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하] 공작부인의 50가지 티 레시피
목차
1장
2장
3장
4장
5장
6장
7장
1장
“어머, 저길 봐. 공작부인이셔.”
“저게 누구야, 고아하신 공작부인이잖아?”
삼삼오오 모여 있는 하녀들이 서로를 향해 속닥거렸다. 시녀 한 명 없이 복도를 걷던 바텐베르크 공작가의 안주인, 클로에는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키득거리던 하녀들은 자신들과 클로에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들으라는 듯 말했다.
“길을 막지 않게 비켜 드리자.”
그러고는 까르르 웃으며 달음박질쳤다. 달려 나가던 하녀들이 뒤처진 한 명에게 이렇게 소리쳤다.
“엘리, 뭐해! 어서 뛰어!”
이전의 클로에였다면 사라지는 하녀들을 ‘아아…… 저, 저기. 물을 좀.’ 같은 말로 붙잡아 보려 노력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클로에는 그것이 의미 없는 일임을 알았다. 의미 없다마다. 오히려 상대들에게 즐거움이나 더 선사하고 말겠지. 하녀들이 완전히 사라지자, 클로에는 눈썹을 찡그렸다.
그녀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엄연히 공작부인의 방임에도 상태가 엉망이었다. 청소는 잘 되어 있지 않아 장식장에 흰 먼지가 끼어 있었고, 아침에 일어난 침대는 여전히 정돈되지 않은 상태였다. 테이블 위의 꽃병에 꽂혀 있던 튤립은 누렇게 시든 지 오래였다.
클로에는 스스로 자신의 침대를 정돈했다.
‘이제 슬슬 꽃병에 새 꽃을 꽂아 두어야지.’
꽃병의 꽃을 가는 것 따위는 마땅히 하녀들이 해야 할 잡일이었다. 안 그래도 할 일이 많은 공작부인이 할 법한 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로에는 스스로 꽃을 구해 올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런 생활에 이미 익숙해진 지 오래였던 것이다.
하녀들과 시종들에게 외면받는 생활. 공작부인이지만 공작부인으로서의 대우를 받지 못하는 생활.
‘벌써 며칠째더라.’
클로에는 협탁 옆의 달력을 넘기며 한숨을 쉬었다.
처음에는 새로운 세계가 당황스러웠다. 그다음에는 주변 사람들의 태도에 놀랐고, 분노했으며, 결국 적응했다.
‘일주일째네.’
클로에는 달력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이 세계’에 떨어진 뒤 며칠이 지났는지를 표시하는 것이었다.
클로에는 달력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자신의 머리를 싸맸다.
“으…….”
이 세계는 그녀의 고향이 아니었다. 그녀는…… 지구의 대한민국이라는 곳에서 태어났고, 자라났다.
그러니까 난데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클로에 바텐베르크’라는 이름의, 하녀와 하인들에게 왕따 당하는 공작부인이 된 것은.
“으아아! 거지 같은 인생!!”
클로에…… 아니, 박하정의, 28년 인생 최대의 위기였다.
* * *
박하정은 남의 눈치만 보면서 살아왔다.
남들 다 하는 대로 12년의 정규교육을 받았고 수능을 쳤다. 남들 다 하는 대로 수능 성적에 맞추어 대학에 갔으며, 남들 다 하는 대로 모 기업 회계팀으로 취업을 했다.
28년을 살면서 박하정이 세상에서 제일 두려워했던 것은 그거였다. 남의 눈 밖에 나는 것. 그래서 직장에서도 그녀는 남의 눈 밖에 나지 않도록 열심히 일했다.
상사가 어떤 일을 던져주든 토 달지 않고 묵묵히 했다. 욕심 많은 동료가 자기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프로젝트를 받아 왔다가 손 놔 버린 것은 늘 박하정의 몫이었다. 그러나 박하정이 업무 외 시간까지 써가며 일을 마무리해 놓으면 그 공은 언제나 프로젝트를 받아 온 동료의 몫으로 돌아가곤 했다.
자기 분야에서의 능력만은 자신 있었다. 이 회사에서 자신이 세운 공만 해도 건물 한 층까지는 아니어도 사무실 하나 세울 정도는 될 것이었다.
그러나 박하정의 그런 노력은 권고사직으로 돌아왔다.
위험성 높고 가망성이 좋지 않아, 모두가 도리질 치던 프로젝트 하나가 당연하다는 듯 박하정에게 맡겨졌다. 언제나처럼 최선을 다해 임했지만 이것만은 그녀의 능력으로도 어쩔 수 없었다. 프로젝트는 처참하게 실패했고 회사는 큰 손해를 보았다.
그리고 그 책임은 온전히 박하정에게 돌아갔다.
사직서를 제출한 그 날 박하정은 자신의 원룸에서 몇 병째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소주를 까며 펑펑 울었다.
울다 지쳐 마룻바닥을 뒤덮은 안주 봉투와 술병의 사이에서 옹송그리고 잠들던 그때, 꿈을 꾸는 상태인지 아닌지도 모를 의식 상태로 그녀는 굳게 다짐했다. 이제 더 이상은 남의 눈치 따위 보면서 살지 않겠다고.
그리고 눈을 뜨니 이곳이었다.
* * *
클로에는 시큰둥한 얼굴로 싸늘하게 식은 대야를 내려다보았다.
하녀가 세숫물이라면서 두고 간 것이었다. 그녀는 손가락 끝을 살짝 담가 보았다. 물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당연하지만 일반적으로 귀족의 앞에 대령되는 세숫물은 적당히 따뜻한 미온수다. 클로에는 그간의 경험으로 이런 냉수를 세숫물이랍시고 들이민 하녀들의 의도가 냉수로 세수하고 상쾌한 아침을 맞이하라는 뜻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벽 너머에서 키들거리고 있을 하녀의 얼굴이 눈에 선했다. 클로에는 아주 잠깐 눈썹을 찌푸렸다가 덤덤한 표정으로 제 얼굴에 찬물을 끼얹었다.
‘적어도 잠은 싹 달아나네.’
수건으로 얼굴의 물기를 훔친 클로에는 스스로 머리를 빗고 드레스를 입었다. 원래라면 하녀들이 해야 할 일이겠지만 클로에의 전속 하녀들은 오늘도 어디선가 빈둥거리고 있을 터였다.
이런 곳에 난데없이 떨어졌지만 그나마 딱 한 가지 다행인 점이 있었다. 클로에, 그러니까, 이 몸의 원래 주인의 기억들이 당연한 듯 박하정의 머릿속에 들어왔다는 것이었다. 그 덕에 이 세계의 생활 습관과 방식, 예의범절 등을 빠르게 습득할 수 있었다.
클로에는 착의를 한 자신의 모습을 전신 거울에 이리저리 비춰 보았다. 혼자 입기 어려운 옷을 입은 터라 완벽하게 깔끔하고 흠잡을 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남들에게 손가락질당하고 경찰차 뜨고 은팔찌 찰 정도도 아니었다.
게다가 클로에는 아름다웠다. 완벽하지 않은 옷매무새 따위 흠도 되지 않을 정도로. 클로에는 8일째가 되는 지금까지도 완전히 적응되지 않아 조금은 남의 얼굴처럼 느껴지는 자신의 얼굴을 만져 보았다.
짙은 밤색의 머릿결이 물결처럼 구불거리며 떨어졌다. 희고 매끈한 피부에, 잘 익은 그린올리브빛 눈동자의 시원스럽게 큰 눈, 아름다운 곡선의 몸매를 가진 그녀는 절세미인까지는 아니더라도 길을 걸으면 누구든 뒤돌아볼 만했다.
박하정은 대한민국 20대 여성의 평균적인 얼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미모를 갖게 되다니 얼마나 기쁜 일인가.
그러나 클로에는 한숨을 푹 쉬었다.
‘예쁘면 뭘 해. 성격이 이 모양인데.’
그녀의 기억 속에서 클로에는 그 얼굴값을 못하는 사람이었다. 아니, 얼굴값을 못한다고 표현하는 건 지극히 온화한 표현이었다.
클로에의 원래 성격은…… 박하정의 트라우마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니까, 어마어마하게 남의 눈치를 보는 성격이었다!
클로에의 기억을 들여다본 순간, 박하정은 몇 년을 투신한 회사에서 권고사직 당한 자신의 성격은 지극히 평범한 축에 속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클로에는 박하정의 다섯 배, 아니 스무 배는 더 남의 눈치를 보았다. 그녀의 모든 행동 원리는 남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그녀는 비굴하고 소심했다. 언제나 주눅 든 어깨와 눈빛은 발에 땀이 나도록 배운 예의범절에도 불구하고 교정되지 않았다. 그 때문에 그녀의 타고난 미모와 열심히 갈고닦은 귀족으로서의 교양은 하나도 빛을 보지 못했다. 맑고 단호한 대신 언제나 웅얼웅얼 혼자 중얼거리는 듯한 말투는 사교계에서도 늘 비웃음거리였다. 자아라는 것이 없는 사람처럼 취향도 패션도 유행을 좇기에 급급했으며, 영애와 영식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취미인 와인에 자신도 관심과 지식이 있는 듯 허풍을 떨었다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이 밝혀져 대망신을 당한 적도 있었다.
남에게 미움받기 싫어서 형성된 그 성격은 모순적이게도 남의 미움과 비웃음만을 샀다.
‘타고난 매력이 이렇게나 많은데 하나도 써먹어 보질 못했어, 불쌍하게도.’
클로에는 거울 앞에서 예의범절대로 양 치마폭을 잡고 인사하는 모양새를 해 보았다. 그녀의 예쁜 얼굴에 매력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그때였다.
문밖에서 까르르 웃어대는 여자들의 즐거운 말소리와 발소리가 들리더니, 노크도 없이 방문이 벌컥 열렸다.
“죄송합니다, 마님!”
하녀들이 전혀 죄송해 보이지 않는 태도와 표정으로 말했다.
“일이 있어서 그만 깜빡 늦어 버렸…… 어머, 준비를 다 하셨잖아?”
일이 있기는 무슨. 클로에는 생각했다. 저들의 태도와 방금 전까지 신나게 놀다 온 듯 들떠 있는 얼굴을 보니 확신이 들었다. 어딘가에 틀어박혀 수다라도 떨다가 이제야 온 거겠지.
원래의 클로에는 본투비 귀족으로, 어릴 적부터 단 한 번도 자신의 손으로 옷을 입어 본 적이 없었다. 거기에 늘 소심한 성격의 그녀라면 하녀들이 늦게 온다고 자기 손으로 채비를 할 생각은 꿈에도 못한 채 네글리제 차림으로 하염없이 기다리며 오들오들 떨고 있겠지.
저들도 분명 그런 걸 기대하고 들어선 것일 테고.
클로에는 팔짱을 끼고 하녀들의 얼굴을 주르륵 훑어보았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래, 채비는 다 했어. 하지만 내가 스스로 채비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희가 태만해도 된다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니지.”
클로에의 당당한 태도에 하녀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딱 봐도 어라? 얘가 왜 이러지? 뭘 잘못 먹었나? 라고 쓰여 있는 것만 같아서 클로에는 속으로 기가 다 찼다.
저건 완전히 이쪽을 얕보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생쥐를 보는 고양이처럼, 한없이 만만하고 자기 아래라고만 느껴왔던 상대가 코를 물었을 때와 같은 얼굴.
게다가 클로에는…… 박하정은 저 ‘얕보는 사람의 얼굴’을 이미 본 적이 있었다. 전 직장의 상사와 동기들이 그녀에게 일감을 떠넘길 때에 자주 지었던 표정이었던 것이다.
“내일은 반드시 제시간에 오도록 해. 안 그러면 용서는 없어.”
“저…… 마님?”
여자들 중 맨 앞에 서 있던 자가 끼어들었다. 클로에는 그녀가 누군지 잘 알았다. 시녀장 콜린 부인이었다.
“뭐지? 콜린.”
“오늘은 평소와 좀 다르시네요.”
콜린 부인은 명백히 비웃음을 띠고 있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제까짓 게 어쩌겠어? 라고 쓰여 있는 듯했다. 쥐가 한껏 용기를 내 콧등을 물었지만 그것조차 가소롭게 생각하는 고양이의 얼굴이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콜린 부인이라면 그럴 만도 했다. 그도 그럴 게, 이 공저에서 대부분의 사용인들이 클로에 그녀를 얕보고 있기는 하지만 콜린 부인은 개중에서도 독보적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클로에의 직속 시녀, 그것도 시녀들을 총괄하는 시녀장이라는 사실을 악용해서 시시때때로 그녀를 괴롭혔다.
실내복이랍시고 음료수를 쏟은 자국이 있는 드레스를 입혀 모두의 놀림거리로 만드는 것은 평범한 축에 속했다. 클로에의 전속 하녀 전원과 모의해서 공작과의 식사 시간을 속여 2시간을 내리 기다리게 만들기도 했다. 명령 불복종과 비웃음, 말 한마디 한마디마다 꼬투리 잡아 비꼬기 따위의 일은 밥 먹듯이 하루 세 번을 꼬박꼬박했다.
비록 자신이 직접 겪은 일은 아니고, 원래의 몸 주인이 겪었던 일이긴 하지만 클로에는 콜린 부인에게 굉장히 화가 났다.
그리고 모든 일들 중, 제일 용서할 수 없었던 일은 그거였다. 어느 날 하루, 클로에의 전속 하녀들이 갑작스레 그녀에게 잘해 주었던 날. 평범한 하녀처럼 친절히 웃으며 클로에를 돕고 친근한 말 상대까지 해 주었다.
클로에는 그게 너무나 기뻤다. 공작저에서 거의 외톨이었던 그녀는 사람의 친절에 굶주려 있었고 따라서 갑작스레 변한 상황이 수상하다는 사실조차 생각하지 못했다. 그냥 자신의 전속 하녀들이 마음을 바꿔 먹은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녀는 하녀들과 콜린 부인에게 친절과 애정을 갈구하듯 매달렸고, 다음 날, 보란 듯이 버려졌다. 다시 괴롭힘이 시작된 것이다.
그 모든 일이 콜린 부인의 계획이었다는 사실을 클로에는 풍문으로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비웃음을 만면에 띠고 있는 콜린 부인을 노려보았다.
“콜린.”
“네.”
“내게 가까이 와.”
콜린 부인은 이번에도 명령 불복종을 할 것처럼 움찔했지만, 그녀는 곧 비웃는 얼굴로 이쪽으로 다가왔다. 클로에가 무슨 일을 할지 궁금했던 것이다.
클로에는 자신의 앞으로 바짝 다가온 콜린 부인을 잠시 보더니,
짜악!
있는 힘껏 그녀의 뺨을 갈겼다.
그 자리에 있던 클로에를 제외한 모두가 경악했다.
완전히 방심하고 있던 콜린 부인은 크게 비틀거리다 가까스로 균형을 잡았다. 그녀는 빨간 고무장갑 같은 손자국이 난 뺨을 손으로 감싼 채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변하든 자네들이 알 바는 아니야. 내가 어떻든 간에 자네들은 내 지시에 따르기만 해.”
클로에는 우아한 동작으로 손을 허리에 얹었다.
“이건 자네들이 감히 업무를 태만한 것에 대한 대가야. 책임자인 콜린 자네에게 대표로 벌을 준 거야. 하지만 만일 이렇게 다시 지각한다면 그땐 뺨 한 대로는 끝나지 않을 거야. 내 말 알아들었나?”
그때까지 완전히 벙찐 얼굴을 하고 있던 콜린 부인은 대답을 하고 싶은 듯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하지만 너무 당황해 목소리가 제대로 안 나왔는지, 클로에는 콜린 부인이 자신의 지시에 응한 건지 반항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어찌 됐든 상관은 없었다. 클로에는 단호하게,
“이만 가도 좋아.”
지시했고 하녀들은 밀물처럼 우르르 문 너머로 사라졌다. 콜린 부인 역시 하녀들의 손에 끌려가듯 가 버렸다.
방문이 완전히 닫힌 것을 확인한 클로에는……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가, 내뱉었다. 그녀는 두 주먹을 꼭 쥐고 허리를 구부린 뒤 부르르 떨었다. 그녀가 소리 없이 허공에 주먹질을 했다.
‘해냈어!’
당연하지만 28년 동안 남의 눈치를 보며 살던 박하정의 성미가 고작 8일 만에 딴사람처럼 바뀔 수는 없었다. 그나마 남의 얼굴을 빌려서라도 떠들어 댄 건 정말 장족의 발전이었다.
‘나 정말 멋있게 말한 것 같아! 아, 속 시원해!’
21세기 대한민국을 살아오던 사람으로서 그녀는 폭력을 선호하지 않았다. 아니, 최대한 지양하는 사람에 가까웠다.
난생처음으로 남의 뺨을 때리는 것이 즐거운 감각은 아니었다. 그것은 공작부인으로서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권력이 묶여 있는 상황이기에, 강한 인상을 심어 줄 방법이 이것밖엔 떠오르지 않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타인의 뺨을 때린 것에 대한 죄책감보다…… 예상을 벗어난 클로에의 말에 멍해진 하녀들의 얼굴을 지켜보는 쾌감이 더 큰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다음번엔 뺨 한 대로는 끝나지 않을 거라고 허세 부리긴 했지만, 사실 지금의 클로에에겐 그것조차 어려운 일이었다.
지구의 근세 유럽과 닮은 이 세계에서는 귀족 부부의 경우 남편의 일과 아내의 일이 정해져 있었다. 여성이 작위를 받은 희귀한 경우가 아니라면 대개 남편은 바깥일을 하고 아내는 저택 안의 일을 돌보았다. 한 해의 예산을 관리하고 사용인들을 감독하는 일 등이었다.
당연히 클로에가 할 일이었지만, 유감스럽게도 클로에의 성격과 적성은 해당 일들과 전혀 맞지 않았다. 사용인들을 감독하는 일은 일찍이 시종장과 하녀장에게로 넘어갔다. 클로에가 예산 관리를 하며 몇 번이나 큰 실수를 하자 보다 못한 집사가 금융전문인을 고용해 일을 맡겨 버렸다.
이런 사정을 공작, 클로에의 남편은 알지 못했다. 남편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았던 클로에는 주인께는 비밀로 해 드리겠다는 집사의 말에 기쁘게 응했던 것이다.
이렇게 되니 클로에는 사용인들이 저를 골탕 먹여도 벌을 주거나 해고할 수 없었다. 봉급으로 협박을 할 수도 없었다. 따라서 클로에는 공작부인이기는 하지만, 예산 관리권도 사용인 감독권도 없는 허수아비 같은 공작부인이 되어 버린 것이다.
여하튼 간에 클로에가 은밀한 쾌감을 만끽하고 있던 그때였다.
방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클로에는 정신을 차리려 고개를 휙휙 저었다.
“들어오세요.”
이 시간에 내게 올 사람이 누가 있지? 라는 의문은 쉽게 풀렸다. 열린 방문으로 들어온 사람은,
“실례합니다.”
머리를 양 갈래로 땋은 어린 여자애였다. 엘리라는 이름의 하녀였다. 이 저택에서 유일하게 클로에에게 호의를 보이는 아이이기도 했다.
“안녕하세요, 마님. 밤새 평안하셨나요?”
“그렇단다. 무슨 일로 찾아왔니?”
엘리가 우물쭈물하는 태도로 대답했다.
“사, 사죄를 드리고 싶어서요.”
“사죄?”
“어, 어제의 일에 대해서요…….”
아. 클로에는 그제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어제 복도를 걷고 있을 때, 하녀 무리가 시시덕거리며 그녀에게서 도망쳤더랬지.
개중엔 엘리도 포함되어 있었다. 다른 하녀가 잡아끌자 이쪽을 미안한 눈으로 계속 돌아보며 끌려 나가던 엘리.
저택에서 클로에에게 제일 호의적인 인물이라지만 엘리는 숫기와 자신감이 없었다. 온 저택의 사람들이 클로에를 조롱거리로 만들 때 홀로 당당히 맞설 정도로 용기 있는 사람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클로에는 그 정도라도 고맙다는 생각이었다. 자신 역시 따돌림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무릅쓰고서라도 클로에를 꾸준히 챙겨 주고 있었으니까.
클로에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괜찮아. 네 의도가 아니었으니까.”
미안함에 눈물을 글썽이던 엘리가 더듬더듬 감사 인사를 했다.
“아, 저, 그리고 말인데요, 마님. 공작님으로부터의 전언이 있어요. 오늘 업무 때문에 바쁘셔서, 저녁 식사 시간이 2시간 미뤄진다고 해요.”
엘리의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갸웃했다. 보통 공작의 전언은 그녀의 시녀나 전속 하녀들에게로 전해지곤 했다.
“고맙구나. 그런데 왜 그걸 네가?”
“아, 저. 콜린 부인이 자신이 전달하고 싶지 않다며, 제게 부탁을…….”
그제야 클로에는 상황을 이해했다. 그녀가 오늘 콜린 부인의 뺨을 때렸기 때문에, 콜린 부인이 자신과 대면하기가 싫어 빨래 담당 하녀인 엘리를 붙잡아 심부름시킨 것이었다.
클로에의 가벼운 감사 인사에 엘리는 황송해하며 돌아갔다.
* * *
방에서 조용히 아침 식사를 한 클로에는 홀로 정원을 산책했다. 더위가 찾아오는 초여름이었지만 바람이 불어 선선했다.
클로에는 생각했다. 모처럼 남의 눈치를 보지 말기로, 내가 원하는 대로 살기로 마음먹었다. 비록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당황스러운 일이 생겼지만 이 다짐은 여전히 유효했다.
그렇다면 지금 클로에, 그녀가 원하는 것은 뭘까?
물론 최선은 원래의 몸, 박하정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이곳은 너무나도 낯설고 그녀에게 적대적이다. 무엇보다 어느 날 하루아침에 남의 자리, 남의 몸을 강탈한 듯한 기분은 전혀 유쾌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으로선 대안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돌아갈 방법을 찾아볼 수조차 그녀에게는 없었다. 이런 문제로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을 리도 없었고.
‘사실, 그곳이 익숙하다는 것 말고는 돌아가야만 할 이유가 딱히 있는 것도 아니지.’
박하정에게 돌아갈 만한 곳이라곤 자신의 작은 원룸뿐이다. 혈육도 없고, 친구는 고만고만한 과 동기나 전 직장 동료 정도고, 그나마 미련을 가질 만한 유일한 것이었던 일자리는 바로 얼마 전에 잃지 않았던가.
클로에는 멈춰 서서 한숨을 쉬었다.
만일 박하정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그다음으로 그녀가 원하는 것은 그거였다. 이 저택의 사용인들에게 더 이상 괴롭힘당하지 않는, 좀 더 평범한 공작부인이 되는 것. 평범한 공작부인이 되어서 내가 맡은 일 정도는 하면서 평화롭게 사는 것.
그러나 이것은 지금 당장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좀 더 장기적인 노력이 필요할 터.
“그다음으로 원하는 것은…….”
클로에가 중얼거렸다.
그것은 명백했다. 피곤하지 않다고 말하면 거짓말인 이 생활, 몸을 따뜻한 온기로 감싸 주는 짧은 휴식이 필요할 때에 줄곧 그리워하던 것이 있었다.
남의 눈치만 보고, 정작 ‘자기 자신’은 없었던 박하정의 삶에서 유일하게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공부도 일도 자신이 하고 싶어서 한 것은 하나도 없었지만 그래도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이 딱 하나 있었다. 이곳에 오면서부터는 그것을 접할 기회를 잃어버렸지만 가능하다면 되찾고 싶었다. 그것이 있다면 이 비정상적인 상황 속에서도 기대어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클로에는 오늘의 석찬 때에, 남편인 바텐베르크 공작에게 할 말을 정했다.
* * *
클로에와 그녀의 남편, 알폰스 바텐베르크의 사이에는 사랑이 없었다.
애초에 가문 간의 이해관계를 위해 이어진 정략결혼이었다. 귀족들 중 대부분이 정략결혼을 하니 억울할 것도 없었다.
바텐베르크 공작가의 가주 알폰스는 사랑하는 이는 없었지만 대를 이을 아내는 필요했다. 바텐베르크가의 위세에 조금의 영향도 미치지 않을 한미한 가문의, 그의 일에 감히 간섭하지 않고 그를 사랑하지 않을 여자.
그런 위치에 그레이가의 클로에만큼이나 적합한 여자는 없었다. 바텐베르크가와 그레이가 사이의 정약은 물 흐르듯 이루어졌다.
클로에는 부모의 손에 떠밀려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의 혼인계약서에 서명했다. 그로부터 13개월이 지났다.
송어 요리를 포크로 찍으며 클로에는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남편의 얼굴을 힐끔거렸다.
그녀의 적응력은 8일 만에 이런 곳에서의 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을 만큼 뛰어났지만 여전히 저자가 자신의 남편이라는 사실만은 적응이 되지 않았다.
우선은 미혼이며 몇 년을 혼자 살아온 박하정, 그녀가 하루아침에 유부녀가 되었으며 생판 모르는 사람을 배우자로 두게 되었다는 사실부터가 낯설었다. 미혼일 때 좀 더 자신에게 집중하며 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유부녀라니! 왠지 모르게 엄청나게 손해를 본 기분이었다.
게다가, 그보다 더 당황스러운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저 알폰스라는 자가…… 어마어마하게 매력적이었던 것이었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곧은 머리칼이 눈부셨다. 그 아래로 완벽한 선을 이루고 있는 이목구비와 턱선, 오랜 검술 수련으로 다져진 단단한 근육으로 가득 찬 육신.
결코 빈약한 미소년이라든가, 여성스러운 외모는 아니었음에도 그에게는 ‘아름답다’라는 수식어가 어울렸다. 넓은 어깨와 들어찬 근육이 아름다운 선을 만들어 내고 있는 팔뚝,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진홍빛의 눈빛은 뇌쇄적인 성적 매력마저 느껴졌다.
물론 클로에 역시 아름다웠지만, 감히 알폰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 사실을 클로에는 남의 일인 양 덤덤하게 생각했다.
부와 권력, 미모와 능력, 강인한 무력을 모두 가지고 있는 알폰스 바텐베르크, 그는 모든 여자들이 원하고 갈망할 만한 남편감이었다. 실제로도 클로에와의 혼인 이전에 그는 수많은 영애들의 연서와 청혼을 받았다.
그런 남자가 자신의 남편이라는 건 행운이라고 할 법했지만…….
클로에는 껄끄러운 기분으로 송어 요리를 씹어 넘겼다.
‘결혼해 본 나만은 알 수 있어. 그는 좋은 남편감이 아니야. 오히려…….’
……어떻게 보면, 최악의 남편감이라고 할 만했다.
그는 누구도 사랑하지 않고 어떤 여자에게도 애정을 줄 수 없으니까. 클로에가 그에게 받은 것은 많았다. 공작부인이라는 어마어마한 지위, 거대하고 아름다운 저택과 수백 벌의 드레스, 어지간한 대귀족도 손에 넣기 어려운 진귀한 보석들…….
그러나 그는 인간적인 관심과 다정함만은 주지 않았다. 그와 그녀가 결혼한 이 13개월 동안 내내.
“요리가 입에 맞으십니까, 부인.”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클로에는,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퍼뜩 놀랐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남편, 알폰스가 붉은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서는 그 어떠한 관심도, 진심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온전히, 완전히 예의상으로 건네는 말이었다. 비록 진심은 없을지언정 그는 남편으로서 아내를 대할 때의 필요한 예의를 갖추는 것만은 중요시했다.
두 사람 중 어느 한쪽에게 어떤 일이 생기지 않는 이상, 저녁 식사만은 반드시 부부가 함께하는 일 역시 그중 하나였다.
클로에 역시 예의상으로 미소 지었다.
“네, 무척이나.”
“다행입니다.”
클로에는 알폰스의 눈빛이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그의 시선에는 꼭 바늘로 콕콕 찌르는 듯한 위압감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익숙한 공작저의 사용인들조차도 눈을 마주치지 못할 정도로 강한 존재감을 가진 남자였다. 심약했던 과거의 클로에가 그를 편하게 느낄 수 있을 리 없었다. 클로에는 알폰스를 두려워했다.
안 그래도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클로에는 자신이 두려워하는 남편에게 무언가를 요청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사랑은 없다 한들 부부간인데, 평생을 함께해야 할 반려자인데도 뭘 먹고 싶다는 말조차 하지 못했다.
클로에가 자신에게 아무것도 요구한 적이 없다는 사실은 알폰스 역시 눈치채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아내에게 공작부인으로서 필요할 만한 것(호화로운 드레스와 보석 등)은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제공하고 있었다. 자신의 의무는 거기까지였다. 클로에가 무언가를 요구한다면 결코 거절하진 않겠지만 먼저 말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그녀가 필요한 것을 찾으려 애쓸 이유도 없었다. 클로에에 대한 그의 관심은 딱 그 정도였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알폰스이므로, 그는 자신의 아내가.
“저,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공작님.”
혼인 뒤 13개월 만에 처음으로 무언가를 요구했다는 사실에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이쪽을 향하자 클로에는 입 안이 조금 마르는 것이 느껴졌다. 고작 말을 건네고 있을 뿐인데, 해선 안 되는 일을 저질러 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그녀를 잠시 무표정한 눈으로 바라보던 공작이 물었다.
“무엇입니까, 부인.”
클로에는 용기를 내어 말했다.
“차(茶)가 필요합니다.”
* * *
클로에의 필요한 것이 있다는 말에 알폰스가 제일 먼저 떠올린 것은 당연히 보석이었다. 혹은 화려한 드레스.
여태껏 알폰스가 보아 왔던 여자들 중 보석을 마다하는 자는 없었다. 아니, 남자라도 그러할 것이다. 만에 하나 이혼을 하거나 뜻밖의 사고가 생긴다 해도 수중에 남는 값진 사유 재산. 일반적인 금전 감각을 가진 자 중 그러한 보석을 싫다 하는 이는 없을 터.
혹은 드레스 역시 가능한 선택지였다. 알폰스의 편견에 의하면 여자란 아름답고 화려한 것에 사족을 못 쓰는 족속이다. 이제껏 유명 디자이너에게 의뢰하여 제작한 드레스를 선물했을 때 이를 거부한 여자는 없었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여태껏 알폰스가 클로에에게 제공한 보석과 드레스는 차고도 넘칠 정도였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보석 따위 아무리 사들여도 바텐베르크 가의 부에는 발끝만큼도 영향을 주지 못할 것이다.
그런 오만한 생각을 한 알폰스는 말없이 와인 잔을 들어 한 모금을 마셨다. 잔을 내려놓은 그는 냅킨으로 손을 닦으며 무감정한 시선을 클로에에게 던졌다.
“무엇입니까, 부인.”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완전히 그의 허를 찌르는 것이었다.
“차(茶)가 필요합니다.”
클로에는 자신의 말이 남편에게 의외의 것으로 다가갔음을 알았다. 그녀는 상대의 허를 찌른 타이밍을 잃지 않기 위해, 재빨리 미리 생각해 두었던 말들을 꺼냈다.
“친정에서 지내던 처녀 시절, 저는 휴식이 필요할 때나 취미로 차를 즐겨 마셨습니다. 아직 결혼 생활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한 지금 역시 낯선 생활의 부담감을 해소할 만한 것이 필요합니다. 차는 그렇게 값비싼 상품이 아닙니다. 아마 공작가의 재정에도 부담되진 않을…….”
“그만.”
어느샌가 식후 담배를 태우고 있던 알폰스가 클로에의 말을 끊었다. 클로에는 알폰스의 미간에 옅게 잡힌 주름을 보고서야, 자신이 그의 자존심을 침범했음을 알았다.
지극히 오만한 이 남자에게는 그녀가 무엇을 원하느냐보다 그녀가 자신의 능력을 티끌만큼이라도 의심했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집사에게 부인의 취미 생활에 부족함이 없을 만한 분량의 차를 발주하도록 지시하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무엇을 사들이느냐는 문제에 대해 내게 일일이 허락받지 않아도 좋습니다. 지급된 예산 내에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구매하십시오.”
“무…… 무엇이든지요?”
“무엇이든.”
알폰스가 단호히 못을 막았다. 클로에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녀가 원한 것은 그저 쉴 때 마실 만한 찻잎 한 통이었다. 그런데 스케일이 이렇게 커지다니!
시가를 깊게 빨아들이며 알폰스가 생각했던 것은 저택 하나와 맞먹을 정도로 값진 드레스와 작은 한 병에 말과 소 값과 맞먹는 화장품 같은 것들이었지만, 클로에의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것은 예쁜 찻잔과 티팟 따위였다.
클로에…… 그러니까 박하정은 차를 사랑했다. 28년 평생을 남의 눈치 보며 공부만 하고 일만 하는 데에 썼지만, 그런 와중 단 하나 그녀의 숨 쉴 구멍이 바로 차였다.
차는 그녀의 유일한 취미이자 즐거움이었다. 비록 남들 다 일할 때 인터넷 고스톱 치고 있던 미친 상사가 그녀의 속이 뒤집어질 때까지 잔소리를 늘어놓더라도, 미친 후배가 그녀가 공들여 놓은 일을 죄다 망쳐 놓더라도 따끈한 홍차 한 잔이면 잠시나마 행복해질 수 있었다.
유일한 취미였으니 당연히 그녀가 차에 투자한 돈과 모아 놓았던 컬렉션만 해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지금 그것들은 그녀의 수중에 없었다. 아마 저 어딘가 다른 세상에 있겠지.
아쉽고 억울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뭐, 어쩌겠는가. 지금 그녀가 잃어버린 것은 그것뿐만이 아닌데.
그래도 이곳에서도 계속 차를 마실 수 있다는 것은 클로에에게 몹시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며, 그녀는 과연 알폰스가 집사를 통해 주문해 준다는 차는 어떤 차일지에 대한 기대를 가슴에 품었다.
* * *
다음 날, 클로에가 일어났을 때에는 그녀의 전속 하녀들이 전원 대기 중이었다. 클로에는 그들의 도움을 받아 착의를 하고 머리를 빗었다. 비록 하녀들의 태도가 몹시 불량하고 손이 거칠긴 했지만 어쨌든 혼자 준비하는 것보다는 빠르고 편했다.
방에서 아침 식사를 마치자 한 하녀가 좋은 소식을 가지고 찾아왔다. 어제 주문했던 차가 도착했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며칠은 기다려야 할 줄 알았는데 굉장히 빨리 도착한 것이었다. 클로에는 대단히 기쁘고 반가웠다. 어서 그것을 받고 싶었기에, 비협조적인 하녀들을 전부 물리고 차를 직접 가지러 갔다.
1층 홀에 다다른 클로에는 순간 멍해질 수밖엔 없었다.
홀에 낯선 나무 상자 같은 것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현관을 통해 밖을 내다보니, 아직도 다 도착하지 않은 상자들을 일꾼들이 나르고 있었다.
클로에는 잠시 그것을 구경하다가 자신이 차를 가지러 왔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정신을 차렸다. 뭔지는 몰라도 가구라도 샀나 보지. 공작은 엄청 돈이 많은 것 같아 보였으니까.
클로에는 근처에서 일꾼들에게 이리저리 지시를 내리고 있던 집사, 키엘에게 도착했다는 차가 무엇인지 물었다. 키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저기 있잖아요.”
“저기 어디요?”
“저기에 쌓여 있습니다, 마님.”
키엘이 예의 바른 손동작으로 어느샌가 사람 키보다도 높이 쌓여 가고 있는 나무 상자들을 가리켰다.
……클로에는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무언가 착각을 했거나. 클로에는 확인하기 위해 다시 한 번 물었다.
“저…… 제가 말하는 차라는 건, 제가 마실 차를 얘기하는 건데요. 뜨거운 물에 우려 마시는 찻잎이요.”
“네, 그렇습니다. 마님.”
클로에는 듣고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저기 쌓여 있는 전부가 주인님께서 발주하신 찻잎이랍니다.”
클로에가 직접 확인을 해 보니, 정말 그 모든 나무 상자들은 찻잎이 맞았다. 온갖 산지와 다원에서 온 수백 가지의 찻잎들.
포장지나 상자, 도자기 병 등에 담은 뒤 다시 커다란 나무 상자에 넣어 뒀는데도 두꺼운 포장을 뚫고 복잡하고도 화려한 향기가 뿜어져 나왔다. 제각기 다른 향을 가진 찻잎들이 모여 만들어 낸 달콤한 불협화음이었다.
클로에는 그 진한 향에 취한 채로 생각했다.
아, 알폰스라는 사람, 자존심이 참 말도 못 하게 세구나.
의도야 어찌 됐건 이렇게나 많이 사다 준 것은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오늘 석찬 때에 그에게 감사 인사를 해야겠다고 다짐하고 있는데, 집사가 다가왔다.
“주인님의 선물은 마음에 드시나요?”
“아…… 네. 매우.”
아직도 얼떨떨한 클로에가 대답했다. 상앗빛 머리를 어깨까지 늘어뜨리고 있는 집사가 친절하게 웃었다.
“앞으로도 필요한 것이 있으시다면 뭐든 말씀해 주세요. 대신 주문해 드릴 테니까요.”
“아…… 네에.”
그러고는 클로에는 홀에서 떠밀려 나왔다. 모든 짐은 방으로 옮겨 드리겠다며 키엘이 등을 떠민 탓이었다.
찻잎들이 전부 그녀의 방에 도착했다. 기념할 만한 첫 티타임을 장식할 차로 클로에는 제일 무난한 향의 찻잎을 골랐다. 적당한 크기로 썰어 만든 브로큰 타입의 새까만 찻잎에서 달콤한 향이 퐁퐁 뿜어져 나왔다.
차통을 들고 차를 마시기 위해 부엌으로 내려가던 길이었다. 그녀는 엘리와 마주쳤다.
클로에가 활짝 웃었다. 이것은 대단히 반가운 일이었다. 클로에는 이전부터 차는 혼자 마시는 것보다 함께 마시는 것이 더 맛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의 첫 티타임에 엘리가 함께해 준다면 분명 즐거울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클로에는 엘리를 티타임에 초대했다.
“저, 정말 죄송하지만 지금은 어려워요, 마님!”
그러나 엘리의 대답은 예상외의 것이었다.
“밀러 부인이 시킨 일이 있어서요. 정말로 죄송해요.”
그렇게 말하는 엘리의 팔에는 빨랫감이 담긴 대야가 들려 있었다.
클로에는 엘리의 손가락이 팅팅 불어 주름진 것을 보았다. 땀에 범벅이 된 머리채와 다소 흐트러진 옷차림도.
클로에는 그녀가 잠깐 쉴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괜찮아, 난 안주인이잖니. 밀러 부인에게 내가 불렀다고 말을 전하고 오렴.”
밀러 부인은 빨래 하녀들을 관리하는 사람이었다. 엘리는 빨래 하녀, 그중에서도 가장 늦게 들어오고 나이가 어린 막내였는데, 그 탓에 자주 선배들의 일을 떠맡았고 제일 바빴다.
선배들이 막내를 부려 먹고 있으면 밀러 부인이라도 자제를 시켜야 할 텐데, 그녀는 막내의 사정 같은 것은 별로 관심 없는 것으로 보였다.
클로에는 그런 엘리가 꼭 직장에 다니던 자신의 모습 같다고 생각했다. 엘리도 이제껏 클로에를 많이 챙겨 주었는데, (비록 그때의 클로에와 지금의 클로에는 다른 사람이지만) 자신도 엘리를 조금 챙겨 주는 것이 뭐가 나쁘겠는가.
엘리는 지하의 세탁실로 달려가 밀러 부인에게 말을 전하고 돌아왔다. 클로에와 엘리는 부엌으로 향했다.
일반적으로 귀족 저의 부엌은 부엌 하녀들의 공간이다. 평범한 귀족 여인이라면 그 안에서 무언가를 하기는커녕 발 한 번 들이는 법이 없기 마련이다. 귀족이 체통 머리 없게 부엌에 들락날락거리는 일은 상스럽고 귀족적이지 못한, 부끄러운 일로 취급되었다.
‘하지만 난 일반적인 귀족이 아니지.’
그렇게 생각하며 클로에는 제 손으로 부엌문을 열었다.
단숨에 부엌에 있던 부엌 하녀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아직 저녁을 준비하기엔 이른 시간이라 하녀들의 수는 많지 않았고, 있는 몇 명도 느긋하게 설거지를 하거나 재료를 다듬으며 자기들끼리 수다를 떨고 있었다.
“마, 마님?”
클로에와 마주친 부엌 하녀들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어렸다. 클로에는 저택 전체에서 안주인의 대우를 받지 못한다. 대부분의 사용인들이 그녀와 마주쳐도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수군덕대며 지나가고는 했다.
그러나 그녀와 마주칠 일이 비교적 적고, 무려 공작부인씩이나 되시는 분께서 직접 주방에 행차한 것에 경황이 없었던 부엌 하녀들은 주인마님께 예를 갖춰 인사했다. 클로에는 답례로 웃어 보였다.
클로에는 엘리를 데리고, 수군거리는 부엌 하녀들의 사이로 걸어 들어가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모든 부엌 하녀들의 시선을 온몸으로 받는 것은 그렇게 즐거운 기분은 아니었다. 클로에, 그녀는 전생의 28년 인생 동안 남들의 시선을 즐겨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렇지만 프레젠테이션을 한다고 생각하고 얼굴에 철판을 까니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본디 귀족들이 부엌을 드나드는 일은 없다지만 클로에는 여전히 21세기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이곳 사용인들의 평소 태도를 봐선 그녀가 차를 우리고 싶으니 뜨거운 물을 가져다 달라고 누군가에게 말해 봤자 무시당할 가능성이 컸다.
기왕 이런 상황인 거, 그녀는 자신이 익숙한 방식대로 직접 차를 우려 보고 싶었다. 그녀가 친히 부엌까지 출동한 데에는 이런 연유가 있었다.
호기심을 견디지 못한 부엌 하녀들 중 하나가 물었다.
“마님, 여기까진 대체 어쩐 일로…….”
클로에는 엘리와 시선을 교환하곤 생긋 웃었다.
“차를 우리러 왔단다. 나는 신경 쓰지 말고 일했으면 좋겠구나.”
“차…… 말인가요?”
부엌 하녀가 낯선 듯이 되물었다.
그럴 만했다. 이곳, 제국에서 차는 그리 널리 퍼진 문화가 아니었다. 완전히 수입품인 것은 마찬가지인데도 차보다는 커피가 더 널리 알려져 있었고, 차를 마시는 사람은 드물었다. 이곳에서 차는 아직 덜 알려진 외국의 오지(奧地)나 마찬가지였다.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클로에는 부엌 하녀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엘리에게 눈짓했다. 차통을 내려놓으라는 뜻이었다.
엘리는 모란 무늬가 양각 조각된 고급스러운 차통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어찌나 긴장했는지 삐걱거리는 소리가 다 날 것만 같은 동작이었다. 그녀는 난생처음 만져 보는 고급 수입품에 긴장을 해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평민, 개중에도 남의 수발들어 주며 먹고사는 하녀는 평생 가도 한 번 맛보기는커녕 만져 보기도 어려운 것이었다.
클로에가 방금 이곳까지 온 이유를 물었던 부엌 하녀에게 부탁했다.
“물을 끓일 주전자를 꺼내 주겠니?”
부엌 하녀는 잠시 멍한 얼굴을 하더니 선반에서 주전자를 꺼내 내왔다. 두꺼운 철 재질의 주전자였다.
“혹시 동으로 만들어진 주전자는 없니?”
“네? 동 주전자요?”
부엌 하녀가 황당한 듯한 얼굴을 했다. ‘어차피 물이 끓는 것은 다 똑같은데 주전자 재질이 중요하냐’는 식의 반응이었다.
물론 클로에가 평범한 공작부인이었다면 부엌 하녀가 저렇게 대놓고 건방진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클로에는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 동 주전자가 있다면 가져다주렴.”
“그냥 쇠 주전자를 쓰시면 안 될까요? 저희가 지금 좀 바쁘거든요.”
하나도 안 바쁜 것이 눈에 보이는데도 그런 소리를 했다. 클로에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안 돼. 찻물은 공기가 많이 남아 있도록 빠르게 끓이는 것이 중요한데, 쇠 주전자는 열전도율이 낮아 너무 느리게 끓거든. 동 주전자로 가져다주렴.”
그제야 부엌 하녀는 동 주전자 하나를 꺼내 왔다. 보기에 500ml 정도의 분량으로 딱 적당해 보였고, 클로에는 그것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엘리에게 물을 끓여 주길 부탁한 뒤 클로에는 다구로 쓸 만한 도자기 다구를 찾았다. 찻주전자나 찻잔은 없었고, 대신 커피팟과 커피잔이 있었다. 엄밀히 말해 커피웨어와 티웨어는 다른 물건이었지만 클로에는 일단 이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뜨거운 물로 다구를 데운 뒤, 커피팟에 찻잎을 넣고 갓 끓기 시작한 신선한 물을 부었다.
모래시계를 뒤집으며 클로에는 생각했다.
‘이젠 우려 나기를 기다리면 돼.’
잠시 뒤, 드디어 모래시계의 마지막 모래가 떨어졌다. 클로에는 스트레이너로 걸러 가며 찻물을 잔에 따라 내었다.
향은 상당히 괜찮았다. 홍차 특유의 안온한 온기를 담은, 적당한 무게감을 가진 향이 퍼져 나갔다. 이 세계에서의 의미 깊은 첫 잔이었다. 클로에는 사풋 설레는 기대감을 가지고 잔을 입에 대었다.
“윽!”
클로에가 얼굴을 찡그렸다. 곁에 서 있던 엘리가 깜짝 놀라 다가왔다.
“마님, 괜찮으세요?!”
음료의 맛을 보자마자 인상을 찡그리는 마님이라니! 어마어마하게 수상한 장면이 아닌가. 엘리의 머릿속에 역사적으로 수도 없이 반복되어 왔던 음료를 이용한 독살 사건들이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그런 건 아니었다. 클로에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냥 차가 잘못 우려져서.”
그렇게 말한 그녀가 고민하기 시작했다. 차는 너무나 맛이 없었다. 마시기 어려울 정도로 쓰고 떫었던 것이다. 그녀가 전생에서 차를 우려 본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고, 이곳에 왔다고 그 실력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닐 텐데도.
어째서일까? 찻잎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았고, 다구 역시 깨끗했다. 그렇다면 문제는 물에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차의 성분 중 99%를 차지하는 것이 물이니만큼 차 맛에 물은 큰 영향을 미친다. 클로에가 부엌 하녀에게 물었다.
“저택에서 쓰는 물은 어디에서 구해 오는 거지?”
귀족들치고 자기 집에서 쓰는 물이 어디서 나는 건지 궁금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그런 것은 하인들이 알아서 할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부엌 하녀는 별걸 다 물어본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매일 아침마다 하인들이 우물에서 길어 옵니다.”
아침에 길어 온 우물물. 문제가 될 만한 것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좋은 물이었다.
‘흔히 아침에 길어 온 우물물이 차를 우릴 때에 쓰기로는 최상의 물이라고 하지.’
차 마시는 사람들 사이에선 일종의 상식으로 통하는 것이었으나 현대 한국인이 우물물 같은 것을 마실 기회가 많을 리 없었다. 클로에 역시 전생에서는 늘 수돗물이나 생수 정도를 마셨다.
‘설마, 그게 문제인 걸까?’
클로에가 엘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엘리, 물을 한 잔 가져다주겠니?”
“네? 네!”
엘리는 물을 한 잔 떠왔다. 아침에 길어 온 우물물이라는 물은 아주 맑고 깨끗했다. 클로에는 그것을 받아 마셔 보았다.
‘목 넘김이 가볍고 맛이 맑아. 익숙한 맛이야.’
클로에가 생각했다.
‘틀림없어. 이곳의 물은 경수가 아니라 연수였던 거야.’
전생, 박하정이었던 시절 그녀는 대학생 때에 운 좋게 대기업이 지원하는 유럽 단기 어학연수 프로그램에 참가할 수 있었다.
그녀가 갔던 국가는 영국이었다. 그때 그녀는 물이 낯설어 고생을 했다. 물이 입에 맞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머리를 감거나 샤워를 할수록 머리카락과 피부가 푸석푸석해졌던 것이다.
마실 때마다 혀에 닿는 물의 질감이 무거웠다. 차를 우리려 시도하자 차가 잘 우러나지 않았다. 영국인이었던 룸메이트가 설명하길, 유럽의 물은 미네랄이 많이 포함된 경수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물에 석회가 섞여 있어서 그래. 차는 3~4분 이상 우리는 게 좋아.’
미네랄이 적고 물이 맑아 상대적으로 차가 잘 우러나는 한국의 물, 즉 연수에 익숙해져 있던 그녀에겐 낯선 경험이었다.
이곳, 제국의 문화 양식과 생활 방식이 유럽에 가깝다는 것 정도는 척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클로에는 무심코 이곳의 물이 경수일 것이라고 생각하곤, 영국에서 우리던 습관대로 차를 우렸다.
하지만 이곳의 물에서는 미네랄, 특히 탄산칼슘(석회)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이곳의 물이 연수이며, 한국에서 우리던 대로 짧은 시간 안에 차를 우려야 한다는 사실의 방증이었다.
이 사실을 깨달은 클로에는 다시 차를 우리기 시작했다. 실패한 차는 버리고 동 주전자에 물을 끓이고 찻잎을 다시 계량했다. 자신의 입맛에 맞추어 짧은 시간 동안 차를 우려낸 그녀는 조심스럽게 맛을 보았다.
‘맛있어!’
그녀의 얼굴이 스위치라도 켠 듯이 환해졌다. 그녀는 엘리에게도 차를 따라 주며 권했다.
“홍차라고 하는 것이란다. 마셔 보면 고소하고 달큰한 몰트(malt. 맥아)의 향이 느껴질 거야. 엘리는 처음 마셔 보는 것이니, 설탕을 타서 마셔도 괜찮아.”
클로에는 집게로 각설탕을 집어 주었다.
이 값비싼 음료를, 마님께서 직접 정성스레 준비를 해 주니 엘리는 황송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엘리는 거의 찻물이 코로 넘어가는지 입으로 넘어가는지 모를 기분으로 한 모금을 마셨다.
‘아……!’
그녀의 입 안에서 난생처음 느껴보는 독특한 향기가 피어올라 비강을 채웠다. 맹물과는 달리 비단처럼 매끄러운 질감이 혀를 감싸는 것이 느껴졌다. 따뜻한 온기가 배 속을 데웠다.
설탕을 넣어 달달한 맛과 홍차 본연의 달큰한 향이 어우러져 처음 마셔 보는 것이지만 어쩐지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엘리는 마음을 빼앗기는 것만 같았다.
클로에가 조심스레 물었다.
“맛이 있니?”
엘리가 안경 아래의 눈을 감탄으로 적시며 대답했다.
“마, 맛있어요……! 향도 맛도, 너무나 달콤해요!”
그제야 클로에는 안심한 듯 웃었다.
그러는 동안, 따스하고 달콤한 향기는 부엌 가득히 퍼져 나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부엌 하녀들이 그들을 힐끔거리게 만들었다. 개중에는 그 낯선 향에 내심 침을 삼키거나 입맛을 다시는 하녀들도 있었지만 클로에와 엘리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럼, 자리를 편한 곳으로 옮길까?”
클로에가 응접실이 있는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엘리는 다구를 얹은 쟁반을 받쳐 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차를 맛본 소녀의 얼굴에 잔잔한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 * *
클로에는 자신의 방 창가에 앉아 초여름의 물오른 정원의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지난번의 티타임으로 클로에가 깨달은 것은 이곳의 물이 연수라는 사실뿐만이 아니었다. 이곳에서 차가 낯선 문화인 이유 역시 물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녀가 전생에 살았던 지구, 특히 그곳의 유럽은 음료 문화가 무척이나 발달되어 있었다. 예컨대 영국에서는 맥주와 홍차, 프랑스에서는 와인과 커피를 일상적으로 마셨으며 물은 거의 마시지 않다시피 했다.
그 이유는 유럽의 수질 때문이었다. 경수이며 석회질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 유럽의 물은 맛이 없고 몸에 좋지 않았다. 그러니 맛없는 물 대신 맛있는 술과 차를 일상적으로 마셔 댔던 것이다.
‘그에 반해, 이곳의 물은 무척 깨끗해.’
물이 맑은 제국에서 일상적으로 마시는 음료는 물로도 충분했기에 차 문화가 그렇게 발달할 필요가 없었다.
이곳의 주변 국가들 중에는 차를 즐겨 마시는 곳도 있다고 들었지만, 그중 대부분이 오만한 제국에게 야만국의 취급을 받는 곳들이었다. 기호식품으로서의 음료로 이미 술과 일찍 들어온 커피가 자리를 잡고 있는 제국에서, 차는 야만국이나 마시는 천한 음료였다.
클로에는 그 사실이 씁쓸했으나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엘리만 해도 홍차를 무척 맛있게 마셔 주지 않았던가.
그녀가 차를 맛있게 마시는 엘리의 모습을 떠올리며 엄마 미소를 짓던 그때였다.
똑똑.
갑작스러운 노크 소리에 클로에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 시간, 이때에 자신에게 올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문 뒤의 누군가에게 들어와도 좋다고 말했다.
그녀의 문을 밀고 들어온 사람은 정말이지 예상 밖의 인물이었다.
“밀러 부인?”
접었던 자국이 그대로 있는 앞치마를 두른 밀러 부인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자신의 최고 윗사람인 공작부인을 대하는 표정이라 보기에는 불손해 보였지만 클로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마님.”
“뭐지?”
“앞으로는 일하는 아이를 데려가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클로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밀러 부인은 불친절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일하는 데에 지장이 생깁니다. 엘리에겐 벌을 주었습니다.”
클로에는 자신의 귀를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명령으로, 밀러 부인에게는 미리 말하고 데려간 것인데 엘리에게 벌이라니?
“내 명령으로 데려간 것인데 왜 엘리에게 벌을 주었지?”
“하녀를 다루는 것은 제 일입니다. 마님께서 참견하실 이유는 없습니다.”
밀러 부인이 비웃으며 말했다.
이건 말도 안 된다. 공작가의 안주인인 자신에게 명령의 우선권이 있는 것이 당연한데, 이 사람은 지금 자신의 명령이 클로에의 것보다 상위에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지 않은가. 분명한 월권이었다.
클로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단호한 눈을 하고 밀러 부인을 곧은 시선으로 보았다. 밀러 부인이 흠칫하는 것이 보였다.
“이유가 없다니? 내가 바로 이 바텐베르크가의 안주인인데, 어떻게 이유가 없을 수 있지?”
“그, 그건…….”
“밀러 부인, 자네의 윗사람이 누구지? 내가 윗사람인가, 자네가 윗사람인가? 대답하게.”
밀러 부인은 클로에를 이전의 그 매우 소심하고 심약한 클로에로 생각하고 방심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어, 이게 아닌데.’라고 쓰여 있는 듯한 당혹한 얼굴로, 엉겁결에 말했다.
“마, 마님께서 윗사람이시지요.”
“그런데 어떻게 내 명령보다 자네의 명령을 우선시할 수 있지? 나는 바텐베르크의 정당하고도 명백한 안주인일세. 그런데도 내 권위에 도전한다는 것은, 자네는 바텐베르크 공작가의 권위에 도전하겠다는 것인가?”
“그, 그럴 리가요! 아닙니다, 마님!”
밀러 부인이 불에 덴 듯 놀라 말했다. 클로에는 무섭지 않지만 바텐베르크는 무서운 모양이지. 클로에가 속으로 실소했다.
클로에는 과거의 클로에가 밀러 부인에게 당했던 수모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콜린 부인이 음료수 자국이 뚜렷한 옷을 입혔을 때에 제일 큰 소리로 웃고 조롱한 자도 밀러 부인이었다.
클로에는 맑지만 강단 있는 목소리로 명령했다.
“자네의 윗사람이 바로 나라는 사실을 기억하게. 앞으로 또다시 감히 내 권위에 도전하고 지시를 거부한다면, 바텐베르크가의 안주인으로서 자네에게 적합한 벌을 내릴 수밖에 없네.”
“며, 명심하겠습니다, 마님…….”
밀러 부인은 허리를 숙이더니 도망치듯 허겁지겁 클로에의 방에서 나가 버렸다.
* * *
클로에가 직접 확인하러 가 보니 엘리는 벌로 뒷마당에서 수백 벌의 옷들을 혼자서 널고 있었다. 뙤약볕이 점점 따가워지는 초여름이었다. 어린아이가 혼자 하기에는 지나친 일이었다. 클로에는 엘리에게 벌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그녀를 데리고 나왔다.
“목이 마르지? 들어가서 쉬자. 차라도 좀 마실래?”
“저, 정말요?”
클로에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차통을 가지고 응접실로 내려왔다. 응접실 소파에 편히 자리를 잡고 앉은 그때였다.
“어이쿠, 죄송합니다. 아무도 없는 줄 알고.”
갑작스레 열린 응접실의 문 뒤에는 바텐베르크 기사단의 제복을 입고 있는 남자 세 명이 서 있었다.
클로에는 그들이 기사단 건물과 제일 가까운 문인 서문으로 가려고 했음을 눈치챘다. 서문으로 가는 제일 빠른 길이 응접실을 가로질러 가는 것이었던 것이다.
“즈,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들.”
세 기사 중 매끄러운 검은 머리를 빗어 넘긴 남자가 머쓱하게 웃었다.
그가 도로 문을 닫으려고 할 때에 클로에는 보았다. 세 명 전부가 상체까지 땀에 젖어 있다는 사실을.
그 사실을 깨달은 클로에는 문이 닫히기 전에, 자기도 모르게 외쳤다.
“저, 차 한잔하고 가실래요?”
“엥?”
* * *
세 명의 기사들이 어색한 모양새로 긴 소파 하나에 모여 앉았다. 분명 이 공작저에서 몇 년을 지내왔겠지만, 저택 본관 응접실에 둘러앉아 본 것은 처음일 터였다.
어쩌다 보니 다우(茶友)가 넷으로 늘어난 클로에는 검은 머리의 기사의 주도로 세 남자를 소개받았다. 왼쪽 끝에 앉아서 응접실을 두리번거리는 남자는 발트, 오른쪽 끝에 앉아서 떠들고 있는 검은 머리의 남자가 제이콥, 곧 세상이 멸망할 듯 심각한 얼굴로 가운데에 앉아 입을 다물고 있는 남자가 카인이었다.
“평기사인 저희가 감히 마님의 초대를 받다뇨! 이건 영광입니다. 영광이고 말구요! 설령 아무것도 얻어먹지 못한다고 해도 저희는 오늘 일을 평생의 자랑거리로 삼을 겁니다. 정말입니다.”
“아아, 네…….”
제이콥의 망언에 카인이 그의 옆구리를 찌르는 것이 보였다. 제이콥의 높은 텐션을 감당하지 못한 클로에가 어색하게 웃었다.
공작저에서도 기사들만은 클로에를 적대적으로 대하지 않는 편이었다. 이것은 기사가 하녀 하인들에 비해 특별히 착해서 그렇다기보단, 그들이 클로에를 만날 일이 워낙 없기 때문이었다.
갑작스레 기사들과 같은 자리를 함께하게 된 엘리는 잔뜩 얼어 있었다. 빨래 하녀와 기사는 어지간해서는 마주칠 일이 많지 않았다.
제이콥의 끊임없는 수다를 영혼 없는 “네.”, “그렇군요.”, “아아.”로 받아치면서 클로에는 머릿속으로 어떤 차를 우리면 좋을지를 고민했다.
함께 차를 마실 사람은 총 네 명. 그들 모두가 땀을 많이 흘렸고 지쳐 있다. 티는 내지 않고 있지만 분명 더울 테지. 그런 사람들과는 어떤 차를 마셔야 가장 맛있게 마실 수 있을까?
떠오르는 것은 단 한 가지밖에 없었다.
* * *
부엌으로 달려간 클로에가 응접실로 돌아온 건 10분이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녀는 은쟁반에 유리잔 다섯 개와 티스푼 다섯 개, 그리고 오렌지빛으로 빛나는 액체가 들어 있는 커다란 자(jar)를 받쳐 들고 비틀거리며 돌아왔다.
기사들과 엘리는 불에 덴 듯 놀라 벌떡 일어나 그녀가 든 것을 대신 들어 응접실 탁자까지 옮겼다.
“세상에, 제게 시키지 그러셨어요!”
엘리가 울상으로 말했지만 클로에는 말없이 웃어 보일 뿐이었다.
다섯 명은 다시 소파에 둘러앉았다. 클로에가 설명했다.
“과일 아이스티라는 거예요. 시원하고 달콤해서 아주 맛있어요. 드셔 보세요.”
클로에가 자를 들어 각자의 유리잔에 아이스티를 한가득 따라 주었다. 역시 놀란 엘리가 자신이 하겠다며 말렸지만 클로에는 듣지 않았다. 엘리는 마님께서 친히 따라 주시는 음료가 여전히 송구스러운 것 같았다.
기사들은 각자가 받아 든 유리잔을 멀거니 들여다보았다.
오렌지빛으로 빛나는 투명한 액체는 아름다웠지만 낯설었다. 자몽으로 보이는 과일이 썰려 들어가 있는걸 보아서는 과일 주스 같기도 하지만 주스와는 좀 달랐다.
자 안을 가득 채운 얼음과, 잔 밖으로 송골송골 맺히는 물방울이 시원해 보였다.
“이거, 차예요?”
눈을 둥그렇게 뜨고 있던 발트가 물었다.
“차라면 뜨거운 음료가 아닙니까?”
제이콥도 물었다.
“…….”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던 카인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료들의 의견에 동조하는 것 같았다.
클로에가 빙긋 웃으며 설명했다.
“물론 차는 뜨겁게 마실 수도 있지만 차갑게 마시기도 해요. 이건 진하게 우린 홍차에 얼음을 넣어 식힌 거예요. 자, 한번 들어 보세요.”
이 낯선 음료에 제일 먼저 입을 댄 건 발트였다. 발트는 갈증이 나는지, 유리잔 속에 든 것을 한입에 죄다 털어 넣었다.
“윽!”
“뭐, 뭐야, 발트. 왜 그래?”
“이거…… 정말 맛있어.”
발트가 놀란 듯이 말했다. 그걸 본 엘리 역시 아이스티를 맛보았다.
“와! 세상에. 이건……!”
엘리가 더듬거리며 외쳤다.
“저, 정말 달콤하고 시원한걸요. 너무 맛있어요!”
발트에 엘리까지 궁금하게 하는 반응이 이어지자, 나머지 인원들도 앞다투어 아이스티를 마시기 시작했다.
“우왓…… 갈증이 싸악 풀리는데.”
“어디에서도 맛본 적 없는, 아주 특이한 맛이야.”
“이야, 이건 정말…… 너무 달지 않고 고급스러운 맛입니다. 이런 걸 다 먹게 되다니…….”
삽시간에 소란이 일어났다. 클로에는 무척이나 기쁜 듯이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우지 못했다.
“입맛에 맞으시다니 다행이에요. 아직 많이 남았는데, 더 드실 분?”
“저!”
“저요!”
그녀의 선택은 탁월했다. 땀 흘리고 지친 사람들은 아무래도 뜨거운 음료보다는 시원한 것을 마시고 싶을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시원하면서도 달콤해 처음 마시는 사람도 맛있게 마실 수 있는 과일 아이스티를 선보인 것이다.
만들기가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진하게 우린 홍차를 얼음이 가득 들어 있는 주전자에 부어 식힌 뒤, 설탕 시럽과 과일을 넣으면 되니까.
세 명의 기사들과 엘리는 클로에의 기대보다도 더 맛있게 과일 아이스티를 마셔 주었다. 클로에는 여럿이서 차를 마시는 것은 역시 즐겁다고 생각했다.
* * *
바텐베르크 기사단의 평기사 제이콥과 발트, 카인은 언제나 찹쌀떡처럼 철썩 붙어 다니는 걸로 유명했다. 기사단 내에서는 ‘삼총사’나 ‘그 세 명’이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 기사 삼총사가 오늘은 자랑을 하느라 야단이 났다.
“그래서 말이지! 아리따우신 마님께서 말이야, 여신처럼 자애롭고 천사처럼 다정한 얼굴로 웃으면서― ‘더 드시겠어요?’라고 말씀하시질 뭐야!”
기사단 내에서 최고의 수다력을 자랑하는 제이콥의 말을 들어 주는 사람은 어지간해서는 발트와 카인뿐이었지만, 오늘은 몇 명의 기사들이 관심을 보이며 둘러앉아 있었다.
둘러앉아 있던 기사들 중 한 명이 손을 들고 물었다.
“그게 그렇게 맛있어?”
“고오럼!”
제이콥이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카인, 내 말이 맞지? 엄청나게 맛있었지?”
카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이콥은 한층 우쭐하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건 정말이지…… 크으, 마셔 보지 않은 너희는 상상할 수도 없을 거야. 어디에서도 맛본 적 없는, 아주 특이하면서도 기묘한, 달콤하고도 굉장한 맛이었다고.”
“맞아, 맞아.”
발트가 동조의 표시를 했다. 둘러앉아 있던 기사들은 더더욱 관심을 보였다.
아주 맛있고 기묘한 신비의 음료와 아름다운 공작 마님! 관심이 모이지 않으면 더 이상할 주제였다.
모여 있던 기사들 중 한 명이 미심쩍은 얼굴로 끼어들었다.
“말도 안 돼. 나도 몇 주 전에 저택에서 마님을 뵀는데, 마님은 다른 사람과 눈도 못 마주치고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것 같던데.”
“뭐라고! 그럴 리가 없어. 감히 여신님 같은 우리 마님을!”
제이콥이 분노하며 검을 빼어 들었다. 진검이었다.
“결투다! 톰슨, 마님을 모욕하다니 용서할 수 없다!”
“그래! 마님에게 함부로 말하는 건 용서 못 해!”
제이콥과 발트가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그들의 ‘우리 마님 까면 사살’적인 반응에 기겁한 톰슨은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때였다.
“웬 소란이냐?”
“헉, 단장님!”
하라는 수련은 안 하고 연무장 여기저기에 늘어져 있던 기사들은 순식간에 단장의 앞에 도열했다. 빛과 같은 속도였다. 발롱도르 기사단장은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제이콥, 톰슨. 말해봐라. 무슨 일이지?”
“아, 그게 말입니다. 저…… 토, 톰슨 때문입니다! 톰슨이 마님을 모욕했기 때문에.”
“제이콥, 너!”
제이콥의 졸렬한 프렌드 실드에 그 대상이 된 톰슨이 펄쩍 뛰었다.
“오, 오햅니다! 그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그게 실은…….”
톰슨은 둘이 다투게 된 경위를 발롱도르 단장에게 자세히 설명했다. 제이콥과 발트, 카인이 마님에게 차를 얻어 마시고 돌아왔으며 그것을 기사단에서 자랑했다는 이야기까지 전부.
들으면 들을수록 발롱도르의 미간 주름이 점점 더 깊어졌다. 톰슨의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그가 엄격하게 말했다.
“평기사들이 공작부인께 찾아가 친구라도 된 듯 대면하고 손수 만드신 것을 얻어먹기까지 했다고? 믿을 수가 없군, 공작부인께 그런 실례를 저지르다니.”
발롱도르는 제이콥과 발트, 카인, 그리고 톰슨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너희 넷은 앞으로 일주일간 근신이다. 톰슨 너는 소란을 일으킨 죄다.”
“다, 단장니임!”
제이콥은 당장이라도 단장의 바지 자락에 매달릴 기세였지만 발롱도르가 그런 것을 허락할 리가 없었다. 발롱도르는 그 말만을 남기고 빠르게 자리를 떴다.
발롱도르가 찾아간 곳은 공작의 집무실이었다. 그가 집무실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주군, 발롱도르입니다.”
“들어오게.”
알폰스의 목소리에 발롱도르는 모자를 벗어 들고 집무실에 들어갔다.
일반적인 사무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넓이의 거대한 집무실이었지만, 그만큼이나 어마어마한 양의 책장과 서적으로 들어차 있었다. 집무실이 아니라 서재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였다.
문의 맞은편, 아주 큰 창문의 앞에 책상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알폰스가 앉아 있었다.
“앉게.”
발롱도르는 알폰스의 맞은편에 앉았다. 알폰스는 시가를 입술에서 떼고는 주머니칼을 꺼냈다.
“무슨 일인가.”
“제 휘하의 기사들이 공작부인께 큰 무례를 저질렀다고 해, 용서를 구하러 왔습니다.”
알폰스는 장황한 서론을 좋아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 그를 섬긴 발롱도르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무례?”
“예. 공작저 내에서 우연히 마주친 공작부인을 마주 보고 앉아, 차까지 얻어 마셨다고 합니다.”
“차라…….”
알폰스는 주머니칼로 시가를 적당히 잘랐다.
바로 어젯밤에 집사 키엘을 시켜 자신의 아내가 마실 찻잎의 주문을 넣었던 것이 기억이 났다. 그것을 그새 마셨나 보지.
“용서는 본인에게 가서 구하게.”
“예?”
“부인의 사적인 일에 대해서는 관심 없네. 아직도 모르는가.”
발롱도르는 잠시 당황했던 얼굴을 빠르게 수습했다. 그도 알폰스가 자신의 부인에게 무심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부인과 연관될 일이 워낙 없어 잊고 있었을 뿐이다.
알폰스는 시가를 다시 입에 물고 말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부인에 대한 사소한 일은 내게 보고하지 말게.”
“예, 알겠습니다. 번거롭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발롱도르는 자신보다 스무 살은 젊은 알폰스에게 고개 숙여 사과했다.
발롱도르는 예의를 차려 인사한 뒤 알폰스의 집무실을 걸어 나갔다.
한 반 정도를 가로질렀을 때쯤, 그는 갑자기 떠오르는 것이 있어 고개를 돌렸다.
“주군, 마님께 차를 얻어 마신 수하들이 입을 모아 말한 것이 있었습니다.”
“뭔가.”
알폰스는 시선 한 점 주지 않고 물었다.
“아주 맛있었다고 합니다. 다른 어떤 음료들과도 다른, 아주 특별한 음료라 했습니다.”
“…….”
알폰스의 기준으로는 분명히 사적이고 쓸데없는 이야기였다. 그 사실을 발롱도르가 모를 리가 없었다.
알폰스는 미간에 약간의 주름을 잡고 발롱도르가 있던 자리를 돌아보았다. 기사단장은 어느샌가 사라지고 없었다.
* * *
수백 가지의 찻잎을 쌓아만 두고 있을 수는 없었다. 클로에는 자신의 침실 가까운 곳에 있는 빈방을 빌려 찻잎들을 보관해 두기로 했다.
찻잎을 그 특징과 산지, 이름으로 분류해 정리하는 작업은 많은 시간과 손이 들어가는 일이었다. 기왕이면 남의 손도 빌리면 좋겠지만, 사용인들 중 아무도 클로에를 도와주려 하지 않았다.
결국 클로에는 스스로 모든 차를 정리하기로 했다.
‘적어도 어떤 게 어디 있는지는 기억하기 쉽겠는걸.’
클로에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1/3의 차를 정리하자 반나절이 훌쩍 지나갔다. 지쳐서 잠시 앉아 쉬고 있는데,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 나타났다.
“찻잎을 정리하고 계신 건가요?”
집사 키엘이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다가왔다.
“아, 집사님.”
“바텐베르크의 안주인이신 마님께서 집사님이라뇨. 키엘이라고 불러 주세요.”
“아, 네, 키엘.”
그녀가 하던 일을 돌아보며 키엘이 말했다.
“그건 그렇고 힘드시게 왜 혼자 하시고 계세요? 저도 도와 드릴게요.”
과연, 키엘이 도와주니 일은 두 배가 아니라 몇 배나 더 빨리 진행되었다. 키엘은 정리 정돈의 전문가였다.
함께 정리를 하면서도 키엘은 클로에에게 붙임성 있게 말을 걸어왔다. 이들의 대화는 주로 키엘이,
“힘드시지 않으세요?”
“차는 언제부터 좋아하셨어요?”
“차 우리는 법은 어떻게 배우셨어요?”
등등의 질문을 하고 클로에가 대답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클로에는 예전의 클로에의 기억을 되짚어 보며 예전의 클로에의 행적과 모순되지 않는 답변을 만들어 내기 위해 진땀을 빼야 했다.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집사로서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인걸요.”
드디어 모든 정리가 끝났다. 차통들은 방 안의 찬장과 장식장들을 구석구석 채우고 있었다. 클로에는 뿌듯함을 느끼며 방 안을 훑어보았다.
그녀는 다시 키엘을 돌아보았다.
“저, 키엘. 대신이라고 하기에는 뭐하지만, 키엘에게 차를 대접해 드리고 싶은데요.”
“정말이세요? 저야 좋죠, 영광입니다.”
두 사람은 기쁜 마음으로 차통 몇 개를 나눠 들고 응접실로 갔다. 그리고 거기서 뜻밖의 인물을 마주쳤다.
“아…….”
엘리나 키엘과 다르게 클로에는 마냥 반가워할 수만은 없었다. 결코 편하지만은 않은 상대, 그녀의 남편 알폰스 바텐베르크였던 것이다.
“공작님.”
“부인.”
응접실에 앉아 시가를 문 채 신문을 읽고 있던 알폰스와 차통을 안고 있던 클로에는 조금 어색하게 목례를 했다.
물론 지난 13개월간의 결혼 생활 동안 그들이 이렇게 마주친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의 사이에서는 친근하고 사적인 대화라든가, 하다못해 안부를 묻는 인사조차 오가는 법이 없었다. 주로 알폰스 쪽이 먼저 아무 말 없이 자리를 피해 주곤 했던 것이다.
그리고 분명, 이번에도 그럴 것이었다. 클로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니 예상 밖의 일일 수밖에는 없었다.
“차를 마시려 하는 겁니까.”
알폰스가 먼저 사적인 질문을 해 온 것은.
클로에는 화들짝 놀라 대답했다.
“네? 아, 네.”
“그렇다면.”
알폰스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게도 대접해 주실 수 있습니까. 그 차라는 것을.”
언제나 지극히 무감정하기만 했던 그 눈빛에, 아주 약간의 관심을 담아.
* * *
발롱도르가 구태여 무척이나 사적이고 쓸데없는 이야기를 했을 때만 해도 알폰스는 그것에 관심이 없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식도락에 관심이 없었다. 무척이나 신비롭고 독특하며 맛이 있는 음료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옆에 있다고 한들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그에 대해 빠르게 잊어버리고 다시 일에 집중했다.
그날의 업무를 얼추 마무리 지은 뒤에야 그는 발롱도르가 했던 말에 대해 다시 한 번 반추해 볼 수 있었다.
인간적인 관심과는 별개로 알폰스는 발롱도르 기사단장을 신뢰했다. 알폰스처럼 까다로운 사람이 다른 직위도 아니고 기사단장으로 고용을 하는 건 철저한 직업적인 신뢰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그를 보아온 기간 역시 길었다. 그러니까 알폰스는 대강 알고 있었다. 발롱도르가 자신의 성질을 긁으려고 구태여 사적인 이야기를 꺼낼 사람은 아니라는 것은.
게다가 그는 궁금했다.
‘13개월 만에 무언가를 요구했던가.’
알폰스는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클로에가 자신에게 처음으로 말을 걸었을 때의 그 눈빛을.
지난 13개월 동안 그들은 부부간의 의무와 예의를 치를 때만 제외하곤 서로를 소 닭 보듯 했다.
가끔가다 정말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클로에가 자신을 바라볼 때에, 그녀의 눈빛은 그렇게나 선명하지 않았다.
알폰스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눈을 섣불리 마주치지 못하고 우연히 시선이 닿기만 해도 티가 나게 움찔거리며 떨었다. 알폰스 그의 시선과 말을 주둥이를 쩍 벌린 맹수의 엄니처럼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 차라리 그게 편했다. 최소한 서로를 귀찮게 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런데, 최근 와서는…….’
갑자기 그녀가 달라졌다.
클로에는 자신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예의상의 인사를 나눌 때마다 말꼬리를 흐리거나 자신감 없이 목소리를 떨지 않았다. 똑바르고 선명히 빛나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았고 딱 떨어지는 말투로 무덤덤하게 그를 대했다.
심지어 며칠 전에는 먼저 말을 걸고, 무언가를 요구해 오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것은 정말이지 갑작스러운 변화였다. 꼭, 아내가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리기라도 한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