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클로에는 그제야 자신과 남편의 ‘밀크잼 사업’이라는 것에 대한 생각이 달랐음을 눈치챘지만 이제 와서 무를 수는 없었다. 그러기엔 알폰스가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준비해 왔으며, 사실 클로에도 밀크잼 사업의 규모가 조금쯤 커지는 것이 싫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때의 그녀는 몰랐지만, 그것이 ‘조금쯤’ 정도가 아니었다는 것이 훗날 밝혀지게 된다.
어쨌든 그런 연유로 클로에는 알폰스에게 맞추어 진지하게 대화에 임했다.
“규모가 조금 크지 않을까요? 공작님. 제가 그만큼의 분량의 잼을 만들려면 하루 종일 매달려야 할 것 같아요.”
“물론 일꾼을 고용하셔야지요. 부인, 당신은 공작부인입니다. 이 저택의 수많은 사용인들은 당신의 궂은일을 대신하기 위해 존재하는 겁니다.”
클로에는 살짝 무안해졌다. 그녀는 아직도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살았던 습관을 완전히 버리지 못해서, 궂은일을 남 시키지 않고 스스로 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알폰스가 연기를 뱉으며 말했다.
“이 사업을 위해 투자를 받으실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부인. 가문의 잉여 수입만으로도 충분하니까요. 하지만…….”
클로에는 어쩐지 알폰스가 이 말에 강세를 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일전에 한 번 그녀가 경험했다시피, 알폰스는 누군가가 자신의 능력과 부를 의심하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특히 그 상대가 자신의 아내라면 더더욱.
“만일 친교를 위해 투자를 받기를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셔도 좋습니다.”
클로에는 포트넘 부인을 떠올렸고, 알았다고 대답했다.
한편, 알폰스는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클로에와 대화하며 내심 놀라움을 느끼고 있었다.
제국에서 여성은 남성에 비해 교육의 기회가 적다. 일반적으로 귀족 여아에게 권장되는 교육 분야란 미술과 악기 연주, 가창과 무용, 자수 등의 교양에 한정되어 있다. 그 외에는 기껏해야 귀족가의 안주인이 되었을 때에 필요할 약간의 산수와 회계를 배우는 정도다.
사회학과 경영, 경제 등의 실용적 분야는 제국의 여성에게 권장되지 않았다. 여성이 그런 것을 배우면 ‘드세진다’는 미신 때문이었다.
어쨌든 그런 고로 알폰스는 클로에에게 사업화의 진행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그녀가 관련 분야에 전혀 문외한일 것을 상정하고 그녀를 위한 적절한 설명을 준비해 두었다.
그러나 그의 예상을 뛰어넘는 일이 일어났다.
‘이런 부분까지 알고 있단 말인가.’
놀랍게도 클로에는 사업에 대한 기반 지식이 충분했다. 알폰스가 말을 하면, 별다른 부연 설명 없이도 물 흐르듯 이해했고, 심지어는 그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기도 했다. 이는 단순히 지식을 외우고 있을 뿐만 아니라 완전히 이해하고 응용할 줄 안다는 의미였다.
또한, 바텐베르크의 주인으로서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인 알폰스의 유일한 허점을 그녀는 풍부히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창의력이었다. 반짝이는 발상과 살아 숨 쉬는 아이디어는 그가 유일하게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었는데, 대신 클로에가 그것을 해냈다.
알폰스는 클로에를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눈앞의 여자는 그의 아내이기도 했지만, 그와 함께 거의 완벽한 동업자이기도 했다.
물론 관련된 지식이야 이전의 삶에서 다년간 회사의 온갖 일을 맡아서 했던 클로에에게는 당연한 것이었지만 그것을 알폰스가 알 턱이 없었다.
게다가 클로에는 알폰스와 사업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았다. 회사에서와는 달리, 자신이 어떤 의견을 내고 어떤 질문을 하더라도 알폰스는 비웃거나 무시하지 않고 들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이건 즐거운 경험이었다.
당장 필요한 논의를 마친 뒤 클로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폰스 역시 그녀를 배웅하러 따라 일어섰다.
“수고하셨습니다. 침실로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클로에가 웃으며 솔직하게 말했다.
“오늘 대화 나눈 시간, 정말 즐거웠어요.”
알폰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오늘 클로에와 대화하며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 대화라면 저녁 식사를 할 때까지 끝도 없이 해도 괜찮겠다 싶었다. 또한, 그녀와 의견이나 사업관이 착착 들어맞을 때마다 가슴속 어딘가가 찌릿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알폰스는 그것이 클로에와 대화하며 즐거움을 느낀 것이고, 마음이 맞을 때마다 찌릿했던 것은 희열이었다는 것을 결국 깨닫지 못했다.
마침내 그들은 클로에의 침실에 도착했다. 클로에는 침대에 털썩 앉아 알폰스를 올려다보았다. 알폰스가 그녀에게 목례했다.
“그럼 저는 이만…….”
“잠시 앉았다 가실래요?”
재미있는 대화를 나누어 클로에는 지금 꽤 즐거웠다. 이 여운을 그와 조금 더 즐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알폰스의 반응이 이상했다. 평소 결정이 빠른 그였는데, 이번에는 좋다 싫다 대답을 하지 않고 특유의 그 무표정한 눈으로 그냥 그녀를 빤히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거절에 가깝다고 생각한 클로에는 무안한 얼굴로 말했다.
“혹시 바쁘시다면…….”
“아니요, 바쁘지 않습니다.”
알폰스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잠시 앉았다 가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뒤 그는 클로에의 옆에 털썩 앉았다.
그들은 나란히 앉은 채 약간의 잡담을 나누었다. 매일 저녁 식사 후에 차 한 잔을 함께하게 된 그들은 이제 사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제법 어색하지 않게 할 수 있었다.
클로에는 그것이 너무나 뿌듯했다. 저 로봇 같은 공작과 이만큼이나 친해지다니! 가히 인간 승리가 아닌가!
좋든 싫든 한 지붕 아래에서 함께 살 사람이라면 친해지는 편이 좋다는 게 그녀의 지론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는 열심히 다음 화제를 궁리했다. 유감스럽게도 알폰스는 수다스러운 편이 아니어서 계속해서 대화를 하기 위해 더 노력하는 쪽은 클로에였다.
한편 알폰스는 재잘거리는 클로에를 빤히 보았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관찰을 하고 있다고 보는 게 맞았다.
‘표정이 꽤 풍부하군.’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면 웃고 화나는 이야기를 하면 찡그리는 클로에를 보면서 알폰스가 느낀 감상이었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얼마 전에만 해도 그녀의 표정은 극히 한정되어 있었다. 입꼬리를 축 늘어뜨린 채 우울한 얼굴로 나다니던 그녀에게 감정이라곤 공포와 억울함 정도뿐인 것 같았다.
‘그것이 나보단 나을지도 모르지.’
지금의 알폰스에게는 그런 감정마저도 없으므로.
그런 생각을 한 알폰스는 다시 눈앞의 클로에에게 집중했다. 그녀는 또 무언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지 까르르 웃고 있었다.
그때였다. 알폰스는 문득 궁금증이 들었다.
그녀의 다른 얼굴은 어떨까? 클로에가 평소 잘 짓지 않는 표정을 보고 싶었다.
“부인.”
“네?”
알폰스의 속셈을 모르고 순진한 반응을 보인 클로에는 곧 자기 몸이 조심스레 눌려 뒤로 넘어가는 것을 느꼈다.
“아?”
그리고 다음 순간, 상황을 인식했을 때는 이미 자신이…….
알폰스의 몸에 감싸여 있게 된 뒤였다.
클로에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자신은 침대에 눕혀져 있고 알폰스는 팔로 자신의 몸을 받친 채 그녀를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큰 손이 자신의 어깨를 누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자세도 이상한데 하필 위치가 침대라서 더더욱 위험해 보였다.
클로에는 지금 이 상황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당황스러웠다. 반면 그녀의 코끝에서 7cm도 떨어져 있지 않은 것 같은 알폰스의 얼굴은 얄미울 정도로 무표정했다.
그 얼굴은 정말 감탄할 정도로 잘생겼지만 극도로 당황한 지금의 클로에에겐 그의 미모 같은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음……. 고, 고, 공작님?”
그녀가 용기를 내어 내뱉었다.
그러는 동안 알폰스는 그녀의 붉어졌다 파래졌다 하는 얼굴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역시 표정이 많이 풍부해졌어.’
그는 무심코 클로에의 뺨에 손가락을 대었다. 손가락이 닿는 순간 클로에가 눈을 질끈 감았다.
알폰스의 손가락이 그대로 곡선을 그리며 그녀의 보드라운 뺨을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의 손가락이 클로에의 입술에 닿았다. 피부가 얇고 민감한 부위에 무언가가 닿자 클로에의 긴장한 몸이 흠칫 떨렸다.
‘일일이 반응하는 것은 힘들지 않나.’
알폰스는 자신의 손가락 움직임 하나하나에 일일이 반응하는 클로에가 퍽 신기해 보였다.
그러고 보면 이런 반응 역시 과거와는 다른 점이 있었다. 아내인 클로에를 만지고, 입 맞추고, 안을 때에 그녀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공포에 얼어붙어 어떠한 반응도 보여 주지 못하는 것. 그것이 그녀의 반응이었다.
겁먹은 얼굴로 나무토막처럼 굳어 있는 그녀를 안는 것은 여자를 안는다기보단 시체를 안는 것에 가까웠다. 그래, 차라리 그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의무적인 관계, 즐거움을 느껴 한쪽이 어느 한쪽에 집착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런 게 낫다.
그렇게 생각했던 알폰스였다.
그랬던 그는, 클로에의 말랑말랑한 입술을 조금 더 만지다가 정말로 낯선 기분을 느꼈다.
얼굴을 붉히고 자신의 손길대로 움찔거리는 그녀가 제법 귀엽게 느껴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클로에의 얼굴에 좀 더 가까이 대었다.
클로에는 대놓고 긴장했다.
‘온다……!’
눈을 질끈 감은 상태였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정도는 기척으로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잔뜩 굳은 채로 올 것(?)을 기다렸다.
……그러나 올 것은 오지 않았다. 클로에는 참을성 없이 조심스레 눈을 떴다.
알폰스는 여전히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클로에를 지켜보며 그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굽이굽이 굴곡이 있는 그녀의 긴 밤색 머리카락.
알폰스는 순간 강한 충동을 느꼈다. 그러고는 평소라면 하지 않을 짓을 했다. 클로에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감아올려 입 맞춘 것이다. 그녀의 눈을 바라보면서.
클로에는 자신의 머리카락이 알폰스의 긴 손가락에 딸려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머리카락에 입 맞추는 것 역시도.
그녀는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뜨겁던 얼굴이 더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때였다.
침실 문이 열리며 그 틈으로 클로에의 전속 하녀 중 한 명이 들어왔다.
“마님, 실례하겠습…… 에구머니나!”
하녀가 기겁했다. 침대 위에 눕혀진 클로에와 그녀의 위에 있는 알폰스를 보고 무언가 오해를 한 것이 분명했다.
자신이 공작 부부의 뜨거운 사생활(?)을 방해하다니, 당장이라도 목이 날아갈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듯한 하녀는 마구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했다.
“죄, 죄송합니다! 문을 두드려도 대답이 없으시기에 출타하신 줄 알고……. 정말 죄송합니다!”
하녀는 허리를 폴더폰처럼 접으며 뒷걸음질로 방을 빠져나가는 묘기를 선보이더니 문을 닫았다.
순간 적막이 흘렀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클로에는 알폰스를 조심스레 밀어내며 말했다.
“고, 공작님. 이거 놓아주세요.”
강제로 뭘 할 생각은 아니었던 건지 알폰스는 그 한마디에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사실 자신의 원 목적은 충분히 달성하기도 했고.
클로에는 그제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 그녀가 일어나 앉았다. 알폰스는 벽시계를 돌아보며 말했다.
“석찬 시간이로군요. 지금 내려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함께 가시겠습니까?”
“음, 아니요. 전 옷매무새와 화장을 좀 고쳐야겠어요. 먼저 가 계시면 저도 따라갈게요.”
클로에는 알폰스를 돌아보고 있지 않았지만 그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옷매무새와 화장을 확인하는 걸까?
알폰스가 꽤 오래 클로에를 보다가, 짧게 말했다.
“그러시다면.”
알폰스는 간단한 목례를 하고 먼저 클로에의 침실에서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클로에는 꾹 참고 있던 한숨을 토해 냈다.
“푸하. 정말, 왜 이러는 거지?”
클로에는 자기 가슴의 심장이 있는 부위를 손바닥으로 꾸욱 눌렀다. 그러나 심장은 그런다고 잠잠해지긴커녕 여전히 강하게 펄떡댈 뿐이었다.
결국 그녀는 심장이 원상태를 회복할 때까지 방에 머물러 있기로 마음을 먹었다. 아까는 이 소리를 상대에게 들키는 줄만 알았으니까.
클로에는 아까 알폰스가 했던 행동을 생각했다. 그가 자신의 눈을 보며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었을 때, 왜 그렇게 감전당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을까?
그때의 알폰스의 성적인 매력이 있는 무표정과 뇌쇄적인 붉은 눈빛을 떠올리던 클로에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 사람은 대체 왜 그런 걸까?’
클로에는 생각했다. 난데없이 사람을 깔아 눕히고 머리카락에 입 맞추다니 여간 별스러운 짓이 아니다. 그가 원래 천방지축이라거나 망나니 같은 사람이었다면 차라리 이해가 더 쉬울 텐데, 그는 심장이 납으로 된 것만 같은 사람이 아니던가.
클로에의 모든 기억을 그대로 이어받은 그녀는 알폰스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의 아내인 클로에를 대하면서도 부부간에 필요한 최소한의 접촉을 제외한다면 피하려 들었던 그 사람. 어쩌다 접촉을 하게 되어도 명령어대로 수행하는 로봇처럼 오로지 의무에 의한 행위임을 숨기지 않았던 그 사람.
그래, 그 사람은 클로에와 그렇게 13개월을 살아왔거늘. 오늘은 왜 갑자기 이런 돌발 행동을 보였는지 클로에로서는 짐작도 가지 않았다.
심장이 여전히 쿵쿵거렸다. 이상의 의문에 대해 잠시 고민하던 클로에는, 이렇게 툭 내뱉음으로써 자신의 결론을 표현했다.
“이상한 사람.”
* * *
“사업을 하신다고요? 마님과요?!”
기겁하는 키엘을 향한 알폰스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가 말했다.
“안 될 이유라도 있나?”
“아, 아니요…….”
키엘이 바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그것이 그가 완벽히 납득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알폰스가 여자와 사업을 하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기본적으로 여성들은 사업가가 되기에 적절한 교육을 받지 못한다. 그렇기에 제국에서 여성이 사업을 하는 경우는 남편 등 남자 가족의 사업을 도와주는 정도이거나 드레스 디자이너 등 극히 일부 직종에 한정되었다.
게다가 그 동업자가 다른 여자도 아니고 클로에라니! 키엘은 아직도 클로에가 공작가에 어마어마한 손해를 낼 뻔한 사건을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키엘은 제 주인의 사람 보는 눈을 자부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가 최근 주최한 다과회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다과회 주최와 사업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키엘은 클로에의 다과회를 주최하는 능력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했으나, 그녀가 좋은 사업가인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었다.
키엘이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알폰스는 서랍에서 서류 뭉치를 꺼냈다. 그가 키엘에게 서류를 넘기며 말했다.
“읽고 정리해라. 그리고 벤자민 거리와 일라이자 거리, 피카딜리 거리, 에어레이트 거리의 상권과 부동산 매물에 대해 조사해 보고하고, 서류 마지막 장의 인물들에게 전부 편지를 보내 연락해.”
방금 알폰스가 말한 사업에 대한 서류인 것 같았다. 키엘은 머지않아 자신에게 일거리 폭탄이 떨어질 것을 예감하며 그것을 받아 들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알폰스가 준 서류를 훑어보던 키엘은 저도 모르게 흠칫 놀랐다.
‘이게 마님께서 하신 일이란 말이야?’
서류에는 알폰스와 클로에, 두 사람이 지금껏 진행하고 구체화해 온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그들의 의견과 생각, 지식, 그 모든 것들이.
클로에가 쓴 제안서를 읽으며 키엘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마님은 대체 이런 것을 어떻게……?!’
다과회 준비까지는 그러려니 했다. 귀부인들이 해야 하며, 할 수 있는 일 중의 하나였으니까.
그러나 이 서류에 적혀 있는 것들은 그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것들의 연속이었다. 클로에는 사업에 대해 어지간한 남자 뺨치도록 잘 알고 있을뿐더러, 능력 역시 뛰어났다.
심지어 그녀의 능력과 의견은 알폰스와 상호 보완적이기에 두 사람은 훌륭한 협업을 이루고 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놀라움과 충격을 느낀 키엘은 잠시 서류에서 눈을 떼었다. 저 멀리 창밖을 내다보며 그는 과거에 있었던 일에 대해 생각했다.
“저 하녀가 그러는 것을 똑똑히 보았어요!”
“무……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마님께 오해가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 전 그냥 부엌 하녀일 뿐인걸요.”
키엘은 귀찮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주인마님과 어떤 하녀의 설전을 지켜보았다.
키엘은 바보가 아니었다. 이번 일의 책임자가 부엌 하녀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클로에가 자신의 실수를 아무나 붙잡고 떠넘기려 한다는 것도.
하지만 진실을 밝히는 것은 정신적으로도 피곤하고 시간도 많이 들여야 하는 힘든 일이다. 그 상대가 자신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애초에 주인마님을 혼내거나 추궁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어차피 어떻게 되든 손해를 만회하긴 글렀다. 이 일의 책임자가 누가 되든 키엘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솔직히 말해 키엘은 이 일이 쉽게 끝나기를 바랐다. 필요하지 않은 일을 구태여 하는 것은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잘못을 뒤집어쓴 하녀의 억울함이나 뭐 그런 건 알 바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마음속으로 하녀를 위한 심심한 애도를 건넨 뒤 툭 내뱉었다.
“하녀장. 저 하녀를 끌고 가 벌을 주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집사님.”
“마, 마, 마, 마님! 억울합니다! 제가 한 게 아니에요! 제가 한 게…….”
끌려가는 하녀를 흘끗 본 뒤 키엘은 클로에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자신이 책임을 지기 싫어 남에게 그 죄를 떠넘긴 사람의 표정이 궁금했다.
클로에는…… 떨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 얼굴에 하녀에 대한 미안함 같은 것은 묻어나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이 책임을 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뿐이군.’
키엘은 속으로 조소했다. 무능하면 비겁하지나 말든가. 이래서야 얼굴 빼곤 보잘것없는 최악의 여자가 아닌가. 그 한없는 멍청함과 이기심에 구역질이 나올 정도였다.
‘뭐, 이기적인 것은 나도 마찬가지지만.’
그는 이런 것에 동질감을 느끼는 부류의 인간이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동족 혐오를 느끼는 부류다.
키엘이 무감정하게 말했다.
“벌은…… 회초리 60대 정도면 충분할 것 같네요.”
존경할 가치가 있는 사람만을 존경한다는 것이 키엘의 좌우명이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존경할 가치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예시는 너무나도 명확했다. 전자는 알폰스. 후자는 클로에.
바텐베르크의 집사라는 직업의식은 있었기에 그는 안주인을 존중하고 존경하려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그러나 어떻게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그의 마음속 ‘존경할 만한 사람’ 울타리 안에 안주인을 억지로 쑤셔 넣으려고 해 보아도 그녀는 어김없이 튕겨져 나가고 만다. 결국 그는 클로에를 존경하는 것을 포기했다.
뭐, 겉으로만 잘 대해 주면 그의 직업으로서의 사명은 완료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녀들과 하인들이 클로에의 지시를 잘 듣지 않고, 그러긴커녕 그녀를 괴롭히거나 뒤에서 비웃는다는 사실 역시 키엘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일부러 방치했다. 멍청하고, 게으르며, 심지어 비겁하기까지 한 안주인이 하수인들에게 놀림당하는 것은 그가 생각하기에 자업자득이었다.
다만 키엘은 그러한 괴롭힘에 가담하지 않았다. 클로에에게 딱 사무적인 정도로만 잘해 줬으며 평소 습관대로 그녀에게도 생글생글 웃어 주었다. 그 때문인지 클로에는 (엘리라는 마음 약한 빨래 하녀에게 그러듯) 자신에게도 매달렸지만 그는 그저 진심 없는 대응만을 했을 뿐이었다.
그랬었는데.
언제부턴가 마님이 달라졌다. 그렇게나 소심하던 그녀는 이제 사람의 눈을 직시하며 또박또박 말하게 되었고, 멍청하고 아무것도 할 줄 모르던 그녀는 어떤 귀부인 못지않게 뛰어난 실력으로 맡은 일을 해냈을 뿐만 아니라 차를 정말 맛있게 우렸다.
게다가 다른 하녀를 자기 실수의 희생양으로 만들 정도로 이기적이었던 그녀가, 이제는 누구에게나 진심 어린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따뜻한 마음을 베풀었다. 클로에가 기사들에게 찻잎을 나누어 주고, 부엌 하녀들에게 시원한 차를 만들어 주었다는 풍문은 키엘의 귀까지 들어왔다.
다시 읽던 서류로 시선을 돌리며, 키엘은 생각했다.
‘마님은 정말로 달라지신 걸까.’
뭐, 두고 보면 알 일이었다.
* * *
상황이 예상치 못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공작가의 안주인, 다른 사람도 아닌 그 클로에 바텐베르크가 사업에 참여한다는 특급 뉴스는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요즘 사용인들은 모이기만 하면 전부 그 이야기를 하느라 바빴다.
“마님께서 사업이라고? 정말이야?”
“말도 안 돼!”
“한 달 안에 망하지 않을까?”
“아니야, 의외로 잘하실 수도 있어. 저번 다과회를 떠올려 봐.”
“그 다과회는 아마 집사님이 많이 도와주신 게 아닐까?”
“그럴 리가 없어! 너희 모두 그때 마님이 얼마나 열심히 일하시는지 봤잖아?”
한 청소 하녀가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솔직히 말해 마님이 일을 좀…… 못하셨던 건 사실이지만, 이제 그분은 달라졌어.”
“하긴, 부엌 하녀들이 입을 모아 그렇게 말하더라. 얼마 전에 마님이 부엌 하녀들에게 열심히 일해 줘서 고맙다고 시원한 차를 한 잔씩 주셨다는 거야.”
“뭐? 믿을 수 없어!”
“마님이 나서서 그랬다고?”
“그리고 그건 정말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료였대. 확실히, 마님은 달라진 것 같아. 예전에 비해 유능하고 다정하고 우아해지셨어.”
“내가 보기에도 그래 보여.”
“맞아, 맞아.”
그렇게 사용인들의 대화가 클로에에게 호의적인 방향으로 흐르던 그때였다.
“지금 뭐라고 했지?”
명백한 노기가 서린 날카로운 목소리가 모여 있던 사용인들을 갈라놓았다. 사용인들이 놀란 눈으로 돌아보자, 그곳에는 눈을 부릅뜨고 다가오는 콜린 부인이 있었다.
“코, 콜린 부인!”
사용인들이 급히 예를 취하며 인사했다. 콜린 부인은 분노로 번득이는 눈을 굴리며 말했다.
“누구냐? 대체 누구냐, 감히 제 주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함부로 입에 담는 버릇없는 것들이?”
“…….”
사용인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콜린 부인은 독기가 잔뜩 오른 얼굴로 소리쳤다.
“너희들이냐? 옳아, 너희들이 바로 감히 주인에 대해 함부로 입을 놀린 연놈들이로구나.”
콜린 부인도 엄연한 귀족이거늘 그녀는 자신의 계급과 어울리지 않는 격한 말투로 분개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용인들은 얼굴에서 핏기가 싹 빠져나가 백지장 같았다.
그런데, 겁먹은 와중에도 한 가지 의문이 드는 것이 있었다. 물론 원칙적으로 제 주인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것은 금지된 일인 게 맞다. 그렇지만 여태까지는 시녀장인 콜린 부인이나 하녀장, 시종장 등의 관리급 인사들은 사용인들이 클로에에 대해 흉을 보는 것을 내심 모른 척해 주고 있었다. 일종의 암묵적인 규칙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사용인들도 더 기세가 등등해서 아무 데서나 주인마님에 대해 혀를 놀렸던 것인데……. 오늘의 콜린 부인의 반응은 좀 이상했다. 지금 그녀는 클로에의 이야기에 처음으로 화를 낸 것이었다.
사용인들의 그러한 의문은 곧 뒤따라온 콜린 부인의 말 덕에 풀릴 수 있었다.
“저번에도 언질해 두었거늘 그것을 새까맣게 잊고 감히 마님이 변했다고 이야기해? 정말 믿을 수가 없군. 너희들은 내 말이 말 같지도 않나!”
콜린 부인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사용인들은 움찔 놀랐다. 그랬다. 콜린 부인은 그들이 클로에를 흉보아서 화가 난 것이 아니라, ‘클로에가 변했다’고 말해서 화가 난 것이었다.
“마님에 대해서는 그분을 제일 가까이에서 모셔 온 내가 잘 알아! 13개월이나 모셔 온, 내가 제일 잘 안단 말이야! 너희들이 뭘 안다고 떠들어! 할 말이 있나? 어서 대답해 봐!”
“저, 정말 죄송합니다…….”
하녀 한 명이 고개를 숙이며 사죄했다. 사실 이 하녀는 콜린 부인이 어느 지점에서 화가 난 건지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저 두려운 상황을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의 사죄는 역효과였다.
“꺄악!”
콜린 부인이 그녀의 어깨를 강하게 밀친 것이다. 하녀는 기어코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은 콜린 부인은 연신 씨근거렸다. 그녀가 한층 낮아진 어조로 말했다.
“잘 들어라. 너희의 주인이신 클로에 마님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그대로야. 자기 일도 제대로 못 해 사용인 인사권과 예산 관리권도 빼앗겼고, 사교계에서는 비웃음거리이며, 그분의 남편이시자 공작가의 주인이신 공작 각하께 사랑을 받기는커녕 애물단지 취급을 받는 중이시지.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녀가, 이 상황이 변하는 일은 없을 거다. 알아들었나?”
콜린 부인의 가슴속에 불안감과 공포를 기반으로 한 분노가 끓어올랐다.
안 그래도, 지난번 클로에가 연 다과회가 성황리에 끝났다는 말을 듣고 한껏 예민해져 있던 상태였다. 모든 것을 잃고 추락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요즘 콜린 부인은 잠도 잘 안 오고 밥을 먹어도 소화가 잘 안 될 지경이었다.
마치 불안해하는 자기 자신에게 말하듯이 콜린 부인은 한 음절 한 음절 또박또박 소리쳤다.
“이번에야말로 뇌리에 잘 새겨 놓는 것이 좋을…….”
“정말 죄송합니다, 시녀장님.”
놀랍게도 화난 콜린 부인의 말을 끊는 자가 있었다. 그녀는 부엌 하녀 재클린이었다!
재클린은 멀찍이서 사용인들이 떠드는 것을 관망만 하고 있다가 콜린 부인이 그들에게 화를 내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클로에에 대해 마구잡이로 험담을 하는 것도.
재클린이라고 무섭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애당초 그녀는 한낱 부엌 하녀, 콜린 부인은 귀족 태생의 시녀장이 아닌가. 사실 못 들은 척하고 그냥 가 버려도 아무 문제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럴 수가 없었다.
재클린은 지난번에 부엌 하녀들 중 유일하게 클로에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다. 클로에가 변했는지, 변하지 않았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뒤로도 그녀의 가슴속에 그 일이 앙금처럼 남았다. 감히 건방지게 주인마님께 인사도 드리지 않고 꼿꼿이 서 있었지만 꾸짖지 않고 다정하게 웃어 준 클로에의 미소가 셀로판지처럼 눈앞에 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클로에는 변했을까? 변하지 않았을까. 재클린, 그녀는 자신의 몸에 수많은 매 자국을 남긴 클로에를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생각해야만 할까.
그 답을 바로 오늘 찾은 기분이었다.
“정말 주제넘은 것은 알지만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주인마님은 분명 변하셨습니다.”
“뭐, 뭐라고……?!”
콜린 부인이 입을 떡 벌렸다. 설마하니 고작 부엌 하녀 따위가 자신의 말에 반기를 들 줄은 몰랐던 것이다.
“물론 저는 마님에 대해서 콜린 부인보다 잘 알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최근에 마님을 뵈었던 바로는, 마님께선 과거와 달리 아랫사람들을 생각하고 또 배려하시는 분이 되셨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 것 같습니다.”
“…….”
“마님께선 분명 바뀌고 계시고, 앞으로도 점점 더 좋은 분이 되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시녀장님께서도, 마님의 나쁜 점만 보지 마시고…….”
재클린이 덜덜 떨면서도 말을 이었다.
“마님의 좋은 점을 봐주신다면 분명…….”
그러나 그녀의 말은 끝맺지 못했다. 그녀의 말은,
짜악―
격렬한 파열음을 끝으로 허리가 잘리고 말았다. 콜린 부인이 재클린의 뺨을 때린 것이다.
얼마나 강한 타격이었는지 재클린은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그녀가 멍한 얼굴로 빨갛게 부어오르는 뺨을 감쌌다. 터진 입술에서 피가 흘렀다.
콜린 부인이 씩씩거리며 말했다.
“감히! 네가 감히, 한낱 부엌 하녀 주제에 나를 가르치려 해? 네가 정녕 죽고 싶은 게로구나!”
콜린 부인이 재클린을 거칠게 걷어찼다. 재클린이 비명 같은 신음을 토했다.
“뭐? 마님의 좋은 점? 마님의 좋은 점이라고? 웃기지 마! 너 같은 년은 입을 찢어 버려야…….”
그때였다. 어느 하녀가 불러온 하녀장과 시종장이 다급하게 달려왔다. 그들은 복도가 떠나가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콜린 부인을 뜯어말리며 말했다.
“시녀장님, 진정하세요.”
“이 애들의 처벌은 저희가 맡겠습니다. 그만 고정하세요.”
그제야 콜린 부인은 헉헉거리면서 발길질을 멈추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에는 여전히 번득이는 독기가 서려 있었다.
모여 있는 사용인들의 처우는 시종장이 맡기로 하고, 하녀장은 콜린 부인을 잘 구슬려 어디론가 데려갔다.
한편, 저만치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다.
“봤어?”
“봤어요, 영애.”
“이건 좀 아닌 것 같지?”
“이건 좀 아닌 것 같아요, 영애.”
클로에가 입고 다니는 것만큼 화려하지는 않지만 꽤 고급스러운 드레스를 입고 있는 소녀와 하녀복을 입고 있는 소녀 두 명이 멀찍이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녀복을 입고 있는 소녀 중 한 명이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시, 시녀장님께서 이러실 줄은 몰랐어요…….”
“동문이야, 니나. 나는 시녀장님을 존경하고 언제나 시녀장님의 뜻에 따랐지만 이번 일은 정말 충격이야.”
드레스를 입은 소녀의 이름은 조세핀으로 클로에의 직속 시녀였다. 클로에는 시녀장인 콜린 부인과 일반 시녀인 조세핀, 두 시녀를 데리고 있었다.
하녀복을 입고 있는 소녀 중 한 명인, 클로에의 전속 하녀 마리가 물었다.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영애? 앞으로도 시녀장님의 뜻에 따라도 괜찮은 걸까요?”
마찬가지로 클로에의 전속 하녀인 니나도 말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영애?”
조세핀은 어린 미간에 주름을 만들며 깊게 고민했다. 그녀의 짧은 인생 중 일생일대의 고민이었다.
마침내 그녀가 말했다.
“클로에 마님께서 사업을 하게 되셨다는 것은 다들 알지?”
“네, 영애.”
“그래, 하지만 너희도 이것까진 모를 거야. 사실…… 요즘 공작저 내에 이런 소문이 있어. 집사님이 마님께 곧 예산 관리권을 돌려 드릴 것이라고 하는…….”
“네에?”
마리와 니나가 동시에 깜짝 놀랐다. 예산 관리권! 만일 마님이 그것을 쥐게 된다면 마님의 잃어버린 실권은 상당수 회복되는 셈이었다.
“그…… 그렇다면! 저희는 어쩌죠? 저희, 솔직히 말해서…… 마님께…… 잘 못해 드렸잖아요?”
마리가 겁먹은 얼굴로 말했다. 부드럽게 에둘러 말하기는 했지만, 자기들이 클로에를 괴롭힌 일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었다.
만일 클로에가 공작부인으로서의 권력을 쥐게 된다면 제일 위험해지는 것은 그녀에게 진 죄가 제일 많은 자신들이었다.
마리의 곁에 있던 니나가 우울한 얼굴로 말했다.
“어쩔 수 없지요. 우리는 마님께 너무나 불손했고 많은 잘못을 했어요……. 마님이 제게 어떠한 벌을 내리신대도 저는 이해해요.”
니나, 그녀는 사실 자신의 주인인 마님을 괴롭히는 것이 꺼림칙하고 두려웠다. 그래서 그녀는 콜린 부인과 조세핀, 마리가 클로에를 괴롭힐 때마다 그것을 방관했다. 혹은 윗사람들의 지시에 의해 억지로 클로에를 괴롭히는 일에 동참하기도 했다.
비록 자신의 의지로 클로에에게 잘못을 저지른 것은 아니지만 니나는 방관했던 일을 포함하여 그 모든 일들이 마음속에 죄책감으로 남아 있었다.
마리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얘 또 착한 척하는 것 좀 봐. 네가 그런다고 마님이 널 가엾게 여기시진 않을걸?”
“…….”
마리는 자신이 클로에에게 몹쓸 짓들을 했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보다는 그로 인해 공작부인에게서 앙갚음이 돌아올 것을 더 겁냈다.
그리고 그것은 조세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부르르 떨었다. 사실 콜린 부인을 제외하면 클로에를 제일 많이 괴롭히거나 놀려먹은 사람은 그녀였다.
조세핀 역시 최근 클로에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 원래의 클로에는 자신들이 괴롭히면 괴롭힐수록 더 비굴하게 굴었다. 그러나 지금의 클로에는 어쩐지 이전과는 다른 박력이 있었다. 자신들이 조금이라도 아랫사람답지 않은 행동을 하면 바로 날카롭게 지적하거나 호통을 치곤 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전의 클로에는 자신들에게 괴롭힘당하면서도 자신들에게 인정받고 싶고, 잘 지내고 싶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조세핀 자신이 보기에도 안쓰러울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의 클로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자신들 따위는 이빨 빠진 찻잔만도 못하다는 듯이 대했다. 실제로 굳이 자신들에게 매달리지 않아도 될 만큼 친해진 사람들이 늘어난 것 같기도 하고.
조세핀은 클로에의 그런 태도가, 변화가 무서웠다. 그녀가 만일 공작부인으로서의 권력을 전부 회복한다면, 조세핀과 그 무리들은 이빨 빠진 찻잔처럼 치워져 버릴 것이다.
결코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조세핀은 침을 꿀꺽 삼켰다. 오로지 줄타기를 잘해서 작위를 받고 현재의 지위에 오른 그녀의 아버지, 랜들 준남작의 가르침에 따르면 인생은 바로 라인(Line)이었다.
쉽게 말해 줄을 잘 서야 한다, 이 말이다.
결정을 내린 조세핀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마님께 용서를 구하러 가자. 마님은 아랫사람에게 상냥하시다고 하니까, 분명 받아 주실 거야.”
“네? 지, 진심이세요?”
마리와 니나가 동시에 그녀를 돌아보았다. 조세핀이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는 이제 줄을 옮겨 탈 때가 되었어.”
“주…… 줄이라고요?”
마리와 니나는 조세핀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알아들은 척했다.
어쨌든 그리하여 조세핀과 마리, 니나는 클로에에게 사죄를 드리러 가기로 결정을 내렸다.
* * *
클로에가 침실에서 혼자 책을 읽고 있는데, 누군가가 노크를 했다. 그녀의 허락에 들어온 사람들은…….
“조세핀, 마리, 니나. 어쩐 일이니?”
클로에는 책을 덮지 않고 말했다. 그녀의 말투와 표정은 엘리나 포트넘 부인에게 보여 주던 것과는 완전히 딴판으로 냉랭했다.
조세핀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는 단정히 손을 모으고 앞장서서 말했다.
“마님께 사죄를 드리러 왔습니다.”
“사죄?”
“네.”
조세핀과 마리와 니나가 함께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동안 마님께 보여 드렸던 불손하고 비열한 태도에 대해 가슴 깊이 사죄드립니다. 만일 저희에게 단 한 번의 자비를 베풀어 주신다면 앞으로는 진실로 온 몸과 마음을 바쳐 마님을 보필하겠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세요.”
조세핀과 마리가 말했다.
니나는 잠시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뒤늦게 이렇게 말했다.
“마님, 저는…… 용서해 주시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마님께 죽어 마땅한 죄를 저질렀습니다. 한없이 죄송하고 이 죄는 죽어서도 채 갚을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듣고 조세핀과 마리는 기가 찼다.
‘쟤는 왜 저러는 거야?’
‘쟤가 저러면 우린 뭐가 돼?’
그러나 차마 이 자리에서 이런 말을 입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었기에 그들은 고개 숙인 채 입을 꼭 다물었다.
클로에는 그러는 조세핀과 마리, 니나를 차가운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직속 시녀들과 하녀들은 자신들의 위치를 악용하여 이전의 클로에를 다양한 방법으로 괴롭혔다. 비록 이전의 클로에와 지금의 클로에는 다른 사람일지언정, 클로에는 그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들을 통째로 해고한 뒤 새로운 사람을 뽑고 싶었지만…… 지금의 그녀는 그런 일조차 할 수 없었다. 사용인 인사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들을 곁에 두는 것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 어차피 해고를 할 수는 없다면 이들을 최대한 내게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이용하도록 하자. 적어도 정식으로 사과를 해 오는 것을 보니 이제부터는 내 말에 따를 의지는 있는 모양이지.’
클로에는 그들을 용서하는 것을 보류하되, 그들이 어떻게 하는지를 두고 보기로 마음먹었다.
“온 몸과 마음으로 나를 따르겠다고 했나?”
클로에의 말에 조세핀과 마리의 얼굴이 불이라도 켠 듯 밝아졌다.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물론입니다, 마님!”
“그래, 그렇다면 너희에게 시킬 일이 있다.”
“무엇이든 말씀만 내려 주세요!”
그러나 두고 보겠다는 것이 그들에게 아무런 벌도 내리지 않겠다는 뜻은 아니다.
“너희들이 내게 저지른 잘못을 말해 보아라.”
“네?”
뜻밖의 지시에 놀란 조세핀과 마리는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니나는 클로에의 의도를 깨달은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클로에는 냉랭한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하나도 빼놓지 않고, 전부.”
가해한 이는 기억하지 못해도, 당한 자는 모든 것을 기억하기 마련이라, 클로에가 갖고 있는 이전의 클로에의 기억 속에는 이들의 모든 괴롭힘이 하나도 빠짐없이 들어 있었다.
클로에는 자신이 모든 것을 기억하는 것처럼, 이들 역시 기억하는지 궁금했다. 아니, 기억하지 못한다면 떠오르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그리고 과거의 죄 하나하나를 곱씹으며 후회하길 바랐다.
그 날, 세 사람은 무릎 꿇은 자세 그대로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들을 하나하나 전부 말해야만 했다. 만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반성하는 마음이 부족하다며 기억날 때까지 그대로 앉혀 두었다.
결과적으로, 세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말하는 데에 걸린 시간은 제각기 달랐지만 제일 오래 걸린 사람의 경우 이틀하고도 6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이런 와중에도 콜린 부인만은 사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클로에는 눈치챘다. 그녀는 콜린 부인을 예의 주시하기 시작했다.
한편, 조세핀과 마리, 니나가 클로에에게 사죄를 드린 것을 (그리고 벌을 받은 것을) 콜린 부인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들이 클로에의 발밑에 무릎 꿇고 자신들의 잘못을 하나하나 고할 때 콜린 부인은 벽 뒤에서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용서를 구하는 시녀와 하녀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콜린 부인이 부득 이를 갈았다. 그녀의 꽉 쥔 손이 가늘게 떨렸다.
직속 시녀와 하녀들도 결국 자신이 아닌 클로에를 선택했다. 자신의 입지는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었다.
클로에, 그녀가 자신의 자리와 권력을 전부 빼앗아 가려고 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자신이 추락하는 것은 명백해 보였다. 감히 공작부인에게 반기를 들고 모욕을 준 백작부인으로서 자신은 구제할 수 없는 구렁텅이로 굴러떨어질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된다. 그럴 수는 없었다.
콜린 부인은 요즘 갑자기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는 클로에에 대한 평판을 생각했다.
결국 모든 것은 남들이 클로에를 대하는 방식의 문제, 즉 그녀에 대한 평판의 문제다.
그러니까, 콜린 부인 자신이 그녀의 평판을 깎아내린다면 어떨까? 모든 이들에게 클로에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으며, 그녀가 여전히 구제 불능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증명한다면 모든 것은 원래대로 돌아갈 것이다.
그래, 그럴 것이다. 오로지 그것만이 자신이 살 수 있는 길이다. 콜린 부인은 이를 악물었다.
비열하고 야비한 음모가 바텐베르크 공작저의 어딘가에서 똬리를 틀기 시작했다.
* * *
클로에가 다과회를 무사히 주최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보다 훨씬 고차원인 사업과 관련된 일까지 해내고 있는 것을 본 키엘은 더 이상 예산 관리권을 자신이 가지고 있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사실 그의 입장에선 안 그래도 일이 많은데 안주인의 업무까지 떠맡는 것은 그리 반갑지 않았다. 클로에가 평균 이상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가정하에 그녀가 그녀의 본래 일을 가져가 주는 것은 키엘의 입장에서도 쌍수 들고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지금 당장 예산 관리권을 턱 하고 내어주기에는 또 마음이 걸렸다. 그만큼이나 예산 관리권은 중요한 업무였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키엘이 내린 결론은, 클로에를 시험해 보자는 거였다. 그녀가 과연 예산을 잘 관리할 수 있는 사람인지에 대하여.
“마님, 혹시 바쁘신가요? 몹시 송구스럽지만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는데요.”
“무슨 일인가요, 키엘?”
점심을 먹은 뒤 후식으로 나온 오페라 케이크를 맛보고 있던 도중이었다. 클로에는 호의적인 시선으로 집사 키엘을 돌아보았다.
“지난 한 해 동안의 예산안과 결산 보고서를 보여 드릴게요. 혹시 괜찮으시다면, 이번 해 하반기 동안의 예산안을 작성해 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예산안을 짤 때에 참고할 것이 필요해서요.”
이런저런 구실을 붙여놓긴 했지만 키엘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클로에는 그가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 것인지 대강 감을 잡았다. 그야 사회에서 몇 년 구른 경험이 있는 그녀가 눈치를 못 채기도 힘든 사안이었다.
키엘은 지금 자신에게 예산 관리권을 돌려줄 밑밥을 깔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클로에, 그녀가 두 손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부탁을 한다는 것은 아마 일종의 시험일 것이다. 클로에 자신이 공작저 내의 예산을 훌륭히 관리할 만한 재목이 되는지에 대한 시험.
하지만 솔직히 말해 클로에는 별로 두렵지 않았다. 그녀는 몇 년간의 사회 경험이 있고, 특히 담당 부서가 회계였던 만큼 관련 업무에 특별한 자신이 있었다.
어딜 보나, 그녀가 거절을 한다면 이상할 상황이었다.
“물론이죠! 얼마든지요.”
클로에는 키엘의 시험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녀는 이번에야말로 최선을 다해서, 기필코 예산 관리권을 되찾고 타인에게 얕보이지 않는 공작부인이 되리라고 다짐했다.
그리하여 클로에는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우선 첫 번째로는 올해 하반기 동안의 예산안을 가상으로 작성하기.
작년 한 해 동안의 예산안과 결산 보고서만 읽어 보아도 클로에는 이 공작저 내부의 경제활동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강 알 수 있었다.
사실 그것을 읽으면서 클로에가 제일 놀랐던 것은 공작저 내의 예산의 규모였다. 공작저의 규모만 보아도 범상치 않다 싶긴 했지만 그것은 새 발의 피에 불과했다.
오로지 수도 내의 공작저에서 도는 예산만 거의 궁전 하나쯤은 굴릴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내심 궁금했던 공작가의 자금줄 역시 간략하게나마 알 수 있었다. 국가와도 맞먹을 정도로 거대한 공작령에서 거둬들이는 세금과 황궁에서 지급하는 봉록도 있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공작가가 소유한 수십 개의 사업과 채권, 투자 자산 등이었다.
알폰스 본인은 물욕이 별로 없는지 이번 대에서 확장하거나 시작한 사업은 없었다. 그 대부분이 그의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다. 그 모든 것들이 오랜 역사와 무수한 유능한 선대의 노력 끝에 지금에 와서는 기반이 깊고 탄탄한 자산이 되었다.
키엘이 준 예산안은 오로지 수도에 위치한 공작저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지만 (세출 기록을 보아하니 공작령에 있다는 공작 성의 규모는 공작저보다도 더한 것 같았다) 그것만으로도 바텐베르크 공작가의 막대한 부를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저택 내의 예산만 해도 이렇다니, 공작가 전체를 도는 자금 규모는 가히 천문학적이겠구나.’
전생의 삶, 즉 서민적인 삶이 아직 더 익숙한 클로에로서는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쨌든, 예산안과 보고서를 전부 읽고 파악한 내용으로 그녀는 가상예산안을 작성하는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한편 키엘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 모든 자료를 읽고 이해하고, 예산안을 작년과 비슷하게라도 써 보려면 적어도 한 달은 걸리시겠지.’
그만큼이나 저택 내 회계 규모가 크고 그 자료의 양 역시 많았던 것이다. 키엘은 클로에가 어떤 결과물을 가져오든 느긋하게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의 예상은 완전히 깨져 버렸다.
“키엘, 여기 제가 짜 본 예산안이에요.”
클로에가 결과물을 가져오는 데에는 고작 2일하고도 7시간, 즉 3일도 채 걸리지 않았던 것이다!
키엘은 경악했다. 클로에 때문에 벌써 몇 번째 경악을 하는 건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는 놀란 마음을 숨기고, 검토해 보겠다며 클로에가 준 예산안을 받아 들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틀 만에 그 모든 자료를 읽고, 예산안을 작성하는 것은 불가능해. 아마 작년 예산안을 그대로 옮겨 적으면서 한두 항목 고치시거나 했겠지.’
그것이 키엘의 생각이었다. 사실 이사나 저택의 대규모 보수 등, 어떤 일이 있지 않고서야 해가 달라진다고 예산의 내용이 크게 바뀌진 않는다. 키엘 역시 어떤 일에 대한 예산안을 짤 때 종종 그런 방법을 사용하곤 했다.
그러나 클로에의 예산안을 찬찬히 읽으면서 키엘의 생각은 달라졌다. 예산안을 넘겨보는 그의 눈에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어렸다.
‘말도 안 돼……! 베끼지 않고 처음부터 새로 쓴 거잖아?’
게다가 제일 놀라운 것은, 클로에 그녀가 자료를 확실히 읽고, 심지어 제대로 이해를 한 상태에서 이것을 작성했다는 사실이었다.
‘어떻게 이 단시간에 그걸 전부 읽고 이해하신 거지? 분명 회계 관련 작업은 일전에 그만두신 뒤로 처음 하시는 것일 텐데?’
고작 저택 내부의 예산만을 정리한 예산안으로 그녀는 공작가 내의 세입과 자금줄을 대부분 파악한 것 같았다.
예산의 분배 역시 두말할 것 없이 훌륭했다. 필요한 만큼의 자금을 적재적소에 배치한 클로에의 예산안은 그동안 예산을 맡겼던 회계 전문가보다도 뛰어난 수완과 효율을 보이기도 했다.
키엘은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느끼며 클로에의 예산안을 내려놓았다. 그는 클로에의 갑자기 만개한 능력이 대체 어디까지인지 경이와 호기심을 동시에 느끼기 시작했다.
다음으로 키엘이 클로에에게 준 것은 그가 임의로 작성한 공작저 정원의 가상 예산안이었다. 그는 그것을 주고 굉장히 모호한 말을 했다.
“이걸 읽어 주시고, 느끼신 점을 말씀해 주세요.”
클로에는 순간 당황했다. 느낀 점이라니? 이게 무슨 소설책이나 영화도 아니고, 자신이 예산안 감상문이라도 써야 한다 이건가?
그러나 그것을 받아 침실에서 찬찬히 읽어 본 클로에는 키엘의 의도를 깨달을 수 있었다.
‘빈틈이 있구나.’
예산안에는 명백히 이상한 지점이 몇 개 있었다. 이런 항목에 이 정도의 예산을? 싶은 부분이나, 심지어 맞아떨어지지 않는 숫자들.
그러한 구멍들이 대놓고 보이지는 않게 감추어져 있지만 명백히 군데군데에 도사리고 있었다. 꼭 공작저의 자산을 횡령하기로 작정한 누군가가 악의를 가지고 작성한 것 같았다.
키엘은 구멍이 뚫려 있는 예산안을 보여 주고, 클로에가 스스로 그 문제점을 알아채길 기대했던 것이다.
클로에는 그 예산안을 적당한 모양새라도 갖추게끔 하나하나 수정한 뒤 키엘에게 가져가 보여 주었다.
키엘은 이번에도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불쾌한 것은 아니고, 즐겁고 경이마저 느껴지는 패배였다.
“마님, 이번에도 정말 훌륭하셨어요. 어떻게 단시간에 이렇게 뛰어난 능력을 가지게 되신 건가요?”
그가 악의 없이 물었다. 그러나 클로에는 진땀을 뺄 수밖에 없었다.
‘내가 회사에서 스파르타식으로 구르며 실전 경험을 쌓는 인생을 살다가 어느 날 눈을 떠 보니 클로에의 몸에 빙의해 있었다.’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키엘은 호기심을 감추지 않고 그 비법을 집요하게 캐물었지만, 클로에는 그저 어색하게 웃어 얼버무릴 뿐이었다.
사실 이쯤 되면 클로에의 능력은 훌륭히 증명이 된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 사실을 시험자인 키엘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클로에에게 지금 당장 예산 관리권을 넘겨주더라도 그녀가 일을 훌륭하게 처리할 것을 확신했다.
그러나…… 과거의 좋지 않은 경험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만큼이나 클로에의 과거의 실수가 어마어마했던 것이다. 그래서 키엘은,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그녀를 시험해 보기로 했다.
이번 시험은 이전과는 달리 실전이었다.
그는 클로에에게 공작저의 부엌에서 쓸 예산을 뚝 잘라 준 뒤, 그것을 5일간 운용해 보게 했다.
이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공작저에는 오랜 시간 동안 거래를 해 온 안정적인 거래처들이 있다. 그리고 이 5일은 달리 큰일이 있는 일정도 아니니 예산은 언제나처럼 똑같이 처리하기만 하면 충분했다.
그래서 키엘은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클로에 역시 부담 없이 그 일을 받아들였다.
클로에는 부엌에 남아 있는 식재료들을 확인한 뒤 발주할 품목을 정리했다.
부엌에서 돌아온 그녀는 기지개를 쭉 켰다. 그리고 자신의 시녀 조세핀을 불렀다.
“조세핀, 내가 부르는 대로 받아 적으렴. 그리고 편지를 봉해서 버클리 식료품점에 보내려무나.”
귀족, 특히 귀족 여성 중에 자기 손으로 편지를 쓰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철필을 사용하다 보면 흐르는 잉크가 손에 묻고 소매가 닳는 편지 쓰기 같은 일은 시녀가 대신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클로에는 조세핀에게 발주할 식재료 목록을 불러 주었다. 조세핀은 그것을 열심히 받아 적은 뒤 공작가의 문장이 새겨진 인장을 찍어 편지를 봉했다.
조세핀은 클로에가 시킨 대로 사람을 불러 그것을 식료품점으로 부쳤다.
“분부대로 하였습니다, 마님.”
“수고했다, 조세핀.”
한편, 클로에의 발주 목록을 받아 든 기별꾼은 말을 달려 공작저를 벗어나 시내로 갔다. 그러나 그가 향하는 곳은 버클리 식료품점이 아니었다. 그는 수도의 한 구획과 다른 구획을 잇는 다리 아래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그를 기다리고 있던 누군가가 있었다.
“말씀하신 것을 가져왔습니다.”
“수고했다. 이건 수고한 것에 대한 대가다.”
기별꾼에게 쩔그럭거리는 금화 주머니가 건네졌다. 주머니를 들여다보는 기별꾼의 입이 거의 귀에 걸릴 정도였다. 그러다가, 그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정말로 제겐 아무런 해도 없는 것이 맞겠지요? 상대가 공작부인이시라 두렵습니다.”
“글쎄, 그렇다고 하지 않았나. 전능하신 유일신 앞에 내 명예를 걸고 맹세하지.”
그제야 기별꾼은 조금 안심한 듯한 기색을 했다.
“그럼 마지막 일을 부탁하지. 이걸 그 식료품상에 가져다주게. 꼭, 공작부인께서 보내셨다고 말해야 하네.”
음험한 목소리가 기별꾼에게 편지 봉투를 넘겼다. 클로에가 조세핀을 통해 부친 것과 정확히 똑같은 모양의 편지였다.
그것을 받아 든 기별꾼은 예를 갖추어 인사하곤,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훌쩍 말에 오르더니 빠르게 그곳을 벗어났다.
기별꾼이 떠난 뒤, 다리 아래의 두꺼운 그림자 속에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콜린 부인이었다.
이후 시간이 흘러, 약속한 5일 중 마지막 날이 되었다.
‘오늘만 잘 넘기면 돼.’
오늘만 잘 넘기고 드디어 내일이면, 클로에는 예산 관리권을 돌려받게 된다. 드디어 그녀가 그렇게도 바라던 ‘평범한’ 공작부인에 한 발짝 다가서는 것이다.
클로에는 혹시나 해서 지난 나흘간 자신이 해 왔던 업무들을 복기해 보았다. 다시 확인해도 딱히 문제는 없었다.
그때였다.
“마님, 마님!”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부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클로에의 허락에 그녀의 침실로 들어온 사람은…….
“마님, 실례하겠습니다! 부엌 하녀 애쉴리입니다.”
“애쉴리, 무슨 일이니?”
그 다급해 보이는 기색에 클로에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애쉴리가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마님께서, 마님께서 버클리에 주문하신 것들이 들어왔어요.”
“그러니? 그런데 그게 왜?”
“그러니까 그게……! 마님, 송구스럽지만 부엌에 오셔서 보아주세요. 이건 직접 보셔야 해요!”
심상치 않음을 느낀 클로에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애쉴리의 인도에 따라 그녀가 부엌으로 내려갔다.
그녀가 얼마 전 버클리에 주문해서 갓 도착한 식자재들은 부엌 창고에 차곡차곡 쌓여 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주변에 부엌 하녀들은 물론, 주방장과 보조 요리사들까지 나와서 웅성거리는 것이 보였다. 클로에가 물었다.
“웬 소란들이니?”
“마님!”
부엌 하녀들이 그녀를 불렀다. 어찌할 줄을 모르는 그녀들을 보며 클로에는 사용인들을 헤치고 나아갔다. 사용인들은 홍해처럼 갈라져 클로에가 지나갈 길을 만들어 주었다.
클로에는 부엌 창고를 들여다보았다.
‘이건……!’
그녀는 자신이 주문한 목록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었다. 몇 번이나 확인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것들은…… 자신이 주문한 것이 아니었다.
공작저의 부엌에서는 조금도 쓸모가 없는 온갖 이상한 재료들이 창고에 쌓이고 있었다. 외국의 온갖 듣도 보도 못한 약초와 고약한 냄새가 나는 뿌리채소 같은 것들.
그나마 공작저에서도 사용하는 양파나 토마토 등의 흔한 재료들은 그 상태가 몹시 나빴다. 반쯤 썩거나 물러 터진 것들이 대부분이라 건져서 쓸 수도 없었다.
“이, 이를 어떻게 하죠, 마님?”
“저런 걸로는 오늘 저녁도 준비할 수 없어요.”
부엌 하녀들이 웅성거렸다.
심각한 얼굴로 창고 안을 들여다보던 클로에가 말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직접 버클리에 가서 확인해 보아야겠구나. 가서 마차를 준비하라고 알리렴.”
오래지 않아 마차가 준비되었다. 클로에는 마차를 타고 버클리 식료품 도소매 상점에 도착했다.
공작부인께서 친히 오셨다는 말에 상점의 주인 매트 버클리가 부리나케 뛰어나왔다. 클로에는 그에게 자신이 이곳까지 오게 된 자초지종을 전했다.
그러나 버클리는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그, 그럴 리가요. 저는 분명 공작마님께서 주문하신 그대로 보내드렸습니다.”
“제가 주문한 그대로인가요?”
“그럼요. 바텐베르크 공작가에서의 주문인데 제가 감히 여부가 있겠습니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은 기색은 아니었다. 잠시 고민하던 클로에가 말했다.
“제가 보낸 그 주문서를 보여 주실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곧 버클리가 클로에가 보냈다는 주문서를 가져와 보여 주었다. 그것을 본 클로에는 깜짝 놀랐다.
‘이건 내가 쓴 것이 아니야.’
그녀가 보낸 주문서는 어디로 가고, 엉뚱한 것들을 잔뜩 적어 놓은 다른 주문서가 거기 있었다.
심지어 더 기가 찬 것은, 주문서에 바텐베르크 공작가를 의미하는 인장까지 찍혀 있다는 것이었다.
‘누군가가 악의적으로 조작했구나.’
그렇게 생각한 클로에가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을 외부인 앞에서 티 낼 수는 없었다. 그녀는 표정을 정돈하고 버클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건 제가 보낸 주문서가 아니에요. 공작가에서는 필요가 없는 물건들이니, 교환해 주실 수 있을까요.”
“예? 하, 하지만…… 구하기 어려운 것들을 주문받아서 일부러 수입해 들여온 것이라, 그걸 환불해 드리면 저희가 너무 큰 손해를 보게 됩니다.”
클로에는 난처해졌다.
일단 이 일은 버클리 쪽의 실책이 아니다. 주문서에는 공작가의 인장까지 찍혀 있으니 그가 의심할 여지는 없었을 것이다.
사실, 아무리 큰 손해를 본다 해도 클로에가 버티고 서서 우기면 버클리로서도 어쩔 수 없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어마어마한 위세의 공작가에서 요구하는데 부호라고는 해도 평민인 그가 뭘 어찌하겠는가.
하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클로에가 너무 모질지 못했다.
‘어떻게 하지? 그렇다고 여기에서 포기해 버리면 나는 예산 관리권을 돌려받지 못하게 될 거야. 부엌 하녀들도 난처해질 거고.’
클로에는 방도를 생각하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 보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녀는 잠시 생각해 보겠다고 한 뒤 머리를 식히기 위해 버클리 식료품점을 가로질러 나갔다.
식료품점이라고는 하지만 버클리는 수도에서 식자재를 취급하는 곳 중 제일 큰 업체였다. 바텐베르크는 물론이고 수도에 거주하는 귀족가나 중산층들, 식당들과도 거래를 하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렇다고 그런 도매(都賣)류의 판매만 하는 것은 아니었고 일반 시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소매업 역시 버클리의 중요한 수입 중 하나였다.
바깥 공기를 쐬러 나간 클로에는 가게의 입구 즈음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치즈가 너무 안 팔려서 큰일이에요. 이대로라면 전부 곰팡이가 피고 말걸요.”
“그러게. 분명 세인트 소피아의 축일에 재고가 전부 나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버터 값이 내려서 치즈가 안 팔릴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
클로에는 저도 모르게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버클리의 점원인 듯한 남자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클로에가 그들에게 다가갔다.
“실례합니다. 재고가 많이 남아 있다는 치즈의 종류가 어떤 것인가요?”
남자들은 웬 귀부인이 자신들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에 당황했다. 공작부인이라는 걸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되도록 예의를 지키려 애쓰며 대답했다.
“고다 치즈입니다, 부인.”
“고다 치즈라면…… 그 둥근 덩어리 모양의 단단한 치즈를 말씀하시는 거로군요?”
“그렇습니다, 부인.”
“고다 치즈의 재고는 어느 정도로 남아 있나요?”
남자들은 잠시 고민한 뒤 대답했다.
“창고 세 개 분량이 남아 있습니다.”
창고 세 개! 엄청나게 많은 분량이었다.
치즈와 버터를 만드는 법을 알아내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었다는 세인트 소피아의 축일에는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모두 유제품을 먹으며 축하하는 풍습이 있다. 이날은 치즈들 중 제일 저렴한 고다 치즈가 서민들 사이에서 흔히 팔린다.
그래서 세인트 소피아의 축일을 대비해 고다 치즈를 많이 들여놓았는데, 하필 그 시기에 이웃 나라의 버터 수출이 늘어 버터의 가격이 뚝 떨어졌다. 덕분에 서민들은 치즈 대신 버터를 사 먹었고, 버클리에는 애꿎은 고다 치즈 재고가 잔뜩 쌓였다는 것이다.
남자 점원들에게서 이러한 설명을 듣고 나니 클로에는 머릿속이 트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의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떠오른 것이다.
그녀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랬군요. 설명해 주어서 고마워요.”
“아닙니다, 부인.”
점원들이 대답했다.
클로에가 다시 버클리 상점으로 들어간 뒤, 점원들이 저들끼리 쑥덕거렸다.
“웃는 얼굴이 아름다운 분이시네요.”
“그러게나 말이다.”
클로에는 버클리를 찾아가 물었다.
“버클리 씨, 가게에 고다 치즈의 재고가 많이 쌓여 있다는데, 사실인가요?”
“그걸 공작부인께서 어떻게 아셨습니까? 이제 슬슬 곰팡이가 필 텐데, 전부 쓰레기로 변하기 전에 헐값으로 팔아 버리려 했습니다.”
“어머, 그렇게 하면 엄청난 손해를 볼 텐데요.”
“그래도 전부 버리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클로에가 생긋 웃었다.
“그렇다면 혹시, 치즈를 제값에 전부 팔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예? 그런 방법이 있단 말입니까?”
“네.”
클로에가 차분히 말했다.
“제가 치즈를 단시간 안에 팔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드릴게요. 홍보비용을 계산해서 제게 주세요.”
“고…… 공작부인께서 그 방법을 알고 계시다고요?”
버클리가 놀라 눈을 부릅떴다.
그는 잠시 고민했다. 아무리 그래도 공작부인씩이나 되는 사람이 농담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사업이나 홍보를 배워 봤을 리 없는 여성이 그 많은 치즈를 팔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고?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 역시 온갖 수단을 동원해 봤지만 재고를 간신히 반 가깝게 줄였을 뿐 전부 없애지는 못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