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장 (7/39)

7장

알폰스가 최근 클로에와 경험을 공유하면서 그녀에 대해 가진 인상은 그거였다. 마음이 한없이 연약한 여자. 불행 같은 건 하나도 모르는 양 맑은 웃음을 가진 여자.

그런 그녀에게 굳이 자신의 불행을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기본적으로 타인에게 무관심한 사람일 뿐 그 정도 배려심도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남이 감당할 수 없는 불행을 털어놓아 상대를 괴롭히는 일은 누구에게도 이롭지 않았다. 알폰스 자신에게도, 상대방에게도.

어차피 타인에게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아야겠다는 필요성을 느껴 본 적도 없었다. 무디고 무뎌져 자신에게는 한낱 지난 일이 되어 버리지 않았던가.

그렇게 생각한 알폰스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했더니, 울어 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그가 몸을 돌렸다. 클로에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가는 손가락의 사이사이에서 흘러넘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소리 죽인 울음이지만 채 눌러 삼키지 못한 소리가 파편이 되어 새어 나왔다.

“왜 우는 겁니까.”

“당신이 울지 않아서요.”

“제가 울지 않는 것과 당신이 우는 것은 무슨 상관입니까.”

“제가 당신 대신 울어 드리는 거예요.”

알폰스는 멈칫했다.

클로에는 얼굴에서 손을 떼곤 그를 마주 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에 그가 생각하던 것과 같은 연약함은 없었다. 감당할 수 없는 이야기에 짓눌린 흔적도 없었다.

오히려 그녀의 시선은 올곧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없이 무르고 연약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그녀의 눈동자에는 생각지도 못한 강함과 단호함이 비쳐 보였다.

“알폰스, 당신은 아름다운 사람이에요. 당신의 삶, 품어 왔던 감정, 견뎌 왔던 노력, 전부가 너무나 아름다워요.”

알폰스의 굳은 얼굴에 균열이 생겼다.

우습게도 그것은 그가 그녀에게 느껴 오던 것들이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생각했으나 전하지는 않은 말이었다. 알폰스는 클로에의 그늘 없는 웃는 얼굴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싫어하지도 않았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것도. 무언가를 순수하게 좋아할 수 있는 것도.

그는 할 수 없는 일이니까.

오히려 그렇게 생각하는 것조차 사사로운 감정이 아닌가. 이런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는 그의 안에 없었다. 알폰스 바텐베르크는 세간에서 흔히 말하듯 완벽하지 않다. 오히려 지극히 결여된 존재다. 그의 일부는 아직도 벽장 속에 있다.

그런데 당신은, 그렇게나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수 있구나.

눈물을 끊임없이 흘리면서도 클로에는 그를 올곧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흔들림 없는 태도로 말했다.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그때 이후로 알폰스는 단 한 번도 자신의 가슴속을 들여다본 적이 없었다. 내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었던가? 무엇을 느끼고 있었던가.

그제야 그는 자신의 가슴속에 엉겨 붙어 있던 성에를 발견했다. 한 번도 닦지도, 녹지도 않아 쌓이고 쌓여 두꺼운 벽을 만들어 낸 성에.

그것이 녹기 시작한 것을 느끼면서, 알폰스는 생각했다.

이 사람이 내 아내라서 다행이다.

* * *

“응접실에서 차를 마시는 것이 불편하지는 않습니까?”

클로에는 찻잔에서 시선을 돌려 알폰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의 빈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채 두 손을 깍지 끼고 클로에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오후에 있었던 일에 대한 이야기는 더 이상 꺼내지 않았다. 언제나와 똑같이 행동했다. 저녁 식사를 한 뒤 티타임을 가지는 일 역시 마찬가지였다.

클로에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불편하다니요?”

“차 창고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까.”

그 말에 클로에는 곰곰이 생각했다. 하긴 그렇다. 사람을 쓴다 해도 차 한 잔 마실 때마다 차통과 다구를 몇 층이나 떨어져 있는 응접실까지 날라오는 것은 번거로운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한 번에 여러 종류의 차를 마시기도 어렵고.

“으음, 조금 그렇긴 해요.”

클로에가 솔직하게 대답하자, 알폰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제안했다.

“제가 생각을 해 봤습니다만, 부인의 차 창고를 차를 마시기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개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곳에서 좀 더 편하게 취미 생활을 영위하실 수 있도록.”

클로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알폰스를 보았다. 알폰스가 차분히 덧붙였다.

“……화로를 가져다 놓아 그곳에서 차를 제조할 수 있게 만드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번거롭게 부엌까지 다닐 필요 없이.”

클로에는 테이블 위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녀가 놀란 듯 토끼 눈을 뜨고 말했다.

“저…… 정말…… 정말 좋아요! 그렇게 해 주신다면, 너무 기쁠 것 같아요.”

차와 다구가 가득한, 편안하게 차를 마실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이 생긴다니! 차 애호가로서 이 이상 행복한 일이 또 있을까. 잠시 행복한 꿈에 빠져들었던 클로에는, 곧 현실로 돌아왔다.

“하지만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왜 저를 위해서 그렇게까지…….”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차 창고를 다시 한 번 증축해야 한다. 안 그래도 다구를 집어넣기 위해 개수를 한 게 바로 얼마 전인데 공사를 또 한다니?

“당신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네?”

클로에는 알폰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보았다. 그러나 알폰스는 더 이상 부연 설명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대접하는 차를 마시는 것은 이제 그에게도 일상의 일부였다. 티룸에 들락거리게 될 사람이 클로에 한 사람뿐일 리가 없었다.

말을 아끼던 그가 마침내 꺼내 놓은 말은 이것이었다.

“어쨌든 시작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지요. 당장 오늘부터 설계를 시작하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클로에는 영문을 몰라 속눈썹을 팔랑였다. 어쨌든, 이런 제안을 해 주다니 무척 기쁜 일이었다. 그녀가 방긋 웃으며 인사했다.

“정말 고마워요, 공작님!”

“…….”

알폰스는 대답하는 대신 묵묵히 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그가 주머니칼로 시가의 끄트머리를 자르고, 불을 붙이는 동안 클로에가 즐거운 듯 재잘거렸다.

“그럼, 저만의 티룸이 생기는 거네요. 정말 기뻐요!”

“우리의.”

“네?”

“우리의 것이라고 해 둡시다.”

그렇게 말한 알폰스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겠다는 듯이 시가를 깊이 빨아들였다.

어느덧 가게가 완공되었다. 개장이 머지않았기에 직원을 고용하는 등 개장 준비 때문에 분주했다.

붉은색을 포인트 컬러로 한, 주 고객일 터인 귀부인을 겨냥한 우아하고 아름다운 인테리어의 가게는 클로에의 마음에 쏙 들었다. 그녀는 가게를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불렀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공간의 규모가 커도 너무 크다는 것이었다. 2층씩이나 되는 건물을 가게 내의 상품으로 전부 채울 수 없어, 2층은 어영부영 창고로 쓰며 놀리게 되었다. 그렇다고 건물 구조상 세를 주기에도 어려웠다. 클로에는 이게 어마어마하게 아깝게 느껴졌지만 알폰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 덤덤했다.

가게의 이름 역시 클로에가 지었다. 알폰스가 가게의 이름을 지을 기회를 그녀에게 양보했던 것이다.

알폰스가 가게의 이름을 지을 권리를 양보한 이유는 머지않아 밝혀졌다. 완공된 가게를 둘러보고 돌아오던 길의 일이다.

“우와, 너무 설레요! 정말로 가게가 생긴다니.”

알폰스의 에스코트를 받아 가게에서 나오며 클로에가 말했다. 난생 첫 사업에 대한 기대 덕에 그녀는 한껏 들떠 있던 차였다.

“이런 일은 처음이라 꿈만 같아요. 우리 가게가 열리는 날이 이제 머지않았네요.”

“당신의 가게입니다.”

“네?”

“이 가게는 제가 부인에게 드리는 생일 선물입니다.”

클로에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알폰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반응과는 대조적으로 알폰스의 태도는 아주 일상적인 말이라도 하는 듯 담백했다.

“생일, 얼마 남지 않았잖습니까.”

티끌만큼의 생색도 자랑스러움도 묻지 않은 말이었다.

클로에는 더더욱 크게 눈을 떴다.

그러고 보니 그랬다. 생각지도 못한 것이지만, 박하정이 아닌 클로에의 생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생일 선물이, 이만한 규모의 사업체라니?

이미 자신과 알폰스 사이의 스케일 차이를 몇 번이나 겪어 왔지만 여전히 완전히 적응하지는 못했다. 클로에는 잠시 입을 뻐끔거리다가, 겨우 말했다.

“공작님…….”

지나치게 감동한 그녀는 알폰스를 덥석 끌어안았다. 그들 사이에 스킨십(?)이 여러 번 있긴 했지만 클로에가 그것을 먼저 시도한 것은 처음이었다. 알폰스는 변함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클로에의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한편, 이번 사업에 대한 소문은 공작저 사용인들 사이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 ‘그’ 주인마님 소유의 사업이 생긴다니 이만큼이나 흥미로운 가십거리가 없었다.

“과연 잘될까?”

“설마, 아무리 마님이라도 사업은 좀 무리지.”

“맞아. 비록 최근에 다과회도 훌륭하게 여시고 예산 관리도 하게 되시긴 했지만 사업은 그런 것들과는 다르잖아.”

“그래도 각하께서 좀 도와주시지 않을까?”

사용인들 중 대부분은 최근 클로에가 갑작스레 유능해졌다는 것을 인정했지만, 그래도 사업은 무리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만큼이나 제국에는 사업을 하는 여성이 드물었던 것이다.

아주 소수 의견이긴 하지만, 이런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의외로 잘하실지도 몰라. 다른 일들도 우리의 예상을 한참 뛰어넘으셨잖아? 그러니까 사업도 예상 밖으로 잘하실지도 모르지.”

어쨌든, 일반 사용인들이 다 아는데 집사인 키엘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는 클로에에게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개업 정말 축하드려요, 마님. 분명 잘하실 것이라고 믿어요. 번창하세요.”

“고마워요, 키엘.”

클로에가 웃었다.

키엘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그는 다른 사용인들과 다르게 진심으로 클로에가 잘 해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동안 한없이 기대를 뛰어넘는 그녀의 능력을 지켜보았으니까.

‘이번에는 어떻게 내 예상을 뛰어넘으실지 기대되는걸.’

그는 심지어 그녀의 능력을 흥미롭게 여기고 기대하기까지 했다. 키엘은 그녀가 이번에는 어떤 놀라움을 가져다줄지 상상하며 즐거워했다.

어느덧 메이슨 부인이 백작령으로 돌아갈 때가 왔다. 그녀를 태우기 위한 마차가 저택의 현관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공작 부부는 그녀를 배웅하기 위해 현관으로 나왔다.

“굳이 안 와도 된다니까.”

메이슨 부인이 특유의 날카로운 시선으로 공작 부부를 훑었다. 클로에는, 예전이라면 저 시선에 움찔하거나 화가 나셨나 생각했겠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메이슨 부인의 눈빛은 원래 그렇다는 것을 이제는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메이슨 부인은 공작 부부를 차례차례 끌어안았다.

“건강하거라, 알폰스.”

“살펴 가십시오, 메이슨 부인.”

알폰스가 정중히 인사했다.

이번에는 클로에의 차례였다. 메이슨 부인은 주저 없이 클로에를 부둥켜안았다. 마치 딸이라도 되는 양 친근한 태도였다.

메이슨 부인이 속삭였다.

“고맙다. 덕분에 안심할 수 있을 것 같구나.”

클로에는 순간 이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럴 것이라는 걸 알았는지, 메이슨 부인이 말을 이었다.

“너는 바텐베르크의 좋은 안주인이 될 거야.”

그제야 클로에는 떠올렸다. 메이슨 부인이 자신에게 알폰스를 잘 부탁한다는 말을 했다는 것을. 메이슨 부인은 지금, 클로에라면 알폰스를 믿고 맡길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모로칸 민트티를 만들어 드린 뒤로, 클로에와 메이슨 부인은 낮에 종종 차를 마시며 사담을 나눴다. 덕분에 클로에는 나쁜 첫인상으로 이루어진 메이슨 부인에 대한 선입견을 깨고 그녀와 편히 지낼 수 있게 되었다.

클로에가 생각하기에, 메이슨 부인은 훌륭한 사람이었다. 남편의 독살이라는 비극을 딛고 백작가 내외의 일을 단신으로 해내면서 어린 알폰스까지 맡아 길렀다. 여자 한 명의 몸으로 그게 얼마나 고된 일이었을지 클로에는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에게, 그렇게나 받고 싶었던 인정까지 받았다. 클로에는 마음속이 찡하게 울리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환하게 웃어 보였다.

“안녕히 가세요, 메이슨 부인.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원, 인사치레는 됐다. 내가 무슨 감사 받을 일을 했다고.”

메이슨 부인은 혀를 끌끌 차며 하녀의 부축을 받아 걸어갔다.

메이슨 부인이 마차에 올랐다. 곧이어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창을 통해 비춰 보이는 메이슨 부인이 고개를 돌려 이쪽을 보고 있었다. 클로에는 다시 한 번 허리를 굽혔다.

마차를 타고 공작저를 떠나며 메이슨 부인은 클로에라는 아이에 대해서 생각했다.

모로칸 민트티를 얻어 마신 이후로 그 아이와 여러 번 티타임을 가졌다. 주로 집안일에 대한 잡담이었지만, 알폰스에 대한 이야기도 당연히 나올 수밖에는 없었다.

메이슨 부인은 알폰스의 청소년기를 함께 보내며 그에게 접근하는 자들을 여럿 보았다. 알폰스의 화려한 외모나 부와 지위에 현혹된 자들이었다.

흔히 알폰스를 만난 자들은 그의 화려한 일면에 그를 동경하거나 사랑에 빠졌다. 간혹 그의 어두운 뒷면을 알게 된 자들은, 그를 동정하거나 심지어는 자신이 그를 구원해 주겠다며 덤벼들기도 했다.

그러나 클로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의 화려한 면, 어두운 면을 전부 알고 있지만 그를 동경하거나 동정하지 않았다.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고 해서 그를 대하는 태도가 바뀌지도 않았다. 여전히 그녀에게 알폰스는 알폰스였다. 그저 그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받아들일 뿐이었다.

‘훌륭한 아내를 만났구나, 알폰스.’

좌석에 편히 몸을 묻으며 메이슨 부인이 생각했다.

‘네게 그 이상 어울리는 짝이 있을까.’

언제나 자식 같은 알폰스를 걱정하던 그녀였지만, 이제는 슬슬 그 걱정을 덜어 놓아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 *

마침내 그 날이 왔다.

아침잠에서 깨어 눈을 뜬 클로에는 그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침대 위에서 반 바퀴 데굴 굴러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오늘이 그 날이었다. 그러니까…… 이곳에 떨어진 뒤 처음으로, 알폰스와 후사를 만드는 날 말이다.

클로에는 한숨을 쉬었다. 어젯밤에도 몇 번이나 마음을 다잡고, 각오를 다지긴 했지만 역시 긴장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처음도 아닌데.’

박하정이던 시절, 그녀는 28살이 될 때까지 두 명의 남자친구를 사귀었다. 물론 그들과 밤을 보내기도 했다.

다들 그것이 아주 대단한 일인 것처럼 말하지만 해 보고 나니 의외로 별거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에는 좀 아팠고, 그 이후로는 그저 그랬다. 아주 싫거나 괴로운 것은 아니지만, 왜들 기를 쓰고 이것을 하려고 드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한 번만 하자. 응? 한 번만.’

전 남자친구가 비굴하게 애원하던 것이 떠올랐다. 남의 눈치를 어지간히도 보던 시기였으니, 남자친구가 요구하면 그녀는 거절할 수 없었다.

그렇게 눈치 보면서 퍼줄 거 다 퍼주고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헌신한 연애의 결말은 두 번 다 남자친구의 바람이었지.

클로에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고개를 마구 저어 전 남자친구들의 지질한 얼굴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그리고 알폰스를 생각했다. 그녀는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날도 여느 날과 다를 바 없이 알폰스와 저녁 식사를 함께하고 차를 마셨다.

하녀에게 다구를 치워 줄 것을 부탁하고 두 사람은 복도에서 헤어졌다. 헤어지기 직전, 알폰스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제가 찾아가겠습니다.”

클로에는 그 말에 다시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

침실로 돌아간 클로에는 목욕을 했다. 목욕이야 매일 하는 것이지만 어쩐지 새롭게 느껴졌다. 목욕 시중을 드는 하녀들 역시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하녀들은 몹시 진지해 보였다. 그냥 진지한 정도가 아니었다. 희대의 예술품을 만드는 장인과 같은 눈빛으로 클로에를 정성스럽게 씻겼다.

장미수와 배스 솔트를 넣은 욕조에 몸을 담근 뒤 먼지 한 톨 남아 있지 않도록 깨끗하게 씻기고 향유를 듬뿍 발라 마사지까지 해 주었다. 그러고 나니 흰 피부는 보들보들 매끄러운 데다 좋은 향기가 났고, 머리카락에는 윤기가 흘렀다.

네글리제만 걸친 클로에는 거울을 보고 입을 떡 벌렸다.

‘원래도 미인이었는데, 더 예뻐졌네.’

클로에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며 감탄했다. 얼굴은 당연하고, 속살이 살짝 비치는 네글리제를 통해 보이는 몸매는 또 얼마나 훌륭한지. 그야말로 나와야 할 데는 잔뜩 나오고, 들어가야 할 데는 쏙 들어간 매혹적인 몸매였다.

그렇게 자아도취(?) 삼매경에 빠져 있을 때였다.

노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기겁한 클로에는 후딱 입가에 흐르던 것을 닦고 헤 벌어져 있던 입을 꽉 다물었다. 그녀가 방문을 향해 돌아보았다.

알폰스였다. 마찬가지로 씻고 온 듯이, 금빛의 머리카락은 젖어 있고 목욕 가운 하나를 걸친 채로 알폰스가 들어왔다. 클로에는 다시 입을 떡 벌릴 뻔했다. 그는 클로에보다도 더욱 미인이었으니까.

“오래 기다렸습니까.”

“아, 아니에요. 저도 방금 씻고 나온걸요.”

알폰스와 이야기를 나눈 것도, 함께 시간을 보낸 것도 하루 이틀이 아닌데, 그런데 왜……. 갑작스레 이렇게 부끄럽고 가슴이 뛰는 걸까. 클로에는 두방망이질 치는 심장이 잠잠해지길 바랐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알폰스는 그녀가 부끄러워하는 것을 눈치챘다. 클로에가 보지 않는 사이 그는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따라 그녀가 귀여워 보였다. 그는 준비해 온 와인 병과 유리잔을 침대 옆 협탁에 내려놓으면서도 그녀에게서 붉은 눈을 떼지 않았다.

알폰스는 자연스럽게 클로에를 침대로 이끌었다. 그들은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

“괜찮겠습니까?”

클로에는 자신의 몸 위로 그늘이 지는 것을 깨달았다. 알폰스가 상체를 일으킨 채 자신을 향해 기울이고 있었다.

‘얼굴이 가까워.’

서로의 숨결마저 닿을 것만 같은 거리. 그의 엷은 미소와 색기 있는 붉은 눈동자에 클로에는 어쩔 줄을 몰랐다. 머리 색과 같은 색소가 옅은 속눈썹과, 곧고 아름다운 콧대와 턱. 목덜미와 그의 큰 손. 여전히 젖어 있는 피부…….

……이런 사람이 저렇게 물어오는데 거절을 할 수 있는 여자가 과연 있을까. 클로에는 생각했다. 그녀는 시선을 피하며, 마구 쿵쾅거리는 가슴을 손으로 누르며 대답했다.

“그런 것 같아요.”

뺨을 붉게 물들이고, 시선을 피한 채 대답하는 클로에는 이상할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알폰스는 그녀의 붉은 뺨을 조심스럽게 만졌다. 열기가 올라 있었다.

여태까지 그들이 후사를 만들 때마다 알폰스는 언제나 술을 가져왔다. 그들은 언제나 취한 상태에서 관계를 가졌다. 차라리 그편이 나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은 이상했다. 클로에의 뺨을 쓰다듬고, 그녀를 끌어안고 있자니 병을 가지고 와 뚜껑을 여는 것조차 번거로웠다. 그저 품 안에 안겨 있는 이 여자를 머리카락 한 가닥까지 남김없이 손에 넣고 싶을 뿐이었다.

알폰스는 엄지손가락으로 클로에의 입술을 어루만졌다. 그녀는 수줍은 듯 눈을 감았다.

‘원래 이렇게 사랑스러웠던가.’

13개월이나 되는 결혼 생활 동안 그녀를 몇 번이나 안았다. 하지만, 이렇게나 그녀가 사랑스러워 견디기 어려웠던 적은 없었다. 단 한 번도.

알폰스는 클로에의 얼굴과, 흰 피부와, 그 위로 흐트러진 짙은 밤색의 머리카락을 훑어보았다.

눈을 감고 있던 클로에는, 알폰스가 아무 말도, 아무것도 하지 않자 점점 호기심이 동했다.

‘뭘 하고 있는 걸까?’

결국 호기심이 수줍음을 이겼을 때, 그녀는 살며시 감았던 눈을 뜨곤 알폰스를 올려다보았다.

“……!”

알폰스는 클로에가 자신의 품 안에서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것을 보았다. 그녀의 맑은 올리브빛 눈동자가 호기심을 담은 채 그를 향했을 때,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졌다.

“꺄……!”

갑자기 알폰스가 자세를 바꾸자 놀란 클로에가 소리를 냈다. 알폰스는 덮치듯 그녀의 위를 점령하더니, 클로에의 하얀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코, 입술……. 천천히 내려오는 그의 입술이 자신의 입술을 덮자 클로에는 천천히 다시 눈을 감았다.

‘이거…… 첫 키스야. 그와의.’

이마와 코에 했던 가벼운 입맞춤과 달리 입술과 입술의 접촉은 농밀하고 진득했다. 입술 사이를 가르고 들어온 그의 혀는 클로에의 혀부터 시작해서, 그녀의 입안 구석구석을 맛보고 정복해 나갔다.

“으음, 응…….”

단순히 입과 입을 맞추었을 뿐인데, 너무나 야릇한 감각에 클로에는 신음을 흘리며 알폰스의 앞섶을 쥐었다.

알폰스의 키스는 상상외로 거칠었다. 그의 평소의 우아하고 귀족적인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양새였다. 치아부터 입천장까지 입안 전체가 유린되어 가는 감각과 그때마다 작은 정전기가 일어나는 듯한 느낌에 클로에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키스를 처음 해 본 것도 아닌데, 왜…….’

처음 느껴 보는 감각인 건지.

알폰스의 입술이 떨어져 나갈 즈음에는 클로에의 호흡이 가빠져 있었다. 입술과 입술 사이로 은실이 길게 늘어지고, 클로에의 가슴은 그녀의 숨결을 따라 오르락내리락했다.

키스의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해 다소 몽롱한 기분으로 클로에는 알폰스를 올려다보았다.

‘……!’

그녀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의 눈동자가, 그의 붉은 눈동자가 불타는 듯했다. 진홍색 눈동자에 일렁이는 욕망, 그것도 명백히…… 클로에, 그녀 자신을 향해 있는 욕망.

가슴이 다시 한 번 두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자신을 향한 알폰스의 욕망을 들여다본 순간 그녀는 온몸에서 힘이 빠지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거역할 수 없었다.

“응……!”

알폰스가 그녀의 목줄기를 베어 물듯 물었다. 클로에의 가녀린 선을 따라 그대로 핥아 내리던 그는 쇄골에 몇 개의 붉은 꽃을 피워냈다. 그와 동시에 네글리제 위로 클로에의 탐스러운 유방을 어루만지던 알폰스는, 참을 수 없다는 듯 그녀의 네글리제를 걷어 올려 벗겼다.

그녀의 몸이 그대로 드러났다. 가녀린 체구와 대조적으로 풍성한 볼륨감을 가지고 있는 가슴, 잘록한 허리가 조명 아래에서 하얗게 빛났다. 알폰스의 눈앞에서 아래 속옷 한 장만을 남기고 완전히 알몸이 되어 버린 클로에는 얼굴이 붉어졌다. 그리고 알폰스는…….

그 몸을 마주한 순간, 다시 한 번 다리 사이에 아플 정도로 피가 몰리는 것을 느끼며 알폰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미 많이 참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그녀의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가고 싶었으나 그럴 순 없었다. 최대의 자제력을 발휘하며 알폰스는 클로에의 풍만한 가슴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아…….”

알폰스가 자신의 가슴을 애무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너무나 야한 느낌이 드는 일이었다. 클로에는 손등으로 입을 가린 채 그에게 몸을 맡겼다. 알폰스의 큰 손에도 다 들어가지 않고 삐져나오는 가슴과 그 끄트머리의 연분홍색 선단. 알폰스가 엄지손가락으로 둥글리듯 유두를 애무하자, 클로에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신음을 터뜨렸다.

“으응……!”

클로에는 자신이 낸 소리에 화들짝 놀라 손등으로 입을 막았다. 알폰스는 욕망으로 가득한 눈동자로 그런 그녀를 사랑스럽다는 듯 지켜보며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알폰스는 허리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그가 속삭였다.

“참지 마십시오.”

“하지만…….”

부끄러운 듯 눈을 마주치지 못하며 클로에가 우물거렸다.

수줍어하는 그 모습이 너무나 귀여워, 알폰스는 픽 웃었다. 그가 다시 속삭였다.

“그렇다면 참지 못하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그가 몸을 돌렸다. 클로에는 그가 무슨 일을 하려는 건지 눈치챘다. 아래 속옷을 벗기는 것이었다.

“앗, 잠깐……!”

그러나 알폰스는 물 흐르듯 쉽게 그녀의 아래 속옷을 벗겨 버렸다. 그가 던져 버린 속옷이 방 저편에 떨어지는 것을 보며, 클로에는 다리 사이가 몹시 허전해졌다고 생각했다.

알폰스의 시선이 자신의 다리 사이를 향하는 것을 느끼며 클로에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너무 창피해서 죽을 것만 같았다. 정말이지, 처음 해 보는 것도 아닌데 왜, 유독 이 사람에게는 더 부끄러운지.

그 모습이 귀엽다는 듯 픽 웃은 알폰스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것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그의 손가락이 갈라진 틈을 파고들자마자 클로에의 허리가 뒤로 휘어졌다. 그녀의 그곳은 애액으로 충분히 젖어 있어 매끄러웠다. 알폰스는 손가락 끝으로 그녀의 음핵을 살짝 건드렸다.

“앗……!”

클로에가 움찔 몸을 떨었다. 그가 음핵을 건드릴 때마다 클로에는 저항할 수 없이 허리를 비틀었다. 애액으로 미끌미끌한 음핵을 검지와 중지로 애무하며 클로에를 괴롭히던 그는, 손가락 끝을 입구에 가져다 대었다. 알폰스는 입구를 살살 어루만지며 들어갈 준비를 했다.

마침내 그의 손가락이 입구를 파고들었다.

“아앗, 하아……!”

클로에는 그녀의 깊은 곳을 향해 파고들어 오는 이물감과 알폰스가 자신의 부끄러운 곳을 똑바로 보고 있다는 부끄러움에 죽을 것 같았다. 알폰스를 향해 벌린 그녀의 두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알폰스는 그런 그녀의 허벅지 안쪽을 쓰다듬어 긴장을 풀게 했다.

그녀의 안에서 느리게 왕복하던 그의 손가락은 어느덧 두 개로 늘어났다. 그의 손가락이 왕복할 때마다 클로에는 앓는 소리를 내며 파드득 경련했다. 처음에는 불편했던 이물감과 입구가 팽팽히 당겨지는 느낌도 적응이 되었는지 조금씩 잦아들었다.

그것을 알폰스 역시 느꼈는지, 그는 어느 순간 손가락을 그녀의 안에서 빼냈다. 그의 두 손가락이 젖어 반짝이는 것을 보자 클로에는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알폰스가 천천히 가운을 벗었다.

‘아……!’

클로에는 속으로 경탄했다.

이미 이전의 클로에의 기억을 통해 알폰스의 몸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은 감흥이 달랐다. 넓은 어깨와 아름다운 선의 근육으로 다져진 몸, 하얀 피부는 마치 대리석 조각상을 연상케 했다. 전신에 드문드문 흉터가 보였는데, 이전에는 몰랐지만 클로에는 그것이 학대의 흔적이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몸 아래에는…….

“세상에!”

기겁한 클로에가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아름다운 얼굴과 조각과 같은 몸매, 평소의 우아하고 귀족적인 태도에서는 전혀 예상치 못할 정도의 육중한 것이 그의 다리 사이에 자리 잡고 있었다. 충분히 애무했다고는 하지만 저런 것이 과연 자신의 몸에 무사히 들어갈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알폰스는 그런 클로에를 보며 가볍게 웃었다. 그는 클로에의 몸을 끌어당겨 그녀의 허리를 잡았다. 클로에는 움찔 놀라며 그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손바닥 아래에서 근육으로 탄탄한 어깨의 감촉이 느껴졌다.

알폰스가 귓가에 속삭였다.

“조금 거칠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입구에 뜨거운 살덩이가 닿아 오는 감각에 클로에는 몸서리쳤다. 아까 보았던 그 거대한 것의 모습을 떠올리니 더더욱 불안해졌다. 알폰스는 그녀의 등을 끌어안아 쓰다듬으며 안심시킨 뒤, 천천히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으읏……!”

통로는 충분히 젖어 있었으나, 그가 들어가기에는 너무나 좁았다. 클로에가 지나치게 긴장한 것이다.

알폰스가 귓가에 속삭였다.

“긴장을 푸십시오.”

“으……! 어떻게 푸는 건지 모르겠어요.”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알폰스가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그의 혀가 입 안을 농락하고, 다시금 반복되는 야릇하고도 농밀한 키스에 클로에는 저도 모르게 온몸에서 힘이 빠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알폰스는 젖어 있는 통로를 향해 진입했다. 여전히 입을 맞추고 있었기에 클로에는 아무런 소리도 낼 수 없었다. 거대한 것이 비집고 들어오는 이물감에 그녀는 미간을 찡그리며, 알폰스의 목을 끌어안았다.

완전히 삽입을 한 뒤에야 알폰스는 클로에의 입술을 놓아주었다. 그녀는 숨을 쉬지 못한 듯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아픕니까?”

그 말에 클로에는 아랫도리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정신을 집중했다. 속이 가득 찬 듯한 느낌이, 무척이나…… 낯선 데다가, 입구가 너무나 뻐근해서 금방이라도 찢어지는 것은 아닌가 두려울 정도였다. 그렇지만, 아프지는 않았다.

클로에가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젓자, 알폰스는 그것이 귀엽다는 듯 픽 웃고는 그녀의 귓불을 살짝 깨물었다.

그의 허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놀란 클로에는 그의 목을 끌어안고 있는 팔에 더더욱 힘을 주었다.

아프지는 않았으나, 몇 번이나 반복되는 거대한 것의 움직임에 클로에는 혼이 빠질 지경이었다. 자신의 몸속에서 탐욕스럽게 제 영역을 넓혀 가는 그것에 질벽이 딸려 나가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러한 감각조차 곧 파도처럼 밀려오는 묘한 느낌에 모래성처럼 지워졌다. 오랜 애무로 정성스레 달구어진 클로에의 몸과 아랫배는 알폰스의 물건과 쾌감을 너무나 쉽게 받아 냈다. 추삽질에 따라 철퍽거리는 물소리가 끊이지 않고 울려 퍼져 클로에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웠다.

“하으…… 으응, 아흐윽, 응…….”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터져 나오는 신음이 그녀의 입가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알폰스의 허리 놀림이 점점 강해질수록 온몸에서 열이 오르고 머릿속에서는 불꽃이 튀었다. 그런 와중에도 클로에는 자신의 이상해진 얼굴을 알폰스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고개를 돌렸다.

“안 됩니다.”

커다란 손이 그녀의 턱을 잡고 조심스레 돌려놓았다. 놀라 크게 뜬 클로에의 눈과 아름다운 붉은 눈동자가 허공에서 마주쳤다. 그 순간, 클로에는 더 느낀 것만 같았다.

“하아앙! 아흑, 흐으……. 왜, 왜애…….”

“보고 싶습니다. 당신의 얼굴을.”

그 짧은 말을 내뱉으면서도 여지없이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와 달리 알폰스의 말은 흔들림 하나 없었다.

그는 클로에의 사랑스러운, 열락에 젖어 있는 얼굴을 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움직임대로 느끼고 반응하며, 오로지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육체적 쾌감 이상의 정신적 충족감이 흐뭇하게 차올랐다.

처음에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다음은 여기까지가 감당할 수 있는 선이라고 생각했는데, 또 그다음은 이것이 마지막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전부 오산이었다. 점차 더 커다란 쾌감이 찾아오고, 클로에는 자신의 육체도 정신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흘러내린 애액이 시트 위에 고였고 힘껏 오므린 그녀의 발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되었다. 클로에는 쾌감이, 아니, 알폰스가 자신을 잡아먹을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충분히 달구어 두었다가 한순간 머리카락부터 발끝까지 하나도 남기지 않고 삼켜질 것만 같은 그런 쾌락.

알폰스와 지낸 밤의 기억은 그녀의 몸에 남아 있었지만 지금의 클로에 그녀가 직접 알폰스와 몸을 섞는 것은 처음이었다. 기억 속에서의 알폰스와의 교접 역시 어마어마한 쾌감과 희열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직접 몸을 마주 대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아니, 기억 속에서의 교접보다 지금 하는 일이 훨씬 자극적이고 강렬했다. 기분 탓인 걸까? 단순한 그녀의 착각일까? 클로에는 기억 속의 알폰스를 생각했다. 무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규칙적인 허리 놀림으로 이전의 클로에에게 쾌락을 선사하는 알폰스. 그녀의 안에 사정하여 후사를 낳는 것만이 유일한 목적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쉽게 알 수 있는 교접.

‘달라, 지금과는…….’

클로에는 오로지 그녀만을 바라보는 알폰스의 다정한 눈을 생각했다. 달콤한 눈빛과 목소리와는 대조적인 그의 견딜 수 없이 격렬한 움직임도. 그것을 생각하니 클로에의 질벽은 더욱 강하게 수축했다.

자신의 것을 빈틈없이 조여오는 축축하면서도 따뜻한 그녀의 안을 느끼면서 알폰스는 클로에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의 눈이 몽롱했다. 쾌감에 젖어 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했지만, 눈치가 좋은 알폰스는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지금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순간 알폰스는 머릿속에 확 열기가 오르는 것을 느꼈다. 나와 살을 섞는 도중에, 내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다고?

알폰스는 클로에를 끌어안아 체위를 바꾸었다. 자신이 침대 위에 앉고 그런 그의 위에 클로에를 앉히는 자세였다. 허공을 향해 솟은 그의 성기 위로 클로에의 통로가 한순간에 내리꽂혔다.

“꺄악!”

날카로운 쾌감이 우레처럼 그녀의 몸을 관통했다. 벼락같은 자극이 꼬리뼈부터 시작해 척추를 내달렸다. 클로에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녀의 눈에 생리적인 눈물이 고였다.

그러나 알폰스는 여전히 봐줄 생각이 없었다. 그는 감히 자신과 살을 섞으며 자신에게 집중하지 않는 그녀에게 끊임없이 벌을 내렸다. 그의 노골적으로 거친 몸짓에 클로에는 몇 번이나 벼락같은 쾌감을 경험했다.

“아! 아앙! 앙, 하악, 아앙!”

알폰스는 이것 외에 그녀의 주의를 자신에게 돌려놓는 방법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철퍽 철퍽 살과 살이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 같은 신음 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알폰스는 클로에의 풍만한 유방 위에 얹어져 있는 분홍색 선단을 입에 물었다.

“하으, 으응! 아! 하아앙!”

알폰스가 진득한 혀 놀림으로 그녀의 유두를 입 안에서 굴렸다. 앞니로 유두 끝을 긁어내면서 그와 동시에 손으로는 그녀의 음핵을 둥글렸다. 끊임없이 흘러나온 애액에 음핵까지 푹 젖어 있는 그녀의 성기는 애무하기가 쉬웠다. 알폰스의 탄탄한 허벅지가 애액으로 젖어 들었다.

클로에는 딱 죽을 것 같았다. 한 군데도 견디기가 어려운데 세 곳을 동시에 공격당하니 도저히 자신이 견딜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애원했다.

“아하앙! 으응, 응, 공…… 작님! 앗! 제발, 살, 살……. 아응, 너무, 히, 힘들…….”

그녀의 허리가 끊임없이 경련했다. 땀에 젖은 클로에의 살결이 하얗게 빛났다. 알폰스는 잠시 그녀의 가슴에서 입을 떼고, 밤색 머리카락이 흩어진 그녀의 몸과 자신이 그 위에 새겨 놓은 붉은 낙인들을 살펴보았다.

그제야 약간의 만족감이 돌아왔다.

알폰스는 조금이나마 여유를 되찾았다. 그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알폰스.”

“흐윽, 네, 네?”

“알폰스라고 부르십시오.”

클로에는 그 말이 유일한 동아줄로만 보였다. 딱 죽기 일보 직전인 자신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동앗줄. 클로에가 울먹이며 말했다.

“알…… 폰스! 아앙! 알폰…… 힉!”

알폰스는 자신의 품 안에서 파드득거리는 이 작은 몸을 괴롭히는 것이 너무나도 즐거워졌다. 그녀의 음핵을 둥글리는 손가락을 더욱 빠르게 하며 그가 말했다.

“잘 안 들립니다.”

“아, 알폰…… 으응, 하아앙, 아!”

“다시.”

그제야 클로에는 알폰스가 자신을 놀리고 있음을 눈치챘다. 그녀가 항변했다.

“자, 장난…… 아앗! 장난치는 거죠! 아읏…….”

“장난이라니요. 부인이 제대로 부르지 않는 게 아닙니까.”

“그…… 건 당신이이……. 아아아!”

정말 나빴어!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신음에 도저히 말할 수 없는 마지막 한마디를 삼키고는 클로에는 그렁거리는 눈으로 남편을 노려보았다. 자신의 불만과 항의의 뜻이 제대로 전달되길 바라면서.

알폰스는 속눈썹에 눈물을 잔뜩 매단 클로에가 자신을 쏘아보는 것을 보았다. 정말이지, 어떻게. 그는 진심으로 생각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사랑스러울 수 있는 거지, 이 여자는. 이건 마치 화난 병아리가 깃털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알폰스는 큰 소리로 웃고 싶은 충동을 겨우 참았다.

너무나 귀엽기 그지없는 그녀의 상반신과 달리 하반신은 너무나 음탕하게 그의 것을 조여왔다. 주름 하나하나가 그의 기둥을 빈틈없이 조여와 꽉 물고 있었다. 정신적인 만족감뿐만 아니라 육체 역시 터질 듯한 만족감을 줄 정도로.

‘원래 이랬던가?’

알폰스는 순간 생각했다. 이전에 클로에를 안았을 때에는 분명 그렇지 않았다. 클로에는 성적 파트너로서는 평균만도 못한 상대였다. 음침하고 겁먹은 얼굴로 나무토막처럼 누워 있는 것이 그녀가 하는 일의 전부였으니까.

‘그런데 왜, 이번은…….’

그렇게 생각하던 알폰스는 곧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이제 슬슬, 한계가 오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음핵에서 손을 떼곤 골반을 강하게 쥐었다. 그리고는 그 어느 때보다도 거칠게 그녀의 안을 향해 쳐올렸다.

“꺄악! 앗! 하아! 흐아아!”

온몸이 부서져 버릴 것만 같았다. 클로에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녀의 흰 젖가슴 위로 분홍색 유두가 곤두섰다. 뺨을 타고 생리적인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몸도 정신도 열락의 끝까지 치달아가면서, 그녀는 절정을 직감했다.

“아아아앗!”

그녀가 한계까지 몰려감과 동시에, 알폰스 역시 못을 박듯 강한 허릿짓으로 그녀의 안에 사정했다.

클로에의 가는 몸은 기운 없이 알폰스의 품 안으로 쓰러졌다. 그녀가 숨을 몰아쉴 때마다 동그랗게 말린 등과 아름답게 부푼 가슴이 들썩였다. 알폰스는 그런 클로에의 등을 쓰다듬어 주더니, 그녀를 좀 더 편안해지도록 침대 위에 눕혔다.

자리에 누워 클로에는 자신의 배를 슬쩍 쓰다듬었다. 그의 따스한 정액이 퍼져 나가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칭얼거리듯 말했다.

“죽는 줄 알았어요.”

알폰스가 픽 웃었다. 그는 그 옆에 모로 누우며 클로에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감았다.

“그래서 싫었습니까?”

그럴 리가 있나. 클로에는 잠시 전남친들과의 경험을 떠올렸다. 정말이지, 이 일이 이렇게나 기분 좋은 것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번에 한 것을 이전의 경험들과 비교한다면 그건 알폰스에게 어마무시한 실례일 정도였다.

클로에는 다시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싫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끝나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너무 지쳤거든요.”

격렬한 정사 끝에 밀려오는 나른함이라는 건 생각보다 기분이 좋구나, 라고 클로에는 생각했다. 씻는 것 따위는 내일 하고 이제는 푹 잠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그것은 희망 사항에 지나지 않았다.

“끝났다고, 누가 말했습니까?”

노곤함을 즐기고 있던 클로에는, 이 나직한 말에 깜짝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알폰스는 그녀를 흔들림 없이 보고 있었다. 시작하기 전과 똑같은 얼굴, 그녀를 향한 욕망이 강하게 새겨진 눈으로.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아 끌어당겼다. 클로에의 작은 손 안에 우람하며 단단한, 하지만 점액으로 뒤덮여 미끌미끌한 무언가가 잡혔다.

그녀가 그것이 무엇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 클로에는 경악한 눈으로 알폰스를 보았다.

말도 안 돼.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의 경험에 따르면 남성은 사정한 뒤 바로 발기할 수 없다. 다시 발기시키려면 어느 정도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그런데, 그런데 그녀의 눈 앞에 있는 이 남자는…….

그녀가 넋을 놓고 있는 사이 알폰스는 그녀의 위를 점했다. 흠칫 놀란 클로에가 소리쳤다.

“앗! 자, 잠깐. 잠시만요! 우리, 조금만 휴식을…….”

그러나 알폰스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다시 몸을 점령하기 시작하는 기묘한 느낌과 함께 클로에는 깨달았다. 자신이 완전히 잘못 걸려들었다는 것을.

* * *

출근하던 습관을 잊지 못한 클로에는 일찍 일어나는 편이었으나 오늘만은 예외였다.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늦잠을 자 버린 것이다.

천개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햇살에 눈을 뜬 클로에는 자신이 단단한 팔에 옴짝달싹할 수 없이 안겨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팔의 주인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도.

붉은 눈의 주인은 그녀보다 일찍 일어났고, 그녀의 자는 얼굴을 계속 보고 있었다. 그 사실에 쑥스러움과 왠지 모를 따뜻함을 동시에 느낀 클로에는 생긋 웃어 보였다.

“잘 잤어요?”

알폰스는 자신의 품 안에서 웃는, 그 사랑스러운 얼굴을 보고 생각했다.

‘합방을 할까.’

아니, 아니다. 그런 것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그들이 결혼 직전에 쓴 계약서에는 분명히 명시되어 있지 않았던가. 두 사람이 함께 밤을 보내는 것은 한 달에 하루로 한정된다고.

알폰스는 성생활을 특별히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 그의 타고난 성적 능력에도 불구하고, 어릴 적부터 그에게 가해졌던 금욕에 대한 강요는 오로지 생존을 위해 식사를 하듯, 성욕 해소 역시 최소한으로 행하도록 만들었다. 그에게 성욕이란 일상생활의 영위를 위하여 간간이 의무적으로 해소해야 할 사사로운 욕구, 그뿐이었다.

그러나 지난밤의 일은……. 그는 자신이 알던 세계가 한 번 바뀌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충만한 육신의 쾌락과 정신적 만족감이라니. 자신의 품 안에서 울먹이는 사랑스러운 얼굴이 주는 충만함은 세상의 그 어떠한 행위로도 대체할 수 없었다.

‘젠장, 왜 한 달에 한 번으로 했지.’

그는 내심 후회했다. 일주일에 한 번…… 아니, 일주일에 세 번으로 할 것을.

알폰스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꿈에서도 알지 못한 채, 클로에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시도했다. 그러나 허사였다. 몸을 일으키는 순간, 허리에서 강한 격통을 느끼고 쓰러져 앉은 것이다.

“아흐으……!”

그녀는 다시 침대의 하얀 시트 위로 엎어져서, 꼬물꼬물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역시나 지난밤에 무리를 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럴 만도 했다. 정말로 녹초가 되어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때까지 괴롭힘당했으니까.

이불 속에서 낑낑대는 그녀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불편하십니까?”

“으음, 못 움직이겠어요. 허리가…… 아니, 온몸이…….”

전신이 욱신거렸는데 그중에서도 허리가 제일 아팠다. 괴로움을 호소하던 클로에는, 눈앞의 남자가 바로 자신을 이렇게 만든 원흉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녀가 알폰스에게 눈을 흘겼다.

그녀가 귀엽게 눈을 흘기는 것을 보면서 알폰스는 가슴속이 간질간질해지는 듯한 알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클로에의 긴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감아 입 맞추었다.

“의사를 불러드리겠습니다.”

그의 손이 자신의 이마를 쓸어 넘기는 감각에 클로에는 더 이상 심통을 부릴 수가 없었다.

하녀들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씻고 편한 실내복을 입자 공작저 상주 의사 샨탈이 도착했다. 깐깐해 보이는 검은 단발머리의 그녀는 클로에를 세심히 진찰했다.

“언제부터 편찮으시기 시작하셨죠?”

“오늘 아침이요.”

“흠, 어제 무슨 일이 있었나요?”

클로에를 침대 위에 엎어놓고 그녀의 허리를 꾹꾹 눌러 보며 샨탈이 물었다. 클로에는 뺨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올 것이 왔구나.

“그…… 으, 으음, 어젯밤에 공작님과 밤을 보냈어요.”

“성관계를 하셨다는 말씀이신가요?”

“……네.”

유감스럽게도 샨탈은 수줍은 아가씨 환자의 마음을 잘 배려해 주는 타입의 의사는 아니었다. 정확하고 냉철한 것이, 딱 알폰스가 고용할 만한 사람이다 싶었다.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성관계를 하셨나요?”

“……저, 으음. 밤 10시부터…… 새벽 4시까지?”

“6시간이로군요.”

샨탈은 클로에의 허리에서 손을 떼고 수첩에 무언가를 끊임없이 끄적거렸다. 클로에는 그녀 몰래 손으로 뜨거운 얼굴을 감쌌다. 왜 부끄러움은 나의 몫이지?

진찰을 마친 샨탈이 세심히 설명해 주었다.

“평소 운동을 하지 않으시다가 갑작스레 무리를 하셔서 근육이 놀란 것 같습니다. 그 외의 다른 문제는 없는 걸로 보이네요. 근육통에 좋은 약초를 찧어 드릴 테니, 허리 위에 올려놓고 온찜질을 하세요.”

고개를 끄덕이는 클로에에게 샨탈이 날카롭게 지적했다.

“그리고 평소에도 운동을 꾸준히 하세요.”

클로에는 가슴 한구석이 뜨끔했지만, 한편으로는 언제나 어젯밤 했던 만큼 운동을 하면 자신은 과로사할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샨탈이 떠난 뒤, 변함없이 공작저의 사용인들 사이에선 클로에의 부상(?)이 화제가 되었다.

“혼자서는 걷지도 못할 정도로 앓았다던데?”

“목욕 시중을 들었던 하녀 말로는, 목에 붉은 자국이 많았댔어.”

“새벽 네 시까지 복도에서 소리가 들렸대.”

“한 번 이상 한 적이 처음이지 않아?”

지켜보는 눈이 많으며, 그 눈들의 오락거리가 달리 없는 이상 공작 부부의 사생활은 공공재였다. 물론 당사자들이 알게 된다면 경을 칠 일이지만, 그런 위험성이 지루한 시종 생활 중의 유일한 즐거움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생각하기에 이것은, 확실히 이상 신호였다. 14달이 다 되어 가는 바텐베르크 공작 부부의 성생활이 처음으로 너무나 명확한 변화를 나타낸 것이다. 본래라면 한 달에 하루, 그것도 딱 한 번, 정말 의무적으로 잠자리를 ‘실행’했던 그들은 지난밤 뜨거운 신혼부부처럼 굴었다.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모두가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 사실은 한 가지 결론으로 도달하고 있었다. 바텐베르크 공작 부부, 그들의 관계에 어마어마한 변화가 생긴 것이다.

* * *

티룸의 공사가 마무리되었다. 그것이 무척이나 기뻤던 클로에는 공작저 내의 가까운 사람들 몇 명을 초대했다. 일종의 소박한 개공식이었다.

개공식에 초대받은 사람은 알폰스와 엘리, 기사 삼총사로 총 다섯 명이었다.

“이야! 정말 끝내주지 않습니까! 마님의 초대를 다 받다니 영광입니다!”

“마님의 티룸이라니, 정말 멋져요! 제가 이런 곳에 오게 되다니……!”

호들갑을 떠는 기사 삼총사와 감동에 눈물을 글썽이는 엘리를 흘끗 본 알폰스가 말했다.

“완공을 축하합니다.”

순수하게 기뻐하는 기사 삼총사나 엘리와 달리 그는 조금 불만을 가지고 있는 쪽이었다. 티룸의 완공 뒤 첫 티타임은 당연히 클로에와 자신, 단둘의 것이라고 생각했었던 것이다. 클로에가 티룸에 자신 외의 다른 사람을 전혀 들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기념할 만한 첫 티타임인데…….

기사 삼총사와 엘리를 밝게 웃으며 맞이하는 클로에에게 알폰스가 말했다.

“제가 만들어 드린 티룸이 무사히 완성되어 다행입니다. 마음에는 드십니까?”

클로에는 자신의 남편을 바라보았다. 왠지 그의 말에서 ‘제가 만들어 드린’ 부분에 강세가 들어간 것만 같은 기분이지만, 기분 탓일 것이다. 그는 그렇게 속 좁은 남자가 아니니까. 클로에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네, 정말이요.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아닌 게 아니라, 알폰스의 지시로 개축한 이 티룸은 정말로 훌륭했다.

티룸은 총 세 구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찻잎을 보관하는 곳, 다구를 보관하는 곳, 차를 제조하고 마시는 곳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찻잎을 보관하는 곳은 천장을 터서 2층까지 이어져 있었는데, 사방의 벽이 전부 선반으로 가득 차 있어 선반마다 그녀가 가진 찻잎들을 채워 넣을 수 있었다. 차통들을 채워 넣은 모습은 마치 2층짜리 서재 같아 보였다.

차를 제조하고 마실 수 있는 곳은 그리 넓지는 않았지만 소파와 의자, 테이블과 선반이 많으며 물을 끓일 화로가 있어 아늑하고 따뜻했다. 보드라운 자주색 새틴으로 감싼 가구들은 무척이나 푹신하고 편안해 보였다. 또, 이곳에서 작은 문으로 이어져 있는 다구를 보관하는 공간에는 일전에 알폰스가 사들인 다구가 그득그득 보관되어 있었다.

클로에는 손님들을 둘러앉게 해 두고는 차를 준비하러 갔다.

그녀는 밀크티에 어울릴 만한 찻잎을 꺼냈다. 이것은 클로에가 스스로 블렌딩한 차로, 조금 씁쓸하고 진한 맛을 내는 다원의 아쌈과 맛은 비교적 연하지만 달콤한 몰트 향이 일품인 다원의 아쌈을 적당한 비율로 조합한 뒤 잘 우러나도록 찻잎을 잘게 썰어 놓은 것이었다. 밀크티용으로 적합해 그녀는 밀크티가 마시고 싶을 때마다 애용하고 있었다.

‘오늘은 특별한 밀크티를 만들어 볼까.’

클로에는 밀크티의 새로운 레시피를 곰곰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엘리가 대신 찻주전자와 간단한 비스킷류가 담긴 트레이를 날라 주었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이야! 드디어 마님의 차입니까!”

“기대된다!”

클로에는 직접 티타임에 함께한 모두의 잔에 밀크티를 따라 주었다. 기사 삼총사는 기대했던 투명한 수색이 아닌 희뿌연 액체가 잔을 채우자 깜짝 놀란 듯한 모습이었다.

“이건 밀크티예요. 홍차에 우유를 넣은 음료죠.”

“호…… 홍차에 우유, 말입니까……? 그…… 그렇게 희한할 데가…….”

제이콥이 무척 불안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나, 그는 곧 고개를 휙휙 저었다. 마님에 대한 강력한 신뢰가 그가 마음을 굳게 먹도록 만든 것이다.

“……하지만! 마님께서 주신 것이니 필히 맛있을 터! 저는 마님을 세상 누구보다도 믿습니다. 그러니 잘 먹겠습니다!”

그는 각오를 다진 채 밀크티를 결연하게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으윽!”

“왜 그래, 제이콥.”

발트가 걱정스레 물었다. 제이콥이 대답했다.

“혀 데였어!”

이들이 이렇게 수선을 떠는 동안 밀크티를 잠자코 마시고 있던 알폰스가 말했다.

“무척 부드럽습니다. 독특한 음료로군요.”

클로에는 그가 칭찬에 무척 인색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이 처음으로 티타임을 가졌을 때는 끝끝내 말 한마디 하지 않았을 정도로. 그러니까, 이건 실로 장족의 발전이었다.

엘리가 행복한 듯 말했다.

“너무 맛있어요! 아아, 이렇게 달콤하고 향긋하다니…….”

“입맛에 맞는다니 기쁘구나. 이 밀크티에는 특별히 꿀을 넣어 보았단다.”

“꿀이라구요?”

“그럼. 고소하고 부드러운 밀크티와 달콤하고 특유의 풍미가 있는 꿀은 무척 잘 어울리지.”

클로에가 온화한 얼굴로 설명했다. 과연 그랬다. 그녀가 오늘 만든 밀크티는 꿀을 넣어 홍차의 향과 꿀 특유의 풍미가 어우러져 무척 특별한 향을 자아냈다.

“정말이지 말입니다! 이야, 이거…… 엄청나게 부드럽고 달콤하고…… 좋은 향이 나는 데다가…… 감미롭지 말입니다! 이런 맛이 세상에 존재한다니! 전 감동했습니다!”

혀가 데였다더니만 어느샌가 회복한 제이콥이 호들갑을 떨어댔다. 발트도 맛있다를 연발하며 마시고 있었고, 카인 역시 심히 진지한 얼굴로 밀크티를 들이켰다.

클로에는 무척이나 행복한 얼굴을 했다.

“마음에들 드신다니, 기뻐요. 밀크티는 제가 무척 좋아하는 거라, 여러분께 꼭 소개해 드리고 싶었어요.”

“반응도 좋고 독창적입니다. 부인, 이 음료 역시 판매를 해 보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알폰스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클로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앗, 지, 진심이세요?”

“뭐라고요, 이걸 판매하신단 말입니까! 제가 삽니다, 사요!”

“저도요!”

“앗, 저, 저도…… 돈을 열심히 모아서…….”

기사 삼총사가 동조의 뜻을 표했다. 엘리 역시 우물쭈물 손을 들었다. (유감스럽게도 하녀의 월급은 차를 쉽게 사 마실 만한 금액이 아니었다.)

클로에는 곰곰이 생각했다. 생각해 보면, 얼 그레이 밀크잼은 얼 그레이 밀크티를 설탕에 졸인 것과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얼 그레이 밀크잼의 반응이 무척이나 좋았던 것을 생각해 보면 밀크티 역시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

클로에가 사풋 웃으며 말했다.

“생각해 볼게요.”

클로에는 기사들과 하녀를 지나쳐 남편의 곁에 가 앉았다. 알폰스가 그녀를 물끄러미 돌아보았다. 클로에가 수줍게 웃었다.

“정말 다행이에요. 공작님은 단 것을 안 좋아하시니까, 밀크티를 마음에 안 들어 하실까 봐 걱정했어요.”

음식에 대한 호불호가 거의 없는 알폰스가 유일하게 질색하는 것이 바로 단 것이었다. 식사나 간식은 물론이고, 차 역시 달콤한 가향 종류는 언제나 피하곤 했다.

알폰스는 잠시 그녀를 보았다. 곧, 그가 말했다.

“공작님이 아닙니다.”

“네?”

“알폰스라고, 부르시기로 했지 않습니까.”

알폰스가 찻잔을 들지 않은 팔로 클로에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저께 밤에.”

한 박자 늦게 그 말뜻을 이해한 클로에는……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아아, 이 남자, 정말! 다른 사람들도 있는데 그런 말을!

클로에는 토마토처럼 새빨개진 얼굴로 입을 꾸욱 다물었다. 이 남자, 냉철하고 진지하기만 한 줄 알았는데 의외로 음흉한 구석도 있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기사 삼총사는 웃음을 참고 있었다.

‘이야, 화끈하신걸. 주군 부부께서 이렇게 금슬이 좋으시다니.’

제이콥은 생각했으나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한편, 엘리는 알폰스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멍하니 공작 부부와 기사들을 번갈아 쳐다볼 뿐이었다.

클로에의 얼굴이 토마토처럼 새빨개지자 만족스러움을 느낀 알폰스는 찻잔을 다시 한 번 들어 밀크티를 마셨다.

밀크티는 나쁘지 않았다. 홍차의 짙은 향과 우유의 부드러움, 꿀 특유의 풍미가 만나 누구라도 쉽게 마실 수 있을 법했다.

‘공작님은 단 것을 안 좋아하시니까, 밀크티를 마음에 안 들어 하실까 봐 걱정했어요.’

알폰스는 클로에가 했던 말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그가 단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타고난 것이었는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이어져 온 취향이었다. 나이답지 않게 사탕을 싫어하는 그를 보고 유모들이 놀라워하던 것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밀크티는 제법 괜찮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만일 다른 자가 만들어 주었더라도 맛있었을까.’

무심코 생각한 알폰스는 찻잔을 입에 대려다가 멈칫했다.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그는 차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었다. 클로에와 함께하는 차를 좋아하는 것이었다.

* * *

나른한 오후, 클로에는 티룸에서 잠기운을 쫓을 차 한 잔을 즐기고 있었다.

엘리는 외출을 했기 때문에 그녀와 함께해 줄 수 없었다. 그게 조금쯤은 아쉬웠지만, 가끔씩은 혼자서 여유를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클로에는 생각했다.

어찌 됐건 괜찮았을 것이다. 뜻밖의 불청객이 찾아오지만 않았어도.

“지금 차 마시는 거 맞지? 내게도 한 잔 줬으면 좋겠는데.”

화들짝 놀란 클로에는 찻물을 흘릴 뻔했다.

이곳에 온 뒤로는 처음 들어 보는 목소리였지만 그래도 그녀는 누구인 줄 알 수 있었다. 모를 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바로…….

“화…… 황자 전하.”

클로에는 황급히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문틀에 기대어 서 있던 황자가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앉아, 앉아. 우리 사이에 예의 차리긴.”

제국의 제1 황자, 아서 카노사르 블라디미어였다.

클로에는 주춤주춤 자리에 앉았다. 황자는 꼭 자기 집이라도 된 듯이 성큼 티룸에 들어와, 클로에의 대각선 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그를 따라 들어오는 다른 사람이 있었다. 알폰스 바텐베르크 공작, 클로에의 남편이었다.

‘왜 저렇게 굳은 얼굴을 하고 있지?’

그래도 제 남편이고 익숙한 사람이라고, 클로에는 알폰스의 표정이 조금 신경 쓰였다.

오늘 황자가 알폰스의 집무실에 방문했다는 얘기는 들었다. 잠시 정무에 관한 이야기만 나누고 돌아갈 것이라고 했는데, 어쩌다 여기까지 온 걸까.

클로에는 다시 아서 황자를 보았다. 황가의 상징인 타는 듯한 붉은 머리를 헝클어뜨린 그는 제집처럼 편히 소파에 등을 기댔다. 그는 무척 잘생겼기에 클로에는 그 모습이 예의 없어 보이기보다는 화보의 한 장면 같다고 생각했다.

아름다운 귀족적 기품을 가진 알폰스와 다르게 아서 황자는 말하자면 쾌남의 이미지였다. 직선적인 이목구비와 강인한 턱, 짙은 색의 피부를 가진 그가 이를 드러내며 웃으면 많은 영애들의 마음이 녹아내리곤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클로에에게 중요한 일은 아니었지만.

“황자 전하, 여기까진 어쩐 일로…….”

클로에가 어색하게 물었다. 턱을 괴고 있던 아서 황자가 씩 웃었다.

“청소 하녀에게 물어봤더니 네가 여기 있다잖아. 가기 전에 잠깐 들렀지.”

아서 황자가 클로에에게 윙크를 했다. 그는 자신이 어느 정도의 미모를 가졌는지 알고 그것을 잘 활용하는 사람이었다.

실제로 예전의 클로에였으면 그 모습에 꽤나 동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클로에는 아니었다.

“아, 그러셨군요.”

클로에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클로에가 동요하는 기색이 없자 순간 황자의 얼굴에는 언짢은 듯한 빛이 스쳤다.

어디선가 헛기침하는 소리가 들렸다. 알폰스였다.

“이미 서로 잘 아시겠지만. 전하, 제 처 클로에 바텐베르크입니다. 부인, 아서 블라디미어 황자이십니다.”

그는 어쩐지 노골적으로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클로에는 알폰스가 저런 얼굴을 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그래, 소개해 줘서 고마워, 알폰스. 그런데…….”

아서 황자는 알폰스를 보았다가, 금빛의 눈동자를 티룸의 문을 향해 돌렸다가 했다.

어떤 의미를 담은 건지 5살짜리 어린아이라도 알 수 있는 노골적인 눈짓이었다.

“…….”

그런데 놀랍게도, 알폰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클로에와 같은 소파 끄트머리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눈짓이 통하지 않자 아서 황자는 이마를 살짝 찌푸렸다가, 결국 이렇게 말했다.

“나가주지그래. 나는 클로에랑 단둘이 차 마시고 싶은데.”

“죄송합니다. 저도 지금 차가 무척이나 마시고 싶기에.”

단호한 거절이었다. 게다가 어쩐지 ‘무척이나’에 강세가 들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클로에는 입을 떡 벌렸다.

잠시 허공에서 아서와 알폰스의 눈빛이 맞부딪쳤다. 결국, 먼저 패배를 인정한 건 황자 쪽이었다.

“뭐, 상관없지. 네 아내이기도 하고.”

“…….”

아서 황자는 제국의 소문난 망나니였다. 공부와 정무를 돕는 일보다는 술과 여색을 좋아하고, 툭하면 강연 시간을 지키지 않고 놀러 나가기 일쑤라 황제와 황후의 속을 많이 썩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리는 좋아 어느 정도 황자다운 지식은 있었지만 여전히 태도가 문제였다. 차기 황제감이라고 당당히 부르기엔 어울리지 않는 성정이었던 것이다.

그가 그 나이 먹도록 황태자 책봉이 안 된 것은 그래서였다.

그거랑 별개로 클로에는 아서 황자와 함께 있는 일이 영 껄끄러웠다.

이건 이전의 클로에의 일 때문이었다. 몇 년 전, 풋풋하던 시절 클로에는 남몰래 황자를 사모했었다. 그리고 어느 무도회 날, 가까스로 황자에게 고백했지만 황자는 대놓고 웃을 뿐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사교계에 클로에가 황자를 연모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사교계에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조롱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 클로에가 감히 황자님을 사랑하다니, 웃기지도 않지!’

‘주제에 보는 눈은 있는가 보지!’

꼭 자신의 일처럼 떠오르는 이전에 클로에의 기억에 클로에는 한숨을 쉬었다.

혼인 뒤에 정부를 두거나 연애를 하는 것이 죄가 아닌 세계였다. 황자는 아직까지도 노골적으로 자신과 클로에 사이의 주도권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 사실이 얄밉긴 했지만 어쨌든 그는 황자였다. 달리 거절할 명분도 없었고.

클로에는 다시 한 번 남몰래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어떤 차를 드릴까요?”

“내가 좋아할 만한 걸로.”

자기가 뭘 좋아할지 내가 어떻게 알아?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클로에는 머릿속의 자신이 갖고 있는 차의 목록을 차근차근 살펴볼 수밖에는 없었다. 어떤 차가 좋을까.

알폰스 바텐베르크는 치밀한 사람이었다. 암만 사랑이 없고 관심이 없는 상대와의 결혼이라 한들, 아니 그래서 더더욱 아내 될 사람에 대해 샅샅이 조사했다.

그런 그가, 클로에가 몇 년 전 황자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

그러나 그 생각을 하면 기분이 지극히 가라앉는 이유만은 몰랐다.

까마득한 어둠 속을 더듬는 기분으로, 정체 모를 감정을 그저 더듬으며 알폰스는 자리를 지키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클로에가 선택한 차는…….

‘세상에, 이 차도 있을 줄은 몰랐는데.’

차를 정리하던 도중 이 차를 발견했을 때에 클로에가 제일 먼저 했던 생각이었다.

아니, 어떻게 생각하면 있는 게 당연할지도 몰랐다. 가향 홍차의 클래식이자 알파이자 오메가니까.

클로에는 금방 차를 우려 응접실로 가지고 왔다.

잘 우러난 차를 아서와 알폰스의 앞에 놓인 예열한 찻잔에 따라 내자, 아서가 찻잔을 집어 들고 킁킁거렸다.

“향이 희한한데.”

알폰스 역시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티팟에서 화려한 향이 뿜어져 나왔다.

“향이 화려하군요.”

아서는 찻잔을 술잔처럼 들이켰다. 그가 놀란 얼굴을 했다.

“뭐야, 이거? 꼭 여인들이 뿌리는 향수 같은 느낌인데. 이름이 뭐야?”

“엔 베르체입니다.”

클로에는 차통의 라벨에 쓰여 있던 이름을 댔다.

“하지만 외국의 일부 지역에서는 얼 그레이(Earl Grey), 그러니까 그레이 백작으로도 불러요.”

“그레이 백작?”

황자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거 재밌는걸. 꼭 여인네들이 찍어 바르는 연지 같은 향을 하곤 백작이라. 그가 이 차를 개발했어?”

“아니요. 하지만 그가 이 차를 발견했다는 설화가 있습니다.”

황자가 계속해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클로에가 말을 이었다.

“그레이 백작이 차 산지에 여행을 갔는데, 그 지역 관리의 어린 아들이 연못에 빠진 것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백작이 아들을 구해 주었는데, 이에 감동한 관리가 지역의 특산물이라며 이 차를 선물했다고 합니다. 그 뒤로 이 차에 그레이 백작의 이름이 붙었다고 해요.”

좋아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얼 그레이의 화사한 향기와 다른 사람에게 차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즐거움에 취한 클로에는 조금쯤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얼굴에 점점 진심 어린 미소가 어리기 시작했다.

한편, 황자는 진심 어린 놀란 얼굴이 되어 가고 있었다.

“뭐야, 클로에. 너 이런 것도 알고 있었단 말이야? 전혀 몰랐어. 기억나? 네가 몇 년 전에 와인에 대해 잘 안다고 잘난 척하다가 된통 망신당한 거…….”

“……음, 네. 그런 일이 있었죠.”

클로에가 다시 차게 식은 기분으로 대답했다.

그녀의 설명을 들으며 말없이 얼 그레이를 마시던 알폰스가 물었다.

“향기가 마치 꽃 같기도 하고, 과일 같기도 하군요. 이 향은 무엇입니까?”

“아, 그건 베르가못이라는 거예요. 외국 일부 지역에서 나는 오렌지과의 식물의 열매에서 추출한 오일인데요. 마치 꽃향기 같기도 하고, 시트러스류의 과일 같기도 한 향이 나지요.”

“찻잎에 섞여 있는 노란 게 그 베르가못이야?”

아서 황자가 스트레이너에 남아 있는 엽저(차를 우리고 남은 잎)를 가리켰다. 거뭇거뭇한 찻잎 사이로 금빛의 꽃잎이 드문드문 보였다.

“아, 아니요. 그건 제가 임의로 블렌딩해 본 메리골드 꽃잎이에요.”

“블렌딩?”

“황자님도 말씀하셨지만, 이 차의 향기는 향수나 화장품과도 닮아 있어서요. 혹시나 베르가못의 화려한 향에 부담감을 느끼실까 봐 다른 재료를 섞어 보았습니다.”

클로에가 메리골드를 넣은 덕에 베르가못의 부담스러운 화려함은 조금쯤 누그러지고, 베르가못을 감싸는 듯 은은하고 달콤한 꽃향기로 향은 더 풍부해진 것이다.

클로에는 내심 이 차의 이름을 ‘얼 그레이 플라워’로 점찍어 두고 있었다.

“이야…….”

클로에는 왠지, 아서 황자의 장난스럽던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이유는 몰랐다.

“네게 그런 재능도 있었다니. 꿈에도 생각 못 했는걸.”

이번의 차손님들은 클로에의 ‘얼 그레이 플라워’가 마음에 들었는지, 오래지 않아 티팟을 전부 비웠다.

특히, 아서 황자와 알폰스는 찻잎을 화사한 금빛의 메리골드로 장식했다는 점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아서 황자는 그것이 자신의 눈 색깔을 비유한 것일 거라고 생각했고, 알폰스는 내심 자신의 머리카락을 닮았다고 여겼다.

물론 클로에가 그런 생각을 하고 블렌딩을 한 것은 아니었다.

티팟이 비자 황자는 기분 좋게 웃으며 소파에 몸을 묻었다.

“잘 마셨어, 클로에. 오늘 정말 다시 봤어.”

“아, 네.”

클로에가 예의상의 태도로 대답했다. 차를 마시는 것과 차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분명 즐거웠지만, 역시나 저 상대는 약간 껄끄러웠다.

그때였다.

클로에는 자신의 손이 따뜻한 온기에 붙들려 끌어당겨지는 것을 느꼈다. 황자가 자신의 손을 잡아 끌어당긴 것이었다.

“고마웠어?”

황자가 눈을 찡긋하며 웃었다.

“아…… 아.”

그녀는 이 상황, 황자가 꼭 자신의 애인이라도 되는 듯 손을 잡은 상황이 기분 좋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껄끄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바로 거절하지 못했다. 너무나 당황한 탓에 그대로 굳어 버린 탓이었다. 그녀는 잠시, 황자의 손에 손이 쥐인 채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오히려 먼저 반응을 보인 쪽은, 당사자인 클로에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

“제 아내입니다.”

클로에가 흠칫 놀라 돌아보았다.

어느샌가 알폰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클로에는 그가 그런 눈을 하고 있는 것은 처음 보았다.

언제나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던 신비로운 색채의 알폰스의 선홍빛 눈동자에는 명백한 감정이 서려 있었다. 저건…… 적의였다. 그리고 분노. 자신의 영역을 침범당한 것에 대한.

평소의 알폰스의 모습에서는 도저히 상상해 낼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아무 잘못 없는 클로에조차 등골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공작이라고는 하나 일단은 제국의 예속이여야 하는 그다. 그런 그가 감히 황족에게 이렇게 노골적인 적개심을 드러낸 것은 명백한 무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적의를 정면으로 맞이한 아서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능글맞은 웃음을 띠고 있던 아서의 안색이 희게 질렸다. 휘어져 올라간 그의 입꼬리가 순간 파르르 떨리는 것을 클로에는 보았다.

곧 아서가 정신을 차렸다. 그는 클로에에게서 손을 떼곤, 휘익 휘파람을 불며 웃었다. 알폰스는 웃지 않았다.

낄낄거리며 웃던 아서는 곧 손을 털어 보이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했다.

“설마 해서 하는 말인데, 공작.”

아서가 능글맞게 이죽거렸다.

“지금 질투하는 거 아니지?”

차까지 얻어 마셨으니 더 이상 아서가 공작저에 남아 있을 만한 명분은 없었다. 그는 공작 부부의 배웅 인사도 거절한 채 황궁으로 떠났다. 다행인 일이었다. 살갑게 배웅 인사를 할 만한 분위기는 아니었으니까.

황자가 사라진 뒤 공작 부부의 사이에는 조금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알폰스는 자신이 과잉 행동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까 그 황자 놈한테 더한 반응을 해 주었어야 하지 않았나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때 그가 느낀 것은 분노뿐만이 아니었다. 친부로부터 물려받은 몇 안 되는 감정, 두려움. 그것이 그의 빈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아내가 황자를 선택하면 어떻게 하지.’

성장한 뒤 단 한 번도 두려워해 본 적 없었던 그가 최초로 느낀 두려움. 거창한 감정은 아니었다. 그의 세계를 뒤흔드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은은히 다가와 속삭이는 그 감정은 손거스러미처럼 도드라져 그의 신경을 거슬렀다.

애초에 왜 이런 것을 두려워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필요에 의한 결혼이다. 서로가 이해관계에 의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을 때는 그대로 갈라서면 그만이다.

알폰스는 적당히 이유를 가져다 붙였다. 그는 현재의 일상에 만족하고 있고 변화를 싫어하는 사람이다. 아내는 훌륭한 동업자이자 말 상대이다. 그의 반려자로서 완벽한 사람, 그녀와의 이혼은 지양하는 게 타당했다.

하지만. 알폰스는 그들의 계약 조건에 서로의 사생활을 존중해야 한다는 내용의 항목이 들어 있었다는 것을 기억했다. 만일 이혼을 하지 않은 채 아내가 황자와 내연의 만남을 가진다고 해도 그가 불쾌함을 느낄 이유가 없다. 클로에와의 일상도 지속될 것이고 그렇다면 그가 두려워할 이유도…….

없어야 마땅할 터인데.

그럼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가 황자와 엮이는 것이 싫었다. 어떠한 이유로든 엮이지 않았으면 했다.

알폰스는 자신이 왜 이런 기분을 느끼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상관없었다. 그는 클로에를 붙잡고 싶었다.

식어 버린 다구를 앞에 두고 응접실에 말없이 앉아만 있던 그들 중 먼저 일어난 사람은 알폰스였다. 그는 말없이 일어나 나가 버렸다. 아마 아예 외출을 해 버린 것 같았다.

알폰스가 돌아온 것은 저녁 식사 시간쯤이었다.

“좋은 아내가 되어 주어서,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가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게 말한 그는 품에서 밤색 벨벳으로 포장된 상자를 꺼내 클로에에게 건넸다.

클로에는 상자를 열어 보았다.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보석이었다. 아름답게 빛나는 페리도트와 작은 진주 알들을 백금줄로 엮어 만든 화려한 목걸이와 귀걸이 세트였다.

클로에는…… 보석을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 둘 중 하나를 골라 보라면 물론 좋아하는 쪽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일단 예쁘니까. 그것이 사치라고 생각하거나 소비하는 사람을 한심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녀에게 보석은 이미 차고 넘칠 정도로 많았다. 게다가, 무엇보다 지금 그녀가 원하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저…… 이건 부부 관계로서 제게 주시는 마음의 표시인가요?”

“…….”

알폰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클로에는 그것을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저는 이런 물질적인 보답을 바라고 당신의 아내로 지내는 게 아니에요. 만일 제게 고마움을 표하고 싶으시다면 저는 다른 것을 갖고 싶어요. 좀 더…… 인간적인 거요.”

알폰스는 이 말을 이해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클로에는 남모를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설명했다.

“예를 들어, 친절하고 다정한 눈으로 지어 주시는 미소 같은 거요.”

클로에는 여태까지 단 한 번도 알폰스가 자신에게 웃어 주지 않았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고맙다는 말을 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라는 사실도 기억하고 있다. 그의 성향인 것은 알고 있지만 이렇게 함께 지낸 시간이 쌓이고 쌓이니 서운함을 느끼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알폰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아름다운 선의 얼굴은 입을 다물고 있을 뿐,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클로에는 끝끝내 그의 다정한 말이나 엷은 미소 하나 얻지 못했다.

클로에는 왠지 마음이 아득히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이건 받지 않을게요. 성의는 무척 감사드려요.”

그녀는 상자를 도로 알폰스에게 돌려주었다. 그러고는 누군가가 덜미를 잡으려고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침실로 돌아가 버렸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나 보니 화장대 위에 그 목걸이가 있었다.

화장대 의자에 앉아 멍하니 그 목걸이를 바라보던 클로에는 생각했다.

‘조금쯤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사랑하지 않는 건 어쩔 수 없어도 친해질 수는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좋든 싫든 앞으로 평생 한 지붕 아래에서 살 사람이다. 기왕이면 마음을 나누고, 진심으로 서로를 위하는 관계가 좋았다.

관계 개선을 위해 자신은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했다. 대화를 나눌 때마다 늘 어떤 이야기를 해야 재미있을까, 어떤 농담을 해야 남편을 웃길 수 있을까 고민도 하고, 키엘에게 남편이 무얼 좋아하는지 물어보기도 하고.

그래도 지난 시간 동안 그들은 꽤 괜찮았다. 괜찮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차도 마셨고, 많은 대화도 나누었고 일도 함께했다. 남의 입을 통해서였긴 하지만 그의 옛날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그게 관계 진전의 청신호라고 여겼건만.

‘전부 내 착각이었던 걸까.’

도저히 모르겠다. 알폰스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과연 그 사람은 관계를 진전시키고 싶다는 생각이 있긴 한 건지. 나만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시무룩한 기분으로 목걸이만 빤히 보고 있던 클로에는 곧, 머리를 흔들었다.

‘에잇, 아니야. 너무 고민하지 말자. 이런 괜한 걸로 스트레스받는 건 싫어.’

클로에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손바닥으로 양 뺨을 챱챱 쳤다. 그녀는 조용히 다짐했다.

‘나도 당분간 그 사람을 사무적으로만 대할 거야. 좀 더 시간을 두고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해 볼래.’

당분간 알폰스는 알폰스 나름대로 일을 하느라, 클로에는 클로에 나름대로 자신의 생일 연회를 준비하느라 바쁜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도중 공작 부부는 황궁에서 열리는 작은 다과회에 초대를 받았다. 초청자의 이름에는 클로에로서는 대단히 낯설고 거리감이 느껴지는 사람이 적혀 있었다. 제국의 황제였다.

초대를 받았을 때 클로에는 깜짝 놀랐다. 클로에의 이전 기억을 되짚어 봐도 그녀는 단 한 번도 황제의 초대를 직접 받아 본 적이 없었다.

분명 영광인 일이지만, 클로에로선 딱 하나 걸리는 게 있었다.

'부부 동반 모임이라니.'

여전히 알폰스와는 어색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알폰스와 함께 외출하는 것을 상상하기만 해도 기분이 서먹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른 고만고만한 다과회라면 거절이라도 할 수 있겠지만, 황제가 부르는데 어쩌겠는가.

클로에는 하녀를 통해 알폰스에게 모임의 참가 의사를 알렸다.

모임의 당일이 되었다. 중요한 외출에 걸맞게 신경 써서 단장한 클로에는 알폰스가 기다리고 있다는 현관으로 내려갔다.

"공작님."

알폰스가 보이자 클로에가 생긋 웃었다. 진심 없는 미소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잠시 빤히 보던 알폰스는 그녀에게 가볍게 목례했다. 그는 클로에를 에스코트하며 마차에 태웠다.

클로에와 알폰스가 초청된 곳은 정원이었다. 알록달록한 색상의 작약이 가득 피어 있는 그곳에 테이블과 가림막 등으로 이루어진 작은 자리가 준비되어 있었다.

자리에는 바텐베르크 부부와 함께 초청된 두 쌍의 부부가 있었다. 윈체스터 공작 부부와 로네펠트 후작 부부였다.

아직 모임의 주최자인 황제는 나타나지 않은 상태였다. 그들은 서로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바텐베르크 공작부인. 마리사 윈체스터입니다."

"클로에 바텐베르크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윈체스터 공작부인."

클로에는 제국에 바텐베르크를 통틀어 단 두 쌍밖에 없다는 다른 공작 부부를 처음 보았다. 윈체스터 부부는 바텐베르크에 비해 훨씬 연배가 있어서, 거의 클로에와 같은 나이의 자식이 있을 것 같았다.

서로 인사를 마치고 날씨 이야기나 안부 등의 소소한 한담을 하던 중이었다. 로네펠트 후작부인이 농담처럼 말했다.

"바텐베르크 공작부인, 다과회를 아주 오랜만에 개최하셨다고 들었는데 초대받지 못해 안타까웠어요. 제 지인이신 클로버필드 자작부인이 그랬는데 정말로 즐거운 시간 보내셨다면서요? 다음엔 꼭 저도 초대해 주세요."

당시 클로에는 공작가의 가신들을 위주로 초대자 명단을 꾸렸다.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듯한 로네펠트 후작부인의 반응에 클로에는 약간의 미안함을 느꼈다.

"소박한 모임이었는데,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해요. 다음번에는 꼭 로네펠트 후작부인과 함께하고 싶네요."

그때였다. 시종 한 명이 곧 황제 폐하께서 도착하신다고 알려 왔다. 아니나 다를까 오래 지나지 않아 제국의 황제가 나타났다.

자리에 앉아 있던 귀족 부부들은 전부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추었다.

“허허, 환영하오. 앉아도 좋소.”

꾸벅 인사한 클로에가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제국의 황제, 조지 왈트발 메르세데스 블라디미어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황자와 같은 붉은색이었을, 하지만 이젠 반쯤 하얗게 세어 버린 머리카락을 차분히 빗어 넘기고 수염을 기른 남자였다. 웃을 때 휘어지는 눈의 모양과 남들보다 짙은 색의 피부색은 그의 아들과 꼭 닮았으나, 황자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위엄과 당당한 풍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또 예상치 못한 참가자가 한 명 있었다.

황제의 뒤에 황자 아서가 뒤따라왔던 것이다.

<다음 권에 계속>

공작부인의 50가지 티 레시피 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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