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부인의 50가지 티 레시피 2권
목차
8장
9장
10장
11장
12장
13장
14장
8장
원래 아서는 이 모임에 동참할 생각이 없었다. 보통 관리직을 겸하는 고위 귀족들의 모임에서는 정치적인 얘기가 자주 나오기 마련이었고 그는 그런 일엔 통 관심이 없었다. 게다가 그는 평소 자신에 대한 걱정이 많은 아버지와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고위 귀족 중에는 젊고 예쁜 여자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참석하게 된 건 반강제적인 이유였다. 배울 것이 많을 거라며 황제가 반쯤 끌고 오다시피 한 것이다.
오는 내내 아서가 심드렁한 얼굴을 하고 있던 건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막상 자리에 도착하자, 그의 얼굴에 약간의 관심의 빛이 돌았다.
‘이런! 아바마마도 참. 바텐베르크가 왔으면 왔다고 말씀을 하시지.’
클로에에게 딱히 관심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오늘의 참석자 중 그녀가 제일 예쁜 것이 사실이었다. 게다가 저번에 그녀와 만났던 일은 꽤 재밌었고, 이후 공작 부부가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한편 아서를 본 클로에는 찝찝해졌고, 알폰스는 불쾌해했다. 이 자리에 그가 참석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황제와 고위 귀족이 여럿 있는 품위 있는 자리라서 그런지 아서도 눈에 띄는 일은 벌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평소보다 무척 조용했다.
그늘 아래, 가만히 앉아 있어도 솔솔 불어오는 산들바람이 꽃향기를 싣고 오는 자리에서 그들은 평화롭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화의 내용은 주로 정치적인 논의와 시시콜콜한 잡담이었다.
돌고 돌던 대화의 주제는 어느덧 소일거리로 옮겨왔다.
“저희 안사람은 요즘 승마에 푹 빠졌답니다. 그래서 안사람만을 위한 승마장을 하나 만들어 주기로 했지요.”
반쯤은 자기 자랑을 담아 로네펠트 후작이 말했다. 클로에가 진심을 담아 감탄했다.
“그렇군요. 승마라니 멋진걸요.”
그녀는 운동에는 재능이 없었다. 전생에도 그랬지만, 클로에의 몸은 평균보다 많이 허약한 편이어서 더 그랬다.
“호호, 별거 아니랍니다. 그건 그렇고 바텐베르크 공작부인께서는 즐기시는 것이 있나요?”
“아, 저는…….”
로네펠트 후작부인의 질문에 반사적으로 대답할 뻔한 클로에는 잠시 알폰스의 눈치를 보았다. 그들은 목걸이 사건 뒤로 서로 바쁘다는 핑계를 대면서 티타임을 가지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알폰스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터져 나왔다.
“저희 안사람은 차를 즐깁니다.”
그가 먼저 말했다는 것에 클로에는 조금 놀랐다.
순간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대부분 깜짝 놀랐다. 여전히 제국에서 차는 미개한 야만국에서나 마시는 것이라는 편견이 강했다.
“허……허허, 그렇군요. 바텐베르크 공작부인께서는 취향이 특이하신 것 같습니다.”
윈체스터 공작의 어색한 반응에 알폰스가 담담히 말했다.
“제국인들이 흔히 가지고 있는 편견과 달리 안사람의 차에는 깊이와 품격이 있습니다. 공작도 저희 안사람이 우린 차를 한 모금만 드신다면 생각이 달라지실 겁니다.”
“아, 아니, 제 말은 그러한 뜻이 아니라…….”
윈체스터 공작이 알폰스의 말에 당황하여 안절부절못했다. 그들은 작위로 따지자면 같은 공작이지만 각 공작가 사이의 권력과 재력에는 차이가 있었다. 물론 바텐베르크의 규모가 더 컸다.
그런 와중 로네펠트 후작부인이 관심을 보였다.
“안 그래도 클로버필드 부인이 공작부인의 차를 극찬하더라고요. 나뭇잎을 우린 물인데 우유 향이 나서 무척 신기했다고 하던데요.”
“차에서 우유 향이 난단 말이오? 그거참 신묘하군.”
황제도 관심을 보였다. 여태까지 답지 않게 대화를 듣고만 있던 아서가 끼어들었다.
“그 정도는 보통이죠. 저번에 클로에…… 아니, 바텐베르크 공작부인이 제게 우려 준 차는 꽃과 과일 향이 나고 꽃잎이 섞여 있는데 꽤나 놀라웠다니까요.”
아서는 아는 얘기가 나오면 끼어들어서 잘난 척하고 싶어 안달하는 타입이었다. 이 자리에서 클로에의 차를 마셔 본 사람은 바텐베르크 공작 부부를 제외하면 자신밖에 없다 보니 그는 약간 신이 나 있었다.
“향은 눈 돌아갈 정도로 화려하고 혀 위에선 다채로운 맛이 춤을 추는 게 꼭 아주 좋은 와인을 마시는 기분이었어요. 하, 그 맛을 여기 계신 다른 분들과도 나눌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아쉽군요.”
그가 의기양양한 태도로 말했다.
무려 세 명의 간증에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크게 호기심이 동했다.
“정말 신기하네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도 공작부인의 차를 맛보고 싶은걸요.”
윈체스터 공작부인이 말했다.
“저도 그래요. 정말 궁금해요.”
로네펠트 후작부인도 말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는 게 어떻겠소.”
황제가 끼어들었다.
“바텐베르크 공작부인, 혹시 불편하지 않으시다면 이 자리에서 그 차라는 것을 우려 주실 수 있겠소. 과인도 호기심이 동해서 오늘 부인의 차를 맛보지 못한다면 잠자리에 들 수 없을 것 같소.”
황제의 농담은 분명 농담인데도 불구하고 왠지 모를 압박감이 느껴졌다.
이 모든 일이 클로에가 어 하는 사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녀는 몹시 당황스러웠다.
다른 곳도 아니고, 황궁에서!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제의 앞에서! 차를 우려야 한다니? 아무리 차 우리는 걸 좋아하는 그녀라지만 이건 몹시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분위기가 이렇게까지 되었는데 거절을 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당황한 티를 숨기며 공손하게 말했다.
“제 부족한 솜씨로 이곳에 모이신 분들께 누가 되지 않는다면 영광으로 삼겠습니다.”
“허허, 공작부인은 참 겸손하시군. 필요한 것이 있다면 뭐든 가져오게 할 테니 말씀만 하시오.”
이렇게 해서 클로에는 고위 귀족들과 황제의 눈앞에서 차를 우리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사람을 불러 공작저 티룸에서 다구 몇 개와 차통을 가져오게 했다. 다구는 도자기로 되어 있으니 꼭 취급에 주의해 달라고 언질을 주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공작저는 황궁에서 그리 멀지 않았기에 물건들은 오래지 않아 도착했다. 차와 다구들이 도착하자, 클로에는 하녀에게 갓 끓인 물을 가져다주길 부탁했다.
황제는 클로에의 찻잎에 큰 관심을 보였다.
“동글동글한 것이 마치 구슬 같군. 이게 정말 찻잎이 맞소?”
황제의 말에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허리를 숙여 찻잎을 들여다보았다.
과연, 이번의 차는 녹색의 잎이 동글동글 말려 있는 형태였다. 여태껏 우렸던 검은 잎의 홍차들과는 모양새가 달랐다.
“네, 그렇습니다.”
“호오, 찻잎을 말아 놓은 건가. 이렇게 작게 말려 있으면 물에 우러나기 힘들 텐데.”
클로에가 따끈하게 예열한 다구들을 꺼내며 대답했다.
“뜨거운 물을 부으면 잎이 바로 펼쳐지게 됩니다, 폐하.”
“허허, 그런 것이구려. 다구들이 독특하게 생겼군. 이국의 것이오?”
황제가 클로에가 꺼낸 다구들을 가리켰다.
“마치 온(溫)의 것처럼 보이는데.”
“맞습니다. 온의 차입니다, 폐하.”
클로에는 찻잎 위에 뜨거운 물을 부어 30초 정도를 기다렸다가 물을 따랐다. 찻잎을 씻기는 과정이었다. 그다음 다시 뜨거운 물을 붓고 우려내어 찻잔에 조심스레 따라 내었다.
클로에는 겸손한 태도로 황제에게 첫 잔을 내밀었다.
“온의 철관음이라고 하옵니다, 폐하.”
“홍차가 아니네?”
이 말을 꺼낸 것은 아서 황자였다. 그는 찻잔을 들고 그 안의 연한 연둣빛 수색의 찻물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네. 이것은 청차라고 합니다.”
청차는 우롱차를 다르게 부르는 말이었다.
“오호, 청차라……. 향이 정말 달군그래.”
황제 역시 흥미롭다는 듯 찻잔을 들여다보더니, 곧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그가 찻잔을 들자, 자리에 있던 다른 사람들 역시 따라서 차를 마셨다.
순간 동시에 몇 명의 감탄이 터져 나왔다. 대부분 부인들이었으나 남자들 역시 차에 놀라움을 느끼고 있었다.
찻잔을 내려놓은 황제의 눈이 확연하게 커져 있었다. 그는 흥미로 반짝이는 눈으로 클로에를 돌아보았다.
“향이…… 아주 독특하군. 아주 달콤한 것이 마치 꽃향기 같지 않소. 설명해 줄 수 있겠소?”
클로에는 조곤조곤하게, 하지만 막힘없이 설명했다.
“물론입니다. 그것은 철관음 특유의 난꽃 향입니다, 폐하. 철관음은 차나무 잎을 가공했을 뿐 다른 향을 가미하거나 가향하지 않았지만 특유의 달콤한 난꽃과 과일의 향이 납니다.”
“다른 향을 입히지 않았는데 이런 향이? 믿을 수가 없군.”
황제는 한 모금을 더 머금어 음미했다. 설탕을 넣지 않았는데도 놀라울 정도로 달콤한 향기가 그의 혀를 감쌌다. 달콤하지만 결코 유치하지 않았고, 향기롭지만 아무리 마셔도 질리지 않았다. 귀부인의 우아함과도 닮은, 난꽃의 아름답고 섬세한 향이었다.
황제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걸렸다.
“이런 맛과 향이 존재한다니 놀랍기 그지없군. 좋은 차를 대접해 주어 고맙소, 부인.”
“아닙니다. 황송하옵니다, 폐하.”
클로에가 고개를 숙였다.
다른 사람들 역시 차가 마음에 드는 듯 틈틈이 감탄을 하며 마셨고, 알폰스는 말없이 잔을 비웠다.
그들은 철관음과 곁음식을 마음껏 즐기며 도란도란 담소를 나누었다.
이 와중에 황제는 클로에가 마음에 들었는지, 그녀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어째서 그렇게들 부인의 차에 대해 칭찬을 늘어놓았는지 알겠군. 이런 훌륭한 재주가 있을뿐더러 겸손하기까지 하다니. 공작, 공작은 이런 부인을 두어 참으로 기쁘시겠소.”
알폰스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제게는 과분한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클로에는 그 칭찬이 무척이나 머쓱했다. 목걸이 일 이후로 그들은 티타임도 잘 갖지 않고 서먹하고 데면데면하게 지내왔기 때문에 더 그랬다.
마침내 모임 자리가 파한 다음이었다. 로네펠트 후작 부부와 윈체스터 공작 부부는 이미 돌아갔고, 황제가 클로에에게 자꾸만 무언가를 묻는 바람에 바텐베르크 공작 부부는 조금 더 오래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때 공작 부부를 물끄러미 지켜보던 아서가 툭 내뱉었다.
“근데, 너희 왜 이렇게 서먹해? 부부 싸움했어?”
“네? 그, 그럴 리가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 말에 클로에와 알폰스, 두 사람이 다 화들짝 놀랐다. 두 사람은 최선을 다해 자신들은 부부 싸움을 하지 않았으며 아무 일도 없었다고 주장했다.
바텐베르크 부부까지 시종의 인도를 받아 돌아갔다.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황제가 중얼거렸다.
“소문으로는 바텐베르크 공작 부부의 사이가 좋지 않다고 들었는데, 생각 외로 괜찮은데.”
아서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했다.
“무슨 말씀 하시는 거예요? 둘이 완전 서먹했잖아요. 저건 백 프로 싸운 거라니까요.”
“그렇다곤 해도 서로 예의는 완벽하게 차리고 있지 않더냐. 보통의 서로 등한시하는 부부와는 다르지. 게다가…… 늙은이의 감이지만.”
황제는 생각했다.
두 사람의 사이에는 기류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정약으로 결혼한 부부 사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묘한 기류가.
그는 빙긋이 웃었다.
“제법 어울리는 한 쌍이야.”
그 말에, 황자는 왠지 불퉁하게 대답했다.
“뭐가 어울려요? 하나도 안 어울리던데…….”
“너도 한량 짓은 그만하고 어서 참한 여인을 찾아 결혼해라. 어서 손주로 이 늙은이를 기쁘게 해 달란 말이야.”
“쳇…….”
* * *
“부인.”
공작저로 돌아가는 마차 안.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클로에는 알폰스의 부름을 듣지 못했다.
“부인.”
두 번을 불리고 나서야 클로에는 남편이 자신을 부르고 있음을 알았다. 그녀가 의아한 눈을 그에게 돌렸다.
알폰스는 사뭇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번에는 제가 미안했습니다.”
클로에가 웃었다.
“아, 괜찮아요.”
그러나 눈치 좋은 알폰스는 그것이 진심이 담기지 않은 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조금도 기쁘지 않았으나, 입을 다물었다.
곧 마부가 공작저에 도착하였음을 알렸다.
마차가 멈추어 섰다. 마부가 열어주는 문으로 알폰스가 먼저 내리곤, 그가 클로에를 향해 팔을 뻗었다. 내리는 것을 도와주려는 것이었다. 클로에는 평소처럼 그의 손을 잡았다.
“……!”
그러나 클로에는 평소와는 다른 감각을 느꼈다. 그녀의 몸을 감싸는 알폰스의 단단한 팔이 느껴졌다.
마치 그녀를 감싸 안는 듯한, 평소와는 다른 에스코트에 그녀는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황자가 자신의 손을 잡았을 때와 달리, 불쾌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두근거리는 쪽에 가깝달까.
‘안 돼, 설레지 마.’
클로에는 눈을 질끈 감고 생각했다.
알폰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함께 걸었다.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집사 키엘이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클로에는 키엘에게 미소 지어 보였다. 그녀는 평온을 가장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그 노력은 문턱을 넘자마자 깨어져 버렸다.
“……!”
클로에는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다. 자신의 몸이 옴짝달싹하지 않는 이유 역시 몰랐다.
그녀가 처음으로 느낀 것은 체온이었다. 자신의 몸을 빈틈없이 감싸고 있는 서늘한 체온. 그리고 정수리에서 느껴지는 숨결과,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끌어안고 있는 단단한 팔.
알폰스가 그녀를 끌어안은 것이었다.
클로에는 헛숨을 들이켰다.
알폰스가 자신을 뒤에서 끌어안았음을 깨달은 순간 그녀는 머릿속이 텅 비어 버리는 것 같았다. 놀란 심장이 마구잡이로 쿵쾅거렸다.
알폰스의 체온은 낮은 편이었다. 체온이 조금 높은 편인 클로에에겐 조금 서늘하게 느껴질 정도로.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로에는 자신에게 닿아 있는 면적이 뜨거운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알폰스에게 닿아 있는 부위가 전부 하나하나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
뒤늦게서야 정신을 차린 그녀는, 이곳이 대저택의 중앙 현관이며, 자신들의 주변에는 수십 명의 사용인들이 있고, 그들 모두가 발을 멈추고 경악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클로에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을 보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그녀에게 익숙지 않았다.
그녀는 알폰스를 살짝 밀쳤지만, 알폰스는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단단히, 조금쯤 숨이 막힐 정도로 그녀의 몸을 조여 올 뿐이었다. 알폰스의 숨결이 바로 옆 귓가에서 느껴져 클로에는 다시 한 번 흠칫 놀라야만 했다.
“아직 익숙지 않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낮고 차분한 울림이 있는, 중저음의 남성적인 음색.
“인간적인 마음이라는 것을 전달하는 방법도 모릅니다. 죄송합니다.”
클로에는 그제야 알폰스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지 깨달았다.
알폰스는, 지난번 목걸이 일 이후로 그 일을 내내 신경 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일 이후로 클로에가 자신에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는 사실까지 눈치채고는, 그녀를 계속해서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노력하겠습니다. 배워 보겠습니다. 당신이 원한다면.”
알폰스의 팔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얇은 여름옷 아래로 느껴지는 그의 단단한 팔 근육이 긴장으로 가늘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클로에는, 그 목소리에, 그 말에 진심이 어려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가 그에게 그렇게나 원했던, 그녀가 가지고 싶었던. 그의 진심 어린 말 한마디.
심장은 여전히 큰 소리로 뛰고 있지만,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분 좋은 두근거림에 가까웠다.
‘사랑은 없어도 내 배우자인데, 싫어도 평생의 반려인데.’
알폰스의 가장 깊은 곳에 파묻혀 있는 클로에는 그의 심장 박동 역시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심장이 뛰고 있었다. 평소보다 더 빠르고, 세차게. 그리고 격렬히 뛰고 있을 심장 아래에서 흐르고 있을 뜨거운 피.
그는 냉혈한이 아니었다. 뜨거운 피가 흐르는, 진심을 가지고 있는, 인간적인 부분이 있는…….
사람이었다.
‘아주 조금만 기다려 줘도 괜찮지 않을까?’
클로에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걸렸다. 그녀는 이제, 진심으로 대답해 줄 수 있었다.
“……네.”
클로에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영영 풀리지 않을 것만 같았던 단단한 팔이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알폰스는 클로에를 그녀의 침실까지 데려다주고는, 이전 같았으면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부드럽게 풀린 목소리로 편히 쉬라고 말해주었다. 언제나와 같은 예의상의 인사가 아닌,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물론 이 일은 공작저 내의 사용인들 사이에서 큰 화젯거리로 떠올랐다.
이건 대사건이었다. 그, 공작님이, 그, 마님을 훤한 대낮에 사람 많은 현관에서 끌어안았다. 13개월이나 마님에게 아무런 관심도 가지지 않았던 사람이!
사실 그동안 알폰스와 클로에의 관계가 많이 개선되었다는 사실은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한 달이나 넘게 매일 함께 티타임을 가지고 함께 사업도 했는데 모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두 사람의 관계가 단순히 개선된 정도를 넘어선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나왔다.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두 사람 사이에 우정이나 가족애를 넘어 연애적 의미의 사랑이 싹튼 것이 아니냐는 의견 말이다.
“설마, 13개월이나 냉대를 했는데 한 달 만에 갑자기 그렇게 되었다고?”
“하지만 일리는 있어.”
알폰스와 클로에, 두 사람의 관계는 사용인들 사이의 최고로 흥미로운 가십이자 화제였다.
한편 이런 상황을 단순한 가십거리로 즐길 수 없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콜린 부인이었다.
그녀는 요즘 사는 것이 사는 것 같지 않았다. 잘 때에는 절벽 끝에서 클로에에게 밀쳐져 추락하는 악몽을 꾸고 눈을 떠도 악몽 같았다.
처음에는 클로에에 대해 호의적인 언사를 보이는 사용인들을 보이는 족족 잡아 혼냈지만, 그 수가 너무 많아지자 이제는 그것도 어렵게 되었다. 더 이상 하녀장과 시종장도 콜린 부인, 그녀의 편이 아니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고작 한 달 만에 이렇게 되다니.
이젠 더 이상 발 디딜 틈도 없다고 생각했다.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콜린 부인은 이제 클로에의 평판을 추락시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바칠 수 있었다.
콜린 부인은 절박한 기분으로 생각했다. 마침 기회가 단 한 번 남았다. 저택 내에서는 물론이고 사교계에서의 클로에의 평판을 떨어뜨릴 기회가.
클로에의 생일 연회가 다가오고 있었다. 콜린 부인의 마지막 기회는 바로 그때였다.
마침내 클로에의 생일날.
잠에서 깨어난 클로에는 방에서 아침 식사를 한 뒤 그녀를 단장시킬 스타일링 전문가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평소라면 전속 하녀가 해 주는 단장만으로도 충분했지만, 오늘은 다른 날도 아니고 그녀의 생일을 기념하는 축하연이 열리는 날이었다. 특별한 날에는 특별한 단장이 필요했다.
전문가들은 때맞추어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공작부인. 오늘 하루 공작부인을 최고로 아름다운 분으로 만들어 드릴 쉐릴 자매입니다.”
클로에는 진작 평판 좋은 전문가를 수소문하여 예약해 놓은 상태였다. 그들이 가져온 온갖 화장 도구가 든 가방은 일곱 개나 되었고, 드레스까지 가져오느라 마차 세 대가 필요했다고 했다.
“어서 와요. 잘 부탁드려요. 연회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꾸며 주시면 좋겠군요.”
“걱정 마세요. 연회의 주인공다운 아름다운 모습으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쉐릴 자매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도움에 따라 드레스와 액세서리를 착용하고 화장과 머리를 하는 클로에는 전문가들의 탁월함을 새삼 느꼈다. 콜린 부인이나 니나도 상당히 뛰어난 솜씨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당연히 전문가만큼은 아니었다.
클로에는 자신이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다만 클로에는 모르는 큰 문제가 하나 있었다.
콜린 부인은 바텐베르크의 인장과 클로에 그녀의 직속 시녀라는 사실을 이용해 클로에가 미리 해 두었던 예약의 내용을 바꾸었다.
콜린 부인이 의도한 것은 그것이었다. 클로에를 알폰스의 옛 애인들 중 하나인 달리아와 똑같이 단장시키는 것. 달리아는 알폰스의 옛 애인들 중 최고로 미인이었고 사교계 여인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알폰스의 아내가 그런 달리아를 흉내 낸다면 그만큼이나 우스운 일이 없을 것이다. 무도회의 참가자들과 알폰스는 클로에가 달리아에 대한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테니까.
바텐베르크 공작부인이 달리아와 똑같이 분장하기를 원한다는 말에 쉐릴 자매는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그래도 공작부인은 고객이었다. 그것도 우량 고객. 고객께서 원하시는데 디자이너가 토를 달 필요는 없었다.
그리하여 몇 시간에 걸쳐 쉐릴 자매는 클로에를 정성스럽게 단장시켰다. 마침내, 지루하고 피곤한 단장의 시간이 지나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본 클로에는 깜짝 놀랐다.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그녀는 결 좋은 머리를 높이 틀어 올리고 목깃을 세운 벨라인의 진홍빛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무척 성숙하고 위엄 있는 모습이면서도, 드레스의 빛깔은 알폰스의 눈동자 색깔과 잘 어울렸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아름답긴 분명 아름다운데, 미묘하게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머리 모양도, 화장도, 액세서리와 드레스도. 마치 다른 사람의 옷을 빌려 입은 듯한 기분이었다.
‘뭐, 기분 탓이겠지. 나는 패션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까, 전문가들이 보기엔 뭔가 다를 거야.’
그렇게 생각한 클로에는 쉐릴 자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돌려보냈다.
아직은 좀 이른 시간으로, 무도회가 시작하려면 3시간이 더 남았다. 단장을 하느라 힘들었으니 이젠 좀 앉아서 쉬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녀는 바텐베르크의 안주인이었고 무도회를 위한 마지막 준비를 해야 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곧 포트넘 부인이 오기로 했다. 그녀는 다른 손님들에 비해 일찍 와서 클로에를 도와주기로 한 것이었다.
‘포트넘 부인이 3시간 전에 온다고 했으니, 곧 도착하겠구나.’
클로에는 포트넘 부인을 맞이하기 위해 홀을 향해 내려갔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그녀가 내려가는 동안 마주치는 사용인마다 그녀를 놀란 눈으로 빤히 쳐다보는 것이 아니겠는가.
‘클로에가 너무 예뻐서 그런가?’
클로에는 고개를 갸웃했다. 물론 클로에는 평소에도 아름답기 때문에 한껏 단장한 지금은 더더욱 아름다울 것이었다.
그런데…… 사용인들의 표정에서 읽어 낼 수 있는 감정은 단순히 아름다움에 대한 경탄, 그것뿐이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경악이나 당혹스러움에 가까운 걸로 보였다.
평소 같았으면 사용인들 중 아무나 한 명을 붙잡고 물어보았을 것이나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포트넘 부인이 올 시간이 거의 다 되었던 것이었다.
클로에는 종종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 마침내 홀에 다다랐다. 현관의 밖으로, 포트넘가의 문장이 새겨진 마차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친구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바텐베르크 부인!”
“어서 와요, 포트넘 부인.”
클로에의 인사에 반가운 듯 다가오던 포트넘 부인이 발을 멈췄다. 으레 그랬듯이 그녀를 포옹하려던 클로에의 팔이 어설프게 허공을 휘저었다.
발을 딱 멈춘 포트넘 부인은 장갑 낀 손으로 입을 가리고 경악한 눈으로 자신의 친구를 바라보았다. 사교계에서 발이 넓은 편인 포트넘 부인은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저 차림은……. 틀림없었다. 달리아 후작 영애의 것이 아니던가!
또한,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남편의 옛 애인과 똑같은 차림을 하고 자신의 생일 연회에 나타난다면 큰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 뻔했다. 포트넘 부인은 자신의 친구가 그렇게 모욕당하는 모습은 결코 볼 수 없었다.
무도회는 겨우 세 시간이 남았다. 완전히 새로 스타일링을 하기에는 빠듯한 시간이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이 상태로 그녀를 손님들 앞에 내보일 수는 없었으니까. 그렇게 결정한 포트넘 부인이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바텐베르크 부인, 부디 저를 따라와 주시겠어요?”
“네? 지금 바로 말인가요?”
“네. 굉장히 중요한 일이에요. 한시가 급하니, 가면서 설명해 드릴게요.”
클로에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고작 세 시간 전, 무도회 준비가 막바지로 이른 때였다. 자신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도회의 개최자인 바텐베르크의 안주인이 아니던가. 자리에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포트넘 부인이 너무나 진지해 보였다. 클로에는 그녀가 그렇게 심각한 얼굴을 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포트넘 부인이 저렇게까지 말한다면, 분명 이유가 있겠지.’
클로에는 자신의 친구를 믿었다. 그녀는,
“네, 알겠어요.”
라고 대답하고는 포트넘 부인이 이끄는 대로 그녀가 타고 온 포트넘 가문의 마차에 탔다.
“마부, 시내로 가 주세요.”
포트넘 부인이 행선지를 말하자마자 덜그럭하는 약한 흔들림과 함께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제야 클로에는 자신이 외출 준비를 조금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시내로 가는 길에 포트넘 부인은 클로에에게 그녀를 갑작스레 끌고 온 이유를 설명했다. 지금 그녀의 차림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알폰스의 옛 애인 달리아와 똑같으며, 그대로 무도회에 나간다면 큰 비웃음을 당하리라는 것까지.
클로에는 경악해 붉은 연지를 바른 입을 손으로 가렸다. 등골에 차갑게 내려앉는 당혹스러움과, 그 사실을 미리 알려 줘서 위기를 면하게 해 준 포트넘 부인에 대한 고마움이 동시에 느껴졌다.
“대체 누가 그렇게 꾸며 준 거예요? 대체, 무슨 의도로 부인께 이런…….”
포트넘 부인이 말꼬리를 흐렸다. 클로에는 입술을 깨물었다. 클로에의 싸늘하게 식은 눈을 본 포트넘 부인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포트넘 부인의 지시에 따라 빠른 속도로 달리던 마차가 어느 지점에서 멈추었다. 마차에서 내린 클로에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부티크 숍이었다.
“이곳의 디자이너는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명성에 비해 실력이 아주 뛰어나요.”
포트넘 부인이 속삭였다. 과연, 간판에 쓰인 이곳의 이름은 클로에가 들어 본 적이 없는 이름이었다. 귀부인들 사이에서 난다 긴다 하는 부티크 숍의 이름 정도는 클로에도 알고 있었다.
“여기를 너무 좋아해서 저만 알고 있으려고 했는데, 바텐베르크 부인에게만 특별히 알려 드리는 거예요.”
포트넘 부인이 웃으며 속삭였다. 그녀는 자작부인이니만큼 일류 부티크 숍에 다니지는 못하지만, 나름대로 자신만의 단골집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포트넘 부인은 클로에와 팔짱을 낀 채 부티크 숍에 들어갔다.
숍의 내부로 발을 딛는 순간 갓 가공한 천의 냄새와 향수 냄새가 났다. 넓지 않은 숍은 온갖 가구와 의상의 재료 등이 쌓여 있어 마치 미로 같았다.
“모건, 저예요.”
포트넘 부인이 익숙한 듯 이름을 불렀다. 오래지 않아, 카운터 뒤에서 사람이 나타났다.
“어머, 포트넘 부인. 오랜만이네요.”
강한 곱슬머리의 붉은 머리칼이 치렁거렸다. 모건이라는 유명하진 않지만 실력 있는 디자이너는 크고 두꺼운 안경을 쓴 여자였다.
사실 클로에의 모건에 대한 첫인상은 별로 좋지 않았다. 그녀는 부티크 숍의 디자이너라면 최신 유행의 아름다운 드레스를 빼입고 완벽한 화장을 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눈앞에 보이는 여자는 유행의 선두 주자라기보다는 히피나 혹은 그와 비슷한 무언가로 보였던 것이다.
“아주 아름답게 꾸미고 오셨네요. 드레스를 주문하시려는 건가요?”
“아니요, 모건. 오늘의 손님은 제가 아니라 이쪽이에요.”
포트넘 부인이 클로에에게 눈짓을 했다. 그제야 자신의 단골손님 외의 다른 손님이 와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건지 모건이 안경을 고쳐 썼다.
“오호라, 나비 러프에 행잉 슬리브. 목깃은 높고 허리선은 낮아요. 버슬은 잔뜩 부풀렸군요. 등나무인가요? 아름답죠. 매우 아름답지만 유행은 이미 지났어요. 정확히 말하자면 21개월 전에요. 특히 이 컬러, 최근의 유행이라고 보기엔 채도가 지나치게 높아 유치해요. 저 같으면 채도를 낮추어 차분하게 만들거나 컬러를 아예 바꿨을 거예요. 손님에겐 짙은 레드보다는 부드럽고 명도가 높은 컬러가 어울릴 것 같으니까요.”
클로에는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모건의 시선이 무척 부담스러웠다. 마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그녀에게 읽히는 기분이었다.
그녀의 드레스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모건이 시선을 올렸다.
“무엇보다 신선함이 없어요. 지나치게 식상하고 진부한걸요. 머리 모양부터 드레스, 액세서리까지요. 보이지는 않지만 아마 구두도 그렇겠죠. 21개월 전에 달리아 후작 영애가 유행시킨 패션 그대로, 그 어떠한 재해석도 느껴지지 않는, 오로지 베끼기에만 급급한 차림. 끔찍하군요. 저 같으면 당신을 그렇게 꾸며 놓은 디자이너와 다시는 거래하지 않을 거예요. 그건 그렇고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모건이 장부로 보이는 수첩과 펜을 꺼냈다. 클로에가 덤덤히 말했다.
“클로에 바텐베르크예요.”
“아하, 네, 클로에 바텐…… 바텐베르크…… 뭐라고요?!”
모건이 입을 떡 벌렸다.
“바, 바, 바, 바텐베르크 공작부인이신가요?!”
클로에는 몹시 서먹해졌다. 그녀는 곁에 있던 포트넘 부인을 흘끗 보았다. 포트넘 부인은 배까지 잡고 웃음을 참으려 애쓰고 있었다.
클로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모건의 두꺼운 안경이 반쯤 내려와 그녀의 코 아래에 걸렸다. 그녀는 입을 떡 벌리고 카운터 위에 두 손을 올려놓은 채 그저 클로에를 보고만 있었다.
몇 초 뒤, 모건이 다급히 수습했다.
“죄, 죄송해요. 그, 그렇게 높으신 분을…… 만나 뵌 적이 없어서.”
“알겠죠? 모건, 이건 좋은 기회예요.”
포트넘 부인이 끼어들었다.
“공작부인이시라고요! 당신이 이분을 잘 모시면 그만큼 좋은 홍보가 또 어디 있겠어요? 분명 당신에게도 어마어마한 도움이 될 거예요. 그러니, 당신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해 주길 바라요.”
모건이 꼴딱 침을 삼켰다. 그녀가 약간 주눅 든 태도로 클로에에게 말했다.
“저, 공작부인께 너무나 큰 실례를 하였어요. 깊이 사죄드립니다.”
“아니에요, 당신의 말 그대로 이 드레스는 끔찍해요. 저한테 잘 어울리지도 않고요. 오히려 당신의 안목을 확인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클로에가 웃으며 말했다. 그제야 모건은 아까 전의 당당한 태도를 반쯤 회복했다.
“흠흠, 그러시다면. 드레스를 맞추러 오신 건가요?”
“아니요, 오늘 연회를 주최해요. 드레스부터 메이크업, 헤어까지, 전부 맞추고 싶어요.”
“아하, 연회는 언제 시작하나요?”
“……2시간 30분 뒤요.”
모건은…… 입을 떡 벌렸다. 그녀는 잠시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리다가, 계산대를 내리쳤다.
“말도 안 돼요! 전부 하는 데에 최소한 8시간은 걸릴 거예요. 2시간 30분이라니! 요, 용서하세요, 공작부인. 하지만 전 못 해요! 정말이에요.”
클로에와 포트넘 부인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포트넘 부인이 설득했다.
“다시 생각해 봐요, 모건. 아마 연회의 시간을 조금 늦출 수 있을 거예요. 이만한 기회가 어디 있겠어요? 아주 완벽하게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바텐베르크 부인은 원래도 아름다우니, 그 아름다움을 조금만 돋보이는 정도로 해 보면 되잖아요.”
모건은 무엇으로 물들였는지 모를 초록색 손톱을 깨물면서 고민했다. 모건, 뛰어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사생아 출신이라는 이유로 언제까지나 2류에 머무르고 있는 그녀가 만일 이번 기회를 잡지 않는다면, 앞으로 평생 공작부인을 코디할 기회가 올까?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다른 디자이너의 조수였던 시절부터 일찍이 마음속에 묻어 놓았던 디자이너로서의 야심이, 열정이 부르르 떨며 기지개를 켰다. 얼마간 고민한 끝에, 모건은 두꺼운 안경알 너머로 눈을 빛내며 말했다.
“좋아요, 해 보겠어요.”
이후의 일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클로에 자신조차 모를 정도로 빠르게 이루어졌다. 디자이너 한 명과 고작 두 명뿐인 조수들은 클로에나 포트넘 부인이 알아들을 수 없는 용어로 쉴 새 없이 의사소통을 하며 손을 놀렸다.
“운이 좋게도, 고객님의 신장과 체격은 평균적이라 사이즈가 맞는 샘플 드레스가 몇 벌 있어요. 흠, 하체의 길이와 가슴둘레, 허리둘레는…… 평균적이지 않지만…….”
귀부인이 드레스를 고르는 방식이란, 원래라면 하나하나 입어 보고 고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으므로 적당히 얼굴 밑에 대어 보고 입은 모습을 가늠해 보기로 했다.
“흠, 이건 아냐. 이것도 아냐.”
그러나 클로에는 조금도 가늠해 볼 수 없었다. 모건은 드레스를 클로에의 얼굴 밑에 대기가 무섭게 치워 버렸던 것이다. 그 기세가 하도 살벌해 클로에는 차마 자신도 보고 싶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 색상은 공작부인의 머리 색에 어울리지 않아. 이건 허리가 굵어 보일 거야. 흠, 이건 나쁘지 않은가? 아니야, 뭔가 부족해.”
사실 클로에가 보기에는 모든 드레스가 아름다웠고 이 중 아무거나 대충 걸쳐도 평타는 칠 것 같아 보였으나, 디자이너의 눈에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렇게 모건이 던져 의자 위에 쌓여 가는 드레스가 늘어갔다. 드레스 더미가 점차 높아짐에 따라 클로에는 불안해졌다. 어쩌면, 이 중에서 내게 맞는 드레스는 없는 게 아닐까? 모건이 ‘음, 역시 안 되겠네요. 안 됐지만 그냥 돌아가세요.’라고 말하며 돌려보내지는 않을까?
클로에는 한 발짝 뒤에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는 포트넘 부인에게 불안함을 담은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포트넘 부인은 그저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남아 있는 드레스는 점차 줄어들었다. 절반…… 삼분의 일…… 사분의 일…… 오분의 일…….
그러는 동안 클로에는 불안과 초조에 쪼그라든 간이 남아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마침내 행거에는 단 한 벌의 드레스가 남았다.
모건은 안경을 고쳐 쓰더니, 마지막 남은 드레스를 클로에의 얼굴 밑에 대어 보았다.
‘이것마저 맞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클로에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다른 드레스 숍을 찾아다닌다면 1시간 만에 어울리는 옷을 찾아 주고 수선도 해 줄 곳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그 방법이 그렇게 끌리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모건의 드레스에서 깊은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그때였다.
“이거예요.”
“네?”
“이거라고요.”
클로에가 돌아본 모건의 얼굴은 눈에 띄게 밝아져 있었다. 입꼬리가 귀에 걸릴 것 같았다.
모건은 클로에의 몸을 돌려 포트넘 부인과 조수들에게 그 모습을 보여 주었다. 클로에는 조수들의 얼굴이 환해지는 것을, 포트넘 부인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기뻐하는 것을 보았다.
그제야 모건은 클로에를 전신 거울이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세상에…….”
클로에는 저도 모르게 거울 위에 손을 짚었다. 그녀는 멍하니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드레스였다. 엷은 베이지 빛의 그것은 로브 부분에 섬세한 진분홍빛 장미 패턴이 그려져 있었는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드레스 자체의 아름다움이 아니었다.
드레스는 홀로 아름답지 않았다. 입고 있는 사람보다 빛나거나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클로에를 빛나게 해 주고 있었다. 클로에 자신이 보기에도 이 드레스를 가져다 댄 자신의 얼굴은 한 톤 환해 보이고 생기가 흘러넘쳤다.
단순히 드레스 한 벌인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걸까? 마치 마법이라도 걸린 듯한 기분이었다. 클로에가 넋을 놓고 있는데, 누군가가 그녀의 어깨를 건드렸다.
클로에가 고개를 돌렸다. 모건이었다.
“입어 보시면 더 마음에 드실 거예요.”
추켜올린 안경 아래로 선명한 미소를 띠며 그녀가 말했다.
조수들의 도움을 받아 착의를 한 클로에는 전면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이리저리 비추어 보았다.
드레스는 어딜 봐도 완벽했다. 부드럽고 아름다운 베이지색은 클로에에게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적당히 파인 U자형 네크라인과 파니에, 상단은 꽉 끼고 하단은 부드럽게 팔랑이는 러플 소매는 그녀의 가녀리지만 볼륨감이 있는 몸매를 멋지게 표현해 주었다. 로브 아래의 하얀 스커트는 섬세한 레이스가 수놓아져 있어 세련되어 보였다.
등 뒤는 상, 하체가 이어진 느슨한 주름, 즉 와토 주름과 흡사한 것이 있어 망토 같은 드레스 자락이 바닥에 끌렸다. 그 덕에 단순한 가녀린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공작부인으로서 필요한 위엄과 무게감이 있어 보였다.
클로에는 어찌나 기뻤는지 얼굴까지 붉혔다. 그러나 모건이 다시 그녀의 어깨를 건드렸다.
“이것으로 만족하면 안 돼요. 아직 메이크업과 헤어가 남았잖아요?”
진짜 시간이 걸릴 일들은 이제부터였다.
드레스는 수선을 위해 조수 중 한 명의 손에 맡겨졌다. 이번에는 모건과 조수 나머지 한 명이 클로에에게 찰싹 달라붙어 각각 메이크업과 헤어를 담당했다.
콜린 부인의 작품인 아름다우나 클로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화장은 순식간에 지워졌다. 클로에는 눈을 감고 재빠르게 움직이는 손에 몸을 맡겼다.
한편, 클로에에게도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제일 먼저 그녀가 한 것은 공작저로 기별을 보내는 것이었다. 지금의 상황을 보건대 이곳에서 모든 일을 처리하고 공작저로 돌아가기에는 시간이 부족할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그녀는 드레스를 보기 전 조수에게 부탁하여 공작저로 기별을 보내게 했다. 일이 있어 귀택이 늦어질 것 같으니 연회 손님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상황을 수습해 달라는 것이었다.
두 번째로 한 것은 쉐릴 자매에게 연락을 하는 것이었다.
운이 좋게도 쉐릴 자매의 오늘 일정은 클로에를 단장시켜 주는 것 말고는 없었고, 그래서 그들은 빠르게 응대할 수 있었다. 클로에는 기별꾼을 통해 쉐릴 자매에게서 스타일링의 콘셉트가 달라진 이유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배후에 누가 있는지도.
클로에는 여태까지 있었던 자신을 방해하는 모든 일들의 배후에 콜린 부인이 있었음을 직감했다.
클로에가 생각하기에, 이번 일은 분명 선을 넘은 일이었다. 바텐베르크의 안주인인 그녀를 모독하고 공작부인으로서의 평판을 깎아내려 그녀를 추락시키겠다는 의도가 너무나 잘 보이지 않는가.
지금까지 사용인들에게 벌을 주지 않았던 것은 벌을 주고 싶어도 그녀에게 그럴 ‘힘’이 없었기 때문이지만, 지금은 달랐다. 지금은 대부분의 사용인들이 그녀의 말을 따랐고 사용인 감독권이 거의 돌아온 상태였다. 그녀는 콜린 부인에게 적합한 처우를 내리기로 결심했다.
어쨌든 클로에는 이곳저곳에 바쁘게 연락을 함과 동시에 얌전히 메이크업과 헤어 세팅을 받았다.
비록 최대한 빠르게 하고는 있다지만, 이 길고도 지루한 시간을 하루에 두 번이나 겪는 것은 상당한 인내심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다 되었습니다!”
그 말과 함께 클로에가 한숨을 쉬며 눈을 떴다. 모건의 손에 의해 드레스에 화장, 머리, 액세서리까지 풀 세팅을 한 그녀는 자신의 모습에 만족스러워했다.
클로에는 모든 비용을 바텐베르크가에 청구하도록 했다.
“정말 수고 많았어요, 모건. 무리한 조건에도 최선을 다해 주어 고마워요.”
클로에가 상냥히 웃었다. 지친 낯빛을 하고 있던 모건은, 그 말에 금방 웃음을 되찾았다.
본디 장사꾼에게 감사 인사를 하는 사람은 드물다. 되레 퉁명스러운 말투로 반말을 하거나 돈을 던지거나 하지 않는다면 다행이다. 더군다나 이쪽이 사생아 출신의 뒷배 없는 여성이고 저쪽이 귀족이라면 더욱 그렇다.
자신의 작품과도 마찬가지인 클로에가 아름답게 웃으며 감사 인사를 하자 모건은 피로가 날아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황송해하며 말했다.
“아닙니다, 부인. 이런 게 제 일인걸요.”
“당신의 성의와 뛰어난 재능을 결코 잊지 않겠어요.”
진심이 담긴 감사 치레와 작별 인사를 한 뒤 클로에는 포트넘 부인과 함께 부티크 숍을 나섰다. 시간이 촉박했다. 연회의 시작 시간에서 거의 한 시간이 지나 버렸던 것이다.
물론 이 정도 시간 만에 풀 세팅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기적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어쨌든 늦은 건 늦은 거였다. 게다가 그녀는 다른 누구도 아니고 이번 연회의 주최자, 바텐베르크의 안주인이 아닌가. 부디 알폰스가 잘 수습을 해 주었길 바라는 수밖에.
마차에 탄 그녀는 낯빛에서 초조한 기색을 지우지 못했다. 포트넘 부인이 눈치 좋게 마부에게 말했다.
“바텐베르크 공작저로 가 주세요. 전속력으로요.”
마부가 말에게 세차게 채찍질했다. 마차가 마치 폭주하듯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마침내 공작저에 도착한 그녀들은 거의 달리듯 홀을 가로질렀다. 이미 한 시간 하고도 삼십 분이 지나 있었다.
“어머, 마님! 돌아오셨군요!”
사용인들이 놀라 말을 걸었다. 클로에는 상황이 어떤지 알아보기 위해 한 하녀를 붙잡고 물어보았다. 하녀가 대답했다.
“각하의 지시로 집사님께서 열심히 수습을 하고 있어서 아직은 괜찮을 거예요. 그렇지만 어서 들어가 보시는 게 좋을 거예요, 마님. 마님이 나오지 않으셔서 손님들이 의아해하고 있어요.”
휴. 클로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키엘의 집사로서의 능력은 탁월했다.
클로에는 연회장으로 바로 들어가기보단 알폰스를 만나러 가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그와 나누어야 할 이야기가 있었다. 클로에는 알폰스가 집무실에 있다는 사용인의 말을 듣고 그를 찾으러 향했다.
* * *
한편, 연회장에 모인 손님들은 어리둥절해하고 있었다.
거의 한 시간 하고도 삼십 분이 지났다. 그런데도 연회를 주최하고 책임져야 할 안주인은 아직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공작저의 집사 키엘만이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음식과 음료를 계속해서 채워 놓게 하고 일찍 온 손님들의 항의를 대신 들어 주는 등 최대한 수습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키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부정적인 뒷말은 나올 수밖에 없었다.
“공작부인이 왜 안 나오는 걸까요?”
“생일 연회의 주인공이 안 나오다니 이상하네요.”
“혹시 그것 때문 아닌가요?”
한 귀부인이 다른 귀부인에게 속닥거렸다.
“일 년 전에도 바텐베르크 공작부인은 다과회를 열었다가 큰 실수를 하고 틀어박혔잖아요. 그때의 기억이 생각나 겁먹고 못 나오는 건 아닐까요?”
“설득력 있네요. 원래 사회성이 없기로 유명한 분이었으니까요. 갑자기 그런 증상이 도지신 걸 수도 있겠어요. 뭐, 아직도 사람들 앞에 나서기가 두렵다든가…….”
키득거리는 귀부인들의 뒤편, 연회장이 들여다보이는 복도의 구석에는 콜린 부인이 있었다.
그녀는 불안해하고 있었다. 온몸에서 핏기가 빠져나가, 유령처럼 새하얀 몰골로 떨고 있었다.
무언가가 잘못되었다. 원래라면 클로에는 자신의 계획대로 달리아와 똑같은 모습으로 사람들의 앞에 나타나야 했고, 모든 사람들에게 망신당하고 평판이 추락해야만 했다.
그런데 어째서, 왜, 지금 이 시간까지 그녀는 나오지 않고 있는 걸까.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 걸까. 무언가가 잘못 돌아가는 것이 틀림없었다.
아니, 아니다. 별일 없을 것이다. 클로에는 달리아를 전혀 모르지 않던가. 더군다나 자신의 계획은 완벽했다. 공작부인의 지각이라는 멍청한 우연 때문에 어그러질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야만 했다.
콜린 부인이 그렇게 자신을 달래던 그 순간이었다.
“주목해 주십시오!”
그때였다. 연회장을 꿰뚫는 듯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공작 부부께서 들어오십니다!”
콜린 부인은 거의 사색이 되었다. 두 사람이 동시에 들어오다니, 어째서? 클로에의 지난 생일에는 알폰스와 클로에가 서로 다른 곳에서 들어왔는데. 마치 어쩔 수 없는 자리이기에 함께한다는 듯이…….
콜린 부인은 절박한 눈으로 입구를 바라보았다. 그곳으로 들어오는 알폰스와 클로에는…….
콜린 부인뿐만 아니라, 연회장에 있는 모든 사람의 눈이 한 지점에서 멎었다. 이곳 어디에나 멋지게 차려입은 귀족 남성과 아름다운 귀족 여성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한 쌍이 나타났다.
그들에게서는 희미한 빛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알폰스 바텐베르크, 그는 이런 시선과 경외를 받는 것이 당연한 남자였다. 제국에서도 아마 유일할 듯한 화려한 빛의 곧은 금발, 완벽에 가까운 콧대와 턱선, 강렬한 위압감의 붉은 시선과 조각상 같은 육체는 태어날 때부터 그를 수많은 관심 속에서 살게 했다.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것은 그가 지닌 것들에 대한 대가였다.
그리고 그런 빛나는 남자의 팔에 끌어안겨 행복한 듯 웃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클로에 바텐베르크, 사교계의 먹잇감, 그레이가의 애물단지. 그녀는 누구보다도 그런 남자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누구나 생각했는데…….
……그 순간 자리에 있는 자들은 모두 그 생각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클로에를 기억하거나 그녀에 대한 풍문을 들은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녀의 평소 행색을 알았다. 언제나 구부정한 자세, 남과 맞추지 못하고 언제나 땅을 기어 다니는 시선, 머리카락으로 가린 어두운 얼굴과 자신 없는 목소리, 그저 남들의 모양새를 흉내 내기 급급한 특징 없는 복장, 늘 남의 눈치만을 보는 듯한 태도……. 그녀 본연의 매력조차 드러내지 못하는 한심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클로에는 달랐다. 그녀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곧은 자세에 당당한 걸음걸이, 땋아 높이 틀어 올린 머리 아래로 드러난 목덜미, 독창적이고 아름다운 드레스. 그리고 무엇보다도, 빛나는 환한 미소에서 이전의 그녀를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본래도 미인이었으나 알폰스처럼 제국 내에서도 드물 정도의 미인은 아니었기에 클로에는 평소 그와 함께 있으면 그의 존재감에 눌리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너무나도 어울리는 단장을 한 지금은 그와 함께 있어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알폰스와 함께 서로를 빛내는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한 쌍으로 보였다.
클로에는 자신들에게 감탄의 시선을 보내고 있는 손님들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의 앞에 나서는 것은 내심 떨리는 일이었지만, 이전의 삶에서 여러 번 해 보았던 프레젠테이션을 한다고 생각하니 괜찮아졌다.
그녀는 기쁘게 생각했다. 훌륭한 디자이너를 소개해 준 포트넘 부인에게 감사를 해야겠다고.
알폰스는 그런 그녀를 곁눈질로 살피며 생각했다.
‘지나치게 아름다워.’
본디 매력적인 배우자는 타인에게 전시하는 트로피로써 선호되는 경향이 있지만 알폰스는 전혀 다르게 생각했다. 이렇게 많은 타인의 앞에서, 굳이 이 정도로 아름다울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녀를 단장해 주었다는 디자이너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히 무엇보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드레스의 네크라인이었다. 가슴골이 훤하게 드러나는, 깊게 파인 U자형의 네크라인.
객관적으로 이 드레스가 유독 노출이 심한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이곳에도 저 정도의 네크라인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널리고 깔릴 지경이었지만 알폰스에게 보이는 것은 클로에뿐이었다.
‘다 보이잖아. 다른 놈들에게.’
알폰스는 얼마 전 클로에와의 정사 중 그녀의 목덜미에 붉은 자국을 남겼던 것을 기억했다. 그날 이후로 자국이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 일주일간 클로에는 목까지 가리는 형태의 드레스만 입고 다녔는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내심 만족스러웠었다.
알폰스는 앞으로 아내의 목에 일주일에 한 번씩 자국을 새겨 놓을까 고민했다.
그들이 그런 한가로운 생각을 하는 동안, 정신이 다 혼미해질 정도로 공포에 질려 있는 이가 있었다. 콜린 부인이었다.
‘발각됐구나.’
자신의 지시로 했던 단장은 어디 가고, 전혀 다른 단장을 하고 온 클로에를 보고 콜린 부인은 자신의 속셈이 들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클로에는 연회장 저편 복도에서 이쪽을 들여다보고 있는 콜린 부인을 알아챘다. 상대 역시 뚜렷하게 눈치챌 정도로 클로에는 그녀를 지긋이 보았다. 클로에의 시선이 닿는 순간 눈에 띄게 화들짝 놀라는 콜린 부인은 밀가루처럼 창백했다. 소나기 맞은 쥐처럼 안쓰러운 꼴이었다.
‘하지만 용서할 생각은 없어.’
클로에는 생각했다.
콜린 부인은 클로에가 자신을 보는 것을 알아챘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너무나도 뚜렷하고 명백하게. 콜린 부인은 까무러칠 것만 같았다.
클로에가 이번에야말로 자신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목을 졸랐다.
‘도망가야 해.’
콜린 부인은 이성을 잃고 그 자리에서 뛰쳐나갔다.
그러나 그녀의 도주는 현관에서 가로막혔다. 그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에게 붙들린 것이다.
“이거 놔! 난 가야 해! 놔!”
콜린 부인이 발악했으나 그녀 단신으로 기사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안 돼. 공작 각하의 지시다.”
“콜린, 네가 도주하려고 할 테니 저택 입구에서 체포하라고 명령하셨다.”
기사들의 말에 콜린 부인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주인님도 알고 계셨구나. 전부 다…….’
그녀는 밑바닥을 알 수 없는 까마득한 절망에 사로잡혔다. 알폰스는 그녀를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녀의 코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운명, 아니 응보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 * *
클로에의 생일 연회는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제국에 단 두 쌍밖에 없는 공작 부부는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았다.
특히 클로에의 달라진 모습과 알폰스의 클로에에 대한 달라진 태도는 큰 화젯거리가 되었다. 연회장 이곳저곳에서 남몰래 공작 부부의 변화에 대해 쑥덕이곤 했다.
그 화제의 남편인 알폰스는 한쪽 팔을 아내의 허리에 감은 채 그녀에게서 부드러운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의 곁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의 위압적인 눈빛이 저렇게도 변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있었다.
그때였다.
“실례합니다, 주인님.”
알폰스가 마침내 클로에에게서 시선을 떼었다. 그는 내심 자신과 그녀의 시간(필요한 접객은 했지만, 그것이 그들에 대한 관심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을 방해한 상대에 대해 불만을 느꼈지만 이해했다. 상대가 어떤 말을 할지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그의 시선 끝에는 집사 키엘이 있었다.
“그녀를 붙잡았다고 합니다.”
키엘의 얼굴은 늘 생글생글거리는 평소와 달리 진지했으나 그것은 알폰스의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알폰스는 깊게 고민하지 않았다. 도로 클로에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그가 말했다.
“독방에 가둬. 내가 갈 때까지, 쥐새끼 하나 얼씬할 수 없게 해.”
“알겠습니다.”
키엘은 재빠르게 사라졌다.
* * *
콜린 부인은 저택 외진 곳에 있는 독방에 갇혔다. 다른 방들에 비하면 손바닥만 한, 창문도 가구도 없이 오로지 어슴푸레한 조명 하나만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콜린 부인은 공포에 떨며 시간을 보냈다. 자신의 몰락을 지금 당장 마주하는 것보다 기다리는 것이 훨씬 두려운 일이었다. 알폰스가 언제 찾아올지, 그것이 한 시간 뒤일지, 다섯 시간 뒤일지도 모르며, 심지어는 지금 몇 시간이 지났는지도 알 수 없는 상황. 그 시간 동안 콜린 부인은 한껏 부풀어 오른 상상력으로 자신에게 가해질 온갖 방법의 처벌을 생각했다. 스스로 자신의 정신을 좀먹으며 그녀는 미쳐 가고 있었다.
마침내 몇 시간인지, 며칠인지도 모를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클로에의 생일 연회가 마무리되어 대부분의 손님들이 돌아갔다. 알폰스는 현재 시간이 자정을 훌쩍 넘었음을 확인했다.
‘그런 버러지만도 못한 것 때문에 아내의 생일을 낭비할 순 없지.’
알폰스는 하인 두 명에게 동행할 것을 명령했다. 그가 하인들과 함께 콜린 부인이 갇힌 독방으로 향한 때는 그녀를 잡아넣으라고 명령한 지 6시간이 지난 때였다.
그는 열쇠를 꽂아 독방의 문을 열었다. 어슴푸레하던 방에 갑작스러운 빛이 비쳐 들었다. 콜린 부인이 화들짝 놀라며 팔로 눈을 가리는 것이 보였지만 알폰스는 그녀를 조금도 배려하지 않았다.
알폰스를 본 콜린 부인은 거의 발작하듯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가 절규했다.
“주인님, 주인님! 제, 제,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
알폰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특유의 붉은 눈동자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냉혈동물과 같은 눈빛에 공포에 질린 콜린 부인은 심장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이, 이, 어리석은 것이 그만 하늘 같은 마님께 불손한 일을 하고 말았습니다. 부디 제 어리석음을 가엾게 봐주십시오!”
콜린 부인은 기어가서 알폰스의 바지 자락을 잡았다. 연회장에서 그대로 입고 온, 콜린 부인은 평생 일해도 살 수 없을 가격의 예복이 손때와 먼지로 더럽혀졌다.
알폰스의 곁에 있던, 그와 동행한 하인들이 콜린 부인을 알폰스에게서 강제로 떼어놓았다. 하인들에게 붙들린 상태에서도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광기 어린 눈을 번득이며 소리쳤다.
“자, 자비를 베풀어 주시겠지요?”
콜린 부인의 처절한 얼굴에는 한 점의 반성도, 죄의식도 없음을 알폰스는 알았다. 그저 이 상황만을 모면하려는 역겨운 낯짝.
“자비를 베풀어 주시겠지요? 리사에게도 그랬듯이 자비로우신 마님께선 제게도 자비를 베풀어 주시겠지요? 주인님!”
지독히도 뻔뻔하고 염치없는 자였다. 그제야, 알폰스가 입을 열었다.
“아내는 처벌 권한을 나에게 완전히 양도했다.”
일순간 콜린 부인의 얼굴이 얼어붙었다. 그 짧은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녀는 확실히 알았다.
그녀의 처벌에 클로에는 전혀 개입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쉽게 말해서, 그녀는 클로에의 자비를 기대할 수 없었다. 단 일말의 자비도.
냉락한 독방 안에, 알폰스의 차가운 목소리만이 덩그러니 떨어졌다.
“그녀 역시 너를 용서할 수 없다고 하더군.”
남편이 그러는 동안 클로에 역시 놀고 있지는 않았다. 그녀는 하녀들에게서 증언을 들었다.
“……얼음 연못을 마리에게 가르쳐 준 자가, 콜린 부인이었단 말이지.”
심증이 확신이 되는 순간이었다. 클로에는 보기 드물게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지극히 분노하고 있었다.
하녀들은 취조라도 받는 것처럼 희게 질려 있었다. 마님의 분노가 어디로 떨어질지 두려웠던 것이다.
클로에는 입술을 깨물었다. 화가 났다고는 하나 그녀는 아무 데나 분풀이를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콜린 부인의 그 행동에 묻어 있는 것은 명백한 악의였다. 만일 운 좋게 기사들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클로에나 혹은 하녀들 중 누군가를 위험하게 만들 수도 있었던 잔인한 악의.
용서해 줄 수 있는 선을 넘어도 한참 넘은 것이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문 두드리는 소리에 알폰스가 지시했다.
“열어라.”
하인 중 한 사람이 안에서 잠근 독방 문을 열어 주었다. 문 앞에 있는 자는 하녀였다. 독방 내의 살벌한 분위기에 잔뜩 겁을 먹은 하녀.
“주…… 주인님. 마, 마님으로부터의 전언입니다.”
“아내가?”
하녀는 클로에가 알아낸 얼음 연못 사건의 전말을 알폰스에게 전달했다. 임무를 마친 뒤, 그녀는 가만히 있으면 불똥이라도 튈 것처럼 후다닥 인사하고 자리를 떴다.
알폰스의 시선이 다시 콜린 부인을 향했다. 그러나 아까 전과는 조금 다른 눈빛이었다. 하녀의 말을 듣기 전에는 얼음송곳 같은 눈이었다면, 지금은 그 눈동자에 불꽃이 서려 있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 * *
결론부터 말하자면, 콜린 부인은 오랜 시간에 걸친, 공작부인에 대한 집요하고도 악독한 죗값을 목숨으로 치르게 되었다.
지금의 클로에가 이곳으로 온 이후에 지은 죄의 값도 컸지만, 이전의 클로에가 있던 시절의 죄는 더더욱 컸다. 그녀는 지난 13개월 동안 온갖 방법으로 클로에를 괴롭히고, 모욕을 주고 정신을 갉아먹었다. 클로에가 스스로 한심하고 가치가 없음을 믿게 하고 스스로를 믿지 못하게 하였으며, 다른 사용인들도 그렇게 하도록 종용했고 그러한 과정에서 쾌락을 느꼈다.
비록 클로에가 타고나길 사회적이지 못했다 한들 알폰스와의 결혼 뒤, 더더욱 병적으로 상태가 나빠졌던 것은 그녀의 탓일 가능성이 컸다.
지금의 클로에는 그 일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하나하나, 전부.
그랬기에 더 용서할 수가 없었다. 계급의 차이와 고용 관계라는 문제를 떠나서 콜린 부인은 인간이 인간에게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질렀다.
클로에는 콜린 부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지 않았다.
콜린 부인의 처벌을 대신하여 담당하게 된 알폰스는 결코 인정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알폰스는 콜린 부인에게 300대의 회초리를 명령하고 목숨만 겨우 붙어 있는 그녀를 황립 재판소에 넘겼다. 죄명은 귀족 모독과 살인 미수였다. 재판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이루어졌고 그녀는 교수형의 선고를 받았다. 이 모든 과정 중에 알폰스의 입김이 들어갔다는 것은 만인 사이에서 공공연한 비밀이다.
현재 콜린 부인, 그녀는 차가운 지하의 감옥 안에서 처형 날짜만을 기다리고 있다.
다만, 알폰스 바텐베르크, 그라면 시녀 하나 해치우고 무마하는 것은 일도 아닐 것이었다. 직접 해치운다는 제일 빠르고 간편한 방법도 있는데 왜 그가 굳이 귀찮고 복잡한 절차를 따랐느냐에 대한 대답은 이와 같다.
“더러운 피를 내 손에 묻힐 수는 없지.”
집무실에서 점심 식사를 하던 도중, 콜린 부인이 교수형 선고를 받았다는 키엘의 보고를 받은 알폰스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한편, 콜린 부인의 죄가 전부 밝혀지고 그녀가 재판에 회부되었다는 소식에 많은 수의 사용인들이 공포에 떨었다. 주인마님의 명령에 불복하는 등, 지난 13개월 동안 클로에에게 자잘한 죄 하나라도 저지른 적 있던 사람들이었다.
사용인들 사이의 분위기를 쇄신하는 데에 제일 큰 공헌을 한 자들은 뜻밖에도 부엌 하녀들이었다.
일찍이 클로에에게 감화되어 그녀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던 부엌 하녀들은 주인마님의 변화와 그녀의 뛰어난 배려와 인성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잘못을 저지른 자들이 깊게 사죄하고 속죄해야 한다는 말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