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먹었어. 됐지?}
오늘도 어김없이 마세준에게 아침 챙겨 먹은 사진을 찍어 보내고는 반쯤 감긴 눈으로 빵을 넘겼다. 부지런히 떠먹기 귀찮아 계란부터 한 번에 먹어 치워 버렸다. 마세준 등쌀에 얼마 전부터 아침을 챙겨 먹기 시작했는데, 엄마 아빠가 차려 주던 아침상에 비하면 초라했지만 그래도 안 먹는 것보다야 나은 선택이긴 했다. 속이 든든해서 그런지 확실히 오전 중에 덜 졸리기도 했고.
[빵 한 장만 더 먹어]
[데리러 갈게, 천천히 내려와]
잠도 모자란 애가 허구한 날 집 앞에 와서 기다리겠대. 그리고, 누굴 빵순이로 아나. 맨날 한 장씩 더 먹으래. 그렇게 투덜대면서도 나는 빵 한 장을 접시 위로 더 꺼내 놓았다.
{그럴 시간에 잠 좀 더 자. 꼴랑 10분 보자고 뭐하러 고생해. 이따 너네 학교로 갈게.}
서둘러 답장을 보내고는 옷을 껴입었다. 마지막 1학기가 갓 시작된 터라 아침저녁으로는 아직 쌀쌀했다. 또 니트 차림으로 나갔다가는 마세준에게 잔소리 주워듣기 딱 좋았다.
“산초, 누나 갔다 올게. 맛있는 거 사 올 테니까 이따 저녁에 신나게 놀자?”
“니야오.”
내가 겉옷을 손에 쥐었을 때부터 스멀스멀 눈치를 살피던 산초가 결국 서럽게 울어 보였다. 또 나가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냐-”
연이은 울음소리에 가슴이 미어진다. 눈초리를 떨구며 현관문을 열었다. 중문 너머로 이산초를 문득 돌아보자 풀이 죽은 얼굴이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최대한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현관문이 잘 잠겼는지 문고리를 한번 힘주어 당겨 보았다. 이산초를 내가 데려온 게 정말 잘한 일일까, 엄마 아빠랑 지냈으면 이산초가 조금은 덜 외로웠을지도 모르는데…….
우유, 케첩, 산초 간식. 오늘 사 와야 할 것들을 머릿속에 하나둘 나열하며 1층 현관을 나서는데, 빌라 앞에 서 있던 차 문이 열렸다. 나도 몰래 흘끔 시선을 던졌다. 운전석 문을 열고 나오는 매끈한 실루엣이 꽤 멋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순간 뜨끔했다. 이런 날도 다 오네, 마세준 아닌 남자한테 눈길도 다 줘 보고……. 마세준한테는 죽을 때까지 비밀이지만. 그대로 인영을 스쳐 지나가려다, 설마 하는 마음에 눈썹을 조금 구기며 뒤를 돌았다.
“뭐야?”
뭐야, 진짜 마세준이잖아.
“데리러 온 댔잖아.”
마세준은 씩 웃으며 그렇게 말할 뿐이었다. 내가 저 차에 대해 꼬치꼬치 물어 오기를 고대하는 사람처럼, 장난기가 다분히 묻어 있는 얼굴이다. 별수 있나, 궁금한 사람이 지는 거지.
“그거 뭐냐고. 아줌마 아저씨 차도 아닌 것 같은데. 새 차잖아.”
“할아버지 전역 선물. 너랑 좋은 데 많이 다니라고 하시더라.”
“아니…….”
“아직 엄마 아빠도 안 태워 줬다. 너 일등으로 태우려고.”
마세준은 내 어깨를 쥐고 등 뒤에서 나란히 걷더니 보조석 문을 열어 주었다. 얼결에 차에 오른 뒤, 차를 가로질러 운전석으로 돌아가는 마세준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세준이랑 둘이 영국에 갔을 때도 할아버지는 최소한의 배려만 해 주셨을 뿐, 우리의 일정에 그다지 관여하지 않으셨다. 해서 보통 쿨한 분이 아니란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통까지 크실 줄이야. 전역 두 번 했다가는 집이라도 한 채 사 주실 것 같았다.
차 안은 흔한 방향제 하나 없이 깨끗했다. 있는 거라곤 대충 적어 붙여 놓은 휴대폰 번호 하나. 마세준답네. 나 같았으면 벌써 오만 잡동사니 다 갖다 달아 놓고 꽂아 놓고 했을 텐데. 운전석에 자리한 마세준은 비죽 웃으며 내게 손을 뻗어서는, 다물리지 않는 내 턱을 꾹- 올려 주었다. 서늘한 손끝이 살갗에 닿았다 떨어지는가 싶더니, 아무래도 아쉽다는 듯 볼을 가만히 쓸다 물러났다.
나는 마세준을 잠시간 응시했다. 어떻게 귀띔 한번 안 해 주고 이렇게 놀라게 하나 싶어 황당하다가도, 한마디 말도 않다가 몰래 차를 몰고 온 정성이 갸륵하고 귀엽기도 했다. 뭐, 어쨌든 잘된 거지. 이제 데이트 더 많이 할 수 있겠다. 늦게까지 막차 생각 안 하고 놀아도 되고.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가뿐하기만 했다.
“새 차 냄새난다.”
나는 기분 좋게 향기를 맡으며 말했다. 초등학생 때 우리 집 새 차 뽑았을 때 생각도 나고……. 역시 이 향은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마세준은 그 말을 속이 안 좋다는 얘기쯤으로 들었는지 제 좌석과 내 좌석의 창문을 조금 열어 주었다.
“방향제 하나 둬야겠네. 바닐라 향으로 할까, 잎새야.”
나는 마세준의 저런 상냥함을 사랑한다. 제 소유물인 자동차에 놓을 방향제 하나에도 내 의사를 물어 오는. 가지런한 손으로 룸미러를 조정하는 마세준을 슬그머니 바라보았다.
“아니면 자몽이 좋아?”
“마세준.”
마세준은 옅게 웃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민간인 된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세상 물정을 잘 모르나 본데, 이제 전 좌석 안전벨트 필수야. 안 그러면 벌금 내.”
“…….”
“안 매 줄 거야?”
아직 채워지지 않은 안전벨트를 살살 쓸어내리며 말하자, 마세준은 눈을 다 접어 가며 웃더니 냅다 입술을 부딪쳐 왔다. 부드럽고 촉촉한 혀가 입술을 간지럽히다 가볍게 빨아 당기자 곧 입술 틈이 벌어졌다. 이 신성한 월요일 아침에 이래도 되나 하는 망설임이 스쳤지만, 그도 잠깐이었다. 나는 단단한 마세준의 팔을 쓸며 따뜻한 숨결을 반겼다. 잘 뻗은 목에다 팔을 감으며 나도 모르게 신음을 흘리자, 뜨겁게 닿았던 입술이 떨어졌다.
“이러다 차에서 일 치겠다.”
마세준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내게서 몸을 뗐다. 아쉬운 마음이야 있었지만 나 역시 심히 공감하는 부분이었기에, 멋쩍은 얼굴로 입술을 닦았다. 마세준은 다시 불쑥 다가와 안전벨트를 매 주더니,
“오늘 입술 색 예쁘다.”
“…….”
깔끔하게 물러서는 대신 내 입술을 쓸며 그렇게 말했다. 얘가 꼭 이런다니까. 끊으려면 딱 끊어야지, 여운은 왜 남겨?
차는 제법 매끄럽게 골목을 빠져 나와 도로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마세준은 준법정신이 매우 투철한 운전자였고 나는 그게 퍽 마음에 들었다. 의젓해 보인달지, 괜히 간질거리는 게 있었다. 핸들 위에 얹어진 손은 마디마디가 길었고, 마세준은 가벼운 셔츠를 걸치고 있었다. 얼핏 보이는 메탈 시계도 어른 같다.
“기분 이상해.”
신호를 받은 차가 멈추어 서는 것과 동시에 내가 말했고, 마세준은 기어를 바꾸어 걸며 나를 슬쩍 돌아보았다.
“뭐가 이상해?”
“그냥, 진짜로 어른이라도 된 것 같아서.”
나는 창문을 완전히 내리고 그 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그렇게 말했다.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미풍이 이마를 간질였다. 어쩐지 기분이 좋았다. 허벅지 위에 가만히 올라가 있던 왼손 위로 느닷없이 온기가 닿았다. 마세준은 곧 내 손을 잡아채 손등에다 입을 맞췄다.
차는 부드럽게 달려 학교 정문을 넘어섰다. 그냥 정문 앞에서 내려 달라는 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마세준은 스터디 있는 날 아니냐면서 부득불 중앙도서관 앞까지 나를 바래다줬다. 기억력도 좋지.
“데리러 올게. 출발할 때 연락할 테니까 밖에서 기다리지 마.”
마세준은 아쉽다는 듯 내 손을 꾹 잡았다 놓아주며 말했다.
“응. 운전하면서 전화하지 말고, 운전 조심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 마세준을 뒤로한 채 차 문을 열었다.
“아 맞다, 마세준.”
“…….”
“너도 오늘 입술 색 예뻐.”
뒤를 돌아 짓궂은 목소리로 말하고 문을 닫았다. 그대로 걷다 말고 잠시 뒤를 돌자, 마세준은 룸미러를 바라보며 내 립스틱이 묻은 입술을 문질러 닦아 내고 있었다. 귀가 새빨갰다. 귀여운 자식.
나이를 먹으면 뭐하나, 이 세상에서 마세준 놀리는 게 제일 재미있었다.
* * *
1층에서 스터디 자료를 출력하고는 카페 한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어설프게 지문을 두어 번 훑고 나자 팀원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나름 열띤 시간을 보내고는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불필요한 친목은 스터디 자멸의 지름길이었다.
그대로 인문관으로 향하려던 내 발길은 편의점 앞에서 우뚝 멈추어 섰다. 잠시 볼을 깨물며 서 있다가 홀린 듯 문을 열었다. 설마 있을까 싶었는데, 커다란 편의점에는 나름 몇 가지 종류의 차량용 방향제가 갖추어져 있었다. 바닐라, 바닐라……. 있다.
“이게 다 있네.”
나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스터디 이후엔 세 시간짜리 강의가 연달아 두 개였다. 월요일은 밥 먹을 시간이 마뜩잖아 쫄쫄 굶다가 뒤늦은 점심을 먹어야 했다. 주린 배를 붙잡고 간신히 필기를 이어갔다. 가방 속 휴대폰이 진동한 건 막 마지막 강의가 끝난 시점이었다.
출발한다는 마세준의 전화를 받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날씨가 좋아도 너무 좋아 보였다. 바람이라도 쐴 겸 건물 밖으로 나왔다. 지나가던 후배에게 영혼 없이 인사를 하고는 입구를 나섰다. 가뿐한 기분으로 주변을 살펴보는데 건물 측면 주차장에서 그새 익숙해진 차가 보였다. 긴가민가하며 몇 걸음 더 걷자, 마세준의 실루엣이 또렷하게 보였다. 가볍게 창을 두드렸다.
“어떻게 벌써 와 있어?”
작은 소리와 함께 창문이 열리더니, 마세준이 씩 웃었다. 몇 시간 못 봤다고 그새 반가웠다.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씰룩였다.
“바람 쐬러 갈까.”
왜 이렇게 일찍 왔냐니까, 대답은 않고. 그래도 바람 쐬러 가자는 말에 신이 나서 냉큼 차에 올라탔다. 아침에는 나지 않던 달큼한 향기가 나고 있었다. 설마 벌써 방향제를 달았나 싶어 송풍구를 바라보고 있는데, 마세준이 뒷좌석으로 팔을 뻗어 종이봉투를 끌어왔다. 따끈한 기온이 느껴지는 종이봉투가 내 허벅지 위에 놓였다.
“뭐야?”
“너 월요일마다 배고프다고 울잖아, 간식.”
“오, 마세준.”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봉투를 헤집자 파니니와 스콘이 보였다. 고소하고 달달한 냄새에 침이 다 꼴깍 넘어갔지만, 나는 아쉬운 마음으로 봉투를 다시 접어 두었다.
“차에 냄새 배잖아. 먹다가 흘리기라도 하면 어떡해.”
“…….”
마세준이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는 게 느껴져 뒤늦게 말을 덧댔다.
“새 차인데 그럼 안 되지.”
“……이잎새, 너 무드 없어.”
마세준은 뜻 모를 이야기를 늘어놓더니, 내 턱을 가볍게 쥐었다.
“차가 중요하겠어, 네가 중요하겠어.”
마세준은 홀더에 꽂혀 있던 아메리카노를 내게 건넸다. 얼른 먹으라는 무언의 강요였다. 나는 잠시 왼쪽 볼을 깨물다가, 봉투를 열어 파니니를 하나 쥐어 올렸다. 하얀 종이를 벗겨 내는 나를 보며, 마세준은 그제야 마음에 든다는 듯 웃었다.
“많이 먹어.”
아직 따끈한 파니니를 맛있게 한입 베어 물고는, 마세준에게도 건넸다. 마세준은 사양도 없이 그걸 받아먹으며 시동을 걸었다.
해 질 무렵의 호수공원에는 인적이랄 게 없었다. 오전의 미풍은 어느덧 쌀쌀맞은 바람으로 바뀌어 있었던 데다, 딱 저녁 식사 시간이었던 탓이다. 마세준은 잔디밭 위에 담요를 펼쳐 주었다. 맥주 캔을 따 건네는 마세준에게, 나는 사이다 캔을 넘겨줬다.
“아, 좋다.”
맥주를 두어 모금 넘기고는 곁에 앉은 마세준의 무릎 위로 덜렁 누워 버렸다. 누구 남자 친구인지 밑에서 올려다봐도 잘생겼다. 아쉽다. 가로등이 조금 더 밝았으면 좋았을걸. 마세준은 나를 내려다보며 가만히 머리칼을 넘겨 주었다. 은근한 웃음을 지어 보이는 마세준을 빤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마세준, 지금 우리 키스하면 너 음주운전 하는 건가? 나 딱 맥주 두 모금밖에 안 마셨는데.”
“…….”
“아니지?”
“아마.”
그런데 뭘 망설이냐는 듯이 마세준을 응시하자, 웃음기를 거두지 않은 마세준의 얼굴이 찬찬히 다가왔다. 가만히 머물렀다가 멀어지는 얼굴을 넋 놓고 바라보다,
“더 해 줘.”
맥주 캔을 저 멀리 치워 버리고는 마세준의 옷소매를 쥐어 가볍게 끌어당겼다.
“아무도 없잖아.”
마세준은 내 눈가를 쓰다듬다가 다시금 몸을 숙여 왔다. 따스한 목덜미를 잡아채 끌어당기자, 마세준이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아랫입술을 깨물어 입술을 가르고 들어서자 마세준은 순순히 제 혀를 내주었다. 뱃속이 간질거릴 만큼 매끄러운 속살을 핥고 나른한 신음을 흘렸다. 마세준은 제 목에 얹힌 내 손을 가벼이 풀어내더니, 나를 안아 올려 제 허벅지 위에 앉혔다. 부풀어 있는 앞섶에서 홧홧한 열기가 느껴졌다.
“집에 가자, 얼른.”
마세준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 허리를 쥐고 맞닿은 몸을 떨어뜨렸다. 나는 다시 마세준 쪽으로 바짝 몸을 당겨 앉았다.
“가자며.”
“응.”
“……이러면 못 가.”
곤란하다는 목소리였다. 나는 비죽 웃으며 마세준의 목덜미로 고개를 늘어뜨렸다. 열이 오른 살갗을 베어 물고 힘주어 빨아 당겼다.
“잎새야…….”
그만하라는 건지, 좋아 죽겠다는 건지 모를 목소리였다. 요즘은 해도 해도 모자랐다. 틈만 나면 마세준이랑 맨살을 맞대고 싶었다. 마음껏 입술을 놀리다 고개를 들자, 마세준이 반쯤 포기한 얼굴로 웃다가 내 머리칼을 정돈해 주었다.
차가 빌라 주차장에 들어서자마자 마세준은 다급히 안전벨트를 풀었다. 나는 마세준이 그러거나 말거나 가방 속에서 방향제를 꺼내 들었다. 뚝뚝 소리를 내며 플라스틱 포장재를 뜯어내 달큼한 향을 한 번 맡아 보았다. 그러고는 방향제를 송풍구에 꽂아 주었다.
“아직 봄이니까 바닐라가 좋겠더라고.”
잠자코 나를 바라보던 마세준은 다짜고짜 내 볼을 잡아채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춰 주었다.
“그냥 편의점 갔는데 보이길래. 여름 오기 전에 자몽으로 바꿔 줄게.”
괜히 겸연쩍어 시선을 틀자, 마세준이 잽싸게 차에서 내려 조수석 문을 열더니 나를 안아 내렸다.
“야아, 하지 마!”
뭔 말을 해도 먹혀들질 않았다.
* * *
차가 생긴 이래 마세준은 정말로 매일같이 나를 데리러 왔고 바래다주었다. 가뜩이나 공부할 시간도 부족한 애가 너무 무리한다 싶어 쭉 걱정되던 참이었는데, 마세준은 오늘도 학과 회식이 끝날 때까지 나를 기다렸다가 집으로 바래다주었다. 단정한 옆얼굴을 바라보다가, 이때다 싶어 운을 뗐다.
“공부하다 늦은 것도 아닌데 이런 날까지 뭐하러 데리러 와. 택시 타고 가면 된다니까, 너도 피곤할 텐데.”
“안 피곤해. 나 좋자고 이러는 거야.”
마세준은 잠시의 말미도 없이 답해 왔다.
“안 피곤하기는……. 잠도 쪼개서 자잖아.”
“괜찮다니까. 너 보면 다 풀려.”
그런 게 어디 있냐, 하고 따지려다가, 문득 나도 마세준을 보면 피로가 가신다는 걸 떠올리고는 입을 다물었다. 우리는 민망할 만큼 자주 만났다. 아니, 매일 얼굴을 봤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마세준의 노력에 기대고 있다는 사실에 미안한 마음이 커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애쓰지 않고도 매일매일 마세준을 본다는 건 어떤 기분이었더라. 같은 교실에서 부대끼고, 아침을 함께 먹고. 그때는 그게 고마운 일인지도 모르고 살았던 것 같다. 너무 당연했으니까.
“마세준.”
“응.”
불러 놓고는 내가 아무 말을 않자, 신호를 받아 멈추어선 마세준이 나를 쓱 돌아보았다.
“잎새야, 왜.”
머리칼을 넘겨 주며 웃는 얼굴이 다정했다.
얼마나 좋을까,
“우리 그냥 같이 살자.”
매일 저 얼굴 보면서 눈 뜨면.
그런 생각으로, 내내 품고 있던 폭탄을 터뜨렸다.
“산초도 너 맨날 보고 싶어 하고, 아침마다 식단 사진 보내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그리고, 밤마다 헤어지는 거 너무 싫어. 아무리 바빠도 잠은 잘 거잖아. 같이 살면 못 해도 하루에 몇 시간은 얼굴 보며 살겠지.”
“이잎새.”
“왜. 싫어?”
마세준은 갓길에 차를 급히 세우더니, 대뜸 창문이란 창문을 다 올렸다. 그러다가 속이 갑갑했는지 다시 창문을 내렸다.
“…….”
그러고는 아무 말이 없었다. 적잖이 놀란 듯했다.
“집에 안 쓰는 방 하나 더 있잖아. 옷방이랍시고 놀려 봐야 뭐해? 옷도 몇 벌 없는데. 그냥 너 들어와서 살면 안 돼? 침대랑 책상만 놓으면 딱일 것 같은데. 각자 방도 있겠다 어느 정도는 영역 보장되고. 막말로 애만 안 들어서면 되지. 난 엄마 아빠랑 싸울 각오 돼 있어. 어쩌면 우리 엄마는 쌍수 들고 환영할지도 몰라.”
차창에 팔꿈치를 얹어 놓고 있던 마세준은 돌연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찬찬히 내 얼굴을 살폈다. 술김에 하는 헛소리가 아닌지 의심하는 눈치였다.
“안 취했어. 고작 맥주 몇 잔에 취할 것 같아?”
“……정말 그랬으면 좋겠어?”
“응.”
“진심이야?”
“그렇다니까.”
마세준은 제 왼손으로 가만히 뒷목을 주물렀다. 그러고는 몇 번쯤 눈을 깜빡였다.
“이잎새.”
“응.”
“나 한번 들어가면 절대 안 나가. 그래도 괜찮아?”
마세준다운 대답에 피식 웃음이 튀어나왔다.
“그러라니까? 누가 나가게 해 준대?”
내 대답이 마음에 쏙 든 모양이었는지, 마세준도 나를 따라 웃었다.
* * *
일은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다. 우리는 마세준네 집에서 육자대면을 했다. 우리 집 세 식구, 마세준네 세 식구. 다 같이 저녁을 먹은 뒤 과일 몇 개를 앞에 두고 모여 앉은 틈을 타 이실직고하기로 했다. 드릴 말씀이 있다는 마세준의 말에 어른들은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저희, 같이 지낼까 합니다.”
마세준은 무릎을 꿇은 채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른들의 눈빛이 마세준과 나를 번갈아 보며 바쁘게 엉켰다. 마세준이 제 방에 들어가 있으랄 때 잠자코 들어가 있을 걸 그랬나 보다. 이렇게 낯 뜨거울 줄은 몰랐지.
“……또 뭐라고. 휴가 나와서 집에 낯 한번 안 비췄던 녀석이 뭐 한다고 뒤늦게 얌전을 빼.”
마세준네 아빠가 싱겁다는 듯 피식 웃으며 포크로 사과를 찍었다. 곧이어 퍼지는 아삭아삭 소리에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얼렁뚱땅 합쳐도 아무도 트집 안 잡을 일을 곧이곧대로 와서 승낙을 받고 있으니, 세준이가 정말 참하긴 참하다.”
우리 엄마의 목소리였다. 동거하겠다는데 참하다는 소리가 웬 말이야. 얼떨떨한 얼굴로 마세준을 돌아봤다. 마세준은 아직도 긴장을 놓지 않은 채, 꽉 다문 턱으로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뭐 필요한 건 없고? 냉장고라도 하나 새로 해 주랴?”
이번에는 우리 아빠였다.
“집은, 안 옮겨도 되겠어? 거기서 둘이 지내기엔 좀 좁을 것도 같은데.”
마세준네 엄마까지. 이로써 네 번째 승낙이었다.
추웠다. 할리우드가 어디 멀리 있는 게 아니었다. 도장이야 졸업 후에 찍는 것으로 하자, 이삿날은 언제냐, 가전이며 가구는 어쩔 거냐, 쟤들 얼굴 빨개진 것 좀 봐라, 우스워 죽겠다. 그런 말들이 오가더니 어른들끼리 식후 다과회가 열렸다. 시끌벅적한 와중에, 나는 얼어 있는 마세준의 손을 당겨 잡으며 싱긋 웃어 주었다. 그제야 마세준도 굳은 얼굴을 풀며 입 끝을 살며시 올려 웃었다.
엄마는 우리 둘을 따로 불러다 넌지시 말을 꺼냈다. 다 좋으니 피임만 단디 하라는 이야기였다. ‘아, 엄마. 우리가 알아서 해.’ 민망한 얼굴을 문지르며 그렇게 말했다가 등짝을 얻어맞았다. 마세준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면서도 내 앞을 막아서더니,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걱정 끼치지 않겠다고. 나는 마세준 등 뒤에 숨어서 손으로 부채질만 벅벅 해 댔다.
* * *
“너 완전히 출가할 작정이야? 무슨 짐이 이렇게 많아?”
“난 분명히 말했어. 절대 못 나간다고.”
차를 가득 채운 짐을 바라보며 혀를 내두르자, 마세준이 제 검지로 내 입술을 누르며 말했다. 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웃었다. 아무렴 어떨까. 기분이 째지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날은 축하를 한답시고 같이 샴페인을 마셨다. 그러고는, 뭐, 밤새 했다. 알몸을 껴안고 잠들었다가 새벽부터 파고드는 손길에 눈을 떴다. 각방을 쓰자던 계획은 그렇게 무산되었다. 마세준은 당연하다는 듯 매일 밤 내 침대로 파고들었다. 이럴 거면 침대 사이즈라도 바꾸자는 말에, 마세준은 단호하게 안색을 굳혔다. 절대 안 될 소리라고.
욕실에 나란히 놓인 칫솔 두 개를 보고 있자면 언제라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정신이 채 다 들기도 전에 등 뒤에서 전해져 오는 마세준의 온기를 느끼는 것도, 엉킨 다리를 밀어내며 ‘야아, 무겁다니까.’ 하고 마음에도 없는 투정을 부리는 것도, 집에 돌아와 따스한 밥 냄새를 맡는 것도, ‘다녀왔어.’ 하고 아직은 어색한 저녁 인사를 나누는 것도, 소박하게 캔 맥주를 나누어 마시다 눈이 맞아 뜬금없이 입을 맞추는 것도. 전부 꿈만 같았다.
어느 주말에는 늘어지게 낮잠을 자다 마세준을 졸라 중국 요리를 시켜 먹었고, 가끔은 부지런히 일어나 조조 영화를 보러 가기도 했다. 새벽 수영을 갔다 와서 종일 섹스를 하는 날도 있었고, 때로는 얼굴 구경하기가 힘들 정도로 서로 바쁘기도 했다.
작은 소음이 잠든 귓가를 간질이는 것 같아 간신히 눈을 떴다. 창을 타고 넘어오는 흐릿한 불빛이 이불 위에 턱을 괴고 있는 마세준을 비춰 주었다. 겉옷을 벗지도 않은 채, 마세준은 그 옅은 불빛에 의지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는 얼굴 뭐 볼 게 있다고.
“왔어?”
“응, 조금 전에.”
“깨우지 그랬어. 밥은?”
오늘 많이 늦을 것 같다는 말에, 별맛도 없는 밥을 혼자 챙겨 먹고 일찍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러다 잠이 들었나 보다. 들어오는 소리도 못 들었네. 부드러운 턱을 문질러 주며 묻자, 마세준이 눈을 감으며 내 손에 제 뺨을 기대 왔다.
“생각 없어.”
“나 한 끼 굶으면 그 난리를 하면서, 왜 넌 저녁을 걸러? 씻고 와, 반찬 꺼내 줄게. 대충이라도 먹어.”
마세준은 침대를 박차고 일어서려는 내 손목을 쥐어 끌어 내리고는, 손바닥에 따스한 입맞춤을 뿌렸다.
“잎새야, 같이 씻을까.”
“응?”
“씻겨 줄게.”
눈을 감은 채 장난스레 손목을 깨물다 핥기를 반복하던 마세준이 곧 나를 안아 일으켰다. 환한 욕실 안으로 들어섰을 때는 이미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뒤였다. 매일 밤 몸을 섞는 우리가 발가벗고 서서 무엇을 할는지는 보지 않아도 훤했다.
따스한 물줄기 아래 서서 마른침을 삼켰다. 얼마 안 가 물줄기가 멎었다. 욕실에는 아직 채 걷히지 못한 냉기가 감돌고 있었다. 몸이 조금 떨려 왔다. 마세준은 단내가 나는 샤워젤을 제 손에 짜내서는 내 뒤로 선 채 부득불 내 몸으로 손을 뻗었다. 이미 빳빳하게 올라선 가슴 돌기 위로 부드러운 거품과 뜨거운 손바닥이 반복적으로 오갔다.
“흣…….”
마세준이 갑작스레 손에 힘을 실어 오는 바람에 밭은 음성이 샜다. 마세준은 내 하얀 둔덕을 한 손 가득 쥔 채 정점을 둥글리기 시작했다. 가쁜 숨이 터져 나왔다. 귓불을 매끄럽게 머금은 입술에서 쉿, 하고 젖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잎새야, 다 울리잖아.”
“…….”
별수 없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벌써 다리에 힘이 풀리려 해, 등 뒤로 손을 뻗어 마세준의 허리춤을 붙잡았다. 가슴에 머무르던 손길이 차차 몸을 타고 내려갔다. 마세준이 아랫배를 느릿느릿 쓰다듬던 와중에 느닷없이 어깨를 깨물어 왔다. 일찍이 발기한 페니스가 허리춤에서 제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 마세준의 손이 비부를 가르고 들어섰을 때는 더 이상 신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잎새.”
“으응…….”
“왜 이렇게 젖었어?”
“…….”
“응?”
부러 곤란한 질문을 해 오는 마세준에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안을 데우던 손가락이 불현듯 빠져나갔다. 몸이 달아 뒤를 돌자, 혼탁한 눈빛을 한 마세준이 서서히 나를 벽으로 내몰기 시작했다. 냉기가 남은 벽에 등이 닿았다. 마세준은 짧게 입을 맞추고 물러서더니 곧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힘없이 무너지려는 왼쪽 다리를 단단히 붙들어 제 어깨에 걸치고는, 그대로 고개를 묻었다.
“하아, 흣.”
참지 못하고 잇새를 비집고 나온 신음이 습한 욕실을 울렸다.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이자, 눈을 감은 채 나를 핥아 올리는 마세준이 보였다. 저릿한 성감이 몸을 가득 채웠다. 젖은 머리칼 속으로 손을 넣어 헤집었다. 마세준의 혀가 음부를 쓸어 올릴 때마다 몸이 뒤틀렸다. 그렇게 한참을 붙들린 채 서 있었다.
“그만, 세준아, 나 못 서 있겠어…….”
아득한 정신을 붙들고 간신히 말했다. 그러고도 한참을 움직이던 마세준은 입술을 떼어 잠시 나를 올려다봤다.
“씻겨 준다고 했잖아, 아직이야.”
“…….”
흥분으로 눈가를 붉게 물들인 채 잘도 떠들고 있는 마세준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발갛게 열이 오른 마세준의 입술은 끈끈하게 젖어 있었다. 그대로 뒤통수를 끌어 다시 아래로 가져갔다. 낮게 웃는 숨이 여체에서 퍼졌다.
정말 더는 버티고 서 있지 못하겠다는 생각에 몸을 늘어뜨릴 즘, 마세준이 몸을 일으켜 두 팔로 내 엉덩이를 받쳐 올렸다. 혼탁한 눈빛을 마주하기 힘들어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오늘은 끝까지 넣어 달란 말을 안 하네.”
“…….”
서운하게. 귓가에 대고 그렇게 중얼거린다.
“……들어가도 돼?”
그러고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기도 전에 단번에 제 것을 박아 넣었다. 불길 같은 격통이 물러난 자리를 채운 것은 저릿한 쾌감이었다. 마세준이 낮게 욕을 짓씹었다.
“……아, 아!”
“말만 안 했지,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데……. 맞아?”
마세준은 그렇게 약을 올리며 자맥질을 거듭했다. 나는 일그러진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성은 하얗게 휘발된 지 오래였다. 도무지 말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입술을 가르고 나온 것이라곤 달뜬 신음이 전부였다.
“왜…… 대답 못 하겠어?”
세게 쳐올리는 힘에 고개를 뒤로 젖히며 잘게 끄덕였다.
“가슴 빨게 해 주면, 오늘은.”
“…….”
“넘어가 줄게.”
허락을 구하는 게 아니라, 가슴을 삼키겠다는 예고였다. 대답할 말미도 없이 습한 열기가 가슴에 닿았다.
“아아! 아, 흐읏…….”
아무런 여과도 없이 내 잇새로 흘러나온 신음에, 가슴을 머금고 있던 마세준의 입술이 다급히 올라와 내 입술을 삼켰다. 마세준의 목덜미를 그러쥐고, 맞물린 입술 틈으로 나란히 신음을 쏟았다.
세면대에 손끝만 간신히 짚은 채 뒤에서부터 마세준을 받았다. 마세준은 눈의 초점을 놓은 채로 내 몸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부끄러워 거울 속 우리의 모습에서 고개를 돌릴라치면 벌이라도 주듯 목을 깨물어 왔다. 마세준이 남긴 흔적 때문에 상체가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가슴이 형편없이 흔들렸다. 그러고도 성이 차지 않았는지, 마세준은 열이 오른 내 몸을 안아 침대 위로 데려가 한참 동안 내려올 생각을 않았다.
붉게 물든 눈으로, 마세준은 내 몸 깊은 곳에 파정하며 곳곳에 입을 맞춰 주었다. 그 작은 입맞춤들이 모두 사랑한다는 말로 들렸다. 몇 번째 사정인지 셀 수조차 없었다. 작은 스탠드만 켜 놓은 어두컴컴한 방은 이미 무거운 성애의 향으로 가득했다. 눈을 감았다 뜨기가 버거웠다. 기진한 몸이 느른하게 가라앉았다.
“잎새야.”
낮게 울리는 목소리에 간신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다정한 시선이 내 얼굴 위에 머물러 있었다.
“응.”
볼썽사납게 갈라진 목소리로, 이불을 끌어와 어설프게나마 가슴을 가리며 답했다. 마세준은 내 어깨 위로 고개를 묻더니, 가만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기를 반복했다. 의미가 명백한 투정이었다.
“왜, 너 사랑하냐고?”
고집스러운 뒤통수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묻자, 마세준이 응석 부리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이 흐리멍덩한 와중에도 그게 귀엽고 짠해 웃음이 났다.
마세준은 자기 인생에 더 바랄 게 없다고 했다. 매일매일 나를 보고, 껴안고, 밥 먹이고. 그게 제 낙이랬다. 어느새 내 쪽으로 얼굴을 향한 채 잠들어 있는 마세준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드러난 등에 입을 맞춰 주었다.
“……사랑해.”
잠든 귓가에 속삭이다가, 매끈한 볼 위에 입술을 한 번 더 내리눌렀다.
“세준아, 사랑해…….”
마세준은 잠결에도 나를 제 몸으로 끌어가 빈틈없이 껴안았다. 웃는 얼굴이었다.
* * *
운이 좋았다. 연이은 면접에 멘탈이 다 너덜거릴 무렵, 나는 그럭저럭 괜찮은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처음 몇 달은 얌전히 눈칫밥을 먹었다. 너무 열 내지도 말고 꾸준히 성실하게만 하라는 엄마의 조언에 따라, 폐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열정적인 자세로 임했다.
일 자체는 재미있었다. 은근한 성취감도 있었고, 도시 괴담처럼 전해지는 또라이 같은 상사도 없었다. 물론 야근이나 회식은 뭐 같았지만, 회사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마세준을 볼 때면 씻은 듯 화가 풀렸다. 월급날마다 마세준 옷도 사 입히고, 산초 간식이랑 장난감도 사 주고, 꽤 비싼 저녁도 사 먹었다. 돈 버는 재미라는 게 생각보다 쏠쏠했다. 마세준은 내가 열심히 일해서 사 준 걸 아까워서 어떻게 입느냐면서 옷을 모셔만 두었다가 내게 혼쭐이 났다. 그 이후로는 곧잘 내가 사 준 옷을 입어 돈 쓴 보람을 느끼게 해 줬다.
마세준은 일찍 일어나면 겸사겸사 부지런해지고 좋은 거 아니냐면서, 내 출근 시간에 맞추어 매일 아침을 차려 주었다.
미지근한 물에 몸을 씻고 나오자 따끈한 수제비가 아침상에 올라 있었다. 어젯밤, 같이 텔레비전을 보다 맛있겠다며 몇 번 침을 삼켰더니, 부지런한 마세준이 새벽같이 일어나 수제비를 뜬 모양이었다.
“야아, 어디 미안해서 맛있겠단 소리 하겠어?”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는 마세준의 허리를 폭삭 껴안으며 말하자, 마세준이 가벼운 웃음을 터뜨리며 뒤를 돌았다.
“내가 무슨 낙으로 산댔어.”
마세준은 엄지로 내 눈썹을 쓸며 그렇게 물었다.
“……내 입에 먹을 거 들어가는 거 보는 낙?”
내 대답이 마음에 든다는 듯, 마세준이 손가락으로 내 코끝을 가볍게 두드리고는 씩 웃었다.
“아침 먹자.”
마주 앉아 있으면 무릎이 수시로 부딪치는 식탁에 앉아 잠시 발장난을 쳤다. 잘 익은 애호박을 하나 떠서 입으로 가져가자, 몸이 따끈하게 데워지며 속이 풀렸다.
“마세준.”
“…….”
두껍지도 얇지도 않은 예쁜 수제비 하나를 퍼 올려 후후 바람을 불고는, 마세준 앞에다 내밀었다.
“먹어 봐. 내가 너 안 사랑하게 생겼나.”
마세준은 입을 늘려 웃으며 내가 건넨 수제비를 받아먹었다.
“너, 졸업하자마자 내가 보쌈할 거야. 그동안 누나가 돈 많이 벌어 놓을 테니까, 우리 애기는 공부 열심히 해?”
팔을 쭉 뻗어 머리칼을 다독여 주자, 마세준이 혀로 볼을 찌르며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다분히 화가 난 모습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애기 아니랬지.”
오라가 슬슬 까매진다. 마세준은 내 입에 먹을 거 들어가는 모습을 보는 낙에 산다 했지만, 미안하게도, 나는 이 맛에 산다.
“학생이면 애기지 뭐.”
나는 웃음기를 싹 지운 얼굴로 마세준을 바라보다 다시 국물을 떴다. 드르륵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마세준이 내 옆으로 와 섰다. 흘끔 올려다보자, 볼멘 얼굴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또 왜. 어디서 기분이 상했는데. 틀린 거 없는 소리잖아.”
너는 학생이고 나는 회사원이니까, 너 애기 맞지. 그렇게 놀릴 때마다 마세준은 저렇게 토라진 얼굴로 투정을 부렸다. 웬일로 얌전히 서 있던 마세준은 밑도 끝도 없이 나를 번쩍 안아 일으켰다. 방으로 끌려가며 허겁지겁 숟가락을 식탁에 내려놓았다.
“안 돼. 출근해야 해.”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마세준의 목을 힘주어 안았다.
“…….”
화가 난 마세준은 말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아주 조심스레 나를 침대 위에 눕혔다. 이 미터짜리 애기가 세상천지에 어딨다고 저런 말에 발끈할까. 근데 그게 귀여워서 또 자꾸 놀려먹게 된다. 눈치 없는 산초가 동네 구경난 것처럼 문틈으로 몸을 들이자, ‘산초, 아니야. 노는 거 아니야.’ 마세준이 그렇게 달래면서 산초를 내보내고는 문을 닫았다. 침대로 돌아오는 길에 상의를 벗어 던지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입술이 터져라 깨물며 웃음을 참았다.
“수제비는? 아까운데. 진짜 진짜 맛있었단 말이야.”
“…….”
저가 만든 수제비 맛있다는 말에 뿌듯하긴 했는지 예쁜 입술 끝이 올라간다.
“마세준.”
침대 위로 올라선 마세준이 눈을 맞춰 왔다.
“우리, 그냥 올겨울에 결혼할까.”
다급히 블라우스 단추를 끄르던 손길이 대번에 멎었다. 일렁이는 목울대를 보며 살며시 웃었다.
그 긴 시간을 붙어 있었는데도 지루할 틈이 없었다. 어떻게 얘를 놀려먹을지, 마세준이 조건도 없이 내게 주는 것들을 어떻게 갚아 주어야 할지. 아마 평생 그것만 궁리해도 지루하지 않을 거다.
“나한테 장가오라고.”
“…….”
“싫어? 왜 대답을 안……”
“누가 싫대?”
어김없이 내가 뜻한 바대로 넘어와 주는 마세준을 보며, 나는 별수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더 놀려먹을 새도 없이 다가오는 입술을 달게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