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변화한 태도에 그녀의 미모와 지위, 재력이 날개가 되었다. 소심한 태도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그녀가 변화함으로써 제대로 그 위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눈에 띄었던 건 그녀의 모습뿐만이 아니었다. 더욱더 놀라운 것은, 그녀를 향한 알폰스의 행동에 있었다.
바텐베르크 공작이 자신의 아내를 냉대한다는 것은 제국 사교계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비록 지난번 해로즈 백작의 무도회에서 두 사람이 생각 외로 사이좋게 지내는 것을 보이긴 했지만 그 무도회는 그렇게 규모가 크다고 할 수 없었고 알폰스가 클로에를 대하는 태도 역시 평범한 수준이었다. (비록 익히 알려진 알폰스라는 사람의 성격상 그런 ‘평범한’ 태도도 놀라운 것이긴 했지만.)
그러나 이번 연회에는 상황이 달랐다. 제국 사교계 내의 중요 인사들이 대부분 참여한 대규모의 행사였으며, 무엇보다도 클로에를 대하는 알폰스의 모습은…….
‘……!’
연회장 중간쯤에 들어선 클로에는 약간의 불편함을 느꼈다. 새 구두가 잘 맞지 않는지 발뒤꿈치가 자꾸만 쓸려서 아팠던 것이다.
‘구두를 갈아 신어야겠네.’
귀부인들이 무도회에 참가할 때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구두는 물론 드레스까지 예비용으로 가지고 다니는 일은 아주 흔했다.
클로에는 구두를 가져올 것을 부탁할 시종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녀가 그러는 기척을 느낀 알폰스가 물었다.
“부인, 어디 불편한 데라도 있으십니까?”
“아, 신발이 발에 잘 안 맞아서요. 잠깐 갈아 신고 싶은데 기다려 주시겠어요?”
클로에가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알폰스는 그런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두른 채 그녀를 잠시 내려다보았다.
해로즈 백작가의 무도회에서와는 다르게 알폰스는 노골적으로 클로에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들었다.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 중 많은 수가 느낄 만큼 뚜렷하게.
알폰스는 클로에 대신 시종을 불렀다.
“아, 제가 해도 되는데…….”
클로에가 당황해 말했지만 알폰스는 그녀를 향해 간단한 눈짓만을 줄 뿐이었다. 그는 마차에 있는 구두를 가져오게 지시하곤 클로에를 연회장 가운데에 있는 분수대로 데려갔다.
분수대 가장자리에 클로에를 앉힌 알폰스는 시종이 구두를 가져오길 기다렸다. 시종이 구두를 가져오자, 클로에가 말했다.
“도와주어서 고마워요, 알폰스.”
“아닙니다.”
알폰스가 짧게 대답했다. 클로에는 구두를 받아 갈아 신으려 했다. 그러나 그녀보다 먼저 구두를 받아 드는 손이 있었다. 알폰스였다.
“어? 알폰스…….”
알폰스가 무엇을 하려는 건지 몰라 눈을 동그랗게 뜬 클로에의 앞에서 알폰스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드레스 자락 속에서 그녀의 발을 조심스럽게 잡아선 구두를 벗겼다.
“……!”
누구도 예상치 못한 그의 행동에 클로에는 물론이고 주변에 지나가던 사람들까지 할 말을 잃어버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제국에서 제일 위세 있는 바텐베르크 공작가의 주인이다. 암만 자신의 아내라곤 한들 다른 누군가에게, 그것도 남들이 전부 보는 곳에서 무릎을 꿇은 것이다.
그러나 알폰스는 조금도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다. 그는 클로에의 구두 한 짝을 전부 벗기곤 시종이 가져온 구두를 다시 신겼다.
클로에는 너무 놀라서인지, 당황해서인지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꼈다. 게다가 그의 손길이 너무나 섬세하고 유리 세공품을 만지는 것처럼 조심스럽다는 걸 깨닫자 심장의 박동이 더더욱 강렬해졌다.
“부인.”
아찔했던 눈앞이 낮은 목소리에 원래대로 돌아왔다. 클로에가 알폰스를 보았다. 그가 물었다.
“발은 편안하십니까?”
클로에는 자신의 얼굴이 뜨끈하게 달아오른 것을 느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남들의 시선 때문인지, 아니면 그 시선 전부를 다 합치고도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의 알폰스의 강렬한 시선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네. 덕분에요.”
알폰스는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나서야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알폰스가 다시 클로에를 에스코트하며 사라진 뒤,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본 것에 대한 해석과 논평을 나누느라 바빠졌다.
‘바텐베르크 공작 부부는 사이가 좋지 않다고 들었는데, 낭설이었던 건가?’
연회에 참가한 많은 사람들은 소문과 현실의 괴리에 혼란을 겪고 있었다.
정작 당사자들은 다른 사람들의 혼란 같은 것은 추호도 모르는 채였다. 그들은 함께 연회장을 거닐며 대화를 하고, 가끔 웃기도 했다. 알폰스는 비록 웃지는 않았으나 그가 클로에를 보는 시선은 다른 그 누구를 보는 것과도 같지 않았다.
그러한 알폰스의 반응은 많은 여자들에게 충격을 선사했다.
‘저 사람, 저런 눈빛도 할 수 있었던가?’
결혼 전, 알폰스는 오는 여자 막지 않고 가는 여자 잡지 않았다. 고백을 받으면 누구와라도 교제하긴 했지만 마음을 준 사람은 없었다. 상대가 누구건 간에 최소한의 예의는 보였지만 그뿐이었다.
그는 어느 누구에게도 저렇게 다정한 얼굴로 웃어 주지 않았다. 어느 누구에게도 저렇게 내내 허리에 감은 팔을 영원히 떼어놓지 않을 것처럼 굴지 않았다. 어느 누구에게도 저렇게 섬세한 낌새 하나하나 신경 써 주지 않았고, 어느 누구에게도 저런 다정한 눈빛을 건네지 않았다.
공작 부부는 함께 연회를 즐겼으나 춤은 추지 않았다. 클로에가 춤을 잘 추지 못한다는 걸 알폰스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한 황궁 시종이 알폰스에게 다가와 황제 폐하께서 그를 찾는다고 알렸다. 무언가 정무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알폰스는 클로에를 떼어 놓고 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제가 호출을 하는데 거절을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녀를 황제가 있다는 곳과 최대한 가까운 곳까지 데려왔다. 그러고 나서도 별로 떨어지고 싶지가 않은 듯 미미한 아쉬움이 묻어나는 눈으로 클로에를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부인. 멀리 가지 마시고 여기에 계십시오.”
“물론이죠.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알폰스.”
클로에가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알폰스가 떠난 뒤, 클로에는 혼자 쉬기 위해서 잠시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그녀가 한숨 돌리기도 전이었다.
“이야, 이게 누구야. 바텐베르크의 잉꼬부부 아니야?”
별로 반갑지 않은 사람이 나타났다.
“그런데 잉꼬가 오늘은 웬일로 혼자 있을까?”
샴페인 잔을 든 아서가 다소 연극적인 태도로 말하며 클로에에게 다가왔다. 클로에의 표정이 단숨에 떫어졌다.
“황자 전하.”
“황자 전하라니, 우리 사이에 섭섭하게. 좀 더 편하게 불러.”
“편하게 라면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클로에는 과거 미혼의 젊은 여직원들마다 죄다 치근덕거리던 진상 상사를 떠올렸다. 클로에 그녀도 그 상사의 목표가 된 적이 있었다. 클로에는 그때 세상에서 제일 사무적인 어조와 만리장성을 방불케 하는 철벽을 치는 법을 배웠다.
클로에의, 알폰스에게 대하는 것과는 180도 딴판인 냉랭한 어조에 아서의 입꼬리가 미미하게 꿈틀거렸다. 그러다 그는 곧, 좌석에 몸을 좀 더 깊게 묻고 피식 웃었다.
“아―서.”
“…….”
“안 돼? 너, 알폰스도 이름으로 부르잖아?”
당연한 말이지만 아무리 공작부인이라도 황자를 이름으로 부르는 건 대단한 무례였다. 어지간히 깊은 관계가 아니고서야.
클로에는 굳이 표정 관리를 하려 들지 않았다. 그녀가 소금 덩어리라도 씹은 표정을 짓자 아서가 손을 내저었다.
“하하, 농담이야 농담. 뭐, 황자님 정도면 부담 없겠지?”
“그래서 찾아오신 용건을 여쭤봐도 될까요? 황자 전하.”
클로에가 ‘전하’에 미묘한 악센트를 넣었다. 아서는 그것을 알아채고 헛웃음을 흘렸다.
클로에의 대응은 분명 이상했다. 일단 어떻게 생각해도 아서 그가 기대한 방향의 반응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녀의 언행은 아주 예의 바르다 못해 말도 못 하게 사무적이었으니까. 이런 상황에서 불쾌함을 드러낸다면 쪼잔한 사람이 되는 건 아서 그였다.
“용건이라니? 우리 사이에 그런 것도 필요해?”
“황자 전하와 저의 사이가 어떤 사이인가요?”
클로에가 단호하게 물었다. 이런 식으로 나오니 아서도 할 말이 없어졌다. 그는 웃는 모양 그대로 굳어 버린 얼굴로 잠시 머뭇거렸다.
“그건. 음……. 어쨌든 우리 꽤 친하잖아? 나는 클로에와 나름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클로에는 그렇게 생각 안 하는 거야? 이거 섭섭한데.”
가까운 사이라서 이전의 그녀가 어릴 적 했던 고백을 동네방네 소문내서 비웃음거리로 만들었단 말인가? 클로에는 기가 찼다.
게다가 친하기는 무슨. 클로에 그녀의 기억에 따르면 이전의 클로에에게 아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가끔 자기 기분 따라 여지가 담긴 말을 한마디씩 툭툭 건네어 그녀를 희망 고문한 것 빼고는.
거기까지 생각하니 더 이상 아서의 말에 반응하고 싶지 않아졌다.
클로에는 아서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아서는 여기서 조금 놀랐다. 이전의 클로에 같은 경우 단 한 번도 아서의 눈을 제대로 마주 본 적이 없었으니까.
“황자 전하. 아뢰옵기 송구하지만, 저는 제가 전하와 가까운 사이라고 느낀 적이 없습니다. 또한 저는 이미 지아비를 맞아, 이 부족한 한 몸 제 남편과 공작가에 헌신하기로 오래전에 결정한 몸입니다. 그런데 전하와 이렇게 독대하는 일이 잦아지면 원치 않은 소문이 생길까 저어됩니다. 그러니 저를 편하게 여기시더라도, 부디 이렇게 저와 독대하시는 것은 지양해 주셨으면 합니다.”
“뭐…… 뭐라고?”
비록 사실과 사실이 아닌 말이 섞여 있긴 했지만 아서의 입을 다물게 만드는 데에는 충분했다. 클로에는 어버버하는 아서를 보고 속이 시원해지는 것을 느꼈다. 게다가, 그의 등 뒤로 반가운 얼굴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송구합니다만 저는 그럼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부군께서 찾아오셔서요.”
좌석에 몸을 묻고 있던 아서가 고개를 돌렸다. 그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아, 알폰스…….”
알폰스의 눈빛이 강렬했다.
클로에가 일어섬과 동시에 아서 역시 따라 일어났다. 클로에는 아서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알폰스에게 다가가 다정하게 물었다.
“다녀오셨어요?”
“예, 부인.”
알폰스는 클로에의 손을 잡아 손등에 입 맞췄다. 다분히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한 행동이었지만 클로에는 그것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
아서 쪽을 흘끗 보자 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마 망신을 당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그에게는 적당히 인사를 한 뒤 자리를 벗어났다. 한 방 먹여 준 것 같은 기분에 괜히 웃음이 나왔다.
“바람이 쐬고 싶어요.”
클로에가 말했다. 알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발코니를 향해 함께 걸었다.
현대식 건축물의 발코니를 생각했는데 이곳의 발코니는 조금 달랐다. 일직선인 복도가 하나 있었고 그 양옆으로 장막이 달린 발코니가 여럿 있었다. 주로 개인적인 대화를 나누기 위한 곳이었다.
그중 대부분은 장막이 쳐져 있었다. 이미 누군가가 들어가 있다는 뜻이었다. 장막이 쳐진 발코니를 열어 보거나 들어가는 건 대단한 무례였기에, 그들은 비어 있는 발코니를 찾기 위해 복도를 걸었다.
상당히 깊은 곳까지 들어왔을 때였다.
“……그래, 바텐베르크 부부 말이야.”
클로에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 그녀가 멈추자 알폰스 역시 따라 멈췄다.
틀림없이 들었다. 바텐베르크라고 했다. 클로에는 자신들이 언급된 발코니 쪽으로 신경이 쏠리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유명하잖아? 아내 쪽이 냉대받는다고. 남편은 아내를 거들떠도 안 본다는데. 듣기로는 평소 저녁 식사 시간 외에는 얼굴을 안 본다는 소문이 있어.”
“나 같아도 그러겠다. 그런 바보 같고 한심한 여자를 누가 사랑해 주겠어?”
“그러니까, 공작도 괜히 한 번 변덕 부려 보는 것이 틀림없어. 당연하잖아? 공작이 그런 여자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할 리가 없지.”
“당연하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데…….”
클로에는 장막의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 모든 말을 듣고 있는 채로.
다른 말들은 괜찮았다. 뭐라고 헐뜯어도 상관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생채기를 남긴 것은 자신에 대해 한 말이 아니라, ‘알폰스가 누군가를 사랑할 리가 없다’는 말이었다.
‘잊고 있었어…….’
클로에는 멍하니 생각했다.
잊고 있었다. 알폰스는 누군가를 사랑할 만한 남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이전의 클로에의 기억을 가지고 있어, 그가 세간에서 어떤 평가를 듣는지, 어떤 스캔들이 있었는지를 기억했다. 그는 아무리 대단한 상대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기로 유명했다.
게다가 그들은 혼인할 당시 각서를 썼다. 서로를 사랑하지 않겠다는 항목이 들어 있는 각서를.
‘내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인데.’
그런데 왜, 그 아무래도 상관없는 사실들이 그녀에겐 비수처럼 느껴지는지.
그때였다.
“……!”
성큼성큼 걸어간 알폰스가 장막을 걷어 버린 것이다. 클로에가 채 말리기도 전의 일이었다.
* * *
아리아나는 알폰스를 사랑하는 여자들 중 하나였다.
그를 열렬히 사랑했지만 사랑의 결말은 알폰스의 결혼이었다. 알폰스의 결혼 상대가 부러워 미칠 것만 같았다. 응당 자신의 것이 되었어야 할 남자가 다른 여자의 손에 넘어간 이후로 그녀의 몸과 마음은 질투와 둘 데 없는 연정으로 타들어 갔다.
아리아나는 알폰스가 자신의 아내에게조차 사랑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에 매달렸다. 그의 아내가 얼마나 한심한 여자인지, 그녀가 얼마나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지 그녀에 대한 가십에 탐닉하며 살았다.
‘그런데 어째서…….’
그랬던 그녀는 오늘, 무리를 해서 황궁 무도회에 참석했다. 알폰스가 참석한다는 말에 그를 먼발치에서라도 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그녀는 그 결정을 후회해야만 했다.
알폰스가, 그 한심한 여자를 다정히 대하고 있었다. 사랑스럽다는 듯한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이래서는 안 되었다. 자신의 목숨이 달린 듯 집착했던 가십, 공작부인은 사랑받지 못한다는 소문, 만일 그것들이 전부 거짓이라면……. 아리아나는 살아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흔들리는 자신을 붙잡기 위해 친구를 불렀다. 자신을 살게 하는 그 말들이 사실임을, 알폰스는 클로에를 사랑하지 않음을 확신 받고 싶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속이기 위해 공작부인을 헐뜯었다.
‘어째서 당신이…….’
그랬을 뿐이었는데.
아리아나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 언제나 먼발치에서 지켜보았던 사람이 지금, 눈앞에 있었다. 아름다운 금발이 별빛에 창백하게 빛났다. 형형한 빛의 붉은 눈동자가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공작…… 각하…….”
그녀의 가녀린 목소리는 알폰스의 귀에 닿지 않았다.
“영애입니까.”
그녀는 본 적이 없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남의 사정에 대해서 다 아는 듯 함부로 혀를 놀리는 자가.”
그의 눈빛이 이렇게나 분노한 기색을 띠는 것은.
* * *
클로에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알기로는 남이 들어가 있는 발코니의 장막을 함부로 걷고 들어가는 것은 대단한 무례였다. 알폰스가 아서 황자 같은 망나니라면 또 모를까, 그는 평소 예의를 중요시하는 남자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가, 아무리 그와 그녀에 대한 이야기가 들렸다고 한들 남의 발코니에 무턱대고 쳐들어가다니?
클로에는 차마 그를 말릴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클로에는 알폰스의 뒤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눈빛이 얼마나 형형한 빛을 띠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가, 각하……. 저는, 그게 아니라…….”
아까만 해도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떠들던 여인들의 목소리가 바람 불면 꺼질 듯이 가녀려졌다. 알폰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영애들이 제 아내, 클로에 바텐베르크에 대해 함부로 혀를 놀리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녀는 바텐베르크가의 정당하고도 공식적인 안주인입니다. 그런 그녀를 모욕한다는 것은, 바로 바텐베르크가와 그 주인인 저를 모욕하는 것.”
“아니에요! 각하, 정말 저는 그런 게 아니라…….”
“영애들이 감히 바텐베르크의 명예를 욕보인다면 저는 가문의 이름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걸 원하시는 겁니까?”
가문의 이름으로 대응한다. 이 사안이 가문 단위의 싸움으로 번질 수도 있다는 뜻이다. 정치적, 법적 다툼으로 끝난다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최악의 경우 영지 간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어떠한 방향으로든 감히 제국의 단둘밖에 없는 공작가, 황제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을 정도의 위세와 권력을 쥐고 있는 바텐베르크와 가문 단위의 싸움을 벌이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가문은 이 제국에 없었다.
그 사실을 영애들이라고 모를 리가 없었다. 두 명의 영애들의 얼굴은 안쓰러울 정도로 창백해졌다.
아리아나의 친구, 미리엄이 먼저 무릎을 꿇었다.
“각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제, 제가 감히 바텐베르크의 안주인께 주제넘은 짓을 저질렀습니다!”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울기 시작한 미리엄의 곁에서, 아리아나의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그녀의 백지장 같은 얼굴을 흘끗 본 알폰스는 영애들에게 마지막으로 경고했다.
“만일 영애들이 제 아내를 한 번이라도 더 욕보인다면 그때는 용서하지 않겠습니다. 바텐베르크는 가문의 명예를 걸고 온 힘을 다해 대응할 겁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알폰스는 뒤돌아서 발코니를 걸어 나와 버렸다.
알폰스가 뒤돌았을 때, 클로에는 아리아나가 꺼질 듯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들었다.
“……지 말아요.”
지 말아요? 무슨 뜻일까. 하지만 그녀가 신경 쓸 바는 아니었다. 클로에는 발코니를 걸어 나가는 알폰스를 따라나섰다.
아리아나가 넋을 잃고 중얼거렸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요.”
그녀를 보는 알폰스의 시선에 진득하게 묻어 있는 감정은 경멸이었다. 마치 벌레만도 못한 것을 보는 듯한, 다시는 시선 한 번 주지 않을 경멸.
몇 년에 걸쳐 이어진, 그녀의 깊고 깊은 사랑의 보답이었다.
* * *
공작저로 돌아가는 동안, 클로에가 상처받지 않았나 신경을 쓰는 건지 알폰스는 그녀를 유독 더 세심하게 챙겼다. 그 사실을 느낀 클로에는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다음 날, 아침부터 알폰스가 클로에의 침실에 찾아왔다.
“가지고 싶은 것은 없으십니까?”
난데없는 질문에 클로에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나서야, 그녀는 알폰스가 아직도 어제의 일을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연히 웃음이 나왔다. 클로에가 웃으며 대답했다.
“차를 밀봉할 수 있는 통이 가지고 싶어요.”
“통…… 말입니까?”
평소 표정이 적은 알폰스였지만 이번에는 누가 봐도 뚜렷한 의아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침대 위에 나란히 앉은 그의 미간에 가는 주름이 잡히자, 클로에는 저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그의 미간을 꾹 눌렀다.
“……?”
“앗, 죄송해요.”
클로에가 뜨거운 거라도 만진 듯 부리나케 손을 뗐다. 워낙 매끈하고 예쁜 미간이라 주름이 잡히면 펴주고 싶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다행히도 알폰스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클로에가 농담을 하는 줄 알았다. 모처럼 갖고 싶은 것을 물었는데 기껏 통이라니? 통 같은 건 평민의 잡화점에 가도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다.
알폰스가 자신의 생각을 말하자 클로에는 고개를 저었다.
“‘밀봉할 수 있는’ 통이요. 찻잎은 향이 무척 잘 날아가거든요. 단단히 밀봉하지 않으면 향이 쉽게 날아가서 맛이 없어져요. 찻잎을 오래오래 맛있게 보관할 수 있는, 하지만 원한다면 언제든 꺼내 마실 수 있는 그런 차통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녀의 설명을 듣던 알폰스는 드물게도 픽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가 다시 클로에를 보며 말했다.
“또 차로군요.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안 되나요?”
클로에가 물었다. 그의 말을 듣고 나니 자신이 맨날 차 타령만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알폰스는 차분하게 말했다.
“아니요, 됩니다. 부인께서 원하신다면.”
그 말에 클로에는 배시시 웃었다. 알폰스는 어쩐지 마음속 한구석이 간질간질해져 오는 걸 느끼며 그녀를 보았다.
정말이지 묘한 기분이었다.
“시중에서 곧장 구할 수 있는 물건은 아닌 듯하니 조금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물론이죠! 정말 고마워요, 알폰스.”
이날 알폰스는 키엘을 시켜 장인에게 클로에가 요구했던 물건을 의뢰했다.
며칠 뒤였다. 베이커리와 식당에 납품할 제품 목록을 검토하던 클로에에게 예상치 못한 손님이 찾아왔다.
“마님, 손님께서 찾아오셨다고 합니다.”
하녀가 허리 굽혀 인사했다.
클로에는 목록을 내려놓았다.
“손님? 오늘은 올 사람이 없을 텐데. 어떤 분이시니?”
하녀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결코 낯설지 않았다.
“벨라도나 후작이라고 합니다.”
* * *
“갑작스러운 방문임에도……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공작부인.”
클로에 앞이라 긴장을 하는 건지, 원래 그런 체질인 건지는 몰라도 끊임없이 식은땀을 흘리며 벨라도나 후작이 말했다.
클로에는 얼음을 동동 띄운 냉녹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갑작스러운 손님을 맞이한 곳은 응접실이었다. 별로 벨라도나 후작을 클로에 자신의 (그리고 알폰스와의) 티룸에 들이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의 딸인 벨라도나 후작 영애의 무례와 상관없이 말이다.
클로에가 담담히 말했다.
“아니에요. 그보다, 이렇게 제게 찾아오신 연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혼인 뒤 연애가 일상적인 제국이니만큼 이곳에서는 기혼자가 이성과 독대하는 것이 흠은 아니었다. 그렇다곤 해도 후작쯤 되는 사람이 아무 연 없는 이성에게 찾아오는 일은 드물었다.
하필이면 알폰스는 업무를 보러 황궁에 입궁한 날이었다. 벨라도나 후작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클로에는 그것이 괜히 아쉬웠다.
후작은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았다.
“이런, 하하. 공작부인께선 무척 단도직입적이시군요. 그렇죠, 허례허식 같은 건 별로 중요하지 않죠……. 현명하십니다.”
클로에는 그가 최선을 다해 자신의 비위를 맞추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그의 의도는 잘 달성되지 않고 있었다.
“제가 이렇게 찾아뵙게 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공작부인께서 주도하시는 사업이 무척이나 호재라고 들었습니다. 아주 신선하고 매력적인 상품들로 많은 유행을 만들어 내셨다면서요.”
“과찬이세요.”
“하하, 겸손하시군요. 제 딸아이도 밀크잼을 아주 좋아한답니다. 완전히 반했다고나 할까요.”
딸아이? 그 벨라도나 영애가? 클로에는 다과회에서 마주친 벨라도나 영애가 차를 무척 꺼려 했던 것을 떠올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후작이 빈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클로에는 후작이 빙빙 돌려가며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대강 알 것만 같았다. 사실, 아무런 연도 없는 남자가 자신에게 찾아올 이유라면야 그것밖에 없긴 했다.
“그러니까, 제가 부탁드리고자 하는 것은 그겁니다. 저희 벨라도나가에서 운영하는 베이커리와 커피 하우스에 트리플 스위트의 물건들을 공급받고 싶습니다. 밀크잼이며 장미잼, 그 외 많은 것들을 말이지요. 가능하겠지요?”
역시나. 클로에는 무감정한 눈으로 벨라도나 후작이 아까 땀을 닦은 손수건으로 손을 문지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사업이 상승세를 타면서 이러한 연유로 그녀를 찾아오거나 편지를 부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덕분에 이 세계에 온 뒤 처음으로 조금 바빠진 그녀였다.
제국 유일의 커피를 수입하는 상단의 최대 지분을 소유하고 있는 벨라도나 후작가는 자연스레 그를 이용한 사업도 여럿 꾸리고 있었다. 베이커리와 커피 하우스 등이 그것이었는데, 벨라도나 후작가는 수도를 포함한 제국 남부에서 제일 많은 커피 하우스를 소유하고 있는 가문이었다.
비록 그녀와 벨라도나 영애 사이에 악연이 있다고는 해도 어린애의 치기 어린 경거망동을 사업에까지 끌어들일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제법 공과 사가 확실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안타깝지만 그건 어려울 것 같네요.”
“네, 네?! 어째서입니까?”
“개인적으로 식품을 다루는 요식업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홍보도, 상품 기획력도 아닌 위생이라고 생각해요.”
유감스럽게도 그 많은 가게의 소유주인 벨라도나 후작은 위생 관념이 그렇게 철두철미한 사람이 아니었다.
클로에의 기준으로 보면, 숟가락이나 물컵에 얼룩이 보인다거나 주방 식기들이 오래되었는데도 교체하지 않는 등 까다롭게 살펴보면 불쾌감을 느낄 만한 부분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그의 가게들은 워낙 그 수가 많고 귀족들이 갈 만한 곳은 실상 몇 되지 않기 때문에 그다지 위생적으로 보이지 않는 가게임에도 잘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가 소유한 베이커리와 커피 하우스는 그 수가 많으니만큼 그와 거래를 튼다면 클로에에게도 분명히 큰 이득이 될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이상으로 ‘트리플 스위트’의 브랜드 가치를 걱정했다. 비록 자신의 관점에서지만 그런 비위생적인 가게들과 거래를 한다면, 만일 그 가게들의 관리 과실로 트리플 스위트의 밀크잼을 먹고 식중독에 걸리는 사람이라도 나온다면 그것은 큰 이미지 실추였다. 비록 아직 브랜드 가치라는 개념도 없는 제국이었지만, 여전히 현대적인 사고를 하는 클로에는 당장의 이득보다는 좀 더 장기적인 손익을 고려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벨라도나 후작이 식은땀을 흘렸다. 그는 당연히 클로에가 자신과 거래를 할 것이라고 믿었던 모양이었다.
“하, 하지만……! 공작부인, 저희 벨라도나 가와 거래를 하신다면 분명 큰 이득이…….”
“그런 것은 상관없어요. 저는 여태까지 단 한 번도 위생 문제가 일어날 만한 가게와는 거래를 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예정입니다.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찻잔 받침에 찻잔을 올려놓으며 클로에가 말했다.
“참, 하나 더. 사업적 거래를 하시려거든 앞으로는 필히 만남을 약속하는 편지를 보내도록 하세요.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이요.”
사적인 만남이라면 모를까 공적인 만남을 사전 약속도 없이 가지려고 하는 벨라도나 후작이 클로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그건……! 고, 공작부인께서는 여유 시간이 많으시리라 생각해서. 전 그저…….”
“저택 내부의 일을 담당하는 안주인이라고 한들 놀고먹기만 하는 것은 아니랍니다. 내사 관리 역시 없어서는 안 될 일 중의 하나예요. 더군다나 저는 내사뿐만 아니라 제 개인 사업 역시 돌보고 있고요.”
간혹 이런 사람이 있었다. 바깥일을 하지 않는 여성은 그저 남편이 가져온 돈으로 편히 놀고먹는다고 생각하는 부류들. 하지만 클로에는 내사 역시 경제활동만큼이나 중요하고 떳떳한 노동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대화는 이쯤이면 충분할 것 같네요. 후작께서도 바쁜 업무가 많으실 텐데, 이만 돌아가 주셨으면 합니다.”
단호한 축객령이었다. 벨라도나 후작은 여전히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얼굴이었지만, 그렇다고 집주인의 말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그는 풀죽은 모양새로 인사한 뒤 응접실을 떠났다.
며칠 뒤의 일이었다.
클로에는 편지를 한 통 받았다. 벨라도나 후작에게서 온 것이었는데, 자신 소유의 가게들의 위생 수준을 개선했으니 트리플 스위트와의 거래 문제를 다시 한 번 재고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만남의 장소와 시간은 전적으로 클로에의 의사에 따르겠다는 말 역시 끼어 있었다.
‘나름대로 절실한 모양이네. 우리 가게와 거래하기 위해 이렇게까지…….’
클로에는 그것이 반쯤은 부끄럽고 반쯤은 뿌듯했다.
클로에는 다시 한 번 그를 만나 보기로 했다.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장소와 시일을 적은 답장을 부쳤다.
당일, 클로에가 모처럼 나선 장소는 바로…….
“여기까지 와 주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바텐베르크 공작부인.”
이전의 만남 때보다 좀 더 정중해진 벨라도나 후작이 마차에서 내리는 클로에를 맞이했다. 그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서 내린 클로에가 시선을 들었다. 그녀의 눈앞에는 화려한 간판이 달린 커피 하우스가 있었다. 벨라도나 후작이 소유한 가게 중 하나였다.
클로에의 곁에서는 전속 하녀가 양산을 들어 뜨겁게 내리쬐는 여름 햇빛을 가려 주고 있었다. 클로에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보다는 가게 내부를 보고 싶네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자, 이쪽입니다.”
클로에는 거래처를 정하는 데에 까다로운 편이라, 거래할 가게에 모두 최소 한 번쯤은 방문해 보곤 했다. 오늘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눈으로 가게의 관리 상태에 대해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클로에가 커피 하우스에 들어가자 아니나 다를까 손님들의 시선이 확 쏠렸다. 커피 하우스의 방문객 중 여성은 드물기 때문이었는데, 특히나 일꾼이 아닌 아름답게 단장한 귀부인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눈에 띄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클로에는 곧장 부엌으로 향했다. 부엌은 오픈된 바 형태로 되어 있는 커피를 내리는 곳과 간단한 식사류와 간식을 만드는 작은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부엌에 들어선 클로에는 우선 식기와 조리 도구의 위생 상태를 확인했다. 전부 새것으로 바꾼 듯 깨끗했다. 선반이나 조리대 역시 손가락으로 쓸어 보았으나 먼지 한 톨 나오지 않았다.
위생에 신경을 쓰는 것이 정말 사실인 것 같았다.
“하하하, 훌륭하지 않습니까? 이 정도는 되어야 손님들께서 안심하고 식사를 하시겠지요. 암요!”
벨라도나 후작이 자랑스럽게 웃었다.
부엌에선 몇 명의 노동자들이 뜨거운 날씨에 땀 흘리며 일을 하고 있었다. 클로에는 그 모습을 유심히 보았다.
화장실을 포함해 가게 내부를 꼼꼼히 확인한 클로에는 마침내 커피 하우스의 밖으로 나왔다.
“어떻습니까?”
손수건으로 땀을 닦던 후작이 물었다. 조금 초조해 보이긴 하지만, 이번에야말로 클로에가 거래를 허락해 줄 것이라 거의 확신하는 눈치였다. 그가 눈을 빛내며 재촉했다.
“공작부인, 괜찮으시다면 거래를…….”
“음, 후작님의 가게를 더 볼 수 있을까요? 마치브라이드 거리에 있다는 베이커리가 좋을 것 같아요.”
클로에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벨라도나 후작이 당황스러운 얼굴을 했다.
“네? 아아, 네. 무, 물론 가능합니다만…….”
“이해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마치브라이드 거리로 갈까요?”
클로에는 타고 온 마차에 도로 탔다. 벨라도나 후작과 클로에를 태운 마차가 마치브라이드 거리로 달려갔다.
베이커리 역시 확인해 보았지만 조리실엔 먼지 한 톨 없었다. 특이점이라면 고양이가 있다는 것 정도였다.
“어머, 귀엽네요. 베이커리에서 키우는 고양이인가요?”
짧은 주황빛 털을 가진 고양이가 선반에 앉아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클로에는 동물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그녀가 즐거워하는 것을 보며 벨라도나 후작은 뿌듯하게 웃었다.
“아아, 네. 그렇습니다. 이 녀석이 쥐를 잡기엔 제격이랍니다. 저희와 거래하는 상단 소속 선장이 말하길 쥐잡이엔 고양이가 특효라기에 일찍이 데려왔었죠.”
“그랬군요.”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그렇게 벨라도나 후작의 가게를 두 군데 더 돌았다. 방문하는 가게는 전부 그녀가 지목해서 미리 준비한 상태가 아닌 평소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었고, 전부 비슷비슷한 상태였다.
“덕분에 오늘 잘 구경했어요. 안내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클로에가 친절하게 말했다. 벨라도나 후작은 기쁜 눈치였다. 드디어 하루 종일 돌아다닌 고생의 결실을 보는구나 싶은 얼굴이었다. 그는 벼르고 벼르던 말을 다시 한 번 꺼냈다.
“저야말로 감사하지요, 공작부인. 저, 그렇다면, 이번에야말로 저희와 거래를…….”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후작님과 거래를 하지는 못할 것 같아요.”
“네…… 네에?!”
후작이 입을 떡 벌렸다. 설마하니 이번에도 거절당할 줄은 추호도 몰랐던 눈치였다.
“어, 어, 어째섭니까! 트, 틀림없이 깨끗하지 않았습니까? 먼지 한 톨 없도록 관리했는데…….”
“네, 정말 깨끗하더라고요.”
클로에가 침착하게 말했다.
“가게는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벨라도나 후작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했다. 클로에는 그가 좀 안타까웠다. 그가 나름 노력을 했다는 사실은 보였던 것이다. 그것도, 오직 그녀와 거래를 하기 위해서.
“부엌에서 일하시는 분들 중 머릿수건을 하신 분이 한 분도 없더군요.”
“네? 머, 머릿수건이라고요?”
“네. 요리에 머리카락이 들어가지 않게 하기 위해선 머릿수건은 필수예요.”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제가 계속 지켜봤지만, 아무도 손을 씻지 않더군요. 화장실에도 변소만 있을 뿐 손을 씻을 만한 물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고요.”
“그, 그건…….”
벨라도나 후작은 완전히 허점을 찔린 듯한 얼굴을 했다. 클로에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21세기 현대에서 이런 것은 다섯 살배기도 알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설마 살다 살다 이런 걸 남에게 가르쳐야 할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하나 더. 쥐를 잡으시는 것은 좋지만 식품을 파는 곳에서 고양이는 안 돼요. 털도 빠지고 비위생적이에요.”
“하, 하지만 제가 아는 선장이 분명…….”
“일반 가정에서나 배에서는 쥐를 잡기 위해 고양이를 키울 수도 있지만 베이커리와 같은 식료품점에서는 다르죠. 차라리 쥐덫을 놓는 게 좋겠어요.”
벨라도나 후작의 어깨가 다시 추욱 늘어졌다. 이번에야말로 계약을 맺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에 빛나던 눈이 울상이 되었다.
측은함을 느끼면서 클로에가 말했다.
“부엌을 깨끗하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하는 사람들도 위생을 지키도록 해 주세요. 머릿수건과 앞치마는 필수에, 일할 때만 입는 깨끗한 옷을 준비해 주시고 손도 자주 씻도록 교육하세요. 베이커리에서 고양이는 키우지 마시고요.”
“아……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거래를 체결해 주시는 겁니까?”
벨라도나 후작이 물었다. 클로에가 빙긋 웃었다.
“네.”
다시 며칠 뒤의 일이다. 벨라도나 후작에게서 세 번째 만남을 부탁받은 클로에는 다시 한 번 그 소유의 가게들을 돌아보았다.
이번에는 만족스러웠다. 클로에, 그녀가 말한 모든 조건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쯤 되면 거절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클로에는 삼고초려를 받은 것처럼 왠지 미안하면서도 기뻤다.
무엇보다, 자신이 현대적 식품 위생을 전파했다는 것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클로에는 벨라도나 후작을 돌아보며 말했다.
“수고가 많으셨어요. 하지만 지금 당장 후작님의 모든 가게에 저희 가게의 상품을 공급하진 않겠어요. 후작님의 가게들이 위생적으로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고 이 상태가 완전히 확립되었음을 확신하기까지는 다소간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우선은 수도의 몇몇 가게에만 공급하도록 하고, 공급하는 가게를 차차 늘리는 것으로 해요.”
“알겠습니다, 공작부인.”
그것만으로도 기쁜지 벨라도나 후작이 안심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것으로 거래 체결이군요. 저희와 거래해 주셔서 무척 감사드립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아니에요, 저야말로 요구를 성의껏 들어주셔서 기뻐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클로에는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벨라도나 후작은 아내와 사별한 상태였는데, 이후 재혼을 하지 않아 그 딸이 대신 집안의 안주인 노릇을 하고 있었다. 벨라도나 영애가 사교 활동을 열심히 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어린 나이에 고생하는 것은 알겠지만, 친부도 알긴 알아야겠지.’
그렇게 생각한 클로에가 운을 띄웠다.
“실례가 안 된다면 댁의 따님, 벨라도나 영애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어요.”
클로에는 길게 이야기하지는 않고, 벨라도나 영애가 사교계에서 철이 없는 언행을 자주 보이므로 더 큰일이 나기 전에 주의를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사교계는 위험한 곳이었다. 암만 어리다 한들 경거망동해서야 나중에는 더 큰 대가를 치를 수도 있었다.
벨라도나 후작은…… 경악한 것 같았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엽고 예쁜 딸이 설마 사교계에서는 버르장머리 없이 굴고 다닐 줄 그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 그, 그런……. 추호도 몰랐습니다. 제 모자란 여식이 공작부인께 무례를 끼쳤다면 부디 저를 대신 벌해 주십시오. 제가 잘못 가르친 탓입니다.”
“아니, 아니에요. 아직 많이 어리고 미숙할 만하죠. 다만 후작님께서 영애에게 잘 주의를 주셨으면 좋겠어요.”
후작이 굽신거렸다. 클로에는 그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처음 봤을 때와는 많이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그녀가 일하는 방식을 보면서 후작이 그녀를 진심으로 존중하고 존경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새로운 거래를 체결한 뒤, 클로에는 기쁜 마음으로 저택으로 돌아왔다.
* * *
트리플 스위트를 운영하며 클로에는 제법 바빠졌다. 사업뿐만 아니라 사용인들과 저택의 내실을 관리하는 일 역시 그녀의 몫이었다.
특히나 트리플 스위트의 간판 메뉴인 밀크잼의 판매량이 점점 늘어나며 일꾼도 더 많이 고용해야만 했고, 신경 쓸 것과 관리할 것도 한없이 늘어나기만 했다.
피곤하긴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단순한 취미가 이렇게까지 발전한 것이 클로에는 신기하고 꿈만 같았다.
또 하나 즐거운 것이 있었다. 밀크잼 중 초콜릿 맛이나 바닐라 맛, 커피 맛 등은 익숙한 맛이기에 인기가 좋으리라 예상했지만, 생각 외로 얼 그레이 맛과 말차 맛의 수요도 좋았다.
클로에는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차를 즐기게 된 것이 기뻤다.
‘얼 그레이, 말차를 이용한 제품을 좀 더 개발하는 것이 좋겠어.’
그렇게 생각한 클로에는 간단한 요리부터 시작해 상품을 구상해 보았다. 이번에 만들어 낸 얼 그레이 쿠키와 말차 초콜릿은 그 일환이었다.
“진짜, 진짜 맛있어요, 마님!”
엘리가 손으로 자신의 양 뺨을 감쌌다. 거의 황홀경이었다. 쿠키 정도는 종종 먹었지만 버터가 적게 들어가 뻣뻣한 맛이 났다. 원재료를 수입해야만 하는 초콜릿은 그녀가 먹기에 비싼 식재료였다. 얼 그레이와 말차는 말할 것도 없다.
클로에는 새로운 상품을 우선적으로 저택 내부의 사람들에게 시험해 보았다. 반응은 무척 좋았다. 버터와 잘게 썬 홍차 잎을 듬뿍 넣은 쿠키와 생크림을 듬뿍 넣은 생초콜릿에 말차 가루를 묻혀 만든 초콜릿을 맛본 많은 사람들이 감탄한 것이다. 제국의 사람들에게는 낯선 맛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밀크잼으로 이미 한 번 확인된 바 있듯 차로 만든 간식은 의외로 굉장히 잘 먹혔다.
엘리의 반응에 클로에가 부드럽게 웃었다.
“아까 부엌 하녀들도 그 말을 했어.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구나.”
쿠키와 초콜릿을 열심히 만든 부엌 하녀들에게 자신들이 만든 것을 먹어도 된다고 했을 때 그들은 거의 믿을 수 없어 했다. 부엌 하녀들은 늘 만들기만 했지 그 비싼 요리를 직접 먹어 본 적은 드물었던 것이다.
그들은 과자를 맛있게 먹어 주면서도, 클로에가 개발한 레시피의 보완점을 찾아 주기도 해 무척이나 큰 도움이 되었다.
클로에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시험을 위해 간식을 나누어 주고 다니면서 저택 내 사용인들의 그녀에 대한 호감과 충성심도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일전의 생일 연회 이후로 새로 들어온 사용인들이나, 이전부터 있던 사용인들이나 모두 마찬가지였다.
한편, 이 상황을 기쁘게만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알폰스였다.
클로에가 일을 시작하면서 그들은 사업에 대한 논의를 이유로 함께 있는 일이 빈번해졌다. 클로에가 집무실에 찾아가기도 하고, 알폰스가 클로에의 침실에 찾아가기도 했는데, 과거 그들이 만나는 시간이 저녁 식사 때뿐이었던 시기를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클로에는 알폰스와 많이 친해졌다는 생각에 마음껏 좋아할 수 있었지만 알폰스는 그렇지 못했다.
“부인.”
클로에는 입을 가리고 하품을 하던 자세로 굳어 알폰스를 돌아보았다. 그녀가 자세와 표정을 바로 하고 그를 보았다. 알폰스의 미간에 가는 금이 갔다.
“잠은 잘 주무십니까?”
“네? 물론이죠.”
클로에가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 하지만 알폰스는 그 대답을 믿지 않았다.
그녀가 집무실에 온 지 고작 50분이 지났을 뿐이지만 그동안 클로에는 하품을 총 7번 했다. 굳이 눈치가 좋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알폰스의 눈빛이 곱지 않았다. 그가 물고 있던 시가를 내려놓고 클로에를 보았다.
“많이 피곤해 보이십니다. 휴식을 충분히 취하지 않으시는 게 아닙니까.”
“으음, 아니에요. 어젯밤에도 충분히 잤는데…….”
클로에는 왠지 나쁜 짓을 하고 선생님 앞에 선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 들었다.
사실 그랬다. 취침에 드는 시간부터가 이전에 비해 확연히 줄어들었을뿐더러, 요즘 따라 눕는다고 해도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몸이 지쳐 있으면 잠이 곤하게 잘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반대였다. 마치 몸이 급격하게 쌓이기 시작한 피로에 시위라도 하듯, 피곤하긴 피곤한데 도저히 잠이 쉽게 들지 않는 밤이 반복됐다. 그런 식이니 기껏 침대에 누워도 몇 시간을 뒤척거리다가 간신히 눈을 붙이더라도 누적된 피로가 풀리기도 전에 일어나야만 했다.
그런 클로에를 지켜보는 알폰스는 기분이 탐탁잖았다.
이럴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일이 늘어나면, 그만큼 그녀가 소진되는 것도 당연했다.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그리고 알폰스는 그런 것을 원치 않았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저택에 박혀서, 그녀가 좋아하는 차나 우리면서 살았으면 좋겠다. 외출도 가급적 자제하고, 오로지 그에게만 관심과 마음을 쏟으면서.
누구보다 앞서가서 판을 벌여줄 때는 언제고 그는 이제 와서 이런 앞뒤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클로에의 사업을 키우고, 멋들어진 가게를 선물하면서 그녀가 기뻐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좋았지만 막상 클로에가 열심히 일에 골몰하기 시작하니 별로 좋지 않았던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가게를 선물하지 말 것을.’
뒤늦은 후회를 했지만 의미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만일 그가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지금과 다른 선택을 했을 것 같진 않았다. 클로에가 뺨을 붉게 물들이고 기뻐할 것을 알고 있는데 자신이 그 모습을 다시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것 같지가 않았다.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한 뒤, 알폰스가 말했다.
“부인, 일이 힘들다면 가게를 대신 운영해 줄 사람을 찾는 것도 좋습니다. 제가 돕겠습니다.”
“아니에요. 제가 하고 싶어요. 정말 즐거운걸요.”
클로에가 단호하게 말했다. 알폰스는 골치가 아팠다. 이 여자는 한 팔에 안길 정도로 가녀리고 마음도 한없이 무르고 여린데, 가끔은 이렇게 고집이 있었다.
고집이 있고 한 번 결정한 것을 잘 바꾸지 않는 것은 알폰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의 사전에는 협상이나 흥정이 없었다. 칼 같은 성격도 성격일뿐더러, 그가 명령하면 남들은 군말 없이 따라야 할 정도의 권력도 있었다. 그러나 이 작고 무른 여자 앞에서는,
“……그렇다면 적어도 오늘은 그만하고 쉬십시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물러나고 절충하게 된다.
클로에는 고민을 해 보는 듯 눈을 굴렸다.
“으음, 그건…….”
하지만 알폰스도 여기까지가 물러나 줄 수 있는 한계였다. 그에게도 더 이상은 협상의 여지가 없었다.
알폰스는 대답을 듣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클로에에게로 다가와 그녀를 안아 들었다.
“꺄악!”
갑작스레 몸이 끌려 올라가는 기분에 클로에가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등과 허벅지를 받쳐 든 알폰스는 아주 잠시 어디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 이대로 그녀의 침실까지 가는 것도 나쁘지 않았지만 가능하다면 일을 마저 하면서도 그녀가 쉬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었다. 그래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아, 알폰스!”
알폰스가 걷기 시작하자 놀란 클로에가 그를 불렀다. 그가 자신을 어디로 데려가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알폰스는 그녀를 흘끗 보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집무실 한쪽의 소파에 클로에를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클로에가 채 상황 파악을 하기도 전에 소파 등받이 부분을 접어 납작하게 만들었다. 일을 하던 도중 편히 쉴 수 있도록 침대로도 소파로도 쓸 수 있게 설계된 일종의 소파베드였다.
클로에는 자신의 곁에 알폰스가 눕는 것을 보았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언제나 혼자서 잠들었다. 이렇게 누운 상태로 곁에서 타인의 체온을 느끼는 것은 여전히 어색하기만 했다.
……클로에는 자신의 심장이 세차게 뛰는 이유를 그렇게 정의했다.
그녀가 놀란 토끼 눈으로 알폰스를 보았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 왠지 모를 만족감을 느끼며, 알폰스는 충동적으로 그 뺨을 매만졌다. 그의 입꼬리가 보일 듯 말 듯한 호선을 그렸다.
“편히 쉬십시오. 주무셔도 좋습니다.”
그러면서 잠드는 모습을 구경이라도 하겠다는 양 이쪽을 향해 따뜻한 눈길을 보냈다.
클로에는…… 부담스러워서 잘 수가 없었다.
눈을 감아도, 떠도 상대의 시선이 느껴졌다. 실체 없는 눈빛이 바늘이 되어 콕콕 찌르는 것만 같았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그와 이렇게 나란히 누워 있자니 떠올려선 안 될 이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단 한 번뿐이지만 그와 보냈던 열락의 시간. 땀으로 조금 젖어 있는 살과 살이 맞닿아 있는 촉감. 등줄기를 따라 전기처럼 오르던 감각. 덮쳐오는 피곤함과 수마에 몸을 맡길 때의 만족감. 함께 잠들어 눈을 떴던 다음 날 아침 같은 것.
그때를 생각만 해도 아랫배가 저릿저릿했다. 클로에는 자신이 드디어 미쳤나 보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원래 성욕이 특출한 편은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오히려 적은 쪽이었다. 옛 남자 친구들이 한 번만 하자고 매달릴 때마다 그녀는 늘 마지못해 응하고는 했다. 간혹 남자 친구와의 성 경험에 대해 즐거운 듯이 털어놓던 친구들을 상대로 언제나 할 말이 없었다.
그랬던 자신이었는데. 클로에는 죄스러워 알폰스의 눈을 바라보지 못할 정도였다.
‘이건 다 알폰스가 너무 잘생겼기 때문이야.’
클로에는 마음속으로 변명거리를 주워섬겼다. 사실 알폰스의 성적 매력이 일반적인 남성에 비해 월등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었으므로 아주 틀린 말은 아닐 것이었다.
“모, 못 자겠어요.”
클로에가 가까스로 말했다. 알폰스가 진심으로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어째서입니까.”
“절 보고 계시잖아요. 시선 때문에 못 자겠어요.”
클로에는 이렇게 말하면 알폰스가 일어나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이 떠올리고 있는 정사의 기억을, 뱃속에서 튀어나올 정도로 쿵쾅대는 심장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가까이 붙어 있는 것보단 멀리 떨어져 있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그러나 알폰스는 그녀의 기대에 응해 주지 않았다.
“……!”
단단한 팔이 클로에의 허리를 감아 끌어당겼다. 클로에가 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깨닫기도 전에, 높지 않은 체온과 단단히 밀착되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달은 순간, 클로에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알폰스가 자신을 꽈악 끌어안은 것이다.
“아, 알폰스……!”
그녀가 놀라 말했다. 심장이 두방망이질 쳤다. 그러나 알폰스는 태연했다.
“이렇게 하면 주무실 수 있겠지요.”
말인즉슨 끌어안아 시선이 닿지 않으니 잘 수 있을 거라는 뜻이었다. 클로에는 기가 막혔다. 어쩜 저렇게 자기 맘대로 생각한담!
클로에는 낯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모깃소리처럼 말했다.
“놔주세요.”
알폰스는 그 목소리에 진심이 실려 있지 않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사실 다섯 살짜리 어린애라도 알 수 있을 것이었다. 그의 낮고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클로에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알폰스의 큰 손이 그녀의 등을 쓸었다. 클로에는 묘한 느낌에 파르르 떨었지만 곧 익숙해졌다. 긴장을 풀라는 듯이 몇 번이나 등을 쓸어내리는 큰 손의 촉감에 줄곧 긴장하고 있던 몸에서 힘이 빠졌다.
따뜻하고 단단한 품속에서 클로에는 일부러 잊고 있던 노곤함과 피곤함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최근 며칠간 이어지던 불면 증상은 꿈이었다는 양 수마가 몰려왔다. 이렇게 아늑한 상태라면, 몇 시간이고 잘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클로에의 호흡이 고르게 되고 그녀가 잠이 들었다는 확신이 들자 알폰스는 등을 쓸어내리던 손길을 멈추었다.
이제 그만 일어나 남은 업무를 보아야 한다. 하지만, 일어나려고 해도 클로에를 깨우지 않고 일어날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사실은 그다지 일어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이, 자신의 품 안에 안겨 있는 작고 가녀린 체온이 만족스러웠다. 가능하다면 언제까지나 닿은 채로 있었으면 했다.
얕은 한숨과 함께, 알폰스가 혼잣말을 했다.
“오늘 일하기는 글렀군.”
* * *
알폰스 덕분에 행복한 단잠을 자긴 했지만 매일 그럴 수는 없었다. 사실 알폰스는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클로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하루 쉰 만큼 다음 날 더 많이 일했다.
“마님, 몸을 아끼세요. 안 그래도 몸이 약하시잖아요.”
어느 날은 그녀의 직속 시녀 중 한 명인 조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전임자들이 쫓겨난 뒤 새로 들어온 사용인들 중 한 명이었다.)
그녀의 걱정은 충분히 근거 있는 걱정이었다. 하지만, 클로에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이렇게 대답했다.
“걱정 고맙구나, 조앤. 나는 충분히 쉬고 있단다.”
신제품의 테스트도 할 겸, 친분이 생긴 사람들에게 선물을 하기 위해 새로 구운 과자와 밀크잼을 포장한 클로에는 전속 하녀들을 대동하고 기사단으로 향했다. 기사 삼총사에게도 한 꾸러미씩 나누어 주고, 다음으로 단장실로 향한 그녀는 하녀들을 잠시 복도에서 대기시키고 노크를 하고 들어갔다.
“공작부인께서 여긴 어쩐 일로.”
발롱도르의 반가움 담긴 인사에 클로에가 수줍게 웃었다.
“늘 감사하다는 뜻에서 약소하지만 먹을 걸 조금 가져왔어요. 입맛에 맞으신다면 좋겠네요.”
“수제품이군요. 영광입니다.”
발롱도르는 그녀의 선물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내심 그녀의 마음 씀씀이와 섬세함에 감탄하는 것도 빼먹지 않았다.
선물을 전달하고, 간단한 담소를 나눈 뒤 클로에는 오래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순간 세상이 빙그르르 돌았던 것이다.
“……!”
그녀는 눈에 띄게 휘청하다가 발롱도르의 책상을 붙잡아 겨우 몸을 지탱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당연히도 발롱도르는 깜짝 놀랐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가 클로에를 부축했다.
“부인! 괜찮으십니까?”
“아, 괜찮아요. 잠시 빈혈이 왔나 봐요.”
천천히 두통이 가시고 눈앞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앉아 있다가 갑자기 일어서면 머리가 어지러운 정도의 증상은 흔한 일이다. 그렇게 생각한 클로에는 대수롭잖게 말했다.
발롱도르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눈앞에서 사람이 화살에 맞거나 칼에 뎅겅 썰려 나가는 장면도 수없이 본 백전노장치고는 좀 과한 반응이었지만, 그럴 정도로 그의 눈앞에 서 있는 여자는 위태로울 정도로 가녀렸다. 원래도 마르고 가녀리긴 했지만 최근엔 더 그렇게 된 것 같았다.
게다가……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부하들을 쳇바퀴처럼 굴려 공포의 대상이 된 그답지 않게, 발롱도르는 클로에를 걱정했다.
“부인, 아무래도 체력이 허해지신 것 같습니다. 꼭 의사를 찾아가 보십시오.”
“걱정 감사해요.”
두 사람은 예의 있는 작별 인사를 했다. 클로에가 돌아간 뒤, 발롱도르는 다시 자리에 앉으며 생각했다.
‘공작부인께서 오늘 방문하셨다는 사실을 공작 각하께 보고해야 하나?’
발롱도르는 그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다른 것보다 방금 클로에가 휘청거린 일이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오래지 않아 혼자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각하께서 좋아하실 리가 없지.’
일전에만 해도 클로에가 기사단에 찾아와 모든 기사들을 만나기까지 했지만 보고하지 않았다. 알폰스가 클로에에 대한 사소한 것은 보고하지 말라고 했던 것을 발롱도르는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사실 방금 공작부인이 휘청했던 일도 엄밀히 말하자면 극히 사소한 것이었다. 젊은 여성들이 종종 빈혈을 일으키곤 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가녀린 체형을 유지하기 위한 식단 조절과 코르셋 때문에 제국의 젊은 귀족 여인들에게 현기증 정도는 일상이었다. 심지어 코르셋을 지나치게 조인 경우, 호흡이 어려워 기절하는 경우도 있었다.
발롱도르는 자신이 지나친 걱정을 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늙고 나니 기우만 늘어나는군.’
그렇게 생각하며 발롱도르는 공작부인이 오기 전 하고 있던 일을 다시 꺼냈다. 하지만, 오랜 전장에서의 경험으로 날카롭게 다듬어진 그의 직감은 자꾸만 마음속 어딘가를 불편하게 했다.
기사단에 다녀온 지 사흘 뒤, 아침에 눈을 뜬 클로에는 자기 몸이 자기 몸 같지가 않다고 생각했다. 온몸의 관절이 녹슨 경첩처럼 삐그덕거리는 것만 같았다.
‘정말 피곤하긴 하네. 의사를 불러야 할까 봐.’
여느 때와 같이 만족스럽지 않은 잠이었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는 그녀에게 전속 하녀들이 때맞춰 찾아왔다. 단장을 도와주려는 것이었다.
부산을 떠는 하녀들에게 떠밀려 단장을 시작한 클로에는 생각했다. 오늘 낮에는 할 일이 많았다. 가게도 둘러보고, 신제품을 만들 재료를 찾으러 식재료 상에 가야 했다. 남는 시간은 저녁을 먹은 뒤였다.
‘저녁을 먹고 샨탈을 부르자.’
그렇게 결론을 지은 그녀는 뺨에 분칠을 해 주는 하녀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 * *
하루 종일 부지런을 떤 보람이 있게도 클로에는 저녁 식사 시간에 딱 맞추어 늦지 않게 도착했다. 자리에는 이미 알폰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미안해요, 많이 기다렸어요?”
“아닙니다.”
반가움과 미안함을 동시에 느끼며 클로에가 자리에 앉았다.
곧 식사가 날라져 왔다. 클로에는 하루 종일 부지런하게 뛰어다녔는데도 이상하게 배가 고프지 않았다. 안 그래도 배가 고프지 않은데, 머리마저 지끈지끈 아파서 더더욱 입맛이 없었다. 결국 모처럼 나온 구운 메추라기 요리를 깨작거리다 사분지 삼이나 남기고야 말았다.
알폰스는 그녀가 평소 같지 않음을 눈치챘다. 평소 클로에는 메추라기 요리를 잘 먹었으므로 입맛에 맞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식사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은 둘째치고 안색이 너무나 안 좋았다.
그 사실을 깨달은 그는 식기를 테이블에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그를 클로에는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 알폰스…….”
“괜찮으신 겁니까?”
알폰스가 굳은 얼굴로 물었다. 클로에는 언제나처럼 ‘괜찮아요.’라고 대답하고 싶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거짓말을 하기에는 알폰스의 얼굴이 너무나 심각했던 것이다.
그는 긴 손가락으로 클로에의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이 드러났다. 알폰스는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제 눈에는 조금도 괜찮아 보이지 않습니다만.”
“아, 알폰스. 저는…….”
클로에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런 변명도 할 수 없었다. 일어나는 순간 세상이 다시 한 번 핑그르르 돌았던 것이다. 돌과 돌 사이에 머리를 넣고 짓누르는 듯 아팠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깨질 듯한 통증 속에서 클로에는 자신의 시야가 돌연 시커먼 어둠 속으로 추락하는 것을 느꼈다. 분명 바로 앞에 서 있을 알폰스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크게 휘청하는 몸을 알폰스가 붙잡아 안았다.
“부인!”
가녀린 몸이 축 늘어졌다. 알폰스가 다급히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정신을 잃은 클로에의 낯빛엔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알폰스는 눈을 부릅떴다. 손이 떨렸지만 그녀를 떨어뜨리지 않도록 단단히 안고 있었다. 그가 물러나 있던 집사를 향해 말했다.
“키엘, 의사를 데려와.”
“이미 사람을 보냈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하지만 그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가 인지할 수 있는 것이라곤 클로에의 끊어질 듯 가녀린 숨소리뿐이었다.
* * *
바텐베르크 공작가의 안주인이 쓰러졌다.
저택 안은 발칵 뒤집혔다. 당장 달려온 공작가의 상주 의사 샨탈은 그녀의 증상을 과로로 인한 기력 쇠진으로 진단했다.
침대에 누인 클로에의 낯빛은 그림자 하나 없을 정도로 창백했다. 열이 끓고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다. 의사는 최선을 다해 그녀의 열을 식히고 입에 약과 브랜디를 흘려 넣었지만 차도는 없었다.
“눈을 뜨시려면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샨탈이 설명했다.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해요. 이 정도로 악화되었다면 며칠 전부터 증상이 있었을 텐데요. 며칠만이라도 일찍 알아내어 공작부인을 쉬게 해 드렸더라면 이렇게까지 되시지는 않았을 거예요.”
알폰스는 눈앞이 아찔했다. 그는 클로에의 전속 하녀들과 시녀를 꾸짖었다.
“주인마님을 가까이서 보필해야 할 너희들이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단 말이냐? 너희에겐 직무 유기의 벌이 있을 테니 기다리고 있도록.”
“저, 정말로 죄송합니다, 각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하녀들이 머리를 조아렸지만 알폰스의 혼란과 갈 곳 없는 분노는 사라지지 않았다.
진정 잘못한 것은 자신이다. 요 며칠간 클로에를 지나치게 홀로 두었다. 하필 영지에 일이 생긴 탓에 바빴던 것이다.
아니, 그것조차 변명이다. 알폰스는 자신의 변명을 인정하지 않았다. 아내를 혼자 두어서는 안 되었다. 안 그래도 그녀가 피곤해하고 충분한 휴식을 취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며칠 전에 발견했지 않았던가. 그때 이후론 잘 휴식을 취하고 있겠거니 마음을 놓았던 것이 잘못이다.
그때였다. 클로에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자가 있었다.
“단장.”
알폰스의 무겁게 내리 찌르는 눈빛이 발롱도르를 향했다. 어떠한 일에도 침착함과 냉정함을 잃지 않는다는 점에서 발롱도르 단장과 기사단의 주인, 알폰스는 닮은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 모두 오늘만은 강한 동요를 낯에서 지우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닮았다.
침통한 그림자를 주름진 얼굴에 드리운 발롱도르가 보고했다.
“송구합니다. 사흘 전 공작부인께서 병증에 대한 징후를 보이셨으나 보고 드리지 않았습니다.”
순간 알폰스의 눈에 희번득한 노기가 돌았다. 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름끼칠 정도로 차가운 분노가 뚝뚝 떨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그가 씹어뱉듯 말했다.
“그게 정말인가? 왜 진작 보고하지 않았지?”
발롱도르가 고개를 숙였다.
“각하께서 공작부인에 대한 사소한 것은 보고하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알폰스의 뇌리를 강한 깨달음이 치고 지나갔다.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클로에는 그의 머릿속에 항상 존재했다. 이제는 그녀가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 것이 너무나 당연해서, 마치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