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장
“나쁘지 않죠?”
아서가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가 목소리가 들린 쪽을 돌아보았다. 클로에가 이쪽을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음, 뭐…….”
아서가 그녀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흐흠, 흠.”
난데없는 소리에 클로에가 알폰스를 돌아보았다. 일부러인지 아닌지 헛기침을 한 그의 미간에 가느다란 주름이 잡혀 있었다.
그가 아서 쪽을 흘끗 보더니 새로운 화제를 꺼냈다. 방금 아서와 함께 나누던 대화에 대해서였다.
“부인, 진(Gin)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음, 술의 일종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클로에가 진이 뭔지 모를 리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일전에 그녀가 시녀 록우드 부인에게 가르쳐 준 칵테일 레시피에도 진이 들어갔던 것이다.
“이야, 클로에. 그런 것도 다 아네.”
아서의 경박한 반응은 무시한 채 알폰스가 말했다.
“맞습니다. 제국 북부의 홀란트 연합 공화국에서 전래된 곡물로 만든 증류주입니다. 가격이 저렴하고, 기존에 제국에서 흔히 소비되던 주류인 맥주에 비해 도수가 높아 하층민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습니다.”
“그래, 클로에. 혹시 ‘한 푼이면 취하고, 두 푼이면 만취’라는 광고 문구 본 적 있어? 그게 바로 진의 광고 문구야.”
알폰스의 설명에 아서가 끼어들었다. 클로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어디서 본 건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쩐지 익숙한 문구였던 것이다.
그들의 설명에 따르면 저렴한 값에 만취할 수 있는 술인 진은 빈곤층 사이에서 빠르게 퍼져 나갔다. 이는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었다. 진의 과열된 인기는 많은 수의 알코올 중독자들과 범죄, 사고를 낳았던 것이다.
“통계에 따르면 빈민가인 로빈슨 거리에서는 10개의 건물 중 하나는 진 숍이라고 합니다. 진이 성행하면서 빈민가에서 병사자와 인명 사고, 범죄가 네 배 이상 증가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알폰스가 찻잔을 찻잔 받침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클로에는 곰곰이 고민했다. 알코올 중독은 어느 사회에서나 치명적이었다.
“맞아. 오죽하면 수도 내에서 우유 소비가 반으로 줄었다는 말도 있겠어. 다들 우유 사 먹을 돈으로 진을 사 먹어서 말이야.”
“정말 큰일이네요. 빈민들의 영양 상태가 더욱 나빠지겠어요.”
영양 상태가 좋지 않은 사람의 경우 알코올은 더더욱 위험할 수밖에는 없었다.
어쨌든 알폰스와 아서, 두 사람이 어떤 문제로 논의를 하고 있었는지 알게 된 클로에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이런 문제가 있었군요. 두 분, 고민이 많으셨겠어요.”
“뭐, 그렇지.”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황가에서는 어떤 해결 방법이 논의되고 있는지 여쭈어봐도 될까요?”
아서는 클로에가 생각 외로 정치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이 신기했다.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뭐, 일단은 주세를 인상하고 진 판매를 허가제로 돌리는 정도. 이 일을 위해서 알폰스가 많은 노력을 했지.”
그가 알폰스를 가리켰다.
“그렇지만 역시 역부족이야. 그래서 나는 진지하게 진 판매 허가를 위해서 영업 허가료를 내게 만드는 법안을 고려 중이야.”
“영업 허가료는 어느 정도인가요?”
“뭐, 금화 5천 개 정도?”
금화 5천 개!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평민 중산층의 연봉 수준이니까.
“금화 5천 개요? 분명 판매 규제는 되겠지만 그건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에요. 진을 매매하던 빈곤층이 불만을 가지기라도 하면요? 그때마다 강압적으로 억누르실 생각인가요?”
클로에가 깜짝 놀라 말했다.
“그 사람들에게 진은 노동과 빈곤의 고됨을 달래주는 삶의 낙일지도 몰라요.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닌 진을 강제로 빼앗는 방식은 분명 큰 부작용을 부를 거예요.”
“흠, 클로에. 네 말도 맞지만 그렇다고 진을 규제하지 않을 수는 없어.”
“규제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에요. 다만 저는 점진적이고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아서가 고민하기 시작했다. 곧, 그가 일어나며 말했다.
“뭐, 어쨌든 오늘 잘 마셨어, 클로에. 정향이 들어간 거치곤 괜찮더라.”
그가 떠난 뒤에도 클로에는 이 문제에 대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아서가 떠나자 티룸에는 두 사람만이 남았다. 알폰스가 클로에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답지 않게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귀엽게 느껴진 알폰스가 엷게 웃으며 다가왔다. 그가 클로에의 옆자리에 앉아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진 문제를 신경 쓰고 계십니까?”
그가 중저음의 울림이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클로에의 얼굴은 여전히 어두운 그대로였다.
“너무 안타까운 이야기예요.”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렇게 말한 알폰스가 멈칫했다. 그가 자신의 말을 정정했다.
“……부인께서 걱정을 하실 필요는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워낙 건조한 사람인지라 말의 뉘앙스 같은 것을 따지면서 조심하는 편은 아니다. 상대가 클로에라서 그렇다. 그녀의 앞이라는 이유만으로 평소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자신의 건조한 말투마저 신경이 쓰인다.
그러나 정작 그를 그렇게 만든 당사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녀가 여전히 알폰스와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말했다.
“무언가……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을까요?”
알폰스는 어째서 그녀가 이런 일에 마음을 쓰는지 알 수 없었다. 알폰스 그야 공직에 있으므로 당연히 신경을 써야 했지만 클로에는 아니었다. 그녀가 책임감을 느껴야 할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이 얼마나 무른 마음인지. 뛰어난 수완과 판단력을 가진 냉철한 사업가인 그녀가 한편으로는 이렇게나 무른 감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사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다른 것보다는, 그녀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것이, 그녀의 마음에 불필요한 무게가 얹혀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한 알폰스는 클로에가 계속해서 고민을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가 명백한 의도를 담아 클로에의 귓불을 깨물었다.
“아, 알폰스!”
효과는 탁월했다. 클로에가 단박에 뺨을 붉힌 채 소리쳤다. 그에게 주의를 돌리느라 그녀의 얼굴에서 그림자가 사라지자 알폰스는 만족감을 느꼈다.
그가 클로에의 귀 위쪽을 길게 핥았다. 그녀가 여린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조금만 주의를 분산시키면 당장이라도 부끄러운 소리를 내고 말 것 같았다.
“부인께 그런 얼굴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알폰스가 귓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귓가에 와 닿는 그 목소리마저 지금의 클로에에겐 자극으로 느껴졌다.
알폰스가 생각하기에 분명 그녀에게 그런 얼굴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녀에겐 티 없이 맑게 웃는 얼굴이 어울린다. 아니면 얼굴을 붉히고 달뜬 숨을 쉬는 얼굴이나.
그의 입술이 클로에의 목선을 타고 내려왔다. 점점 몽롱해지는 머리로, 클로에는 자신의 몸이 소파에 눕혀지는 것을 느꼈다.
* * *
“다즐링 30g 주세요.”
트리플 스위트에 드디어 다즐링이 들어왔다. 올해 여름에 수확한 신선한 햇차 세컨드 플러쉬였다.
이것은 적정한 단가와 향미를 만들기 위해 클로에가 직접 여러 다원의 다즐링을 블렌딩한 차이기도 했다.
비록 다원도 등급도 다르긴 하지만 황실에 납품하는 차 역시 다즐링이 아니던가. 이런 좋은 마케팅 소재를 두고 클로에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클로에는 다즐링이 황제가 마시는 홍차라고 대대적으로 홍보를 했다. 그리고 그 효과는 뛰어났다.
황제도 마신다는 신상품을 사기 위해 방문한 많은 귀부인과 몇 명의 귀족 남성들로 가게가 붐볐다.
언제나처럼 클로에는 가게에 자주 감독을 왔다. 직원들은 여진의 교육대로 철저하게 일했으며 손님들은 만족하며 차를 사 갔다.
가게가 잘 돌아가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클로에는 문득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저는 얼 그레이 20g 주세요.”
“싱할라 10g과 다즐링 20g 주세요.”
손님들의 주문을 받을 때마다 직원들은 분주해졌다. 할 일이 많았다. 차통을 꺼내 찻잎을 저울에 담아 계량해서 종이에 포장한다. 찻잎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꼼꼼히 싼 뒤 고객에게 건넨다.
딱히 특별할 것이 없었다. 제국 내에서 이루어지는 거래의 일반적인 풍경이었다. 주문을 받고, 고객이 원하는 분량을 주는 것. 현대에도 재래시장에서는 흔히 이런 형태의 거래를 하지 않던가.
하지만 클로에의 생각은 달랐다.
‘포장하는 것이 생각보다 오래 걸리잖아. 차라리…… 미리 포장을 해 두고 지정된 단위로만 판매하는 것이 어떨까?’
산업의 대형화와 공장화가 이루어졌던 이전 세계에서 봤던 거래의 형태였다. 클로에가 그런 세계에서도 살았었기에 가능한 발상이었다.
실제로 그랬다. 손님이 붐비면 붐빌수록 계산대에 줄을 서는 사람이 늘었고, 그럴수록 계량과 포장에 걸리는 시간이 치명적이었다. 고객을 지나치게 기다리게 하는 것이 좋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좋은 발상이 떠오르자 클로에는 당장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
‘현대에는 찻잎을 50g, 80g, 100g 단위로 판매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이곳은 찻잎의 가격이 비싸서 그런지 주로 구매하는 단위가 훨씬 적어. 10g, 20g, 30g 정도로 포장하는 게 좋겠어.’
용량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신경 써야 하는 것은 역시 포장! 클로에는 고객이 만나는 제품의 첫인상이나 마찬가지인 포장의 중요성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트리플 스위트의 로고와 차의 이름을 써 넣고, 예쁜 문양을 그려 넣자. 차의 소비자는 주로 귀부인이니까 디자인은 아주 중요해.’
포장 디자인을 구상할 때 클로에는 알폰스에게서 큰 도움을 받았다. 그건 바로…….
그가 선물한 티 캐디였다.
‘주 고객이 부유한 귀족이니까 공장식으로 대량 생산된 포장보다는 고급스럽고 특별한 포장이 더 좋겠지.’
그녀는 알폰스의 티 캐디에서 영감을 얻었다. 그가 제작해 준 나무로 만들고 자개와 거북이 등딱지로 장식한 아름다운 차통.
‘포장을 여러 종류로 하고, 각기 가격을 다르게 표기할 거야. 종이로 된 포장이 제일 저렴하고, 그다음은 철로 만든 틴(tin), 제일 값진 것은 거북이 등딱지, 상아, 자개 등으로 장식한 통이야.’
그렇게 아이디어를 구체화시킨 클로에는 디자이너에게 포장 디자인을 의뢰해 장인에게 제작을 맡겼다.
마침내 첫 균일 포장 상품이 판매 개시된 당일.
“어머, 이 아름다운 상자는 뭐죠?”
갑자기 가게에 깔린 알록달록한 틴들과 화려한 자개 상자에 귀부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번에 리뉴얼된 찻잎 상품입니다, 부인. 10g, 20g, 30g 단위로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이 예쁜 통이 차통이라고요?”
직원의 설명에 귀부인들이 깜짝 놀랐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클로에의 포장 마케팅은 무척 성공적이었다. 귀부인들은 아름다운 디자인의 포장을 무척 좋아했다. 가격에 포장하는 비용이 들어가서 단가는 더 올랐는데도 그랬다.
자개, 상아로 장식한 상자는 주로 선물용으로 판매되었다. 유별난 인기를 끈 것은 바로 틴이었다. 틴의 디자인 자체는 단순했지만, 선명한 트리플 스위트의 로고와 섬세한 문양, 그리고 차마다 다른 알록달록한 색깔이 귀부인들의 수집욕을 자극했다. 이미 가진 차를 틴을 모으기 위해 또 사는 부인도 있었다.
자택에 트리플 스위트의 로고가 박힌 차통 하나쯤을 놓아두는 게 귀부인들 사이의 교양이 되었다. 더군다나 귀족들의 집마다 트리플 스위트의 로고가 놓여 있는 것은 그 자체로도 훌륭한 홍보 수단이었다. 이래저래 효과적인 마케팅이었다.
“바텐베르크 부인은 정말 대단하세요. 어떻게 매번 이런 놀랍고 새로운 발상을 하시죠?”
이 마케팅에 대해서 특히 로네펠트 부인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그녀 역시 저택에 트리플 스위트의 틴을 색상별로 그리고 사이즈별로 모아 두고 있었다.
클로에가 수줍게 웃었다.
“부끄럽군요. 보통인걸요.”
“말도 안 돼요! 수도에, 아니 제국에 바텐베르크 부인만 한 수완가는 없을 거예요.”
로네펠트 부인이 너무나 열정적으로 칭찬을 하는 바람에 클로에는 무척 쑥스러웠다.
한편 클로에의 뛰어난 사업가로서의 능력을 인정하는 사람은 로네펠트 부인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를 제일 인정하고 또 경애하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알폰스였다.
“……재스민 차의 공급처를 늘리는 문제 말인데요. 이제 슬슬 수도 외로 영역을 넓히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그와 그녀는 여전히 대화를 많이 했다. 사적인 주제로도, 사업에 대해서도 그랬다.
오늘 같은 경우도 그랬다. 클로에가 알폰스의 집무실로 찾아왔다. 사업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이제 그녀가 집무실에 들락거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상이 되어 버렸다.
“데번과 메인폴에서 특히 주문이 많이 들어오고 있어요. 제가 계산해 보니 운송료 대비 손익 분기점을 넘었더군요. 해당 지역에 재스민 차를 공급하기 시작해도 좋을 것 같아요.”
클로에가 자신이 직접 계산하고 작성한 자료를 건네주며 말했다. 알폰스가 그것을 받아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자료는 흠잡을 데가 없었다.
트리플 스위트를 운영하고 바텐베르크가의 내실을 관리하는 것만으로도 업무량은 차고 넘칠 텐데 재스민 차 공급 사업에 대해서는 언제 또 조사를 한 건지. 그는 클로에의 열정과 섬세함에 감탄했다.
그는 여자로서의 클로에를 사랑했지만 그와 동시에 동업자이자 한 명의 어엿한 사업가인 클로에를 존중하고 존경했다. 능력이라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가 이런 존경심을 느낄 정도라니. 그는 그녀를 마주 대할 때마다 언제나 무언가를 배워 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건 그거고 질투 나는 것은 나는 것이었다. 그는 클로에의 주의력이 언제나 사업에 쏠려 있다는 것이, 그녀가 자신을 찾아오는 이유가 거의 항상 사업 때문이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의 모든 정신이, 그녀의 모든 시선이 언제나 자신만을 향하고 있으면 좋을 텐데. 하지만 그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새장에 가둬 둘 수 있는 새처럼 손아귀에 거머쥘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녀는 사랑하는 것이 너무 많았고, 알폰스는 그런 그녀를 사랑했다. 그 사실이 그를 더 애타게 하고 욕망하게 했다.
한편 클로에는 손바닥을 간질이는 그의 손가락을 의식하고 있었다. 펜과 검을 쥐어 굳은살이 박인 그의 긴 손가락. 그 손짓이 점점 더 강렬하고 명백해지자 그녀도 여상히 반응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음…….”
결국 그녀는 하던 말을 잊어버리고 쩔쩔맸다. 주장하는 바를 막힘없이 술술 말하던 방금 전과의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클로에는 그에게 ‘손바닥을 야하게 간질이는 방법’에 대해 논문이라도 써 보라고 권해 보고 싶었다. 그의 논문은 학계에 큰 파란을 불러일으키고 베스트셀러가 될 것이 분명했다. 단지 손바닥을 간질일 뿐인데 어떻게 이렇게 가슴이 조이고 발가락이 가만있지를 못하고 꿈틀거리게 만들 수 있는지 놀라울 정도였다. 손바닥이 성감대가 된 기분이었다.
알폰스가 물었다.
“그러니까, 뭡니까?”
“네, 네?”
클로에가 당황해 되물었다. 어쩔 줄 모르고 허공을 떠돌던 그녀의 올리브빛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
“하시던 말씀을 마저 하십시오.”
그녀의 시선 속 알폰스는…… 웃고 있었다. 그의 올라간 입꼬리에는 명백한 장난기가 담겨 있었다.
클로에가 당황해 뺨을 붉히고 얼굴을 푹 숙였다.
“아니, 그러니까…….”
내, 내가 뭐라고 말하려고 했더라. 그녀가 어느덧 자신의 손가락 사이사이를 간질이기 시작하는 알폰스의 손길을 신경 쓰지 않으려고 애쓰며 말했다.
“그러니까, 데번에서의…… 예상 수익이…….”
“갑자기 말씀을 잘 하지 못하시는군요.”
알폰스의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클로에는 그 말에 괜히 발끈했다.
“아, 알폰스가 저한테 장난치고 있잖아요!”
“장난이라고요? 무슨 장난 말입니까.”
그가 손목 안쪽을 간질이며 말했다.
“저는 언제나 진지합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이 사람이 이렇게 말하니까 진담 같다.
클로에는 할 말을 잊었다. 이마 위로 쏟아지는 그의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얼굴이 공연히 뜨끈뜨끈하게 달아올랐다.
그때였다. 알폰스가 물고 있던 반쯤 타들어 가던 시가를 재떨이에 내려놓더니 그대로 책상 위를 건너왔다.
“어맛……! 뭐, 뭐하시는 거예요?”
상대의 돌발 행동에 그녀가 화들짝 놀랐다. 그러나 알폰스는 대답 대신 책상에 걸터앉은 채로 그녀를 안아 올렸다. 그가 클로에를 자신의 무릎 위에 앉히며 속삭였다.
“부인께서는 오늘 상태가 이상하시군요.”
“이, 이상하다니요? 그건 다 알폰스 당신이…….”
“아무래도 확인을 해 보아야겠습니다.”
그의 손길이 가슴에 닿았다. 클로에는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잘못된 판단이었다. 눈을 감아 시각이 차단되자, 나머지 감각들이 오히려 예민해졌다. 시가 향이 섞인 그의 체향이 훅 끼쳐왔다. 평소 이미지와 달리, 그의 체향은 시가 냄새가 섞여 다소 거칠고 남자다운 느낌마저 있어 더욱 가슴이 떨렸다.
콩닥, 콩닥, 심장이 맥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긴 손가락과 손바닥이 두 가슴을 덮어 오자 클로에는 자신의 흥분감을 들킬까 봐 불안해졌다.
떨림을 감추려 애쓰며 클로에가 뒤척거렸다.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옷 위로 양 가슴을 매만지는 부드러운 손길. 둥글리듯 다정하게 애무하던 손길은 곧 또렷한 욕망을 드러내며 엄지손가락으로 유두를 간지럽히기 시작했다. 비록 옷 위로였지만 집요하게 유두를 꼬집고, 비비고, 괴롭히니 클로에도 견딜 방도가 없었다.
“음, 으음…….”
그녀가 끙끙 앓는 소리를 내자, 알폰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역시 이상하십니다. 고작 이 정도로 괴로운 소리를 내시다니.”
“괴, 괴로운 게 아니라…….”
클로에가 항변해 보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알폰스의 손가락 끝에서 코르셋의 리본이 풀려나갔다. 그의 능숙한 손길에 드레스의 상의 부분이 걷어 내려지고, 곧 그녀의 하얀 상반신이 드러났다.
공기 중에 맨살이 닿는 감각은 차가워서 클로에는 조금 소름이 돋았다. 오늘은 그렇게 추운 날씨가 아닌데. 어쩌면 그만큼이나 몸이 달아올라 있기 때문일지도.
이미 몇 번이나 몸을 섞은 사이였지만 맨 가슴을 보여 주는 것은 부끄러웠다. 클로에는 얼굴을 붉히며 두 팔로 몸을 가렸다.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낮고 달콤한 목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단지 그의 숨결이 닿는 것만으로도 아랫배에 전기가 오르는 듯한 기분이 들어, 클로에는 움찔 놀랐다.
“확인하려고 하는 것뿐입니다.”
그녀가 부끄럼을 타는 모습이 오히려 더 귀여웠는지 알폰스의 입가에는 연신 엷은 웃음기가 올라와 있었다. 클로에가 주저하자, 알폰스는 그녀의 두 팔을 한 손에 쥐더니 슬쩍 옆으로 치웠다.
마침내 드러난 그녀의 탐스럽고 새하얀 두 가슴을 알폰스는 마치 맛좋은 과실이라도 되는 양 입에 물었다. 그가 분홍색 선단을 혀끝으로 굴릴 때마다 클로에의 입에서는 단지 입술을 깨무는 것만으로는 참을 수 없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앗, 하읏, 하아……. 으으응…….”
알폰스는 그것을 배경음 삼아 즐기며 입술을 점점 아래로 향했다. 그녀의 가슴, 갈비뼈, 허리, 배꼽을 혀와 입술로 유린하며, 붉은 자국을 점점이 피워 내면서도, 한 손으로는 그녀의 허벅지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가터벨트를 풀어 냈다.
마침내 그의 입술이 그녀의 몸에서 떨어져 나갔을 때가 되어서야 클로에는 한숨을 돌릴 수가 있었다. 하지만 평화는 아주 잠깐이었다. 그의 입술의 종착지가 어디인지 깨달은 순간, 클로에는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알폰스는 클로에를 번쩍 들어 책상에 앉혀 놓고 그녀의 다리를 벌렸다. 그는 축축하게 젖은 속옷을 방해되지 않게 옆으로 젖혀 놓고는 드러난 그녀의 국부를 뚫어지게 보았다. 그것만으로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운데, 더 심각한 문제는, 그가 그곳에 입을 맞추려고 했다는 것이다.
“자, 잠깐! 어, 어디에 입을 대려고 하는 거예요?”
클로에는 거의 목까지 빨갛게 물든 상태였다. 그녀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부끄러운 행위였다. 게다가, 그녀의 민감한 부위는 잔뜩 흘러나온 애액으로 젖어 있었다.
그러나 알폰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했다.
“귀엽지 않습니까. 우는 것이 안타까운데 달래 줘야 합니다.”
“귀…… 귀엽다고요?”
클로에는 기가 막혔다. 세상에 이런 부끄러운 부위를 두고 귀엽다느니 하는 닭살 돋는 말을 하는 남자가 또 있을까?
클로에는 두 손으로 뜨거운 얼굴을 감싸곤 양옆으로 마구 흔들었다.
“그, 그러지 마세요. 부끄러워요……. 게다가 더럽잖아요.”
그런 그녀가 사랑스러운 듯 지켜보던 알폰스가 픽 웃었다. 그는 달래듯이 클로에의 등을 쓸어내렸다.
“부인의 몸에서 더러운 곳은 없습니다.”
“말도 안 돼요.”
칭얼거리는 클로에의 몸을 쓰다듬으며, 알폰스는 조심스레 클로에의 스타킹을 신은 발끝에 입 맞추었다. 심지어는 그것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발가락 하나하나를 입술로 간질이듯 애무하기 시작했다.
그가 입술로 새끼발가락부터 엄지발가락까지 순서대로 조심스레 빨았다. 혀끝으로 발가락 사이를 간지럽히기도 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굉장히 간지러웠다. 하지만 간지러울 뿐만 아니라 뱃속의 작은 불이 조금씩 범위를 넓혀가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만하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발을 입으로 애무하는 것은 더럽다고, 멈추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쉽사리 말이 나오지 않았다. 믿을 수 없게도, 클로에는 알폰스가 멈춰 줬으면 싶으면서도, 또 멈추지 말았으면 싶기도 했다.
“……읏, 으응!”
그의 입술은 발가락을 타고 올라와 그녀의 복사뼈와 발목을 간질이더니, 종아리에 몇 번이나 입 맞추곤 허벅지에 몇 개나 되는 붉은 꽃을 피워 냈다. 허벅지 안쪽은 그녀의 유난히 민감한 곳이라 클로에는 달뜬 숨으로 몇 번이나 몸을 떨었다.
마침내 그의 입술이 다시 그녀의 두 다리 사이로 올라왔을 때, 클로에는 그가 괜히 발과 다리를 애무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그녀의 거부감을 줄여 주기 위해 시간과 공을 들인 것이었다. 실제로, 발과 다리를 입으로 애무받고 나니 국부를 입으로 애무받는다는 거부감도 한결 줄어들어 있었다. 여전히 더러울까 봐 걱정이 되긴 했지만 밀어 낼 정도는 아니었다.
클로에는 불안감과 걱정이 섞인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알폰스는 두 손으로 그녀의 허벅지를 쥔 채 그녀의 다리 사이를 지긋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그의 시선은 다정했지만, 한편으로는 소용돌이치는 정욕이 강렬할 정도로 느껴졌다.
그의 숨결이 민감한 곳에 닿았다. 그의 시선이, 숨결이 부끄러운 곳을 자극했다. 클로에는 그것만으로도 그곳이 더더욱 젖어 드는 것을 느꼈다.
‘어떡하지, 그냥 보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달아올라 버리다니…….’
자신이 너무 천박해 보이지는 않을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하지만 알폰스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오히려 점점 더 뜨거워지는 눈으로 그녀의 그곳을 가까이하더니, 결국…….
“……아아아!”
클로에는 온몸이 조여드는 것을 느꼈다. 전신의 세포 하나하나가 수축하듯, 몸속 작은 폭죽들이 일제히 터져 나가듯, 고통 같은 쾌감이 전신을 엄습했다.
알폰스의 입술이 그녀의 젖은 속살을 헤집었다. 그는 작은 열매 같은 클로에의 음핵을 찾아내어 그것을 혀로 꾹 눌렀다가, 혀끝으로 정성스레 구슬렸다. 단지 그것뿐이었는데, 클로에는 알폰스의 집무실 책상에 거의 쓰러지듯 누워서 몸을 떨었다. 허리가 속절없이 휘어졌다.
알폰스는 거의 무아지경의 상태로 혀와 입술을 놀렸다. 그녀의 음핵을 두 입술로 가볍게 물더니, 부드럽게 문지르거나 입으로 빨아들였다. 마치 장난 같은, 그리 힘이 드는 것도 아닌 작은 행위였지만 클로에는 그것만으로도 미칠 것 같았다.
더 미칠 것 같은 건 또 있었다.
“맛있습니다.”
“네, 네에……?”
할딱이던 클로에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못 들어서 물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모를 그가 아닐 텐데도, 그는 굳이 이렇게 다시 설명했다.
“부인이 맛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제발 저런 부끄러운 말을 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일까? 클로에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거의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아, 제발. 그러지 마세요…….”
모깃소리처럼 쥐어 짜낸 그 목소리에 알폰스가 낮게 웃었다. 다름이 아니라, 그는 정말로 큰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오랜 시간을 들여 그녀를 애무하는 것은 정말로 하나도 힘이 들지 않는 일이었다. 오히려, 자신이 혀나 입술을 조금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그녀가 부들부들 떨고, 얼굴이 붉어지고, 어쩔 줄 몰라 하고, 음란하기 짝이 없는 소리를 내며 우는 것은 그에게 큰 만족감과 성취감을 선사했다.
조금 더, 더 괴롭히고 싶다. 그저 톡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녀의 반응은 그의 안에 있었던 줄도 몰랐던 제일로 저열한 욕망을 수면 위로 떠오르게 했다.
‘정말이지, 이렇게 귀여운 것도 잘못이라면 잘못이지.’
알폰스는 그런 시커먼 본심을 숨기며 그녀의 작은 구슬을 괴롭히는 것을 계속했다. 심지어는, 다디단 액체가 흐르는 그녀의 작은 입구를 혀끝으로 핥더니 혀를 조심스레 안쪽에 밀어 넣기까지 했다.
“아아앙!”
클로에는 몸의 그 어느 곳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따뜻하고 물컹한 혀가 자신의 안쪽에 밀려들어 오는 것이, 내벽을 훑고 자신의 아래를 농락하는 것이 하나하나 외면할 수 없을 정도로 생생하고 강렬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바들바들 떨리는 팔로 책상을 긁다가, 곧 온몸을 관통하는 절정에 경련했다.
“아으…… 하아아……!”
값비싼 책상을 잔뜩 긁어놓던 손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휘어지던 허리가, 곧 축 늘어졌다.
덜 벗겨진 옷과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 몸에 달라붙어 오는 것이 느껴졌다. 다리 사이에서 뜨거운 액체가 울컥울컥 쏟아지고 있었다. 가쁜 숨으로 호흡을 고르던 클로에는 자신의 얼굴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을 깨달았다.
알폰스였다. 그는 엷은 미소 띤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그녀의 얼굴 옆에 손을 짚었다.
그가 클로에의 혈색 도는 뺨을 쓰다듬더니, 입을 맞추었다. 그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말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것이 싫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조금은 기대감마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이런 건 정말 말도 안 돼. 이런 게 나일 리가 없잖아. 역시 이건 다 알폰스 때문이야. 그가 너무…… 능수능란해서…….’
클로에는 괜한 심통을 부렸다.
“정말, 이 짐승……. 덕분에, 오늘 일 얘기는 다 했네요.”
그러나 알폰스는 그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그는 단 한 마디도 져 주지 않고 대답했다.
“그런 건 침실에서 이어서 해도 됩니다.”
침실에서 그런 이야기를 할 겨를이 나기나 할지 모르겠다. 적어도 클로에의 지난 경험을 바탕으로 예상하자면, 그런 건 불가능했다.
그의 입술이 포개져 오는 것을 느끼며 클로에는 눈을 감았다. 그와 맞닿은 살은 따뜻하고 이유 모를 안정감을 가져다주어서, 그런 사소한 것쯤은 상관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 * *
“휴가라고요?”
언제나와 같은 저녁 식사 시간이었다. 알폰스와 마주 보고 식사를 하던 클로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나 상대의 태도는 얄미울 정도로 침착하고 여상했다.
“예.”
그가 고기를 나이프로 썰며 덧붙였다.
“부인께는 휴식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갑자기 왜요? 저는 요즘 운동도 하고 있고, 무리하지 않는걸요.”
그녀의 말은 사실이기도 하고 사실이 아니기도 했다. 그녀는 일이 없으면 찾아서라도 하는 타입인지라 여진이나 록우드 부인과 업무를 나누는데도 불구하고 영 업무량이 줄어들지 않고 있었다.
알폰스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쓰러지신 지 몇 달 되지 않았습니다. 가능한 한 몸을 편히 두시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계속해서 일을 하는 것은 부인의 연약한 몸에 부담이 됩니다.”
자신이 쓰러졌던 일에 대해 꺼내니 클로에는 할 말이 없어졌다. 그 일은 몸 관리를 제대로 못 하고 자신을 혹사한 그녀의 잘못이 맞았으니까.
우물쭈물하던 그녀가 화제를 돌렸다.
“……하지만, 지금은 여름도 아니고 가을인걸요. 휴가를 가기에 좋은 계절이 아니에요.”
그런 말을 할 줄 알았다는 듯이 알폰스가 막힘없이 말했다.
“가을 여행지로 좋은 곳을 알고 있습니다. 가문 소유의 별장 중 하나가 있는 곳입니다.”
새삼스럽게도 그가 이전의 클로에에게 단 한 번도 휴가 제안을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사실 그는 이전의 클로에에게 별장이 있다는 이야기도 한 적이 없었고 그래서 그녀는 공작가가 별장을 가지고 있는 줄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클로에 그녀라고 여행이나 휴가가 싫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일거리가 적지 않았고, 그녀가 떠나는 동안은 업무를 죄다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야 하는데 그것이 너무 미안했다.
그녀가 그 문제로 고민하고 있으니 다른 사람들이 가만있지 않았다.
“걱정 마시고 다녀오세요, 마님!”
“맞아요. 재미있게 즐기시고 오세요!”
그녀의 하녀들도 응원했다.
“다녀오세요, 마님. 각하와 즐겁고 오붓한 시간을 보내세요.”
그녀가 휴가를 떠나면 그녀의 업무 중 일부를 넘겨받아야 하는 키엘조차 이렇게 말했다.
클로에는 여진에게 ‘이러저러한 일로 곤란을 겪고 있는데,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말릴 수 있겠느냐’라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그랬더니 돌아온 여진의 답장은 이러했다.
―잘 다녀오세요, 공작부인. 사업은 걱정하지 마시고요.
여진 너마저도!
답장을 받은 클로에는 잔뜩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 * *
여진 역시 자신의 고용주가 몸이 약하다는 사실과 이미 한 번 과로로 쓰러진 적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자신이 고용되었다는 사실도.
만일 자신이 고용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클로에의 건강이 조금이나마 손상되었다간, 이 만족스러운 직장을 잃는 것은 물론이고, 그녀가 여태껏 보고 들었던 공작의 행태에 의거하면 자신의 신상까지 위태로울지도 모른다. 여진은 지극히 현실적이었고 따라서 며칠간의 업무 가중과 신상에의 위협 중에서는 당연히 전자를 고를 만한 인물이었다.
어찌 됐건 여진마저 응원하고 나서니 클로에는 더 이상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그녀는 간만의 휴가를 떠나기로 했다. 알폰스와 함께.
클로에는 제일 먼저 휴가 동안의 일거리를 인수인계했다. 저택 내의 내사는 키엘과 록우드 부인이 분담하기로 했고, 사업과 관련된 일은 여진에게 일임했다.
다음으로는 휴가를 위한 채비를 하려고 했지만 알폰스가 막았다. 휴가와 관련된 일은 자기가 다 알아서 할 테니 그녀는 조금도 신경 쓰지 말라는 것이었다. 정말로 클로에를 푹 쉬게 만들고 싶은 것 같았다.
필요한 준비가 전부 끝난 뒤, 그들은 휴가지를 향해 출발했다.
다행스럽게도 알폰스가 말한 ‘가을 여행지로 좋은 곳’은 그리 멀지 않았다. 말과 마차 외에는 별다른 교통수단이 없는 제국에서 다른 지역으로 가려면 몇 주는 걸린다는 말을 듣고 걱정하던 클로에에게는 다행인 일이었다.
약 이틀을 내리 달려 도착한, 공작가 소유의 별장 중 하나라는 그곳은…….
“어머나!”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클로에가 탄성을 질렀다. 그녀의 둥그렇게 뜬 눈에 별장의 정경이 비쳤다.
별장은 대단히 크고 번듯했다. 주인 부부가 온다는 소식에 겉과 안을 전부 보수하고 정돈해 놓아서 더 근사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수도의 공작저만큼은 아니었다. 별장은 별장이니까. 그녀가 감탄한 것은 별장 때문이 아니었다.
별장의 정원은 물론 별장 밖까지, 거대한 장미의 군락이 지평선을 수놓고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붉은 가을 장미 꽃밭과 그 내음에 가슴이 절로 두근거렸다. 클로에는 이런 풍경을 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장미처럼 상기된 뺨으로 알폰스를 돌아보았다. 그가 클로에의 어깨를 감싸며 설명했다.
“장미로 유명한 곳입니다. 특히 가을의 풍경이 훌륭합니다.”
“정말 그래요. 너무 예뻐요.”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인데도, 알폰스는 그다지 마음으로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장미 군락보다 눈앞의 이 여자가 기뻐하며 웃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가 사랑스럽다는 듯이 웃으면서 검지로 그녀의 뺨을 쓸었다.
그들이 정문을 향해 걸었다. 그곳에는 별장 담당의 하인과 하녀들이 주인 부부를 맞이하기 위해 질서 정연하게 도열해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주인님, 그리고 주인마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시종장이 그렇게 말하며 고개 숙이자 그의 뒤로 사용인들이 따라 인사했다. 알폰스가 고개를 들어도 된다는 의미를 담아 말했다.
“오랜만이군, 윌킨스.”
결혼 뒤 그가 별장에 온 것은 처음이니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난 셈이다.
시종장 윌킨스로서는 알폰스 주인님은 어린 시절부터 몇 번이나 보아 왔지만 주인마님은 처음이었다.
알폰스가 결혼을 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그 결혼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는 잘 알지 못했다. 그가 아는 것이라곤 그레이 백작가의 외동딸이라는 것이나 그녀가 어떤 음식과 가구를 좋아하는지 정도의 기본적인 것뿐이었다.
물론 이곳까지 알폰스와 그의 아내의 사이가 좋지 않다거나, 공작부인의 성격에 결함이 있다든가 하는 소문이 흘러들어 오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윌킨스는 그런 소문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에게는 자신의 눈과 귀로 보고 들은 것이 제일 믿을 만했다.
그가 말했다.
“짐을 옮겨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주인마님, 처음 뵙겠습니다. 이곳의 별장을 담당하고 있는 윌킨스입니다. 먼저 휴식을 취하며 여독을 푸시겠습니까? 아니면 별장의 안내를 받으시겠습니까?”
클로에는 조금 피곤하긴 했지만 새로운 곳에 대한 호기심이 더 앞섰다. 그녀가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별장의 안내를 부탁해요, 윌킨스.”
“알겠습니다. 자, 그럼 이쪽으로…….”
그때였다. 윌킨스로서는 전혀 뜻밖의 인물이 나섰다.
“나도 함께 가지.”
“예?”
알폰스였다. 윌킨스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아는 주인님은 이 별장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며 굳이 안내를 다시 받을 필요가 없고 시간 낭비를 싫어한다. 그런 그가 굳이 별장 안내를 다시 받겠다고 나서다니?
윌킨스는 주인님의 의도를 알아내려 애썼지만 노련한 그도 차마 ‘주인마님 때문에’라는 해답은 찾아내지 못했다.
어쨌든, 안 될 건 없었다. 윌킨스가 말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럼 두 분, 이쪽으로…….”
하인들이 분주하게 짐을 나르는 가운데, 그들은 느긋하게 별장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윌킨스의 안내를 받으며 클로에는 별장 내의 지리를 익히기 위해 노력했다. 별장은 아늑했고 그녀는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특히나 그녀의 마음을 끄는 곳이 있었다.
“발코니입니다. 전망이 너무나 아름답지요.”
3층 발코니였다. 부드러운 가을 햇살이 비쳐 들어오고 산들바람이 불었다. 이곳의 공기는 정말 맑아서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폐가 깨끗해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남쪽을 향해 조금만 내려가면 작은 마을이 있고, 무엇보다 장미가 만발한 들판이 한눈에 보였다. 동쪽에는 물새가 물장구치는 호수가 있다.
클로에가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정말 아름답네요.”
알폰스는 그녀의 시선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 것을 눈치챘다.
“이곳에서 잠시 쉬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그가 제안했다. 클로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윌킨스가 대신 대답했다. 알폰스와 클로에는 함께 발코니의 테이블에 앉아 잠시 쉬기로 했다.
클로에는 쉬는 김에 차를 한 잔 마시고 싶었다. 저런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며 차를 마시면 그 맛이 각별할 것 같았다.
그녀는 윌킨스에게 마차에 실어 온 차통과 티 세트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녀가 가져온 차 관련 물품들은 옷보다도 많을 정도였다.
별장의 3층 발코니에서 두 사람만의 작은 티파티가 열렸다. 클로에는 능숙하게 홍차를 우렸고 알폰스가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차를 우리는 과정에서 폴폴 피어오르는 향기와 먼 곳에서 바람에 실려 오는 장미 향이 뒤섞였다.
“휴가지에서의 첫 번째 티타임이네요.”
정성스럽게 우린 차를 알폰스의 찻잔에 따라 주며 클로에가 말했다. 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흰 찻잔 안에 주홍빛의 액체가 넘실거리며 차올랐다.
그가 찻잔을 들어 올렸고, 클로에 역시 자신의 찻잔을 들어 입에 대었다.
‘……?’
찻물이 혀 위에 닿는 그 순간이었다. 클로에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이 홍차는 그녀가 직접 블렌딩한 것이었다. 온의 홍차인 운남, 싱할라, 그리고 바라트의 아쌈을 섞어 만든 무가향 홍차로, 부드럽지만 혀 위에서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달콤한 몰트 향이 매력적인 차다.
아침 점심 저녁 밤 언제 마셔도 무난하게 어울리고 밀크티로 만들어도 맛있어서, 데일리 티로 아주 좋았다. 그녀가 여행지에서 마실 홍차로 이것을 가져온 건 그래서였다.
아직 트리플 스위트에서 발매하지는 않았지만 그녀 나름의 자신작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어쨌든 그러다 보니 이 차의 맛을 세상에서 제일 잘 아는 사람은 클로에 그녀였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맛이 있긴 한데…… 평소 마시던 것과 뭔가 다르다.
찻잔을 입술에서 떼고 클로에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라, 왜 차 맛이 달라졌지?”
그녀의 혼잣말에 알폰스가 반응했다.
“차 맛이 달라졌습니까?”
“네.”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곰곰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보관은 잘 했으니 찻잎이 변질되었을 리는 없는데. 우리는 방식의 문제도 아니고…….’
공작저에서 우려 마실 때와 이곳에서 우렸을 때의 차이가 뭘까? 일단 찻잎의 문제는 아니다. 알폰스 그가 제작해 준 티 캐디에 잘 담아서 애지중지하며 각별히 조심해 가져왔으니까.
‘도구의 문제도 아니고, 우리는 방식의 문제도 아니고…….’
티세트 역시 저택에서 쓰던 그대로였다. 우리는 사람과 방식이 동일한 건 당연지사였다. 그렇다면 달라진 것은 오직…….
‘물이구나.’
클로에의 머릿속에 끊어졌던 회로가 연결되듯 불이 켜졌다.
공작저가 있는 수도와 이 마을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물의 수원지도, 성분도 다를 것이다.
‘처음 제국에 왔을 때도 느꼈지만 물은 정말 중요하구나.’
물은 차 맛에서 아주 중요한 요소다. 차의 성분의 대부분을 물이 차지하니까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물은 지역별로 달라. 같은 차를 우려도 수도에서 우린 차와 먼 지방에서 우린 차는 맛이 다른 거야.’
그랬다. 실제로 그녀의 전생에서, 영국처럼 차를 즐겨 마시는 국가에서는 ‘잉글리시 브랙퍼스트’, ‘스코티시 브랙퍼스트’ 등의 지역별 블렌딩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은 해당 지역의 수질과 입맛을 고려한 것이다.
‘수도뿐만 아니라 다양한 지역에서 차를 판매하려면 해당 지역의 수질을 고려할 필요가 있겠어.’
클로에는 새삼스러운 깨달음을 얻었다.
한편 깊은 생각에 빠진 그녀를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알폰스였다.
‘사업 생각을 하고 있군.’
척하면 딱이었다. 그는 이제 눈빛만 봐도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대충은 알 수 있었다.
사업 생각을 못 하게 하려고 여기까지 데려온 건데 이래서야. 그렇게 생각한 알폰스가 그녀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말을 걸었다.
“그래서 차 맛이 나빠졌습니까?”
찻잔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던 클로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보았다. 그녀의 깊은 올리브빛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는 것을 본 알폰스는 묘한 만족감을 느꼈다.
“아…… 아니요.”
클로에가 대답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단지 수도에서 마시던 차와 달라졌다고 느꼈을 뿐 그게 맛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이 맛이 싫은 건 아니에요. 게다가 무엇보다, 풍경이 너무 예뻐서…….”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먼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산들거리는 바람이 싱그러운 장미 향을 싣고 왔다. 그녀의 길고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이 장미 향을 실은 바람과 뒤섞여 하늘거렸다.
“예쁜 풍경과 함께하는 차 맛은 각별하네요.”
예쁜 풍경과 즐거운 휴가에의 기대에 그녀의 마음은 가득 설레고 있었다. 이렇게 행복한 기분으로 마시는 차가 맛이 있지 않을 리가.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지켜보던 알폰스가 은은하게 웃었다.
“그렇군요.”
* * *
발코니에서의 짧은 티타임을 끝낸 뒤에도 별장 안내는 계속되었다.
알폰스와 클로에의 입장에서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한편, 그들을 안내하는 윌킨스의 입장에서는 기함할 일의 연속이었다.
윌킨스는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알폰스는…… 시종일관 클로에의 곁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안내 내내 그의 팔은 클로에의 허리나 등을 감고 있었다. 단 몇 분이라도 그녀와 떨어진다면 도둑맞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 같았다.
거기까지는 그럴 수 있다 치자. 무엇보다 윌킨스를 놀라게 한 건 이것이었다.
‘주인님이…… 웃고 계시다니?’
윌킨스는 도저히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은은하고 옅은 미소이긴 하지만 알폰스는 분명 웃고 있었다.
그것이 억지웃음이 아니라는 것을 늙은 시종장은 알 수 있었다.
알폰스 바텐베르크, 그가 다른 사람을 향해 진심으로 웃어 준다. 별장을 담당하는 시종장인지라 그를 자주 본 건 아니지만, 윌킨스는 알폰스가 열 살이 넘을 무렵부터 그가 웃는 것을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대체 저분은……?’
윌킨스는 이런 놀라운 일을 가능케 한 당사자를 새삼스러운 눈으로 보았다. 클로에 바텐베르크, 바로 그의 주인마님이다.
물론 윌킨스가 보기에도 클로에는 상당한 미인이었다. 예의와 품위가 있고, 웃는 얼굴이 아주 선하고 순수해 보여 괜히 호감이 가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주인님이 저렇게까지……?’
그렇다곤 해도 엄청나게 인상적이고 놀라울 정도는 아니었다. 냉정히 말해 제국에서 저 정도의 미인, 저 정도로 예의 있는 사람은 숱하게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알폰스는 너무나 뚜렷할 정도의 애정을 그녀에게 드러내고 있다. 왜, 어떻게, 하필 저 사람일까. 시종장으로서는 불필요한 호기심이 들었다.
윌킨스는 알폰스가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진심을 다해 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런, 자신의 생전에는 결코 일어날 수 없을 줄 알았던 일이 벌어지다니.
‘어쩌면…….’
어쩌면, 그녀는 윌킨스가 느끼는 이상으로 대단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얼핏 보면 평범해 보이는 겉모습 아래로 아직은 드러나지 않은 굉장한 매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윌킨스는 이 새로운 주인마님께 경외와 깊은 인상을 느꼈다. 그가 클로에를 바라보는 눈빛에 점차 진심 어린 존경의 빛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별장의 안내가 끝난 뒤 클로에는 다른 일을 하지 않고 침실에서 푹 쉬기로 했다. 티를 내지 않았지만 그녀도 이틀간을 내리 마차에 갇혀 있었으니 여독이 쌓여 있었다.
만일 춤 연습으로 기본 체력을 쌓아 놓지 않았더라면 별장에 도착하자마자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을 것이다.
미리 조사해 둔 주인 부부의 입맛에 맞춘 정성스러운 만찬으로 저녁 식사를 했다. 하녀들의 시중을 받아 목욕을 한 뒤 클로에는 일찌감치 침대에 누웠다. 피곤하니 일찍 잠자리에 들 생각이었다.
그런데 누운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난데없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이 시간에 그녀를 찾아올 사람이라면 단 한 명뿐이었지만…….
“어머, 알폰스!”
정말로 그였다. 그녀가 깜짝 놀라 상대의 이름을 불렀다.
놀랄 만도 했다. 그녀가 그의 집무실을 찾아가는 일은 있어도 그가 그녀의 침실에 찾아오는 일은 드물었던 것이다. 하다못해 오늘은 함께 밤을 보내는 날도 아니었다. (그 계약은 이미 유명무실해지기는 했지만.)
잠옷 차림인 클로에와 대조적으로 그는 와이셔츠와 바지를 잘 차려입고 있었다.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클로에가 얼떨결에 말했다.
“밤중에는 웬일로 이렇게 갑자기…….”
“제가 찾아오는 것이 불편합니까?”
그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클로에가 눈을 깜빡였다. 물론 그건 아니었다. 오히려 어느 쪽이냐면 반가운 편이었다. 거의 하루 종일 그와 붙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래서 그녀가 조심스레 대답했다.
“그건 아니에요.”
“그렇다면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단지 ‘싫지 않다’라고 말했을 뿐인데 알폰스는 꼭 들어와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것처럼 그녀의 침실로 들어왔다.
그를 방에 들여놓고 나니 클로에는 괜히 머쓱해졌다. 아무 이유 없이 그가 신경이 쓰였다.
일단 지금 그녀는 잠옷 차림이었고, 화장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물론 화장을 하지 않아도 클로에는 미인이었으나 맨얼굴로 그를 마주한 일이 거의 없어서 그런지 괜히 부끄러웠다.
‘남편인데 뭘, 신경 쓰지 말자.’
그렇게 생각하기로 한 그녀가 알폰스를 데려다가 침대에 앉혔다. 두 사람이 침대에 나란히 앉았다.
“어쩐 일로 찾아오셨어요?”
방이 어두워서 다행이었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클로에가 보지 못했으니까.
미간에 미미한 주름을 만들던 그가 결국 말했다.
“보고 싶어서 왔다고 하면 이상합니까?”
클로에는 기함했다.
“네에에?”
보고 싶었다고? 그에게 그 이상으로 어울리지 않는 말이 있을까?
아니, 애당초 거의 하루 내내 붙어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마지막으로 얼굴 본 지 몇 시간이나 지났다고 또 보고 싶다니?
어느 면으로 보나 사리에 맞지 않는 말이었다. 평소 늘 이성적인 그가 한 말이라고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귀에도 들릴 만큼 심장이 쿵쾅거렸다. 아마 너무 놀라서 그럴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클로에가 큼큼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그…… 그러셨군요.”
“…….”
“제가…… 보고 싶으셔서, 보러 오셨다고요.”
“예.”
클로에는 괜히 낯이 뜨거워져서 고개를 숙였다. 보고 싶어서 왔다는데, 그렇다면 조금만 같이 있어 줘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고 모로 누웠다. 잠깐의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요리조리 시선을 피하던 클로에가 결국 어색함을 깨기 위해 말을 걸었다.
사적인 대화를 조금 했다. 그러고 있자니 시선을 맞추는 것도 서서히 부끄럽지 않아졌다. 촛불 몇 개가 광원의 전부인 어두운 방, 클로에는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알폰스의 잘생긴 얼굴을 감상하는 것도 나름 나쁘지 않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한편 알폰스의 입장은 그렇게 여유롭지 않았다.
흰 베개 위로 흐트러진 그녀의 갈색 머리카락이, 수줍은 웃음이 아름답다. 단지 시간을 때우기 위해 의미 없이 주고받는 대화가 좋고 가슴이 뛰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헛웃음이 났다. 이것이 자신이라고 믿을 수가 없다. 만일 과거의 자신에게 미래에 자신이 밤중에 어떤 여자의 침실에 찾아들어 가 나누는 대화에 두근거린다는 말을 하면 죽어도 믿지 못했을 것이었다.
‘평생 이렇게나 갖고 싶었던 것이 있었던가.’
알폰스, 그는 물욕이 없는 남자다. 애초에 그는 욕망이라는 것을, 욕심이라는 것을 배우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무언가를 이렇게나 탐을 내게 되다니.
그녀가 가지고 싶다. 그녀의 모든 것을, 몸도 마음도 영혼도 송두리째 손에 넣고 싶다. 자신이 이렇게나 욕심 많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욕망하는 짐승이라는 사실을 그는 그녀를 만나고서야 처음 알았다.
그녀의 마음을 가질 수만 있다면 아무것도 필요 없었다. 공작 위도 영지도 성도, 그는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그녀를 위해 내줄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가 강렬한 눈빛으로 눈앞의 클로에를 훑어 내렸다. 동그란 이마와 가냘픈 턱선, 가는 목과 둥근 어깨. 실크로 지어진 잠옷 아래로 드러나는 아름다운 곡선. 그는 참을 수가 없어졌다.
한편 그런 알폰스를 마주하고 있던 클로에는 그의 눈빛이 변하는 것을 보았다. 이미 그의 그런 눈빛을 몇 번이나 보아왔던 그녀는 그게 무엇을 뜻하는 건지 알았다. 그가 그녀를 원하고 있었다.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그가 다가와서 입술을 포갠다. 입술 사이를 조심스레 침범하고 들어온 혀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거칠게 움직였다. 그녀의 입 안 여린 살을 훑고 혀를 얽어 온다. 그녀의 구석구석을 전부 맛보겠다는 듯이 뜨겁게 혀를 놀린다.
“으응…….”
결국 클로에가 참지 못하고 끙끙거렸다. 길고 거친 키스 끝에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늘어지는 은실을 그가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핥아 올렸다.
클로에가 몽롱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어느샌가 몸을 일으켜 양팔 사이에 그녀를 가두고 있었다. 정욕에 얼룩진 그 붉은 눈동자에 클로에는 곧이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직감했다.
“아, 안 돼요!”
돌연 그녀의 손이 척 하고 올라가 그의 얼굴을 가로막았다.
한껏 흥분해 있는 상태에서도 알폰스는 상대의 반응에 의아함을 느꼈다. 여태까지 관계를 가져오면서 그녀가 이런 식으로 반응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늘은 정말로 안 돼요. 너무 피곤해요. 이틀이나 내리 마차를 타고 달려왔는걸요.”
“부인…….”
알폰스가 짐승이 으르렁거리듯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 하지만 클로에는 단호했다.
“제 건강 때문에 온 휴가인데 건강을 해쳐서 돌아갈 수는 없잖아요. 오늘은 알폰스가 원하는 대로 해 드릴 수 없어요.”
건강 얘기까지 운운하니 설득을 하기에도 곤란했다.
알폰스가 클로에의 눈을 빤히 보았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만큼 강렬한, 어둠 속에서도 형형히 빛나는 것만 같은 그런 눈빛이었지만 클로에는 조금도 굽히지 않고 그 눈을 빤히 보았다.
알폰스로서는 곤혹스러울 일이었다. 당장 이 여자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 여자의 안에 들어가고 싶어 허리가 녹을 지경이었으니까.
게다가 그는 여성에게 성적 요구를 했을 때 거부당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런 일은 난생처음 겪는 일이다.
그렇다고 싫다는 사람에게 강요를 할 생각 같은 것은 추호도 없었다. 그는 욕망을 이겨 내기 위해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고 이를 악물었다. 속이 타들어 가는, 전신을 불사르는 것 같은 강렬한 충동이 그의 몸과 마음을 거세게 때렸다. 이 여자를 사랑한다. 그녀를 지금 당장 가지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다.
하지만 그 혼자만이 원해서는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없었다. 두 사람 모두가 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속 타는 열망에 저항하듯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그리고는 그녀의 몸 위에서 내려왔다.
알폰스가 다시 자신의 곁에 눕자 클로에는 그제야 얼굴을 피고 웃었다.
“잘 자요.”
그녀가 기쁜 듯한 얼굴로 속삭였다.
알폰스는 덤덤한 얼굴을 한 채 그런 클로에의 뺨을 쓸었다. 놀랍게도, 그녀는 정말로 그대로 잤다. 그의 팔뚝 하나를 베개 삼아서.
많이 피곤하다는 게 사실이었는지 순식간에 잠들어 버린 그녀의 옆얼굴을 보며 알폰스는 생각했다. 친부에게서 가히 초인적이기까지 한 인내심을 배워서 다행이라고. 그렇지 않았으면 위험했을지도 모른다.
알폰스는 그날 밤 거의 잠들지 못했다.
* * *
두 사람은 거의 비슷한 시간에 일어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알폰스는 거의 한순간도 잠을 자지 못했으니 그가 클로에의 기상 시간에 맞춰 주었다고 표현하는 게 맞았다.
아침 식사는 두 사람 모두 간단하게 침대에서 하기로 의견을 맞췄다. 클로에가 하녀를 불러 조식을 내오게 했다. 오래지 않아 과일 콩포트와 버터와 브리오슈, 수프 등으로 구성된 아침 식사가 나왔다.
두 사람은 침대에 앉아서 함께 식사를 하며 한담을 나누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부인.”
“뭔가요?”
“계약 말입니다.”
마침 수프를 한 스푼 떠서 입에 넣고 있던 클로에는 사레가 들릴 뻔했다. 그녀가 뺨을 붉힌 채 남편을 돌아보았다.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 계약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겠지? 지금 여기서?
클로에가 방 한편에서 대기하고 있는 하녀들을 흘끗 보았다.
그러나 불길한 예감은 늘 맞는 법이다.
“저는 더 이상의 계약 위반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계약을 정식으로 수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알폰스의 태도는 너무나 뻔뻔하고 당당했다. 그 ‘계약 위반 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선택지는 그의 머릿속에 없는 것 같았다.
클로에는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럼……. 그 이야기는 좀 나중에 할까요?”
“이미 관련된 논의를 몇 번이나 미루지 않았습니까. 제 생각에 친밀한 부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한 달에 한 번은 턱없이 부족하다고 봅니다.”
클로에의 어깨가 눈에 띄게 움찔 떨렸다. 이 사람이 진짜! 하녀들이 저기 있는데 정말 못 하는 말이 없어!
그녀가 귀까지 달아오른 얼굴로 알폰스를 홱 돌아보았다. 나름대로 항의의 뜻을 담은 것이었으나 그는 알아채지 못했다. 아니면 알아채지 못한 척하는 거거나.
그가 나이프로 빵을 자르며 유려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적절한 빈도를 생각해 보았습니다만…….”
이건 더 이상 안 되겠다. 클로에는 하녀들에게 나가서 대기하라는 뜻의 손짓을 했다. 하녀들이 우르르 방문을 통해 나가고 문이 닫힌 뒤에야 그녀가 안심을 했다.
그제야 클로에는 알폰스의 말을 듣는 척이라도 해 볼 수가 있었다.
그녀가 흠흠 헛기침을 하고는 그를 돌아보았다. 오랜 경력의 전 회사원이자 현 사업가답게 표정은 제법 평정을 가장할 수 있었지만 귀가 빨간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그럼…… 두 주에 한 번 정도요?”
알폰스가 고개를 저었다.
“너무 적습니다.”
“그럼 한 주에 한 번?”
“여전히 부족합니다.”
클로에의 뺨이 또 붉어졌다.
이 사람이 정말! 대체 얼마나 자주 하려고 이러는 거야.
부끄러움에 눈을 마주칠 수가 없는데도, 그의 시선이 자신에게 와 닿는 것만은 너무나 또렷하게 느껴졌다. 그녀가 대체 뭐라고 이렇게까지 열심히 바라보는 건지 클로에로선 알 수 없었다. 그녀가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하시게요?”
식사를 마치고 주머니를 뒤져 담뱃갑을 꺼내던 그가 미미하게 웃었다. 클로에는 볼 수 없는 얼굴이었지만, 그 웃음엔 그와 어울리지 않는 미묘한 장난기마저 있는 듯했다.
“해당 항목을 완전히 삭제합시다. 부부간 잠자리 같은 사적인 일을 계약으로 제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계약 당시 그 옳지 않은 항목을 먼저 제안한 사람이 누구냐면 바로 그였다. 클로에의 기억을 모두 넘겨받은 그녀 역시 그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가 부끄러움마저 잊고 어처구니없다는 눈빛으로 알폰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는 변함없이 뻔뻔한 얼굴로 담뱃갑에서 시가를 꺼내 주머니칼로 끝을 자르는 중이었다.
게다가 잠자리 횟수 제한 항목을 삭제하자는 이야기는…… 그거 아닌가. 제한 없이 잠자리를 갖자는 것. 일주일에 세 번, 네 번, 아니 매일 잠자리를 가져도 상관이 없다는 뜻이었다.
‘설마 정말로 매일 하진 않겠지만 (클로에는 알폰스의 정력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이 사람, 보기보다 엉큼하잖아?’
저렇게나 번듯하고 점잖은 얼굴을 하고서 속은 아주 새까맣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제안을 거부할 생각도 들지 않는다는 것. 왠지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에 열이 올랐지만 그건 분명히 불쾌감은 아니었다.
‘내가 미쳤나 봐.’
그녀가 달아오르는 얼굴을 푹 숙였다. 이래서야 진짜 엉큼한 쪽이 누구인지 모르겠다.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거부할 생각도 없는 그녀의 속마음을 눈치챘는지 알폰스가 픽 웃었다. 그가 시가를 들지 않은 손으로 클로에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 손끝이 달아오른 뺨 위를 언뜻언뜻 스치는 게 왠지 모르게 더 부끄럽게 느껴져서 클로에가 심술을 부렸다.
“알폰스.”
“예.”
“침실에서 담배는 금지예요. 흡연은 나가서 하세요.”
그녀가 고개를 팩 돌려 버리며 말했다. 귓가에서 들리는 웃음소리가 낮게 울렸다.
식사를 마친 뒤 하녀를 불러 식기를 치우게 했다. 몇 명이 식기를 치우는 중에, 그중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하녀가 공작 부부에게 말을 걸어왔다.
“주인님, 혹시 오늘 정해진 일정이 있으십니까?”
알폰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달리 없다.”
“시종장이 주인님과 마님께 오늘 마을에서 축제가 있다고 일러드리라고 하였습니다.”
“축제라고? 아, 이 계절이라면…… 추수 감사 축제를 말하는 것이겠군.”
“그렇습니다.”
하녀가 공손하게 말했다. 클로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알폰스를 돌아보았다. 이곳에 몇 번 와 본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그는 오늘 있다는 축제에 대해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클로에에게 설명했다.
“이 지역에서는 매해 가을마다 그해의 수확에 대한 감사의 뜻을 담아 추수 감사 축제를 엽니다. 축제는 오후부터 밤까지 이어지는데, 이 작고 수수한 마을이 활기를 띠는 날이기도 합니다.”
클로에의 눈이 반짝였다.
축제, 그것도 휴가지에서의 축제라니! 이런 우연이 또 있을까?
그녀가 반가운 듯 말했다.
“정말 재미있겠네요! 꼭 가고 싶어요.”
그런 그녀가 귀여워 보여서 알폰스가 눈에 희미한 웃음을 걸쳤다.
“부인이 좋으시다면, 저도 좋습니다.”
두 사람은 축제를 즐길 채비를 했다. 다과회나 무도회가 아니라 축제에 참석하는 것이니 지나치게 화려하거나 불편한 복장은 좋지 않았다. 또, 둘만의 즐거운 추억을 위해서 하녀는 동행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하녀는 물릴 수 있다 해도 호위까지 물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알폰스의 검술 실력도 뛰어나긴 했지만, 공작 부부의 외출이니만큼 호위는 필요했다.
두 사람 모두 방해받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기사들은 멀찍이 떨어져서 모습을 숨긴 채 그들을 호위하기로 했다.
마을은 별장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평소에는 한적하고 조용한 시골이라지만, 가을에는 만개한 장미 군락과 축제를 즐기기 위해 관광객이 많이 찾아온다고 했다. 축제는 관광객들과 주민들로 어우러져 무척 활기가 넘쳤다.
특히 마을 중앙의 길을 따라 늘어서 있는 각종 노점은 그것만으로도 장관이었다. 흥미로운 눈으로 노점들을 지켜보던 클로에가 좋은 생각이 난 듯이 말했다.
“이곳에서 과일 아이스티와 밀크티를 팔면 잘 팔릴 것 같네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물론 진지하게 가판을 차리겠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사업가로서의 직업병이 발동한 탓에 한 번 지나가듯 해 본 말일 뿐이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알폰스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그럴 만도 했다. 그녀가 그놈의 사업에 워낙에 열심인지라 건강을 해칠까 봐 (사실은 그녀의 주의를 사업에 다 빼앗기는 것 같아서) 여기까지 데리고 나온 것인데 여기서마저 사업 생각을 하게 놔둔다면 데려온 보람이 없었다.
그가 조금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안 됩니다. 부인은 이곳에서 다른 건 생각지 말고 휴식을 취하셔야 합니다.”
클로에가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알아요. 그냥 해 본 소리란 말이에요.”
그러면서 토라진 듯 고개를 돌리는데, 그 모습조차 한없이 귀여워 보이는 자신을 자각한 알폰스는 자신이 어지간히 중증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천하의 바텐베르크 공작이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심란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쨌든 클로에는 축제 구경하는 것을 즐겼다. 그녀는 호기심이 많은 편이었고, 예쁜 것이나 맛있는 것을 좋아했으므로 축제 구경만큼 즐거운 일이 또 없었다.
소소하게 무언가를 사서 알폰스와 나눠 먹기도 하고, 신기한 수공예품을 두고 잡담도 하면서 재미난 시간을 보냈다.
“이건 뭘까요, 알폰스?”
클로에가 어느 가판대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곳에는 병과 일회용 토기 잔, 원료인 듯한 우유 통을 쌓아 두고 있었다.
알폰스가 대답했다.
“과일 우유라는 것입니다. 이 지역의 전통 음료인데 우유에 과일 콩포트를 넣어서 만듭니다.”
“그렇군요. 한 번 마셔 보고 싶어요.”
클로에가 과일 우유 하나를 샀다. 그것은 이름 모를 열대 과일이 들어간 것이었는데, 우유의 부드러움과 과일의 새콤달콤한 맛이 조화를 이루어서 무척 맛있었다.
그녀는 알폰스에게도 과일 우유를 권했지만 그는 정중히 사양했다. 단 것을 워낙 싫어하는 사람이니 그럴 만도 했다.
과일 우유를 마시던 클로에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밀크티에 과일 콩포트를 넣어도 무척 맛있을 것 같아요. 그렇지 않나요? 달콤하고 친숙한 맛이 나니까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을 것 같네요.”
뭘 보아도 결국 대화가 사업으로 이어진다. 극심한 직업병이었다. 알폰스는 이제 슬슬 해탈할 지경이었다.
한편 클로에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이 있었다.
‘진 가게가 많네.’
일전에 아서가 말해 주었던 그것이었다. 제국 내의 골칫거리 중 하나가 되고 있다는 진을 파는 가게들.
눈에 띄는 간판과 홍보지로 도배해 놓아 못 알아보려야 못 알아볼 수가 없는 그 가게들은 정말 그 수가 많았다. 알폰스가 말했듯이 열 집 중 하나까지는 아니었으나 거리의 어딜 봐도 진 가게가 꼭 하나쯤은 보일 정도였다.
‘이런 시골에서도 진이 아주 인기구나.’
물론 적당히 마신다면 술은 좋은 기호식품이다. 하지만 그 ‘적당히’가 지켜지지 않을 때 문제가 생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있다. 아서의 말을 들을 때보다, 실제로 자신의 눈으로 무수한 진 가게들을 목격하는 것이 좀 더 피부 위로 와 닿는 감이 있었다.
클로에가 고개를 내저었다. 어찌 됐든 오늘은 즐길 필요가 있었다. 그러라고 알폰스가 자신을 이곳까지 데려온 게 아니던가.
때마침 그녀의 관심을 끄는 것이 보였다.
“어머, 이거 좀 봐요!”
그것은 수공예품을 파는 가판대였다. 수공예품이래도 다른 것이라면 그녀가 이렇게까지 관심을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곳에서 취급하는 물건은 도자기였다.
은은하고 맑은 흰색으로 빛나는 그것들은 손수 그린 지역 특유의 무늬로 포인트가 잡혀 있었다. 깔끔하고 단정하지만 지역의 개성이 묻어나는 것이, 도자기를 좋아하는 클로에의 눈에 걸리지 않을 리가 없었다.
당연히 찻주전자나 찻잔 같은 것은 없었다. 그래도 접시나 슈가볼, 밀크저그 같은 것이 있었다. 전부 차를 마실 때도 흔히 쓸 수 있는 물건들이다.
아기자기하고 매력적인 도자기를 보는 클로에의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어찌나 좋은지 뺨까지 상기되었다.
그녀가 허리를 굽히고 도자기들을 들여다보는 모습을 지켜보던 알폰스가 물었다.
“마음에 드십니까?”
어쩐지 과거의 일이 떠올랐다. 아직 그가 클로에를 사랑하지 않았던 시절의 일이다. 그녀가 다구를 보러 간다기에 충동적으로 따라갔었다. 돌이켜 보면 매일 그에게 차를 우려 주는 그녀에 대한 부채감이라든가, 그사이에 조금쯤 생겨났던 관심과 정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그때만 해도 생각도 하지 못했지.’
우리의 관계가 이렇게까지 변모할 줄은. 그가 그녀에게 품은 조그마한 감정의 씨앗이 싹을 틔우고 줄기를 뻗어 만개할 줄은.
벌써 아주 오래전처럼 아득하게 느껴지는 과거에 알폰스가 보일 듯 말 듯 웃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그때 했던 것처럼 해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한 알폰스가 품에서 수표책을 꺼내려고 하던 그때였다.
“여기 있는 거 다 주세요.”
클로에가 손가락으로 가판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가판대에 앉아 있던 여성이 순간 멍한 얼굴을 하더니, 불에 덴 듯 놀라 벌떡 일어났다.
“네? 죄, 죄송하지만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여기 있는 거 전부 제가 살게요. 깨지지 않게 잘 포장해 주세요.”
클로에가 생긋 웃으면서 말했다. 넋을 놓고 있던 여성은, 몇 초 뒤에야 정신을 차리고 다급하게 도자기들을 포장재로 싸기 시작했다. 얼마나 놀랐는지 손마저 떨렸다.
여주인의 손이 떨리는 것을 보고 클로에가 걱정스레 말했다.
“조심하세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여주인이 도자기를 포장하는 것을 도와주면서, 클로에가 알폰스 쪽을 돌아보았다. 왠지 모르게 뿌듯해하는 얼굴과 뽐내는 듯한 얼굴이 반반 섞인 듯한 묘한 표정이었다.
알폰스가 다구를 사 주었을 때와 달리 이제 클로에는 개인 자금을 꽤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성공한 사업의 소유주였으니 당연한 일이다.
수표책을 반쯤 꺼내다 만 자세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알폰스가 픽 웃었다.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뽐내고 있는 그녀가 사랑스러우면서도, 왠지 모르게 아쉽기도 했다. 묘한 기분이었다.
알폰스는 도자기를 사 주는 대신 지나가던 일꾼들을 고용해서 도자기의 포장과 운반을 돕게 했다.
한편 이 모습을 지켜보는 눈이 있었다.
‘저걸 아무런 고민 없이 다 사다니, 돈이 정말 많은가 봐.’
조금 떨어진 곳에서 클로에와 알폰스를 관찰하던 자가 감탄했다.
‘주변에 하녀나 기사가 없는 걸 보면 귀족인 것 같진 않은데……. 어쨌든 돈이 그렇게 많으면 불우한 이웃에게 조금쯤 나누어 주어도 괜찮겠지? 그래, 난 저 사람들에게 좋은 일 시켜주는 거야.’
그렇게 생각한 그자가 살금살금 다가갔다. 목표는, 돈 많아 보이는 저 예쁜 여자 쪽이었다.
여자는 도자기에 완전히 정신이 팔려 있었다. 가방에 든 것을 조금 슬쩍해도 추호도 모를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고는, 손을 뻗었다.
그때였다.
“……악!”
모든 일은 눈 깜짝할 새에 벌어졌다. 날렵한 도둑인 그조차 의식하지 못한 동안 말이다.
정신을 차렸을 때 눈앞에 보이는 것은 온통 흙뿐이었다. 몇 초 뒤에야 그는 자신이 땅바닥에 처박혔다는 사실을 알았다. 등 뒤에서 강한 통증이 느껴졌다. 팔이 등 뒤로 꺾여 제압당해 있었다.
도자기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자신이 소매치기당할 뻔했다는 것도 몰랐던 클로에는, 등 뒤에서 들려온 큰 소리에 화들짝 놀라 뒤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상황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아…… 알폰스! 제이콥! 이게 무슨……?!”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공작 부부를 수행하고 있던, 제이콥을 비롯한 몇 명의 기사들이 누군가를 향해 칼을 뽑아 들고 있었다. 게다가 그 누군가는 알폰스에게 제압당해 땅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있기까지 하다.
알폰스가 형형한 눈을 한 채로 으르렁거렸다.
“내 아내에게 무슨 짓을 하려고 했지?”
“아야야, 아야야야야! 이거 놔주세요, 아파요!”
그의 팔 밑에서 엄살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어린 소녀의 것이었다.
기본적으로 비폭력 주의자에 가까운 클로에가 기사들과 알폰스를 말렸다.
“잠깐만요, 어린아이인 것 같은데 너무 험하게 다루는 것은 좋지 않아요. 이 아이가 무슨 일을 하려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쥐방울만 한 녀석이 마님께 손을 대려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감히 공작부인께 불경한 손을 대려고 하다니…… 이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사안이 아닙니다.”
제이콥을 비롯한 기사들이 소녀를 향해 날카로운 눈을 빛냈다. 클로에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도 이건 아니에요. 검을 넣으세요. 알폰스, 이 아이가 일어날 수 있게 해 주세요.”
남자들이 클로에의 말대로 했다. 괴로워하던 아이가 흙먼지를 뒤집어쓴 꼴로 일어났다. 아이는 머리를 짧게 땋아 묶은 십 대 초중반 정도의 어린 여자애였다.
클로에가 물었다.
“얘야, 무슨 일을 하려고 했던 거니?”
상황의 심각성(정확히 말하자면 남자들이 이 여자를 심히 과보호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소녀가 한껏 불쌍한 얼굴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저, 저는 그냥 도둑질을 하려고 했던 것뿐이에요. 절대 부인을 해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고요.”
“뭐라고? 감히 마님께 소매치기를?”
제이콥이 분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