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장 (14/39)

14장

“여어, 잘 지냈어? 클로에.”

아서가 손을 들어 보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셨나요, 바텐베르크 공작부인.”

엘리나가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그리고 클로에의 얼굴은 떫어졌다. 엘리나는 예의가 있고 지난번의 인상이 좋았기 때문에 나쁘지 않은 손님이었지만, 아서가 문제였다.

“무슨 용무로 오셨나요?”

그녀가 아서를 향해 사무적인 어조로 물었다. 아서가 손을 내저으며 대답했다.

“오해하지 마, 다른 의도가 있는 거 아니니까. 엘리나가 네 가게의 열렬한 팬이지 않겠어. 그래서 데이트 겸 구경 왔지 뭐.”

“손턴 영애가…… 제 가게의 팬이라고요?”

클로에가 놀란 얼굴로 엘리나를 돌아보자 엘리나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진심인 것 같았다.

아서는 믿을 수 없었지만 엘리나는 믿을 수 있었다. 사실 못 믿는다고 해도 황자씩이나 되는 귀한 손님을 내쫓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클로에는 직원에게 그들을 VIP룸으로 안내하도록 지시했다.

귀족 등 부유층이 주 고객인 고급 상점에는 대부분 VIP 고객을 위한 특실이 있다. 이때 고객을 접대하는 것은 어지간히 바쁘지 않고서야 가게의 사장이나 총책임자다.

클로에는 VIP실로 들어가기 전에, 괜한 오해를 사거나 하는 걸 피하기 위해서 알폰스에게 전보를 보냈다. 아서가 엘리나와 함께 가게에 와서 접대를 한다는 내용이었다.

전보를 보낸 뒤 클로에는 VIP실로 들어갔다.

그 커다란 트리플 스위트 1층의 거의 절반 정도는 될 법한 널찍하고 호화로운 방이었다. 아서와 엘리나의 앞에는 이미 직원이 대접한 간단한 다과가 놓여 있었다. 클로에는 아서와 엘리나의 맞은편에 앉아서 물었다.

“어떤 물건을 보러 오셨나요? 차? 잼?”

아서가 소파에 몸을 묻으며 고개를 저었다.

“트리플 스위트의 어지간한 물건들은 이미 엘리나가 다 갖고 있어. 그런 거 말고, 아주 신선한 걸 보고 싶어. 사교계에 가지고 나가면 모두의 부러움을 살 만한 거 말야. 혹시 곧 발매할 예정의 신상품 같은 거 없어?”

“신상품이라고요?”

클로에가 고민하기 시작했다. 현재 발매를 앞두고 있는 신상품은 딱히 없었다.

그때 클로에의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안 그래도 얼 그레이를 판매할지 말지 고민하고 있지 않았던가. 이 사람들에게 얼 그레이를 시험해 보면 어떨까.

무척 좋은 생각인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한 클로에가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클로에는 직원을 불러 얼 그레이를 우려 올 것을 지시했다. 잠시 뒤, 직원이 티 세트를 들고 나타났다.

직원이 세 사람의 앞에 티 세트를 세팅했다. 찻잔과 티팟, 스트레이너 등으로 이루어진 호화로운 티 세트였다. 모든 물건에는 트리플 스위트의 로고가 박혀 있었다.

클로에가 직접 손님들의 잔에 차를 따라 주었다. 얼 그레이의 향은 아주 화려해서, 단지 잔에 따르는 것만으로도 사방으로 확 퍼져 나갔다.

그 향을 맡은 아서가 말했다.

“어! 무슨 차인지 알겠어. 얼 그레이지?”

그는 오랜만에 아는 척을 할 수 있어서 뿌듯한 것 같았다. 클로에가 대답했다.

“맞아요. 얼 그레이예요. 다만 저번에 황자 전하께서 드신 것과 다른 점은, 그때는 꽃잎을 블렌딩한 ‘얼 그레이 플라워’였지만 이번에는 아무것도 블렌딩 되지 않은 순수한 얼 그레이라는 거죠. 베르가못의 향이 좀 더 진하게 느껴지실 거예요. 한 번 들어 보세요.”

그녀의 설명을 듣고 아서와 엘리나가 잔을 집어 들었다. 한 모금 맛을 본 뒤 아서가 말했다.

“확실히 향이 더 진한걸. 하지만 나쁘지 않아.”

이전에 얼 그레이 플라워를 시음하게 했을 때도 그랬지만 아서는 얼 그레이가 입맛에 맞는 것 같았다. 그는 얼 그레이를 맛있게 마셨다.

그러나 복병은 다른 곳에 있었다.

“손턴 영애, 얼 그레이가 입맛에 안 맞으시나요?”

클로에의 질문에 엘리나는 나쁜 짓 하다가 들킨 어린아이처럼 움찔 놀랐다.

“아, 아니에요. 무척 향이 좋아요.”

엘리나가 대답했다. 하지만 클로에는 그것이 빈말임을 알 수 있었다. 아서가 첫 잔을 다 비우고 몇 잔을 더 따라 마실 동안에 엘리나는 딱 두 모금 맛보고는 더 입을 대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클로에가 엘리나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손턴 영애. 원래 얼 그레이는 특유의 향이 강하고 화려해서 취향을 많이 타요. 저도 갓 차를 마시기 시작했을 때에는 얼 그레이를 마시지 못했답니다.”

“네에? 공작부인께서요? 차를요?”

엘리나가 깜짝 놀랐다. 어쩐지 클로에는 처음부터 차에 대해 아주 잘 알고, 모든 차를 좋아할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클로에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차피 차는 기호식품이니까, 자기가 좋아하는 차를 자기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마음껏 즐기면 되는 거예요. 입맛에 옳고 그른 건 없잖아요.”

“세상에…… 공작부인께서 그런 생각을 가지고 계신 줄은 몰랐어요! 사교계에서는 유행하는 차를 잘 마시거나 즐기지 못하면 교양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분위기가 팽배하잖아요.”

엘리나는 무척 감명을 받은 듯한 모양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예법과 유행과 허영으로 가득한 사교계에서 클로에 같은 사고방식은 흔한 것이 아니었다.

“네, 맞아요. 그래서 저는 안타까워요. 사람들이 유행하는 차라고 억지로 마시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자기가 좋아하는 차를 맛있게 마셔 주었으면 하는데.”

“그러셨군요! 공작부인의 말씀 새겨들을게요.”

엘리나는 클로에의 말에 큰 감동을 느꼈다. 클로에가 진심으로 차를 좋아하고, 또 깊은 생각과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일반적인 귀족들과는 사고방식이 아예 달랐다. 이런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 무척 신기했다.

한편 엘리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꿈에도 모르면서, 클로에가 엘리나에게 웃어 보였다.

그녀는 엘리나에게 강한 친근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좀 더 도움이 될 만한 말을 해 주고 싶었다. 그녀가 엘리나에게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손턴 영애, 제가 비밀 이야기 하나 해 드릴까요?”

“네? 비밀 이야기요?”

솔깃했는지 엘리나 역시 클로에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클로에는 엘리나의 귓가에 대고 이렇게 속삭였다.

“사실 저는 처음 차를 마시기 시작했을 때 설탕을 넣지 않으면 마시지 못했답니다.”

“세상에! 정말요?”

엘리나가 놀라며 까르르 웃었다.

한편 두 여자가 자기만 빼놓고 귓속말을 하며 웃는 걸 보고 있던 아서가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그가 물었다.

“뭐야, 지금 무슨 이야기 했어? 나도 가르쳐 줘.”

“비밀이에요, 황자 전하.”

“맞아요. 여자들끼리의 비밀이랍니다.”

클로에와 엘리나가 왜 웃었는지는 너무 궁금했지만 여자들의 비밀이라고 하니 더 이상 캐물을 수가 없었다. 아서는 끙 소리를 내며 턱을 괴었다. 그가 그러는 것을 보고 클로에와 엘리나는 한 차례 더 웃음을 터뜨렸다.

어쨌든, 비록 입맛에는 옳고 그른 것이 없다고 했고, 엘리나가 얼 그레이를 좋아하지 않는 것도 이해하지만……. 그래도 대접한 사람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손님이 대접한 음식을 맛있게 먹어 주는 것이 더 기분 좋은 게 사실이었다.

클로에는 엘리나가 얼 그레이를 맛있게 먹는 것을 보고 싶었다.

‘어떤 방법이 좋을까?’

그녀가 고민했다.

일단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밀크잼이나 쿠키 같은, 얼 그레이를 넣어 만든 요리였다. 하지만 그쯤 되면 카테고리가 아예 바뀌는 느낌이라 차를 대접하는 기분은 나지 않았다.

그때였다. 클로에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됐다, 이거다. 이거면 차로서의 정체성이 아주 훼손되는 건 아니면서 얼 그레이를 싫어하는 사람도 맛있게 먹을 수 있어. 그렇게 생각한 클로에가 미소 지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새로운 얼 그레이를 대접해 드릴게요.”

그렇게 말한 클로에는 직원을 불러 무언가를 지시했다. 아서와 엘리나는 클로에가 그러는 것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볼 뿐이었다.

잠시 후 직원이 작은 볼을 두 개 가져왔다. 유리로 된 볼 안에는 두 스쿱의 아이스크림이 예쁘게 놓여 있었다.

그것을 본 아서가 말했다.

“이게 뭐야? 얼 그레이를 대접해 준다더니, 아이스크림이잖아.”

엘리나가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

“아하! 뭔지 알 것 같아요. 얼 그레이 아이스크림이군요?”

클로에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이건 바닐라 아이스크림이랍니다.”

“바닐라 아이스크림이랑 얼 그레이가 무슨 상관이야?”

아서가 미심쩍다는 듯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클로에가 웃었다.

“네, 지금 보여 드릴게요.”

그렇게 말한 그녀가 한 번 가볍게 손뼉을 쳤다.

그러자, 한 직원이 들어왔다. 티팟 하나를 가지고.

직원은 아서와 엘리나에게 가볍게 예를 차려 인사한 뒤 그들의 볼에 티팟에 담긴 것을 따라 주었다.

“엇……!”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그것은 아이스크림과 섞이며 밀크티 같은 먹음직스러운 색깔로 물들었다. 볼에서 향긋한 향이 솔솔 올라왔다. 클로에가 웃으며 말했다.

“얼 그레이 아포가토라고 들어 보셨나요?”

“얼 그레이 아포가토?”

아서가 되물었다. 아포가토는 제국에서도 흔한 디저트이지만, 얼 그레이 아포가토라는 것은 처음 들어 보았다.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포가토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에 에스프레소를 넣는 거라면, 얼 그레이 아포가토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에 진하게 우린 얼 그레이를 넣는 거예요. 아이스크림의 시원하고 달콤한 맛이 얼 그레이의 향기와 어우러져서 부담 없이 드실 수 있을 거예요. 드셔 보세요.”

그녀의 설명에 아서와 엘리나가 스푼을 들었다.

먼저 얼 그레이 아포가토를 맛본 쪽은 아서였다. 한 스푼을 떠먹어 보곤 그가 말했다.

“오, 확실히. 아주 향긋하면서 달달하고 부드러워서 맛있는데. 누구나 좋아하겠어.”

사실 아서가 얼 그레이 아포가토를 마음에 들어 할 것은 예상하던 일이었다. 그는 원래 얼 그레이를 좋아하니까.

클로에는 그보다는 엘리나 쪽의 반응에 더 주의를 기울였다. 얼 그레이 아포가토를 맛본 엘리나의 반응은…….

“어머나! 정말 하나도 부담스럽지 않아요.”

그녀가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달콤하고 무척 맛있어요! 꼭 얼 그레이 밀크잼과도 비슷한 맛이네요. 어떻게 이렇게 부담스럽지 않고 맛있죠?”

그제야 클로에도 안심할 수 있었다. 가슴속에 뿌듯함이 솟아올랐다. 클로에가 웃으며 대답했다.

“얼 그레이와 우유의 조합은 최고니까요.”

아서와 엘리나는 얼 그레이 아포가토를 맛있게 먹었다. 즐거운 시간을 보낸 뒤, 그들은 얼 그레이 찻잎을 다량 구매해서 돌아갔다.

가게 앞까지 두 사람을 배웅한 뒤 돌아서려던 찰나였다.

“부인!”

아서를 만났을 때와 달리 클로에는 이번에는 진심으로 반가워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몸을 돌리며 말했다.

“알폰스!”

그녀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그에게로 얼른 다가갔다. 두 사람은 거의 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자연스럽게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두르며 알폰스가 말했다.

“황자 전하는? 가셨습니까?”

“손턴 영애와 함께 방금 돌아가셨어요.”

그 대답을 듣고서야 알폰스는 자신이 한발 늦었음을 깨달았다. 늦은 자신에게 화가 났지만, 클로에가 방긋방긋 웃는 것을 보니 별일은 없었던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한편 클로에는 알폰스가 그답지 않게 조금 흐트러진 차림이라는 걸 눈치챘다. 언제나 옷깃 하나 완벽하게 정돈하고 다니는 그다. 그런데 그런 그가 이렇게 흐트러진 차림이라니?

그의 이마 위로 아무렇게나 흩어진 앞머리를 정돈해 주며 클로에가 물었다.

“뛰어오기라도 하신 거예요? 왜 이렇게 차림이 흐트러졌어요?”

알폰스는 잠시 말이 없었다.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던 그가 겨우 대답했다.

“예, 맞습니다.”

“네?”

“뛰어왔습니다.”

알폰스는 오늘 업무로 인해 입궁했고, 황궁과 트리플 스위트 사이의 거리는 결코 짧지 않았다.

순간 클로에는 알폰스가 농담이라도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알폰스는 그녀가 아는 사람들 중 제일 유머 감각이 없는 사람이었다.

“뭐…… 뭐라고요?”

“부인의 전보를 받고 마차를 타고 오는 길에 사고가 났습니다. 길이 혼잡해서 삯 마차를 타고 오기에도 여의치가 않아서 거기서부터 뛰어왔습니다.”

“사…… 사고라고요? 마차 사고 말인가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경미한 접촉 사고일 뿐이라 다친 곳은 없습니다.”

클로에는 기겁해서 뒷목이라도 잡고 싶을 지경이었는데, 정작 당사자는 이렇게나 담담할 수가 없었다.

‘정작 자기는 황자님이 온 것만으로 걱정해서 달려왔으면서……!’

클로에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알폰스를 살펴보며 생각했다.

‘나를…… 걱정해서…….’

확실히, 그랬다. 믿을 수 없지만 그가 사고까지 났는데도 불구하고 그 먼 거리를 달려오는 것을 감수한 이유는 단 한 가지밖에 없었다.

그녀를 걱정해서.

‘대체 왜……? 아무리 아내라고 해도 정략으로 이루어진 결혼이었는데, 왜 그렇게까지…….’

그렇게 생각하니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클로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알폰스는 전보를 받는 순간 참을 수가 없었다. 아주 오랜 시간 잊고 지냈던 감정인 불안이 그를 해일처럼 덮쳤다. 그녀가 사랑했던, 어쩌면 지금도 그럴지 모르는 남자인 황자와 그녀를 자신이 없는 자리에 함께 둘 수는 없었다. 비록 다른 사람이 함께 있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그러했다.

황자가 클로에를 어떤 눈빛으로 바라볼지, 어떤 말로 수작을 걸지 생각하면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그래서 달려왔다. 다른 모든 것을 감수하더라도 그편이 나았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함께 귀택했다.

진료 결과, 정말로 경미한 사고였는지 알폰스는 타박상 하나 없었다. 사고는 상대측의 과실이었지만 상대가 개인 삯 마차를 모는 영세한 마부였기에 배상을 탕감해 주기로 했다. 마부는 바텐베르크 공작 부부에게 진심 어린 감사를 표했다.

* * *

알폰스가 다친 곳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걱정을 덜자 클로에는 안심하고 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여전히 그녀는 어떤 가향 차를 판매 목록에 올려야 할지가 고민이었다.

최종적으로는 아서와 엘리나 두 사람 모두 얼 그레이에 만족하고 찻잎을 사 간 것을 보면 얼 그레이의 상품성은 증명된 셈이었다.

‘하지만 역시 취향을 많이 타는 게 문제야. 처음 향을 맡았을 때 거부감을 느끼기가 쉬우니까.’

이번에 출시하는 가향 차는 첫 가향 차이다 보니 신경 쓸 것이 많았다. 되도록 취향을 타지 않는 대중적인 가향이어야 했고, 상품성도 있어야 했다. 시향을 하는 것만으로도 확 끌리는 매력이 있으면 더 좋을 거다.

‘역시 얼 그레이는 판매하는 게 좋겠어. 베이킹의 재료로 쓰기도 좋고, 얼 그레이 밀크잼을 판매했을 때부터 계속해서 판매 요청이 들어왔었으니까.’

신중을 기해 고민하던 클로에는 결국 가향 차를 두 가지 출시하기로 했다. 얼 그레이와 다른 가향 차 하나.

그렇다면 취향을 타지 않는 가향이란 건 뭘까? 클로에는 그것이 먹을 수 있는 것의 향이라고 생각했다. 꽃 등 먹을 수 없는 것의 향은 마시는 데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화장품과 비슷한 베르가못 향이 가향된 얼 그레이처럼.

먹을 수 있는 것의 가향은 크게 보면 두 가지다. 디저트 가향과 과일 가향. 클로에는 이 둘 중, 과일 가향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디저트 가향은 비교적 인공적인 느낌이 나기 쉽고 단 것을 싫어하는 알폰스 같은 사람들 중에는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도 많다.

그렇다면 과일 가향 중에 제일 일반적이고 취향을 타지 않는 것은…….

‘딸기 가향일까?’

클로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딸기 가향은 무난하게 인기가 많아 대부분의 가향 차 브랜드들이 구비하고 있고, 밀크티로 만들어도 맛이 좋다.

클로에는 시험 삼아 딸기 가향 차를 하나 꺼내 보았다. 찻잎에서 달콤한 딸기의 향이 솔솔 올라왔다.

그녀는 그것을 한 팟 우려 푹신한 소파로 가져갔다. 딸기 가향 홍차를 마시면서 클로에는 생각했다.

‘역시 맛있어. 무난하게 인기를 끌 법한 맛이야. 딸기 향은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도 적고…….’

클로에가 생각했다.

‘하지만…….’

클로에는 차를 마시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했지만, 그만큼이나 만드는 것도 좋아했다.

찻잎과 찻잎, 혹은 허브나 기타 부재료를 섞어 새로운 차를 만드는 작업인 티 블렌딩은 무척 번거롭지만 그만큼이나 흥미로운 작업이다.

얼 그레이 플라워나 현미 녹차 등, 클로에는 이곳에 넘어온 뒤로도 몇 번이나 티 블렌딩을 해 본 적이 있다. 그런 그녀에게 이런 욕심이 생기는 것은 당연했다.

‘내가 블렌딩한 차를 내 가게에서 팔 수만 있다면…….’

그건 정말로 즐겁고 보람 있는 일이 될 것이었다.

딸기 가향 차는 무난하고 대중적이지만 그만큼이나 사람을 확 끌어당기는 힘은 부족했다. 아주 흔한 향이니까.

그러니, 만일 클로에 그녀가 새로운 향의 차를 만들어 낸다면 어떨까. 무난히 대중적인 향이라 거부감이 적고, 또 그와 동시에 신선해 한 번 향을 맡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끌어들이는 그런 차를.

안전이냐 도전이냐의 기로였다. 오랜 고민 끝에 그녀는 결정했다.

‘만들어 보자. 대중적이면서 매력적인 새로운 차를.’

티 블렌딩은 사실 그렇게 어려운 작업은 아니었다. 원하는 향의 콘셉트를 구상한 뒤 콘셉트에 알맞은 재료를 정하고, 원하던 그 향이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다른 비율로 혼합해 맛보는 시험을 거치면 된다.

그러니 이 작업은 어렵다기보다는 번거로운 것에 가까웠다. 실험과 시행착오를 몇 번이나 거쳐야 할지도 짐작되지 않았다. 하지만 클로에는 눈앞의 작업에 대해 부담감보다 기대감을 더 크게 느꼈다.

클로에는 이번에 만들 차의 콘셉트를 고민해 보았다.

‘딸기 가향 홍차를 베이스로 상큼하고 달달한 과일 가향 차를 만들어 보자. 마침 더운 여름이니 아이스티로 마시기도 좋고, 밀크티로도 마시기 좋으면 더 좋겠지.’

어렵지 않게 원하는 향을 구상한 클로에는 구상한 차에 어울릴 만한 재료를 골라내었다.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과일 가향 홍차들을 꺼내어 일일이 시향해 보고 고민하던 클로에가 최종적으로 추린 것은 세 가지였다. 체리 가향, 라즈베리 가향, 레드 커런트 가향.

‘딸기와 체리를 메인으로 하고 라즈베리와 레드 커런트는 향을 풍부하게 해 주는 정도로만 사용하자.’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차마다 전부 가향의 정도가 다르다는 것이었다.

예컨대 딸기 가향 홍차가 보통 정도의 가향이라면, 체리 가향은 강한 가향, 라즈베리 가향은 약한 가향, 레드 커런트는 보통 가향인 식이었다.

게다가 가향뿐만 아니라 베이스 홍차의 맛까지 따져야 한다. 이러한 부분을 전부 감안해서 차를 블렌딩해야만 했다.

클로에는 조합할 홍차들을 살펴보며 고민했다.

‘메인이 되어야 하는 딸기 가향 홍차를 메인으로, 딸기와 균형을 이루어야 하지만 진한 가향의 체리 가향 홍차는 그보다 적게, 향이 약한 라즈베리 가향 홍차는 레드 커런트 가향 홍차보다 많이 넣어 보자.’

대강 어림잡아서 정한 비율이므로 아직 완전하지 않을 것이었다. 클로에는 각각의 찻잎을 계량하여 혼합했다. 그렇게 해서 ‘클로에 블렌딩 알파 버전’이 완성되었다.

만들었으면 이제 시험해야 했다. 클로에는 그것을 적당량의 물에 우려 마셔 보았다.

“윽!”

아니나 다를까…… 맛이 없었다. 체리 향이 너무 과해 다른 향을 죄다 덮어 버렸다. 특히 라즈베리 향은 넣었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다시 한 번 해 보자. 이번에는 체리 가향 홍차의 분량을 줄이고, 라즈베리 가향 홍차는 조금 더 늘려 보는 것으로.’

클로에 블렌딩 베타 버전을 테스트한 그녀의 얼굴이 아리송해졌다.

‘역시 좋은 비율은 아니야. 체리를 조금 더 줄여야 할까? 레드 커런트의 비중은 늘리는 게 좋겠어.’

클로에는 계속해서 혼합과 시험을 반복했다.

클로에 블렌딩 감마.

‘아무래도 라즈베리의 비율을 늘리는 게 좋겠어. 체리는 좀 더 줄이는 것으로 하고.’

클로에 블렌딩 델타.

‘레드 커런트의 비율을 늘려 볼까?’

클로에 블렌딩 엡실론.

‘아니야, 아까 그게 더 나았던 것 같아.’

클로에 블렌딩 제타.

‘아무래도 허전한 게, 뭔가 빠진 느낌이…… 다른 부재료를 더 넣어 볼까?’

클로에 블렌딩 에타.

‘부재료의 자기주장이 너무 강해. 양을 약간 줄이고, 딸기의 비중을 높여 보자.’

클로에 블렌딩 세타.

‘분명 제일 잘 어우러지는 비율이…….’

클로에 블렌딩 요타.

‘어디엔가 있을 텐데…….’

그리고 계속. 계속…….

몇 시간이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클로에는 시계를 확인하는 것조차 잊고 계속해서 실험을 반복했다.

그리고 마침내.

“됐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찻잔에 입을 대었던 클로에가 탄성을 내질렀다.

“찾았어, 블렌딩의 황금 비율!”

대체 몇 번이나 실험을 거쳤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때쯤, 드디어 클로에가 찾던 그 향과 맛이 모습을 드러냈다.

완성된 차는 딸기와 라즈베리의 비중이 컸다. 달콤한 딸기류의 과일들을 메인으로, 체리와 레드 커런트가 향을 더 풍부하고 상큼하게 해 주고, 또 마지막으로 그녀가 넣은 부재료인 장미 꽃잎이 과일들의 향을 가볍게 감싸주어 차향이 달고 유치하지 않게 만들어 주었다.

사실 당초의 목표와는 약간 다른 작품이 완성되긴 했지만 어쨌든 괜찮았다. 이것 역시 아주 맛이 좋았으니까.

최고로 성취감이 느껴지는 순간. 클로에는 감격에 두 주먹을 꼭 쥐고 혼자만의 세리머니를 했다.

그런 뒤, 그녀는 마침내 완성된 ‘클로에 블렌딩’을 찻잔 가득 따라 냈다. 찻잔을 들고 푹신한 소파에 몸을 묻은 그녀는 개운한 마음으로 그것을 홀짝이기 시작했다.

인고의 끝에 다가온 결실이었다. 지금만큼은 홀로 만끽해도 괜찮을 것이었다.

클로에 블렌딩을 다 마신 그녀는 하녀들을 불러 티룸을 정리하게 했다. 하녀들이 실험의 잔해물들을 치우는 것을 보면서 클로에는 약간의 안타까움과 아쉬움을 느꼈다.

‘역시, 블렌딩은 다 좋은데 하고 나면 찻잎을 너무 많이 버리게 된단 말이야. 아까워라.’

찻잎을 그렇게나 많이 가지고 있었음에도 그녀는 그런 생각을 했다.

티룸을 다 정리한 뒤 클로에는 사람을 보내 알폰스를 불렀다. 자신의 작품을 제일 먼저 그에게 자랑하고 싶었던 것이다.

알폰스는 금방 찾아왔다. 클로에가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바쁘신 와중에 갑자기 불러 죄송해요.”

“아닙니다, 부인. 잠시 쉬던 도중이었습니다.”

아까는 너무 신이 난 나머지 알폰스가 업무 중일 것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어버렸던 것이다.

알폰스는 늘 앉던 자리에 앉았다. 곧 클로에가 클로에 블렌딩을 한 팟 우려 가져왔다.

“제가 블렌딩한 차인데, 곧 트리플 스위트에서 발매할 예정이에요. 딸기와 라즈베리, 체리, 레드 커런트 가향 홍차와 장미 꽃잎이 들어갔어요. 달콤한 과일 향이 메인이지만 어른스러운 장미 향이 유치하지 않게 보완해 주고 있고요, 상큼한 과일 가향 차라 아이스티로도 좋고, 또 밀크티로도 아주 잘 어울린답니다.”

자랑스러워하는 얼굴로 자기가 만든 차를 자랑하기 시작하는 클로에를 보며 알폰스는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차를 입에 머금으면서 그가 생각했다.

‘너무 달군.’

그는 오래전부터 꾸준히 단 향을 싫어했다. 디저트 가향 차 등은 아예 손도 대지 않았고, 가향 차 자체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코로 느껴지는 향과 입에서 느껴지는 맛이 너무 달라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던 것이다.

클로에와 함께 하도 티타임을 가지다 보니 어느덧 개인적인 차에 대한 호불호까지 생기고 만 것이었지만 그는 거기까지는 아직 의식하지 못했다.

어쨌든 가향 차를, 특히 단 향이 나는 가향 차를 좋아하지 않는 그에게 이 클로에 블렌딩은 너무 달았다.

“……그래서 장미 꽃잎을 조금 넣어 보니 확실히 향이 살아나더라고요. 장미 향에 과일이 눌리는 것이 아니라 서로 부각되는 느낌이 정말 좋았어요.”

차를 블렌딩하던 과정에 대해서도 신이 나서 잔뜩 떠들어 대던 클로에는 어느 순간 자신만이 지나치게 말을 많이 했음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제 얘기만 했죠?”

“아닙니다. 즐겁게 듣고 있었습니다.”

알폰스가 다시 잔을 들어 올리며 대답했다. 클로에가 수줍게 웃었다.

“저…… 그래서 차는 좀 괜찮으신가요?”

그에게 자랑을 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무작정 클로에 블렌딩을 대접하긴 했지만 사실 그녀도 걱정이 없지 않았다. 알폰스가 단 향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내심 불안해하고 있던 참이었다. 자신이 만들고 대접한 차가 알폰스의 입맛에 맞지 않을까 봐서.

찻잔을 들어 올려 입술에 가져가면서 알폰스는 생각했다.

이 차가 그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는 건 명백했다. 그런데 왤까. 이 티타임이 싫지 않았다. 클로에가 눈을 빛내며 해 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찻잔을 입에 가져가는 것이. 그에게는 부담스러운 향을 느끼면서 그녀와 함께 앉아 있는 것이…….

그 이유를 지금에 와서 알폰스 그가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가 눈앞의 여자를 사랑하고 있기에. 그의 미각과, 후각과, 청각과 시각 모든 것을 무력화하고 감각의 마지막 한 가닥까지 그녀를 향할 정도로 사랑하고 있기에.

찻물이 그의 입 안을 적시고 혀 위를 굴렀다. 차향은 비강을 가득 채우더니 날숨에 담겨 빠져나가 잔잔한 잔향만을 남긴다.

‘어쩌다 이렇게 되어 버렸나.’

단데, 이렇게 단데 싫지가 않다니.

알폰스가 클로에를 보았다. 그녀는 호기심과 불안과 기대가 어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아주 엷은 미소를 입가에 띄운 채 대답했다.

“좋습니다.”

차가 아니라, 당신이.

“정말 좋습니다.”

그의 대답에 클로에의 얼굴이 물감 번지듯 밝아졌다. 그녀가 기뻐하며 말했다.

“정말 다행이에요! 알폰스가 싫어하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어요.”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녀는 곧 얼굴에 자부심을 띄우고 말했다.

“단 걸 싫어하시는 알폰스조차 좋다고 하시는 걸 보면 괜찮은 블렌딩이긴 한가 봐요.”

“그런 것 같습니다.”

비록 입맛에 안 맞긴 해도 차를 수없이 마셔 본 결과 알폰스 역시 이 차가 잘 만들어진 건지 아닌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가 느끼기에도 이 차는 어느 한 향이 눌리거나 덮이는 일 없이 조화롭게 어우러지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모든 향이 섞여 전혀 다른 새로운 향 같기도 했고, 또 어떻게 보면 각각의 향들이 겹겹의 층을 이루며 장미꽃처럼 둘둘 말려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많은 정성을 들여 잘 만든 차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알폰스는 입가에 아주 엷은 미소를 띤 채 차를 마저 마셨다. 자부심을 느끼고 자랑스러워하는 클로에가 퍽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 * *

알폰스가 차를 다 마시고 집무실로 돌아간 뒤 클로에는 클로에 블렌딩을 가지고 부엌으로 내려갔다. 비록 티룸이 생겨 이젠 부엌까지 가서 차를 우릴 일은 없었지만, 종종 부엌 하녀들을 만나러 갔기 때문에 그녀는 부엌이 꽤 익숙하게 느껴졌다.

클로에는 주인마님을 환대하는 부엌 하녀들에게 자신이 만든 차를 맛보여 주었다. 다행히도, 알폰스와 다르게 대부분의 부엌 하녀들은 이 차가 입맛에 맞았으며 매우 좋아했다.

"정말 맛있어요, 마님!"

"맞아요. 차를 만들어 내기까지 하시다니, 마님은 정말 대단하세요!"

부엌 하녀들이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때 하녀들 중 애쉴리가 클로에에게 물었다.

"마님, 이 차는 이름이 있나요?"

그렇다. 차를 만들었으면 이름을 붙여 주어야 했다. 가게에서 정식으로 판매도 해야 하는데 언제까지나 클로에 블렌딩이라고 부를 수는 없으니까.

클로에가 빙긋 웃었다.

"생각을 해 보고 있단다. 차향의 메인이 되는 과일들이 전부 붉은색의 과일이니까, 붉은색의 색감을 강조하는 이름이었으면 좋겠구나. 달콤함과 성숙함 역시 느껴진다면 더 좋을 테고."

어쨌든 부엌 하녀들을 대상으로 한 클로에 블렌딩의 테스트는 성공적인 것 같았다.

새로운 상품을 내놓는 데에는 많은 준비와 시간이 필요했다. 재료를 수급할 경로도 만들어야 하고, 포장과 마케팅을 연구하고, 선판매 분량을 제조하고, 직원들을 교육하는 등 할 일이 많았다.

모든 준비가 끝나 트리플 스위트의 첫 가향 차들이 발매된 시기는 8월 초 즈음이었다.

이때 발매된 가향 차는 얼 그레이와 클로에 블렌딩의 새 이름인 ‘붉은 입술’. 트리플 스위트 한복판의 눈에 잘 띄는 매대에 아름다운 무늬가 그려진 알록달록한 틴(tin)들이 도열되었다. 매대의 앞에는 직접 보거나 시향할 수 있는 소량의 찻잎이 준비되어 있었다.

트리플 스위트의 소비자들은 가게에서 판매하는 얼 그레이로 만든 디저트들로 인해 얼 그레이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익숙해진 상태였다. 그들은 맛있게 먹었던 얼 그레이 밀크잼과 디저트들을 생각하면서 얼 그레이 찻잎을 집어 들었다.

한편 붉은 입술의 경우는 좀 달랐다.

“어머, 이게 뭘까요?”

세 명의 귀부인들이 붉은 입술이 진열되어 있는 매대 앞에 멈추어 섰다. 새로운 상품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들의 눈을 잡아끈 건 따로 있었다.

“홍차인 것 같은데 찻잎이 너무 아름다워요.”

“어머, 향도 정말 달콤해요!”

그동안 검은 홍차 잎만 보아 왔던 귀부인들은 이 처음 보는 찻잎의 아름다운 모습에 깜짝 놀랐다. 검은색의 찻잎 사이사이에 붉은 건조 장미 꽃잎이 섞여 있었던 것이다. 검은색과 붉은색의 대비와 장미 꽃잎의 우아한 모습은 찻잎을 무척 사랑스럽게 보이게 했다.

찻잎의 비주얼에 끌려 시향 차를 집어 들어 향을 맡으면 그 역시 처음 맡는 사람으로 하여금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달콤하고 복합적인 과일의 향, 귀부인들이 좋아하는 베리와 은은한 장미 향의 화려함은 발길을 그냥 돌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귀부인들이 그러고 있자 직원이 다가와 설명했다.

“그 차는 딸기, 라즈베리, 체리, 레드 커런트 가향 홍차와 장미 꽃잎을 블렌딩한 것입니다, 부인. 밀크티와 특히 아이스티로 잘 어울려 여름 한정 상품으로 판매하고 있습니다.”

“여름 한정 상품이라고요?”

“네, 그렇습니다. 또한 이 차는 바텐베르크 공작부인께서 직접 블렌딩하신 것으로 대륙에서 오직 이 트리플 스위트에서만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계절 한정 상품’, ‘지역 한정 상품’ 등은 전생의 차 브랜드들에서도 흔히 차용하는 마케팅 방식 중에 하나였다. 이 마케팅 방식은 말 그대로 특정 계절이나 시기에 판매하거나 특정 지역, 특정 지점에서만 판매하는 것을 말한다.

언제나 특별한 것, 자신만의 것, 자랑거리가 될 만한 것을 찾는 귀족들에게 이러한 ‘한정 상품’ 마케팅은 대단히 유효했다. 귀족들 특유의 수집욕과 허영심을 자극하기에는 이만한 마케팅 방식도 없었다.

‘공작부인이 직접 블렌딩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 역시 클로에의 마케팅 전략 중 하나였다. 비록 과거의 클로에는 특유의 성격 덕에 그 위세를 많이 깎아 먹긴 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현재의 클로에는 누가 봐도 모자람이 없는 공작부인이었으며, 사교계 등에서도 그 이미지를 많이 회복한 상태였다.

황궁과 직접 거래를 하고 있다거나, 이제는 상당히 규모 있는 사업의 주인이라는 사실 등을 제외하고서라도 ‘공작부인’이라는 직위는 모든 사교계 여성들의 관심과 동경의 대상이었다. 황족 여성을 제외하면 제국에서 가장 높은 지위의 여성이 아니던가.

그런 공작부인이 직접 제조했다는 사실은 사람들이 상품에 관심을 가지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현대에도 흔히 쓰이는 일종의 ‘유명인 마케팅’ 같은 거랄까.

그리고 이러한 클로에의 마케팅 전략은 훌륭히 먹혀들었다.

“여름 한정 상품이라니! 그렇다면 지금 사 둘 수밖에 없겠는걸요.”

“곧 영지로 올라갈 생각이었는데, 이 차를 가져가면 다들 놀라워하겠죠?”

“공작부인께서 직접 만드신 차라니, 정말 궁금하네요. 얼른 사 가서 맛을 보고 싶어요.”

그렇게 세 명의 귀부인들은 기쁜 마음으로 붉은 입술을 구매해 돌아갔다.

차 자체의 품질 덕인지, 판매 전략 덕인지 붉은 입술은 판매 기간인 8월과 9월 동안 뛰어난 판매고를 올렸다. 얼 그레이도 나쁘지 않았다. 트리플 스위트 덕에 생긴 얼 그레이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 그리고 베이킹 재료로 사용하려는 이유 등으로 적지 않은 사람들이 구매해 갔던 것이다.

그렇게 가향 차는 트리플 스위트의 판매 상품으로써 안정적 궤도에 올랐다.

다만 한 가지 작은 문제가 있긴 했다.

“축하드립니다, 공작부인. 그 차가 트리플 스위트의 단일 상품으로써 최단 기간 최고의 매출을 올렸어요. 그동안 월 최고 매출 상품이었던 얼 그레이 밀크잼도 추월했다고 합니다.”

언제나처럼 감독차 가게에 들른 클로에에게 여진이 보고했다. 그러나 클로에는 기뻐하는 게 아니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마워요, 여진. 그런데 그 차가 무슨 차인가요?”

클로에의 질문에 여진이 민망하다는 듯 뺨을 붉혔다. 여진이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붉은…… 입술이요.”

“아…….”

여진의 대답을 듣고 클로에가 알겠다는 듯 탄식했다.

안타깝게도 블렌딩과 마케팅 능력에 비해 클로에의 작명 센스는 형편없었던 모양이다. 붉은 입술이라는 이름은 육성으로 부르기에 몹시 민망했다. 여진은 물론 직원들이나 손님들조차 차의 이름을 부르기 민망해하곤 했다.

그렇다고 올해의 판매가 거의 끝나가는 이 시점에 이름을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고.

클로에는 다음 블렌딩의 이름은 꼭 평범하고 무난하게 짓기로 다짐했다. ‘레드 베리즈’ 뭐 이런 이름으로.

* * *

티 푸드에 대해 가르쳐 주었던 것을 시작으로 클로에는 종종 로네펠트 후작가에 들러 로네펠트 후작부인에게 차에 대해 가르쳐 주었다.

로네펠트 후작부인은 차에 대해 관심과 호기심이 많은 좋은 학생이었고, 또 차에 대해 설명하기 좋아하는 클로에 역시 좋은 선생님이었다. 두 사람은 차라는 공통 화제로 인해 빠르게 가까워졌다.

어느 날은 로네펠트 부인이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바텐베르크 부인은 정말로 차에 대해 잘 아시는 것 같아요. 공작부인의 차에 대한 설명을 듣는 건 참 재미있어요. 언제 한 번 차에 관심이 있는 부인들을 모아서 수업을 해 보시는 것은 어떤가요?”

그 말에 클로에는 깜짝 놀랐다. 비록 소소하게 포트넘 부인이나 로네펠트 부인을 가르쳐 주고 있긴 했지만 그녀는 그것을 친구끼리의 수다 정도로 가볍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남을 가르쳐 주거나 수업을 하다니? 클로에는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어머, 과찬이세요. 저는 남을 가르치기에는 배움과 그릇이 부족해요.”

“정말, 공작부인도 겸손하시기는! 제가 보기에는 충분하신걸요. 한번 고려해 보세요.”

클로에는 로네펠트 부인의 고평가가 무척 부끄러웠으나 한편으로는 기쁘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이 귀부인들을 모아놓고 차에 대한 수업을 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차에 대한 호기심으로 눈을 빛내는 부인들에게 차에 대해 설명하고, 함께 차를 우리고 마셔 보기도 하는 시간.

일종의 티 클래스와도 비슷했다. 전생에 티하우스나 차 관련 연구 기관 등에서 종종 진행하는 차에 대한 지식과 예절 등을 가르치는 수업을 티 클래스라고 부르는데, 카페 등에서 진행하는 원데이 쿠킹 클래스 등과 비슷한 것이었다.

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클로에로서는 상상만 해도 무척 즐거울 것 같았다.

‘하지만 티 클래스에서 강의를 하기에 나는 너무 부족해. 남을 가르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니까. 내 지식은 그냥 취미로 혼자 차를 우리고 즐기는 수준일 뿐인걸.’

그렇게 생각하긴 했지만 역시 티 클래스에 대해 생각하니 두근거리는 가슴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클로에는 티 클래스에 대한 생각을 머릿속 한편에 고이 접어 두었다.

클로에가 인기 높은 아서 황자와 로네펠트 부인과 가깝게 지낸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사교계 내에서의 그녀에 대한 평판 역시 조금씩 바뀌었다.

“바텐베르크 공작부인이 황자님과 가깝게 지내신다고요?”

“무도회나 공작부인의 가게에도 황자님이 직접 찾아가셨다는 소문이 있던데요.”

“뿐만 아니라 로네펠트 후작부인과도 무척 가깝게 지내신대요. 후작부인이 지난 사교 모임에서 공작부인에 대한 극찬을 늘어놓았다지 뭐예요.”

상황이 이렇게 되니 과거의 클로에를 기억하고 있던 사람들도 자신들이 기억하고 있던 클로에에 대한 이미지를 수정할 수밖에는 없었다.

“확실히 공작부인이 많이 바뀌시긴 한 것 같아요.”

“분명 예전과는 달라요. 요즘의 공작부인은 무척 품위 있고 매력적이에요.”

“공작부인과 이야기를 나누면 즐겁던걸요.”

공작부인이라는 높은 직위에도 불구하고 바닥을 치고 있었던 클로에의 사교계에서의 평판이 점차 높아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클로에가 변화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한편 이러한 평판의 변화를 기쁘게만 생각할 수는 없는 사람이 있었다. 알폰스였다.

자신의 아내, 자신의 가문의 안주인의 평판이 높아진다는 것은 분명 기쁜 일이고, 축하해 주어야 할 일이며, 그에게는 실익이 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진심을 담아 축하해 줄 수 없는 자신에 대해 그는 큰 충격을 느꼈다.

클로에에게 점점 더 많은 편지와 초대장이 들어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사교활동으로 인해 점점 더 바빠지고 있다는 사실도.

클로에가 타인을 보고, 타인에게 이야기하며, 타인에게 웃어 주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알폰스는 자신 안의 정체 모를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가문의 사교계에서의 위신 따위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느껴졌다. 클로에의 시선과 웃음만큼 가치 있는 것이 없는데 그런 것이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그 올리브색 눈동자가 나만을 담았으면, 입술을 열어 말하는 모든 말이 나를 향한 것이었으면, 그녀의 순수한 웃음을 전부 내 것으로만 할 수 있었으면.

타고난 물욕이 적어 일평생 무언가를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 그였다. 그런데 그녀가 욕심이 났다. 그녀의 머리카락 한 올까지 전부 손에 넣고 독점하고 싶다. 그의 언제나 잠잠하던 심장이 난생처음으로 느껴보는 소유욕이라는 폭풍에 휩쓸렸다.

어느 무엇도 두려워해 본 적이 없는데 이제 와서 그녀가 두렵다. 눈빛과 말과 웃음을 타인에게 나눠주는 사이, 가랑비에 옷 젖듯 빼앗기고 말 그녀의 마음과 영혼이 두렵다.

차라리 가능하다면 그녀를 가둬 놓고 싶었다. 저택에 갇혀 있는 그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라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저 저택의 제일 깊은 곳에서 그만을 기다리며 그 좋아하는 차만 계속 우리면서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그녀의 모든 것이 온전히 그만의 것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말로 그렇게 할까.’

불타는 마음이 너무나 괴로울 때는 그녀의 사랑스러운 웃는 얼굴을 보며 어두운 마음을 품기도 했다.

바텐베르크 가의 권력이라면 한미한 백작가 출신의 여자를 가둬 놓고 사는 것은 일도 아니다. 알폰스는 황가조차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게 만들 자신이 있었다. 오로지 그 말고는 볼 수 없는 곳에 클로에를 숨겨 두고 그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줄 자신이 있었다. 자신의 감정과 생각이 얼굴 위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렇게 다행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알폰스는 자신이 그럴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알폰스, 무슨 생각을 해요?”

클로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알폰스는 문득 상념에서 깨어나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죄송합니다. 어디까지 말씀하셨습니까?”

“정말, 당신이 그러기도 하는군요. 다른 생각을 하다가 말을 놓쳐 버리시다니.”

클로에가 까르르 웃었다. 그녀가 든 잔 안에 반쯤 남은 홍차가 찰랑거렸다.

알폰스는 그 얼굴에 잠시 넋을 잃었다.

즐겁게 웃던 클로에가 웃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더니 아까 했던 이야기를 다시 시작했다.

“그러니까요, 포트넘 부인이 말해 준 이야기인데요. 글쎄 포트넘 부인이 무도회에서 10년 전 친구를 만났더래요. 그런데 그 친구가…….”

알폰스는 시선을 클로에게 고정시킨 채로,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가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만일 클로에를 가둬 두면 그녀가 다시는 저런 얼굴로 웃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더 이상 이렇게 편한 태도로 그에게 잡담을 건네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가 사랑하는 그녀의 그늘 없는 웃음, 순수한 열정과 사랑스러운 활기를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느덧 그의 안에서는 그녀를 독점하는 것보다 그러한 것들이 더 중요해졌다. 그의 욕심,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소유욕보다도 그녀의 밝은 미소가 훨씬 소중했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독점해도 괜찮겠지.’

알폰스가 뜻 모를 엷은 미소를 입술 위에 걸쳤다. 그는 클로에의 이야기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래서 정말 부끄러웠다지 뭐예요. 참 재미있는 이야기죠?”

너무 오래 기다렸다. 알폰스는 빈 찻잔을 내려놓고 맞은편에 앉아 있던 클로에의 소파로 건너갔다. 클로에는 알폰스가 갑자기 자기 옆에 와서 앉자 눈을 댕그랗게 뜨고 그를 보았다.

“예,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알폰스가 손가락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빗어 내리며 말했다. 그의 입가에 띄워져 있는 묘한 미소에 클로에는 어쩔 줄 몰라 했다. 클로에의 경험상 그가 저런 얼굴을 할 때마다 꼭 하는 일이 있었다.

애정 어린 손길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몇 번 빗어 내리던 알폰스가 천천히 그녀의 입술 위에 입술을 겹쳐왔다. 클로에는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 부끄러워서 그러는 건지 어쩐 건지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혀와 혀가 얽히는 동안 신체 접촉도 점점 진득해졌다. 알폰스의 한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아 왔다. 다른 한 손으로는 클로에의 손목을 잡았다. 그의 엄지가 명백한 의도를 담아 그녀의 손목 안쪽을 간질였다.

키스에 녹아내리고 있느라 알폰스의 의도를 뒤늦게 깨달은 그녀는 그가 입술을 떼고 지긋한 손길로 자신을 소파에 눕히자 크게 놀랐다.

“아, 알폰스!”

클로에가 달아오른 얼굴로 소리쳤다. 알폰스는 그녀의 몸을 거의 덮듯이 했다. 그가 묘한 미소와 함께 엄지로 그녀의 뺨을 간질이며 대답했다.

“왜 그러십니까.”

왜 그러십니까? 왜 그러십니까아아?

클로에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 남자, 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기로는 아주 선수다.

클로에가 더욱 달아올라 귀까지 붉어진 얼굴로 항변했다.

“여, 여기는 침실이 아니에요!”

“밖은 아니니 괜찮지 않습니까.”

알폰스가 뻔뻔하게 대답했다. 클로에는 말문이 막혔다. 일전에 트리플 스위트의 창고에서 그가 접촉해 올 때가 떠올랐다. 하긴 생각해 보면 트리플 스위트보다는 공작저인 티룸이 훨씬 나은 장소 같았다.

‘아니야, 그의 계략에 휘말리면 안 돼!’

클로에가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가 부끄러움에 눈도 못 마주치면서 말했다.

“게, 게다가…… 전 씻지도 않았다고요.”

“괜찮습니다.”

“제가 안 괜찮아요!”

그때 그가 다시 한 번 그녀의 입술을 덮쳐왔다. 자꾸 뭐라고 하니까 아예 입을 막아 버리겠다는 태도였다.

“으응, 으…….”

덕분에 돌아왔던 정신이 다시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갔다. 끈적하고 녹진한 입맞춤에, 그의 혀로 유린당하는 여린 속살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클로에와 입 맞추는 동안 알폰스가 그녀의 옷을 벗겼다. 그가 능숙한 솜씨로 클로에의 등 뒤에 달려 있는 단추들을 하나하나 풀어 내렸다.

덕분에 흐물흐물 녹아내렸던 머릿속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상체가 다 드러난 뒤였다. 그녀가 새빨개진 얼굴로 두 손으로 가슴을 가리며 알폰스를 쏘아보았다.

“정말, 알폰스!”

“아직 할 마음이 안 드신다면.”

알폰스가 보일 듯 말 듯 입꼬리를 끌어당긴 채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그의 정욕으로 푹 젖은 시선과 마주칠 때, 클로에는 순간 자기가 마비라도 된 줄 알았다.

가슴이 마구 뛰었다. 그러나 이 감정은 분명 ‘싫음’이나 ‘불쾌함’은 아니었다.

마치 그 사실을 알기라도 하는 듯이 알폰스가 오만한 얼굴로 말했다.

“제가 그 마음이 들도록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 선언에 클로에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의 말은 한 치의 허세도, 허풍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것이 조금의 여지도 없는 진심임을 그녀는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가뜩이나 이곳이 침실이 아니라 티룸이었고, 그녀는 아직 씻지 않은 상황임을 고려한다면 더더욱 그랬다.

만약 이런 곳에서 부끄러운 일을 벌이면, 앞으로 이곳에서 차를 마실 때마다 그때의 일이 떠올라 신경이 쓰일지도 모른다. 클로에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클로에가 말했다. 오만함으로 가득한 상대에게 눌려 자신 없어 보이지 않기 위해, 한 음절 한 음절에 힘을 주어서.

알폰스의 붉고 매혹적인 눈동자가 당돌한 그녀를 귀엽다는 듯 내려다보았다. 클로에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강하게 말했지만, 그의 눈은…… 그녀의 말을 조금이라도 받아들인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그 눈은 오히려 고양이가 쥐를 잡아먹기 직전 그것을 내려다보는 눈과 닮아 있었다. 손아귀 안에 있는 쥐가 덜덜 떨기는커녕 앙큼하게도 뻗대는, 오히려 그래서 더 괴롭히고 싶어지는 듯한 얼굴.

“어디 한 번…… 기대해 보겠습니다. 부인이 얼마나 버틸지.”

얕잡아 보는 듯한 말에 발끈한 클로에가 뭐라고 한 소리 덧붙이려던 그 순간이었다.

“앗……!”

그녀의 턱을 쥔 채, 키스를 하려는 듯 얼굴을 가까이하던 알폰스의 입술이 향한 곳은, 그녀의 입술이 아니라 귀였다. 그의 입술은 그녀의 귓불을 조심스레 감싸고는 맛있는 요리라도 되는 듯 혀로 굴렸다.

클로에는 눈을 질끈 감았다. 색정적인 부위도 아니고, 단순히 머리의 한 부위일진대. 자신의 귀에 이렇게 많은 신경이 모여 있었는지 그녀는 처음 알았다. 그의 혀가 츄릅, 츄릅 하는 야한 소리를 내며 귓불을 빨아들이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소리를 참아 내기 어려워졌다.

‘적어도, 소리만이라도 들리지 않았으면…….’

그의 온기, 존재감, 눈빛, 손길, 혀와 입술……. 그 모든 것이 자극적이었으나 제일 참기 어려운 것은 역시 그 소리였다.

알폰스는 마치 일부러 그러는 듯이 소리를 내며 그녀의 귀를 애무하곤, 살짝 아프지 않을 정도로 깨물곤 속삭였다.

“인내심이 훌륭하시군요.”

“으……. 당신 정말.”

클로에가 원망스러운 눈으로 그를 흘겼다. 하지만 그 눈빛은 알폰스가 주춤하거나 죄책감을 들게 하긴커녕, 오히려 역효과였다.

‘이럴수록 오히려 더 괴롭혀 주고 싶다는 것을 정녕 모르는 건가, 이 여자는.’

똑똑할 때는 한없이 똑똑하고 당돌하면서, 순진할 때는 한없이 순진한 여자였다.

알폰스는 그녀의 목줄기에 붉은 자국을 남기면서 가슴을 큰 손으로 감쌌다. 둥근 모양의 가슴이 그의 손을 따라 출렁이며 움직였다. 알폰스는 그 보드라운 촉감을 즐기면서도, 클로에가 입술을 깨물며 참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러다 다치십니다.”

알폰스는 짐짓 다정하게 클로에의 입술을 꾹 눌러 입술을 깨물지 못하게 했다. 하나 그러는 동안에도 다른 손으로는 엄지손가락을 뺀 네 개의 손가락으로는 가슴 전체를 주무르고, 엄지손가락으로는 유두를 굴리며 간질이고 있었기에, 클로에는 더더욱 기가 찼다.

“아, 알폰스. 다정한 척하시기는, 웃, 으으……!”

벌써 잔뜩 붉어진 얼굴의 클로에가 할딱였다. 그녀는 입술이라도 깨물지 않으면 도무지 견딜 수가 없는 상태였다.

‘이 남자, 대체 어째서 이렇게까지 잘하는 거야?’

단순히 유두를 손가락으로 튕길 뿐인데도 그 오묘한 간지러운 느낌이 그녀를 미치게 만들고 있었다. 가슴의 선단에서 시작된 그 간지럽고 뜨거운 기분은 그녀의 뱃속을 끓어오르게 만들었다.

그녀는 전생에서의 전남자친구들을 떠올렸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그녀에게 이런 감각을 선사한 적이 없었다. 성 경험이 처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런 감각을 느끼게 해 주는 사람은 눈앞의 이 남자, 알폰스뿐이었다.

“웃, 하아…….”

클로에는 저도 모르게 알폰스의 옷자락을 쥐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만들고, 그녀의 주의를 흐리게 만드는 이 감각 때문에 그의 손이 어느새 드레스 자락 아래로 들어오고 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

어느 순간 몸이 쑥 끌려 올라갔다. 정신을 차리자 자신의 몸이 그의 품에 쏙 들어간 채 뒤로 안겨 있었다. 머릿속이 뜨거운 증기로 가득 차는 와중에도 또 무슨 꿍꿍이인지, 무언가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알폰스는 그런 그녀의 마음은 아는지 모르는지 등 뒤에서 그녀의 목줄기를 장난스레 깨물었다.

“아직 유방밖에 만져드리지 않았는데…… 벌써 이렇게 젖어계십니다.”

그의 손가락이 어느샌가 가터벨트를 풀고 속옷 위를 더듬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속옷이 온통 질척질척하게 젖어 있는 것이 그녀에게도 느껴졌다.

클로에는 삽시간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렇게나 그의 마음대로 될 일은 없을 거라고 말했는데, 중요한 치부를 들켜 버린 기분이었다.

“그, 그건……. 그, 그런 게 아니라고요. 전 그냥…….”

알폰스의 손가락이 속옷 위로 위아래로 부드럽게 마찰했다. 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데도 그것은 상당히 자극적이어서 클로에는 이를 악물었다.

“읏, 하아아…….”

스타킹 아래로 발가락이 마구 곱아 들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대로라면 그의 꿍꿍이대로 되어 버릴 텐데도 자꾸만 다리가 절로 벌어졌다.

그가 뒤에서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어떻습니까? 여전히 할 마음이 들지 않으십니까?”

단순히 귓속말을 할 뿐인데, 그 목소리가, 숨이 잔뜩 달아오른 클로에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뜨끔해진 클로에는 자신의 마음을 숨기려 고개를 마구 저어댔다.

“아, 아직…… 멀었어요. 저는, 전혀……! 앗, 잠깐……!”

그가 입맛을 다시는 소리가 들렸다.

“생각보다 강적이십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그 한순간, 그의 긴 손가락이 속옷 아래로 파고들었다. 속옷 위로도 충분히 자극적이었는데 그 사이를 가로막던 천이 사라지자 클로에의 눈앞이 벼락이라도 치듯 번쩍 빛났다.

“앗, 아앗……! 아흑, 알폰, 스……!”

클로에의 몸이 불쌍할 정도로 와들와들 떨렸다. 발가락이 마구 곱아 들고, 허리가 비비 꼬이고, 그가 붙잡고 있음에도 몸이 자꾸만 튀어 올랐다.

질척하게 젖은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음핵을 사정없이 괴롭히자, 눈앞이 하얗게 번쩍이고, 생리적인 눈물이 고였다. 더군다나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동그란 가슴을 모양이 일그러질 정도로 주무르고 있었다.

등 뒤에 있었기에 클로에는 알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알폰스는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 당돌한 여자가 자신의 품 안에서 울먹이며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세상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만족감을 선사했다.

하지만 아직은 멀었다. 그는 더 괴롭히고 싶었다. 더욱더, 울먹이는 정도가 아니라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자신의 아래에서 울부짖을 때까지. 언제나 단정하고 금욕적인 남자였던 알폰스 바텐베르크는 자신조차 알지 못했던 자신이 깨어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클로에의 허리는 점점 더 크게 튕겼다.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소리도 점점 더 높아졌다.

“앗, 하아앗, 아……! 알, 폰스. 아아……!”

그녀는 절정을 직감했다. 이대로라면 곧, 그의 손에 몇 번이나 오간 적 있던, 모든 여자들이 꿈꾸는 바로 그 열락에 도달할 것을 느꼈다.

당연히 그럴 것이었다. 이대로라면 그 외의 길은 없었다. 이미 몇 번이나 부정했음에도, 몇 번이나 경험했던 그 감각에 대한 기대감을 클로에는 도저히 이겨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기대를 배신했다.

열락에 도달하기 바로 직전. 뚝, 하고 그의 손가락이 멈췄다.

경련하듯 움찔거리던 그녀의 몸도, 애달프던 신음 소리도, 마구 질척이며 티룸을 한가득 울리던 물소리도, 모든 것이 멈추었다.

“어……?”

롤러코스터처럼 고조되는 감각에 마구 도리질 치던 클로에조차 어리둥절한 얼굴로 알폰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영문 몰라 하는 얼굴은 강아지처럼 사랑스러워 깨물어 주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정도였지만 알폰스는 욕망을 꾹 참아 눌렀다. 이 모든 것이 이후의 더 큰 즐거움을 위해서였다.

그는 그저 보일 듯 말 듯 미소지으며 클로에를 뒤에서 끌어안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모르는 척하며 그녀의 머리카락에 코를 박고 달콤한 체취를 즐겼다. 한 손으로 가슴을 천천히 주무르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절정에 도달할 수 없었다.

클로에는 안달이 났다.

‘정말, 뭐 하는 거지?’

갑작스레 맥이 끊겨 버린 기분에 뭔가 실망스러웠지만, 도저히 왜 그러냐고 재촉할 수는 없었다.

“무언가를 원하는 얼굴이십니다.”

알폰스가 손끝으로 뺨을 살살 쓸어내리며 물어왔던 것이다.

“역시 이젠 슬슬 할 마음이 드십니까?”

그의 가볍게 호선을 그리는 입꼬리가 이상스러울 정도로 능글맞고 장난스럽게 보였다.

하지만 클로에는 역시 부끄러웠을뿐더러, 의외로 자존심이 있었다. 그녀는 애타는 마음을 숨기고 최대한 강하게 말했다.

“그, 그럴 리가 없잖아요. 제 마음이 변할 일은 없을 거라고요.”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알폰스는 그다지 아쉬워하지 않는 듯한 태도로 말했다.

“부인께 절정을 선사해 드리지 않아도 괜찮겠지요.”

그것이 어찌나 여상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어조였는지, 클로에는 순간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네? 뭐, 뭐라고요?”

“말 그대로입니다. 부인께는 그것이 별로 필요 없어 보이시니, 최대한 오래 즐겨 볼 생각입니다.”

“그, 그런……! 세상에, 그런 게 어딨어요?”

클로에가 얼굴이 빨개져서 항의했으나 언제나 그랬듯이, 알폰스는 듣지 않았다.

그는 정말이지 자기 멋대로였다. 그의 손가락이 어느새 다시 클로에의 음핵을 구슬리며 그녀의 희고 둥근 어깨에 앞니를 박아 넣었다.

“아, 흐윽……!”

음핵을 괴롭힐 뿐만 아니라, 이번에는 그녀의 잔뜩 젖은 구멍에도 손가락이 들어왔다. 겨우 손가락 하나였음에도 그녀의 질벽은 기다렸다는 양 기민하게 반응했다. 클로에는 자신의 몸이 기쁨에 겨워 그의 손가락을 빨아들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너무나 부끄러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아, 하앗, 알, 폰스으, 정말, 아……!”

오랜 애무로 그녀의 몸은 뜨거운 환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 크고 묵직한 절정이 찾아오기 바로 직전, 그의 손가락이 다시 한 번 우뚝 하고 멈췄다.

“아……!”

클로에는 저도 모르게 탄식을 뱉었다. 그것은 그 누가 들어도 아쉬움이 가득했기에 그녀는 뒤늦게 아차 하여 등 뒤의 사람을 흘끗 보았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그것을 알아챘는지 알아채지 못했는지도 알 수가 없을 정도로, 마음을 읽기가 어려운 얼굴. 그래서 더 얄밉디 얄미운…….

“으! 알폰스, 정말 미워요. 진짜로……!”

약이 오를 대로 오른 클로에는 평소보다 훨씬 유치해졌다. 차마 아쉽다고는 할 수 없으니 그녀는 아무런 말이나 주워섬겼다.

그런 그녀가 귀여워 죽겠다는 듯, 귀 윗부분을 살짝 깨물어 준 알폰스가 속삭였다.

“딱 한 마디만 하시면 됩니다.”

“어, 어떤 말을…….”

“‘하고 싶다. 당신을 원한다’ 라고요.”

클로에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수치스러움과 패배감과 얄미움에 죽을 지경이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새빨개진 얼굴을 가렸다.

“……싶어요.”

말이라기엔 우물거림에 더 가까운 말에 알폰스가 귀를 기울였다.

“예? 잘 안 들립니다만.”

“하…… 하고 싶어요. 알폰스 당신과.”

분명 자신이 유도한 것인데도 그 말을 듣는 순간 알폰스는 굳어 버릴 수밖엔 없었다.

잔뜩 달아오른 얼굴로, 욕망에 못 이겨 울먹이며 애원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그녀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자신의 이름은 얼마나 달콤한지.

“안아 주세요. 알폰스를…… 원해요. 지금 당장.”

클로에가 눈물 맺힌 큰 눈을 깜빡이며, 새빨개진 얼굴로 속삭인 그 순간. 알폰스는 자신의 몸이 마치 불길로 이루어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친부에게 배운 유일한 것인 초월적인 인내심조차 이 순간에는 소용이 없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거의 찢듯이 바지 앞섶을 풀었다. 그의 단정하고 아름다운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흉악한 물건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체내의 피가 있는 대로 몰려 알폰스의 흰 얼굴과 대조적으로 붉었으며, 그 우람한 기세는 신체의 일부라기보단 흉기에 가까울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무시무시한 물건이 클로에의 눈에는 무척이나 사랑스러워 보였다. 그 어마어마한 크기와 위용이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두려움이나 불안감을 훨씬 앞서는 욕망이 그녀의 본능적 공포심조차 마비시켰다.

정욕에 이성마저 마비된 알폰스는 그녀의 작은 문이 자신의 것 끄트머리에 위치하도록 클로에를 앉혔다. 그러고는, 그녀의 골반을 쥔 채 인정사정 보지 않고 끌어내렸다.

“앗, 흐아아아!”

그녀의 몸이 꿰뚫린 것은 한순간이었다. 그 짧은 순간으로 인해, 눈앞에 새하얀 불길이 번쩍 튀었고 가녀린 사지가 파들파들 경련했다.

고작 삽입을 했을 뿐인데 온몸이 떨리고 있었다. 클로에는 자신의 몸 세포 하나하나가 환희에 비명을 지르고 있음을 알았다. 손가락 같은 것과는 다른, 몸을 가득 채우는 충만감에 벅차올라 숨이 막혔다.

“아, 알폰, 스…….”

클로에가 끙끙 앓는 소리와 함께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알폰스는 대답 대신 그녀의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겹쳤다. 뜨겁게 맞닿아 마찰하는 아래와 같이 입맞춤 역시 뜨거웠다.

“응, 으응, 응…….”

뱃속을 가득 채우는 삽입감만으로도 숨이 막히는데, 이런 진득한 입맞춤이라니. 클로에는 부족한 숨에 애타하며 그가 내뱉는 숨을 조금이라도 나눠 받기 위해 애썼다.

알폰스는 그녀의 머릿속이 몽롱해질 때쯤에서야 클로에의 입술을 놓아주었다. 그녀가 사랑스러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될 수 있는 한 더욱 많은 부위가 맞닿았으면 했지만, 가뜩이나 체력이 부족한 여자인데 이 이상 했다간 실신해 버릴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배려가 허리 아래도 다정함을 뜻하지는 않았다.

퍽― 퍼억― 퍽― 알폰스가 몰아붙일 때마다 클로에의 몸 전체가 애처로울 정도로 흔들렸다. 이미 잔뜩 달아올라 있었으므로, 그녀가 절정에 도달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몸이 마구 떨렸다. 생리적인 눈물이 줄줄 흘렀다. 눈앞이 번쩍이고, 온몸의 세포가 불타오르는 것만 같았다. 이미 그로 인해 수많은 절정을 경험했지만, 이렇게나 강렬한 것은 처음이었다. 마치 해일에 휩쓸리듯 폭력적이기까지 한 절정에 자칫 정신을 놓아버릴 뻔했지만 그의 손아귀가 그녀를 붙잡았다.

그의 손은, 주체하지 못하고 떨리는 그녀의 팔을 단단하게 쥐었다. 강렬한 절정을 느끼면서 수축하는 그녀의 안쪽은 알폰스에게도 고통과도 혼동될 정도로 어마어마한 쾌감을 선사해 주고 있었다. 쫀득하게 휘감아 오는 내벽의 조임에 알폰스가 탄식을 토했다.

“큭!”

하지만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그녀가 절정을 느끼는 도중에도 끊임없이 허리를 박아 넣었다. 정말이지 굉장한 여자였다. 지금껏 여러 여자와 동침을 해 왔지만, 그에게 이만한 쾌락과 충만감을 주는 여자는 없었다. 이 여자가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뻣뻣한 나무토막처럼 굴던 그 여자가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오래 애태운 끝에 폭력적일 정도로 강렬한 절정에 도달한 클로에는 그것만으로도 지쳐버렸지만, 알폰스는 그녀를 놓아줄 생각이 추호도 없는 것 같았다.

그는 달래듯 지쳐 늘어진 클로에의 얼굴 여기저기에 키스를 퍼부으며, 그녀를 티룸 협탁에 엎드리게 만들곤 계속해서 끊임없이 허리를 놀렸다.

“앗, 하으, 아, 으응, 아…….”

그렇게 강렬한 절정을 느꼈음에도 그녀의 몸이 다시 달아오르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엉덩이와 골반이 부딪치면서 나는 철썩― 철썩― 하는 소리와, 허벅지를 따라 줄줄 흐를 정도로 넘쳐나는 액체에 음란한 물소리가 끊임없이 티룸을 가득 채웠다.

“흣, 후우, 하아…….”

알폰스는 그 단정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거친 숨을 쉬었다. 평소의 그의 성격을 감안한다면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모습이었다.

클로에의 몸이 테이블 이쪽 끝에서 저쪽까지 떠밀릴 정도로 격렬한 행위 끝에,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절정에 달했다.

알폰스는 경련하는 그녀의 몸을 두 팔로 으스러지게 끌어안곤 클로에의 깊은 곳에 사정했다. 시커멓고 질척질척한 소유욕과는 대조적인, 그녀의 안쪽 제일 깊은 곳에 자신의 것이라는 하얀 증표가 새겨졌다.

“하아아…….”

클로에의 가녀린 몸이 축 늘어졌다. 안 그래도 체력이 부족한 그녀가 기운을 차리는 데에는 다소간의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당분간 엎드려 쉬었는데도 불구하고, 뚜렷하게 느껴지는 시선에 그녀가 물끄러미 그쪽을 보았다.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고 있는 알폰스가 은은하게 웃어 주었다.

그 시선에 클로에는 오히려 실감이 났다. 결국 해 버렸다. 심지어 침실도 아닌 곳에서!

클로에가 자신을 폭 안은 알폰스의 품 안에서 꼬물거리며 말했다.

“알폰스. 저, 옷 좀 입을게요.”

보아하니 자신은 알몸인데 그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양, 약 올리듯이 아까의 그 차림새 그대로다. 대체 언제 입은 건지.

그녀의 젖은 머리카락을 만지고 있던 알폰스가 대답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네?”

“어차피 씻느라 다시 벗으셔야 할 거 아닙니까.”

클로에는 경악했다.

지금 내가 들은 말이 알폰스가 한 말이 맞단 말인가. 그, 언제나 머리카락 한 올까지 가지런하고 단정한, 매너와 예의에 지극히 엄격한 알폰스가 이런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 그…… 그럼 저더러…… 알몸으로 침실까지 가라는 말씀이신가요?”

클로에가 당황스러움에 말까지 더듬으며 물었다. 당연하지만 정신 나간 소리였다.

그 말에 알폰스가 픽 웃었다.

그는 말없이 소파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러더니 소파에 걸려 있던 담요와 드레스를 집어 그걸로 그녀의 몸이 보이지 않도록 잘 가려 주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등과 허벅지 아래에 손을 넣어 안아 들었다.

티룸부터 클로에의 침실까지는 몇 걸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웠다. 아무도 마주치지 않고 침실까지 도착한 알폰스는 클로에를 침대 위에 눕히고 하녀를 불렀다.

그는 하녀들에게 목욕 준비를 지시했다. 단 목욕 시중은 들지 않아도 좋다고 했다. 곧 뜨거운 물이 욕조 가득 차오르고 피부를 보들보들하게 해 주는 입욕제나 향유 같은 것이 준비되었다.

하녀들이 전부 나간 뒤 알폰스는 다시 클로에를 안고 욕실로 들어갔다. 그녀는 자기가 걸어갈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알폰스가 물을 건드려 온도를 확인했다. 김이 폴폴 피어오르는 적당히 따뜻한 미온수. 그는 욕조에 클로에를 조심스럽게 담갔다.

그러니 욕조에 몸을 담갔을 때쯤엔 클로에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뒤늦게서야 클로에는 자신의 몸을 살펴보았다.

온몸이 난리도 아니었다. 목이며 쇄골에 어깨에 가슴까지. 온통 붉고 동그란 자국과, 이빨 자국이 가득했다.

‘굳이 매번 이렇게 흔적을 남겨야만 직성이 풀리는 걸까?’

클로에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취향이었다. 그 자국을 보자, 아까의 격렬한 행위들과 그 벼락같은 감각이 떠오르는 것만 같아서 그녀는 다시 얼굴을 붉힌 채 손으로 자신의 몸에 물을 끼얹었다.

그런데 곁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녀가 돌아보니 알폰스가 옷을 벗고 있었다.

“뭐, 뭐 하세요?”

상의를 벗어 행거에 걸어 놓으며 알폰스가 대답했다.

“옷 벗습니다만.”

“그, 그건 저도 알아요. 제 말은 왜 옷을 벗고 계시냐는 뜻이었어요.”

“저도 씻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알폰스의 아무렇지도 않은 말에 클로에가 깜짝 놀랐다.

“이곳에서요?”

클로에는 당연히 알폰스가 자신의 욕실에 가서 따로 목욕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함께 목욕을 한다니! 그와는 이미 볼 거 다 본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새삼스럽게 함께 씻는 행위가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녀가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알폰스가 옷을 완전히 벗었다. 단단한 근육으로 잘 짜인 그의 나신에 클로에는 선이 아름답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니, 지금 남의 몸 구경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클로에는 자신이 저도 모르게 그의 몸을 넋을 놓고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부끄러움에 고개를 푹 숙였다.

그때 옆에서 찰박이는 물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샌가 알폰스가 욕조에 들어오고 있었다.

대단히 큰 도자기 욕조는 5~6명이 들어와도 충분할 것 같았다. 물에 들어온 알폰스는 클로에를 보았다. 뚜렷하다 못해 진득하기까지 한 그의 시선에 클로에가 얼굴을 붉혔다.

그는 클로에의 붉은 자국으로 얼룩덜룩한 몸을 찬찬히 살펴보고 있었다. 그것도 적잖은 만족감을 담아서.

클로에의 이런 모습은 오로지 그만의 것이었다. 그녀와의 은밀한 시간도, 열에 달뜬 그녀의 달콤한 목소리도.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속에서 다시 한 번 뜨거운 충동이 끓어올랐다. 그는 클로에에게 다가갔다.

“부인.”

그가 심상찮은 눈빛을 하며 다가오자 클로에는 묘한 긴장감을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그녀의 몸을 끌어안으며 다시 한 번 입술로 그녀의 쇄골을 탐하기 시작했다. 입욕제가 들어간 물에 몸을 담근 그녀의 육체는 딱 알맞게 따끈해져 있었고, 좋은 향기가 났다.

“이 짐승! 대체 얼마나 해야 만족할 거예요? 정말 이런 사람인 줄 몰랐어. 신사적인 사람인 줄 알았는데…….”

클로에가 부끄러워하며 그의 몸을 밀어냈다.

하지만 알폰스는 굴하지 않았다. 그는 묘한 눈빛을 하며 눈꼬리를 곱게 접었다. 그가 클로에의 젖은 턱선을 다정하게 쓸어내리며 물었다.

“짐승이라니 서운합니다. 부인은 법과 신의 인정을 받은 저의 하나뿐인 반려일진데, 그런 당신과 금슬이 좋은 것도 죄가 됩니까?”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그의 매혹적인 붉은 눈을 들여다보며 그 중저음의 음성을 듣고 있자면, 말도 안 되는 궤변이라도 그럴싸하게 들리는 착각이 일어났다.

“그, 그런 건……. 저는 그런 뜻이 아니라.”

알폰스는 클로에가 망설이는 틈을 결코 놓치는 법이 없었다. 그가 기름칠이라도 한 듯 매끄러운 혀로 말했다.

“모르셨습니까? 제가 이렇게까지 욕정하는 사람은 오직 부인 한 사람뿐입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오직 한 여자만 보는 사람, 그런 사람이 신사가 아니고 뭡니까?”

클로에는 어찌할 줄을 몰랐다. 전라의 그를 마주하고 있는 상태이기에 더 그런지도 몰랐다. 욕실을 가득 채운 이 달콤하고 매혹적인 향기가 더더욱 머릿속을 몽롱하게 만들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게 주의를 흩뜨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 그럼……. 아까 그 말은 취소할게요. 제가 너무했어요.”

그녀가 풀죽은 강아지 같은 태도로 말했다.

이 여자를 어쩌면 좋지.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알폰스는 인생에서 거의 유일하게도 한바탕 웃음이라도 터뜨리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이 여자는 대체 뭘 먹고 이렇게 귀여운 거지. 사람이 굳이 이렇게까지 사랑스러워야 할 필요가 있는 건가?

사업과 관련된 일을 할 땐 누구보다도 수완 좋은 사업가인 그녀가 사실은 이렇게나 순진하고 물러터진 일면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당장이라도 잡아먹고 싶어 참을 수 없게 만들었다.

“괜찮습니다.”

알폰스는 기뻐서 쾌재라도 부르고 싶은 마음을 언제나와 같은 평온한 얼굴 뒤에 숨긴 채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그러면서, 그녀의 목덜미를 입에 물었다.

“앗, 으읏……!”

클로에는 움찔 몸을 떨었지만 그를 밀어내지는 않았다.

“사실은, 부인을 보고 이렇게 되었습니다.”

알폰스는 그녀의 손을 끌어당겨 자신의 분신에 와 닿게 만들었다. 바로 방금 전 사정했는데도, 언제 그랬냐는 듯 그의 물건은 분연히 몸을 일으켜 다시 그 우람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손에 와 닿은 거대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클로에는 화들짝 놀랐다. 눈으로는 몇 번 보았지만, 그것을 직접 만진 것은 처음이었다.

그것의 촉감은 매우 이상했다. 한 손에 다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크고, 따뜻하고, 단단했으나 그 표면은 반질반질하고 보드라웠다.

그의 분신을 만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너무 부끄러워서 금방이라도 얼굴이 터져 버릴 것 같았지만 어쩐지 싫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쯤은 더 만져 보고 싶기도 했다.

‘내가 이것을 잘 다루면 그의 표정도 달라질까?’

클로에는 두 뺨을 붉힌 채 알폰스의 얼굴을 힐끔거렸다. 그의 단정한 얼굴엔 엷은 미소만이 떠올라 있을 뿐이었다.

그 단정한 얼굴이 찌푸려지는 모습은 과연 어떨까? 그가 저 매끄러운 이마를 있는 대로 일그러뜨리고, 대리석처럼 흰 피부가 발갛게 달아오른다면 어떨까.

클로에는 깜짝 놀랐다. 아주 한순간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척추를 따라 찌릿찌릿 전기가 오르고, 아랫배 깊은 곳이 뜨거워지는 것만 같았다. 순간 허리에 힘이 풀려 그녀는 거의 주저앉을 뻔했다.

‘말도 안 돼. 방금 그렇게나 했는데도…….’

단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다. 그녀는 성욕이 적은 편이면 적은 편이었지 결코 많은 편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단 몇 달 만에 음란해진 것만 같아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그녀의 그런 생각을 읽어 내기라도 한 듯이, 알폰스는 눈을 깔아 내리며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한 번 만져 보셔도 좋습니다.”

“하, 하지만……. 저, 별로 잘하지 못해요. 만족시켜 드릴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데…….”

클로에가 얼굴을 빨갛게 붉힌 채 주저하며 말했다.

알폰스는 걱정 말라는 듯 그녀의 얼굴 이곳저곳에 입을 맞추었다.

“그런 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녀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어 덮으며 그가 속삭였다.

“부인이 손대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전 참을 수 없을 지경입니다.”

“네?”

이 사람은 아까부터 대체 왜 이러는 걸까. 굉장히 금욕적이고 로봇처럼 최소한의 욕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인 줄로만 알았는데 제법 유혹적인 말도 할 줄 아는 것 같았다.

하긴 그랬다. 최근 갑자기 한 달 1회로 고정되어 있던 관계 횟수를 늘리자고 하지를 않나. 자꾸만 그녀를 성적으로 유혹하지를 않나…….

‘의외로 바람둥이 기질이 있는 걸까? 그게 아니면…….’

클로에는 생각했다.

‘……진심으로 내게 성적 끌림을 느껴서?’

그렇게 생각하자, 뜨거운 무언가가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더 이상 욕조를 채우고 있는 따뜻한 물 때문이라고 변명할 수도 없을 정도로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아니야, 설마 그럴 리가 없잖아. 계약 결혼으로 이루어진 관계고, 클로에를 14개월이나 방치했는걸. 좋은 사람인 것은 사실이지만, 진심으로 끌림을 느낀다거나 그런 건 아닐 거야.’

그의 것을 가볍게 쥐었다. 조심스럽게 위로 쓸어 올려 보았다.

남자의 성기를 가져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좋은지 영 아리송했다. 적당히, 살아오면서 보고 들은 것들을 떠올리려 애쓰며 클로에는 그것을 감싸 쥔 손을 위아래로 움직여 보았다.

단단하고 뜨거운 그것의 끝에서 무언가가 만져졌다. 다른 손으로 만져 보니 무언가 투명하고 미끌미끌한 액체가 조금씩 나오고 있는 것 같았다. 조금 미끌거리던 그것은 욕조 안의 물에 섞여 사라졌다.

‘내가 잘 하고 있는 게 맞나?’

클로에는 부끄러움을 참으며 알폰스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반듯하고 아름다운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패어 있었다. 그는 단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모습으로 인상을 쓴 채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매우 아름다우면서도 유혹적이어서 클로에는 순간 숨을 삼켰다.

눈이 마주치자, 그의 붉고 형형한 눈빛이 와닿는 것이 느껴졌다. 늘 차가워 보였던 그 눈 속에 불꽃 같은 정염이 일렁이는 것을 클로에는 볼 수 있었다.

“당신은 정말…….”

그가 입술을 짓씹으며 중얼거렸다.

클로에는 부끄러워하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하지만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가 먼저 덤벼들었으니까.

알폰스는 마치 덮치듯 그녀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잡아먹을 듯한 키스에 그가 여유를 상당히 잃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 사실이 어쩐지 만족스러웠다.

“음, 으음…….”

그녀를 집어삼킬 것만 같은, 구석구석까지 핥아 내려가는 거친 입맞춤에 숨이 벅차 하면서도 클로에는 쥐고 있는 것을 놓지 않았다. 그러긴커녕, 머릿속이 몽롱해지니 더 대담해져서, 한 손으로는 그의 기둥을 매만지며 다른 손으로는 그 뿌리에 달린 음낭을 쥐고 쓰다듬었다.

그리 오래 만지지도 못했는데, 그가 먼저 신호를 주었다. 키스를 이어가는 동시에, 더 참을 수 없다는 듯 그가 클로에의 두 다리를 벌렸다. 클로에는 두근거림과 떨림을 느끼며 그의 것을 쥐고 있던 손을 놓았다. 곧, 그녀의 내부로 그 커다랗고 익숙한 물건이 진입하는 것이 느껴졌다.

“으응, 읍…… 후우…….”

이미 한 차례 행위를 한 후인 데다가, 그의 것을 만지는 일이 생각 외로 흥분되었는지 그녀는 충분히 젖어 있었다. 그의 것은 조금의 어려움 없이 매끄러운 움직임으로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왔다.

그제야 알폰스는 입술을 떼었고, 숨을 돌릴 틈이 생겼다.

클로에는 젖은 눈을 하고 그를 보았다.

“알, 폰스. 아…….”

“어떻게 이렇게 예쁩니까.”

알폰스가 속삭였다.

“당신보다 아름다운 사람은 없습니다. 어디에도.”

그는 진심으로 기쁘고, 행복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니 클로에도 무척 만족스럽고 기뻤다.

그가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알폰스의 귀두 끝이 내벽을 긁어내리는 것을 느끼고 클로에는 허리를 휘었다.

“앗, 하아아……! 응, 아아……!”

알폰스는 그런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보물처럼 끌어안고 끊임없이 여기저기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의 뺨에도, 이마에도, 목에도, 가슴에도, 쇄골에도. 가벼운 버드 키스일 뿐인데도 그의 입술이 닿는 곳마다 뜨거운 열기가 퍼졌다.

그 달콤한 입맞춤과 대조적으로 허릿짓은 격렬해서, 욕조의 물이 마구 넘쳐흘렀다. 물의 무게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금도 힘들지 않은 듯 격렬한 행위를 계속했다.

“앗, 하으, 알, 폰스! 앗, 앙……!”

클로에는 그의 다정한 상반신과 자비 없는 하반신 중 어느 쪽에 장단을 맞춰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목을 뒤로 힘껏 젖히자, 젖은 갈색 머리카락이 하얀 욕조 위에 흐트러졌다.

그를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쳤다. 쾌감이 온몸을 때릴 때마다 눈앞이 번쩍였고, 사지가 후들후들 떨리며, 발가락이 곱아 들었다. 무엇이라도 잡지 않으면 이 자극에 휩쓸려가 버릴 것만 같아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알폰스의 어깨를 감싸 안고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알폰스의 이마에서 물인지 땀인지 모를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그는 허리 밑으로는 클로에를 마구 몰아붙이면서도 그녀가 절정에 오르는 것을 도와주려는 것인지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음핵을 짓뭉갰다. 물과 애액에 미끌미끌하게 젖은 그곳에서부터 벼락처럼 날카로운 쾌감이 몸을 찌르고 들어와 클로에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아아, 아, 하아……! 아아앗!”

결국 클로에의 허리가 마구 비틀렸다. 그녀는 정신을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머릿속은 새하얘졌고, 눈에서는 눈물이 마구 흘러내렸다.

“크윽!”

알폰스가 모든 것을 그녀의 안에 쏟아낸 것은, 한도 끝도 없이 올라가던 클로에가 지상에 돌아온 후였다.

행위가 끝난 뒤에도 두 사람은 한참이나 끌어안고 있었다. 클로에가 주변을 살필 수 있을 정도로 기운을 되찾았을 때, 욕실은 이미 엉망이 되어 있었다. 남아 있는 욕조의 물은 반도 되지 않았고, 배수로도 없는 욕실 바닥에는 찰랑일 정도로 물이 가득했다.

뒷정리를 자기 손으로 할 필요는 없지만 클로에는 그래서 더 뒷정리를 할 사람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이, 이제…… 제대로 씻을까요?”

클로에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욕실에 들어온 지 한참이 됐지만 제대로 된 목욕은 이제야 시작이었다.

* * *

콜린 부인을 비롯해 불충한 사용인들을 한꺼번에 해고했던 사건 이후 클로에에게 새로운 시녀와 하녀들이 들어왔다. 시녀는 1명, 하녀는 3명이었다. 이때 하녀들 중에는 과거의 하녀였던 니나와 빨래 하녀였던 엘리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클로에에게 무척 충직했으며, 그녀가 저택 내에 있을 때 그녀를 도와주는 역할을 했다. 여진이 저택 외부의 일을 도와주는 사람이라면 그들은 저택 내부의 일을 돕는 사람인 것이다.

클로에 역시 그들을 무척 아꼈다. 종종 그들을 티룸으로 데려가서 작은 티파티를 하기도 할 정도로. 클로에와 함께 차를 마시다 보니 그들 역시 차를 무척 좋아하게 되었다.

시녀와 하녀들을 이끌고 티룸에 차를 마시러 온 평화로운 오후였다.

“저…… 죄송하지만 화장실을 좀 다녀올게요.”

하녀들 중 한 명인 니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그녀를 보며 새 하녀인 로지가 웃었다.

“또? 니나는 화장실에 자주 가는구나.”

“아, 아니에요.”

니나가 얼굴을 붉히며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장난기가 많은 로지는 그냥 넘어가 주질 않았다. 로지가 목소리를 낮추고 놀려댔다.

“니나는 오줌싸개래요.”

“로지!”

새로 들어온 시녀인 록우드 남작부인이 엄하게 소리쳤다.

“공작부인의 면전에서 그게 무슨 채신머리없는 짓이니?”

“아니에요, 록우드 부인.”

클로에가 웃었다. 그녀는 니나에게 화장실에 얼른 다녀오라는 뜻의 손짓을 했다. 많이 급했는지 니나가 후다닥 달려 나갔다.

니나가 돌아온 뒤, 차를 마시던 클로에가 입을 열었다.

“차에는 카페인이라는 성분이 들어 있단다. 카페인이 무엇인지 알고 있니?”

“아, 저는 알아요!”

로지가 제일 먼저 손을 들었다.

“커피에 많이 들어 있는 거 아닌가요?”

제국에서 커피는 비교적 상용화되었으므로 제국인들 사이에서 커피를 마시면 잠을 깰 수 있다는 것 정도는 상식선의 이야기였다. 특히나 커피를 즐겨 마시는 귀족가에서 일을 해 본 경험이 있던 로지는 더 그랬다.

클로에게 로지에게 웃어 주었다.

“그래, 맞아. 카페인은 커피에 많이 들어 있는 성분이지. 이 성분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잠이 오지 않게 하는 효능부터 단기 집중력 강화 등 다양한 역할을 한단다.”

“마님, 그럼 그걸 많이 먹으면 좋은 건가요?”

이번에는 엘리가 물었다. 클로에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카페인은 부작용도 가지고 있단다. 심장을 심하게 두근거리게 하거나, 손발이 저리거나 떨리기도 하고, 장을 자극해 배탈이 나게도 하지. 또한 카페인의 제일 주요한 부작용 중 하나가 이뇨 작용이란다. 화장실에 자주 가게 하는 거지.”

“그렇다면 니나가 화장실에 자주 갔던 게……!”

엘리의 말과 동시에 엘리와 로지가 동시에 니나를 돌아보았다. 니나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클로에가 가볍게 웃고는 말을 이었다.

“그래. 그것 역시 카페인의 작용 중 하나일 거야.”

“마님, 그건 커피에 더 많이 들어 있나요? 홍차에 더 많이 들어 있나요?”

로지가 호기심으로 눈을 빛내며 물었다. 클로에가 대답했다.

“같은 용량으로 따지자면 홍차가 커피보다 적게 들어 있단다. 홍차의 카페인은 커피의 약 절반 정도인데, 그래도 많이 마시다 보면 카페인의 부작용이 오게 되니 조심해야 한단다.”

차 한 모금을 더 마시고 클로에가 말을 이었다.

“특히 이뇨 작용은 신체에서 수분이 많이 빠져나가게 하니까 차나 커피를 마신 뒤엔 물을 충분히 마셔 줄 필요가 있단다. 너희도 티타임을 가진 뒤엔 물을 많이 마시도록 하렴.”

“네, 마님!”

하녀 세 명이 동시에 대답하곤 서로를 돌아보며 웃었다.

“마님, 그럼 차는 몸에 안 좋은 건가요?”

웃던 도중 로지가 물었다. 그녀의 당돌한 질문에 니나와 엘리가 깜짝 놀랐다.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클로에 역시 눈을 크게 떴다. 그녀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는 않아. 차에는 폴리페놀, 카테킨, 사포닌 등의 성분이 들어 있는데, 이 성분은 염증과 세균을 억제하고, 지방을 분해하고, 중금속을 배출하고 노화를 막는 데에 도움을 준단다.”

“우와, 역시 마님은 차의 전문가세요!”

엘리가 눈을 빛내며 감탄했다.

차가 건강에 미치는 효능에 대해서는 전생에서도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중 현대인에게 제일 유효한 효능은 ‘몸에 나쁘지 않다’는 것일 것이다.

전생의 세계에 존재하는 음료들 중 많은 수가 칼로리가 높고 당분이 과다하게 들어 있다. 하지만 차는 (설탕이나 우유를 넣지 않았다면) 칼로리가 제로다. 다른 음료 대신 차에 맛을 들이면 섭취 칼로리를 줄여 비만이나 동맥경화 등의 성인병을 예방할 수 있다.

클로에가 웃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뭐든 과유불급이기 마련이란다. 카페인도 있으니 차는 적당히 마시는 것이 좋아. 또한 차는 건강식품이나 영양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해. 차는 어디까지나 기호 식품이니만큼 마실 때 효능에 기대를 걸기보다는 그 맛과 향, 그리고 여유를 즐기는 것이 좋단다. 우리도 티타임 때 그런 것을 느끼도록 노력해 보자꾸나.”

클로에의 말에 하녀들과 시녀 록우드 부인이 감탄했다. 클로에는 차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을뿐더러 무척 사랑했고, 그와 동시에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고 있었다.

차에 대한 그녀의 인식의 깊이는 상당했다. 생각이 무척 깊은 것이다.

클로에가 과로로 쓰러진 사건 뒤로 그녀는 춤을 교습받게 되었다. 그녀에게 춤을 가르쳐 주는 사람은 메이너드 백작부인으로, 숙녀를 위한 예절 교육에 대해서는 정평이 난 사람이었다.

“자, 공작부인. 오늘은 그동안 배우신 성과를 시험해 보겠습니다.”

‘시험’이라는 말에 클로에는 저도 모르게 긴장이 됐다. 시험이라는 것을 마지막으로 겪어 본 게 언제였더라? 과거에는 그녀가 이런 식으로 시험을 다시 치게 되리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었다.

메이너드 백작부인은 사뿐사뿐한 걸음으로 클로에에게 다가왔다. 그녀가 말했다.

“제가 신사의 역할을 할 테니 공작부인께서는 숙녀의 역할을 해 주세요.”

“네, 알겠어요.”

클로에는 머릿속에 그동안 배웠던 스텝과 동작을 그려 보았다. 하지만 긴장이 되어서인지 평소보다 잘 떠오르지 않았다.

“힘내세요, 마님!”

여린 목소리에 클로에가 고개를 돌렸다. 문 옆에 클로에의 시녀와 하녀들이 나란히 서서 대기 중이었는데, 그중 엘리가 클로에를 응원하고 있었다.

“맞아요, 힘내세요!”

“힘내세요, 마님!”

엘리에 뒤이어 로지와 니나까지도 응원을 했다.

“…….”

심지어는 대단히 차분하고 깐깐한 성품의 록우드 부인조차 응원의 뜻을 담아 목례했다.

그들의 응원을 받으니 클로에는 긴장이 조금쯤 날아가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쨌든 대단히 기분이 좋아졌다. 클로에는 그들에게 생긋 웃어 주곤 다시 메이너드 부인을 보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갑자기 강습실로 쓰고 있던 방의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찾아온 것이다.

누구지? 지금 이 시간에 올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텐데. 클로에의 얼굴에 의문이 떠오름과 동시에 메이너드 부인이 외쳤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그러자 모두의 표정이 제각각 변했다. 예컨대 다른 사람들은 놀라워하거나 겁을 먹었고, 클로에의 얼굴은 반가움으로 환해졌다.

“공작 각하, 강녕하셨습니까.”

메이너드 부인과 록우드 부인이 예법대로 인사했다. 하녀들 역시 치마폭을 펼쳐 들며 고개를 숙였다. 클로에는 그에게로 달려갔다.

“알폰스! 여긴 어쩐 일이세요?”

정장을 반듯하게 차려입은 알폰스가 그녀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클로에는 자연스럽게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러고 나서야 알폰스는 다른 사람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일어나도 좋다는 뜻의 눈짓을 한 뒤 그가 말했다.

“아내가 오늘 시험을 친다는 소식을 들었기에 찾아왔습니다. 참관해도 되겠습니까.”

그간 공작부인을 가르치느라 공작저에 여러 번 드나들었던 메이너드 부인이었으나 그녀도 그 유명한 바텐베르크 공작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약간 긴장한 태도로 말했다.

“물론입니다, 각하.”

“그거 잘 됐군요.”

알폰스는 내려놓기 싫은 듯이 손에 쥐고 있던 클로에의 손을 한 번 보고는 그녀의 손을 놓았다. 여전히 반가움에 눈을 빛내고 있는 클로에에게 그가 말했다.

“긴장하지 마십시오.”

‘긴장하지 마십시오’라니? 클로에는 이렇게 건조한 응원은 난생처음 보았다. 참 그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폰스가 물러나고 메이너드 부인이 헛기침을 했다.

“자, 그럼 이제 정말로 시험을 시작해 보겠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제가 신사의 역할이고 공작부인께선 숙녀의 역할을 하시는 겁니다.”

그때였다.

<다음 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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