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
마세준은 나와 한 번의 봄을 더 보낸 뒤 입대하게 되었다. 입대일은 거짓말처럼 성큼성큼 다가왔다. 의연하게 보내 주겠다고 몇 번이고 마음을 다잡아 보았지만, 막상 마세준을 떠나보낼 날이 다가오자 입이 쓰기만 했다.
영롱한 종소리와 함께 미용실 문이 열렸다. 혼자 다녀오겠다는 마세준을 타일러 함께 미용실에 들른 참이었다. 우리는 적잖이 가라앉은 분위기로 미용실을 나섰다. 고개를 돌려 마세준을 바라볼 때마다, 이제 내일이면 마세준을 보내야 한다는 게 무섭도록 실감이 나서 마음이 무겁디무거웠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잡은 손을 살짝 끌어 걸음을 멈추고는 까치발을 했다.
“어디 봐 봐.”
팔을 뻗어 까끌까끌한 머리를 쓸어 주자 마세준이 고개를 기울여 오며 옅게 웃었다. 와중에 무슨 애가 그 머리 꼴을 해도 잘생겼는지, 정말 보내기 싫었다.
“예쁘게 잘 깎였네. 너는 왜 이 머리를 하고도 멋있고 그러냐. 더 보내기 싫게.”
마세준은 조금 쓴웃음을 걸쳐 보이며 내 머리를 제 가슴으로 끌어가 누였다.
“미안해.”
“나도 속상해서 그렇지. 네가 미안할 게 어디 있어.”
“……너 보고 싶어서 어쩌지.”
마세준은 고저 없는 목소리로 읊조리듯 말했다. 부드럽게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는 그 익숙한 손길에 가슴이 먹먹해지더니, 곧 억눌린 듯 갑갑해졌다. 별다른 말 대신 마세준의 허리춤을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우리는 다시 손을 잡고 집을 향해 걸었다. 산초와도 작별 인사를 해야 했다.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치는 마세준을 바라보다 부러 소리를 내어 비죽 웃었다. 내내 죽상만 하고 있다가 마세준을 보내기는 싫었다. 마세준은 쑥스러운지 제 목을 문지르다 나를 따라 웃었다. 그 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마세준의 팔짱을 낀 채 집 현관문을 열었다. 졸린 눈을 한 산초가 문가에 앉아 있다가 다가와 우리를 반겨 주었다. 마세준이 애틋한 눈으로 산초를 안아 주는 걸 바라보다가 영 마음이 시끄러워서 방문을 열었다.
책장 가장 아래 칸에서 앨범을 꺼내어 탁탁 먼지를 털고는 거실 테이블로 가 앉았다. 마세준을 곁에 앉혀 놓고 두터운 앨범 커버를 손에 쥐어 넘겼다. 메모지로 표시해 둔 페이지를 펼치고는, 한 칸에 빼곡히 꽂혀 있는 사진 뭉치를 힘겹게 잡아 뺐다. 시기나 장소에 맞춰 분류하기 모호한 낱장들을 모아 둔 것이었다.
두어 장을 넘기자 찾고 있던 사진이 나왔다. 긴 세월에 색이 희끄무레 날아가 어쩐지 더 아득하게 느껴지는 사진이었다. 사진 속 나는 뭐가 그리 좋은지 마세준을 보며 자지러지게 웃고 있었고, 곁에 선 마세준은 반쯤 얼어 울기 직전이었다. 사진 속의 우리는 아주아주 어렸다.
“이 사진, 본 적 없지?”
나는 마세준이 보기 좋게 그 앞으로 사진을 밀어주었다. 내가 하는 양을 바라보고 있던 마세준은 금세 사진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사진 속 나를 발견한 마세준의 얼굴에 미소가 스며드는 게 보였다.
“응, 처음 본다.”
“……마세준.”
한창 사진 속 내 얼굴에 정신이 팔려있던 마세준은,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쳐 오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직도 웃는 낯이었다. 마세준은 나를 바라보다가도 그 새를 참지 못하겠는지 얼른 사진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러고는 미소를 머금은 채 어릴 적 내 모습을 쓰다듬었다. 나 역시 그 모습에 잠시간 넋을 놓았다.
뭐가 저렇게 소중할까, 그냥 사진인데.
마세준과 함께 있다 보면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사랑이 별거 아닌 것 같다는 생각. 사랑이 시답잖다는 게 아니라, 그리 먼 데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 매 순간이 사랑일 수도 있다는 생각. 궁리해 볼 것도 없이 내가 지금 받고 있는 게 사랑이구나 싶어서.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아, 잔잔한 상념을 털어 내고 다시 입술을 뗐다.
“우리, 고2 때 처음으로 뽀뽀했던 거 기억나?”
마세준은 그제야 다시금 나와 눈을 맞추더니, 손을 뻗어 내 볼을 찬찬히 매만졌다. 아니나 다를까 짧게 입술이 마주 닿았다 떨어졌다. 촉, 작게 울리는 소리와 함께 물러나는 숨결은 따스하기만 했다. 떠올리자니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는지 마세준은 싱긋 눈을 접으며 웃었다.
“기억나지 그럼. 그날 한숨도 못 잤는데.”
그 다정한 눈동자에는 내 모습이 선명히 맺혀 있었다. 어지러운 향기가 났다. 내가 선물한 향수는 진작에 바닥이 났을 텐데 마세준은 언제나 이 향기를 안고 다녔다.
마세준의 얼굴을 붙들고, 마세준이 그러했듯 촉,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춰 주었다.
“이거, 우리 처음 만난 날 찍은 사진. 엄마가 며칠 전에 장롱서 찾아 줬어.”
“…….”
“내가 너 보자마자 이렇게 얼굴 붙들고 뽀뽀했대. 너 예쁘다고.”
할 거 안 할 거 해서는 안 될 거까지 다 한 사이에, 뽀뽀한 얘기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마세준은 대뜸 얼굴을 붉혔다. 그러고는 제 입술까지 물어 가며 웃음을 삼켰다. 그렇게 좋아?
“이잎새, 왜 나한테 뽀뽀했어?”
불쑥 얼굴을 들이대며 그렇게 묻는다.
“글쎄? 나도 기억이야 안 나지.”
“응? 잘 생각해 봐.”
바스락거리는 앨범 속지를 문지르며 대충 얼버무리자 참다못한 마세준이 내 얼굴을 부드럽게 쥐고는 눈을 맞춰 왔다.
“왜 뽀뽀했어.”
“예뻐서 그랬다잖아.”
“정말 그게 다야?”
작고 다정하게 물어 오는 목소리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응.”
“예쁘다고 다 뽀뽀하나, 아닐걸. 난 너 좋아해서 키스했는데.”
“……뭐,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나 보지. 봐 봐, 쬐깐한 게 벌써 살벌하게 잘생겼잖…….”
기분 좋게 웃으며 다가오는 입술을 달게 받아들였다. 맞닿은 입술이 아려 올 때까지 긴긴 키스를 했다. 이 별거 아닌 늦봄 저녁을 이토록 설레는 시간으로 만들어 주는 마세준이 좋아서 웃음이 나다가도, 그런 마세준을 보낼 생각을 하자 마음 깊은 곳에서 울컥하니 매운 것이 올라오려 했다.
입술이 떨어진 뒤에도 우리는 한동안 이마를 맞대고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마세준의 어깨를 움켜쥐며, 차라리 시간이 멈추어 버리길 바랐다. 숨을 고르다 감은 눈을 떴을 때, 마세준은 작은 상자를 손에 쥔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홀린 듯 마세준과 눈을 마주했다. 천천히 열린 상자 속에는 영롱한 반지가 잠들어 있었다. 뭘 모르는 내 눈으로 보기에도 제법 값이 나가 보이는 것이었다.
“마세준…….”
마세준은 내 약지를 두어 번 쓸더니, 망설인 끝에 두 번째 손가락에다 반지를 끼워 줬다. 나랑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어 주지 뭐 저렇게까지 알바를 하나 그랬는데.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니기에 전화도 안 받느냐고 몇 번쯤 떼를 썼는데. 불러 놓고도 더는 입이 떨어지지 않아 진중한 눈가를 내려다보며 애먼 입술만 깨물었다.
“잎새야.”
아무 말도 없이 굳은 듯 앉아 있자, 마세준이 전에 없이 긴장한 표정으로 내 이름을 불렀다.
“……아프지 말고, 귀찮아도 끼니 거르지 말고.”
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텅 빈 내 약지를 가만히 쓰다듬으며 하는 말에 못내 속이 상했다. 마음 같아선 여기에 끼워 주고 싶다고, 마세준은 꼭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직 우린 많이 어렸다. 서로에게 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끽해 봐야 진심 어린 약속, 몇 달을 일해서 산 반지 같은 게 최선이었다. 그마저도 아직 약지에는 끼워 줄 수 없는, 그 정도의 분명함. 마세준은 불안한 모양이었다. 그걸 어떻게든 씻어 주고 싶었다. 고작 눈에서 멀어진다고 희미해질 감정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막연한 두려움이 엄습하는 것까지는 나 역시도 어쩌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마세준. 네가 나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는데, 나도 너 그만큼 사랑해.”
그렇게 말하고는 이마에 입을 맞춰 주었다. 뚫어져라 나를 바라보는 마세준의 얼굴을 애틋하게 쓸어 보았다.
“…….”
“다치지 말고 잘 다녀와. 기다리고 있을게.”
마세준을 되도록 힘주어 안으며 읊조리듯 말했다. 다시 뜨거운 입술이 찾아들었다.
이튿날, 마세준은 훈련소로 떠났다.
* * *
꽤 오래도록 마음의 준비를 한 덕에 걱정했던 것보다는 의젓하게 마세준을 보내 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모래성 같은 평온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어쩌다 마세준에게 온 전화를 받지 못하는 날에는 온몸에 기가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목소리를 듣고 싶은데 들을 수가 없어서, 휴대폰에 저장된 동영상을 보며 몇 번 눈물을 짰다.
처음 면회를 가던 날, 조금 마른 얼굴로 늠름하게 웃는 마세준을 보는데 말 그대로 속이 미어졌다. 마세준은 외려 나더러 살이 빠진 것 같다며 잘 좀 먹으라고 잔소리를 했다. 가물에 콩 나듯 마세준이 휴가를 나올 때면 1박이 1초 같았다. 가끔 마트에서 달다는 건 다 쓸어다가 보내 주면, 마세준은 뭘 그렇게 많이 보냈냐고 하면서도 좋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편지 한 장을 보내면 세 장이 돌아왔다.
그 긴 시간 동안 내가 그리워했던 건 그다지 대단한 순간들이 아니었다. 샤워를 하고 나온 마세준에게서 서늘하게 묻어 나오던 샴푸 향기, 하얀 면 티를 입고 있던 깨끗한 옆모습, 온기를 나누고 나른해진 몸에다 쉼도 없이 입을 맞춰 주던 다정함, 잠결에 얼굴을 쓰다듬어 주던 손길. 그런 것들이었다.
더럽게 느리게 흘렀지만, 어찌 됐든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흘렀다. 거의 전역이나 다름없는 마세준의 말년 휴가를 한 달쯤 앞둔 날, 나는 산초와 함께 이사했다. 아빠가 남부 지역으로 발령이 나면서 불가피하게 때 이른 독립이 이루어진 것인데, 엄마는 나와의 이별보다는 산초와의 이별에 더 서글퍼하는 것 같았다. 자주 입는 옷가지와 아끼는 침구, 책, 식기 몇 개, 산초 캣타워랑 장난감. 짐은 그리 많지도 않았다. 셀 수 없이 많은 추억이 깃든 803호와는 그렇게 작별을 했다.
이산초는 새집에 적응하느라 다소간 고생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면접 준비에 스터디에 워낙에 정신이 없었던 나는 적응이고 뭐고 집에 와 뻗어 자기 바빴다. 엄마 아빠나 마세준에 대한 그리움이야 불쑥불쑥 올라왔지만, 그럭저럭 괜찮았다. 작지만 취향대로 꾸며 놓은 집으로 돌아오면 산초가 달려 나왔고, 가끔 출몰하는 날벌레도 이산초가 다 잡아 주었고, 늠름한 이산초를 껴안고 잠들면 그게 바로 위안이었다.
그 생활에 조금은 적응을 했다고 느낄 무렵 마세준이 마지막 휴가를 나왔다. 엄마 아빠까지 상경해서 다 같이 저녁을 먹은 뒤, 마세준을 날름 끌고 나왔다. ‘저희, 동창회가 있어서 먼저 일어나 볼게요.’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했다. 순진한 마세준도 ‘어머니, 잎새 너무 늦지 않게 들여보낼게요.’ 하고 말을 거들었다. 들여보내긴, 내 집으로 갈 건데. 다행히 어른들은 간만에 회포를 푸느라 우리는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떨린다.”
“떨려?”
중얼거리듯 한 말에 마세준이 되물었고, 나는 비밀번호를 누르다 말고 고개를 끄덕였다. 문 너머에서 기척을 느낀 이산초가 니야오- 하고 작게 울기 시작했다.
“엄마 아빠 말고는 네가 첫 번째 손님이야. 아직 아무도 안 데려왔어. 미호도.”
뒤에 서 있던 마세준이 고개를 숙여 내 눈가에 입을 맞췄다. 더 해 보라는 듯 볼을 기울여 내밀자, 이번에는 볼에 입술이 내려앉았다. 그다음에는 입술 근처로, 또 그다음은 입술을 반쯤 겹쳐서. 마세준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나를 한 번 으스러지게 껴안고 물러났다.
기계음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고, 문가에 서 있던 이산초가 마세준의 다리에 몸을 비비며 울어 댔다.
“이산초, 잘 있었어?”
마세준은 신발장 선반에 모자를 내려놓더니, 끝도 없이 엉겨 오는 이산초를 덜렁 안아 들었다.
“말도 마. 너랑 전화할 때 스피커폰 해 주면 귀 쫑긋거리고 난리나.”
“산초, 형 보고 싶었어?”
산초는 대답이라도 하듯 그르릉 모터를 돌리기 시작했다. 마세준은 동그란 이마를 몇 번이고 쓸어 주었다.
우리는 작은 식탁에 마주 보고 앉아 커피를 마셨다. 간질간질한 기분이었다. 마세준은 이제 곧 민간인이 된다. 나는 죄 없는 입술을 깨물며 마세준을 살며시 훔쳐봤다.
“왜 자꾸 웃어.”
마세준은 지도 헤벌쭉 웃고 있으면서 나더러 왜 웃냐고 그랬다.
“너도 웃잖아.”
무얼 더 바라는 게 사치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평화는 거기까지였다. 치킨 시켜서 맥주 한잔하자는 내 말에 냉장고를 열어 본 마세준은 대체 뭘 먹고 살았느냐고, 어떻게 산초 간식보다 사람 먹을 게 더 없냐고, 그러니까 살이 그렇게 빠진 거 아니냐고 잔소리를 퍼부었다. 참나, 자기도 집에 먹을 거 없으면서. 우리 부모님도 그런 잔소리는 안 한다.
“오랜만에 보는데 잔소리만 할 거야?”
나는 잔소리를 멎게 하는 방법을 아주 잘 알았다. 뒤에서 허리춤을 답삭 껴안고 등에 고개를 누이자, 마세준은 한숨을 쉬며 뒤를 돌아 내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아무 말도 안 했다. 볼멘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다가 결국에는 나를 마주 안았다. 허리춤으로 올라온 커다란 손이 부드럽게 등을 다독였다.
“이잎새, 혼자 있다 아프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원래 자취하면 다들 그래. 대충 때우고 사는 거지.”
“왜 대충 때우고 살…….”
마세준은 말을 하다 말고 꾹 입을 다물었다. 오랜만에 보는데 잔소리만 퍼붓는 건 자기도 좀 그랬나 보지. 기다란 손가락이 내려와 내 머리칼을 찬찬히 넘겨 주었다.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왜, 만들어 주게?”
나는 몸을 살짝 떼어 내고는 마세준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마세준은 복잡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그럼 나 김치 넣은 등갈비 찜. 내일 해 줘.”
목을 끌어안으며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췄다. 잔소리 그친 게 예뻐서 그런 건데, 마세준은 이제 잔소리 대신 다른 걸 할 생각이었는지 불쑥 입술을 가르고 들어왔다. 그러고는 나를 안은 채로 침대로 향했다.
결국, 치킨이고 맥주고 구경도 못 했다. 맛있는 거 해 주겠다던 마세준은 얼마 없는 내 기력까지 기어코 바닥을 내놨다. 매일같이 지극 정성 밥을 차려 주던 마세준은 다시 군대로 내뺐다. 전역까지는 채 열흘도 안 되는 시간이 남아 있었다. 거의 2년을 기다려 놓고 그 며칠을 기다리기가 그렇게 힘들었다. 마세준이 채워 둔 반찬을 하나둘 꺼내 데워 먹으며 마세준을 기다렸다.
* * *
나는 단출한 조리대 위에 덜렁 앉아, 베란다에 널린 세탁물이 바람에 휘날리는 걸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이따금 부드러운 섬유유연제 향기가 부엌까지 넘어오고는 했다. 그 향기 길을 따라 부엌으로 시선을 옮기자 낯선 광경이 보였다.
작은 식탁에는 식재료가 늘어져 있었고, 텅 비어 있던 찬장도 새 식기와 조미료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내 곁에는 마세준이 있었다. 정말로, 마세준이었다. 전역 신고를 마치고 온 민간인 마세준. 일자로 굳어 있던 입술이 샐쭉 올라갔다. 마세준도 흐르는 물에 체리를 씻는 와중에 몇 번이나 나를 돌아보며 웃었다.
“마세준, 나 좀 꼬집어 봐.”
신이 나서 말하자, 마세준이 고개를 대번에 돌려서 내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고는 또 씩 웃는 거다. 눈 끝에 매달린 달가움이 귀여웠다. 그런가 하면 아직 군인 티를 벗지 못해 어딘가 더 어른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너 꼬집을 데가 어디 있다고 꼬집으래.”
마세준은 물방울이 맺힌 체리 하나를 내 입가에 내밀며 말했다. 웃기시네. 밤마다 오만 데 다 꼬집고 깨물고 하면서. 나는 먹음직스러운 체리 대신 마세준의 그을린 팔뚝을 답삭 붙잡아 내 앞으로 이끌었다. 팔을 뻗어 다급히 물을 잠근 마세준이 내 다리 양옆으로 손을 짚으며 고개를 숙여 왔다.
“너 진짜 이제 아무 데도 안 가는 거야?”
가까이 다가오는 얼굴을 아무리 바라봐도 좀처럼 실감이 나질 않아서, 다부진 손끝에 내 손을 올려 은근히 쓰다듬으며 물었다. 서늘한 물기가 묻은 손이 올라오더니 찬찬히 내 볼을 쓸었다. 숨이 다 섞일 만큼 가까이 다가온 마세준이 내 눈가를 바라보았다가 입술을 바라보기를 수차례, 가볍게 입술이 마주 닿았다 떨어졌다.
“그래, 평생 너 따라다닐 거야.”
목을 끌어안으며 시선을 맞추자, 마세준이 내 등을 다독이며 이마를 콩 하고 부딪쳐 왔다. 단단한 허리춤에 다리를 얽었다.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도 어디 갈까 봐서 성이 안 풀렸다.
“잎새야, 나 안 보고 싶었어?”
얠 어떻게 딱 붙잡아 놓고 살지 궁리하고 있는데, 다감한 목소리가 아주 가까운 곳에서 울렸다. 따스한 기운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물을 걸 물어, 나 진짜 눈에 진물 나는 줄 알았어.”
마세준은 내 대답을 듣고도 한참을 내 얼굴만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불쑥 입을 맞춰 왔다. 벌어진 입술 새로 뜨겁고 부드러운 것이 유려하게 미끄러져 들어왔다. 점막을 핥고 혀를 쓰다듬었다. 허리춤에 머무르던 마세준의 손길이 상의 틈을 파고들어 살갗을 어루만졌다. 옆구리를 매만지던 손길이 얇은 속옷 틈을 비집고 들어와 정점을 비틀듯 쥐었다. 꼬집을 데 없다면서. 맞닿은 입술 틈으로 희미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보고 싶었어.”
힘겹게 입술을 떼어 낸 마세준이 어지러운 시선을 하고는 숨을 뱉듯 말했다. 그 내내 하얀 둔덕을 쓰다듬는 손길이 야릇하기만 했다.
“이잎새, 진짜 보고 싶었어. 알아?”
나는 고개를 여러 번이고 끄덕이다,
“……침대로 갈래. 나 밤새 안아 줘.”
마세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마세준에게 매달려 침대로 향하는 동안, 우리는 잠시도 입술을 떼지 않았다. 내 허리를 받쳐 든 마세준이 제 몸으로 내 하체를 끌어가자, 나는 마세준의 목을 끌어안으며 달콤한 입술을 힘주어 물었다.
알몸이 된 마세준이 내 셔츠 틈으로 제 고개를 밀어 넣었다.
“하, 하아…….”
예민한 살갗이 빨리고 잇새에 짓이겨질 때마다 다급한 숨이 끊어져 쏟아졌다. 머릿속이 온통 하얗게 번져 있는 틈을 타 짧은 바지와 속옷이 순식간에 벗겨졌다. 그대로 내 몸을 타고 내려가려는 마세준의 어깨를 꽉 쥐어 저지시켰다. 상의 안감에 짧은 머리칼이 긁히더니 마세준의 얼굴이 나타났다. 혼탁해진 눈을 마주하며 아무렇게나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세준의 허리에 두 다리를 밀착시켰다.
“그냥…… 빨리 넣어 줘.”
달뜬 목소리로 재촉하자, 마세준이 가만히 내 얼굴을 바라보며 엉덩이를 느릿느릿 쓰다듬었다. 눈빛이, 장난스레 빛났다.
“뭘 넣어 달라는 건지 모르겠어. 말해 봐.”
“마세준, 얼른…….”
모르겠다는 말과는 달리 마세준의 기다란 손가락이 불쑥 아래를 가르고 들어섰다. 빠듯하게 들어차는 느낌에 일순 고개를 젖히며 신음을 흘렸다.
“이거 말하는 거야?”
마세준이 귀 옆선을 핥으며 짓궂은 목소리로 물었다. 부드러운 혀가 딱딱한 연골을 달래는가 싶더니 세게 깨물었다.
“아! 흣, 손 말고, 네 거 넣…….”
입술로 내 입을 가로막은 마세준은 기어코 손가락을 하나 더 밀어 넣었다. 흥건하게 젖어 질척거리는 소리에 얼굴이 계속해서 달아올랐다. 섬세한 손끝이 정점을 괴롭히듯 애무했다.
“들어, 와……. 제발. 응?”
마세준의 어깨를 힘주어 밀치며, 애원하듯 매달렸다. 마세준은 그제야 내 균열에 대고 제 성기를 문지르며 입술을 올려 웃었다. 그러고는 화가 날 만큼 천천히 내 몸을 가르고 들어서기 시작했다. 안 태우던 애를 태우니까 미칠 노릇이었다. 다리를 뻗어 마세준의 허리를 바짝 껴안아 당기자, 마침내 성기가 깊은 곳을 자극하며 들어찼다. 닿아선 안 될 곳까지 꿰뚫리는 것만 같았다.
마세준은 낮게 포효하며 이를 악물더니,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거칠게 삽입을 반복했다. 내 쪽도 사정은 다를 바 없었다. 눈을 떴으되 보이는 게 없었다. 그저 마세준이 집요하게 내 눈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만 어렴풋이 느껴질 뿐이었다.
“마세준…… 세준아.”
묵직하고 뜨거운 것이 아래를 메울 때마다 몸이 하릴없이 흔들렸다. 마세준은 내 발목을 쥔 채 조금의 빈틈도 없이 저를 밀고 들어왔다.
“더.”
“응?”
아득한 의식을 붙들며 물었다.
“목소리, 더 들려줘…….”
마세준은 그렇게 말하며 내 목에 제 이를 세웠다.
“아, 하으읏…… 미치겠, 어.”
마세준의 등에 손을 펼쳐 묻으며 웅얼대자, 마세준이 내 얼굴을 감싸 쥔 채 속도를 더하기 시작했다.
“이잎새.”
“으응…….”
“이잎새.”
도무지 멈출 것 같지 않은 쾌감이 계속해서 몰려들기만 했다. 잦아들 기색이 보이질 않았다.
“내 이름 불러 줘.”
“…….”
“얼른.”
“……마세준.”
“다시.”
“세준아…… 마세준…….”
흔들리는 목소리로 대답하면, 마세준은 내 젖은 머리칼을 넘겨 주거나, 다급히 입을 맞춰 왔다. 숨을 몰아쉴 틈조차 주지 않는 키스는 내 몸을 진정시키기는커녕 더 목이 타게 했다.
여러 차례 파정을 하고 난 뒤에도 우리는 그대로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땀 맺힌 살갗이 엉겨 붙은 감각마저 나른하고 황홀했다. 마세준 몸 위에 엎드려 너른 가슴을 찬찬히 쓰는 동안, 마세준도 내 등과 엉덩이를 실컷 쓰다듬었다. 의도적으로 문지르는 손길에 나도 모르게 짙고 긴 숨을 쏟아 냈다. 아직 후희에 젖어 있는 몸이 절로 움찔거렸다. 끈덕지게 치대는 마세준의 가슴 위로 턱을 세워 시선을 맞췄다. 곧장 직설적인 눈빛이 내 얼굴 위로 꽂혔다. 나를 골려 댄 게 얄미워 시선을 피해 버렸다.
“눈 피하지 마. 얼굴 보고 싶어.”
그렇게 말하며 내 엉덩이를 꽉 쥔 마세준이 나를 안은 채 침대에 기대어 앉는다. 둘 곳 없는 팔을 뻗어 마세준의 어깨를 짚었다. 벌어진 여체를 단단한 허벅지 위에 대고 앞뒤로 움직이는 손길에, 입술을 악물었다. 내 움직임을 따라 젖은 소리가 났다. 어떡해, 또 하고 싶어…….
“잎새야, 얼굴 보여 줘. 응? 나 봐.”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음성이 간절했다. 결국, 고집스레 가슴팍만 바라보던 시선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붉게 달아오른 낯빛과 초점이 나간 눈을 보고 있자니 절로 몸이 동했다. 묵직하게 올라선 성기로 홀린 듯이 손을 뻗었다.
“후……. 이잎, 새…….”
힘을 실었다. 마세준이 고개를 뒤로 젖히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젖은 끝을 잠시 구슬리다 더 참지 못하고 그대로 내려앉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탄식을 쏟았다. 내 허리와 등을 단단히 받친 마세준이 매섭게 제 것을 치받기 시작했다. 흔들리는 가슴을 손으로 잡아 가리며 신음을 흘리자 마세준이 내 손을 가뿐하게 치워 내어 제 목덜미에 둘러놓았다.
“가리지 마.”
“…….”
“내 목 안아.”
“…….”
“잎새야, 응?”
자기는 내 말대로 안 해 줬으면서, 바라는 것도 많았다. 그렇게 꿍한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입술 틈에서는 끊임없이 밭은 숨이 밀려 나왔다. 마세준은 내 입술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몰라.”
“…….”
“나도 내 마음대로 할…….”
잔소리를 멎게 하는 법을 알고 있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마세준이 입을 맞추며 격하게 몸을 놀리자, 나는 결국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는 대신 마세준을 끌어안으며 교성만 쏟아 냈다.
“마세준, 이제 그러지 마…….”
기꺼이 팔베개를 내어 준 마세준의 품에 안겨서, 따끔한 목으로 간신히 말을 꺼냈다. 마세준은 퉁퉁 부은 내 입술을 부지런히 만지작댈 뿐, 일언반구 아무 말이 없었다. 후일을 위한 의도적 침묵임이 분명했다. 너무 얄미워서 입술에 얹힌 손을 탁, 쳐 냈다.
“또 그러려고 대답 안 하는 거야?”
“……내가 뭘 어쨌더라. 기억이 안 나는데.”
마세준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면서, 은근슬쩍 내 가슴으로 손을 뻗어 왔다. 변태인 데다 양심까지 없는 인간이었다. 야멸차게 손을 떼어 내 붙잡고는, 고개를 젖혀 마세준을 바라봤다.
“아까는 내가 하도 급해서 그냥 넘어갔는데, 진짜 딱밤이라도 놓고 싶었어.”
내가, 어? 체면 다 팔아먹고 넣어 달라고 사정사정을 했는데, 어떻게 그래. 오죽 급했으면 그랬겠냐고.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세준은 나른하게 웃으며 내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그렇게 급했어?”
그러고는 내 귀에 대고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또 살살 구슬려서 뒹굴려는 개수작이 틀림없었다. 내가 암만 밤새 안아 달라고 그랬다지만, 그게 어디 진짜 그 뜻이겠어? 나도 더는 못해. 사람이 정도를 알아야지!
몸을 반쯤 돌려 손으로 매트리스를 짚었다. 쪽팔리고, 민망하고. 그리고…… 이대로 있다간 분명 또 좋다고 같이 뒹굴 것 같아서.
“잎새야, 어디 가.”
“나 추워. 옷 입을 거야.”
나는 몸을 일으키며 찬바람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와중에 다리 사이가 흥건해서 얼굴이 달아오르다 못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입지 마.”
가만히 내 손등을 살살 쓰다듬던 마세준이 손에 힘을 실으며 나를 붙들었다.
“춥다니까.”
“내가 안아 줄 테니까, 옷 입지 마.”
밤새 안아 달라며. 마세준은 그렇게 말을 덧대며 나를 침대 위에 눕히고, 정해진 수순처럼 내 몸 위로 올라탔다. 올려다본 어깨에는 내 잇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입으면 다시 벗길 거야. 헛수고하지 마.”
“……말하는 것 좀 봐.”
마세준이 내 두 손을 붙든 채 포만감이 깃든 얼굴로 웃었다. 지금 저 얼굴 보고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닌데……. 나도 나였다.
“왜 볼 빨개졌어?”
“……흥분해서 그런 게 아니고 추워서 그런 거야.”
“그래, 추워서 그런 거야. 흥분해서 그런 거 아니야.”
웃음기가 어린 마세준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자니 뒤늦게 낭패감이 몰려왔다. 아주, 자진 납세를 하고 앉았다. 얼굴에 홀려서 할 말 못 할 말 분간도 못 하고.
“이잎새.”
“…….”
마세준이 넌지시 나를 불렀다. 옆으로 틀었던 고개를 되돌려 마세준을 바라봤다.
“잎새야, 꿈 같다.”
“…….”
그렇게 말하는 마세준은, 정말 꿈을 꾸듯 행복해 보였다.
“나도……. 안 믿겨.”
잡힌 손을 빼내어 그리웠던 얼굴을 손등으로 쓸어 봤다. 마세준은 소리를 내어 웃으며 짧게 입을 맞추고 물러났다. 다시 눈이 마주쳤다. 마세준은 내 눈을 마주한 그대로, 차게 식은 내 손끝에 입을 맞췄다.
“말 안 들은 거 사과할 테니까, 딱밤 때리지 말고 받아 줘.”
“…….”
가슴도 차갑네. 마세준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내 가슴을 자근거렸다. 그 뒤로도 한참을, 기대감으로 작게 떨리는 내 몸 곳곳에 마세준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쪽, 쪽, 다정한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다시는 너 혼자 안 둘게.”
기어코 다시 몸을 가르고 들어서며 속삭이는 마세준의 손을 잡은 채, 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