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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화 (97/97)

97화(외전)

유이시엘과 로엘, 카드란이 도착한 곳은 거대한 꽃밭이었다. 꽃들이 수없이 많이 피어 짙은 향을 내뿜고 있었다.

꽃들의 색깔이 모두 다 청색이 것이 특이했다. 다양한 청색 꽃들이 피어 있는 곳으로 걸어간 유이시엘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머리카락 색을 확인했다.

“유이시엘의 머리카락 색과 같지?”

아나키엔이 웃으면서 물었다.

“무슨 사연이 있습니까?”

카드란이 흥미를 가지고 물었다. 색깔이 정해진 것이, 꼭 이유가 있을 것만 같았다.

“궁금해?”

“조금은요.”

“연인이 청색 머리카락이었어.”

아나키엔의 말에 유이시엘과 카드란은 잠시 놀란 듯이 그를 보았다.

“연인이 있었어요?”

“연인이 있었습니까?”

둘이 동시에 비슷한 말을 했다. 그러자 아나키엔이 그들을 흘겨보았다.

“왜 그런 반응이야?”

“그거야 아나키엔에게 연인이 있을 거라고는…….”

카드란은 조금 고약한 면이 있던 아나키엔을 떠올렸다. 사람을 의심하고, 끝임 없이 시험하던 그가 아직도 뇌리에 떠나지 않았다.

“아, 그건 뭐…….”

그러다가 아나키엔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결말이 별로 좋지 않았어.”

그는 그렇게 말한 뒤 꽃들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꽃들은 예뻐! 구경해.”

아나키엔은 화제를 피했다. 카드란과 유이시엘도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꽃들을 바라보았다.

“어마마마, 이건 무슨 꽃이에요?”

로엘의 질문에 유이시엘이 웃으면서 답해 주었다. 지금도 황후궁의 정원에 매년 심을 꽃들을 고르는 일을 유이시엘이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어지간한 꽃 이름은 다 알고 있었다.

“근데 이 꽃들엔 청색이 없는데, 어떻게 한 거예요?”

유이시엘이 호기심을 가지고 물었다.

“그거야 마법으로 바꾸었지.”

아나키엔의 마법의 한계는 어디까지인 걸까.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래도 사람의 마음은 치료하지 못해.”

아나키엔이 과거의 일을 떠올려 이런 말을 하는 걸까. 목소리가 유난히 씁쓸하게 들렸다.

그에 유이시엘도 자신의 일을 떠올렸다. 카드란도 마찬가지였다.

“여기 꽃들이 정말로 예뻐요!”

다행히 로엘의 외침에 그들은 현재로 돌아왔다. 그렇지. 지금은 로엘과 여행 중이기에, 가족끼리 시간을 보내고 있는 와중이기에 우울해할 틈이 없었다.

카드란과 유이시엘은 얼른 정신을 차린 뒤 로엘을 따라갔다.

일단은 여행을 즐기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 * *

며칠 동안 영지 곳곳을 돌아다니고 많은 것을 구경했다. 하지만 유이시엘은 꽃밭에서 느꼈던 감정이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음을 알아챘다. 절망하고, 절규하고 무심으로 치달았던 그때가 울컥울컥 떠올랐다.

로엘이 잠이 들었다. 카드란은 유이시엘의 마음을 짐작한 듯 옆방으로 가 있었다.

‘저녁에 비가 내린다고 하는데.’

비라도 맞으면 좀 나아질까.

유이시엘이 잠시 한숨을 내쉬는데 문이 열리며 아나키엔이 고개를 내밀었다.

“무슨 일이에요?”

“아이도 잠들었는데, 마지막 날이잖아. 카드란하고 술이라도 해.”

아나키엔이 유이시엘에게 술을 건네주었다. 고급 와인이었다.

“저택 옥상에 가면 나름 운치 있는 장소가 있어.”

“감사해요.”

“뭘, 내가 쓸데없는 말을 해서 여행을 망친 거 같은데.”

“아니에요. 아나키엔 덕분에 여행이 즐거웠어요.”

유이시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이 진정되기를 기다리는 카드란이 있을 옆방의 문으로 다가갔다.

그는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 어떤 마음일까.

과거의 순간을 이야기하기로 했다. 마음을 털어놓기로 했다.

물론 카드란에게는 불편한 자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자신이 힘들다. 카드란이라면 견뎌 줄지도 몰랐다.

유이시엘은 노크를 했다. 문이 열리며 카드란이 고개를 내밀었다.

“유엘?”

“술 한잔해.”

유이시엘의 말에 카드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나키엔이 운치 있는 장소가 있다고 했어. 옥상에 올라가자.”

“그래.”

카드란이 그녀를 따라 옥상에 올라갔다. 레어 안이라고 해서 동굴일 거라 생각했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거대한 틈을 지나면 새로운 장소로 워프 되었다. 그렇기에 여기가 세계의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카드란과 유이시엘도 몰랐다.

올라간 옥상에는 테이블과 탁자가 위치했고, 비를 맞지 않도록 위에 천막이 설치되어 있었다. 밤하늘을 보며 술을 마실 수 있는 공간이었다.

카드란과 유이시엘은 자리에 앉았다.

맞은편에 앉은 그들은 말없이 술을 마셨다. 건배를 한 뒤 말이 없던 그들, 침묵을 깬 것은 유이시엘이었다.

“카드란, 내 과거를 봤잖아.”

“생생하게 봤지.”

카드란은 아나키엔이 주었던 벌을 생각했다. 벌써 몇 년 전인데도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인 양 생생했다.

“언제가 가장 괴로웠어?”

유이시엘는 줄곧 궁금했다. 카드란은 언제의 자신을 보고 괴로워했을까. 그러자 카드란은 막힘없이 대답했다.

“네가 내가 외치는 소리를 듣고 절망했을 때야. 과거에 네가 했던 것을 모두 다 부정하고 추억마저 부서졌다고 외쳤던 나와,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너. 그것을 알았을 때 정말로 나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었어.”

카드란은 길고 긴 말을 했다. 유이시엘은 손끝을 떨었다. 그가 수없이 절망을 주었지만 그녀도 그 순간이 가장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일을 계기로 완전히 내려놓아 버렸으니까.

“후회해?”

유이시엘은 감정을 누르며 물었다. 하지만 감정은 그녀의 입가와 눈으로 흘러나왔다. 눈물이 흐르고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고통을 삼키고 물어보는 그녀를 바라보며 카드란은 와인을 한잔 마셨다.

“후회하지.”

그는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그때라도 그 짓을 안 했더라면 네가 오랜 기간 고통스러워하지 않았을 거야.”

유이시엘은 이를 악물었다. 그렇지만 결국 이 소리가 나오고 말았다.

“왜 그랬어?”

원망이 섞인 말이 튀어나왔다.

“내가 고통스러워할 것을 나중에라도 알았잖아! 아니, 그때도 알고 있었잖아! 그런데 왜 그런 거야!”

그때는 카드란에게 외치지 못했던 말.

마음이 죽어서 사라진 줄 알았던 고통의 가시가 그녀의 마음을 차지했다. 날카로운 가시는 카드란을 찌를 것처럼 일어났다.

슬픔이 폭발할 것 같다. 지금까지 줄곧 누르기도 하고, 애써 외면했던 과거의 그녀가 나타났다.

상처를 입은 과거의 자신, 무심함에 눌려 나타나지 못했던 아픔을 가진 그녀가 나타나 울고 있었다.

상처를 준 카드란에게 말하고 있었다.

왜 상처를 주었냐고.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느냐고. 자신을 그렇게 몰아가야 했느냐고.

카드란은 눈물을 흘리며 묻는 그녀의 옆으로 다가갔다. 유이시엘의 손을 꼭 잡다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미안해.”

그는 곧바로 사과를 했다.

“나 때문에 넌 힘들었을 거다. 울고 싶지만 울지도 못하게 되어 버려서.”

그는 말없이 유이시엘을 끌어안았다.

그 순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후두둑 떨어지는 빗소리가 들렸다. 마치 유이시엘의 마음에 슬픔의 비가 내리는 것을 알려 주듯이.

“나는…….”

유이시엘은 그의 품에서 몸부림쳤다.

“그때의 카드란이 정말…….”

말을 잇지 못하던 그녀가 결국 오열했다.

“미워.”

슬픔이 너무나도 밀려온다. 그때의 감정이 살아나 그녀를 괴롭게 했다.

“상처는 사라지지 않아. 그렇지만 나에게 감정을 뱉어 내며 이야기하고 울면 조금은 나아질 거라 믿어. 그러니까 유엘, 많이 울어.”

“란…….”

“나에게 속죄의 기회를 줘.”

그가 그렇게 말했다.

왜 이제 와서 과거의 상처를 말하느냐고, 잘 지내고 있는데 굳이 말해야 하느냐고 화내지 않는다.

자신의 상처가 현재도 남아 있는 것을 그는 안다. 그리고 들어 준다. 안아 준다.

그의 이런 태도가 그녀에게 희망을 주고 있었다.

오열이 조금 잦아들었다. 유이시엘은 말없이 카드란의 품에서 숨을 들이켰다. 카드란은 유이시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다정한 손길로 그녀를 감싸 안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누가 뭐라고 한 적 없는데 눈빛으로 서로에 대한 갈증을 읽었다.

카드란이 먼저 유이시엘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갖다 댔다.

“허락하는 거지?”

“응.”

유이시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태도에 마음이 다시 조금 살아났다.

그들은 서로 격렬한 키스를 나누었다. 그는 그녀를 입술을 탐하고 그녀도 그를 받아들였다.

잔잔히 비가 그칠 무렵 긴 키스가 끝났다.

카드란은 숨을 몰아쉬는 유이시엘의 뺨을 어루만졌다.

“나중에 같이 둘만의 여행을 가자.”

“둘만?”

“응, 하루라도 좋아. 둘만 가고 싶군. 유엘의 이야기를 좀 더 들어 주고 싶어.”

그가 이렇게 나올 때면 심장이 뛴다.

유이시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눈물이 나올 것 같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 준다는 그의 마음이 너무나도 예뻤다. 상처받은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비가 다시 그쳤다. 잔잔히 사라지는 구름을 바라보며 유엘과 카드란은 잠시 같이 앉았다.

* * *

로엘은 돌아가는 게 조금 아쉬웠다. 레어에는 수많은 볼거리가 있었다. 아나키엔이 다음에도 초대해 준다고 했으니 나중에 또 오고 싶었다.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신이 나서 레어에서의 일을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로엘은 조용히 카드란과 유이시엘을 바라보았다.

유이시엘이 카드란의 옆에 앉아 그의 어깨에 기대어 잠자고 있었다. 그리고 카드란은 어색한 듯 굳은 채로 로엘과 시선이 마주쳤다.

“어머니가 주무시는구나.”

“알고 있어요.”

로엘은 일부러 나직이 말했다.

“정말로 자는군…….”

카드란은 몇 번이고 읊조렸다.

유이시엘이 옆자리에 앉은 것도 믿어지지 않는데, 심지어 자신의 어깨에 기대어 있다니. 현실이 아닌 듯했다.

그렇게 여행이 끝났다.

평소와 같으면서도 같지 않은 여행의 끝. 카드란은 그날 유이시엘이 일어날 때까지 꼼짝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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