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균 중의 균 마세균, 잠복기만 15년-6화 (6/17)

6장.

뭐, 그렇다고 마세준 얼굴을 안 보고 살 수는 없었다. 아침에 방문만 열면 우리 집에서 떡하니 밥을 먹고 있는데, 그걸 무슨 수로 피하나. 방도가 없다. 마세준은 어디서 마가린이라도 뒤집어쓰고 왔는지, 구겨진 잠옷을 입고 있는 나를 그놈의 지랄 맞은 눈빛으로 쳐다봤다. 저 바보가. 그럴 때마다 나는 쿵쾅거리면서 욕실로 달려갔다.

교복을 입고 식탁에 앉으면, 내 접시에는 잼이 예쁘게 발린 식빵이 올라와 있었다. 마세준은 우유까지 다 따라 놓고 나를 기다렸다. 심지어 빵 다 먹을 타이밍이 되면 물티슈까지 착 대령했다. 처음에는 적응이 안 돼서 체할 뻔했는데, 적응이 되니 편했다.

딱 하나 적응이 안 되는 건, 동네 구경났다는 듯 우리를 보는 엄마 아빠의 눈빛이었다. 그건, 좀처럼 적응이 안 됐다. 어느 날은 엄마가 옆구리를 살살 찌르면서 둘이 무슨 일이냐고 묻기에, ‘아, 뭐가!’ 이러고서 방으로 도망쳐 버렸다. 사실 달리 해 줄 말도 없었다. 마세준과 내가 이렇다 할 특정한 관계가 된 것도 아니었으니까.

쉬는 시간마다 우리 교실로 쳐들어오는 건 여전했다. 이제는 심지어 종이 쳐도 지네 반으로 안 가려고 했다. 이거 진짜 제대로 미친놈이었다. 임성재가 우물쭈물 서 있으면, 자초지종을 들은 과목 선생님들이 곧 마세준을 내쫓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책상에 고개를 처박았고, 뒤이어 미호 웃음소리가 BGM처럼 쫙 깔리곤 했다. 한 달이 지나 짝을 바꾼 뒤로는, 다행히 종이 치자마자 교실로 갔다. 지 말마따나 두 걸음이면 됐다.

우리 사이에 달라진 점이 또 있다면, 밤마다 마세준에게 전화가 온다는 것이었다. 지금처럼 <마세균>이 화면에 뜰 때마다, 나는 심호흡을 하게 되었다.

“왜.”

-이잎새, 뭐 하고 있었어.

물음도 아니고 평문도 아닌, 이상한 어조였다. 사실 민망할 게 하나 없는 말이었는데, 이상하게 속이 메슥거렸다. 마세준은 소리 내 웃지도 않았는데, 자꾸 저 새끼가 미소 짓고 있는 게 눈에 그려졌다. 괜히 귀가 간지러워서 스피커폰으로 통화를 했다. 행여나 엄마가 들을까 봐 음량은 확 줄였다.

“그냥 있는데.”

-그냥 뭐 하고 있었냐고.

“3학년 수학 예습하고 있었다. 왜.”

당연히, 구라다. 예습은 개뿔, 2학년 1학기 수학 좀 도와 달라고 엎드려 빌어야 할 판이었다.

-그랬어? 이제 내가 이잎새한테 과외받아야겠네.

“누가 해 준대?”

왜 저렇게 느끼하게 물어본대? 참나. 사람 잡을 일 있나.

-돈 낼게. 좀 가르쳐 줘.

“얼마 줄 건데.”

-한 회당 만 원.

“내가 너처럼 그렇게 저렴한 인력인 줄 알아? 택도 없어.”

이번에는 마세준이 하하- 하고 웃었다. 그럴 때마다 속이 뜨끔하니 죄를 지은 기분이 된다. 전화는 밤 무서운 줄 모르고 계속됐다. 마세준은 휴대폰이 뜨거워질 때까지 전화를 끊지 않으려 했다.

“내 폰 터지면 네가 책임질 거야? 진짜 이러다가 터질 것 같단 말이야. 그리고 나 자야 된다고.”

-그래. 책임질 테니까, 끊지 마.

“너한테 돈이 어딨어.”

-나 돈 많아. 작년에 고액 과외를 좀 했거든.

“……1분만 이따가 끊을 거야.”

-2분.

“1분!”

그렇게 하다가 5분을 또 넘긴다. 결국, 아침에 눈을 떠보면 방전된 휴대폰이 내 손에 쥐어져 있기 일쑤였다. 그런 날은 한사코 마세준 휴대폰을 뺏었다. 저 새끼는 꼭 얄밉게 배터리를 100% 가득 채워서는 들고 다닌다.

마세준 폰으로 게임을 하다 보면 문자에 불이 난다. 와, 요즘 애들은 진짜 저돌적이다. 마세준은 답장도 안 하는 것 같은데 징그럽게들도 보낸다. 그렇다고 뭐, 내가 화를 내나 어쩌나. 내가 쟤 여자 친구도 아닌데…….

* * *

우리는 여전히 곧잘 붙어 다녔다. 그러나 전과는 다른 기류가 흘렀다. 눈이 마주치면 쌩하니 피하는 건 매한가지였는데, 그러다 새빨간 귀를 하고서는 다시 눈이 마주친다. 그러면 이번에는 제법 오래 서로를 본다. 가끔은 목이 탔다. ‘뭘 봐.’ 하고 비아냥거리거나, 뻐큐를 날리는 일 같은 건 없다.

집에서 둘이 노는 일도 좀처럼 없었다. 마세준은 매일 나를 집 앞에다 바래다주고는 자기네 집으로 돌아갔다. 가끔 간식을 사 들고 산초를 보러 오긴 했다. 하지만 전처럼 밤이 다 되도록 뭉그적거리다가 가는 일은 없었다.

“산초, 형 간다. 누나한테 놀아 달라고 해. 누나가 안 놀아 주면 형한테 일러. 알겠지?”

“냐-”

그러고는 신발을 신었다. 내가 배웅을 안 해 주면 거기서 우뚝 서 있고.

“이잎새, 나간다. 문 잠가.”

“아, 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렇게 툴툴대면, 뒤도 안 돌고 등 뒤로 문을 열고는 웃으면서 나갔다. 그러고 소파에 앉아 빈둥거리는데 5분도 안 돼서 전화가 왔다.

-이잎새.

“왜.”

-문 잠갔어?

“자동문인데 뭐하러 잠그냐?”

-걸쇠 걸어야지.

나는 또 마지못해 현관으로 가 걸쇠를 잠갔다. 부러 들으라고 퍽퍽 소리를 냈다.

“들었지? 됐냐?”

-아니, 끊지 마.

“나 공부해야 돼.”

-나는 너랑 통화할 건데.

에이 씨, 나날이 낯짝이 두꺼워진다. 나는 방으로 가 책상에 앉아 스피커폰을 켰다. 그러고는 책장에 꽂힌 책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마세준.”

-왜.

“사실 나 너한테 뻥친 거 있어.”

-뭔데?

“나…….”

-…….

“나 수학 하나도 몰라. 기말고사 때 56점 맞았어. 그러니까 다시 나 과외해 줘.”

마세준은 미친 듯이 웃었다. 웃음 틈으로 삐- 마세준네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뒤이어 철컥 소리가 났다.

“왜 아무 말도 안 해? 싫어?”

-아니, 좋아.

“돈도 주는데, 당연히 좋아야지.”

-돈 안 줘도 돼.

“노동 착취로 신고하려고 그러지?”

주로, 그런 시시콜콜한 대화가 대다수였다. 마세준은 뭐가 좋다고 그날도 통화를 마칠 생각을 안 했다.

* * *

그렇게 여름방학과 함께 다시 과외가 시작됐다. 나는 TV를 등지고 앉은 마세준을 보며, 새삼 마세준이 참 크다는 생각을 했다. 작년에 이런 구도로 과외를 받았을 때는 TV가 많이 보였던 것 같은데, 이제 거의 안 보인다. 아침밥 똑같이 먹고 점심 급식까지 똑같이 먹는데, 저녁에 뭘 먹길래 지 혼자 저러고 컸냐.

설명을 마친 마세준은 내가 풀어 놓은 문제들을 신중하게 채점했다. 그 손가락이 되게 길다. 짧게 깎인 손톱도 단정하니 예뻤다. 마세준은 나중에 꼭 다시 풀어 봐야 한다며 빨간 펜이나 볼펜도 쓰지 않았고, 새까만 샤프를 손에 쥐고 작게 정답을 체크했다. 나도 모르게 또 그 손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이제 마세준은 샤프보다는 만년필이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어른…… 같다.

“잘했는데.”

마세준은 문제지를 내 쪽으로 돌려주며 기특하다는 듯 말했다. 그때까지 마세준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나는 화들짝 놀라 침을 한 번 삼켰다.

“두 개 빼고 다 맞았어. 봐, 여기랑 여기.”

“이건 왜 틀렸는데?”

“일단 다시 한번 풀어 봐. 봐 줄게.”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문제지로 눈길을 던졌다. 근데, 이마가 뚫릴 것 같았다.

“그만 봐.”

“안 봤어.”

“웃기지 마.”

나는 마세준에게 한 번 이죽거리고는 다시 문제를 풀어 나갔다. 저 눈은, 도저히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산초, 형 모레 또 올게. 뭐 사 올까. 응? 연어? 연어가 먹고 싶어?”

과외가 끝나자, 마세준은 또 곧장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산초를 품에 안아 몇 번 쓰다듬고는, 곧 현관으로 향했다. 나는 괜히 섭섭해서 멀뚱히 서 있다가, 신발을 구겨 신는 마세준을 향해 달려갔다.

“야, 밥 안 먹고 가?”

“…….”

“어차피 너도 저녁 먹을 거 아니야. 나 혼자 밥 먹기 싫단 말이야.”

마세준은 턱을 깨물며 웃음을 참고 있었다. 좋단다. 아주 안 물어봤다간 울었겠네, 울었겠어. 짜식이 그러면서도 대답은 안 한다. 얘는 진짜 이상한 포인트에서 말을 아낀다.

“싫어? 왜 말을 안…….”

“그럼 나가자.”

마세준은 신발을 벗는 대신, 웃음기를 싹 거두고 나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나가자고? 어디 갈 건데.”

“아무거나. 너 먹고 싶은 거 다 사 줄게.”

과외비도 쥐꼬리만큼 받으면서, 기세는 좋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으로 뛰어갔다. 옷장을 벌컥 열었다가, 내가 왜 고민을 하는지 이해가 안 돼서 그냥 바지만 얼른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문을 열고 나가자, 마세준은 현관에 쭈그리고 앉아서 산초 얼굴을 만져 주고 있었다.

나는 피자가 먹고 싶다고 했고, 마세준은 나를 파스타 집으로 데려갔다. 괜히 혼자 오버했다 싶을 정도로, 마세준은 평소와 다름없이 나를 대했다. 굳이 달라진 점을 꼽아 보자면 아주 미묘한 다정함 정도였다. 볼에 묻은 소스를 닦아 준다든지, 내가 접시를 비우기 무섭게 파스타를 덜어 준다든지. 사이좋게 피자와 파스타를 나눠 먹고는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사서 걸었다. 나는 망고 맛을 골랐고, 마세준은 파인애플 맛을 골랐다.

“야, 그거 맛있어?”

내가 묻자, 마세준은 거리낌 없이 제 콘을 내밀었다. 전에는 덥석덥석 잘만 물어 먹었는데, 괜히 그러기가 민망했다.

“…….”

그래도, 먹고는 싶었다. 나는 잠깐 주저하다가 구석을 베어 물었다. 마세준은 씩 웃고는.

“나도.”

그랬다. 마세준은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고개를 숙여 내 아이스크림을 달랑 베어 물었다. 내가 먹던 자리를 딱.

지랄을 하려면 당장 해야 했는데, 멍청하게 서 있느라 타이밍을 놓쳤다. 미친놈 같으니라고. 일부러 그런 거야. 여름이니 당연한 거지만, 진짜 날이 미친 듯이 더웠다.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워 쉰 지 5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보나 마나 마세준일 거라 생각하며 화면을 들여다봤는데, 뜻밖에도 발신 번호는 마세준네 집 전화였다.

-이잎새.

“어, 왜.”

-나 너네 집에 휴대폰 놓고 온 것 같은데.

“알았어. 일단 끊어 봐. 내가 한번 찾아볼게.”

나는 일단 전화를 끊고는, 마세준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거실 테이블 아래에서 전화가 울리기에 그리로 가서 휴대폰을 들어 올렸다. 산초가 토각토각 발톱 소리를 내며 따라왔다.

화면에는, <우리 잎새>가 떠 있었다.

* * *

‘칠칠치 못하게.’ 아무것도 모르는 마세준에게 핸드폰을 쥐여 주며 그렇게 말하고는, 잽싸게 문을 닫았다. 얼마 안 가 엘리베이터 내려가는 소리가 났다.

나는 곧장 냉동실 문을 열었다. 산초가 닭가슴살이라도 삶아 주는 줄 알았는지 호다닥 따라왔지만, 미안하게도 그럴 목적은 아니었다. 나는 얼른 냉동실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게 다 뭐야, 진짜.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쉬며 눈을 댕그라니 굴리는데, 문짝에 꽂혀 있는 냉동 망고가 눈에 들어왔다. 아빠가 요거트랑 갈아 준다고 사 놓고는 뜯지도 않은 거였다. 그걸 보고 있자니 내 망고 아이스크림을 뺏어 먹던 마세준이 대뜸 생각났다. 하, 냉동실마저 내 도피처가 되어 주지 못했다. 얼굴을 식히려고 들이밀었다가 괜히 열만 더 얻었다.

그 대신 산초를 데리고 침대에 누워서, 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우리 잎새, 우리 잎새……. 내가 왜 네 잎새냐? 나는 엎드려서 베개에 얼굴을 푹 묻었다. 나한테는 이잎새, 이잎새 그래 놓고, 뒤에서는 우리 잎새. 그랬다는 거지. 이건 단순한 부끄러움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알아선 안 될 걸 알아 버린 느낌이었다.

‘나 너 좋아해.’ 이렇게 말하는 것만이 고백이 아니란 걸 나도 안다. 빵에 발린 잼, 오천 원짜리 과외, 점심시간마다 내 손에 쥐여 주는 초코 우유, 말없이 콜라 잔에 꽂아 주는 빨대, 먹고 싶은 거 다 시키라는 말, 누가 고백이라도 할라치면 ‘나 좋아하는 사람 있어.’ 하는 말, 여자 꼬시려고 수영 다닌다는 말. 그거, 다 마세준 마음이었다.

난 이미 마세준 마음을 일백 번도 더 확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기적인 행동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걸 날름 다 받아먹었다. 대책 없이 굴었다는 건 나도 인정한다. 그래도 나쁜 마음으로 그런 건 아니다. 나도 좋아서 그랬다. 감히 마세준 마음이 어떤지 몰랐을 뿐이다. 아니, 알긴 알았지만, 그 마음이 어느 정도인지는 몰랐으니까.

지금까지는 마세준이 나를 좋아한다는 걸 어렴풋이 아는 것에 불과했다면, 오늘은, 마세준 마음의 깊이를 확인한 기분이었다. 그건 내게 무거운 경각심을 주었다.

마세준이 싫지는 않았다. 그러면 미쳤다고 그렇게 붙어 다녔게. 솔직히 말하자면, 좋다. 올봄부터는 가끔가다 ‘마세준이랑 사귀면 어떨까?’ 그런 생각도 했었다. 진짜 진짜 솔직히 말하자면, 꿈에서 뽀뽀도 해 봤다. 근데, 그렇다고 해서 그 마음이 다른 결론으로 곧장 이어지는 건 아니었다. 그냥 그게 전부였다. 마세준은 좋지만, 나와 마세준의 관계가 새로운 방향으로 흐르는 건 싫다. 어색하고 민망해서가 아니다. 무섭다.

학기 초부터 좋다고 사귀다가 금세 헤어진 애들을 수도 없이 봤다. 물론 미호나 김용호처럼 잘 만나는 애들도 있지만, 나와 마세준이 그런 케이스가 되리란 걸 어떻게 장담해? 난 그런 모험에 나와 마세준의 오랜 우정을 던질 생각이 없었다. 걔네는 이제 서로 말도 안 한다. 말만 안 하면 다행이게,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인 애들이 태반이다. 마세준이랑 그렇게 되고 싶지는 않다. 걔네라고 헤어지고 싶어서 헤어졌을까. 좋다고 만났는데, 왜 헤어졌겠나. 어련히 다 저마다 이유가 있었겠지.

나는 그런 식으로 마세준을 잃고 싶지 않다. 나는 마세준을 필요로 한다. 물질적인 이유나 편의 때문이 아니다. 마세준은, 나한테 있어 마세준은, 이산초 같은 거다. 없어진다고 생각하면 눈물부터 난다.

이제 마세준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나는 가장 중요한 게 뭔지를 셈해 봤다. 내가 마세준을 좋아하고, 마세준이 나를 좋아하고, 그런 거 다 제쳐 두고. 내가 가장 바라는 우리의 모습이 어떤 형태를 띠고 있는지를.

“마세준…….”

내가 허공에 대고 작게 속삭이자, 내 허리춤 옆에 누워 있던 산초가 얼른 귀를 젖히며 현관문 쪽을 바라봤다.

“이산초, 너네 형아 온 거 아니거든.”

이산초도 똑같다. 냉동실도 이산초도 오늘은 도움이 안 된다. 괜히 미워서 등을 돌려 누웠다.

밤 9시가 되자, 어김없이 마세준에게 전화가 왔다. 오늘은 받을 자신이 없었다. 받고 싶지가 않았다.

* * *

“엄마, 나 과외 선생님 좀 알아봐 줘.”

이튿날 늦은 아침, 나는 엄마 몰래 콩을 발라내며 말했다. 오래간만에 새 밥을 해서 아침상을 차렸다는 엄마한테, 밥 안 먹겠다는 말은 못하겠어서 억지로 식탁에 앉아 있던 차였다.

“왜, 뭐 어려운 과목 있어? 점수는 곧잘 나왔잖아.”

“아니, 수학.”

“요새 세준이가 잘 봐주는데 왜?”

엄마는 웬 뜬금없는 소리를 하냐는 듯 나를 바라봤고, 나는 콩나물국을 뜨는 둥 마는 둥 하며 대답을 피했다.

“이잎새, 대답도 않고. 왜 밥까지 깨작대고 그래. 너 또 세준이랑 다퉜어?”

“밥 생각 없어.”

“이것아, 먹을 생각 없으면 애당초 안 먹겠다고 하던지.”

나는 먹던 그릇을 싱크대에 넣어 놓고는 방으로 가 숨었다. 진짜 어디로든 숨고 싶었다. 때마침 우웅- 진동이 울렸다. 마세준이었다. 나는 그대로 배터리를 뽑아 버렸다.

아니나 다를까 10분도 안 돼서 마세준이 집으로 쳐들어왔다. 나는 침대에 숨어서 마세준이랑 엄마의 대화를 엿들었다.

“세준이, 오늘 과외 있는 날이야? 과일이라도 사다 놨어야 하는 건데, 아줌마가 몰랐네.”

“아니요. 그냥 잎새랑 나가서 놀까 해서요.”

“어머, 그래. 날도 좋은데 같이 어디 재미난 데라도 다녀와. 아니면 영화라도 보든지. 아줌마가 오랜만에 용돈 좀 줄까?”

마세준은 내 속도 모르고 나랑 놀러 가겠다고 날 데리러 왔다. 그 뒤로도 둘이 한참을 떠들었다.

“이잎새.”

긴장이 풀릴 즈음, 방문이 두 번 울렸다. 그 울림을 따라 심장이 난데없이 뛰기 시작했다.

“이잎새?”

가만히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다정하고 조심스러웠다. 나는 대답 없이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세준아, 들어가 봐. 쟤 진즉 일어나서 밥까지 먹었어.”

저럴 땐 정말 마세준네 엄만지 우리 엄만지 헷갈린다. 천천히 문이 열렸다. 그리고 달칵, 소리를 내며 닫혔다.

“이잎새, 어디 아파?”

마세준은 문가에 서서 내게 물었다. 나는 움찔거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천천히 입을 뗐다.

“아니.”

“그럼, 피곤해? 잘 못 잤어?”

거기까지 듣는데 괜히 울컥했다. 목소리가 너무 착하잖아. 왜 나한테 그렇게까지 잘해 줘? 내가 뭐라고.

“……어.”

마세준은 그제야 걸음을 뗐다. 그러고는 책상 의자를 빼 앉는 것 같았다.

“이잎새, 계속 잘 거야?”

“어.”

“나랑 안 놀고?”

“안 놀아. 너랑 안 논다고.”

나는 이불을 걷어치우며 일어나 앉았다.

“너, 뭐야. 왜 내가, 왜…….”

“왜 그래.”

마세준은 나를 보며 앉아 있었다. 그것도 다 속상했다. 책상에 앉을 거면 책상을 보고 앉아야지. 왜 쳐다도 안 보는 나를 향해서 앉아 있냐고.

“내가 왜, 네 잎새야?”

“뭐?”

마세준의 당황한 얼굴을 보자, 진짜 못할 짓이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도 다시 이불을 뒤집어썼다. 아예 등을 돌려 누웠다. 그러고는 한참 동안 숨만 골랐다. 마세준은 그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세준.”

“…….”

더 이렇게 있다가는 가슴이 터질 것 같아서, 용기 내서 운을 뗐다.

“나 안 좋아하면 안 돼?”

그렇게 말하자마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마세준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지금 마세준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감히 볼 용기가 안 났다. 나는 다시 입술을 뗐다.

“그냥 나 좋아하…….”

“알아들었으니까 그만해.”

나는 누가 봐도 우는 목소리로 간신히 그렇게 말했고, 마세준은 곧 내 방을 나섰다. ‘나 간다.’ 그 말도 안 했다.

* * *

싸운 것도 아닌데, 우리는 전에 없이 멀어졌다. 마세준은 내게 전화를 하지도 않았고, 우리 집으로 찾아오지도 않았다. 산초를 보러 오지도 않았다.

나는 새로운 수학 선생님께 과외를 받았다. 잘생긴 대학생 오빠였다. 선생님은 내 문제지에 빨간 펜으로 죽죽 소나기를 뿌렸다. 틀린 문제를 다시 한번 풀어 보라며 자상하게 대해 주지도 않았다. 공식이나 알려 주면서 외우라고 했다. 오천 원짜리 과외보다 형편없는 고액 과외였다.

과외가 없는 날에는 도서관에서 공부를 했고, 주에 한 번쯤 미호를 만났다. 우리는 카페에서 팥빙수를 먹거나 레모네이드를 사서 공원에 갔다. 미호는 가끔 김용호를 데리고 나왔고, 그럴 때마다 김용호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볼 뿐, 별다른 언급은 없었다.

가끔 밤 9시마다 하릴없이 시계를 들여다보는 것 말고는 특별할 것도 없는 날들이었다.

개학 날, 마세준은 우리 집으로 오지 않았다. 엄마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나는 직접 잼을 발라서 아침을 먹었다. 빵을 먹고 난 뒤에는 물티슈 대신 비누로 벅벅 손을 닦았다. 처음으로 혼자 버스를 탔고, 하마터면 못 내릴 뻔했다. 그때 처음으로 울컥했지만, 잘 참았다.

나는 되도록 교실에서 칩거했다. 화장실 갈 때를 제외하고는 교실 밖으로 잘 나가질 않았다. 반짝 하복을 입고는, 곧 춘추복을 입었다. 짝이 몇 번 바뀌자 동복을 입었다.

김용호가 전처럼 우리 반을 드나드는 동안, 마세준은 한 번도 우리 반으로 찾아오지 않았다. 어쩌다 운이 나빠 복도에서 마세준과 마주치는 날에는, 재빨리 눈을 피했다. 마세준은 나보다 빨랐다. 다시 눈이 마주치는 일 같은 건 없었다.

마세준은 마치 나를 모르는 사람처럼 대했다. 아니, 대했다는 말은 적합하지 않다. 그냥, 우리는 모르는 사이가 됐다. 남이 됐다. 나는 가끔가다 책이 없으면 없는 대로, 그냥 혼났다.

가끔 그리웠다. 사실 매일이 그랬다. 영어 동화책을 읽어 주던 어린 마세준이 그리웠고, 넘어져 업어 달라고 조르면 냉큼 등을 내밀던 초딩 마세준이 그리웠다. 걸쇠까지 잠그라고 잔소리하던 목소리도 그리웠고, 말도 안 되는 내 생떼에 번번이 넘어가 주던 마세준이 그리웠다.

혼자 저녁을 먹을 때마다 마세준이 생각났다. ‘이잎새’ 불러 놓고는 안 부른 척을 하던 마세준이 그리웠다. 산초를 쓰다듬으며 웃던 얼굴도 그리웠다. 내 바보 같은 겁 때문에, 나는 마세준을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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