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장 (20/39)

20장

“저희가 준비한 식사가 만족스러우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이에요. 아주 즐거웠어요, 브랙스턴.”

즐거운 식사가 끝난 뒤, 브랙스턴은 공작 부부를 마차까지 배웅해 주었다. 알폰스와 가벼운 악수를 하고 클로에의 손등에 입을 맞춘 뒤 그가 말했다.

“오늘도 정말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공작부인. 아, 물론 공작 각하께도요.”

그는 진심으로 감명을 받은 얼굴이었다. 그야 그럴 만도 했다. 제국에서는 어딜 가도 배울 수 없는 훌륭한 지식들을 그녀에게서 많이 얻었으니까.

“다음에 꼭 또 들러 주십시오. 그때는 더욱 정성스러운 진수성찬을 준비하겠습니다.”

“어머나, 그거 기대되네요.”

클로에와 브랙스턴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누군가의 헛기침이 끊어 놓았다. 알폰스였다.

“이만 가지. 오늘의 후한 대접은 잊지 않겠네.”

“어휴, 아닙니다. 살펴 가십시오, 각하. 그리고 공작부인.”

클로에는 마차에 오른 뒤에도 계속해서 브랙스턴에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맛있는 것을 먹고 차에 대한 이야기를 잔뜩 해서 기분이 한껏 좋아진 상태였던 것이다.

곧 마부가 문을 닫았다. 즐거운 시간을 보낸 여운으로 자신에게 곧 일어날 일을 잊어버린 클로에는 다시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맛!”

클로에는 자신의 어깨를 눌러 좌석에 눕히는 손길이 유달리 다급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알폰스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다.

“누구에게 그렇게 웃어 주시는 겁니까?”

“네?”

“그런 야한 눈으로 다른 남자를 보지 마십시오. 함부로 눈웃음 흘리고 다니지 말란 말입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클로에는 잠시 어안이 벙벙해졌다가, 곧 빙그레 웃었다. 그녀가 손을 들어 상대의 뺨을 감쌌다. 그의 매끄러운 턱과 잡티 하나 없는 뺨이 손을 가득 채웠다.

“알폰스, 많이 흥분했네요.”

가슴이 뛰었다. 이렇게나 그가 애달아하는 모습은 처음이라 어쩐지 그가 귀여워 보였다. 흐뭇한 만족감이 마음속에 차올랐다.

그가 잔뜩 애를 태우고 있다는 사실은 아까 식당에서도 잔뜩 느꼈다. 그때는 그가 얄미워 보였지만 단둘밖에 없는 데다 배도 채운 지금은 되레 즐거웠다.

알폰스 바텐베르크, 세상에서 제일 냉철하고 인내심이 강할 그가 이렇게까지 애를 태우고 있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그녀 때문이었다. 그녀를 가슴 깊게 원해서.

이 사실은 무척 부끄러웠지만, 그만큼이나 가슴 떨리고 기쁘기도 했다.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그의 눈빛이 뜨거웠다. 그의 강렬하고 뇌쇄적인 붉은 눈빛에 클로에는 순간 부끄러움이 마취되는 것만 같았다.

풍선처럼 들뜨는 기분에 그녀가 상체를 조금 일으켰다. 그러고는 그의 뺨을 쥔 채 입술 위에 입을 맞추었다. 쪽 하고.

“……!”

순간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강렬한 욕망과 질투만을 드러내던 그의 눈동자에 놀람의 기색이 떠올랐다.

그런 그가 사랑스러워 클로에가 웃었다. 그녀의 맑은 웃음소리가 알폰스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알폰스는 순간 그녀가 한 일을 믿을 수 없었다. 그가 알기로 클로에는 수줍음이 썩 많은 편이었다. 특히 스킨십에 적극적이지 못했고, 따라서 먼저 접촉을 해 오는 사람은 거의 언제나 그였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먼저 접촉을 해 왔다. 술에 취한 것도 아닌 맨정신으로. 심장이 강하게 뛰었다.

‘내 삶에서 이렇게 사랑스러운 사람이 또 있었던가?’

그 짧은 순간에 그가 문득 생각했다.

‘그럴 리가 없다.’

그의 매력적인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브랙스턴에 대한 질투라던가, 클로에에게 괜한 원망 같은 것은 아까의 입맞춤 한 번에 싹 휘발된 뒤였다.

이제 그의 가슴속에는 정열적인 애정과 당장 그녀를 품에 안고 싶은 충동뿐이었다. 그녀의 속옷 차림을 보았을 때부터 계속 이어져 왔던 불꽃이 폭발적으로 타올랐다.

그가 덮치듯 그녀의 입술을 삼켰다. 클로에는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작은 입술로, 미숙한 실력으로나마 그를 받아들이고 돌려주려고 애쓰는 것이 느껴져 더더욱 사랑스러움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긴 키스가 끝나고, 마침내 입술을 떼어낸 뒤, 알폰스가 마부석을 향해 말했다.

“마부, 이곳에서 제일 가까운 숙박업소로.”

마차가 달리는 그 짧은 순간에도 알폰스는 갈증을 참을 수가 없었다. 달리는 내내 그는 애끓게 치솟는 갈증을 그녀의 입술로 해갈하려 했다.

쉬지 않고 이어지는 입맞춤에 그녀가 숨차 하면 잠깐 입술을 떼어 숨 쉴 틈을 주었다가, 숨을 고르기가 무섭게 다시 입을 맞추기를 반복했다.

“도착했습니다.”

마침내 마차가 멈추었다. 알폰스는 마부가 문을 열어 주는 것도 기다리지 못하고 다급하게 제 팔로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고는 내렸다. 클로에를 한 팔로 끌어안고.

“어맛!”

그녀가 깜짝 놀라 그의 목에 팔을 감아왔다. 그녀의 몸을 작은 인형처럼 가볍게 들어 올린 그는 성큼성큼 여관을 향해 나아갔다.

한편 그의 팔에 안긴 클로에는 주변의 시선을 느꼈다. 어두워진 시간이라지만 큰 대로변이어서 주변에는 사람이 많았다. 그녀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아, 알폰스. 내려 주세요. 제 발로 걸을 수 있어요.”

알폰스가 그녀를 내려 주었다. 클로에가 땅을 디딜 때 높은 구두 때문에 살짝 휘청하자, 그의 단단한 팔이 그녀의 등을 끌어안아 고정해 주었다.

알폰스는 그녀의 등을 단단히 감아 안고 여관에 들어갔다. 여관 주인이 허리를 숙였다.

“어서 오십…….”

“하룻밤.”

알폰스는 한 번도 멈추지 않고, 발걸음의 속도조차 늦추지 않고 방 열쇠 중 하나를 휙 낚아챘다. 그러고는 어안이 벙벙해하는 여관 주인을 뒤로하고 복도를 가로질렀다.

클로에는 방문 고리에 열쇠를 꽂아 넣는 그의 손길이 답지 않게 다급하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어느 정도였냐면, 두어 번 실수를 해서 열쇠가 구멍에 들어가지 못하고 미끄러졌을 정도였다.

만약 알폰스가 이런 실수를 했다고 키엘이나 저택의 사용인들에게 말을 한다면 아무도 믿지 못할 것이었다.

문이 닫히자마자 알폰스는 다시 클로에를 끌어당겨 그녀를 방문에 밀어붙였다. 클로에는 다시 한 번 그의 입술이 자신의 입술 위로 포개어지는 것을 느꼈다. 진득한 입맞춤이 이어졌다.

“으응…….”

그녀가 앓는 소리를 내자, 알폰스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입 맞추면서 그녀의 앞섶 매듭을 풀어 내리기 시작했다.

매듭이 풀어지고, 옷의 사이에서 그녀의 풍만한 가슴이 드러나자 알폰스는 목마른 사람이 물을 마시듯 허겁지겁 그녀의 가슴을 입에 담았다.

알폰스가 그녀의 유두를 핥으며 혀로 둥글리자 클로에는 몸이 저절로 비비 꼬이고, 목이 뒤로 젖혀졌다.

“앗, 으응, 응……!”

클로에는 헐떡이며 문에 몸을 기댔다. 무엇에라도 몸을 기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다리에서 힘이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몸을 숙이며 천천히 입술을 내리던 알폰스는 그녀의 치마폭을 걷어 올렸다. 그의 모습이 치마 아래로 사라지자 클로에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보이지는 않지만, 그가 이제부터 무슨 짓을 할지 알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의 손길이 그녀의 속치마를 올리고 속옷을 끌어 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다리 사이의 민감한 부분에서 뜨거운 숨길이 느껴졌다. 클로에는 눈을 질끈 감았다.

곧, 그곳에서 강렬한 쾌감이 피어올랐다. 츄르릅, 츄릅, 하는 음란하고 물기 어린 소리도 들렸다. 그 음란하고 부끄러운 소리는 온 방 안을 울려서 클로에가 다 부끄러워질 정도였다.

“아아, 하으, 아! 알, 폰스! 아앗……!”

다리에 힘이 풀렸다. 클로에는 거의 주저앉을 뻔했지만, 알폰스의 단단한 손이 그녀의 다리를 받쳐 들어 마음대로 앉을 수도 없었다. 클로에는 앉지도 못한 채 알폰스의 혀에 가장 은밀한 곳을 농락당하며 문에 기대어 할딱였다.

“응, 아흣. 힉……! 알, 폰스! 알폰…… 스……!”

알폰스는 입술을 음핵을 한껏 괴롭히는 동시에 그녀의 입구에 손가락을 밀어 넣기 시작했다. 이미 애액과 타액으로 흠뻑 젖은 그곳은 그의 손가락을 쉽게 받아들였다. 아니 오히려, 쾌감에 자극당한 그곳은 더한 것을 원하듯 액을 쏟아내며 그의 손가락을 빨아들였다. 너무나 기쁜 듯이 그의 손가락을 오물거리고 있었다.

손가락을 빨아들이듯 조여 오는 그 감각에 알폰스는 벌써 다리 사이가 아플 정도로 뻐근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몸이 그를 바라고 있는 것 같아서, 그에게 익숙해진 것 같아서 알폰스는 치마 아래에서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정말이지 위도 아래도, 이렇게나 사랑스러울 수는 없는 것이다.

알폰스는 더 많은 것을 원하는 그녀의 탐욕스러운 아랫입에 물려 주던 손가락을 두 개로 늘렸다. 팔에 힘을 주어 피스톤질하며 그녀의 작은 열매를 남김없이 맛보고, 입술로 비비고 짓눌렀다.

클로에는 거의 미칠 것 같았다. 알폰스가 자신의 치마 아래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꿈에도 모른 채, 그저 그가 주는 쾌감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핫, 하으, 정말, 아, 더는……! 아, 알폰, 스……!”

그녀는 그가 주는 절정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목이 뒤로 젖혀지고, 갈 데 없는 손가락은 문을 벅벅 긁었다. 숨 막히는 고양감이 그녀를 높은 곳으로 몰아갔다. 몸이 기우뚱 불안정하게 기울었지만 알폰스는 그녀가 넘어지지 않도록 몸을 단단하게 잡고 있었다.

절정을 느끼는 와중에도 조금도 봐주지 않고 그녀의 아래를 희롱하던 알폰스는, 그녀의 떨림이 멈추자 치마폭에서 나왔다.

“아아, 하아아…….”

문에 기댄 채, 가슴을 드러내고 앞머리는 온통 흐트러진 모습으로 숨을 몰아쉬는 클로에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알폰스는 입술을 깨물며 자신의 것을 꺼냈다. 클로에의 녹색의 눈동자에 그의 흉악한 물건이 가득 비쳤다.

누구라도 보는 순간 위압감을 느끼게 할 정도의 크기와 모양이었지만, 예상을 했기 때문인지, 클로에는 그것이 두렵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젠 어쩐지 귀여워 보이기까지 하는 것 같았다.

‘정말, 내가 미쳤나 봐.’

클로에는 부끄러워하면서도 그의 물건을 흘끗흘끗 훔쳐보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저런 모양을 하고 있지만 알폰스의 몸이기 때문인지 사랑스러워 보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게다가 지금부터 저것이 가져다줄 감각들에 대한 기대감마저 피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그러는 그녀를 귀엽다는 듯 바라보면서 알폰스는 자신의 것을 쥐고 치마를 들어 올렸다. 클로에가 자신을 마주 보게 한 채로, 그녀의 한쪽 다리를 들어 올려 허벅지를 쥐었다. 그리고 그녀의 안쪽을 향해 그대로 파고들었다.

“으으응!”

클로에가 파드득 몸을 떨었다. 그의 몸이 허벅지를 짓눌러 왔다. 깊이 찔러오는 그의 물건과 함께, 힘겹지는 않을 정도로 몸을 눌러 오는 그의 체중이 느껴졌다. 그것이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았다.

알폰스는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손가락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던 그녀의 아랫입은 그의 것을 물려주자 물 만난 고기처럼 굴었다. 기쁜 듯이 오물오물 물어오는 그녀의 안쪽은 빈틈없이 그의 것을 꽉꽉 조였다.

“아아, 아……! 하으, 윽……!”

클로에는 부끄럽지만 그의 움직임에 합을 맞추고자 노력했다. 허리를 조금씩 조금씩 움직이는 그녀의 움직임은 어색하고 서툴렀으나, 알폰스에게는 굉장한 자극으로 다가왔다.

“……!”

클로에가 스스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는 거의 잡아먹을 듯이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그는 그녀를 통째로 집어삼킬 것처럼 빨아들이고 핥으며 그녀를 탐했다.

“으응, 음……!”

클로에는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그의 키스를 받아 주랴, 숨을 고르랴, 허리를 움직이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어떻게 알폰스는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하고 있는지 믿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마침내 입술이 떨어져 나갔을 때 클로에는 쾌감에 울먹이고 있었다. 이미 허리의 움직임은 잔뜩 흐트러진 상태였다. 그녀의 몸에 걸쳐진 옷이 덜렁거렸다.

“알…… 폰스. 알폰스. 아……! 흐읏!”

알폰스는 울먹이는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하지만 허리 아래는 조금도 다정함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무자비하게 그녀를 몰아가고 있었다.

클로에는 문을 박박 긁었다. 땀이 흠뻑 흘러 옷이 축축했다. 접합부에서 흘러내린 액체가 다리를 따라 흘러내려 바닥까지 적시고 있었다.

“아앙, 아, 아, 아……!”

클로에는 크게 몸을 떨었다. 절정에 이르렀다는 신호였다. 마치 해일 같은 쾌감이 그녀를 집어삼켰다. 알폰스가 뒤따라 절정을 느끼며 그녀의 안쪽 깊은 곳에 사정했다.

알폰스는 붙잡고 있던 클로에의 다리를 내려 주었다.

“수고했습니다.”

그가 클로에를 꼭 안아 주었다. 그녀는 그의 다정한 말과 포옹이 무척이나 기뻤다. 그의 말과 행동에서는 사랑과 배려가 뚝뚝 흘러넘쳤다.

클로에는 그의 등을 마주 안으며 대답했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그렇습니까.”

그녀의 얼굴 여기저기에 입 맞춰주던 알폰스가 속삭였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앞으로도 더 수고하셔야 하니까요.”

“정말, 이 짐승!”

그의 말의 뜻을 이해한 클로에는 그를 팍 밀쳤다. 하지만 알폰스는 조금도 밀려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안아 들더니 침대로 향하는 것이 아닌가.

알폰스는 클로에를 침대에 눕히더니, 반쯤 벗겨져 걸리적거리던 드레스를 완전히 벗겼다. 그리고는 그녀의 몸에 올라타곤 뜨겁게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그것을 거부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기대감에 아래가 저릿저릿했다. 클로에는 기쁜 듯이 그의 키스를 받아들이며, 자신을 탐해오는 그의 손길에 자신의 몸을 맡겼다.

* * *

“어서들 와요.”

약속한 시간이 되자, 귀부인들이 속속들이 도착했다. 로네펠트 부인과 함께 다구와 차를 점검하고 있던 클로에가 활짝 웃었다.

“어머나, 안녕하세요, 공작부인.”

“공작부인이시로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잘 부탁드려요.”

도착한 귀부인들은 타임 자작부인, 해로즈 백작부인, 그리고 위타드 백작부인으로, 로네펠트 부인의 친구이자 오늘의 학생이었다.

클로에는 그들의 첫인상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들이 예의 있고 친절해 보여서이기도 했지만, 차를 좋아하거나 차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 중 나쁜 사람은 없다는 클로에의 선입견 때문이기도 했다.

오늘은 로네펠트 부인이 제안했던 원데이 티 클래스의 날로, 수업 장소는 로네펠트 부인의 후작저 응접실이었다.

“모두 도착하셨군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곧 웰컴 티와 티 푸드를 대접할게요.”

로네펠트 부인이 클로에 대신 말했다. 그녀가 손뼉을 쳐 하녀들을 불러 미리 준비한 티 푸드를 내오라고 일렀다. 클로에는 간단히 홍차를 한 팟 우렸다.

곧이어 로네펠트 부인이 준비한 티 푸드가 나왔다. 클로티드 크림을 곁들인 플레인 스콘과 바나나 스콘, 오이 샌드위치와 빅토리아 스폰지 케이크였다.

빅토리아 스폰지 케이크는 클로에가 로네펠트 부인에게 일러 준 메뉴였다.

스폰지 케이크 두 장 사이에 생크림과 라즈베리 잼을 바르고 아무런 장식을 하지 않은 단순한 요리지만, 특유의 묵직한 식감과 한 입 베어 물면 입 안 가득 퍼져 나가는 버터 향이 홍차와 잘 어울렸다.

이 케이크는 맛도 홍차와 잘 어울릴뿐더러, 클로에의 전생에서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티 푸드로 즐겨 먹었던 것이라는 의미도 있었다.

빅토리아 여왕은 남편인 앨버트 공과 무척이나 사랑이 깊었는데, 이 남편에게 여왕이 몸소 빅토리아 스폰지 케이크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어머나!”

“정말 맛있어 보이네요.”

자리에 모인 귀부인들이 티 푸드를 보며 즐거워했다. 로네펠트 부인이 그들의 곁에 앉으며 말했다.

“그렇죠? 이 티 푸드들은 바텐베르크 공작부인께 직접 배운 레시피랍니다. 홍차와 최고의 궁합을 자랑하는 메뉴죠.”

이미 앞서 클로에에게 차와 잘 어울리는 티 푸드에 대해 배운바 있던 로네펠트 부인이 자신이 배운 것에 대해 자랑스럽게 떠들어 댔다. 스콘에는 클로티드 크림이 최고로 잘 어울린다거나, 홍차에는 향이 강하지 않은 깔끔한 티 푸드가 어울린다든가, 기타 등등.

로네펠트 부인의 설명을 듣고 귀부인들 중 한 명이 감탄했다.

“어머나, 전 전혀 몰랐어요. 홍차에 어울리는 티 푸드가 따로 있다니. 대단해요, 로네펠트 부인.”

“호호, 아니에요. 이 정도는 보통이죠.”

“공작부인께 그런 사실들을 배웠다고요? 공작부인은 정말 대단하신 분이시네요.”

귀부인들 중 한 사람이 말했다. 순간 자리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홍차를 우리고 있던 클로에를 향했다.

클로에는 모든 사람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는 것을 느끼고 수줍게 웃었다. 마침내 홍차가 다 우려지자, 그녀가 직접 티팟을 들어 테이블 중간에 가져다 놓았다.

“자, 마음껏 드세요.”

“어머! 정말 아름다워요.”

단순히 홍차를 내왔을 뿐인데 이런 말이 나온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번 티 클래스에서 사용한 로네펠트 부인의 다구는 유리로 된 것들이었다. 유리로 된 티팟과 잔은 가득히 차오른 오렌지빛의 아름다운 수색이 투명하게 들여다보였다.

특히, 마치 호박처럼 세로로 올록볼록한 굴곡이 있는 티팟은 안에 가득한 오렌지빛 액체 때문에 진짜 호박처럼 보였다.

“너무 사랑스러워요!”

“정말 예쁜 주전자네요.”

클로에가 생긋 웃었다. 그녀가 차근차근 설명했다.

“유리로 된 다구는 차의 수색을 잘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요. 여러분께 차의 다양하고 아름다운 수색을 보여 드리고 싶어 이 다구를 선택했답니다.”

“어머나, 그랬군요!”

“과연!”

유리로 된 다구는 보기에는 아름답지만 보온성이 많이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다. 단독으로 쓰면 차가 너무 빨리 식어 버리기 때문에, 차를 따뜻하게 유지시켜 주는 다구를 함께 사용하는 편이 좋았다. 티팟을 감싸는 형태로 만든, 헝겊 등으로 된 재질의 티 코지(tea cozy)라든가 티 워머(tea warmer) 등이 그것이었다.

오늘 같은 경우는 티 워머가 함께 나왔다. 티팟 아래에 받쳐 놓는 동그란 형태의 그것은 작은 초를 넣어 촛불의 열로 티팟을 따뜻하게 데우는 데 쓴다.

다섯 명의 귀부인들은 향긋한 홍차와 티 푸드를 즐기며 잠시 서로의 안부를 묻거나 날씨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었다.

분위기를 적당히 띄운 뒤, 클로에가 설명을 시작했다.

“차의 종류는 크게 나누어 6가지가 있어요. 이것을 6대 다류(茶類)라고 해요. 백차, 녹차, 황차, 청차(우롱차), 홍차, 흑차가 그것이에요.”

차의 역사부터 차의 종류, 좋은 차를 고르는 법, 홍차를 맛있게 우리는 법 등이 그녀의 주된 이야기였다.

사실 클로에는 오늘을 위해 많은 준비를 했다. 지식은 충분했지만 남을 가르치는 데에 필요한 것은 지식뿐만이 아니다. 조리 있고 깔끔하게 핵심만을 말하는 말솜씨와 학생의 눈높이에서 바라보는 시선, 그리고 커리큘럼 등의 꼼꼼한 준비가 필요하다.

고작 서너 시간 안에 끝나는 원데이 클래스, 그것도 학생은 네 사람밖에 없는 수업이었지만 클로에는 결코 대충 하고 싶지 않았다.

누가 뭐래도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것에 대한 수업이었다. 그녀는 학생들이 많은 것을 얻어가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면 했다.

그렇게 해서 차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지고, 차를 진심으로 좋아하게 되었으면 했다.

그래서 많은 것을 준비했다. 수업의 가대본을 직접 써 보기도 했고, 가끔 분위기가 늘어지거나 학생들이 지루해하면 하나씩 꺼내놓을 농담이나 자신의 경험담까지 정리해 두었다.

사실 클로에 그녀는 처음부터 말재주가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태생적으로 소심한 구석이 있고 활발한 사교성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전생 때에 대학생 시절부터 직장 생활을 할 때까지 타인의 ppt 발표를 전담한 결과 설명을 한다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 요령이 붙었다. 클로에로서의 새 삶을 살면서 겪은 여러 가지 경험과 성격의 변화 역시 도움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클로에의 수업은 꽤 괜찮았다. 학생들은 지루해할 틈 없이 그녀의 설명에 빠져들었고 시시때때로 감탄했다.

문외한이 보기에도 그녀의 지식의 넓이와 깊이는 경탄스러울 정도였다. 어떤 질문이 들어와도 차근차근 꼼꼼히 학생의 눈높이에서 설명을 해 주었고, 설명은 차분한 분위기에서 이루어졌지만 애정과 열정이 느껴졌으며, 준비 역시 철저하게 했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 수 있었다.

로네펠트 부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평소 공작부인이 설명해 주는 것도 재미있었는데, 오늘은 정말 대단한걸!’

홍차를 홀짝이며 그녀가 생각했다.

‘역시 내 안목은 틀리지 않았어. 공작부인은 가르쳐 주는 일에 재능이 있다니까.’

이 수업을 주선한 사람으로서의 책임감 때문인지, 그냥 로네펠트 부인의 성격이 그런 건지는 모르겠으나 그녀도 수업에 제법 도움을 주었다.

대답도 잘했고, 적극적으로 수업에 참여하거나 친근한 농담을 던지면서 수업의 분위기가 부드럽게 유지되도록 도와주었던 것이다.

이런저런 차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들은 홍차를 많이 마셨다. 클로에는 싱할라, 바라트, 온 등의 홍차를 소개하면서 각 산지별 홍차를 몇 종류씩 우려 주어 각각의 특징을 선명하게 느끼게 했다.

바라트의 아쌈을 마시던 도중이었다. 귀부인들 중 한 사람인 타임 부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찻잔을 들여다보는가 싶더니, 호들갑스럽게 이렇게 말했다.

“어머, 어머, 이걸 보세요. 찻물에 김이 꼈어요.”

“찻물에 김이라고요?”

다른 귀부인들이 전부 타임 부인의 찻잔을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말은 정말이었다. 붉은 찻물의 표면 부분에 하얗게 김이 낀 것처럼 보였다. 이것은 안개가 낀 것 같기도 했고, 서리가 내린 것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빙판이 깨어지듯 쩍쩍 굵은 금이 생기기도 했다.

위타드 부인이 무척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다.

“어머, 정말이잖아요! 이게 대체 뭐죠?”

그리고는 다시 모두의 시선이 한쪽으로 쏠렸다. 물론 클로에에게였다.

이제 슬슬 모두의 시선을 받는 데에 익숙해진 클로에가 가볍게 웃었다.

“그건 포기 크랙(foggy crack)이라는 것이에요. 차에 포함된 성분 때문에 생기는 현상인데, 좋은 차를 잘 우렸을 때에 생긴다고 해요.”

“어머나, 그럼 이 차는 좋은 차겠군요!”

“공작부인께서 직접 골라 가져오신 차인데, 당연하죠.”

로네펠트 부인의 말에 클로에가 웃었다.

해로즈 부인이 끼어들었다.

“그건 그렇고 정말 맛있는 아쌈이에요. 더 마셔도 될까요?”

“물론 괜찮지만, 찻잎을 걸러내지 않고 티팟 안에 그대로 남겨 두어서 많이 떫어졌을 거예요.”

이건 이상한 일이었다. 평소 클로에는 차를 우릴 때마다 찻잎을 미리 전부 걸러 두었다. 차가 더 떫거나 써지지 않도록 맛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녀가 하필 아쌈의 잎을 걸러 내지 않은 이유는 바로 밝혀졌다.

“아쌈은 특유의 고구마를 닮은 구수한 몰트 향과 진한 맛 때문에 밀크티에 어울리죠. 아주 간단한 밀크티 만드는 법을 알려 드릴게요.”

밀크티라 함은 우유를 넣은 홍차다. 진하게 우린 홍차에 우유와 설탕을 넣으면 밀크티가 된다는 것 정도는 이 자리에 모인 귀부인들도 알고 있었다. (그들 전부가 트리플 스위트의 팬이었기에 밀크티를 사 마셔 본 경험이 많이 있었다.)

“우유와 설탕 대신 넣으면 아주 좋은 재료가 하나 있어요. 그건 바로…….”

클로에가 뜸을 들이다가, 귀부인들의 얼굴에 궁금함과 다급함이 묻어날 때쯤 말했다.

“연유예요.”

“연유라고요?”

다른 귀부인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백문이 불여일미(百聞而不如一味)다. 클로에는 하녀에게 연유를 가져올 것을 부탁했다.

곧 달콤한 연유가 담긴 조그마한 단지가 대령되었다.

클로에는 지나치게 우러나 검붉은 빛깔로 변한 아쌈을 찻잔에 따랐다. 그리고는 연유를 티스푼으로 다섯 번이나, 밥숟가락으로 치면 두 스푼 정도 되는 분량을 떠 넣어서 잘 섞었다.

그렇게 하니 과연, 검붉어서 보기만 해도 쓴 홍차의 빛깔이 부드러운 밀크티의 색으로 변했다.

클로에가 귀부인들에게 말했다.

“자, 한번 해 보세요.”

그녀가 하는 것을 넋 놓고 지켜보고 있던 귀부인들이 똑같이 흉내 내 보았다. 순식간에 달콤한 밀크티가 만들어졌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클로에가 말했다.

“진하게 우린 홍차에 연유를 넣으면 정말 간단하면서도 맛있는 밀크티를 만들 수 있어요. 자, 이제 맛을 보세요.”

그 말에 귀부인들이 밀크티를 홀짝이기 시작했다. 곧이어 모두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머……! 정말 진하고 맛있는 밀크티예요!”

당연한 일이다. 홍차에 연유를 넣어 만드는 밀크티는 홍차에 우유를 붓는 것보다 수분이 적게 포함되고, 따라서 맛이 진해진다. 게다가 연유 특유의 부드럽고 달콤한 풍미 때문에 밀크티의 향미가 좋아진다.

“홍차를 우려서 우유를 넣어 만든 밀크티보다 훨씬 맛있는걸요.”

“게다가 아주 간단하기까지! 정말 좋은 레시피예요.”

“공작부인은 정말 대단하세요. 어떻게 이런 레시피를 알게 되셨어요?”

귀부인들이 즐거운 듯 떠들어 댔다. 특히, 개중 위타드 부인이 좋아했다.

“저는 차를 잘 못 우리는데, 이런 쉬운 레시피라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요. 찻잎의 정확한 용량과 우리는 시간 같은 것을 따질 필요가 없어서 더 좋네요.”

위타드 부인은 여기 모인 귀부인들 중 제일 차를 우리는 솜씨가 형편없었다. 그녀는 깜빡깜빡하는 경향이 있어 찻잎에 물을 붓고 시간 재는 걸 잊었다. 그래서 너무 오래 우리거나 너무 짧게 우리거나 했다.

이런 사람에게 이 밀크티를 만드는 방식은 무척이나 편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찻잎에 물을 붓고 무작정 오래 우려도 괜찮으니까. 단 10초의 차이로도 맛이 확확 바뀌는 스트레이트(우유 등의 재료를 넣지 않고 찻잎 자체로만 우리는 차)와는 전혀 달랐다.

그녀를 보고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역시 다들 간단하고 쉽게 우리는 방식을 좋아하는구나. 사실 정통적인 차 우리는 방식이 복잡하긴 해.’

다구를 예열하고, 찻잎의 양을 계량하고, 티팟에 찻잎을 넣고, 그 위에 정확히 계량한 물을 붓고, 정확한 시간을 재어 우린 뒤 스트레이너로 걸러내며 다른 티팟에 차를 따라 낸다. 클로에는 이 과정마저 좋아했기 때문에 거의 언제나 정통적인 차 우리는 방식을 고수했지만 모든 사람이 그럴 수는 없었다.

한 명이라도 많은 사람이 차를 즐겨 마시게 되려면, 차가 대중적이 되려면 차 우리는 방식을 최대한 간소화하는 편이 좋았다. 클로에는 그 방편에 대해 잠시 고민했다.

“정말 즐거웠어요, 공작부인.”

“저도요. 정말 유익하고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클로에의 티 클래스는 예상했던 시간보다 무려 한 시간을 넘겨서 끝났으나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부인들이 벌써 끝난 수업에 아쉬움을 느낄 정도였다.

“만일 다음에도 또 이런 수업을 하신다면 꼭 제게 연락을 주세요.”

“어머, 저도요! 꼭 연락 주세요.”

“수업을 장기적으로 해 보실 계획은 없으세요? 공작부인께 꾸준히 배우고 싶어요.”

반응이 좋은 것 같아 클로에는 몹시 기뻤다. 비록 준비는 힘들었지만, 그 보람이 있었다.

한데 귀부인들 중 위타드 부인이 이렇게 말했다.

“저도요. 하지만 공작부인께서 시간이 나실지 모르겠어요.”

“아, 맞아요. 워낙에 바쁘신 분이니까요. 사업도 정말 잘하시고 있고…….”

“일을 무척 열심히 하신다고 들었어요.”

다른 귀부인들이 아쉽다는 얼굴로 동조하던 그때였다.

“어쩔 수 없어요. 우리 공작부인은 사교계의 떠오르는 별이잖아요.”

로네펠트 부인이 호호 웃으면서 클로에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삽시간에 클로에의 뺨이 붉어졌다. 그녀가 손사래를 쳤다.

“무슨 말씀이세요? 과찬이 심하세요.”

기대했던 반응이었다. 요즘 클로에 놀리는 재미로 살고 있는 로네펠트 부인이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흑심(?)을 숨기고 다정하게 웃어 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공작부인이야말로 겸손이 심하세요. 요즘 바텐베르크 공작부인하면 사교계에서 알아준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어요. 그렇죠? 여러분.”

로네펠트 부인이 다른 귀부인들에게 동조를 구했다.

타임 부인, 해로즈 부인, 그리고 위타드 부인은 오랜 사교계 생활로 다져진 눈치로 그녀의 의도를 눈치챘다. 로네펠트 부인은 클로에를 놀리고 싶은 것이다. 물론 칭찬이 진심이 아니라는 건 아니지만.

게다가…….

“어머, 이분 좀 봐……. 그러다가 다른 분들이 오해하시겠어요.”

그 놀림에 반응하는 클로에는 꽤 귀여웠다. 부드러운 눈매가 순하게 생겨서는 빨갛게 달아오른 뺨으로 손사래를 치는데,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더 놀려 주고 싶게 만드는 마력이 있는 모습이었다.

해로즈 부인이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오해는요. 공작부인께서 굉장하시다는 것은 네 살배기 어린애도 알아요.”

타임 부인도 거들었다.

“요즘 모든 어린 소녀들의 선망의 대상이시잖아요. 지성과 인품, 능력을 겸비한 공작부인이라니! 어떻게 이 이상 멋질 수가 있겠어요?”

위타드 부인도 헛기침을 하더니 끼어들었다.

“그럼요. 공작부인은 제국 여성들의 귀감이라고요.”

누군가를 놀려 먹겠다는 공통의 목표 앞에서 부인들의 단합력은 굉장했다.

그들의 과장적인 칭찬에 클로에는 얼굴이 불타오르는 것만 같았다. 손 부채질을 해 보았지만 더더욱 뜨거워지기만 할 뿐이었다.

“어머, 정말……. 이, 이분들이 왜 이러시지…….”

귀부인들은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웃었다.

‘공작부인에게 이런 면모도 있었구나.’

하여간에 공작부인은 꽤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차분하고 지적으로 차에 대해 강의할 때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로네펠트 부인은 이만하면 충분히 놀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뭐든 지나치면 안 되는 법이다. 그녀가 화제를 돌렸다.

“어쨌든 다음에도 또 차를 마셔요. 가게에도 자주 놀러 갈게요.”

로네펠트 부인은 자신이 화제를 돌리자 클로에의 얼굴에 뚜렷하게 드러난 ‘살았다’라는 단어를 보았다. 하여간에 감정이 뚜렷한 사람이었다.

“그럼요. 얼마든지 환영이니 자주 찾아와 주세요.”

“저도 가도 되는 거죠, 공작부인?”

“저도요!”

“물론이죠. 모두 함께 즐거운 티타임을 가져요.”

“어머, 기뻐라!”

클로에의 첫 티 클래스는 그렇게 즐거운 추억을 남기고 마무리되었다.

한편, 티 클래스로 인해 귀부인들만이 무언가를 배워 간 것은 아니었다. 클로에 역시 무언가를 배웠다.

‘역시 한 명이라도 많은 사람을 사로잡기 위해서는 차 우리는 방식을 간소화해야 해. 지금의 잎 차를 우리는 과정은 입문자에게는 복잡하게 느껴질 거야.’

티 클래스가 끝난 뒤 침실에서 휴식을 취하며 그녀가 생각했다.

간소화의 방편으로 이것저것 생각해 보았지만, 현재 상황에서 제일 좋은 방법은 단 한 가지밖에 없었다. 제일 실현 가능성이 높고 모두에게 반응이 좋을 만한 것. 그것은 바로…….

클로에가 침대에서 일어나 앉으며 생각했다.

‘나는 티백을 만들 거야.’

* * *

클로에의 전생에서 티백을 발명한 사람은 20세기 초의 미국인 토마스 설리반이었다. 차 판매상이었던 그는 찻잎 샘플을 비단 주머니에 담아 고객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한데 그중에서 찻잎을 비단 주머니째로 물에 담가 우려 마셔 본 고객이 있었고, 그 고객은 이 방식이 매우 편리하고 뒤처리가 간단하다고 전해왔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토마스 설리반은 역사상 첫 티백 홍차를 상품화했다.

‘확실히 티백은 잎 차보다 훨씬 접근하기 쉽지. 간편하고 쉬운 과정으로 차를 우려 마실 수 있어.’

클로에는 전생 때 전 세계에서 유통되는 홍차의 85%가 티백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트리플 스위트에서 주력으로 판매하는 잎 차는 전생의 시장에서도 고작 15%의 비중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클로에는 소수의 마니아만이 차를 즐기고 좋아하길 바라지 않았다. 그녀는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이 차를 좋아해 주었으면 했다. 많은 사람들의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소비되길 바랐다.

그러기 위해서는 차를 우리는 방법은 간단해져야 한다. 차를 우리는 솜씨가 부족해도, 필요한 도구가 없다고 해도, 누구나 언제 어디서나 쉽게 차를 우려 마실 수 있도록.

트리플 스위트의 새로운 상품, 티백 홍차를 개발하기 위해 클로에는 다시 티룸으로 들어갔다.

“제일 먼저 티백의 재질을 정하자.”

그녀는 곰곰이 고민했다. 일단 전생에서 주로 티백의 재질로 쓰였던 건 나일론이나 옥수수 전분 펄프다.

하지만 둘 다 제국에서는 개발되지 않은 것들이었다. 물론 클로에는 차 마니아지 화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아무리 그녀라도 그것을 만들어 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클로에는 제국에서 구하기 쉬운 재료들을 가져다가 하나씩 비교해 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그녀가 고르고 골라낸 재질은 면, 마(린넨), 비단, 모슬린이었다.

먼저 면과 마는 생산가가 저렴하다. 그러나 실험해 본 결과 둘 다 섬유 재질 특유의 맛이 함께 우러났다. 심하진 않고 입맛이 아주 예민한 사람만 느낄 수 있는 정도지만 그것으로도 클로에의 성에 차지 않았다.

비단은 생산 단가가 비싼 데다 우러나는 정도가 다른 재질에 비해 많이 떨어졌다.

마지막으로 모슬린. 모슬린이란 면사를 성기게 직조해 만든 섬유였다. 쉽게 말해 면과 비슷했으나, 들어가는 섬유가 적다 보니 섬유 재질의 맛이 훨씬 덜 우러났다. 게다가 단가도 낮고, 조직이 성기니 차 성분의 투과율이 좋았다.

“과연, 다들 모슬린으로 티백을 만드는 이유가 있었구나.”

이 모슬린은 클로에의 전생에서도 티백을 만들 때 흔히 쓰이는 재질이었다. 나일론과 종이 재질의 티백이 비교적 저가형이라고 한다면 모슬린 티백은 고급형이라고 할 수 있겠다.

결국 티백의 재질은 모슬린으로 결정되었다.

“자, 다음은 ‘찻잎을 어느 정도로 분쇄할까’야.”

현재 트리플 스위트에서 판매하는 찻잎은 전부 홀리프(whole leaf)로, 한 번도 절단하지 않은 원래 형태 그대로의 찻잎이었다.

이 역시 전생의 기억을 돌이켜 보면, 티백 중에도 홀리프의 찻잎을 사용한 것들도 물론 있었다.

하지만 흔히 대중적으로 소비되는 것은 홀리프가 아니라 패닝(fannings) 등의 형태로 잘게 분쇄한 형태다. 왜냐하면, 찻잎의 크기가 작을수록 잘 우러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잘게 분쇄해 버리면 과거 부엌 하녀 리사가 메이슨 부인에게 했던 실수처럼 다루기 어려워질 수 있었다.

클로에는 찻잎을 직접 손으로 잘라가며 실험해 보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로 분쇄한 찻잎이 티백으로 적당할지를 연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무척이나 힘들면서도 즐거운 일이었으나 티백 만들기에만 매달릴 수는 없었다.

클로에는 공작부인이었고 저택의 내사와 사업을 관리하기에도 바빴다. 당연하지만 사교 활동도 해야 한다. 알폰스와의 연애 사업도. 그렇기 때문에 남는 시간을 잘 활용해 연구를 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렇게 해서, 티백을 만들기 위해 남는 시간마다 틈틈이 연구를 한 지 며칠이 지났다.

클로에가 부엌에 나타났다. 엘리를 데리고. 부엌 하녀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세상에, 마님!”

“어서 오세요, 마님!”

그리고 다들 반가워했다. 클로에의 업무가 많아진 지금은 업무가 없었던 예전처럼 자주 부엌에 찾아올 수 없었지만, 여전히 부엌 하녀들은 모두 그녀를 좋아하고 존경했다.

“모두들 오랜만이구나. 애쉴리, 나도 만나서 반갑단다. 재클린, 잘 있었니?”

물론 클로에 역시 부엌 하녀들을 몹시 아꼈다. 과거 사용인들의 외면을 당하던 시절, 제일 먼저 그녀에게 마음을 열어 준 아이들일 뿐 아니라 언제나 이들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다.

“오늘은 내가 만든 새로운 상품을 보여 주러 찾아왔단다.”

특히 트리플 스위트의 신메뉴를 개발할 때마다 의견과 조언을 아끼지 않던 아이들이었다. 그래서 부엌 하녀들이 클로에를 신뢰하는 만큼 그녀 역시 부엌 하녀들을 무척 신뢰했다.

클로에에게 몰려든 부엌 하녀들 중 애쉴리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무엇일지 궁금해요, 마님. 이번에도 홍차인가요?”

“그렇단다. 내가 이번에 가져온 홍차는 아주 새로운 것이란다. 바로 티백이라는 거야.”

“티백이라고요?”

클로에가 자상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자, 이걸 보렴.”

위에 올려놓았다. 복주머니처럼 생긴 하얀색의 작은 주머니였는데, 안에 검은색의 무언가가 들어 있는 게 보였다.

부엌 하녀들 중 제일 차를 잘 우리고 좋아하는 리사가 말했다.

“찻잎이군요! 이 정도면 한 팟 정도 우릴 수 있겠네요.”

“맞아. 딱 3g의 찻잎이 들어 있거든. 똑똑하구나, 리사.”

“헤헤.”

“그럼 여기 담긴 찻잎을 꺼내서 쓰는 건가요?”

재클린이 차분하게 물었다. 클로에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이것 자체를 물에 넣을 거야.”

“네? 이 주머니를 물에 넣는다고요?”

이런 반응이 올 줄 예상했다는 듯이 클로에가 빙긋 웃었다. 그녀가 가볍게 손뼉을 짝짝 쳐서 분위기를 환기하곤 말했다.

“자, 그럼 모두들 티백을 사용하는 법을 배워 보자꾸나!”

하녀들은 순식간에 갓 끓인 물과 다구 등을 준비해 왔다. 시범은 차를 잘 우리는 리사가 맡기로 했다.

손에 모슬린 티백을 하나 쥔 리사는 아주 많이 긴장한 얼굴로 말했다.

“마님, 먼저 이걸 티팟에 넣으면 될까요?”

일반적으로 차를 우릴 때는 티팟에 찻잎을 먼저 넣고 물을 넣는다. 하지만 클로에는 고개를 저었다.

“이 티백 안에는 패닝에 가까운 찻잎이 들어 있단다. 리사, 패닝이 뭔지 기억하지?”

리사가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녀는 엄하고 무시무시한 메이슨 부인에게 패닝급 찻잎을 잘못 우려 주었다가 아주 크게 혼쭐이 날 뻔했다.

리사는 자신이 아직도 이 저택에서 일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클로에의 자비와 친절 덕이라고 생각했다.

클로에가 웃었다.

“기억하렴. 티백을 우릴 때는 물을 먼저 넣고 티백을 넣어야 한단다. 안 그러면 이전에 리사가 잘못 우렸던 패닝처럼 찻잎이 지나치게 자극을 받아 맛이 없어지거든.”

“아, 알겠습니다, 마님.”

리사는 티팟에 뜨거운 물을 가득 부었다. 그리고는 티백을 찻잎이 자극받지 않도록 조심스레 물에 넣었다.

“패닝은 홀리프보다 우리는 시간이 짧다는 것, 기억하지? 티백 역시 그렇단다. 약 1분 30초 정도면 되겠구나.”

자잘한 찻잎이 들어 있는 티백은 패닝급 찻잎처럼 아주 소중하게 다뤄 주어야 한다. 티백을 흔들거나 휘젓거나 짰다가는 쓴 성분이 있는 대로 우러나와 홍차는 시커먼 쓴 물이 되고 만다.

그러니까 티백을 물에 넣은 뒤에는 건드리지 말고 고이 내버려 두는 것이 좋다.

그렇게 1분 30초가 지난 뒤, 리사는 클로에의 가르침에 따라 티백을 조심스레 꺼내 버렸다. 이렇게 간단하고 빠르게 맛있는 홍차가 한 팟 만들어졌다.

“우와, 이럴 수가!”

“정말 빠르고 간단하네요, 마님!”

거름망과 티팟 두 개를 사용하는 찻잎 우리는 법에 익숙해져 있던 부엌 하녀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티백을 사용하면 정말 쉽고 간편할뿐더러, 설거짓감도 줄어든다. 하녀들이 좋아할 만도 했다.

리사는 깊은 감명을 받은 눈으로 아름다운 호박빛으로 빛나며 달콤한 향이 풍겨 나오는 찻물을 들여다보았다. 그녀가 존경을 담아 클로에를 바라보았다.

“마님, 이건 정말 굉장한 발명품이에요. 마님은 정말 대단하세요.”

“맞아요, 마님!”

“마님 최고!”

하녀들이 신이 나서 제각기 떠들어 댔다. 쑥스러움에 뺨이 살짝 상기된 클로에가 웃었다.

어찌 됐건 부엌 하녀들의 티백에 대한 평은 그야말로 최고였다. 그리고 그들이 호평한 상품 중에 발매 후 반응이 좋지 않았던 것은 없었다. 클로에는 몹시 만족스러웠다.

이틀 뒤, 클로에는 친한 사용인들(부엌 하녀들 전원을 포함한)과 기사들에게 티백을 하나씩 예쁘게 포장해서 선물했다. 기사들은 간편하다고 호평이었으며, 하녀들은 너무 예쁘고 귀여워서 도저히 쓸 수가 없다고 야단이었다.

어쨌든 클로에의 깜짝 선물에 모두가 기뻐했다. 클로에는 무척 보람을 느꼈다.

얼마 후 클로에는 아쌈과 싱할라, 얼 그레이의 티백 버전을 출시했다. 모든 티백 상품에 금 잉크로 손수 적은 사용법과 주의 사항을 적은 카드까지 넣어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 달이 지났다. 여진이 부리나케 공작저로 달려왔다. 평소 차분하고 냉소적인 그녀가 그렇게 다급하게 행동하는 것을 클로에는 처음 보았다.

클로에라고, 그 모습을 보고 내심 좋은 소식이 있겠거니 기대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하지만 여진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그녀의 그런 기대조차 한참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정말 축하드려요, 공작부인. 티백 한 종의 판매량이 모든 잎 차의 한 달 판매량을 뛰어넘었어요.”

“뭐라고요?!”

클로에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사업을 이끌면서 온갖 일들을 겪었고, 그동안 다양한 놀랄 만한 일들을 만나긴 했지만……. 이번만 한 일은 아마 다시 없을 것이었다.

클로에가 개발한 티백은 그야말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사교계에 유행하는 홍차라는 것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기는 했지만, 홍차를 맛있게 우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홍차를 우리는 방법 자체를 모르거나 비싼 찻잎을 구입했지만 맛있게 우리는 데에 실패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모든 문제를 해결한 것이 바로 티백이었다. 누구나 쉽게 차를 우릴 수 있는 티백은 홍차의 유행이라는 시기와 완벽한 시너지를 이루었다. 물 들어올 때 노 젓듯이 모두가 차에 관심을 가질 때 차에 대한 진입 장벽을 획기적으로 낮춘 것이다.

결과적으로 티백은 어마어마하게 많이 팔렸다. 찻잎의 용량이 같다면 잎 차보다 티백이 훨씬 비싸다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트리플 스위트에서 판매하는 티백은 하나하나가 수제품이었으므로 더욱 비쌀 수밖에 없었다.)

클로에는…… 믿을 수가 없었다. 싫거나 불쾌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로, 너무 행복해서 믿을 수가 없었다.

덕분에 여진은 잔뜩 당황해야만 했다. 언제나 차분하고 획기적인 사업 수완을 보였던 자신의 고용인이 눈물을 뚝뚝 흘리는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고, 공작부인. 왜 그러세요?”

“아…… 미안해요.”

클로에가 소매로 눈가를 훔쳤다. 여진이 얼른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주었다. 클로에는 감사 인사를 하며 그것으로 눈가를 찍어 내었다.

“감격스러워서요. 살다 보니 이런 일도 있구나…… 하고.”

“살다 보니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 전부가 공작부인의 공입니다. 정말이지…… 티백 같은 상품은 저도 생각도 해 보지 못했다고요. 어릴 적부터 평생을 차를 마시며 살아왔는데.”

여진이 위로하듯 말했다. 클로에는 그녀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동방 사람들은 차에 대해 보수적이다. 우유든 설탕이든 무언가를 넣어 먹는 것을 아주 괴상한 행위로 여긴다.

여진 역시 다르지는 않았다. 차에 우유와 설탕을 섞는 밀크티 같은 것은 영 마뜩잖게 받아들였으나, 티백만큼은 그녀도 탄복할 수밖에는 없었다.

찻잎 그 자체와 크게 다르지 않은 맛을 내면서도 쉽고 간단하게 우릴 수 있다. 마음을 비우고 정신을 수양하는 의미의 동방의 다도 정신과는 약간 어긋나는 점이 있지만, 이 티백이 상업적으로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는지는 전문가인 여진으로선 모를 수가 없었다.

“그만큼이나 대단한 상품을 만들어 내신 겁니다. 공작부인은 뛰어난 발명가예요.”

손수건을 손에 쥔 채 클로에가 가볍게 웃었다.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발명가는 무슨. 그녀는 자신이 뛰어나다고는 추호도 생각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티백의 발명가는 토마스 설리반이다. 클로에 그녀는 토마스 설리반이 만든 발명품을 흉내 냈을 뿐이다.

“저는 발명가가 아니에요. 그냥 차를 무척 좋아하는 애호가일 뿐인걸요. 티백이 많이 팔리는 것도, 더 많은 사람들이 차를 좋아하게 됐다는 증거 같아서 무척 기뻐요.”

이제 와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고 생각했으나 여진은 보면 볼수록 클로에가 대단해 보였다.

‘정말 이렇게나 차를 사랑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또 있을까?’

어릴 적부터 일상적으로 차를 마셔온, 청 왕국 특유의 다도를 오랜 시간 배워 온, 모국 특유의 차 문화에 자부심이 있는 여진으로서도 차마 차에 대한 순수한 애정으로는 공작부인을 이길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뛰어난 구상력에 겸손함까지. 나는 제국에 이런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어.’

제국을 비롯한 서방과 동방의 관계는 그리 좋지 않다. 서로가 서로를 오랑캐라며 멸시하는 것이 보통이다.

여진 역시 다르지 않았다. 심지어 제국에서 수년간 일을 해 온 지금까지도 마찬가지였다. 제국의 문화와 제국인들은 아무리 화려해 보여도 실상은 천박하기 이를 데 없다고 계속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그런 여진의 선입견을 깨부순 사람이 있었다. 바로 클로에 바텐베르크, 그녀의 고용주다.

함께 현미 녹차를 마셨던 첫 만남 때부터 여진은 깨달았다. 어쩌면 자신은 이 사람을 존경하게 될 것 같다고. 지금 여진은 정직하게 말할 수 있었다. 자신은 클로에 그녀를 그 어떤 제국인보다도 진심으로 존중하고 존경하고 있다고.

클로에 바텐베르크, 그녀는 단순히 돈이 많고 사업 수완이 좋은 사업가 정도가 아니었다. 여진에게 있어서는 여진 자신의 세계관을 한층 넓혀 주고 좁았던 시야를 틔워 준 은인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 마음을 숨긴 채 여진은 클로에가 관심을 가질 만한 트리플 스위트의 소식을 여럿 전했다. 대화 도중, 클로에가 맛있는 녹차를 우려 찻자리를 갖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즐거운 시간이었다.

* * *

“마님, 월동 준비를 시작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아요.”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공기가 부쩍부쩍 싸늘해졌고 길거리의 나무들이 옷을 벗기 시작했다.

집사 키엘의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마침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래야겠어요. 바로 오늘부터 시작해야겠네요.”

“네. 혹시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지 저 키엘을 불러주세요, 마님.”

“고마워요, 키엘.”

수도와 시골 할 것 없이, 사람과 짐승 할 것 없이 겨울나기 준비로 바빠지는 시기였다.

다람쥐도 할 일이 많아질진대 이런 거대한 저택의 내사를 책임지기 위해 할 일이 적을 리가 없었다. 웃풍이 드는 벽과 창문을 수리하고 화로 등 난방 기구를 마련하고 장작과 보존 식량을 쌓아 두고 두꺼운 천과 솜으로 이불과 옷을 새로 짓는 등 할 일이 산더미였다.

키엘과 헤어진 뒤 클로에는 침실로 곧장 들어와 종이와 철필을 꺼내 들었다. 본격적인 월동 계획을 짜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다과회나 연회를 여는 것과 달리 월동 준비는 쉽지 않았다. 클로에가 이제껏 해 본 월동 준비라곤 창문에 단열 비닐을 붙이거나 전기장판이나 겨울 코트를 구입하는 정도였다. 그러니까 전생에서의 월동 준비와 제국에서의 월동 준비는 크게 달랐던 것이다.

“일단은 공부를 하는 것이 좋겠어.”

그렇게 생각한 클로에는 키엘에게 지난해, 지지난해 겨울의 장부와 관련 내용의 책을 부탁했다.

다행히도 공작저에 자료는 충분했다. 며칠을 꼬박 읽으면서 공부하고 나니 어떻게 해야 할지 대강의 감은 잡혔다. 적어도 월동을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 정도는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또 있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공작부인!”

번지르르한 얼굴의 상인이 클로에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이렇게 저희 상단을 선택해 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아차, 인사가 늦었군요. 제 이름은 제레미 맥키, 제레미라고 불러 주십시오.”

“반가워요, 제레미. 모쪼록 좋은 거래가 되었으면 좋겠네요.”

“암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제 모토는 오로지 고객 만족, 공작부인께서도 저희 상단을 선택해 주신 보람을 느끼실 정도로 만족스러운 거래를 선사해 드리겠습니다.”

그는 갈색의 피부를 가졌고, 조금 느끼한 분위기이긴 했지만 퍽 잘생긴 호감형의 젊은 상인이었다.

게다가 언변이 좋고 성격이 친근했다. 클로에는 지나치게 친근하게 구는 사람에게 부담을 느끼는 쪽이었지만 (예컨대 아서) 이 사람은 특이하게도 별로 부담스럽지가 않았다.

‘과연, 이 정도의 말재간은 있어야 영업에 도움이 되겠구나.’

마찬가지로 사업가인 입장에서 클로에는 상대의 장점을 빠르게 파악하고 기억했다. 저런 능력을 클로에 그녀가 똑같이 흉내 낼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이런 경험이 손님을 응대하는 데에 약간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클로에는 제레미에게 자리를 권했다. 곧 하녀들이 홍차를 내왔다. 찻잔을 들어 올리며 클로에가 말했다.

“편지로도 말씀드렸지만 제가 당신을 부른 것은 월동 준비를 위해서예요.”

“예, 요즘 많은 분들이 월동 준비를 위한 자재를 찾고 계십니다. 특히나 올해 겨울은 몹시 추울 예정이라니까요.”

“일단 저택을 수리할 예정이에요. 이참에 일부 벽의 도배도 다시 하고 싶고요. 장작도 많이 들여야 할 테고, 방에 놓을 난방 기구도 보여 주셨으면 해요.”

홍차를 맛있다는 듯이 홀짝이곤 제레미가 말했다.

“물론 전부 준비해 가지고 왔습니다. 자, 이제부터 하나씩 보여 드리겠습니다. 말리!”

제레미가 손뼉을 짝짝 치자 상단의 일꾼 몇 명이 자재들을 하나씩 내오기 시작했다.

클로에는 유리창과 바닥에 깔 타일을 포함한 온갖 자재들과 최신 마법 기술로 제작한 난방 기구 등을 눈으로 확인하고 손으로 만져 보았다. 찻잎을 고를 때처럼 대단히 심사숙고를 기하는 노련한 시선이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 한계는 있었다. 책이나 장부 등에서 본 자재들은 괜찮지만 새로 나온 자재와 난방 기구 같은 것은 처음 보는 것인지라 선택에 어려움이 있었다.

게다가 맞은편에 앉은 제레미는 또 어찌나 입담이 좋은지 그의 말만 들으면 죄다 사들여야 할 것 같았다. 클로에는 약간 혼란스러웠다.

“공작부인, 이 유리야말로 진보의 정수입니다. 보시다시피 올해 상반기에 발명된 랜드리스 기법으로 깎아낸 것이라 유리 표면에 어떠한 굴곡도 없고 두께도 일정해 보기에도 미려하고, 또 무엇보다 보온 능력이 우수해서 실험 결과, 일반 창문에 비해 실내 온도를 2도나 상승시키는 것으로 알려졌…….”

듣고 있자면 판단 능력을 흐려지게 하는 제레미의 말을 클로에가 단호하게 잘라냈다.

“아아, 고마워요, 제레미. 공작저에 당장 교체할 유리창은 없어서요. 유리에 대한 문제는 좀 더 고려를 해 볼게요.”

아무리 그가 말을 잘한다고 판매하는 물건을 죄다 사들였다간 아까운 공작저 재산만 축날 것이다.

물론 유리창 좀 간다고 기울어질 공작저의 재정이 아니었으나 원래 낭비는 이런 작은 곳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고 클로에는 믿었다.

한참을 상품들을 보고 만져 보고 시험해 보고 제레미의 설명을 듣던 클로에는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조금씩 정신적으로 지쳐가는 게 체감되었다. 이대로라면 흐려진 판단력으로 충동구매를 해 버릴지도 모른다.

그때 클로에는 전생의 경험을 떠올렸다. 직장에서 치이고 치여 정신적으로 지쳐 있을 때마다 판단력이 흐려져 마구잡이로 카드를 긁었던 기억들.

홧김에 직구 사이트에서 별로 가지고 싶은 것도 아닌 온갖 한정 차와 다구를 다량으로 지른 뒤 상미 기한이 다 지나가는 찻잎을 끌어안고 굶주리며 살았던 기억들…….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무언가를 구매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탁 소리와 함께 클로에가 찻잔을 찻잔 받침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가 생긋 웃으면서 말했다.

“미안해요, 제레미. 조금 생각해 볼 시간이 필요한 것 같네요. 다음에 다시 와 주실 수 있죠?”

천재 마법사가 개발한 온열 마나석을 넣어 만든 화로에 대해 8분째 떠들어 대던 제레미가 입을 꾹 다물었다. 잠시 눈을 끔뻑거리던 그가 말했다.

“아, 물론이죠. 부담 갖지 마십시오. 그럼 전 언제 다시 오면 될까요?”

그들은 제레미가 다시 찾아오는 날짜에 대해 의논했다. 클로에는 하녀들과 시종들에게 부탁해 제레미를 배웅케 했다. 그는 클로에가 충분히 준비가 되었을 때 다시 올 것이다.

상인을 보낸 뒤 클로에는 다시 월동 준비에 대해 고민했다. 그가 다시 오기 전까지는 구매할 것과 구매하지 않을 것을 확실히 결정해 두어야 한다. 그녀는 머리를 싸맸다.

‘이곳에서 반년 정도를 지냈지만, 여전히 나는 제국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구나.’

클로에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이 그랬다. 공작가의 안주인이라는 직분은 많은 것을 책임져야 했다. 제국의 월동 준비 방식에 대해서도 빠삭해야 했고.

그간 살아남기 위해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했다고 생각했지만 클로에는 아직도 자신이 부족한 점이 많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그런데 그때였다. 그녀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잠깐, 내가 제국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다면…….’

클로에가 중지와 엄지를 맞부딪쳤다.

‘제국에 대해 잘 아는 사람한테 물어보면 되는 거잖아?’

그녀의 머릿속에 다시 한 번 어떠한 기억이 떠올랐다. 바로 일 년 전, 이전의 클로에가 가지고 있는 기억이었다.

일 년 전, 이전의 클로에 역시 월동 준비를 한 적이 있었다. 또한 그녀는 지금의 클로에만큼이나, 아니 지금의 클로에보다 훨씬 더 월동 준비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애당초 내사와 회계에 대해 전혀 몰라 여러 실책을 일으켰던 그녀였다. 월동 준비라고 잘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마님,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키엘이 걱정스럽게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과거의 클로에는 거절했다.

‘아, 아니에요. 저도 혼자 할 수 있어요. 저, 정말이에요.’

‘……음, 그러시군요. 그래도 마님, 행여나 도움이 필요하시면 제게 말씀해 주세요. 꼭이요.’

‘저, 정말 저 혼자 할 수 있다니까요! 저를 못 믿으시는 건가요?’

이전의 클로에는 그 아무에게도 물어보거나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혼자 해결하려 했다. 행여 얕보이거나, 자신의 무능력함을 모두가 알게 되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키엘의 조언도 거절한 그녀가 들은 말은 오로지 상인의 말뿐이었다. 상인의 사탕발림에 홀라당 넘어간 그녀는 상인이 권하는 것은 전부 구입하고 설치했다.

그리고 그 결과 월동 준비는 엉망이 되었다. 정작 필요한 건 구입하지 못하고 필요 없는 것만 사들였으니 따뜻하고 즐거운 겨울을 보낼 수 있을 리 없었다.

뒤늦게야 상황을 파악한 키엘이 수습했지만 여전히 불필요한 지출을 했다는 점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한 기억을 떠올린 클로에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키엘이 저택 내의 예산 관리권을 그녀에게 돌려주는 데에 많은 주저를 했던 이유가 있었다.

어쨌든 클로에는 그런 식으로 일 처리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아랫사람에게 물어보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키엘은 클로에보다 훨씬 오랜 시간을 제국에서 살아온 제국 생활의 전문가다. 물어보고 도움을 요청하는 데에 주저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한 클로에는 행동 방침을 결정했다. 과거의 클로에의 행적을 반면교사 삼기로 한 것이다.

그날 점심, 디저트를 먹은 뒤 클로에가 키엘에게 말을 걸었다.

“키엘, 혹시 지금 시간 괜찮으세요?”

키엘이 동그란 눈을 더 동그랗게 떴다.

“물론이죠, 마님. 무슨 일이세요?”

“다름이 아니고, 이번 월동 준비를 하는데 자재 구입에 대해 여쭤볼 것이 있어서요.”

클로에의 말을 들은 키엘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더더욱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러더니 곧, 그가 활짝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럼요!”

클로에는 키엘에게 월동 준비에 대해 이모저모 상담을 했다. 과연, 공작가의 유능한 집사는 달랐다. 그는 책이나 장부에서 얻을 수 있는 지식보다 훨씬 더 생생한 최신 정보를 많이 알려 주었다.

클로에는 월동 준비 계획을 짜면서 막히는 것이 생길 때마다 주저 없이 키엘이나 시녀 록우드 부인에게 질문을 했다. 제국 귀족가의 내사에 대해 줄줄 꿰고 있는, 그야말로 전문가인 그들은 최선을 다해 클로에를 도와주었고, 그 결과 클로에는 만족스러운 계획을 짤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제레미가 찾아오는 당일.

온갖 자재 샘플들을 실은 마차들이 줄줄이 공작저 정원으로 들어왔다. 곧 제레미가 응접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공작부인,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그는 이전과 다르지 않은 태도로 클로에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런데 이전과 달라진 것이 있었다. 그가 자리에 앉자마자, 홍차와 함께 그에게 내밀어진 것이 있었다. 주문서였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이대로 주문하고 싶어요.”

티스푼으로 찻잔을 휘저으며 클로에가 부드럽게 웃었다.

눈을 둥그렇게 뜬 제레미가 주문서를 집어 들고 읽었다. 그의 갈색 눈동자가 글자 위를 빠르게 훑었다.

그러더니, 주문서를 내려놓고 하하 웃었다. 그가 클로에를 향해 윙크를 하며 말했다.

“이거 참……. 공작부인께서 정말 많이 준비를 하셨나 봅니다.”

클로에가 담담하게 말했다.

“이 정도는 보통이죠.”

제레미는 기껏 힘들게 가져온 샘플 자재들이 무용지물이 된 것을 안타깝게 여기면서 주문서를 품에 챙겨 넣었다.

그러나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상대는 생각 외로 그렇게 쉬운 상대가 아니었고, 유약해 보이는 인상과 달리 뜻밖의 강단이 있었다. 이 상황에서 다른 물건을 더 권했다가는 가능한 거래마저 못 하고 내쫓기고 말리라.

사실 온갖 값비싼 신제품을 팔아먹겠다는 그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을 뿐, 객관적으로 보자면 이 거래도 만족스러운 장사이긴 했다. 공작저의 규모가 하도 거대하다 보니 필요한 자재도 많았던 것이다.

제레미는 저 순하게 생겨서는 생각 외로 냉철한 공작부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이 정도의 거래에 만족하기로 했다.

그는 뒷머리를 긁적이더니 자신의 앞에 놓인 홍차 잔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차를 음미했다. 대단히 맛이 좋은 홍차였다.

이렇게 해서, 클로에는 지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은, 딱 적당하다고 말할 수 있는 거래를 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렇다고 그녀가 과하게 절약을 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는, 이전의 클로에는 물론 다른 귀족들 역시 잘 생각지 않는 특별한 곳에 돈을 썼다. 바로 사용인들의 숙소와 옷이었다.

가문의 일원과 귀족 손님들을 위한 응접실, 침실, 복도 등에 돈을 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겨울에도 춥거나 하지 않도록 침실과 복도에 돈을 쓰는 건 당연했다.

게다가, 보통의 귀족의 경우 응접실과 홀에 실용성은 물론이거니와 과시와 장식을 위해 대단히 큰돈을 쓴다. 그러나 다른 귀족 손님들의 눈에 띄지 않는 사용인들의 숙소 따위에 돈을 듬뿍 쓰는 귀족은 드물었다.

그런데 바로 클로에가 그런 일을 했다. 그녀는 지난 13년 동안이나 보수한 적이 없는 사용인 숙소를 따뜻하게 개수하고, 침구도 깨끗하고 두툼한 것으로 새로 바꿔 주었다.

게다가 겨울용 옷도 따로 지어 주었다. 일반적으로, 특히 하녀복은 겨울용 여름용이 따로 없다. 불편한 긴소매와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스커트는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덥고 설거지할 때는 소매가 젖는 등 이래저래 불편하기 일쑤였다.

부엌 하녀들이나 전속 하녀들과 친하게 지낸 결과 클로에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이참에 편안하고 따뜻한 겨울 하녀복을 새로 짓기로 했다.

실용적인 옷을 잘 디자인하기로 유명한 디자이너에게 의뢰를 넣었다. 단정하면서도 따뜻하고 가볍고 활동하기에 편한 하녀복을 만들어 달라고 말이다.

디자이너로서는 이런 주문을 처음 받아 보아서 대단히 놀랐다. 흔히 하녀복이라고 하면 남들 눈에 보이는 것만 신경을 써서 미관적으로만 단정하고 정작 입기에는 불편한 게 일반적이었다.

모든 귀족이 그랬다. 그들에게 한낱 사용인들의 편의성 같은 것은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공작부인 정도의 지위를 가진 사람이 사용인의 편의를 신경 쓰다니?

디자이너는 의아했으나 어쨌든 의뢰는 의뢰였다. 공작부인이 이 의뢰의 값을 후하게 쳐주었기에 디자이너는 열심히 작업해야만 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찬바람에 몸이 절로 떨리는 아침이었다.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새벽부터 하녀들은 분주하게 씻고 준비를 한 뒤 숙소에서 본관으로 향했다.

“요즘 숙소가 참 따뜻해서 좋아. 일어나기 싫을 정도야.”

“맞아, 맞아. 내 방은 새벽 내내 외풍이 들어왔었는데 이젠 전혀 안 그래. 진짜 잠잘 맛 난다니까.”

“게다가 새 이불은 어떻고! 진짜 목화솜이 들어간 거라 너무 푹신하고 따뜻하더라.”

“진짜 좋긴 한데 덕분에 숙소 벗어나기가 싫어. 밖은 너무 춥지 않니?”

“맞아, 맞아.”

신나게 재잘거리던 하녀들은 본관 현관을 지나 홀에 들어서면서부터 입을 꾹 다물었다. 엄격한 하녀장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녀들은 언제나처럼 하녀장의 앞에 도열하고 그녀에게 아침 인사를 올렸다. 하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한 명도 빠짐없이 왔구나. 오늘은 너희에게 좋은 소식이 있다.”

좋은 소식이라니, 뭐지?

단정하게 두 손을 배 위에 모으고 도열해 서 있는 하녀들의 귀가 쫑긋거렸다.

하녀장이 신호를 보내자, 하인 몇 명이 검은 천이 가득 담긴 상자를 가지고 나왔다. 하녀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절로 쏠렸다.

“주인마님께서 너희들을 위해 새로 옷을 지어 주셨다. 따뜻하고 편안한 겨울용 옷이라고 하니 주인마님의 배려와 자비에 감사하거라.”

하인들이 하녀복을 한 벌씩 하녀들에게 나눠 주었다. 하녀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가문의 안주인이 하녀복을 새로 지어 주는 것 자체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하녀복을 입은 하녀들의 모습이 손님들에게 우스워 보이지 않게 하녀복은 조금이라도 닳거나 해지면 바로 바로 새 옷을 공급해 준다.

하지만…… 이 옷은 그런 이유로 나눠 주는 새 옷과는 달랐다. 우선 딱 보기에도 천이 도톰하고 부드러웠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가벼웠다.

하녀들이 새 하녀복을 받아 들고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자 하녀장이 말했다.

“뭣들 하느냐? 어서 새 옷을 입고 나오거라.”

그 말에 하녀들이 우르르 하녀 휴게실로 달려갔다.

잠시 후, 옷을 갈아입은 하녀들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옷 좀 봐! 정말 따뜻하고 포근해.”

“정말이네! 이 정도면 어지간한 추위에도 끄떡없겠어.”

“게다가 팔을 높이 들어도 어깨와 옆구리가 땅기지 않아. 꼭 잠옷 입은 것처럼 편안해.”

“이렇게 가벼운데 어떻게 따뜻한 거지?”

하녀들의 만족도는 그야말로 최고였다.

그들은 대단히 감동했다. 이렇게까지 자신들을 신경 써 주는 주인마님이 이 세상에 또 있을까? 아니,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그래서 더 놀라웠다.

제국에서 하녀는 사람이 아니다. 귀족들의 편의를 위한 일종의 부속품 같은 존재다. 그런데 그런 자신들을 위해 이렇게까지 해 주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마님은 정말 대단하셔.”

“나는 평생 이 공작가에 뼈를 묻을래.”

“나도야! 이제 다른 귀족가에는 도저히 갈 수 없어.”

사용인 숙소를 개수한 뒤 이미 하늘을 찌르던 클로에에 대한 충성심과 인망은 더더욱 높이 구름을 뚫고 올라갔다.

그러나 정작 클로에 본인은 이 사실을 잘 모르고 있었다. 그녀가 사용인 숙소를 개수하고 하녀복을 새로 지어 준 것은 딱히 자신의 지지도를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녀가 그렇게 한 것은 그냥 그래야 할 것 같기 때문이었다. 제국에서 나고 자란 귀족들의 눈에 사용인은 자신과 동등한 인간이 아니었지만 전생을 겪은 클로에가 보기엔 그렇지 않았으니까. 그냥 다른 사람들이 춥게 지내는 것이 싫었을 뿐이다.

모든 월동 준비를 끝낸 클로에는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쉴 수 있었다. 이제는 겨울이 온대도 두렵지 않았다.

* * *

‘저, 알폰스 바텐베르크는 아내 클로에 바텐베르크를 사랑합니다.’

그 일은 어마어마하게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 일이 있은 뒤로 몇 주 동안 사교계에서는 계속 그 이야기만 할 정도였다.

‘가슴 깊이, 평생에 걸칠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아서라고 그 일이 충격적이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 알폰스 바텐베르크가, 그 클로에 바텐베르크를 사랑한다니. 게다가 그 사실을 많은 사람들의 앞에서 입에 담는다니. 이 얼마나 위신 떨어지는 일이란 말인가.

아서로선 도저히 알폰스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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