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장 (12/39)

12장

그녀는 지난 생에서 술에 꽤 강한 편이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술자리에 빠진 적이 없음에도 여태까지 자신의 술버릇을 모를 정도로.

처음으로 그녀가 자신의 술버릇을 알게 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클로에는 부인들을 차례대로 끌어안았다.

“녹턴 부인.”

“챈들러 부인.”

“웨지우드 부인.”

아무도 공작부인의 주정(?)을 거부하지 않았다. 모두가 깔깔 웃으며 그녀의 포옹을 받아 주었다.

클로에는 꼬인 혀로 이렇게 주장했다.

“프리 허그라는 거예요.”

“프리…… 네? 그게 뭔가요?”

“제가 살던 곳에서 많이들 했던 거예요.”

살던 곳? 그 말을 들은 부인들은 대충, 클로에의 친정인 그레이 백작령을 말하는 것이겠거니 했다.

부인들을 다 한 번씩 프리 허그 해 주고 나니 더 이상 안아 줄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클로에는 여전히 부족했다. 좀 더 껴안을 사람이 필요했다.

클로에는 술기운이 올라 붉게 상기된 얼굴로 신이 나서 외쳤다.

“누구, 따뜻한 온기가 필요하신 분은 더 안 계신가요?”

당연히 한껏 혀 꼬부라진 소리였다.

그런 그녀의 말을 들은 사람들 중에는 주변에 있던 부인들뿐만 아니라, 그들이 그러는 걸 웃으며 지켜보던 남자들 역시 있었다. 남자들 중, 제일 젊은 축에 속하는 신사 한 명이 호기롭게 나섰다.

“혹시 그 온기를 저도 느껴 볼 수 있겠습니까?”

그 장난스러운 말에 클로에는 눈을 끔뻑였다. 술에 한껏 취해 있긴 했지만 그녀의 타고난 철벽녀 기질이 발동한 것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남자를 껴안는 건 좀 그렇지 않나?’

하지만 이내, 취기가 불러들인 치기가 그녀의 이성을 흐렸다. 뭐, 그런 게 상관있겠어? 그냥 재미있어서 하는 건데. 그렇게 생각한 그녀가 슬그머니 양팔을 벌렸다.

“그럼…….”

그때였다.

“그만.”

큰 손이 불쑥 나타나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클로에가 그쪽을 돌아보았다. 알폰스였다.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고, 공작 각하…….”

이 우스운 상황에 하하 호호 웃던 분위기가 싸하게 가라앉았다. 알폰스가 무척 진지하게 화를 내고 있던 것을 모두가 느꼈던 것이다.

알폰스는 감히 클로에에게 안기려 했던 남자 쪽을 흘끗 노려보았다. 그저 눈길 한 번 주었을 뿐인데 남자는 온몸에 서늘한 한기가 돌았다. 그는 희게 질린 얼굴로 한 발짝 물러섰다.

“각하, 그게 아니라…….”

속에서 천불이 났다. 물론 클로에가 다른 남자를 끌어안는 대참사는 막았지만 그래도 그럴 뻔했다는 것만으로도 화가 났다.

알폰스는 잔뜩 굳은 얼굴로 클로에를 내려다보았다. 대체 이 여자는 어떻게 되어 먹은 거란 말인가. 아무리 술을 마셨기로서니 어떻게 이렇게까지 무경계할 수가 있지? 대체 어떻게?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저쪽에서 지켜보던 부인들이 당황해 수런거렸다. 그다음이 어떻게 될지 전혀 예상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때였다.

“알폰스.”

클로에가 방싯방싯 웃으며 알폰스를 끌어안았다. 프리 허그였다.

“보고 싶었어요.”

클로에가 알폰스의 가슴팍에 뺨을 비볐다.

요 쪼끄마한 여자에게 끌어안긴 알폰스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당황이 가시고 나니 황당함이 찾아왔다. 가슴속에서 용암처럼 끓어오르던 화가 가라앉다 못해, 어이가 없어졌다.

‘정말이지 이 여자는……!’

알폰스는 기가 차다고 느끼면서도 손을 내밀어 그러는 클로에의 탐스러운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클로에가 헤헤 웃었다. 평소라면 죽어도 보여 주지 않을 모습이었다.

물론 여전히 아까의 그 모습을 떠올리면 화가 났다. 하마터면 클로에가 다른 놈을 끌어안을 뻔했다는 것을, 그러는 것을 가만둘 뻔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조마조마했다. 하지만 방금 클로에가 했던 말을 되새기면 가슴이 철렁할 정도로 만족스러운 것이 사실이었다.

‘보고 싶었어요, 라.’

여전히 굳은 얼굴로 클로에를 내려다보던 그는, 클로에의 입술 위에 입 맞췄다.

“어머!”

“방금 봤어요?”

그 모습을 본 부인들은 거의 기함했다. 부인들은 물론이고 저 반대편에서는 남자들도 이 모습을 보고 기겁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알폰스는 신경 쓰지 않았다. 눈을 깜빡거리는 클로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가 나직하게 말했다.

“돌아갑시다.”

* * *

이번에야말로 알폰스는 봐주지 않았다. 포트넘 자작 부부에게 인사를 한 뒤 클로에를 데리고 빠져나온 알폰스는 그녀를 마차에 태우고 따라 탔다. 클로에는 여전히 칭얼거렸다.

“더 놀고 싶었어요.”

“나중에 또 오면 되지 않습니까.”

“그치만…….”

말 우는 소리와 함께 마차가 출발했다. 그와 동시에 클로에의 말이 끊겼다. 딱히 그녀의 의사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알폰스가 그녀에게 입을 맞춘 것이다.

마치 더 이상 칭얼거리지 못하게 만들어 주겠다는 듯이 알폰스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진득이 틀어막았다. 입술과 치아 사이를 혀가 가르고 들어가 그녀를 남김없이 맛봤다. 진한 포도주의 향이 났다.

키스를 하면서 알폰스는 한 손으론 클로에의 뒷머리를 받치고, 한 손으로는 그녀의 등을 쓰다듬었다. 마치 어린애를 달래는 듯이 시작한 손길은 점점 농밀해지고 끈적해졌다. 빈말로도 그 손길에 짙은 욕망이 묻어나지 않았다고 할 수 없었다.

알폰스의 손길은 마치 참을 수 없다는 듯 그녀의 등을, 허리춤을 탐하며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급기야 그의 손이 클로에의 허벅지에 닿았다. 드레스 스커트 위로 그녀의 허벅지를 쓸어내리던 손은 점점 안쪽을 향해 파고들었다. 그의 손끝이 허벅지 안쪽에 닿자 클로에도 참지 못하고 신음했다.

“아아.”

그 소리를 듣자 알폰스는 머릿속이 텅 비어 버리는 것 같았다. 그곳에 남은 것은 역류하는 욕망뿐이었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이런 여자를 품 안에 두고 대체 어떻게 참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때였다.

마차가 멈추었다. 어느샌가 저택에 도착한 것이었다.

알폰스는 그것이 못내 불만스러웠다. 젠장, 포트넘 자작의 저택에서 좀 더 먼 곳에 살았어야 했는데.

그는 아쉬운 대로 클로에에게서 입술과 손을 떼었다. 술에 취하고 달콤한 자극에 취한 클로에가 달뜬 숨을 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몽롱한 눈빛이었다.

알폰스는 순간 그 모습을 아무에게도 보여 주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간단히 클로에의 옷매무새를 정돈해 주고는 그녀의 앞에 무릎 꿇었다. 그러고는 한 팔로는 클로에의 등을, 한 팔로는 그녀의 다리를 받쳐 들었다. 클로에를 안아 든 것이다.

“귀택하셨습니까, 각하. 마님.”

공작 부부가 돌아온다는 사실을 앞서 전달받은 키엘이 하인과 하녀 몇 명을 데리고 허리 굽혀 인사했다.

그런데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주인 부부의 모습은 상상을 아득히 초월하는 것이었다. 알폰스를 오래 모셔 그를 꽤 잘 파악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키엘이지만 오늘만큼은 그도 기겁할 수밖에는 없었다.

각하께서 주인마님을 안아 들고 계시지 않은가!

그러나 키엘은 주인마님의 모습을 보고 상황을 대강 짐작했다. 주인마님은 졸고 있었다. 발갛게 상기된 그녀에게선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술 냄새가 풍겼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을 쓰시지 않고…….’

아랫사람이 없는 환경이라면 모를까 귀족이 직접 누군가를 짊어지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키엘은 알폰스의 태도와 표정에서 그 행동의 의도 역시 빠르게 추측해 낼 수 있었다.

알폰스는 인사를 하는 이쪽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알폰스는 냉정한 사람이지 불손한 사람은 아니라, 이런 일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쪽에 관심을 주기는커녕 품 안에 안고 있는 클로에만을 더더욱 깊게 감싸 안는 것이 아닌가.

그는 그대로 홀을 가로질러 계단을 올랐다. 방향상 클로에의 침실로 향하고 있는 것 같았다.

곁에 있던 하녀 중 한 명이 우물쭈물하다 키엘에게 물었다.

“마님을 모시러 가야 할까요? 씻겨 드리고 환복을 해 드려야 할 텐데…….”

“아니, 그럴 필요 없어요.”

키엘이 말했다.

“아마 필요 없으실 겁니다. 각하께서 나오시기 전까지, 아무도 마님의 침실에 들지 말라고 전하세요. 제 말 이해하시죠?”

그렇게 말하고는 눈을 찡긋하는 것이었다. 하녀는 순간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무언가 깨달은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눈치가 빠른 하녀라 다행이었다.

알폰스는 그대로 아무의 방해도 받지 않고 클로에의 침실에 도달했다. 그는 클로에를 침대 위에 눕혔다. 여전히 타는 듯한 갈증은 해갈되지 않았다. 자신의 것이 아닌 것 같은 충동이 거세게 가슴을 때렸다.

“부인.”

알폰스는 허리를 굽혀, 그녀의 귓가에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으응.”

그 목소리에 클로에는 얕은 졸음을 비집고 눈을 떴다. 긴 속눈썹이 어설프게 올라가고 그 아래로 올리브빛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녀가 옅게 웃었다.

“알폰스.”

알폰스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이런 강렬한 열망도, 충동도, 욕망도 그에게는 어느 것 하나 익숙하지가 않았다. 자신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욕망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았다. 자신의 안에서는 어린 시절 이미 죽어 버린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째서.

그는 손을 뻗어 클로에의 입술을 손끝으로 훑었다. 붉은빛의 말랑하고 촉촉한 입술이 그의 손가락을 따라 움푹 파였다가 다시 돌아오곤 했다.

어째서는 뭐가 어째서란 말인가. 알폰스, 그는 자신이 이러는 이유를 이미 알고 있었다.

참는 것만은 한없이 익숙했던 자신이 언제부터인가 클로에, 그녀에 대한 것은 아무것도 절제할 수 없게 되어 버린 이유. 결코 변하지 않으리라 자신했던 자신이 달라진 이유. 더 이상 자신이, 자신이 알던 알폰스 바텐베르크가 아니게 된 이유.

그것은…….

‘추하군, 알폰스 바텐베르크.’

알폰스는 이를 악물었다. 누구에게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를 요구했던 자신이, 심지어 클로에에게조차 그러했던 자신이 그 멍청한 감정에 취해 이토록 한심하게 구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지금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세상 누구보다도 잘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되었다. 클로에가 자신과 같은 것을 원할 리가 없었다. 애당초 한 달에 한 번이라는 계약에도 어긋난다.

클로에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바랐던 것이 아닌가.

그것이 숨이 막혔다.

알폰스는 열망과 소유욕이 어린 붉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클로에는 자신이 얼마나 추잡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꿈에도 모르는 듯한 순진한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았다.

정신과 영혼은 욕망에 질질 끌려간 지 오래였으나 그는 육신에 한해 극도의 자제력을 쥐어짜 냈다.

한참을 클로에를 들여다보던 알폰스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안녕히 주무십시오.”

라고 말했다.

이변이 일어난 것은 그때였다.

그의 입술이 동그란 이마에서 떨어져 나가는 순간, 두 팔이 덮치듯 그를 쓰러뜨렸다. 한껏 방심하고 있었던지라 그대로 당해 버린 알폰스는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클로에가 자신을 쓰러뜨린 것이다.

그녀는 잔인할 정도로 사랑스러운 얼굴로 웃었다. 그리고는 입술을 포개왔다.

오늘만 해도 처음이 아닌 입맞춤은 짧았다. 그녀의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그것은.

알폰스의 이성의 끈을 끊어 놓기에 충분했다.

“――!”

눈 깜짝할 사이에 두 사람의 위치가 뒤바뀌었다. 알폰스의 손은 그의 것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거친 놀림으로 클로에의 드레스를 벗기기 시작했다. 하녀 몇 명이 달라붙어 입혀 놓은 파티용 드레스는 그렇게 벗기기 쉬운 것이 아니라 자제력을 잃은 그는 옷을 거의 찢다시피 했다.

하얗게 드러난 클로에의 목덜미를 베어 물듯 빨아들이며 그녀의 목과 쇄골, 가슴팍까지 이어지는 낙인을 수도 없이 찍어낸 그는 코르셋의 어깨 줄을 내렸다. 참을성 없이 코르셋의 천으로 만들어진 가슴 부분만 뒤집어 내린 뒤 흰 봉우리의 선단을 물었다.

“응……! 으응!”

행위가 시작되면서부터 끊임없이 흘러나오던 클로에의 신음 소리가 높아졌다. 민감한 선단을 알폰스는 집요하게 괴롭혀댔다. 클로에의 얼굴이 쾌감으로 일그러지고 목소리는 녹아들어 갔다. 그녀의 가는 허리가 호선을 그리며 떨렸다. 단지 가슴만을 애무했을 뿐인데 그녀는 평소보다 더 민감하게 반응했다.

“아……! 아, 알폰스……!”

그녀가 가는 손가락으로 알폰스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순간 알폰스의 눈에서 불똥이 튀는 것만 같았다. 그는 그제야 가슴을 괴롭히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 대신에 클로에의 발치로 내려갔다.

아직도 발끝에서 간당거리는 하이힐을 멀리 집어던져 버리고 알폰스는 스타킹을 벗기지 않은 채 클로에의 발끝을 물었다. 클로에의 엄지발가락에서 시작된 그의 애무가 천천히 안쪽으로, 더 은밀한 방향으로 이동했다. 무릎 뒤쪽의 여린 살을 살짝 깨물자 클로에가 눈에 띄게 움찔 떨었다.

스타킹 위, 가터벨트의 아래로 흰 살결이 그대로 드러난 허벅지를 쓰다듬던 알폰스는 그 안쪽에도 붉은 자국을 새기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라는 증거를 남기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는 연한 살을 빨아들일 때마다 깨물어 매번 움찔거리는 클로에의 반응을 즐겼다.

마침내 그녀의 허벅지 안쪽이 온통 붉은 자국과 잇자국으로 얼룩덜룩해졌을 때 알폰스는 속옷을 젖혔다. 그곳은 이미 상당히 젖어 있어 그의 것을 받아들이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지만 그는 만족하지 않았다. 그가 손끝으로 잔뜩 젖은 음핵을 굴리기 시작하자 클로에가 자지러졌다.

“아앗! 아!”

알폰스는 당장이라도 그녀의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욕망을 누르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누가 보더라도 성급한 손길로 클로에의 음핵을 빠르게 굴렸다. 그녀의 가녀린 몸이 파드득 떨렸다. 클로에의 허벅지가 간헐적으로 힘이 들어갔다가 이완되었다.

“아앙, 아, 아하악, 앗……!”

아니, 아니다, 여전히 충분하지 않았다. 알폰스는 그녀의 젖은 음핵에서 손을 떼고 입을 가져다 대었다. 혀끝으로 음핵을 핥고, 두 입술로 그것을 비비던 알폰스는 아주 조심스럽게 그것을 빨아들였다.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흐아아! 하아! 아흐으……!”

비명에 가까운 신음성이 터져 나오고 클로에의 허리가 강하게 휘었다. 만일 그녀가 술에 취하지 않았더라면 견디기 어려웠을, 그래서 분명 그만하라고 소리쳤을 만한 격렬한 쾌감. 하지만 알폰스는 그것을 알면서도 그만두지 않았다. 그만두기는커녕, 입술로는 그녀의 음핵을 괴롭히며 손가락 끝으로 입구를 건드렸다.

입구의 민감하디 민감한 살을 건드리는 것은 약간의 간지러움과 함께 클로에, 그녀를 더욱 흥분케 했다. 이미 그곳은 충분히 젖어 있어 손가락 정도를 받아들이는 데에는 무리가 없어 보였지만 알폰스는 무작정 쑤셔 넣는 대신 손가락 끝부터 조심스럽게 넣어 왕복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손가락 끝, 그다음은 한 마디, 두 마디, 그리고 마침내 손가락 하나. 알폰스는 음핵을 입술로 비비고 빨아들이며 애무하면서 손가락으로 거듭되는 피스톤질을 했다.

“하아앙! 아응, 아앗, 아……!”

두 군데, 그것도 여자의 몸에서 제일 민감한 부분 두 군데를 동시에 공격당하는 클로에는 한껏 몸을 뒤틀었다. 스타킹을 신은 발가락을 한껏 오므리며 쉴 새 없이 파드득거리며 몸을 떨었다.

그런 그녀가 느끼고 있는 견디기 어려울 정도의 쾌감을 증명하듯 그녀의 입구에서는 매끌거리고 끈적한 액이 끊임없이 흘러나와 침대 시트를 적셨다. 그저 손가락 하나를 넣었을 뿐이지만 클로에의 입구는 그것을 빈틈없이 조였다. 마치 그를 조르는 양. 무언가 더 좋은 것을 갈구하는 양.

취기가 아직 가시지 않아 몽롱한 상태에서도 클로에는 자신이 ‘좀 더’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너무나 좋았지만, 머릿속에선 끊임없이 벼락이 치고 몸이 뒤틀렸지만, 충분히 흥분한 그녀의 몸은 이미 경험해 본 알폰스의 그것을 원하고 있었다.

그녀가 간신히 말했다.

“알…… 폰스. 제, 제발…….”

평소라면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술에 취해 이성의 통제를 잃고 본능적으로 되어 버린 클로에는 솔직하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갈구했다.

“좀 더…… 앗! 더, 더어……. 알폰스, 좀 더…….”

아랫도리를 괴롭힘당하면서도 겨우 쥐어 짜낸 말이었다. 눈치 빠른 알폰스가 이 말을 알아듣지 못할 리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말에 반응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집요하게 그녀의 음핵을 혀와 입술로 탐하고 입구를 농락할 뿐이었다.

하다못해 피스톤질을 하는 손가락의 개수라도 늘려 줬으면 하는데 그는 오로지 손가락 하나만을 사용했다. 클로에는 술기운에 그것이 못내 애가 탔다. 너무 좋은데, 또 너무나 애가 타 죽을 지경이었다. 자신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는 알폰스가 원망스러웠다.

“하아! 알…… 폰스! 알폰스! 아앗!”

몇 번이나 더 불러 보았지만 허사였다.

그리고, 그녀가 원하던 ‘그것’ 대신 다른 것이 그녀를 찾아왔다. 절정이었다. 애타는 애무 끝에 절정이 파도처럼 그녀를 덮쳤다. 그녀는 감전이라도 된 듯 몸을 뒤틀었다. 파도에 쓸려 내려가듯 그녀는 이 절대적인 감각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쓸려 내려가는 대로 몸을 맡길 뿐이다.

“아아아아아!”

오래 애타게 만든 만큼 그 쾌감은 길었다. 그녀가 절정을 느끼는 도중에도 알폰스는 애무를 멈추지 않았다. 절정을 따라 클로에의 질벽이 수축해 마치 그의 손가락을 쥐어짜는 것만 같았다.

마침내 절정이 끝나고, 알폰스 역시 그녀에게서 입과 손을 떼었다. 손가락을 구멍에서 빼내자 애액이 실처럼 길게 늘어졌다. 클로에는 침대 위에 늘어져 숨을 몰아쉬었다.

알폰스는 그 몸 위로 허리를 기울였다. 술과 쾌감에 취해 붉게 상기된 뺨을 한 그녀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알폰스는 그녀의 몸을 바라보았다. 반쯤 벗은 코르셋과 애액에 젖은 속옷, 가터벨트와 스타킹을 그대로 입고 있는 하얀 몸.

그 누구에게도 넘겨주고 싶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몸. 그 모든 것이 그의 것이었다.

잠시 눈을 감고 있던 클로에가 눈을 떴다. 몽롱한 눈동자가 도르륵 굴러 그를 담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알폰스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자신이 그녀를 볼 때 생각하는 것과 똑같은 것을 그녀 역시 생각할까.

‘무엇을 느끼고 있습니까.’

자신이 그녀를 만질 때 느끼는 것과 똑같은 것을 그녀 역시 느낄까.

그럴 리가 없었다.

제국법으로 구속되어 있는 그녀의 몸은 그녀가 자신의 아내로 남는 이상 영원히 그의 것이었다. 하지만 법은 그녀의 마음과 영혼까지 구속하지는 못한다.

그것을…… 자신이 바랐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만한 여자를 고르고 골라 제 곁에 두었다. 그녀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가만히 누워 알폰스를 바라보던 클로에는 어느 순간 세상이 뒤집히는 것을 느꼈다.

“아?”

아니다, 세상이 뒤집힌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이 뒤집힌 것이었다. 그녀는 크고 단단한 두 손이 자신의 골반을 쥐고 끌어 올리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양팔로 시트를 짚어 상체를 받쳤다.

알폰스는 한 손으로는 클로에의 골반을 쥔 채 한 손으로 거칠게 자신의 바지춤을 끌렀다. 이미 한참 전부터 아플 정도로 발기해 있던 그의 물건이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그는 클로에의 속옷을 젖혔다. 푹 젖고 붉게 충혈되어 있는 입구가 드러났다.

그는 자신의 것을 쥐고 잔뜩 젖은 구멍에 맞추어 천천히 밀어 넣기 시작했다.

몽롱한 와중에도 민감한 구멍이 잔뜩 팽팽해지고 몸속에 무언가가 들어차는 감각만은 생생했다. 클로에는 저도 모르게 낮은 신음을 흘렸다. 절정을 느낀 직후였고 충분히 젖어 있어 조금도 아프지 않았지만, 이 뻐근함과 이물감은 술기운에도 어찌할 수 없었다.

천천히 밀어 넣은 물건은 마침내 뿌리까지 그녀의 안으로 들어갔다. 알폰스는 다시 골반을 잡고 그것을 당겨 빼내었다. 귀두 끝에 질벽이 딸려 나가는 감각에 클로에가 신음했다.

추삽질의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느리게 시작했던 동작은 클로에의 엉덩이가 알폰스의 골반과 부딪쳐 소리가 날 정도로 거세졌다. 클로에의 신음도 높아졌다.

“아흐으! 앗! 하아, 아!”

그녀의 마음을 가지지 못하는 것도, 영혼을 가지지 못하는 것도 결국엔 자신이 자초한 일이었다. 누군가를 원망할 수도, 하늘을 원망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확실하게 내 손 안에 있는 그녀의 몸만이라도 완전히 가지고 싶다. 그녀가 오로지 자신만을 느끼고 자신만을 원할 수 있도록.

방금 절정에 도달해 놓고서 그녀의 질벽은 마치 굶주린 듯이 알폰스의 것을 휘감아 조여 댔다. 알폰스는 눈앞에 불똥이 튀는 것만 같았다. 지금껏 관계를 가져 보았던 그 어떤 여자에게서도 느끼지 못한 감각이었다.

클로에는 기다렸던 쾌감에 어쩔 줄을 몰랐다. 세포 하나하나가 조여들고 신경 하나하나가 환성을 터뜨렸다. 술기운에 부끄러움도 무엇도 다 잊은 채 그녀는 행복해질 정도의 열락을 즐겼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왠지 허전했던 것이다. 마치 제일 아끼던 물건 하나를 잃어버린 듯한 느낌.

어째서? 드디어 원하던 것을 받았는데. 이렇게나 기분이 좋은데.

클로에는 몽롱한 머리로 알폰스와 보냈던 한 달 전의 밤을 생각했다. 그때…… 그들은 마주 본 채 몸을 섞었다. 알폰스는 단단한 팔로 자신의 몸을 끌어안고 다정한 눈빛으로 말을 걸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에게 등을 돌린 채 성기만을 붙여, 그의 얼굴을 볼 수도 체온을 느낄 수도 없지 않은가.

클로에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녀는 알폰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침대를 짚고 있던 팔을 그를 향해 뻗으며 말했다.

“알…… 폰스. 하앗!”

“예.”

“아, 아…… 안아 주세요.”

순간 알폰스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흑, 흐윽……! 아, 안아 주세…… 안아 주세요!”

“…….”

거의 칭얼거리는 듯한 그 말에 알폰스는 할 말을 잃었다.

대체 왜, 이 여자는, 이렇게 종종 자신의 마음을 들었다 놓곤 하는 걸까. 그녀가 그러는 이상 그는 그녀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체념도 할 수 없었다.

알폰스는 클로에의 몸을 뒤에서 끌어안은 채 그녀를 침대에 모로 뉘었다. 갑자기 바뀐 체위에 클로에가 채 적응하기도 전에, 그는 더 볼 것 없이 강하게 삽입했다.

“흐아앗! 하앙!”

격렬한 쾌감에 몸을 떨면서도 클로에는 자신을 단단히 끌어안고 있는 알폰스의 체온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여전히 입고 있는 와이셔츠의 목깃이 그녀의 목덜미를 간질였다. 클로에는 그것에서 안정을 느꼈다. 여전히 얼굴은 볼 수 없는 채였지만, 아까보다는 나았다.

알폰스는 거칠게 추삽질하면서도 한 손으로는 클로에의 풍만한 유방을 주무르며 선단을 자극하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음핵을 굴렸다. 강렬한 자극이 전신을 채웠다. 짜르르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열기에 그냥 이대로 녹아버릴 것 같았다. 그녀가 신음했다.

“하앗! 아아! 아, 조, 좋아! 앗!”

평소라면 아무리 좋아도 결코 하지 못했을 말이지만 그녀의 이성은 술기운과 열락에 휘발되어 버린 지 오래였다.

그녀의 목덜미를 깨물던 알폰스가 내뱉었다.

“좋습니까?”

“앗…… 조, 좋아…… 하윽! 좋아아…….”

지금이 아니라면 들을 수 없을 솔직한 반응에 알폰스는 그녀의 귀를 살짝 깨물었다. 그가 속삭였다.

“저도 좋습니다.”

클로에의 뺨을 타고 생리적인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미 한 번 절정을 느꼈음에도, 뒤에서 마구 쳐올리는 거대한 것은 그녀를 다시 한 번 절정을 향해 잡아끌고 가고 있었다.

녹아 버릴 것 같았다. 목이 쉬도록 신음하고 베갯잇과 시트를 잡아 쥐고 침대를 긁자 알폰스가 그녀를 강하게 끌어안아 그러지 못하게 했다. 몸을 움직이지 못하니 더 미칠 것만 같았다. 오르막길을 빠르게 올라가는 그녀의 감각이 그녀의 입구를 쥐어짜고 강하게 조이게 했다.

절정이 다가오는 것을 직감하며 알폰스는 그녀의 안쪽으로 깊이, 더욱더 깊이 쳐올렸다. 되도록이면 그녀의 제일 깊은 곳에 자신의 것이라는 증명을 남기고 싶었다.

마침내 절정이 찾아왔다. 그녀는 몸을 강하게 떨며 저도 모르게 물고 있던 알폰스의 손을 깨물었다. 그와 동시에, 알폰스 역시 그녀의 제일 깊은 곳에 정액을 쏟아 냈다.

거친 정사의 여운 끝에 먼저 일어난 사람은 알폰스였다. 그는 클로에의 안에서 여전히 발기해 있는 자신의 것을 빼낸 뒤, 그녀의 뺨을 만졌다.

“잠들었나.”

그는 잠시 잠든 클로에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마차에서 내려 침실까지 오는 그 짧은 순간에도 졸 정도로 취해 있었으니 사실 지금까지 버틴 것만 해도 대견한 일이다.

알폰스는 옷매무새를 추스르고 일어났다. 그는 방문을 열고 하녀들을 불러, 클로에의 옷을 갈아입히고 그녀를 씻기도록 했다.

* * *

클로에는 다음 날 아침 눈을 떴다. 깨어난 그녀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알폰스를 찾는 일이었다.

그는 그곳에 없었다.

침대 위에는 오직 그녀 혼자뿐이었다. 게다가 자신의 몸은 깨끗하고 어제의 외출복이 아닌 얇은 잠옷을 입고 있었고, 화장도 다 지워져 있었다. 침대 시트도 갓 간 것처럼 깨끗했다.

‘이상하다, 다 꿈이었나……?’

그 끈적하고 달콤한 감각도, 전신이 부서질 것만 같은 생생한 쾌감도, 전부?

그렇게 생각하면서 몸을 일으킨 그녀는 앓는 소리를 내며 다시 드러누워야 했다.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쑤셨던 것이다.

‘꿈이 아니구나!’

그렇게 생각한 그녀는 차임벨을 울려 전속 하녀를 불렀다. 그녀가 하녀를 불러 제일 먼저 한 일은, 따끈한 스팀 타월과 지난번 샨탈이 주었던 약초를 이용해서 허리에 찜질을 하는 것이었다.

찜질과 간단한 식사를 하니 몸이 꽤 나아져서 움직일 정도는 되었다. 그녀는 방으로 가져온 식기를 다시 가져가기 위해 침실 한편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녀에게 물었다.

“공작님은 오늘 저택에 계시니?”

“아니요, 마님. 공작님께선 잠시 외출 중이십니다.”

클로에는 살짝 뾰로통해졌다. 어젯밤에는 자신과 그런…… 일을 해 놓고, 함께 자지도 않고 바로 외출이라니 너무 매정한 거 아닌가?

어쨌든, 마음 같아서는 오늘 하루 그냥 푹 쉬어 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지난번에 들어온 사업 제의안을 검토하는 등 할 일이 제법 있었던 것이다. 알폰스는 저녁 식사 때 만나기로 하고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아주 드물게도, 그 날 알폰스는 저녁 식사 시간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클로에는 혼자서 저녁 식사를 했다.

알폰스가 돌아온 것은 제법 늦은 밤중이었다.

그때까지 엘리와 차를 마시고 밀린 업무 몇 개를 해치우며 그를 기다리고 있던 클로에는 골이 난 상태였다. 사실 자신도 자신이 왜 그러는지 명확한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화가 났다.

알폰스는 많은 일을 공작저에서 수행하고, 가끔 황궁으로 직접 출근하거나 출장을 가는 일이 있어도 시곗바늘처럼 정확한 시간에 귀택하곤 했다. 그런 그가 하필 오늘 이렇게 늦게 들어와야 할 이유는 뭐란 말인가?

“각하께서 귀택하셨습니다.”

하녀의 말에 클로에가 물었다.

“고맙구나. 공작님께선 지금 어디에 계시니?”

“집무실에 계십니다.”

클로에는 여기서 한 번 더 화가 났다. 이렇게 늦게 들어와서는 자신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또 일을 하러 갔다는 말인가?

그녀는 직접 찾아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하녀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물린 뒤, 스스로 간단히 옷매무새를 점검하곤 알폰스의 집무실로 갔다.

문을 두드리자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십니까.”

“저예요, 알폰스.”

클로에가 말한 그때였다. 거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집무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그 너머에는 알폰스가 있었다. 꼭 그녀가 올 줄 알았던 것만 같았다.

그 얼굴을 마주하자 클로에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알폰스가 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표정 변화가 크지 않은 그인지라 알아보기는 어려웠지만 클로에가 느끼기에 그 얼굴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미안함이나 당황함에 가까웠다.

클로에가 먼저 말을 할 타이밍을 놓친 동안, 알폰스가 말했다.

“부인, 왜 그렇게…….”

클로에는 왠지 모를 기대감과 두근거림으로 그의 뒷말을 기다렸다.

“입술이 툭 튀어나와 있습니까.”

아니, 이 사람이! 기껏 한다는 소리가!

어쨌든 알폰스가 그 말을 해 준 덕에 클로에는 자신이 지금 오리 입이 되도록 화가 나야 하는 상태라는 것을 인지했다. 그녀는 목을 빳빳이 들고 답지 않게 턱을 쳐들었다.

“알폰스, 오늘 늦게 오셨네요.”

그리고 클로에는 심상치 않은 기색을 눈치챘다. 알폰스가, 그 알폰스가 자신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클로에는 괜한 자존심에, ‘기다린 것은 아니’라고 말하려고 하다가 멈칫했다. 사실은…… 그를 기다린 게 맞았고, 그녀는 거짓말에 능숙하지 않았다.

알폰스는 클로에를 집무실의 안으로 이끌었다. 그녀는 집무실의 안쪽으로 걸어 들어오면서 그의 책상을 흘끗 보았다. 책상 위에는 반쯤 글씨로 빼곡히 덮여 있는 편지지와 서류 몇 장, 잉크병과 철필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알폰스는 클로에를 집무실 중앙의 소파에 앉힌 뒤 그 앞에 마주 앉았다. 클로에는 화났다는 의사 표현의 일환으로 다리를 꼬아 앉았다. 그녀가 말했다.

“공작님, 혹시 계약을 위반하신 것 때문에 제게 미안해서 늦게 들어오신 거라면 그럴 필요 없었어요. 좀 당황스럽긴 했지만 화가 나진 않았는걸요. 전 오히려…… 그러니까…… 공작님이 같이 있어 주셨으면 했어요. 왜냐하면…… 그런 일을 치른 뒤 혼자 일어나는 아침은 무척 외롭고 불안하거든요. 공작님은 공감이 안 되실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그래요.”

그녀는 일부러 알폰스라는 호칭 대신 거리감이 느껴지는 공작님이라는 말을 썼다.

“게다가 늦게 들어오신 것도 그렇고요. 어찌 됐든 공작님과 저는 부부이니까 걱정이 되는걸요. 그러니까 앞으론 말없이 떠나서 늦게 들어오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말해놓고 보니 클로에는 약간 민망해졌다. 부부라고는 하지만 사랑해서 결혼한 사이도 아닌데, 너무 참견을 한 건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 정도는 함께 한 지붕 아래에서 살아가는 부부간의 예의라고 생각하곤 말을 마무리 지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뿐이에요.”

알폰스는 클로에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도록 기다려 주었다. 그는 잠시 자신이 할 말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여전히 미사여구라든가 마음을 녹이는 달콤한 말에 능한 편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짧게 말했다.

“부인께서 혼자 계시게 해 죄송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늦게 들어온 이유는 부인에 대한 죄송함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네? 그럼요?”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클로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슴주머니에서 시가 케이스를 꺼내려던 알폰스는 다시 그것을 밀어 넣었다. 그는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서류들을 가져와 자신과 클로에 사이의 협탁에 내려놓았다.

“오늘 황궁에서 맺은 계약서입니다.”

“네? 황궁이요?”

알폰스가 자신의 일에 대해 클로에에게 말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서류를 끌어당겼다. 그녀의 눈동자가 글자 위를 훑고 지나가는 동안 알폰스가 설명했다.

계약의 내용은 이러했다. 황궁에 일정량의 찻잎을 공급할 것. 그리고 황궁의 시녀들에게 차 우리는 법을 교육시킬 것.

계약의 내용이 믿어지지 않았던 클로에는 계약의 상대자를 살폈다. 상대는…… 황제였다. 조지 왈트발 메르세데스 블라디미어.

일전에 철관음을 인상적으로 마셨던 황제가 주기적인 찻잎 공급을 의뢰한 것이다. 포트넘 부인의 하우스 파티 때에 알폰스가 받았던 연락이 바로 이것이었다.

책임자로 알폰스가 나서긴 했지만 이건 사실상 클로에 그녀에 대한 의뢰와 다름이 없었다. 황제는 그녀를 염두에 두고 의뢰를 한 것이었다.

클로에는 거의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알폰스가 오늘 늦게 들어온 것은 이 계약을 성사시키기 위해서였다. 서류를 몇 번이고 읽던 클로에는 마침내 그것을 협탁 위에 내려놓고 알폰스를 보았다.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알폰스가 차분히 말했다. 클로에가 보건대 그건 겸양의 표현이 아니었다. (알폰스는 그렇게 겸손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그녀가 좋아할지 확신을 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클로에는 뺨이 붉어졌다.

“이건…… 이건…….”

말로 감정 표현을 하려던 그녀는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느낀 것을 말로 표현하는 대신, 알폰스에게 다가가 그를 덥석 끌어안았다.

알폰스가 드물게도 움찔 놀랐지만 클로에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몇 초 후 그에게서 떨어져 나간 그녀가 행복에 겨워 말했다.

“알폰스, 정말 고마워요!”

그녀와 대조적으로 알폰스는 홍조 하나 띠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가볍게 웃었다. 그는 클로에가 자신을 부르는 호칭의 변화를 눈치채고 있었다.

“마음에 드시다니 다행입니다.”

그가 점잖게 말했다. 그러고는 그는 클로에의 허리에 팔을 둘러 잡아당겨 그녀를 자신의 옆자리에 앉혔다. 그녀의 등을 쓸어내리며 알폰스가 귓가에 속삭였다.

“계약 위반에 대해서는 화가 나지 않으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클로에는 얼굴이 붉어졌다. 방금 알폰스에게 따질 때에 저도 모르게 계약 위반에 대해서는 항의를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것이 떠올랐다. 그의 손길을 느끼며 그녀가 말했다.

“아…… 아니에요. 저 화 났어요.”

“그런 것치곤 꽤 적극적이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말입니다.”

“그…… 그, 그건, 술에 취해서…….”

귓가에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낮은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사람은 술에 취하면 본성이 드러난다고 하지요.”

이 양반이, 진짜!

클로에는 어제 자신이 지나치게 술을 마신 것을 후회했다. 설마 이 몸이 전생의 몸보다 술에 약하리라곤 생각지도 못한 것이 화근이었다.

그녀는 알폰스를 밀쳤지만 상대는 조금도 밀려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단단히 팔을 감아오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된 김에 계약을 수정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한 달에 한 번은 조금 적다고 생각하는데…….”

무섭도록 달콤한 소식을 전해 온 직후에 이런 제안을 하다니! 예전부터 느낀 것이었지만 클로에는 새삼 이 사람이 상당한 고단수라는 사실을 체감했다. 아무리 봐도 감정에 무감각하다는 거 거짓말 아니야?

“새…… 생각해 볼게요.”

결국 알폰스의 품에서 벗어나는 것을 포기한 그녀가 고개를 푹 숙이고 중얼거렸다. 긴 손가락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감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부끄러움에 눈을 감았다.

* * *

황제와의 미팅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사이에 클로에는 간단한 사교 활동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사교 활동다운 사교 활동을 한 지가 워낙 오래되었던 것이다. 사교 활동은 그저 즐기는 시간이 아니라, 귀족가 부인으로서의 의무이기도 했다.

그간 사교계의 온갖 사람들에게서 온 초대장이 제법 쌓여 있었다. 예전에만 해도 공작부인이기에 예의상 보내는 초대장 정도밖엔 받아 보지 못했지만 저번 생일파티 뒤로는 초대장이 훨씬 자주, 많이 들어왔다.

클로에는 가장 최근에 온 초대장 몇 장을 두고 고민했다. 무도회같이 거창한 곳보다는 가벼운 다과회에서 편안히 대화를 나누고자 했다. 너무 멀리 가고 싶지도 않았다. 이런저런 조건을 취합하니 적합한 자리는 딱 한 군데밖에 없었다.

클로에는 마르가리타 자작부인의 다과회에 가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다과회 당일, 파티의 자리에서 클로에는 예상치 못한 상대를 마주쳤다.

“어머. 그동안 안녕하셨나요, 바텐베르크 공작부인.”

아리아나, 일전에 무도회에서 마주쳤던 아리아나 바넷이었다.

“안녕하세요, 바넷 영애.”

클로에는 그녀가 누구인 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아리아나, 그녀는 무도회에서 친구와 함께 클로에의 험담을 하던 사람이었다.

분명 좋은 인연은 아니었지만, 클로에는 싫거나 불쾌해하는 티를 대하지 않고 차분하게 상대를 대했다.

그녀의 차분한 반응에 아리아나가 살살 눈웃음을 쳤다.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요. 만나 뵙게 되어서 반가워요. 바텐베르크 공작부인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듣고 있었답니다.”

‘선의에서 이러는 것 같지는 않아.’

친근한 척 다가오는 그녀의 태도가 클로에는 어쩐지 찜찜하게 느껴졌다. 클로에의 험담을 하던 현장을 알폰스에게 들켰을 때 아리아나가 보였던 억울함과 원한 섞인 눈빛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서 더 그럴지도 모른다.

그래서 클로에는 그녀에게 그냥 예의상의 반응을 했다.

그리고 클로에의 그런 예상은 제대로 맞아떨어졌다. 아리아나는 지난 무도회에서의 바텐베르크 부부와의 만남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의 굴욕과 자신이 오랜 시간 짝사랑해 왔던 상대 알폰스에 대한 배신감과 애증, 클로에에 대한 시기를 도저히 지울 수가 없었다.

아리아나는 클로에가 알폰스와 함께 행복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녀는 클로에가 당황하고, 충격을 받았으면 했다. 상처받고 분노하거나 눈물이라도 보인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런 악한 마음을 품은 채 아리아나는 가시꽃 같은 미소를 지었다.

“부군께선 잘 지내고 계신가요?”

순간 클로에는 가슴이 싸하게 식는 것만 같았다. 그녀에 대한 시기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던 여자가 알폰스에게 관심을 보였다. 그 의도가 의심될 수밖에.

하지만 그런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클로에는 침착한 어조로 대답했다.

“물론이죠, 공작님께서는 언제나 잘 지내신답니다.”

“어머, 그거 다행이네요. 좋은 분이시니까요, 공작 각하는. 그 다정하신 분께서 무탈하시기를 저는 언제나 바란답니다.”

아리아나가 회상에 빠진 듯한 말투로 말했다.

“예전에 각하께선 언제나 제게 꽃을 보내곤 하셨죠. 제가 어딜 가든 바래다주시고, 따스한 눈길로 눈을 맞춰 주시곤 했는데, 그때의 즐거웠던 추억이 떠오르네요.”

물론 새까만 거짓말이었다. 알폰스는 그렇게 다정한 남자가 아니었을뿐더러 무엇보다 아리아나는 그와 교제한 적이 없었다.

그러한 사실까진 몰랐지만 클로에는…… 기가 찼다. 그녀가 설령 과거에 알폰스와 교제했었다고 한들 그 얘기를 지금 자신에게 꺼내는 것은 당연히 무례한 일이었다.

클로에는 그제야 자신과 아리아나의 자리가 하필이면 바로 옆자리인 것 역시 우연이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아리아나는 처음부터 이런 것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든 다과회의 주최자인 마르가리타 부인에게 입김을 불어 넣었겠지.

클로에의 눈빛이 싸늘해지자 아리아나가 사풋 웃었다.

“어머, 죄송해요. 제가 이런 무례를. 물론 공작 각하께선 이제 부인의 부군이시죠. 이제는 그 다정함을 부인께 보여 드릴 것이라고 생각하면 부럽네요.”

클로에는 그 말의 의도 역시 이해했다. 아리아나는, 알폰스가 클로에에게 그러한 다정함을 보여 줄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리아나가 진심으로 원하는 건 그거였다. 클로에가 아리아나 자신을 질투하고 알폰스에게 상처받는 것.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실상 알폰스는 클로에에게 꽤 다정하기도 했고, 클로에 역시 그렇게 쉽게 상처받을 정도로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었다. 잠자코 커피잔을 휘젓던 그녀가 직구를 던졌다.

“영애께서 과거에 공작님과 교제를 하셨다니 전혀 몰랐던 사실이네요.”

“각하께서도 부인께 말씀을 드리기는 꺼려지셨겠죠. 저와 각하가 좀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으니까요.”

“그래요? 그거 무척 흥미롭네요. 얼마나 가까운 사이셨는지 궁금한걸요.”

그렇게 말하는 클로에의 입가에는 얼핏 부드러운 미소마저 걸려 있었다. 직장 생활을 하며 온갖 진상 상사들을 만나 봤던 그녀로서 이 정도의 표정 관리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리아나는 살짝 초조해졌다. 이 정도씩이나 도발을 했는데도 상대가 아무렇지 않아 보이지 않는가. 그녀는 점점 더 자극적이고 도발적인 말을 찾기 위해 고민했다.

한편, 클로에는 옆 눈으로 주변을 살펴보았다. 아리아나가 지금 벌이고 있는 짓은 누가 보기에도 예의에 어긋나는 것일 터였다. 그러나 주변에 있는 그 어느 누구도 그녀를 말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긴커녕 오히려 호기심과 흥미 어린 눈길로 이쪽을 흘끗거릴 뿐이었다.

보통의 경우 공작부인에게 이렇게까지 무례를 보인다면 제재를 할 법했지만 클로에는 보통의 공작부인이 아니었다. 아직도 사교계의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만만히 여기고 있는 모양이었다. 주변의 모두가, 클로에 그녀가 언제쯤 울며 뛰쳐나갈지 아니면 화라도 낼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뭐, 좋다. 이렇게 많은 시선이 모여 있을 때가 낚싯대를 드리우기는 적기였다. 그렇게 생각하며 클로에가 물었다.

“저와 공작님께선 자주 티타임을 가지곤 해요. 공작님께선 차를 좋아하시거든요. 영애와도 그런 자리를 자주 가지셨나요?”

클로에가 도발에 쉽게 넘어가지 않자 초조해진 아리아나는 자기 자신도 수습하기 어려울 지경까지 거짓말을 했다.

“그럼요. 저와도 종종 커피를 한잔하셨지요. 저는 곁들이는 간식으로 종종 그분이 제일 좋아하는 과자를 구워 오곤 했답니다.”

“아아, 그러셨군요. 공작님께서 제일 좋아하시는 과자가 어떤 건가요?”

아리아나는 그렇게 클로에가 드리운 낚싯바늘을 물어 버렸다.

“……으음, 공작님께선 건과일을 가득 넣은 사브레를 좋아하세요.”

클로에가 생긋 웃었다.

“바넷 영애. 영애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계시네요.”

순간 분위기가 싸하게 가라앉았다. 각자 소담을 나누는 척하면서 클로에와 아리아나의 보이지 않는 신경전에 관심을 쏟고 있던 사람들이 전부 말문을 잃고 이쪽을 돌아보았다.

클로에는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공작님은 단 것을 전혀 즐기시지 않아요. 특히 과자는 제일 질색하시죠. 그래서 차도 언제나 단 향이 전혀 없는 것을 즐기시고, 티 푸드로 단 것은 거의 입에 대지 않으세요. 간식도 거의 드시지 않고요. 이제, 제가 정말 궁금한 것은…….”

순간, 클로에의 시선이 싸늘해졌다. 그녀가 냉랭하게 말했다.

“……어째서 영애가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공작님과의 옛 관계를 꾸며 내려 하시는 건가, 그것이네요.”

‘속았다.’

아리아나는 그제야 자신이 클로에의 심문에 완전히 넘어갔음을 깨달았다.

‘내가 간악한 공작부인에게 완전히 속아 버렸어.’

이 많은 사람들의 앞에서 큰 망신을 당한 그녀의 얼굴이 납빛이 되었다.

그들을 지켜보던 귀부인들은 말없이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드디어 보이지 않는 신경전의 결판이 났다. 상황의 주도권은 누가 뭐래도 클로에의 것이 되었다. 이쯤 되니, 더 이상 뜸을 들여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귀부인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클로에의 편을 들기 시작했다.

“맞아요, 저도 바넷 영애가 바텐베르크 공작님과 교제했다는 이야기는 금시초문이네요.”

“저도 그런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어요.”

그러나 클로에는 그들이 간사한 기회주의자임을 잘 알고 있었다. 클로에가 울며 뛰쳐나가기만을 기다리던 그녀들이 뒤늦게 자신에게 아부를 하는 모습은 무척 우습고 구역질이 났다.

클로에는 그런 부류의 사람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녀는 간사한 모습을 보이는 귀부인들의 얼굴과 이름을 하나하나 전부 기억해 두었다.

귀부인들이 클로에의 편까지 들자 납빛이었던 아리아나의 얼굴은 터질 듯 붉어지다 못해 검붉은 빛을 띠었다. 할 말을 잃은 그녀는 조가비처럼 입을 다물었다. 이후로 다과회가 끝날 때까지 아무도 그녀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다과회의 주최자인 마르가리타 부인이 화제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바텐베르크 부인께서는 차를 좋아하신다면서요? 정말 대단하세요. 그런 외국의 문물을 일찍부터 받아들이시다뇨.”

“맞아요, 정말 놀라워요.”

“저도 마셔 보고 싶어요.”

주변의 귀부인들이 맞장구를 치며 거들었다.

클로에는 황당했다. 저번에 벨라도나 영애가 주최했던 다과회에서는 모두가 그녀가 차를 마시는 것을 비웃었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제 와서 그것이 대단하고 놀랍다니, 어쩜 이렇게 태도 바꾸기를 손바닥 뒤집듯이 쉽게 하는지.

다과회에 다녀온 클로에는 다시 미뤄 뒀던 일을 손에 잡았다. 그녀는 바쁘게 일을 할 필요가 있었다.

남을 가르쳐 본 경험이 없는 클로에가 시녀들을 교육시킬 준비를 하는 것부터가 일이었다. 그런 뒤에는 황제가 원하는 조건에 맞는 차를 찾고, 설명을 준비해야 했다.

황제가 원하는 조건은 그거였다. ‘철관음과 비슷한 차’. 정말이지 애매하기 짝이 없었다. 황제가 차에 조예가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우선 클로에가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은 철관음과 같은 우롱차 종류였다. 동방미인이나 봉황단총 같은, 중국이나 대만의 차라면 더 좋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가 가진 차들 중엔 그 차들과 비슷한 것이 없었다. 클로에는 혹시 그것들과 비슷한 차는 없나 나중에 수입상에 의뢰를 해 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어쨌든 현재 가지고 있는 차들 중, 제일 조건에 걸맞은 차는…….

고민의 끝은 바라트 왕국의 어느 한 지방으로 닿았다. 선택지는 그것밖에 없었다. 클로에는 황제가 이것을 마음에 들어 할 것을 확신했다.

마침내 시연을 해 보이기로 약속한 당일이 되었다. 클로에는 몇 명의 사용인들을 이끌고 세 통의 차를 챙긴 뒤 마차를 타고 황궁으로 향했다.

일전에 황제를 알현했던 때에는 정원으로 갔지만 이번의 만남 장소는 응접실이었다. 그녀가 황궁 귀빈 응접실에 도착하자 황제가 친절하게 맞아 주었다.

“오랜만이구려, 바텐베르크 부인. 혹시 과인의 의뢰가 바쁜 와중 폐가 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소.”

“아닙니다, 폐하. 폐하의 명을 받들 기회를 얻는 것은 제게 크나큰 영광입니다.”

“명이라니? 내 청을 오해하지 말아 주시오, 부인. 그저 늙은이의 사사로운 바람일 뿐이라오.”

이번 자리에 아서는 없었다. 클로에는 그편이 차라리 편하게 느껴졌다. 지위도 연배도 황제가 아서에 비해 비교할 수도 없이 높은데 왜 아서 쪽이 훨씬 불편하게 느껴지는 건지 모르겠다.

가무잡잡한 피부 위로 친근한 눈주름을 그린 황제가 말했다.

“그럼, 부인이 이번에 가져온 차는 무엇일지 궁금하군. 보여 줄 수 있겠소?”

“물론입니다.”

클로에는 자신이 데려온 사용인들을 불렀다. 세 명의 하녀들이 차통을 하나씩 들고 나타났다.

“이번 차도 지난번에 맛보여 주었던, 그, 우롱차인가?”

“아닙니다. 이 차는 홍차입니다.”

“우리 아들놈이 부인에게서 대접받았다는 그것이로군.”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흰 종지에 마른 찻잎을 조금씩 담아 선보였다.

마른 찻잎에서부터 독특한 향기가 피어올랐다. 만일 이 자리에 아서나 알폰스가 있었다면 평범한 홍차와는 또 다른 특별한 향임을 알아차렸을 것이었다.

“제가 이 차를 고른 이유는, 이 차는 비록 홍차이지만 우롱차와 같은 산화도가 낮은 차의 특징을 그대로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꽃과 과일의 독특한 아로마는 철관음의 그것과 비슷합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차의 향은 철관음의 그것과 똑같지는 않았지만 꽃과 과일의 독특한 향이 난다는 점에서는 닮은 구석이 있었다.

세 종지에 담긴 찻잎은 왼쪽으로 갈수록 푸른빛을, 오른쪽으로 갈수록 검은빛을 띠었다. 특히 맨 왼쪽의 찻잎은 홍차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황제는 철관음의 동글동글 말린 잎의 푸른빛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차의 이름이 무엇이오?”

“네, 폐하. 이 차의 이름은 다즐링(Darjeeling)입니다.”

“다즐링?”

다즐링은 바라트 왕국의 다즐링 지역에서 생산되는 차를 일컫는다. 홍차의 80%를 차지하는 아쌈과는 차나무의 종 자체가 다르기에 일반적인 홍차와는 다른 특별한 향과 맛을 낸다.

아쌈이 묵직한 바디에 고구마나 호박을 연상시키는 몰트 향이 느껴진다면, 다즐링은 가벼운 바디에 과일과 꽃과 같은 달콤하고 상큼한 향을 가졌다. 난꽃향이 나는 철관음이나 다양한 꽃과 과일의 향을 내는 중국의 우롱차들과 일견 비슷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 이것은 다즐링이 아쌈과 달리 중국종의 차나무에서 나기 때문이다.

클로에가 오늘 바라트 왕국의 다즐링을 가져온 것은 이 때문이었다.

멀리까지 퍼져 나가는 다즐링의 달콤한 향기를 맡은 황제가 말했다.

“정말 독특하고 좋은 향이구려. 지난번에 마셨던 철관음에서 전형적인 동방의 향이 났다면, 이 차에선 과일과 꽃 같은 화려한 향이 나는 듯하오.”

“훌륭한 안목이십니다. 다즐링은 그 독특하고 뛰어난 향으로 세계 3대 홍차로 꼽히기도 합니다.”

“과연, 오늘도 좋은 차를 가져오셨구려. 코와 눈으로는 충분히 즐겼으니 이젠 슬슬 이 차를 맛보고 싶군. 부탁하겠소, 부인.”

클로에는 차통들을 가지고 응접실에 딸린 탕비실로 갔다.

커피팟에 우려야 할 줄 알았는데, 황제가 차에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지 황궁에는 간단한 티 세트가 준비되어 있었다. 전형적인 온식 다구였다.

클로에는 하녀들에게 물을 끓이고 다구를 예열할 것을 부탁한 뒤 찻잎을 계량해 티팟에 넣었다.

그녀는 준비된 다즐링들 중 첫 번째는 물을 약 80도의 온도까지 식혀서 넣었고, 두 번째와 세 번째는 95도가량의 끓는 물을 그대로 넣었다. 그리고 첫 번째 차는 낮은 온도에 우리는 만큼 조금 더 오랜 시간을 기다렸다.

차가 충분히 우려지자 그녀는 각각 다른 티팟에 거름망으로 걸러 차를 부은 뒤, 하녀들에게 지시해 그것들을 가지고 나왔다.

티팟 세 개가 등장하자 황제가 기쁜 듯이 웃었다.

“한 번에 세 가지의 차를 마셔 보다니, 이렇게 호화로운 일이. 한데 이게 전부 다즐링이오, 바텐베르크 부인?”

“네. 다즐링 지방에서 재배되는 다즐링은 매년 3~4월, 5~6월, 10~11월, 일 년에 총 세 번 수확됩니다. 각 시기에 수확된 다즐링은 모두 맛과 향, 특징이 다르기에 전부 준비해 보았습니다.”

“허허, 수확 시기마다 맛이 다르다니 특이하군. 각각 어떻게 다르오?”

클로에는 대답 대신 황제의 찻잔에 3~4월에 수확한 다즐링을 따라 내었다. 녹차나 우롱차처럼 적게 산화된 차와 같은 부드러운 노란빛이 찻잔에 가득 찼다.

클로에가 웃었다.

“이것이 3~4월에 수확한 다즐링, 즉 퍼스트 플러쉬(첫물차)입니다. 그 맛과 향을 느껴 주셨으면 합니다, 폐하.”

황제는 빙긋 웃곤 찻잔을 들어 올렸다.

혀 위로 굴러가는 찻물의 느낌이 가벼웠다. 그 향과 맛은 부드러웠다. 은은한 꽃향기와 약간의 단 향이 느껴졌다. 약간의 떫은맛도 있었다.

말없이 찻잔을 반쯤 비우던 황제가 말했다.

“혀와 입 안이 마르는 것 같은 기분이군.”

클로에가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설명했다.

“입 안이 마르고 조이는 듯한 그 감각을 수렴성이라고 하옵니다, 폐하. 차에는 모두 어느 정도 그런 느낌이 있는데, 특히 다즐링 퍼스트 플러쉬가 심한 편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다음 차들은 덜한 편이라는 것이군. 다음 차들을 마시고 싶소.”

황제는 찻잔을 반밖에 비우지 않은 채 다음 차를 주문했다.

다음으로 클로에는 5~6월에 수확한 다즐링, 즉 세컨드 플러쉬(두물차)를 따라 내었다. 그 빛깔은 밝은 오렌지빛으로, 향이 은은한 퍼스트 플러쉬에 비해 훨씬 화려한 향기가 찻잔에서 퍼져 나왔다.

그 차를 맛본 황제가 말했다.

“호……! 이것은 아까의 차보다 달고 향이 강하군.”

세컨드 플러쉬는 꽃향기가 강했던 퍼스트 플러쉬에 비해 과일과 같은 단 향이 강했다. 꽃향기나 열대과일과 같은 낯설고 달콤한 향이 균형 있게 조화를 이루었다.

클로에가 기쁜 듯이 말했다.

“네, 세컨드 플러쉬는 좀 더 농익은 과실의 향이 느껴지지요. 저는 다즐링 세컨드 플러쉬를 한 모금씩 머금을 때마다 꼭 과즙이 많고 향이 좋은 과일을 깨무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재미있는 표현이오, 부인. 흠, 과연 독특하고 매력적인 향이군.”

황제는 오래지 않아 찻잔을 모두 비웠다.

“마지막 차도 기대되는구려. 준비해 주겠소?”

“네, 폐하.”

클로에는 마지막 차를 따라 내었다. 그 수색은 퍼스트 플러쉬나 세컨드 플러쉬보다 짙고 어두워, 일반적인 홍차와 비슷한 진홍빛을 띠었다.

“마지막 다즐링, 오텀널(Autumnal, 가을차)입니다.”

퍼스트 플러쉬 다음이었던 세컨드 플러쉬가 향이 짙어졌으니, 마지막 차는 더욱 진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는 않았다. 오텀널의 향은 세컨드 플러쉬처럼 멀리 퍼지지 못하고 찻잔 근처에서만 머물렀다.

황제는 관심과 호기심을 보이며 그 잔을 들어 맛보았다. 그의 표정이 묘해졌다.

“흠? 굉장히 달구려. 이렇게 단 차는 처음 보오.”

여전히 꽃향기와 과일의 향이 느껴졌으나 오텀널에서는 특히 단내가 강했다. 세컨드 플러쉬에서 농익었던 과실이 익다 못해 즙이 뚝뚝 흘러내릴 지경이 되고, 꽃은 반쯤 져 버린 것 같았다.

클로에가 차분히 말했다.

“예, 겨울을 나기 위해 차나무가 비축해 놓은 당분이 잎에 그대로 녹아 있어 오텀널에서는 강한 단 향이 납니다.”

황제는 오텀널을 전부 마셨다.

“음, 나쁘지는 않지만 이 늙은이의 입맛에는 너무 달군. 이 차는 금방 질릴 것만 같소.”

클로에는 단 것을 좋아하기에 다즐링 오텀널도 즐겨 마셨다. 그러나 이미 알폰스에게 다즐링 삼종 세트를 실험(?)해 본 결과 단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오텀널의 단 향에서 거부감을 느낀다는 사실을 그녀는 이미 알고 있어 별로 마음 아프지는 않았다. (알폰스는 단 향이 제일 적고 향이 은은한 퍼스트 플러쉬를 호평했다.)

세 가지의 다즐링을 전부 마신 황제가 말했다.

“즐거운 시간이었소, 부인. 좋은 차를 세 가지나 마시는 호강도 해 보고, 부인에게 청하기를 잘한 것 같소.”

“과찬이십니다, 폐하.”

클로에가 고개 숙여 인사했다. 황제는 몸을 따뜻하게 덥히는 뱃속의 온기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과인은 부인이 가져온 차들 중 두 번째 차가 무척 인상 깊었소. 그 독특하고 훌륭한 향은 질 좋은 와인에 비할 법하더군.”

그래서 다즐링에는 ‘홍차의 샴페인’이라는 별명도 있다. 클로에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계약서를 공작저로 보낼 터이니 확인해 주구려. 오늘의 대접과 거래에 감사하오, 공작부인.”

“황송합니다, 폐하.”

그리하여 바텐베르크에서는 매년 황궁에 일정량의 다즐링 세컨드 플러쉬를 납품하게 되었다.

돌아가는 길에 클로에는 탕비실에서 차를 준비할 때 보았던 광경을 떠올렸다.

“앗, 뜨거!”

예열된 찻잔을 집어 들던 하녀들 중 하나가 소리쳤다. 다행스럽게도 찻잔을 떨어뜨려 깨 먹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덕분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놀라 그 하녀를 째려보았다. 하녀가 부끄러운 듯 고개 숙여 인사했다.

“죄, 죄송해요. 죄송합니다.”

그 모습을 지켜본 클로에는 생각했다.

‘찻잔이 잡기에 너무 뜨거웠구나. 그럴 만도 하지. 온의 찻잔에는 손잡이가 없으니까.’

온에서는 비교적 덜 뜨거운 물에 우리는 녹차와 우롱차를 주로 마시기에 손잡이가 없는 찻잔을 쓸 수 있지만, 아주 뜨거운 물에 우리는 홍차를 마시기에는 손잡이가 없는 찻잔은 불편하다.

전부 수입품인 외국의 찻잔과 티팟들은 여러모로 제국의 사람들에게 불편함이 있고 취향에도 잘 맞지 않았다. 그 사실을 곰곰이 생각해 본 클로에는 이 기억을 머릿속 깊은 곳에 새겨 두었다.

* * *

황제가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는 소문은 귀족들 사이에서 빠르게 퍼져 나갔다. 유행에 관심이 많은 귀족들은 그 황제가 마신다는 차에 조금씩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윈체스터 공작가의 영애 이졸데 역시 그중 하나였다.

“전하께서도 차를 드셔 보셨다고요?”

그녀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물었다.

아서는 과시하는 듯한 얼굴로 씩 웃었다. 그는 이졸데를 더욱 가까이 끌어당긴 뒤 말했다.

“물론이지. 우리 아바마마께 차를 납품하는 바텐베르크 공작부인 말이야, 내가 걔랑 좀 친해.”

“어머. 너무 멋져요, 전하! 전하는 과연 발도 넓고, 유행을 선도하는 분이시군요.”

“그럼. 바텐베르크의 공작부인, 클로에 말이야. 그 친구가 다른 건 몰라도 차 우리는 솜씨 하나는 기가 막히거든. 정말 신기하고 맛있는 차를 많이 대접받았지.”

사실 아서가 클로에가 우려 준 차를 마셔 본 건 단 두 번뿐이지만 그것을 솔직히 말할 그가 아니었다.

“우와, 어떤 차를 드셔 보셨어요?”

“뭐, 이것저것.”

자신이 마셔 본 차를 떠올리려 애쓰며 아서가 말했다.

“동방의 꽃의 향이 나는 차도 있었고, 독특한 과일의 향이 나는 차도 있었어. 이건 공작부인, 그녀가 직접 블렌딩한 세상에 하나밖에 없다는 특별한 차였지. 그런 특별한 차를 클로에가 내게 직접 우려 준 거야.”

“와, 전하는 정말 대단하세요!”

“어쨌든 이졸데, 너도 기회가 된다면 나중에 한 번 마셔 봐. 분명 네 마음에도 들 거야.”

“네, 전하!”

이졸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적극적인 맞장구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아서는 시시덕거리며 그녀의 술잔에 술을 한 잔 더 따라 주었다.

“좋아, 우리 그럼 건배할까?”

“그럼요!”

두 개의 은잔이 맞부딪치는 청명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졸데 윈체스터, 그녀는 다음 날 바로 찻잎을 주문했다. 찻잎을 수입하는 상단의 수가 적어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껌뻑 죽는 딸바보 아버지, 윈체스터 공작에게 부탁했더니 오래지 않아 약간의 홍차 찻잎을 구할 수 있었다.

어찌어찌 찻잎을 구하기는 했지만 차에 대한 지식이 없는 이졸데가 차를 맛있게 우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어쨌든, 이졸데가 원하던 것은 ‘정말 맛있는 차를 맛보기’가 아니라 ‘황제 폐하와 황자 전하도 즐겨 드신다는 최신 유행인 차를 맛보기’였기 때문에 그녀는 그런대로 만족했다.

이졸데는 곧 새로운 유행이 될 것만 같은 신문물을 친구들에게 자랑스럽게 선보였다.

“이것이 바로, 황제 폐하께서도 즐기신다는 홍차라는 것이랍니다.”

“어머! 이것이 바로 홍차로군요.”

“이렇게 빨리 홍차를 구하시다니! 역시 윈체스터 영애예요.”

이졸데는 클로에와 달리 사교계의 꽃이자 여왕이었다. 그런 그녀가 미숙한 실력으로 우려낸 홍차를 마시면서 주변 영애들은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어쨌든 황제에 황자, 제국에 단둘밖에 없는 공작가의 외동딸이자 사교계의 꽃까지 가세하니 귀족들이 홍차에 관심을 보이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이 새로운 유행에 조금이라도 먼저 탑승하고 싶은 귀족들의 차를 찾는 주문이 식료품점마다 빗발쳤다.

트리플 스위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또 편지가 왔습니다, 공작부인. 홍차 잎을 구할 수는 없느냐는데요.”

여진이 내려놓은 종이 상자에는 온갖 귀족가의 인장이 찍힌 편지가 그득히 담겨 있었다.

“공작부인께서는 일찍부터 차를 즐기시고 계셨다는 소문이 사교계에 제법 넓게 퍼져 있었던 것 같아요. 공작부인께서 즐기신다는 차를 직접 맛보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가 많네요.”

클로에는 어안이 벙벙했다. 자신이 주변에 홍차를 퍼뜨리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데! 그 많은 노력보다 황제와 황자가 차를 즐긴다는 소문 한 번의 위력이 훨씬 강력했다.

어찌 됐든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하는 법이다.

“고마워요, 여진. 트리플 스위트에서 찻잎을 판매하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해 보아야겠어요.”

기본적으로 트리플 스위트의 정체성은 잼 가게다. 달콤한 잼과 꿀, 시럽 등 귀부인들이 찾고 즐길 만한 고급스럽고 달짝지근한 것들이 주 판매 품목이었다.

하지만 클로에는 잼 가게에서 찻잎을 파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차에는 달콤한 티 푸드가 잘 어울리니까.

“이렇게 말씀드리면 실례일지도 모르지만, 과연 제국인들이 차의 진정한 맛과 향을 찾아내 즐길 수 있을까요? 저는 조금 회의적인데요.”

여진의 말에 클로에가 웃었다.

“그것이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역할 아니겠어요.”

한 번 트리플 스위트에서 찻잎을 취급하기로 마음을 먹었으니 쇠뿔은 단김에 빼기로 했다. 제일 먼저 고민해야 하는 것은, 많고 많은 차들 중 어떤 차를 트리플 스위트에서 취급해야 하느냐였다.

전량 수입품인 데다 수입 통로도 많지 않은 찻잎을 들이는 일은 상당한 비용과 시간이 든다. 기껏 힘들게 들여온 찻잎이 잘 팔리지 않으면 큰 손해를 보게 되니, 신중하게 고민해야 했다.

“바라트의 아쌈, 그리고 싱할라의 차가 좋겠어요.”

“훌륭한 선택이십니다, 공작부인. 홍차 중에 제일 무난하고 취향을 타지 않는 종류로군요.”

아쌈은 일전에 포트넘 부인이 첫 구매한 홍차로, 진한 맛과 수색, 그리고 고구마나 호박과도 닮은 구수한 몰트 향을 가진 차다.

싱할라의 차는 과거 클로에의 전생에서 마셨던 차 중, 실론과 많은 특징이 닮아 있었다. 실론이란 스리랑카의 차를 통칭하는 말로, 무난한 맛과 향 그리고 아름다운 오렌지빛 수색을 가졌다.

클로에는 수입에 앞서 차의 반응을 시험하기로 했다.

* * *

어떤 차를 취급할지를 결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차를 소개하는 방식, 즉 마케팅이다.

수년의 직장 생활로 이 사실을 이해하고 있는 클로에는 아쌈과 싱할라를 어떤 식으로 소개해야 할지 고민했다.

‘모든 손님들이 지나치는 가게의 입구 부분에 시음대를 설치하자. 모든 손님들에게 차 한 잔씩 맛보게 하는 거야.’

지난번에 황제에게 소개했던 다즐링과 달리 이번에 트리플 스위트에서 취급하게 될 홍차는 편하게 마시기 좋은 중급품이다. 그러니 고유의 맛과 향을 고스란히 느끼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하는 다즐링과 달리, 조금의 변형을 가하는 한이 있더라도 쉽고 대중적으로 다가가게 하는 편이 좋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과하게 변형하면 곤란해진다. 찻잎을 산 손님들이 따라 하기 어려워할 테니까. 변형은 어디까지나 찻잎을 사 들고 돌아간 손님들이 집에서도 쉽게 해 마실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한 선이 좋았다.

‘먼저 아쌈은 흔히 마시는 방법대로 뜨겁게 우려 내놓자. 아쌈은 밀크티와 핫티가 어울리는 차이지만, 아직 밀크티는 많은 사람들에게 낯설게 느껴질 거야. 그리고 싱할라는…….’

클로에는 창밖의 하늘을 내다보았다. 여전히 햇볕이 뜨거운 여름이었다.

‘날씨가 더운 여름이니까 차 한 종류 정도는 차갑게 내놓는 것이 좋겠지? 특히나 싱할라는 수색이 예쁘고 맛이 무난해서 아이스티로 만들기 좋으니까.’

조금 더 고민하던 클로에는 시음대에서 차를 어떻게 내놓으면 좋을지 결정했다.

마침내 트리플 스위트의 손님들을 상대로 시음을 시작하는 당일이 되었다.

며칠 전부터 부산을 떨며 제작한, 마치 요리 수레와도 비슷하게 생긴 손잡이와 바퀴가 달린 시음대가 완성되었다. 가판과 직원 교육도 완료되었고, 제일 중요한 차는 클로에가 직접 준비했다.

“뜨거운 차는 언제나 티 코지를 씌워 두어 보온해 두도록 하고, 식으면 바로 탕비실로 와서 갓 우린 것으로 교체할 것. 잊지 않았겠지요?”

직원 교육을 담당한 여진이 시음대를 담당하는 직원에게 묻는 것을 보면서 클로에는 탕비실로 들어갔다. 탕비실에서는 직원들이 얼음이 동동 떠 있는 싱할라를 옮기고 있었다.

마침내 가게의 오픈 시간이 되었다.

“이건 뭐죠?”

“최근 황제 폐하께서도 즐기시는 음료, 홍차라는 것입니다, 부인.”

직원이 교육받은 대로 깍듯하게 말했다. 그 말에 유행에 민감한 귀족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손님들은 앞다투어 잔을 받아 들었다.

잔을 받아 든 손님들에게는 두 가지의 선택지가 있었다. 대용량 티팟에 담긴 뜨거운 아쌈과 거대한 유리 단지에 얼음과 함께 든 차가운 싱할라였다. 그런데 손님들의 시선은 아무래도 한쪽을 향해 더 쏠렸다.

"어머! 너무 예뻐요!"

누군가가 말했다.

유리단지 안에서 반짝이는 오렌지빛 싱할라에 얼음과 함께 떠 있는 것이 있었다. 약 5mm 정도의 두께로 얇게 썬 레몬이었다. 균일한 두께로 썬 레몬 조각들과 동동 떠 있는 얼음이 든 음료는 보기에도 아름다울뿐더러 더운 날씨에 지쳐 있던 손님들의 갈증을 자극했다.

“차가운 것으로 주세요.”

“저도 차가운 것으로…….”

홍차를 마시는 방식 중 무척 유명한 레몬티라는 것이었다.

레몬티를 만들기에 싱할라만큼이나 적합한 홍차는 없었다. 아쌈은 너무 진하고 자기주장이 강해 레몬과 궁합이 맞지 않고, 다즐링은 레몬이 특유의 향을 가려 버린다. 클로에가 생각하기에는 수색도, 맛도 지나치게 진하지 않고 무난한 싱할라야말로 레몬티를 만들기에 적당했다.

클로에는 뜨겁게 우린 싱할라에 얇게 저민 레몬을 몇 초 넣었다가 빼었다. 레몬이 지나치게 우러나면 너무 신 데다가, 껍질의 쓴 성분이 우러나기 때문에 레몬티를 만들 때에는 레몬을 오래 넣어 두지 않는 것이 좋았다.

레몬의 상큼한 향이 우러난 싱할라에 얼음을 넣어 차게 식힌 뒤 장식용으로 썬 레몬을 몇 조각 띄우면 맛있고 보기도 좋은 레몬 아이스티가 완성된다.

이렇게 만든 레몬 아이스티는, 이미 레모네이드라는 음료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쉽고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게다가 홍차 특유의 고소한 향에 레몬의 상큼한 향이 더해져 밸런스가 좋고, 갈증 해소에도 탁월했다.

게다가 이미 온식 요리점에서 제공하는 재스민 차 덕에 차 맛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많았다는 사실도 오늘의 인기에 한몫했다.

위와 같은 이유들과 추가로 클로에의 뛰어난 차 우리는 솜씨와 레시피 선정까지 더해져 싱할라 레몬티는 뜨거운 인기를 보였다. 준비해 놓은 많지 않은 싱할라의 샘플 티가 오전 중에 다 떨어졌을 정도였다.

“죄송합니다, 부인. 준비한 싱할라는 이미 다 떨어졌습니다.”

덕분에 애꿎은 가판대의 직원이 하루 종일 허리를 굽신거려야만 했다.

레몬티만큼이 아니었을 뿐, 아쌈 역시 특유의 향과 맛 덕에 어느 정도 인기가 있었다. 클로에는 아쌈과 싱할라 모두 수입하기로 결정했다.

“정말로 축하드려요, 마님!”

클로에가 귀택하자, 이 소식을 빠르게 들은 엘리가 달려와 축하해 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차를 좋아하게 되었나 봐요! 저도 정말 기뻐요. 마님의 소원이셨잖아요?”

클로에가 귀엽다는 듯 빙긋 웃었다.

“고맙구나, 엘리. 그렇지만 아직 사람들은 차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야.”

“네에? 하지만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좋아했는데…….”

“사람들은 차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유행을 좋아하는 것일 뿐이란다.”

클로에는 이 상황을 제법 객관적으로 판단했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차에 반응을 보이고 좋아하긴 했지만 그것은 차가 유행이기 때문이다. 만일 유행이 아니었다면 이만큼의 반응을 얻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클로에가 종종걸음으로 따라오는 엘리를 위해 발걸음을 늦춰 주며 말했다.

“사람들이 정말로 차를 좋아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할 거야. 되도록이면 이 유행이 끝나기 전에 사람들이 차의 매력을 알게 해야겠지.”

혼잣말 같은 그녀의 말에 엘리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 이미 엘리의 눈에는 거대한 클로에깍지가 끼어 있었으므로 당연한 일이었다.

‘역시 마님……! 정말로 생각이 깊으신 데다가, 차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분이셔!’

어린 소녀의 눈에 동경의 빛이 아른거렸다.

한편, 엘리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지 못한 채 클로에는 머릿속에 작은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마침 차가 유행이 되었고, 그 수요도 생겼다. 이 기세를 계속해서 이어 가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선 클로에 자신이 계속해서 맛있는 차를 소개하는 것이 중요했다.

클로에는 얼마 전, 황궁에 갔을 때 하녀가 손잡이 없는 온식 찻잔이 뜨거워 잘 들지 못했던 것도 떠올렸다.

‘두 번째 다과회를 열자. 차의 주 소비자인 귀부인들에게 정말 맛있는 차를 소개하는 거야.’

그녀는 머릿속에서 다과회를 열기 위한 과정들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 * *

공작저에 몇 대의 마차가 도착했다. 물론 공작가의 것은 아니었고, 그렇다고 제국의 다른 귀족의 것도 아니었다.

‘왔구나.’

창문을 통해 그 모습을 지켜본 클로에는 종종걸음으로 응접실로 내려갔다. 아침 식사를 한 뒤부터 줄곧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정오도 채 되지 않은 오전이지만, 굉장히 오래 기다린 듯한 기분이었다.

공작가의 안주인답게 응접실에 편히 자리를 잡고 앉아 손님들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곧 손님들이 하인들에 의해 응접실로 안내되었다. 클로에가 말했다.

“어서 와요. 클로에 바텐베르크예요.”

“공작부인을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주름진 피부가 햇볕에 그을린 중년의 남자가 말했다. 피부색이나 이목구비, 강한 외국어의 억양을 보았을 때 제국인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들은 바라트 왕국에서 온 상인이었다.

클로에는 황실에 납품할 다즐링을 주문하기 위해 그들을 불렀다. 공작부인이 된 뒤로 쇼핑을 해 보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이렇게나 떨리고 기대되고 신이 나는 쇼핑은 다구 전문점에 간 뒤로 오랜만이었다.

“올해 수확한 세컨드 플러쉬 다즐링을 부탁드렸는데, 상품은 확실한가요?”

“물론입니다. 찻잎을 직접 보시겠습니까?”

상인들이 나무로 만들어진 차통을 하나씩 가져왔다. 클로에의 앞, 응접실의 테이블에 통이 하나씩 쌓여 갔다. 하나 둘 셋 넷……. 그 개수가 무려 열두 개나 되었다.

클로에는 통에 쓰여 있는 라벨을 확인했다. 차마다 이름이 붙어 있었다. 각자의 차를 수확한 다원(茶園)의 이름인 것 같았다.

“전부 다원 차인가요?”

“그렇습니다, 공작부인.”

“상당히 고급이군요.”

상인들이 놀라 웅성거렸다. 그들 역시 제국인들이 차에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바라트 왕국의 차는 대부분 내수로 사용하고 수출되는 지역은 제국을 제외한 몇몇 국가가 전부다.

그렇기에 제국의 공작부인이 다원 차라는 개념을 알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다원 차란 한 다원에서 재배된 차를 말한다. 각 다원 고유의 독특한 개성과 테루아르(terroir)가 고스란히 드러나기에 대체로 고급 차로 친다. 다원마다 쳐지는 값어치는 하늘과 땅 수준으로 매우 다양하다.

상인들 중 선두에 서 있는, 클로에와 대화를 나누던 남자가 눈짓했다. 불경하니 입을 다물라는 뜻이었다. 사실 다원 차라는 개념을 아는 것 자체는 그리 대단한 것이 못 된다. 어디선가 주워들은 것일 수도 있는 게 아닌가?

상인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클로에는 이미 통을 하나하나 열어 보고 있었다. 차통 하나를 열 때마다 달콤한 다즐링 세컨드 플러쉬의 향기가 훅 끼쳐 들었다.

‘다들 향이 뚜렷한 것을 보니 역시 햇차인가 보네.’

찻잎의 향은 날아가기 쉽다. 조금만 잘못 보관했다가는 아차 하는 순간 무취 무맛의 맛없는 나뭇잎 조각이 되어 버린다.

그런 만큼 보이차 등 오래 발효할수록 맛이 좋아지는 특이한 차를 제외하면, 찻잎 역시 갓 재배한 햇차가 제일 맛이 좋다.

클로에는 먼저 열두 가지의 홍차 중 개인적인 기준치에 미달하는 것들을 골라내었다.

“이 차는 찻잎의 크기가 고르지 않고 줄기가 많군요. 크기가 고르고 줄기와 가루가 적은 찻잎만 골라내겠어요. 보관 상태가 좋지 않아 향이 변질된 것도 제외하겠어요.”

클로에는 찻잎의 크기가 고르고 상태가 좋은 찻잎만 골라내었다. 눅눅한 냄새가 나거나 향이 좋지 않은 것 역시 제외하였다. 그러고 나니 열두 가지의 찻잎 중 일곱 가지가 제외되어 단 다섯 가지만 남았다.

다시 한 번 상인들이 술렁였다. 클로에의 안목은 정확했다. 제국인이 가격이나 별도의 설명을 듣지도 않고 제일 상급의 품질이 좋은 찻잎만을 추려 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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