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장
‘클로에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을 희생했다고?’
물론 아서가 보기에도 클로에는 꽤 괜찮은 여자였다. 과거에는 이렇게 한심한 여자가 다 있나 싶었지만, 지금은 예전과 달랐다. 남과 눈을 마주친 채 말을 또박또박했고, 사업도 훌륭히 이끌고 있었으며, 차를 아주 맛있게 잘 우렸다. 게다가 예쁘기까지.
옛날에는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지만, 만일 그녀가 그때도 지금 같았더라면 아서는 분명 그녀를 꼬시려 들었을 거다.
하지만 그래 봤자다. 거칠게 말해, 그 정도로 예쁜 여자는 수도에 얼마든지 있다.
아서는 수도 없이 많은 여자들과 만나 보았지만 그중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위해 주고 싶은 여자는 한 명도 없었다.
아서 블라디미어, 그는 세상에서 자신이 제일 소중했다. 그는 기본적으로 그런 남자였다.
‘하여간에 공작에겐 실망이 크다니까. 걔가 그런 웃기는 짓을 벌일 줄 난 미처 몰랐어.’
“……자님!”
‘그건 그렇고, 클로에도 공작을 좋아하려나? 걔, 예전에는 나를 좋아했는데…….’
아서는 잠시 옛날의 클로에의 모습을 떠올렸다. 새빨개진 얼굴로 자신에게 사랑한다 고백하던 어렸던 그녀의 모습.
그때의 클로에가 예뻤던가? 워낙 오래전의 일이라서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쩌면…….
“황자님!”
그때 아서의 상념을 누군가의 목소리가 끊었다. 아서가 자신의 곁을 돌아보았다. 거기선 이졸데 윈체스터 공작 영애가 그의 팔을 끌어안고 있었다.
이졸데가 이마를 찡그리며 말했다.
“황자님도 참.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세요?”
“아, 미안. 잠시 딴생각을 좀.”
아서가 다시 고개를 돌리며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하나도 미안해 보이지 않는 태도였다.
이졸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쩐지 평소의 그 같지 않았다. 만일 평소 같았더라면 그는 웃으면서 미안하다고 입을 맞춰 주거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을 것이다.
‘뭐, 별일 아닐 거야.’
그렇게 생각한 이졸데가 말을 걸었다.
“그건 그렇고, 황자님. 바텐베르크 공작님이 발표했던 그거 말이에요.”
이졸데는 아서가 만나는 수많은 여성들 중 한 명이었다. 윈체스터 공작 부부의 예쁨을 한 몸에 받고 자란 데다 평생을 공작가의 영애로서 사교계의 꽃으로 사랑받아 온 그녀는 살짝 눈치가 없었다.
그녀가 한쪽 손으로 뺨을 감싸며 눈을 감았다.
“정말 로맨틱하지 않아요? 체면이 깎일 줄 공작님도 알았을 텐데, 아내를 위해 그런 말까지 하다니! 공작님은 정말 공작부인을 사랑하나 봐요. 너무 멋져요.”
아서는 떫은 얼굴로 꿈에 빠진 듯한 이졸데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툭 내뱉었다.
“그게 로맨틱하기는 뭐가 로맨틱해? 바텐베르크는 멍청한 짓을 한 거야.”
이졸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어머? 황자님, 저희 어머니 아버지랑 똑같은 말씀을 하시네요. 황자님의 생각이 부모님 세대랑 같을 줄은 생각도 못 했는걸요!”
아서는 내심 가슴속 어딘가가 콕콕 찔리는 것을 느꼈다. 그런 그의 기분은 눈치채지 못한 채 이졸데가 계속해서 말했다.
“어쨌든 신기하지 않아요? 그 얼음장 같던 알폰스 바텐베르크 공작님도 사랑을 한다는 게. 심지어 그 상대가 그 유명한 공작부인이라는 게!”
“클로에가 유명하다고?”
아서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졸데가 순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서는 내심 이졸데가 클로에가 요즘 하고 있는 트리플 뭐시기 사업에 대한 얘기를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예상은 빗나갔다.
“네! 왜, 엄청 유명했잖아요? 모자란 부분이 많은 분이었으니까요. 사교계에서는 그분을 부르는 별명도 있었는걸요. ‘얼간이 공작부인’!”
순간 아서의 얼굴이 굳었다. 그러나 이졸데는 눈치채지 못했다.
“특히 제일 우스웠던 일은 그거였어요. 그분이 아직 영애였던 시절에 한참 와인이 유행했는데, 자신이 와인에 대해 아주 잘 알고 가문 소유의 양조장도 있다고 주장했거든요. 그래서 다른 영애와 영식들이 그 양조장에 구경 가고 싶다고 해서 약속도 잡았는데, 정작 당일에 공작부인은 나타나지 않았대요. 왠지 알아요? 가문 소유의 양조장이라는 건 없었거든요! 뒤늦게 사실 거짓말이었다고 하기에는 부끄러우니까 아예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은 거죠. 정말 바보 같지 않아요?”
“대체 언제 적 얘기를 하는 거야?”
아서가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음성에 이졸데는 깜짝 놀랐다.
“어라, 황자님?”
“지금의 클로에는 그때와 다르다고! 어릴 때 이야기로 비웃고 헐뜯으면 재밌어? 나 참.”
아서가 자신의 팔을 끌어안고 있는 이졸데의 손을 뿌리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 황자님!”
“나 먼저 간다.”
이졸데는 그의 반응에 깜짝 놀랐다. 웃긴 일화 좀 이야기했다고 그가 이렇게 화를 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졸데는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이미 늦었다. 아서는 그녀를 버려둔 채 문 너머로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이졸데와 함께 있던 레스토랑 특별실을 나온 아서는 거리로 들어섰다.
‘춥다.’
얼어붙는 바람이 뺨을 에었다. 재킷 사이로 한기가 새어 들어왔다. 숨을 쉴 때마다 숨결이 하얗게 일어나 하늘로 퍼져 나간다.
이런 날씨에는 따끈한 차 한 잔이 간절하다.
‘잠깐 공작가에 들를까.’
사실 차는 황궁에서도 마실 수 있다. 하지만 황궁에서 마실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다즐링뿐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서는 이제 다즐링에 질려 버렸다. 연로하신 아버지는 여전히 그것을 마음에 들어 했지만, 쉽게 질리는 성격인 아서는 몇 달 내내 마신 다즐링에 신물이 났다.
답지 않게 잠시 주저하던 아서는 곧 발걸음을 옮겼다. 바텐베르크 공작저가 있는 방향이었다.
한편, 공작 부부는 함께 점심식사를 한 뒤 각자 자신의 일을 하고 있었다. 알폰스는 영지에 대한 서류를 처리했고, 클로에는 공작저 관련 장부를 정리한 이후 책을 읽었다.
‘요즘 이런 것도 재밌단 말이야.’
클로에는 어젯밤에 읽다가 잤던 소설책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채 몇 페이지를 읽지 못하고 책을 덮어야만 했다. 하녀가 그녀에게 이런 소식을 전했기 때문이다.
“마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황자 전하께서 찾아오셨어요.”
클로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황자 전하라고?
황자는 가끔 공작저에 찾아오긴 했지만 그가 찾았던 사람은 언제나 알폰스였다. 정무에 대한 의논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알폰스와 정무에 대한 의논을 하는 김에 클로에를 만난 적은 있었어도 이렇게 그녀를 대놓고 찾아온 것은 처음이다.
하지만 대체 왜? 솔직히 말해 클로에에게 아서는 편한 상대가 아니었다. 낯을 가리는 그녀는 여전히 아서를 좀 불편하게 여겼다.
그와의 독대를 피하고 싶긴 했지만 난생처음으로 자신을 찾아온 걸 보면 무언가 중대한 이유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잠시 고민하던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자 전하를 이곳으로 모시렴.”
잠시 후.
“이봐, 오랜만이네.”
부담스러울 정도로 스스럼없는 인사말과 함께 티룸에 그가 나타났다. 클로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그런 예의는 생략해도 돼.”
“실례지만, 어떤 이유로 찾아오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클로에의 단호한 태도에 아서가 쩝 입맛을 다셨다. 하여간에 옛날에는 저렇지 않았는데, 요즘의 그녀는 서운할 정도로 냉정하다.
그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날이 춥길래 차 좀 얻어 마시고 싶어서 왔지. 다즐링은 지겨워 죽을 지경인데 무언가 특별한 거 없어?”
클로에는 기가 탁 풀렸다. 뭔가 심각하고 중대한 이유가 있는 줄 알고 긴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아서가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그렇다고 황자를 쫓아내거나 할 수도 없는 일이다. 전생을 포함해 한 번도 차를 요청하는 것을 거절해 본 적이 없기도 했고.
하지만 여전히 아서를 독대하는 것은 꺼려진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좋은 생각이 났다.
‘알폰스를 부르는 것이 좋겠어.’
그를 불러 셋이서 차를 마시면 독대도 아니게 되고, 겸사겸사 일 때문에 고생하는 남편의 휴식도 챙겨 줄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한 클로에는 티룸 한편에 서 있던 하녀에게 지시를 내렸다.
“가서 공작님을 모셔오겠니? 황자 전하께서 방문하셨으니 함께 티타임을 가지고 싶다고 전해드리렴.”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때 너무나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의 시선이 티룸의 입구를 향해 쏠렸다. 그곳에는 알폰스가 서 있었다.
“어머, 알폰스!”
“아.”
순간 클로에와 아서의 얼굴이 상반된 빛을 띠었다. 클로에는 이보다 더 반가울 수 없다는 얼굴이었고, 아서는 정말이지 안 반가운 얼굴이었다.
무뚝뚝한 얼굴을 한 알폰스가 저벅저벅 티룸의 안쪽으로 들어왔다.
그는 클로에의 옆자리로 가서, 그녀의 어깨를 감싼 채 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 서슬에 클로에 역시 함께 자리에 앉게 되었다. 알폰스가 그녀의 등을 단단히 끌어안았다.
알폰스의 시선이 아서를 향했다. 그의 단정한 얼굴에 미미한 그림자가 졌다.
“차가 드시고 싶으시다니 잘됐군요. 함께 드십시다.”
일련의 상황들을 멍하게 지켜보고 있던 아서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허 웃었다. 그가 불편하게 목을 죄는 머플러를 느슨하게 풀어 버리곤 저벅저벅 다가와 공작 부부의 맞은편에 앉았다.
“뭐 좋아. 원래 티타임에는 한 명이라도 더 많은 게 더 재밌지.”
그가 제집 안방처럼 소파 등받이에 팔을 걸치며 다리를 꼬았다.
“클로에, 오늘은 무슨 차를 대접해 줄 거야? 다즐링이랑은 아주 다른, 특별한 차였으면 좋겠는데.”
그 말을 들은 클로에의 미간에 자잘한 주름이 졌다. 다즐링과는 다른 특별한 차라니? 이렇게 막연한 주문일수록 맞춰 주기 어려웠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아직 사람들은 홍차에 익숙지 않다. 이제 겨우 조금씩 관심을 갖기 시작했을 뿐이었다.
‘어려운 주문일수록 내가 노력해야 해. 마음에 쏙 들 만한 차를 대접해야지. 조금이라도 더 차를 진심으로 좋아하게 될 수 있도록.’
그렇게 생각한 클로에가 머리를 굴렸다.
다즐링과는 다른 특별한 차. 손님은 황자 전하와 알폰스. 황자 전하는 얼 그레이를 좋아하는 것을 보니 향이 풍부한 것을 선호하는 듯하고, 알폰스는 단 것을 싫어한다.
게다가 지금의 계절은 초겨울이다. 이렇게 쌀쌀한 날씨에는 역시 밀크티지.
여기까지 생각한 클로에가 미소 지었다. 있었다. 이런 상황에 딱 맞는 차가.
“두 분, 여기 앉아 계세요. 제가 차를 우려 올게요.”
그렇게 말한 클로에는 차를 우리는 공간으로 들어갔다.
그러고 나니 티룸에는 두 남자만 남았다.
“…….”
“…….”
허공에서 붉고 노란 두 사람의 시선이 맞부딪쳤다. 어쩐지 긴장감 어린 침묵이 티룸 안에 내려앉았다.
알폰스와 아서는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굳이 따지자면 반대에 가깝다. 두 사람은 성격도 관심사도 정반대였고, 물과 기름처럼 섞이기 어려운 존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딪칠 일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사적으론 서먹한 사이라 한들 두 사람 모두 제국의 고위급 위정자인 것은 변하지 않는다.
또한 아서의 친부가 알폰스를 아끼는지라 더더욱 두 사람은 시시때때로 접점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동안 두 사람은 그럭저럭 지냈다. 이번 해 여름까지는 말이다.
먼저 침묵을 깬 쪽은 알폰스였다.
“제 안사람에게는 어떤 볼일이 있어서 찾아오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것도 한 번도 이런 일 없으셨다가 오늘 갑자기.”
아서가 능글하게 웃으며 다리를 꼬았다.
“말했잖아. 차 얻어 마시러 왔다니까? 네 마누라 차 끓이는 솜씨 기막힌 건 너도 알잖아.”
비록 망나니 황자라는 별명마저 있는 그지만, 그런 것 치고도 무례한 언행이었다.
알폰스는 머릿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런 속마음은 숨긴 채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차 얻어 마시자고 엄연히 반려가 있는 부녀자를 찾아오신단 말입니까? 제게는 일언반구의 말도 없이?”
분노한 그의 눈빛이 무게처럼 아서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처음 겪는 일이 아니었던지라 이번에는 아서도 제법 버텼다.
“무슨 소리야, 남의 마누라 만난다고 그 남편 허락이 필요해? 여긴 제국이야. 동방이 아니라고.”
창백해진 얼굴로도 살살 세 치 혀를 놀리는 그의 등골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사실 아서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이곳은 제국이고 제국 귀족에게 혼인 뒤 애인을 만드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니까.
오히려 알폰스 그의 태도가 아주 이례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제 아서는 그의 이례적인 태도의 이유를 안다.
알폰스 바텐베르크, 그는 아내를 위해 자신의 명예를 희생했으나 그가 잃은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만인 앞에 거대한 약점을 드러낸 것과 다름없었다.
이상한 일이다. 암만 아서가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망나니 황자라 한들 이유 없이 타인을 상처 입히고 싶어 하는 일은 드물다.
한데 아서는 오늘 그러고 싶었다. 알폰스가 어리석게도 드러낸 약점을 물어뜯고 물고 늘어지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그가 화를 내면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이 순간 황가와 공작가의 관계라든가, 황제도 함부로 대할 수 없을 정도인 공작의 권력과 지위라든가, 그런 온갖 현실적인 문제들 따위는 아서의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봐, 알폰스. 그렇게 매달리는 남자는 별로 매력 없어.”
아서가 이죽이며 말했다.
“아마 클로에도 별로 안 좋아할걸?”
순간 알폰스의 얼굴에 드리워져 있던 그늘이 짙어졌다. 그의 안광이 중력처럼 아서를 묵직하게 짓눌렀다. 아서의 얼굴에서 종잇장처럼 핏기가 사라졌다.
“다시는 제 아내를 찾아오지 마십시오.”
이 목소리의 주인이 아서, 그가 알던 알폰스 바텐베르크 공작이 맞을까?
평소 알고 있던 냉철하고 감정 없는 얼음장 같은 공작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낮고 거친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는 목소리. 마치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자를 적대하는 들짐승 같은.
“큭…… 나, 는…….”
아서가 끙끙거리며 저항하려던 그때였다.
발소리가 들렸다. 알폰스는 알 수 있었다. 가볍고 사뿐사뿐한 저 발소리는 분명히 자신의 아내의 것이다.
그가 언제 화를 냈느냐는 듯이 표정을 정돈했다. 그와 동시에 아서를 내리누르던 압박감도 사라져서 그는 휴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곧이어 트레이를 하나 든 클로에가 밝게 웃으며 나타났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그녀가 나타나자 티룸을 채우고 있던 긴장감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 대신 맑고 깨끗하고, 여리지만 따뜻한 기운이 방을 가득히 채웠다. 이 역시 알폰스, 그가 사랑하는 것이다.
아내를 본 알폰스는 마음이 진정되는 것을 느꼈다. 아까 아서를 볼 때에 비하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럽고 말랑해진 그의 시선이 클로에에게 고정되어 떨어지지 않았다.
두 남자 사이에 있었던 일을 눈치채지 못한 클로에는 트레이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곤 알폰스의 옆자리에 앉았다. 이 작은 몸이 단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느껴지는 안정감이 좋아서, 알폰스는 그녀의 허리를 팔로 감고 뺨에 가볍게 입 맞췄다.
“알폰스, 정말……. 황자 전하도 계신데.”
클로에가 부끄럽다는 듯이 웃었다. 그녀의 뺨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잘들 논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서는 떨떠름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잠시 알폰스와 장난을 치던 클로에가 곧 정신을 차리고 아서에게 말을 걸었다. 아직 뺨이 상기되어 있었다.
“음, 오늘의 차는 싱할라예요. 싱할라 홍차를 드셔 보셨나요?”
턱을 괴고 있던 아서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어, 마셔 봤지. 네 트리플 뭐시기 가게에서 파는 거잖아. 엘리나가 어찌나 좋아하던지 나한테도 엄청 먹였어. 근데…….”
곧 그가 몸을 일으켰다. 약간 불만족스러운 얼굴로 그가 말했다.
“싱할라가 뭐가 특별해? 가게에서도 파는 건데.”
예상한 반응이라는 듯이 클로에는 살짝 턱을 치켜들고 뿌듯한 얼굴을 했다. 그녀가 검지를 들어 올려 까딱였다.
“‘싱할라’ 홍차가 한 종류만 있다는 생각은 버리세요. 이건 정말 특별한 싱할라랍니다. 바로 우바(Uva)라는 거예요.”
“우바?”
“네. 바라트 왕국의 홍차가 아쌈이나 다즐링 등, 지명으로 나뉘었던 걸 기억하시죠? 싱할라도 마찬가지예요. 싱할라의 홍차도 지명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뉘어요.”
클로에가 손으로 산 모양을 그려 보이며 말했다.
“다만 재밌는 건, 바라트 왕국과 달리 작은 섬 싱할라의 다원은 전부 산 위에 있어요. 싱할라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산이죠. 그래서 싱할라의 차는 이 산의 어느 높이쯤 있느냐에 따라 고지대, 중지대, 저지대로 나뉘어요.”
“각 지대에 따라 특징이 다릅니까?”
“맞아요!”
핵심을 찌르는 알폰스의 질문에 클로에가 기뻐했다.
“싱할라의 홍차는 저지대일수록 거칠고 강한 맛이 나고, 고지대일수록 여리고 섬세한 맛이 나요.”
“뭐, 그래. 그래서 오늘 우리가 마실 차는 뭔데?”
“우바는 고지대 싱할라예요, 전하.”
클로에가 자신 있는 태도로 말했다.
“우바는 정말 특별한 홍차예요. 다즐링이랑은 전혀 다른 맛과 향이 나면서 우바만의 아주 독특한 매력이 있죠. 그 매력을 인정받아 세계 3대 홍차(다즐링, 우바, 기문)로 꼽힐 정도예요. 아마, 황자 전하의 마음에도 드실 거예요.”
“흐응, 그래?”
아서가 그런 클로에를 재미있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역시, 클로에의 설명은 언제 들어도 흥미롭다. 그녀의 설명을 듣다 보면 구정물도 마시고 싶어질 거라는 아서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럼 어디 맛 좀 볼까. 그 특별한 홍차라는 거 말이야.”
클로에는 손님들의 찻잔에 홍차를 직접 따라 주었다. 두 남자는 찻잔을 들여다보았다.
흰 찻잔에 가득 차오른, 진하게 우린 듯, 다소 진득해 보이기도 하는 갈색을 띤 오렌지빛의 수색. 진한 빛의 찻물이 비단결처럼 보드랍게 찰랑거렸다.
그 모습도, 찻잔에 풍겨 나오는 향도 무척이나 먹음직스러워서 침이 고일 정도였다.
“좋아, 그렇다면…….”
아서가 먼저 찻잔을 입에 대었다.
공기와 함께 입 안에 밀려들어 오는 찻물이 혀 위로 퍼져 나갔다. 그 순간 놀랄 정도로 풍부한 향기가 입 안과 비강을 채웠다.
입 안을 점령하는 몰트의 구수함. 그러나 아쌈에 비하면 훨씬 섬세한 향.
아쌈과도 다르고 다즐링과도 달랐다. 물론, 이것만 해도 충분히 매력적인 홍차였다. 그런데 맛이 좋기는 하지만, ‘아주 특별한 홍차’라고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다.
한데 그때였다. 아주 묘한 맛이 찾아온 것은.
‘이건……?!’
아서가 흠칫 놀랐다. 설마하니 홍차에서 느낄 수 있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한 맛이다. 알싸하게 미각을 쓸어내리는 이 자극적인 향은 설마…….
아서가 클로에를 돌아보았다. 기대감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던 클로에가 빙긋 웃었다.
“느끼셨어요?”
그녀의 곁에 앉아 있던 알폰스가 말했다.
“이 알싸한 느낌은 설마…….”
“민트……입니까?”
남편의 말에 클로에가 뛸 듯이 기뻐했다.
“어머! 미각이 예민하시네요. 바로 맞히셨어요!”
우바 홍차 잎에는 아주 특별한 성분이 함유되어 있다. 바로 멘톨 성분이다. 주로 민트 등에 함유되어 있는 이 성분은 혀에 닿았을 때 알싸하고 시원한 특유의 청량감을 느끼게 한다.
사실 클로에는 멘톨이 들어 있는 차의 향이 민트보다는 ‘파스’와 흡사하다고 생각했지만……. 제국에는 없는 물건이기에 차마 황자와 남편 앞에서 그렇게 비유할 수는 없었다.
아서가 감탄했다.
“꼭 향이 강한 향신료나 허브를 먹는 것 같아. 그저 고소하기만 할 뿐만 아니라 민트 향이 나는 홍차라니, 확실히 특이한걸.”
“확실히…… 홍차 특유의 몰트 향을 민트 향이 정리해 주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진득할 정도로 구수한 몰트 향의 뒤를 잇는 뚜렷한 민트 향. 하나만 있어도 특이할 특성을 두 가지나 가지고 있다. 확실히, ‘특별한 홍차’라고 부를 만했다.
클로에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정말 특이하죠? 싱할라에서는, 이 민트 향이 우바 다원 근처에 형성되어 있는 소나무 군락의 향이 옮아온 것이라고 해요.”
아서가 무릎을 탁 쳤다.
“과연 그랬군! 어쩐지, 그냥 홍차에서 이런 향이 날 리가 없다 했어.”
“……라고는 하지만 단순히 마케팅의 일환일 가능성이 높아요. 아무리 소나무 군락이 있다고 해도 그 향이 우바의 모든 찻잎에 고루 배어들기는 어려우니까요. 학자들은 이 민트 향이 후천적인 것이 아닌 선천적인 품종 자체의 특성이라고 여기고 있어요.”
“…….”
이어지는 클로에의 설명에 아서가 민망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클로에가 기분 좋은 듯이 손뼉을 짝 쳤다.
“우바는 스트레이트로도 맛이 좋지만, 밀크티로 만들어도 아주 잘 어울려요. 특유의 진한 몰트 향 때문이죠. 자, 한 번 우바 밀크티를 맛보시겠어요?”
“물론입니다.”
“그, 그럼 나도.”
묵묵히 차를 마시고 있던 알폰스가 먼저 동의의 의사를 표했다. 무안한 얼굴로 먼 산을 보고 있던 아서 역시 뒤늦게 끼어들었다.
클로에는 끈적하고 달콤한 연유가 담긴 작은 저그를 내밀고는 한 잔에 몇 스푼 정도를 넣으면 되는지 말해 주었다. 아서와 알폰스는 그녀가 시키는 대로 했다.
찻잔에 티스푼으로 연유를 떠 넣자, 진하게 우러난 붉은 찻물 속에 하얀 구름이 피어올랐다.
간단한 우바 연유 밀크티가 완성되자, 아서는 이제 제법 익숙한 듯이 찻잔을 들어 입을 대었다.
우바로 만든 밀크티는…… 아쌈으로 만든 것과는 전혀 달랐다. 달큰한 엿기름, 묵직한 고구마와 닮은 아쌈으로 만든 진한 밀크티에 비해 섬세하고 풍부한 향.
스트레이트로 마실 때만 해도 그렇게나 뚜렷하게 느껴졌던 민트 향은 연유의 달콤함에 감싸여 드러나지 않았다. 무척이나 향긋하면서 아쌈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는 밀크티였다.
“맛있죠? 우바는 아쌈 다음으로 밀크티에 많이 쓰이는 차예요. 아쌈만큼 묵직하지는 않지만 특유의 풍부하고 섬세한 향 덕에 밀크티로 만들면 무척 고급스러운 맛이 나죠.”
클로에가 웃으며 말했으나 아서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가벼운 쇼크를 느끼고 있었다. 워낙 풍부한 향을 좋아하는 그였다. 엘리나가 종종 선물해 주었던 트리플 스위트의 아쌈 밀크티보다 이것이 오히려 훨씬 혀에 착착 달라붙었다.
이건 정말로…… ‘맛있다’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다. 과연, 괜히 세계 3대 홍차가 아니었다.
한편 알폰스는, 기본적으로 단맛을 싫어하고 묵직하고 깔끔한 향을 좋아하기에 아서만큼이나 감동을 느끼지는 못했다.
그러나 클로에의 차를 여러 번 마셔 본 그는 알 수 있었다. 이 홍차의 우유와의 궁합은 그야말로 훌륭했다. 잡내는 가려 주고 특유의 구수함은 돋워 주니 과연 사람들이 매력을 느낄 만했다.
“좋은 차입니다.”
우바 밀크티를 한 모금 마신 알폰스가 그렇게 툭 내뱉었다. 지극히 건조한 말이었으나 클로에는 그것이 최상의 찬사임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생긋 웃어 주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알폰스 역시 옅은 미소를 입가에 띄웠다.
그들이 그러는 동안 말문을 잃었던 아서가 겨우 말했다.
“이건…… 꽤…… 괜찮네. 확실히……. 클로에, 이 찻잎 나한테 조금 팔 수 있어?”
아서는 대놓고 칭찬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타입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뒤에 꺼내 놓은 질문이 그의 진심인 것은 확실했다. 클로에는 자신이 고른 것이 훌륭한 선택이었음을 확신했다.
‘역시 겨울에 마시는 밀크티만큼 각별한 것은 없지.’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그녀가 물었다.
“어때요, 이 정도면? 황자 전하께서 원하시던 특별한 차로서 충분한가요?”
아서의 금안이 둥그런 모양으로 커졌다. 그는, 부끄럽지만, 요 맹랑한 여자에게 인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만일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녀는 그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을 것이다.
아서가 어색한 얼굴로 말했다. 그의 잘생긴 이마가 찡그려졌다.
“……그래, 충분해. 맛있더라, 클로에.”
나이스! 클로에는 어쩐지 공략에 성공한 것 같달까, 얻기 무척 어려운 무언가를 얻어낸 것만 같은 기분에 무척이나 뿌듯해졌다. 그녀가 잘난 척하는 듯한 태도로 말했다.
“우바는 그렇게 많지 않지만, 정 원하신다면 조금 팔아 드릴 수는 있어요.”
“……뭐, 그래. 거참 고맙네.”
“천만에 말씀…… 어맛!”
그때 클로에는 귓가에서 몸서리쳐지는 감각을 느꼈다. 약간 얼얼하기까지 한 그 감각에 그녀가 깜짝 놀라 옆을 돌아보았다.
범인은 알폰스였다. 그가 그녀의 귀 윗부분을 깨문 것이다. 클로에가 알폰스의 손등을 가볍게 내리치곤 붉어진 얼굴로 속삭였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전하 앞에서!”
그러나 알폰스로서는 그런 일을 한 진지하고도 심각한 이유가 있었다. 그녀가, 지나치게 오래, 황자와 대화했던 것이다. 그것도 꽤 즐거운 듯이.
보기만 해도 뱃속 어딘가가 뒤틀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아서의 눈앞에서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알폰스는 잠시 아서 쪽을 노려보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클로에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다가 그녀의 뺨을 가볍게 꼬집었다.
“아야!”
가만히 있다가 공연히 두 번이나 당한 클로에는 어안이 벙벙했다.
이 사람이 대체 왜 그러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알폰스의 영문 모를 돌발 행동이라니, 그만큼이나 희귀하고 충격적인 일은 이 세상에 또 없을 것이었다.
한편 두 사람이 깨를 볶고 있는 걸 못 봐주겠다는 얼굴로 지켜보고 있던 아서는 테이블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하?”
클로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불렀다. 아서는 재킷을 여미고 목도리를 단단하게 감으며 떠날 준비를 했다. 그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했다.
“그럼 난 차도 마셨으니 갈게. 오늘도 잘 마셨어, 클로에. 우바를 사는 건 다음에 사람을 보내지.”
티룸을 나서려던 그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테이블 위로 시선을 돌렸다.
“그 책 재미있지. 다 읽은 거야?”
클로에는 순간 그가 무슨 소리를 하나 했다. 하지만 곧 깨달았다. 그녀가 테이블에 올려 둔 읽다가 만 추리 소설에 대한 것이었다.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반 밖에 못 읽었어요.”
“그래? 그렇구나.”
잠시 자신의 턱을 쓰다듬던 아서가 이렇게 말했다.
“범인은 정무 대신이야. 그 왜, 사팔뜨기 하녀의 주인인 콘웰 후작.”
그렇게 말하고는 티룸을 나가 버렸다.
무의식적으로 무릎을 굽혀 작별 인사의 예를 갖춘 클로에는 자신이 들은 것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에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그만큼이나 상대의 태도가 너무나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던 것이다.
“……!”
자신이 된통 당했음을 깨달은 것은 이미 한참이나 늦은 뒤였다.
상대는 떠났고, 자신은 스포일러를 당해 버렸다. 그것도 아주 재미있게 읽고 있던 책의 최고의 반전을!
한편, 클로에가 스포일러를 당한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동안 아서는 공작저를 뜨고 있었다. 공작저의 드넓은 복도를 가로지르며 그는 생각했다.
이상한 일이다. 분명 재미있게 놀았고, 맛있는 것도 마셨는데 오히려 기분은 침잠해 들어갔다.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는데.’
그는 기본적으로 앞날을 걱정하지 않는다. 즐겁게 놀고 진탕 마신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런데 왜 오늘은…….
‘이상하게…… 가슴속이 뻥 뚫린 것 같지.’
아서는 손을 자신의 가슴에 대어 보았다. 당연히도 자신의 가슴은 단단했고 뚫린 데 없이 꽉 막혀 있었다.
연인처럼 다정하던 클로에와 알폰스의 모습이 떠올랐다. 알폰스가 자신의 아내를 사랑한다며 선언하던 순간도. 두 사람이 함께 휴게실로 들어간 이후 연회가 끝날 때까지 나오지 않았던 일도…….
금안에 무거운 빛을 띄우던 아서는 곧 고개를 저었다. 어찌 됐든,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 * *
얼어붙는 날씨에는 역시 따뜻하고 부드러운 밀크티가 제격이다.
그렇게 생각한 클로에는 트리플 스위트의 판매 상품 라인업을 재구성했다. 제일 먼저 한 일은 싱할라와 과일 가향 차 같은 아이스티용 차를 창고 깊은 곳에 넣어 두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대신 밀크티와 관련된 상품을 가판대에 잔뜩 진열했다.
몰트 향이 구수한 아쌈, 달콤하고 진한 홍차 시럽, 우유와 잘 어울리는 얼 그레이, 그리고 유리병에 담긴 온갖 종류의 밀크티들.
트리플 스위트에 처음 밀크티를 들여놓았을 때부터 반응이 좋은 것들을 한 종씩 늘려 갔더니 이제는 판매하는 밀크티의 종류가 제법 많았다. 기본이 되는 아쌈 밀크티부터, 얼 그레이 밀크티, 생 코코아 가루를 넣은 초콜릿 밀크티, 마시면 뱃속부터 따끈해지는 진저 시나몬 밀크티 등등.
‘이제 슬슬 겨울 한정 신제품을 들여놓아야겠어.’
지난여름 한정 상품으로 쏠쏠한 재미를 본 클로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어떤 밀크티가 좋을까. 럼을 섞은 럼 밀크티? 바라트식 향신료를 가득 넣은 마살라 차이?’
잠시 고민하던 클로에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지난가을 휴가 때 마을 축제에서 보았던 과일 우유. 과일 콩포트나 퓨레를 넣어 과일의 상큼 달콤함과 우유의 부드러움을 함께 즐길 수 있는 멋진 음료였다.
‘그것을 밀크티에 응용하면 좋을 것 같아. 밀크티에 과일 콩포트라니! 생각만 해도 멋지잖아.’
그렇게 생각했더니 가벼운 기대감으로 가슴이 콩콩 뛰었다. 클로에는 당장이라도 벌떡 일어나서 티룸에 달려가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티룸에 콕 박혀서 이런저런 과일로 실험을 해 보고 싶었다.
‘겨울 한정이라면 겨울의 느낌이 물씬 나는 것이 좋겠지. 그 외에도 다양한 과일을 실험해 보자.’
클로에는 겨울 과일 등을 이용해 밀크티를 만들어 보았다.
당연하지만, 감귤이나 레몬 등 시트러스 계열의 과일은 밀크티에 어울리지 않았다. 우선 특유의 신맛이 우유의 부드러움과 어울리지 않을뿐더러, 무엇보다도 우유는 산성이 닿으면 단백질이 응고되는 성질이 있기 때문이다.
여러 번의 실험 결과, 이 계절에 구할 수 있는 과일 중 밀크티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되는 것은 바나나와 망고였다.
‘문제는 둘 다 수입 과일이라 단가가 많이 올라간다는 거지만…….’
그러나 망고 퓨레, 바나나 퓨레와 밀크티의 조합은 포기할 수 없을 정도로 환상적인 맛을 자랑했다. 이 달콤함과 부드러움이라니!
클로에는 망고 밀크티와 바나나 밀크티는 예약을 받아 주문 제작 판매하기로 결심했다.
‘봄에 딸기, 여름에 블루베리가 나오면 딸기 밀크티와 블루베리 밀크티도 만들자.’
딸기 콩포트와 블루베리 퓨레를 넣은 밀크티라니……. 가히 충격적인 맛일 것임이 분명했다. 클로에는 상상만 해도 입에 군침이 절로 도는 걸 느꼈다.
‘그건 그렇고…… 그래서 겨울 한정 밀크티는 어떤 걸로 할까?’
클로에는 이 문제에 대해 오래 고민했다. 일을 하면서도 생각하고, 춤 연습을 하면서도 생각하고, 밥을 먹으면서도 생각하고 잠자리에 들어서도 생각했다.
그렇게 고민해도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던 어느 날이었다.
클로에는 마차를 탄 채 낯선 거리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새로운 거래처와 미팅을 하기 위해서였다.
목적지에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상념에 잠겨 있는데, 갑작스레 마차가 급정거했다. 의아해진 클로에가 창밖을 내다보았다.
귀를 기울이니 정면 쪽에서 마부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클로에가 마부석을 향해 물었다.
“마부, 무슨 일인가요?”
“아이고, 마님. 별일 아닙니다. 웬 건방진 꼬맹이들이 공작부인 가시는 길을 막아서기에 혼을 내주려던 참이었습죠.”
“꼬맹이라고요?”
클로에가 되물었다.
어쩐지 마차 안에서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 안 되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누구의 에스코트도 없이 직접 제 손으로 마차 문을 열고 내렸다.
주인마님이 그러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마부는 여전히 마부석에서 고함을 질러 대고 있었다.
“이놈, 네가 막아선 분이 어떤 분인 줄은 알고 이러는 거냐? 썩 꺼져 버려!”
그런 마부가 소리를 지르고 있는 상대는…… 정말로 꼬맹이였다. 많아 봤자 열 살, 여덟 살쯤 될 것 같은 어린애 두 명이 마부에게 꾸지람을 듣고 있었다.
지저분한 차림새에 땟국물이 줄줄 흐를 듯한 얼굴을 한, 조금 더 큰 아이가 슬프게 말했다.
“정말로 배가 많이 고파요. 동생도 그렇대요. 귀하신 분께 조금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전해주세요.”
이 모습을 본 클로에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대강 짐작했다.
‘저 어린아이 두 명이 구걸을 하기 위해 마차 앞을 막아섰구나.’
마부가 삿대질까지 하며 성을 냈다.
“너희 같은 녀석들이 감히 말을 붙여 볼 수 있는 분이 아니다. 썩 꺼지지 않으면 치안 유지대를 부르겠다!”
“그럼 그렇게 해 주세요. 차라리 감옥에 가는 게 좋겠어요. 거기 가면 밥은 줄 테니까요.”
보다 못한 클로에가 끼어들었다.
“배가 정말 많이 고픈가 보구나. 먹을 것이 필요한 거니?”
“아, 아니. 마님!”
마부가 간 떨어질 듯 깜짝 놀랐다. 설마 주인마님이 직접 내려올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그가 놀라거나 말거나 클로에는 허리를 조금 굽혀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춰 주곤 자상하게 웃었다.
“우와…….”
아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실 이 아이들에게는 처음이었다. 귀족 같은 귀하신 몸을 본 것도, 이렇게나 예쁜 사람을 본 것도.
둘 중 나이가 많은 아이가 더 빨리 정신을 차렸다. 큰 아이가 애원했다.
“맞아요, 마님. 저흰 정말 배가 고파요. 제발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클로에는 가슴이 아팠다. 그녀는 기본적으로 아이들을 좋아했고, 아이들은 밥을 굶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모든 아이들은 열심히 공부하고 건강히 뛰놀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감옥에 가는 것도 불사하며 구걸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같아서는 무엇이든 도와주고 싶었다. 어른이 될 때까지 건강한 식사를 할 수 있을 정도로 큰돈을 주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클로에는 잘 알았다. 이런 작은 아이들에게 큰돈을 주었다간 분명 아이들이 범죄의 표적이 될 것이다. 혹은 아이들이 자립심을 잃을 수도 있다.
클로에는 안타깝고 아쉬운 마음을 숨기고, 담담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로지, 가서 이 아이들을 위한 큰 빵을 사 오겠니. 기사 한 분과 같이 갔다 오렴.”
“네! 마님.”
고아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부도 마찬가지였다. 고아들이 목이 아플 정도로 고개를 꾸벅꾸벅 조아리며 인사했다.
“아름다우시고 자비로우신 마님! 정말 감사합니다.”
“예쁜 마님, 감사해요.”
클로에가 아이들에게 생긋 미소를 지어 주었다.
한편 이 모습을 모두 지켜보고 있던 마부는 정말 크게 놀랐다.
무려 공작부인씩이나 되시는 분께서 이런 골목길에서 직접 내려서, 더러운 고아 아이들을 굽어살피시다니? 마부는 이렇게나 자비로운 귀족은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정말 존경스러우신 분이야.’
평민인 마부는 미천한 존재에게 다정하신 마님을 보고 특히나 큰 감명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 보면 내게도 언제나 고맙다고 인사를 해 주시는 아주 친절한 분이지. 예전엔 이러지 않으셨는데…….’
마부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클로에는 다시 마차에 올라타기 위해 걸어 나갔다.
한데 그녀의 눈에 이상한 것이 띄었다.
“모닥불……?”
좁은 골목에서 상인으로 보이는 몇 사람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무언가를 먹고 있었다. 클로에가 마부에게 물었다.
“마부, 저게 뭘 하는 걸까요?”
“아, 저건 말입니다 마님, 아마 고구마를 구워 먹고 있는 것 같습니다요.”
“고구마라고요?”
그때 클로에의 머릿속에 섬광 같은 빛이 스쳤다. 며칠 동안이나 고민했던 것의 실마리가 보인 것이다.
‘그래! 내가 왜 이 생각을 못 했지?’
그녀가 반짝이는 눈으로 생각했다.
‘밀크티에 들어가는 게 꼭 과일이어야 한다는 생각에 얽매여 있었어. 사실은 퓨레나 콩포트로 만들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 들어가도 상관없잖아?’
미팅을 다녀온 뒤, 남편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돌아온 티타임 시간. 클로에가 알폰스에게 자신의 아이디어를 설명했다.
“그러니까 고구마 퓨레를 만들어서 밀크티에 넣는 거예요. 정말 맛있을 것 같지 않나요?”
차를 다 마시고 시가를 피우기 시작한 알폰스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담배 연기를 길게 뱉어 내고는 그가 말했다.
“독창적인 발상입니다. 하지만 제국의 귀족들은 고구마를 그리 선호하지 않습니다, 부인. 그걸 고려하셔야 할 겁니다.”
“뭐라고요?”
클로에는 깜짝 놀랐다.
이 맛있는 고구마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니? 대체 왜?
알폰스에게 이래저래 물어본 결과 사실은 이러했다.
고구마는 신대륙이 발견되었을 때 감자, 초콜릿, 토마토 등과 함께 제국에 들어온 작물이다.
그러나 특유의 독특하면서 매력 있는 맛 덕에 쉽게 제국에 정착한 초콜릿과 토마토와 달리 고구마와 감자는 그러지 못했다.
그 이유라 하면 먼저 그동안 제국에는 흙 밑에서 자라는 걸 캐 먹는 식물이 없었다. 덩이줄기 식물이라는 것을 제국 사람들은 처음 보았기에 선뜻 입에 대지 못했다.
게다가 울퉁불퉁하고 못생긴 모양 역시 귀족들이 좋아하지 않는 데 한몫했다.
귀족들은 땅 밑에서 자라는 데다 못생긴 감자와 고구마를 천하고 불결하다고 생각했다.
놀란 클로에가 입을 다물었다. 좋은 방안을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의 난관에 부딪쳤다.
제국의 사회와 정치에 대해 꽤 열심히 공부했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아직도 모르는 것이 많긴 한 모양이었다.
클로에의 둥근 어깨가 처졌다. 그녀가 시무룩해지자 당황한 알폰스가 위로를 건넸다.
“너무 아쉬워하지 마십시오. 더 좋은 재료를 찾아내실 수 있을 겁니다.”
“네, 그래요…….”
클로에가 대답했으나 여전히 그녀의 어깨는 처진 상태 그대로였다. 알폰스가 계속해서 위로를 했다.
“아니면 부인께서 처음으로 고구마를 모두에게 소개하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소개를…… 한다구요? 고구마를요?”
클로에가 고개를 갸웃했다.
과연, 생각해 보니 그랬다. 고구마 같은, 맛도 좋고 밀크티에도 잘 어울리는 것을 먹지 않는 사람이 많은 것은 국가적 손실이었다.
‘그래, 고구마는 맛이 있으니 소개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거야. 한 번만 맛보면 누구나 반하고 말걸.’
자신은 이미 귀족들이 천하게 여기던 차를 유행시킨 적도 있지 않던가.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클로에의 얼굴이 스위치라도 켠 듯 밝아졌다. 눈에 감동의 빛이 아른거리나 싶더니, 그녀가 알폰스를 꼬옥 끌어안았다.
“정말 고마워요, 알폰스! 그렇게 해 보아야겠어요.”
알폰스는 너무 놀라 손에 쥐고 있던 시가를 떨어뜨릴 뻔했다. 만일 키엘에게 말한다면 그는 믿지 못할 것이었다. 각하께서 실수를 할 뻔하시다니!
곧 알폰스가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걸쳤다. 그의 날카로운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그가 시가를 들지 않은 손으로 클로에의 등을 쓸어내렸다. 부드럽게 등줄기를 쓸어내리던 그의 손가락이 허리 아래쪽에 닿았다.
그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 명백한 손짓에 클로에의 뺨이 붉어졌다.
“어머, 정말. 당신도 참…….”
눈앞의 가슴팍에 손을 기댄 채 클로에가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고맙다면 갚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를 자극했다. 그 낮은 음성에 클로에는 아랫배로부터 짜릿한 무언가가 올라오는 듯한 기분이었다.
고맙다는 말을 하기가 무섭게 음흉한 속내를 드러내다니. 하여간에, 특히 서로의 마음을 알게 된 이후에는 더더욱, 건수만 잡히면 매번 일을 치르느라 클로에는 요새 체력이 부족할 지경이었다.
그렇다곤 해도…… 싫다고 할 생각이 들기는커녕, 오히려 가슴은 기대감으로 두근거려서 클로에는 더 부끄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 * *
고구마를 사교계에 소개하기에 앞서 클로에는 그 방도를 고민해 보았다.
‘먼저 고구마에 대한 거부감을 줄이는 것이 순서겠지.’
고구마가 맛있다는 것을 알려면 입에 대어 보아야 하는데, 거부감이 있으면 그것부터가 어려울 테니 말이다.
‘물론 파이지 등에 싸서 몰래 먹이는 방법도 있긴 하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렇다면 거부감을 줄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클로에는 고민해 보았다.
마케팅 부서에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관련 업무를 꽤 수행해 본 클로에는 이미지 마케팅을 알고 있었다. 이미지 마케팅이란, 상품에 특정 이미지를 결합시켜 홍보하여 해당 이미지가 소비자들의 무의식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게 하는 것이다.
‘결국 거부감도 이미지니까. 고구마의 불결하고 천박한 이미지를 고상하게 바꾸는 거야.’
클로에는 전속 하녀 로지를 불렀다. 그리고는 종이에 무언가를 적어서 로지에게 건네며 이렇게 말했다.
“로지, 이걸 좀 사와 주겠니? 아마 빈민가인 하우스턴 거리의 시장에서 구할 수 있을 거야. 돈은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단다. 혹시 모르니 기사를 2명 데려가도록 하고.”
로지는 쪽지를 들여다보더니 깜짝 놀랐다. 눈이 휘둥그레진 로지가 물었다.
“마, 마님? 정말로 이런 것을 사 오라고요?”
“물론.”
클로에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로지는 잠시 떡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것을 사 오라니, 농담을 하시는 건가 싶어 다시 한 번 마님을 돌아보았으나 농담을 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결국 로지가 치마폭을 잡고 예를 갖추며 말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마님. 눈썹이 휘날리도록 바람같이 다녀올게요.”
몇 시간 뒤, 로지는 클로에가 부탁한 것을 사 왔다. 클로에는 로지를 크게 칭찬했다.
다음 날 아침. 알폰스와 함께 아침 식사를 했다. (아침 식사는 자신의 침실에서 혼자 하는 것이 평범한 귀족의 일상이었으나, 이들은 언제부턴가 아침 식사도 함께했다.)
알폰스는 오늘도 외근인지 키엘에게 가방과 외출용 코트를 지시했다. 그 모습을 본 클로에가 물었다.
“입궁하시는 거예요?”
“그렇습니다.”
알폰스가 클로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신을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아내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사실 이런 아내를 두고 외근 따위 하고 싶지 않았다. 하루 종일 침실에서 그녀와 함께 붙어 있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사랑스러운 아내를 먹여 살리고 지키려면 그는 일을 해야 했다.
평생을 그저 그래야만 한다는 책임감으로 일해 온 그였으나, 클로에를 사랑하게 됨으로써 알게 된 새로운 책임감의 무게는 이전과 전혀 달랐다.
그때였다. 클로에가 그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부탁이 있어요, 알폰스. 이것을 부토니에 대신 꽂고 입궁해 주시겠어요?”
그녀가 내민 것은 꽃이었다. 흰색 바탕에 가운데가 보라색인, 마치 나팔꽃과 같은 형태의 꽃.
화려한 멋은 없지만 단순하고 단정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클로에가 내미는 것이라면 도마뱀이라도 꽂고 다녔을 알폰스지만, 그래도 그는 그 꽃이 꽤 마음에 들었다. 지나치게 화려한 꽃이었더라면 그의 단정한 복장에 어울리지 않았을 것이다.
알폰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클로에는 밝게 웃었다. 그녀는 직접 알폰스의 부토니에를 빼고는 그 자리에 꽃을 달아 주었다.
‘꽃 선물이라니.’
예쁘게 장식된 꽃다발도 아니고 그냥 꽃 한 송이였지만 알폰스는 썩 흡족했다. 연인 간에 서로 꽃 선물을 한다는 사실은 그도 알고 있었다.
게다가 클로에가 직접 꽂아 주었다는 것도 좋았다. 마음 같아서는 평생 이 꽃을 간직하고 싶었다.
클로에가 설명했다.
“참 예쁘죠? 이건 고구마 꽃이에요. 알폰스의 기품 있고, 능력 있고, 멋진 이미지가 고구마 꽃의 이미지에도 영향을 줄 거예요. 그럼 귀족들의 고구마에 대한 거부감도 줄어들겠죠? 그러니까 알폰스, 누가 이 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꼭 고구마 꽃이라고 알려 주셔야 돼요.”
자신이 생각해낸 마케팅 기법이 자랑스러웠는지 클로에는 뿌듯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알폰스는 충격을 받았다. 좋아서 둥둥 떠 있던 기분이 도로 땅으로 꺼졌다.
연인 간 애정 표현의 일환인 꽃 선물이 아니었단 말인가?
머리가 어디에 부딪히기라도 한 것처럼 아팠다. 그가 충격에서 헤어나는 데에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그래, 그래도 그녀가 준 것이다.’
상상하던 그런 의미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클로에가 준 선물이다. 게다가 그녀가 그 가녀린 손으로 직접 꽂아 주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알폰스는 그 사실에 만족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아내와 진한 입맞춤까지 한 뒤에야 알폰스는 떨어지지 않는 발로 현관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가문의 문장이 크게 박혀 있는 검은 마차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알폰스는 마차를 타고 황궁으로 이동했다. 정무 회의에 참가한 뒤 별궁에서 본궁으로 이동하는데 별로 반갑지 않은 얼굴과 마주쳤다.
“이게 누구야, 내 친구 알폰스 아니야! 오늘은 어쩐 일로 여기까지 다 행차하셨대.”
제1 황자 아서였다. 타는 듯한 붉은 머리와 가무잡잡한 얼굴을 가진 그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알폰스는 까딱 목례했다. 예의범절을 중요시하는 그이기에 놀라운 태도였다.
아서가 친한 척을 해 오는 것이 그는 반갑지 않았다. 그만큼이나 그는 알폰스에게 마음에 들지 않는 작자였다.
알폰스가 그렇게 생각하거나 말거나, 아서가 웃으며 물었다.
“그래, 클로에는 잘 있고? 어? 근데 그건 뭐야?”
아서가 의아한 눈으로 알폰스가 단춧구멍에 꽂은 꽃을 들여다보았다.
귀족들 사이에서 생화를 부토니에로 꽂고 다니는 것은 흔하지만 이건 난생처음 보는 꽃이었다.
“나팔꽃인가? 꽤 예쁜데.”
아서가 성급하게 손을 가져다 대었다. 아니, 대려고 했다.
꽃을 만지려고 하던 아서의 손을 막는 것이 있었다. 알폰스의 팔이었다.
“어라…….”
아서로선 생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아무리 태자 책봉이 안 되었다지만 황자인데, 무엄하게도 이 황자의 손을 막는다고?
“건드리지 않는 편이 좋을 겁니다.”
으르렁거리는 듯한 낮은 목소리. 팔을 들어 상대의 손을 막아선 알폰스의 눈이 노골적인 불쾌감의 기색을 띠었다.
아서는 상대의 기세에 밀려서 저도 모르게 손을 내렸다. 그러고는 뒤늦게야 상한 자존심의 아픔과 머쓱함이 몰려왔다. 그가 괜히 투덜거렸다.
“뭐야, 만지면 닳아? 유난 떨기는.”
상대가 손을 내리자 그제야 알폰스도 팔을 내렸다.
그의 싸늘한 시선이 아서를 향했다.
아서 블라디미어. 만약 알폰스에게 제일 큰 위기감을 주는 자가 있다면 바로 그일 것이다. 클로에는 지금 알폰스를 사랑하고 있다. 그녀의 몸도, 영혼도 전부 자신의 것이었다.
‘그렇지만…….’
한때 그녀가 아서를 사랑했단 사실이 신경 쓰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사랑할 뿐만 아니라 그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기까지 했다고 들었다.
하마터면, 자신의 아내가 저자의 것이 될 뻔했다.
그렇게 생각하기만 해도 뱃속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정말이지 천만다행으로 상대가 아내의 사랑스러움을 알아보지 못해 결국 그녀는 자신의 것이 되었지만…….
그래도 ‘그럴 뻔했다’라는 일말의 가능성만으로도 알폰스는 상대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아내는 알폰스, 자신의 것이었다. 한 번 그의 손 안에 들어온 이상 이제 그 아무도 그녀를 빼앗아 갈 수는 없다.
알폰스는 그 사실을 상대에게 알려 주고 싶었다. 그녀의 마음은 더 이상 황자에게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바로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똑똑히 기억하게 만들고 싶었다.
“이것은…….”
알폰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안사람이 준 겁니다.”
“뭐?”
아서는 순간 상대가 무슨 소리를 하나 했다.
보아하니, 알폰스가 단춧구멍에 꽂고 있던 꽃은 바로 클로에가 준 것이라는 뜻인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상대가 왜 그렇게 과잉 반응을 했는지도 대충 짐작이 갔다.
아서로서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무리 마누라가 좋아도 그렇지 고작 꽃 한 송이 가지고 유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녀석이 내가 알던 그 알폰스 바텐베르크가 맞아?’
그 냉철한 공작이 이렇게 될 줄이야 생각도 하지 못했다. 클로에에게 빠지기 시작한 뒤의 알폰스는 하루가 다르게 놀라운 모습을 갱신하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클로에가 준 꽃이라니. 아서의 금색 눈동자가 데룩 굴러 다시 한 번 단춧구멍에 꽂힌 꽃을 보았다.
단순하고 깔끔하지만 우아한 맛이 있는 꽃이다. 사실 아서의 취향이라곤 보기 어려웠다. 그는 화려한 것을 좋아하니까.
‘그런데, 왠지…….’
클로에가 직접 꽂아 줬다고 생각하니 꽃이 괜히 더 예뻐 보이는 것도 같았다.
‘역시 클로에는 지금은 공작을 좋아하고 있는 건가?’
아서는 순간 자신이 느낀 감정에 깜짝 놀랐다. 저 꽃이 갖고 싶었다. 저 단순하고 소박한 꽃을 꽂고 있는 상대가 부러웠다.
왜, 하필? 아서 블라디미어, 그로 말할 것 같으면 대륙을 호령하는 제국의 제1 황자다. 비록 태자 책봉은 못 받았지만 조만간 받을 것이고 (아서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면 그는 장차 제국의 주인이 된다.
그런 그가 여태껏 가지고 싶었는데 가지지 못한 것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여태까지 그가 갖고 싶어 했던 것은 언제나 호화롭고, 아름답고, 사치스러운 보물이었다.
저런 몇 푼 될 것 같지도 않은 수수한 꽃 한 송이가 아니고.
아서는 약간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그는 그리 생각이 깊은 인물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방금 자신이 느낀 것을 ‘단순한 변덕’ 정도로 여기기로 했다.
아서의 눈가와 입꼬리가 씰룩였다. 꽃에 꽂혀 있던 자신의 시선을 간신히 떼어 낸 뒤 그가 알폰스를 향해 히죽 웃었다.
“마누라 사랑이 아주 지극하셔. 제국 역사에 남을 만한 금슬인걸.”
어느 모로 봐도 놀리는 의도가 가득한 말이었다. 그러나 알폰스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
아서의 입꼬리가 다시 한 번 씰룩거렸다. 상대가 자신의 의도대로 반응하지 않자 괜히 짜증이 났다.
하지만 더 이상 트집 잡을 것을 찾을 수 없었다. 아서는 알폰스 놀리기는 그만하기로 하고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뭐, 그럼…….”
“그리고.”
아서가 발걸음을 돌리려던 그때였다. 무언가가 그의 팔뚝을 붙들었다. 알폰스의 손이었다.
순간 아서는 흠칫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의 손아귀 힘이 장난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서 블라디미어, 그는 타고난 검술의 천재였고 제국의 몇 안 되는 소드 마스터의 반열에 올라있었다. 그런 만큼 그의 체력과 근력은 제국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였으나…….
아서는 느낄 수 있었다. 딱히 세게 쥔 것도, 강하게 힘을 준 것도 아닌 것 같은데도 상대의 손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이 어마어마했다.
힘을 주지 않은 것이 이 정도라면 이자의 진짜 실력은……. 아서는 등골이 괜히 서늘해졌다.
등 뒤에서 알폰스의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제 아내를 그런 식으로 하대하지 마십시오.”
아서는 숨이 막힐 듯한 압박감을 느꼈다. 그는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황가의 일원이라도 지켜야 할 예의가 있는 겁니다. 함부로 불려도 될 여인이 아닙니다.”
암만 공작이라 한들, 아슬아슬하게 하극상을 넘나드는 발언. 하지만 아서는 반박할 수가 없었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알폰스의 말이 끝나자 아서는 그제야 숨을 쉴 수가 있었다. 그가 휴우 하고 긴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알폰스에게 붙잡힌 팔을 거칠게 빼냈다. 할 말을 다 했는지, 손아귀는 별 저항감 없이 팔을 풀어주었다.
아서는 대답하지 않고 그대로 걸어 나갔다. 알폰스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벗어나자 몸에 뒤늦은 한기가 들었다.
몸이 으슬으슬 떨리는 것은 틀림없이 차가운 겨울바람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아서가 투덜거렸다.
“저런 놈의 아내가 되다니 클로에도 참 안됐다니까.”
어쨌든, 그날 밤 황자 궁에 몸을 누인 아서는 또 낮에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알폰스가 꽂고 있던 이름 모를 꽃이 생각났다.
여전히 갖고 싶다. 그 꽃이.
‘젠장, 부러워 죽겠네.’
하지만 그 짜증 나는 공작 놈을 따라 했다는 소리는 듣기 싫었다. 아서는 갖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려 애쓰며 잠을 청했다.
그러나 다음 날에도 그 꽃이 갖고 싶었다. 그다음 날에도. 또 다음 날에도.
정말 짜증이 난다. 아서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갖고 싶은 마음을 참아 본 적이 없었다. 재물이든 여자든 갖고 싶은 것은 뭐든 손에 넣어야만 직성이 풀렸던 그다.
그런데 고작 그 꽃 한 송이를 못 가져서 이 모양이라니?
한데 그 시기쯤이었다. 황궁에 똑같은 꽃을 꽂고 다니는 사람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전부 알폰스를 따라 하는 사람들이었다.
알폰스 바텐베르크는 혼인 전이나 후나 변함없이 많은 사람의 경외와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의 행동이나 버릇, 가지고 다니는 물건 등을 흉내 내는 사람은 종종 있었다. 심지어 그가 피우는 독한 시가를 따라 하는 사람마저 있었다.
마찬가지였다. 그 단순하면서도 단정한, 알폰스의 금발과 썩 잘 어울리는 흰색과 보랏빛의 꽃은 아서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의 눈길을 끌었다.
몇몇 귀족들이 그 꽃을 구해서 꽂고 다녔다. 그 덕분에 아서는 몰랐던 그 꽃의 정체도 알게 되었다. 바로 고구마 꽃이었다.
‘고구마 꽃이 유행을 타다니……. 거 참 웃기네.’
고구마라 하면 그 울퉁불퉁하고 못생긴 흙투성이의 식물이 아닌가. 귀족들은 먹지 않아 주로 빈민들이 먹었다.
오죽 낯설었으면 한때 제국에 고구마를 먹으면 나병에 걸린다는 소문까지 있었을까. (고구마의 울퉁불퉁한 표면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런 고구마의 꽃이 황궁 내에서 유행을 타다니. 정말 오래 살고 봐야 했다.
‘그래, 제국의 제1 황자인 이 내가 고구마의 꽃 따위를 달고 다녀야 할 필요는 없지. 이런 것도 잠깐의 변덕일 뿐이야. 곧 있으면 지나갈 거야.’
아서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며칠 뒤, 클로에가 고구마 꽃을 단춧구멍에 꽂아 주는 꿈까지 꾸고서야 그는 인정을 했다. 그리고 시종을 시켜 고구마 꽃을 구해 오게 했다.
고구마 꽃을 스스로 부토니에 자리에 꽂은 아서는 떫은 얼굴로 거울을 바라보았다.
“내가 이런 짓까지 하다니…….”
대체 저 꽃이 뭐라고.
하지만 결국 손에 넣으니 기분이 좋은 것도 사실이었다.
‘건방진 공작 녀석, 마누라가 달아 줬다는 그 자랑스러운 꽃을 이제 나도 갖고 있다고!’
그렇게 생각한 아서는 기분 좋게 본궁으로 향했다.
어쨌든 그리하여, 바텐베르크 공작에 이어 제1 황자까지 고구마 꽃을 꽂고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공작이 코어한 팬이 많다면 대중적인 패션을 이끄는 사람은 바로 황자다. 제국에서 제일 영향력 있는 두 남자가 달고 다니는 꽃은 모두의 주목을 받았다.
“저 꽃이 대체 뭐지?”
“고구마 꽃이라고요? 공작 각하와 황자 전하가 왜 고구마 같은 것의 꽃을 달고 다니시죠?”
“잘은 모르지만, 나도 저걸 구해 봐야겠어. 곧 유행이 될 것 같으니 말이야.”
“고구마 꽃은 대체 어디서 구하는 거야?”
빈민가에서나 구할 수 있던 고구마 꽃의 가격이 갑작스레 8배로 뛰어올랐다. 심지어 고구마 꽃을 얻기 위해서 자신의 저택 온실에 고구마를 직접 심는 귀족들도 많았다.
오래지 않아 고구마는 수도 귀족의 온실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물이 되었다.
* * *
로네펠트 부인의 후작저에서 돌아온 클로에는 곧장 침실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침대에 쓰러져 누웠다. 기분이 무척 좋았다.
‘얼마 전에 온실에 고구마 모종을 50개 심었어요. 위타드 부인의 고구마는 벌써 줄기가 팔뚝만큼 길어졌다고 하더라고요.’
심지어 황제마저 고구마 꽃을 달고 다니기 시작했더라는 로네펠트 부인의 말을 듣고 클로에는 자신의 마케팅이 성공적으로 먹혀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많은 귀족들이 고구마를 구하지 못해 안달하고 있었다. 귀족저의 온실마다 고구마가 자라고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고구마 꽃을 꽂고 다녔다.
귀족들 사이에서 고구마에 대한 거부감이 많이 허물어진 것이다.
물론 귀족들이 좋아하는 것은 고구마의 덩이뿌리가 아니라 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 소득만으로도 충분히 희망이 보였다.
잠시 성취감을 만끽하던 클로에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살짝 흐트러진 앞머리 사이로 그린 올리브빛 눈동자가 반짝였다.
“아직 만족하기는 일러. 이젠 슬슬 다음 단계를 개시해야지.”
클로에는 부지런히 다음 단계의 작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고구마 꽃 작전’이 이미지를 이용한 간접적 마케팅이라면 이번 단계는 직접적 마케팅이었다. 고구마를 소개한다는 목표의 하이라이트이자 본게임이기도 했다.
<다음 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