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장 (9/39)

9장

제국의 귀족저 내 사용인들 사이에서 부엌 하녀들의 영향력은 적지 않은 편이었다. 저택의 구성원 중 어느 하나도 부엌 하녀들의 신세를 지지 않는 자가 없었으니까. 밥을 먹지 않는 인간은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안 그래도 콜린 부인의 처벌 소식을 듣고 두려움과 죄책감을 느끼고 있던 사용인들은 부엌 하녀들의 강력한 주장에 크게 동요했다.

부엌 하녀들의 도움에 힘입어, 공작저 사용인들 사이에서는 반성론이 대세로 떠올랐다.

사용인들 중 많은 수가 클로에에게 개인적으로 사죄를 드리거나 자청해 벌을 받았다. 개중 클로에가 용서할 수 없었던 몇몇 정도가 심했던 자들은 해고되거나 큰 벌을 받기도 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돌아가는데 하녀장과 시종장이 인사권을 그대로 쥐고 있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이미 저택 내 인심은 완전히 클로에를 향해 돌아섰다. 하녀장과 시종장은 자처해서 인사권과 사용인 관리 감독권을 클로에에게 넘겼다.

그리하여 클로에는 마침내 이전의 클로에가 빼앗겼던 예산 관리권과 사용인 인사권을 전부 되찾게 되었다.

자신의 시녀와 전속 하녀들을 비롯해 해고한 사용인들의 빈자리를 채우는 것은 그녀의 몫이었다. 클로에는 채용 희망자들 사이에서 자신에게 충실할 만하고 성실한 이들을 골라 채용했다.

공작가 역사상에도 남을 법한 이 대사건을 통해 저택 내의 분위기는 완전히 쇄신되었고, 단 한 명의 사용인도 클로에를 거스르거나 그녀를 얕보지 못했다.

* * *

“저와 함께 외출이요?”

차를 마시려던 클로에는 찻잔을 도로 입술에서 떼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의 맞은편에 앉은 알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큰일을 겪으시지 않았습니까. 휴식을 가지는 차원에서.”

언제나와 같이 클로에의 티룸에서 차를 마시던 와중이었다.

알폰스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대해 클로에는 곰곰이 고민해 보았다. 굳이 말하자면 그녀는 집순이에 가까웠다. 집 안에 틀어박혀 차를 마시는 것을 제일 선호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가끔은 새로운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저이와 외출을 한 적이 별로 없네.’

무도회나 행사 등에 참석한 일을 빼고는 함께 다구를 사러 간 일이 전부였다. 기왕 부부인데, 그건 너무하지 않은가. 좀 더 함께 즐거운 추억을 만들어 놓는 것이 좋을 것이다.

게다가, 저번에 모건의 부티크 숍에 간 것을 제외하곤 너무나 오래 공작저에서 나가지 않았다. 이러다간 몸에서 곰팡이가 슬 것만 같았다.

클로에는 알폰스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다음 날 오후, 그들은 마차를 타고 시내에 나갔다. 공작가의 문장이 달린 마차에 타면 너무 눈에 띈다는 클로에의 주장에 의해 삯 마차를 탔다.

첫 번째로 그들이 간 곳은 극장이었다. 지난 저녁 클로에가 연극이 보고 싶다는 말을 했던 것이다.

그들은 알폰스가 키엘을 통해 미리 예약해 둔 VIP석으로 안내되었다. 이 세계의 극장은 평민들의 자리와 귀족 및 부유층의 좌석, VIP석으로 나뉘어 있었다. 평민들의 자리는 1층의 평면적인 바닥으로 좌석 없이 서서 연극을 감상하는 입석이었고, 귀족들의 좌석은 2층, 3층에 자리하고 있었으며 VIP석은 2층, 3층에서 돌출되게 설계된 일종의 특별실에 가까웠다. 이곳에서 VIP 고객들은 자신의 방처럼 편히 자리하여 연극을 볼 수 있었고, 극장 직원들에 의해 끊임없이 음료와 간단한 간식이 제공되었다.

VIP석에 들어서자마자 클로에는 난간에 기대어 밖을 내다보았다. 이곳은 무대가 훤히 들여다보여서, 여기서 연극을 관람한다면 정말 생생하고 즐거울 것 같았다.

“정말 기대돼요!”

클로에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알폰스의 입꼬리가 보일 듯 안 보일 듯 미미하게 올라갔다.

사실 그는 연극에 관심이 없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예술 전반에 관심이 없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았다.

물론 흔히 말하는 ‘고급 예술’은 귀족들의 기본 교양이기 때문에 충분히 배워 두었지만, 이론적 지식을 알고 있을 뿐이고 그것들에 진심 어린 관심을 가지고 있진 않았다.

오랜 시간 배워 온 것들 역시 그럴진대 오늘 그들이 보러 온 풍속적인 연극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이 연극은 하필이면 눈물을 짜내는 장면으로 가득한 최루성 신파극이었다. 그의 취향과는 끔찍할 정도로 대척점에 있었다.

하필, 클로에가 그런 것을 좋아하는 것이 문제지만.

알폰스는 생각하고 있었다. 연극이 이어지는 4시간 동안, 그냥, 죽은 듯이 있자고.

공작 부부는 좌석에 앉았다. 오래 지나지 않아 무대의 막이 오르고, 연극이 시작되었다. 클로에는 눈을 빛내며 곧장 무대에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알폰스는 그녀의 좋아하는 것에 대한 열렬한 열정과 집중력을 높이 샀으나 오늘만은 아니었다. 이렇게 지루한 공연에 어떻게 저렇게까지 집중할 수 있는지 나쁜 의미로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다만 재미있는 점이 딱 하나 있기는 했다. 연극의 내용이 아니라 클로에의 반응이었다. 알폰스가 보기에 이 연극의 구성은 꽤 단순해서, 장면마다 작가의 의도가 이해가 될 정도였다. 예컨대 농담이 나오면 웃으라는 것이었고, 주인공이 위기에 처하면 긴장하라는 것이었고, 애절한 배경 음악과 함께 주인공과 연인이 잠시 헤어지는 장면이 나오면 울라는 것이었다.

작가의 의도를 머리로는 알 수 있지만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알폰스는 클로에를 보았다. 그녀는 놀랄 정도로, 작가의 의도대로 반응하고 있었다. 농담이 나오면 웃었고 주인공이 위기에 처하면 주먹을 꼭 쥐었고 주인공과 연인이 헤어지자 눈물을 뚝뚝 흘렸다.

‘저것도 나름대로 재능인가.’

결국 연극이 아니라 클로에의 반응을 보는 것에서 더 흥미를 느낀 알폰스가 그녀의 얼굴을 보며 시간을 죽이고 있을 때였다.

1막과 2막이 끝나고 두 번째 휴식 시간이 돌아왔다. 마카롱을 먹고 있는 클로에에게 알폰스가 물었다.

“이런 게 재미있습니까?”

클로에가 놀라 그를 보았다. 알폰스는 언제나와 같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비꼬려는 것이나 그녀에게 시비를 걸기 위한 것이 아닌, 정말로 궁금해서 묻는 질문이었다. 그와의 짧지 않은 한 지붕 생활을 통해 클로에는 그 사실을 알았다. 그 질문이 알폰스의 어떤 부분, 어떤 사고방식에서 비롯했는지도 알았다.

‘연극을 안 좋아하는구나.’

클로에는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연극을 보고 싶다고 하자 바로 극장에 예약을 했던 알폰스를 보고 막연히 그도 공연을 좋아하는구나 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그녀를 많이 배려해 준 것이었다.

클로에는 고마우면서도 미안해졌다. 그녀가 생긋 웃었다.

“네, 간접 체험을 할 수 있잖아요. 이 시간만은 다른 사람이 되어 볼 수 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클로에는 하얀 손을 내밀어 남편의 손을 잡았다. 크고 체온이 높지 않은, 아름다운 손.

“저와 전혀 다른 타인의 감정을 하나가 된 듯 느끼는 것, 그게 정말 재미있어요. 저는 예술이란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

“알폰스, 이번 한 번만 집중해서 봐 줄래요? 다음에 또 연극 보자는 얘기 안 할게요.”

감정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라. 솔직히 말해 그에게 와 닿는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신선한 해석이었다. 그가 받았던 예술에 대한 오랜 교양 교육에서는 어디에서도 그런 해석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이 여자는 사랑스럽게 웃고 있었다. 그 빛나는 얼굴에 금이 가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알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극의 3장이 시작되었다. 알폰스는 클로에의 말대로 다시 한 번 연극에 집중해 보기로 했다.

그러나 역시나였다. 주인공이 어째서 울고, 어째서 화내는지 알폰스는 이해하지 못했다.

하다못해 로맨스 신이 나와도 마찬가지였다.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이루어져서는 안 될 사랑을 절절히 고백하는 장면에서 클로에는 눈물을 흘렸지만 알폰스의 가슴은 싸늘할 뿐이었다.

4장이 시작되었다.

알폰스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한숨을 쉬었다. 그의 목울대가 일순 도드라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의미 없는 일이었다. 이대로라면 그냥 클로에의 반응을 구경하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오, 한 떨기 꽃 같은 나의 조세핀. 당신이 다칠 바엔 차라리 내가 다쳤더라면 좋았을 텐데…….”

악당의 습격을 받고 부상을 입은 여자 주인공의 곁에서 남자 주인공이 흐느꼈다.

‘자신의 안위보다 타인의 안위를 우선시하다니, 비이성적이군.’

알폰스는 차마 입으로는 내뱉을 수 없는 초 치는 말을 머릿속에서만 중얼거렸다.

그가 본디 결혼 상대를 구할 때 후사를 낳을 능력을 제외하고 제일 우선시했던 것이 ‘그를 사랑하지 말 것’이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숱한 연극과 풍속적인 소설들은 사랑을 아름다운 것으로 미화하고 있지만 그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결국 누구에게도 이롭지 않았다. 사랑은 이성을 마비시키고 지성을 흐린다. 만일 시인들이 노래하듯, 배우들이 읊조리듯 사랑이 이런 것이라면 그는 그것과는 평생 연이 없으리라.

알폰스는 생각을 멈추었다. 무대 위의 배우 두 사람이 키스를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기나긴 연극의 첫 키스 신이었다. 물론 그가 타인끼리의 입술 접촉에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관심 끝에는 클로에가 있었다.

뺨을 붉게 물들인 클로에가 침을 삼켰다. 배우들의 입맞춤은 생각보다 농밀하고 길었다. 아니면 그녀에게만 그렇게 느껴졌던 것일지도 몰랐다.

드라마도, 영화도 딱 남들 보는 만큼은 봤던 그녀가 키스 신을 처음 봐서 이러는 것은 아니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키스보다도 더 진한 애정 행각을 담은 영화도 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왜…… 그저 입맞춤일 뿐인데 이렇게 낯 뜨겁고, 곁에 있는 사람을 의식하게 되는지. 그녀는 가는 손을 꼭 쥐었다.

……그녀는 여태까지 알폰스와 딱 한 번 입을 맞췄다. 지난번 후사를 만들던 밤에.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랫배가 찌르르 울리고 온몸의 힘이 풀리는 것만 같다. 알폰스는 그때를 기억하고 있을까.

알폰스는 뺨을 붉히고 힐끔힐끔 자신의 눈치를 보는 클로에를 보았다. 그녀의 꼭 쥔 손과 앙다문 입술까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를 의식하고 있는지가 눈치 빠른 알폰스 그에게는 오늘 아침 신문에 특집 기사로 나기라도 한 듯 명확히 보였다.

그의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연극이 시작된 뒤로 그가 처음으로 보이는 웃음이었다. 남의 키스에는 관심 없지만 자신의 아내와 한 키스까지 관심 없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연지를 곱게 바른 클로에의 입술이 사랑스러웠다. 알폰스는 아내의 한 줌밖에 되지 않는 허리를 팔로 둘러 끌어당겼다. 그는 클로에가 채 자신의 이름을 부를 시간조차 주지 않고, 자신의 입술로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키스는 길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알폰스가 자신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무는 것을 느낀 클로에는 반쯤 나갔던 넋이 돌아왔다. 그녀는 새빨개진 얼굴로 항의했다.

“아…… 알폰스! 무슨 짓이에요?”

“무엇이 말입니까.”

그러나 돌아온 상대의 침착하고도 차분한 반응에 클로에는 더 어이가 없었다. 그녀가 힘을 주어 속삭였다.

“공공장소잖아요!”

그 모습이 꼭 고양이에게 덤비는 병아리 같다. 그렇게 생각한 알폰스의 눈꼬리가 보일 듯 말 듯 휘어졌다. 그는 아내의 허리를 더욱 끌어당기며 귓가에 속삭였다.

“아무도 보지 않습니다, 부인. 그러기 위한 특별석이 아닙니까.”

그 낮은 울림이 귀에 닿는 감각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묘했다. 귓속말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왠지 아랫배가 찌르르 울리는 것만 같았다.

“그, 그렇지만……. 으! 알폰스, 잠깐!”

알폰스가 클로에의 뜨겁게 달아오른 귀 위쪽을 깨물곤 입 맞추었다. 불에 데기라도 한 것처럼 놀란 클로에는 가까스로 그가 가만히 있어야만 하는 이유를 쥐어짜 냈다.

“알폰스, 연극에 집중하기로 했잖아요!”

“집중하고 있습니다.”

“네?”

무대 위에서는 마침내 남자 주인공의 악역에 대한 복수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연극의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중요한 장면이었다.

주인공들의 어떠한 감정도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단 하나, 그가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이 있었다. 키스의 짜릿함과 즐거움이었다.

클로에는 ‘자신과 전혀 다른 타인의 감정을 하나가 된 듯 느끼는 것’이 재미있다고 했던가. 다른 것은 몰라도 하나 정도는 분명히 느꼈으니 나름대로 성공적이었다.

“재미있습니다, 연극.”

“네에?”

“재미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알폰스는 클로에의 목덜미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의 입술이 훑고 지나갈 때마다 티 나게 움찔거리는 작은 몸이 사랑스러웠다. 마음 같아서는 이 목덜미에 진한 낙인을 새겨 놓고 싶지만, 그랬다간 클로에가 외출을 그만두고 저택으로 돌아가 버릴 것 같아 알폰스는 충동을 겨우 눌러 참았다.

마침내 연극이 끝났다. 남자 주인공은 악당에게 결투를 신청해 복수하는 데에 성공했고, 여자 주인공은 깨끗이 나은 몸으로 병상에서 일어났다. 행복한 연인은 축복 속에 결혼했다. 모든 배우들이 무대로 나와 인사하고 환호 속에 막이 내렸다.

그리고 클로에는 정신이 없었다. 아직도 알폰스와의 스킨십의 여운이 사라지지 않은 데다가, 그 덕분에 연극 후반부를 거의 보지 못해 내용이 머릿속에서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었다.

“공연은 마음에 드셨습니까?”

그리고 그 원흉은 자기가 언제 뭘 했냐는 듯한 멀끔한 얼굴로 이렇게 물어온다. 클로에는 처음으로 알폰스가 얄밉다고 느꼈다. 그에게 에스코트를 받으며 극장을 걸어 나오면서도, 클로에는 자신이 공연에 만족을 했는지 어떤지 확신할 수 없었다.

“음…… 네. 재밌었어요.”

클로에가 혼란스러운 기분으로 대답했다. 알폰스는 그런 그녀가 사랑스럽다는 듯 부드러운 시선을 주었다.

알폰스는 그녀를 마차로 이끌려 했지만 클로에는 고개를 저었다. 날씨도 좋겠다, 조금 걷고 싶다는 것이었다.

알폰스는 흔쾌히 마부에게 마차를 맡겼다. 그들은 시내의 활기를 즐기며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클로에의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여기도 카페가 있네?’

사실 카페가 아니라 커피 하우스라고 하는 것이지만, 클로에는 그 둘을 구분하지 못했다.

빈티지한 가게에서는 볶은 원두의 향기로운 향과 잔잔한 대화 소리가 흘러나왔다. 21세기 한국에 이십여 년을 살아온 클로에에게 카페는 잠시 쉬었다 가기 좋은 곳이었다. 게다가 느낌 탓인지 목이 칼칼하니 무언가를 마시고 싶어지기도 했다.

비록 차만큼은 아니지만 그녀는 커피도 꽤 좋아했다. 원래 주식을 먹다 보면 가끔 간식이 먹고 싶어지는 법이다.

“커피를 마실까요?”

클로에가 커피 하우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녀가 가리키는 쪽을 돌아본 알폰스는 순간 의아한 듯한 눈을 했지만, 클로에는 눈치채지 못했다.

“저곳에서 말입니까? 좋습니다.”

알폰스는 의아한 듯한 기색을 순식간에 지운 채 대답했다.

그들이 커피 하우스의 입구를 막 지나치려 할 즈음이었다. 안에서 나온 직원 하나가 그들을 가로막았다.

“죄송합니다만, 귀하. 아내분을 대동하신 출입은 곤란합니다.”

“어머?”

클로에가 놀라 알폰스를 돌아보았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덤덤한 얼굴이었다.

“커피 하우스는 신사분들의 사교를 위한 장소입니다. 송구하지만 여성분은 입장 불가입니다.”

그제야 클로에는 이곳이 평범한 카페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생각해 보니, 예전에 차의 역사에 관한 책에서 읽어 보았던 것 같다. 현대의 카페와 달리 남성들의 사교 활동의 장인 커피 하우스에 대해서 말이다. 그녀는 자신이 실수를 했음을 깨닫고는 부끄러워했다.

그런데, 자신은 그렇다 쳐도, 자신을 말리지 않고 여기까지 데려다 놓은 알폰스는 뭘까? 그녀가 알폰스의 무표정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알폰스가 커피 하우스에 대해 모를 리가 없었다. 클로에와 달리 그는 날 때부터 이 세계의 주민이었으니까.

한편 알폰스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군.’

알폰스, 그가 커피 하우스에 방문한 적이 없을 리가 없었다. 귀족 남성, 즉 그와 같은 사람들을 위한 장소가 아니던가. 그는 기억력이 좋아 사람의 얼굴 역시 잘 기억하는 편이었는데, 이 점원은 분명 그의 기억 속에 없었다.

게다가 귀족을 상대로 장사하는 커피 하우스의 직원이 제국에 단둘밖에 없는 공작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보니 아마 취직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입인 것 같았다.

점원은 자신이 상대하고 있는 사람들이 무려 공작과 공작부인이라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다. 그저, 자신이 귀족 나리들의 발을 멈추게 한 것이 뿌듯했다. 뭔가 자신이 귀족도 어쩔 수 없는 권력을 가지고 있는 듯한 알량한 착각이 들었다.

만일 상대들이 뻔뻔하게 굴거나 고압적으로 나온다면 그는 귀족 나리분들께 고개를 들지 못했을 것이나, 이 상대들은 그렇지 않았다. 여자 쪽이 아무것도 몰랐다는 듯 당황과 시무룩함이 섞인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신입의 패기에 힘입어 어리석은 행동을 해 버렸다. 좀 너무 나가는 말을 한 것이다.

점원은 흠흠 헛기침을 하곤 조금쯤 우쭐한 얼굴로 말했다.

“안타깝지만 저희 가게는 단순히 친목을 도모하는 장소가 아닙니다. 신사분들께서 정치와 사회, 사업에 대해 깊게 의논할 수 있는 지식과 논의의 산실입니다. 여러모로 아름다운 레이디께는 어울리는 장소가 아니죠. 레이디들께선 정치와 경제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고, 화장품이나 새로 나온 드레스 등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것을 좋아하시니까요.”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알폰스와 함께 돌아가려 했던 클로에는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저 말은 분명 클로에, 그녀를 가리켜 하는 말이다.

“아아, 물론 그게 나쁜 일은 아닙니다. 여자분들은 타고나길 지적 활동과는 인연이 없도록 만들어져 있으니까요. 본디 남자는 이성, 여자는 감성을 담당하도록 신께서는 그리 정하셨으니 어쩔 수가 없지요. 비이성적이고 감정적인 대신 신께서는 여자에게 아름다움을 부여하지 않으셨습니까……. 아름다움을 갈고 닦는 것, 그것이 레이디분들께 맡겨진 역할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제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시는 아내분을 두셔서 기쁘시겠습니다, 신사분.”

점원이 악의 없이 칭찬했다. 클로에는 표정을 관리하기가 힘이 들었다.

‘왜 저렇게까지 말하는 거지?’

그녀는 이미 이 제국의 풍조가 21세기의 한국보다 더욱 성차별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여성에게는 교양과 신부 수업 외의 교육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런 사상을 굳이 상대의 면전에서 말로 꺼내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었다.

아마 저 점원은 알폰스가 당연히 자신의 말에 동조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사실 이 세계에선 그게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만일 이 세계 표준의 사고방식과 의식 수준을 가지고 있는 평범한 귀족 남성이었다면 허허 웃으며 동조하는 것이 당연한 것일 터였다.

거기까지 생각한 클로에는 기대를 놓았다. 그 역시 이 세계의 남자였다. 알폰스의 입에서 자신을 상처 입힐 만한 말이 나오더라도 무던히 넘겨야만 했다.

여태까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무표정으로 점원의 말을 듣고 있던 알폰스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점주를 불러와라.”

“역시 그렇…… 예?”

점원이 얼떨떨한 얼굴을 했다. 알폰스가 담담히 말했다.

“이 가게를 시가의 3배로 매수하지.”

“예에?”

“그리고 넌 해고다. 다시는 이 가게에 출근하지 않아도 좋다. 오늘까지 일한 급료는 내가 지급할 테니 짐을 싸서 꺼져라.”

점원은 웃는 얼굴 그대로 얼어붙었다. 알폰스가 지금 한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별이 잘 안 되는 모양이었다. 사실 귀족이라곤 해도 대로변의 장사 잘되는 가게를, 그것도 시가의 3배로 고민 없이 사들일 만한 재력의 소유자는 별로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알폰스는 이미 품에서 수표를 꺼내 서명하고 있었다. 써 갈기듯 서명한 고액의 수표를 점원의 면전에 껌 포장지처럼 집어 던지며, 그가 무표정하게 말했다.

“전달해라. 지금 당장.”

잘 영업하고 있던 대로변의 유명 커피 하우스 ‘리틀필드’의 주인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이 과정 중 종업원들은 어리둥절했고, 수도에 상경한 뒤 간신히 일자리를 얻은 한 청년은 입을 잘못 놀린 죄로 짐을 싸고 울며 나갔으며, 시가의 3배를 일시불로 받은 기존 점주는 희희낙락했다.

그러나 제일 당황한 사람은 따로 있었다.

“커피는 마음에 드십니까?”

평민 수십 명이 평생 놀고먹을 돈을 한순간에 써 버렸지만 그런 것은 조금도 중요치 않다는 얼굴로, 알폰스가 말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무표정한 낯빛이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알 수 있었다. 그의 입가가 옅은 미소를 띠고 있다는 것도, 특유의 위압감 느껴지는 형형한 붉은 눈이 믿을 수 없게도 다정히 빛나고 있다는 것도.

그리고 그런 그의 맞은편에 앉아 커피잔을 들고 있는 클로에는…… 속이 울렁거렸다.

커피 하우스 내의 모든 사람들이, 종업원, 손님 할 것 없이 자신들을 보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알았다. 그 눈빛이 하나같이 놀라움을 표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도.

이런 식의 주목을 받는 것은 익숙지 않다. 더더군다나, 남편이 오로지 자신에게 커피를 마시게 해 주겠다는 이유로 이 가게를 통째로 사들인 상황이라면 더욱 그랬다.

커피의 맛은 현대에 비하면 조금 부족한 기술로 내려진 평범한 핸드드립 커피였지만 그녀는 그 사실조차 느낄 수가 없었다. 사실은 커피가 입으로 들어가고 있는지 코로 들어가고 있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네. 아주 맛있네요.”

클로에가 힘겹게 대답했다. 알폰스는 그런 그녀가 한없이 귀엽다는 듯한 눈을 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병아리가 모이 먹는 것을 보는 엄마 닭 같았다.

이 상태라면 커피만 마시는 데도 체할 것 같았다. 어렵게 어렵게 주변의 시선을 잊으려 노력하며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그런 클로에의 머릿속에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커피 하우스 같은, 여자들의 사교 장소도 있다면 좋을 텐데.’

물론 제국의 여성들 역시 사교 활동을 활발히 한다. 다과회나 무도회 등의 일이 그러한 활동의 일환이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자택 외부의 사교 장소가 있다면 좋겠다고 클로에는 생각했다. 편히 휴식도 취할 수 있고, 지인과 편한 마음으로 즐기다 갈 수 있는 그런 곳.

잠시 그것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던 클로에는, 그 생각을 잊지 않도록 자신의 뇌리 깊은 곳에 새겨 두었다.

커피를 다 마신 이후에야 클로에는 겨우 커피 하우스를 탈출할 수 있었다. 알폰스의 에스코트를 받고 나오며 클로에는 안도감과 후련함을 동시에 느꼈다.

“식사를 하시겠습니까.”

그때 그런 클로에의 정수리 위로 이런 말이 툭 떨어졌다. 클로에가 알폰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언제나처럼 단조롭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레스토랑에 저녁 식사를 예약해 두었습니다. 아마 마음에 드실 겁니다.”

그러나 한없이 차분해 보이면서도 알폰스의 눈동자는 끊임없이 상대를 살피고 있었다. 클로에, 그녀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클로에는 왠지 모를 감동을 느꼈다.

‘연극에 저녁 식사 예약까지. 정말 세심한 사람이구나.’

게다가, 식사 이야기를 들으니 왠지 모르게 배가 고파지는 것 같기도 했다. 클로에는 기쁘게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알폰스가 예약해 두었다는 식당에 가기 위해서는 마차를 타야만 했다. 식당 앞에 도착한 클로에는 멈칫 놀랐다. 이 세계로 온 뒤, 처음으로 보는 건축 양식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서양적인 재질과 양식, 동양적인 양식을 섞어 놓은 듯한 저 건물은 마치…….

“온……인가요?”

클로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알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온의 요리, 좋아한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제야 클로에는 자신이 알폰스에게 온의 요리를 좋아한다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 알폰스와의 두 번째 티타임 때였다. 그때 지나가듯 한 별것 아닌 말을 알폰스는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곳은 수도 유일의 동방풍 식당, 명해관(明該館)이었다. 전석 예약제이며 VIP 고객을 위한 특별실도 마련되어 있는 고급 식당이었다.

그들은 함께 식당에 입장했다. 알폰스를 알아본 점원이 그들을 친절히 미리 예약해 둔 특별실로 안내했다.

총 3층으로 이루어져 있는 식당은 1층과 2층의 일부가 일반 테이블로 채워져 있으며 2층 일부와 3층은 다양한 종류의 특별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은 직원을 따라 3층까지 올라 긴 복도를 걸었다.

점원이 막 그들을 위한 방의 문을 열어 주려 하던 그때였다.

“어어, 이런 곳에서 다 만나다니?”

……이 목소리는, 설마. 클로에는 두근거리던 기대감이 달고나처럼 파삭 부서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별로 돌아보고 싶지 않았지만 상대가 그녀가 예상하는 그자라면, 그래서는 안 되었다. 공작 부부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이거 참 반가운걸. 역시, 우리의 인연은 끈끈하다니까.”

아니나 다를까 아서 황자였다. 평소와 다른 점이라면 곁에 한 여성을 끼고 있다는 정도였다. 정성 들여 단장한 여성은 차림새로 보건대 아마 귀족 영애인 듯했다.

“황자 전하.”

알폰스의 노골적으로 경계 어린 눈빛 아래에서 클로에가 예를 차렸다. 아서가 손을 내저었다.

“그러지 말랬잖아. 우리 사이에 딱딱하게시리.”

“황자께서도 석찬을 즐기러 오신 모양입니다.”

알폰스가 대단히 딱딱한 말투로 말했다.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럼, 좋은 시간 되십시오. 저희는 이만.”

“아니, 잠깐! 성질 급하기는. 내 말 좀 들어 봐.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함께 식사하지 않겠어? 내 소중한 친우들을 위해 내가 사지.”

“안 사셔도 됩니다.”

“거 참, 매정하게 왜 이러시나!”

알폰스의 가히 만리장성을 방불케 하는 철벽에 아서가 다급히 말했다.

“어서 가자고. 마침 4인실이 하나 빈다고 하니까.”

알폰스는 황자가 대단히 거슬렸다. 모처럼의 아내와 둘만의 외출을 다른 놈한테 침범당하는 것이 싫었고, 더더군다나 그놈이 황자라니 더 싫었다. 자신이 대체 왜 이렇게까지 거부감을 느끼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하여간에 그랬다.

안 그래도 자신과 성격이 상극인 아서 황자다. 원래부터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요즘 따라 더더욱 그가 거슬렸다. 그놈의 뺀질거리는 웃음과 능글거리는 몸짓 하나하나가 밉상이었다. 누군가에게 호의를 품지도 않지만 적의도 잘 품지 않는 알폰스였으니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과 별개로 황자의 제안을 거부할 구실이 없었다. 뭐 하나라도 찾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아무런 구실 없이 황족의 말을 거부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그리고 이성적으로 보았을 때 딱히 득 될 행동이 아니었다.

그렇게 판단한 알폰스는 점원 대신 열어젖히려 했던 특별실의 문고리에서 손을 떼었다. 이 간단한 동작에만 해도 그 특유의 초인적인 인내심과 자제력이 필요했으니 자신의 친부에게 고마워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곁에 여자도 있으니 어쭙잖은 짓거리는 하지 않겠지.’

무심코 그렇게 생각했으나 황자 곁의 여자가 자신의 불만과 무슨 관계성이 있는지 알폰스는 설명할 수 없었다.

결국 공작 부부는 마지못해 아서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4인용 특별실에 둘러앉아 자리를 잡았다.

명해관의 요리는 전부 코스식이라 이곳에서 식사를 하려면 반드시 정확한 인원 정보를 포함한 예약이 필요했으나, 황자 정도 되는 사람의 권력이라면 없던 방도도 생기는 것 같았다.

오래지 않아 전채 요리부터 시작해서 다양하고 고급스러운 요리가 테이블을 채웠다. 식사는 나쁘지 않았다. 아니, 훌륭했다. 중식이라면 자장면에 탕수육이 최고인 줄로만 알았던 클로에는 신세계를 보았다. 특히 콩소스를 곁들인 통전복구이와 고추기름소스 바닷가재찜은 입에 넣는 순간 사라져 버려 아쉬울 정도였다.

식사를 하며 나눈 대화에 의하면 황자의 동행인인 여성은 손턴 자작가의 엘리나라고 했다. 여자를 좋아하는 황자의 교제 상대 중 한 명인 것 같았다. 그녀는 특별히 특색은 없었지만 사근사근한 성격으로 불편한 황자와의 자리를 그나마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다.

어찌 됐든 걱정과 달리 식사를 하면서 별일은 없었다. 클로에와 엘리나가 회전 테이블을 보고 재미있어 한 것 정도가 제일 특이한 일일 정도로.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로에는 무언가 허전함을 느꼈다.

‘정말 맛있는데, 왜 이렇게 무언가가 빠진 것 같지?’

그렇게 생각하며 클로에는 화이트 와인을 한 모금 머금었다. 달콤하고 질 좋은 와인이었다.

게다가, 클로에 그녀의 평소의 입맛에 비교해 요리들이 조금 느끼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혀 표면이 기름으로 한 겹 코팅된 듯한 느낌이랄까.

이 느끼함을 지우려면…….

“재스민 차가 빠졌네요.”

클로에가 무심코 말했다.

“흠?”

“예?”

게다가 그 말은 두 남자의 관심을 동시에 끌었다. 혼잣말에 예상치 않게 두 남자가 동시에 자신을 돌아보자 클로에는 살짝 당황했다.

“아, 재스민 차라는 것이 있어요. 온의 요리점에서 식사에 곁들여 마시는 차인데요, 녹차에 재스민 꽃잎을 블렌딩하거나 재스민의 향을 입힌 거예요.”

당황해 저도 모르게 설명하던 클로에는 또 차덕후로서의 직업병이 발동되었다. 자기 설명에 신이 난 것이다.

“느끼함을 잡는 데에 최고라 온의 요리와 최상의 궁합을 자랑해요. 그래선지 온에서는 오래전부터 이 차를 식사와 함께 즐겼어요. 게다가 부담스럽지 않고 은은하면서도 향긋한 재스민의 향은 얼마나 매력적인데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차 중 하나랍니다.”

“흐응, 그래?”

턱을 괴고 그녀의 설명을 듣던 황자가 픽 웃었다.

“넌 참 재밌어. 차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눈이 반짝반짝하거든.”

“그, 그런가요?”

이전에 알폰스에게도 들었던 말이었다. 클로에는 부끄러워져 입을 다물었고, 알폰스의 미간엔 가는 주름이 졌다.

“그래. 네 설명을 듣다 보면 구정물도 마시게 될 것 같단 말이야. 한 번 마셔 보고 싶네, 그거.”

칭찬인지 욕인지 알 수 없었다.

“으음, 네. 제국의 온 식당에서도 재스민 차를 마실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은데 말이에요.”

클로에가 무심코 말했다.

그때였다. 아서의 눈이 마치 좋은 장난감을 발견한 어린아이처럼 반짝였다. 그의 안면에 장난기를 담은 웃음이 피어오르자 클로에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이 식당 주인, 불러 줄까?”

“네에?”

“내 친구거든. 아마 오늘 저녁 할 일 없을걸. 불러 줄까? 한 번 직접 말해 볼래?”

“네에에?”

클로에가 입을 떡 벌렸다. 아서 황자, 그가 어지간히 발이 넓다는 사실은 사교계에 익히 퍼져 있는 유명한 사실이었지만, 설마 이 식당의 소유주와도 아는 사이였을 줄이야! 기겁한 클로에가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 아니요! 그, 그러실 필요까진 없어요!”

“사양하지 않아도 돼.”

채 클로에가 말리기도 전에 아서는 차임벨을 울려 점원을 불렀다. 그 모습이 마치 자신의 인맥을 자랑하고 싶어 안달 난 사춘기 소년 같았다.

실제로 명해관의 소유주와 아서가 얼마나 친밀한 사이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황자가 부르는데 꾸물거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정말로 오래지 않아 그가 나타났다.

“처음 뵙겠습니다, 공작 각하, 공작부인.”

그는 브랙스턴 백작으로, 브랙스턴 후작가의 후계자이기도 했다. 클로에는 그의 얼굴은 처음 보았지만 이름은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수도에 여러 개의 고급 요리점들을 소유하고 있어 수도에 거주하는 귀족들 중 그 소유의 요리점에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자가 없을 정도였던 것이다.

일이 이렇게까지 되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클로에는 속으로 한숨을 쉬곤, 브랙스턴 백작과 적당히 예의를 차린 인사치레를 나눈 끝에 본론을 꺼냈다. 재스민 차에 대한 설명이었다.

그녀가 공작부인이라서 그런 건지, 황자의 소개로 이루어진 만남이라 그런지 브랙스턴 백작은 그 설명을 진지하게 들어 주었다.

“그렇군요. 온의 요리에 대해 연구할 때 그런 것이 있다는 말은 들어 보았지만, 아무래도 제국인들은 차를 즐기지 않다 보니 가게에 들여놓지는 않았습니다.”

“한 번 직접 마셔 보고 싶지 않아, 브랙스턴? 클로에가 차 타는 솜씨 하나는 일품인데 말이야.”

“예? 그, 그래도 되겠습니까?”

브랙스턴이 황공하다는 표정으로 클로에를 돌아보았다. 황자가 저렇게까지 말했는데 거절해서야 면이 서지 않았다.

“그럼 저희 저택에서 재스민 차를 직접 맛보시겠어요?”

그렇게 말하고서 클로에는 알폰스를 돌아보았다. 허락을 구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알폰스는 영 탐탁지 않은 얼굴이었으나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서 총 5명이 공작저를 향해 출발했다.

클로에는 처음으로 저택 외부 사람을 자신의 티룸에 초대했다. 아서는 제집처럼 편한 태도로 눌러앉았고, 엘리나와 브랙스턴은 훨씬 조심스럽고 긴장한 태도였다. 초면에 공작의 저택에 초대받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클로에는 온에서 직접 공수해 온 재스민 차를 가지고 있었다. 비교적 차를 천대하는 제국과 달리 차를 즐겨 마고 발전시켜 온 국가도 여럿 있었는데, 온은 그중 하나였다. 차나무의 원산지라는 말도 있을 정도이니 말 다 했다.

클로에는 차를 한 김 식힌 물에 정성껏 우려내 왔다. 연한 노란빛의 수색을 가진 그것을 맛본 손님들이 감탄했다.

“말씀하신 그대로, 느끼함이 씻겨져 내려가는군요.”

“향이 아주 은은한데. 저번에 네가 주었던 얼 그레이와는 정반대야.”

향이 아주 화려해 호불호를 타기 쉬운 얼 그레이와 반대로 재스민 차는 누구나 마시기 좋을 정도로 친숙하고 은은한 향을 지녔다.

특히 브랙스턴이 감탄했다. 온의 요리의 전문가라서 그런지 더더욱 재스민 차의 매력을 빠르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이렇게 맛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정말로 온의 기름진 요리와 잘 어울리겠는데요.”

뺨을 붉히고 칭찬을 듣고 있던 클로에가 희망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명해관에 재스민 차를 들여놓으시는 것은 어떨까요?”

“글쎄요, 저도 그러고 싶긴 하지만…….”

브랙스턴이 우물쭈물 말했다.

“아무래도, 차라는 선입견 때문에 손님들께서는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지 않을까요. 게다가, 구하려면 온에서 직수입을 해야 할 테니 거래처를 뚫는 것도 어려울 겁니다. 아무래도 손익 계산에 안 맞을 가능성이…….”

클로에는 안타까웠다. 어떻게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재스민 차를 영업하고 싶었던 것이다.

“거래처는 걱정 마세요. 공작님께서 도와주실 거예요. 그렇죠, 알폰스?”

이야기가 갑작스레 사업적인 방향으로 선회하니 알폰스가 약간의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만.”

바텐베르크 공작가는 오래전부터 온의 상단과 연이 있었다. 알폰스가 하룻밤 만에 온의 차들을 다량 구매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러니 그가 재스민 차를 수입해 와 명해관에 납품한다면 거래처 문제는 생각 외로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브랙스턴은 자신의 콧수염을 매만지며 곰곰이 고민했다.

“그거 좋군요. 하지만 손님들께서 재스민 차를 좋아하실지 알 수가 없어서요. 아무래도 고가의 상품이라, 도박을 하기는 주저됩니다.”

21세기의 지구에서야 재스민 향의 합성향료를 사용해 저렴한 재스민 차를 생산할 수 있지만 이곳에선 불가능했다. 오로지 천연 재스민 꽃잎만을 이용하여 녹차 잎에 향을 입혀야 하는데, 재스민은 고급 향료인지라 수입품치고도 높은 가격을 자랑했다.

“홍보를 하는 것은 어떨까요? 신메뉴 출시 기념 재스민 차 50% 할인이라든가…….”

“귀족들은 할인 제도를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지, 그런 건 평민들이나 좋아하는 거지.”

흔치 않게도 알폰스와 아서가 클로에의 말에 반대 의사를 표했다. 클로에는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귀족들의 소비 생활은 흔히 과시를 위해 이루어진다. 그런 그들에게 할인 정책 같은 것을 실시해 보았자 반응이 좋지 않을 것이 당연했다.

“아, 그렇군요. 그렇다면…… 유행에 약한 사람들을 자극해 보면 어떨까요. 온의 요리를 먹을 때 재스민 차를 함께 마시지 않으면 유행에 뒤처지는 것처럼 느끼도록요.”

제국의 귀족들과 부유층에겐 유행이야말로 소비 생활의 전부였다. 의복과 액세서리는 물론, 집 안의 인테리어와 가구나 먹는 음식, 즐기는 취미, 교제하는 이성의 스타일, 생활양식까지. 언제나 유행의 선두에 서거나 그게 불가능하면 선두의 꽁무니라도 쫓아가는 것으로 부를 과시하고 허영심을 충족했던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좋은 생각이라고 여겼는지 브랙스턴이 흥미를 보였다.

“멋지군요. 그런데 그게 어떻게 가능하죠?”

“간단해요. 유행의 선두 주자인 저명인사가 직접 홍보하는 거죠.”

“유행의 선두 주자인 저명인사요? 그게 누구…….”

라고 말하던 브랙스턴이 순간 말을 멈추었다. 조건에 해당하는 훌륭한 예시를 떠올린 모양이었다.

그 자리에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순간 한 방향을 향했다. 이 자리에서, 그 조건에 들어맞는 사람이란 단 한 명밖에는 없었다.

“……나?”

아서가 눈을 게슴츠레 떴다.

클로에의 얼굴이 환해졌다. 아서야말로 훌륭한 홍보 모델인 것이 당연했다. 그에게는 미모와 사교성, 인맥, 영향력, 권력, 홍보자로서 필요한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었다. 클로에가 손뼉을 짝 쳤다.

“완벽해요! 레스토랑에 포스터를 붙이는 거예요. ‘황자님조차 감탄한 맛의 재스민 차! 황자님께선 온의 요리를 드실 때 언제나 재스민 차도 함께 마십니다. 이 이상 신선하고 완벽한 경험은 없다!’ 이런 식의 카피를 넣어서요. 여기에 황자님의 서명이나 재스민 차를 들고 있는 황자님의 모습을 담은 초상화까지 담으면 더욱 완벽하겠죠. 분명 모두들 황자님을 따라 하기 위해 줄을 설걸요. 황자님의 권위를 빌린다고나 할까요? 이런 걸 광고업계에서는 권위의 법칙이라고 하는데…….”

신이 나서 말하던 클로에는 알폰스의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알폰스의 앞에서는 업무 경험이 없는 것처럼 행동해야만 했다.

클로에, 그녀는 이전의 삶에서 광고업계에서 일하거나 홍보팀에 소속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홍보 관련 업무를 몇 번 맡아 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 홍보를 위한 전략에 대해서도 간단히는 알고 있는 편이었다.

아서가 감탄했다.

“멋진데. 클로에, 너 머리가 꽤 돌아가는구나.”

칭찬인지 뭔지 알 수 없었다.

“……음, 뭐, 그렇죠.”

“이 몸께서 모델을 서 줄 필요가 있다 이거지.”

아서는 과시적인 태도로 어깨를 으쓱이며 다리를 꼬았다.

“나도 딱히 불만은 없어. 나의 소중한 친우 브랙스턴과 클로에를 위해서라면 이 정도쯤이야. (클로에는 왠지 그가 의도적으로 알폰스를 빼고 말한 게 아닌가 싶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 대가는 당연히 있겠지?”

“당연하죠. 홍보에 협력해 주시는 만큼 그 비용도 지불해 드릴게요. 그렇죠, 브랙스턴 백작님?”

“홍보가 충분히 되기만 한다면 그 정도는 아깝지 않습니다.”

“좋아요. 그럼 카피는 제가 쓸게요.”

클로에는 이전의 삶에서 광고 카피를 쓰는 업무 역시 맡아 본 적이 있었다.

클로에는 알폰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공작님께선 거래처와 상품을 준비해 주세요.”

알폰스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바텐베르크의 사업은 클로에 덕분에 나날이 확장되어 가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명해관의 신메뉴 재스민 차에 대한 논의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그러는 동안, 알폰스는 내심 오늘 저녁 내내 이어진 황자와 클로에 간의 상호작용을 의식하고 있었다.

브랙스턴과 클로에가 대화를 나누고 눈을 맞추는 것 역시 아주 즐겁지는 않았지만, 아서와 클로에 간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알폰스는 아내와 결혼하기 전 수집했던 그녀에 대한 소문을 생각했다. 자신이 직접 본 적은 없지만 클로에가 과거에 아서를 좋아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인 것 같았다.

‘지금도 그럴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그가 알 수 있는 사실은 클로에, 그녀가 아서와 말을 섞고 그를 눈에 담을 때마다 속이 뒤틀린다는 것뿐이었다.

그녀가 누구를 사랑하든 알폰스가 알 바는 아니었다. 그것은 그녀의 자유고 사생활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그녀가 아서를 마주하는 순간마다 그녀가 자신의 것이라고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상기시키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

클로에가 누구를 사랑하든 상관없었다. 어찌 됐든 그녀는 제국의 법과 신이 인정한 자신의 아내였고, 자신의 것이었다.

머리카락 한 가닥부터 그녀의 시선과 목소리, 정신과 마음의 제일 깊은 곳까지 전부 자신의 것이었으면 했다.

알폰스는 그 사실을 황자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지금 당장 그에게 과시하고 싶었다. 그의 초인적인 인내심도 한계에 다다랐다.

“부인.”

클로에가 물끄러미 그를 보았다. 한 팔에 안길 정도로 가녀린 몸과 오밀조밀한 얼굴이 그를 향했다.

알폰스는 그녀의 허리를 팔에 안아 쓸어내렸다. 그는 느리게 아내의 입술에 입 맞추었다. 가볍게 얹어진 듯 입술과 입술이 포개어졌으나 그는 거기서 끝낼 생각이 없었다. 그의 혀가 클로에의 입술 사이로 갈라 들어갔다. 그녀가 채 상황을 인지하기도 전에, 그의 혀가 입 안 여린 살을 쓸고 혀를 얽었다.

진한 키스가 끝나고 그는 그녀의 눈 위에 입을 맞추었다. 그가 웃음기를 머금은 얼굴로 말했다.

“알폰스라고 부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마치 이것만이 자신의 입맞춤의 이유라는 듯이. 자신의 마음속의 검은 속내는 털끝만큼도 들키지 않겠다는 듯이.

정신을 차리고,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를 깨달은 클로에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지금, 3명의 손님들 앞에서 키스를 한 것이었다. 그것도 딥키스를!

“그…… 그건, 다, 다른 사람 앞이라서!”

클로에가 항의의 뜻을 담은 말을 더듬더듬 속삭였다. 알폰스는 그녀가 자신으로 인해 당황하는 것이 좋았다. 이 순간만큼은 그녀의 마음과 눈동자 속에 온전히 자신만이 비추어지고 있는 것만 같아서. 알폰스는 사랑스럽다는 듯이 클로에의 귀 윗부분을 살짝 깨물었다.

‘허, 잘들 논다.’

한편 그 모습을 지켜보는 아서는 어이가 없었다. 그는 남자의 직감으로 알폰스가 일부러 과시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 상대는 아마도 자신일 테고.

그가 최근 클로에를 상대로 장난질을 좀 친 것은 사실이었다. 한없이 소심하던 클로에의 변화가 재미있었고, 그녀가 아직도 자신을 마음에 두고 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그게 설마 공작의 질투와 시기를 불러올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알폰스 바텐베르크, 그는 많은 수의 여성들과 교제하면서 단 한 명에게도 마음을 허락한 적이 없었다. 마음은커녕 끝끝내 최소한의 친근함과 관심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설마, 자기 아내 조금 건드렸다고 이렇게까지 굴 줄이야.

그가 진심으로 아내를 사랑하고 있다? 에이, 설마. 아서는 그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 알폰스 바텐베르크가 그럴 리가 없다. 그저 자기 소유의 누군가를 건드리는 것에 분노하는 것뿐이라고 아서는 판단했다.

‘그 바텐베르크 공작이 이럴 줄은 몰랐네. 치사해서 진짜.’

치사해서 클로에를 꼬시려던 의욕마저 쏙 들어갈 지경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아서는 곁에 앉아 있던 엘리나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어깨를 시원하게 드러낸 그녀의 드레스 안쪽으로 아서의 손가락이 파고들었다.

“어머, 황자 전하도 참.”

엘리나가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했다. 그러면서도 거절은 하지 않았다. 그는 황자였으니까.

아서는 그것이 만족스러웠다. 그는 황자였고 그의 주위엔 여자가 많았다. 그리고 그들 중 아무도 그를 거절하지 않았다. 클로에가 조금 반반하긴 해도 그만큼 예쁜 여자는 차고도 넘친다. 엘리나도 그중 한 명이었다.

아서는 엘리나의 입술과 관자놀이에 키스를 퍼부으며 그녀의 보드랍고 매끄러운 등의 감촉을 즐겼다. 알폰스가 어떻게 나오든, 그가 클로에에게 얼마나 집착하든 자신에겐 조금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엘리나와 아무리 진하고 농밀한 스킨십을 가지면서도, 자신의 눈길이 간간이 클로에와 알폰스를 좇고 있음을 그는 깨닫지 못했다.

한편.

‘집에 가고 싶다.’

두 커플의 예상치 못한 진한 애정 행각과 왠지 모를 긴장감이 흐르는 분위기에 뻘쭘해진 것은 브랙스턴이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이 자리를 박차고 벗어나고 싶었으나 안타깝게도 그에겐 용기가 없었다.

* * *

바텐베르크 공작저를 떠나는 마차의 안이었다. 아서의 어깨에 기대고 있던 엘리나가 문득 말했다.

“황자 전하께서는 공작부인의 생일 연회에 다녀오셨다면서요?”

“으음? 그렇지.”

아서가 뽐내듯이 말했다.

“나야 클로에의 친우니까, 당연히 초대받았지.”

“부러워요. 저는 초대도 받지 못했어요. 공작부인의 생일 연회, 사교계에서 굉장히 화제가 되었는데 말이에요.”

“응? 그랬어?”

아서가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엘리나는 그의 어깨에서 머리를 떼고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모르셨어요? 하긴, 모르실 수도 있겠네요. 지금도 여자들은 그때 공작부인이 입은 드레스를 디자인한 디자이너가 누구인지에 대해 쑥덕거리고 있어요. 공작부인, 그때 정말 아름다우셨다면서요?”

“뭐, 예쁘긴 예뻤지.”

아서는 연회 때의 일을 생각했다. 그는 공작과 공작 부부가 나란히 걸어 나오는 것을 보았다. 솔직히 말해 공작 쪽은 그의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알폰스보다 더 잘생겼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오히려 그가 놀란 쪽은 따로 있었다. 클로에였다. 그때의 클로에는 분명히 아주 예뻤다. 분을 얇게 바른 피부는 희고 매끄럽게 반질거렸고, 사랑스러운 눈매의 녹색 눈동자와 드러난 가는 목선이 눈길을 끌었다.

평소에도 그녀가 반반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 날은 ‘클로에가 이렇게 예뻤던가?’ 하고 놀랄 정도였다. 만일 그녀가 평소에도 늘 그렇게 하고 다녔다면 그녀가 고백을 하기도 전에 아서 자신이 먼저 꼬시려고 덤벼들었을지도 모른다.

……뭐, 이러니저러니 해도 클로에는 클로에다. 아서는 잡힌 고기에게는 관심을 주는 타입이 아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엘리나가 문득 말을 꺼냈다.

“다들 공작부인이 변했다고들 해요. 아시잖아요? 그…… 옛날엔 그분의 소문이 별로 좋지 않았던 거.”

“어, 그렇지. 소심하고 바보 같기로 유명했잖아.”

“으음…… 네, 그렇다고 쳐요. 어쨌든, 그분이 바뀌었다는 게 사실인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다들 말 한 번 붙여 보고 싶어 하고, 공작부인이 주최하는 사교 모임에 참가해 보고 싶어서 안달해요.”

“그으래?”

아서는 씩 웃었다. 그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엘리나, 넌 어땠어?”

“네?”

“클로에 말이야. 네가 보기엔 인상이 어땠어? 절대 본인에게 말하지 않을 테니 솔직하게 말해 봐.”

당황스러운 질문이었다. 엘리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말문이 막혔다. 아서가 몇 번이고 채근하자,

“부러워요.”

그녀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예쁜 데다 똑똑하기까지 하죠. 저는 사업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지만, 여자가 하는 말을 세 명이나 되는 남자들이 주의 깊게 들어 주는 일은 드물잖아요. 감탄했어요. 아, 저 정도는 되어야…….”

엘리나가 한숨 쉬며 말했다.

“……공작님도 푹 빠지시는구나, 하고.”

아서는 엘리나가 알폰스를 언급하자 공연히 발끈했다. 알폰스 바텐베르크, 그가 요즘 따라 왜 이렇게 심기에 거슬리는지 모르겠다.

“에이, 푹 빠지긴 무슨. 그놈은 그냥 신혼 놀이에 재미가 들린 것뿐이야. 변덕을 부리는 것뿐이라고.”

“네, 그런가요?”

엘리나는 적당히 아서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는 모른다. 알폰스가 얼마나 클로에에게 푹 빠져 있는지, 엘리나는 공작 부부와 마주한 지 오래 지나지 않아 알아차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공작부인에게서 도무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그의 눈동자와 그녀에게 말할 때만 미미하게 더 나직해지는 목소리를 마주하고서도 어떻게 모를 수가 있단 말인가. 공작 부부와 함께할 기회만 있다면, 분명 그녀 외에도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엘리나는 가슴 한구석이 저려 오는 것만 같았다.

만일 자신도 그녀…… 클로에 바텐베르크와 같았다면. 그녀처럼…… 아름답고, 좋아하는 것에 열정이 있으며, 박식하고 남자들과 당당히 대등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더라면, 아서가 자신에게 푹 빠졌을까.

엘레나는 아서의 옆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런 그녀의 시선을 느꼈는지, 아서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잘생긴 입매를 끌어당겨 웃었다.

“그리고, 클로에보다 네가 더 예뻐. 엘리나.”

그가 빈말을 했다. 엘리나는 그것이 빈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아는 티를 낼 필요는 없었다. 그녀가 수줍게 웃었다.

“아이, 황자님도 참.”

* * *

명해관에서의 재스민 차 출시는 티룸에서의 회의 그대로 진행되었다.

바텐베르크가에서 재스민 차를 수입해 명해관에 납품했다. 명해관에서는 클로에에게 배운 기술대로 재스민 차를 우려내어 온의 요리와 함께 내어놓았다.

명해관의 벽면에는 층층마다 클로에가 구상한 홍보용 포스터가 붙었다. 알고 보니 황족의 얼굴을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법이 있었던지라, 아서의 초상화는 쓰지 못하고 대신 그의 자필 서명이 들어갔다. 홍보의 총 책임역은 자연스럽게 아이디어를 처음 내었던 클로에에게로 돌아갔다. 그녀는 홍보비용을 아서와 공평하게 배분했다.

그녀의 홍보 전략은 훌륭히 먹혀들어 갔다. 그간 제국에서는 아주 간혹 유명한 연극배우가 광고의 모델이 되는 경우는 있었어도, 황자가 모델로 나서서 그의 자필 서명을 광고에 활용한 일은 처음이었다.

더군다나 귀족과 부유층들의 허영 어린 심리와 황자의 권위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그녀의 광고 카피는 고객들의 소비 욕구를 자극했다. 레스토랑 전체에서 은은한 재스민 향이 나도록 하는 것 역시 그녀의 아이디어였다.

귀족들 대부분은 유행에 민감했고, 자신들이 남에게 유행에 뒤지지 않는 세련된 사람으로 보이길 원했다. 오로지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 고가의 재스민 차를 주문한 귀족들은 그 맛을 본 뒤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이럴 수가, 느끼함이 싹 사라지잖아?”

“온의 요리와 무척 잘 어울리는군.”

“생각 외로 맛있는걸. 차란 다 화장품처럼 경박한 향이 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제국 내에서 온의 요리가 유행한 과정 그대로, 재스민 차 역시 서서히 새로운 유행이 되기 시작했다. 이 값비싸고 낯선 이국의 문화를 접해 본 사람들은 누구 할 것 없이 그 맛에 익숙해지고 빠져들었다.

그 매력과 허영을 자극하는 클로에의 홍보 전략에 힘입어, 어느샌가 온의 요리를 먹을 때 재스민 차를 주문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예법 같은 것이 되어 버렸다. 재스민 차를 모르거나 주문하지 않는 사람은 촌스럽고 온의 요리를 먹을 줄 모르는 것처럼 취급되었으며, 명해관 외에 제국 내의 온풍 레스토랑들도 하나둘 재스민 차를 들여놓기 시작했다.

최종적으로 명해관의 고객 중 약 70%가량이 재스민 차를 주문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수도의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한 건 재스민 차뿐만이 아니었다.

“최고예요, 바텐베르크 부인! 정말로 인기 만점이라고요.”

잼 가게에 먼저 와 있던 포트넘 부인은 클로에를 보자마자 달려와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귀부인들마다 전부 이 가게에 대해 이야기해요. 제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니까요!”

“찾아와 주어서 고마워요, 포트넘 부인.”

클로에는 부끄럽지만 몹시 기뻤다. 그녀는 뺨을 붉히며 포트넘 부인의 손을 맞잡았다.

클로에의 잼 가게, ‘트리플 스위트’가 개장한 지 약 삼 주가 지났다. 가게가 완공되었을 때 클로에는 생각지 못한 규모와 화려함에 놀랄 수밖엔 없었다. 이 거대하고 값진 생일 선물을 준비한 당사자는 어지간한 스케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인 것 같았다.

“어이쿠, 공작 각하께서도 오셨군요.”

트리플 스위트가 개장한 뒤로 공작 부부에게 더 예의를 차리게 된 포트넘 자작은 모자를 벗고 알폰스에게 꾸벅 인사했다. 그에 비해 알폰스는 가볍게 눈짓만을 할 뿐이었다.

“포트넘 자작.”

“정말 멋진 가게입니다! 아마 가게의 호화로움으로는 일라이자가의 아이리스 키친에도 지지 않을 겁니다. 아니, 비교도 안 되죠! 그러니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이런 훌륭한 사업에 함께할 기회를 주셔서 영광이라는 겁니다…….”

“…….”

포트넘 자작이 손을 싹싹 비비는 모습을 알폰스는 탐탁잖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 사업을 위해서는 추가 투자가 전혀 필요 없다는 알폰스의 의견과 달리 최종적으로 가게 지분의 일부를 포트넘가가 가져갈 수 있었다. 모두가 클로에와 포트넘 부인 간의 우정의 산물이었다.

말이 투자지, 바텐베르크가의 재정 상태를 고려하자면 사실상 숟가락 얹기와 다름없었다. 그 이후로 포트넘 자작은 공작 부부를 자신의 큰 은인이라고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그게 사실이기도 했고.

트리플 스위트의 주 상품은 다양한 과일 잼과 꿀, 그리고 밀크잼이었다. 그중 가게의 시그니처 메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물론 클로에가 개발한(?) 밀크잼이었는데, 이 독창적이고 특별한 잼에 대한 소문은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며 가게 앞에 줄을 서게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밀크잼은 수도의 새로운 유행이 되었다. 특히나 귀부인들 사이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식사 빵이나 비스킷, 스콘에 발라먹어도 맛있는, 향이 좋고 고급스러운 잼이라니! 밀크잼은 식사나 간식은 물론 귀부인들의 다과회에 내놓기에 손색이 없어 여성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결국 트리플 스위트에 개인 고객은 물론이고, 고위 귀족가나 베이커리, 식당 등에서 대량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하는 데에는 채 며칠도 걸리지 않았다.

클로에는 이 밀크잼이라는 새로운 문화가 귀족들 사이에서 무리 없이 받아들여진 것이 기뻤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기쁨과 승리감에 젖어 있기만 할 수는 없었다. 제국의 귀족들의 유행은 폭발적이지만 그만큼 사그라드는 것도 금방이었다. 이러한 시장에서 살아남으려면, 그녀는 끊임없이 신제품을 구상해야만 했다.

“저, 다음 신제품은 장미잼으로 할까 해요.”

“네? 장미라고요? 그, 제가 아는 장미꽃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포트넘 부인이 정직하게 놀랐다. 클로에가 미소 지었다.

“네, 맞아요.”

“먹어도 되는 건가요? 전 장미는 늘 구경만 했지, 한 번도 요리에 사용해 본 적은 없어서…….”

“장미꽃은 아름답지만 식용으로도 쓸 수 있어요. 허브 티를 만들기도 하는데, 장미꽃이 진 뒤 남은 씨방으로 만든 차가 바로 로즈힙 티랍니다.”

“어머, 그랬군요. 전 전혀 몰랐어요.”

클로에가 보기에 제국에는 장미꽃을 먹는 방법이 많이 퍼지지 않은 것 같았다. 그나마 평민 위주로 로즈 페탈 티 정도가 음용되고 있긴 하지만, 그 이상의 사용법은 발견되지 않고 있었다.

“장미잼은 남쪽의 따뜻한 지방 국가에서 유래한 것이에요. 독특하고 향과 모양 모두 아름다워 귀부인들의 마음을 끌기에 좋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클로에가 설명했다. 장미잼은 장미를 다양하게 활용하는 국가인 터키에서 처음 만들어진 것인데, 그녀가 생각하기에 제국에서도 인기를 끌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포트넘 부인은 반가운 듯 짝 손뼉을 쳤다.

“정말 좋은 생각이에요! 바텐베르크 부인은 어쩜 그리 박식하고 발상이 탁월하세요?”

“으음…… 뭐, 그냥 평범한걸요.”

“평범은요! 밀크잼 같은 멋진 음식을 개발하신 분께서!”

21세기 한국인의 기준으로는 평범한 것이었다. 클로에는 포트넘 부인의 칭찬이 무척이나 부끄러웠다.

* * *

클로에와 알폰스가 황궁 연회에 초청받은 것은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뒤였다.

이번 연회는 여름마다 돌아오는 종교 축일 기념 연회로, 황궁에서 치러지는 가장 큰 행사 중 하나였다. 그만큼 중요한 자리였다. 수도에 거주 중인 귀족가에서는 대부분 참석했으며, 종종 타지에서도 이날을 위해 올라와 참석하는 귀족들도 있을 정도였다.

그러니 공작 부부인 바텐베르크 부부가 참석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알폰스는 최근 클로에가 무척 바쁘게 지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저택 내의 예산 관리와 사용인 감독 등의 평범한 귀부인들이 하는 업무를 해치우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의 사업 역시 매우 열정적으로 꾸려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알폰스는 클로에에게 굳이 귀찮은 일정을 하나 더 보태주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다른 곳이 아닌 황궁에서 주최하는 연회이니 거절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좋은 선택이 아닌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큰일이 날 것도 아니었다. 알폰스의 평소 성향도 있고, 대처만 적절히 한다면 큰 무리 없이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연회에 초청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은 클로에는 이렇게 반응했다.

“중요한 연회라고요? 그렇다면 당연히 가야죠.”

“굳이 참가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부인. 안 그래도 업무로 바쁘시지 않습니까.”

클로에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런 것도 공작부인으로서의 업무 중 하나인걸요. 알폰스와 함께 간다면 저, 별로 힘들지 않을 것 같아요.”

그녀는 자신 때문에 바텐베르크 공작가나 알폰스에게 실낱같은 불이익이라도 돌아오는 것을 원치 않았다.

알폰스는 그녀를 설득하려고 했으나 클로에는 의외의 면에서 완고한 면이 있었다. 결국 그녀의 강력한 주장으로 공작 부부는 연회에 참석하기로 약조했다.

연회 당일. 바텐베르크 부부는 연회의 많은 참석자들의 시선을 끌었다.

공작부인의 생일 축하연은 사교계에서 제법 화제가 되었다. 사교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클로에 바텐베르크라는 여자의 변화는 대단한 이슈였다. 고작 일 년 전까지만 해도 망신을 당하고 두문불출해 알음알음 비웃음을 샀던 그녀는 어느 순간, 어디에 내놓아도 무시당하지 않을 어엿한 공작부인이 되어 있었다.

제일 두드러지는 변화는 그녀의 태도였다. 그녀의 떳떳하고 자신감 있는, 그러나 자만하진 않고 예의가 있으며 성숙한 태도는 도저히 이전의 그녀와 같은 사람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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