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장 (11/39)

11장

그래, 분명히 그랬었다. 단장에게 클로에에 대한 사소하고 사적인 것은 보고하지 말라고 명령한 건 자기 자신이다. 그녀가 앞으로 자신의 사람이 되리라곤 생각지도 못한 무심함이, 그녀가 이렇게나…… 소중한 존재가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오만함이 불러온 것이 바로 지금이다.

알폰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가 친부에게서 물려받은 유일한 감정인 분노가 가슴을 쳤다. 가능하다면 과거의 자신을 힐난하고 싶었다. 욕설이라도 쏟아부으며 멱살을 잡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 늦은 뒤였다. 이제 와서 그가 바꿀 수 있는 과거는 없었다.

* * *

알폰스는 클로에를 간호하는 하녀들을 전부 물렸다. 그는 먹지도 자지도 않고 그녀의 곁에 앉아 있었지만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고작 땀을 닦아 주고 때 되면 머리 위의 차가운 물수건을 갈아 주는 것뿐이었다.

집사 키엘이 종종 식사가 될 만한 것을 가져왔지만 무엇이건 협탁에 놓여 얼음장처럼 식어 갈 뿐이었다. 클로에가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앓아누워 있는데 자신이 무언가를 먹어도 될 리가 없었다.

그녀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자신의 어떠한 인간적인 감정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사랑 없는, 오로지 필요만을 목적으로 한 결혼이었다. 더더군다나 그녀는 그가 호감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시선은 마주치지 못한 채 언제나 바닥을 향했다. 기어드는 목소리는 그에게 아무런 의미를 가져다주지 못했다. 시종일관 겁먹은 듯한 표정과 눈치를 보는 듯한 행동거지는 한없이 지겨울 정도였다.

그래, 차라리 반가울 정도였다. 그는 그녀가 자신에게 걸맞은 결혼 상대라고 되뇌었다. 그는 그녀에게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었다. 그녀도 그의 곁에서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원할 수 있을 것이었다. 행여 그녀가 원하는 것이 사랑이라면 보답할 수 없었겠지만 그녀가 그럴 여자가 아니었음을 알았다. 그녀는 그를 두려워하고 있었으니까.

알폰스는 그것이 차라리 만족스러웠다. 서로에게 간섭하지 않고 헛된 것을 기대하지 않기 위해서라면 그것이 나았다.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그녀가 변했다. 알폰스는 그날의 인상을 아직도 기억했다.

‘차가 필요합니다.’

목소리는 주저함 없이 단호했다. 그녀의 올리브빛 눈동자는 자신을 올곧게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는 조금 의아했을 뿐 그 사실에 아무런 의미 부여도 하지 않았다. 굳이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저는 누군가와 함께 차 마시는 것을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거든요.’

그녀는 더 이상 그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에게 살가웠고 기쁜 듯이 마주했다.

‘알폰스, 당신은 아름다운 사람이에요. 당신의 삶, 품어왔던 감정, 견뎌왔던 노력, 전부가 너무나 아름다워요.’

티 없이 웃는 얼굴이 낯설었다. 무언가에 열정적일 수 있다는 것이, 자신의 감정에 솔직할 수 있다는 것이 이상했다. 그 모든 것이 알폰스, 그에게는 결핍된 것이다. 눈이 부셔 낯설고 처음에는 불편했다.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그러나 가랑비처럼 스며드는 ‘익숙해짐’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그에게 익숙해졌고, 자연스러워졌고, 어느샌가 당연해졌다. 언제나, 늘, 그의 마음속에선 그 정도의 위치에 있었던 것처럼.

익숙지 않은 감정을 느낀 것은 그때부터였다.

……하나뿐인 자신의 아내였다. 사랑은 없을지언정 책임감은 있었다. 가슴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는 감정들은 모두 그것의 일환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녀가 웃는 얼굴을 조금 더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웃을 때 눈을 찡그리는 버릇이, 순진하게 자신을 돌아보는 눈동자가, 무르고 여린 마음이, 팔랑거리는 속눈썹이, 차를 따라 주는 손짓이, 무엇이든 열심히 하려고 하는 열정이, 곤히 잠든 얼굴이, 방울방울 떨어지는 눈물이 좋았다.

어느샌가 그녀가 자신의 마음속 울타리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녀를 소중히 여기게 된 것이다.

낯설지만 싫지 않은 감정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녀를 아끼게 된 것과는 별개로 알폰스는 자신이 여전히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감정에 도취되지 않는, 그래서 이성을 마비시키고 판단을 흐리는 법이 없는 자신.

‘그랬는데 지금은.’

클로에의 유령처럼 창백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심장이 비틀렸다.

저 웃음기 없는 얼굴이 다시 눈을 뜨고 웃음 짓도록 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알폰스는 차라리 자신이 아팠으면 했다. 저 여리고, 건드리면 부서질 듯 가녀린 사람 대신 아픈 것이 자신이 되게 해 준다면 그는 아무것도 필요 없었다.

‘이런 건 내가 아니다.’

알폰스의 긴 손가락이 클로에의 얼굴을 훑었다. 그녀의 귀와 눈꺼풀, 상기된 뺨, 마른 입술.

하나의 감정이 독극물처럼 스며든다. 그의 모든 것을 마취시키고 숨을 틀어막고 가슴을 조인다. 그를 그로서 있을 수 없게 하고 이성을 죽인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는 이미 자신이 아는 자신이 아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이제 와서 돌이켜 봤자 소용없다.

알폰스 바텐베르크는 알고 있었다.

세상은 이런 감정을 사랑이라 부른다.

* * *

클로에가 눈을 뜬 것은 그녀가 쓰러진 지 20시간이 지난 뒤였다.

“으으…….”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목이 너무나 말랐다. 두통은 한결 가셨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가 힘이 들었다.

그때였다. 다른 누군가의 큰 손이 클로에의 작고 흰 손을 꽉 쥐었다. 눈앞에 불쑥 물컵이 들이밀어졌다.

클로에는 그 잔을 받아 들어 마셨다. 바짝 말라 갈라질 것만 같던 목을 물로 적시자, 그제야 조금 살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의 손을 잡아 주고, 물을 준 사람의 얼굴을 확인했다.

“알폰스…….”

클로에가 꺼질 듯한 목소리로, 제일 먼저 한 말은 이것이었다.

“왜 그렇게 괴로워 보여요?”

알폰스는 그제야 그녀의 곁에 있는 내내 자신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클로에의 걱정 어린 시선에 목이 메었다.

……진짜 괴로울 사람이 누구인데. 알폰스는 말라가는 와중에도 남을 걱정하는 저 여자의 심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진짜 힘든 건 자신이면서 남 걱정하지 말라고 화라도 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끓어 넘치는 감정을 입 밖으로 토해 내는 대신 그는 이를 악물었다.

클로에가 가늘게 웃었다.

“무서운 얼굴 하지 마요.”

그녀의 손이 뻗어가 알폰스의 뺨에 닿았다. 그는 그제야 의식적으로 인상을 풀었다. 클로에는 만족했다.

그녀가 속삭였다.

“저, 더 자도 되죠?”

알폰스가 겨우 대답했다.

“……주무십시오.”

클로에는 안심하고 눈을 감았다. 오래지 않아, 그녀의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알폰스는 계속 그녀의 곁에 있었다.

* * *

클로에는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다. 여전히 머리는 무겁고 목은 깔깔하고 몸은 으슬으슬했지만, 지난밤에 비하자면 훨씬 나아져 있었다.

그녀는 양파 수프와 조금의 빵, 치즈로 아침 식사를 했다. 그제야 알폰스도 밥을 먹었다. 함께 식사를 한 뒤, 클로에는 남편에게 인사했다.

“계속 곁에 있어 주어서 고마웠어요.”

알폰스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말을 하길 주저하는 것 같았다. 잠시 생각을 하는 것 같던 그는 마침내 이렇게 말했다.

“걱정했습니다.”

클로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쩐지 알폰스답지 않은 말이라고 느껴졌던 것이다. 그러나 후속타가 있었다.

“진심으로.”

알폰스가 이렇게까지 진심을 털어놓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이었다. 클로에는 왠지 모르게 기뻤다.

클로에가 깨어났다는 소문은 공작저에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그러자 하나둘 병문안을 오는 사람들도 생겼다.

제일 먼저 찾아온 사람은 발롱도르 기사단장이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공작부인께 충분한 신경을 써 드리지 못했습니다.”

발롱도르가 서른 살은 더 어린 자신에게 허리를 깊이 숙이며 정중히 인사하는 것이 클로에는 무척 부담스러웠다. 그녀는 진심을 다해 말렸다.

“그러지 마세요. 저도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걸요.”

“아닙니다. 주군의 일족을 지키는 것이 기사단의 일일진대, 제가 공작부인의 병증 하나 눈치채지 못했으니 그 죄가 큽니다.”

“정말, 괜찮다니까요!”

그렇게 ‘죄송하다’와 ‘괜찮다’의 한차례 다툼이 있었다. 그 끝은 샨탈이 환자의 안정을 외치며 기사단장을 방에서 내쫓는 것이었다.

그 뒤로도 문병객이 끊이지 않았다. 기사 삼총사와 엘리는 당연히 왔다. 부엌 하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듣기로는 부엌 하녀들 전원이 오고 싶어 했지만 샨탈의 반대로 재클린과 애쉴리만이 대표로 왔다고 재클린은 말했다. 다른 모두가 너무나 걱정하고 있다며, 건강한 마님을 뵙기를 고대한다며 산더미 같은 과자와 간식을 두고 갔다.

그 외에도 다른 기사들이나 사용인들이 삼삼오오 찾아왔다. 클로에의 머리맡 협탁에는 병문안을 온 사람들이 가져온 먹을거리나 꽃 등의 선물이 쌓여 갔다. 클로에는 그것이 무척 기뻤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누워서만 지내는 것은 몹시 지루한 일이었다. 24시간 내내 누워 있어야만 했던 클로에는 몹시 좀이 쑤셨지만, 의사는 단호했다.

“절대 안정을 취하셔야 해요. 적어도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는 다른 생각 하지 마시고 휴식만 취하셔야 합니다.”

침실을 나가고 싶다는 클로에의 말에도 샨탈은 냉정했다.

게다가, 샨탈뿐만이 아니었다.

“침실에서 나가지 마십시오. 안정을 취하셔야 한다지 않습니까. 완치되시기 전엔 절대 안 됩니다.”

알폰스마저도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스스로가 한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하루 종일 클로에의 곁에 붙어 있는 통에 몰래 나갈 수도 없었다. 그는 아예 클로에의 옆에 책상을 가져다 놓고 모든 업무를 거기서 처리하고 있었다.

조금 뾰로통해진 클로에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다. 그래도 쓰러진 뒤로부터 이틀은 내리 푹 쉬었고, 이젠 열도 내렸다. 그런데 앞으로 며칠을 더 누워만 있어야 한다니! 심심해서 머리가 돌아 버릴 것 같았다.

이불 밖으로 고개를 빼꼼히 내민 클로에가 말을 걸었다.

“저기, 알폰스.”

“예, 부인.”

“저 차가 마시고 싶어요. 우리 같이 티룸에 가지 않을래요? 잠깐이면 괜찮을 거예요.”

(클로에가 생각하기에는) 알폰스도 차를 꽤 좋아했다. 이것은 그에게도 달콤한 유혹일 것이었다.

그러나 클로에의 예상을 깨고 알폰스는 고민조차 하지 않은 채 딱 잘라 말했다.

“안 됩니다.”

이럴 수가! 전혀 통하지 않는다니?

클로에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곧 시무룩해졌다.

사실 알폰스의 입장으로 말할 것 같으면, 함께 티룸에 가자는 것은 그에게도 달콤한 유혹이 맞았다.

그는 자신이 인지하고 있는 것 이상으로 클로에와의 티타임을 사랑하고 있었다. 클로에가 우아한 손동작으로 차를 우리는 모습도, 그녀가 전해주는 뜨거운 온기도, 향긋한 차의 향과 뒤섞인 클로에의 체취도, 잘 마셨다는 인사에 기뻐하는 그녀의 모습도 전부 좋았다.

하지만 그것이 클로에의 건강보다 우선시 될 수 있느냐면 그건 아니었다. 서류의 읽던 부분에 굵게 밑줄을 그으며 알폰스는 생각했다. 클로에가 완전히 회복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차라면 그 이후에도 질릴 때까지 마실 수 있으니까.

몇 번째인지 기억나지 않는 서류에 서명을 한 뒤 알폰스는 클로에를 돌아보았다.

나가고 싶다고 한참을 투덜투덜하더니 그새 잠이 들어 있었다. 긴 속눈썹을 내리깔곤 새근새근 규칙적으로 숨을 쉬는 것이 평온해 보였다. 확실히 이전에 비해서는 많이 회복된 것이 분명했다.

약간의 더위를 느낀 알폰스는 와이셔츠의 상단 단추를 한두 개 끌렀다. 그러면서도 그의 눈동자는 아내에게서 도무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내가 누워 있는 침대를 향해 다가갔다.

알폰스는 클로에가 누워 있는 침대에 걸터앉아 그녀를 들여다보았다. 베개 위로 밤색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고 세상모르게 잠들어 있는 얼굴이라니. 조금 수척해진 얼굴과 메마른 입술이 안쓰러워 손가락으로 쓸어 보았다.

완치되는 순간부터 아내에게 삼시 세끼를 특별 코스로 제공하라고 주방장에게 지시해야겠다. 안 그래도 마른 그녀였다. 좀 찌울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잠든 그녀의 모습은 평소의 건강한 때와는 또 다른, 눈을 뗄 수 없는 매력이 있었다. 그녀를 한참이나 관찰한 뒤에야 알폰스는 자신이 지금의 클로에가 무척이나 예쁘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픈 모습도 아름답군.’

그녀의 턱을 만지며 알폰스가 생각했다. 물오른 여름 잎새 같은 건강함으로 빛나는 평소의 모습과 달리 조금 창백하고 수척한 지금의 모습조차 사랑스러웠다.

무방비한 상태의 그녀를 들여다보던 알폰스는 마음이 동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저 몸에 자신의 것이라는 뜻의 붉은 낙인을 가득 만들어 주고 싶었다. 열에 달떠 볼을 붉히고 숨을 몰아쉬는 얼굴이 보고 싶었다. 눈가에 맺히는 눈물을 닦아 주고 그 안에 자신을 한가득 남겨 주고 싶었다.

하지만, 안 된다. 욕망의 정도와 관계없이 알폰스는 사리 분별을 할 줄 알았다. 다른 건 다 둘째치고서라도 일단 환자이지 않은가. 그녀에겐 절대 안정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렇게나 잘 아는데도 불구하고. 마음과 이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따로 노는 것인지를 알폰스는 난생처음으로 깨달았다. 강렬한 충동이 자석처럼 그의 몸과 마음을 끌어당겼다.

살면서 이렇게까지 강한 욕구를 느껴 본 적이 있었던가. 알폰스는 그녀로 목이 말랐다. 당장이라도 해갈하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그가 허리를 굽혔다. 그녀의 잠든 얼굴과 그의 얼굴이 닿을 만큼 가까워졌다. 입술과 입술이 겹쳐졌다.

클로에는 잠결에 어렴풋이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그녀의 입 안에 따뜻하고 부드러운 무언가가 침범해 들어오는 감각은 야릇하기도 하고 달콤하기도 했다. 그녀는 그것이 꿈인 줄로만 알았다.

클로에가 그것이 꿈이 아니라 현실임을 깨달은 것은 입 안을 탐하는 것의 움직임이 점점 거칠어졌기 때문이다.

“으응…….”

그녀가 속눈썹을 나풀거리며 눈을 떴다.

그녀는 잠시 현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단지 자고 일어났을 뿐인데 이상하게 몸이 달아올라 있었다. 숨이 달뜨고 뺨에서 열이 올랐다.

입 안의 부드러운 점막을 무언가가 쓸고 지나갔다. 그 거친 움직임이 어쩐지 다급하게 느껴졌다. 단 일분일초도 기다리지 못하겠다는 듯, 지금 당장 그녀의 모든 것을 삼키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듯.

“으읍?!”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깨닫자 잠이 싹 달아났다. 알폰스에게서 나는 옅은 담배 냄새가 코끝에 끼쳐 왔다. 그의 단단한 손길이 어깨를 붙들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으응, 응, 응.”

클로에는 당황스러웠다. 어떻게든 항의를 하고 싶었지만 입이 틀어 막힌 이상 말은 언어가 되지 않은 파편으로 튀어나올 뿐이다.

‘이 사람이!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말한 게 대체 누군데!’

마치 잡아먹힐 것만 같은 거친 입맞춤에 아랫배가 찌릿찌릿해져 오는 것만 같았다. 클로에는 눈을 감았다.

마침내 그의 입술이 떨어져 나갔을 때야 클로에는 숨을 가볍게 몰아쉴 수 있었다. 전 남자친구들과의 키스는 전혀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이 사람과의 키스는 왜 유독 이렇게나 야릇한지.

기습 키스 당한 와중에도 야릇함을 느낀 것이 분해, 클로에는 괜히 호흡을 가다듬고 항의의 눈빛을 알폰스에게 쏘아 보냈다.

“정말, 뭐 하는 거예요?”

한편 그녀가 일부러 호흡을 가다듬고 조금도 느끼지 않은 척하는 것을 눈치챈 알폰스는 그녀가 너무나 귀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맛만 보는 게 아니라, 제대로 잡아먹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는 친부의 유산인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그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그가 차분히 말했다.

“미안합니다.”

“저는 환자예요.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요.”

어쩐지 아까와 태도가 정반대가 되어 버린 것 같지만 상관없었다. 클로에는 일부러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때였다. 손가락 하나가 그녀의 턱에 와 닿는가 싶더니, 부드럽게 방향을 틀었다. 클로에의 올리브빛 눈동자와 위압적인 붉은 눈동자가 마주쳤다.

클로에는 순간 감전이라도 되는 줄 알았다.

“용서해 주시지 않을 겁니까?”

나직한 목소리가 아랫배를 울렸다. 그의 웃음기 띤 눈동자에 클로에는 꼼짝할 수가 없었다. 마치 그 자리에 동여매 묶여 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몇 초가 지난 뒤에야 클로에는 화악 몰려오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결국, 그녀는.

“몰라요.”

라고 말하며, 이불을 확 뒤집어쓰고야 말았다. 나직하고 조용한 웃음소리가 이불 너머에서 흘러들어 왔다.

하여간에, 저 사람이 자신의 간호를 담당하고 있는 건 잘못된 선택이라고 클로에는 생각했다. 자신의 안정에 제일로 좋지 않은 건 다른 게 아니라 저 사람이니까.

* * *

일감을 클로에의 침실에 가져오면서까지 그녀의 곁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는 알폰스이지만 그도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떠야만 하는 때가 있었다. 바로 목욕을 할 때였다.

그날 저녁, 알폰스가 씻으러 간 틈을 타 클로에는 슬그머니 침실에서 나왔다. 알폰스가 침실에서 모든 사용인을 물렸기 때문에 아무런 방해 없이 걸어 나올 수 있었다.

‘어휴, 살 것 같다.’

고작 복도로 나왔을 뿐인데 왠지 공기가 달라진 느낌이었다.

클로에가 향한 곳은 자신의 티룸이었다. 고작 침실에서 건너 건넛방이라 멀리 벗어난 것도 아니었다. 며칠 누워 있자니 차가 무척 당겼다. 물이나 주스를 많이 마시긴 했지만 역시 아무래도 부족했다. 차가 아니면 안 되었던 것이다.

잠옷 차림으로 티룸에 들어선 그녀는 아쌈을 위주로 한 블렌딩의 진한 홍차 잎을 챙겼다.

차통을 테이블에 올려놓은 뒤 클로에는 제일 먼저 작은 유리병을 꺼내어 뜨거운 물에 삶아 소독해 두었다.

그리고 밀크팬을 꺼내 물 300ml를 끓였다. 물이 끓기 시작하자 약 40g의 찻잎을 넣고 얼마간 우려낸 뒤, 설탕을 80g 붓고는 건드리지 않은 채 10분 정도를 끓게 두었다.

그녀가 만들려고 하는 것은 홍차가 아니었다. 침실에 구금(?)되어 있는 동안 간편히 차를 마실 수 있도록 ‘홍차 시럽’을 만들고 있었다.

10분간 끓여 낸 뒤 졸아든 찻물을 체에 부어 찻잎을 걸러 낸 클로에는 완성된 홍차 시럽을 유리병에 부어 두었다.

“다 됐다!”

클로에가 자신이 만든 홍차 시럽을 뿌듯하게 들여다보았다. 이제는 완성된 이것을 차게 식히기만 하면 된다.

짙은 갈색으로 졸아든 홍차 시럽은 보기만 해도 달콤할 것처럼 윤이 흘렀다. 이것은 우유에 타기만 해도 간단히 밀크티를 만들 수 있는 획기적인 아이템이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종류의 시럽처럼 팬케이크 등에 뿌려 먹어도 맛이 좋았다.

그때였다.

“세상에, 마님! 여기 계셨군요!”

노크도 없이 티룸의 문이 열렸다. 화들짝 놀란 클로에가 돌아보자, 그곳엔 전속 하녀 두 명이 서 있었다.

“공작 각하께서 찾고 계세요. 어서 돌아오세요!”

“제발요, 마님. 저희와 함께 가셔요!”

“앗, 그렇지만…….”

클로에가 아쉬운 듯 말했다. 그녀가 침실에서 탈출한 지 고작 30분밖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클로에는 두 하녀에게 연행되어 도로 침실로 돌아가야만 했다.

* * *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뒤에야 샨탈은 클로에가 완전히 회복되었다는 진단을 내렸다.

클로에는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기뻤다. 특히 제일 기뻤던 것은, 홍차 시럽으로 만든 야매 밀크티가 아닌 다른 차들을 마음껏 마실 수 있다는 것이었다.

“완치를 축하합니다, 부인.”

그녀의 회복이 기쁜 사람은 클로에 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남편을 돌아보며 배시시 웃었다. 맨 처음 봤을 때에 비하면, 그의 시선과 목소리는 분명 많이 부드럽고 간간한 온기가 감돌았다.

“고마워요, 알폰스. 당신 덕분이에요.”

괜히 들뜬 기분에 클로에는 알폰스에게 가깝게 붙어 왔다. 그녀가 먼저 접촉을 해 오는 것은 드문 일이었기에 알폰스는 마음속에 피어오르는 흐뭇함을 즐겼다.

“사실, 부인의 완치를 기념하여 준비해 둔 것이 있습니다.”

“네? 준비하신 거라고요?”

클로에의 눈망울에 호기심이 맺혔다. 알폰스는 그녀의 침실에 대기하고 있던 하녀에게 말했다.

“가져오게.”

하녀는 꾸벅 인사를 하고 잠시 나갔다가 무언가를 들고 왔다.

그것은 상자였다. 나무로 만든 사각형의 형태였는데, 자개와 거북이 등딱지로 아름답고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하녀가 상자를 공손하게 클로에에게 건넸다. 클로에는 반쯤은 얼떨떨한 얼굴로 그 상자를 받아 들었다. 상자를 열어 보니, 그 내부는 몇 겹의 다양한 재질로 단단히 감싸져 있었다. 클로에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녀가 알폰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티 캐디(tea caddy. 차를 보관하는 통)군요!”

클로에의 얼굴이 기쁨으로 젖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알폰스는 엷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가 최고로 즐거워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것은 그녀가 일전에 알폰스에게 요구한 바 있었던 차를 밀봉할 수 있는 상자였다. 몇 겹의 재질로 단단히 감싸 있어 향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았고, 제일 안쪽에는 제습 기능이 있는 안료를 발라 찻잎이 손상되지 않게 신경을 썼다.

“정말 고마워요, 알폰스. 너무 예뻐요!”

기뻐하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알폰스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우선 준비한 것은 76개입니다. 앞으로도 부인의 모든 차를 보관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통을 제작할 예정입니다.”

“76개나요!”

클로에의 눈동자가 감동으로 일렁였다. 그녀는 상자를 내려놓고 알폰스를 꽉 끌어안았다. 알폰스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그녀의 등을 쓸어내렸다.

한편, 한차례 아프기까지 하고 나니 클로에는 더 이상 자신이 사업의 모든 일을 감당하겠다고 우길 수가 없었다. 결국 그녀는 재무 전문가를 고용하여 그에게 일정 분량의 일감을 맡기는 것에 동의했다.

이때 자리에 함께 있었던 키엘은 굳이 주인이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일을 맡아서 하는 충실한 집사였다. 그는 순식간에 유능한 전문가를 몇 명 추려내 그 목록을 알폰스에게 올렸다.

“……특히 경력으로 보나, 실적으로 보나 올리버 스미스야말로 제일 마님의 사업에 적합한 전문가라고 생각합니다. 각하께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안 돼.”

“네?”

예상치 못한 알폰스의 단호한 대답에 키엘이 입을 떡 벌렸다.

“어떤 이유 때문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각하?”

“…….”

그러나 알폰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미간에는 가는 금이 간 채였다. 아무 말 없이 시가만 뻑뻑 피우면서 (요 며칠간 환자를 배려해서인지 그는 클로에의 곁에서 담배를 태우지 않았다. 안 그래도 골초에 속하는 그였는데 잠시 금연을 한 반동인지 그 뒤로 그는 더더욱 담배를 많이 피우게 되었다.)그러고 있는 그 모습이 그를 오래 모셔 온 키엘에게조차 낯설었다. 알폰스는 언제나 ‘아니면 아니다, 기면 기다.’ 하는 요구와 취향이 확실한 주인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합리적인 주인인 알폰스가 이유 없이 거절하다니?

키엘의 그런 의문은 오래지 않아 해결되었다.

“여자로 해.”

“네에?”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키엘은 순간 알폰스가 농담이라도 하나 싶었으나 첫째로 그 알폰스가 농담 따윌 할 리가 없었고 둘째로 알폰스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심각했다.

재무 전문가를 여성으로 고용하라니? 여성의 교육 권리가 적은 제국에서 경제와 사업의 전문가라 할 만한 여성은 그 수가 적었고, 거기서 알폰스가 만족할 정도로 능력과 권위가 있을 만한 사람은 더더욱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모든 조건에 걸맞은 여성 전문가를 찾는 것은 어마어마한 인력이 소모되는 일이었다. 저택의 상주 의사로 여성인 샨탈이 고용되어 있는 것 역시도 제국 내에서 유래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특이한 일로 취급받았으니 말 다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알폰스가 모를 리는 없었다.

대체 자신의 주인이 갑자기 왜 이러는 건지 알 수 없어 쩔쩔매던 키엘의 머릿속에 한 가지 가설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 마님과 재무사의 사이를 의식해서?’

클로에의 사업에 대한 열정과 관심을 감안하면 그녀와 전문가가 자주 연락을 취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제야 풀리지 않던 퍼즐 한 조각이 맞추어진 듯 모든 의문의 합이 맞아 들어가기 시작했다. 알폰스가 클로에와 젊은 남성 전문가가 마주 앉아 단둘이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것을 가만둘 수 없는 것이라면 모든 것이 이해가 됐다.

하지만 믿기가 어려운 것도 사실이었다. ‘그’ 합리적이고 공사 분리가 확실하며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판단을 하는 알폰스가 고작 그런 것에 연연한다고?

키엘은 은은한 충격에 심장이 다 쿵쿵거릴 지경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공작님이! ‘그’ 공작님이! 인지 부조화가 올 것만 같았으나 그는 노련한 집사로서 그런 기미를 숨기고 충실하게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어떠한 예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가 모시는 주인 부부의 관계에 어마어마한 변화가 일어난 것만 같은 예감이.

* * *

키엘의 예측대로 모든 조건에 알맞은 여성 전문가를 찾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제국을 다 뒤져 찾아낸 몇 안 되는 전문가들은 전부 알폰스의 마음에 차지 않거나 일정이 맞지 않았다. 결국 키엘은 외국의 전문가들까지 수소문해야만 했다.

그 결과로…….

“바텐베르크 공작부인께 인사 올립니다. 청(淸) 왕국 손 가의 여식 여진이라고 합니다.”

실로 운이 좋게 업무를 위해 제국에 체류하고 있던 외국의 전문가 한 명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나마 여성의 인권이 높은 동방의 국가 청 출신인 여진은 알폰스가 만족을 느낄 정도로 뛰어난 재무사이자 수완가였고, 마침 제국에서 진행하던 업무가 끝나 다른 일이 없는 상태였으며, 제국어와 제국 예절에 무척 능숙했다.

클로에는 여진을 바라보았다. 그녀에게 예를 갖춰 인사를 하고 있는 여진은 길고 숱 많은 검은 머리를 타래처럼 땋아 내린, 전체적으로 둥그스름한 인상이 강한 여성이었다. 말하자면 달덩이 같았다.

객관적으로 미인은 아니었으나 클로에는 그녀의 얼굴이 무척 눈에 밟혔다. 여진의 이목구비는 대단히 동양적이었던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녀가 전생에 살았던 국가인 한국의 사람들과 비슷했다.

그런 여진에게 클로에는 상당한 친근감과 호감을 느꼈다. 그녀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반가워요. 비록 업무적으로 이루어진 관계지만, 당신과 함께 그 이상의 신뢰를 쌓을 수 있다면 좋겠네요.”

“영광입니다, 공작부인.”

“청 왕국의 사람들은 차를 좋아한다죠? 당신도 그런가요?”

공작부인의 난데없는 질문에 여진이 고개를 들었다.

비록 제국에서는 차를 즐기는 사람이 드물지만 제국의 밖에는 차를 즐기는 국가가 많았다. 대표적으로 차의 산지로 꼽히는 국가 온과 바라트가 있었고, 그 외에도 청 등 작은 국가들이 차를 즐겨 생산하거나 소비하곤 했다.

청의 사람들의 경우 녹차를 즐겨 마셨다. 알폰스가 여진을 고용한 이유 중에는 이 사실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습니다, 부인.”

“저 역시 그래요. 차를 마시는 것이 제 작은 즐거움 중의 하나랍니다. 차를 좋아하시는 분을 만나 기뻐요. 이렇게 첫 만남을 가진 김에, 찻자리를 함께한다면 좋을 듯한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차를 좋아하는 제국인이라고?

여진은 제국에서 지낸 지가 꽤 되었으나 그녀의 존재가 놀라웠다. 가끔 평민 중에 허브 티나 꽃차 정도를 우려먹는 사람은 보았지만, 공작부인 정도의 지위를 가진 사람이 차를 좋아한다며 스스럼없이 말하는 것은 처음 보았다.

‘하지만 그래 봤자겠지.’

물론 여진은 차를 좋아했다. 내심, 독자적인 차 문화와 다도가 발달되어 있는 모국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으며, 차를 경시하고 제대로 마실 줄 모르는 제국인들을 한심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차를 좋아한다는 이 공작부인도 고만고만한 제국인들 중 하나일 것이 뻔했다. 대용 차와 정통 차의 차이도 구분하지 못하면서 값비싼 차 한두 종류를 신줏단지처럼 가져다 놓고 가끔 먹는, 좋은 차와 아닌 차도 알아볼 줄 모르는 딱 그 정도의 사람이겠지.

여진은 그런 냉소적인 생각을 감추고 예의 있게 대답했다.

“어찌 여부가 있겠습니까.”

잠시 후 그들은 클로에의 티룸에 도착했다. 클로에의 뒤를 따라 티룸에 발을 들인 여진은 깜짝 놀랐다.

“이건 설마……! 저것이 전부 차인가요?”

“그렇답니다.”

티룸에 들어서는 순간 코끝에 닿는 화려하고 복잡한 향기와, 눈앞에 펼쳐진 끝도 없이 벽을 채운 차통들과 다구라니!

그제야 여진은 자신의 예상이 일부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일부 틀린 정도가 아니었지만 아직 거기까지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여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지 못하는 클로에는 대단히 자연스럽게 티룸을 거닐었다. 클로에는 여진을 편한 자리로 안내한 뒤 물었다.

“녹차가 좋으시겠죠?”

“뭐, 뭐든 잘 마십니다.”

“어머, 잘됐네요. 그럼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잠시 뒤 클로에는 단아한 동양식 다구가 담긴 쟁반을 들고 나왔다. 소파에 앉아 있던 여진은 다시 한 번 놀랄 수밖엔 없었다. 제국에서 저렇게 고향을 떠올리게 하는 친근한 형태의 찻주전자와 찻잔을 볼 줄은 생각도 못 했다.

클로에는 찻주전자의 긴 손잡이를 쥐고 여진의 잔에 차를 따라 주었다. 연한 노란빛의 찻물에서 고소한 향을 담은 김이 피어 나왔다.

여진이 차를 마시지 않고 주저하자, 클로에가 가볍게 웃으며 눈짓했다.

“들어 보세요.”

여진은 저도 모르게 끌리듯이 찻잔을 들어 마셨다.

고소한 향이 비강을 적셨다. 제국 외의 서방의 국가에서 가끔 마셔 본 홍차의 기름처럼 매끄러운 질감이 아닌, 조금 뻣뻣할 정도로 담백한 질감의 진짜 녹차였다.

이 향긋하고 풋풋한 향. 여진은 단번에 이것이 상당히 질이 좋은 녹차임을 깨달았다.

게다가 그게 끝이 아니었다. 녹차의 풋풋함을 부드럽게 감싸주는 고소한 맛이 있었다. 여진은 이것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눈을 크게 뜬 여진이 찻잔을 입에서 떼고 말했다.

“현미 녹차인가요?”

“어머, 역시. 바로 아시는군요!”

클로에가 기쁜 듯이 손뼉을 쳤다.

“제가 직접 만들어 본 건데, 괜찮은가요?”

“지, 직접이라고요?”

여진이 깜짝 놀랐다. 제국에서 공작부인에게 현미 녹차를 대접받은 것도 놀라운데, 그것도 직접 만든 것이라니?

클로에가 기쁜 듯이 털어놓았다.

“네. 직접 녹차와 현미를 블렌딩한 거예요. 현미는 청 왕국에서 수입해서 직접 찌고 튀겼답니다.”

그런 그녀의 눈에서는 진짜 좋아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듯한 열기가 느껴졌다.

여진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차를 좋아하긴 하지만 마신 지는 오래되었다. 7년 전 청을 떠난 뒤 한 번도 녹차를 맛본 적이 없었을 정도였다.

7년 만에 만나는 녹차는, 그것도 고향인 청 왕국에서 가져온 현미로 만들었다는 현미 녹차는 청에서 마셨던 기억 속의 맛과 놀라울 정도로 같았다. 코끝에 느껴지는 친숙하고 그리운 향기와 함께 여진은 고향에 온 듯한 편안함을 느꼈다.

게다가 무엇보다 여진에게 편안함을 주는 존재는…… 뜻밖에도, 눈앞의 공작부인, 클로에였다. 자신에게 닿은 여진의 시선을 느끼곤 클로에가 생긋 웃으며 물었다.

“타국에서 지내는 건 외롭지 않으세요?”

“네?”

“그냥…… 그럴 것 같아서요. 예의에 어긋났다면 죄송하네요. 하지만 저도 그런 기분을 느껴 본 적이 있어서, 남 일 같지가 않아요.”

클로에가 씁쓸한 얼굴을 했다. 여진은 아까의 냉소적인 태도는 어디로 가고, 그런 그녀의 말을 귀 기울여 경청하고 있었다.

“편안하고 익숙한 것들, 낯익은 것들은 먼 곳에 두고 오고 완전히 새로운 곳에 와서 적응하는, 적응해야 할 수밖에 없을 때의 그 기분 말이에요. 이곳의 생활이 적응하기 어려울 때는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사무치기도 하지만 그럴 수 없을 때. 이곳의 생활, 사람들에게도 정이 들고 적응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가끔 그때가 생각날 때가 있어요.”

클로에는 전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정말 예상치 못하게, 어느 날 갑자기 이곳에 떨어졌고 누군가의 아내가 되었으며 클로에 바텐베르크가 되었다. 전생에서 가족이나 친척은 없긴 했지만 친하게 지내는 사람은 있었다.

28년 동안 익숙해졌던 그 모든 것들을 버리고 문화도 삶의 방식도 인간관계도 전부 다른 타인이 되는 것은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곳에 온 직후에는 닥친 상황이 그리 행복하지 않은 상황이었으니 더했다.

향수에 젖어 있던 클로에는 뒤늦게 제 발이 저려 변명했다.

“아, 시집왔을 때의 이야기예요. 제 친가와 공작가는 많이 다르더라고요.”

그녀가 변명을 하거나 말거나 여진은 가만히 그녀가 했던 말을 곱씹고 있었다.

여진은 자존심과 기가 센 성격이라 자신의 약점을 쉬이 인정하려 드는 타입이 아니었다. 먼 타국에서의 생활은 쉽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럴수록 더더욱 자신을 다그쳤다. 나는 제국 생활이 마음에 든다고. 청 왕국에서의 가난했던 생활보다 훨씬 부유하게 지낼 수 있는 이곳에서의 생활이 편하다고.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하면, 꼭 그렇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그것을 7년 만에 깨닫다니. 여진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여진의 얼굴을 보고 나름의 사정과 고생이 있었음을 이해한 클로에가 따뜻한 눈을 했다. 그녀가 말했다.

“그럴 때 마음을 따뜻하게 녹이고 힘들 때에 기댈 수 있는 무언가가 있으면 좋은 것 같아요. 저 같은 경우엔, 그게 차였어요.”

클로에가 애정 어린 눈으로 티룸을 둘러보았다.

여진은 그제야 아까 전에 자신이 성급한 판단을 내렸음을 인정했다.

눈앞의 이 사람은 그저 외국 문물이라는 겉멋에 차를 즐기는 척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차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여진이라고 불러도 괜찮죠?”

“네? 네.”

“제가 가진 녹차를 조금 나누어 드릴게요. 제가 차로 많은 위안을 받은 것처럼 여진에게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클로에가 다정하게 웃었다.

여진은 그제야, 진심으로 기쁜 듯이 웃었다. 그녀가 내심 가지고 있던 클로에에 대한 편견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인정할 수밖에는 없었다. 자신은 아마도 눈앞의 이 사람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존경하게 될 것 같았다.

그들은 현미 녹차를 마저 나누어 마셨다. 무척 즐거운 찻자리였다.

* * *

여진과 일거리를 나누고 나니 클로에에겐 적지 않은 여유 시간이 생겼다. 그래 봤자 보통의 귀족 부인들보다는 할 일이 많은 편이었지만 그녀는 그것만으로도 무척 한가해졌다고 느꼈다.

“갑자기 여유 시간이 생기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바람이 선선했다. 날씨를 즐기기 위해 오랜만에 티룸이 아닌 테라스에서 차를 한잔하던 클로에가 곁에 서 있던 키엘에게 말을 걸었다.

사실 반쯤 농담 같은 말이었다. 진짜로 할 일이 필요하다기보다는 오랜만에 쉴 시간이 생겼다는 자랑에 가깝달까.

눈치가 좋은 집사인 키엘 역시 그 의미를 알아들었다. 하지만 그는 무척이나 노련한 사람이었다. 어느 정도냐면,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을 정도로.

“아! 그렇다면 운동을 해 보시는 것은 어떠세요?”

“우…… 운동이라고요?”

예상치 못한 말에 클로에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러나 키엘은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듯이, 그저 선량하고 정직해 보이는 얼굴로 웃어 보이며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네. 마님의 체력과 건강을 위해서요! 만일 마님께서 다시 쓰러지시거나 한다면 저희들은 정말 슬플 거예요.”

클로에는 좀 당황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는 운동을 무척 싫어했다. 가능하다면 티룸에 콕 박혀서 차를 마시거나 책을 읽는 게 훨씬 좋았다. 그녀는 슬금슬금 발을 뺐다.

“하, 하지만……. 전 운동에 재능이 없는걸요. 그리고 이제부터는 무리하지 않을 거니까, 쓰러지지 않을 거예요.”

그러나 키엘은 여전히 그녀의 완곡한 거절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는 여전히 즐거운 듯한 태도로 말했다.

“에이, 재능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아요. 그냥 건강에 도움이 될 정도로만 하시면 되는걸요.”

키엘은 마님만을 공략하는 것으로는 결판이 나지 않을 것을 눈치챘다. 그래서 그는 주인님을 끌어들이는 초강수를 뒀다. 키엘이 눈치 없는 척하며 말했다.

“아! 제 생각이지만 정말 좋은 생각인 것 같아요. 아무래도 각하께도 말씀을 드리는 게 좋겠어요. 분명 좋아하시겠죠?”

“앗! 키엘, 잠시만요……!”

“그럼 전 각하를 뵈러 이만……!”

키엘이 못 들은 척하며 꽁무니를 뺐다. 클로에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런 집사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한편, 키엘로부터 ‘마님의 건강을 위해 마님께서 운동을 배우시게 하는 것은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들은 알폰스는 그것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클로에의 건강을 위해서라면 아무것도 아끼지 않을 생각이었다. 윈체스터 공작처럼 아내만을 위한 승마장을 만들어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알폰스는 그날 저녁 식사가 끝난 뒤 클로에에게 언질을 띄워 보았다.

“그런데, 오늘 키엘로부터 부인께서 운동을 하시는 것이 좋을 것slakpw 같다는 의견을 들었습니다. 혹시 부인께서도 들으셨습니까?”

클로에는 오후에 키엘이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결국 알폰스에게도 말을 했구나!

“네, 저도 들었어요.”

“부인께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알폰스가 나직하게 말했다.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클로에의 뺨이 붉어졌다. 키엘에 이어 알폰스까지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니, 자신에게 운동이 필요한 것이 맞긴 맞는 것 같다.

전생에서의 몸도 그리 튼튼한 체질은 아니었지만, 현재의 몸은 더더욱 타고나길 허약했다. 공작가에서는 영양가 높은 식사와 편안한 잠자리 등으로 클로에의 건강을 보완하고자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그렇다. 건강한 모습으로 앞으로도 계속 일을 하려면, 그리고 차를 마시려면……. 건강을 신경 써야만 했다.

결국 클로에는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좋은 생각이에요.”

“저와 생각이 일치하신다니 다행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종류의 운동을 좋아하십니까?”

클로에는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가 좋아하는 운동 같은 건 없었다. 그녀가 민망해하며 말했다.

“잘 모르겠어요.”

알폰스가 말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생각해 봅시다.”

주인마님께서 곧 운동을 하실 거라는 쓸데없는 소문은 공작저에 퍼져 나갔다. 기사단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이야기를 들은 제이콥이 흥분하며 외쳤다.

“마님께서 운동을 하신다니! 역시 운동이라면 검술과 승마지, 암!”

제이콥이 기사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너희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우리 기사단이 마님의 운동을 책임지면 어떨까? 우리가 검술을 가르쳐 드리는 거야!”

“오오! 좋다!”

“그렇게 되면 마님을 자주 볼 수 있잖아! 좋아!”

예쁜 마님을 자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희망에 찬 기사들이 환호했다. 그러나 개중 톰슨이 이성적으로 말했다.

“검술은 무슨 검술이야. 마님처럼 다정한 분은 검술 같은 거친 운동은 안 좋아하실걸.”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우우우! 이 배신자!”

결국 톰슨은 언제나처럼 다른 기사들에게 얻어맞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제이콥은 자신의 의견을 기사단 단장에게 전했고, 톰슨이 제시한 의견대로 검술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 kjmdml클로에가 그것을 거절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결국 클로에는 그녀의 하녀 니나와 로지의 의견대로 춤을 배우기로 했다. 열심히 배우다 보면 언젠가 알폰스와 함께 무도회에 가도 부끄럽지 않게 춤을 출 수 있을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춤을 배우는 것도 나름대로 재미있게 느껴졌다.

* * *

며칠 아픈 덕에 바깥바람을 쐰 지가 오래되었다. 완치되었다는 샨탈의 진단 뒤에도 알폰스의 걱정과 과보호에 클로에는 사나흘 정도를 바깥에 나가지 못했다.

그러고 나니 이제 슬슬 외출도 하고 싶고, 저택 외부의 사람을 만나고 싶은 것도 사실이었다.

그때쯤이었다. 타이밍 좋게도 포트넘 부인이 소규모 가든파티를 한다며 바텐베르크 부부를 초대했다. 사이좋은 친구인 포트넘 부인이 초대를 했는데, 외출이 하고 싶었던 클로에가 거절할 리가 없었다.

알폰스는 여전히 클로에를 내보내기엔 불안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녀가 워낙에 바라는 데다가 자신을 동반하는 자리이므로 결국 그 초대에 승낙했다.

당일 저녁, 클로에와 알폰스는 함께 포트넘 자작저로 찾아갔다.

“초대해 주셔서 무척 감사드려요, 포트넘 부인.”

“아니에요. 오히려 참가해 주셔서 제가 더 감사하지요, 바텐베르크 부인.”

포트넘 자작 부부는 공작 부부를 맞이하기 위해 마중까지 나와 있었다. 포트넘 부인과 친근한 인사를 한 클로에는 그녀가 이끄는 대로 가든파티의 장소인 뒤뜰로 향했다.

“귀빈들이 오셨구려!”

포트넘 자작이 그들을 맞이하려 뛰어나왔다. 막 뒤뜰에 도착한 그들을 발견한 것이다.

“오랜만이에요, 자작님.”

클로에의 뒤에서 알폰스 역시 말없이 목례를 했다.

“공작 각하, 그리고 공작부인. 아내의 파티를 빛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포트넘 자작은 최근 들어 좀 더 찐 것 같은 토실토실한 볼이 찢어지도록 웃음 지으며 알폰스와 악수했다. 자신의 아내와 클로에의 우정 덕에 최근 경제적으로 큰 이득을 보고 있는 그는 공작 부부를 제 가족처럼 환대했다.

그들은 포트넘 자작의 안내에 따라 가든파티가 시작되기 직전의 뒤뜰로 향했다. 둥근 조명을 여기저기 달아놓은 뒤뜰은 무르익어 가는 여름의 신록을 머금고 있었고 달콤한 향기를 풍기는 꽃 관목이 많이 심겨 있었으며 해가 졌기에 적당히 서늘했다. 모여서 간단한 바비큐와 와인 한 잔을 즐기기에 이만큼 좋은 조건이 없었다.

챙이 넓은 모자 아래의 클로에의 얼굴이 기대감으로 상기되었다. 포트넘 부인과 재잘거리는 그녀를 보며 알폰스가 픽 웃었다.

그는 오늘 역시 별로 파티에 참석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지만, 클로에가 저렇게까지 좋아하는 걸 보니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티가 시작되었다. 다른 무도회나 사교 모임들과는 달리 포트넘 부부의 제일 친한 지인들만을 몇 명 부른 이번 파티는 꽤나 편안한 기분이었다. 최근 필요에 의해 사교 모임들에 참석하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은 잘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 끼어 있는 걸 좋아하지 않는 클로에는 이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긴 테이블 위에는 정성 들여 준비한 요리가 준비되어 있고 뜰의 한편에서는 전문 셰프가 석쇠에 바비큐를 굽고 있었다. 하인들 역시 다양한 음료수를 들고 돌아다녔다.

여타 모임들이 그렇듯이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무리가 남녀로 나뉘어졌다. 알폰스는 그다지 클로에를 떼어 놓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는 남자들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아내가 있는 쪽을 흘끗거렸다.

“……그래서 이번엔 싱할라의 홍차를 사 보았답니다. 캔디라고 했던가, 그런 이름의 차였던 것 같은데 어떤 것인지 잘 기억나지 않네요.”

포트넘 부인과 클로에는 포트넘 부인이 얼마 전에 사들였다는 차를 소재로 놀라울 정도로 오래 대화하고 있었다.

“각하, 각하께서 최근에 운영하고 계시다는 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때 포트넘 자작의 지인인 듯한 한 남자가 알폰스에게 말을 걸었다. 알폰스가 대답했다.

“어떤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그가 소유한 사업은 너무나도 많았기에 그중 무엇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 최근에 시작하신 사업 중에 귀부인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아주 독창적인 상품들과 영업력으로 무척이나 호조를 보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아, 무엇에 대해 말씀하시는 건지 알 것 같습니다.”

듣고 있던 다른 남자가 끼어들었다.

“다운튼 거리에 내셨다는 가게, 트리플 스위트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저도 그 가게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식료품 상점들은 많이 봤지만 잼과 달콤한 것들만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가게는 처음 보았습니다. 귀부인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끄는 걸 보니 공작 각하의 혜안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더군요.”

“정말입니다! 제 여동생은 밀크잼에 푹 빠져서 종류별로 잔뜩 주문해 쌓아 놓고 먹더군요. 처조카 역시 트리플 스위트의 단골입니다.”

“그런 신선한 발상은 어떻게 생각해 내시는 겁니까? 장미잼을 보았을 때는 정말 놀랐습니다.”

남자 두 명이 주거니 받거니 연신 알폰스에 대한 찬사를 건넸다. 알폰스는 그것이 완전히 순수한 의미의 칭찬은 아닐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아마 저들은 트리플 스위트와 관련된 거래를 트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알폰스는 말없이 품에서 시가를 꺼내 끄트머리를 자른 뒤 불을 붙였다.

“무슨 이야기들을 하고 계시는 건지 물어봐도 되겠소?”

그때 와인을 가지러 갔던 포트넘 자작이 돌아왔다. 알폰스가 시가를 빨아들이는 동안 남자들이 말했다.

“공작 각하의 트리플 스위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업은 다른 사람들은 감히 따라 할 수 없는 예술의 경지죠. 각하는 무척이나 대단하신 분입니다.”

남자 두 명의 말에 포트넘 자작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얼떨결에 말했다.

“네? 제가 알기로 그건 각하께서 소유하고 계신 사업이 아닙니다.”

“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그게, 그러니까…….”

“아무래도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연기를 길게 뱉어 낸 뒤에야, 알폰스가 입을 열었다.

“트리플 스위트는 제 사업이 아닙니다. 구상과 기획, 상품의 선정, 운영, 관리, 세무, 어떤 것에도 전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예에?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하, 하지만…… 분명 바텐베르크의 사업이라고 들었습니다만…….”

알폰스가 손가락에 끼운 시가를 입에서 떼었다. 그 자리에 있던 남자들은 순간 놀랐다. 알폰스가 아주 엷게나마 웃었던 것이다. 심지어 그 웃음에는,

“사업의 소유주를 모셔 오겠습니다.”

일종의 장난기가 배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알폰스는 뒤돌아서 파티에 참석한 여자들이 모여 대화를 나누는 자리로 갔다. 그가 장갑 낀 손으로 클로에의 어깨를 감싸며 불렀다.

“부인.”

뭐가 그리 즐거운지 수다를 떨며 까르르 웃던 클로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돌아보았다. 자신을 부른 사람이 남편이라는 것을 깨닫자 그녀의 얼굴이 물감이 번지듯 밝아졌다.

“알폰스.”

자신을 부르는 그녀의 모습에 알폰스는 못내 가슴 한구석이 간질간질했다. 그런 기분을 꾹 누른 채 그가 말했다.

“잠시 시간을 내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죠. 무슨 일이신데요?”

클로에는 대화를 나누던 부인들과 눈인사를 하곤 알폰스의 손을 잡았다. 알폰스가 부인들에게 인사를 남겼다.

“실례했습니다.”

모여 있던 부인들은 나란히 걸어가는 공작 부부의 뒷모습을 얼떨떨한 얼굴로 지켜보았다. 방금 본 것들이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던 것이다. 공작 부부가 충분히 멀어지자 부인들이 소곤거렸다.

“세상에, 정말 사이가 좋아 보여요.”

“방금 봤어요? 공작님,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 웃고 계셨어요.”

“저도 봤어요! 공작님께서 웃으시는 모습은 처음 봐요.”

부인들은 알폰스의 다정한 얼굴과 클로에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친근한 태도에 대해서 열기를 띤 목소리로 떠들었다. 알폰스가 이성과 교제한 것이 한두 번은 아니었지만 그는 그들 중 단 한 명에게도 진심 어린 미소와 친근하고 편한 태도를 허락하지 않았다.

다만 여기서 한 사람, 이미 이 광경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있던 포트넘 부인만이 담담할 뿐이었다.

“잉꼬부부가 따로 없다니까요.”

포트넘 부인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 태도에서는 왠지 모를 대견함이나 뿌듯함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알폰스는 클로에를 데리고 아까 대화를 하던 남자들에게로 갔다. 그가 그러는 것을 멍한 얼굴로 보고만 있던 남자들이 말했다.

“고, 공작부인 아니십니까.”

남자들이 클로에에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알폰스가 왜 클로에를 데려온 건지 모르는 듯한 반응이었다. 클로에가 바로 그 트리플 스위트의 주인이라는 것을 생각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각하, 공작부인은 갑자기 왜……?”

“이분이 바로 트리플 스위트의 주인입니다.”

“예, 예?”

남자들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알폰스가 분명한 어조로 쐐기를 박았다.

“이분이 트리플 스위트의 소유주란 말입니다.”

* * *

클로에는 그 말을 듣고 알폰스가 자신을 왜 이 자리에 데려왔는지 대강 짐작했다.

제국에서 여성의 일과 여성이 배울 수 있는 것은 극히 한정되었다. 설령 여성이 사업을 한다 해도 그것은 대부분 평민의 일이었고, 여성 귀족들에게 권장되는 것은 오로지 남편의 내조를 하고 가정을 잘 꾸리는 일이었다.

그래선지 남자들은 알폰스의 말을 듣고도 그 의미를 잘 파악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부인께서도 일을 도우신다는 겁니까?”

“아닙니다. 사업과 관련한 모든 일은 제 아내가 담당하고 있습니다. 트리플 스위트의 명실상부한 주인은 제가 아닌, 제 아내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알폰스의 태도에는 미미하지만 명백한 자랑스러움이 묻어나 있었다.

“아무래도 트리플 스위트의 사업과 관련해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 듯한데, 이쪽과 함께 하십시오.”

그제야 남자들은 그가 하는 말을 완전히 이해했다. 그들은 무척이나 놀라워했다. 제국에선 무척 희귀한 일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럴 수가! 부인께서 사업을 하시고 계시다고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어머, 아니에요.”

그러나 남자들은 여전히 내심의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클로에의 일을 알폰스가 많이 도와주고 있지 않을까? 아무래도 클로에는 여성이니만큼 사업에 대한 지식과 경험은 부족하지 않을까?라는 식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금방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별이 났다. 클로에와 대화를 시작하자마자 남자들은 자신들이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자신의 사업은 물론, 경제와 사회, 그리고 제국의 정치에 대해 무척이나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적어도 남자 자신들과 비교해 전혀 부족하지 않을 정도였다.

이곳에 떨어지고, 어느 정도의 적응을 거치고 사업을 시작하게 되자, 클로에는 살아남기 위해 제국의 사회와 정치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책과 신문 등을 닥치는 대로 탐독하며 독학을 한 것이다.

한편, 남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클로에의 모습을 본 부인들이 속닥였다.

“어머, 바텐베르크 부인을 좀 봐요. 남편들과 대화를 나누고 계신걸요?”

“정말 신기하네요. 남자들은 늘 사업과 정치에 대한 재미없는 이야기만 하지 않던가요?”

부인들의 눈이 호기심과 신기함으로 빛났다.

“뭐, 그러니까 바텐베르크 부인이 대단하신 거죠.”

포트넘 부인은 꼭 자기 일이라도 된 듯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남자들이 있는 곳에서 한참이나 이야기를 나누던 클로에가 말했다.

“어머, 저는 이제 슬슬 부인들께 가 보아야 할 것 같네요.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생겨 즐거웠어요, 신사분들.”

“정말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바텐베르크 부인.”

“저도 그렇습니다, 부인. 감사했습니다.”

남자들이 진심 어린 감탄의 기색으로 인사했다.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내심 여성은 사업이나 공적인 일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 클로에 덕에 그러한 선입견을 깰 수 있었다.

남자들 중 한 사람이 저도 모르게 악수를 청하듯 손을 내밀었다. 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한 다음 악수를 나누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그런데 한편에서 그것을 저지하는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흐흠, 흠.”

알폰스였다. 그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무표정했으나, 그 눈에는 왠지 모를 불쾌함이 담겨 있었다.

그 눈빛에서 쏟아져 나오는 왠지 모를 위압감이 송곳처럼 찌르고 들어오는 것 같았다. 남자는 저도 모르게 손을 내렸다.

클로에는 다시 부인들에게로 돌아가 대화를 나누었다. 한 번 돌아봐 주지도 않고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는 클로에를 보자 알폰스는 왠지 모르게 입 안이 썼다.

결국 또다시 클로에와 떨어져 있게 되자, 알폰스 역시 아까와 똑같이 그녀를 힐끔거리며 멀리서나마 주시할 수밖에는 없었다.

클로에를 멀리서 지켜보던 그가 재차 그녀에게 다가간 것은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난 뒤였다.

“부인, 취하신 것 같습니다.”

클로에가 하인에게서 받아 들려던 술잔을 다른 큰 손이 먼저 집어 올렸다. 알폰스의 손이었다.

눈앞의 술잔이 허공으로 붕 떠오르자 클로에의 시선도 따라 올라갔다. 술잔에 고정되어 있던 그녀의 시선이 뒤늦게 알폰스에게로 돌아왔다.

그녀가 술기운에 상기된 얼굴을 하곤 말했다.

“저 안 취했어요.”

알폰스는 골이 아팠다. 그는 술잔을 치워 버리고 대신 물 잔을 집어와 건넸다.

“어쨌든 음주는 그만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부인들과 수다를 떨면서 한 잔 두 잔 마신 와인은 정말로 맛이 좋았다. 달콤하고 알코올 특유의 냄새가 심하지 않은 것이 딱 클로에의 취향이었다.

도수가 높지 않은 술은 쉽게 마시다가 오히려 금방 취하기 마련인데 이번의 클로에가 꼭 그랬다. 그렇게 몇 잔을 마시고도 부족해 더 가지러 나왔을 때 그녀를 지켜보고 있던 알폰스가 따라 나온 것이다.

“이제 그만 돌아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시간이 늦었습니다.”

사실 그렇게 늦은 시각은 아니었다. 아직 파티의 참석자들 중 한 명도 돌아가지 않았고 돌아갈 생각도 없어 보였다.

객관적으로는 늦은 시각이 아님에도 알폰스에게는 어쩐지 무척 늦은 밤처럼 느껴졌다. 특히나 이렇게 무방비하게 취해 있는 아내를 방치해 두기에는.

그러나 클로에는 단호했다.

“싫어요.”

“부인.”

알폰스의 미간에 가는 금이 갔다. 그런 그의 얼굴을 보며 클로에는 배시시 웃었다. 취한 와중에도 그녀는 남편의 얼굴이 참 흐뭇하게 잘생겼다는 생각을 했다.

클로에가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앓느라고 제법 오랜 시간 집밖에 나오지를 못했고, 친한 친구 포트넘 부인을 본 것도 무척이나 오래간만이었던 것이다. 정말 오랜만에 바깥 공기를 마시며 다른 사람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 클로에에겐 무척이나 행복하게 느껴졌다. 이 이른 시간부터 돌아가기엔 아쉬울 정도로.

클로에는 그대로 뒤로 돌아 포트넘 부인에게로 달려갔다. 그러곤 포트넘 부인의 등 뒤에 쏙 숨어 버렸다.

“어머?”

자신의 등 뒤에 클로에가 숨은 것을 깨달은 포트넘 부인은 피식 웃음 지었다. 클로에는 평소에 차분한 편인 데다 차에 대해 잘 알고 포트넘 부인에게 설명을 해 주는 역할이었다. 그런 클로에가 이렇게 어린애처럼 구는 것이 귀엽게 느껴졌다.

도망친 클로에를 잡으러 온 알폰스는 그녀가 포트넘 부인의 등 뒤에 숨은 것을 발견했다. 그는 기가 찼다. 클로에는 포트넘 부인보다 키가 컸고 따라서 포트넘 부인의 머리 위로 그녀의 정수리가 보였다.

‘지금 저걸 숨은 거라고.’

알폰스가 클로에의 정수리를 노려보았다. 포트넘 부인의 등 뒤에서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완전히 물가에 어린애를 놔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한편 타격은 애꿎은 포트넘 부인이 받았다. 알폰스 특유의 따가울 정도로 위압감 있는 눈빛에 빗맞은 것만으로도 그녀는 움찔 놀랐다.

‘새삼스럽지만 저 사람 무섭단 말이야.’

서늘한 무언가가 등줄기를 훑고 지나가는 것만 같았다. 목덜미에 식은땀이 나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생각했다.

‘이런 사람한테 이렇게 친근하게 구는 바텐베르크 부인도 참 대단하지.’

만일 자신이라면 그럴 수 있었을까? 그 알폰스 바텐베르크에게?

포트넘 부인은 그 대답을 이미 알고 있었다. 천만에.

그때였다. 포트넘 자작가의 하인 한 명이 나타났다. 그가 볼일이 있는 사람은 뜻밖에도 알폰스였다.

“공작 각하, 즐기시는 와중에 죄송합니다. 공작 각하께 중요한 기별이 왔습니다.”

알폰스는 영 마음에 안 들어 붉은 눈동자를 굴려 흘끗 하인을 보았다. 하인 역시 포트넘 부인처럼 움찔 놀라고 말았다.

“무슨 일로.”

“송구합니다만 저도 내용은 모릅니다. 중요한 것이라 반드시 각하께 직접 전달해야 한다고 합니다.”

가는 건 가더라도 저렇게 취한 상태의 부인을 두고 가고 싶지는 않았다. 함께 파티장을 빠져나간 김에 잘 구슬려서 그대로 저택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더 좋고. 알폰스는 클로에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부인.”

“싫어요. 집에 데려갈 생각이죠?”

알폰스는 눈살을 조금 찌푸렸다. 남들은 잘 읽지 못하는 자신의 생각을 저 여자는 종종 깜짝 놀랄 정도로 잘 읽어 내곤 했다. 앙큼하게도.

취한 아내를 두고 가고 싶지 않은 마음에 알폰스는 답지 않게 갈등했다. 그가 고민하는 것을 보고 주변에 있던 부인들이 까르르 웃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공작님. 공작부인은 저희가 잘 모시고 있을게요.”

“정말 애처가시네요.”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었는데 고집을 피울 수도 없었다. 알폰스는 체념하곤 되도록 빠르게 다녀오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네. 걱정 마세요. 잘 다녀오세요.”

부인들의 미소 섞인 대답을 뒤로하고 알폰스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알폰스가 사라지자 포트넘 부인이 호호 웃으며 등 뒤의 클로에를 돌아보았다.

“바텐베르크 부인, 이제 나오셔도 돼요.”

“가셨어요?”

“네, 가셨어요.”

드디어 클로에가 찰싹 달라붙어 있던 포트넘 부인의 등 뒤에서 떨어져 나왔다.

그녀는 꽤 기분이 좋았다. 취기는 기분 좋게 올랐고 파티는 즐거웠다. 게다가 포트넘 부인은 얼마나 친절한지! 술기운에 나무꾼에 의해 구출 받은 사슴 같은 기분이 된 클로에는 가슴속에 잔잔히 차오르는 고마움을 느꼈다. 그녀가 방실방실 웃으며 포트넘 부인을 꼭 안았다.

“숨겨줘서 고마워요, 포트넘 부인.”

혀가 꼬부라진 발음으로 그녀가 말했다.

“어머, 어머, 이분 좀 봐.”

엉겁결에 끌어안긴 포트넘 부인은 순간 당황했다가, 곧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포옹을 한 뒤 클로에는 주위를 보았다. 자신의 모습을 보고 부인들이 호의적으로 키득거렸다. 그걸 보자니 클로에는 무척이나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 웃는다는 것은 참 좋은 거였다. 건강에도 좋고.

세상은 참 아름답고 인생은 살 만했다. 한껏 들뜬 클로에는 왠지 모르게 거기 있는 부인들을 모두 한 번씩 껴안아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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