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부인의 50가지 티 레시피 3권
목차
15장
16장
17장
18장
19장
20장
21장
15장
“남자 역할을 하는 시험 보조자가 따로 없습니까?”
듣기만 해도 위압감이 느껴지고 등골이 서늘해지는 목소리였다. 물론 클로에만 빼고 말이다.
구경만 하겠다더니 이렇게 끼어든 사람은 알폰스였다. 알폰스의 따가운 눈빛에 메이너드 부인이 주춤했다.
“……아, 그것이. 제, 제가 보조자의 역할을 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각하. 준비가 부족하여 죄송합니다.”
알폰스의 말이 ‘보조자도 안 구하고 뭘 했냐’라고 탓하는 소리로 들렸던 모양이었다. 알폰스의 눈빛이 와 닿자 평소 강건한 성격의 메이너드 부인의 얼굴이 절로 창백해졌다.
그런데 알폰스의 입에서 나온 말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내용이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예, 예?”
“제가 남자 역할을 하겠습니다.”
메이너드 부인은 물론 시녀와 하녀들과 심지어 클로에마저도 깜짝 놀라 입을 벌렸다. 도저히 알폰스가 했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뜻밖의 제안이었던 것이다.
남의 일에 관심이 없고 끼어드는 것을 싫어하는 그 바텐베르크 공작이, 참관하러 온 것까지는 그렇다 쳐도 시험까지 도와주겠다고 자진해서 나서다니! 정말이지 이 사람이 그들이 알던 그 공작이 맞단 말인가?
그러나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지 모르는지, 당사자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무표정으로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보조자가 있는 편이 평가하기 더 용이할 겁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바텐베르크 공작이 남을 ‘보조’하겠다고 나서다니? 그 오만하고 두려울 게 없는 자가.
클로에는 입을 조금 벌린 채 남편의 얼굴을 보며 이렇게 생각했다. 정말이지 어떻게 저렇게까지 뻔뻔한 얼굴을 할 수 있을까? 자기는 아무런 이상함도 느끼지 못하겠다는 양.
잠시 넋 놓고 있던 메이너드 부인이 곧 정신을 차렸다. 사실 그녀로 말할 것 같으면 알폰스의 제안을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지위의 차이도 차이일뿐더러, 도와주겠다고 자진해서 나서는데 왜 굳이 거절을 하겠는가. 메이너드 부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각하께서 그렇게 해 주신다면 영광으로 알겠습니다.”
메이너드 부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알폰스가 이쪽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그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클로에는 심장박동이 점점 더 커지고 있음을 느꼈다.
마침내 클로에의 앞에 선 그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가 느리게 미소 짓는 것을 보며 클로에는 손을 콩닥거리는 가슴에 대고 꾹 눌렀다.
‘기분이 이상해.’
이쪽을 향해 내미는 그의 손. 크고, 손가락이 긴, 펜을 쥐는 손가락에 굳은살이 박여 있는 손이 그녀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나에게 왜 이렇게 잘해 주지?’
클로에가 알폰스의 붉은 눈동자를 올려다보았다. 호의를 가득 담은 그의 눈동자는 분명 처음 보았을 때와는 전혀 달랐다.
‘내가 그의 아내라서? 사업 파트너라서……?’
남남을 보던 것과 같은 처음 보았을 때의 차가운 눈동자. 그 눈을 보았을 때의 느낌만 어렴풋이 기억날 뿐 정확히 어떤 모양새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의 과거의 싸늘한 모습은 지금의 따뜻하고 다정한 모습으로 덮여 버렸다.
지금 클로에가 볼 수 있는 것은 그의 따스한 눈빛뿐이다. 꼭 정말로 소중히 여기는 사람을 대하는 듯한 눈빛.
그것이 너무나 벅차고, 또 기뻐서 클로에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가 알폰스를 마주 보며 꽃망울을 터뜨리듯 활짝 웃었다.
‘무엇 때문이든 뭐 어때. 이렇게나 행복한걸.’
클로에가 알폰스의 손을 잡았다. 진홍빛과 올리브빛의 두 눈동자 사이에서 애틋한 시선이 오고 갔다.
그리고 그 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크흠, 흠.”
메이너드 부인이 헛기침을 했다. 클로에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알폰스는 못내 아쉬움을 지우지 못하며 한 박자 늦게 돌아보았다.
“오늘 시험에 쓸 춤곡은 왈츠입니다. 준비해 주세요.”
“알겠어요, 부인.”
클로에가 대신 대답한 뒤 알폰스를 돌아봤다. 그녀가 웃음기 어린 눈으로 속삭였다.
“도와주시면 안 돼요.”
그녀는 과거 춤을 전혀 배운 적 없던 시절에 알폰스가 자신을 리드해서 도와주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을 하는 순간 클로에는 보았다. 알폰스의 눈에 미미한 허를 찔린 눈빛이 스쳐 지나갔다는 것을. 하지만 그답게도, 순식간에 표정을 정돈한 그가 여유롭게 말했다.
“부인께서 원하신다면.”
알폰스가 손을 잡지 않은 손으로 클로에의 등을 끌어안았다. 클로에 역시 그의 어깨에 손을 걸쳤다.
분명 아까만 해도 긴장한 나머지 동작이 잘 떠오르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이제 어깨를 무겁게 내리누르던 초조함 같은 것은 봄눈 녹듯 사라진 뒤였다. 초조함과 긴장감이 사라진 빈자리에는 대신 영문 모를 자신감이 차올랐다.
왤까? 그가 있어서? 이제 정말로 편안하게 여겨지는,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안정되는 그가 있어서? 왈츠의 준비 동작을 취하는 클로에의 눈꼬리가 곱게 휘었다.
“그럼, 시작합니다. 하나, 둘, 셋!”
메이너드 부인의 초읽기가 끝남과 동시에 악단이 연주를 시작했다. 현악기의 선율이 아름다운 춤곡이 주변을 가득 채웠다. 클로에와 알폰스가 빙글 돌면서 치마폭이 동그랗게 펼쳐졌다.
열심히 배운 보람이 있었다. 클로에의 실력은 확실히 좋아졌다. 심지어 오늘은 평소보다도 더 잘한 것 같았다. 알폰스가 조금도 도와주지 않았는데도.
한 곡의 춤이 끝났다. 메이너드 부인이 안경을 고쳐 쓰며 놀란 얼굴로 말했다.
“실력이 정말 많이 향상되셨군요, 공작부인! 가르쳐 드리는 사람으로서 보람이 느껴지네요.”
선생의 칭찬에 클로에가 뿌듯하게 웃었다. 이때 그녀가 알폰스를 올려다보는 눈빛은 분명 ‘봤죠? 제가 해냈어요!’ 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그런 클로에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알폰스가 한없이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메이너드 부인이 말을 잇는 그 순간이었다.
“정말 멋진 춤이었어요. 공작 각하께도 무척이나 감사…….”
뿌듯함에 여전히 가슴이 두근거리던 클로에는 잠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다.
그녀가 상황을 깨달은 것은 한 박자나 뒤였다. 그녀의 입술을 삼킨 누군가가 있었다. 알폰스였다. 그는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감싸 안은 채 진하게 입을 맞춰 왔다.
혀가 잇새를 파고들고 입 안에 견딜 수 없이 달콤한 흔적을 그렸다. 정신마저 흐물흐물하게 녹아 버릴 것 같은 그때, 클로에는 자신들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사람들의 존재를 깨달았다.
교사인 메이너드 부인부터, 시녀 록우드 부인, 그리고 하녀 엘리와 로지, 니나에 심지어는 초청받은 악단들까지.
그들은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입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딥키스를.
“읍……!”
놀란 클로에가 알폰스를 밀쳤다. 하지만 그는 손가락만큼도 까딱하지 않았다. 그 순간만큼은 그가 너무나 크고 단단한 바위산처럼 느껴졌다.
오히려 장난스러운 손길로 그녀를 좀 더 단단히 끌어안아 품에 가둬 버리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는 흥분했는지 혀 놀림이 한층 더 거칠어지기까지 했다.
결국 알폰스는 자기가 원하는 만큼 충분히 입을 맞춘 뒤에야 클로에를 풀어 주었다. 그러고 나서도 여전히 아쉬운 듯한 그의 눈빛에 클로에는 기가 찼다.
“아, 알폰스……! 뭐 하는 거예요, 사람들 앞에서!”
그녀가 목까지 붉어진 얼굴로 속삭였다.
차마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사실 안 보는 게 그녀의 정신 건강에 더 낫기도 했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입을 떡 벌리고 경악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 상황에서도 알폰스는 한없이 뻔뻔할 뿐이었다.
“부부간에 신체적 접촉을 하는 것이 부끄럽습니까?”
정말이지 이걸 말이라고. 클로에는 너무 기가 막혀서 도저히 말문을 열 수가 없었다. 결국 그녀가 간신히 내뱉은 말이라곤,
“그, 그, 그, 그런 건 다른 사람들이 없을 때, 단둘이 있을 때나 하는 거라고요!”
클로에가 그의 옷깃을 잡고 애써 항변했다.
그녀의 말에 알폰스가 새로운 것을 배운 듯이 이렇게 대답했다.
“단둘이 있을 때, 말입니까.”
순간 클로에는 등골이 오싹해져 옴을 느꼈다. 어쩐지 지금 항의를 한답시고 자충수를 둔 듯한 느낌이 드는데…….
클로에는 남들의 앞에서 신체적 접촉을 하는 것을 지극히 부끄러워했지만 알폰스는 달랐다. 그는 오히려 그걸 좋아하는 편이었다.
과시할 수 있으니까. 이 여자가 자신의 것이라고, 법과 신이 인정한 자신의 아내라고, 자신만이 이렇게 손을 댈 수 있다고 낙인찍듯 모두에게 알릴 수 있으니까.
그는 단순히 뻔뻔하거나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타인을 꽤 의식하고 있었다. 클로에와 관련해서만 말이다. 혹여나 헛꿈을 꾸거나 헛욕심을 부리는 놈들이 생겨나지 않도록.
그날의 춤 수업은 평소보다 일찍 끝났다. 알폰스와 단둘이 있고 싶다며 시녀와 하녀들을 무른 클로에는 그와 함께 복도를 걸었다.
“이제, 무도회에서 함께 춤출 수 있겠네요.”
그녀의 예상치 못한 말에 알폰스가 눈을 조금 크게 떴다. 클로에가 그를 올려다보며 배시시 웃었다.
“아쉬웠어요. 제가 춤을 잘 추지 못해서 함께 무도회에 갔을 때 춤을 추지 못하는 거 말이에요. 알폰스, 춤 정말 잘 추잖아요. 저 때문에 그 솜씨를 썩히시는 건 아까워요.”
그녀의 이 말은 진심이었다.
그야, 그녀는 알폰스를 위해 이 춤을 배웠으니까. 무도회에서 그와 마음껏 춤을 출 수 있도록.
클로에는 내심 신경을 쓰고 있었다. 알폰스만큼 춤을 잘 추는 사람이 못 추는 자신을 배려하느라 춤을 추지 않는 것을.
물론 춤을 배우게 된 원래의 목적은 클로에 그녀의 건강 관리였지만 갈수록 주와 부가 바뀌었다. 연습의 힘듦을 떨쳐 버리기 위해서는 열심히 배워서 언젠가 그와 함께 무도회에서 멋들어지게 춤을 출 것을 상상하는 것이 건강해진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보다 더 효과가 좋았다.
“오늘 함께 춤을 추어서 좋았어요. 알폰스와 춤추고 싶어서 열심히 배웠거든요.”
클로에가 사랑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는 무도회에 갈 때마다 쭈욱 같이 춰요.”
그녀의 솔직한 말에 알폰스는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 왜일까, 너무 놀라서?
알폰스는 놀람과는 다른 어떤 감정의 전조를 느꼈다. 멀리서부터 몰려오기 시작하는 해일과 같은 어떤 감정.
그 감정에 부낭 하나 없이 휩쓸려 표류하면서도 알폰스는 이대로 시간이 멈추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이것이라면 폐부에 가득 들어차 질식해도 좋았다. 그대로 가라앉아 익사해도 좋았다.
‘이것이구나.’
한 겹만 벗겨 내면 그 안쪽에는 감정의 폭풍이 몰아치는데 그는 낯빛 하나 바꾸지 않고 그렇게 생각했다.
‘행복이라는 것이.’
한편 알폰스가 어떤 기분을 느끼고 있는지, 정작 그를 그렇게 만든 당사자인 클로에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녀가 볼 수 있는 것은 언제나처럼 무표정한 알폰스가 자신을 보고 서 있으며, 그의 눈동자가 묘하게 일렁인다는 것 정도다.
“알폰스?”
그녀가 그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그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괜찮아요?”
그런 그녀를 보며 알폰스는 숨이 막힐 정도로 벅차오르는 감각을 느꼈다. 가슴속의 무언가가 무한히 팽창하듯이 벅찬 기분.
한때 감정을 경시했던 그였지만 지금은 억만금을, 아니 세상을 전부 준다 해도 이 감정을 결코 내놓지 않으리라. 이 감동과, 신체가 아닌 정신을 가득 채우는 희열과, 행복과…… 사랑을.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알폰스의 인내심은 한계에 달했다. 그는 눈앞의 여자를 덮치듯이 끌어안아 입 맞췄다.
“……!”
기습적으로 자신을 끌어안아 입 맞춰 오는 그에 클로에는 크게 놀랐다. 일순간 그녀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양팔로 자신을 끌어안아 오는 그의 힘이 예상외로 강해 숨이 막혔다.
하지만 싫지 않았다. 아니, 사실대로 말하자면 기쁘다. 이번에는 보는 사람도 없다. 이곳에 있는 건 두 사람뿐이다.
그렇다면 이 순간을 만끽해도 괜찮지 않을까. 그의 품에 안겨서, 그의 입맞춤에 응하며, 클로에는 그런 생각을 했다.
* * *
춤을 열심히 배워서 얻은 이점은 무도회에서 춤을 출 수 있게 되었다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애당초 춤을 배우기 시작한 본래의 목적인 체력도 과거에 비해 훨씬 나아졌다.
여러 층의 계단을 한꺼번에 올라도 더 이상 지치거나 숨이 차지 않았다. 만성적인 피로감도 훨씬 줄어 몸에 활력이 생겼고, 그러다 보니 오히려 일도 손에 잘 잡혔다. 클로에에게는 무척이나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또한 이 소식에 기뻐한 사람은 클로에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시녀와 하녀들 역시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평소 그녀와 가깝게 지내던 부엌 하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물론 지금은 공작저 내의 모든 사용인들이 클로에를 잘 따랐으나 엘리나 부엌 하녀들만 하지는 않았다. 클로에 역시 긴 시간 동안 그녀를 돕고 잘 따라준 엘리와 부엌 하녀들을 몹시 아꼈다.
클로에의 새로운 시녀와 하녀들의 충성심 역시 날이 갈수록 높아졌다. 예를 들면, 이런 일이 있었다.
클로에의 시녀 록우드 부인은 출퇴근을 한다. 클로에가 일어나기 전의 이른 시간에 출근하여 클로에가 씻으러 들어갈 즈음에 퇴근하는 것이 그녀의 일상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은 록우드 부인이 전보로 조금 늦게 출근한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매번 지각 한 번 없이 칼같이 출근하는 성실한 그녀였기에 클로에는 그러려니 했다.
‘록우드 부인에게도 중요한 개인 사정이 있을 수 있겠지.’
그것이 클로에의 생각이었다.
록우드 부인 없이 하녀들이 클로에의 단장을 도왔다. 클로에가 옷을 입고 머리를 만진 뒤 화장을 하면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이런 얘기가 나왔다.
“……그래서 저희 할머니는 한숨을 많이 쉬세요. 꼭 록우드 부인같이요.”
로지의 말에 화장을 받던 클로에가 깜짝 놀라 그녀를 돌아보았다.
“록우드 부인? 록우드 부인이 한숨을 많이 쉬니?”
록우드 부인은 한 번도 클로에의 앞에서 한숨을 쉰 적이 없었다. 그녀는 철두철미하고 프로 의식이 있었으며, 표정과 태도 역시 철저했다.
클로에의 말에 로지는 자신이 실언을 했음을 깨달았다. 자신은 한낱 하녀이고 록우드 부인은 귀족인데, 귀족인 공작부인의 앞에서 다른 귀족을 함부로 입에 담아 욕보인 게 아닌가.
로지가 창백해진 얼굴로 말했다.
“죄, 죄송해요, 공작부인.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하지만 클로에는 개의치 않았다.
“아니, 괜찮단다. 그보다 그 얘기를 좀 더 자세히 해 보겠니?”
클로에의 재촉에 로지가 눈치를 보았다. 어쨌든 남작부인인 록우드 부인보다는 공작부인인 클로에의 급이 훨씬 높다. 그러니 클로에의 말에 따르는 수밖에.
로지가 입을 열었다.
“저도 뒤에서 들은 것뿐이라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요즘 록우드 부인의 안색이 좋지 않아요. 한숨을 푹푹 쉬기도 하고, 특히 혼자 있을 때 표정이 많이 안 좋은데, 제가 감히 무슨 일이 있으시냐고 물어볼 수도 없고. 정말 걱정이 돼요.”
“그게 정말이니? 엘리, 니나.”
클로에가 물었다. 엘리와 니나가 안타까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로지의 말이 맞아요.”
“저도 록우드 부인이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는 걸 보았어요.”
전혀 몰랐다. 록우드 부인은 클로에의 앞에서는 언제나 완벽한 시녀이자 아랫사람의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 해도 아랫사람에게 잘 신경을 써 주지 못한 건 윗사람인 클로에 그녀의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려 주어서 고맙구나.”
“아닙니다, 마님.”
“과언이세요.”
늦은 오전이 되어서야 록우드 부인이 출근을 했다. 그녀는 출근이 늦어서 죄송하다며 클로에에게 용서를 구했다. 하지만 클로에는 흔쾌히 괜찮다고 말했다.
사실 록우드 부인에게 묻고 싶은 것은 따로 있었다. 클로에는 다른 하녀들을 물리고 록우드 부인과 단둘이 방에 남은 채 물었다.
“록우드 부인, 무슨 우환이라도 있는가?”
“예? 무슨 말씀이신가요, 공작부인?”
“요즘 안색이 많이 좋지 않다는 말을 들었네. 혹시 근심거리가 있다면 내게 말해 보게.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록우드 부인이 곤란한 얼굴을 했다.
“하녀 아이들이 말씀을 드렸군요.”
“그 아이들은 내가 물어 대답한 것뿐이니 아이들에게는 노여워하지 말게.”
클로에가 진심으로 걱정스러워하며 물었다.
“윗사람을 돕고 보좌하는 것이 아랫사람의 일이지만 아랫사람을 챙기는 것은 윗사람의 일이지. 그러니 행여 폐라고 생각하지 말고 내게 털어놓아 보게.”
록우드 부인이 클로에의 앞에서 고민이 있는 티를 내지 않은 데엔 이유가 있었다. 자신은 공작부인을 도와야 할 시녀인데 자신이 도와야 할 사람에게 오히려 걱정거리를 얹어 줄 수는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클로에가 이렇게까지 자기 일처럼 걱정을 해 주니 어쩔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호의를 저버리는 것이야말로 예의에 어긋나는 일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록우드 부인이 설명했다.
“공작부인, 아뢰기 부끄럽지만 사실은…….”
록우드 부인은 혼인한 지 이제 고작 반년 차로, 제국 귀족계에서는 지극히 드물게도 연애결혼에 성공한 사람이었다.
그녀의 현재 남편인 록우드 남작의 강력한 의지로 혼인에는 성공했지만 문제는 이후에 일어났다. 록우드 남작의 아버지이자 록우드 부인의 시아버지인 록우드 자작이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던 것이다. 록우드 부인의 친가와 록우드 자작가의 권세의 차이가 문제였다.
시가에 미움받는 마음이 편할 리 없다. 록우드 부인은 시부모의 인정을 받으려 여러모로 노력했으나 아무런 소득 없이 반년이 흘렀다.
‘록우드 부인에게 이런 사정이 있었구나.’
시가에 미움받고 있었다니, 그 마음이 얼마나 불편하고 힘들지. 클로에는 무척 안타까워졌다.
“시가와 가까워지기 위해서 어떤 방법을 써 보았나?”
“시아버지가 술을 좋아하기에 여러모로 발품을 팔아 외국의 술을 선물해 드렸습니다만, 전부 이미 가지고 계신 것이라 반응은 좋지 않았습니다.”
“록우드 자작이 술을 좋아한다고?”
“예. 해외의 진귀한 술을 즐기는 애주가입니다. 그리고…….”
잊고 있었던 것을 떠올렸는지 록우드 부인이 이렇게 말했다.
“최근에는 황제 폐하께서도 즐기신다는 차에도 관심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진귀한 술을 좋아하고 차에 관심이 있다라.”
클로에가 진지한 얼굴로 고민했다. 무언가가 떠오를 듯 뇌리의 가장자리에서 얼굴을 들이밀었다가 말았다가 하는데, 제대로 잡히지는 않았다.
몇 분을 고민하던 그녀의 머릿속에 마침내 그것이 잡혔다. 클로에가 눈을 빛냈다. 이거였다.
“내게 좋은 생각이 있네.”
“예? 좋은 생각이라고요?”
록우드 부인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공작부인의 호의에 그녀에게 고민거리를 털어놓긴 했지만 무언가가 해결될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었다. 공작부인은 차의 전문가이지 술의 전문가가 아닐뿐더러, 자신은 한낱 시녀일 뿐이다. 공작부인씩이나 되는 사람이 고민을 들어 주겠다고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할 일이었다. 그녀가 직접 돕겠다고 나서는 것까지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록우드 자작은 칵테일을 좋아하는가?”
그런 상황에서 클로에의 이 질문은 예상외의 것이었다. 록우드 부인이 얼떨떨한 듯이 대답했다.
“……? 예, 좋아합니다. 하지만 시아버지는 언제나 새로운 걸 찾기 때문에, 어지간한 칵테일에는 눈도 깜빡하지 않을 겁니다.”
잠시 고민하던 클로에가 빙긋 웃었다.
“그거 잘됐군. 록우드 부인, 혹시…….”
“예.”
“티 칵테일이라고 들어 보았나?”
‘티’, ‘칵테일’ 모두가 여러 번 들어 본 친숙한 말이었지만, 그 두 가지가 합쳐지니 너무나도 낯설었다. 록우드 부인이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티 칵테일이라고요?”
“그렇다네. 차는 그 자체로도 훌륭한 음료이지만, 주류와도 훌륭한 조화를 이루지. 차를 재료로 사용하면 몹시 독창적이면서도 향미가 훌륭한 칵테일을 만들 수 있네.”
예컨대 일전에 클로에가 만들었던 ‘위스키를 넣은 로얄 밀크티’나 ‘위스키를 넣은 홍차’ 등도 일종의 티 칵테일이라고 볼 수 있다.
차의 향미는 알코올과 무척 잘 어울린다. 차 특유의 향미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차와 술, 허브와 과일 등을 조합하면 무척 신선하면서도 매력적인 음료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클로에를 따라 몇 번이나 차를 마셔 본 경험이 있는 록우드 부인이었지만 그녀는 차와 술의 조합 같은 것은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록우드 부인은 큰 충격을 받은 듯한 얼굴이었다.
“그, 그런 게 가능하다면 시아버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레시피를 몇 가지 가르쳐 주겠네. 록우드 자작에게 직접 대접해 보는 것이 어떻겠나.”
“공작부인……! 정말 감사합니다!”
록우드 부인이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늘 침착한 그녀였지만 오늘만큼은 대단히 감동을 받아 어쩔 줄 몰라 하는 것 같았다.
록우드 부인은 벌써 시아버지에게 인정을 받기라도 한 양 몹시 기뻐했다. 클로에는 미소를 지으며 그런 록우드 부인을 티룸으로 데려갔다.
티룸에 도착한 뒤, 클로에는 록우드 부인을 기다리게 하고 차근차근 재료들을 꺼냈다. 밀크티 등에 섞어 먹는 용도로 술 몇 가지는 티룸에 구비되어 있긴 했으나 또 어떤 것은 하녀를 불러 가져오게 해야 했다.
“제일 먼저 가르쳐 줄 것은 얼 그레이로 만드는 칵테일이네.”
클로에가 말했다.
얼 그레이로 만드는 밀크잼과 디저트는 다양한 데다 록우드 부인도 많이 먹어 봤지만, 얼 그레이로 만드는 칵테일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록우드 부인은 진지한 얼굴로 클로에의 설명을 경청할 준비를 했다.
클로에는 얼 그레이 찻잎 2.5g을 250ml의 뜨거운 물에 3분 동안 우렸다. 찻잎을 빼낸 뒤, 잘 우러난 찻물을 차갑게 보관했다.
그녀는 차갑게 식힌 찻물에 진 125ml와 꿀 1티스푼, 그리고 오렌지즙 60ml를 섞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칵테일을 얼음을 가득 채운 유리잔 두 개에 나눠 내면 완성이다.
“자, 이건 ‘로얄 얼 그레이’라고 부르는 칵테일일세.”
칵테일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클로에의 설명과 함께 지켜본 록우드 부인은 깜짝 놀랐다. 생각보다 과정이 그렇게 어렵지 않았던 것이다.
“과정이 그렇게 복잡하지 않군요. 이런 레시피라면 저도 따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물론, 자네도 충분히 따라 할 수 있을걸세.”
클로에가 유리잔 하나를 내밀며 생긋 웃었다. 그녀가 유리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건배할 텐가?”
“예?”
우아하지 못하게 건배라니!
클로에의 전생에서 익혔던 행동은 여전히 제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에게는 낯설게 보이는 면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불쾌하거나 이상할 정도는 아니었다. 록우드 부인은 머뭇거리다가 자신의 유리잔을 들어 클로에의 잔에 쨍 하고 부딪쳤다.
홍차와 오렌지즙이 섞여 주홍색으로 아름답게 빛나는 잔을 들여다보던 록우드 부인은, 클로에가 먼저 칵테일을 마시는 모습을 보고 뒤늦게 맛을 보았다.
처음 마셔 본 티 칵테일의 맛은…….
진 특유의 강한 알코올의 향이 알싸하게 코끝에 감돌았다. 그 강한 맛에 아, 지금 마시고 있는 게 술이 맞구나, 싶은 생각이 들다가도…… 뒤늦게 다른 감상이 찾아온다.
강한 알코올의 맛을 얼 그레이 특유의 화려한 꽃향기가 다가와서 감싸 안았다. 얼 그레이의 향기가 비강을 가득히 채우는 동안, 상큼한 오렌지의 맛과 꿀 특유의 독특한 풍미가 혀 위를 굴렀다.
그리 달지 않고, 상큼하며, 시원하다. 너무나 향긋해 차 같기도 하지만 신경을 찌르는 알딸딸한 기분에 술 같기도 하다. 그야말로 차와 술을 섞은 티 칵테일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맛이었다.
록우드 부인이 감탄했다.
“이건…… 정말로 술이면서, 또 차로군요. 정말 독창적이에요.”
유리잔을 홀짝이며 클로에가 말했다.
“아직 놀라기는 이르다네. 록우드 자작부인은 어떤 과일을 좋아하는가?”
갑작스러운 질문이었지만, 시부모의 인정을 받기 위해 오랜 노력을 한 록우드 부인은 금방 대답할 수 있었다.
“딸기를 좋아합니다.”
“딸기라면…… 음, 그 레시피가 좋겠군.”
잠시 고민하던 클로에는 오래지 않아 결정을 내렸다. 얼 그레이 로얄 한 잔을 다 비운 뒤 클로에는 하녀를 불러 라임과 딸기, 그리고 생민트를 가져오게 했다.
얼 그레이 로얄의 맛을 본 뒤 클로에의 티 칵테일 레시피에 큰 믿음이 생긴 록우드 부인은 재료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녀가 물었다.
“이번 레시피의 이름을 여쭤봐도 될까요? 공작부인.”
“물론일세. 이번 티 칵테일의 이름은 ‘루이보스 스트로베리 모히토’라고 하네.”
루이보스 스트로베리 모히토. 이름만 봐도 어떤 재료가 들어갈지 대충 알 수 있을 듯하다.
“이번 칵테일에도 홍차가 들어가나요?”
“아닐세. 이번 칵테일에 들어가는 것은 홍차가 아니라, 루이보스라는 이름의 인퓨전일세.”
“루이보스라고요?”
클로에는 루이보스가 담긴 차통을 꺼내 들어 루이보스 찻잎을 보여 주었다. 그것은 붉은빛이 도는 갈색의 가느다란 잎이었다. 꼭 침엽수의 잎 같기도 했다.
“루이보스는 남부 열대지방에서 생산되는 인퓨전의 일종일세. 우려낸 수색이 홍차와 아주 비슷한 붉은빛이고 허브 티인 만큼 카페인이 없지. 그래서 임산부 등, 카페인을 먹을 수 없는 사람들이 홍차 대용으로 즐겨 마시기도 한다네.”
클로에는 루이보스 차통을 가지고 와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루이보스 차에서는 특유의 쿰쿰한 향이 나는데, 이것은 루이보스를 처음 접하는 사람이 거부감을 느끼기 쉽지. 하지만 다른 재료와 섞어 칵테일을 만들면 특유의 향도 거부감 대신 매력으로 다가올 걸세.”
그녀는 250ml의 끓는 물에 2.5g의 루이보스를 넣어 5분 이상 우렸다. 허브 티나 인퓨전은 찻잎의 떫은맛을 내는 성분이 없기 때문에 오래 우려도 괜찮았다. 잘 우린 찻물은 루이보스를 제거한 뒤 차게 두었다.
다음으로 클로에는 꼭지를 제거하고 4등분한 딸기 4개와 민트 잎 10개와 설탕 시럽 2티스푼을 혼합한 뒤 으깨어 섞었다. 여기에 생라임 1개분의 즙과 아까 차갑게 식혀 둔 루이보스 찻물과 럼 125ml를 섞는다.
350ml 분량의 유리잔을 두 개 준비해 혼합한 칵테일을 반반씩 나눠 넣은 뒤, 잘게 부순 얼음과 물 혹은 소다수를 넣어주면 루이보스 스트로베리 모히토가 완성된다.
이번 역시 그리 복잡하지 않은 과정을 통해 완성된 칵테일에 록우드 부인이 넋을 잃었다. 으깨어진 딸기와 민트 잎이 들어 있는 주홍빛의 아름다운 액체가 유리잔 안에서 넘실거렸다.
클로에가 그녀에게 한 잔을 내밀었다.
클로에가 먼저 마시기 시작한 뒤, 록우드 부인이 따라 마셨다. 시원한 칵테일이 잘게 부순 얼음 조각과 함께 입속에 들어차 신경을 찔렀다. 뒷골이 찡하게 당길 정도로 시원했다.
럼과 민트 잎, 라임이 들어간 우리가 알고 있는 모히토의 맛, 거기에 딸기와 루이보스가 추가되었다. 상큼하고 달콤한 딸기의 맛과 낯설지만 산뜻한 루이보스의 향기. 록우드 부인은 루이보스를 처음 마셔 보았지만, 클로에가 설명했던 것과 같은 쿰쿰한 향이나 거부감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루이보스 특유의 산뜻함과 딸기의 달콤함, 모히토 특유의 상큼하고 상쾌한 맛이 어우러져 록우드 부인이 이제껏 알던 것과는 전혀 다른 색다른 맛을 자아낸다. 록우드 부인이 감탄했다.
“이건…… 정말, 정말 맛있네요. 이렇게 맛있는 술은 난생처음 마셔 보는 것 같아요.”
술기운 때문인지, 쑥스러움 때문인지 뺨을 붉힌 클로에가 웃었다.
“마음에 든다니 기쁘군.”
이날 클로에는 록우드 부인에게 충분한 양의 얼 그레이와 루이보스를 선물했다. 값비싼 것들을 선뜻 선물로 내밀자 록우드 부인은 감사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록우드 부인은 얼 그레이와 루이보스를 가지고 가, 시부모인 록우드 자작과 록우드 자작부인의 앞에서 클로에에게 배운 티 칵테일을 선보였다. 이 너무나도 새롭고 신선하며 독창적인 음료는 깐깐한 시부모의 입맛을 매료시켰다.
록우드 부인이 가져온 것이라면 무엇이든 혹평하던 록우드 자작과 자작부인 역시 이것만은 호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일은 이후 오래오래 이어진 록우드 부인과 그녀의 시부모 사이의 긍정적 관계의 작은 씨앗이 되었다.
시댁과 얽힌 큰 고민이 해결되고 나니 록우드 부인이 한숨을 쉴 일은 없었다. 그녀의 어두운 얼굴을 보고 하녀들이 걱정을 할 일도 없었다. 록우드 부인은 클로에에게 진심 어린 깊은 감사의 마음과 충성심을 갖게 됐으며, 그녀와 하녀들 모두가 그녀의 고민거리를 해결해 준 클로에의 지혜에 큰 감동을 받았다.
* * *
“……어쨌든 윈체스터 공작 영애는 대단해요. 그야말로 사교계의 꽃이라니까요.”
작은 다과회였다. 포트넘 부인은 커피를 홀짝이며 다른 귀부인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있었다.
좁고 깊은 인간관계를 선호하는 클로에와 달리 포트넘 부인은 발이 넓었다. 거의 매일 다과회를 비롯한 사교 활동에 열심일 정도였다. 정말 대단한 체력이었다.
오늘의 다과회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늘의 다과회는 포트넘 부인이 직접 개최한 것으로, 소귀족(준남작, 남작, 자작 작위의 귀족들)가의 귀부인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교 활동에 열심인 포트넘 부인의 흥미를 끌 만한 새로운 소식이 없었다.
그때 포트넘 부인의 귀가 쫑긋할 만한 이야기가 들려왔다.
“사교계의 꽃 하니까 생각난 건데, 최근에는 사교계의 떠오르는 별이 있다면서요?”
“그게 누군가요?”
“바텐베르크 공작부인 말이에요.”
자신의 절친한 친구인 클로에의 이야기가 나오자 포트넘 부인의 신경이 절로 쏠렸다. 오늘은 거의 구경만 하고 있던 그녀가 처음으로 이야기에 뛰어들 마음이 생겼다.
“바텐베르크 공작부인이요? 정말 대단하신 분이죠. 요즘 하시는 사업도 대단하잖아요?”
“트리플 스위트 말이죠? 저는 그곳의 오리지널 블렌딩 티인 붉은 입술을 무척 좋아한답니다. 얼마나 사랑스러운 향인지 몰라요. 다음 다과회 때 조금 가져오도록 할게요.”
“어머! 그 차, 저도 꼭 사고 싶었는데. 그만 아차 하는 사이에 한정 판매 기간이 지나 버렸지 뭐예요. 감사해요, 에이프릴 부인.”
“사업뿐만이 아니라 공작부인이 최근 여신 다과회나 연회도 전부 성공적으로 개최되었다고 들었어요.”
“공작부인은 정말 예전 같지 않으세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 것 같다니까요.”
클로에의 칭찬이 여기저기서 들려오자 포트넘 부인은 기분이 좋아졌다. 꼭 자기 일 같았다.
그때 다른 귀부인이 포트넘 부인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포트넘 부인께선 바텐베르크 공작부인과 막역한 관계이시라고 들었는데 정말인가요?”
포트넘 부인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럼요. 공작부인과 저는 일주일에도 몇 번씩 만나거나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랍니다.”
“어머! 정말이요?”
“그거 정말 부럽네요.”
“혹시 기회가 되시면 다음에 공작부인께 저를 소개시켜 주시겠어요, 포트넘 부인?”
귀부인들의 부러움 담긴 말에 포트넘 부인의 콧대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그때였다.
“그런데 공작부인께서 유행시키신 차라는 음료 말이에요, 그건 저에겐 잘 안 맞는 것 같아요.”
유행을 별로 신경 쓰지 않아 괴짜로 소문이 난 귀부인이었다. 클로에 덕에 홍차 예찬론자가 된 포트넘 부인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어떻게 안 맞으시나요?”
“저는 차를 마시면 늘 배앓이를 하곤 해요. 몇 번이나 겪고 나니 이제는 입도 대지 못하겠어요.”
“어머, 저도 그래요.”
그녀의 말에 또 다른 사람이 용기를 내서 말했다.
“저도 얼마 전에 홍차라는 것을 처음 사 왔는데, 마시고 온 가족이 배앓이를 했지 뭐예요. 게다가 냄새도 무척 이상했어요. 아주 퀴퀴하고 지독한 냄새가 나는 게…….”
“퀴퀴하고 지독한 냄새라고요?”
포트넘 부인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달큰하거나 고소하거나 향긋한 향기가 아니라 지독한 냄새가 났단 말씀이신가요?”
그건 포트넘 부인이 알고 있는 홍차에서 날 수 있는 냄새가 아니었다.
만약 홍차 특유의 달큰하고 고소한 향이 입맛에 맞지 않는다면 이해할 수 있다. 사람마다 입맛은 다른 법이니까.
하지만 홍차에서 퀴퀴하고 지독한 냄새가 난다니, 그것만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포트넘 부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제가 얼마 전에 트리플 스위트에서 사 온 홍차를 맛보여 드릴게요.”
포트넘 부인은 얼마 전에 트리플 스위트에서 싱할라를 잔뜩 사 왔다. 그녀는 하녀에게 싱할라 찻잎을 가져오게 한 뒤, 클로에에게 배운 방법으로 그것을 우려냈다.
스트레이너로 찻잎을 걸러내며 찻잔에 따를 때 피어오르는 향에 귀부인들이 깜짝 놀랐다.
“어머! 이건 뭐죠?”
“제가 마셨던 홍차는 이런 향이 아니었는데…….”
포트넘 부인은 내심으로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귀부인들에게 홍차를 내어주며 말했다.
“이게 바로 트리플 스위트에서 사 온 진짜 홍차예요. 한 번 드셔 보세요.”
유행 덕에 비교적 홍차에 익숙해진 귀부인들이 주저 없이 잔을 받아 들었다. 아까 홍차에서 지독한 냄새가 났다거나, 배앓이를 했다고 한 귀부인들이 약간 주춤하긴 했지만 대세에 따라 잔을 받았다.
모두가 홍차를 한 모금씩 맛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어머나, 향이 너무 좋아요.”
“그러게요, 정말 고소하네요.”
“차를 잘 우리시네요, 포트넘 부인.”
“호호, 보통이죠. 바텐베르크 공작부인께 배운 솜씨랍니다.”
포트넘 부인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귀부인들이 감탄했다.
특히나 아까 지독한 냄새나 배앓이에 대해 이야기한 귀부인들이 아주 깜짝 놀랐다.
“어, 어떻게 홍차에서 이런 맛이 날 수 있죠?”
“제가 마신 홍차는 이런 맛이 아니었어요. 정말 놀랍네요.”
포트넘 부인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때 드셨던 홍차는 어떤 홍차였나요?”
귀부인들은 홍차의 종류까지는 몰랐지만, 대신 자신들이 찻잎을 사 온 가게를 가르쳐 주었다.
최근 홍차가 유행하고 수요가 늘어나면서 트리플 스위트 외에도 찻잎을 취급하는 식료품점이 늘었다. 포트넘 부인은 그곳들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한 점이 있었다. 지독한 냄새나 배앓이를 겪었다는 귀부인들이 찻잎을 샀다는 식료품점이 전부 동일한 곳이었던 것이다.
포트넘 부인은 단번에 수상함을 느꼈다.
그날의 다과회가 끝난 뒤, 포트넘 부인은 당장 클로에에게 편지를 썼다. 오늘 있었던 일을 소상히 적으면서, 그 귀부인들이 찻잎을 사 온 곳이 모두 같은 곳이었다는 것까지 언급했다.
편지를 받아 본 클로에는 이렇게 생각했다.
‘차를 마시고 배탈이 나거나 차에서 고약한 냄새가 났다고? 아마 유통 과정 중에 위생을 잘 지키지 않았나 보네.’
그녀는 그런 차가 시장에 퍼진다면, 차에 대한 이미지가 널리 나빠질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다. 그래서 클로에는 직접 그 가게에 가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해당 식료품점은 수도 내였지만 공작저와는 약간 먼 거리에 있는 곳이었다. 클로에는 정체를 숨기기 위해 가문의 문장이 새겨져 있는 마차가 아니라 삯 마차를 타고 갔다.
마침내 해당 식료품점에 도착했다.
“어서 오십시오.”
식료품점의 주인은 문을 열고 들어오는 클로에를 보았다. 옷은 값비싸 보이는 것을 보니 귀부인인 듯한데, 귀부인답지 않게 하녀 한 명만 대동한 채 자기 손으로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온다.
게다가 타고 온 마차에는 가문의 문양이 없다. 아마 삯 마차인 것 같았다. 가게 주인은 심드렁하게 생각했다.
‘기껏해야 졸부 집안의 안주인인가 보군.’
클로에는 주인에게 다가와 친절하게 웃으며 물었다.
“혹시 홍차 잎을 볼 수 있을까요?”
“아, 홍차 말씀이시군요. 이리 오십시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주인은 클로에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주인을 따라 응접실로 들어가, 자리에 앉으면서 클로에는 생각했다.
‘가게는 꽤 번드르르한데……. 가게 주인의 태도가 좋지 않아.’
가게는 분명 상당히 번듯하고 멋졌다. 아마 개장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았고, 어느 정도 부유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곳인 듯했다.
그러나 클로에는 어쩐지 가게 주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들어올 때에 자신의 모습을 스캔하듯 읽어 내리는 주인의 눈빛이나,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영 심드렁해 보이는 주인의 태도를 느꼈다.
‘손님의 차림을 보고 대접하는 방식을 달리하는 건가? 주인의 마인드가 이래서야, 가게가 괜찮은 곳일지 의심되는걸.’
클로에가 마음속으로 냉정하게 평가했다.
그런 클로에의 마음은 꿈에도 모르고 주인이 곧 직접 홍차 잎이 담긴 통을 들고 돌아왔다.
“이것이 바로 찾으시는 홍차 잎입니다.”
클로에가 무심코 물었다.
“산지가 어디인가요?”
당연한 질문이었다. 산지가 싱할라냐, 바라트냐, 온이냐, 아님 다른 그 어딘가냐에 따라 홍차의 맛과 성질은 전혀 달라진다.
그러나 주인은 불친절한 태도로 이렇게 대답할 뿐이었다.
“그런 것까진 저도 모르겠네요.”
꼭 ‘뭘 그런 걸 묻느냐’라는 투다. 클로에는 약간 기가 찼지만, 일단 홍차 잎부터 확인하기로 했다.
주인이 차통의 뚜껑을 열어 찻잎을 보고 시향하게 해 주었다.
조금 미심쩍은 기분으로 통 안을 확인한 클로에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건…… 홍차가 아니야.’
아무리 봐도, 모양이 이상했다. 그녀가 아는 홍차 잎 특유의 모양이 아니었다.
이것은 홀리프(분쇄하지 않은 통째의 찻잎)도, BOP(2~3mm의 크기로 분쇄한 찻잎)도, 패닝(가루와 같은 형태로 분쇄한 찻잎)도 아니었다. 그저 검은색의 나무껍질 조각들 같은 무언가일 뿐이다.
더 큰 문제는…… 찻잎을 워낙 많이 봐 온 자신은 이 정도로 속아 넘어가지 않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거다. 홍차 잎 자체를 처음 본 사람이 이것을 보고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분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왜 그러십니까?”
클로에가 잠시 멈칫하는 것을 본 주인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꼭 귀찮으니 살 거면 얼른 사고 아니면 꺼지라는 표정이었다.
클로에는 빠르게 표정을 정돈했다. 그녀가 주인을 향해 생긋 웃으며 말했다.
“이 찻잎, 100g만 주시겠어요?”
그제야 주인의 표정이 약간 바뀌었다.
“물론이죠.”
찻잎을 구매해 온 클로에는 당장 귀택해서 그것을 우려 보았다.
‘……!’
아니나 다를까, 그 식료품점에서 사 온 찻잎으로 우린 물은 보통의 홍차와 확연히 다른 모양새를 띠었다.
홍찻물 특유의 붉은빛을 띠는 갈색, 혹은 오렌지빛과는 달랐다. 부재료 없이 찻잎만으로 블렌딩한 홍차는 맑고 선명한 빛을 띠기 마련인데, 이 찻물은…….
‘뿌옇잖아.’
클로에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 탁한 물은 도저히 홍차라고 볼 수 없었다. 애초에 마실 수나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설마 설마 했는데. 클로에는 약간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티룸의 소파에 다가가 앉았다.
그녀가 아무리 차의 이미지를 좋게 만들려고 노력해도 이런 비양심적 업자가 있으면 물거품이 되는 건 순간이었다. 아니, 무엇보다도 그녀는 사람들이 차를 마실 때 즐겁고 행복했으면 했다. 이런 탁하고 고약한 냄새 나는 물을 억지로 마시며 얼굴을 찡그리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일은 막아야 해.’
잠시 고민하던 클로에는 여진에게 전보를 썼다. 해당 식료품점에서 판매하는 찻잎에 대해 조사해 달라는 것이었다. 찻잎을 수입하는 상단, 차의 제조장, 다원 등 뭐든 좋았다.
무엇이든 하려면 증거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며칠 뒤.
“공작부인, 저번에 지시하셨던 조사 결과 발견한 것이 있습니다.”
공작저까지 직접 찾아온 여진이 클로에에게 보고했다. 클로에의 눈이 번쩍 뜨였다. 최근 그녀가 여진에게 지시한 조사라면 단 하나밖에 없었다.
“고생하셨어요. 무엇을 발견하셨나요?”
여진은 말없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비단 주머니였다.
여진이 주머니에 든 것을 꺼내서 클로에에게 보였다. 여진의 손바닥 위에 올려져 있는 것들은…… 인목(장밋과의 상록수) 잎, 물푸레나무 잎, 감초, 그리고 엽저(차를 우리고 남은 찻잎) 찌꺼기였다.
달리 부가 설명이 없었는데도 클로에는 여진이 말하고 싶은 의도를 이해했다. 그녀는 여진이 가져온 증거품들을 잘 갈무리한 뒤 말했다.
“정말 수고 많았어요. 큰 도움이 될 것 같네요.”
“제가 도움이 되어 기쁩니다.”
여진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여진이 물러난 뒤에 클로에는 혼자 남아 생각했다.
귀부인들의 증언을 들은 직후에는 그저 찻잎이 유통 과정 중 변질된 거겠거니 했는데,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인목 잎, 물푸레나무 잎, 감초, 엽저. 이 재료들은 명백한 가짜 찻잎 제조의 증거였다. 클로에는 문제의 식료품점이 가짜 찻잎을 제조해서 판매하는 곳이라고 확신했다.
가짜 찻잎 제조의 역사는 깊다. 18세기의 영국부터 현대까지 찻잎은 오랜 시간 동안 위조품이 존재해 왔다. 찻잎 자체가 사치품이라 값어치가 있고, 차를 잘 아는 전문가는 부족하기에 벌어지는 일이었다.
클로에 역시 전생에 가짜 찻잎에 속아 본 적이 있었다. 아직 차에 대해 잘 모르던 어린 시절, 중국 여행을 갔다가 귀한 보이차라는 상인의 말에 홀라당 샀는데, 그게 마침 가짜 찻잎이었다. 그것을 한국에 돌아온 뒤에야 깨달은 클로에는 가짜 보이차를 죄다 버렸고 아까운 돈은 전부 사기꾼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다음 날. 클로에는 다시 한 번 저번의 그 식료품점에 나타났다.
이번에는 가문의 문장이 없는 마차를 타고 시녀와 하녀들에 기사까지 대동했다. 심지어 옷도 특별히 좋은 것으로 골라 입었다.
그랬더니 그녀가 문 앞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가게 주인의 환대가 돌아왔다.
“어이구, 또 오셨습니까! 다시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인.”
가게 주인이 비굴해 보일 정도로 굽실거렸다. 클로에의 눈에는 그 웃는 얼굴이 무척 어색해 보였다.
어쨌든 클로에가 주인을 향해 웃어 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제가 지난번에 사 갔던 찻잎을 다시 한 번 볼 수 있을까요?”
“네, 물론이죠. 이쪽으로 오십시오.”
가게 주인이 친절한 웃음을 만면에 띠며 클로에를 저번의 그 응접실로 안내했다.
찻잎을 100g이나 산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돌아와서 홍차를 보고 싶다고 말하는 클로에를 보고 가게 주인은 이렇게 생각했다.
‘찻잎을 더 많이 살 생각인가 보군.’
이건 완전히 수지맞는 장사였다. 찻잎을 이렇게나 많이 팔다니! 그는 마음속으로 콧노래를 불렀다.
응접실 소파에 앉은 클로에가 말했다.
“그 찻잎을 직접 우려 주실 수 있을까요? 직접 우리신 걸 마셔 보고 싶네요.”
“네네, 물론이죠.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뭘 조금만 물어봐도 불친절한 태도로 일관했던 저번과는 아주 딴판이었다.
곧 식료품점 주인이 홍차를 우려 가지고 왔다. 주인이 클로에의 찻잔에 직접 차를 따라 주며 말했다.
“자, 이것이 황제 폐하께서도 드신다는 동방에서 온 신비한 묘약 홍차랍니다. 두통, 결석, 수종, 복통, 설사, 폐병, 괴혈병, 악몽, 기억 상실에 효과가 있고 불로장수하게 도와주지요.”
동방에서 온 신비한 묘약? 두통, 결석, 수종, 복통, 설사, 폐병, 괴혈병, 악몽, 기억 상실? 불로장수? 클로에로서는 기가 찰 정도였다. 여태까지 이런 거짓말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가짜 홍차를 팔아넘겼을까?
“수색이 아주 탁하군요.”
클로에가 모른 척하고 물었다. 가게 주인이 웃으며 대답했다.
“네, 홍차라는 것이 원래 이렇답니다.”
“어머, 그런가요? 그거 신기하네요.”
클로에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아는 홍차라는 건 이렇지 않은데 말이에요.”
“네…… 네?”
가게 주인이 약간 얼떨떨해진 얼굴로 물었다. 클로에가 대동해 온 하녀들을 향해 말했다.
“니나, 끓는 물을 준비해 주겠니? 엘리, 너는 미리 준비해 온 다구들을 꺼내 오렴. 로지는 차통을 가져오거라.”
“네, 마님.”
하녀들이 클로에의 지시에 따라 흩어졌다. 가게 주인은 여전히 상황 파악을 못 한 듯 어리둥절해 보였다. 클로에가 그에게 말했다.
“저는 이 홍차를 집에서 이미 맛보았어요. 한 모금 머금는 순간 입 안과 혀, 목구멍이 저리더군요. 꼭 먹을 수 없는 성분이 들어가기라도 한 것 같이요.”
“부인, 그, 그건…….”
가게 주인이 약간 창백해진 얼굴로 변명하려고 했으나 클로에가 말을 잘랐다.
“이게 제가 저번에 이곳에서 사 갔던 홍차 잎이에요. 보세요, 찻잎이 균일하지가 않네요. 어떤 것은 굵고, 어떤 것은 가늘고, 어떤 것은 작고 어떤 것은 커요. 줄기 같은 것도 많이 보이고요.”
클로에가 차분하게 말했다.
“꼭 찻잎뿐만이 아니라 다른 것도 들어간 것처럼요.”
“부, 부인!”
가게 주인이 소리치던 그 시점이었다.
날카롭고 차가운 무언가가 그의 목덜미에 닿았다. 가게 주인은 백지장처럼 된 얼굴로 돌아보았다. 진검이었다. 서늘하게 빛나는 검신이 그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기사 삼총사와 톰슨. 클로에가 대동해 온 기사들이었다.
“어딜.”
제이콥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감히 바텐베르크 공작부인의 앞에서 언성을 높이느냐?”
“바, 바…….”
식료품점 주인이 경악한 얼굴로 말했다.
“바텐베르크 공작부인이시라고요? 이분이?!”
가짜 홍차 잎을 제조해서 판매하기까지 한 사람이 제국 사교계에 홍차를 유행시킨 장본인, 클로에 바텐베르크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가 거의 절망적인 얼굴로 클로에를 돌아보았다. 가게에 들어올 때만 해도 한없이 친절하고 다정하게 웃고 있던 클로에의 얼굴에는 조금의 웃음기도 없었다. 그녀의 눈빛이 자신의 목을 겨누고 있는 날붙이만큼이나 차가워서 가게 주인은 등골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그때 준비를 마친 하녀들이 응접실로 우르르 돌아왔다. 클로에는 기사들에게 손짓을 해 검을 다시 넣으라는 뜻을 표했다.
“전부 준비되었니?”
“네, 마님!”
하녀들이 대답했다.
클로에는 그들이 늘어놓는 뜨거운 물과 다구, 공작저에서 가져온 싱할라 차통 등을 눈으로 훑었다. 이제는 거의 그녀와 한 몸이 되어 버린 듯한 물건들이었다.
클로에는 가게 주인의 눈앞에서 차분히 싱할라를 우리기 시작했다.
티팟에 찻잎을 넣고 뜨거운 물을 붓자 홍차 특유의 달큰한 향기가 피어올랐다. 클로에는 티팟의 뚜껑을 닫고 차가 잘 우러나길 기다렸다. 마침내 충분한 시간이 흐르자 그녀가 찻잔에 차를 따라 냈다.
클로에가 자신이 우린 싱할라 찻잔과 아까 주인이 우려다 준 가짜 홍차 찻잔을 내밀며 말했다.
“이래도 발뺌하실 건가요?”
주인이 내어 준 가짜 홍차가 담긴 찻잔의 물은 뿌옇고 칙칙한 짙은 갈색을 띠었다. 딱히 찻잔이 깊은 것도 아닌데 찻잔의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반면 클로에가 우려낸 차는 달랐다. 맑고 투명한 주홍빛 보석처럼 아름답게 빛나는 싱할라. 그녀가 아는 홍차의 모습이었다.
클로에가 아까 가게 주인이 우렸던 티팟을 집어 들었다. 가게 주인은 크게 움찔했으나 뒤의 기사들의 시선이 따가워서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클로에가 티팟을 열어 보였다. 그 안의 엽저는 검은색이 아니라 거의 녹색 빛을 띠고 있었다.
"보세요, 한 번 우리고 났더니 찻잎의 물이 빠졌네요."
클로에가 자신의 추측을 설명했다.
“한 번 우리고 남은 엽저, 인목 잎, 물푸레나무 잎, 감초 등을 혼합하고 건조한 뒤 염색약으로 까맣게 물들였겠죠. 그래서 이렇게 탁하고 진한 수색이 나오고, 입에 머금었을 때 혀가 조이는 느낌이 들었던 것일 테고요.”
그녀의 설명을 듣는 동안 가게 주인의 얼굴은 시시각각 희고 퍼렇게 질려갔다. 마침내 클로에가 말했다.
“제 설명이 틀렸나요?”
이런 상황에서 부인하는 것은 헛된 일일 뿐이다. 오히려 괘씸죄만 더 추가될 수 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가게 주인이 다급히 무릎을 꿇고 말했다.
“저, 정말 송구합니다! 하, 한 번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클로에가 그런 가게 주인을 냉정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다른 일이라면 모를까, 클로에는 먹을 것으로 장난을 치는 행위를 용서할 수 없었다. 이자의 가짜 차를 마신 사람들이 배앓이로만 끝나서 다행이지 더 심한 병이라도 걸렸으면 어쩔 뻔했는가. 식중독에 걸리면 자칫 생명이 위태로울 수도 있었다.
“그대에게 벌을 내리는 자는 제가 아니라 판사예요. 지금 그 말, 법정에서 해 보세요.”
그녀가 말했다.
“사람들을 속여 부당한 이득을 취하고 건강을 위태롭게 했으며 귀족을 능멸한 그 죄, 톡톡히 치르게 될 거예요.”
그나마 한 가닥의 지푸라기에 매달리던 가게 주인의 눈에서 마지막 희망이 사라졌다. 그가 엎드려 꺼이꺼이 울기 시작하자, 클로에는 시녀와 하녀들, 기사들과 함께 응접실을 빠져나왔다.
그들이 식료품 가게를 나왔을 때 밖에는 치안 유지대가 대기 중이었다. 가게에 들어가기 전 클로에가 미리 불러 놓은 것이었다.
이리하여 가짜 찻잎을 제조해 판매했던 식료품 가게의 주인은 치안 유지대에 연행되었다. 재판부터 처벌까지, 모든 절차는 기대 이상으로 빠르게 처리되었는데, 이 모든 과정에 자신의 남편의 입김이 들어가 있으리라곤 클로에는 꿈에도 몰랐다.
* * *
길었던 여름이 지나고 완연한 가을이 되었다. 영원히 푸를 것만 같던 창밖의 풍경이 노란색으로 물들었다. 정원에는 크고 화려한 여름꽃들이 사라지고 한결 소박한 가을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한층 쌀쌀해진 날씨에 시녀와 하녀들은 물론 심지어 키엘이나 알폰스마저 옷을 따뜻하게 입으라며 눈치를 주었다. 덕분에 클로에는 어쩔 수 없이 옷을 좀 더 두껍게 입거나 언제나 숄 같은 것을 걸치고 다녀야 했다.
클로에가 사업에 대해 상의를 하러 알폰스의 집무실에 올라갔을 때였다.
“알폰스, 저예요.”
집무실 문을 두드리자 곧 문이 저절로 열렸다. 문 뒤에서 익숙한 얼굴이 드러났다.
“무슨 일이십니까, 부인.”
한창 업무 중인 시간이었을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무실 저편에서 대답만 하는 게 아니라 직접 걸어와 문을 열어 주기까지 하는 건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닐 것이었다.
그러나 클로에에겐 알폰스가 그러한 귀찮음을 감수했다는 사실에서 감동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그녀의 시선을 그의 뒤에 있는 다른 존재가 사로잡았던 것이다.
“황자 전하.”
저만치에 앉아 있던 아서가 손을 들며 씩 웃어 보였다. 클로에는 그가 언제 공작저에 들어온 건지 궁금했다.
“여, 이게 누구야. 부정 식품 사범을 잡는 데 큰 공헌을 하셨던 영웅이 아니신가?”
그의 장난스러운 말에 클로에가 떫은 얼굴을 했다.
“전하께서도 그 일을 들으셨군요.”
“암, 당연하지. 내가 누군데. 그땐 정말 고마웠다고, 클로에. 내 일거리를 줄여 줘서 말이지.”
아서의 감사 인사에 대답하지 않은 채(의도적인 것이었다) 클로에가 알폰스를 돌아보며 물었다.
“일에 대해 논의 중이셨나 봐요.”
“예, 그렇습니다.”
알폰스는 클로에를 흘끗 보고, 아서 쪽도 한 번 보더니 그녀를 향해 문을 활짝 열었다.
“일단 들어오십시오.”
아서의 의사는 가뿐히 무시한 처사였다.
그러나 클로에는 생각이 달랐다. 두 사람이 만난 것을 보면 정무에 대해 의논하고 있었던 모양인데 자신이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에요. 저는 방해만 될 거예요. 두 분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클로에가 방해라니? 그렇지 않아. 다만 남자들의 정치 얘기 같은 건 관심이 없을 것 같아서 미안한 것뿐이지.”
아서가 말했다.
이 말에 딱히 악의 같은 건 들어 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녀를 약 올리려고 했던 것이나 비하하려던 것이 아니다. 다만 제국 내에서의 일반적인 인식 수준이 반영되었을 뿐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으나 알폰스는 괜히 심기가 안 좋아졌다.
“……그런 것이라면 걱정 말고 들어오십시오, 부인.”
그가 차분히 말했다.
클로에는 알폰스를 보았다. 그는 진지해 보였다. 클로에는 아서를 보았다. 아서가 씩 웃으면서 손가락을 까딱였다. 어서 들어오라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실례하겠습니다.”
이렇게까지들 하는데 거절하는 것도 실례였다. 클로에는 집무실에 들어서서 알폰스의 책상 근처, 그러나 아서에게서는 훌쩍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아서는 클로에가 자신을 의식하고 떨어져서 앉은 것을 눈치챘다. 그는 그것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거 참 너무한 거 아니야? 질척대지 않을 거라고 내가 그렇게 말했건만. 하여간에 쟤도 참 고집이 있다니까. 언제까지 저러려는 건지.’
속으로는 툴툴거리면서도 아서는 겉으로 여유를 가장하며 빙긋 웃었다. 그가 클로에에게 물었다.
“역시 널 보니까 뭔가 대접받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오늘은 추천해 줄 만한 메뉴가 없나?”
클로에가 아무리 차 우려 주는 걸 좋아한다고 한들 저렇게 당연하다는 듯이 나오면 약간 빈정이 상한다. 그러나 상대는 황자인 것을 뭘 어쩌겠는가.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대답했다.
“이제 가을이니 잘 어울리는 차가 있긴 한데요.”
“그래? 한번 맛보고 싶은데.”
아서가 적극적으로 관심을 표시했다. 클로에가 알폰스를 돌아보았다. 그 역시 이쪽을 집중해서 지켜보고 있었다.
두 사람이 다 관심이 있는 것 같으니 클로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차를 내올까요?”
“그럼 이렇게 된 거 자리를 옮기지?”
아서가 턱짓으로 집무실 문을 가리켰다.
“클로에 네 티룸으로 가자. 거기서 편안한 분위기로 이야기를 나눠 보자고.”
클로에가 선선히 대답했다. 차를 우리려면 티룸으로 가는 쪽이 훨씬 편했다.
“좋아요.”
한편 알폰스는 약간 심기가 불편했다. 지난번에 얼 그레이나 재스민 차를 마실 때도 그랬지만 그는 티룸이 클로에와 자신만의 공간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거기에 남, 특히나 황자가 발을 들이는 것은 불쾌한 일이었다.
하지만 클로에가 원하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그는 끓는 속을 평온한 얼굴 뒤에 숨긴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가시죠.”
잠시 뒤, 클로에의 티룸에 세 사람이 함께 모였다. 클로에와 알폰스가 한 소파에 나란히 앉고 그 맞은편에 아서가 앉았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클로에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이미 이런 상황에 익숙해진 알폰스와 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클로에는 하녀를 불러 오렌지와 정향을 가져오게 했다.
정향은 향신료의 일종으로, 정향나무의 꽃봉오리를 따서 말린 것이다.
하녀가 오렌지와 정향을 가져오자 클로에는 오렌지를 약 1cm 정도의 두께로 몇 조각 썰었다. 다음은 동그란 오렌지의 단면에 못처럼 생긴 정향을 균일하게 박아 넣는다.
그다음으로는 싱할라를 뜨겁게 우렸다. 뜨겁게 우린 싱할라 한 팟과 정향을 박아 넣은 오렌지 몇 조각을 가지고 클로에는 손님들에게 갔다.
클로에는 홍차를 각자의 찻잔에 따라 주었다. 아서가 자신의 찻잔을 들어 올려 킁킁 냄새를 맡아 보곤 말했다.
“그냥 평범한 홍차 같은데? 어디가 가을과 어울린다는 거야.”
그 말에 클로에가 빙긋 웃었다. 그녀가 찻잔을 내려놓으라는 뜻의 손짓을 했다.
“자, 보세요.”
클로에가 정향을 박아 넣은 오렌지 한 조각을 아서의 찻잔에 띄워 주었다. 주홍빛의 찻물 위에 기하학적인 모양으로 정향을 박아 넣은 오렌지가 떠올랐다. 그 모습이 아기자기하고 아름답다고 느끼며 아서가 물었다.
“이건 뭐야? 오렌지와…… 정향인가?”
“네, 맞아요. 황자 전하.”
클로에가 알폰스의 찻잔에 오렌지 조각을 넣어 주며 말했다.
아서가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정향이 별로인데. 냄새가 이상하잖아? 쇠나 약을 빨아 먹는 기분이야.”
클로에가 웃었다.
정향이 어떤 맛과 향을 가지고 있는지 현대인에게 제일 빠르게 이해시킬 수 있는 방법은 ‘치과 냄새’다. 치과에서 사용하는 마취제는 정향을 이용해 만드는데, 그래서 치과에서는 정향 냄새가 난다.
그, 금속 같기도 하고 약 같기도 한 아주 독특한 특유의 냄새와 아주 강렬한 향기 때문에 정향은 크게 호불호를 탄다. 그리고 아서 황자는 좋아하지 않는 쪽이었다.
“황자 전하도 편식을 하시는군요.”
“편식이라니, 어디까지나 기호의 문제야.”
아서가 투덜거렸다.
하지만 준 것을 마다할 수는 없었다.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니고 클로에가 준 차다. 지난 여러 번의 경험들로 인해 차에 관한 한 아서의 안에서 클로에의 신뢰도는 엄청나게 높은 상태였다.
아서가 오렌지 정향 차를 한 모금 마셨다.
'……!'
그리 달지 않은 오렌지의 상큼함이 찻잔 너머 그의 혀까지 전해진다. 홍차 특유의 고소한 향과 오렌지의 조화는 과연 완벽하다. 과일과 홍차가 잘 어울린다는 것은 이미 몇 번이나 증명한 사실이었으니까.
그러나 찻물에 은은하게 우러나온 정향의 향은 그가 알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매운 듯, 싸하면서도 미묘하게 단 향이 나는 정향. 그가 그리 싫어했던 정향의 향이, 찻물에 은은하게 우러나오니 또 얼마나 독특하며 향기로운 향이 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