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하지만…… 그렇다고 이 여성의 말을 무시하기도 어려운 것이 사실이었다. 버클리는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결국 고민하던 그가 말했다.
“그렇다면 홍보비용으론 어느 정도를 드리면 되는 겁니까?”
“치즈를 판매했을 때의 순수익의 1할을 주세요. 먼저 선금으로 창고 하나 분량만 주시고, 제 방법을 사용하셔서 치즈가 창고 하나 이상 팔리면 그만큼 값어치를 따져 제게 주시면 돼요.”
순수익의 1할. 적지는 않은 금액이었다. 그러나 치즈 전부를 상하기 직전에 반값도 안 되는 헐값에 내다 파는 것과 비교하면 남는 장사였다.
버클리는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공작부인의 혜안을 믿겠습니다.”
클로에가 생긋 웃었다.
“그럼, 들어 볼 수 있겠습니까? 공작부인의 그 치즈를 팔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버클리가 약간 초조한 듯한 기색으로 재촉했다. 클로에는 가능한 한 최고로 우아하고 차분한 동작으로 자리에 앉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치즈를 소매로 판매하실 때에는 치즈 덩어리에서 손님이 원하시는 무게만큼을 잘라 파시는 걸로 알고 있어요. 그렇죠?”
“예, 공작부인의 말씀이 맞습니다.”
“치즈 덩어리 하나당 서너 개 정도의 금화를 무작위로 넣어 두세요.”
“예?”
버클리는 깜짝 놀랐다. 판매해야 하는 치즈에 금화를 넣어 두다니! 그것도 치즈 한 덩이당 서너 개씩! 남에게 금화를 거저 주다니, 왜 그런 짓을 해야 한다는 말인가?
버클리의 반응을 예상했기에 클로에는 그걸 보지 못한 척하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벽보를 붙여 대대적으로 홍보를 하세요. ‘버클리의 식료품점에서 파는 치즈에는 금화가 들어 있습니다! 과연 당신은 금화의 주인이 될 수 있을까요? 당신의 행운을 시험해 보세요.’라는 식으로요. 사람들은 금화를 얻는 행운을 노리고 버클리에 치즈를 사러 올 거예요.”
그제야 버클리는 공작부인의 의도를 조금쯤 이해할 수 있었다. 즉, 이것은…….
“치즈를 이용한 추첨 상품이로군요!”
클로에가 빙긋 웃었다.
그러니까, 이것은 일종의 ‘치즈를 이용한 복권’이었다. 제국에서는 추첨을 통해 상품을 주는 놀이를 하는 일은 있어도 현대적 의미의 복권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즉 지금 이 일은 클로에가 제국에 새로운 개념을 도입한 것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실 이것이 온전히 클로에의 아이디어는 아니었다. 그녀는 전생 때, 홍차에 대한 책을 많이 읽었고 개중에는 홍차의 역사를 다룬 것도 있었다. 이 치즈를 이용한 복권 전략은 현대에도 굴지의 대기업으로서 이름 높은 립톤(Lipton)사의 창시자, 토마스 립톤이 자기 개인 소유의 식료품점을 운영할 때에 사용했던 전략이었다.
클로에는 책에서 읽은 부분을 기억해 내 버클리에게 가르쳐 준 것이었다.
버클리는 클로에의 전략이 무척이나 신선하고 뛰어난 것임을 어렵잖게 깨달았다. 이대로 실행만 한다면 어쩌면 수도에서 치즈가 필요한 사람들이 전부 버클리로 찾아올지도 모른다. 그는 지금 당장 치즈가 다 팔린 듯이 기뻐했다.
“이럴 수가! 정말로 현명하신 분이로군요! 15년간 사업에 투신했지만 이렇게 뛰어난 홍보 전략은 처음 봅니다.”
“과찬이세요.”
클로에가 수줍게 웃었다.
기뻐하던 버클리는 순간 멈칫했다. 무언가 걱정거리가 생긴 탓이었다.
“그런데, 만일 치안 유지대에서 치즈를 먹다가 목에 금화가 걸리면 어떻게 하냐고 제지를 하면 어쩌죠?”
“그건 간단해요. ‘버클리의 치즈에는 금화가 들어 있어 먹다가 질식할 수 있으므로 주의하세요’라고 대대적으로 광고하세요. 그렇게 하면 위험성과 주의사항을 충분히 알린 셈이 되기도 하고, 오히려 광고가 되어 더 많은 사람들이 이곳의 치즈를 구입하려 하겠죠.”
“이럴 수가! 공작부인은 정말로 지혜로우시군요!”
클로에의 홍보 전략과 만일의 사태에 대한 대응법이 대단히 만족스러웠는지 버클리는 두말하지 않고 선금을 내어주었다. 정확히 창고 하나 분량의 치즈 판매 순수익의 1할이었다.
이곳 제국은 여성의 일이 극히 제한되어 있는 곳이다. 클로에는 자신이 이런 곳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돈을 벌었다는 것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기쁘고 흐뭇했다.
그녀는 그 돈으로 원래 주문하려고 했던 식자재들을 샀다. 식료품점 몇 개를 돌며 발품을 팔았더니 수입품까지도 그럭저럭 구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필요한 모든 식자재를 사들여 귀택하니 아슬아슬하게 저녁 준비를 시작해야 하는 시간이 되었다.
“세상에, 마님!”
“마님, 돌아오셨군요!”
클로에가 부엌으로 가자마자 풀 죽어 있던 부엌 하녀들이 우르르 그녀를 둘러쌌다. 클로에는 그들의 시선에서 어떠한 기대를 읽어 냈다. 클로에 그녀가 이 상황을 해결했을지도 모른다는, 신뢰감을 밑바탕으로 한 기대였다.
클로에는 그 사실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고개가 꼿꼿하게 서고 어깨가 펴졌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아무도 믿어 주지 않고,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는 애물단지 공작부인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제는 적어도 부엌 하녀들만은 그녀를 믿어 주고 있었다. 자신들의 마님, 공작부인으로서.
클로에는 기분 좋게 웃었다.
“필요한 식재료들을 전부 준비해 왔단다. 어서 주방장과 함께 저녁 만찬 준비를 시작하렴.”
부엌 하녀들의 얼굴이 물감이 번지듯 밝아졌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돌아보더니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리고…….”
클로에가 입을 열자 부엌 하녀들이 깜짝 놀라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다른 소식이라도 있는 것일까? 그것이 나쁜 소식만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부엌 하녀들이 가슴을 졸였다.
그러나 클로에의 입에서 나온 말은 모두의 예상을 뒤엎는 것이었다.
“언제나 저택을 위해 고생하는 너희 부엌 하녀들을 위해 내가 작은 선물을 준비했단다. 모두에게 추가 수당을 줄 테니 유용하게 쓰도록 하렴.”
버클리에게서 받았던 선금으로 식재료를 전부 구입한 뒤에도 약간의 잔돈이 남아 있었다. 클로에는 그 돈으로 부엌 하녀들에게 보너스를 주기로 한 것이다.
부엌 하녀들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애쉴리도, 심지어 평소 침착한 편인 재클린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마, 마님…….”
놀란 하녀들 사이에서 제일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재클린이었다.
클로에는 아직도 재클린을 기억하고 있었다. 일전에 부엌을 방문했을 때에, 모두가 자신에게 인사할 때 유일하게 자신에게 인사하지 않은 아이였다.
“언제나 저희 부엌 하녀들에게 마음을 써 주셔서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저는…….”
그리고 과거의 클로에가 재클린에게 어떤 잘못을 했는지도 클로에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재클린이 자신에게 인사를 하지 않아도, 공손하지 않게 굴어도 괜찮았다. 반대로 자신이 그 상황이었어도 그 억울함과 원한을 지우기는 어려울 것이었다.
재클린은 마치 이전에 인사를 하지 못했던 일을 만회하듯 깊게 고개를 숙였다.
“저 하나는 아무것도 아닌 미약한 것이지만 언젠가 마님께 도움이 되길 고대하며 앞으로도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마님!”
재클린의 뒤를 따라 부엌 하녀들이 깊게 고개를 숙였다. 클로에는 괜히 눈시울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신뢰를 받는다는 감각이 이런 것일까? 전생에서는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는 감정이었다. 예산 관리권이라든가 뭐라든가, 그런 것들을 떠나 클로에는 지금 이 순간이 무척 감동적이고 행복했다.
클로에가 따뜻하게 웃어 보였다. 다른 사용인들에게는 여전히 비웃음거리일지 몰라도, 적어도 부엌 하녀들에게만큼은 최고의 마님인 클로에가 다정하게 말했다.
“바텐베르크를 위해 오늘도 열심히 일해 주렴.”
“네, 마님!”
* * *
한편 이 일을 기뻐한 사람은 버클리나 부엌 하녀들뿐만이 아니었다. 키엘 역시 무척이나 기뻐했다.
“이 예산으로 자재 관리는 물론 부엌 하녀들에게 추가 수당까지 지급하시다니……. 마님, 마님은 정말 현명하신 안주인이세요!”
키엘의 칭찬에 클로에가 뺨을 붉혔다. 그녀는 여전히 칭찬에 익숙한 타입은 아니었다.
“과찬이에요, 키엘.”
“아니에요, 과찬이라뇨! 마님께 드릴 찬사는 아직도 한참을 모자라요. 설마 이렇게까지 예산을 잘 운용해 주실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
키엘은 수줍어하는 클로에를 감탄과 흐뭇함이 섞인 얼굴로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건 그렇고 이제 더 이상 부탁드릴 것이 없네요. 이렇게나 뛰어나신 안주인을 몰라뵌 저를 용서해 주세요.”
“어머, 아니에요. 키엘이 언제나 저를 잘 도와주셔서 전 언제나 고마움을 느끼고 있답니다.”
“하하, 부끄럽군요. 어쨌든, 이제부터는 공작가의 재정을 마님께서 담당해 주시면 정말 기쁠 것 같아요. 마님께서 맡아 주신다면 정말로 안심이에요.”
클로에는 머릿속에서 종이 울리는 것만 같았다.
예산 관리권! 그것을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야 했던가. 아직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으로 그녀는 어느 정도의 권위를 부여받을 수 있었다. 그녀가 그렇게나 바랐던 남들에게 비웃음당하거나 놀림받지 않는 정상적인 공작부인으로 한 걸음 나아간 것이었다.
한편, 좀 나중의 이야기지만, 클로에의 홍보 전략을 이용하자 버클리의 치즈는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심지어 이 치즈 속 금화 마케팅은 제국 내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 비록 부호이기는 해도, 버클리와 같은 평민 상인이 이렇게까지 신선하고 파격적이며 과감한 홍보 전략을 사용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덕분에 버클리 식료품점의 매출 역시 동반 상승하기까지 했다. 버클리는 이를 무척 기뻐해 클로에에게 장문의 감사 편지와 두둑한 선물, 그리고 약속했던 추가 수익금을 보냈다.
그리고, 덕분에 클로에의 비자금 역시 두둑해졌다. 남편에게 의존하지 않아도 운용할 수 있는 자신만의 자금이 생긴 것이다.
이때 재미를 본 버클리 식료품점은 일 년에 한 번, 세인트 소피아의 축일마다 치즈에 금화를 끼워 넣어 팔았다. 덕분에 세인트 소피아의 축일마다 버클리 식료품점은 어마어마하게 붐비곤 했다. 치즈 재고가 결코 남을 일이 없었던 것은 물론이다.
사건이 잘 해결된 것은 천만다행이지만 어쨌든 클로에는 이 일이 누군가의 악의에 의해 조작되었음을 기억하고 있었다.
‘바텐베르크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는 것은 저택 내부자의 소행이라는 것. 그리고 내가 버클리에 보낸 주문 목록을 조작할 수 있었던 사람은 정황상 많지 않아.’
클로에가 알기로 그녀의 주문 목록을 손댄 사람은 두 명이었다. 그것을 직접 써 준 조세핀, 그리고 그녀의 편지를 전달한 파발꾼.
이 중 적어도 파발꾼의 단독 소행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그는 바텐베르크의 내부자가 아닐뿐더러 동기 역시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세핀의 동기라면 충분했다. 클로에는 그녀가 콜린 부인 다음으로 악랄하게 과거의 클로에를 괴롭혔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비록 내게 용서를 구하긴 했지만 여전히 내게 앙심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지. 아마 내가 그 이상의 영향력을 가지는 것은 바라지 않았을 거야.’
클로에는 남몰래 파발꾼을 불러와 조사했다. 그러나 콜린 부인에게 매수당한 그는 자신은 조세핀이 부탁한 편지를 전달했을 뿐이라고 딱 잡아뗐다.
‘내게 용서를 구한 아이들을 당분간 지켜보기로 했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기회를 준 것이나 다름없어. 기회를 주었는데도 이런 짓을 벌이다니, 입이 두 개라도 할 말이 없겠지.’
주문 목록을 조작한 범인이 조세핀이라고 확신한 클로에는, 그녀를 데려와 심문하도록 했다. 조세핀은 자신이 그런 일이 아니라며 부정했지만 클로에는 믿지 않았다.
“너는 현재 내가 가진 권위가 어떻든 간에 내 말을 따르기로 했지, 조세핀.”
클로에가 고개 숙인 조세핀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이것이 네게 내리는 마지막 지시란다. 넌 해고야, 조세핀. 다시는 얼굴 볼 일이 없었으면 좋겠구나.”
“마, 마님……!”
“네가 내게 저지른 잘못들을 생각하면 이것은 무척이나 온정적인 처벌임을 알겠지. 두말 말고 어서 짐을 싸서 이 저택에서 나가 주었으면 좋겠구나.”
평소의 다정하고 아랫사람에게 친절한 모습은 오간 데 없고, 클로에는 한없이 냉랭한 태도로 그리 말했다.
조세핀은 억울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자신이 저지른 것이 아닌 주문 목록 조작 일은 제외하더라도, 자신은 지은 죄가 많았다. 클로에가 영원히 자신을 용서하지 않을 것임을 그녀의 눈빛으로 알 수 있었다.
결국 조세핀은 그날로 짐을 싸서 랜들 준남작가로 돌아가야만 했다.
클로에는 이러한 불미스러운 사정을 알폰스나 키엘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 했다. 그러나 무려 안주인의 시녀가 해고된 일을 집사가 모를 리가 없었다.
조금 나중의 일이긴 하지만, 키엘은 조세핀이 주문 목록을 조작한 죄로 해고당했다는 사실을 다른 사용인들의 입에서 전해 들었으며, 그 사실을 알폰스에게 전했다. 알폰스는 이 일을 가만둘 수 없었다. 준남작가의 여식 주제에 공작부인의 명예를 실추시키려 하다니, 이것은 공작가에 대한 기만이며 모욕이었다.
알폰스는 은근하지만 분명하게 랜들 준남작가를 경제적 정치적으로 압박했다. 바텐베르크 공작가의 눈 밖에 난 준남작가가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랜들 준남작가의 가세가 이후 날로 내리막길을 걷게 되어, 영지도 작위도 팔아 치우고 이름뿐인 몰락 귀족이 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 *
어쨌든 예산 관리권까지 손에 쥐게 된 클로에의 공작저 내에서의 영향력은 이제 결코 좌시할 수 있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집사 키엘 역시 그녀에게 호의를 보이고 있으며, 알폰스와는 매일 티타임을 가지는 것은 물론 사업 이야기를 한다고 종종 그의 집무실에 들락거린다는 사실 역시 아무도 부정할 수 없었다.
클로에는 더 이상 과거의 만만하고, 멍청하며, 한심한 클로에가 아니었다. 그녀를 신임하거나 선망하는 사람이 점차 늘어났다.
이쯤 되니 여전히 그녀의 말을 듣지 않거나 그녀를 업신여기던 사용인들도 하나둘 깨닫기 시작했다. 더 이상 클로에의 말을 거역하는 것은 위험한 행동이라는 것을 말이다.
공작저 내 사용인들은 클로에의 눈치를 보며 그녀에게 살살거리기 시작했다.
“마님, 필요하신 것은 없으세요?”
“마님, 분부만 내려 주세요.”
“마님, 마사지를 해 드릴까요?”
사용인들은 모두 클로에의 호의를 얻어 과거 자신들의 잘못을 만회하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클로에는 이런 상황이 어이가 없었다. 그녀는 기본적으로 상대가 가진 힘과 권력에 따라 대하는 태도가 다른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자신의 영향력이 조금 변했다고 자신을 업신여기던 자들이 모두 허리를 굽실거리는 것은 유쾌하지 않은 경험이었다.
어쨌든 달리 방법은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사용인 인사권이 없었던 것이다. 클로에는 우선은 상황을 지켜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한편 이런 상황에 애가 타는 사람이 있었다. 콜린 부인이었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위험을 무릅쓰고 주문서를 조작하기까지 했는데 클로에는 그 상황을 오히려 역이용하여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녀가 결국 예산 관리권을 손에 넣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콜린 부인은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이제 기회는 많이 남지 않았다. 이대로 놔둔다면 다시는 옛날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옛날, 자신이 언제나 클로에의 위에 있고, 자신의 말 한마디로 그녀를 천국으로도 지옥으로도 몰아넣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그때로.
콜린 부인은 더 이상 수단과 방법을 가려서는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든 클로에를 추락시켜야만 했다. 자신이 추락하지 않으려면.
* * *
“마님, 들어 보셨어요? 북쪽 숲에는 얼음 연못이라는 곳이 있대요.”
클로에의 머리를 빗어 주던 마리가 말했다. 클로에가 대답했다.
“그러니?”
“네. 여름에도 마력의 힘으로 언제나 꽁꽁 얼어 있는 신비로운 곳이래요. 시원하고 아름다워서 여름에 구경하기 좋다나 봐요.”
클로에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마리가 다급히 덧붙였다.
“게다가, 북쪽 숲은 자연의 풍경이 잘 보존되어 있고 예쁜 꽃과 수목이 많대요. 요즘 날씨가 참 더운데, 놀러 가기에 딱 좋은 곳인 것 같아요.”
‘가고 싶은가 보네.’
클로에는 생각했다.
조세핀이 해고된 지 얼마 안 되었던 때였다. 클로에의 직속 시녀가 사라지자 그녀를 따르던 남은 하녀들인 마리와 니나는 한동안 조금 의기소침해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조세핀이 클로에를 망신주려 주문서를 조작했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조세핀의 평소 인격이 어땠는지 알 만했다.)
클로에는 마리와 함께 그녀의 전속 하녀인 니나를 흘끗 보았다. 클로에가 입을 옷을 들고 있는 니나 역시 입은 꾹 다물고 있지만 은근히 기대하는 눈이었다.
본래 누군가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당근과 채찍이다. 채찍은 이미 사용했으니, 이번에 필요한 것은 당근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한 클로에가 말했다.
“그래, 그렇다면 한번 가 볼까? 다음번에 모두 함께 피크닉을 가자꾸나.”
“정말요?!”
마리가 기뻐했다.
그렇게 해서, 클로에와 시녀장 콜린 부인, 마리와 니나는 이틀 뒤 북쪽 숲으로 피크닉을 가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피크닉을 가기로 한 전날 밤이었다. 콜린 부인이 갑작스레 외출을 하겠다고 알렸다. 집에 우환이 있다는 것이었다.
“본가에 일이 생겼다니 어쩔 수 없지. 잘 다녀오게.”
클로에가 담담히 작별 인사를 했다. 콜린 부인은 그녀에게 꾸벅 인사한 후 짐이 들어 있는 가방을 들고 침실에서 나왔다.
복도를 걸어 현관을 빠져나오며 콜린 부인은 남몰래 웃었다.
피크닉 장소인 북쪽 숲의 얼음 연못은 콜린 부인이 추천한 곳이었다. 얼음 연못은 아름다운 곳이다. 하지만 아름다운 만큼 위험하기도 했다.
얼음 연못에는 작은 마물인 수두 개구리가 산다. 그 개구리에게 물리면 열병을 앓게 되는데, 치사율은 높지 않지만 앓고 나면 전신이 얽어 곰보 자국이 생기게 된다.
클로에에게서 그나마 봐줄 만한 부분인 얼굴은 추하게 망가지게 될 것이다. 덤으로 자신과 하녀들을 위험한 곳으로 끌어들였다는 비난까지 받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클로에의 평판이 떨어지는 것도, 그녀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것도 시간문제다.
콜린 부인은 그러한 사실을 숨기고 얼음 연못의 좋은 점만을 잡담처럼 마리에게 흘렸다. 전속 하녀들 중 제일 머리가 나쁘고 눈치가 없는 마리는 그것을 곧이곧대로 듣고 클로에를 설득한 것이다.
이틀 뒤의 일을 기대하며, 콜린 부인은 종종걸음으로 공작저를 빠져나왔다.
다음 날, 클로에는 아침 일찍 일어나 하녀들의 도움을 받아 단장을 했다. 자줏빛 리본을 엮어 하나로 땋아 내린 머리는 활동적이면서도 우아해 보였다.
클로에는 단정하면서 편안한 드레스를 입고, 간식과 돗자리가 담긴 바구니를 준비해서 그녀의 전속 하녀들과 북쪽 숲을 향해 출발했다. 북쪽 숲과 제일 가까운 문인 서문을 통과하면 걸어서도 갈 법한 가까운 곳이었다.
그러나 서문은 바텐베르크 기사단과 제일 가까운 문이기도 했다.
“어라? 마님! 어딜 가시는 겁니까?”
클로에와 하녀들은 기사 삼총사와 마주쳤다. 클로에는 반가운 얼굴들을 보고 상냥하게 웃었다.
“아, 제이콥, 발트, 카인! 저희는 북쪽 숲으로 가고 있어요.”
“예? 뭐라고요? 북쪽 숲이요?”
기사 삼총사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예상 밖의 반응에 클로에는 고개를 갸웃했다.
“부, 북쪽 숲에는 마님께서 무슨 일로 가신답니까?”
“얼음 연못이라는 곳이 있대서 피크닉을 가려고 했는데요.”
“아이고, 마님께선 참 겁도 없으셔! 북쪽 숲으로 피크닉이라뇨?”
제이콥이 두 손을 내저었다.
“북쪽 숲에는 산짐승과 마물들이 있어요. 풍경이 볼만하긴 하지만 연약한 아가씨들끼리 가기에는 곤란한 곳입니다.”
“어머! 산짐승과…… 마물이요? 전혀 몰랐어요! 큰일 날 뻔했네요. 가르쳐 주셔서 감사해요.”
그 말에 클로에는 갈 마음을 미련 없이 바로 접었다.
“크핫핫, 별말씀을요! 저희가 바로 바텐베르크의 검, 마님의 검이 아니겠습니까! 언제나 마님의 안전을 최우선하는 것이 인지상정이죠.”
클로에의 감사 인사에 흐뭇해진 제이콥이 껄껄 웃었다. 그 모습을 잠시 보던 클로에는 자신을 따라나선 하녀들을 돌아보았다.
마리는 눈에 띄게 당황하고 있었다.
‘마리는 이 사실을 알고 일부러 추천한 것일까? 아니면…….’
클로에는 곰곰이 생각했다. 마리 역시 콜린 부인과 조세핀을 따라 괴롭힘에 가담하던 아이였다. 클로에 자신에게 앙심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렇게 위험한 곳이라는 것을 알면서 클로에 자신만 보내는 것도 아니고, 자기 역시 따라가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물론 중간에 슬쩍 빠지려고 했을 가능성도 있긴 하지만, 클로에가 생각하기에 이 상황에서 제일 의심스러운 사람은…….
‘……콜린 부인.’
하필 어젯밤에 집에 일이 있다며 빠져나간 콜린 부인이다.
예컨대 이런 위험한 곳을 마리에게 가르쳐 준 사람이 콜린 부인이라고 생각한다면 모든 것이 쉽게 이해된다. 콜린 부인이 클로에 자신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고, 클로에를 위험에 빠뜨리려 위험한 얼음 연못에 보냈다. 그리고 자신은 위험한 얼음 연못에 가지 않으려고 집안 핑계를 대며 전날 밤 빠져나갔다.
조세핀이 해고된 지 오래 지나지 않았다. 조세핀이 해고당하는 것을 보고도 마리가 이런 상황을 꾸몄을 가능성은 낮다. 차라리…… 주문 목록 조작 사건 역시 콜린 부인이 사주한 일이고, 이번 일도 클로에가 예산 관리권을 손에 넣으면서 위기감을 느낀 콜린 부인의 짓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떨까.
이렇게 생각하면 모든 것이 합리적이고 이치에 맞는다.
‘원한이 있는 나는 그렇다 치고, 원한이 없는 하녀 애들까지 위험에 빠뜨리려 하다니.’
클로에가 얼핏 미간을 찌푸렸다. 콜린 부인의 잔인함과 냉혹함이 불쾌하게 다가왔다.
“마, 마님?”
그때였다. 생각에 빠져 있던 클로에를 누군가가 불렀다. 니나였다.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란다. 잠시 생각을 좀 하느라.”
자신을 걱정하는 니나의 반응에 클로에가 빙긋 웃었다. 니나는 그제야 안심한 얼굴을 했다.
클로에는 마리를 흘끗 보았다. 마리는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번 일의 책임을 자신이 지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럼, 이번 피크닉은 취소되는 건가요? 아쉬워요.”
니나가 아쉬운 듯 말했다. 그녀의 손에는 이것저것 챙겨 넣은 간식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클로에는 잠시 고민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클로에 자신 역시 조금 아쉬운 것이 사실이었다. 모처럼의 피크닉에 자기도 모르게 제법 기대를 걸었던 모양이었다.
그때 클로에의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저, 제이콥.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요.”
“실례라뇨! 저희는 마님께서 하늘의 별을 따 오라 하시면 따 올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제이콥의 너스레에 클로에가 사풋 웃었다. 그녀가 말했다.
“혹시 저희가 기사단을 구경할 수 있을까요?”
* * *
그렇게 해서 클로에와 하녀들의 소풍 장소가 바뀌었다. 얼음 연못에서 바텐베르크 기사단으로.
클로에의 부탁을 듣는 순간, 기사 삼총사는 정규 훈련을 빼먹기로 마음먹었다. 너무나 쉬운, 그리고 무시무시한 결과가 예정되어 있는 결정이었다.
기사단은 건물과 거대한 연무장이 포함되어 있는 제법 넓은 부지였다. 기사 삼총사는 생각 외로 괜찮은 가이드여서, 클로에와 하녀들은 제법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공작저에 비해 아주 단순한 장식이지만 위엄을 갖춘 기사단 건물을 구경하고, 이번에는 연무장을 돌아볼 차례였다. 클로에와 하녀들을 이끌고 보무도 당당하게 연무장에 들어선 제이콥이 외쳤다.
“짜식들아! 어서 인사 올려라. 바텐베르크 공작 마님이시다!”
“뭐?”
“뭐라고?”
여기저기서 땀에 젖은 채 수련을 하던 기사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몰려왔다. 개중에는 웃통을 벗고 수련하던 자도 있었는데 클로에는 등 뒤의 하녀들이 작은 소리로 좋아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클로에를 눈에 담은 기사들은 전부 잠시 멈칫했다. 클로에는 드물게도 아름다운 귀부인이었다. 그리고 여기 모인 자들은 수년째 훈련과 전투에 인생을 바치고 있는 이들이었다.
그러니 넋을 잃고 바라볼 수밖에. 잠시 멍하니 클로에를 바라보던 기사들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아우성쳤다.
“저, 정말 마님이시잖아!”
“시어도어, 이 미친놈아. 마님 앞에서 그게 무슨 꼴이야. 당장 윗옷 안 입어?”
“내 윗옷 어디 갔어?”
다급히 행색을 정돈한 기사들은 순식간에 클로에 앞에 도열했다. 기사단장이 갑작스레 나타났을 때만큼이나 엄청난 속도였다.
“공작부인께, 충성을 담아 경례!”
제이콥이 소리쳤다. 기사들이 정연하게 자세를 갖추었다.
“목숨과 긍지를 바쳐, 바텐베르크의 검이 되겠습니다!”
기사들이 한목소리로 소리쳤다. 일종의 인사인 것 같았다.
클로에는 난생처음 들어 보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여태까지 단 한 번도 기사단에 올 일이 없었던 것이다.
기사들이 경례를 마치자, 이번엔 클로에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클로에 바텐베르크입니다. 저택을 안전하게 지켜 주셔서 언제나 감사히 생각하고 있어요.”
본디 귀족은 자신의 기사에게 감사 인사를 하는 법이 없다. 기사가 주인을 지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주인을 위해 피 말리는 수련을 하는 일도, 목숨과 일생을 바쳐 검을 휘두르는 일도.
그런데 이 마님은…… 아름다우면서도 자애로운 마님은 그들에게 무려, 감사 인사를 하고 있었다. 진심을 담아서.
기사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밖엔 없었다.
‘천사다!’
‘여신의 강림이다!’
도열해 있던 기사들의 뒷줄에선 이런 소란도 일어났다.
“톰슨, 너 이리 나와 봐.”
“잠깐 우리들 좀 보자.”
“마님이 뭐가 어쨌다고 했지?”
“아니, 나도 저런 분이실 줄은 몰랐어! 잠깐! 으아아아! 살려 줘!”
끌려 나가는 톰슨에게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는 대신, 기사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사래를 치며 겸양을 떨기 시작했다.
“아니…… 아닙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바텐베르크의 검으로서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클로에는 꿈에도 몰랐지만 사실 그녀는 바텐베르크 기사단 내에서 이미 인기인이었다. 그게 전부 제이콥을 비롯한 기사 삼총사의 공이었다. 그들이 침이 마르도록 클로에를 칭찬하고 자랑했을 뿐만 아니라, 과일 우롱차라는 이름의 신문물을 기사단 내에 퍼뜨리는 데에 일조했던 것이다.
그러니 클로에는 얼마 안 가 기사들에게 호기심과 호의 어린 관심을 한 몸에 받게 되었다.
기사들에게 둘러싸인 채 클로에는 층계에 걸터앉아 대화를 나눴다. 클로에는 기사 삼총사들과의 교류 경험이 있었고, 기사들은 클로에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전해 들어 알게 모르게 그녀에게 친근감을 느끼고 있었던지라 분위기는 꼭 막역한 친구 사이 같았다.
그 곁에 선 제이콥이 뿌듯한 듯 코쓱을 하고 있었고, 하녀들은 저들끼리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나는 마님이 저렇게 기사들에게 인기가 많은 줄 몰랐어.”
마리가 놀란 듯이 말했다.
“그러게요. 정말 사이가 좋아 보여요.”
니나는 조금 동경하는 듯한 눈으로 클로에와 기사들을 지켜보았다.
대개 일반 사용인들에게 기사들은 경외의 대상이었다. 귀족 비율이 높았을 뿐 아니라, 다른 사용인과 달리 자긍심과 기사도, 무력을 갖춘 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와중이었다.
“왜들 소란이냐?”
“다, 단장님!”
마님의 등장에 훈련은 새까맣게 잊고 있던 기사들이 기겁했다.
기사들이 빛과 같은 속도로 도열했다. 발롱도르 기사단장은 자신의 수하들의 선택적 군기에 한숨을 쉬었다.
“왜들 이렇게 소란이냐? 제이콥, 발트, 아벨. 너희들은 정규 훈련도 빼먹고 어딜 갔다가 이제야 슬금슬금 기어들어 온 거지?”
“다, 단장님! 저희는 논 게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저희는 공작부인의 기사단 안내라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음? 공작부인?”
발트와 제이콥의 변명에 발롱도르가 눈을 크게 떴다. 그는 그제야 층계에 앉아 있다가 이제 막 내려온 공작부인과 그녀의 하녀들을 발견했다.
클로에가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단장님. 클로에 바텐베르크입니다. 갑작스레 찾아와 기사단의 훈련을 방해한 점 사과드립니다.”
갑작스러운 공작부인의 등장에 당혹한 발롱도르는 잠시 말문을 잃었다. 그는 뒤늦게서야 그녀를 따라 깊게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부인. 저야말로 제 휘하의 수하들이 공작부인께 무례를 행하지는 않았나 염려스럽습니다.”
“무례는요. 모든 분들이 무척이나 친절하고 정중하셔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답니다.”
발롱도르는 주변의 수하들이 흐뭇하고 뿌듯해하는 기색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그들에게 엄한 눈빛을 쏘아 준 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평온한 얼굴로 공작부인을 마주 대했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늙은이 마음이 얼마나 편안해졌는지 모릅니다. 공작부인,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잠깐의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죠.”
발롱도르는 클로에를 기사단 건물의 단장실로 모셨다. 클로에는 발롱도르가 편히 이야기할 수 있게끔 하녀들을 잠시 물리고, 단장석의 맞은편에 앉았다.
잠시 후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커피가 내어져 왔다. 클로에가 조심스레 잔을 집어 한 모금 마시는 과정을 발롱도르는 주름진 눈가에 박혀 있는 빛나는 눈동자로 지켜보았다.
클로에가 커피잔을 내려놓자, 발롱도르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
“공작부인을 감히 이 자리까지 모신 것은, 수하들이 공작부인께 끼친 무례에 대해 용서를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머, 어떤 일 때문인가요?”
발롱도르가 이야기한 것은, 일전에 기사 삼총사가 클로에에게 차를 얻어먹었던 일이었다. 이미 3주 정도 지난 일이었지만 그는 그것을 계속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던 것 같았다.
기사단장의 차분한 사과에 클로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오히려 저는 무척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걸요. 오히려, 저야말로 그 일에 관해 단장님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었어요.”
“무엇입니까?”
“다른 분들께 차를 대접해 드리는 것은 제 기쁨이에요. 저는 단장님께서 제가 기사분들과 즐겁고 편안한 티타임을 보내는 것을 허락해 주셨으면 해요.”
귀족적인 언어로 우회하여 말하기는 했지만 그 속뜻을 발롱도르가 모를 리가 없었다. 가문 휘하의 기사단의 단장보다 가문의 안주인이 더 높은 것은 당연지사. 지금 이, 젊은 마님은 그에게 한없이 부드러운 명령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기사단의 문화와 권위를 무시당하는 듯한 느낌을 받지 않도록.
발롱도르는 내심 상대의 화법과 배려에 감탄했다. 바텐베르크의 안주인께서 직접 평기사들까지 신경 써 주는 마음 씀씀이가 놀라웠던 것은 물론이다.
“공작부인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제가 여부가 있겠습니까. 앞으로는 수하들에게 부인과 티타임을 가졌다고 벌을 내리지 않겠습니다. 편안하고 즐거운 티타임 가지시길.”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단장님.”
클로에가 기쁜 듯이 웃었다. 그 모습을 보며 발롱도르는 흐뭇한 웃음이 절로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가 클로에를 여기까지 부른 이유는 단순히 사과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것이었으면 연무장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는 궁금했다. 몇 주 전부터 기사단 내에서 연일 화젯거리로 오르내리는 공작부인이. 그가 수십 년간 충성을 바쳤던 바텐베르크가의 새로운 안주인이.
발롱도르가 직접 본 클로에는 우아하고 공손한 사람이었다. 예의 바르면서도 비굴하지 않고, 공작부인이라는 직급에 어울리는 품위가 있었다.
‘공작부인은 성격적 결함이 있다고 들었는데…… 전혀 그래 보이지는 않는데. 중상모략이었던 모양이군.’
오랜 시간 쌓여온 연륜과 단장으로서의 경험으로 인해 그는 사람 보는 눈이 갖춰져 있었고, 자기 스스로도 자신의 눈을 신뢰하는 편이었다.
그런 그는 공작부인이 썩 마음에 들었다. 그녀의 능력적인 면은 아직 알 수 없었지만, 자신을 대할 때의 대처 방식이나 기사들의 마음을 쉽게 얻은 것을 보면 안주인으로도 훌륭히 해낼 듯 보였다.
발롱도르와 클로에는 편안한 분위기에서 소소한 대화를 더 나누었고, 그러는 동안 발롱도르의 마음속 클로에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는 점점 확신으로 굳어졌다.
그 날, 클로에는 기사단의 융숭한 대접을 받고, 즐거운 시간을 보낸 뒤 공작저로 돌아갔다.
클로에가 돌아간 뒤, 발롱도르는 오늘 있었던 일을 바텐베르크 공작에게 보고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물론 일반적인 경우 이러한 일은 당연히 보고하는 것이 맞다. 다른 사람도 아닌 바텐베르크의 안주인이 기사단에 방문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부인에 대한 사소한 일은 내게 보고하지 말게.'
일전에 공작이 했던 말이 신경이 쓰였다.
이번 일은 흔히 있는 일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대단한 일도 아니다. 공작부인의 방문 목적 역시 공적인 이유가 아닌 사적인 것이 아니었던가.
'보고하지 말라고 하셨으니, 보고하지 않는 것이 맞겠지.'
결국 발롱도르는 그렇게 판단했다.
* * *
이 날로부터 공작저 내에 클로에가 기사들과 친하다는 소문이 쫙 퍼졌다.
“그 소식 들었어? 마님이 기사들과 친분이 있대. 아주 절친하다던데.”
“기사들은 마님의 말이라면 별이라도 따 오려고 한대.”
“마님의 말씀은 도저히 거역 못 하겠어. 자칫하다가 기사들한테 혼쭐이라도 나면 어떡해?”
사용인들은 동요했다. 기사들은 경외의 대상이었다. 그런 기사들이 든든히 마님의 뒤를 받치고 있었다니, 기사들에게 혼쭐이라도 나면 어쩌나 겁도 났고, 또 마님이 그렇게나 자기들이 모르는 매력과 장점을 갖추고 있는 건가 싶어 호기심이 들기도 했다.
어찌 됐건 다시는 클로에를 거역해서는 안 되겠다는 것이 사용인들의 생각이었다.
한편 돌아온 콜린 부인은 어안이 벙벙했다. 분명 자신이 돌아오면 클로에나 최소한 하녀들 중 누군가가 수두에 걸려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부 멀쩡하지 않은가? 게다가 공작저 내에는 클로에가 기사들과 친하다는 소문이 쫙 퍼져 그녀의 평판이 오히려 더 올라가 있었다.
콜린 부인이 클로에에게 있었던 일을 알게 된 건 눈치 없는 마리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뒤였다.
“큰일 날 뻔했어요, 콜린 부인! 글쎄, 콜린 부인이 가르쳐 주었던 얼음 연못이 엄청 위험한 곳이었다지 뭐예요. 마님과 저와 니나는 운이 좋게도 그 사실을 우연히 만난 기사님께 들었어요. 그래서 얼음 연못 대신 기사단으로 소풍을 갔답니다.”
그제야 콜린 부인은 자신의 계획이 또 실패했음을 깨달았다.
한편, 비록 기사단으로의 피크닉이 즐겁기는 했지만 클로에는 이번 일 역시 쉬이 넘길 생각은 없었다.
물론 제일 좋은 것은 콜린 부인에게 큰 벌을 내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사용인 감독권도, 이 모든 것이 콜린 부인의 소행이라는 물증도 없는 클로에에게는 불가능했다.
대신에 그녀는 마리를 심문했다.
클로에는 내심 마리가 얼음 연못을 가르쳐 준 사람이 콜린 부인이라고 실토하길 바랐지만 어떻게 입막음을 한 것인지 마리는 그 말만은 하지 않았다. 대신 울먹이면서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이 그녀가 한 말의 전부였다.
십 대 중반밖에 되지 않는 어린애가 울먹이니 천성적으로 마음이 약한 클로에는 조금의 동정심이 생겼다. 하지만, 이것은 마리를 치워 버릴 좋은 기회였다. 클로에는 마리가 자신을 괴롭히는 일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것을 기억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반성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도.
‘니나, 네가 그런 식으로 행동하면 난 뭐가 되니? 너무 너 혼자만 마님께 잘 보이려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죄송해요, 마리.’
‘어쨌든 마님한테 나쁜 짓 한 건 너나 나나 마찬가지니까 말이야! 너 혼자만 신임을 받을 생각이라면 집어치우는 게 좋아.’
마리가 니나를 타박하는 것을 우연히 들었다. 그때 클로에는 안 그래도 바닥을 찍던 기대가 지면을 뚫고 맨틀까지 뚫고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어쨌든 마리는 곁에 두고 신뢰하기에 적합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녀는 해고하는 것이 좋았다. 가능하다면 더 빨리. 클로에는 마음을 좀 더 굳게 먹었다.
클로에는 결국 이번 일의 책임을 물어, 마리가 짐을 싸서 집으로 돌아가게 했다. 클로에는 다시는 마리를 볼 일이 없기를 바랐다.
마리를 해고한 그 날, 언제나처럼 알폰스와 저녁 식사를 하고 티타임을 갖던 도중이었다. 클로에는 알폰스에게서 놀라운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무도회라고요?”
찻잔을 비우고 시가를 피우던 알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간단히 대답한 그는 왠지 모르게 입이 근질거림을 느꼈다. 그는 곧, 이전이라면 결코 입에 담지 않을 말을 입에 올렸다.
“만일 원치 않으신다면 불참하셔도 좋습니다.”
사실 불참하면 곤란한 자리다. 최근 중요한 거래 상대가 주최한 무도회였던 것이다. 이런 경우 배우자를 동반하여 부부가 함께 무도회에 참석해 주는 것이 예의다.
만일 예전 같았으면 당연하다는 듯이 클로에와 함께 갔을 것이다. 그녀가 원하는지, 원치 않는지의 여부 같은 것은 상관없었다. 가야 하는 곳이니 가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알폰스는 오늘따라, 왠지 클로에가 원치 않는다면 가지 않게 해 주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클로에의 반응은 정반대였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알폰스를 향해 상체를 가까이했다.
“아니에요! 가고 싶어요. 무척 궁금한걸요.”
‘궁금하다, 라.’
알폰스는 순간 언뜻 의문을 품었다. 그가 알기로 클로에는 무도회에 참석한 적이 아예 없지 않았다. 아니, 결혼 이후에 알폰스 자신과 함께 무도회에 다녀온 적도 있었다. 그런 사람이 입에 담기에는 별로 적절한 표현이 아니었다.
어쨌든 상관없었다. 알폰스는 클로에가 호기심으로 눈을 빛내는 것을 보며 일전에 포트넘 자작가에 방문했던 것을 떠올렸다.
알폰스는 담배 연기를 깊이 빨아들인 뒤 뱉어 내고는 말했다.
“그렇다면, 함께 가시는 걸로 알겠습니다.”
알폰스는 집사를 통해 무도회의 주최자인 해로즈 백작에게 참석 의사를 알렸다.
그리고 바텐베르크 공작 부부가 실로 오랜만에 무도회에 참석한다는 소문은 귀족 사교계에 빠르게 퍼져 나갔다.
“그 두 분, 사이가 정말 안 좋으시다면서요?”
“여자 쪽이 무척 볼품없다던데요.”
바텐베르크 공작 부부의 우스운 조합과 그 관계는 이미 귀족 사교계에서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 누구보다 눈에 띄는 완벽한 신랑감인 알폰스 바텐베르크와 한심한 놀림거리인 클로에 바텐베르크가, 화려한 무도회 드레스를 입고 나막신을 신은 모양새만큼 어울리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특히나 사람들은 과거 제국의 내로라하는 미녀들에게도 냉랭했던 알폰스가 클로에는 얼마나 냉대하고 있을지 기대했다. 개중에는 과거 알폰스에게 구애했으나 거부당해 클로에를 질투하는 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해로즈 가의 무도회에서 보여 줄 알폰스와 클로에의 관계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과 기대에 온갖 뜬소문이 모락모락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무도회에 참석할 예정인 사람들은 모두 그 바텐베르크 부부의 모습을 꼭 자기 눈으로 확인해 보겠노라고 의지를 불태웠다.
그렇게 해서 무도회 당일이 되었다.
해로즈 백작저에 바텐베르크의 문장을 단 거대한 마차가 들어오자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마차에서 내린 키가 훤칠하고 멀리서도 눈에 띌 정도로 잘생긴 남자, 알폰스는 에스코트를 위해 마차 안으로 손을 내밀었다.
클로에는 그의 도움을 받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마차에서 내려선 그들은 잠시 어떤 이야기를 나눴다. 클로에가 꽤 귀여운 얼굴로 웃었다. 그들은 곧 다정한 모습으로 함께 백작저로 향했다.
이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은 기대와 다른 모습에 어안이 벙벙했다.
“의외로 사이가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무슨 소리야, 고작 마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았을 뿐인데. 아마 무도회장에서는 다를 거야.”
이런 식의 대화를 나눈 사람들은 부리나케 바텐베르크 부부의 뒤를 쫓았다.
그러나 뜻밖의 모습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알폰스는 클로에를 제법 정성스레 에스코트했다. 그 태도에는 그가 여느 여자들을 대했던 때 보였던 것과 같은 의무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그가 클로에와 다니는 것을 귀찮다고 여기거나 싫어하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기존의 알폰스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것은 무척이나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알폰스보다 더욱 달라져 사람들이 제 눈을 의심하게 만든 사람은 따로 있었다. 클로에였다.
“바텐베르크 공작 각하의 곁에 계신 분이 정말 공작부인이 맞아?”
“아마 그런 것 같은데…….”
“공작부인은 언제나 자신감 없어 보이고, 공작 각하를 대단히 어려워하신다고 들었는데…….”
거기까지 말한 어떤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클로에는 분명히 소문 속의 자신감 없고, 알폰스를 어려워하며 두려워하는 냉대받는 여자와는 달랐다.
굳이 자신감 없고 소심하기로 유명한 클로에가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폰스를 어려워하고 있었다. 타인이 어려움을 느낄 만한 지위를, 분위기를, 눈빛을 그는 가지고 있었다. 그 누구에게도 선을 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태도와 특유의 위압감 넘치는 그의 붉은 눈동자는 거구의 용병이라도 찔끔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런데 정작 그 ‘클로에’는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클로에는 알폰스를 향해 맑게 빛나는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그녀는 필요한 예의를 갖추는 한에서 알폰스를 대단히 편하게 대했다. 그러는 그녀의 눈빛과 태도에서 두려움 같은 것은 한 톨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는 거지?’
‘어떻게 공작 각하께 저렇게 대할 수가 있지?’
‘어떻게 공작 각하께서는 저렇게 편히 대하는 상대를 가만히 두시는 거지?’
기존의 알폰스를 알고 있던 사람들은 말은 하지 않아도 모두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개중에는 이러한 뜻밖의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흥, 저 정도가 뭐라고. 나는 공작 각하께 훨씬 편하게 대하기도 했는걸.”
“웃는 건 저 여자뿐이지, 공작 각하는 한 번도 웃음 짓지 않으시잖아요. 각하께서는 아내에게 관심이 없는 것이 분명해요.”
주로 과거 알폰스와 교제를 했거나 그를 남몰래 사모하고 있어 그의 아내에 대한 질투를 불태우는 사람들이었다.
물론 공작 부부를 지켜본 사람들 중엔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두 분, 생각 외로 잘 어울리시는 것 같아요.”
“그러게나 말이에요. 예전에는 이만큼 안 어울리는 조합은 또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떤 의견을 가지고 있든, 바텐베르크 공작 부부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다.
한편 클로에는 자신이 수많은 시선과 구설수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알폰스가 허리를 굽혀 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오겠다고 속삭였다. 이런 사교모임에서는 춤을 출 때가 아니라면 남성과 여성은 갈라져 동성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무리에서 노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클로에는 그러시라며 웃었다.
알폰스가 해로즈 백작을 만나러 가자, 클로에는 혼자 음료나 파티 음식이나 맛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목적은 달성되지 못했다.
“어머나, 안녕하세요, 바텐베르크 공작부인.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바텐베르크 공작부인, 드레스가 정말 아름다우시네요. 드레스 디자이너의 이름을 여쭈어봐도 될까요?”
“바텐베르크 공작부인…….”
알폰스가 떨어져 나가기가 무섭게 이번엔 여성들의 무리가 다가와 그녀를 끌어들이려고 안간힘을 썼기 때문이었다. 클로에 본인은 몰랐지만 그녀는 이번 무도회 최고의 관심과 호기심의 대상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사정을 모르는 클로에는 어안이 벙벙했다. 클로에, 즉 자신은 공작부인이라는 높은 지위를 갖고 있으면서도 사교계에서의 영향력은 한없이 낮아 사교모임에서 인기 있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의 이 상황은 대체 뭐란 말인가?
어쨌든 당황은 접어 두고서 최선을 다해 예의 바르게, 하지만 비굴해 보이지는 않게 대응하기 위해 클로에는 무진 애를 썼다. 공작부인이 된 지 아직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귀족적 말투에 익숙하지 않은 그녀는 여러 명이 한꺼번에 말을 걸어오자 저절로 진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대화를 나누던 클로에는 곧 이 사람들이 왜 이렇게 자신에게 관심이 많은지를 눈치챘다. 에둘러 표현하기는 했지만, 그들의 관심사는 주로 알폰스와 그녀의 관계에 있었다.
‘공작님과 내가 생각 외로 사이가 좋아 보이니까 그 점이 궁금한 모양이구나.’
클로에는 적당한 선에서 솔직하게 대답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여기서 괜히 내 체면을 세우자고 사실을 부풀려서 말했다간 나중에 크게 망신을 당하는 수가 있었다.
그때였다.
“어머나, 공작부인과 부군께선 정말 사이가 좋으시군요.”
다이어 후작부인이 눈을 가늘게 접어 웃으며 말했다.
“서로 편하게 지내는 모습이 마치 남매 같아요. 저희 바깥 분께선 저를 어찌나 아끼시는지, 한시도 떨어져 있으려고 하질 않으셔서 무척이나 귀찮답니다. 그러는 것보단 공작부인을 남매처럼 대해 주시는 부군 같은 분이 훨씬 좋아 보여요.”
부러워하는 척하면서 건네는 이 가시 돋친 말을 클로에가 알아듣지 못할 리가 없었다. 이건 쉽게 말해서, 자신은 남편에게 사랑받는데 너는 사랑받지 못해서 어쩌냐는 뜻의 시비다.
이런 식의 칭찬을 하는 듯하면서 비꼬는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호의적으로 반응하면 그건 또 그것대로 비웃음거리가 된다. 클로에는 담담히 대답했다.
“네, 그러시군요.”
자신의 예상대로 클로에가 상처받는 것 같지 않자 다이어 후작부인의 눈에 얼핏 한기가 돌았다. 그녀는 조금 더 도발의 수위를 높여서 말했다.
“남편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아내로서 필요한 최고의 덕목이죠. 그런 의미에서 공작부인께서는 정말로 걱정 없으시겠어요. 부군께 마치 누이처럼 예쁨받으시잖아요? 아시다시피, 남편에게 사랑받는 것이야말로 여자의 행복의 전부이니까요.”
남편에게서 여자로서 사랑받지 못하는 너는 결코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사랑받는 나와는 다르게. 귀족적으로 돌리고 돌려 다이어 후작부인이 그리 말하고 있었다.
그녀의 악의를 눈치챈 주변의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쪽에는 신경 쓰지 않고, 음료수를 한 모금 마신 클로에가 차분히 말했다.
“다이어 후작부인께서는 그러시군요. 하지만 저는 여자의 행복이 오로지 남자에게 사랑받느냐 아니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순간 주변이 잠잠해졌다. 모두가 놀란 것 같았다.
그럴 만도 했다. 여성 인권이 낮은 제국에서는 남편에게 사랑받는 것이야말로 여자의 행복의 모든 것이고, 여자가 할 일은 오로지 남편을 잘 내조하고 아이를 잘 키우는 일이라는 사상이 팽배했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와중에 공작부인씩이나 되는 사람이 대놓고 반기를 드니 다들 놀란 것이리라.
클로에가 말을 이었다.
“저는 남편의 사랑이나 아이의 양육 외에도 삶을 다채롭고 풍부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 많다고 생각해요. 혹시 다이어 후작부인은 그런 것이 없나요? 이것이라면 밤을 새워서, 끼니를 걸러서라도 할 수 있을 만큼 즐거운 것. 더욱더 알고 싶고 더욱더 배우고 싶은 것. 즐기는 것만으로도 몸속에는 반짝이는 활기가 차오르는 듯하고, ‘아, 나는 살아 있구나.’라고 느낄 수 있는 그런 것. 그런 것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인생은 어마어마하게 달라져요.”
“그…… 그런 것이…… 남편을 사랑하는 것 외에 또 무엇이 있단 말인가요? 공작부인께선 정말로 그런 것이 있나요?”
“네.”
클로에가 웃었다.
“저는 차를 우릴 때에 그런 기분을 느껴요. 찻잎에 뜨거운 물을 부을 때에 피어오르는 달콤한 향을 들이마실 때, 물을 붓고 티코지를 씌운 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차가 우려지길 기다릴 때, 알맞게 우려진 차를 한 모금 머금을 때 저는 살아 있음을 느껴요. 새로운 차를 맛볼 때는 가슴이 흥분으로 두근거리고, 제가 모르는 것들에 대해서는 더 많이 알고 싶어요. 이런 감각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이에요.”
그녀가 꿈꾸듯 이야기했다. 넋을 놓고 있던 다이어 후작부인은 클로에의 이 말에 움찔 놀랐다.
“다이어 후작부인도 언젠가 이런 기분을 느껴 보신다면 좋겠네요.”
“그, 그런…….”
시비를 걸려다가 본전도 못 찾은 다이어 후작부인은 수치로 뺨을 붉히고 있었다. 클로에와 다이어 후작부인을 둘러싼 사람들이 수군대고 있었다.
그곳에 있는 모두에게 느껴졌다. 클로에는 진심이었다. 그녀는 남편을 내조하거나 아이를 키우는 일 외에도, 삶을 다채롭게 물들이고 영혼을 살찌우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조, 조언 감사해요.”
파르르 떨던 다이어 후작부인은 그 말만을 남기고 파우더룸에 다녀오겠다며 바삐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사라지자 웅성거림도 수그러들었다.
주변에서 상황을 관망하고 있던 한 귀부인이 클로에에게 말을 걸었다.
“잘 대처하셨어요, 공작부인. 무척 감탄했어요.”
“어머, 아니에요.”
클로에가 수줍게 대답했다. 귀부인이 고개를 저었다.
“사실 다이어 후작부인은 영애 시절에 공작부인의 부군께 숱하게 구애하셨어요. 후작부인의 친정에서 직접 거액의 지참금과 청혼장을 보내기도 했지만 부군께선 전부 거절하셨죠. 아마 조금 전 후작부인이 그러신 것도 공작부인을 질투해서 그런 게 아닌가 싶어요.”
그랬구나. 클로에는 그제야 후작부인의 악의의 이유를 찾았다. 그녀는 알폰스를 짝사랑했으나 사랑을 거절당해 다이어 후작과 결혼했다. 그러나 그 이후로도 알폰스에 대한 미련을 지우지 못해 클로에를 이렇게 대놓고 도발하기까지 한 것이다.
“그랬군요. 알려 주셔서 감사해요, 부인.”
“뭘요.”
그 이후로 귀부인 무리의 대화는 어떠한 악의나 사고 없이 평화롭게 이루어졌다. 클로에는 한결 차분해진 기분으로 귀부인들과 잡담을 나눌 수 있었다.
얼마나 대화를 나누었을까, 곧 오케스트라에 의해 무도회장에 춤곡의 서곡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곧 춤을 출 시간이 되었다는 의미였다.
주변의 여성들은 하나둘 자신의 파트너를 찾아가거나 다른 남자의 춤 신청을 받아 떠났다. 그 모습을 보며 클로에는 문득 생각했다.
‘공작님도 내게 춤을 권하실까?’
사실 그러든 말든 크게 상관은 없는 일이었다. 최근 클로에의 노력에 의해 제법 친해지기는 했지만 그들은 사랑이 없는 부부가 아닌가.
‘뭐, 꼭 연애 관계에 있어야만 함께 춤을 추는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어쨌든 클로에는 알폰스가 이 이상 자신에게 신경을 써 주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는 자신과 놀러 온 것이 아니라 일을 위해 이 자리에 온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클로에는 가슴 한구석이 얼핏 저려 오는 걸 느꼈다.
반드시 서로 사랑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는 자신의 남편이었다. 조금만 더 가까워지는 것을…… 조금만 더 그가 자신을 신경 써 주는 것을 바라는 것이 과도한 욕심일까.
그때였다.
“부인.”
한 손이 자신에게 내밀어졌다. 클로에가 놀라 그쪽을 보았다.
그녀의 앞에는, 처음 보는 청년이 서 있었다. 꽤 세련된 복장에 잘생긴 얼굴을 하고 있는 그는 제법 매력적이었다.
“저와 한 곡 추시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그 남자의 얼굴에는 왠지 모를 자신감이 담겨 있었다. 자신이 매력적이라는 사실을 썩 잘 알고 있는 사람의 표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로에는 순간 약간의 실망감을 느꼈다.
그녀는 알폰스의 한순간도 변한 적이 없었던 그 특유의 무뚝뚝한 눈을 떠올렸다. 클로에는 속으로 웃었다. 그래, 그런 눈을 가진 사람에게 헛된 기대를 했다. 그 사람은 열심히 일이나 하라지 뭐. 나는 즐겁게 놀 거니까.
클로에는 생긋 웃으며 청년의 손을 잡았다.
“잘 부탁드려요.”
잡으려고 했다.
클로에는 앞으로 내밀려고 하던 자신의 손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손이 꽉 쥐어져 있었다. 다른 누군가의 커다란 손 안에.
클로에가 옆을 올려다보았다.
“공작님…….”
알폰스는 그녀의 손을 꽉 붙든 채 청년을 보았다. 그는 훤칠한 편인 청년보다도 훨씬 키가 컸다. 클로에는 그의 눈에, 정말로 드물게도 감정이 어려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분노? 아니, 짜증이라고 해야 하나?
일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춤을 출 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클로에를 찾으러 온 알폰스는 발견했다. 클로에와…… 그녀에게 춤을 청하는 한 남자를.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클로에가 누구와 춤을 추든 알폰스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반드시 부부간에만 춤을 춰야 하는 것도 아니니, 클로에 그녀의 자유가 아닌가.
그런데도 알폰스는, 정말로 놀랍고 비논리적이게도…… 그 순간 은은한 짜증을 느꼈다.
‘겨우 그것도 못 기다리나.’
음악이 시작하자마자 출발했으니 그렇게 오래 걸린 것도 아닐 것이었다. 그런데 고작 그 짧은 시간도 못 기다려서 다른 남자와 춤을 추려 하다니? 알폰스는 짜증이 치밀었다.
이성적이고 냉철한 그가 이런 상황에서 그런 식으로 생각하다니, 너무나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갑작스러운 상황이었기에 그는 그런 것까지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하는 행동이 적절하고 이성적인지를 재고하는 대신, 클로에의 손을 붙잡는 것을 선택했다.
알폰스를 본 순간 클로에는 해가 뜬 듯 마음속이 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마음속만큼이나 얼굴 역시 밝아졌지만 본인은 깨닫지 못했다.
청년은 클로에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한 채, 그저 그녀의 미모에 끌림을 느껴 춤을 청했다. 하지만 만일 그녀가 누구인 줄 아는 상태로 춤을 청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그는 생각했다. 다시 말하자면 춤을 추는 행위는 그저 사교활동이자 스포츠의 일종이기 때문에 기혼자와 함께한다 하더라도 흠이 아니다.
아주 가끔 자신의 배우자에게 집착하는 타입의 사람이 드물게 있긴 하지만, 청년은 알폰스가 그런 타입일 것이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 냉혈한으로 유명한 알폰스 바텐베르크, 자신의 아내를 냉대하기로 유명한 바텐베르크 공작이 아닌가.
“각하.”
그랬기에 그는 바텐베르크 공작을 눈앞에서 보고서도 당당하려고 했다. 그러나…….
“내 아내에게 무슨 용건이지.”
‘……!’
공작의 붉은 눈에서 형형할 정도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저 무감정하게 직시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압력이 느껴지는 시선이다. 감정까지 실려 있는 지금 그 눈빛을 맞는 사람의 기분이 유쾌할 리가 없었다.
그 바텐베르크 공작의 시선의 압박감을 한 몸으로 느낀 청년은 다리가 후들후들 떨릴 지경이었다. 지금 이 순간 매력적인 공작부인 같은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는 그저 도망쳐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아, 아닙니다.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각하, 부인. 전 그럼 이만……!”
가까스로 말을 뱉어 낸 청년은 꽁지 빠지게 도망쳐 그 자리를 벗어났다. 자리에는 여전히 기분이 좋지 않은 알폰스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클로에뿐이었다.
알폰스가 나타나니 갑자기 도망간 청년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클로에는 다시 알폰스를 돌아보았다. 그는 다시 평소와 똑같은 무심한 눈으로 돌아와 있었고…… 여전히 클로에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
클로에는 그게 새삼 쑥스럽게 느껴졌다. 그녀는 헤헤 웃으며 은근슬쩍 손을 빼내려 했다. 그러나 알폰스는 그녀를 놔주지 않았다. 그의 손아귀는 클로에의 작은 손을 더 단단히 움켜쥘 뿐이었다.
클로에는 조금 뺨을 붉혔다. 결국 그녀는 손을 빼내는 것을 포기했다. 대신에 그녀가 말했다.
“저, 공작님.”
“예.”
“공작님이 저를 찾으러 와 주셔서 기뻐요.”
그녀가 솔직하게 말했다. 알폰스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로, 그런 클로에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 시선에 클로에는 더 부끄러운 기분이 되었다.
게다가 기껏 돌아온 대답이,
“그렇습니까.”
너무나 담담해서 클로에는 더더욱 민망해졌다.
“네.”
“그럼, 부인.”
알폰스가 나직하게 말했다.
“제게 부인과 함께 춤을 출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클로에는 가슴이 세차게 두방망이질 치는 것을 느꼈다. 그냥 춤을 추자는 말일 뿐인데, 그것만으로도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스릴 수 없었다.
잠시 눈을 감고 마음을 차분히 한 클로에는, 이내 눈을 뜨고 웃었다.
“네.”
그러나 그녀가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다.
엄연한 귀족가의 레이디인 이전의 클로에는 물론 춤을 배웠다. 그녀의 기억을 전부 이어받은 만큼, 지금의 클로에도 춤추는 법을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머리로 기억하는 것과 몸의 움직임은 별개였다. 춤추는 법을 머리로 기억한다고 그것을 온전히 몸으로 써먹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
그 사실을 무도회장의 한복판에서, 음악이 시작된 뒤에야 뒤늦게 깨달은 클로에는 당황했다. 선율에 맞추어 주변의 사람들이 돌기 시작했다. 알폰스도 돌았다. 가까스로 그의 움직임에 발을 맞추며, 클로에가 속삭였다.
“고, 공작님. 저, 사실 춤을…….”
“예.”
“춤을 못 춰요.”
그런 그녀를 발견한 주변의 사람들이 쑥덕거렸다. 가뜩이나 클로에의 평소 평판이 좋지 않았고, 그녀의 뭐든 트집 잡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만큼 그녀의 춤 솜씨는 좋은 먹잇감이었다.
클로에는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몰래 비웃고 있는 듯 억눌린 웃음소리까지도. 그녀의 얼굴이 저절로 달아올랐다. 등골에선 식은땀이 흘렀다.
그런 클로에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던 알폰스가 말했다.
“부인.”
“네?”
“제게 기대십시오.”
클로에는 의아한 얼굴로 알폰스를 올려다보다가, 곧 그가 말하는 대로 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알폰스는 자세를 바꾸어 클로에의 등을 감쌌다. 그는 클로에가 자신에게 완전히 의지하도록 한 뒤, 천천히 그녀를 리드했다.
알폰스는 훌륭한 춤꾼이었다. 그가 클로에의 몸을 받쳐 안아 그녀의 움직임을 조절하자, 클로에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게 추는 걸로 보였다.
클로에의 마음속을 꽉 채우던 부끄러움이 사라지고 자신감이 돌아왔다. 비록 자신의 춤 솜씨가 아니긴 하지만, 나쁘지 않아 보이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충분히 만족했다. 그녀는 목을 꼿꼿이 세운 채 알폰스를 마주 보고 웃었다.
수군거리던 소리나 비웃음 소리 역시 잦아들었다. 클로에는 알폰스의 품에 안겨서, 그와 함께 춤을 추는 것을 즐겼다.
연회는 무르익었고 술에 취한 사람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화장을 고칠 필요성을 느낀 클로에는 알폰스에게 말한 뒤 파우더 룸으로 들어갔다.
파우더룸은 상당히 넓고 깔끔했고, 이미 여러 명의 여자들이 화장을 고치거나 옷매무새를 다듬고 있었다. 특히, 저 맞은편의 넓은 공간은 단체 휴게실 같은 구조로 이루어져 있어 여자들끼리 잡담을 나누는 곳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클로에가 막 화장을 다 고쳤을 즈음이었다.
“어머나, 바텐베르크 부인!”
낯선 목소리였다. 클로에가 돌아본 그곳에는, 그녀를 알아본 여자들 몇 명이 손짓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바텐베르크 부인, 이쪽으로 와요. 함께 이야기 나눠요.”
“그래요, 어서 와서 우리들의 궁금증을 좀 해소해 주세요.”
궁금증이라니? 클로에는 무심코 그쪽을 향해 다가갔다.
휴게실에 모여 있던 그 여자들은 수가 제법 많아 열대여섯 명은 될 것 같았다. 연령대는 약간 높아 보였고 대부분 취기가 얼큰하게 올라 있었다.
클로에가 자리에 끼자, 그녀를 처음 부른 부인이 말했다.
“바텐베르크 부인, 저희는 조금 망측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어요. 온갖 이야기를 듣곤 하지만 역시 제일 궁금한 사람은 따로 있죠.”
망측한 이야기? 왠지 클로에는 자신이 이 자리에 끼면 안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도망치기엔 늦었다. 부인이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어왔다.
“그러니까 저희가 궁금한 것은, 바텐베르크 공작님의 밤일은 어떻냐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