작물이었다.

그동안은 제국 집정관들의 무지와 거부감으로 인해, 고구마는 제국 수도 일부에서만 재배되고 있었다. 하지만 만약 고구마가 영지에 널리 퍼져 나가면…… 적어도 영지민이 굶주리는 것만은 면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이른바 구황 작물이라고나 할까.

이리하여 한 영애의 부탁으로 말미암아 윈체스터 공작령에 고구마가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바텐베르크 공작령에는 진작 퍼져 나가고 있었다.

각각의 영지에서 첫 수확이 있은 이후, 고구마의 구황 작물로서의 재배에 대한 안건이 정계 중앙에 올라가기까지는 단 몇 달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빈민을 구제하기 위한 작물을 뜻하는 ‘구황 작물’이라는 개념이 제국에서 퍼져 나가기 시작한 것도, 식량 부족에 시달리며 굶주리는 제국민이 줄어들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 즈음부터였다.

한편 제국 귀족들의 무지와 편견을 깨고 구황 작물 고구마를 소개하여 제국민의 굶주림을 면하게 하는 데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인물로서 클로에 바텐베르크의 이름은 제국 내에 알음알음 알려지게 된다.

* * *

“클로에.”

속삭이는 듯한 자신의 이름에 클로에가 고개를 돌렸다.

“행복하니?”

어디서 들려오는 목소리지?

햇살이 따스한 꽃밭이었다. 많은 꽃을 꺾어 손톱 끝이 녹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전부 누군가에게 선물할 것이었다. 이것은 엘리의 것, 이것은 여진의 것, 이것은 알폰스의 것…….

달콤한 꽃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아름다운 정경과 향기에 한껏 말랑해진 가슴으로 클로에가 웃었다.

“응, 정말 행복해.”

“왜?”

“왜냐하면…….”

잠시 고민하던 클로에가 말을 이었다.

“옛날에는 내가 누구에게도 필요하지 않다고 느꼈는데, 요즘은 아니거든.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좋은 사람들과 차 한 잔을 함께하며 웃을 수 있다는 게 정말 행복해.”

목소리가 침묵했다. 곧이어 이런 말이 들렸다.

“그래? 그랬구나. 그럴 만도 하지.”

클로에가 숨을 들이켠 건 이 시점이었다.

“행복할 만도 해. 남의 자리를 빼앗았으니.”

클로에는 치마폭에 잔뜩 담아 뒀던 꽃이 쏟아지는 것도 인지하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떨리는 시선은 못 박힌 듯 정면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의 시선 끝에는…… 그녀가 있었다. 클로에, 클로에 바텐베르크가.

그녀가 무서운 눈을 하고 말했다.

“그 자리는 내 거야. 그 행복도 내 거고.”

“……!”

“클로에 바텐베르크는 나야. 네가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게 내 거란 말이야.”

클로에는 대답할 수 없었다. 오래전부터 가슴속을 짓누르고 있던 죄책감이 그녀의 혀를 묶어 버렸다.

“네 친우들도, 사이좋은 시녀와 하녀들도, 공작부인이라는 지위도, 재력도, 사업도, 알폰스의 사랑도……!”

무서운 눈을 한 클로에가 달려들었다.

클로에는 기겁해 도망치려 했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돌려줘! 전부 내 거란 말이야!”

도망칠 수가 없다. 저항할 수도 없다. 클로에는 눈을 질끈 감았다.

“……!”

클로에가 눈을 떴다.

제일 먼저 느껴지는 것은 몸을 눅눅하게 적시고 있는 식은땀이었다.

그다음으로 느껴지는 것은 단단한 팔과 따스한 품. 이 세상 무엇보다도 든든한…….

너무나 이른 새벽이었다. 클로에가 데구루루 눈을 굴려 자신을 끌어안은 사람의 얼굴을 보았다.

눈을 감고 규칙적인 숨을 내쉬고 있는 알폰스의 얼굴이 보였다. 내려앉은 속눈썹과 반듯한 콧대와 턱선, 마치 이 세계의 것이 아닌 것처럼 아름다운 얼굴…….

클로에는 순간 그 금빛 속눈썹을 만져 보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그가 단잠에서 깨고 말 것이다.

안 그래도 바쁜 사람인데 잠까지 방해할 수는 없지. 그녀는 겨우 충동을 눌러 참았다.

클로에는 그의 얼굴을 가만히 보았다. 거칠었던 호흡도, 비정상적으로 거세게 뛰었던 심박도 천천히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그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안정이 되는 그의 얼굴.

‘정말로 이 사람을 사랑해.’

단 한 순간조차 낭비하지 않고, 살아가는 모든 순간 동안 그를 사랑하고 있다.

클로에는 가슴 한구석이 저려 옴을 느꼈다.

‘……나는 남의 자리를 빼앗은 걸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이기적인 것을 알고 있지만……. 이 자리를 돌려주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행복은 이곳에 있었다. 좋은 사람들도, 열정을 불사를 수 있는 일도, 그의 사랑스러운 눈길도…… 전부 이곳에 있다.

미안하지만, 정말 이기적이지만, 이제 더 이상 그의 곁이 아닌 곳에서는 살아갈 수가 없었다. 그를 떠나기에는 너무 늦어 버렸다.

‘남의 자리를 빼앗아서 행복해지다니.’

클로에는 가는 한숨을 내쉬었다. 온몸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어쩌면 난 행복해질 자격이 없는 걸지도 몰라.’

눈을 감았다. 지나친 무게의 죄책감이 그녀의 작은 몸을 짓눌렀다.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 날 오전, 일어나 씻고 단장을 하고 아침 식사를 하고 내사를 위한 일을 하면서도 여전히 머리가 복잡했다.

편두통처럼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으나 쉴 수도 없었다. 유난히 바쁜 날이었기 때문이다. 오전부터 저녁까지 스케줄이 꽉 차 있었다.

‘차라리 잘됐어.’

클로에는 바삐 일을 해서 그림자처럼 들러붙는 죄책감을 잊어버리려 노력했다.

그날 오후였다. 클로에는 거래 상단과의 미팅을 위해 외출 준비를 했다.

황실로부터 요청이 들어왔다. 내년부터는 납품하는 차의 종류를 늘려 달라는 것이었다. 특히 좋은 우바를 납품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그 때문에 클로에는 외국의 상인들을 불렀다. 이전에 다즐링을 골랐던 것처럼 상품을 직접 보고 선택하고 싶었다.

상품 사정으로 인해 미팅 장소는 공작저가 아니라 항구였다. 클로에는 마차를 타고 항구를 향해 출발했다.

“어서 오십시오, 공작부인!”

“아이고, 공작부인 오셨습니까!”

그녀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상인들이 버선발로 뛰어나왔다. 차와 관련해서 클로에는 상인들 사이에서 소문난 대형 VIP 고객이었다.

클로에가 단정하게 웃으며 말했다.

“반가워요, 좋은 거래를 했으면 좋겠네요. 상품은 어디에서 볼 수 있나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자, 이쪽으로 오십시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상품을 갓 싣고 왔는지 항구에 정박되어 있는 무역선이 몇 척 보였다. 그 곁에 임시로 세워 둔 천막이 끝도 없이 길게 늘어서 있고, 천막 아래에는 상자가 잔뜩 쌓여 있었다. 클로에가 요구한 다양한 차가 담긴 상자일 것이었다.

하루 종일 고민과 죄책감으로 무거웠던 그녀의 가슴이 순간 콩닥콩닥 뛰었다. 꼭 무거운 갑옷을 벗어 던진 것처럼 가벼운 기분이 들었다.

클로에는 얼른 그쪽을 향해 다가가서 꼼꼼히 찻잎의 상태와 품질을 살피기 시작했다.

‘차라는 건 정말 신기하다니까. 전부 똑같은 차나무, 카멜리아 시넨시스의 잎을 가공한 건데 어마어마하게 다른 향이 나.’

다양한 찻잎을 시향해 보며 그녀가 생각했다.

과연 그랬다. 어떤 찻잎은 은은한 꽃향기가 났고, 풋풋한 해조류 냄새가 나는 찻잎도 있었으며, 농후한 과일 향이나 태운 설탕, 구운 빵의 냄새가 나는 찻잎도 있고, 나무껍질이나 향신료의 냄새가 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대단히 청량하고 맑은 향부터 진득하고 묵직한 그을음이나 흙의 냄새가 나는 찻잎까지.

정말이지 이 순간만큼은 근심 걱정이 사라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찻잎을 살펴보던 클로에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혹시 시음을 해 볼 수 있을까요?”

“암요, 물론입니다. 얼마든지요.”

상인들이 호의적인 태도로 반응했다. 곧 다양한 차의 시음을 준비하느라 상단의 사람들이 부산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한편 이 상단의 상인들 중 제일 나이가 어린 소년은 이 상황이 못마땅했다.

‘제국의 귀족이 뭘 안다고. 제국인들이 차를 마시는 사람들을 야만인으로 여긴다는 것은 세 살배기 어린애도 아는데.’

시향이니 시음이니 제법 흉내는 내고 있었지만 제국인이니 정말로 차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닐 것이었다. 그냥 외국의 물건을 수집하는 수집벽이 있는 거만한 귀족일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생각한 소년은 시음을 준비하는 자리에서 슬쩍 빠진 뒤 클로에에게 다가갔다. 모든 상인들이 분주했기 때문에 그녀의 곁에는 시녀와 하녀 몇 명밖에 없었다.

“안녕하세요, 부인. 뭔가 도와드릴 것은 없으신지요?”

소년이 시동(侍童)인 척하며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클로에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아요.”

“부인께서는 차에 대해 대단히 박식하시네요. 무척 감탄했어요.”

소년이 아부하는 척 말했다.

“부인께서는 어떤 차를 제일 좋아하세요?”

“음, 청차와 녹차도 좋아하지만…… 역시 제일 선호하는 것은 홍차예요.”

옳지, 그거 잘됐다. 소년이 샐샐 웃으며 말했다.

“홍차, 좋죠. 홍차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어요. 부인께서는 홍차가 어떻게 발명되었는지 아세요? 온에서는 처음에 녹차를 수출했어요. 그런데 항해 도중 긴 시간이 흐르고, 비바람을 맞으면서 찻잎이 발효된 거예요. 결국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녹차가 홍차가 되어 있었는데, 그게 수출지에서 무척 인기가 많았어요. 그래서 그 이후로는 일부러 찻잎을 발효시켜 홍차를 만들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예요. 재미있지 않나요?”

그럴싸한 이야기지만 이 이야기는 거짓말이다. 차를 자주 마시는 국가에서 태어난 소년은 이 이야기가 왜 거짓말인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귀부인은 홀라당 속아 넘어갈 것이 분명했다. 소년은 장난기를 숨긴 채 귀부인을 올려다보았다. 이 우아하고 예쁜 귀부인이 그의 새빨간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 감탄하는 모습이 기대가 되었다.

그런데 그의 기대를 완전히 배반하는 일이 일어났다.

“재미있는 이야기네요.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닐 거예요.”

클로에가 친절하게 말했다.

“녹차는 제작 과정 중 열처리를 해서 더 이상의 산화가 일어나지 못하게 막아요. 그래서 아무리 오래 보관해도 홍차가 되거나 하지 않고 녹차인 채로 있을 수 있는 거죠.”

그녀의 말대로였다. 녹차와 홍차의 차이는 산화가 얼마나 되었느냐였다. 녹차는 찻잎을 수확한 뒤 더 이상 산화가 일어나지 못하게 열처리를 한 것이고, 홍차는 찻잎을 완전히 산화시킨 것이다.

우롱차(청차)는 바로 그 중간지점에 있는 차였다. 약 20~80%가량 산화를 시킨 것을 우롱차라고 부른다.

그녀의 말에 소년은 깜짝 놀랐다. 이걸 어떻게 안 거지? 차를 좋아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녹차는 열처리를 하기 때문에 아무리 오래 두어도 홍차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래서 그는 몇 번이나 이 이야기를 우려먹었다. 누군가가 귀찮게 홍차가 어떻게 발명되었는지를 물어보거나 할 때 말이다.

소년이 당황한 얼굴로 입을 뻐끔거렸다.

“그, 그걸 어떻게…….”

“그리고 하나 더. 홍차는 발효로 만드는 게 아니에요.”

“뭐, 뭐라고요?”

클로에가 친절하게 설명했다.

“발효란 미생물로 인한 물질의 변화를 말하는 거죠. 홍차는 미생물이 아닌 산화 과정을 통해 제작해요. 여기서 산화(酸化)란 산소와 접촉해 물질이 변성을 일으키는 것을 말해요. 예를 들어 사과를 깎아 놓으면 갈색이 되는 것처럼 말이죠. 미생물을 이용한 발효로 만드는 차는 보이차와 같은 흑차예요.”

차에 대해 잘 아는 사람 중에서조차 산화와 발효의 차이를 구분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심지어 홍차를 발효로 만든다고 표기한 책도 있을 정도다.

“그, 그, 그럴 수가…….”

차에 대해 잘 모르는 귀부인을 놀려 줄 생각에 가득 차 있던 소년은 오히려 된통 한 방 먹어 버렸다.

소년이 어버버하고 있던 그때였다.

“이 자식! 어딜 감히 공작부인 앞에서 경거망동이냐!”

“켁!”

상단주가 달려와 그의 뒷덜미를 잡았다. 클로에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까지 소년이 그가 보낸 시동인 줄 알았던 것이다.

상단주는 소년이 장난기가 많다는 것을, 그래서 거래 상대에게도 가끔 장난질을 치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소년의 귓가에 대고 으름장을 놓았다.

“감히 VIP 고객께 허튼짓이라도 했던 거라면 널 가만두지 않겠다! 숨이 넘어가기 직전까지 굶을 줄 알아라!”

“켁, 켁, 이거 놔요!”

상단주가 클로에를 향해 몸을 돌렸다. 방금 전 무시무시한 말을 한 그 사람이라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저자세를 취했다. 놀라운 태세 전환이었다.

“혹시 저희 쪽 아이가 공작부인께 실례를 해 드린 것은 아닌지 염려스럽습니다. 이 아이가 어려서 아직 철이 없습니다.”

클로에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가볍게 웃었다. 그녀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왔다.

“아니에요. 그쪽 분이 아주 재밌는 이야기를 해 주셨는걸요. 오히려 즐거웠어요.”

“네? 그게 정말입니까?”

이 말에 상단주뿐만 아니라 소년 역시 깜짝 놀랐다. 소년이 입을 떡 벌리고 서 있는데, 상단주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는 명백히 ‘너 이따가 보자!’라는 의미가 담긴 표정을 짓더니 다시 클로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가 말했다.

“그…… 그러했다니 다행입니다. 저는 또 이 아이가 공작부인의 심기를 불편하시게 만들어 드렸다면 어쩌나 했지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소년이 멍하니 클로에를 바라보았다. 제국인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차에 대해 박식한 데다가 이렇게나 친절하기까지 한 귀부인이라니!

게다가 예쁘기까지!

그런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괜히 얕잡아 보며 장난질을 치려고 했던 과거의 자신이 미워질 지경이었다. 소년의 가슴속에서 동경심과 존경심이 절로 피어올랐다.

* * *

클로에는 시음을 하고, 찻잎을 고르느라 긴 시간을 보냈다.

그녀가 이렇게 열심히 차를 고른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물론 그녀가 좋아하는 일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클로에 바텐베르크는 나야. 네가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게 내 거란 말이야.’

잠시만 주의를 돌리면 어젯밤 꾸었던 꿈이 떠올라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음, 이것도 맛있네. 이건 향이 정말 독특한걸. 그리고 이건…….’

이렇게 머리가 복잡하고 안 좋은 생각이 들 때에는 차라리 바쁘게 다른 일에 몰두하는 편이 나았다. 그것이 클로에의 지론이었다.

그런 이유로 쇼핑에 몰두한 지 한참 뒤,

“살펴 가십시오, 공작부인.”

“정말 감사합니다!”

클로에는 상인들의 배웅을 받으며 마차를 타고 떠났다. 그녀가 구매한 상품들은 오늘 저녁 짐 마차를 타고 도착할 것이다.

마차 안에 앉아 있던 클로에는 긴 두루마리를 펼쳤다. 그녀가 구매한 상품들의 목록이 적힌 영수증이었다. 영수증은 풀어도 풀어도 길게 이어졌다.

‘너무 많이 사 버렸다…….’

클로에가 끙 소리를 내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황궁에 새로 납품할 것과, 트리플 스위트에서 새로 출시할 것, 개인적으로 마실 것 등등을 구매할 예정이었기에 좀 많이 살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설마하니 이렇게 많이 사게 될 줄은 몰랐다.

지금 티룸에도 차가 잔뜩 쌓여서 남아 있는데, 자그마치 마차 세 대 분량을 더 구매하고 만 것이다.

‘역시 정신적으로 지쳐 있을 때는 쇼핑을 하면 안 돼.’

일전의 월동 준비할 때를 떠올리며 클로에가 한숨을 쉬었다.

쇼핑에 지나치게 몰두했다. 물론 재정에 무리가 갈 정도로 산 건 아니지만, 차가 아까웠다. 차란 신선도가 중요해서 많이 쌓아 두기만 하는 게 능사가 아니니까.

찻잎을 보관할 수 있는 기간은 차의 종류에 따라 다르다. 산화도나 발효도가 높을수록 오래 보관할 수 있고 거의 산화시키지 않은 녹차, 백차는 그해 안에 마셔 주는 것이 좋았다.

보관이 잘못되거나 지나치게 오래되어 향이 날아간 경우 차에서는 아무 맛도 나지 않거나 낙엽 맛, 지푸라기 맛이 난다. 이렇게 되면 아까워도 버리는 수밖에 없다.

물론, 되도록 맛이 없어지는 날을 미루려면 잘 보관하는 수밖에 없다. 찻잎은 향이 잘 날아가고 주변의 냄새를 쉽게 흡수한다. 그러한 일을 막으려면 찻잎을 밀봉 포장해서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는 서늘하고 건조한 곳에서 보관해야 하는 것이다.

클로에는 전생의 기억이 떠올랐다. 스트레스를 받은 날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차를 한정판이라고 대량 구매했다가 하나하나 힘겹게 밀봉 포장하던 일.

제일 좋은 밀봉 포장 방법은 은박 봉투를 구매해서 찻잎을 담아놓고 입구를 실링기나 고데기, 다리미 같은 것으로 지져서 봉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도 향이 조금씩 날아가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된다.

클로에는 스트레스로 인한 지나친 충동구매에 대해 깊이 반성하기로 했다. 그리고 다음부터는 스트레스를 받을 때에는 절대 쇼핑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 * *

며칠 뒤, 로네펠트 부인의 초대를 받아 찾아갔다가 이런 말을 들었다.

“혹시 저번에 해 주셨던 수업을 한 번만 더 해 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공작부인께 수업 들었던 것을 자랑했더니 자기도 듣고 싶다는 사람이 많아서요.”

클로에가 웃었다. 분명, 저번 수업은 무척 즐거웠었다. 저번과 같은 분위기라면 한 번 더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가벼운 마음으로 그녀가 물었다.

“그래요? 총 몇 분이신가요?”

“열한 명이에요.”

“네에?”

클로에는 놀라서 스콘에 클로티드 크림을 바르던 나이프를 떨어뜨릴 뻔했다.

열한 명이라니! 많아도 너무 많았다.

게다가 클로에는 여전히 자신이 남을 가르쳐도 되는 사람인지 확신하지 못했다. 일전에 했던 수업은 인원이 적어 ‘친구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 정도라고 자신을 설득할 수 있었지만 열한 명은 지나치게 본격적이 아닌가.

클로에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것은 힘들 것 같네요, 부인. 아직 저는 제 그릇이 남을 가르쳐도 될 정도라고 생각하지 않아서요.”

이 말에 로네펠트 부인은 깜짝 놀랐다. 가르치는 일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남을 가르칠 그릇이 되지 않아서’라고?

‘일부러 겸양을 떠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로네펠트 부인은 눈치가 좋은 편이었다. 그녀는 클로에가 진심으로 저 말을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로네펠트 부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클로에가 스스로를 지나치게 과소평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인품도, 지식도, 능력도 클로에만큼이나 이 일에 적합한 사람은 없었다.

로네펠트 부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전부터 느꼈던 거지만……. 바텐베르크 부인은 자신에 대한 자신감과 믿음이 부족한 것 같아.’

로네펠트 부인은 그 사실이 안쓰러웠다. 만일 자신이 그 정도의 능력과 실력을 갖추고 있었더라면 일 년 내내 콧대를 치켜들고 살았을 것이다.

보아하니 클로에가 가르치는 일을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아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저 자신감이 부족해서 하고 싶고 잘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은 비극이다. 로네펠트 부인은 상대를 좀 더 꼬드겨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부인. 제국에 바텐베르크 부인만큼이나 뛰어난 차에 대한 전문가가 어디 있다고 그러세요? 게다가 지난 수업, 정말 재미있고 유익했어요. 그냥 그대로만 해 주시면 돼요. 열한 명이어도 별로 달라지는 건 없을 거예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클로에는 수업하는 것이 무척 즐거웠다. 가능하다면 또 그런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면 했다.

그러다 보니 로네펠트 부인의 설득이 몹시 달콤하게 들려왔다.

‘괜찮지 않을까? 열한 사람이라곤 해도 사실 아주 많은 인원은 아니고……. 지난번에 한 번 해 봤으니 두 번은 어렵지 않을 거야. 로네펠트 부인도 이렇게 열심히 설득하는데, 거절하기 미안하잖아.’

갈등하던 클로에는 결국 못 이기는 척 로네펠트 부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로네펠트 부인은 진심으로 기뻐했다.

한편, 클로에로부터 두 번째 수업에 대해 전해 들은 포트넘 부인은 이렇게 반응했다.

“분명 정말 좋은 소식이지만……. 뭔가 아쉽네요.”

“아쉽다고요?”

“네. 저만 부인의 수제자이고 싶었거든요.”

포트넘 부인이 애교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바텐베르크 부인의 최고의 애제자는 당연히 저일 거예요. 그렇죠? 제 말이 맞죠?”

친구의 그런 모습이 웃기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클로에는 깔깔 하고 한참을 웃었다.

두 번째 수업 역시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인원은 많아졌어도 모두의 수업 태도가 무척 좋았기에 큰 어려움 없이 수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수업에 참여한 부인들의 반응도 무척 좋았다. 클로에는 이 사실이 무척 자랑스러웠다.

그래서 그날 저녁, 함께 티타임을 가지면서 알폰스에게 실컷 자랑을 했다. 수업에서 무슨 일이 있었고, 뭐가 즐거웠고, 누가 어떻게 반응을 했다 등등, 미주알고주알.

“…….”

알폰스는 클로에의 그런 모습이 좋았다. 두 사람이 티룸에서 나누는 잡담 중에서는 대부분의 비중을 클로에가 차지했다. 원래 알폰스가 과묵한 편이기도 했지만, 그가 클로에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녀가 즐거운 듯 재잘대는 일상의 이야기가 좋았다. 그럴 때 그녀가 내뿜는 활기가, 그녀의 반짝거리는 눈이 좋았다.

사실, 가능하다면 온종일 곁에 두고 싶었다. 그녀의 모든 일상과 시간이 자신만으로 가득 찼으면 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는 것이 현실이 아닌가. 그러니 적어도, 함께 있지 않은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물론 그녀가 무엇을 했다 정도는 매일 집사에게 보고받고 있지만 그것으론 부족했다. 그녀의 모든 것을, 일상 중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빠짐없이 알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그녀의 함께하지 않은 시간마저 전부 소유하고 싶었다.

알폰스가 재떨이에 시가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정말 즐거우셨겠습니다.”

“네, 진심으로요. 가능하다면 다음에 또 하고 싶어요.”

클로에가 너무나 사랑스러운 얼굴로 웃었다. 알폰스는 그 얼굴을 보며 묘한 감정을 느꼈다.

그녀를 사랑한다는 것은 행복하면서도 불안한 일이다.

감정에 무딘 그이지만 느낄 수 있었다. 클로에는 자신을 사랑하지만, 그와 동시에 너무나 많은 것을 사랑하고 있었다.

서로를 사랑하나 그들의 사랑은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사랑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은 그녀와 달리 그가 사랑하는 것은 그녀뿐이다. 그가 원하는 것도. 그가 필요로 하는 것도.

그 사실이 불안하고, 괴롭다. 그녀의 최우선 순위가 자신이 아닐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두렵다.

하지만 어찌할 수 없었다. 만일 어찌할 수 있다고 해도 과연 자신이 그렇게 할지도 의문이었다. 알폰스는 그녀의 그런 부분 역시 사랑했으므로.

즐거운 것, 좋아하는 것에 둘러싸인 그녀는 두려울 정도로 사랑스럽다.

좋아하는 것들에 둘러싸여 있는 그곳만이 그녀가 있어야 할 자리라고, 알폰스는 그렇게 믿었다.

그렇다곤 해도 여전히 그녀의 전부를 가지고 싶다는 욕심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는 평정을 가장하기 위해 새까만 속내를 숨기고 아무렇지도 않은 동작으로 새 시가를 꺼내 들어 입에 물었다. 그러고는 불을 붙이며 물었다. 되도록 아무런 감정도 내비치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그런 일을 하면서 제 생각이 들기도 합니까?”

“네?”

뜻밖의 질문에 클로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클로에는 순간 자신이 들은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의 입에서 나오기에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클로에가 멍한 얼굴로 알폰스의 얼굴을 보았다. 언제나처럼 대단히 잘생기고 진중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그 얼굴에서 나온 말이 ‘다른 일을 하면서 자기 생각을 몇 번 하느냐’라니? 아무리 보아도 어린애 투정 같은 말이지 않은가.

잠시 멍해져 있던 클로에의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다른 일에 몰두하는 것을 질투하는 건가?’

설마……!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뜻이라고밖엔 생각되지 않았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입꼬리가 괜히 올라갔다.

‘왜 이렇게 귀엽지?’

클로에가 자꾸만 올라가려 하는 입꼬리를 내리누르려고 애쓰며 생각했다.

귀엽다니? 눈앞에 있는 저 남자는 어느 모로 봐도 객관적인 귀여움이라곤 한 톨도 없는 남자다.

사실 클로에 그녀 외의 대부분의 사람은 알폰스를 보면 귀엽다고 생각하긴커녕 두려워하거나 긴장하는 게 전부니까 말 다 했다.

그런데 왜, 저런 무뚝뚝하고 냉혈한 남자가 그녀의 눈에는 이토록 귀여워 보이는지 알 수 없었다. 만일 그녀의 이런 평을 키엘이나 기사들이 들었다간 다들 기함해서 뒷목을 잡고 쓰러질 것이었다.

알폰스가 어떤 대답을 원하는지는 알겠지만 그것을 쉽게 주고 싶지는 않았다. 클로에는 괜한 장난기에 이렇게 말했다.

“글쎄요. 어땠더라? 잘 기억이 안 나네요.”

순간 알폰스의 매끈한 미간에 주름이 패었다.

‘이 여자가.’

하여간에 까다로운 여자였다. 은은하게 느껴지는 짜증에 알폰스는 시가 연기를 깊게 들이쉬었다가 다시 뱉었다.

기본적으로 남의 장난기에 넘어가 주는 것은 그의 취향이 아니다. 그는 그런 시간 낭비 따위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앞의 이 여자는 그에게 있어 셀 수도 없이 많은 예외를 만드는 사람이다.

장난을 싫어하는 것 이상으로 그는 그녀의 대답이 듣고 싶었다. 되도록 빨리, 지금 당장, 듣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알폰스는 인생 최초로 남의 장난질에 넘어가 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어떻게 하면 기억이 나시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그의 미간에 팬 주름에서 불편한 심기가 느껴졌다. 클로에는 그 모습이 너무나 귀엽고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더욱 장난기가 들어 그녀가 대답에 뜸을 들였다.

“흐으음, 글쎄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클로에가 고민하는 척 흠 소리를 냈다.

“…….”

알폰스는 주름진 미간으로 그녀가 그러는 것을 잠자코 기다려 주었다. 인내심이 강해서 다행이었다.

한참 뜸을 들이고 나서야 남편 괴롭히기는 이만하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클로에가 반달처럼 접은 눈을 굴려 알폰스를 보았다. 그녀가 새초롬하게 말했다.

“이렇게 하면 기억이 날 것 같아요.”

그러면서, 검지로 자신의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그것을 보는 순간 알폰스는 불편했던 심기가 탁 풀렸다.

한 방 맞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기분 좋은 만족감이 혈류를 타고 흐른다. 심장이 기분 좋은 감각으로 박동한다.

정말이지 이 여자는, 어디까지 사랑스러워지려는 건지.

그의 미간에서 주름이 사라졌다.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알폰스는 얼마 타지 않은 시가를 재떨이 위에 올려 둔 뒤, 일어나 아내의 곁에 가서 앉았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두르곤, 귀여운 입술에 입 맞추었다.

한참이나 이어진 입맞춤 끝에 두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알폰스가 물었다.

“이제 기억이 나십니까?”

몽롱한 기분에 취해 있던 클로에는 그의 질문을 이해하는 데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그녀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으, 으음……. 나는 것 같기도 해요.”

“몇 번입니까?”

“음…….”

아무리 생각해도 이 사람, 키스를 너무 잘한단 말이야. 클로에로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경지였다.

그녀의 뺨이 붉어졌다. 부끄러운 듯이 그녀가 말했다.

“하, 한 번……? 두 번?”

이 말에 알폰스는 잠시 멈칫했다. 고작 한두 번밖에 생각 안 한다고?

그러나 곧 그녀의 말의 속내를 이해했다. 알폰스의 입가에 가벼운 웃음이 떠올랐다.

“아직 부족하신가 봅니다.”

“…….”

클로에는 대답하지 않고 시선을 피했다. 아까는 잘만 유혹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지. 귀엽게.

알폰스가 다시 한 번 그녀의 입술 위로 입술을 겹쳤다. 끈적한 살덩이와 열기가 두 사람 사이를 오갔다.

지나친 자극에 무릎 위에 올려놓은 클로에의 손가락이 치맛자락을 잡아 쥐었다.

다시 한 번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그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아직도 한 번입니까?”

“아, 아니요.”

“그럼?”

허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그의 손길이 이상하게 야하게 느껴졌다. 등골을 타고 짜르르 올라오는 감각에 그녀의 뺨이 더더욱 달떠 올랐다.

“사실은 세 번, 아니 네 번…….”

그때였다. 그의 달콤한 손길이 멈추었다. 클로에가 놀라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반면 알폰스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오히려 두 손을 그녀에게서 떼어 들어 올리기까지 했다. 그녀를 조금도 건드리지 않겠다는 뜻으로 보였다.

“정말입니까?”

그가 속삭였다.

“거짓말은 허락하지 않겠습니다.”

그녀로서는 거역할 수 없을 정도로 유혹적인 목소리였다. 클로에는 더 이상 도저히 거짓말할 수 없었다. 그녀가 시선을 애써 피하며 말했다.

“……사실은, 많이.”

“얼마나 많이?”

“아주…… 많이요.”

그 순간, 고집스럽고 무뚝뚝해 보이던 그의 입가가 휘어 올라갔다.

이번에 견딜 수 없게 된 건 그의 쪽이었다. 그는 클로에의 입술을 집어삼키며 그녀의 몸을 단단한 팔로 옭아맸다. 그의 손에 의해 가녀린 몸이 소파 위에 누였다.

소파에 길게 누워 클로에의 몸을 끌어안은 채 허리와 탐스러운 엉덩이 선을 쓰다듬으며 그녀의 입술을 탐하던 알폰스는 곧 입을 떼었다. 입술과 입술 사이로 긴 은사가 늘어졌다.

그는 탐욕과 열망이 담긴 눈으로 자신의 품에 안긴 몸을 훑어보았다. 소파 위로 구불구불 흐트러진 밤색 머리카락. 키가 훤칠한데도 가냘픈 어깨. 팔 하나로도 감을 수 있을 정도로 가는 허리. 치마폭 아래로 드러난 다리와 앙증맞은 발.

알폰스는 마치 이 아름다운 정경을 하나하나 눈에 새기려는 양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녀의 옷의 리본을 풀어 내렸다.

클로에는 그의 강렬한 눈빛 앞에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절절 끓는 정욕과 열정이 담긴 눈이 자신의 몸을 쓸어내리고, 쓰다듬었으며, 애무하고 있었다. 그저 보이는 것만으로도, 그의 시선 끝에 있는 몸의 부위가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

그는 클로에의 드레스를 벗겨 낸 뒤 그녀의 드러난 상체를 샅샅이 살펴보았다. 뽀얀 어깨 아래로 그녀는 상체에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집에서는 코르셋을 잘 입지 않는 편이었다.

“아, 알폰스……. 왜 그렇게 들여다보는 거예요.”

클로에가 투정 부리듯 말했다. 그녀의 얼굴은 부끄러움과 왠지 모를 흥분감에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알폰스는 그런 그녀의 팔과 어깨에 이어 봉긋하게 부푼 가슴을 살펴보았다. 그 하얀 두 덩이의 가슴과 앙증맞은 열매 같은 분홍색 선단을 눈에 담자, 그도 슬슬 자신의 인내심이 고갈되는 것을 느꼈다. 알폰스는 그 분홍색 열매를 입에 물었다.

알폰스는 능숙하게 혀끝으로 열매를 굴리고 핥았다. 그가 뜸을 들였기 때문인지, 단지 가슴을 애무할 뿐인데도 클로에는 몸이 행복의 비명을 지르는 것만 같았다.

“읏, 알, 폰스…….”

몸이 바로 이것을 바랐다고, 더한 것을 원한다고 환호성을 지르는 것이 느껴졌다. 클로에는 애타는 마음에 애꿎은 소파 등받이를 쥐어뜯었다.

“아아, 알폰스. 조, 좀 더…….”

저도 모르게 내뱉은 클로에는 화들짝 놀랐다. 좀 더 라니. 자기 자신이 말도 안 되게 음란해 보였다.

혹시 알폰스가 놀라거나, 좋지 않게 볼까 싶어서 그녀가 알폰스의 얼굴을 흘끗거렸다. 아니나 다를까 알폰스는 조금 놀란 얼굴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반응은 클로에의 예상과는 달랐다.

“정말이지…… 이 이상 인내심을 자극하지 마십시오.”

늘 단정하던 그의 입가가 비틀리고 흰 이가 드러났다. 알폰스는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클로에의 어깨를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제가 얼마나 참고 있는지, 알긴 아시는 겁니까?”

그 말에 클로에는 깜짝 놀랐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눈에 알폰스는 신사인 척 하는 짐승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앞에서는 언제나 빈틈없고 단정한 신사 그 자체이지만, 둘이 있으면 기회만 생기면 그녀를 괴롭혀 대는 짐승이 되곤 했다.

그런 그가 참고 있다고는 추호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네? 아, 아흐읏. 참, 아요? 알폰스가?”

알폰스는 조금 거칠어진 태도로 그녀의 어깨와 가슴에 몇 개나 되는 잇자국을 내더니, 배꼽을 혀로 둥글리다가 그녀의 배에 대고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의 달콤한 향기가 비강에 가득 차올랐다. 당장 그녀의 안쪽에 밀고 들어가고 싶은 충동을 참으려고 한 행동이었으나, 그 달콤한 향에 취하기라도 한 건지 오히려 역효과가 났다.

알폰스는 속치마를 벗겨 던지곤 그녀의 속옷을 옆으로 밀어제쳤다. 당장이라도 파고들고 싶은 그녀의 국부가 드러났다. 그녀의 단내가 더더욱 강하게 났다. 알폰스는 충동에 져 버려 그녀를 거칠게 밀어붙이지 않기 위해 속으로 제국의 형사법을 8조 1항부터 9항까지 외우기 시작했다.

“물론입니다.”

“어…… 어째서죠?”

“제가 참지 않으면 부인을 아프고 힘들게 할 테니 말입니다.”

알폰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클로에의 국부에 혀를 섞었다.

클로에에게 곧장 강렬한 자극이 밀어닥쳤다. 그의 혀가 뜨거운 속살을 훑더니 작은 구슬을 탐하기 시작했다.

“아, 흐으읏! 아아!”

그녀는 교성을 뱉었다. 허리가 제멋대로 비틀리고 뒤로 구부러졌다. 파도처럼 밀어닥치는 쾌감 속에서 클로에는 그가 했던 말을 생각했다.

그의 말이 이해가 될 것도 같았다. 그녀의 몸은 이미 그에게 많이 익숙해진 상태였지만, 그의 물건은 여전히 위험할 만치 크고 흉악했으며, 클로에의 몸은 허약하고 섬세했다.

클로에는 언제나 알폰스가 자신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가 언제나 그녀를 충분히 풀어 주고 잔뜩 젖어 들게 만들고 나서야 그녀의 안에 들어온다는 사실도.

그에 반해 클로에는 단 한 번도 참아 본 적이 없었다. 욕망이 생길 만하면 언제나 알폰스가 먼저 다가왔고, 그녀의 몸을 즐겁게 해 주었다. 그래서 그녀는 언제나 조금도 인내하는 일 없이 그를 받아들이는, 그를 안에 품는 행복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 사실을 생각하니 새삼 감동적이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여전히 그의 애무는 이어지고 있었다. 입술을 짓씹고, 눈물이 날 정도의 쾌감에 떠밀리면서도 클로에는 다리를 뻗었다.

그녀가 스타킹을 신은 발로 그의 잔뜩 솟아오른 바지춤을 툭 건드렸다. 이 예상치 못한 접촉에 알폰스가 흠칫 놀라며 입술을 떼었다. 놀란 듯 자신을 돌아보는 저 붉은 눈동자가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클로에는 무척 부끄러웠지만, 발로 조심스레 그의 솟아오른 곳을 어루만졌다. 그가 자신을 만져 주었던 기억들을 되새기면서 조금씩 둥글리고 문지르기도 했다.

그녀의 애무에 알폰스의 이마가 찡그려졌다.

“부인, 이게 무슨…….”

클로에는 잔뜩 붉어진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고 있었다. 손가락 사이로 순진한 녹색 눈동자를 드러내며 그녀가 물었다.

“싫으신…… 가요?”

“그럴 리가 있습니까.”

뒤늦게 그녀의 의도를 깨달은 알폰스가 그녀의 얼굴 여기저기에 입을 맞추었다. 무척 부끄러웠지만 그것이 매우 기분 좋아서 클로에는 손 아래에서 웃었다.

“다행이에요. 저도, 알폰스를 기분 좋게 해 드리고 싶었어요.”

어설픈 애무를 계속하면서, 그녀가 속삭였다.

알폰스는 뜨거운 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자신을 얼마나, 끊임없이 자극하고 있는지 그녀는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바지 앞섶을 풀었다. 그의 거대한 기둥이 모습을 드러내자, 클로에가 몸을 일으켜 그것을 손에 쥐었다.

뜨겁고 단단한 그것의 끝에서는 투명한 액체가 조금씩 흐르고 있었다. 클로에는 어설픈 손길로 그것을 위아래로 문질렀다. 곧 그 끝에서 울컥 하며 더 많은 양의 액체가 흘러나왔다.

그녀가 애무를 해 준다는 것은, 애무 자체도 자극적이지만 무엇보다 시각적인 자극이 굉장히 강했다. 그녀가 순한 눈망울로, 자신이 잘하고 있는 건지 확신이 없어 이쪽을 흘끗거리며 열심히 애무를 하는 모습은 정말로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속을 들끓게 만들었다.

견디지 못한 알폰스는 그녀를 덥썩 끌어안고는 그녀의 입술에 다시 입 맞추었다.

“으읍!”

클로에는 당황하면서도, 그의 물건을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그녀는 키스에 최선을 다해 응대하면서 작은 손으로 기둥을 열심히 애무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한 번에 익숙지 않은 두 가지 일을 해내려고 애쓰는 그녀가 더더욱 견딜 수 없이 사랑스러웠다.

한 손으로는 그녀의 허리를 받치고,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음핵을 간질이던 알폰스는 곧 참지 못하고 그녀의 손에서 물건을 빼냈다. 그가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깨달은 듯한 클로에가 속삭였다.

“오늘은 참지 말아요. 나를…… 마음대로 해도 괜찮아요.”

그녀의 둥근 눈매가 가늘게 호선을 그렸다.

정말이지. 누구보다도 수줍음을 타고, 누구보다도 순진하면서도 누구보다도 위험한 여자였다.

제일 큰 문제는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지 자각이 없다는 것이었지만.

알폰스는 이를 악물며 그녀의 안쪽을 향해 똑바로 파고들었다. 그를 애무하면서도 흥분했던 것인지 상당히 젖어 든 그녀의 안쪽은 그를 어렵지 않게 받아들였다.

“으…… 흐응!”

그가 끝까지 들어오자, 아랫배가 가득 차는 만족감에 가슴이 떨렸다. 하지만 그녀의 탐욕스러운 몸은 그 이상을 바라고 있었다.

클로에가 저도 모르게 애타는 눈으로 알폰스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그것에 호응하듯 그녀를 있는 힘껏 밀어붙였다.

“아흐으!”

클로에의 허벅지가 파르르 떨렸다. 불에 델 듯 뜨거운 감각이 그녀의 안쪽을 가득 채웠다. 알폰스는 입맛을 다시며 몇 번이나 더, 계속해서 그녀를 밀어붙였다.

퍼억, 퍼억, 살과 살이 부딪치는 소리와 찰방이는 음란한 소리가 방을 가득 채웠다.

아랫배부터 시작해서 온몸을 떨리게 만드는 쾌감에 클로에는 어찌할 줄을 모르고 소파를 쥐어뜯었다. 그것을 눈치챈 알폰스가 그녀의 손을 붙잡아 자신의 목에 감도록 했다.

클로에는 있는 힘껏 그의 목에 매달렸다. 마주 본 채 그를 끌어안으니, 그의 얼굴이 너무나 잘 보였다. 알폰스의 찡그려진 금빛 눈썹. 미간의 주름과,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 그의 깊고 강렬한 눈동자와 점점 자제력을 잃어가는 얼굴.

그녀는 자신의 얼굴이 보인다는 사실조차 잊고 그 얼굴을 정신없이 바라보았다. 자신의 몸이 기뻐하고 있는 것도 좋았지만, 그의 반응 하나하나가 그가 기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듯해 더욱 행복했다.

클로에는 마음껏 그에게 매달렸다. 그의 땀에 젖은 와이셔츠가 살갗에 달라붙는 것이 느껴졌다.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곧 절정이 찾아왔다. 클로에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의 양팔이 어찌나 세게 끌어안았는지 몸이 으스러질 것만 같았지만 그것마저도 좋았다. 그날 클로에는 몇 번이고 그의 품에서 몸부림쳤다.

* * *

새로운 납품 계약에 대해 황제와 의논할 일이 있었다. 입궁한 뒤 다시 돌아오는 길, 클로에는 아서와 마주쳤다.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클로에가 먼저 예를 갖추며 인사했다. 그 모습을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로 지켜보던 아서는 클로에와 눈이 마주치자 씩 웃었다. 아서가 제안했다.

“오랜만이야, 클로에.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같이 산책하지 않을래?”

“송구하지만 바쁜 일이 있어서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전하.”

고민하는 척도 하지 않는 단호한 거절이었다. 그러나 아서는 포기하지 않고 말했다.

“할 말이 있어서 그래.”

“송구하지만 자리를 옮기는 것은 어렵습니다. 이곳에서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도저히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철벽이었다. 아서가 입맛을 쩝 다셨다.

‘내가 저럴 줄 알았다니까. 옛날에는 저렇지 않았는데.’

다른 사람도 아닌 황자 아서 블라디미어다. 이제껏 그를 거절했던 여자가, 그것도 이렇게나 단호하게 거절했던 여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었던가?

만일 옛날 같았으면 오히려 클로에 쪽에서 산책하고 싶어 안달을 했을 것이다. 괜히 그때가 그립다는 생각을 하면서 아서가 말했다.

“뭐, 정 원한다면야. 다름이 아니고…….”

클로에는 이 시점에서 긴장했다. 전에도 이러다가 읽고 있던 책의 스포일러를 당하지 않았던가. 이번엔 무슨 말을 들을지 무서웠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너무나 뜻밖의 것이었다.

“난 너 대단하다고 생각해.”

“그렇…… 네?”

클로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서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저 조그만 얼굴이 평소와 다른 표정을 지었다는 것만으로도 괜히 만족감을 느꼈다.

그가 헛기침을 하곤 말을 이었다.

“솔직히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요새는 굉장해. 감탄하고 있다고.”

“네…… 에?”

아서는 너무 놀라 감사 인사조차 까먹은 클로에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가 시원스러운 인상으로 씩 웃었다.

“내가 하려고 했던 말은 여기까지야. 그럼 수고해.”

그러고는 그녀를 지나쳐 가던 길을 다시 가기 시작했다.

클로에는 멍한 얼굴로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고 있은 지 한참 뒤에야 감사 인사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아, 감사합니다.”

뒤늦게 말했으나 이미 그와의 거리는 꽤 많이 멀어져 있었다.

그녀의 말을 들어서 그런 건지 단순한 우연인 건지, 아서가 손을 흔들었다.

그가 시야에서 사라진 뒤에야 클로에는 눈을 뗄 수 있었다.

혼자 남은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방금 일어난 일을 믿을 수가 없었다. 차라리 현실이 아니라 꿈이라고 생각하는 쪽이 믿을 만할 정도였다.

한참이나 고개를 갸웃거린 클로에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대체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거지?”

클로에가 황궁에 다녀온 뒤로 오래 지나지 않아, 신년이 다가왔다.

매년 초 황궁에서는 황실 주최 신년회가 있다. 그러나 참여는 비교적 자유로운 행사였기에 공작 부부는 가지 않았다. 두 사람 다 사교 활동을 그렇게 즐기는 편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두 사람만의 작은 신년회를 갖기로 했다.

일 년의 마지막 날 밤, 공작 부부는 단둘이 티룸에 앉아 있었다.

벽에서는 모닥불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올랐고 창밖은 어두웠다. 클로에는 두꺼운 숄을 두르고 있었다. 사실 별로 춥지는 않았지만, 남편의 강요 때문이었다.

“피곤하지는 않으십니까?”

무뚝뚝하지만 다정한 목소리에 클로에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전 괜찮아요.”

“언제나 바쁘지 않으십니까.”

“요즘은 별로 안 바빠요.”

이 말은 사실이었다. 그녀가 조금만 무리를 하려고 하면 남편부터 시작해서 집사에 시녀, 하녀들까지 전부 와서 뜯어말리니 무리하고 싶어도 무리할 수가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