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장 (17/39)

17장

알폰스가 냉정한 눈으로 소녀를 살폈다.

아까는 단지 클로에에게 손을 대려고 했다는 사실 때문에 저도 모르게 냉정을 잃기는 했지만, 확실히 이 소녀는 자객이나 그 무엇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일단 자객이라고 보기엔 지나치게 허술하다.

‘단순한 좀도둑일 뿐인가.’

그렇다고는 해도 감히 공작부인, 감히 그의 아내를 건드리려고 한 그 배짱은 가상했다. 그는 소녀의 두둑한 배짱을 높이 평가해 그에 상응하는 벌을 줄 생각이었다.

알폰스가 기사들을 향해 눈짓을 했다.

“치안 유지대에 넘기는 것이 좋겠군.”

“존명!”

이런 좀도둑 한 명 때문에 모처럼의 외출을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알폰스가 뒷일을 기사들에게 맡기고는 등을 돌렸다.

그때였다.

“아이고, 잘못했습니다, 나리들!”

좀도둑 소녀가 털썩 무릎을 꿇고는 머리를 조아리며 두 손을 싹싹 비볐다.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설마 귀족 나리이신 줄은 상상도 못 했다구요.”

소녀는 특히 클로에에게 집중적으로 애원했다. 아무래도 이 자리에서 제일 마음 약한 사람이 그녀라는 사실을 눈치로 안 것 같았다.

“할머니가 많이 아픈데 아빠는 매일 술 취해서 일을 안 해요. 할머니의 약값을 벌기 위해 이런 짓을 했어요. 제발 용서해 주세요, 나리들!”

그리고 소녀의 전략은 맞아떨어졌다. 소녀의 안타까운 사연에 클로에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 제이콥이 나섰다.

“뻥 치는 거 아니야? 불쌍하게 보여서 용서받으려고!”

“아, 아니거든요! 진짜거든요?”

“이 녀석이 지금 누구 면전이라고 눈을 부라려? 이거 이거, 뻔뻔한 걸 보면 역시 거짓말이 분명합니다, 주군!”

제이콥과 소녀가 아웅다웅거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클로에가 고개를 내저었다. 나이 어린 소녀는 그렇다 쳐도 제이콥이 저 어린아이랑 같은 수준으로 노는 걸 보니 심란했다.

클로에가 아이를 향해 차분하게 물었다.

“얘야, 이름이 뭐니?”

조금 주저하던 소녀가 대답했다.

“제 이름은 샌디예요.”

“그래, 샌디. 할머니께서 어떻게 편찮으신지 물어봐도 괜찮겠니?”

클로에가 몸을 낮추어 아이와 시선을 맞춰 주며 물었다. 샌디가 시무룩한 얼굴로 말했다.

“의사 선생님이 그러는데 괴혈병이래요. 괴혈병은 뱃사람들이 걸리는 건데, 왜 저희 할머니가 걸렸는지 모르겠어요.”

괴혈병. 클로에도 그 병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잇몸에서 피가 나고 이가 빠지며 빈혈이 생기고 면역력이 떨어지다가 종국에는 죽음에까지 이르는 병이다.

그러나 이전 세계에서는 괴혈병이 비타민 C 부족으로 생기는 병이며, 비타민 C만 충분히 섭취하면 예방과 치료가 가능하다는 사실이 일종의 상식으로 통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 녀석을 그냥 풀어 줄 수는 없습니다, 주군! 거짓말이 분명하니까요.”

클로에의 상념은 제이콥의 열띤 주장으로 인해 끊어졌다. 제이콥의 말에 샌디가 발끈했다.

“정말 거짓말 아니에요! 직접 보실래요?”

샌디로서는 홧김에 내뱉은 말 같지만 그건 좋은 방법이었다. 클로에가 물었다.

“네 집은 여기서 머니?”

“아니에요, 별로 멀지 않아요.”

“그럼 네가 우리를 안내해 주렴.”

클로에가 샌디에게 부탁했다. 샌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꼬마 도둑은 공작 부부와 기사들에게 길을 안내했다.

샌디의 집은 정말로 그리 멀지 않았다. 그걸 집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낡아 빠져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오두막집이었다. 크기도 작아서 공작 부부를 따라온 기사들은 제이콥만 빼고 전부 오두막 밖에서 대기해야 할 정도였다.

그리고 ‘할머니는 병에 걸렸고 아빠는 술에 취해서 일을 못 한다’는 샌디의 주장은 사실이었다. 한 노인이 병색이 짙은 얼굴로 침대에 누워 쌕쌕거리고 있었고, 한쪽 팔이 없는 중년의 남성이 곤드레만드레 취한 채로 의자에 늘어져 졸고 있었다. 그의 발치에는 빈 진 병만이 몇 개가 굴러다녔다. 클로에는 어째서 샌디의 집안이 이렇게 곤궁한지 이해할 수 있었다.

클로에가 제이콥을 돌아보았다. 그는 엄청나게 무안해하고 있었다.

“거봐요, 제 말이 맞죠!”

샌디가 떵떵거렸다.

“아, 아니 그게…… 난 당연히 변명인 줄로만 알았지…….”

제이콥은 상당한 장신에 체격도 컸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가 왠지 작아진 것처럼 보였다.

클로에가 조심스럽게 오두막 안을 둘러보았다. 집 안에는 가구라고 할 만한 게 앞서 말한 침대 하나와 의자 하나뿐이었다. 그 외에는 감자와 귀리가 담긴 작은 포대 자루가 몇 개 굴러다닐 뿐이었다. 아마 이 가족의 식량인 것 같았다.

벽에 네모 모양으로 뚫린 창문 밖으로 달빛에 하얗게 빛나는 장미꽃이 보였다. 그걸 보니 선선한 장미 향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가 샌디에게 물었다.

“할머니께서는 평소 무엇을 드시니? 샌디.”

“할머니는 이가 다 빠져서 오트밀 죽만 먹어요.”

저런. 클로에가 탄식했다.

샌디의 할머니가 뱃사람도 아닌데 괴혈병에 걸린 이유가 거기 있었다. 괴혈병의 주된 환자가 뱃사람인 이유는 몇 달이나 이어지는 항해 동안 비타민 C가 들어 있는 신선한 야채를 먹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었다. 굳이 항해를 하지 않더라도 채소를 먹지 않으면 괴혈병에 걸리는 것이 당연했다.

“괴혈병에는 술이 좋대서 진을 먹이기도 하고, 땅에 목만 남기고 파묻으면 낫는다기에 그렇게도 해 보았지만 전혀 효과가 없었어요.”

샌디가 슬픈 듯이 말했다. 괴혈병의 주요한 민간요법들이었다.

내내 클로에의 곁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던 알폰스가 그녀의 등에 팔을 감고 물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클로에가 그에게 속삭였다.

“할머님이 편찮으시다니, 가능하다면 돕고 싶어요.”

“부인, 마음은 이해합니다만 괴혈병은 불치병입니다.”

알폰스가 말했다. 그는 클로에가 이렇게 온정적으로 나올 것을 알고 있었다. 클로에의 따뜻한 마음씨 역시 그가 좋아하는 것 중 하나였다.

그러나 현재 제국에서 괴혈병은 불치병이었다. 한 번 걸리면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치료법 대신으로 민간요법 몇 가지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긴 하지만 실제로 효험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마 샌디가 구입하려고 했던 약 역시 그런 민간요법 중 하나일 것이다.

“실제로 많은 수의 선원들이 괴혈병에 걸려 사망합니다. 바텐베르크와 거래하는 상단의 주요 손실 원인 역시 괴혈병으로 인한 선원의 사망입니다. 제국 해군의 경우 괴혈병으로 인한 사망자가 전투로 인한 사망자보다 더 많을 정도입니다.”

‘아직 괴혈병의 원인을 규명해 내지 못했구나.’

클로에가 생각했다. 제국에서는 아직 괴혈병이 비타민 C 부족으로 인해 생기는 병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괴혈병을 불치병으로 취급하는 것이고.

하지만 클로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곳의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그녀는 전생을 겪은 몸이 아니던가.

“혹시 과일을 드시게 해 봤니? 이가 없으시다면 즙을 내어 드려도 좋아.”

클로에가 샌디에게 말했다. 샌디가 깜짝 놀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과일은 너무 비싸잖아요?”

비싼 데다가 과일이 괴혈병에 효험이 있다는 사실도 몰랐으니 할머니에게 먹여 보았을 리가 없었다.

그때 클로에에게 좋은 생각이 났다. 그녀가 기사들 중 한 사람을 불러 무언가를 부탁했다. 별장에 있는 그녀의 짐에서 무언가를 가지고 와 달라는 것이었다.

어느 정도 기다린 뒤 기사가 돌아왔다. 그가 가지고 온 것은 통이었다. 클로에의 티 캐디 말이다.

클로에가 그것을 열었다. 캐디의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붉은색의 쭈글쭈글하게 마른 과일 조각처럼 생긴 무언가였다. 꼭 토마토를 말린 것같이 보이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그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그녀뿐이었기에 클로에가 설명했다.

“이건 로즈힙(Rosehip)이라는 것이란다. 장미가 지고 나서 부풀어 오른 씨방을 말린 것인데, 괴혈병에 효험이 있을 테니 뜨거운 물에 우려서 마시게 해 드리렴.”

“네? 로즈힙이라고요?”

차통을 받아 든 샌디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물었다. 샌디가 놀란 이유는 명백했다.

첫째로 그녀는 (장미가 그렇게나 많은 고장에서 태어나 자랐음에도) 장미의 씨방을 말려서 먹을 수 있다는 말을 처음 들어 보았고, 둘째로 그것이 괴혈병에 효험이 있다는 것은 더더욱 처음 들어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클로에가 거짓말이나 농담을 하고 있다고 보기에는, 그녀는 너무나 당당해 보였다. 그녀가 친절하게 미소 지으면서 말했다.

“그렇단다. 양은 충분할 테니 로즈힙 티를 매일 한 잔씩 드리렴. 나는 며칠 뒤에 다시 오도록 할게.”

클로에가 로즈힙 티가 괴혈병에 효험이 있다고 단언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로즈힙에는 어마어마한 양의 비타민 C가 들어 있다. 어느 정도냐면, 같은 무게의 레몬에 무려 30배에 달할 정도다. 그런 이유로 로즈힙은 ‘비타민 폭탄’이라는 별명까지 있다.

로즈힙 한 통을 선뜻 건넨 뒤, 클로에는 작별 인사와 함께 알폰스와 기사들과 함께 그 집을 떠났다.

* * *

그러나 샌디의 집을 떠나는 클로에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기사가 로즈힙을 가져올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그녀는 샌디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샌디의 아버지는 원래 성실한 사람이었지만, 사고로 한쪽 팔을 잃은 뒤로는 어떤 곳에서도 일을 구할 수 없었다. 그에 비관한 나머지 매일 술을 마시게 되었다고 한다. 심지어 샌디가 나쁜 짓을 하면서까지 구해 온 밥값마저 술값으로 써 버릴 정도였다.

‘너무 안타까워.’

로즈힙 티 덕에 할머니의 병은 나을 것이라고 확신했지만 그래도 클로에는 샌디의 어려운 집안 사정에 대해 깊은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런 그녀의 기색을 눈치챈 알폰스가 물었다.

“그 일이 마음에 걸리십니까?”

“네. 뭔가 도와줄 방법이 없을까요?”

클로에가 한숨처럼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돈이라도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가난하던 집에 갑자기 목돈이 생기면 도둑맞기 쉬웠고, 샌디의 아버지가 술 마시는 데 다 써 버릴 수도 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클로에는 한숨만 내쉴 수밖에 없었다. 같은 생각을 했기에, 차마 아무런 말도 해 줄 수 없었던 알폰스는 그저 그녀의 어깨만 위로처럼 매만질 뿐이었다.

시간도 늦었고, 즐길 만큼 실컷 즐겼다 싶어서 그날의 외출은 그쯤에서 마무리하기로 했다.

“귀택하셨습니까, 주인님, 그리고 주인마님.”

시종장 윌킨스가 그들을 맞이했다.

“부재하시던 동안 이 마을의 지주에게서 초대장이 왔습니다.”

“지주라고요?”

클로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알폰스를 돌아보았다. 알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놀라는 기색이 없는 걸 보니 그에게는 익숙한 일인 것 같았다.

“이 지역의 지주는 공작가의 사람이 이곳으로 휴가를 올 때마다 만찬에 초청하곤 합니다. 우리가 이곳에 왔다는 소식을 이제야 접했나 봅니다.”

지주라고는 해도 지방 귀족이다. 중앙 귀족, 그것도 공작씩이나 되는 높은 지위의 중앙 귀족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서 나쁠 게 없는 건 당연했다.

납득한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폰스는 윌킨스에게 지주의 초청에 응하겠다고 알렸다.

지주가 공작 부부를 초대한 시간은 다음 날 저녁이었다.

“아이고, 바텐베르크 공작 각하 아니십니까! 이리 친히 걸음해 주셔서 얼마나 영광인지 모릅니다.”

이 마을의 지주인 케네디 남작과 남작부인이 호들갑스러울 정도로 반갑게 그들을 맞이했다. 꼭 유명 인사를 처음 만난 사람 같았다. 이미 알폰스를 여러 번 만나 보았을 텐데도.

거의 꽁지까지 다 타오른 시가를 곁의 시종에게 건넨 뒤 알폰스가 대답했다.

“초면도 아니면서 무슨 말인가. 어쨌든 초대해 주어 고맙군.”

“아닙니다. 오히려 저희야말로 감사하지요, 암요.”

“어머, 소문으로만 듣던 공작부인이시군요! 호호, 반가워요. 공작부인을 뵙기를 얼마나 고대했는지 모른답니다.”

남작과 남작부인의 지나친 반응에 클로에는 좀 머쓱한 기분이 들었지만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았다.

“아이고, 내 정신도 참.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들어가서 말씀 나눕시다. 두 분 본인의 자택이라고 생각하시고 편히 계시다 가십시오.”

남작과 남작부인의 안내에 따라 공작 부부는 남작 성에 들어섰다. 클로에는 이곳이 낯설었지만 알폰스는 남작 성의 구조에 꽤 익숙해 보였다. 아마 어릴 적부터 이 마을에 휴가를 올 때마다 초청을 받았기 때문이리라.

공작 부부는 연회장으로 안내되었다. 길고 긴 테이블에 단 네 명만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얼마 기다리지 않아 미리 준비된 요리가 하나씩 나오기 시작했다.

“좀 더 빨리 인사를 드렸어야 하는 건데 이제야 두 분을 모신 제 불찰을 용서하십시오.”

“아니, 어제가 축제였으니 다망했겠지.”

공작보다는 지위가 낮은 남작가인 데다가 수도에서 말로 이틀이나 걸리는 거리의 시골인데도 만찬의 질은 상당했다. 귀한 손님들이 오신다고 꽤나 정성 들여 준비한 것 같았다. 클로에는 남작부인과 날씨와 수도의 유행 등에 대한 소소한 한담을 나누며 만찬을 즐겼다.

길고 긴 식사가 거의 마무리될 쯤이었다. 케네디 남작이 자리를 옮길 것을 제안했고 그들은 응접실에 자리를 잡았다. 잠시 어디론가 사라진 남작이 곧 싱글벙글한 얼굴로 나타났다. 그의 곁에는 집사가 와인 병을 들고 따라오고 있었다.

“이게 글쎄 오베르뉴산 129년도 와인이 아니겠습니까.”

“네? 129년도라고요?”

클로에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남작의 얼굴에 더더욱 흐뭇한 기색이 짙어졌다.

“저희가 가지고 있는 와인 중 제일 귀한 것입니다. 새로운 공작부인을 처음으로 뵙는 자리니 이 정도는 해야지요.”

클로에도 모르던 사실이었지만 사실 공작가에는 그 정도 되는 등급의 와인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클로에가 가진 와인에 대한 지식은 차에 비해 많이 미진했다.) 그러나 알폰스에게도 그 사실을 굳이 입 밖으로 내어 좋은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으려 하지 않을 정도의 예의는 있었다.

집사가 코르크를 따자 케네디 남작이 직접 모두의 유리잔에 와인을 따라 주었다. 그가 자신 몫의 와인 잔을 들며 말했다.

“아름다우신 공작부인을 위해 건배!”

네 개의 와인 잔이 쨍 소리와 함께 가볍게 맞부딪쳤다.

129년산이라고 생각해서 그런가 와인의 맛은 꽤 좋았다. 클로에는 차 외의 음료도 좋아했다. 원래 주식을 먹다 보면 가끔 간식이 필요한 법이다.

“그건 그렇고 공작부인, 이곳은 마음에 드시나요?”

클로에를 만난 뒤로 줄곧 그녀의 깨끗한 피부와 수도풍의 드레스에 대해 찬사를 늘어놓던 남작부인이 이렇게 물었다.

뺨이 살짝 상기된 클로에가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물론이에요. 정말 아름다운 곳이더군요. 특히 장미 군락은 정말로 인상적이었어요.”

지평선까지 대지를 끝도 없이 새빨갛게 물들인 장미 군락, 마치 하늘 아래로 넓고 넓은 붉은 융단을 깔아놓은 것 같은……. 그 모습과 싱그러운 향기를 클로에는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알폰스가 왜 이곳을 가을 여행지로 추천했는지 그녀는 몇 번이나 이해했다.

그때였다. 그녀의 머릿속에 샌디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샌디의 작고 낡은 오두막집과 병든 노인, 빈 진 병 사이에서 잠든 팔이 하나 없는 남자도.

‘이건 설마…….’

있었다, 샌디를 도와줄 방법이. 게다가 이 방법이라면 샌디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클로에가 문득 케네디 남작에게 물었다.

“남작님, 이 지역의 주 수입원이 어떻게 되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예? 허허, 물론이죠. 이곳 영지민들은 대부분 농사를 지어 먹고삽니다만, 가을철의 관광 사업 역시 훌륭한 수입원이죠. 보셨다시피 가을의 풍경은 이 보잘것없는 마을의 흔치 않은 자랑거리니까요. 관광객들 덕에 축제도 많이 발전했고요.”

어흠! 케네디 남작이 자랑스러움을 숨기지 못하는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클로에가 이렇게 말했다.

“그럼 남작님, 만약 제가 이 지역에 도움이 될 법한 사업을 제안한다면 받아들일 생각이 있으신가요?”

“예?”

“네?”

남작과 남작부인이 거의 동시에 입을 떡 벌리고 눈을 붕어처럼 둥그렇게 떴다.

만일 지금의 이 말을 클로에가 아닌 알폰스가 했더라면 그들은 그렇게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알폰스가 아닌 클로에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사업 제안이!

남작 부부는 클로에의 말이 수도에서 유행하는 새로운 재미있는 농담인가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엔 클로에의 얼굴이 너무나 진지했다.

남작 부부가 이번에는 알폰스 쪽을 돌아보았다. 그는 여전히 무표정이었고 시가를 물고 있었으며 손에는 빈 와인 잔을 들고 있었다. 가만, 자세히 보니 그의 미간에 가는 주름이 잡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남작 부부는 끝끝내 읽어내지 못했지만 그 주름의 의미는 ‘결국 이렇게 되는군.’이었다. 휴가라는 달콤한 떡밥으로도 클로에를 일에서 떼어 놓는 것은 불가능했다.

케네디 남작이 큼큼 헛기침을 하곤 물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사업이라면 어떤 사업을 말씀하시는 건지……?”

솔직히 말해, 만일 다른 여성이었더라면 ‘에이, OO 부인도, 농담도 잘하시지!’라고 넘기거나 들어도 주의 깊게 듣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이나 제국에선 여성 사업가라는 존재가 낯선 것이었다.

그러나 케네디 남작이 클로에의 말을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들어 볼 마음이 생긴 건 다른 이유가 아니고 단순히 상대의 지위가 높기 때문이었다. 저들은 다른 그 누구도 아닌 공작 부부, 심지어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바텐베르크 공작 부부니까.

그리고 클로에는 지난 경험들의 결과로 케네디 남작의 그런 생각을 대강 눈치채고 있었다. 또한 그녀는 이럴 때 제일 좋은 해결 방식이 무엇인지도 알았다.

“남작님도 괴혈병의 심각성에 대해서는 잘 아시지요? 상단이나 해군 등에서 이 불치병 때문에 골머리를 많이 썩이고 있다는 것도요.”

“물론입지요. 잘 압니다.”

케네디 남작은 이곳이 선박 위도 아니고, 하다못해 해변가의 마을도 아니고, 내륙 지방에서 갑작스레 괴혈병에 대한 화제를 듣게 되어 조금 당황한 것 같았지만 그래도 클로에의 말을 주의 깊게 들으려 노력했다.

클로에가 차분히 설명했다.

“괴혈병은 현재 불치병으로 알려져 있지만, 비타민 C라고 불리는 성분을 섭취하면 쉽게 치료할 수 있어요. 이 비타민 C는 신선한 과일과 채소에 흔히 함유되어 있는 성분이에요.”

“비……타민이요? 과일과 채소라고요?”

남작이 깜짝 놀라 물었다.

“괴, 괴혈병 같은 무서운 병이 고작 과일을 먹는 것만으로도 치유가 된단 말입니까? 저는 믿기가 어렵습니다, 공작부인. 아무래도 그건…….”

“네, 아주 쉬운 치료 방식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방법을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한 것은 장기간 항해하는 선박에서 신선한 과일과 채소를 보관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에요. 가격이 비싸기도 하고요.”

보관과 운송이 어려워 해변가에서는 신선한 과일과 채소가 특히나 값이 비쌌다. 이런 판국에 이익 집단인 상단이 선원들에게 값비싼 과일과 채소를 공급하려 할 리가 만무했다.

“하지만 비타민 C의 좋은 공급원이 이 마을에는 많아요.”

“조, 좋은 공급원이라고요?”

“네. 바로 로즈힙이에요. 들장미가 지고 난 뒤 부풀어 오른 씨방이죠. 이것에는 레몬의 약 30배에 달하는 비타민 C가 들어 있어요.”

클로에가 남작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제안해 드리고 싶은 것은 이거예요. 이 마을에는 들장미가 매우 많아요. 곧 장미가 질 것이고 로즈힙이 많이 여물 테니 이것을 수확해서 건조한 뒤 괴혈병의 예방과 치료제로 상단과 해군에 판매하세요. 효과가 무척 좋을뿐더러, 건조해서 사용하는 것이고 부피가 작아 보관과 운송이 쉽죠. 장기간 항해를 하는 선박에서 사용하기엔 아주 적격이에요.”

“아 아니, 공작부인, 잠깐만요. 물론 말씀하신 것이 사실이라면 그 제안은 정말로 훌륭합니다만…….”

남작이 곤란한 얼굴로 끼어들었다.

“죄송하지만 그 로즈 뭐더라…….”

“로즈힙이요.”

“예, 로즈힙이란 게 괴혈병에 특효라는 이야기는 정말로 금시초문입니다. 널리고 깔린 게 장미인데 그 장미가 괴혈병을 낫게 해 준다니,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이건 엄청난 발견이라고요. 부인께서는 떼부자가, 아이고 죄송합니다, 학계에 크게 인정받으실 겁니다.”

클로에가 빙긋 웃었다. 그녀의 미소는 무척 온화하고 선량해 보였지만, 그와 동시에 왠지 모를 자신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 증거를 곧 보여 드릴게요.”

* * *

다음 날, 약속한 시간에 남작 부부는 공작 부부의 별장으로 찾아왔다. 공작 부부는 그들을 데리고 어디론가로 향했다. 목적지는 이미 클로에와 알폰스가 한 차례 가 본 바 있는 곳이었다.

창문으로 보일 정도로 장미 군락과 가까운 곳에 자리 잡은 작은 오두막. 알폰스가 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안에서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클로에가 대답했다.

“나란다, 샌디. 기억하고 있니?”

그녀의 목소리를 알아들었는지 곧 문이 벌컥 열렸다.

“마님!”

뺨이 장미색으로 상기된 샌디가 냉큼 달려 나와 클로에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어머나!”

“정말 감사해요, 마님! 할머니의 잇몸에서 더 이상 피가 안 나요. 안색도 좋아졌어요. 이제 아프지 않대요!”

“어머……. 그거 정말 다행이구나!”

이미 그렇게 될 줄 알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무척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클로에가 진심으로 기쁜 듯이 활짝 웃었다.

그녀가 샌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알폰스를 돌아보았다. 그가 보일 듯 말 듯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클로에는 이번에는 케네디 남작 부부를 돌아보았다. 그들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거의 경악한 표정으로 남작이 말했다.

“고, 공작부인. 설마…….”

클로에가 미소 지으며 설명했다.

“네, 이 아이의 할머님은 괴혈병 환자였어요. 오랜 시간 과일과 채소를 섭취하지 않아 생긴 병이었죠. 저는 얼마 전 이 아이에게 제가 가진 로즈힙 티를 나누어 줬고, 할머님은 그것을 마시면서 점차 건강을 되찾는 중이랍니다. 그렇지, 샌디?”

“네, 맞아요!”

그녀가 샌디를 돌아보며 묻자, 아이가 질끈 땋은 머리가 흔들릴 정도로 세게 고개를 끄덕였다.

케네디 남작은 한참이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잠시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리던 그가 결국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땀을 닦았다. 그가 말했다.

“이건…… 정말로 증명이 된 것과 다름이 없군요. 괴혈병에 로즈힙이라는 게 효과가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물론이죠.”

클로에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곁에 있던 알폰스가 말했다.

“만일 임상 실험이 더 필요하다면 내가 지원하도록 하지. 우리 가문과 거래하는 상단에도 괴혈병 환자가 몇 사람 있으니 그들에게 로즈힙을 시험해 보겠네.”

“그, 그렇게 해 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지요, 각하. 감사합니다.”

클로에가 한 발짝 나서서 케네디 남작에게 말했다.

“남작님, 임상 실험 결과 로즈힙이 괴혈병에 효과가 있다는 것이 분명해지면 야생 장미에서 로즈힙을 수확하는 사업을 꼭 진지하게 고려해 주세요. 유통과 판매는 바텐베르크가 책임질 거예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우리 마을에 괴혈병의 특효약이 있다니! 분명 엄청난 이득을 볼 겁니다.”

“그리고 죽음만을 기다리던 괴혈병 환자들도 삶을 되찾겠죠. 선원들은 건강하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테고요.”

이리하여 (알폰스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클로에는 휴가지에서 또 하나의 사업 계약을 체결하였다.

이쯤 되니 알폰스도 체념할 수밖에는 없었다. 그녀가 일 생각을 하는 것은 어쩔 수 없으니, 대신 그가 앞장서서 클로에가 양적으로라도 많은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수밖에. 그렇게 그는 더욱더 클로에를 과보호하겠다는 다짐을 다졌다.

그때였다.

“누가 우리 집 앞에서 이렇게 시끄럽게 구는 거요?”

오두막 안에서 남자 하나가 어기적거리며 걸어 나왔다. 샌디가 깜짝 놀라 그를 불렀다.

“아빠!”

굳이 샌디가 그러지 않아도 클로에는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그 남자는 일전에 그녀가 샌디의 오두막에 방문했을 때에 진에 취해 잠들어 있던 아이의 친부였다.

머리는 대체 언제 빗었는지 새집에 가까웠고, 정돈되지 않은 수염이 덥수룩한 그 남자는 한쪽 팔이 없었다. 그 모습을 발견한 남작부인이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를 뻔하다가 겨우 자신의 손으로 입을 막았다.

“샌디? 이 사람들은 대체 누구냐?”

남자가 투덜거리며 졸린 눈으로 공작 부부를 훑었다. 아직 술에 덜 깨서 흐리멍덩한 그의 시선이 곧 공작 부부의 옆으로 향했다. 거기엔 남작 부부가 있었다.

아무리 술에 취해 있다고 해도 자기가 사는 지역의 지주를 알아보지 못할 리는 없었다. 남자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어이쿠, 나리. 여기까진 무슨 일이십니까?”

케네디 남작이 손을 내저었다. 그가 두 손으로 정중하게 공작 부부를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은 내가 아닌 이분들께 예의를 차리게. 이분들이 누구시냐면, 에헴, 무려 바텐베르크 공작 각하와 그 부인이시란 말일세!”

“예? 공작 각하와 공작부인이요?”

서민 중의 서민인 남자로선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높은 지위의 사람들이었다. 잠시 멍하게 서 있던 그가 몇 초 뒤에야 정신을 차리고 머리를 조아렸다.

“아이고, 높으신 분들을 제가 몰라뵈었습니다. 무례를 용서해 주십쇼.”

아까 마셨던 술이 홀라당 깨는 듯한 기분이었다. 클로에가 온화하게 웃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남작님, 로즈힙 사업과 관련해서 꼭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요.”

“무엇입니까, 부인?”

“로즈힙 수확에는 꼭 이분, 샌디의 아버지를 1순위로 고용해 주세요.”

이 말에 기함한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다. 첫째로 케네디 남작이 놀랐고, 둘째로는 남작부인이 놀랐고, 셋째로는 당사자인 샌디의 친부가 놀랐으며 마지막으로 넷째로는 샌디가 놀랐다.

“예? 뭐라고요?”

“샌디의 아버지는 사고로 팔을 잃은 뒤로 일을 구할 수가 없었대요. 그런 탓에 지금은 진에 취해 있는 시간이 대부분이지만, 사실 이전에는 아주 성실한 사람이었다고 해요. 저는 샌디의 아버지가 다시 열심히 일을 할 수 있었으면 해요.”

클로에가 다시 샌디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렇지 않니, 샌디?”

샌디의 안 그래도 크게 벌리고 있던 입이 점점 더 벌어졌다. 샌디의 갈색 눈동자가 아롱거렸다.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아이가 말했다.

“네……! 전 우리 아빠가 다시 일을 했으면 좋겠어요. 다시 성실하고 친절한 아빠가 되어 줬으면 좋겠어요!”

아버지가 팔을 잃은 것보다 더 슬펐던 것은 그로 인해 아버지가 절망했다는 사실이다.

아무런 일도 구하지 못한 탓에 자괴감에 빠져 매일 술만 마시던 아버지. 조금 가난하긴 했어도 언제나 성실하게 일하고 자신에게 다정했던 그런 아버지가 사무치게 그리웠지만 이제 손에 잡히지 않을 정도로 먼 과거의 일이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울지 말렴, 샌디.”

클로에가 다정한 손으로 울먹이는 샌디의 머리를 쓸었다. 어깨를 떨던 샌디가 두 손으로 마구 얼굴을 문질렀다. 깨끗해지긴커녕 오히려 온 얼굴이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되어 버렸지만 그것이 보기 밉지 않았다. 왜냐하면 슬픔의 눈물이 아니었으니까.

그때였다.

“저…… 저도 그렇습니다.”

쉰 듯한 이 목소리가 새어 나온 건, 샌디의 아버지인 남자가 서 있는 바로 그 방향이었다.

“저도 제가 일을 했으면 합니다. 너무나 부끄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이제는 부끄러움 없는 아빠이자 아들이 되고 싶습니다. 정말 열심히 살겠습니다. 나리, 꼭 저를 고용해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딸과 많은 사람들의 앞이라 금방이라도 넘어올 것 같은 울음을 참는 것 같았다. 비록 눈물은 흘리지 않았지만 그의 목소리와 눈은 누구보다도 간절했다.

자리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케네디 남작에게 쏠렸다. 모두가 그의 입만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사실을 느낀 케네디 남작이 민망한지 얼굴을 약간 붉혔다. 그가 말했다.

“이것 참, 내가 어떻게 공작부인의 부탁을 거절하겠나? 그것도 괴혈병의 치료법을 발견한 이런 훌륭하신 분의 부탁을.”

“나리,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남자가 달려 나와 남작에게 몇 번이고 허리를 숙였다. 남작이 머쓱하게 말했다.

“내가 아니고 공작부인께 감사해하게.”

“마님, 정말로 감사합니다. 새로운 삶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살겠습니다. 큰 복을 받으실 겁니다.”

남자는 남작의 말대로 이번엔 클로에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클로에가 다정하게 웃었다.

“정말 잘되었네요. 말씀하신 대로 성실한 아버지이자 아들이 되어 주세요. 그리고 다시는 샌디가 슬퍼하거나 나쁜 길로 들지 않게 해 주세요. 가끔 사람을 보내 어떻게 지내는지 확인하겠어요.”

“암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정말 감사합니다.”

샌디와 샌디의 아버지는 클로에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또한 처음에는 클로에가 사업의 제안을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지 못했던 케네디 남작도 그녀의 능력과 마음 씀씀이에 크게 놀랐다.

‘과연, 저 정도는 되어야 그 바텐베르크 공작의 아내가 되는 모양이야.’

그가 클로에 소유의 훌륭한 사업에 대해서 알게 되는 건 좀 더 이후의 일이다.

훗날의 이야기지만, 알폰스가 주도한 로즈힙 티의 임상 실험이 성공적으로 끝난 직후 케네디 남작은 로즈힙의 수확과 농작을 시작한다. 남작가의 영지가 생산하고 공작가 소유의 상단이 유통한 로즈힙은 괴혈병의 치료와 예방을 목적으로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결과적으로 이 거래는 케네디 남작가 소유의 영지와 바텐베르크 공작가에 부를 축적해 주었으며, 많은 수의 선원의 생명을 구했고, 한 집안에 다시 한 번 화목함과 웃음이 깃들게 했다. 클로에가 괴혈병 치료법의 발견자로서 큰 영예를 얻은 것은 물론이다.

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클로에가 괴혈병의 치료법을 찾아냈다는 사실에 알폰스는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남작과의 구두 계약을 체결한 뒤 공작 부부는 다시 별장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알폰스가 물었다.

“부인, 괴혈병에 로즈힙 티가 효과가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게 되셨습니까?”

올 게 왔다. 이런 질문이 돌아올 줄 예상하고 있던 클로에가 미리 준비하고 있던 대답을 꺼냈다.

“순전히 우연이었어요. 어릴 적에 우연히 괴혈병에 걸린 고아를 만난 적이 있는데, 많이 피곤해 보여서 피로 회복에 좋다고 알려진 로즈힙 티를 나누어 주었거든요. 그러자 그 아이가 차를 마시고 괴혈병이 점차 나아지는 게 아니겠어요?”

사실 클로에는 거짓말에 그렇게 능한 편은 아니다. 이 설명 역시 여러모로 빈틈이 많았고, 지적할 점을 찾으라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지만 알폰스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설명을 믿고자 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그 정도로 그녀를 신뢰했던 것이다.

알폰스는 클로에가 하는 설명의 모순점을 지적하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정말 훌륭한 발견을 하셨습니다. 많은 이들이 부인께 감사히 여길 것입니다.”

뜻밖의 칭찬에 클로에가 얼굴을 붉혔다. 사실 비타민 C가 괴혈병에 효능이 있다는 것은 그녀가 발견한 것이 아니다. 그녀가 전생을 겪은 사람이었기에 알고 있는 사실인 것이다.

어쩐지 죄책감이 들었다. 아마 자신의 남편, 반려자에게 거짓말을 했기 때문일 거라고 클로에는 생각했다.

클로에의 무거워진 마음은 알지 못한 채 알폰스는 감탄했다. 과연 눈앞의 이 여자의 잠재 능력은, 차에 대한 이해와 앎은 어디까지일까? 차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녀의 지식이 인명을 구할 정도일 줄은 미처 생각지도 못했다.

평생 무언가에 놀라거나 감탄할 일이 없었던 그였는데, 눈앞의 이 여자는 몇 번이나 그에게 예외를 만들어 준다. 알폰스는 클로에의 지혜에 다시 한 번 감복했다.

한편 클로에에게 신경 쓰이게 만드는 것이 또 하나 있었다. 바로 축제 때도 무수히 보았던, 그리고 샌디의 아버지도 중독되어 있던 진이었다.

아서와 알폰스의 설명을 들을 때에도 큰 문제구나 싶기는 했지만 실제로 눈으로 보고 피부로 체감한 진 문제는 무척 심각했다.

‘이 문제에 있어 내가 도움을 줄 방법은 없을까?’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달리 떠오르는 방도는 없었다. 그녀는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진 같은 심각한 사회 문제에 한낱 차를 좋아하는 사람일 뿐인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을지도 모른다. 이것이야말로 알폰스나 아서 같은 사람을 믿고 그들에게 완전히 맡겨야 할 일인지도.

‘하지만, 만약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그렇다면 제2, 제3의 샌디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자신은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클로에는 다짐했다.

그날 오후였다. 공작 부부는 장미 군락에서 간단한 야외 티타임을 가졌다. 하녀들에게 뒷정리를 부탁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갈 채비를 하는 클로에에게 알폰스가 말했다.

“부인과 함께 가고 싶은 곳이 있습니다. 멀지는 않은 곳입니다. 함께하시겠습니까?”

클로에가 의아함이 담긴 눈을 말똥거렸다. 그녀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에요.”

알폰스는 모든 하녀를 물렸다. 심지어 기사의 호위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이번에야말로 두 사람만의 시간을 만들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모든 사용인을 거절한 알폰스는 클로에를 어디론가 에스코트했다. 클로에는 전혀 처음 보는 길이었지만 그는 꽤 익숙해 보였다.

원래 사람이 다니는 통로가 아닌지 길은 좀 거칠었고 약간의 경사가 있었다. 클로에는 처음에는 잘 따라갔지만 곧 지쳐 버렸다. 그녀의 체력은 비록 춤 연습으로 많이 나아졌다지만 여전히 평균보다 부족한 편이었다.

타고난 체력과 운동 능력이 좋은 알폰스는 가던 도중 그녀가 지쳐 버릴 줄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지 좀 당황한 것 같았다. 바위에 걸터앉아 휴식을 취하던 클로에는 그가 당황한 얼굴로 쩔쩔매는 진귀한 풍경을 보게 되자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어쩐지 모르게 그가 귀여워 보였다.

“부인께서 힘들어하실 줄 미처 몰랐습니다. 제 불찰입니다. 죄송합니다.”

사과라면 클로에 쪽에서 해야 하지 않나 싶었는데, 되레 저쪽에서 해 온다. 양산을 든 채 알폰스의 손수건을 깔고 앉아 있던 클로에가 생긋 웃었다.

“아니에요. 오히려 제가 죄송하죠.”

“아닙니다. 제가 좀 더 신경을 썼어야 했습니다.”

잠깐 동안 ‘아니다, 내가 더 죄송하다’의 다툼이 벌어졌다.

어쨌든 휴식을 취했음에도 클로에의 다리는 여전히 욱신거렸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녀는 거친 언덕길을 더 오를 체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딱 중간 정도 온 탓에 지금 돌아가기에는 뭔가 애매했다.

클로에가 이를 어쩔까 고민하는데, 재킷을 벗어 팔에 걸치고 있던 알폰스가 그것을 다시 입었다. 그리고는 이쪽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온다.

클로에가 그를 돌아보았다. 그의 그림자와 함께, 왠지 모를 불길함이 엄습하는가 싶더니…….

“어맛!”

그녀가 깜짝 놀라 내뱉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양산을 떨어뜨릴 뻔했다. 알폰스가 말도 없이 그녀를 안아 든 것이다.

“가, 갑자기 왜 이러세요?”

“직접 걷기는 어려우시지 않습니까.”

알폰스가 무척 담담하고 담백한 어조로 대답했다.

“불편하십니까?”

“그, 그런 문제가 아니라……. 설마 이대로 목적지까지 걸어갈 생각이신 거예요?”

“예.”

알폰스의 너무나도 당연하고 대단치 않다는 듯한 어조의 대답에 클로에는 입을 떡 벌렸다.

현재 그들은 반 정도 왔다. 객관적으로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었으나 아무리 그래도 사람 하나를 안아 든 채 걸을 만한 거리도 아니었다. 심지어 (경사가 야트막하긴 하다지만) 오르막길이지 않은가.

클로에는 말랐지만 키가 평균보다 큰 편이었다. 어린애도 아니고, 다 큰 어른을 들고 가려면 얼마나 힘들겠는가.

알폰스는 이미 목적지를 향해 걷기 시작했고, 그녀의 등과 다리를 감은 팔은 무척 단단해 승차감(?)은 편안했으나 클로에는 걱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 하지만…… 분명 알폰스가 힘들 거예요.”

저도 모르게 내뱉고 클로에는 순간 아, 하고 당황했다. 몇 번의 경험으로 알게 된 바로, 알폰스 그는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는 듯한 말을 극도로 싫어한다.

클로에는 알폰스가 화를 내거나 불쾌감을 드러낼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강렬한 눈빛의 붉은 눈동자가 데룩 굴러 그녀를 향했다.

‘아……?’

그러나 그 눈동자에 묻어나는 감정은 불쾌감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잠시 클로에를 내려다보더니, 곧 픽 웃었다.

“보십시오. 과연 어떨지.”

비록 코웃음을 치긴 했지만 조금도 불쾌해하지 않는다. 클로에는 그의 변화한 태도에 내심 놀랐다. 또, 왠지 모르게 두근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클로에는 알폰스가 자신을 드는 것이 무겁고 힘이 들까 봐 노심초사하고 있었지만, 그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너무 가볍군.’

분명 잘 먹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특히나 지난번, 클로에가 쓰러진 사건 뒤로는 주방장에게 클로에의 식사를 각별히 신경 쓰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나 가볍다니……. 쥐면 꺼지고 바람 불면 날아갈까 우려된다.

‘주방장을 갈아 치워야겠어.’

이렇게 애꿎은 어느 한 사람이 직장을 잃었다.

또한, 식사의 질도 중요하지만 양 역시 중요했다. 알폰스 그가 보기에 클로에는 음식을 새 모이만큼만 먹었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클로에의 식사량은 평범했다.) 심지어 자기 자신도 먹는 데에는 취미가 없어 신체를 유지하는 데에 필요한 최소량만 먹으면서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더 좋은 요리를, 더 많이 먹여야지 안 되겠어. 다시 쓰러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니.’

그래, 이렇게 가볍고 가냘픈 여자를 이 길로 이끈 그가 큰 잘못을 했다. 그는 자신의 실수를 반성하면서, 더 일찍, 아니 처음부터 그녀를 안아 들고 갔었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알폰스의 단언대로 그는 조금의 지치는 기색도 없이 클로에를 안고 목적지까지 데려갔다. 이전부터 짐작하고 있긴 했지만 클로에는 그의 괴물 같은 체력에 내심 혀를 내둘렀다.

‘내가 남편 하나는 잘 만난 것 같아.’

남자는 체력이 중요하지, 암. 그녀가 무심코 생각했다. 그리고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내가 미쳤나 봐!’

“도착했습니다.”

자신의 아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꿈에도 모른 채, 알폰스가 그녀를 내려 주었다. 조심스레 내려선 클로에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관목으로 둘러싸여 왠지 모를 아늑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그곳은 한쪽만 시원하게 뚫려 있었다. 그쪽으로 시선을 준 클로에가 감탄했다.

“어머……!”

그곳에 있는 것은 마을이었다. 장미 군락에 둘러싸인 마을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그리 규모가 크지 않은 작은 시골 마을은 이렇게 내려다보니 꼭 장난감 마을처럼 보이기도 했다.

사랑스러운 풍경이었다. 그것을 감명받은 얼굴로 내려다보던 클로에가 알폰스를 돌아보며 물었다.

“이런 곳은 어떻게 알게 되셨어요?”

그들이 온 길은 사람이 다니는 길은 분명 아니었다. 이 장소가 널리 알려진 곳은 아니란 뜻이다.

어여쁜 풍경은 관심 없다는 양, 내내 풍경을 지켜보는 클로에의 얼굴에 시선을 붙이고 있던 알폰스가 고개를 돌렸다. 그가 담담한 음색으로 말했다.

“우연이었습니다.”

그가 소년이었을 적의 이야기다. 그는 친부에게 충직한 아들이었으나 어쩐지 가슴속을 짓누르는 답답한 느낌은 어찌할 줄 몰랐다.

그 느낌은 가족 전체가 휴가를 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친부의 ‘귀족 교육’은 휴가 중이라도 멈추지 않았다.

친부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던 그가 누구의 눈길에도 닿지 않기 위해 선택한 장소가 이곳이었다. 발 닿는 대로 걷다가 우연히 발견한 곳. 무늬만 휴가가 아니라 그에게는 진정한 휴식이자 자유의 장소였던 이곳.

알폰스는 이곳을 찾아낸 뒤로, 이 지역에 휴가를 올 때마다 혼자 여기로 찾아왔다. 그래야만 휴가를 보냈다고 느낄 수 있었다.

이 장소는 그의 유년 시절의 기억이 묻힌 곳이다. 그의 유일하고 안온한 휴식처였으니 그 의미 또한 깊었다. 그는 아무도 이곳으로 데려오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이곳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단 한 사람의 예외가 생겼다. 바로 클로에였다.

알폰스는 느끼고 있었다. 이곳이 그의 감정적으로 가물었던 유년기의 쉴 곳이자 위로였다면, 성년이 된 지금의 그의 쉴 곳이자 위로는 클로에, 그녀였다.

알폰스가 헛웃음을 지었다.

“어린 시절 종종 찾아오곤 했습니다.”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클로에는 알폰스가 깊은 추억에 빠진 눈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제게는 소중한 장소입니다.”

구구절절 설명해 주지 않았지만, 클로에는 알 수 있었다. 그의 아내로서의 직감일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그의 유년 시절이 어떠했는지 알고 있다. 지치고, 외롭고, 기댈 데 없는 어린 시절의 그가 친부의 시야와 손안을 벗어날 수 있었던 세상에서 유일한 장소. 어린 시절의 알폰스와 이 공간이 어떤 관계를 맺었을지, 그가 이 장소를 어떻게 느끼고 있을지 클로에는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소중한 곳을 나에게…….’

그녀의 남편과 달리 그녀는 타인의 감정에 극히 예민하며 동화력이 강한 사람이다. 하물며 상대가 배우자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그가 괴로우면 그녀도 괴롭고 그가 기쁘면 그녀도 기쁘다.

숨이 찰 정도로 심장이 뛰었다. 그녀가 알폰스를 돌아보았다. 그렇게나 소중한 자신만의 장소를 그녀에게 허락한 그의 얼굴은…….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답게 웃고 있어서, 더할 나위 없는 진심으로 기뻐 보여서…….

클로에는 그것이 못내 기뻤다. 그녀는 더 이상 감출 수 없는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그가 다정한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주저 없이 그 손을 마주 잡았다. 가슴이 기분 좋게 뛰었다.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했다.

공작 부부는 그 뒤로도 며칠 동안이나 푹 쉬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마침내 수도의 저택으로 돌아가기로 한 당일이었다.

“살펴 가십시오, 주인님, 그리고 주인마님.”

별장 시종장 윌킨스가 하인과 하녀들을 이끌고 마차에 오르는 공작 부부를 향해 인사했다. 이 마을과 별장과 윌킨스, 그리고 은인인 귀족 나리들께서 돌아가신다는 소식에 그들을 배웅하러 온 샌디에게 정이 들고 있던 참이었던 클로에는 은은한 아쉬움을 느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안녕히 가세요, 마님. 건강하세요.”

샌디가 허리를 직각을 넘어 예각에 가깝게 굽혀 인사했다. 아이의 눈은 조금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클로에가 그런 샌디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웃어 주었다.

“울지 말렴. 나중에 또 휴가를 올 거란다. 그리고, 가끔 사람을 보내서 안부를 전하도록 할게.”

“꼭이에요, 마님!”

울먹이는 샌디를 향해서 클로에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폰스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 올라탄 클로에는 편안하게 자리에 앉았다. 알폰스가 마부에게 출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랴!”

마부의 채찍질 소리와 함께 마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공작저에 도착하려면 오던 길과 마찬가지로 이틀을 꼬박 이동해야만 한다. 클로에가 마차 창밖의 풍경을 감상하는데, 그녀의 곁에 앉아 있던 알폰스가 말을 걸었다.

“부인, 휴가는 즐거우셨습니까?”

클로에가 그를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담담했으나 어쩐지 어딘가 모르게 딱딱해 보였다. 잘 보니 긴장을 한 것 같기도 했다. 마치 그녀의 반응을 기다리는 것처럼.

‘설마 내 눈치를 보는 건가?’

에이, 설마. 라고 생각하고는 싶지만 이제는 그녀도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그는 정말로 그녀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녀가 즐거워하고 기뻐하길 진심으로 바라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절로 행복감이 가슴속에서 몽글거렸다. 그녀가 생긋 웃었다.

“네, 정말 많이요.”

이건 진심이었다. 이 휴가를 오지 않으려고 그렇게나 용을 썼던 일들이 먼 옛날의 일처럼 느껴졌다. 정말이지, 이 휴가를 오지 않았더라면 인생에 있어 큰 손해를 볼 뻔했다.

그녀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알폰스의 얼굴에서 긴장이 풀렸다. 클로에는 그러는 그가 어쩐지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가 보일 듯 말듯이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어디라도 모셔다드릴 수 있습니다.”

“네?”

“관광지로 유명한 북부의 노팅턴힐도 좋습니다. 굳이 제국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바다를 건너봐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그의 말은 그거였다. 클로에가 만일 이번 여행을 마음에 들어 했다면 다음에도 어느 곳이든 함께 여행을 갈 생각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 그의 말을 이해한 클로에가 배시시 웃었다.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굳이 멀리 갈 필요는 없어요. 알폰스와 함께라면, 저는 어디에 있더라도 좋으니까요.”

예상외의 대답에 알폰스가 눈을 크게 떴다. 이전과 달리, 그는 이제 이 감정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이 감정의 정체를 알려 준 사람이 바로 클로에, 그녀였다. 알폰스가 행복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할 수 있는 건 그녀뿐이다. 그의 가슴속 모든 나침반은 그녀를 가리키고 있었다.

알폰스의 가볍게 올라간 눈꼬리가 휘어졌다. 그가 그녀의 어깨를 다정히 감싸 안았다.

그가 다가옴을 느끼자 클로에가 뺨을 붉혔다. 그녀는 조금 수줍어하는 듯싶더니 곧 눈을 감았다. 그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입술 위로 입술이 포개어졌다. 두 사람 사이로 작은 온기가 오고 갔다.

* * *

수도의 저택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여독을 푼 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달라진 건 없었다. 클로에가 황실의 초청을 받은 일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로즈힙 임상 실험이 마무리된 뒤의 일이다. 클로에는 세 번째로 황궁으로 불려갔다. 황제를 비롯한 중앙의 고위직 관리 몇 사람과 만찬을 함께한 뒤 훈장을 받았다.

은독수리 훈장. 황실의 상징, 독수리가 새겨진 훈장이다. 그녀가 훈장을 받은 이유는 물론 그것이었다. 전 세계의 모든 선원들이 두려워하는 불치병, 괴혈병의 치료법을 찾아낸 것.

제국을 위해 큰 공로를 세운 사람에게만 수여된다는, 대단히 명예로운 훈장인 은독수리 훈장을 클로에가 받은 일은 대단히 놀라운 것이었다. 제국 역사상 은독수리 훈장을 받은 여성은 그녀가 처음이었던 것이다.

사실 여성에게 은독수리 훈장을 수여하는 것 자체를 반대하는 여론도 있었다. 그녀의 남편인 알폰스 바텐베르크 공작이 훈장을 대리 수여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의견이었으나, 황제는 물론이거니와 당사자인 바텐베르크 공작마저 그 방책을 강하게 거부했다.

제국에서 제일 권위와 권력이 있는 두 사람이 거부하니 어쩔 수 없었다. 귀족들에게 약간의 거부감과 어마어마한 충격과 낯섦 등을 남긴 채 클로에는 결국 제국 최초로 은독수리 훈장을 받은 여성이 되었다.

한편 그녀는 자신이 은독수리 훈장을 받게 된 데에 그런 복잡한 과정이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녀가 부담을 느낄까 봐 알폰스가 입막음을 한 탓이다.

“그래서, 휴가는 재미있었어?”

평생 가는 자랑거리가 될 만한 훈장을 받았음에도 클로에의 일상은 변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가게, 트리플 스위트에 자주 가서 사업을 돌보았고 손님들을 맞았다.

하지만 오늘의 손님은 조금 달갑지 않았다.

“거기서까지 사업을 하나 체결했다는 소식을 들었어. 활약상이 아주 대단하던데? 이제 불량 식품 사범을 잡은 정도가 아니라 괴혈병을 물리친 영웅이 됐네.”

가게까지 찾아온 아서가 그녀를 놀려 댔다.

그리고 클로에는 사회 경험으로 인해 이런 사람에게 어떻게 응대를 해야 할지 알고 있었다. 이런 자에게는 먹잇감을 던져 주면 안 된다.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게, 태연하게 반응해야 상대도 제풀에 지쳐 물러난다.

클로에는 장부를 확인하며 태연하게 말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아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의 얼굴에 ‘어라? 내가 원하던 반응이 아닌데.’라고 훤히 쓰인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아서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클로에를 흘끗거리며 생각했다.

‘하여간에, 확실히 달라지긴 달라졌단 말이야. 예전 같았으면 홍당무가 되어선 대답 한마디 제대로 못 했을 텐데.’

공연히 심술이 난 아서가 다시 말했다.

“그건 그렇고 과연 바텐베르크의 잉꼬부부라니까. 그거 알아? 둘이 금슬 좋은 게 여기까지 소문이 났어. 거기서도 아주 죽고 못 살았다며?”

클로에는 아서로부터 어떤 말을 듣든 부끄러워하지 않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착각이었던 것 같다. 이 말을 듣자마자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것을 보면 말이다.

“주, 죽고 못 살았다니요…….”

귀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그녀는 공연히 장부를 들어 올려 얼굴을 숨겼다. 그녀의 가녀린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아서는 그제야 만족감을 느꼈다. 그는 자신의 말 한마디로 클로에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수 있다는 사실을 좋아했다.

* * *

클로에가 쓰러졌던 일은 공작가의 대사건이었다. 그 이후로 많은 것이 변했다. 저택 상주 의사 샨탈이 클로에를 일주일에 한 번씩 정성 들여 진찰하게 되었다는 것 역시 그중 하나였다.

일주일에 한 번 반복되는 검진이 귀찮을 만도 하지만 클로에는 싫은 내색 없이 받아들였다. 자신이 건강 관리를 잘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데 어느 때부터인가 조금 신경 쓰이는 점이 생겼다. 샨탈이 진찰할 때 클로에의 배를 꼼꼼히 관찰하기 시작한 것이다.

의료적인 검진의 일종이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그래도 괜히 민망했다. 그래서 어느 날은 클로에가 샨탈에게 물었다.

“샨탈, 최근 추가된 검진은 어떤 건가요? 배를 들여다보거나, 손목의 맥을 짚어 보는 것 같은 일이요.”

검진 기록을 꼼꼼히 기록하던 샨탈이 안경을 추어올리며 클로에를 돌아보았다. 그녀가 대답했다.

“태기를 확인하는 것이에요. 공작부인께서도 이제 회임을 하실 때가 되었으니까요.”

언제나처럼 직설적이고 단호한 (수줍음 많은 숙녀에 대한 배려가 없는) 답변이었다.

얼굴에서 화끈 열기가 피어올랐다. 심지어 목까지 뜨거운 기분이 나는 걸 보니 보이지는 않아도 목까지 붉어진 게 분명했다. 클로에가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아, 그, 그렇군요.”

샨탈 역시 공작 부부 사이의 행위의 빈도가 날이 갈수록 잦아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클로에의 건강을 책임지는 의사이니까 말이다.

진찰을 받은 클로에는 방의 한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녀 록우드 부인과 함께 방을 나섰다. 이미 날씨는 상당히 많이 쌀쌀해져 있었다. 겨울이 훌쩍 다가온 것이다. 클로에는 날씨가 더 추워지기 전에 정원 산책을 충분히 즐겨 둘 생각이었다.

그런데 계단을 내려가던 와중, 이런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확실히 이상하긴 해. 우리 마님 말이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그렇게나 자주 함께 밤을 보내면서.”

틀림없이 클로에, 그녀에 대한 이야기였다. 클로에가 저도 모르게 우뚝 발을 멈추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말소리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평범한 여자라면 벌써 회임을 하고도 남았을 텐데.”

“워낙 허약하셔서 그럴지도 모르지. 저번에는 과로로 쓰러지시기까지 했잖아.”

“정말 걱정이야.”

여기까지만 들어도 그들이 어떤 내용의 대화를 하고 있는지 뻔히 알 수 있었다. 그들은 클로에가 그렇게나 자주 부부 관계를 가지면서도 임신을 하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클로에가 어찌하기도 전에, 록우드 부인이 먼저 선수를 쳤다. 그녀가 쿵쿵 소리가 들릴 정도로 화난 발걸음으로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그러고는 소리가 들려온 모서리 너머로 돌아 소리쳤다.

“감히 주인마님에 대해 함부로 입을 놀리다니! 정말이지 믿을 수가 없구나, 이 불충한 것들!”

언제나 침착하고 냉철하며, 귀족 여성의 모범이 될 정도로 단정한 그녀였지만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노한 기색이 다분한 모습으로 그녀가 마구 호통을 쳤다.

뒤따라온 클로에가 록우드 부인에게 다가갔다. 모서리를 돌자 감히 주인마님의 뒷이야기를 떠들어 댄 용감무쌍한 하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록우드 부인에 이어 클로에까지 맞닥뜨리게 된 그들은 시체처럼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벌벌 떨고 있었다.

“주, 주인마님! 록우드 부인!”

“저희가 큰 죄를 지었습니다.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하녀들의 낯빛이 말이 아니었다. 그들은 앞뒤 볼 것 없이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시끄러워지자 다가온 다른 사용인들에게 록우드 부인이 소리쳤다.

“어서 회초리를 가져오도록! 이 어리석은 것들에게 주인에 대하여 혀를 함부로 놀리면 어떻게 되는지 가르쳐 주겠…….”

“진정하게, 록우드 부인.”

그때 클로에가 나섰다.

“대신 화를 내주어서 고맙지만, 나는 괜찮으니 너무 노여워하지 말게.”

그 말을 듣고서야 록우드 부인은 겨우 진정했다. 그녀는 마님의 앞에서 단정하지 못한 모습을 보인 것을 부끄러워했다. 그러나 화를 내지 않더라도 록우드 부인은 여전히 엄격했다.

“하지만, 사용인들 주제에 감히 주인에 대해 함부로 입을 놀린 죄는 큽니다. 벌을 주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저 아이들이 악의를 가지고 그런 말을 한 건 아니지 않나. 저 아이들 딴에는 나를 걱정하느라 그런 것이니, 내가 보기에는 참작할 만하네.”

하녀들이 감히 주인마님의, 그것도 임신과 같은 사적인 부분에 대해 함부로 입을 놀리다가 들킨다면 그것은 보통의 귀족가의 경우 크게 경을 치고도 남을 일이었다. 문제의 하녀들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크게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나 클로에는 보통의 귀족이 아니었다. 그녀는 다른 귀족들보다 여리고 무른 성정이었고 민주사회에서 살았던 기억을 여전히 지니고 있었다.

어쨌든 주인마님이 이렇게까지 말을 하는데 록우드 부인도 더 이상 무어라 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마님께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알겠습니다. 저 아이들에게 달리 벌은 내리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추가적인 예절 교육은 불가피해 보입니다. 허락해 주셨으면 합니다.”

“허락하겠네. 그에 대해서는 록우드 부인에게 맡기지.”

“감사합니다.”

창백한 얼굴로 떨고 있던 하녀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정말 꼼짝없이 죽었구나 싶었는데 마님의 자비와 친절로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선처를 받은 것이다.

하녀들이 허리를 깊게 숙이며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자비로우신 마님!”

“정말로 감사합니다. 다시는 불경한 짓을 하지 않겠습니다.”

산책은 무르고 다시 침실로 돌아온 클로에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얼굴이 약간 창백했다. 록우드 부인의 앞이라 의연한 척을 하기는 했지만 사실 충격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꽤 크게 받았다.

‘그러고 보니, 정말로 이상해.’

사실 임신에 대해서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이곳에 떨어져 누군가의 아내가 되기 전에 그녀는 독신의 커리어우먼이었다. 결혼은 물론이고 임신이나 출산에 대해서는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그녀에게는 가정을 꾸리는 것보다 자신의 삶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그랬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생겼고 아이를 낳아 대를 이어야 한다는 의무가 생겼다. 실제로 아이를 만들기 위한 부부 관계도 여러 번 가졌다.

‘그렇게나 여러 번, 오래 관계를 가졌는데 아직도 아이가 생기지 않다니…….’

솔직히 말해 아이를 낳을 마음의 준비는 되지 않았다. 벌써 누군가의 엄마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이상한 것은 이상한 것이다. 이 몸은 혼인 이후 한 달에 한 번씩은 꼬박꼬박 부부 관계를 가졌고 심지어 최근에는 그 횟수마저 늘었다.

그런데 어째서 임신하지 않는지 알 수 없었다. 엄마가 될 심적 준비는 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녀에게는 공작가의 대를 이을 의무가 있었다. 그녀는 아기를 낳아야 했다.

고민하던 클로에는 며칠 뒤, 샨탈을 불러 물어보았다. 자신이 회임을 하지 않는 이유를 말이다.

샨탈은 주인마님의 질문에 정직하게 대답했다.

“선천적으로 허약해, 회임이 어려운 체질이신 듯하네요. 체력과 체질을 보강하면 꼭 회임하실 수 있을 거예요.”

결국 하녀들의 말 그대로였다. 문제는 클로에에게 있었다.

샨탈을 물린 뒤 클로에는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낯빛이 어두웠다. 주인마님의 곁을 지키고 있던 록우드 부인이 최선을 다해 위로했다.

“걱정 마십시오, 부인. 틀림없이 곧 좋은 소식이 있으실 겁니다.”

클로에는 록우드 부인을 향해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 보였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대부분의 부부들이 결혼한 지 일 년 안에는 임신을 했다. 그녀 자신도 그랬어야 했는데…….

‘아니야, 신경 쓰지 말자. 어차피 임신을 할 계획 같은 건 없었잖아.’

클로에가 생각했다.

‘계획 없는 임신은 위험한 거야. 나는 아직 엄마가 되고 싶지 않아. 좀 더 나 자신과 내 일에 집중하고 싶어.’

그러나, 머리로는 알고 있음에도 여전히 마음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클로에는 알폰스에게 괜한 미안함을 느꼈다. 그가 결혼을 한 이유는 그녀를 사랑해서가 아니었다. 오로지 2세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자신이 그의 아이를 낳아 주지 못한다면…… 그건 그녀가 그의 아내가 될 자격이 없다는 뜻이 아닐까. 마음속에 거대한 돌이 하나 얹어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어느 날이었다. 슬슬 사교 활동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클로에는 다과회에 참석했다.

다과회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분위기는 무난하게 굴러갔다. 최신 유행의 드레스와 악의적이지 않은 가십에 대한 대화가 주로 오고 갔다.

이리 튀고 저리 튀던 화제가 다과회 참석자들의 남편으로 향했다. 각자 자신의 남편의 흉을 보거나 자랑을 하기 시작했다. 그중 남편 자랑을 열심히 하던 한 부인이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제가 제일 부러운 분은 바텐베르크 부인이에요. 부군께서 정말 굉장하시잖아요?”

한 번 물꼬가 터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이런 말들이 이어졌다.

“정말이에요. 유능하시고, 검술 또한 뛰어나시고, 모두의 동경과 존경을 받는 분이시죠.”

“4년 전에 황실 주최 검술 대회에 참석하신 공작 각하를 보았어요. 어찌나 위엄 있으시던지요.”

“게다가 아름다우시기까지 하잖아요. 제 남편도 공작님의 반만 닮았으면 좋겠네요.”

최근에서야 겨우 사교계에서 인정받기 시작한 클로에와 달리, 알폰스는 언제나 늘 모두의 존경과 관심의 대상이었다. 그런 남편을 가진 클로에는 많은 귀족 여성들의 부러움을 샀다.

클로에의 뺨이 붉어졌다. 남편의 칭찬을 듣는 것은 무척이나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기쁘기도 했다. 공연히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수줍게 웃으면서 말했다.

“제게는 과분한 분이시죠.”

“어머나, 부인도 참, 겸손하셔라.”

“과분이라뇨, 최고로 어울리는 한 쌍이신데요.”

클로에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거나 어떤 이유로든 간에 그녀에게 환심을 사고 싶은 부인들이 떠들어 댔다.

그런데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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