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야, 너 어디 가?”
대뜸 귓가로 날아든 익숙한 목소리는 마세준의 것이었다. 찌르는 듯한 아픔은 아니었지만 미지근하면서도 끈질긴 복통에 이미 짜증이 쌓일 대로 쌓인 상태였다. 이마에 고인 식은땀을 손등으로 훑으며 무기력하게 뒤를 돌았다.
“집에.”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와 있던 마세준은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마치, 뭐 이런 게 다 있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원래 같았으면 진작에 티격태격했겠지만, 불행히도 오늘은 그럴 힘이 없었다.
“오자마자 간다고? 선생님한테 말도 안 하고 그냥 가?”
“내가 너냐. 벌써 말씀드렸거든.”
그다지 좋지 못한 표정으로 서 있는 마세준을 내버려 둔 채, 나는 다시 뒤를 돌아 놀이공원 출구를 향해 힘없이 걸었다. 여기서 코끼리 열차를 타고 지하철역까지 가기만 하면, 그래도 그때부터는 갈 만할 것이었다.
눅눅하게 때가 앉은 의자일지라도, 일단은 얼른 앉고 싶었다. 얼려 온 물이며 김밥이며 과자들까지, 마치 돌덩이처럼 어깨를 짓눌렀다. 선선한 바람도 따스한 햇살도 조금도 위안이 되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자유 이용권이 조금 아까웠다. 딱 하나 탔다. 회전목마. 그마저도 내가 이름 모르는 애랑 단둘이. 다른 애들은 무시무시한 걸 타겠다고 우르르 뛰어갔는데. 억울함에 입술을 한 번 깨물고 출구를 지나쳐 나왔다. 그대로 터덜터덜 걸어서 코끼리 열차 판매소로 갔다.
“한 명이…….”
“초등학생이요.”
푯값을 내려고 가방 앞주머니를 뒤적이는데 기다란 팔이 쑥, 내 어깨 너머로 내밀어졌다. 웬일로 잠잠히 사라졌나 했더니 또, 마세준이었다.
“새치기하지 마. 오늘 너랑 장난 칠 기분 아니야.”
“두 장 주세요.”
마세준은 나를 흘끔 보더니 아무 말 없이 푯값을 냈다. 그러고는 뭐라도 맡겨 놓은 사람처럼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돈? 돈을 달라는 건가. 쪼잔한 줄은 몰랐는데. 참나.
“줘.”
“뭘.”
돈 달라는 건 줄 알면서도 심통이 나서 물었다. 하지만 마세준은 돈을 앗아 가는 대신 뒤쪽으로 서더니 내 가방 바닥을 한 번 들어 올렸다.
“뭐가 들어서 이렇게 무겁냐. 배고파, 뭐 먹을 거 없어?”
“여기서 뭘 먹어.”
“아무튼, 줘 봐.”
마세준은 그대로 가방을 낚아채 갔다. 저 자식의 평소 성정으로 미루어 보건대 이걸 들고 어디로 튀어 버릴지도 몰랐지만, 지금으로서는 차라리 그게 나았다. 그래. 들고튀어라, 튀어.
“가방은 팔아먹든 버리든 맘대로 해. 대신 말 걸지 마.”
“봐서.”
마세준은 내 얼굴을 뚱하게 보더니 고개를 돌려 버렸다. 오래지 않아 열차가 우리 앞으로 멈추어 섰다. 나는 힘겹게 열차에 올라 말을 아꼈고, 뒤따라 오른 마세준은 제 앞으로 멘 내 가방을 허락도 없이 열어 뒤적이더니, 뭐 별거 없네. 그런 말을 구시렁댔다. 그리고 다시 지퍼 닫는 소리가 났다. 그 후로는 또 한참을 아무 말 없이 바람을 맞으며 앉아 있었다.
“야.”
마세준의 부름에, 나는 소리 없이 ‘왜’ 하고 대답했다. 지금으로서는 소리를 뱉어 낼 기력도 없었다. 마세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렇게 싱겁다, 애가.
“넌 집에 왜 가는데.”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폐장 직전까지 있는 것 없는 것 다 타고 다녀도 이상하지 않을 놈인데. 그래서 지하철 개찰구에 카드를 찍으며 물었다.
“나, 산초 밥 줘야 돼.”
마세준은 카드를 가져다 대며, 뭐 그런 걸 묻느냐는 투로 말했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웃었다.
“아니, 우리 산초 밥을 네가 왜 주는데?”
“걔가 네 산초냐? 공동 명의지.”
이럴 때마다 정말 기가 찬다. 공동 명의?
“야, 산초가 부동산이냐?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나는 다다다다 말을 쏘려다, 급작스레 밀려오는 피곤함에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마세준이 앞으로 둘러맨 내 가방을 향해 다가섰다.
“나 목말라.”
냉기가 맺혀 있는 물병을 찾아내어 뚜껑을 열고 다급히 몇 모금을 들이켰다. 얼얼할 정도로 서늘한 액체가 미열이 오른 속을 달래 주었다. 뚜껑을 닫고는 병을 이마에 가져다 대자 비로소 살 것 같았다.
“나도 물.”
마세준은 내 이마 위에 머물던 물병을 눈 깜짝할 새 가져가 마시기 시작했다.
“남겨.”
마세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디찬 물을 달게도 마셨다. 저게 뭐라고 저렇게 맛있게 마시지. 뜬금없는 소리지만, 나는 마세준이 마시는 건 다 마시고 싶다. 마세준이 먹는 건 다 먹고 싶고. 이 아픈 와중에도 말이다. 결국, 물병을 받아 들고 두어 모금 더 마신 뒤, 다시 마세준에게 물병을 건넸다.
“배고파.”
얼마 안 남은 물병을 다시 내 가방에 챙겨 넣은 마세준이 투덜대듯 말했다.
“난 아님.”
단호한 내 말에, 마세준은 얄밉다는 듯 나를 돌아보았다. 얼마 안 가 골을 울리는 굉음과 함께 지하철이 들어섰다. 미지근하지만 흉흉한 바람이 잠시간 땀을 식혀 주었다. 냉방이 빵빵한 것은 물론, 자리까지 널찍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내가 꼬물꼬물 걸어가 앉은 옆으로 마세준이 조심성도 없이 털썩 주저앉았다.
“자리도 많은데 왜 여기 앉아. 징그러워, 저리 가.”
“야, 너 뭐, 여기 전세 냈어? 남이 사.”
아, 완전 말 많은 놈. 싫다 소리를 참 정성스럽게도 한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눈을 감아 버렸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집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선생님한테 미리 잘 말씀드리고 푹 쉬는 거였는데. 이게 다 마세준 때문이다. 마세준이……. ……까 봐……. 억지로……. 나는 옆에 앉은 마세준을 마음의 샌드백 삼아, 이 핑계 저 핑계 다 갖다 붙이며 욕을 했다. 잠이 솔솔 왔다.
“야, 일어나.”
“…….”
“이잎새, 일어나.”
얼마나 지났을까, 열이 올라 멍한 몸을 마세준은 참 가차 없이도 흔들었다. 나는 그 짧은 새 한층 무거워진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렸다.
“어디야?”
잠긴 목에서 따갑도록 건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제 내려야 돼. 너 그래서 걸을 수 있겠냐?”
“어. 걸어.”
마세준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내 팔을 잡아 일으켰다. 조금 소름이 끼치려 했지만, 지금은 이것저것 잴 타이밍이 아니었다. 잠자코 마세준의 부축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지하철 계단이 오늘따라 서러울 정도로 길게 느껴져 눈물이 다 나올 것 같았다.
“야, 이리 와.”
한숨을 푹푹 쉬며 계단을 향해 발을 옮기려는데, 마세준이 엘리베이터로 턱짓을 하며 내 몸을 이끌었다. 나는 잠시 꿈쩍 않으며 마세준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저거 타도 되나. 노약자용인데.
“괜찮아, 타. 아픈 사람도 약자야.”
마세준의 단호한 말을 듣고 있자니 찝찝한 마음은 금세 휘발되었다. 결국, 나는 오늘 하루 도덕심을 배반하기로 했다. 마세준 말마따나 오늘은 나도 약자니까…… 괜찮겠지. 가벼운 걸음으로 엘리베이터에 오르자마자 마세준의 손을 뿌리쳤다.
그러나 하나둘 모여든 어르신들을 채 담지 못한 엘리베이터가 결국에는 경고음을 냈고, 짜기라도 한 듯 어르신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꽂혀 들었다. 눈치가 보여 잽싸게 내리려는데, 마세준이 내 손목을 꾹 쥐더니 내 걸음을 저지시켰다.
“거, 젊다 못해 어린 친구들이 벌써 이런 걸 타 버릇하면 쓰나.”
“죄송합니다. 친구가 몸이 좋지 않아서요.”
회색 중절모를 쓴 할아버지가 혀를 차며 말하자, 마세준은 답지 않게 공손한 목소리로 사과를 하더니 나를 바라본 채로 뒷걸음을 쳐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올라가 있는다.”
그러고는 무슨 대답을 하기도 전에 뒤를 돌아 걸었다. 무거운 내 가방을 멘 채 계단을 오르는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철컹하고 문이 닫혔다. 묵직한 소리를 내며, 엘리베이터는 아주 천천히 지상으로 몸을 옮겼다. 문이 열리자, 마세준은 뜻밖에도 승강기 앞 기둥에 기대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보다 빠르다니, 정상이야?
아무런 말 없이 지하철 개찰구를 빠져나온 마세준은 대뜸 택시를 잡아 세웠다.
“덥다. 택시 타고 가자.”
나는 마세준이 열어 준 뒷좌석으로 쓰러지듯 앉았고, 택시는 가만히 목적지를 향해 달렸다. 역에서 집까지는 그래도 금방이었다. 정말이지, 이렇게 힘든 귀가는 처음이었다. 솔직히는 그나마 쟤가 없었다면 더 힘들었을 테고. 나는 택시비를 내는 마세준의 뒤통수를 가만히 보다가.
“야, 밥 먹고 가.”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마세준은 또 뚱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내려다보네……. 쟤, 분명 2년 전만 하더라도 나보다 작았는데. 그렇게 잠깐 딴 길로 샜다가…….
“배고프다며.”
나는 녀석의 얼굴에 대고 다시 한번 말했다. 마세준은 별 대꾸 없이 내 뒤를 따랐다. 하여간 거절을 않는다, 쟤는.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서자, 뜻밖의 귀가에 놀란 엄마가 호들갑스레 현관문으로 나왔다. 산초도 냐- 소리를 내며 따라 나와 내 무릎을 스쳤다가, 이내 마세준의 무릎에 얼굴을 비비며 애교를 부렸다. 치, 맨날 밥 주고 응가 치워 주는 게 누군데, 이럴 땐 진짜 세상 허무하다.
“어머, 잎새야. 너 많이 안 좋았구나. 어휴,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쉬게 할 걸 그랬어. 어쩌니. 얘 안색 좀 봐.”
“배 아프대요.”
마세준이 산초를 안아 올리며 날름 대답했다. 산초는 크릉크릉 소리를 내며 마세준의 품에서 축 늘어졌다. 저게, 누나가 왔는데. 그것도 엄청나게 아픈데.
“어휴, 우리 세준이가 잎새 부축해 준 거야? 아이고, 고마워서 어쩌니.”
마세준은 민망하다는 듯 웃어 보이더니 이내 산초와 함께 거실로 사라졌다.
“약 먹고 좀 누워 있으면 될 것 같아.”
“그래. 잎새, 손만 씻고 들어가 누워 얼른. 응?”
화장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말이 아니었다. 찬물을 얼굴에 몇 번 끼얹고 손과 발을 씻고 나오자, 마세준이 산초를 위해 장난감을 흔들고 있었다. 산초는 흥을 주체하지 못해 텀블링을 하고, 벽에 머리를 부딪치고,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씨이……. 산초 껴안고 자려고 그랬는데. 마세준 때문에 다 틀렸다. 마세준이 집에 머무르고 있는 이상 이산초는 웬만해서는 내 곁에 오지 않는다.
나는 터덜터덜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은 뒤, 엄마가 건네주는 약을 삼켰다. 침대에 멀거니 누워서, 마세준이 딸랑딸랑 장난감 흔드는 소리, 탁탁 쥐돌이 던져 주는 소리, 산초가 빨리 쥐돌이를 던져 달라고 냐- 냐- 우는 소리를 들었다. 완벽한 자장가였다. 그리고, 잠들기 직전에서야 그 생각이 들었다. 나, 마세준한테 배 아프다고 한 적 없는데.
눈을 뜨자, 거실에서 TV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몇 시간이나 잔 건지 커튼을 치지 않았음에도 방 안은 이미 어둑어둑했다. 나는 어질어질한 머리를 이끌고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눈을 있는 대로 찡그렸다. 불이란 불은 다 켜져 있던 탓에 거실이 환해도 너무 환했다.
간신히 부엌으로 가 물을 한 잔 내려 마시는데 산초가 다가와 무릎에 이마를 비벼 댔다. 나는 마시던 물 잔을 내려놓고 산초를 안아 올렸다.
“야, 이산초. 너무 늦었거든. 누나 아픈 데 와 보지도 않고. 너어, 진짜. 맨날 마세준밖에 모르지. 미안하면 얼른 이리 와. 누나 뽀뽀, 뽀뽀. 에헤이, 뽀뽀해 줘야지.”
나는 부드러운 산초의 이마에 마구 뽀뽀를 했다. 그리고 귀를 살짝 넘겨 가며 얼굴을 만져 주었다. 크릉크릉- 기분 좋은 소리가 났다. 고소한 냄새가 나는 등에 얼굴을 몇 번 비비고는, 거실 소파로 갔다.
뜻밖에도 거실 소파에는 마세준이 누워 있었다. 축구 중계를 보다 그대로 잠든 모양이었다. 뒤늦게 시간을 확인하자 오후 9시였다. 얘…… 집에 안 가나. 아빠는 아직 안 왔나. 엄마는 이 시간에 또 어딜 간 거지.
곱게 자는 얼굴을 바라보다가 리모컨을 들어 TV를 껐다.
암전된 화면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거실 베란다로 나가 서늘한 바람을 쐬고 있자니 그나마 먹먹한 머리가 조금은 개운해지는 것 같았다. 그대로 방으로 들어가려다 생각을 바꿨다. 마세준 발치에 앉아 다시 TV를 켰다.
* * *
원체 학교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 또 어느 누가 학교를 좋아하겠느냐마는, 나는 아침나절의 학교를 유독 싫어했다. 벽에서 스며 나오는 그 축축한 냉기와 북적이는 분위기가 영 싫었다. 졸리고, 발도 시리고, 먼지도 많고, 정신 사납고. 뭐, 이런저런 이유로.
어찌어찌 교실에 도착한 것에 안도하며 책상에 가방을 내려놓는데, 교실 앞문으로 들어서던 다현이가 불쑥 말을 걸어왔다.
“잎새야, 담임선생님이 너 2층 상담실로 오라는데.”
“담임선생님이?”
“응.”
다현이는 본인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고, 나는 가방을 그대로 내버려 둔 채 터벅터벅 상담실로 향했다. 어제보다야 덜 힘겨웠지만, 아직 몸이 좋지 않아 걸음이 가볍지는 않았다.
상담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뒷짐을 진 채 고개를 숙이고 있던 마세준과 매서운 표정의 담임선생님이 동시에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엉거주춤 목례를 한 뒤 마세준에게 힐끔 눈길을 주었지만, 마세준은 곧장 시선을 피했다. 또 왜 저런대. 나는 속으로 구시렁대며 담임선생님 앞에 섰다.
“안녕하세요, 부르셨어요. 선생님?”
“그래, 잎새야. 몸은 좀 괜찮고?”
선생님은 살벌한 표정에 비하면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네. 이제 많이 좋아졌어요.”
“그래. 세준이, 넌 잠시 복도에 나가 있어.”
마세준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쫓겨나듯 문을 나섰다. 분위기가 냉랭한 게, 보통 일은 아닌 것 같았다. 그나마 예측 가능한 건수라면……. 음, 설마 이 새끼…… 어제 말도 안 하고 튄 건가. 설마 그건 아니겠지.
“잎새야, 어제 세준이가 말도 없이 사라졌어.”
잡는다, 설마가 사람을. 뭐? 나더러는 선생님한테 말도 안 하고 가느냐더니. 지는 진짜 토낀 거였어.
“오후 늦게 점호하는데 선생님이 진짜 얼마나 놀랐는지. 내내 전화도 안 받고 말이야. 잎새, 어제 혹시 세준이랑 같이 있었니?”
“네. 어제 입구에서 우연히 만나서 같이 집에 갔어요.”
나는 대답과 동시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고, 이 녀석이 정말! 그럼 그렇다고 말을 할 것이지. 그렇게 물어도 아니라고, 안 그러면 어디 가느라 그랬냐니까 입을 껌뻑도 안 하는 거 있지. 어휴, 저 답답이.”
선생님은 속 터져 죽겠다는 목소리로 한탄을 했고, 나는 웃음을 참으려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래. 잎새 아직 몸도 안 좋아 보이는데 선생님이 괜히 오라 가라 한 것 같네. 혹시 어지럽거나 하면 반장한테 귀띔해 두고 보건실 가서 좀 쉬도록 해. 세준이 들어오라고 하고.”
“네.”
나는 길게 대답을 하고는 상담실 문을 열었다. 헤실헤실 웃으며 문 옆에 멀대처럼 서 있는 마세준의 약을 살살 올렸다.
“야, 너 선생님한테 말씀도 안 드리고 튀었다며?”
“아, 뭐.”
마세준은 툴툴거리며 성가시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할 말 없을 때 꼭 저런다.
“선생님 엄청나게 화나신 듯.”
“…….”
“들어가 봐. 혼날 건 마저 혼나야지.”
나를 삐딱하게 바라보는 마세준의 어깨를 톡톡 치고는, 뒤를 돌아 걸었다.
* * *
다행히 주말이 오기 전에 생리가 끝났고, 나는 가뿐한 걸음으로 공원으로 향했다. 좀 창피하지만, 내 인생 최초로 두발 자전거에 도전하는 날이었다.
모인 사람은 마세준, 이태민, 최규훈, 윤지애, 최사라, 그리고 나까지 총 여섯 명이었다. 구(區) 차원에서 무료로 대여해 주는 자전거를 빌려 타고 공원을 돌자는 계획이었다.
나는 그거 뭐, 까짓것 네발자전거랑 얼마나 다르겠나 싶어서 흔쾌히 승낙했었고, 지금…… 땅을 치며 후회하는 중이었다. 페달을 밟는 건 고사하고, 바닥에서 발을 떼지도 못하고 있었다. 한쪽 발만 떼도 바퀴가 요란하게 기우뚱거렸고, 내 몸은 좀처럼 말을 들을 생각을 안 했다.
“이잎새, 괜찮아?”
어디선가 나타나 불쑥 물어 오는 목소리는 최규훈의 것이었다. 나는 쪽팔림에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지 애들은 거의 날아다니고 있었다. 저것들은 밥 먹고 자전거만 탔나, 왜 저렇게 잘 타?
그중 마세준이 진짜 가관이었다. 설렁설렁 페달을 밟는데도 빠르기는 제일 빨랐다. 심지어 하나도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그게 그렇게 배가 아팠다. 씨, 내가 너한테 지고는 못살아. 진짜로.
“내가 가르쳐줄게. 저쪽으로 가서 천천히 타 보자.”
최규훈은 천천히 내 앞에 멈추어 서더니, 흔쾌히 나를 돕겠다고 했다. 나는 잠시 갈등했다. 최규훈이랑은 별로 안 친했다. 그냥 우르르 다닐 때나 편한 거지, 어색한 건 정말 질색인데……. 하지만 구미가 당기는 건 사실이었다. 시선을 돌리자, 저 멀리 유유자적 페달을 밟는 마세준의 뒷모습이 보였다. 신경도 안 쓴다 이거지. 지는 겁나 잘 타니까.
“그래 주면 고맙고.”
나는 최규훈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어, 맞아. 그냥 좀 기울어지더라도 계속 페달을 밟아야 돼. 지금 왼쪽으로 조금 기울었으니까 핸들을 왼쪽으로 살짝 꺾어. 아니 아니, 멈추지 말고. 내가 잡고 있으니까. 괜찮아, 계속 가.”
최규훈은 썩 괜찮은 코치였다. 일단, 인내심이 상당했다. 나는 최규훈의 지도 아래 꽤 짧은 시간 만에 자전거 타는 법을 익힐 수 있었다. 아직 바닥에서 발을 뗄 때마다 심장이 울렁거렸지만, 봄바람을 가르며 타는 자전거는 두려움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충분했다.
“금방 배우네. 이제 혼자 타 봐. 내가 따라가면서 봐 줄게.”
나는 올챙이 적 생각은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숨까지 헉헉대며 자전거를 몰아 마세준의 뒤꽁무니를 쫓았다. 가는 내내 몇 번이나 자전거가 비틀거렸지만, 불타는 의지로 위기를 몇 번이나 넘겼다. 마침내 멀지 않은 곳에 마세준의 뒤통수가 보였을 때, 나는 더욱 가열하게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어, 조심해!’ 당황해 그렇게 외치는 최규훈의 목소리와 함께, 장렬하게 넘어지며 무릎을 찧었다.
“아…….”
눈을 뜨자, 반쯤 기울어진 세상이 보였다. 눈을 몇 번 깜빡이며 사태 파악을 하려 애썼다. 나는 길바닥에 모로 누워 있었다. 낑낑대며 정강이를 두 손으로 잡아 올리자 너덜너덜해진 청바지 틈으로 피가 흥건하게 보였다. 멍하니 피를 보고 있자니 갑자기 고통이 몰려드는 것 같았다. 눈물이 찔끔 날만큼 아팠다.
“이잎새, 괜찮아?”
최규훈이 조심스레 몸을 숙이며 물었고, 나는 쪽팔림에 아픈 것도 잠시 잊은 채 잽싸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괜찮아. 알아서 일어날 테니까 얼른 가서 애들이랑 놀아.”
“어떻게 그래. 자, 얼른 일어나.”
최규훈은 황당하다는 듯 웃다가 손을 내밀었고, 나는 팔뚝으로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제발 그냥 가. 쪽팔려서 그래.”
그렇게 간절하게 말하는데, 끼익, 듣기 싫은 소음과 함께 커다란 자전거 바퀴가 내 앞에 멈추어 섰다.
“너네 뭐 하냐, 길바닥에서.”
마세준이었다. 그 지긋지긋한 목소리에 바보같이 입꼬리가 축 처졌다. 그냥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참 빨리도 왔다. 나쁜 새끼.
“가 봐. 내가 데려갈 테니까.”
“어?”
“가 보라고.”
최규훈은 제 이마를 몇 번 긁적이더니, 자전거를 일으켜 세워 떠났다. 나중에 고맙다고 인사해야지. 미안하다고도 하고.
눈물이 콧등을 타고 우에서 좌로 흘렀다. 눈물이 귓속으로 들어가기 전에 손등을 뻗어 얼른 닦아 냈다. 내가 그러고 있는 동안 마세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천천히 앞에 다가와 쭈그려 앉더니, 내가 하는 양을 잠자코 보기만 했다.
“왜 넘어져서는 눈물을 빼냐. 천천히 탈 것이지.”
“…….”
다 알고 있었으면서. 내가 네발자전거도 겨우겨우 울면서 배웠다는 거, 지도 알면서. 어떻게 그렇게 모르는 척을 하냐.
“봐, 다쳤나 보게.”
“안 다쳤어. 가.”
형편없는 목소리가 새어 나와서 나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누가 봐도 눈물에 폭 잠긴 목소리였다.
“고집부리지 마.”
커다란 손이 내 앞에 내밀어졌다.
“가라고.”
“그만하고 일어나. 약국이라도 가게.”
“너나 가. 이 나쁜 새끼야.”
느닷없는 거친 말에, 마세준은 피식거리며 웃었다.
“알았어, 내가 나쁜 새끼야. 그러니까 일어나. 진짜 가 버리기 전에.”
나는 그제야 모래가 박힌 손바닥으로 땅을 짚고 앉아서는, 빽 소리를 질렀다.
“그런 말이 나와? 가 버린다는 말이 나오냐고. 나는 너 넘어졌으면 이렇게 안 했어, 진짜. 야, 마세균. 자전거 가르쳐 주는 게 그렇게 어렵냐? 내가 계속 쳐다봤잖아. 도와 달라고 신호 보냈잖아. 근데 왜 못 알아듣고 세월 좋게 혼자 그러고 있는데. 자전거 못 타는 거 빤히 알면서. 왜 그래. 왜 그러냐고.”
간신히 말을 마치고는 소리를 내어 펑펑 울기 시작했다. 막상 말로 하고 보니, 정말 말도 못 하게 서러웠다. 마세준은 이 세상에서 제일 나쁜 놈인 게 분명했다.
“야, 뭘 그렇게까지 울어. 그만 울어.”
마세준은 곤란하다는 목소리로 이도 저도 못 하고 앉아 있었다. 그게 또 열 받았다. 한참 눈물을 뺀 나는 소매로 눈물을 아무렇게나 벅벅 닦은 뒤, 굳어 있는 마세준을 노려보며 말했다.
“등 대.”
“뭐?”
“업으라고. 나 못 걸어.”
마세준은 잔말 않고 등을 내밀었다. 나는 그 등에 업혀서 한참을 훌쩍였다. 진작에 이럴 것이지.
* * *
마세준은 약국 앞 벤치에 나를 앉혀 놓고는 약을 사 왔다. 한참을 부스럭대더니 알코올 솜과 빨간약, 연고, 반창고를 꺼내어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무릎 이리 내봐.”
나는 땀이 배어 나오는 마세준의 이마를 잠시 노려보다가, 잠자코 무릎을 내어 줬다. 마세준이 무심한 손길로 내 무릎에 달라붙은 모래를 쓱쓱 닦아 내자, 상처가 쓰라려 눈물이 또 찔끔 나왔다.
“아파.”
“조금만 참아. 다 됐어.”
나는 눈물이 글썽거리는 눈가를 손으로 몇 번 훑어 냈다.
“따끔해.”
그렇게 말한 마세준은 곧 내 무릎에 빨간약을 떨어뜨리더니, 후, 소리를 내어 불었다. 약이 마르길 기다렸다가, 연고를 바르고 밴드를 붙여 주었다.
이번에는 손바닥이었다. 두 손바닥이 처참하게 까져 있었다. 알코올 솜이 따가워 손을 오므리려 하자, 곁으로 올라와 앉은 마세준은 힘을 주어 내 손가락을 잡아 폈다.
“그거 아프단 말이야.”
마세준은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내 얼굴을 내려다봤다.
“또 우냐? 뭐 그런 걸 가지고 울어. 다 커서.”
“내가 뭘 다 커. 초딩인데. 초딩이 울 수도 있지.”
마세준은 피식 웃으며 약을 마저 바르기 시작했다.
“오늘 산초 보러 가도 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이하게 묻는 목소리가 엄청나게 얄미웠다.
“언제는, 안 된다 그러면 안 왔냐?”
나는 밴드가 덕지덕지 붙은 손을 잡아 빼며 말했다.
* * *
초등학교 졸업식을 며칠 앞둔 어느 날, 교복을 샀다. 3년간 입을 옷을 구매하는 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간신히 엄마와 사이즈 타협을 마치고 매장을 나설 때쯤엔 식은땀이 다 날 지경이었다. 마냥 냉랭하지만은 않은 겨울바람이 불어와 달아오른 뺨을 식혀 주었다. 우리는 그 겨울이 채 녹기도 전에 중학생이 되었다.
그날은 예비소집일이었다. 뭔 공지를 그렇게 요란하게 하겠다는 건지. 이 최첨단 시대에, 까짓것 문자 몇 통 보내면 될 일을 말이다. 나는 침대 시트에 눌어붙듯 누워서 꼼짝을 않고 있었다.
“이잎새! 얼른 일어나래도! 너 엄마 말 안 들어 진짜!”
엄마가 벌컥 방문을 엶과 동시에 벼락같이 소리쳤고, 나는 즉시 이불을 뒤집어씀으로써 내 영혼을 보호했다.
“아, 5분만. 나 어제 샤워하고 자서 머리 안 감아도 된단 말이야.”
“어휴, 이 귀신. 또 새벽까지 휴대폰 쥐고 있었지 너! 너 정말 휴대폰 압수라도 당해야 정신을 차릴래? 어휴, 어휴. 내가 뭐에 씌어서 저걸 사 줘 가지고.”
“아, 알았어. 알았다고.”
나는 급히 꼬리를 내리며 침대에서 내려섰다. 휴대폰 압수, 현재로써는 세상에서 가장 듣기 무서운 말이었다. 엄마가 방을 빠져나가는 걸 확인하자마자 베개 밑에 고이 모셔 놓았던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아직 한 달도 안 된 새 휴대폰이었다. 다른 애들이 초딩, 아니 유딩 때부터 갖고 있었던 그 흔한 휴대폰을, 난 열네 살이 되고 나서야 손에 넣게 됐다. 엄마 아빠의 오랜 철학 때문에.
눈을 비비며 거실로 나가자, 마세준이 식탁에 앉아 있었다. 저게 왜 여기 있나 싶어 눈을 다시 비볐는데, 그래도 마세준이 맞았다.
“야, 너 여기서 뭐 해?”
우유를 마시던 마세준이 내게 눈길을 돌렸고, 이내 못 볼 걸 봤다는 듯 다시 식탁 위로 시선을 거두어 갔다. 냐- 그 틈에 산초가 다가와 내 무릎에 얼굴을 비볐다. 저게, 왜 말을 씹어? 나는 산초를 안아 들며 다시 한 번 물었다.
“너 왜 여기 있냐니까.”
“이잎새, 까마귀 고기 삶아 먹었어? 엄마가 3월까지는 데려다준다고 했잖아.”
마세준을 대신해 엄마가 성마른 대답을 해 주었다.
“아……. 그랬지 참.”
그제야 수긍이 갔다. 우리가 새로 입학하게 될 중학교는 아파트 단지에서 꽤 떨어져 있었다. 교통편도 영 시원찮은 데다가 카풀을 하기에도 인원이 부족해, 엄마가 학기 초반에만 우리를 바래다주기로 합의되어 있었다. 어느 정도 적응하고 난 뒤에는 버스를 갈아타 가며 직접 등교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어머 세상에, 시간 좀 봐. 얘, 잎새야. 너 얼른 씻어. 애기 이리 내고!”
시간을 확인한 엄마가 다시 한번 나를 독촉했고, 나는 산초의 이마에 뽀뽀를 한 뒤 엄마 품에 산초를 내려놓았다. 산초는 엄마의 품에 잠자코 안기는 대신 어깨를 타고 올라 바닥으로 점프했다. 나는 피식 웃으며 욕실로 향하다가, 그대로 뒤를 돌아 마세준을 잠시간 응시했다. 오늘 뭐가 좀 다른데……. 가만 뜯어보니, 교복이 범인이었다. 이, 역시 기럭지가 돼서 그런지 교복이 제법 잘 어울렸다. 짜식, 봐줄 만한데.
“야, 너 태 좋다?”
내가 장난스레 느물거리자, 마세준은 토스트를 먹다 말고 마른기침을 했다. 나는 어깨를 들썩이며 휴대폰 잠금을 풀고는 화장실로 향했다.
* * *
“잎새, 또 괜히 세준이 괴롭히지 말고. 사이좋게들 지내.”
“내가 뭐.”
엄마의 난데없는 꾸중에, 나는 시선을 창밖으로 고정한 채 대충 대답했다. 멀지 않은 곳에 학교 정문이 보였다. 억울해. 얌전히 잘 있는데 또 혼났다.
“으휴, 양심이 있으면 네 전적을 한번 곱씹어 봐. 세준이가 보살이지, 보살이야. 늦겠다. 얼른들 내려, 선생님 말씀 잘 듣고. 뭐 빠뜨리지 말고 유인물 같은 거 잘 챙겨 와. 알겠지? 세준아, 잎새 좀 부탁할게?”
엄마는 세상 상냥한 목소리로 뒷좌석에 앉은 마세준을 돌아봤고, 마세준은 고개를 꾸벅 숙인 뒤 문을 열었다. 환장할 콜라보였다. 왜 두 사람 다 내 앞에서만 딴사람이 되느냐고. 나는 무슨 죄기에.
“바래다주셔서 감사합니다. 개학하면 버스 타고 다닐게요.”
“학교생활 익숙해질 때까지만 타고 다녀. 아줌마도 가볍게 바람 좀 쐬게.”
“네.”
마세준은 대답과 함께 뒷문을 닫더니, 곧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원래 같았으면 ‘야, 안 내리고 뭐 해.’ 이러고 말았을 텐데. 또, 또, 젠틀한 척한다. 괜히 우리 엄마 앞이라 저런다. 저러니 우리 엄마가 쟤라면 껌뻑 죽지. 덕분에 친딸은 서러워 미친다.
“엄마, 땡큐. 나 갈게.”
“그래. 고생들 해라.”
부웅- 소리를 내며 엄마의 차가 떠났고, 나는 마세준과 함께 교문을 넘었다.
* * *
역시 별건 없었다. 강당에서 교장 선생님이 몇 마디를 한 뒤 반 배정이 있었고, 시키는 대로 교실에 가서 앉아 있자니 뭔 종이를 부지런히 나눠 줬다. 그걸 가방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고 한참 동안 멍을 때리고 있는데, 그만 집에 가라고 했다.
나는 애들이 얼추 교실을 빠져나갈 때까지 얌전히 책상에 앉아 있다가, 휴대폰을 꺼내 마세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야, 뭔 전화를 이렇게 늦게 받아. 너네 반 끝났어? 어디야?”
-하…….
수화기 너머 마세준은 깊게 한숨을 쉬었다.
“왜 시퍼렇게 젊은것이 한숨을 쉬고 그러냐? 복 나가게.”
마세준은 또 말이 없었다. 이상한 새끼. 왜 전화를 받아 놓고 말을 안 해? 그렇게 속으로 투덜거리는데, 풀썩, 가방 하나가 내 책상 위로 내려왔다. 고개를 들자 불만스러운 얼굴을 한 마세준이 서 있었다.
“눈을 뜨고 다니는 거냐, 너.”
마세준은 삐딱하게 물었다. 대답을 듣겠다는 의도로 묻는 게 아니라 꼽을 주려는 것 같았다.
“뭐야. 너 왜 여기 있어? 우리 반은 어떻게 알고 왔냐?”
내가 휴대폰을 귀에서 떼며 황당하다는 듯 묻자, 마세준은 표정을 굳히며 입술을 뗐다.
“왜 여기 있냐고? 너 그거 오늘 몇 번 묻는지 아냐.”
“헐…… 설마…… 너도 3반이야? 진심?”
나는 교실을 한 번 둘러본 뒤 턱을 다물지 못하며 물었고, 마세준은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가자, 배고프다.”
이로써 우리는, 3년 연속 같은 반이 되었다.
* * *
“아, 맞다.”
우리는 버스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신호에 걸린 버스가 멈추어 섰고, 차창 너머 편의점에 진열된 사탕 바구니를 보자, 자연스레 가방에 잠들어 있는 사탕 꾸러미가 생각났다. 그저께 엄마랑 마트에 갔다가 아빠 걸 사는 김에 겸사겸사 산 거였다. 솔직히, 엄마가 세준이 좀 챙겨 주라며 닦달을 안 했더라면 굳이 사지는 않았겠지만. 기왕 산 거 생색을 있는 대로 낼 예정이었다.
“야, 받아.”
팔을 툭툭 치며 사탕을 건네자, 말없이 정면을 응시하던 마세준은 의심스러운 눈길로 나를 바라봤다.
“야, 너 내가 뭐 이 정도 의리도 없을 줄 알았냐? 너한테 받아먹은 게 얼만데. 나도 양심이라는 게 있어. 그러지 말고 넣어 둬. 밸런타인데이에 혼자 궁상떨지 말고.”
마세준은 한참 동안 사탕을 노려보더니, 마지못해 받아 간다는 뉘앙스를 술술 풍기며 그것을 집어 들었다. 어쭈.
“뭐냐. 기껏 주니까.”
나는 마세준의 허벅지 위에 놓인 봉지를 다시 낚아채 갈 듯 손을 뻗었고,
“뭐가.”
마세준은 내 손목을 덜컥 잡았다.
“줘도 띠껍냐고. 김새게.”
“내가 언제.”
마세준은 곧 다른 손으로 사탕 꾸러미를 잡아당겼다.
“새끼, 어차피 받을 거면서.”
나는 손목을 비틀어 빼냈고, 마세준은 사탕을 부지런히 제 가방에 챙겨 넣었다.
“너, 그거 혼자 먹어라. 누구 한 톨이라도 나눠 줬다간 봐, 용서 없어 진짜. 그거 비싼 거야.”
마세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정차 벨을 눌렀다.
“야, 너 피자 먹을 거냐.”
버스 정류장에 발을 디디자마자, 뒤에서 버스 계단을 내려오던 마세준이 물었다.
“피자?”
나는 기쁨을 감추지 못한 채 물었다. 안 그래도 엄청 당겼는데……. 바로 이거였다. 날 아무리 빡치게 해도, 내가 이래서 마세준을 미워할 수가 없다. 얜 내가 뭘 먹고 싶어 하는지를 기가 막히게 안다. 정말 신기할 정도로.
“내가 산다.”
게다가 먹을 것도 곧잘 사 준다. 이러니 내가 얘를 못 끊지.
“오오올. 사탕 먹인 보람이 있는데. 그럼…… 나 치즈크러스트 추가해도 됨?”
나는 마세준의 옆구리를 찌르며 물었고, 마세준은 손을 휘휘 저으며 내 손을 털어 냈다.
“어, 맘대로 해.”
“용돈 받았냐? 장난 아니네.”
나는 피식 웃으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두근대는 가슴을 안고, 일찍이 다운 받아두었던 음식 배달 앱을 켰다.
“나도 이제 직접 피자 시켜 먹을 수 있거든. 이제 궁상맞게 너한테 부탁할 일 없거든.”
나는 그간의 억울함을 토로하듯 장난스레 말했고, 나란히 걷던 마세준은 흘끔 내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보더니, 휴대폰을 들고 있는 내 팔을 살짝 쥐었다.
“아니, 가서 먹자고.”
그러고는 뚱딴지같은 소리를 했다. 무슨 소리래. 포장은 고사하고 맨날 시켜 먹기만 했는데.
“귀찮은데…….”
나는 입 안쪽 살을 깨물며 고민하다 말했다. 피자는 모름지기 집에서 뒹굴면서 먹어야 한다. 시시한 영화 하나 틀어 놓고, 막 양손 새끼손가락으로 컵 겨우 쥐어서 벌컥벌컥 콜라도 마시고.
“너 원하는 대로 해, 그럼.”
마세준은 내 팔을 놓아주더니, 뾰족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고는 얄미울 만큼 긴 다리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아니, 저 새끼 왜 저래. 삐진 것 같은데. 샐러드바 먹고 싶어서 저러는 건가. 아니, 풀떼기는 좋아하지도 않는 게. 음, 그도 아니면…….
그때, 아차 싶었다. 뇌리로 콜라가 휙 스쳐 갔다. 그래. 콜라, 콜라 때문이었다. 저 콜라 귀신, 아무리 생각해도 콜라가 아니고서야 저렇게 가시 세울 일이 없었다.
“야! 같이 가. 같이 가자고. 내가 까짓 콜라 그거 백천 개 사 줄게.”
정답을 찾은 나는 벌써 저만치 멀어진 마세준을 향해 뛰어가며 외쳤다. 마세준은 우뚝 멈추어 서더니, 뒤를 돌아 내 얼굴을 한참 동안 노려보았다.
“아 왜 그러는데.”
나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말했고, 마세준은 갑자기 하늘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내가 널 데리고 뭘 하냐.”
뭔가, 제대로 허탈한 표정이었다. 그날은 그랬다. 피자 한 판 먹기가 더럽게 힘들었다.
* * *
“냐-”
품에 안긴 산초가 간식을 고대하며 내 목과 어깨에 얼굴을 짓이겨 왔다. 크릉크릉 있는 애교 없는 애교를 다 부려 가면서. 나는 벌써 눈물이 날 것 같아 괜히 코를 훌쩍였다. 이 쪼그만 게 얼마나 배가 고플까.
산초는 오늘 일생일대의 수술을 앞두고 있었고, 그 때문에 어젯밤부터 사료를 먹지 못했다.
어깨와 귀 사이에 휴대폰을 걸쳐 둔 불안정한 자세로, 나는 산초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수화기 너머 마세준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기를 기다렸다.
“오구 오구, 산초, 우리 애기. 맛있는 거 먹고 싶어. 으응. 맘마 못 먹어서 배고팠어.”
-어…….
꽤 오래 기다린 끝에 들려온 목소리는, 팍 가라앉아 갈라져 졸려 죽겠다고 외치고 있었다. 보아하니 지금 일어났다. 아니, 오늘이 어떤 날인데. 목욕재계하고 딱 기다려야지.
“야, 너 언제 올 거야.”
나도 모르게 칭얼거리는 목소리가 나왔다. 내가 지금 얼마나 무서운데, 자기는 늦잠이나 자고 있냐.
-응…….
마세준은 아직도 반쯤 꿈결 속에 있는 것 같았다. 언제 올 거냐고 묻는데 응은 무슨 응. 생전 늦잠 안 자더니 꼭 중요한 날 이런다.
“오늘 산초 병원 가는 날이잖아. 아직도 자고 있으면 어떻게 하냐?”
-……씻고 갈게.
“30분 안에 와.”
나는 통화가 끊긴 휴대폰 액정을 잠시 바라보다가, 입술을 불만스럽게 씰룩이며 주머니에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초인종은 20분도 지나지 않아 울렸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건, 머리에서 물기를 뚝뚝 떨구고 있는 마세준의 몰골이었다. 아니, 아무리 옆 동이라지만…… 2월 중순에, 진짜 또라이인가. 어느새 귀신같이 나타난 산초가 마세준에게 안아 달라며 보채기 시작했다.
“늦잠 잤다. 미안.”
마세준은 상체를 숙여 산초를 쓰다듬음과 동시에 진짜 무성의하게 사과를 했다. 뭐, 별 상관없었다. 우린 원래 그런다. 사과를 하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다.
“감기 걸리라고 고사를 지내지, 왜.”
나는 그렇게 말하며 마세준에게 수건을 던져 줬고, 마세준은 머리를 열 번도 안 되게 털더니 내게 수건을 도로 돌려줬다. 나는 단호한 표정으로 수건을 다시 마세준의 머리 위에 얹었다.
“제대로 말려. 이 날씨에 옷 젖으면 진짜 바로 감기 걸려.”
그러고는 산초를 앗아 왔다. 무릎을 꿇고, 의사 선생님의 지시대로 담요와 배변 패드를 깔아 둔 캐리어에 산초를 들여보냈다. 그동안 마세준은 다시 제 머리를 털어 냈다.
“니야오, 니야오.”
산초가 발톱을 세우며 버티자, 애한테 정말 못 할 짓을 하는 것 같아 속이 문드러졌다. 산초는 가기 싫다는 듯 뻗대며 울었다. 이 와중에 똘똘한 우리 산초. 병원 몇 번 가 보더니 병원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기 시작했다.
“산초, 누나가 산초 아야 하지 말라고 그러는 거야. 알지? 응?”
캐리어 문을 잠그자, 문에 달린 창살 틈으로 산초가 계속 코를 문질렀다. 나는 손가락을 뻗어 촉촉한 코를 톡톡 두드렸다. 그러고는 캐리어 위로 담요 하나를 더 덮어 주었다. 곧 마세준이 캐리어를 안아 들었고, 우리는 병원으로 향했다.
* * *
“엉엉, 산초야. 누나가 미안해. 우리 산초 고자 만들어서 미안해.”
내가 동물병원 대기실 의자에 앉아 넋을 놓고 우는 동안, 마세준은 커다란 손으로 제 눈가를 계속 쓰다듬었다. 쪽팔려 죽겠다는 몸짓이었다. 나는 그게 더 서러웠다. 산초가 땅콩을 잃었는데, 넌 지금 쪽팔린 게 대수냐? 산초가 고자라니…… 산초가 고자라니!
“이잎새, 그만 울라고. 어? 뚝.”
“엉엉. 우리 산초 뽕알이 없어지는데, 내가 어떻게 뚝을 해.”
“야, 쉿! 넌 어떻게 수치란 걸 모르냐.”
마세준이 검지를 입술에 세워 가며 나를 진정시키려 하는 동안, 간호사 선생님이 차트를 들고 우리에게 다가왔다.
“산초 보호자분, 경과 안내해 드릴게요. 여기 보시면 산초 피검사 결과 아주 건강해서, 조금 전에 마취 들어갔어요. 남아의 경우는 개복 수술이 아니니 크게 걱정 않으셔도 돼요. 원장님께서 수술 꼼꼼히 잘 봐주실 거예요.”
“네.”
“일단 귀가하셨다가, 오후 5시 30분 전후로 와 주시면 될 것 같아요. 수술 후 유의 사항은 그때 또 안내해 드릴게요. 진료비 수납은 이쪽에서 먼저 해 주시면 됩니다.”
“네. 선생님, 우리 산초 잘 부탁드려요.”
나는 어깨를 들썩이며 간신히 대답했고, 간호사 선생님은 웃으며 내 등을 두드려 주었다. 나는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뻘쭘하게 앉아 있던 마세준에게 우리 엄마의 카드를 건넸다. 자리에서 일어선 마세준은 잠시 나를 내려다보더니, 곧 데스크로 향했다.
그새 눈물이 멎은 나는 코를 간간이 훌쩍이며 마세준을 기다렸다. 잠시 뒤, 마세준은 영수증과 함께 구겨진 티슈를 몇 장 건넸다. 멋없이 퍽퍽 뽑아 들었을 걸 생각하자 괜히 좀 웃겼다. 나는 그걸 잡아 들고 눈가를 대충 찍은 뒤, 팽- 코를 풀었다.
“야, 나 울었더니 배고파. 밥 먹을래. 햄버거.”
맹맹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세준은 ‘코미디다 진짜. 하나만 해라, 어?’ 하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다가, 기가 막힌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짧게 웃었다.
“가자.”
나는 휴지를 쓰레기통에 잘 넣은 뒤, 마세준을 따라 병원 문을 나섰다.
* * *
“나는…… 음, 통살치킨버거 세트. 음료는 사이다.”
“또 약 냄새 난다고 다 버리지 말고 그냥 콜라 마셔.”
“아니야, 오늘은 진짜 사이다 마실래.”
내가 자신 있게 답하자, 마세준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곧 카운터로 향했다. 우리는 빨간 쟁반 두 개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고, 마세준은 감자튀김 포장지 위에 케첩을 짜다 말고 내 눈을 응시했다. 나는 툴툴거리며 눈을 흘겼다.
“뭘 봐. 눈 부은 거 처음 보냐.”
“안 봤는데.”
“아니면 말아라.”
나는 어깨를 으쓱한 뒤, 감자튀김 부스러기를 찾아서 주워 먹기 시작했다. 이게, 진짜 별미다. 완전 아삭하고 고소하고 다 한다. 한껏 흥이 오른 기분으로 사이다를 한 모금 빨아들이는데, 하……. 또 약 냄새가 났다. 그, 이상한 치과 냄새 같은 거.
“윽.”
내가 과장된 제스처로 컵을 내려놓자, 마세준은 기다렸다는 듯 내 빨대를 뽑아 제 콜라 컵에 꽂아 주었다. 나는 곧 죽어도 사이다를 마시겠다고 호언장담했던 게 쪽팔려서, 검지로 광대를 긁다가 말했다.
“내가 이따 리필 해 올게.”
“또 들고 오다 넘어지려고.”
“이게, 내가 뭘 얼마나 많이 넘어졌다고.”
마세준은 햄버거 봉지를 뜯더니, 말끔한 동작으로 빵을 베어 물었다. 그나저나, 나도 저거 먹을걸. 뭔지는 몰라도 더럽게 맛있어 보였다. 얜 나중에 할 거 없으면 음식 CF만 찍어도 떼돈 벌 거다, 아마.
“야.”
“왜.”
“네 거 뭐야? 한 입만 바꿔 먹자.”
나는 내 버거를 흔쾌히 내밀며 말했고, 마세준은 콜라를 한 번 빨아들이더니 한숨을 푹 쉬었다.
“똑같은 거야. 네 거랑.”
“그래? 근데 왜 그게 더 맛있어 보이지?”
마세준은 왜 아니겠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젓더니 다시 햄버거를 먹는 데 집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세준의 햄버거가 동났다. 나는 먹고 있던 햄버거를 내밀었지만, 마세준은 고개를 내저었다. 잘 먹기는 잘 먹는데 배가 부르면 젓가락 딱 내려놓는, 진짜 부러운 식습관이었다. 나는 맛있는 게 눈앞에서 다 사라질 때까지 의자에서 엉덩이를 못 떼는데.
또 한창 햄버거를 삼키는데 또 테이블 아래에서 마세준과 무릎이 부딪쳤다. 처음 몇 번이야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자꾸 그러니까 슬슬 약이 올랐다.
“야, 너 다리 길다고 자랑하냐.”
“뭐가.”
마세준은 창밖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다리 부딪치잖아. 의자를 좀 빼던가.”
“이거 고정돼 있는 의자야.”
“씨, 이거 한국인의 체형을 똑바로 고려해서 만든 거 맞아? 무슨 놈의 의자를 중딩도 못 앉게 만들어 놨어.”
마세준은 고개를 돌리며 잠시 나와 시선을 맞췄다. 느릿느릿 테이블 위로 턱을 괴더니, 다시 또 하염없이 창밖을 내다봤다. 그 이후로는 한 번도 무릎이 부딪치지 않았다.
* * *
밥을 먹고도 시간이 한참 남자, 우리는 호기롭게 카페에 들어갔다. 레모네이드를 한 잔씩 시켜 놓고는 각자 휴대폰을 들여다봤다.
새벽같이 산악회 등산을 간 엄마 아빠는 내게 끊임없이 사진을 전송해 왔다. 산초 수술은 잘 되었느냐며, 우는 이모티콘도 수십 개를 보내 왔다. ‘저녁에 마세균이랑 데리러 갈 거야.’ 하고 짧은 답장을 보낸 뒤, 사진을 확대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마세준에게 내 휴대폰 화면을 보여 주었다.
“야, 이거 봐 봐. 엄마 완전 겁먹었어. 출렁다리 무섭나 봐.”
“잘 도착하셨대?”
“어, 아까 아침에. 재밌나 봐, 엄청 신났어. 내일 저녁에 온대.”
“너, 혼자 안 무섭냐.”
“현관에 잠금장치가 몇 갠데. 무서울 게 뭐 있어. 우리 산초도 있고.”
마세준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또다시 휴대폰 화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뭘 저렇게 열심히 보나 궁금해진 나는, 테이블 위로 몸을 기울여 마세준의 화면을 훔쳐봤다. 마세준은 ‘고양이 중성화 수술 후 관리’, ‘수컷 고양이 중성화’ 뭐 그런 걸 검색하고 있었다.
귀여운 새끼. 의연한 척해 놓고 뒤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구만. 나는 그게 기특해 마세준을 보며 웃었고, 마세준은 휴대폰을 응시한 채 ‘그만 봐. 잘생긴 거 처음 보냐.’며 툴툴댔다. 나는 ‘안 봤는데.’ 그랬다.
마세준은 곧 컵 뚜껑을 열더니 얼음을 씹었고, 그 소리가 괜히 맛있어 보여 나도 그렇게 했다. 별맛은 없었다.
* * *
“산초, 우리 애기. 많이 아팠어? 누나랑 얼른 집에 가자. 맘마하고 간식 먹자. 응? 조금만 참아.”
나는 캐리어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계속해서 산초에게 말을 걸었고, 마세준은 택시를 잡아 세웠다.
집으로 돌아와 소파 위에 캐리어를 올려 두고 그 문을 열자, 잔뜩 풀이 죽은 산초의 모습이 보였다. ‘냐.’ 산초는 원망스럽다는 듯 작은 목소리로 울었다. 눈을 반쯤 뜨고 눈치만 살피는 것이, 영 기운이 없어 보였다. 팔에 감긴 붕대를 보자 안타까움에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아가, 산초야. 힘들었지.”
캐리어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발가락을 슬며시 매만져 주자, 산초는 기다렸다는 듯 내 손가락에 얼굴을 비비려고 들었다. 목을 감싸고 있는 딱딱한 카라 때문에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냐.”
나와 눈이 마주친 산초가 또 한 번 울었다. 무서웠는데 왜 이제야 만져 주는 거냐고 투정을 부리는 듯했다. 이 어린것에게 괜히 못 할 짓을 한 것 같아 괴로웠다.
“또 우냐.”
“수술을 괜히 시켰나 봐.”
“그래야 오래오래 스트레스 없이 건강하다잖아. 잘한 거야.”
식탁에 앉아 있던 마세준이 그렇게 말하자, 기다렸다는 듯 눈물이 줄줄 흘렀다.
“산초, 미안해.”
나는 산초의 앞에 엎드려 누워 눈물을 빼다가, 곧 잠에 빠졌다.
카라라랑- 산초의 밥그릇에 사료 떨어지는 소리에 눈을 떴다. 나는 소파 등받이에 코를 묻은 채 잠을 자고 있었다. 산초가 오도독오도독 사료를 씹는 소리에 이어, 마세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산초. 의젓하게 잘했어. 근데 너 인마, 너 때문에 누나가 얼마나 울었는지 알아?”
나는 담요를 끌어안으며 슬쩍 등 뒤로 고개를 돌렸다. 캐리어는 현관 앞에 잘 치워져 있었고, 마세준은 산초의 등을 쓰다듬고 있었다. 사료를 먹는 뒷모습을 보니 다행히 산초는 기력을 많이 회복한 것 같았다. 몸을 일으키던 마세준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괜히 무안해서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마세준의 다리가 눈앞에 있었다. 마세준은 곧 물 잔을 내밀었다.
“마셔.”
나는 소파를 짚고 몸을 일으킨 뒤, 그것을 받아 달게 마시기 시작했다.
“산초 물도 곧잘 마셨고, 화장실도 갔어. 수술한 거 덧날까 봐 놀아 주진 않았다. 이따 밤에 자기 전에 팔에 붕대만 잘 풀어 줘. 나 간다. 문 잠가.”
마세준은 말을 마치자마자 뒤돌아 걸었고, 나는 물을 마시다 말고 손등으로 입술을 닦으며 다급하게 마세준을 불러 세웠다.
“야. 마세준, 잠깐만!”
신발에 발을 끼워 넣던 마세준은, 무슨 일이냐는 듯 나를 돌아봤다.
“자고 가면 안 돼? 내 침대에서 자. 내가 소파에서 잘게.”
부탁하듯 운을 띄웠지만 나는 곧 뻔뻔해졌다.
“자고 가. 나 무서워. 혼자 있다가 혹시 산초 아프면 어떻게 해?”
나는 물 잔을 꽉 쥔 채 말했고, 미세하게 흔들리는 물 잔을 잠시 응시하던 마세준은 그대로 현관문을 여는 대신 신발을 벗고 집으로 들어섰다. 그러고는 주방으로 향했다.
“아빠한테 물어볼게. 밥부터 먹자.”
냉장고 문을 열며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쉰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먼저, 산초와의 약속을 지키기로 했다. 간식 캔을 따서 부어 주자, 산초는 사료를 먹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기세로 연어를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산초, 오구 오구. 그렇게 맛있어.”
카라 속으로 손을 뻗어 부드러운 뒤통수와 귀를 몇 번 쓰다듬은 뒤, 주방으로 갔다. 나는 마세준이 예쁘게도 썰어 놓은 오이를 날름 하나 집어 먹은 뒤, 냉장고에서 비빔 소스를 꺼냈다. 마세준은 냄비 두 개에 불을 붙이더니 각각 달걀과 소면을 삶았다. 깨와 참기름을 뿌려 내자 저녁상이 뚝딱 완성되었다.
“야, 이게 뭐 어때서. 진짜 편하다니까?”
나는 부득불 고쟁이를 거부하는 마세준을 타이르고 있었다. 마세준은 입이 댓 발 튀어나와 있었다. 기껏 저녁 맛있게 잘 먹여, 침대 양보해 드려, 아끼는 고쟁이까지 건네줬더니 이러고 나온다. 아니, 명절 때마다 우리 가족은 이걸로 천하통일이다. 할매 할배, 엄마 아빠 할 거 없이. 세상 편한데……. 얘가 뭘 모른다.
“금방 갔다 온다니까.”
고쟁이 입기 싫다고 이 밤에 고작 잠옷 가지러 집에 다녀오겠다니, 말이 되냐, 고집도 진짜.
“그냥 입지, 누가 본다고 그러냐.”
마세준은 입을 달싹거리더니, 가차 없이 집을 나서며 얘기했다.
“문 잠가. 5분 안에 올게.”
그러고는 진짜 5분 안에 왔다. 걸쇠를 풀지 않은 채 빼꼼 문을 열자, 거칠게 숨을 헐떡이는 마세준의 가슴팍이 보였다. 나는 다시 문을 닫았다 열었다. 마세준의 손에는 칫솔이랑 잠옷이 들려 있었다.
나는 뒤를 돌아 소파에 가 앉았다. TV를 켰는데도 마세준이 거실로 나올 생각을 않자, 나는 고개를 빼 들어 마세준의 동태를 살폈다. 식탁 의자에 겉옷을 벗어 걸어 두는 마세준의 얼굴은 추위에 익어 흡사 불타는 고구마 같았다.
우리는 개봉한 지 5년이나 지난 시시한 영화를 틀었고, 그러다 나는 어느 틈에 잠들었던 것 같다. 이튿날 눈을 뜨자, 나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열린 방문 틈으로 쥐돌이 흔드는 소리가 났다. 문을 열고 나가자, 마세준과, 행복한 고자 이산초가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