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장
“생각보다 전문가인 것 같은데요.”
“어떻게 제국인이 차에 대해 저렇게까지 잘 아는 거지?”
상인들이 바라트 왕국의 언어로 서로에게 속삭였다.
그러나 바라트 어를 모르는 클로에는 그저 생긋 웃으며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이 다섯 가지의 차를 시음해 볼 수 있을까요?”
바라트의 상인들은 공작저에 차를 팔러 오면서 상대가 차에 대해 거의 모르는 문외한일 것을 상정했다. 쓰레기 같은 차를 상급품이라고 속여 비싸게 팔 생각까진 없었지만, 그렇다고 아주 정직하게 필요 이상의 정보를 전달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다원의 특징이 어쩌니, 등급이 어쩌니 설명해 보았자 알아듣지 못할 테니까.
그런데 예상 밖의 일이 벌어졌다. 상대가 생각 외로 차에 대해 전문가였던 것이다.
차를 우리러 부엌에 우르르 몰려간 상인들이 흥분해 떠들어 댔다. 마침내 당사자인 공작부인에게서 벗어났으니 말문이 트인 것이다.
중년의 남자가 듣다못해 소리쳤다.
“조용! 듣는 귀가 이렇게 많은데 못 하는 말이 없구나.”
웬 남자들이 몰려와 외국어로 떠들어 대니 놀란 부엌 하녀들이 제각기 호기심의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상인들 중 한 명이 투덜거렸다.
“어차피 우리말인데 뭐 어때요, 상단장님.”
“그 공작부인 정말로 수상한데. 혹시 제국인이 아닌 거 아닙니까? 외국에서 시집을 왔다거나…….”
“그런 것치고는 너무 전형적인 제국인의 얼굴이던데.”
“어떻기는 뭐가 어떠냐는 말이냐. 애초에 차를 우리기엔 한 명만 더 따라와도 충분할 것을 한꺼번에 우르르 몰려와서는…….”
상단장은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전부 다 따라오겠다고 하는 것을 거절했었어야 했다.
“자네들은 그 소문도 못 들어 보았나? 두 달 전 제국에 있는 모든 차 물량을 싹싹 긁어 갔다는 제국인 말이다.”
“아, 그 제국인이요? 물론 들어 보았죠.”
“제국은 물론 수도와 가까운 외국의 물량도 전부 긁어 갔다면서요?”
“그 압도적인 재력은 거의 전설급이었다잖습니까. 덕분에 이베리아에선 한동안 시민들이 마실 차도 없었다던데요.”
“그 소문을 아는 자네들이 그 제국인이 바로 이곳의 공작이라는 사실도 몰랐단 말인가?”
“그렇…… 네에에?”
상인들이 놀라 소리쳤다. 상단장이 혀를 찼다.
“저런, 그런 기본적인 사실도 모르고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 그래서야 우리 푸심빙 상단의 일원이라고 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그…… 그렇다는 건…… 아까 본 그 공작부인이.”
“그 공작부인이 바로 그 제국의 모든 차를 수집한 사람이라는 말인가요?”
“나이도 어려 보이던데!”
상인들이 입을 떡 벌렸다. 그들은 제국의 차를 싹싹 긁어모았다는 그 사람을 괴팍한 수집 취미를 가진 부자 노인네 정도로 상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어서 차를 우려서 가지고 가자. 공작부인이 왜 이렇게 안 오나 하고 이상하게 여기겠다.”
“아차, 깜빡하고 있었네요.”
“지금 당장 준비하겠습니다요.”
상인들이 물을 끓이러 부리나케 달려갔다.
잠시 뒤 총 다섯 주전자의 차가 우려져 나왔다. 클로에는 그것들을 차례대로 시음해 보았다.
전부 같은 다즐링이지만 다원에 따라 각기 풍미와 향기가 눈에 띄게 차이가 났다.
그리고 클로에가 차를 하나씩 맛을 볼 때마다 상인들의 놀람 역시 정도를 더해 갔다. 그녀의 차를 맛보는 능력과 표현력이 대단했던 것이다.
“이 다즐링은…… 어머, 정말 특이하네요.”
차를 한 모금 마신 클로에가 즐거운 듯 웃었다.
“첫 모금에선 아몬드 쿠키의 고소한 향과 태운 설탕의 달콤한 향이 났는데, 계속 마시다 보니 향신료와 같은 느낌이 들어요. 화려하고 다양한 향신료와 향이 강한 허브 같다고 해야 하나……. 아아, 재스민과 민트인가요? 언뜻 오렌지필의 향도 느껴지고요. 한 가지 차에서 이런 복합적인 향이 느껴지다니, 정말 재미있는 다즐링이에요.”
그리고 다음 차를 마시며, 이번에는.
“어머, 달콤한 사과의 향이 잔뜩 느껴지네요. 다즐링 특유의 풀냄새가 합쳐져 마치 풋사과 같아요. 그리고 함께 느껴지는 시트러스한 향이 마치 금귤 같은…….”
이라고 자신의 느낌을 중계하기 시작한 클로에를 보며 상인들 중 한 명이 질린 듯이 말했다.
“언제까지 저러려는 걸까요?”
다른 상인이 자신도 모른다는 의미로 고개를 저었다.
이 공작부인의 후각과 미각은…… 과연 뛰어났다. 어릴 적부터 차를 마시며 자란 상인들도 저렇게까지 예민하게 향을 구분할 수는 없었다. 저 정도면 바라트에서도 거의 훈련받은 전문가에 견줄 수준이었다.
‘제국인 중 저런 사람이 있을 줄이야, 정말 생각도 못 했어.’
상인들이 생각했다.
어쨌든 전문가 공작부인은 시음해 본 다섯 가지의 다즐링들 중 세 가지를 구매했다. 가짓수는 적어도 꽤 많은 분량을 한 번에 구매했을 뿐만 아니라 값도 후하게 쳐주어서 상인들은 고생해서 제국의 수도까지 온 보람을 느꼈다.
* * *
상인들은 좋은 거래를 해 헤벌쭉 기분이 좋은 얼굴로 돌아갔다. 클로에 역시 기분이 좋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즐거운 쇼핑이었어.’
역시 스트레스 해소에는 쇼핑만 한 것이 없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비록 오늘 구입한 분량 중 대부분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황실에 납품할 것이기는 했지만 그녀는 만족했다.
구입한 차 중 황실에 납품할 것을 따로 분류한 뒤 전부 정리하고 나니 타이밍 좋게 외근 나갔던 알폰스가 돌아왔다.
“다녀오셨어요?”
“예, 부인. 거래는 잘 마치셨습니까?”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여전히 상기된 뺨과 반짝반짝 빛나는 눈을 보고 알폰스는 어련히 즐겁게 잘했겠거니 생각했다. 그는 클로에가 차를 접할 때에는 늘 그런 얼굴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나치게 열심히 일하시는 것은 아닙니까, 부인. 병상에서 일어나신 것도 얼마 전이지 않습니까.”
물론 그의 말이 무색하게도 클로에는 지치기보단 생기로 넘쳤다. 신나게 놀다 온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그녀는 알폰스가 그렇게 자신을 걱정해 주는 것이 기분 좋았다.
‘이렇게 걱정도 할 줄 아는 사람인 줄, 처음에는 정말 몰랐는데.’
클로에는 알폰스에 대한 첫인상을 생각했다. 자신에게 한없이 무관심했던 알폰스. 차갑고 무서운 붉은 눈을 가진 알폰스. 그에 대해 잘 몰랐던 그때를 떠올리자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클로에는 솔직하게 말했다.
“우리, 많이 친해진 것 같네요.”
그 말에 알폰스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친해……졌습니까?”
클로에에 대한 연정은 자각했지만 자신과 그녀 사이의 관계는 도저히 가늠할 줄을 몰랐던 그였다. 여태까지 마음으로 가까워져 본 사람이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클로에가 사랑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그 모습을 보자 알폰스는 가슴속이 간질거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쩐지 따뜻하기도 하고 벅찬 감정. 그러나 그는 그것이 희망이라는 것만은 끝끝내 알지 못했다.
그때였다.
클로에는 굳이 떠올릴 필요가 없는 기억이 떠올랐다.
‘예전에 각하께선 언제나 제게 꽃을 보내곤 하셨죠. 제가 어딜 가든 바래다주시고, 따스한 눈길로 눈을 맞춰 주시곤 했는데, 그때의 즐거웠던 추억이 떠오르네요.’
클로에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것은 아리아나였다.
그녀가 어째서 무도회에서 자신의 험담을 했고, 다과회에서 어째서 거짓말을 했는지 클로에가 그 이유를 모를 리가 없었다.
아리아나는 명백하게 알폰스를 연모하고 있었다. 비록 추한 모습으로 발현되었긴 하지만 그 감정의 정체는 분명했다.
한때 그가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최악의 남편감이니 뭐니 생각하기는 했지만, 클로에는 자신을 질투하는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나며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그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자신을 사랑한다며 그런 짓들을 하는 사람들만 계속해서 만났다면 사랑 같은 건 진절머리가 날 만도 하지.’
어쨌든 그녀는 지금만으로도 좋았다. 그녀와 알폰스는 서로 사랑하지 않을지언정 서로를 소중히 위해주고 친하게 지내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한 클로에가 웃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알폰스. 제가 알폰스를 좋아하게 되는 일은 결코 없을 테니까요.”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알폰스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그는 자신이 표정이 많지 않음을 실로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잔인한 말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알폰스의 뇌리에 떠올랐다. 하필 아까와 같은 말을 해 놓은 직후에 이렇게 말할 필요는 뭐란 말인가.
그는 클로에가 잔인할 정도로 사랑스럽게 웃는 얼굴을 보았다. 혹여나 티끌만큼의 거짓의 증거라도 찾아내고 싶었으나 그런 것은 없었다. 그의 아내는 지금 진심을 담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기분을 한탄할 수도, 누군가를 원망할 수도 없다. 그는 자신이 클로에에게 어떤 말을 했고, 과거에 그녀를 어떻게 대했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이것은 결국 자신이 뿌린 씨앗이다. 그는 일찍이 그녀의 마음에 무관심의 씨앗을 뿌리고 거름을 주어 풍성히 자라게 했다. 싹을 틔운 무감정이 줄기를 뻗고 잎을 피워 열매를 맺었다.
그때에는 그 씨앗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얼마나 어리석은가.
결국 상념의 끝에 알폰스가 입에 담을 수 있었던 말은 이것뿐이었다.
“……그렇습니까.”
클로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을 돌렸다.
“네. 아, 그건 그렇고, 일전에 다과회에 대해 말씀드렸잖아요.”
“예.”
“이번에는 차 외에도 한 가지 준비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요…….”
저번에 두 번째 다과회에 대해 생각했을 때 클로에는 그에 대해 알폰스에게 미리 언질해 두었다. 그녀는 그동안 구체화해 둔 이번에 열 다과회에 대해 알폰스에게 소상히 설명했다.
물론 알폰스는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그저 클로에가 하는 말에,
“그렇게 하십시오.”
“부인이 원하신다면 저도 좋습니다.”
“예.”
라고 진심 없는 대답을 주워섬겼을 뿐이다.
한편 자신의 계획을 이야기하던 클로에는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알폰스가 자신의 말을 잘 듣고 있지 않음을 깨닫지 못해서는 아니었다.
‘왜 슬프지?’
즐거운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도 기분이 좋아지기는커녕 점점 가라앉기만 했다. 돌이켜 보면 아마 아까 알폰스에게 좋아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되새겼을 때부터 그랬던 것만 같다.
이내 그녀는 계획을 충분히 설명했다는 생각이 들자 알폰스와 더 함께 있지 않고 침실로 돌아와 쉬었다.
* * *
“어서 오시오.”
클로에가 들어선 곳은 작고 낡은 공방이었다. 천장이 낮은 그곳은 벽마다 빼곡히 달린 찬장에 도자기가 가득했다. 각종 식기와 꽃병 등의 가정에서 쓸 법한 생활용품이 대부분이었다.
“귀부인께서 오셨군. 의뢰하실 게 있소?”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클로에가 공방 끄트머리에 앉아 있던 노인을 돌아보았다. 주름진 이마를 가지고 있는 그는 눈이 나쁜지 얼굴에 걸 수 있게끔 되어 있는 확대경을 걸치고 있었다.
도자기 공방의 공방주, 멘디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클로에를 보았다. 그녀는 눈에 띄게 아름다웠고 좋은 옷을 입고 있었지만, 동행한 시녀는 한 명뿐이었다.
멘디스는 적당히 그녀가 하급 귀족이나 잘 사는 평민일 거라고 어림짐작했다.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주전자와 잔을 만들어 주셨으면 해서 왔어요.”
“커피팟과 커피잔이라면 기성품이 많소이다. 저쪽에 있으니 한번 골라 보시지요.”
“아니요, 제가 원하는 건 커피팟과 커피잔이 아니에요. 저는 찻주전자와 찻잔을 만들어 주셨으면 해서 여기 왔어요.”
멘디스가 놀란 눈으로 턱을 쓸었다. 찻주전자와 찻잔이라니? 도자기를 만드는 데 잔뼈가 굵은 그였으나 그런 의뢰는 처음 들어 보았다.
“찻주전자와 찻잔? 실례지만 커피잔과 무엇이 다르오?”
“찻잔은 향과 특유의 수색을 즐기기 위해 커피잔에 비해 넓은 형태를 띠고 있어요. 또 위아래가 길쭉한 커피팟과 달리 찻주전자는 찻잎의 점핑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둥근 모양을 띠죠.”
막힘없이 설명한 클로에가 시녀에게 눈짓했다. 시녀는 스케치북 하나를 꺼내 멘디스에게 내밀었다.
“도안을 그려 왔으니 보신다면 이해가 빠르실 거예요.”
클로에가 이번 다과회에서 내보이려고 하는 것은 차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번 기회에 티 세트를 선보이려 하고 있었다.
그동안 그녀가 쓰고 남들에게 보여 왔던 다구들은 전부 외국산이기에 제국인들이 쓰기에 불편하거나 디자인이 취향에 맞지 않았다. 클로에는 나름대로 제국 사람들이 좋아하고 편안히 쓸 수 있을 법한 디자인의 다구를 구상해 보았다.
그녀가 수도에서 제일 뛰어난 실력을 가졌다는 도자기 장인을 찾아온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스케치북을 넘겨 보며 멘디스는 흐음 소리를 냈다. 도안을 뚫어져라 쳐다보기도 하고, 눈을 가늘게 뜨기도 하고, 확대경으로 조심스럽게 살펴보기도 했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클로에의 도안을 오랜 시간 유심히 지켜보던 그가 마침내 한 말은…….
“……이건 거북이요?”
“찻주전자예요.”
“……이건 생쥐이고?”
“찻잔이에요!”
클로에의 얼굴이 붉어졌다. 정성 들여 그린 그림이었으나 안타깝게도 그녀의 그림 솜씨는 차 우리는 실력만큼 뛰어나지 못했다.
결국 클로에는 도안으로 장인을 이해시키는 것을 포기하고, 대신 자신이 원하는 디자인을 소상히 설명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과연 수도에서 제일가는 도자기 장인이라는 이름값이 헛된 것은 아니었는지 공장주는 상당한 프로 의식의 소유자였다. 클로에의 설명을 한 마디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유심히 듣고, 많은 것을 물어보고 받아 적었다.
제국 내에서는 거의 제작되어 본 역사가 없는 ‘찻주전자’ 그리고 ‘찻잔’을 설명하는 데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클로에가 동행한 시녀와 함께 공방을 나섰을 때는 이미 해가 지기 시작한 뒤였다.
약속한 시일이 지난 뒤, 클로에는 다시 한 번 공방을 찾았다.
“어서 오시오. 마침 잘 오셨소. 부인께서 주문하신 물건이 바로 어제 완성되었소.”
멘디스는 클로에를 공방의 안쪽에 있는 작은 방으로 안내했다. 그곳에서 그녀가 본 것은…….
“어머나!”
그곳에는 네 가지의 티 세트가 있었다. 짙은 청색으로 레이스와 같은 섬세한 무늬가 그려져 있는 것도 있었고, 붉고 노란 모란이 그려져 있는 것도 있었다. 어떤 것은 귀엽고 화사한 잔꽃무늬를 두르고 있었고 어떤 것은 단색 위주의 디자인이라 차분해 보였다. 하나같이 가장자리에는 금테나 은테가 둘러 있어 우아하고 고급스러워 보였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제국에서 최신 유행의 세련된 디자인들이었다. 귀부인들 사이에서는 자기 저택의 부엌 찬장마다 이런 스타일의 식기로 채우고 있지 않으면 목을 세우고 다닐 수 없을 정도였다.
클로에는 감탄하며 그 아름다운 곡선과 무늬를 들여다보았다. 비교적 형태가 높은 편인 커피잔과 달리 넓은 입구를 가지고 있는 찻잔은 꼭 반쯤 피어난 꽃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떻소?”
그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돌렸다. 공방주 멘디스는 이마 가득한 주름살 아래로 자부심과 고객의 반응에 대한 호기심이 섞인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클로에가 솔직하게 말했다.
“정말 마음에 들어요. 이곳에 맡기기를 잘했네요.”
“흐흠!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오.”
물론 의뢰하던 당시에 가격에 대해서도 미리 상담해 두었다. 멘디스는 이 이름 모를 부인에게 제법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돈을 아끼려는 기색이 없고 당시에도 자신의 작품을 후하게 쳐주었던 것이다.
클로에는 수표책을 꺼냈다. 비록 바텐베르크가의 예산을 사용해도 괜찮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그녀는 개인 자금을 쓰고 싶었다. 트리플 스위트는 상당히 잘나가는 사업이었고 이제 그녀는 적지 않은 돈을 벌고 있었다. 더 이상 남편의 재력에 기댈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녀는 수표에 숫자 몇 개를 적어 멘디스에게 넘겨주었다.
그것을 받아 들어 확인한 멘디스는…… 깜짝 놀라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일전에 상의했던 금액보다 몇 배나 더 되는 액수였던 것이다!
“아니, 이보시오! 이것은…….”
“작품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 보이는 제 성의이니 거절하지 말아 주세요.”
생긋 웃으며 말한 클로에는 미리 불러 둔 사람들을 데려와 물건을 옮기게 했다.
멘디스는 혼란스러웠다. 애초에 자신의 작품값은 결코 싼 편이 아니다. 찻잔과 찻주전자라는 난생처음 만들어 보는 물건을 만들었으니 더더욱 비쌀 수밖엔 없었다. 그런데 그것을 몇 배로 쳐주기까지 하다니, 이 귀부인은 엄청난 재력가임이 틀림없었다.
클로에가 짐을 옮기는 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동안 멘디스는 그녀의 시녀에게 은근슬쩍 물어보았다.
“이보시오, 실례지만 저 부인의 성함이 어찌 되시는지 여쭤봐도 되겠소이까?”
“그걸 아직까지 모르셨단 말인가요? 저희 마님은 클로에 바텐베르크 공작부인이세요.”
공작부인! 멘디스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는 클로에에게 달려가 허리를 숙였다.
“감히 공작부인을 몰라뵈어 송구합니다! 부디 이 어리석은 노인네의 실례를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어머, 저는 괜찮으니 어서 일어나세요.”
클로에가 웃으며 말했다. 멘디스는 여전히 등골에서 땀이 흘렀다. 수도에서도 명성 있는 공방을 운영하고 있기에 높은 사람들을 제법 보았고 얼굴을 익혔다고 자부하지만, 바텐베르크 부인은 그도 난생처음 보았기에 이런 실수를 하고 말았다.
양쪽 모두 만족할 만한 거래를 한 뒤, 클로에는 멘디스의 환송을 받으며 마차를 타고 저택으로 돌아갔다.
마침내 두 번째 다과회의 날이 밝았다.
차와 곁들이는 간식, 다구와 응접실의 인테리어 등 클로에는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하나하나 체크했다.
그녀가 다구를 의뢰한 곳은 멘디스의 공방뿐이 아니었다. 공장에서 제작하는 것이 아닌 사람이 손으로 하나하나 빚어내는 것이라 필요한 모든 다구를 멘디스의 공방에서만 주문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몇 군데의 공방을 다니며 발품을 팔았고, 결과적으로 오늘 필요한 모든 다구를 준비할 수 있었다.
다과회의 규모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 각 좌석마다 테이블웨어와 다구를 세팅한 클로에는 테이블을 생화와 과일로 장식하게 했다.
준비를 끝마치고 나니 타이밍 좋게 첫 번째 손님이 도착했다. 클로에는 손님들을 한 명씩 맞이하기 시작했다.
“오랜만이에요, 바텐베르크 부인. 초청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어서 오세요, 로네펠트 후작 부인.”
이번 다과회의 손님들은 클로에가 평소 사교계에서 마주친 적이 있고 그녀와 어느 정도 친분이 있는 사람들을 위주로 구성되었다.
“바텐베르크 부인! 이렇게 만나서 기뻐요.”
“어서 와요, 포트넘 부인.”
클로에의 첫 친우인 포트넘 부인 역시 빠지지 않았다. 그녀는 클로에와 마주치자마자 가벼운 포옹을 한 뒤 말했다.
“오늘은 어떤 차를 선보여 주실지 무척 기대를 하고 왔답니다.”
“기대에 부응해야 할 텐데 걱정이네요.”
하나둘 도착한 손님들은 지정된 자리에 앉았다. 은제 식기와 외국산 도자기들은 아름답고 고급스러웠으나 그들 모두가 여러 번 본 친숙한 물건이었다.
그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따로 있었다.
“어머나, 정말 예쁜 커피잔이네요.”
“그러게요. 입구가 넓은 게 꼭 반쯤 피어난 꽃 같아요.”
“이 커피팟도 보세요. 참 귀엽지 않나요?”
“이렇게 동그란 주전자는 처음 봐요. 무척 사랑스럽네요.”
클로에가 말했다.
“그것들은 커피잔과 커피팟이 아니라 찻잔과 티팟이랍니다. 차를 우리고 마시는 데에 특화되어있지요.”
“어머, 커피잔과 찻잔이 다른가요?”
일전에 멘디스가 그녀에게 했던 질문과 똑같았다. 클로에는 친절하고 차분하게 커피잔과 찻잔의 차이, 커피팟과 티팟의 차이를 설명했다.
“……또한 커피팟은 드립핑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위아래가 길지만 티팟은 찻잎이 점핑하기 쉽도록 형태가 둥글답니다.”
“어쩜! 저도 커피팟과 커피잔을 쓰긴 하지만 왜 그렇게 생겼는지는 몰랐어요. 바텐베르크 부인은 정말 박식하시군요.”
“저도 이런 걸 가지고 싶네요. 어디서 구하셨어요?”
“트리플 스위트에서 살 수 있나요?”
몇 명의 부인들이 감탄했다. 클로에가 수줍게 웃었다.
그때 하녀들에 의해 곁들이는 음식과 차가 날라져 왔다.
오늘의 참가자들은 모두 클로에와 어느 정도 안면과 인연이 있었고, 따라서 그녀가 차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찻잔과 티팟을 내놓은 시점에서 오늘의 다과회에서 클로에가 차를 내올 것이라는 것을 익히 짐작했다.
그러나 오늘 나온 차의 모습에 모두가 당황할 수밖에는 없었다.
오늘 클로에가 내놓은 것은 로얄 밀크티였다. 찻잎을 우유에 넣어 끓여 만든 로얄 밀크티.
부드러운 빛의 갈색을 띠는 로얄 밀크티는 평범한 차나 물에 비해서는 밀도 있는 질감이었으며, 또 고소하고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달콤한 향이 났다.
클로에는 사람들이 낯설어하는 것을 보고도 당황하지 않았다. 이미 두 번이나 남에게 밀크티를 선보인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얼 그레이 맛 밀크잼과 비슷한 거예요. 얼 그레이 맛 밀크잼 역시 홍차 잎과 우유, 설탕을 넣어 졸여 만드는 거니까요.”
이 자리의 사람들은 대부분 요즘 유행한다는 밀크잼을 먹어 본 적이 있었다. 따라서 좀 더 쉽게 밀크티에 대한 거부감을 내려놓고 맛을 보았다.
“어머! 정말 좋은 향이 나네요.”
“정말 달콤하고 부드러워요!”
그들 중 이런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정말이에요. 저는 사실 차가 무슨 맛인지 잘 모르겠던데, 이런 차라면 집에 두고 얼마든지 마실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단 것을 좋아해서 홍차에 꼭 설탕을 넣는데, 이 차는 정말 입맛에 딱 맞네요!”
평소 차에서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한 사람들이나 단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서 특히 호평이었다. 아무래도 우유와 설탕이 들어가 좀 더 부드럽고 달콤한 친근한 맛이 나다 보니 다가가기가 쉬운 것 같았다.
순식간에 밀크티 한 잔을 비운 포트넘 부인이 말했다.
“그건 그렇고, 이 차에서는 꼭 위스키 향이 나는 것 같네요.”
“어머! 맞아요, 포트넘 부인. 이번에는 밀크티에 위스키를 넣고 끓여 봤어요. 밀크티에 위스키를 넣으면 풍미가 무척 좋아지거든요.”
클로에가 반가워했다.
“싱글 몰트 위스키에 바닐라빈의 깍지를 넣어 숙성시킨 뒤 밀크티에 첨가했답니다. 팔팔 끓여서 알코올은 날려 보냈으니 안심하세요.”
“바닐라빈이라니! 정말 정성이 많이 들어갔군요!”
전생에서는 흔히 ‘로얄 밀크티’라고 부르는 음료가 두 가지로 나뉘었다. 일본식 로얄 밀크티와 영국식 로얄 밀크티가 그것이다.
영국에서 로얄 밀크티라고 부르는 음료는 위스키를 넣어 끓여 만든 음료로 위스키 특유의 몰트 향이 풍부하게 느껴져 풍미가 무척 매력적이다. 일본식 로얄 밀크티는 이러한 영국식 밀크티를 간소화한 것이다. 일본에서는 위스키의 첨가 여부와 관계없이 찻잎을 우유에 넣어 끓여 만든 음료를 전부 로얄 밀크티라고 부른다.
흔히 한국에서 말하는 로얄 밀크티는 일본식인 경우가 많다.
클로에는 일본식 로얄 밀크티 역시 좋아했지만 오늘은 좀 더 특별한 메뉴를 내놓고 싶었다. 그래서 시험적으로 영국식 로얄 밀크티를 내놓은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클로에는 밀크티 역시 판매 목록에 추가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다과회가 마무리된 그 날 저녁이었다. 귀택한 알폰스는 언제나처럼 클로에와 식사를 한 뒤 차를 마셨다.
클로에는 알폰스에게 다과회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클로에는 자기가 겪었던 재미있는 이야기를 알폰스에게 이야기해 주는 것을 좋아했다.
“……밀크티에 위스키를 넣는 것이 정말 재미있는 아이디어였대요. 모처럼 칭찬을 들어서 즐거웠어요.”
“그래서 이 차에도 위스키를 넣으신 거군요.”
알폰스가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클로에가 반갑게 대답했다.
“네, 맞아요. 밀크티가 아닌 일반 스트레이트 홍차에 위스키를 넣어도 아주 맛이 좋거든요.”
스트레이트 홍차에 위스키를 한 방울 넣어 마시는 방법은 러시아에서 유래된 것이었다. 클로에가 기대감 어린 얼굴로 물었다.
“어때요, 알폰스? 위스키를 넣은 홍차는 입맛에 맞으세요?”
“예. 마음에 듭니다.”
지극히 담담한 말이었으나 클로에는 기쁜 듯이 미소 지었다.
그녀를 보고 있자니 알폰스는 가슴속이 답답해졌다.
‘제가 알폰스를 좋아하게 되는 일은 결코 없을 테니까요.’
그는 이것이 자신이 뿌린 씨앗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후까지 옷깃을 잡아당기는 건 체념이 아닌 미련이었다.
‘만일 조금이라도 일찍 깨달았더라면 달라졌을까.’
이제 와서 알폰스는 자신이 13개월이나 그녀를 냉대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저 서로 인사나 하고, 필요한 것은 뭐든 마련해 주고, 간혹 부부 동반 모임에 함께 참석하고, 한 달에 한 번 관계를 맺는 정도면 남편으로서 필요한 예는 다한 줄 알았다. 그것이 미래에 얼마만큼의 후회가 될 줄은 모르고.
왜 그랬지. 어째서 이 여자를 방치했지. 그는 살면서 거의 겪어 본 적 없을 정도로 가슴이 아팠다. 보이지 않는 손이 심장을 쥐어뜯는 것만 같았다.
클로에, 그녀는 그때의 일에 대해서 한 번도 입에 담은 적이 없었으나 오히려 그래서 더 마음이 아팠다. 내 어리석은 행동 때문에, 이기적인 생각에, 얼마나 원망스러웠을까. 얼마나…… 외로웠을까.
찻잔을 비운 뒤 알폰스가 말했다.
“부인.”
“네?”
클로에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알폰스가 담담히 말을 이었다.
“죄송했습니다.”
“네? 무엇을요?”
“저는 너무 오래 당신을 홀대했습니다. 가까워지려 노력해 본 적조차 없었습니다.”
클로에는 멍한 얼굴을 했다.
“좀 더 일찍 당신과…… 함께 지냈다면 좋았을 텐데. 무척이나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알폰스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동안 못해 드린 만큼 더욱 부인을 위하겠습니다. 너무 오랜 시간 당신을 알아보지 못한 저의 어리석음을 용서해 주십시오.”
클로에는…… 간신히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이해했다.
이 사람은 지금 자신이 클로에를 방치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가 클로에를, 그것도 13개월이나 냉대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때의 클로에와 지금의 클로에가 다른 사람이라는 데에 있다.
클로에는 알폰스와 데면데면했던 과거의 클로에의 기억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그것을 자신의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남의 기억일 뿐이었다.
게다가 그녀에게 알폰스는 조금 무뚝뚝한 데도 있긴 하지만 무척 좋은 남편이었다. 적어도 이렇게 그녀에게 정중하게 사과를 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 아니에요, 알폰스! 제게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전 정말 괜찮은걸요.”
그녀가 진심을 다해 말했다.
그녀가 그러자 알폰스는 안심하긴커녕 더 심각한 얼굴을 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부인. 상처에 더 솔직해지셔도 됩니다. 평소에는 그리 정직하신 분이 어째서 괴로운 일엔 솔직하지 못하십니까.”
그 말에 클로에는 직감했다. 아, 이 사람.
내가 자신을 배려해 준다고 생각하고 있구나.
사실, 알폰스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렇게 판단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긴 했다. 그렇지만 클로에로서도 자신의 것이 아닌 사과를 듣는 기분이라 답답하고 민망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정말로 정직하게 ‘당신이 냉대한 건 다른 사람이고 저는 그 사람과 다른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정말이지 답답할 노릇이었다.
결국 그날의 대화는 확실히 마무리 짓지 못한 채 끝나 버렸다. 클로에는 마지막까지 알폰스가 단단히 착각한 듯한 애틋하고 죄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트리플 스위트에서는 일전에 판매하기 시작한 아쌈과 실론 이후로 세 번째 차를 선보였다. 밀크티였다.
가게의 콘셉트에 걸맞게 클로에는 밀크티를 예쁜 유리병에 담아 밀랍으로 봉한 뒤 리본으로 장식했다. 맛깔스러워 보이는 짙은 베이지색의 액체가 유리병 안에서 찰랑거리는 모습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밀크티를 판매하는 것을 여진은 별로 탐탁지 않게 여겼다. 온이나 청 등 동방의 사람들은 차에 무언가를 첨가하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차 자체의 순수한 맛과 향을 즐기는 것이 제대로 된 다도라고 여겼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잘 모르겠어요, 공작부인. 우유가 들어간 차를 차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뭐, 차에 익숙지 않은 제국인들 입맛에야 맞을지도 모르지만.”
“한 번만 마셔 보세요. 아마 여진도 생각이 달라질걸요?”
“음, 전 정말 괜찮아요. 차에 무얼 넣는 건 질색이라.”
“그런 것치곤 현미를 넣은 녹차는 잘 마셨잖아요?”
“그, 그건…….”
당황하는 여진을 보고 피식 웃은 클로에는 이렇게 말했다.
“혹시 마음이 바뀌면 언제라도 말해요. 함께 시음해 봐요.”
그리고 클로에는 밀크티와 함께 홍차 시럽을 발매했다. 간단히 밀크티를 만들어 마실 수 있고, 다양한 요리에 사용해 손쉽게 홍차의 달콤한 향을 낼 수 있다는 내용의 포스터도 만들어 붙였다.
또한, 가게에 예상치 못한 취급 품목이 생겼다. 바로…….
“공작부인, 티팟과 찻잔을 구매하고 싶다는 요청이 또 들어왔어요.”
여진이 말했다.
“일전에 여셨던 다과회가 정말 성공적이었나 봐요.”
귀부인들의 다과회에서 다구를 처음 선보인 것은 옳은 선택이었다. 귀족들의 사교계에서 소문, 특히 유행 거리가 될 만한 것에 대한 소문은 발 없이도 천 리를 갔다.
클로에가 초대했던 귀부인들은 자신들이 보았던 너무나 아름답고 세련된 다구에 대한 칭찬을 사교계에서 아끼지 않았다. 물론 그러한 행동의 이유에는 ‘내가 이러한 새로운 유행을 최초로 접해 보았다’는 자부심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하여간에 귀족들은 자신들만이 유행에서 뒤처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들은 도자기 공방이란 공방을 다 뒤지다가 찻잔을 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클로에의 특수 제작품이었으니 당연했다.
결국 그들은 클로에의 가게에 연락을 해 티팟이나 찻잔을 구할 수 있는 방도를 찾아보기 시작한 것이다.
다구를 널리 알릴 생각으로 다과회에서 선보이긴 했지만 이 역시 새로운 사업 아이템으로 연결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기에, 클로에는 이를 어찌해야 하나 고민했다. 당연하지만 도자기를 그녀가 직접 만들어 공급할 필요는 없었다. 만일 다구를 가게에서 공급하려면 도자기 공방과의 공조가 필수적이었다.
그녀는 전생에서 어지간한 차 브랜드들은 대부분 도자기 제작 기업과 콜라보하여 자신들의 상표를 박은 시그니처 다구를 판매한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녀가 알기로 아직 제국의 요식업계에서 그러한 방식의 협동 작업은 이루어진 적이 없었다. 그녀가 그 일을 실행한다면 트리플 스위트가 제국 최초로 시그니처 식기를 제작한 곳이 될 것이었다.
클로에는 트리플 스위트의 상표를 디자인하기로 결심했다. 일단 첫 도안은 자신이 그렸다.
“…….”
일전에도 느낀 바 있으나 그녀는 결코 디자인이나 그림 쪽에는 재능이 없었다. 그녀는 스케치북의 도안을 그린 페이지를 찢어 버렸다.
결국 클로에는 상표 디자인을 일전에 그녀의 생일 연회 때 도움을 받은 적 있던 디자이너 모건에게 맡겼다. 비록 드레스 디자인과는 거리가 먼일이었으나 그녀는 영예로운 일이라고 생각해 진지하게 임했다.
클로에는 트리플 스위트의 상표를 박은 단순한 흰색 티팟과 찻잔을 도자기 공방에 대량 주문했다.
클로에의 공격적인 출시 전략과 마케팅 덕에, 차는 사교계에서도 일부 귀족들 사이의 유행이 아닌 훨씬 범적인 유행으로 자리 잡았다. 그녀의 가게뿐만 아니라 여러 커피 하우스와 식료품점 등에서 찻잎을 수입해 판매하기 시작했다.
포트넘 부인은 이러한 현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일라이자 가의 아이리스 키친에 다녀왔는데요, 거기서도 찻잎을 취급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유행하니까 급히 들여온 티가 나더라고요.”
“어떻게 티가 나는데요?”
“글쎄, 바라트 산인지, 싱할라 산인지, 온 산인지도 모르겠고, 종류는 그저 ‘홍차’ 하나였어요. 게다가 직원은 차를 우리는 법도 모르더라고요. 영 믿음직하지가 않았어요.”
포트넘 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고급 식료품점이라 뭔가 다를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더라고요. 역시 제국에서 차 전문가는 바텐베르크 부인밖에 없는 것 같아요.”
클로에는 잔뜩 민망해져 버렸다.
그녀가 판매하기 시작한 밀크티와 마침 인기가 날로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는 찻잎은 서로 시너지 효과를 일으켰다. 차 자체에서는 매력을 느끼지 못했지만 밀크티를 마셔 보고 차 자체에 관심을 가지게 된 사람도 있었고, 밀크티를 직접 만들어 보겠다며 찻잎을 잔뜩 사 가는 사람도 있었다. 차에 맛을 들이면서 밀크티에도 호기심을 가지는 사람 역시 많았다.
찻잎의 소비자가 주로 나이가 어느 정도 있는 귀부인이었다면 밀크티는 비교적 어린 나이의 영애들을 끌어들였다. 특유의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이 영애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느리지만 분명하게, 클로에의 가게는 대상 연령대를 넓혀가며 새로운 소비 시장을 개척하고 있었다.
“밀크티는 정말 맛있으니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다른 맛의 밀크티 역시 출시된다면 좋겠어요.”
“물론이죠. 조만간 코코아 밀크티와 짜이 밀크티를 판매해 볼까 생각해 보고 있답니다.”
“짜이 밀크티요? 그건 뭐죠?”
“바라트 왕국에서 일상적으로 마시는 음료인데요, 우유에 찻잎과 다양한 향신료를 넣어 끓여 만든 밀크티예요. 계피와 카다몸, 생강, 정향, 육두구 등을 넣어서 만들어요. 생강 쿠키나 계피 사탕처럼 독특한 매력이 있죠.”
“어머! 정말 특이하네요. 아주 복잡하고 독특한 맛이 나겠어요.”
포트넘 부인은 짜이 밀크티에서 어떤 맛이 날지 상상이 잘 안 되는 듯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클로에는 자신이 짜이 밀크티를 만들어 내놓으면 그녀가 무척 맛있게 마셔 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 * *
황궁에서 시녀들에게 차 우리는 법을 교육하고 며칠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그녀에게 예상치 못한 상대의 초청이 들어왔다. 로네펠트 후작부인이었다.
로네펠트 후작부인의 남편, 로네펠트 후작은 황제의 가까운 친척이었다. 후작가라고는 해도 공작가에 뒤떨어지는 위세를 가진 곳은 아니었다.
클로에와 로네펠트 후작부인 사이에는 접점이 별로 없었다. 일전에 황제의 다과회에서 그녀를 만난 일이 첫 번째 만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로에가 로네펠트 후작부인의 초대에 관심이 생긴 것은 편지에 적힌 내용 때문이었다. 로네펠트 후작부인은 자신이 최근 홍차에 맛을 들이기 시작했으며 제국에서 제일 홍차의 전문가인 것으로 알려진 클로에에게 차에 대해 가르침을 받고 싶다고 청했다.
비록 약간 바쁘긴 했지만 짬을 아예 낼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일전에 만나 본 바로는 로네펠트 후작부인에 대한 인상이 좋은 편이었다. 그녀는 예의와 붙임성이 있고 차에 진심으로 관심을 보인 사람 중 하나였다. 클로에는 그녀의 초청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어서 오세요, 바텐베르크 공작부인.”
로네펠트 후작부인은 현관까지 나와 클로에를 맞이했다. 그녀의 안내로 응접실에 도착한 클로에는 아름답게 꾸며진 테이블을 보았다.
테이블 위에는 로네펠트 후작부인과 클로에가 쓸 두 사람분의 식기가 미리 세팅되어 있었는데, 모든 것이 은제였다. 접시나 포크와 나이프, 음료수 잔은 물론이고 삼단 접시까지 모든 것이 얼굴이 비쳐 보일 정도로 깨끗한 은으로 되어 있었다. 찻잔과 찻주전자 대신 커피잔과 커피 주전자가 있었는데 이것 역시 은이었다.
클로에는 삼단 접시와 접시에 놓여 있는 간식들을 보았다. 알록달록한 과일 타르트와 에클레어, 케이크, 파운드 케이크 등이 가득 놓여 있는 모습은 무척 아기자기하고 예뻐 보였다.
“편히 지내세요, 공작부인. 제 초대에 응해 주셔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열심히 준비한 것이 자랑스러웠는지 로네펠트 후작부인이 뿌듯한 얼굴로 웃었다.
클로에는 먼저 후작부인의 요청대로 홍차를 맛있게 우리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로네펠트 후작부인은 싱할라의 홍차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녀는 클로에의 손이 닿자 놀라울 정도로 맛있어지는 차의 맛에 감탄하고 또 감탄했다.
“이 차가 원래는 이런 맛이었는지 몰랐어요. 제가 우릴 때는 이런 맛이 아니었는데…….”
“차는 우리는 방법에 따라 맛과 향이 크게 달라진답니다. 제가 가르쳐 드린 방법 외에도 다양한 방법을 시도해 보세요. 후작부인의 입맛에 알맞은 골든룰을 찾을 수 있도록이요.”
홍차를 우렸으니 이번에는 맛볼 차례였다. 그들은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아 차와 티 푸드를 함께 즐겼다.
그런데 클로에는 한 가지 신경 쓰이는 것이 있었다. 차는 꽤 괜찮았고, 디저트들 역시 두말할 것 없이 맛있고 잘 만든 것들이었다. 그렇지만…….
“혹시 그걸 아세요, 후작부인? 차에 어울리는 티 푸드는 따로 있답니다.”
“네? 어울리는 티 푸드라고요? 그게 뭐죠?”
“흔히 향이 은은한 차에는 향이 은은한 티 푸드가, 향이 진한 차에는 향이 진한 티 푸드가 어울린다고 하죠. 케이크와 같은 일반적인 디저트들은 차와 함께 마시기에는 향이 너무 강해서 차의 향을 덮어 버리기도 해요.”
“어머! 정말인가요? 전혀 몰랐어요!”
케이크나 타르트 같은 종류의 디저트들은 보기도 좋고 맛도 좋지만 티 푸드로 쓰기엔 적합하지 않다. 그 자체의 향이 너무 강해 은은한 차향을 덮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티 푸드가 차에 잘 어울리나요?”
로네펠트 후작부인이 진심으로 궁금한 듯이 물었다. 클로에가 대답했다.
“물론 그것은 차마다 큰 차이가 있어요. 차라고 다 같은 차가 아니라 향의 종류와 정도가 전부 다르니까요. 하지만, 저는 홍차에는 스콘이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스콘이라고요?”
스콘은 제국 북부 지역에서 시작된 퀵브레드의 일종이다. 로네펠트 후작가에서도 이것을 가끔 간식으로 먹었지만, 워낙에 만들기 쉽고 흔한 음식이라 손님을 대접할 때에는 쓰지 않았다.
그렇기에 로네펠트 후작부인이 의아한 듯한 얼굴을 했다. 클로에가 웃으면서 말했다.
“네. 스콘 특유의 퍽퍽한 식감과 향이 강하지 않은 고소한 맛은 홍차에 참 잘 어울려요.”
“공작부인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저도 호기심이 동하는군요. 하녀들에게 스콘을 내오라고 할까요?”
“어머, 그렇게 해 주신다면 감사하지요.”
로네펠트 후작부인은 하녀들에게 스콘을 내오라고 지시했다.
갓 구워 따끈따끈한 스콘을 가져오는 데에는 1시간 정도가 걸렸다. 하녀가 먹음직스럽게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스콘과 딸기 루바브 잼, 마멀레이드, 라즈베리 콩포트, 버터를 함께 내왔다. 클로에는 테이블 위에 놓인 스콘과 잼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클로에는 스콘을 하나 집어 들어 익숙한 손놀림으로 그것을 반으로 갈랐다. 스콘은 가로로 쪼개 안쪽에 잼을 발라 먹으면 바르기도 더 쉽고 먹기에 편하다.
스콘 위에 딸기 루바브 잼을 바르려던 클로에는 이 자리에 무언가 빠진 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말했다.
“어머, 클로티드 크림이 없네요?”
“클로티드 크림이요?”
클로티드 크림은 우유를 가열해 만들어 내는, 55% 이상의 높은 유지방 함량을 가진 크림이다. 버터와 생크림의 중간 정도의 식감과 맛을 가졌다.
제국에서는 빵에 발라 먹기보다는 주로 요리에 사용한다. 로네펠트 후작가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네, 스콘에는 클로티드 크림이 정말로 잘 어울려요. 갓 구운 따끈한 스콘에 클로티드 크림과 베리 잼을 발라 먹으면 그야말로 행복해지는 맛이지요.”
클로에가 무척 좋아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즐거워 보이는 얼굴로 설명했다. 그녀의 말에 호기심이 동한 로네펠트 후작부인이 말했다.
“그럼 클로티드 크림을 가져오라고 할게요.”
“그래 주시겠어요? 감사합니다.”
로네펠트 후작부인이 지시하자 곧 하녀들이 클로티드 크림을 내왔다. 클로에는 스콘에 잼과 클로티드 크림을 함께 바른 뒤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래, 이거였다. 이게 바로 그녀가 찾던 맛이었다. 기분 좋게 씹히는 스콘과 달지 않고 부드럽게 녹아드는 고소한 클로티드 크림, 그리고 달콤하고 향긋한 잼의 조화라니! 클로에는 입 안 가득 퍼지는 행복감을 마음껏 음미했다.
클로에를 따라 클로티드 크림과 잼을 바른 스콘을 맛본 로네펠트 후작부인의 눈이 둥그레졌다.
“어머! 늘 잼이나 버터만 발라 먹었는데, 클로티드 크림이 정말 잘 어울리는군요. 이렇게 먹는 방법이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그 반응을 본 클로에가 가볍게 웃었다.
“맛이 참 좋죠? 이번엔 홍차도 드셔 보세요.”
로네펠트 후작부인은 클로에가 말하는 대로 했다.
순간 후작부인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홍차는 입 안에 들어오는 순간 퍽퍽한 스콘의 식감과 다소 느끼한 클로티드 크림의 기름기를 깨끗하게 씻어 주었다. 비강 가득히 홍차 특유의 향긋한 향이 들어찼다. 스콘 자체의 향이 강하지 않아서, 아까 케이크를 먹을 때와 달리 스콘의 맛과 향은 홍차의 향을 전혀 누르지 않았다.
“어머……! 정말 맛있네요! 스콘의 맛과 홍차의 맛이 참 잘 어울려요.”
“마음에 드신다니 기쁘네요.”
스콘과 클로티드 크림, 그리고 홍차가 얼마나 잘 어울리면, 이 세 가지를 포함한 다과를 부르는 이름마저 있을까. 이러한 다과를 전생에서는 크림 티(Cream tea)라고 불렀다.
로네펠트 후작부인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것이 기쁜 듯했다.
“확실히 아까 케이크와 타르트를 먹었을 때와는 전혀 다르네요. 스콘이 이렇게 좋은 티 푸드인 줄은 몰랐어요. 혹시 다른 좋은 티 푸드를 더 추천해 주실 수 있으세요, 공작부인?”
이 말에 클로에는 잠시 고민했다. 사실 생각나는 티 푸드가 하나 더 있었다. 이 역시 스콘처럼 고전적인 종류의 것으로 오랜 역사와 저명한 명성을 가지고 있는데,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맛이 좋아서라기보다는 다른 이유가 더 컸다.
어쨌든 맛도 홍차랑 잘 어울리는 편이고, 로네펠트 후작부인이 좋아할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한 클로에가 말을 꺼냈다.
“추천해 드릴 티 푸드라면…… 역시 오이 샌드위치일까요.”
“오이 샌드위치라고요?”
“네. 식빵의 테두리를 자르고, 눅눅해지지 않도록 버터를 아주 얇게 바른 뒤 소금을 첨가한 얇게 저민 오이를 끼워서 먹는 거예요.”
오이 샌드위치는 맛이 상큼하고 향이 적당해서 홍차와 잘 어울린다. 하지만 오이 샌드위치가 높은 명성을 가지게 된 것은 단지 맛 때문만이 아니었다.
오이는 따뜻한 날씨가 필요한 채소다. 제국, 특히 수도에서 오이를 먹으려면 온실이 필요했다. 즉 오이는 부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부를 과시하기 좋아하는 귀족들 사이에서, 오이를 주재료로 한 오이 샌드위치는 손님에게 대접하기에 딱 적합한 품목이었다.
클로에는 후작부인 역시 제국의 귀족이므로 이 레시피를 좋아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녀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어머, 정말 먹어 보고 싶네요! 손님께 대접하기에 딱 좋아 보여요. 혹시 귀택하실 때에 저희 하녀들에게 오이 샌드위치의 레시피를 가르쳐 주시겠어요?”
“물론이죠.”
클로에의 대답에 후작부인이 무척 기뻐했다. 로네펠트 후작부인이 물었다.
“혹시 티 푸드를 좀 더 추천해 주실 수 있나요? 손님이 오실 때 대접하고 싶네요.”
의욕이 넘쳐서 아예 티 푸드 리스트를 작성하려는 듯한 모양새였다. 클로에가 가볍게 웃었다.
“사실 차라는 것은 워낙 종류가 다양하고 그 안에서도 다양한 맛과 향이 있어서, 딱 잘라 어떤 티 푸드가 차에 어울린다고 말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어요.”
그렇다. 같은 차라고 해도 그 안에서의 차이는 너무나 컸다. 차의 차이와 입맛의 차이를 고려한다면 ‘차에는 이 티 푸드다!’라는 정답은 없는 문제였다. 예컨대 랍상소우총에는 짭짤한 햄이 잘 어울렸던 것처럼.
“다만 한 가지만 고려해 주시면 될 것 같네요. 홍차의 향과 티 푸드의 향이 어느 한쪽에 눌리거나 치우치는 일이 없도록, 향의 조화에 대해서 생각해 주시면 돼요.”
“그렇군요! 앞으로 차를 내올 때는 향에 대해서 좀 더 고려를 해 보아야겠어요.”
로네펠트 후작부인이 웃으며 대답했다.
클로에는 맛있는 스콘과 차를 즐기며 후작저에서 좀 더 시간을 보내다가 돌아갔다. 아주 즐거운 티타임이었다.
* * *
클로에의 사업은 순조롭게 순항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녀는 가게에 꼬박꼬박 들러 모든 것이 잘 돌아가고 있는지 관리했다.
사장이 이렇게 많은 관심을 보이니 직원들 역시 조금이라도 게으르게 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트리플 스위트에 고용된 모든 사람들은 성실히 일했고 클로에는 만족했다.
그녀가 창고에서 물자를 직접 체크하고 있던 도중이었다. 누군가가 그녀가 있는 창고로 들어왔다. 알폰스였다.
“어머, 알폰스!”
클로에가 반가워하며 말했다. 그를 밖에서 보는 건 또 오랜만이었다. 단정한 외출복을 입고 있는 그는 오늘따라 멋져 보였다.
알폰스는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었다. 보기 드문 얼굴이었다.
“가게에 계실 것 같았습니다.”
“입궁하시고 돌아오시는 길인가요?”
“예.”
클로에가 반가워하며 말했다.
“그럼 귀택할 때에는 함께 가도 되겠네요. 잘됐어요!”
알폰스는 클로에가 솔직하게 기뻐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자신은 잘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클로에, 그녀는 괜히 새침 떨거나 계산적으로 굴지 않고 언제나 알폰스 자신의 몫까지 반응해 주곤 했다.
“부인, 열심히 일하시는 것도 좋습니다만, 무리가 가지 않도록 쉬엄쉬엄하십시오.”
그녀가 쓰러진 지도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그 사실을 기억하고 있던 클로에는 멋쩍게 웃었다.
“아직 별로 무리하지 않았는걸요.”
알폰스는 차분하게 그녀가 들고 있던 물량 목록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두루마리 형태로 되어 있는 그것의 길이는 엄청났다. 게다가 그렇게 많이 확인하였음에도 아직 클로에는 중간까지밖에 일을 진행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런 일은 직원이나 여진에게 부탁해도 괜찮지 않습니까. 부인, 당신은 바텐베르크의 안주인이십니다.”
바텐베르크 공작부인인 클로에가 하기에는 너무 하찮은 잡일이라는 이야기였다. 사실 그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이런 건 기껏해야 물량 관리인이 하는 일이었으니까.
“원래 사장이 솔선수범해야 직원들도 부지런하게 일하는 법이에요. 가끔씩은 이런 일도 직접 해 주어야 안심이 되죠.”
클로에는 조금 쑥스러운 듯 웃으며 말했다.
“알폰스, 죄송하지만 잠깐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얼른 마치고 함께 돌아가요.”
클로에가 다시 목록을 향해 눈을 돌렸다. 알폰스는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
어쩐지 불만족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함께 있는데도 알폰스, 자신이 아닌 일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물론 그는 매사에 열심인 데다 순수하고 열정적인 클로에를 좋아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집중력과 주의를 방해하고 싶은 모순적인 기분이 느껴졌다. 장난기가 거의 없는 그로서는 대단히 낯선 감각이었다.
알폰스는 클로에를 뒤에서 슬쩍 끌어안았다. 클로에는 평균적인 여성의 키로 특별히 작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의 품속에 쏙 들어왔다. 클로에가 작다기보단 알폰스가 크기 때문이었다.
집중을 방해받은 클로에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이참, 알폰스…….”
그러나 그녀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그녀의 입술 위로 다른 입술이 포개어졌다.
깊게 얽혀오는 혀에서는 시가의 훈연 향이 느껴졌다. 혀가 입 안을 스칠 때마다 작은 전기가 올랐다. 그가 가해 오는 자극에 클로에는 일일이 반응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큰 손이 그녀의 허리를 쓸어내렸다. 마침내 입술이 떨어져 나가자, 클로에는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부족한 숨을 몰아쉬었다. 고작 입맞춤을 했을 뿐인데 작은 폭풍이 그녀의 전신을 휩쓸고 지나간 듯 정신이 없었다.
“알폰스, 당신 정말…….”
숨을 고른 클로에가 원망스레 눈을 흘겼다. 머리 위에서 나직하고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몸에 힘이 풀려 있던 찰나, 그녀의 손에 꼭 쥐여 있던 두루마리가 빠져나갔다. 놀란 그녀가 돌아보니 알폰스가 그것을 빼앗아 들고 있었다. 클로에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며 말했다.
“도, 돌려주세요.”
“지금은 이런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알폰스는 두루마리를 둘둘 말아 클로에의 팔이 닿지 않는 선반에 올려놓아 버렸다.
생각지 못한 상대의 장난질에 클로에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하자, 손가락 하나가 그녀의 젖은 입술을 쓸었다.
“정말 경계라곤 할 줄 모르시는군요. 본인이 무슨 상황에 처했는지 모르시는 모양입니다.”
“제가 무슨 상황에 처했는데요?”
알폰스는 그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순진한 얼굴에 픽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허리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계약 변경의 건은 어떻게 할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 말을 듣자 클로에의 뇌리 속에 일전의 알폰스와 이야기 나누었던 계약 변경에 대해 떠올랐다. 그가 말하는 것은 분명 그것이었다.
그러니까, 관계를 갖는 빈도를 한 달에 한 번에서 더 늘리는 문제 말이다.
클로에의 얼굴이 물감 번지듯 달아올랐다. 사실, 그때는 나중에 생각해 본다고 하긴 했지만 이후로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 그건…….”
“사실 생각해 두지 않으셨다 해도 상관은 없습니다. 이미 지난날로부터 한 달은 지났으니까요.”
“벌써요?!”
클로에가 깜짝 놀라 말했다. 그동안 사업에 푹 빠져 있느라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그, 그렇지만 알폰스. 응……!”
클로에가 화들짝 놀라며 신음을 흘렸다. 알폰스가 그녀의 귓불을 가볍게 물었던 것이다.
“하아, 으음……. 알폰스, 그렇다고 설마…… 여기서 할 건 아니죠?”
그의 입술과 손끝이 닿는 곳마다 불이 붙는 것 같았다. 그녀의 귀에 입을 맞춘 알폰스는 목덜미를 따라 몇 번이나 입 맞춰 내려갔다. 그가 민감한 쇄골에 몇 번이나 반복해 입 맞추자 클로에의 목소리가 점점 달콤해졌다.
“안 됩니까? 저는 상관없습니다만.”
“알폰스!”
평소 늘 점잖고 냉정한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곤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그때 그의 입술이 그녀의 목덜미를 빨아들이는 것이 느껴졌다. 몇 번의 경험에 의해 그녀는 그의 의도를 눈치챘다.
“아, 안 돼요! 보이는 곳에는 안 돼요.”
키스 마크를 새기려는 것이었다. 드레스의 목깃 아래로 훤히 드러나는 곳에.
알폰스와 함께 창고에 있다가 목에 키스 마크를 달고 나가면 직원들이 뭐라고 생각하겠는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다른 건 다 양보해도 그것만은 봐줄 수 없었다.
강제로 할 생각은 아니었는지 그녀가 놀라 소리치자 알폰스는 입술을 떼었다. 오래 빨아들이지는 않았기에 목덜미의 흔적은 빠르게 사라졌다.
“그럼 보이지 않는 곳은 괜찮겠군요.”
“당신, 정말…….”
웃기지도 않은 농담에, 그를 타박하기 위해 시선을 맞춘 클로에는 깜짝 놀랐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한없이 질척했다. 그의 번듯한 얼굴에, 위험한 빛이 감도는 눈동자에 눅진한 욕망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진심이었던 것이다.
누구보다도 감정을 감추는 데 능숙한 그였다. 그의 친부는 인간답지 않은 인내심을 그에게 물려주지 않았던가. 그런 그가 이렇게까지 욕망을 드러내는 것은 정말이지 이상한 일이었다.
점차 내려가는 그의 손길에 달뜬 숨을 내쉬며 클로에는 생각했다.
‘설마 나 때문에?’
그처럼 점잖은 사람이 이런 곳에서 함부로 욕망을 드러낼 리가 없었다. 그가 흥분한 이유로는 단 하나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녀가 있기 때문에.
어느샌가 자세를 낮춘 알폰스는 그녀의 풍성한 스커트 자락을 걷어 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차려입은 겹겹의 외출용 드레스는 걷어 올려도 손을 떼면 바로 내려왔고, 그렇다고 스커트 자락을 쥔 채로 무엇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알폰스는 놀라울 정도로 뻔뻔하게도 클로에에게 이렇게 요구했다.
“잠시 잡고 있으십시오.”
“네?”
클로에는 엉겁결에 그가 쥐여 주는 대로 자신의 스커트를 붙잡았다. 결국 그녀가 스스로 치맛자락을 끌어 올린 매우 부끄러운 자세가 되어 버렸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몇 초나 지난 뒤의 일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그녀는 거의 울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치맛자락을 끌어 올린 자세만 해도 어마어마하게 부끄러운데, 심지어 이곳은 침실도 아니고 그녀 자신의 가게였다. 이런 창피한 일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클로에는 자꾸만 자신의 맞은편에 있는 창고의 문을 흘끗거릴 수밖엔 없었다. 당장이라도 저 문이 열릴 것만 같아 조마조마했다.
그녀가 무슨 걱정을 하는지는 꿈에도 모른 채 알폰스는 그녀의 탐스러운 허벅지를 건드리고 있었다. 아직 팬티스타킹은 발명되지 않은 시대였다. 무릎 위까지 올라온 스타킹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고정한 가터벨트와 그 사이로 드러난 흰 살결을 고스란히 바라보며 알폰스는 가터벨트 아래로 손가락을 넣었다. 그가 손가락 끝으로 누르면 포근한 허벅지살은 폭 들어갔다가, 손가락을 떼면 탄력 있게 매끄러운 모양 그대로 돌아왔다.
맨다리로 그의 손길과 따뜻한 숨결을 느끼는 건 정말이지 묘한 감각이었다. 클로에는 다리가 풀릴 것만 같은 것을 가까스로 버티고 서 있었다.
“아……!”
그러나 그의 입술이 허벅지에 닿았을 때는, 정말로 주저앉을 뻔했다. 가늘게 떨리는 그녀의 허벅지 안쪽에 몇 번 입을 맞춘 알폰스는 그 생크림처럼 부드러운 살결을 빨아들였다. 클로에는 감전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그녀가 눈을 질끈 감았다.
잠시 뒤, 그녀는 자신의 다리에 붉은 자국이 고스란히 남은 것을 볼 수밖에 없었다.
알폰스 역시 자신이 만든 그것을 보았다. 흰 살결 위로 붉게 남은 자국, 그것은 마치 낙인 같았다. 그녀가 법적으로는 물론, 어떤 의미로든 자신의 소유임을 증명하는 낙인.
알폰스는 가슴속에 흡족함과 만족스러움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정말, 이런 곳에서…….”
클로에가 원망스럽게 말했다.
“보이지 않는 곳이니 괜찮지 않습니까.”
그러나 알폰스는 뻔뻔한 얼굴로 대답할 뿐이었다. 클로에가 원망을 담아 그를 쏘아보았으나 요지부동이었다.
그때였다.
“공작부인, 여기 계신가요?”
노크와 함께 들려오는 목소리에, 클로에는 불에 덴 듯 놀라 스커트를 내리곤 알폰스를 일으켰다.
알폰스는 그런 그녀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공작가의 후계자였던 그가 생각하기에는, 그가 자신의 법적으로 정당한 아내와 자신들이 소유한 정당한 장소에서 정당한 행위를 할 때엔 다른 자들이 피해 주어야지 자신과 아내가 피해야 할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클로에를 화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녀가 시키는 대로 했다.
창고 문이 열리고 여진이 들어왔다.
“바쁘신 와중에 실례합니다, 공작부인. 공작부인을 찾는 고객이 계세요.”
“아아, 여, 여진……. 그럼요, 제가 가야죠. 잠시만요…….”
금방이라도 펑 터질 것 같은 얼굴을 한 클로에가 왠지 모르게 부자연스러운 태도로 걸어 나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여진은 창고 안의 이상할 정도로 후덥지근한 공기를 느꼈다. 저 멀리 선반에 놓여 있는 물량 목록도 보았다.
왠지 이 창고 안에서 평범하지 않은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 같았다. 여진은 침착하게 생각했다.
‘어쩐지, 구인하는 재무관리사의 첫째 조건이 여성이었던 것이 이상했는데…….’
여진은 그 이유를 찾은 기분이었다.
뭐, 그 덕에 자신이 일자리를 구했으니 불만은 없었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 한들 부끄러운 건 공작부인이지 자신이 아니지 않은가. 그렇게 정리한 여진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을 하며 알폰스에게 인사하고 클로에를 고객이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 * *
트리플 스위트에서 발매한 홍차의 판매율이 안정 궤도에 올랐다.
차가 유행하길 바라고, 더 나아가 더 많은 사람들이 차에 익숙해지고 즐기게 되길 바라는 것이 클로에가 원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유행이 누그러지거나 꺼지기 전에 제때제때 신제품을 공급해 줌으로써 수요를 유지시켜야만 했다.
클로에는 다음에 발매할 차는 가향 차가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무가향 차의 종류는 비교적 한정되어 있지만 가향 차는 만들기 나름인지라 무궁무진한 제품들을 생산해 낼 수 있었다.
게다가 향이 무척 다양해 다양한 취향의 사람들을 끌어들일 수 있고, 클래식 티의 섬세함보다는 좀 더 자극적인 향에 이끌리는 라이트한 소비자층을 공략하기 더 쉬웠다. 전생에서도 어지간한 티 브랜드들 역시 다양한 브랜드 고유의 가향 차들을 판매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러니 이제 막 홍차의 라이트한 소비자들을 만들기 시작한 지금 단계에서 가향 차를 판매하는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어떤 가향 차를 판매할 것이냐 하는 거지.’
클로에가 고민했다.
제일 먼저 그녀가 떠올린 것은 얼 그레이였다. 얼 그레이는 전생의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가향 차였고, 차로 음용하는 것 외에도 베이킹 등 사용하는 방법이 다양했다.
당장 그녀의 트리플 스위트에서만 해도 얼 그레이 맛 밀크잼과 과자들이 높은 판매고를 올리고 있지 않던가.
하지만 그녀는 섣불리 얼 그레이를 판매 목록에 올리는 것을 주저했다.
‘아무래도 얼 그레이는 취향을 많이 타니까, 좀 더 취향을 덜 타는 차를 판매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것이 클로에의 생각이었다.
얼 그레이는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가향 차지만 차의 초심자에게 섣불리 권하기에는 위험이 따른다. 특유의 화장품을 닮은 화려한 향기가 취향을 타기 때문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은 무척 좋아하지만, 싫어하는 사람들은 화장품이나 향수를 먹는 듯한 느낌을 받곤 했다.
일전에 알폰스와 아서 황자에게 얼 그레이를 대접했을 때 두 사람 모두 잘 마셨던 것은 운이 좋았던 일이었다. 클로에가 꽃잎을 블렌딩해 얼 그레이 특유의 화려한 향을 누르는 지혜를 발휘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때였다. 얼 그레이를 판매하느냐 마느냐의 기로에 서서 고민하던 클로에에게 그녀의 고민을 끝내 줄 손님들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