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장 (3/39)

3장

‘온’에서 들여왔다는 찻잔에는 손잡이가 없었다.

매화 무늬가 그려져 있는, 개완이라고도 부르는 뚜껑 달린 동양식 찻잔을 들여다보며 클로에는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다구가 수입품이다 보니 전부 아주 이국적인 디자인이네. 커피팟과 커피잔은 제국 내에서 최신 유행하는 디자인이었는데…….’

분명 외국에서 들여온 다구들은 그 자체로도 아름다웠지만 원래 어떤 문물이든 새로운 곳에 훌륭하게 정착하려면 어느 정도의 현지화가 필요했다.

어쩌면 그래서 더 다구가 제국에서 유행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에 클로에는 제국에서 유행하는 디자인을 접목시킨 다구를 상상해 보았다.

‘동양식 다구도 좋아하지만, 아무래도 제국인들이 쓰기엔 손잡이가 있는 쪽이 더 편리하겠지. 문양도 좀 더 제국식으로 그려 넣고…….’

그렇게 생각하며 차 창고를 나오는데, 이젠 슬슬 익숙해진 얼굴과 마주쳤다. 집사 키엘이었다.

“마님, 여기에 계셨군요. 이제 곧 오찬 시간입니다.”

“고마워요, 키엘. 늘 수고가 많아요.”

클로에가 생긋 웃어 주었다. 그녀는 키엘의 인도에 따라 식당을 향해 내려갔다.

가는 길에, 키엘은 문득 이렇게 말했다.

“마님도 이제 슬슬 직접 사교모임을 주최해 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제가요?”

갑작스러운 키엘의 제안에 클로에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럼요. 마님의 즐거움과 공작가를 위해서요. 걱정은 마세요. 저와 공작저의 모두가 최선을 다해 도와 드릴 테니까요.”

클로에는 그 말이 일리가 있다고 여겼다. 적절한 사교활동을 통한 가문의 위세 확립은 귀족 부인으로서 중요한 역할이었다. 클로에가 마지막으로 사교모임을 주최한 것이 일 년 전이니만큼 그녀는 이제 슬슬 새로운 모임을 꾸려 볼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다구를 들인 게 바로 얼마 전이니까, 이참에 하면 딱 알맞겠는걸.’

마지막 계단에서 내려서며 클로에가 공손한 태도로 말했다.

“그렇다면 그렇게 해 볼게요. 모쪼록 잘 부탁드려요, 키엘.”

“어휴, 저야 말로요.”

클로에가 식탁에 앉자 키엘은 생글생글 웃으며 인사를 하곤 물러났다. 곧 멋진 점심 만찬이 차려졌다.

그렇게 해서 클로에는 소박한 다과회를 준비하게 되었다. 그녀는 사교모임 주최 경험이 처음이니만큼 귀부인이 열 수 있는 두 가지의 사교모임, 무도회와 다과회 중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고 자신이 있는 다과회를 고른 것이다.

이 일을 가지고 수군덕대는 목소리가 많았다.

“들었어? 마님이 다과회를 여신대.”

“저런, 1년 전에도 된통 망신을 당해 놓고선 또 여신단 말야? 대단도 하지.”

저택의 이곳저곳에서 사용인들이 쑥덕거렸다. 대부분 비웃음이 서려 있는 어조였다. 클로에가 이번 다과회를 잘 해낼 거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시피 했다.

이것은 콜린 부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계집이 다과회를 어떻게 망쳐 놓을지 기대되는걸. 이번엔 또 얼마나 망신을 당할지, 그날이 기다려져.’

얼굴에 음습한 그림자를 두른 채 콜린 부인이 미소 지었다.

클로에가 된 뒤로 처음으로 맡게 된 일감에 클로에는 진지하게 임했다. 처음으로 준비하는 다과회를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초대할 손님의 명단부터 초대장의 준비, 다과회 당일에 내놓을 음료와 요리, 다구와 테이블 세팅, 응접실의 인테리어를 위한 꽃과 장식품 구매 등등 모든 것이 클로에의 일들이었다.

아주 쉽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런 대로는 할 만한 일이었다. 예전의 클로에는 다과회를 준비하기 위해 필요한 능력과 경험이 아무것도 없었지만 지금의 클로에는 달랐다. 오랜 직장 생활 경험이 있었으며, 특히 다른 동료들이 그녀의 업무도 아닌 워크숍 준비나 체육대회 준비 등의 일을 떠넘긴 적이 많아 그녀는 행사 기획 및 준비를 해 본 경험이 여럿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다과회 준비 정도는 즐거운 소일거리였다. 클로에는 지루한 시간을 죽이기 위한 좋은 일거리가 생긴 것에 기뻐하면서 열심히 했다.

과거에 예전의 클로에가 다과회를 엉망으로 망친 일이 있기 때문인지 키엘은 일이 조금 진행되었을 때 자신이 검토해 볼 수 있게 해 주십사 했다. 사교모임을 먼저 권하기는 했지만, 키엘 역시 걱정이 아주 안 되는 건 아니었던 것이다.

이전의 클로에가 일을 어지간히 엉망으로 한 게 아니었기 때문에 클로에는 그러려니 했다. 클로에는 이전에 직장에서 만들었던 방식대로 다과회의 기획서를 예산계획서까지 상세하게 작성해서 키엘에게 넘겼다.

‘너무 설렁설렁한 게 아닐까?’

클로에는 조마조마했다. 직장에서 했던 일들과 다르게 그녀는 이번 일을 즐기고 있었다. 그래선지 일을 열심히 해 놓고서도 왠지 논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윗사람이면서도 그녀는 상사에게 업무 검사를 받는 부하 직원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한편, 키엘은 깜짝 놀랐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거의 경악을 했다고 보는 게 옳았다.

‘기획서를 이렇게 상세하게 쓰셨다고……?! 내가 알던 마님이 맞아?’

자기가 권하긴 했지만, 솔직히 말해 클로에가 이렇게까지 잘 해낼 줄은 몰랐다. 클로에가 작성한 기획서는…… 정말이지 보기 드물 정도로 훌륭했다. 나름 유능하다는 말을 듣고 다니는 키엘조차도 이 정도로 일을 해 본 적은 없을 정도였다.

키엘이 입을 떡 벌리고 기획서를 계속해서 반복해 읽자, 클로에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뭐지? 뭐 문제라도 있는 건가?’

결국 불안함을 견디지 못한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예산을 줄여야 할까요?”

“아아…… 아뇨! 전혀요. 우와, 마님. 정말 굉장하신걸요!”

“네?”

키엘이 진심을 담아 감탄했다.

“저, 마님께서 일을 이렇게 잘하시는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 정말 대단하세요! 지금 이 자리에서 예산 관리권을 돌려 드리고 싶을 정도인데요!”

예전의 클로에가 예산 관리를 하며 큰 실수를 한 뒤로 키엘이 대신 예산을 맡아 관리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클로에가 다른 사용인들에게 무시당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예산 관리권은 권위 있는 공작부인으로서 살기 위해선 꼭 필요한 것이었다. 클로에가 기대감 어린 얼굴로 물었다.

“그럼 주실래요?”

“……에, 으음. 생각해 볼게요.”

역시나. 아무래도 과거의 클로에가 친 사고가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니다 보니 조금 주저되는 모양이었다. 클로에는 살짝 실망했다.

기획서를 돌려주며 키엘이 싱글벙글한 얼굴로 말했다.

“어쨌든, 이대로만 하시면 될 것 같아요. 혹시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불러 주시고요!”

그제야 안심한 클로에의 얼굴에 꽃이 폈다.

한편, 이들의 모습을 지켜본 사용인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뭐지? 마님이 일을 잘하셨다니, 말도 안 돼.’

‘하지만 집사님이 맘에도 없는 칭찬을 할 사람은 아닌데.’

어찌 됐든 공작가의 중요한 세력 중 하나인 집사가 클로에에게 강한 호의를 표현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사용인들은 혼란스러워하기 시작했다.

이후 일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클로에의 뛰어난 능력을 눈앞에서 보게 된 사용인들이 더욱 많아졌다.

사용인들의 혼란은 점점 가중되어 갔지만, 그것이 클로에를 무시하는 사용인들의 태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었다.

* * *

“아휴, 지쳤다.”

몇 시간을 쉬지 않고 일한 클로에는 잠시 쉬겠다며 복도로 나왔다.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마님, 괜찮으세요? 약을 준비해 올까요?”

그녀가 데리고 나온 엘리가 걱정스레 물어왔다. 클로에가 걱정 말라는 듯 웃었다.

“아니, 괜찮아. 지금은 약보다는 차를 한잔하고 싶은걸.”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이 말에 엘리는 내심 가슴이 뛰었다. 기대감을 지우려고 애쓰며 그녀가 물었다.

“차를 드실 건가요? 어떤 차를 드실 거예요?”

기대감을 억누르려고 한 것 같지만 명백히 묻어 나오는 목소리에 클로에가 속으로 쿡쿡 웃었다. 자신의 차를 좋아해 주는 엘리가 고맙고 또 귀여웠다.

“글쎄? 곧 보게 될 거야. 기대해도 좋아.”

그들은 필요한 찻잎을 챙겨 부엌으로 내려갔다.

클로에는 이제 제법 능숙하게 다구를 찾아내어 차를 우릴 준비를 했다. 그녀는 부엌 하녀에게 우유를 가져와 달라고 부탁했다. 오래지 않아 신선하고 진한 우유가 준비되었다.

엘리는 그녀가 하는 일을 호기심 넘치는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클로에가 설명했다.

“지금부터 홍차에 우유를 넣을 거야.”

“네에? 홍차에 우유를요?”

엘리는 깜짝 놀란 것 같았다.

클로에는 평소 먹던 분량의 두 배의 찻잎에 3분의 1 정도의 뜨거운 물을 부었다. 이제부터는 충분히 우러나도록 5~6분 정도를 기다려야 한다.

“저, 그, 그렇지만 마님……. 홍차에 우유를 넣어 먹는 건 좀……. 그게 정말로 맛있어요?”

엘리의 반응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홍차에 우유를 넣어 먹는다는 개념이 없는 동네라면, 홍차에 우유를 넣는다는 이야기는 보리차에 우유를 넣는 정도의 괴식으로밖에 들리지 않을 것이다.

클로에는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신, 충분히 우러나 수색이 짙은 갈색이 된 차를 스트레이너로 거른 뒤, 따뜻하게 데운 우유를 부으며 웃었다.

“그래서 안 마실 거니?”

“그게…….”

엘리가 멈칫했다. 홍차에서 풍겨 나오는 향기를 맡은 것이 분명했다.

오늘 클로에가 우려낸 차는 캐러멜과 초콜릿 가향 차였다. 다디단 캐러멜과 초콜릿의 향이 온기를 담은 채 부엌을 가득 채웠다.

‘아쌈 같은 진득한 베이스 홍차에 향긋한 디저트 가향은 밀크티에 최고로 잘 어울리지.’

클로에는 흐뭇한 기분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지친 피로를 풀 때에는 따뜻하고 달콤한 밀크티가 최고야.’

클로에는 티팟에 설탕을 충분히 넣어 저은 뒤, 찻잔과 티팟을 트레이에 얹어 응접실로 가지고 갔다. 트레이를 옮기는 것은 엘리가 대신 해 주었다.

응접실에 도착하자, 엘리는 견딜 수 없다는 얼굴에 기합이 잔뜩 들어간 자세를 하곤 마님께서 차를 주시기를 기다렸다.

“향이 정말, 정말 좋아요. 어쩜 이렇게 달콤하죠?”

엘리가 두 주먹을 꼭 쥐고 말했다. 클로에는 웃으며 그녀의 찻잔에 밀크티를 따라 주었다. 엘리는 냉큼 잔을 받아 들어 호호 불며 한 모금을 마셨다.

“세, 세상에. 이건……!”

그녀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너…… 너무 맛있어요!”

클로에는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따라서 밀크티를 마셨다.

진한 홍차와 부드러운 우유의 맛, 달달한 초콜릿과 캐러멜의 향이 미뢰와 후각을 자극했다. 비강 가득 들어차는 디저트의 향과 그와 잘 어울리는 설탕의 달콤함, 그리고 배 속을 채우는 따스한 온기…….

클로에는 단번에 행복해지고 말았다.

“어, 어떻게 이렇게 맛있는 음료가 있을 수가 있죠?”

엘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건 어디에서도 먹어 본 적이 없어요. 완전히 새로운 맛이에요! 마님, 마님은 꼭 마술사 같아요!”

그녀는 거의 울 것 같았다. 그 격렬한 반응에 클로에는 민망해졌다.

“그러게, 오랜만에 만들었더니 정말 맛있는걸. 다음번엔 공작님께도 한 잔 만들어 드려야겠다.”

* * *

마침내 다과회 당일이 되었다.

클로에는 뿌듯한 기분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번 다과회를 위해 응접실의 가구 배치를 완전히 바꿔야만 했다. 만개한 수국과 국화과의 흰 꽃으로 장식한 응접실은 아름다웠으며 좋은 향기가 났다.

그녀는 약 20명 정도의 적은 인원을 초청했다. 시간에 맞춰 손님들이 속속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어머, 바텐베르크 부인. 다과회에 초청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저야말로 아커만 부인을 모시게 되어 무척 기뻐요.”

손님들이 한 명 한 명 도착할 때마다 클로에는 그들을 직접 맞이했다.

“어머나, 바텐베르크 부인.”

일전에 클로에를 다과회에 초대한 적 있던 벨라도나 영애가 살살 눈웃음을 치며 다가왔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이것은 아버지께서 상단을 통해 입수하신 아멘시아의 최상급 커피콩이랍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뜻으로 가져왔어요.”

“어머, 선물까지. 감사합니다, 영애. 영애께서도 저를 초대해 주셨으니 저도 당연히 영애를 초청해야 마땅하지요.”

클로에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벨라도나 영애는 한쪽 입꼬리를 거만하게 올리며 물어왔다.

“아직도 그…… 차라고 하던가요? 말린 잎을 우린 물을 즐기고 계신가요?”

“그럼요. 좋은 차가 있어, 오늘의 다과회에서도 내놓을 예정인걸요.”

“저런…… 다른 분들은 어떠실지 모르지만, 저는 아직 야만인들의 음료에는 익숙지 않아서요. 과연 커피에 익숙한 제 입맛에 맞을지 저어되는군요.”

클로에는 그녀의 말에 개의치 않고 웃어 보였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처음 드시는 분들께도 매력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차를 골라 보았는데, 입맛에 맞으셨으면 좋겠네요. 아, 벨라도나 영애, 이만 자리를 비켜 주시겠어요? 영애의 뒤로 많은 분들이 기다리고 계세요.”

클로에를 약 올리느라 자신의 뒤로 기다리는 줄이 생겨나는 것도 몰랐던 벨라도나 영애는 화들짝 놀라 자리를 비켜 주었다.

모든 손님을 응접실로 들여보낸 뒤 클로에는 부엌으로 가서 모든 다과가 준비되었는지를 확인하는 마지막 점검을 했다. 물론 오늘 그녀가 제일 선보이고 싶었던 것인, 차를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클로에는 마음을 다시 한 번 정돈했다. 그렇게 떨리지는 않았다. 직장에서 수십 명의 사람들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하던 일보다는 쉬웠으니까.

그녀는 응접실로 돌아가 손님들 앞에 나섰다.

“오늘 저의 다과회에 찾아와 주셔서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모쪼록 편안히 느끼시고, 충분히 즐겨 주신다면 기쁘겠습니다.”

타이밍 좋게 하녀들이 곁음식들을 나르기 시작했다. 약간의 단맛이 있고 향은 강하지 않은, 차를 돋보이게 해 줄 만한 티 푸드들이었다.

그러나 손님들의 시선은 티 푸드보다는 테이블 위에 세팅되어 있는 다구에 더 쏠렸다. 그도 그럴 것이, 다구들이 워낙에 특이하고 이국적으로 생겼기 때문이다.

“어머, 잔이 무척 특이하게 생겼네요. 손잡이도 없고요.”

“주전자도 아주 특이하게 생겼어요.”

클로에가 미소 지으며 설명했다.

“이 다구들은 온에서 수입해 온 청화백자(靑花白磁)다기랍니다. 이 광택 나는 흰 도자기와 아름다운 청색 문양을 보세요. 유약 처리는 완벽하고 곡선 역시 흠잡을 데 없죠. 동방의 독특한 매력이 느껴지지 않나요?”

그 말에 손님들이 다구를 조심스레 들여다보았다. 과연, 도자기 강국인 온의 자기는 그 형태가 유려하고 색상과 문양이 우아해 매력적이었다. 납을 비롯한 광물 유약을 바르는 서방의 도자기들과는 또 다른 신선한 매력이 있었다.

손님들이 감탄했다.

“정말이에요, 은은한 유약 광택이 고급스럽네요.”

“문양이 정말로 섬세해요. 저도 이런 멋진 자기를 가지고 싶네요.”

“동방의 도자기는 모양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돌과 나무재 등 천연 유약을 사용해 식기로 사용해도 건강에 부담이 없고 튼튼하며 열에 강하답니다. 자연을 정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공존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동방의 독특한 철학을 반영한 제조 방식이지요.”

클로에의 막힘없는 설명을 들은 손님들의 얼굴에 점점 더 놀라운 빛이 떠올랐다. 그저 특이하게 생긴 도자기 잔과 주전자라고 생각했던 것이 그녀의 설명을 통해 아름답고도 신선한 매력이 넘치는 외국의 독창적인 문물로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 그런 손님들의 찬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 한 사람이 있었다. 벨라도나 영애였다. 그녀가 곱지 않은 어조로 말했다.

“흥, 그렇지만 온은 야만국이 아닌가요? 동방의 사람들은 야만적이고 비이성적이라고 들었어요. 그들은 키가 작고 피부는 노랗고 눈은 찢어진 데다가, 바닥에 앉아서 생활하고 누워 자는 미개한 생활을 한다면서요?”

클로에는 그 말이 기분 좋지 않았다. 너무나 차별적이고 무례한 말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기분을 감추고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글쎄요, 저는 동방의 사람들이 미개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들은 독창적이고 심도 있는 문화를 구축하고 있어요. 한 번 그 문화를 접해 보시겠어요?”

그렇게 말한 그녀가 손뼉을 짝짝 쳤다. 부엌 하녀들이 차통과 뜨거운 물을 가져왔다. 클로에는 그 자리에서 동방식 다도대로 차를 우렸다.

“어머……! 독특하고 우아한 동작이네요.”

“바텐베르크 부인이 저런 솜씨를 가지고 있었을 줄은 미처 몰랐어요.”

손님들의 수군거림에는 명백한 호의가 담겨 있었다.

곧 차가 완성되자, 하녀들이 찻주전자를 들고 다니며 손님들에게 차를 따라 주었다. 연한 노란색이 도는 찻물을 귀부인들이 신기하다는 듯 들여다보았다.

“이게 바로 차라는 거군요?”

“홍차인가요?”

“홍차라고 하기에는 붉은빛이 돌지 않잖아요?”

수런거리는 귀부인들의 곁에서 클로에가 설명했다.

“이것은 밀키우롱(금훤우롱)이라는 이름의 차입니다. 아무것도 가향하지 않은 차이지만, 찻잎 자체에서 달콤한 우유의 향이 난답니다.”

“어머나! 차에서 우유 향이라고요?”

‘그’ 공작저에서 다과회 손님들에 대한 대접으로 겨우 말린 풀을 우린 물이나 내놓은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귀부인들까지 전부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럴 만도 했다. 말린 나뭇잎에서 과일도, 꽃도 아닌 우유의 향이 나다니?

귀부인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찻잔을 들어 향을 맡아보기 시작했다.

“어머나! 정말이잖아요!”

“고소한 우유의 향이 나요!”

“정말로 향을 입히지 않은, 찻잎 자체의 향인가요?”

클로에가 직접 정성껏 우린 차에서는 차 자체의 단내와 섞여 연유와도 닮은 향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클로에가 생긋 웃었다.

“네, 그래요. 제가 준비한 것이 마음에 드신다면 좋겠습니다.”

귀부인들은 일제히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아직 그들 중 아무도 찻잔을 입에 대지 않았다. ‘평민들이나 마시는 말린 식물을 우린 물’에 대한 거부감이 그렇게나 컸던 것이다.

그들 중 제일 먼저 차를 마신 사람은 호기심이 많은 편인 포트넘 부인이었다. 그녀는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찻잔을 들어 마셨다.

“어머!”

포트넘 부인이 소리쳤다.

“정말로 향긋하네요! 마음에 들어요.”

처음으로 도전하는 사람이 생기자, 그 뒤는 일사천리였다. 귀부인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찻잔을 입에 대고는 감탄했다.

“어떻게 나뭇잎을 말린 것에서 이런 달콤한 향기가 나죠?”

“무척 고급스러운 향이네요!”

“곁음식과도 아주 잘 어울리는걸요!”

그러나 이 와중에도 찻잔을 입에 대지 못하고 있던 사람이 하나 있었다. 벨라도나 영애였다.

그녀는 명백한 불쾌함을 숨기지 못한 얼굴이었다. 어린 치기와 질투를 견디지 못하고, 그녀가 외쳤다.

“이건 말도 안 돼요! 나뭇잎에서 우유 향이 나다뇨?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어요. 분명 몰래 우유를 넣었겠죠!”

“하지만 영애, 이 차의 수색은 아주 맑고 깨끗한걸요? 우유가 들어갔다면 분명 구름처럼 희뿌옇게 되었을 거예요.”

아까 제일 먼저 밀키우롱을 입에 대었던 사람인, 포트넘 부인이 대신 반박했다.

“맞아요, 우유를 섞었는데 이런 맑은 맛이 날 리가 없죠. 바텐베르크 부인, 감사해요. 오늘 덕분에 아주 독특한 경험을 해 보네요.”

다른 부인이 클로에에게 감사를 표했다.

“아니에요. 제가 준비한 것들이 마음에 드신다니 무척 기쁘네요.”

클로에가 공손하게 말했다.

그녀가 오늘 차를 고른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오늘은 다른 날, 먼저 차를 마시기를 청하는 사람들에게 차를 대접해 주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오늘의 손님들은 그녀가 차를 즐기는 것도 모르고, 차를 마셔 보기는커녕 천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었다.

그런 그들이 차를 즐기게 하려면, 처음 차를 마셔 보는 사람에게도 부담 없이 다가가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무엇보다 흥미와 호기심을 동하게 할 만한 차여야 했다. 차를 천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호기심에 입을 댈 수밖에 없도록.

그리고 그녀의 전략은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밀키우롱의 독특함과 신비함에 매료된 사람들을 보면 말이다.

클로에는 벨라도나 영애를 보고 말했다.

“벨라도나 영애, 아셨나요? 동방의 문화는 그 자체로도 충분히 깊이가 있고 매력적이랍니다. 그러니 동방의 문화가 미개하다는 편견은 이제 그만 버리셨으면 좋겠네요. 그리고…….”

그녀가 생긋 웃었다.

“영애의 삼촌께 제대로 우린 차에서는 어떤 맛이 나는지, 잘 전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순간 손님들 사이에서 까르르 웃음이 터져 나왔다. 벨라도나 영애가 주최한 다과회에서 그녀가 클로에에게 어떤 방식으로 시비를 걸었는지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벨라도나 영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새빨개진 얼굴로 입을 꾸욱 다물고 있었다. 그녀는 분했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클로에가 정성껏 준비한 다과회는 그렇게 성황리에 끝이 났다.

* * *

바텐베르크 공작 부부는 다른 귀족가로부터 저녁 식사 초대를 받았다. 포트넘 자작가였다.

공작가에 비하면 자작가는 한미한 가문에 지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세력을 꾸리는 데에 관심이 없고 사교활동을 좋아하지 않는 알폰스는 평소 같았으면 이런 초대 따위는 답장도 보내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어처구니없게도…… 그는 아내가 신경 쓰였다. 포트넘 자작가에서 초대가 왔다는 소식에 클로에가 반짝반짝 눈을 빛냈던 것이다.

포트넘 부인은 일전에 밀크우롱을 선보인 다과회에 참석한 적이 있고, 벨라도나 영애가 시비를 걸 때에 자신을 대신해 반박해 주는 등 무척 호의적인 태도를 보여 고마웠다는 것이다. 클로에는 이 초대에 응함으로써 포트넘 부인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싶어 했다.

알폰스는 그것이 의아스러웠다. 그는 지난 13개월 동안, 클로에가 그런 사교 자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앞장서서 다른 사람의 초대에 응하고 싶어 하다니?

저번에 다과회를 열고 싶다고 했을 때도 의아하긴 했지만, 그때는 다과회가 귀부인으로서 필수적인 일이기에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받지 않아도 그만인 초대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 하는 것이다.

결국 알폰스는 흥미가 동했다. 자작 부부의 초대가 아닌, 자신의 아내가 그곳에서 어떤 모습을 보일지에 대하여. 그는 포트넘 부부의 초대에 응했다.

“바텐베르크 공작 부부를 모시게 되다니, 영광입니다! 준비가 약소하지만 공작 부부께 누가 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포트넘 자작이 벌떡 일어나 공작 부부를 맞이했다. 그는 이렇게 공작 부부를 대접할 수 있게 된 게 무척이나 자랑스러운 눈치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바텐베르크 공작은 아무나 초대할 수 없기로 유명했으니까.

자작의 내민 손을 가볍게 잡아 악수하며 알폰스가 말했다.

“초청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처가 이 초대를 무척이나 반가워하더군요. 포트넘 부인께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는 모양입니다.”

“어이쿠! 저희 집사람을 말입니까? 이렇게나 감사할 데가! 안 그래도, 저희 집사람도 공작부인을 무척이나 다시 뵙고 싶어 했답니다.”

남편들의 등 뒤로 한 발짝 물러나 있는 클로에와 포트넘 부인은 밝게 웃으며 말 없는 인사를 나눴다.

두 부부는 포트넘 자작저의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각자가 정해진 좌석에 착석하고, 애피타이저부터 시작해서 차례차례 요리가 내놓아졌다. 공작저에서 먹던 것만큼이나 화려하진 않지만, 귀한 손님을 모시기 위한 정성이 듬뿍 들어간 메뉴였다.

“이렇게 다시 만나서 기뻐요, 포트넘 부인. 오늘을 무척이나 고대했답니다.”

“어머나, 정말요? 저도 바텐베르크 부인께서 오신다는 말에 정말 많은 기대를 했답니다.”

“하하, 우리 집사람이 바텐베르크 부인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아마 상상도 못 하실 겁니다. 이전에 주최하셨던 다과회에 다녀온 뒤로 바텐베르크 부인과 부인께서 내오신 차에 대한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했는데요.”

“부끄럽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기쁜 소식이네요.”

클로에와 포트넘 부인은 죽이 잘 맞는 한 쌍이었다. 두 사람은 말이 잘 통했고, 또 포트넘 부인은 차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어 클로에에게 많은 것을 물어보았다.

“바텐베르크 부인의 다과회에 초대받고 차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어요. 찻잎도 조금 구매했고, 부족한 솜씨로나마 우려 보기도 한답니다.”

“어머, 저로 인해 차에 관심이 생기셨다니 정말 기뻐요!”

“하지만 바텐베르크 부인께서 우리신 차만큼 맛있지는 않더라고요. 부인, 차를 맛있게 우리시는 비법이 뭔가요?”

“저 역시 부족한 솜씨지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차를 우릴 때에는 물이 굉장히 중요해요. 수질이 어떤지에 따라 우리는 방법도 달라지고, 온도와 물속에 녹아 있는 공기의 양에 따라 차 맛이 달라진답니다. 차를 우릴 때의 이상적인 물의 온도는…….”

“어머나, 과연 바텐베르크 부인이셔! 덕분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결국 두 사람은 식사를 마친 뒤 함께 차를 우려 보기로 했다.

포트넘 자작은 아내가 공작부인과 즐겁게 대화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아내 덕분에 훌륭한 인맥이 생기는 것을 마다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편, 알폰스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역시 태도가 달라졌군.’

그가 클로에와 함께 어떤 자리에 참여한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함께 무도회 등에 참석하거나 오늘처럼 다른 집안의 초대를 받아 간 적도 드물지만 있었던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그들이 결혼한 지 하루 이틀 지난 건 아니었으니까.

그는 클로에가 그럴 때마다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언제나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싶다는 듯이 굴거나 가끔씩은 지나치게 과장적이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듯한 행동을 해 비웃음을 사곤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그녀는 자신이 언제 그랬냐는 듯, 너무나 편안하고 즐거운 듯이 자신의 동년배인 포트넘 부인과 대화를 하고 있었다. 포트넘 부인 역시 그녀를 동정이나 측은지심의 시선이 아닌 진심 어린 흥미와 관심으로 대하고 있었다.

‘언제 저런 사교성을 배운 거지.’

본래라면 전혀 관심 두지 않았을 일조차 지금의 알폰스에게는 관심의 대상이었다. 그는 식사 내내 자신에게 계속해서 말을 붙이고 싶어 하는 포트넘 자작보다 자신의 아내에게 더 많은 시선을 주었다.

식사가 끝난 뒤, 포트넘 부인은 자신이 샀다는 찻잎을 가져와 클로에에게 보여 주었다. 잘 건조된 검은 잎사귀들 사이에서 금빛으로 빛나는 골든 팁(솜털이 금빛으로 보이는 어린잎)이 반짝였다.

찻잎을 마주하는 클로에의 눈이 진지해졌다. 그녀는 티스푼으로 잎을 떠서 향을 맡아 보았다. 달큰한 단내와 진득한 몰트 향이 느껴졌다. 무난한 품질의 아쌈 종 홍차인 것 같았다.

“바라트 왕국의 아쌈인가요?”

클로에가 묻자 포트넘 부인은 화들짝 놀랐다.

“어머! 어떻게 아셨어요?”

“진한 몰트 향은 아쌈의 특징이거든요. 골든 팁이 많고 향이 섬세한 걸 보니, 좋은 차인 것 같네요.”

“과연! 바텐베르크 부인은 차의 전문가세요.”

클로에가 수줍게 웃었다. 그녀는 이곳에 떨어진 뒤 이곳의 차에 대해 열심히 공부했는데, 이곳의 차 산지들은 대체적으로 이전의 세계와 일대일 대응이 되는 곳이 많아 알기 쉬웠다. 예컨대 바라트 왕국은 이전의 세계에서의 인도, 아쌈은 인도에서도 아쌈 지역과 비슷한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저는 잘 모르니까 그냥 상인이 추천해 주는 것을 샀어요.”

“추천을 잘 받으셨네요. 저도 진하고 구수한 향이 나는 아쌈을 좋아해요. 맛이나 향이 초심자도 느끼기 쉬운 편이고요.”

클로에는 하녀에게 끓는 물과 다구를 부탁했다. 자작저에 제대로 된 찻잔은 없었다. 하녀는 대신 커피를 위한 자기 주전자와 커피잔을 가져왔다.

클로에는 주전자와 커피잔에 끓는 물을 조금씩 부어 다구를 예열했다.

“차를 우릴 때는 온도 유지를 하는 것이 무척 중요해요. 하지만 차가운 다구에 차를 우릴 물을 바로 부으면 끓는 물이라도 쉽게 식게 되죠. 그러니 차의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먼저 다구를 예열해 주는 것이 좋아요.”

“어머! 그런가요? 전 생각도 못 했어요.”

다구를 적당히 예열한 뒤, 본격적인 차 우리기가 시작되었다. 클로에는 차 스푼으로 찻잎을 계량해 주전자에 넣고, 끓는 물이 들어 있는 주전자를 손에 들었다.

“여기서부터가 중요해요. 먼저 뜨거운 물로 조심스럽게 찻잎을 적시고…….”

찻잎 위에 끓는 물을 적당히 흘려 넣은 클로에는 별안간 물주전자를 높이 들어 올렸다. 포트넘 부인은 다시 놀랄 수밖에는 없었다.

“어머! 꼭 묘기를 하는 것 같아요.”

“찻물에 충분한 양의 공기를 넣고, 우려지는 과정에서 찻잎이 충분히 뛰어오르도록 하는 거예요.”

클로에의 손 안에서 가늘지만 세찬 물줄기가 만들어졌다. 능숙하게 고르고 아름다운 물줄기를 만들어 낸 클로에는 물을 완전히 부은 뒤 찻주전자의 뚜껑을 닫았다.

“찻물에는 충분한 양의 공기가 녹아들어 있는 것이 중요해요. 차가 우러나는 정도와 맛이 완전히 달라지죠. 또한 찻물의 대류로 인해 찻잎이 위아래로 뛰어오르는 것을 점핑이라고 하는데요, 이 점핑이 잘되게 하는 것 역시 차 맛을 좋게 하는 비법이에요.”

“와! 어쩜. 정말 많은 것을 알고 계시는군요. 그럼, 이제 우려지길 기다리는 건가요?”

클로에는 생긋 웃으며 요리용 모래시계를 뒤집었다.

“네, 맞아요.”

“우릴 때는 몇 분이 적당할까요?”

“입맛이나 찻잎의 특징에 따라 달라요. 하지만, 일반적인 기준 시간은 3분이라고 해요. 3g의 찻잎을 300ml의 물에 3분간 우리는 것, 이것이 제일 흔한 방법이죠. 물론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에요. 우선 이 방법대로 우려보신 뒤, 입맛에 따라 적당히 시간과 찻잎의 양을 조절해 나가시는 거예요.”

잠시 잡담을 했더니 순식간에 3분이 흘렀다. 클로에는 잘 우려진 홍차를 스트레이너로 찻잎을 걸러내며 다른 주전자에 부었다.

“이렇게 다른 주전자에 옮기는 과정을 거치면 찻물의 진하기가 고르게 되고, 찻잎이 찻물 속에 남아 있지 않아 쓴맛이 나는 것을 막을 수 있어요. 자, 이제 한번 맛을 볼까요?”

클로에와 포트넘 부인은 남편들이 기다리고 있는 응접실로 향했다. 두 남편들은 담배를 피우며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 같았는데, 특히 포트넘 자작의 표정이 좋은 것을 보니 대화가 잘되고 있는 것 같았다.

“맛을 보시겠어요?”

클로에가 찻잔을 들고 상냥하게 물었다. 포트넘 자작은 얼른 담배를 뱉어 재떨이에 던져두곤 기쁜 듯이 그녀들을 맞이했다.

“어이쿠, 이거 참. 감히 바텐베르크 공작부인께서 직접 우리신 차를 맛보게 되다니, 영광입니다, 영광!”

클로에는 자리에 모인 세 사람에게 차를 한 잔씩 따라 주곤 자리에 앉았다. 클로에가 자신의 찻잔에도 차를 따라 내는 동안, 포트넘 자작은 차를 급히 마시다가 실수로 혀를 데일 뻔했다.

“……어머! 세상에. 너무나 풍부한 향이 나요! 정말 고소하네요.”

조심스레 차를 마시던 포트넘 부인이 화들짝 놀라 말했다. 클로에는 흐뭇한 기분으로 입술에 미소를 걸쳤다.

“마치 고구마나 호박과도 비슷한 몰트 향은 아쌈의 특징이에요. 음, 이 차, 정말 몰트 향이 풍부하네요.”

“이럴 수가, 차는 다 똑같은 거라고만 했는데, 우리 안사람이 우려 준 것과는 전혀 다르군요. 안사람이 우려 준 것은 마치 탕약처럼 쓰고 까맸는데…….”

포트넘 자작의 말에 클로에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알폰스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잠자코 차를 마셨다.

바텐베르크 부부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돌아간 뒤, 포트넘 부인은 자신의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보, 당신도 보았어요?”

“무엇을 말이오?”

“공작님이 공작부인을 보던 시선이요. 공작님이 공작부인에게 아주 관심이 많은 것 같던데요.”

“흠, 그랬던가? 나는 잘 모르겠소.”

포트넘 자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포트넘 부인은 다르게 생각했다. 눈치가 꽤 좋다고 자신하고 있는 그녀는 분명히 보았다. 공작이 드물지 않게 자신의 아내를 흘끗거리며, 그녀를 관심 어린 시선으로 지켜보던 것을.

혹자는 그게 뭐 별거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사랑이나 애정이 담긴 것이 아닌 그저 그런 호기심 어린 시선일 뿐이다. 오히려 남편이 아내에게 이제야 겨우 약간의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면 너무 늦은 거 아니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포트넘 부인도 그들이 다른 부부였다면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바텐베르크 공작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 알폰스 바텐베르크.

게다가 사교계에서 그 어느 때든 관심의 대상이 되는 공작이 그 부인에게만큼은 관심의 대상이 아닌 듯 보였다. 뜻밖에도 공작부인은 공작을 꽤 친근하게 여기고 있는 것 같았지만, 거기까지였다. 공작부인이 자신의 남편에게 큰 관심을 가지기엔 이미 그녀가 좋아하는 것들이 너무 많아 보였다.

‘이거 흥미로운걸. 바텐베르크 공작은 자신의 아내를 냉대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포트넘 부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빙그레 웃었다. 그녀는 자신이 본 것이 새로운 관계의 전초전이라는 것을 거의 확신했다.

‘역시 소문은 믿을 게 못 된다니까.’

클로에 바텐베르크는 분명히 재미있고, 또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그녀에 대한 흥미와 호기심이 마구 피어올랐다. 이렇게나 다른 누군가에 대해 더 알고 싶어진 적은 오래간만이었다.

* * *

클로에는 첫 동성 친구를 사귄 것이 너무나 기뻤다. 그녀는 다음 날 눈 뜨자마자 부엌으로 내려갔다. 그녀는 부엌 하녀들에게 신선한 우유와 무가당 생크림, 설탕, 그리고 그 외의 몇 가지 재료를 준비하도록 부탁했다.

몇 시간 뒤, 밀크잼을 완성한 그녀는 그것을 예쁜 유리병에 담았다. 그녀가 만든 밀크잼은 바닐라빈을 듬뿍 넣은 바닐라맛, 코코아파우더를 넣은 초콜릿맛, 가루처럼 잘게 썬 얼그레이 잎을 풍부하게 넣은 얼그레이맛으로 총 세 가지였다.

밀크잼을 차갑게 식힌 뒤 클로에는 그것들을 포장해서 포트넘 자작부인에게 부쳤다. 새 친구를 위한 간단한 선물이었다.

반응이 돌아오는 데엔 사흘도 채 걸리지 않았다.

“어머, 포트넘 부인!”

“기별 없이 방문해서 죄송해요, 바텐베르크 부인.”

클로에는 갑작스러운 손님을 반갑게 맞이했다.

“아니에요, 포트넘 부인이라면 언제든 환영이에요.”

포트넘 부인은 클로에에게 잘게 썬 과일이 들어간 에클레어와 오렌지 향이 나는 스콘, 초콜릿 밀푀유 같은 디저트류의 간식들을 가득 담은 바구니를 선물했다. 클로에는 티 푸드로 먹으면 좋겠다며 기뻐했다.

그들은 자리를 응접실로 옮겼다. 곧 간단한 다과가 차려져 나왔다. 그녀들은 다과를 즐기며 사담을 나누었다.

분위기가 적당히 무르익었을 때쯤, 포트넘 부인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찾아오게 된 이유에 대해 말을 꺼냈다.

“바텐베르크 부인이 만들어 주신 ‘우유로 만든 잼’은 정말로 맛있었어요. 그 달콤함과 부드러움이란! 그이도 정말 환상적이라며 감탄하더라고요. 어떻게 우유로 잼을 만드실 생각을 하셨는지, 전 바텐베르크 부인이 연금술사이신 줄 알았지 뭐예요.”

클로에는 몹시 부끄러워졌다. 본디 밀크잼이란 건 이전의 삶에서 그녀가 종종 만들곤 하던 것으로 그녀의 아이디어가 아니었다.

“정말 별거 아니에요. 우유와 생크림에 설탕을 충분히 넣고 한두 시간 잘 저어주면서 졸이기만 하면 되는걸요. 코코아 파우더나 얼그레이 찻잎 등의 부재료를 섞어도 좋고요.”

“어머! 불 옆에서 한두 시간이나요? 정성이 많이 필요하겠어요.”

포트넘 부인이 감탄했다.

“그건 그렇고, 이 신선한 발명품으로 사업을 해 보실 생각은 없으세요?”

“네? 사업이요?”

“네! 저희 바깥사람은 만일 바텐베르크 부인이 이걸로 사업을 하시면 투자할 의향이 있다고까지 하더라고요.”

클로에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사업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글쎄요, 한 번도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어서요. 고민을 해 봐야겠는걸요. 공작님께도 여쭤 보고…….”

“무엇을 말입니까?”

“어머나!”

클로에와 포트넘 부인, 두 사람 다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응접실의 입구에는 알폰스가 있었다.

“실례하겠습니다.”

그는 슬쩍 클로에와 같은 소파에서 그녀와 한 뼘 정도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클로에가 그를 돌아보며 반갑게 웃었다.

“공작님.”

“부인.”

알폰스가 그런 클로에의 얼굴을 무표정한 눈으로 흘끗 보며 목례했다. 그가 포트넘 부인에게 말했다.

“사업에 대해 이야기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실례가 되는 것은 알지만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포트넘 부인은 신이 나서 모든 것을 설명했다. 클로에가 ‘우유로 만든 잼’이라는 신기한 것을 만들어 주었는데 그것이 아주 신선하고 맛이 좋았다는 이야기. 그것을 상품화하면 분명 잘될 것이라는 이야기 등등.

이야기를 잠자코 들은 알폰스가 이번에는 클로에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 밀크잼이라는 것을 저도 맛볼 수 있겠습니까.”

“네! 제가 먹으려고 만들어 둔 것이 제 침실에 있어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클로에는 지나가던 하녀를 불러 자신의 방에 있는 밀크잼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얼마 있지 않아 바닐라맛 밀크잼 한 병이 그들의 앞으로 대령되었다.

응접실 탁자에 놓여 있던 빵조각에 발라 밀크잼을 맛본 알폰스는 그것이 대단히 특이한 식품임을 깨달았다. 과일 잼과도 달랐고, 생크림과도 다른 그 중간 지점에 있는 듯한 것이었다.

잘 만든 디저트류는 귀족과 부유층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았다. 귀부인들이 밥 먹듯이 즐기는 다과회나 그 외의 사교모임에서 내놓기에 딱 좋은 메뉴였으니까.

게다가 이 밀크잼이라는 것은 응용이 쉬웠고 식사로 먹을 수도 있었으니 쓰임새가 많았다. 귀족 여성들을 대상으로 사업화하기에 최적의 아이템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단 것은 좋아하지 않지만, 이건 어쩐지 나쁘지 않군.’

그는 그것이 왠지 마음에 들었다. 그냥, 많은 이유들을 모두 제쳐 놓고, 느낌이. 클로에가 우려 주는 차를 여러 번 마셨더니 그녀에 대한 신뢰도 자체가 높아진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알폰스는 클로에를 흘끗 보았다. 동그란 눈을 깜빡거리는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걸 만들었는지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부인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네?”

“이것을 사업화하길 원하십니까.”

알폰스의 질문에 클로에가 고민했다. 사업이라 함은…… 사실 그녀도 완전히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학생 시절에만 해도 나중에 자신만의 찻집을 꾸려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 봤으니까.

게다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이용한 사업이라니 그만큼 재미있는 것이 없을 것 같았다. 안 그래도 공작저 내에서 인사권과 예산 관리권이 없으니 할 일도 없는데, 지속적인 소일거리가 생겨도 좋을 것 같았고.

클로에가 생긋 웃었다.

“네, 즐거울 것 같아요.”

알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습니다.”

“어머, 바텐베르크 부인! 정말 잘됐네요.”

포트넘 부인이 제 일처럼 기뻐했다.

* * *

알폰스와 클로에의 사이에서 사업 이야기가 처음으로 나온 지 며칠이 지났다. 클로에는 언제나처럼 차를 우리기 위해 부엌으로 향했다. 곁에는 차통을 하나 든 엘리가 함께였다.

공작부인씩이나 되는 사람이 차를 우리기 위해 직접 부엌으로 행차하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제국은 물론 다른 왕국들을 전부 통틀어도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클로에는 차를 우릴 때마다 거의 항상 부엌에 들르곤 했다. 처음엔 물 등을 부탁하더라도 하녀들이 자신의 지시를 들을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지만, 요즘은 그냥 부엌에서 물을 끓이는 것부터 직접 관리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 그렇다.

물론 처음에는 부엌에서 일하는 하녀들도 공작부인께서 직접 부엌에 드나드는 것에 당황하거나, 혹은 그녀를 부담스러워하곤 했다. 그러나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이제는 슬슬 부엌 하녀들도 클로에를 원래 그 자리에 있는 NPC나 수호신 정도로 취급하게 되었다.

클로에가 부엌에 들어서자 그녀를 본 부엌 하녀들이 대강 인사했다. 바텐베르크의 부엌 하녀들은 그녀에게 여느 다른 귀족댁의 마님을 대하듯 정중한 예의와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태도를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무시하거나 대놓고 괴롭히거나 얕보는 것은 아니라 클로에는 그냥저냥 만족했다.

“엘리, 동 주전자에 물을 넣어 불 위에 올려 주겠니? 물의 분량은 1.5L 정도가 좋겠구나.”

“네, 마님!”

차통을 내려놓은 엘리가 동 주전자를 찾으러 달려갔다. 엘리가 동 주전자를 찾아서 물을 담아 화로 위에 올리는 동안 클로에는 찻잎의 정확한 분량을 계량해 대용량 찻주전자에 담았다.

부엌 하녀들은 그들이 그러는 모습을 몰래 힐금거렸다. 사실 하루 종일 부엌에서 힘들게 일하는 것 말곤 재미있는 일이 없는 부엌 하녀들에게 차를 우리는 클로에의 모습은 좋은 구경거리였다.

온갖 요리 재료를 다듬고 온갖 요리를 만드는 그들이었으나 차만큼은 너무나 낯선 영역이었다. 차를 우리는 마님의 모습도, 또 찻주전자에서 흘러나오는 그 달콤하고 낯선 향기도 그들에게는 한없이 신기하고 신비로운 것이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엘리가 끓여 가지고 온 물을 찻주전자에 높이 붓는 마님의 모습을 보며 부엌 하녀 재클린은 그 모습이 무척 우아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서로 말은 안 해도 아마 자신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지난번에 마님이 우렸던 차는 무척이나 달콤한 향이 났다. 태운 설탕 같기도 하고 잘 익은 과실 같기도 한 달콤한 향. 또 다른 부엌 하녀 애쉴리가 그 향을 맡으며 자신에게 속삭였었다.

‘나도 저 차라는 것을 마셔 보고 싶어. 엘리가 부러워.’

그때 자신은 애쉴리에게 핀잔을 주었다.

‘그런 말 하지 마.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마님이잖아? 공작저에서 제일 바보 같고, 아랫것들한테까지 놀림 받는 마님. 분명 차라는 것도 별거 아닐 게 뻔해.’

그때의 일을 회상하던 재클린은 그 마님께서 자신을 부르셨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재클린. 재클린?”

“네…… 네!”

그녀는 불에 덴 듯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클로에가 생긋 웃었다.

“왜 그렇게 놀라니?”

민망해진 재클린이 변명했다.

“노, 놀란 게 아니라요…….”

그러던 그녀는 새로운 깨달음에 눈을 크게 떴다. 재클린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제 이름을 아세요?”

자신이 관리 감독하는 사용인들에 대해 파악해 두는 것은 모든 안주인의 기본 소양이지만, 클로에는 평범한 안주인이 아니었다. 공작저에서 제일 바보 같다고 놀림 받는 그 마님이 아니시던가.

그녀는 사용인들의 이름을 통 기억하지 못했다. 사실 기억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것은 공작저 내 사용인들이 클로에에게 서운함을 느끼는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런데 그 마님이 갑자기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서 친근하게 부르기까지 한다. 무슨 오랜 친구라도 되는 듯이.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클로에는 전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빙긋 웃어 보일 뿐이었다.

“왜 모르겠니? 넌 우리 공작저의 일원이잖니.”

그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건 그렇고, 용과(dragonfruit)와 꿀을 가져다주렴. 용과는 네 개, 꿀은 작은 단지로 하나 정도면 충분하겠구나.”

“요…… 용과와 꿀이요?”

“그래.”

재클린은 좀 얼떨떨한 기분으로 용과와 꿀을 가지러 갔다. 클로에는 재클린의 곁에 있던 애쉴리에게도 얼음을 많이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애쉴리의 이름 역시 기억해서 다정하게 불러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재클린이 용과와 꿀을 가져오는 동안 클로에는 충분히 우려진 차에서 찻잎을 걸러 내었다. 재클린이 부탁한 것들을 가지고 돌아오자 클로에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이번에는 토 안 달고 잘 가져왔네?”

클로에가 처음으로 부엌에서 차를 끓였을 때, 재클린에게 동 주전자를 꺼내 달라고 했을 때 그녀가 토를 달았던 것을 가지고 농담하는 것이었다. 재클린이 바로 그때 주전자를 꺼내 준 하녀였던 것이다.

재클린이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클로에가 웃으며 말했다.

“고맙구나.”

“아, 아니에요.”

클로에는 직접 칼을 들고 용과의 껍질을 벗겨 속살을 깍둑 썰었다. 공작부인씩이나 되는 사람이 직접 칼을 들고 요리를 하다니! 이제 더 이상 놀랄 일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부엌 하녀들 모두가 경악해 그녀가 하는 일을 지켜보았다.

용과를 다 손질하고 나니 애쉴리가 얼음을 가지고 돌아왔다. 클로에는 뜨거운 차를 얼음 위에 붓고, 엘리의 도움을 받아 용과 조각과 꿀을 적당히 섞었다. 그러고 나니 약 4.5L 정도 분량의 향긋하고 달콤한 용과 허니 아이스티가 완성되었다.

부엌 하녀들 모두가 그 투명한 오렌지빛의 무척 시원해 보이는 음료를 흘끔거렸다. 지금의 계절은 초여름이고 부엌은 불이 많은 장소였다. 이런 날씨에 오전부터 불 곁에서 일을 했으니 덥고 하녀복의 등판은 땀으로 젖었다.

클로에가 차를 우릴 때마다 그 독특한 향기에 하녀들 중 한두 명이 입맛을 다시긴 했었으나 오늘만큼은 그러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저렇게 많은데, 한 입만 마셔 보고 싶다.’

모든 하녀들이 그런 생각을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여태까지 클로에가 차를 우리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아 왔지만 다과회를 열었을 때를 제외한다면 저렇게나 대용량을 한꺼번에 만든 것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애쉴리 역시 침을 꼴깍꼴깍 삼켰다. 재클린은 그런 애쉴리에게 눈치를 주었으나 사실 자신도 목이 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그들 중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클로에는 국자를 든 채, 4.5L의 아이스티가 담긴 유리단지 앞에 서서 이렇게 말했다.

“모두들, 자기 잔을 들고 이리로 가까이 오렴.”

가만 보니 엘리는 이미 유리잔을 들고 클로에의 곁에 찰싹 붙어 있었다.

하녀들은 처음에는 그것이 자신들에게 하는 말이 아닌 줄만 알았다. 몇 초가 지난 뒤에야, 누군가가 이렇게 물었다.

“저, 저희요?”

“그럼. 여기 너희 부엌 하녀들 외에 누가 있니.”

하녀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이제 자신들에게 하는 말이라는 것은 알겠으나 마님이 대체 왜 새삼 자신들을 부르는지 알 수 없었다.

설마, 저 얼음을 넣은 차를 자신들에게 나누어 주려는 것일까? 하지만 차는 수입품이고 대단히 희귀했다. 자신 같은 아무 하녀들에게나 나누어 줄 만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클로에와 가까운 사이인 엘리라면 나눠 줄 수도 있다 쳐도 자신들은 그렇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자신들은 어느 쪽이냐면, 클로에 그녀를 깔보고 무시하는 쪽에 가깝지 않았던가.

그런데 대체 왜?

그들이 물음표만 가득 띄운 얼굴로 멍을 때리자 클로에는 알만하다는 듯 가볍게 웃었다. 그녀가 조곤조곤 말했다.

“너희가 지난 다과회 때에도 많은 고생을 해 주었다는 것을 알고 있단다. 오늘 역시 더운 날씨인데도 공작저를 위해 열심히 일해 주는 것이 고맙구나. 목이라도 축이라는 뜻에서 한번 준비해 보았단다.”

클로에가 보기에 부엌 하녀들은 그렇게 나쁜 아이들이 아니었다.

여전히 그녀에게 좀 불손하게 구는 경향은 있으나 다른 사용인들에 비해서는 그나마 클로에에게 제일 적대적이지 않은 편이었다. 아마 부엌에만 상주하며 일을 하는 하녀들인지라 과거의 클로에와의 접점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더 그런 것 같았다.

다른 사용인들은 알폰스나 키엘이 보고 있지 않으면 클로에의 지시는 거의 듣지 않았지만 부엌 하녀들은 별로 그렇지 않았다. 클로에를 보고 노골적으로 비웃거나 자기들끼리 필시 조롱임이 분명한 내용을 속닥이지도 않았다.

게다가, 몇 번 차를 끓이기 위해 부엌에 들락거릴 때마다 달콤한 향기에 하녀들이 종종 이쪽을 흘끗거린다는 것 역시 클로에는 알고 있었다. 태생이 21세기 현대인인지라 여전히 계급제에 익숙하지 않은 그녀는 부엌에서 그들의 도움을 받아 차를 우리면서도 한 입 나누어 주지 않는다는 것이 좀 정 없게 느껴졌다. 언제 한번 날을 잡아 그들에게도 차를 나누어 주고 싶다고 진작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어쨌든, 그녀가 어떤 생각으로 이런 친절을 베풀었건 간에…….

부엌 하녀들은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그, 공작부인씩이나 되시는 분이,

별로 성의 있게 모시지도 않은 우리들을 위해 친히 차라는 것을 준비해 주셨다고?!

모든 부엌 하녀들이 자신에게 호의를 입은 듯한 얼굴이 아니라, 야구 방망이로 뒤통수라도 얻어맞은 듯한 표정을 짓자 클로에는 의아했다. 그러나 그녀는 의아한 티를 내지 않고, 부드러운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마실 사람?”

“마님, 저요, 저요!”

엘리가 열정적으로 손을 들었다.

재클린은 그저 당황한 눈으로 클로에와 얼음이 담긴 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곁에서, 애쉴리가 부엌 하녀들 중 맨 처음으로 달려 나갔다.

“저요!”

그녀가 유리잔을 들고 얼른 엘리의 뒤에 섰다.

하녀들은 처음에는 얼어붙어 서로의 눈치만 보며 꼼짝도 못했다. 그러나 애쉴리가 먼저 나서자, 그것에 용기를 얻어 하나둘 클로에의 앞에 줄을 섰다.

재클린도 엉겁결에 다른 부엌 하녀의 손에 끌려 함께 줄 서게 되었다.

클로에는 한 사람 한 사람, 모든 하녀들에게 직접 차가운 아이스티를 한 잔씩 떠 주었다.

“이건 꿀과 용과가 들어간 아이스티라는 것이란다. 시원하고 달콤해서 차를 처음 마시는 너희들의 입맛에도 맞을 거야.”

이전에 엘리와 기사 삼총사에게 만들어 주었던 과일 아이스티의 개량 버전, 허니 드래곤후르츠 아이스티였다. 홍차 특유의 고소함과 용과의 산뜻함, 꿀 특유의 풍미가 어우러진 아주 매력적인 음료수였다. 열심히 일해 지치고 더운 하녀들에겐 말할 나위 없을 것이다.

부엌 하녀들 중 제일 처음 아이스티를 맛본 애쉴리는 감탄을 터뜨렸다.

“어머, 어머, 어머, 세상에! 너무 맛있어요!”

엘리와 다른 부엌 하녀들 역시 모두 마님의 아이스티를 마시며 감탄했다.

물론 음료수 자체도 더할 나위 없이 맛있었다. 그렇지만 그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동안 클로에가 차를 우리는 것을 보면서 느꼈던 호기심과 관심이 한꺼번에 해소되었고, 무엇보다도 무려 (비록 실권이 없어 허수아비일지언정) 공작부인씩이나 되시는 분께서 한낱 부엌 하녀 따위를 위해 이런 정성을 들여 주셨다는 감동이 하녀들의 가슴속에 가득 피어올랐다.

“어쩜, 주인마님께서 우리를 위해 직접…….”

“다른 귀족들이었으면 생각도 못 했을 일이야.”

“별로 최선을 다해 잘해 드린 것도 아닌데…….”

하녀들이 서로에게 속닥거렸다. 물론 이전에도 클로에를 보며 사용인들이 속닥거리는 일은 자주 있었지만 이번은 달랐다. 이전과 달리, 그 속삭임엔 그녀에게 아주 호의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으니까.

클로에는 모든 부엌 하녀들이 차를 한 잔씩 받은 것을 확인한 뒤, 남은 아이스티를 트레이에 받쳐 들고 자신과 엘리의 티타임을 위해 응접실로 향했다. 그러려고 했다.

그녀의 발길을 멈추게 한 것은 애쉴리였다.

“마님, 저희 같은 하녀들을 위해 이렇게나 신경 써 주셔서,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애쉴리는 클로에를 향해 허리를 90도 직각이 넘도록 깊게 숙였다. 클로에는 조금 놀랐지만 이내 빙그레 웃었다.

허리를 깊게 숙인 애쉴리의 뒤통수를 내려다보고 있던 클로에가 고개를 들었다. 부엌 하녀들이 대부분 그녀에게 깊게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굽혀 예를 갖추고 있었다.

키엘과 엘리를 제외하고서는, 사용인들에게서 처음으로 받아보는 호의였다.

그 사실에 짠한 감동과 기쁨을 느끼던 클로에는 한쪽 구석에 당황한 얼굴로 서 있는 하녀 한 명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재클린이었다.

재클린은 생각했다.

마님이 달라졌다는 소문은 들었다. 하지만 믿고 싶지 않았다. 마음 놓고 마님을 미워할 수 있었으면 했다. 그녀에겐 마님에 대한 작은 원한이 있었다.

“이 사건의 책임자가 누구인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이해하실 거라고 믿어요, 마님.”

반년 전이었다. 일을 너무나 못해 인사권도 예산 관리권도 전부 집사에게 빼앗길 정도였던 클로에가 실수를 저지른 것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중에는 애교로 봐줄 만한 작은 일도 있었고…….

반드시 책임자를 찾아야 할 정도의 큰일도 있었다.

어느 날 부엌에 어려운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굳은 얼굴의 하녀장과, 집사와 주인마님이었다. 전부 한낱 접시 닦는 하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지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세 명 다 얼굴이 좋지 않았다. 재클린을 비롯한 하녀들은 이곳에서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클로에는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백지장 같은 얼굴을 하고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겁을 먹고 긴장했다는 것을 삼척동자라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한순간이지만 재클린마저 동정심을 느꼈을 정도로.

“그럼, 마님.”

언제나 생글생글 웃고 다니던 집사가 동일 인물이 맞는 걸까 싶을 정도로 심드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게 누구죠? 감히 마님의 식자재 거래증명서를 빼돌렸다는 자가.”

집사의 그 말에 하녀들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직감했다.

창백한 얼굴의 클로에는 하녀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덜덜 떨면서도, 그녀는 팔을 들어, 검지로 한 사람을 가리켰다.

재클린이었다.

“저, 저 하녀예요.”

클로에가 기어들어 갈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하녀가 그러는 것을 똑똑히 보았어요!”

재클린은…… 클로에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조금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저 부엌 하녀일 뿐이다. 클로에가 무슨 일을 했는지, 그녀의 거래증명서라는 게 뭔지도 모르는데 재클린이 그 일과 관련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집사와 하녀장이 모를 리 없었다. 그렇게 생각한 재클린이 호소했다.

“무……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마님께 오해가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 전 그냥 부엌 하녀일 뿐인걸요.”

그러나 키엘은 대답 없이 그저 심드렁한 눈으로 클로에에게 지목된 하녀, 재클린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가 사무적으로 내뱉었다.

“하녀장. 저 하녀를 끌고 가 벌을 주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집사님.”

집사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하녀장의 우악스러운 손길이 재클린의 덜미를 쥐었다. 목이 졸릴 정도로 강하게 붙잡힌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 그녀가 소리쳤다.

“마, 마, 마, 마님! 억울합니다! 제가 한 게 아니에요! 제가 한 게…….”

그러나 아무도 그녀의 호소를 귀담아 들어 주지 않았다. 재클린은 클로에를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떨면서, 이쪽에 단 한 번의 눈길도 주지 않았다.

부엌 안은 숨 한 번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는 부엌 하녀들의 긴장감 어린 고요로 넘쳤다. 재클린은 너무나 억울하고 두려웠다. 힘센 하녀장에게 끌려가면서, 그녀가 부엌에서 마지막으로 들은 것은 집사의 목소리였다.

“벌은…… 회초리 60대 정도면 충분할 것 같네요.”

체벌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자 재클린이 맞은 매의 횟수는 결과적으로 60대보다 훨씬 많아졌다. 그녀의 몸에는 아직도 그때 맞은 회초리의 흉터가 남아 있었다.

그것이 고작 반년 전의 일인데, 아직도 몸에 흉터가 선명히 남아 있는데 재클린이 혼자 살아남으려고 자신에게 잘못을 덮어씌운 주인마님에 대한 원통한 마음을 푸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니까 재클린은 마음껏 클로에를 미워할 수 있었으면 했다. 그녀가 변화하는 것은, 특히나 이렇게 다정한 얼굴로 자신들 같은 한낱 하녀들을 배려해 주는 일 같은 것은…… 정말이지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재클린은 당황한 얼굴로 벌벌 떨면서도 클로에에게 허리 숙여 인사하지 않았다.

‘마님은 이 일로 내게 앙심을 품게 되겠지?’

재클린은 생각했다.

‘어쩌면 내게 불이익이 돌아올지 몰라. 다시 한 번 자신의 잘못을 내게 덮어씌울지도 모르지.’

감히, 부엌 하녀 주제에, 감히, 공작부인께 인사를 드리지 않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마주 대하다니 크게 경을 칠 일임이 분명했다. 다른 귀족가 같았더라면 매를 실컷 맞고 쫓겨나더라도 할 말이 없을 일이었다.

재클린은 클로에를 보았다. 마침 클로에도 꼿꼿하게 서 있는 재클린을 발견했다. 허공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재클린은 움찔 놀랐다.

처음이었다. 마님과 눈이 마주친 건.

이번에 그녀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이렇게 직시하게 된 클로에의 눈은…… 재클린의 기억보다 훨씬 맑고 깨끗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눈에는 앙심도, 적의도 없었다.

눈이 마주치자 클로에는 재클린에게 생긋 웃어 주었다. 비웃음이나 비꼬는 미소가 아닌, 진심 어린 상냥한 웃음.

재클린을 향해 그녀의 입술이 소리 없이 달싹였다.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 입술 모양으로만 전달하는 말이었지만, 그런 식의 말이라도 재클린은 단 한 번도 주인마님께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지금껏 주인마님은 주방장도 아니고 한낱 부엌 하녀 따위에게 직접 말을 거는 일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너를 이해한단다.’

클로에는 물론, 반년 전에 있었던 재클린과의 일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재클린이 얼마나 억울하고 비통했을지 역시 추측할 수 있었다.

그녀가 재클린에게 깊은 공감과 안타까움을 느낀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그녀가 박하정이었기 때문이다.

‘저 아이는 나와 닮았어.’

남에게 모진 소리 한 번 하지 못했던 시절, 그녀 역시 수도 없이 억울한 일들을 겪었다. 결국 그 삶의 마지막에는 책임을 뒤집어쓰고 권고사직을 당하기도 했고.

비록 그런 일을 겪게 된 원인은 달랐지만 클로에는 하녀의 감정을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고작 한 마디, 그것도 고작 입 모양으로 건네는 것뿐이지만 그녀는 자신의 마음이 재클린에게 제대로 전달되길 깊이 바랐다.

한편, 클로에의 입술의 모양을 읽어 낸 재클린은 머릿속이 하얗게 굳어 버리는 것만 같았다.

공작부인이 사라지고, 다른 부엌 하녀들도 하나둘 자신의 일거리로 돌아갈 즈음까지 재클린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마님은, 정말로 변한 걸까?

한낱 하녀들을 직접 신경 쓰고 배려해 주는 이 모습이 지금의 마님의 진짜 모습인 걸까?

* * *

클로에와 엘리는 아이스티가 담긴 트레이를 들고 응접실로 가서 함께 차를 마셨다. 용과 아이스티는 정말 시원하고 달콤해 지금 같은 초여름 날씨에 잘 어울렸다.

그때였다. 응접실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온 것은 한 명의 하녀였다.

“마님, 주인님께서 부르십니다.”

“공작님이?”

클로에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뒷정리를 엘리에게 부탁하고, 하녀의 인도에 따라 알폰스의 집무실로 향했다.

“들어오십시오.”

알폰스의 허락에, 하녀가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집무실에 들어서면서 클로에는 저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보통의 사무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거대한 집무실은, 책으로 가득 차 있어 집무실이라기보단 서재와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양옆으로 책꽂이마다 책과 자료가 가득했고, 그 중앙을 따라 맞은편의 벽에는 높은 창문에서 새파란 여름 하늘이 비춰 보였다.

그리고 유리창의 앞에 책상과, 그가 있었다. 클로에는 걸음을 옮겨 그에게로 다가갔다.

창문으로부터 비춰 들어오는 빛을 역광으로 받고 있는 알폰스는 시가를 물고 있었는데, 왠지 그 모습조차 신비로운 분위기를 띠었다. 그가 붉은 눈동자에 클로에를 담으며 말했다.

“앉으십시오, 부인.”

클로에는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알폰스는 재떨이에 시가의 재를 툭툭 털어 떨군 뒤 말을 꺼냈다.

“일전에 말씀하셨던, 밀크잼의 사업화에 대해 논의할 것이 있어 모셨습니다.”

“아아, 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시는 걸까?’

조금 의아해하면서도 클로에는 담담히 반응했다.

원래 그녀가 생각하던 것은 그냥 밀크잼을 몇 개 만든 뒤 친한 사람들에게 파는 정도의 취미의 연장선상의 일이었다. 그런데 차분히 대화를 나누어 보니, 남편의 생각은 단순히 그 정도가 아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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