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장
“맞아요, 정말 어울리는 한 쌍이시죠.”
어느 부인 하나가 말했다. 클로에는 무심코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윌포드 부인이었다. 평소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클로에는 이름만 아는 정도의 사람이었다.
클로에는 그녀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일그러지는 것을 보았다. 윌포드 부인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말꼬리를 흐리며 그녀가 시선을 내렸다. 클로에는 그녀가 자신의 납작한 배를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노골적인 시선을 눈치챈 건 클로에뿐만이 아니었다. 화기애애했던 분위기가 삽시간에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싸늘해졌다.
“하지만, 뭔가요?”
클로에는 말투가 지나치게 날카로워지지 않게 신경 쓰며 물었다. 윌포드 부인이 그녀의 배에서 시선을 떼곤 웃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클로에는 목구멍 뒤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최근 심각하게 고민하던 문제가 아니던가. 그런 것으로 시비가 걸리니 평소보다 더 화가 끓었다.
그러나 화가 난 것과는 별개로 그녀의 판단력은 여전히 냉정했다. 상대가 아무것도 아니라는데 과잉 대응하면 오히려 자격지심이 있는 것으로 보일 것을 클로에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넘어갈 수는 없다. 오늘의 일은 분명 사교계에 널리 퍼져 나갈 것이다. 이렇게 악의적인 시비를 건 상대를 알아보지 못하고 이후 친근하게 대하기라도 한다면 사교계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클로에는 상대의 이름과 얼굴을 머릿속에 단단히 새겨 두었다.
클로에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생긋 웃었다.
“그렇군요.”
그러고는, 그녀는 아까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다른 이들과의 대화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클로에는 그리 외향적이거나 사교적인 타입은 아니었다. 그런 활동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할 줄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오랜 사회생활 경험이 있을뿐더러, 현재 그녀는 사교계에서 꽤 영향력이 있는 위치였기 때문이다.
윌포드 부인은 몇 번이나 화제에 끼어들어 보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그녀의 시도는 번번이 막혀 들었다.
그런 일이 반복되자 자신이 대화에 끼지 못하는 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윌포드 부인은 결국 이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고 커피잔만 내려다보았다. 다과회가 끝난 뒤, 그녀는 도망치듯 사라졌다.
다과회가 있은 후 며칠 뒤였다.
“저, 임신했어요.”
하루가 다르게 날씨가 차가워지는 계절이었다. 초대를 받아 찾아간 클로에에게 포트넘 부인이 이런 말을 했다.
“아직 남편에게밖에 말하지 않았어요. 이 소식을 들은 사람은 남편 빼곤 바텐베르크 부인이 처음이에요.”
포트넘 부인이 두 손을 깍지 끼고 상기된 뺨으로 말했다. 절친한 친구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 무척이나 행복한 것 같았다.
“세상에나! 정말 축하해요, 포트넘 부인!”
클로에 역시 진심으로 기뻐하고 축하해 주었다.
그러나 기쁜 것과 별개로 내심 부러운 기분도 들었다. 클로에의 눈에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간 부러움의 빛을 포트넘 부인은 발견하지 못했다.
“축하해 주셔서 감사해요. 예쁜 딸이었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남편은 아들이 좋대요.”
“딸이든, 아들이든 정말 예쁘고 귀여운 아이일 거예요.”
다음번에 포트넘 자작저를 방문할 때에는 선물로 아기 옷 같은 것을 가져와야겠다고 생각하며 클로에가 말했다.
그런데, 한없이 기뻐 보이던 포트넘 부인의 얼굴이 급작스레 어두워졌다. 시무룩해진 얼굴로 그녀가 말했다.
“정말 기쁘지만, 이제 한동안 홍차를 마시지 못하게 된 것은 아쉬워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마시는 홍차 한 잔이 얼마나 각별한데요.”
클로에가 까르르 웃었다. 그녀의 친구는 진심으로 차를 좋아하게 된 것 같았다. 클로에, 그녀의 덕택으로 말이다.
“확실히, 홍차는 태아에게 해롭죠……. 이럴 때 딱 맞는 것을 제가 알고 있어요.”
“딱 맞는 것이라고요? 그게 뭔가요?”
포트넘 부인이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 클로에가 추천해 주는 것은 언제나 맛있었다는 사실을 그녀는 매우 잘 알고 있었다.
클로에가 웃으며 제안했다.
“괜찮으시다면 포트넘 부인을 제 티룸에 초대할게요. 맛보여 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요.”
“어머, 물론이죠!”
두 사람은 곧장 공작저의 티룸으로 자리를 옮겼다.
“어머, 좋은 향기. 이 티룸은 오랜만이네요.”
티룸에 들어선 포트넘 부인이 숨을 들이켰다. 고작 문 하나의 경계를 넘자 달콤하고 복합적인 향기가 공기 중에 가득 차 있었다. 클로에 역시 티룸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이 차향을 맡는 것을 좋아했다.
클로에는 포트넘 부인에게 자리를 권한 뒤, 차통을 몇 개 꺼내기 시작했다. 그녀는 능숙한 손짓으로 여러 개의 차를 우리기 시작했다. 멀찍이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포트넘 부인이 감탄했다.
‘열심히 배워서 나도 나름대로 잘 우린다는 말을 듣지만, 역시 바텐베르크 부인에 비할 바는 아니지. 바텐베르크 부인은 어쩜 저렇게 우아하게 차를 우리는지 모르겠어.’
한편 자신의 친구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꿈에도 모른 채 클로에가 티팟과 티잔 두 개, 작은 트레이 하나를 쟁반에 받쳐 가져왔다.
포트넘 부인의 맞은편에 앉은 클로에가 설명했다.
“아시다시피, 홍차에는 카페인이 들어 있는데 이것은 태아에게 해로워요. 그래서 임산부에게는 찻잎으로 만든 차 대신에 허브 티나 인퓨전을 추천해 드리고 있어요. 인퓨전이란 찻잎 외의 허브, 꽃, 과일 등으로 만든 대용 차를 일컫는 말이랍니다.”
몇 달 전 키엘과의 티타임에서 그와 엘리에게 해 주었던 설명이었다. 포트넘 부인은 눈을 빛내며 그녀의 설명을 경청했다.
“오늘 제게 소개해 주실 것도 인퓨전이겠군요?”
“맞아요, 포트넘 부인. 홍차가 드시고 싶으신 부인을 위해 홍차의 대용품이 될 법한 인퓨전을 소개해 드릴 거예요.”
그렇게 말하며 클로에가 상대의 찻잔에 인퓨전을 따라 내었다. 그것을 보고 있던 포트넘 부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머! 이거, 홍차 아닌가요?”
그녀가 그렇게 말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찻잔에 차오르는 찻물의 모습이 홍차와 너무나 똑같았기 때문이다.
비단처럼 매끄러워 보이는, 찰랑거리는 주홍빛의 투명한 찻물. 홍차를 여러 번 본 포트넘 부인조차 분간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클로에가 웃었다.
“아니에요. 한 번 향을 맡아 보세요.”
그 말에 포트넘 부인이 찻잔을 들어 올려 킁킁거렸다.
“아, 정말 홍차와 조금 다르네요.”
“그렇죠? 이건 루이보스라고 부르는 허브 티예요. 모양과 맛이 홍차와 비슷해서 카페인을 마실 수 없는 사람들이 홍차 대용품으로 흔히 마신답니다.”
클로에가 작은 트레이를 하나 들어 보였다. 그것에는 루이보스 잎이 담겨 있었는데, 붉은빛을 띠는 갈색이었고 침엽수 잎과 흡사해 보였다.
“허브 티이니만큼 탄닌이 적어서 오래 우려도 떫지 않고 진하게 마실 수 있어요.”
“맛이 홍차와 비슷하다니! 당장 마셔 봐야겠어요.”
“어머, 잠깐만 기다려 보세요. 주의 사항이 있어요.”
포트넘 부인이 찻잔을 입술에 대려는 순간 클로에가 손을 들어 저지했다. 친구가 자신을 의문스러운 눈으로 올려다보는 걸 보고 클로에가 웃었다.
“주의 사항이라구요?”
“네. 조금 쿰쿰한 냄새가 나서 호불호를 탄다는 거예요.”
“쿰쿰한 냄새……?”
“백문이 불여일견이죠. 이제 한 번 들어 보세요.”
클로에의 말에 포트넘 부인이 찻잔을 들어 홀짝였다. 그리고는, 곧 그녀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클로에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아하……. 쿰쿰하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아요. 이건 맛이 마치…… 으으음.”
“처음 마실 때는 조금 장벽이 있죠. 마치 얼 그레이처럼 말이에요. 하지만, 그 냄새에 익숙해지면 홍차와 닮은 구수함과 향긋함이 있어요.”
“어머, 그렇군요. 그렇다면 부인을 믿고 익숙해지도록 자주 마셔 보겠어요.”
클로에가 루이보스가 담긴 티팟을 들어 올렸다. 그녀가 포트넘 부인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더욱 진하게 우러난 루이보스를 찻잔에 따라 내며 말했다.
“익숙해질 때까지는 그냥 드시지 마시고, 밀크티를 만들어 드세요. 우유를 넣으면 쿰쿰함이 덜 느껴지니까요.”
“밀크티라구요? 허브 티로도 밀크티를 만들 수 있나요?”
“네. 밀크티를 만들 수 있다는 점 역시 루이보스가 홍차와 닮은 점이죠. 포트넘 부인, 밀크티 좋아하시죠?”
달달하고 부드러운 것을 좋아하는 포트넘 부인은 트리플 스위트의, 특히 밀크티의 매출에 많은 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기대 어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클로에가 찻잔에 약간의 우유와 설탕을 넣고 티스푼으로 잘 섞었다. 붉은빛이 돌던 수색은 우유가 섞이자 홍차로 만든 밀크티와 흡사한 부드럽고 맛깔스러운 연갈색으로 변했다.
포트넘 부인이 루이보스 밀크티를 홀짝였다. 몇 모금 마신 그녀가 상기된 얼굴로 눈을 빛냈다.
“어머! 정말로 홍차 밀크티와 비슷해요. 쿰쿰한 느낌도 덜하고, 달고 부드러워서 맛있네요!”
“그렇죠?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에요.”
클로에가 자신 몫의 루이보스 밀크티를 마시면서 웃었다.
행복해하며 루이보스 밀크티를 마신 포트넘 부인이 감격스러운 얼굴로 클로에의 손을 꼭 잡았다. 뺨까지 상기된 그녀의 얼굴은 진심으로 기뻐 보였다.
“정말 감사해요! 임신을 했으니 이제 홍차는 한동안 꼼짝없이 포기해야 하는 줄로만 알았어요. 임신을 하고도 밀크티를 마실 수 있다니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도움이 되어서 기뻐요. 다른 허브 티나 인퓨전을 더 소개해 드릴까요?”
“정말이요? 물론이죠!”
클로에는 포트넘 부인에게 다양한 허브 티와 인퓨전을 소개해 주었다. 침엽수처럼 시원한 향이 나는 로즈마리, 키엘에게 소개해 준 바 있던 카모마일, 레몬과 흡사한 상큼한 향이 나는 레몬글라스와 레몬밤, 향긋하고 맛좋은 장미차와 목련차 등이었다.
홍차 대신 마실 수 있는 것들이 늘어났다며 기뻐하는 포트넘 부인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인퓨전을 바리바리 싸주어 배웅하기까지 한 클로에는 흐뭇한 기분으로 티룸 소파에 몸을 묻었다.
‘한데…….’
뭔가 허전했다. 즐겁고 보람 있는 시간이었던 건 진심이지만 왠지 모르게 가슴 한구석이 허했다.
클로에는 자신의 배를 만져 보았다. 여전히 납작한 배였다.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럴 때가 아니야. 좀 더 생산적인 것을 생각하자. 반응이 좋은 듯하니 조만간 허브 티도 트리플 스위트에 들여놓아야겠어. 카모마일과 로즈힙, 루이보스 등을 말이야.’
그러고는 포장의 디자인이나 홍보 방식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어찌 됐든 사업에 대한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기분 전환을 위해 클로에가 시녀와 하녀들을 티룸으로 불렀다. 오래지 않아 그들이 나타났다.
“부르셨습니까, 마님?”
한 명밖에 없는 시녀인 록우드 부인이 대표로 인사했다. 클로에가 웃으며 그들을 맞았다.
“어서 오게. 다름이 아니고 티타임을 함께 하고 싶어 불렀네.”
아까 포트넘 부인과 약 1L가 넘는 차를 마셔 놓고도 그녀의 배에는 빈자리가 남아 있었다.
록우드 부인과 로지, 니나를 앉혀 두고 엘리와 함께 차를 우리러 간 클로에는 콧노래를 부르며 다구를 꺼냈다. 그것은, 최근 열심히 썼던 제국풍의 다구가 아니라…….
“온풍 다구로군요!”
엘리가 반가움에 아는 척했다.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단다.”
제국풍의 다구를 제작하지 않았던 시절에는 온풍 다구를 많이 사용했으나, 요즘은 사용 빈도가 많이 줄었다. 이제 온풍 다구는 동양차를 마실 때에만 사용하곤 했다.
그리고 오늘 마시려는 차 역시 온의 차였다.
‘오늘은 호(壺) 대신에 개완에 우려 볼까.’
호란 동양식 티팟, 즉 찻주전자를 말한다.
클로에는 꺼내놓은 온풍 다구 중 개완 하나와 찻잔 다섯 개를 골랐다. 그리고는 차통에서 적당한 양의 찻잎을 덜어낸 뒤, 찻잎과 갓 끓인 물이 담긴 주전자와 다구들을 엘리의 도움을 받아 옮겼다.
보통 차를 우리는 일은 티룸의 차를 우리는 공간에서 하지만, 오늘은 특별한 다구를 쓰는 만큼 다우(茶友)들에게 차를 우리는 모습을 보여 줄 생각이었다.
엘리와 함께 소파 자리로 돌아오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특히 니나를 놀려 먹고 있는 것 같던 로지가 잠잠해졌다.
엘리와는 녹차를 마신 적이 있지만, 엘리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과는 동양 차를 마셔 본 적이 없었다. 즉 엘리를 제외한 모두가 이런 본격적인 온풍 다구를 처음 보았다.
로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마님, 이게 찻잔인가요? 정말 쬐끄매요!”
“‘쬐끄매요’라니, 로지! ‘조그마해요’ 란다. 마님의 앞에서는 바른말을 쓰도록 하렴!”
고지식한 록우드 부인이 로지를 꾸중했다.
찻잔을 들여다보던 니나도 말했다.
“정말이에요, 마님. 꼭 인형 찻잔 같아요.”
사실이 그랬다. 온풍의 손잡이가 없는 찻잔은 한 모금밖에 안 될 것 같이 작았다.
“마님, 이거랑 이거는 처음 보는 거예요. 어디다 쓰는 건가요?”
로지는 록우드 부인에게 혼나고도 꿋꿋하게 호기심을 드러냈다. 클로에가 웃으며 설명했다.
“그것은 다판과 공도배란다. 천천히 설명해 줄 테니 기다리렴.”
“네에.”
클로에는 제일 먼저 찻잔과 개완, 차 거름망 등에 뜨거운 물을 부어 예열했다. 예열하고 난 물은 모든 다구가 놓여 있는 다판 위에 그냥 쏟아 버렸다.
다판은 그리 크지 않았고, 대나무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클로에가 설명했다.
“다판은 모든 다구들을 올려놓는 일종의 판이란다. 이렇게 물을 바로 버릴 수 있어서 편리하지. 이렇게 다판을 사용해 차를 우리는 방법을 ‘습식다법’이라고 한단다.”
“마님, 티팟이 없는데 차는 어디다 우리는 건가요?”
“이번에는 주전자 대신 개완을 쓸 거란다. 이게 바로 개완이야.”
클로에가 뚜껑이 달린 작은 잔처럼 생긴 개완을 들어 보였다. 아름답고 섬세한 무늬가 새겨져 있는 그것은 150ml 정도나 될까 싶을 정도로 작았다.
로지가 당황했다.
“에게, 그렇게 적게 우려서 누구 코에 붙이죠?”
“로지! 마님 앞에서 버릇없게!”
그러나 클로에는 불쾌하지 않았다. 그녀는 로지의 자유분방한 언행을 귀여워했다. 그녀가 웃으며 록우드 부인에게 괜찮다는 뜻의 눈짓을 했다.
“서방의 다법과 동방의 다법은 다르단다. 이 개완으로는 짧게 여러 번 차를 우리기 때문에 괜찮아. 자, 한번 보렴.”
클로에는 개완에 찻잎을 넣었다. 이번에 마실 차는 ‘봉황단총’으로, 온의 우롱차 중 하나였다.
그녀는 찻잎을 넣은 개완에 조심스레 물을 부었다. 단총의 잎은 매우 연약하기 때문에 잎 위로 직접 물을 부으면 안 된다. 개완의 가장자리로 조심스럽게 흘려 넣어야만 한다.
개완에 물을 넣은 클로에는 뚜껑을 닫고 1분짜리 모래시계로 시간을 재었다. 1분이 지나자 그녀는 개완을 살짝 열고, 차 거름망을 얹은 손잡이 달린 유리컵에 차를 부었다.
“이 유리잔은 공도배(公道杯)라고 한단다. 온의 말로 ‘공평하게 분배하는 잔’이라는 뜻이야. 차를 우리다 보면 개완의 아랫물은 진하고, 윗물은 연해지는데 그것을 적당히 섞기 위한 다구란다.”
공도배 안에 담긴 찻물은 고작 1분을 우렸다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선명한 호박빛을 띠고 있었다. 홍차와는 또 다른 아름다운 수색에 하녀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 예뻐요!”
엘리가 두 손을 깍지 끼고 감탄했다. 클로에가 다정히 미소 지었다.
“맛은 더 훌륭하단다. 모두들 들어 보렴.”
그녀가 모두의 잔에 차를 따라 주었다. 인형 찻잔처럼 조그마한 찻잔 안에 달콤한 호박빛의 찻물이 차올랐다.
하녀들이 찻잔을 호호 불어가며 맛을 보았다. 그 맛은…….
고소한 향의 홍차와는 명백히 다른 향이었다. 입 안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정도로 풍성하고 화려한 향. 너무나 달콤한 그 향은 꽃 같기도 하고, 혹은…….
“……열대 과일?”
록우드 부인이 놀란 얼굴로 중얼거렸다.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마, 망고…….”
모두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록우드 부인이 중얼거리다가, 흠칫 자신의 생각에서 깨어났다. 그녀가 당황했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늘 엄격한 모습을 고수하던 그녀였으니 이런 빈틈을 보인 게 부끄러울 만도 했다. 하녀들이 록우드 부인을 보며 히 웃었다. 록우드 부인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클로에가 감명받은 얼굴로 손뼉을 짝 쳤다.
“그렇지! 봉황단총은 100여 가지의 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그중 제일 일반적인 향인 밀란향(蜜蘭響)일세. 온의 말로 꿀과 난꽃의 향이라는 뜻이지만, 나도 꿀보다는 열대 과일 향에 가깝다고 생각하네.”
물론 같은 밀란향 봉황단총이라고 해도 그 향미가 다양해 편차가 있다. 그러나 클로에는 많은 수의 밀란향 봉황단총에서 열대 과일을 떠올리곤 했다.
엘리가 행복한 얼굴로 말했다.
“열대 과일은 먹어 본 적 없지만…… 너무 맛있어요! 정말 달콤하고 향긋해요. 이게 정말 가향을 하지 않은 차인가요?”
“그렇단다. 온의 우롱차의 향은 놀랍도록 다양하지.”
클로에가 자부심이 느껴지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같은 온의 우롱차인데도 풋풋한 난꽃 향과 대나무 향이 났던 철관음과는 전혀 다른 향미였다.
“어떻게 나뭇잎에서 이렇게 다양한 맛과 향이 날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란다.”
심지어는 같은 봉황단총이어도 영지버섯 향, 생강 향, 치자꽃 향 등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향이 존재한다.
“이렇게 다양하고, 진하고 풍부한 향이 바로 우롱차의 매력이지.”
그렇게 말하며 클로에가 개완에 뜨거운 물을 한 번 더 부었다. 그리고는 이번에는 1분 20초 정도의 시간을 들여 우렸다. 서방의 홍차와 달리 온의 찻잎들은 여러 번 우려서 마실 수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때 로지가 손을 번쩍 들더니 말했다.
“저! 이번엔 제가 해 봐도 될까요, 마님? 제발요!”
“물론이지. 뜨거우니까 조심하렴.”
“감사해요, 마님! 앗 뜨거!”
개완을 받아 들던 로지가 퍼뜩 놀라 소리쳤다. 클로에가 개완을 잡고 있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떨어뜨려 깨뜨렸을 것이다.
클로에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었다.
“손잡이가 달려 있지 않으니 조심하렴. 자, 이 가장자리의 맨 윗부분을 잡는 거란다. 뚜껑을 아주 조금만 열고 조심스럽게 기울이는 거야. 그래, 그렇게…….”
로지가 떨리는 손으로 공도배에 차를 따라 내었다. 고르지 못한 물줄기가 덜덜덜 흔들리며 흘러나오는 것을 보며 하녀들은 새삼 클로에가 얼마나 차를 잘 우리는지 실감했다.
그럼에도 클로에는 미소 지으며 로지를 격려했다.
“처음인데도 잘하는구나.”
“저, 정말 잘했어요?”
로지가 기쁜 얼굴로 물었다.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로지는 마님의 칭찬을 들은 것이 몹시 뿌듯해 보였다.
개완은 잘 쓰려면 약간의 요령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사용법이 제일 간단한 다구 중 하나였다. 클로에 역시 전생에는 중국 차를 마실 때 개완을 즐겨 썼다.
다섯 사람은 온풍 다구를 이용해 맛있는 차를 즐겼다.
며칠 뒤였다. 클로에는 알폰스와 함께 황실 정찬에 초대되었다. 지금까지 초대된 황실 주최 모임과는 달리, 무려 15쌍이나 되는 귀족 부부가 초대된 큰 자리였다.
그것도 수도에서 제일 영향력이 있는 귀족 부부 15쌍이 모인 것이니 그 규모를 익히 짐작해 볼 수 있겠다.
그리고 바텐베르크 공작 부부는 15쌍 사이에서도 단연 주목을 받았다.
물론 바텐베르크가가 제국에 단둘밖에 없는 공작가이며 황실도 함부로 대할 수 없을 정도의 권세와 재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도 중요했다. 귀족으로서 가히 완벽의 경지에 달한, 언제나 모두의 동경과 선망의 대상인 알폰스 바텐베르크 역시 주목받았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사교계의 주목을 끄는 것은 바로 그의 아내, 클로에였다.
고작 반년 만에 완전히 다른 사람 수준으로 변모한 그녀의 변화는 현재 사교계에서 최고로 흥미로운 화제였다. 무능함과 한심함의 아이콘이었던 클로에는 어느덧 한 사업의 소유주이자 제국 최초의 은독수리 훈장을 받은 여성이 되었다.
지난 반년 동안의 그녀의 행적은 놀랍다는 말로도 모자랐다. 그런 그녀에 대한 사교계의 평은 다양했다.
“공작부인은 대기만성형이었나 봐. 여러 면으로 부족했던 분이 이렇게 변화하시다니, 대단도 하지.”
“공작부인은 정말 존경스러워.”
긍정적인 평도 있었고,
“말도 안 돼, 내가 옛날에 봤던 공작부인은 정말 최악으로 한심했는데. 사람과 눈도 못 마주치고 자기 의견도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고. 그저 남을 따라 하기만 급급한 그런 사람이었단 말이야.”
“사람의 본성은 바뀌지 않는 법이야. 얼마나 잘하는지 두고 보자고.”
부정적인 평도 있었으나, 객관적인 공이 워낙 많다 보니 후자의 비중은 크지 않았다.
이렇다 보니 대귀족 중에서도 클로에에 대한 호기심을 드러내는 사람이 많았다.
“공작부인, 일전에 여셨던 생일 연회는 너무나 멋졌어요. 사교 모임 개최의 노하우를 알려 주실 수 있나요?”
“트리플 스위트는 어떻게 해서 개업하시게 된 건가요?”
“사업 운영에서 부군의 도움은 조금도 얻고 있지 않으시다는 게 정말인가요?”
“드레스는 어디서 맞추셨어요? 정말 신선하고 매력적인 디자인이에요.”
클로에가 황실 정찬장에 입장하자마자 대부분의 부인들(심지어는 남성까지도)이 몰려들어 그녀를 둘러쌌다. 반년 전의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을 정도의 관심과 질문이 클로에에게 쏟아졌다.
클로에는 주목을 받는 것이 익숙지 않았다. 전생부터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삶, 남들에게 묻어가는 삶을 모토로 살아왔으니 당연했다.
게다가 외향적이라거나 사교적이라는 말과도 거리가 멀었다. 따라서 그녀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런 기색을 감추고 성심성의껏 부인들을 상대했다.
한편 그런 클로에를 바로 곁에서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알폰스였다.
그는 클로에의 허리를 팔로 감은 채 젓가락 한 짝처럼 그녀에게 찰싹 붙어 있었다. 그를 향해 다가온 (주로 남성들) 사람들도 많기는 했지만, 자신이 아닌 곁에 있는 다른 사람이 더 주목을 받는 상황은 정말이지 처음 겪어 보았기에 신선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는 이 상황이 불쾌했다.
‘왜 굳이 하나하나 상대해 주고 있지? 힘들면 무시하면 될 것을.’
날카로운 눈으로 클로에에게 몰려드는 사람들을 훑어본 알폰스가 다시 자신의 아내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태연한 척 사람들을 상대하고 있었으나 그녀의 남편인 알폰스는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이 상황에 당황스러움과 피곤함을 느끼고 있다.
‘안 그래도 연약하고 수줍음을 타는 사람인데, 미치겠군.’
언제나 클로에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한없이 가녀리게만 보이는 알폰스는 그녀가 몹시 걱정이 됐다. 그녀가 힘들어한다는 사실도 모르고 물고기 떼처럼 몰려드는 사람들이 짜증스럽기도 했다.
안 되겠다. 이 상황에서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을 직접 거부하는 것은 마음이 무른 그녀에게는 무리다. 알폰스 그가 개입해야만 했다.
그렇게 생각한 알폰스는 클로에의 등을 감싸 안아 당겼다. 부인들의 질문에 대답해 주고 있던 클로에는 어 하는 사이에 그에게 끌려갔다.
다음의 일은 부지불식간에 일어났다. 알폰스는 클로에의 가녀린 등을 단단한 팔로 감아 안고는 그녀의 입술 위에 입을 맞추었다.
가벼운 버드 키스도 아니고, 딥키스였다. 순간 그렇게나 떠들썩하던 주변이 얼음장처럼 가라앉았다.
아내의 혀와 입술을 희롱하고 마음껏 탐한 알폰스는 입을 떼었다. 조금의 아쉬움이 남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는 클로에를 곁에 끼고 놀라서 넋이 나간 부인들 사이를 헤치고 지나갔다. 아까만 해도 좀처럼 앞을 비켜줄 것 같지 않던 사람들이 지금은 당황한 나머지 모세의 기적을 선보이고 있었다. 물론 놀라서 넋이 나간 것은 클로에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목적지까지 가로질러 가던 도중 클로에의 나갔던 넋이 돌아왔다.
그녀의 얼굴이 터질 듯이 달아올랐다. 세상에, 너무나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이라 힘껏 현실부정을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가 입을 맞추었다. 그것도 열댓 명이나 되는 남들의 앞에서! 그녀는 이제 어떤 낯으로 얼굴을 들고 다녀야 한단 말인가?
클로에가 알폰스의 팔뚝을 찰싹 때렸다.
“알폰스! 미, 미쳤어요? 정말……!”
그녀가 말을 잇지 못했다. 정말이지, 너무나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알폰스가 진홍빛의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입가에는 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인파에 막혀 움직이지 못하시기에 도움을 드린 것뿐입니다.”
“그, 그, 그런……!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예요?”
클로에가 두 손으로 새빨개진 얼굴을 감쌌다. 알폰스의 얼굴에 뚜렷한 만족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들이 입 맞추는 것을 보지 못한 사람들조차 이 모습을 보고 경악했다. 그,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인 알폰스 바텐베르크 공작에게 아무리 그의 아내라고 해도 타인이 앙탈 부리듯 편하게 굴고 있었다. 그런데 공작은 그것을 용인해 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웃기까지 했다!
“봤어요? 공작 각하가 웃으시는 거 말이에요.”
“봤어요. 공작께서 웃으시는 건 20년 만에 처음 보는 것 같네요.”
근처의 귀부인들이 수군거렸다.
잠깐의 해프닝이 끝난 뒤, 모든 귀족 부부가 각자 자신의 자리에 착석했다. 옆자리의 사람과 가벼운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하인들이 간단한 음료 등 식전 먹을거리를 내왔다.
곧 황제가 등장했다. 자리에 앉아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 예를 갖추었다. 몇 번의 초청과 훈장 수여식 등으로 인해 클로에에게는 이미 낯익은 얼굴이 된 지 오래였다.
“제국의 빛나는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허허, 앉으시오, 앉아.”
황제가 소탈하게 웃었다. 클로에는 도로 착석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귀족 부부는 모두 도착했고, 빈자리가 없는 것을 보니 아서는 이 자리에 참석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아서가 불편했으므로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짐의 초대에 응해 주어 고맙소. 모두 제국의 미래를 책임지고 있는 분들이 아니오. 가끔은 이런 교류가 필요한 법이지. 비록 소박한 자리이지만 마음껏 즐겨 주길 바라오.”
황제의 인사 몇 마디와 함께 석찬의 첫 코스인 애피타이저가 나왔다.
‘소박한 자리’라는 황제의 설명은 그저 겸양의 표현일 뿐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듯 석찬은 정말로 훌륭했다. 제국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들이 모인 중요한 자리이기도 할뿐더러, 오늘의 대접이 황실의 얼굴이 될 터이니 각별히 신경 쓴 것이 느껴졌다.
클로에는 맛있는 것을 좋아했고 따라서 마음껏 먹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던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드레스의 옷태를 내느라 한껏 조인 코르셋 때문이었다.
굳이 코르셋을 하지 않더라도 클로에의 허리는 무척 가늘기 때문에 그녀는 코르셋의 필요성에 의문을 느꼈으나 워낙 중요한 자리인지라 어쩔 수 없었다. 이런 불편하고 번거로운 속옷이 제국에서는 일종의 예의로 통용되는 것이다.
그래서 클로에는 4코스나 나온 애피타이저에 포크질을 조금 하다가, 정작 메인 메뉴는 두어 입 씹어 넘기고 말아 버렸다.
클로에가 주변을 흘끗거렸다. 보아하니 주변의 모든 귀부인들이 비슷한 상태였다. 다들 코르셋 때문에 이런 훌륭한 만찬을 마음껏 즐길 수 없는 것 같았다.
한편 그런 클로에를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물론 알폰스였다.
‘고작 두 입 먹고 남기다니, 지금 장난하는 건가?’
그의 미간에 잔금이 생겼다.
안 그래도 그녀가 너무 마른 듯해 신경이 쓰이는 그였다. 최근 공작저 주방장을 갈아 치우고 식단을 바꾸고 클로에에게 좀 더 많이 먹기를 늘 권하고 있었으나 여전히 클로에는 살이 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랬는데, 고작 두 입 먹고 남긴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알폰스는 클로에가 여기서 더 마르는 것은 결코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 그런 안쓰러운 광경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그가 아내에게 말을 걸었다.
“부인, 좀 더 드시면 안 되겠습니까.”
클로에가 그를 돌아보았다. 알폰스는 언제나처럼 무표정했으나 얼굴에 묘한 그늘이 져 있었다. 그 모습이 꼭 걱정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가 손을 내저으며 웃었다.
“저 많이 먹었어요, 알폰스. 이제 배가 불러요.”
두 입 먹고 배가 부르다고? 말도 안 된다. 무슨 새 모이 먹는 것도 아니고, 살을 찌우긴커녕 일반적인 생활을 영위하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분량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클로에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알폰스가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러고는 그녀의 접시를 끌어당겼다.
클로에의 접시 위에 남아 있던 양갈비 요리를 직접 나이프로 잘게 썰고는, 접시를 그녀의 앞에 돌려놓았다. 이 모든 게 클로에가 어 하는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클로에가 당황해서 말했다.
“아, 아니……. 저, 정말 배부른걸요. 성의는 감사하지만 이제 못 먹어요.”
알폰스가 그녀를 빤히 보았다. 미간에는 주름이 잡혀 있는 채였다. 그런데…… 그의 눈빛에서 뭔가 서운함 같은 것을 느낀 것 같다면 기분 탓이려나.
알폰스가 다시 클로에의 접시를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포크로 양갈비 한 조각을 찍더니 클로에의 입가에 그것을 가져다 대었다.
“아 하십시오.”
그가 진지하게 말했다.
“……!”
클로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 이 사람이 하려고 하는 행동이…… 내가 생각하는 그것이 맞단 말인가?
그녀가 눈동자만 데룩데룩 굴려 주변의 눈치를 보았다.
공작 부부 외의 다른 사람들은 각자 자신들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는 척하면서도, 사실은 전원 이쪽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야 그럴 만도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알폰스 바텐베르크가, 다른 사람에게 먹여 주기를 시도하고 있는데 눈길이 움직이지 않을 리가 없었다.
나이가 많고 보수적인 성격의 귀족들은 ‘그 점잖던 공작이 이렇게 채신머리없는 짓을 하다니!’라며 기겁하고 있었지만 젊은 귀족들은 부정적인 생각보다는 흥미가 더 앞섰다. 지금 이 상황은 연극을 보는 것보다 훨씬 흥미진진했다.
그래서 과연 공작부인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귀족들은 몹시 기대 어린 눈길로 클로에의 반응을 기다렸다.
한편 클로에는 속이 울렁울렁했다. 귀족 부부가 무려 15쌍에 황제까지 있는 이 자리에서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이미 귀까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그녀가 알폰스에게 속삭였다.
“자, 잠깐만요. 제가 먹을게요. 그러니 그거 내려놓으세요.”
“그러시겠습니까.”
그제야 알폰스가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의 눈에 왠지 모를 아쉬움이 스쳐 지나간 것 같기도 했다.
살았다! 여전히 새빨간 그녀의 얼굴에 안도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곱게 잘 썰린 양갈비 요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마치 백만 적군을 상대하는 용맹한 장군과 같은 비장한 얼굴로 양갈비를 상대하기 시작했다.
몇 조각이나 더 먹었을까, ‘이제 슬슬 이 정도면 됐겠지’라고 생각한 클로에가 접시를 밀어 두었다. 그랬더니 그러기가 무섭게 알폰스가 말을 걸어왔다.
“더 드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조금이라도.”
또? 클로에가 눈을 흘겼다. 아까는 그녀를 부끄럽게 만들어서 반강제로 더 먹이더니, 그걸로도 부족한 모양이다.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이제 정말 괜찮아요.”
“그렇다면 한 입만 더 드십시오.”
알폰스가 심각하게 말했다. 클로에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알폰스, 당신 정말…….”
“딱 한 입만 더.”
알폰스가 유머 감각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은 누구보다도 클로에가 잘 안다. 그가 하는 말은 농담이 아니다. 이렇게 진지하게 권해 오는 것을 보니 그녀의 여린 마음이 흔들렸다.
결국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한 입을 더 먹었다.
“이제 됐죠?”
알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그의 붉은 시선이 다시 한 번 테이블 위를 굴렀다.
“고기를 드셨으니 이번에는 채소를 좀 더 드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정말, 알폰스!”
클로에에게는 실로 다행스럽게도 이때 메인 메뉴가 치워지고 다음 코스가 나왔다.
이제 곧 디저트가 나올 순서였다. 클로에가 눈을 빛냈다. 원래 밥 배와 디저트 배는 따로 있는 법이다.
만찬이 끝난 뒤 모든 사람들은 시종의 안내에 따라 응접실로 자리를 옮겼다. 응접실에서는 식후주인 샴페인과 과일이 나왔다.
클로에는 샴페인을 홀짝이면서 다른 여성들과 한담을 나누었다. 그러다 보니 잠시 화장을 고치고 싶은 생각이 들어 다른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파우더룸에 다녀올 생각이었다.
파우더룸에는 이미 사람이 있었다. 한껏 낮춘 말소리가 들려오고 있다는 것을 파우더룸의 밖에서도 알 수 있었다.
클로에가 막 문을 두드리려던 그 순간이었다.
“그렇게나 다정해 보이는데? 정찬 내내 공작님의 시선이 부인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것을 봤잖아.”
클로에의 몸이 굳었다.
“글쎄, 진짜라니까.”
“그게 다 위장이라고 한다면…… 둘 다 아주 훌륭한 배우인 게 분명해. 공작 각하와 공작부인, 두 사람 모두.”
“맞아, 그런 것 같아. 아, 이 이야기는 나에게서 듣지 않은 걸로 해 줘. 알았지? 나도 윌포드 부인에게서 들은 거니까…….”
파우더룸 안의 두 사람이 대화를 끝내려고 하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클로에가 노크도 없이 방의 문을 벌컥 열었다.
“어머나!”
쑥덕대던 귀부인 두 사람이 화들짝 놀랐다. 더군다나, 갑자기 나타난 사람이.
“바텐베르크 부인!”
이었으니 더더욱 놀랄 수밖에는 없었다.
두 명의 귀부인의 얼굴이 삽시간에 창백해졌다. 클로에가 파우더룸으로 들어서며 물었다.
“위장이라니, 저와 부군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던 거죠? 궁금해지네요.”
“그, 그, 그, 그게…….”
“저, 정말 죄송합니다, 공작부인! 실례했습니다!”
두 명의 귀부인은 클로에가 어찌하기도 전에 날쌔게 뛰어 도망쳐 버렸다. 잔뜩 부푼 드레스와 높은 구두를 착용하고 어떻게 저렇게 잘 뛰는지 알 수 없었다.
클로에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사교계에서 뒷말이 나오거나 유언비어가 떠도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일을 하나하나 전부 대응하려 했다간 힘만 들기 마련이다.
하지만……. 클로에가 귀부인들이 도망친 문을 돌아보았다.
‘위장이라니, 대체 무슨 뜻이지?’
화장을 고치기 위해 자리에 앉으며 클로에는 고민했다.
이런 일에 신경 쓰지 않고 싶지만,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등골로 서늘하게 불길함이 타고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다음 날 오후였다. 전날 정찬에서 진을 쏙 뺐기 때문에 오늘은 침실에서 혼자 쉴 생각이었다. 그러나 클로에의 그런 계획을 방해한 존재가 있었다. 포트넘 부인이었다.
“포트넘 부인, 무슨 일이세요?”
포트넘 부인이 초대나 약속도 없이 갑작스레 공작저에 방문한 일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클로에가 급작스러운 만남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포트넘 부인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포트넘 부인이 갑자기 찾아온 데에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클로에는 생각했다.
포트넘 부인은 클로에와 달리 활달하고 사교적인 편이었다. 그러나 하녀들의 안내를 받아 응접실에 찾아온 포트넘 부인은 그녀답지 않게 표정이 어두웠다. 포트넘 부인의 맞은편에 앉으며 클로에가 걱정스레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혹시 좋지 않은 일이라도…….”
“바텐베르크 부인…….”
포트넘 부인이 서글픈 얼굴로 클로에를 보았다.
“저는…… 저는 부인과 부군이 누구보다도 사이가 좋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요.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제가 모를 리가 없잖아요.”
갑자기 이게 무슨 말이란 말인가. 클로에의 얼굴이 굳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포트넘 부인이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포트넘 부인! 울지 마세요.”
“저는, 저는 그런 이야기가 돌아다닌다는 것이 정말 화가 나고 참을 수가 없어서…….”
“저는 정말 괜찮으니까 진정하세요. 배 속의 아이를 생각하셔야죠.”
울면서 횡설수설을 하던 포트넘 부인은 클로에의 위로 덕에 곧 코를 훌쩍이며 진정했다. 포트넘 부인이 레이스 장갑 낀 손으로 빨간 눈가를 문질렀다.
어느새 포트넘 부인의 옆자리로 자리를 옮겨 그녀의 등을 토닥여 주던 클로에가 부드럽게 물었다.
“저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몰라요. 처음부터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포트넘 부인은 그제야 제대로 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이러했다. 포트넘 부인은 오늘 오전에 한 작은 다과회에 참석했다. 그런데 정원을 구경하던 도중 어떤 부인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었다고 했다.
그들의 대화 내용이란…….
“정말, 정말 어처구니없게도…… 그러니까, 바텐베르크 부인과 부군께서 사실 사이가 안 좋으시다는 거예요. 다정해 보이는 것은 전부 위장이라고. 부군께서 부인께 불만을 가지고 있어서, 부인이 곧…… 이, 이혼당하실 거라고…….”
클로에의 얼굴이 조금 멍해졌다. 그녀가 물었다.
“공작님이 제게 불만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뭐라고 하던가요?”
포트넘 부인이 조금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클로에가 채근하자, 그녀가 결국 털어놓았다.
“……부인이 2세를 낳지 못해서, 라고…….”
클로에는 가슴속 무언가가 깨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포트넘 부인이 훌쩍이며 말을 이었다.
어찌 됐든 이런 얼토당토않은 말을 들은 우리의 포트넘 부인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그녀는 화를 내며 그 자리에 뛰어들었고 약간의 언쟁을 벌였다고 했다. 클로에와 달리 불같은 성질의 그녀다웠다.
그리고 다과회가 끝나자마자 한달음에 이곳으로 달려온 것이라고 했다.
클로에가 다정하게 말했다.
“알려 주셔서 감사해요. 어쨌든 저는 정말 괜찮아요. 이혼하는 일도 없을 거고요. 이 일은 공작님과 한 번 대화를 해 보도록 할게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꼬, 꼭 공작님과 대화를 나누어 보세요, 부인. 이건 공작님도 아셔야 해요.”
포트넘 부인이 훌쩍이며 말했다.
포트넘 부인을 배웅한 뒤 다시 응접실로 돌아온 클로에가 소파에 몸을 묻었다. 얼굴에서는 핏기가 사라졌고, 심장은 쿵쾅쿵쾅 거세게 뛰었다.
‘손이 떨려.’
클로에가 왼손으로 오른손을 꼭 쥐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다른 사람들도 전부 알고 있었구나.’
대부분의 정략결혼을 한 부부가 일 년 안에는 아이를 얻는다. 그런데 그녀와 알폰스는, 혼인 뒤 20개월이 다 되도록 아이를 낳긴커녕 임신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충분히 이상해 보일 만한 일이었던 것이다.
연애결혼이 일반적이었던 전생과 달리 이곳에서 결혼은 사랑을 위한 것이 아니다. 오로지 가문 간의 결합과 2세 생산이 결혼의 이유의 전부다.
바텐베르크가와 그레이가의 권세 차이는 극명했다. 애초에 알폰스가 그레이가의 장녀를 신붓감으로 고른 이유도 알폰스 자신과 공작가에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을 정도로 한미한 가문이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알폰스는 사랑을 얻기 위해 결혼한 것이 아니었다. 처가의 권세를 이용하기 위해 결혼한 것도 아니었다. 오로지 그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2세를 생산해 줄 아내가 필요했던 것뿐이다.
그런데 이래서야…….
‘최악이야, 나는.’
클로에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아내로서.’
지금까지는 일부러라도 이 문제에 대해 가볍게 생각한 경향이 있었지만, 이런 소문이 돌아다닌다는 것을 알게 된 지금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귀족들의 사이에서 결혼이란, 아이의 출산이란 이런 의미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이대로는 그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필요 없는 아내가 되어 버릴 것이다.
클로에의 머릿속에 과거의 클로에가 가지고 있던 알폰스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그녀를 본체만체하던 그 남자. 언제나 감정 없는 냉랭한 눈으로 바라보던 그 남자…….
최근에는 그와 가깝게 지냈기에 잊고 지냈지만,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만일 그가, 그녀가 그에게 필요한 2세를 낳아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과거의 그처럼 차갑게 변해 버릴까.
가슴 어딘가에서 강한 통증이 느껴졌다.
클로에는 그렇게는 살 수가 없었다. 한 지붕 아래에서 사는 사람과 남보다 못한 사이로 지내다니.
아니, 그 이전에, 소문대로 만약 그가 그녀가 필요 없음을 깨닫고 경멸하게 된다면. 그래서 결국 이혼 서류를 보낸다면…….
“…….”
클로에는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최악의 경우조차 진지하게 고려하는 그녀 특유의 꼼꼼함과 준비성이 그녀로 하여금 판단하고 계획을 세우게 했다.
만에 하나 이혼하게 된다고 해도 그녀는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녀에게는 충분한 개인 자산과 작지만 견실한 사업체가 있었다.
트리플 스위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작은 집을 얻어서 혼자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었다. 혼자만의 작은 집을 꾸미는 것도, 독신 사업가로서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었다. 워낙 생활력이 좋은 그녀가 아닌가. 그러니까 분명…… 그것만으로도…….
“……안 돼.”
뺨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눈물이 대체 언제부터 쏟아지기 시작했을까. 이혼한 뒤의 일을 생각할 때부터? 그가 이혼을 원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때부터? 그가 다시 자신을 차갑게 대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때부터?
모든 가정이 그녀가 숨을 쉬지 못하게 하고 가슴속을 갈퀴처럼 긁어내린다.
“이제는 안 돼.”
차라리 처음 그를 만났던 반년 전이라면, 괜찮았을지도 모른다. 그가 그녀를 차갑게 대하는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도. 떠나가는 것도.
반년 동안 살금살금 밀려온 감정이 그녀를 적셨다. 발목까지는, 다리까지는, 허리까지는 괜찮다고 용인했던 감정에, 깨달았을 때는 이미 깊이 가라앉은 뒤였다. 결코 돌아 나갈 수도 떠오를 수도 없을 정도로 깊이.
“정말 최악이야.”
끔찍했다. 아이를 낳아 줄 수 없는 데다가, 그를 사랑하기까지 하는 아내라니.
이래서는 그의 아내로 남고 싶다고 말할 자격조차 없다.
어리석게도 이런 때마저 그가 보고 싶었다.
“알폰스…….”
얼굴을 감싼 손가락 사이를 비집고 하나의 이름이 새어 나온다. 깊은 심해에서 흘러나온 그 목소리는 인어의 목소리처럼 바다밖에 닿지 않았다.
* * *
클로에가 대뜸 알폰스의 집무실에 찾아온 것은 평소라면 그녀가 이미 잠들어 있었을 늦은 밤이었다.
“저예요.”
문 뒤에서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알폰스는 입에 물고 있던 시가를 재떨이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은, 그녀가 처음으로 이렇게 늦은 시간에 찾아왔다는 것에 대한 의아함보다는 반가움이 앞섰다.
집무실을 가로질러 문을 열러 가는 그 짧은 순간 동안 알폰스는 스무 개쯤 되는 인사말들을 고민했다. ‘이 시간에는 무슨 일이십니까?’ 아니, 이건 그녀의 방문을 불편해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늦은 시간인데 주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그는 종종 그녀를 이 시간보다 더 늦은 시간까지 재우지 않고는 했다.
마침내 알폰스는 제일 그럴싸하고 정중하면서 예의를 갖추었으면서도 반가움이 느껴지는 인사말을 하나 찾아냈다. 그러나,
“부인…….”
문을 여는 순간 그렇게나 고민한 인사말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아내의 진녹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 그 순간, 그는 입을 꾹 다물었다.
클로에의 표정이 묘했다. 그녀는 분명 웃고 있었지만 알폰스가 좋아하던 그 얼굴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기쁜 듯한 티 없이 맑은 웃음이 아니라 진심이 담기지 않은 미소로 보였다.
알폰스의 얼굴이 대리석처럼 굳어졌다.
“이렇게 늦은 밤에 찾아와서 죄송해요, 알폰스.”
클로에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들어가도 될까요?”
알폰스는 잠깐 그녀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그러더니, 곧 그녀가 들어오도록 몸을 비켜 주었다.
“아닙니다. 들어오십시오.”
알폰스가 자리를 권했다. 소파 침대였다. 그가 가끔 휴식을 취하기 위해 놔두었던 소파 침대는 클로에가 집무실에 찾아오기 시작하면서 쓰임새가 많아졌다.
자리에 앉은 뒤로도 클로에는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알폰스는 참을성 있게 그녀가 어두를 꺼낼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마침내 그녀가 말했다.
“……알폰스, 궁금한 게 있어요.”
“말씀하십시오.”
“저는, 저는…….”
클로에가 작은 숨을 들이쉬고는 말했다.
“저는 당신에게 충분한 아내인가요……?”
알폰스의 눈이 커졌다.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질문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무엇보다, 그 말과 함께 아내가 울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는 클로에가 우는 모습을 본 적이 많지 않았다. 첫 번째는 그녀가 알폰스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었을 때였고, 이번이 두 번째인 것이다.
알폰스가 생각하기에 그녀는 그리 자주 우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아는 여성이라곤 과거 교제를 해 왔던 영애들이 전부였고 그들은 클로에에 비해 훨씬 자주 울었다. 그에 비하면 지금의 아내는 거의 울지 않는 사람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 아내가 울고 있었다. 지금, 그의 앞에서.
알폰스는 무언가 보통 일은 아님을 직감했다. 그는 당장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고 달래 주려 애썼다.
“왜 우시는 겁니까?”
“…….”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제게 말씀해 보십시오.”
“…….”
“제가 도움을 드릴 수도 있잖습니까. 아니, 어떻게든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그는 이제 와서 자신이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위로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에 후회를 느꼈다. 만약 남을 위로해 본 적이 있었더라면 지금 훨씬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애석하게도, 클로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고, 눈물을 뚝뚝 떨구면서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알폰스는 가슴이 갑갑해져 옴을 느꼈다. 위로라는 것도 정해진 정답이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충분한 아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부인은 제게…….”
그가 입술을 깨물었다.
최근 좀 더 감정을 드러내려 노력해 오고 있긴 했지만 여전히 그의 기준에서 지나치게 감상적인 것에 대해서는 본능적인 거부감이 든다. 이런 말을 입에 담으려 할 때마다 벽장의 아가리가 떠오른다. 그를 마저 삼키기 위해 아가리를 찢어지게 벌린, 시커먼 벽장…….
“……대체 불가능한 존재입니다. 부인 외에 어떤 여인이 제 반려가 될 수 있겠습니까.”
고개 숙인 채 눈물만 방울방울 떨어뜨리고 있던 클로에는 생각했다. 얼마나 다정한 사람인가. 그가 최선을 다해 자신을 위로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의 사정을 알고 있으니 일견 건조해 보이는 저 말들에 얼마나 많은 노력이 담겨 있는지도 안다. 그의, 그런 점을 좋아했다.
그런 노력을, 차가운 외면에 감싸여 있는 한없이 따뜻하고 다정한 내면을 잃고 싶지 않았다. 이런 다정함도 그가 아직 그녀를 ‘필요한 아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일까. 만약 그녀가 그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클로에가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눈물이 아롱거리는 눈으로 그녀가 웃었다.
“정말 아무 일도 아니에요. 갑자기 신경 쓰이게 만들어 드려 죄송해요.”
“부인…….”
클로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눈물 자국을 닦고 웃으며 언제나처럼 밤 인사를 했다.
“잘 자요, 알폰스.”
“…….”
알폰스는 붙잡을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대답을 강요할 수도 없었다. 그는 그녀가 자신의 집무실을 빠져나가는 것을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다음 날, 날이 밝자마자 알폰스는 키엘을 불렀다.
“부르셨나요? 각하.”
충실한 집사 키엘이 그에게 인사했다. 그러나 알폰스는 인사를 하는 시간조차 아까운 듯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네가 해 주어야 할 것이 있다. 내 아내를 중심으로, 최근 사교계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 조사해 와라. 지극히 사소한 것도 상관없으니 하나도 놓치지 마라.”
주인의 지시를 머릿속에 꼼꼼히 새긴 키엘이 웃으며 대답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분명 키엘은 유능한 집사였다. 그가 두꺼운 분량의 보고서를 주인에게 올리기까지는 고작 사흘밖에 걸리지 않았다.
클로에가 어디에서 누굴 만나 무슨 이야기를 했다는 내용이 주 내용인 그 보고서의 맨 앞장에는 특히 알폰스의 눈이 번쩍 뜨일 만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역시 그랬군.’
아무 일도 없는데, 아내가 그럴 리가 없었다. 붉은 데도 한없이 차가워 보이는 그의 눈동자가 글줄 위를 훑었다.
보고서 맨 앞장에 적힌 것은 최근 사교계에 조금씩 퍼져 나가고 있다는 소문에 대한 것이었다. 그 소문에 따르면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다르게 바텐베르크 공작 부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특히 남편 쪽이 아내를 냉대하고 있으나, 체면 때문에 사이가 좋은 척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소문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곧 클로에가 이혼당할 것이라는 구절을 읽을 때는 알폰스의 눈빛이 점차 침잠해 갔다.
그리고 그 근거는 클로에의 불임이었다.
보고서를 책상 위에 올려놓은 알폰스가 손가락으로 앞머리를 헤집었다. 언제나 단정하고 가지런히 자리를 잡고 있던 금빛 머리카락이 제멋대로 흩어졌다.
그 역시 제국의 귀족이다. 귀족들 사이에서 결혼이라는 것이 어떤 용도로 이용되는지, 대를 잇지 못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정도는 뻔히 알고 있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 역시 그런 이유로 그레이 백작가의 장녀와 결혼하지 않았던가.
샨탈은 클로에를 진찰할 때마다 그 내용을 알폰스에게 보고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클로에의 체질에 대해 모르고 있을 리 없었다.
그녀는 선천적으로 허약했다. 비록 최근 영양가 높은 식사와 운동 등으로 보완하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평균에 비하면 한참 아래다. 그 결과 그녀에게 내려진 진단 결과는 난임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는 알폰스에게 조금도 신경 쓰일 문제가 아니었다. 실상 그녀가 난임이라는 사실에 단 한 번도 신경을 써 본 적이 없었다.
비록 그가 결혼했던 당시의 이유는 ‘모든 귀족들이 그렇게 한다’는 관습 때문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지금 그가 결혼생활을 유지해 나가는 이유는, 그녀의 남편으로서 살아가는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그에겐 그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 외의 모든 것은 부가적인 것일 뿐이다. 아이 따위 있어도 상관없고 없어도 상관없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의 관심과 사랑을 독차지하는 무언가가 생긴다고 생각하면 거슬릴 정도다.
‘이쯤이면 모든 사람들에게 인식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직 부족했나.’
알폰스가 미간을 좁혔다. 그가 타인의 앞에서 클로에와 스킨십을 하는 것을 좋아하는 건 그것이 공표와 다름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이 여자는 법과 신이 허락한 자신의 것이자 자신의 아내라고.
모두가 그 사실을 뇌리에 깊이 새기고 어떤 자도 그녀를 넘보거나 이런 식으로 건드리지 않게끔 신경을 썼던 건데……. 설마 그것을 위장이라고들 생각할 줄이야. 노력이 부족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는 더 많이, 더 진하게 하는 수밖에.
‘무엇보다도…….’
그녀를 울리고 상처 입힌 것이 고작 이따위 소문이라니 믿을 수 없었다. 아직도 며칠 전 밤에 자신에게 찾아온 클로에의 얼굴이 눈앞에 생생했다.
‘충분한 아내’냐니? 이런 소문으로, 그저 자신이 난임이라는 사실로 자책하고 스스로 상처 입혔을 그녀를 생각하면 분통이 치밀었다.
보고서를 제출한 뒤 여전히 집무실에 서 있던 키엘은 자신의 주인을 보았다. 알폰스는 읽던 보고서를 책상 위에 던져두더니 손가락으로 이마를 받친 채 앉아 있었다.
‘화가 많이 나셨군.’
키엘이 생각했다. 자신의 주인이 혼인 전에 드러낼 줄 알았던 감정은 오직 분노뿐이다. 그래서 키엘은 알폰스가 화가 났을 때의 모습을 잘 알았다.
그는 조용히 분노한다. 소리를 지르거나 물건을 집어 던지는 대신 차가운 분노를 불태운다. 키엘은 주인의 낮아진 목소리와 얼어붙은 눈빛을 두려워했다. 그의 분노는 언제나 자비 없는 결과를 불러들였으니까.
‘정말 많이 화가 나셨어.’
손가락 사이에서 빛나는 그의 싸늘한 안광을 보며 키엘은 생각했다.
“키엘.”
“예.”
낮은 목소리가 내리꽂혔다.
“이 소문의 근원지는 어디지?”
방금 자신이 제출했던 보고서의 첫 페이지가 내밀어졌다. 사실, 키엘도 자신의 주인이 이 보고서를 읽으면 그렇게 물어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키아라 윌포드 백작부인입니다. 그녀에 대한 정보는 18페이지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키아라 윌포드. 일전에 어느 다과회에서 클로에의 납작한 배로 시비를 걸었던 윌포드 부인이 그녀였다.
알폰스가 시가 연기를 깊이 빨아들였다. 잠시 후 그가 말했다.
“수고했다. 나가도 좋다.”
키엘이 꾸벅 인사한 뒤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 * *
윌포드 백작가는 제국 북부에 백작령을 두고 있는 건실한 집안이었다. 이 집안의 주된 자금줄은 영지의 세금이 아닌 사업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벽돌 및 건축 자재를 만드는 사업이 이 가문의 자랑거리이자 자금줄이었다.
크지 않게 시작했던 사업은 어느덧 상당한 규모로 불어났다. 백작이라는 대귀족의 작위를 가지고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영세한 가문에 지나지 않았던 집안의 사정도 좀 나아졌다.
키아라가 이 집안에 시집을 온 것은 사업이 잘되어 가문의 살림이 핀 이후였다. 운이 좋다고 할 수 있겠으나 그녀는 만족하지 못했다. 그녀가 사랑했던 사람은 윌포드 백작이 아닌 알폰스였기 때문이다.
윌포드 백작의 아이를 두 명이나 낳은 지금, 그녀의 불타는 사랑은 사그라들었으나 집착과 질시는 남아 있었다. 어느 모로 봐도 자신에 비해 한 점 나을 것 없는, 사교계의 웃음거리인 여자가 자신이 손에 넣지 못한 남자를 손에 넣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해 견딜 수가 없었다.
그저 그녀를 조금 깎아내리고 싶었을 뿐이다. 그렇게 해서 무너진 자존심을 조금이라도 회복시키고 싶었다.
“마님, 마님! 큰일이 났어요.”
키아라를 깨운 것은 하녀의 다급한 목소리였다. 아침잠이 많은 키아라가 얼굴을 찡그렸다. 그 사실을 알고 있을 텐데도 불구하고 이 시간에 자신을 깨운 하녀에게 소리를 지르려던 찰나였다.
“중요한 전보가 도착했어요. 바텐베르크 공작가에서 온 거래요!”
바텐베르크 공작가? 잠이 확 깨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키아라가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전보를 가져오너라.”
곧이어 도착한 전보에 적혀 있는 것은 그녀의 예상을 아득히 넘어서는 것이었다.
이 집안의 안주인인 윌포드 부인이 공작가의 안주인에게 가한 모욕의 증거와 증언을 가지고 있다. 만일 다시 같은 일을 저지를 생각이 든다면 오늘의 경고를 떠올리라…… 고.
“경고?”
윌포드 부인이 중얼거렸다. 그녀의 의문이 밝혀진 것은 바로 그날 오후였다.
“여보,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
아침부터 나가 사업을 관리하던 윌포드 백작이 창백한 얼굴로 돌아왔다.
“갑자기 모든 거래처가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하자고 하지 않겠소! 심지어 위약금을 지불해도 좋으니 파기를 하자고 하는데,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인 줄 모르겠소.”
건축 자재를 만드는 윌포드의 사업은 다른 사업과의 거래 없이는 운영이 불가능했다. 그런 상황에서 모든 거래처와의 계약 파기는 치명적인 것이었다. 사업의 존망이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윌포드 부인은 눈앞이 하얘졌다. 그녀는 평범한 귀부인으로 평생을 부족함 없이 살아왔다. 어느 날 갑자기 자본줄이 끊겨 몰락하는 집안에서는 도저히 견뎌 낼 수 없었다.
어째서 그 콧대 높은 공작이 이렇게까지 하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아무리 공작가라고 한들 이런 일을 벌이는 것이 쉬울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어째서 자신이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 건지…….
“여보!”
키아라는 그 자리에서 실신했다. 윌포드 백작이 아연한 얼굴로 달려갔다.
* * *
알폰스가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그가 몇 장의 편지지를 설렁설렁 넘겨보았다. 윌포드 백작에게서 온 것이었다. 뒤늦게 아내가 저지른 일에 대해 알게 된 백작의 구구절절한 사죄의 말과 애원이 담겨 있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알폰스는 애절한 내용의 편지를 대충 책상 서랍 어딘가에 밀어 넣은 뒤 말했다.
“들어오십시오.”
집무실에 들어온 사람은, 그의 아내였다. 그가 사랑하는 선량한 눈동자가 의아함을 담은 채 그를 향했다.
“부르셨어요?”
클로에의 얼굴에는 며칠 전 밤중에 찾아왔을 때와 같은 괴로움과 슬픔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과거처럼 한없이 맑기만 하지도 않았다. 헛된 소문으로 인한 피로함이, 여전히 신경 쓰이는 혼자만의 고민이 그녀의 마음을 괴롭히고 있는 것을 알폰스는 알 수 있었다.
‘그 여리고 무른 마음으로 어떻게 견디고 있을지.’
알폰스가 이를 악물며 생각했다. 그러나 곧, 그녀가 자신을 보고 있음을 의식하곤 빠르게 표정을 정돈했다.
알폰스는 클로에에게 자리를 권하곤 이렇게 말했다.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부인.”
그는 장황한 서론으로 시간을 끄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지난 시간 동안의 경험으로 클로에도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고 그녀가 사풋 웃었다.
“……?”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재미있는 기억이 떠올라서요.”
클로에가 미소 지으며 물었다.
“부탁이라니 어떤 건가요?”
알폰스가 그녀에게 부탁을 해 오는 일은 흔치 않았다. 클로에는 좋은 남편인 그에게 언제나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그의 부탁이라면 무엇이든 최선을 다해 노력할 생각이었다.
그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번거로운 일이 될 것을 알지만, 연회를 열어 주셨으면 합니다.”
“연회라고요?”
“예.”
잠시 고민하듯 뜸을 들이던 알폰스가 말을 이었다.
“발표를 할 것이 있습니다.”
발표할 것이라고?
클로에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궁금해할 것도 아니다. 그는 언제나 유능한 집정자이니, 이번에도 정무와 관련된 것임이 분명했다.
그렇게 확신한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해 드려야죠. 어려운 일은 아니니, 걱정 마세요.”
그녀의 말은 진심이었다. 이미 몇 번이나 공작저에서 사교 모임을 열어 본 경험이 있는 그녀였다. 정말 특별한 자리가 아니고서야 연회 하나 여는 것쯤 그녀에게는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