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밤이 깊어지고 술이 들어가면 으레 야릇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이곤 했다. 성적으로 분방한 분위기인 제국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공작님과 교제해 본 영애들에게 듣기로는, 공작님의 정력이 대단해서 한 번 시작하면 동이 틀 때까지도 하실 수가 있다는데 사실인가요?”
비교적 나이가 어린 영애가 뺨을 핑크색으로 물들인 채 물었다.
“공작님의 물건은 어때요? 충분히 우람한가요?”
“공작님의 성적 취향은 어떤가요?”
“자주 잠자리를 함께하세요? 한 달에 몇 번 정도?”
여기저기서 질문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러나 클로에는 어느 것에도 대답할 수 없었다. 갑작스레 머리를 치고 들어온 깨달음 때문이었다.
그래, 그들은 부부였다. 성적 관계를 갖고, 후사를 만들 법적인 의무가 있는 부부.
실제로 알폰스와 클로에, 정확히 말하자면 알폰스와 이전의 클로에가 쓴 혼인서약서에는 잠자리와 관련된 항목이 들어 있었다. 후사를 만들기 위한 잠자리를 한 달에 한 번, 의무적으로 갖는 것으로.
그리고 이전의 클로에는 정말로 한 달에 한 번 알폰스와 관계를 가졌다.
물론 그녀는 여태까지 그 기억 역시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그 기억을 꺼내거나 회상할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의 머릿속에 고이 접혀 있던 기억들은 의식하자마자 두루마리처럼 펼쳐지기 시작했다. 이전의 클로에의 긴장과 두려움,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게 굳어 있는 그녀, 근육으로 다져진 알폰스의 나신, 주름지는 침대 시트…….
이것은 지금의 클로에, 그녀의 기억이기도 했지만 남의 기억이기도 했다. 어찌 됐든 그녀가 경험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남의 성관계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은 정말이지 이상한 기분이었다. 봐서는 안 될 것을 봐 버린 듯한 죄책감과 그보다 격렬한 부끄러움이 그녀를 덮쳤다.
클로에는 입술을 깨물고는 말했다.
“무례한 분들이시군요. 서로 친한 분들끼리라면 은밀한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겠죠. 하지만, 어디 초면인 저에게 그런 실례되는 말씀을 하시나요?”
“네? 그, 그게 아니고요, 공작부인. 저희는 그저…….”
“많이 취하신 것을 감안하여 다른 불이익을 드리지는 않겠어요. 하지만, 다음부터는 말하기 전에 그 말을 들으면 상대방의 기분이 어떨지를 먼저 생각하세요. 다시 한 번 이런 식의 언행을 하신다면 그때는 쉽게 넘어가지 않겠어요.”
클로에보다 열댓 살은 많아 보이는 여자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채 입을 꾹 다물었다. 클로에는 한 번 뒤돌아보지도 않고 그들을 떠나 연회장을 향했다.
얼마 안 가, 파우더 룸의 밖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남편이 보였다.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클로에의 안에서는 꾹 참아 누르고 있던 부끄러움과 수치의 감정이 터져 나왔다. 방금 보았던 회상이 다시 한 번 떠올랐다. 그의 아름다운 나신과 조금 낮은 체온의 품. 그에게 안겼던 몸의 기억…….
“부인.”
알폰스는 자연스럽게 그녀를 에스코트하기 위해 어깨를 감싸 안았다. 클로에가 여태까지는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반응을 보였다. 화들짝 놀란 것이다.
“아앗! 죄, 죄송해요.”
클로에가 더듬더듬 말했다.
알폰스는 그녀의 긴장한 듯한 태도와 붉어진 뺨을 눈여겨보았다. 그는 클로에에게 손을 대지 않은 채 나지막이 물었다.
“부인,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아니에요. 아무 일도 없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클로에가 얼른 대답했다. 결코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알폰스와의 밤의 기억을 떠올렸으며, 그것을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폰스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얼굴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클로에는 그의 눈빛이 자신을 꿰뚫어 보는 것만 같아 불안해졌다.
마침내 알폰스가 말했다.
“많이 피곤해 보이십니다. 돌아가시겠습니까.”
클로에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오는 마차의 안에서 클로에는 생각했다.
물론 그녀는 연애 경험이 없지 않다. 박하정이던 시절에는 이성 교제도 해 보았고, 남자친구와 잠자리도 가졌다.
하지만 그런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클로에는 알폰스의 얼굴을 보기가 어려웠다. 그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를 보면 자꾸만 그 기억이 떠올라 버려서. 그의 품과, 열기와, 그에게 안겼던 이전의 클로에의 모든 경험이…….
게다가…….
‘나도…… 그렇게 해야 하는구나. 그와.’
클로에는 문득 생각했다. 물론 누군가의 아내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 어렴풋이 인식하고는 있었지만, 아주 먼 미래의 일처럼 느껴졌던 것이 당장 내일의 일처럼 실감이 났다.
그의 아내가 된 것은…… 싫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쯤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클로에는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 날 아침, 침대에서 일어난 클로에가 제일 먼저 떠올린 것은 알폰스였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에게 안겼던 기억.
이건 정말 이상한 기분이었다.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도 모르는 사이 내 몸이 그렇고 그런 걸 해 버린 느낌이랄까.
‘으으, 정신 차려야지.’
클로에는 자신의 뺨을 찰싹찰싹 쳤다. 언제까지나 이 기억에 얽매여 있을 수는 없었다.
곧이어 하녀들이 나타났다. 클로에는 적당한 단장을 하고 실내드레스를 입은 뒤 하녀들에게 엘리를 불러 달라고 부탁했다.
“부르셨어요, 마님?”
오래지 않아 엘리가 도착했다. 반가운 얼굴이었다. 클로에는 그녀에게 생긋 웃어 주었다.
“어서 오렴. 별일은 아니고, 차를 같이 마시고 싶어서 불렀단다.”
“정말요?”
엘리의 얼굴이 환해지는 것을 보고 클로에는 속으로 쿡쿡 웃었다.
“그래. 함께 차를 골라 볼까?”
그들은 차 창고 방으로 가서 차와 다구를 골랐다. 클로에는 오늘의 선택이 썩 만족스러웠다. 아마 엘리에게도 그럴 것이었다.
‘역시 정신 안정에는 이만한 게 없지.’
클로에는 흐뭇한 마음으로 엘리와 함께 응접실로 내려갔다.
홍차의 검은 잎과는 달리 뚜렷한 녹색의 빛을 띠고 있는 찻잎을 보며 엘리가 말했다.
“홍차가 아니네요, 마님. 저번 다과회 때 보여 주셨던 것 같은 우롱차인가요?”
“아니, 이건 녹차야. 홍차나 우롱차와 달리 찻잎을 전혀 산화시키지 않은 것이란다.”
클로에는 지나가던 하녀에게 끓는 물의 준비를 부탁했다. 오래지 않아 김이 팔팔 피어오르는 찻물이 준비되었고, 클로에는 잠시 엘리와 수다를 떨며 그것을 그냥 두었다.
엘리는 그것이 신경 쓰이는지 자꾸만 물주전자를 흘끔거렸다.
“마님, 차를 우릴 때에는 갓 끓인 뜨거운 물을 사용해야 한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이러다 물이 식을 것 같아요.”
“응, 녹차는 홍차와는 달리 한 김 식힌 물로 우려내야 하거든. 녹차나 우롱차는 홍차보다 낮은 온도의 물에서 맛있게 우러난단다.”
물을 적당히 식힌 뒤 녹차를 우려냈다. 연노랑에 가까운 예쁜 수색이었다.
클로에는 엘리에게 녹차를 따라 주며 말했다.
“먼저 마셔 보고, 맛이 홍차와는 어떻게 다른지 이야기해 주렴.”
“저, 정말요? 제가 먼저 마셔도 될까요?”
주저하던 엘리는 클로에가 재촉하자 결국 잔을 입에 대었다. 따뜻한 차를 호호 불어 마신 뒤, 엘리의 눈이 놀라움으로 빛났다.
“우와…… 이건……! 정말 고소해요. 이게 정말 나뭇잎으로 우려낸 차가 맞나요? 꼭 곡식 같은걸요!”
“맞아, 좋은 녹차는 무척 고소하지. 좋은 차인가 봐.”
클로에는 흐뭇하게 웃으며 차를 마셨다. 과연, 상당히 좋은 녹차였다. 곡식 같은 고소함이 혀끝을 맴돌고, 홍차와는 다른 풋풋한 향이 코끝에 감돌았다.
“그리고 또? 홍차와는 어떻게 다르지?”
“또…… 음……. 아! 홍차는 아주 부드러운데, 녹차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맞아. 홍차는 찻물이 혀에 닿는 감촉부터가 비단 천이 스치는 것 같은데, 녹차는 그렇지 않지. 녹차를 처음 마시는 사람도 편히 마실 수 있도록 부드러운 맛이 나게 산화시킨 것이 홍차야.”
홍차의 달콤한 향과는 다른, 담백하면서도 고소한 향이 응접실을 가득 채웠다. 차를 좀 더 마시던 클로에는 문득 엘리를 향해 말했다.
“엘리는 차의 맛을 잘 느끼는구나. 좋은 티 테이스터(*차를 시음하는 사람)가 되겠는걸.”
“앗……! 저, 정말요?”
칭찬을 들은 엘리는 무척 부끄러웠다. 그녀는 언제나 선배들에게 혼나고 치여 사는 막내 빨래 하녀로, 살면서 칭찬을 들어 본 적이 손에 꼽혔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름다우면서 상냥하고 차를 무척 잘 알고 정말 맛있게 만드시는, 내심 존경하고 있던 마님께서 자신을 칭찬해 주시다니!
엘리는 눈물이 핑 돌 것만 같았다. 자기 같은 한낱 하녀를 이렇게나 잘 챙겨 주고 차 같은 희귀한 음료를 맛보게 해 주는 착한 마님은 이 세상에 클로에밖에 없을 것이었다.
엘리는 자신의 빈약한 힘으로나마, 앞으로도 최선을 다해 마님께 충성하고 마님을 지켜드리기로 마음먹었다.
엘리가 자신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꿈에도 모른 채, 무언가를 생각하던 클로에가 말했다.
“참고로, 녹차 잎을 가루가 되도록 갈아서 물에 개어 먹기도 하는데, 이것을 말차라고 불러. 녹차보다 진하고 씁쓸하지만 잘 만들면 정말 부드럽단다. 게다가, 말차로 과자를 만들어 먹기도 하는데 이것도 무척 맛있어.”
클로에가 입맛을 다셨다. 이전의 삶에서 그녀는 말차 맛 과자를 무척 좋아했다. 독특한 향과 쌉쌀한 맛의 말차 맛 쿠키, 케이크, 아이스크림, 초콜릿……. 그녀는 새삼 그러한 것들이 그리워졌다.
“다음에 부엌 하녀들에게 만들어 달라고 해야겠다. 엘리, 같이 나눠 먹자.”
“저, 정말요?”
“그럼.”
엘리가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듯 얼굴을 붉혔다. 클로에는 흡족하게 웃었다.
엘리와 차를 마신 클로에는 슬슬 때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사업에 대하여 알폰스와 의논을 할 시간이었다.
뒤처리는 엘리에게 부탁한 뒤 클로에는 이제 제법 익숙한 기분으로 알폰스의 집무실을 향해 올라갔다. 처음에는 낯설기만 한 곳이었는데, 요 몇 주간은 몇 번이나 들락거려 제법 익숙해졌다.
“오셨습니까, 부인.”
자신의 집무실에 들어선 클로에를 알폰스 역시 익숙한 태도로 맞이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클로에를 위해 직접 의자를 빼 주었다. 클로에는 웃으며 목례하는 것으로 감사를 표시했다.
간단한 사담과 안부 인사로 시작한 그들의 대화는 곧 본론으로 넘어갔다.
클로에는 꿈에도 몰랐지만 알폰스는 이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전 내내 일을 하면서도 드문드문 시계를 흘끗거릴 정도였다.
알폰스 본인은 자각하지 못했지만 그는 이 시간을 제법 즐겼다. 다른 업무와는 전혀 달랐다. 그동안 클로에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시간을 보냈기에 그녀를 편히 여기게 된 것도 있었지만 단지 그것뿐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좋은 대화 상대이자 동업자였다. 알폰스와 마음과 가치관이 잘 맞을뿐더러 상호 보완적인 능력을 지녔다. 그러면서도 독자적인 사업관과 그녀만의 일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있어 그것을 조금씩 알아가는 재미가 있었다.
어떤 지점에서는, 흥미롭게도, 알폰스 그가 그녀에게서 배워가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이것은 결코 흔히 있는 일이 아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오늘 필요한 논의를 일단락한 뒤 알폰스가 말했다. 오늘도 중요한 결정을 마무리 지었다. 클로에는 만족감과 성취감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생 많으셨어요.”
클로에가 인사했다. 알폰스는 그녀를 배웅하기 위해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고 있던 다 탄 시가 꽁지를 재떨이 위에 내려놓았다.
“이제 몸은 괜찮으십니까?”
그녀를 문 앞까지 배웅하며 알폰스가 말했다.
“네? 몸이요?”
“어제 많이 피곤해하시지 않았습니까.”
그 말에 클로에는 즐거운 시간을 보내느라 잊고 있었던 지난밤에 떠올렸던 기억을 다시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뜨거운 살과 살의 마찰, 짜릿하고 은밀한 감각, 자신의 가쁜 숨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침실.
자신의 것이지만 자신의 것이 아닌 기억에 부끄러움이 전신을 덮쳤다. 그 순간 클로에는 아까만 해도 아무렇지도 않았던, 어깨를 감싸고 있는 알폰스의 팔을 의식했다.
“앗!”
그녀는 움찔 놀라 저도 모르게 외마디 소리를 내뱉으며 알폰스에게서 떨어졌다.
허공에서 당황한 눈초리가 마주쳤다. 클로에는 너무나 부끄럽고, 이런 생각을 자꾸만 떠올린다는 것이 그에게 미안하고, 과민 반응을 한 듯해 민망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해요.”
그녀가 모깃소리처럼 작게 말했다.
알폰스는 클로에가 그러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부부간에 어깨에 팔을 두르는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며칠 전에만 해도 클로에의 어깨에 팔을 둘렀지만 그때에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아 하지 않았던가.
그는 붉은 눈동자로 클로에를 빤히 보았다. 하지만 그 눈빛을 느낀 클로에는 고개를 더욱더 푹 숙이고 시선을 피하기만 했다.
클로에가 갑자기 부끄럼을 타기 시작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알폰스는 그 모습이 퍽 흥미로웠다.
조금 전만 해도 평범한 여자라곤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고 사업에 대한 깊은 지식과 철학을 드러내던 그녀가 지금, 왠지는 모르겠지만 접촉 하나하나에 부끄러워하는 새색시처럼 굴고 있지 않은가.
그는 그녀가 그러는 것이 재미있었다. 조금쯤은 귀여워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알폰스는 그녀의 뺨을 손으로 감싸 들어 올려 눈을 맞추었다. 그가 무슨 행동을 하는 건지 클로에가 채 눈치채기도 전이었다.
“앗…….”
그의 눈동자를 똑바로 들여다보게 되자 클로에는 다리가 풀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야릇한 기억 속 그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단순히 시선과 시선이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그때의 그 감각이 떠올라 등줄기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클로에는 가까스로 주저앉지 않고 버티고 섰다.
알폰스는 그런 그녀의 붉게 물든 뺨과 울망거리는 눈동자, 반쯤 벌어진 입술이 제법 유혹적이라고 생각했다.
여태까지 그를 유혹하려 들었던 여자는 많았다. 하지만 알폰스는 단 한 번도 그러한 행위들에서 성적 매력을 느껴 본 적은 없었다. 오히려 너무나 의도가 빤히 들여다보여 우스울 정도였다.
그런데 별로 그런 의도도 아닌 듯한 그의 아내에게 유혹을 느끼다니 뜻밖의 일이었다.
알폰스는 순간 저 조금 벌어진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겹치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그건 너무 급작스러웠다. 이 벌벌 떠는 여자가 견디지 못하고 도망쳐 버릴 수도 있지 않은가. 그것은 그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입을 맞추는 대신, 한 손으로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 올렸다.
“……!”
클로에는 그의 손길이 닿는 대로 파르르 몸을 떨었다. 그가 갑자기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망이라도 칠까 싶었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버티고 서 있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안 그래도 부끄러울 행위인데, 그의 눈빛 하나하나, 손길 하나하나마다 이전의 클로에의 야릇한 기억을 떠올리게 해 더더욱 견디기가 어려웠다. 도저히 평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알폰스는 자신의 손길 하나하나에 반응하면서 거의 울상을 짓고 있는 그녀의 얼굴에 묘한 만족감을 느꼈다.
어쩐지 괴롭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으나 죄책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가슴속 어딘가가 근질근질했다. 조금 더 괴롭히고 싶었다. 알폰스는 그것이 여태껏 자신이 가지고 있었는지도 몰랐던 가학심이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알폰스는 클로에의 목덜미에 입술을 대었다.
“으……!”
클로에는 저도 모르게 두 손으로 상대의 가슴팍을 짚었다. 하지만 밀어낼 생각은 들지 않았다. 두 사람의 근력차를 생각한다면 아마 밀어낸다 하더라도 택도 없었을 것이다.
‘이건 위험해.’
자신의 허리춤을 더듬는 알폰스의 손가락을 느끼면서 클로에가 생각했다. 어느샌가 달뜬 숨에 그녀의 가슴이 빠르게 오르내렸다. 알폰스의 손은 점점 내려가 그녀의 허벅지에 닿아 있었다.
이미 부끄러움은 한계까지 치밀어 올랐다. 아랫배가 찌릿찌릿해 견딜 수가 없었다. 이대로라면 큰일이라도 날 것 같았다. 그녀는 마침내 생각했다.
‘그만하라고 해야겠다.’
“고, 공작님, 저기…….”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목덜미에 몇 번이나 입 맞추며 드레스 스커트를 걷어 올리던 알폰스가 속삭였다.
“왜 그러십니까?”
낮은 목소리. 그 목소리엔 무언가 마법이라도 걸려 있는 것 같았다. 클로에는 그의 목소리에 꽁꽁 묶여 겁박당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만하자고 말하기가 주저될 정도였다.
그러나 그녀는 가까스로 쥐어짜 내 말했다.
“이, 이제 그만…….”
그때였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각하, 키엘입니다.”
알폰스는 문을 돌아보았다. 그의 미간엔 드물게도 가는 주름이 잡혀 있었다.
‘하필 이때에.’
이상한 감각과 아랫배의 열기에 녹아 가고 있던 클로에는 정신이 퍼뜩 들었다. 그녀는 얼른 알폰스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이번에 그는 순순히 떨어져 주었다. 클로에는 다급하게 옷매무새를 정리하곤, 어쩐지 방 안에 아직도 달뜬 숨과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는 것 같아서 허공에 손을 휘휘 저었다.
알폰스는 좀 전만 해도 자신의 손 안에 가득 차 있던 온기에 묘한 아쉬움을 느꼈다. 아무튼 상황이 이렇게 되니 어쩔 수 없었다.
“들어와라.”
‘어라? 마님이시잖아.’
알폰스의 집무실에 들어선 키엘은 그곳에 자신의 주인뿐만 아니라 마님도 함께 계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 자체는 별로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키엘 역시 클로에가 최근 알폰스의 집무실에 자주 들락거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건 두 사람의 분위기였다. 둘 다 옷매무새가 약간 흐트러져 있는 데다가 클로에의 얼굴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되도록 평정을 연기하려는 듯 침착한 척하고 있었지만 낯빛을 감출 수는 없었다.
게다가 알폰스는 약간쯤 불쾌한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뭔가 중요한 일을 방해받은 듯한 태도였다.
눈치가 빠른 키엘은 공작 부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겉으로는 모르는 척했다.
“무슨 일이지.”
“일전에 지시하신 사전 시장 조사와 재료 수급 통로 조사의 결과에 대해 보고하기 위해 왔습니다.”
알폰스는 키엘이 눈치가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순진한 척하고는 있지만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다 눈치챘으리라는 것도.
뭐,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알폰스가 나직하게 말했다.
“그럼 들어가십시오, 부인. 바래다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 아니에요. 같은 집인데 뭘요.”
클로에가 더듬더듬 말했다. 그녀는 알폰스와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종종걸음으로 도망가 버렸다. 누구에게 쫓기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어떻게 돌아왔는지도 모르겠다. 마침내 침실에 도착한 클로에는 긴 숨을 토해 냈다.
그녀는 침대에 걸터앉았다가 옆으로 길게 쓰러져 누웠다. 두 손으로 가슴을 꾹 눌러 보았다. 여전히 심장이 쿵쾅쿵쾅 세차게 뛰고 있었다.
‘대체 왜 이렇게 떨리는 거지?’
클로에는 눈을 꼭 감았다.
‘그 사람은 왜 그랬던 거지?’
떨리는 만큼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직 석찬까지는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복잡한 머리를 정리하기 위해 그때까지 잠깐만 눈을 붙이기로 결정했다.
* * *
“마님의 생신이 머지않았네요. 미리 생신 축하드려요, 마님.”
키엘의 말에 클로에는 깜짝 놀랐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생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박하정이 아니라 클로에의 생일이기 때문에 자신의 생일이라는 실감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티를 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고마워요, 키엘. 키엘은 기억력이 무척 좋군요.”
“집사로서 이 정도는 당연한 일이지요. 그건 그렇고, 마님의 생신 연회는 어떻게 하실 예정이신가요?”
클로에는 조금 당황했다. 집안의 일을 담당하는 안주인이니만큼 자신의 생일 파티도 자신이 준비해야 하는 모양이었다.
모양새가 약간 우습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제국에서는 원래 그러는 모양이니 어쩔 수 없었다. 클로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구체적으로 생각해 두지는 않았어요. 조만간 준비하기 시작해야겠네요.”
“네,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마님.”
키엘이 친절한 웃음을 띠며 말했다. 클로에 역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오랜만이구나, 알폰스.”
깐깐해 보이는 인상의 노부인이 하녀의 인도를 받으며 공작저의 현관을 걸어 들어왔다.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알폰스가 예의를 갖춰 고개 숙여 인사했다.
“강녕하셨습니까, 메이슨 부인.”
알폰스의 곁에 서 있던 클로에는 왠지 모르게 자신이 긴장하고 있음을 알았다. 뒤늦게서야 그녀를 알아본 듯, 노부인이 다정하지 않은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
“네가 알폰스의 안사람이구나. 만나서 반갑다.”
“클로에 바텐베르크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메이슨 부인.”
클로에가 꾸벅 인사했다.
메이슨 부인이 방문할 것이라는 사실을 공작 부부가 알게 된 것은 겨우 지난밤이었다. 그나마 메이슨 부인보다 앞서 달린 전령이 가까스로 그녀의 연락을 전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친척 어르신께서 찾아오신다고 합니다. 약 2주 정도 머무신다고 하는군요.’
클로에는 어제 알폰스가 자신에게 전해 주었던 말을 떠올렸다.
그의 말에 따르면, 메이슨 부인은 메이슨 백작가의 마지막 일원으로 알폰스를 어릴 적에 돌봐 준 인연이 있다고 했다.
그녀는 비록 제국 내에서의 작위는 백작부인에 불과하지만 출신은 이웃 왕국의 공주이자, 외가로 가면 제국 황가의 피 역시 잇고 있어 고위 귀족조차 쉬이 대하지 않는 상대였다.
‘성정이 조금 괴팍하시긴 하지만, 심성이 악한 분은 아닙니다.’
알폰스는 그녀에 대해 그렇게 설명했다. 조금 굳은 미간과 한숨 섞인 목소리로.
어찌 됐든, 조금 갑작스러워서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이미 정해진 것이라면 어쩔 수 없었다. 클로에는 알폰스의 친척 어르신과 잘 지내고 싶었고, 그의 좋은 아내로 인정받고 싶었다.
메이슨 부인은 곱지 않은 눈길로 공작 부부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흠, 사이가 좋아 보이는구나.”
클로에는 부끄러웠지만 그 칭찬이 내심 기분 좋기도 했다. 그녀가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메이슨 부인.”
그녀는 알폰스의 얼굴이 굳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보지 못했다.
공작 부부는 직접 메이슨 부인을 응접실로 모셨다. 응접실의 소파에 앉은 메이슨 부인이 한숨을 쉬었다.
“이제야 좀 살 것 같구나. 이 나이가 되니 지척을 걷는 것도 힘들다니까. 그래, 클로에라고 했던가?”
“네, 메이슨 부인.”
“먼 길을 여행했더니 지치는구나. 마실 것이라도 가져다주겠니?”
“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클로에는 메이슨 부인에게 차를 우려 대접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메이슨 부인의 말이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어딜 가니? 설마 마실 것 하나 대접하자고 네가 직접 부엌으로 가는 거니? 채신머리없게.”
“아, 그것이…….”
“제국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위신과 명예를 가진 바텐베르크 공작가의 안주인으로서 그러면 되겠니.”
메이슨 부인이 혀를 끌끌 찼다.
그녀의 말에 클로에는 잠시 머뭇거렸다. 사실 말투는 둘째치고서라도 메이슨 부인의 말이 맞았다. 제국 내의 법도에 따르면 귀족이 직접 부엌에 들락거리는 것은 체통 없는 일이다.
결국 클로에는 다시 자리에 앉아, 그들의 곁에 서 있던 하녀에게 지시했다.
“리사에게 홍차를 우려 가져오게 하렴. 무난한 향의 무가향 블렌딩 홍차가 좋겠구나.”
클로에는 그동안 부엌 하녀들에게 차 우리는 법을 가르쳐 두었다. 부엌 하녀들이 관심을 보이기도 했고, 혹시 손님 대접할 때에 필요한 일이 있을까 싶어서 가르쳐 둔 것인데 마침 다행이었다.
리사는 부엌 하녀들 중 제일 차를 잘 우리는 아이였다.
하녀는 주인 부부와 메이슨 부인에게 꾸벅 인사한 뒤 부엌 하녀들에게 지시를 전하기 위해 자리를 떴다.
주인마님의 지시를 전해 들은 부엌 하녀들은 동요했다. 차를 우리는 일은 마님을 통해 여러 번 배우고 연습하긴 했지만, 직접 손님을 대접해 보는 것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부엌 하녀들은 최선을 다해 맛있는 차를 우려 자신들이 진심으로 존경하는 마님께 도움이 되기로 결심했다.
부엌 하녀 애쉴리가 마님의 차 창고에서 차통을 하나 가져왔다. 리사가 그 찻잎을 가지고 정성 들여 차를 우렸다.
잠시 뒤 하녀들이 찻주전자와 찻잔 등의 다구들을 트레이에 받쳐 들고 응접실에 나타났다.
공작 부부와 메이슨 부인의 앞에 하나씩 찻잔이 놓였다. 하녀들은 각각의 찻잔에 차를 따른 뒤 공손한 태도로 물러섰다. 메이슨 부인은 공기 중으로 퍼져 나가는 홍차 특유의 향을 감지하고 말했다.
“이게 뭐니? 커피 같지는 않은데. 향과 빛깔이 특이하구나.”
“홍차라고 하는 것입니다, 메이슨 부인.”
클로에가 설명했다. 메이슨 부인이 눈썹을 치켜들었다.
“홍차? 동방이나 이베리아에서나 마시는 것이 아니니. 요즘은 제국의 공작가에서도 차를 마시니?”
메이슨 부인의 출신지인 왕국에서도 차는 마시지 않는다. 메이슨 부인의 비아냥에 알폰스가 먼저 반응했다. 불쾌한 듯한 기색을 띠며 그가 말했다.
“메이슨 부인, 제 안사람의 차는 특별합니다. 맛보시고 말씀하셔도 늦지 않을 겁니다.”
클로에가 알폰스에게 눈짓했다. 자신은 괜찮다는 뜻이었다. 알폰스가 입을 다물자 그녀가 차분하게 말했다.
“신경 써서 준비한 것이니 부디 입맛에 맞으셨으면 합니다.”
“너희가 정 그렇다면야…….”
메이슨 부인은 여전히 미심쩍은 기색이었으나 태도를 굽혔다. 그녀가 새끼손가락을 든 채 찻잔을 집어 들었다. 그녀가 차를 머금었다.
그 순간이었다.
와장창창!
날카로운 소리에 클로에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 갑작스러운 소음이 예상외였던 건 알폰스도 마찬가지였던 건지, 그가 보호하듯 한쪽 팔로 클로에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러나 클로에는 그 사실에 감동하고 있을 수 없었다.
바닥에 얼룩진 붉은 홍찻물이 흘러 점차 영역을 넓혔다. 산산조각 난 찻잔 조각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찻잔을 떨어뜨린 메이슨 부인의 낯빛이 창백했다. 눈을 부릅뜨고 입술을 오므린 그녀가 손을 형편없이 떨었다.
“지금, 이런 것을…… 내게 마시라고 준 거니?”
그녀의 목소리에는 명백한 노기가 담겨 있었다. 클로에는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것만 같았다.
“죄송합니다, 메이슨 부인.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불에 덴 듯 일어난 클로에는 메이슨 부인의 티팟 안에 들어 있는 홍차를 티스푼으로 떠먹었다.
“윽……!”
클로에가 미간을 찡그렸다. 차는 명백하게 맛이 없었다. 얼굴이 찡그려질 정도로 쓰고 떫은 데다가 홍차 특유의 달콤하고 고소한 향은 어딜 갔는지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가 그러는 동안, 알폰스는 메이슨 부인을 진정시키고 차를 우린 부엌 하녀를 데리고 오면서 차통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잠시 뒤 창백한 얼굴로 벌벌 떨고 있는 리사와 차통이 대령되었다. 리사는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허리를 깊게 굽혔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 부족함으로 인한 실책입니다.”
“옳아, 네가 마실 것을 준비한 아이로구나. 대체 그 조그마한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들었길래 이런 짓을 벌였니? 못된 것!”
메이슨 부인이 소리쳤다. 그녀는 리사가 나쁜 마음을 먹고 일부러 그랬다고 생각하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리사는 그저 허리를 몇 번이나 굽히며 사죄를 할 뿐이었다.
안쓰러울 정도인 리사의 모습을 보며 클로에는 생각했다.
‘리사는 악의를 가지고 일부러 차를 망칠 아이가 아니야. 아마 차를 우리는 과정 중에 실수가 있었겠지.’
그녀는 통을 열어 보았다. 통의 뚜껑이 열리는 즉시 클로에는 한숨처럼 탄식했다. 리사가 어떤 실수를 했는지 깨달았던 것이다.
“패닝(fanning)급 찻잎이구나.”
클로에는 여전히 리사에게 소리를 지르는 메이슨 부인의 말을 끊었다.
“메이슨 부인, 실례지만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리사는 악의를 가지고 차를 잘못 우린 것이 아닙니다.”
“무슨 말을 하는 거니? 그렇다면 부엌 하녀가 차 하나 우릴 줄도 모른다는 거니? 말도 안 되는 소리!”
“메이슨 부인!”
메이슨 부인이 성급하게 소리를 지르자 알폰스가 불쾌한 기색으로 그녀를 저지했다. 클로에는 다시 한 번 자신은 괜찮다는 식의 눈짓을 한 뒤 차분히 고개를 저었다.
“차 우리는 법은 제가 직접 하녀들에게 가르쳤습니다. 특히 리사는 그중 제일 뛰어난 실력을 보인 아이입니다. 그래서 저는 리사를 믿고 맡겼던 것이고요. 하지만 오늘은 작은 실수가 있었습니다.”
“아니,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는 거니? 부엌엔 가 보지도 않았으면서.”
알폰스의 기세에 눌린 메이슨 부인이 한결 얌전한 태도로 물었다.
그렇게 물을 줄 알았다는 듯, 클로에는 캐디에서 찻잎을 조금 떠서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메이슨 부인과 알폰스에게 보여 주었다. 찻잎은 아주 잘게 갈려서 본연의 형태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찻잎이라기보단 흙에 더 가까운 모양새였다.
“오늘 우린 차를 확인해 보니 가루처럼 잘게 간 것을 뜻하는 패닝 등급의 찻잎이었습니다. 제가 별로 가지고 있지 않은 타입이지요.”
클로에는 잠시 메이슨 부인이 자신의 말을 잘 듣고 있는지 확인했다. 메이슨 부인은 물론 알폰스와 심지어 리사까지 이쪽에 완전히 집중하고 있었다. 클로에는 말을 이었다.
“찻잎은 그 형태에 따라 우리는 방법이 다릅니다. 전혀 분쇄하지 않은 홀리프(whole leaf) 등급의 찻잎과 달리 분쇄된 찻잎은 물과 닿는 표면적이 넓어 성분이 쉽게 우려 나오기 때문이에요. 그러므로 분쇄가 많이 되어 찻잎 입자의 크기가 작을수록 조심해서 다루어야 하고 우리는 시간은 줄여야 해요.”
“그렇다면 제일 입자가 작은 패닝급 찻잎을 우리는 방식은 홀리프를 우리는 방식과 많이 다르겠군요.”
“맞아요, 공작님. 패닝급 찻잎은 홀리프에 비해 극히 짧게 우려야 해요. 또, 일반적으로 차를 우릴 때는 찻잎을 먼저 티팟에 넣고 물을 붓지만 패닝은 반대로 해야 합니다. 물을 먼저 넣고 찻잎을 넣어야 해요. 그러지 않으면 찻잎이 지나치게 자극받아 쓴 성분이 우려 나오고 말아요.”
“그러니까 네가 하고 싶은 말은…….”
메이슨 부인이 끼어들었다.
“저 하녀가 우리는 방식에서 실수했다는 거구나.”
“네. 저는 평소 하녀들을 가르칠 때 제가 제일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인 홀리프 등급의 찻잎만 사용했어요. 리사는 패닝 찻잎을 평소 배운 대로 홀리프 찻잎을 우리는 방식대로 우렸기 때문에 이런 맛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길게 설명한 클로에는 숨을 한 번 쉰 뒤, 리사를 돌아보고 말했다.
“그렇지, 리사? 너는 이 찻잎을 평소 배웠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우렸겠지.”
리사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네, 마, 마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저는 배웠던 대로 찻잎을 먼저 넣고 물을 넣었고, 늘 하던 대로 3분 30초 동안 우렸어요…….”
리사는 그제야 자신이 무슨 실수를 했는지 깨달았다. 그녀는 분명 평소 배운 대로 정확하게 정성을 다해 차를 우렸음에도 불구하고 차에서 끔찍한 맛이 나게 된 것에 무척 당황해하고 있던 차였다.
“그렇다면, 하녀의 실수에 대한 처벌은 나중에 생각해 보도록 하고.”
알폰스가 잠깐의 침묵을 끝냈다. 그가 클로에를 돌아보며 말했다.
“부인, 혹시 불편하지 않으시다면, 직접 차를 우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저는 부인께서 직접 우려 주신 차가 마시고 싶군요.”
이것은 일종의 배려였다. 하녀의 실수로 약간 훼손된 클로에의 명예를 회복할 기회를 주는 것이었다. 물론 정말로 본인이 마시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 사실을 아는 클로에는 알폰스가 자신을 신경 써 주는 것이 고마웠다. 그녀는 메이슨 부인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래도 괜찮을까요?”
“물론입니다.”
알폰스가 그렇게까지 하자 메이슨 부인 역시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차에 대해 잘 몰랐고, 차를 우리는 데에 신경 쓸 것이 이렇게 많다는 것 역시 알지 못했었다.
그렇게 해서 이번에는 클로에가 제대로 실력 발휘를 했다. 그녀는 패닝 등급 찻잎을 능숙하게 우려내어 대접했다. 아까와는 달리 조금도 쓰지 않으면서 달달한 몰트 향을 풍겨내는 호박빛의 아름다운 찻물을 보고 메이슨 부인은 내심 놀랄 수밖에 없었다.
사건이 해프닝으로 끝나고 메이슨 부인을 손님방으로 안내한 뒤 알폰스는 한 가지 남은 일에 대해 생각했다. 아까 실수를 한 하녀를 벌주는 일이다.
그는 기본적으로 과도하게 엄격하거나 까다로운 주인은 아니었다. 호불호가 확실하고 원칙에 충실하기에 그의 아래에서는 억울하게 벌을 받아 불만을 가지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그런 그에게 차를 실수로 잘못 우린 하녀 정도는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평소 같았다면 말이다.
그런데, 그런 그임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왠지 그 하녀에게 화가 났다. 클로에가 지혜롭게 대처했기에 망정이지, 자칫하면 그녀의 명예에 흠집이 갈 뻔하지 않았는가.
‘회초리를 때리고 해고하는 정도라면 충분하겠지.’
그런데 그런 그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 같은 사람이 있었다. 클로에였다.
“리사에게 책임을 묻지 말아 주세요, 공작님.”
메이슨 부인을 손님방으로 안내하고 돌아오는 길에 클로에가 불쑥 내뱉은 말이었다. 알폰스는 자신이 잘못 들은 줄만 알았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까 리사의 처벌에 대해 나중에 생각해 본다고 하셨잖아요. 계속 걱정되었어요. 리사가 벌을 받을까 봐요.”
말이 좋아 작은 실수지, 그 실수를 중요한 손님 앞에서 저질렀다는 점에서 리사의 잘못은 다른 귀족가의 경우 크게 경을 치고도 남았다. 사용인들이 할 수 있는 잘못 중에서 제일 큰 것은 주인을 욕보이는 것인데 이번에 리사가 저지른 실수가 바로 그렇지 않은가.
“이번 일의 책임은 저에게도 있다고 봐요. 부엌 하녀들에게 패닝급 찻잎을 우리는 법에 대해 미리 가르쳐 주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니 공작님, 노여우시더라도 저를 봐서 리사에게 벌을 내리지 말아 주세요. 만일 꼭 내리셔야 한다면 제가 대신 책임을 지게 해 주세요.”
“부인.”
알폰스가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클로에가 하는 말은 진심이었다.
이곳은 계급제 사회라는 사실을 클로에 역시 알고 있었다. 평민은, 설령 잘못이 없더라도, 귀족의 기분 여하에 따라 매를 맞거나 직업을 잃거나 심지어는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음에도 만인이 평등한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아온 기간이 훨씬 긴 클로에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고작 그 정도의 일로 벌을 받으면 너무 안타깝잖아.’
그것이 클로에의 생각이었다.
알폰스는 클로에를 보며 이렇게 느꼈다.
‘마음이 무르군.’
마음에 안 들면 갈아 치우면 그만인 한낱 하녀 한 명에게 측은지심을 느끼는 공작부인이라니 우습다. 이 여자는 대체 마음이 얼마나 연약하단 말인가.
클로에의 말을 들으니 알폰스는 마음이 한결 차분해지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고작 하녀의 실수 하나로 발끈해서 벌까지 고민한 자신의 모습이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런 건 자신답지 않았다. 분명히.
그렇게 마음을 정리한 알폰스가 말했다.
“그 하녀가 폐를 끼친 상대는 부인이니 결정권은 제가 아닌 부인께 있습니다. 부인께서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감사해요, 공작님.”
클로에의 얼굴이 화사하게 밝아졌다. 알폰스는 고작 하녀의 일을 자기 일처럼 기뻐하는 그녀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기뻐하는 얼굴은 보기 싫지 않았다.
클로에는 다른 하녀를 통해 리사를 불러와 벌을 주지 않겠다는 결정을 전했다.
리사는, 자신이 일부러 그런 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진 건 좋았지만 그래도 벌을 받는 건 피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짐을 미리 싸 둬야 하나 생각하면서 어떡하냐며 엉엉 우는 다른 부엌 하녀들을 달래주던 참이었다.
그중 제일 격하게 슬퍼하던 사람은 찻잎을 가져온 애쉴리였다.
‘정말 미안해, 리사! 난 그게 패닝급 찻잎이라는 건 줄 꿈에도 몰랐어. 그냥 향이 좋길래 가져온 거였는데.’
‘나는 괜찮아, 애쉴리. 그만 울어. 눈이 다 부었어.’
‘하지만, 하지만 나 때문에 리사가…….’
이런 상황이었으니 클로에가 부른다는 말을 듣고 당연히 벌을 주려고 그러시나 보다 했다.
“네? 저, 저를 용서해 주시겠다고요?”
그런데 막상 주인마님을 만나 들은 이야기가 벌을 주지 않겠다는 것이니 깜짝 놀랄 수밖에.
“그럼. 내가 너희에게 패닝급 찻잎을 가르치지 않은 책임도 있잖니. 그러니 오늘 있었던 일은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말렴.”
리사는 여러 군데의 귀족가를 전전하다가 공작가에 온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얼마나 관대하고 자비로운 처사인지 이해하고 있었다. 다른 귀족들이라면 꿈도 못 꿀 일일 것이다.
그러니 리사는 깊게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우리 같은 부엌 하녀들을 배려해 주시고 신경 써 주시는 데다 박식하시고, 자비로우시기까지 한 마님이라니!’
그녀는 이런 훌륭하신 주인마님을 둔 자신이 제국 최고의 행운아인 것만 같았다. 리사는 마음 깊이 클로에에 대한 존경심을 느꼈다.
사업의 준비는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클로에는 재료 수급은 물론 새로이 낼 가게의 건축과 인테리어에도 관여했다.
공작 부부는 가게의 부지를 수도의 저택 밀집 지역으로 선정했다. 밀크잼은 귀족이나 최소 중산층이 사 먹을 법한 사치품에 가깝다는 사실을 고려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알폰스가 상점 거리 중심부의 2층짜리 상가 건물을 하나 사들였을 때는 클로에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규모가 너무 크지 않나요? 분명 처음의 계획은 밀크잼만을 취급하는 가게였는데, 이건 좀…….”
“규모가 크다면 취급 품목을 늘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가문의 이름을 건 사업이니만큼 이 정도는 해야 체면이 섭니다.”
원래 알폰스는 체면이나 남의 시선을 별로 고려하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 넓이는 얼마나 넓은지, 밀크잼을 아무리 많이 만들어 쌓아 두어도 도저히 채울 수 없을 정도였다. 결과적으로 가게는 최초의 계획과는 달리 밀크잼만이 아니라 다양한 잼과 시럽, 꿀을 취급하는 곳이 되었다.
어쨌든 사업은 어느 순간부터 클로에의 상상을 훌쩍 뛰어넘을 만큼 그 스케일을 불려 나가고 있었다. 클로에는 좋은 재료를 공수하기 위해 상단들과 연락을 취해 거래처를 만드는 데 힘썼다.
클로에와 함께 사업을 구체화해 나가는 과정이 알폰스에게는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그녀는 이론적 지식뿐만 아니라 실무에서도 훌륭한 능력을 보였다. 마치…… 실제 실무 경험이 있는 것처럼.
하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결혼 후는 당연하고, 결혼 전 클로에가 사업에 발을 담갔다는 이야기는 조금도 듣지 못했다. 알폰스는 클로에가 탁월한 능력과 재능을 타고났다고 여겼다.
미완성의 가게를 둘러본 뒤 함께 귀택하는 길, 알폰스는 클로에를 흘끗 보았다.
그녀는 두말할 것 없이 훌륭한 동업자였다. 사실, 반려자로서도 썩 괜찮았다. 단순히 서로의 이익, 가문 간의 이익을 둔 정략결혼의 상대자를 넘어서.
그녀와의 시간은 그의 지루한 일상에서 독특한 변주이자 휴식이었다. 그녀를 때로는 그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런 점이 불만스럽거나 불쾌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그런 점이 퍽 흥미로웠다.
이쯤 되니 그는 의문스러웠다.
‘왜 나는 이전에는 그녀의 이런 면모를 알지 못했을까.’
무려 13개월이었다. 그들이 무늬만 부부인 상태로 지낸 것이.
그는 13개월 동안이나 클로에에게서 이런 흥미로운 점을 발견하지 못한 과거의 자신이 이상해 보일 지경이었다.
알폰스는 자신이 저도 모르게, 가랑비에 옷 젖듯이 클로에가 익숙해졌음을 느꼈다.
예전에는 어떻게 지냈더라. 그녀의 이런 모습을 알기 전, 그녀와 결혼하기 전에는. 어쨌든 별로 그때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이 사실이었다.
가게의 완공이 멀지 않았다.
“부르셨나요, 메이슨 부인?”
클로에가 인사했다.
메이슨 부인은 손님용 침실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메이슨 부인은 안락의자에 몸을 깊게 묻고 특유의 깐깐한 눈초리를 이쪽으로 쏘아 보냈다.
“그래, 잘 왔다. 날이 더운데 몸은 건강하니?”
다정한 말과 곱지 않은 눈초리의 부조화에 클로에는 조금 혼란스러웠다. 그녀는 그냥 모른 척, 예의 바르게 반응하기로 했다.
“네, 살펴 주신 덕분에.”
하녀 니나와 함께 정원을 산책하고 있던 참이었다. 갑작스레 메이슨 부인이 부른다는 전언을 받고 클로에는 손님방에 방문했다.
“잘됐구나. 흠, 오늘 부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클로에는 메이슨 부인이 어째서 자신을 부른 것인지 그 이유를 조금도 짐작할 수가 없었다. 사실은 무언가 트집을 잡으려는 것은 아닌가 불길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일전에 겪었던 메이슨 부인과의 첫 만남에서 그녀에게 그리 긍정적인 인상을 받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메이슨 부인이 말한 것은,
“알폰스가 네 차를 정말 즐겨 마신다는 이야기를 들었단다. 다시 한 번 네 차를 맛보고 싶은데, 별일이 없으면 차 한 잔 내어 주거라.”
의외로 대단한 일은 아니었다.
아니, 아닌가? 클로에는 일전에 메이슨 부인이 찻잔을 깨 먹은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맛있게 만들지 못하면 또 깨뜨리실지도 몰라.’
차를 우리는 것은 클로에가 좋아하는 일이기는 했지만 그 상대가 까탈스럽다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어쨌든 거절할 명분은 없었다. 클로에는 트집 잡히지 않게 맛있는 차를 대접하리라고 다짐하며 대답했다.
“네, 물론이지요. 혹시 원하시는 차가 있으신가요?”
“내가 뭘 알겠니? 아무거나 가져다주렴.”
아무거나라니! 하필이면 제일 곤란한 주문이었다.
그러나 클로에는 곤란한 티를 내지 않았다. 표정을 정돈하던 클로에의 시선에 무언가가 걸려들었다. 메이슨 부인의 땀에 젖은 목덜미였다.
‘더우신가 보구나. 연세가 있으신 분들은 젊은이보다 더위를 잘 타시니까.’
클로에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그녀는 메이슨 부인의 취향에 대한 정보를 하나라도 더 얻기 위해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아, 저건…….’
운이 좋았다. 클로에는 테이블 위에 얹어져 있는 무언가를 보았다. 이거다! 클로에는 기쁜 마음을 감추고 태연한 태도로 물었다.
“알겠습니다, 메이슨 부인. 그럼 한 가지만 더 여쭈어볼게요. 혹시 민트를 좋아하시나요?”
“민트라면 그 싸한 맛이 나는 허브 말이니? 좋아하고말고.”
클로에는 예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군요. 그럼, 금방 만들어 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그녀는 손님 침실에서 나오며, 지나가던 하녀를 붙잡아 정원에서 어떤 것을 구해와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자신 역시 바쁘게 차 창고를 향했다.
잠시 후 클로에는 하녀와 함께 돌아왔다. 하녀는 티팟과 찻잔이 담긴 트레이를 테이블에 내려놓은 뒤 메이슨 부인과 클로에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나갔다.
클로에는 메이슨 부인의 찻잔에 차를 따라 주었다. 메이슨 부인은 침침한 눈으로 찻잔을 들여다보다가, 흥미로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냉차로구나.”
얼음이 동동 띄워져 있는 찻잔은 보기만 해도 시원해 보였다. 연한 노랑과 연두의 중간쯤 되는 빛을 띠는 수색도 아름다웠다.
침침한 눈을 가늘게 뜨고 찻잔을 들여다보던 메이슨 부인은 눈을 감고 차를 호로록 마셨다.
제일 먼저 느껴지는 것은 혀를 톡 쏘는 듯 상쾌한 민트의 맛이었다. 그다음은 사탕처럼 달콤한 맛.
메이슨 부인은 입술에서 찻잔을 뗀 뒤 쩝쩝 입맛을 다셨다. 마지막으로, 은은하면서도 고소한 맛과 그녀가 처음 느껴 보는 독특한 향이 입안을 감쌌다. 그것이 자극적일 수 있는 민트의 맛을 누그러뜨리고, 향과 맛을 풍부하고 새롭게 만들었다.
차가운 것이 목을 넘어 배 속으로 들어가자 뒷골이 조금 울렸다. 하지만 불쾌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맛있……구나.”
메이슨 부인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그와 대조적으로, 클로에의 얼굴이 불이라도 켠 듯 환해졌다.
‘됐다! 해냈어!’
클로에는 찻잔을 지켜낼 수 있었다는 것이 너무나도 기뻤다. 알폰스의 친척 어르신께 점수를 딴 것도 물론.
“이게 무슨 차니?”
메이슨 부인의 물음에, 클로에가 기다렸다는 듯 설명했다.
“녹차를 진하게 우린 뒤 설탕을 넣고, 생 페퍼민트에 부어 잠시 두었습니다. 남쪽 지방의 유목민들이 즐겨 마시는 음료입니다.”
클로에는 메이슨 부인의 테이블 위에서 박하사탕을 보았다. 할머니들이 흔히 좋아하는 새하얀 박하사탕. 그것을 보고 클로에는 메이슨 부인이 민트와 달콤한 것을 좋아할 것이라고 추측한 것이다.
녹차와 페퍼민트가 어우러진 상쾌하고 달콤한 맛의 이 차는 클로에의 이전의 삶에서는 ‘모로칸 민트티’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이름 그대로 모로코의 유목민들이 흔히 마시던 것이다.
“유목민들은 흔히 뜨겁게 마시지만, 오늘은 날씨가 더워 차갑게 만들어 보았어요.”
“유목민이라, 너는 참 별걸 다 아는구나.”
메이슨 부인이 칭찬인지 아닌지 모를 말을 했다. 어쨌든 그녀는 모로칸 민트티가 마음에 들었는지 혼잣말처럼,
“맛있구나, 맛있어.”
중얼거리며 찻잔을 비웠다.
티팟은 오래지 않아 동이 났다. 차를 다 마시고 나니, 메이슨 부인은 한숨을 쉬며 티팟을 향해 수그리고 있던 등을 다시 안락의자에 묻었다.
“시원한 것을 마시니 이제 좀 살 것 같구나.”
클로에는 다구를 치우기 위해 차임벨을 울려 하녀를 불렀다. 하녀가 트레이를 들고 나가자, 메이슨 부인은 끙 앓는 소리를 내더니, 이렇게 말했다.
“저번에는 미안했다.”
“네? 아니에요, 메이슨 부인. 오해할 만한 상황이었는걸요.”
메이슨 부인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히 위로하지 말거라. 내가 예민하게 굴었다는 것을 알고 있단다. 나는 네가 하녀를 시켜서 나를 골탕 먹이려고 그러는 줄 알았다.”
메이슨 부인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다 늙은 여편네가, 지아비가 독살당한 뒤로 의심만 많아졌지 뭐니.”
아, 그런 사정이 있었구나. 클로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메이슨 부인이 왜 괴팍하게 구는지 이해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메이슨 부인이 다시 말을 꺼냈다.
“알폰스와의 결혼 생활은 어떻니?”
“네에?”
완전히 예상치 못한 질문에 클로에는 당황했다. 아니, 당황한 정도가 아니었다. 차의 기원에 대해 막힘없이 설명하던 아까의 모습은 어디 가고,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어 말을 마구 더듬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 아! 조, 좋아요! 정말이요! 고, 공작님도 정말 친절하시고요.”
“그러니? 다행이구나.”
메이슨 부인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클로에를 곁눈질했다. 하지만 클로에는 너무 당황하고 있어 눈치채지 못했다.
“알폰스를 잘 부탁한다. 내게는 자식 같은 아이란다.”
클로에는 그 말에 놀랐다. 자식 같은 아이라고?
“저…… 외람된 말씀이지만, 메이슨 부인께서…… 공작님을 키우셨나요?”
“그렇단다.”
클로에는 순간 이 질문을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했다. 하지만, 그 갈등을 억누른 것은 호기심과 알폰스에 대한 관심이었다.
“그럼, 공작님의 친부모님은…….”
“진작 죽었지.”
클로에는 왠지 모르게 숙연한 기분이 들었다. 누구보다 강하고 단단해 보였던 알폰스에게 그런 사정이 있었던 줄 미처 몰랐던 것이다.
메이슨 부인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침묵을 끊고, 그녀가 말했다.
“……너는 알폰스의 아내, 바텐베르크의 안주인이니 알 필요가 있겠지.”
클로에는 이후 메이슨 부인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직감적으로 눈치챘다.
왠지 말려야 할 것 같았다. 메이슨 부인이 알폰스의 부모 같은 사람이래도 어쨌든 타인이다. 남의 입에서 자신의 뒷사정을 듣는 것을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그럼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한 죄책감이 옷자락을 붙들어도 클로에는 그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그녀는 알폰스에 대해 알고 싶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좀 더 알고 싶었다.
결국 클로에는 메이슨 부인을 말리지 못했다.
가라앉은 적막함 속에서, 메이슨 부인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 * *
알폰스 바텐베르크의 친부이자 전 바텐베르크 공작이었던 루드비히 바텐베르크는 완벽한 귀족이었다.
그는 유능했으며 오만하고 콧대 높았다. 완벽한 곧은 자세는 자로 잰 것만 같았고, 발걸음은 위엄 있었으며, 우아한 얼굴은 어느 상황에도 눈썹 한 가닥 흐트러지는 법이 없었다. 영지민들 사이에서는 바텐베르크 공작의 살갗 아래에는 차갑고 푸른 피가 흐른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그리고 루드비히는 알폰스가 자신만큼, 아니, 자신 이상으로 귀족답기를 바랐다.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은 알폰스는 빨리 철이 들었고 냉철하며 영리했으나 루드비히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알폰스는 3살부터 귀족적인 예의범절과 정치, 역사, 교양을 배웠다. 4살부터는 승마와 검술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수업은 해가 뜨면 시작해서 밤이 깊도록 이어졌다.
그러나 루드비히는 그것으로도 부족하다고 여겼다.
“알폰스, 감정을 내보이는 것이야말로 귀족으로서 실격인 일이다.”
루드비히는 언제나 말했다.
“타인에게 속내를 내보이지 마라. 사사로운 감정을 수치스럽게 여겨라. 절제하고 또 인내해라. 그것이 너의 품격을 높이는 방법이다.”
알폰스는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아버지.”
알폰스가 감정을 비칠 때마다 루드비히는 엄한 벌을 내렸다. 알폰스의 모든 종류의 감정을 억압하고 억누르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지 했다.
알폰스의 자제력은 극단까지 내몰렸다. 맞고도 울지 않고, 모욕당해도 화내지 않는 일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알폰스는 사흘 밤낮을 자지 않고도 졸린 티를 내지 않는 법을 배웠다. 나흘을 굶고도 눈앞에 내밀어진 수프를 느리고 귀족적으로 먹는 법을 배웠다.
그는 살기 위해 배웠다. 아버지가 만족할 정도로 배우지 않으면 돌아오는 것은 체벌이었다. 회초리는 예사였고 가죽 벨트나 말채찍도 사용되었다. 살점이 튀고 핏물이 흩어졌다. 몇십 대는 평범한 수준이었다. 최초로 거짓말을 한 날에는 심문을 위해 백여 대를 때렸다. 그러나 한사코 영구적인 장애를 남기는 것만은 피했다. 알폰스가 불구가 되면, 귀족적으로 걸을 수 없으니까. 루드비히의 회초리에는 피가 마르지 않았다.
자아가 완전히 성숙하지 않은 어린 시절에는 그저 아버지가 무조건 옳은 줄 알고 따랐다. 그러나 그도 자랐다. 밟아도 자라는 새싹처럼 자아가 여무는 시기가 왔다.
“제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버지.”
열 살의 알폰스가 말했다.
“인간이 행복하면 웃고, 굶주리면 배고픈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역사책을 아무리 뒤져도 자식에게 이런 식의 교육을 한 가문의 전례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의 교육 방침은 불용합니다. 저는 더 이상 이런 취급을 받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느냐.”
아들의 얼굴을 돌아보지도 않고, 스테이크를 썰며 루드비히가 말했다.
“그 말에 후회는 없느냐?”
알폰스는 침을 삼켰다. 학습된 공포가 살을 에었지만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가 대답했다.
“예.”
식사를 끝낸 루드비히는 하인들에게, 알폰스를 저택 5층 서쪽 끝 방 벽장에 가두라고 지시했다.
아버지를 부르짖으며 저항하는 알폰스를 얼음장 같은 눈으로 내려다보며 루드비히가 말했다.
“그 안에서 깊이 반성해라. 완전히 반성하기 전에는 꺼내 주지 않겠다.”
한 평도 채 되지 않고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벽장에 열 살의 알폰스는 감금당했다. 루드비히는 벽장문에 자물쇠를 채우고, 하루 세 번의 식사와 한 개의 요강만을 지급하도록 했다.
어린 알폰스는 굳게 닫힌 벽장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첫 달에는 이러지 마시라고 소리쳤고, 세 달째부터는 죄송하다며 용서를 빌었다. 네 달째부터는 꺼내 주시기만 하면 무슨 일이든 하겠다고 했고, 여섯 달째부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벽장 바닥에 웅크려 멍하니 검은 허공을 바라봤을 뿐이다.
열한 달이 지난 뒤에야 루드비히는 알폰스를 꺼내도 좋다는 명령을 내렸다.
알폰스는 하인들의 손에 의해 씻기고 머리를 자르고 깨끗한 옷이 입혀진 뒤 루드비히의 앞에 세워졌다. 열한 달 만에 보는 자식의 얼굴을 내려다보는 루드비히의 눈은 이전과 다름없이 냉혹했다.
“충분히 반성하였느냐.”
“…….”
아버지의 미모를 이어받아 어릴 적부터 눈에 띄게 아름다웠던 알폰스의 얼굴은 시체처럼 창백했다. 완벽한 형태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메마른 입술에서는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아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루드비히가 말했다.
“충분히 반성하였다고 생각한다면, 앞으로 내 말에 복종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무릎을 꿇어라. 용서해 주겠다.”
알폰스는 주춤주춤 무릎을 꿇었다. 거울처럼 깨끗한 대리석 바닥 위로 소년의 무릎이 닿았다. 그제야 만족한 루드비히는, 아무런 말도 없이 등을 돌려 자신의 용무를 보러 갔다.
그 날부터 알폰스의 마음속에는 아무런 감정도 남지 않았다. 그가 유일하게 알고 있는 것은 분노와 원한이었다. 자신의 친부, 루드비히를 향한, 상대방을 집어삼키고 자기 자신조차 살라 먹을 격렬한 분노. 그러나 그것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루드비히가 알폰스에게 가르쳐 준 유일한 것인 초인적인 인내심이 가슴속 화염을 감추게 만들었다.
그리고 루드비히 바텐베르크는 알폰스가 열네 살이 되는 해에 죽었다.
사고였다. 술 취한 마부가 몰던 마차가 바텐베르크 공작과 그를 따르던 사용인 세 명을 치었다. 그들 모두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너무나 허망한 죽음이었다. 알폰스가 그에게 가진 원한의 깊이에 비해서는.
예기치 못한 아버지의 죽음에 알폰스의 깊디깊은 감정은 갈 데를 잃었다. 목적 잃은 감정은 장작이 필요했다. 결국 그 감정은 고스란히 자기 자신에게 돌아갔다. 목적 잃은 감정은 주인을 장작 삼아 불태워 결국 알폰스의 가슴속엔 타고 난 재만이 남았다.
“부모 잃은 그 아이가 유일한 친척이었던 내게 맡겨졌을 때,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단다. 그때의 알폰스는 사람이 아니었거든. 도무지 사람 같지가 않았어…….”
메이슨 부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귀족가 세력 싸움에 남편을 잃고 혼자 백작가 안팎의 살림을 꾸려 오던 메이슨 부인은 먼 친척 아이를 맡게 되었을 때 앞날이 막막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그녀의 안에 숨어 있던 모성애가 봄비 맞은 씨앗처럼 싹을 틔웠다. 그녀는 알폰스가 성인이 될 때까지 사 년 동안 정성을 다해 돌봤다.
그녀의 노력 끝에 알폰스는 지금의 모습까지 회복했다. 제법 사람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이다.
감정에 지극히 둔감해졌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성인이 된 알폰스는 공작가로 돌아왔고 바텐베르크의 주인이 되었다.
알폰스는 밑줄을 그어 가며 읽던 서류에서 펜촉을 떼었다.
아무래도 집중이 잘되지 않는다. 머릿속이 번잡했다. 이런 일은 처음 있는 일이라 그는 조금 신경이 곤두섰다.
그는 꽁지까지 타들어 가는 시가를 재떨이 위에 올려놓은 뒤 목을 단단히 감고 있던 타이를 조금 느슨하게 풀었다.
‘다른 일부터 처리할까. 급한 일은 아니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클로에에 대한 것이었다. 마침 사업에 대해 그녀에게 의견을 구해야 하는 것이 있었다. 숨도 돌릴 겸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겸사겸사 차라도 한 잔 청해서 함께 마신다면 더 좋겠지.
그렇게 생각한 알폰스는 클로에의 침실로 찾아갔으나 그곳에 그녀는 없었다. 사용인에게 물어보니, 클로에가 메이슨 부인의 부름을 받고 그녀의 방으로 갔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알폰스는 메이슨 부인이 지내고 있는 손님용 침실로 찾아갔다. 그가 노크를 하려던 그때였다.
“……부모 잃은 그 아이가 유일한 친척이었던 내게 맡겨졌을 때,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단다.”
방문 표면에 닿기 직전 손이 멈췄다.
“그때의 알폰스는 사람이 아니었거든. 도무지 사람 같지가 않았어…….”
알폰스는 눈치가 좋은 사람이었다. 그는, 메이슨 부인과 클로에가 나누고 있는 대화의 내용을 직감했다.
어느덧 길었던 대화가 마무리 지어졌다. 클로에는 메이슨 부인에게 공손히 인사를 했다. 문을 향해 돌아서면서 클로에는 가슴속에 무거운 돌덩이가 하나 얹힌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알폰스에게…… 어떠한 사정이 있을 거라고는 예상했다. 하지만 그것이 이런 것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태어났을 때부터 강하고 단단했을 것만 같았던 알폰스의 강함은 치열한 고통 속에서 만들어졌다. 새빨갛게 달궈 연마하는 쇳덩이처럼 끊임없이 아파하면서.
클로에는 그 아픔이 자신의 것처럼 느껴졌다. 어렸던 그와 하나가 된 것처럼 마음이 너무나 아팠다. 그를 위로해 주고 안아 주고 싶었다. 이 강렬한 충동은, 단순히 ‘남편이라서’라든가 ‘아는 사람이라서’ 같은 이유로는 설명할 수가 없는 감정이었다.
얼마나 두려웠을까? 얼마나…… 외로웠을까.
“……!”
등 뒤로 문을 닫으면서 발견한 것에 클로에는 움찔 놀랐다. 알폰스가 있었던 것이다.
‘들었구나.’
클로에는 생각했다.
알폰스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무표정으로 클로에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클로에는 입술을 깨물었다.
알폰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을 따라오라는 듯이 눈짓했다.
그가 향한 곳은 자신의 집무실이었다. 두 사람이 걸어 들어가고, 집무실의 문이 닫혔다. 클로에가 말했다.
“미안해요.”
“당신 잘못이 아닙니다.”
클로에를 향해 등을 돌리고 있는 알폰스가 대답했다. 클로에는, 주저하며 말했다.
“공작님, 저…….”
“아무 말도 하지 말아 주십시오.”
알폰스는 클로에가 그 일을 알지 않기를 바랐다.
부끄럽다든가, 그녀를 믿을 수 없다든가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