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6화 (96/97)

96화(외전)

* * *

여행 당일이 되었다. 드래곤 아나키엔의 레어는 인간들에게 개방하지 않기로 유명했다. 과거 인간과 전쟁에서 진 이후로 그는 영지를 결계로 묶어 봉인했었다. 그렇다 보니 영지를 들어가려면 특별한 힘이 필요했다.

아나키엔의 레어로 가는 동안 유이시엘과 로엘, 카드란이 탈 마차는 2개였다. 일단 유이시엘이 오랜 시간 카드란과 같이 있는 걸 불편해하면 그가 알아서 다른 마차를 탈 예정이었다.

유이시엘과 로엘은 같이 마차에 올라탔다. 그다음 카드란이 체스판을 들고 탔다. 일은 미리 해 두었기에 마차 안에서 서류를 보지 않고 로엘과 놀아 줄 생각이었다.

아나키엔이 마법으로 공간 이동을 할 홀을 만든다고 했다. 공간 이동을 한다 해도 레어까지 가는 데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레카린은 카드란과 유이시엘이 마차에 올라타는 것을 본 뒤, 기사들을 정렬시켰다.

그리고 얼마 후 공간에 균열이 가면서 다른 공간이 나타났다. 그곳으로 레카린이 탄 말이 먼저 출발했다.

“아바마마, 아름다워요!”

로엘은 커다란 틈을 창문으로 바라보았다. 푸른색이 감도는 틈은 무척이나 신기했다.

“로엘의 말대로 아름다운걸.”

“어마마마 머리카락 색과 닮았어요.”

“그러니?”

유이시엘이 물었다. 로엘은 유이시엘이 앉은 자리 옆으로 다가가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휘감았다.

“네! 맞아요! 그렇죠, 아바마마?”

그러자 카드란도 유이시엘의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유엘의 머리카락 색이 더 아름답지.”

“당신도 참.”

유이시엘의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카드란이 이렇게 칭찬해 주면 부담스러워, 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은데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흘렀다. 신나게 떠들던 로엘은 잠들었다.

유이시엘과 카드란은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카드란이 잠시 머뭇거리다 유이시엘을 보았다.

“다른 마차로 갈까?”

카드란의 질문에 유이시엘은 그를 보았다.

“괜찮아.”

“정말로?”

“응.”

유이시엘은 잠시 고개를 기울이다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정말로 아무렇지가 않아.”

“다행이군.”

“란이 옆으로 오는 건 아직 부담스럽지만, 한 공간에 오래 있는 것은 괜찮은 것 같아.”

유이시엘이 허락한 자리. 그곳이 거기까지였다. 하지만 이전보다 많이 가까워졌기에 카드란은 만족했다.

“그렇군.”

이제 둘이 같이 오랫동안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다음 여행은 어디로 가고 싶은가?”

카드란은 이 기회에 물었다.

“음, 어디로 갈까. 여름에는 바닷가의 별장에 가고 싶은데.”

“나도 좋군.”

카드란의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가슴이 벅차오르고 감정이 날뛰었다.

유이시엘과 이런 대화가 된다. 이것으로 모든 것을 얻은 듯한 기분이 되었다.

유이시엘은 그런 그의 마음을 알고 슬쩍 노려보았다.

“너무 먼 거리는 안 돼!”

“물론이지.”

“가는 데 이틀, 3일 정도 걸리는 곳까지는 허락할게.”

유엘은 기준을 정해 주었고 카드란은 조건에 맞는 황가의 별장을 떠올랐다.

그렇게 여행을 떠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그들은 다음 여행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 * *

아나키엔의 레어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거대한 동굴이었다. 아나키엔이 현신했을 때만큼의 크기로 만들어졌다고 하던데, 그 공간이 무척이나 넓었다.

카드란은 마차에서 유이시엘, 로엘과 함께 내렸다.

“아나키엔!”

카드란이 그의 이름을 부르자 허공에서 소리가 들렸다.

“여기야.”

소리의 근원으로 고개를 돌리니 거대한 검은 용이 날개를 크게 편 뒤 하늘로 올라가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용의 날카로운 시선이 카드란과 유엘을 향하더니 곧 강한 빛이 주변을 덮었다.

얼마 후 빛이 사라지고 아나키엔이 인간의 모습으로 땅에 나타났다.

“혹시 쥐새끼들이 들어올까 싶어서 일부러 드래곤으로 따라오고 있었어.”

“쥐새끼?”

“틈으로 다른 놈들이 올 수 있잖아.”

아나키엔은 그렇게 말한 뒤 싱긋 웃었다.

“내가 레어를 개방하는 건 천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라, 다들 난리가 났을 거야. 무슨 이유인지 알아내려고 정신이 없을걸?”

아나키엔은 마치 이 상황을 즐기는 것 같았다. 카드란과 유이시엘은 그를 흘겨보았다.

그때 로엔이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아나키엔! 우리 어디에서 놀 거예요?”

로엘은 아나키엔이 제국을 수호하는 용으로 알고 있었다. 그를 삼촌처럼 여기고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그에게 다가왔다.

“뱃놀이를 갈 거야. 천 년 전에 타고 놀던 거라 낡아서 수리한다고 애 먹었어.”

“천 년 전 배요?”

유이시엘이 호기심을 보였다. 그녀는 역사를 좋아했다.

“보고 싶군요.”

카드란 역시 마찬가지였다.

“부부가 둘 다 관심을 가지네.”

아나키엔은 재미있다는 듯 그들을 보았다.

“이제 내가 안내할 테니 기사들은 알아서 놀아.”

“네? 그럴 수는…….”

레카린은 당황했다.

“그렇게 해라. 나중에 돌아갈 때나 호위하고, 여기서 대기하도록.”

카드란이 명령했다.

“기사들도 내 레어를 돌아다녀도 괜찮아. 레어에 사는 몬스터들이나, 생물들에게는 너희들 건드리지 말라고 미리 명령해 두었으니 괜찮을 거야.”

아나키엔은 그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럼 카드란과 유엘, 로엘은 이곳으로 오라고.”

아나키엔은 커다랗고 동그란 원이 그려진 곳 위로 올라갔다. 유이시엘과 로엘, 카드란이 올라가자 바닥에서 빛이 났다.

“공간 이동이야.”

아나키엔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눈에 보이는 풍경이 바뀌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넓은 호수였다. 바다만큼 넓어서 저 멀리 수평선이 보였다. 바다를 본 적 없는 로엘은 신기한 듯 호수를 보았다.

“우와, 정말로 아름다워요!”

로엘은 환호성을 질렀다. 유이시엘과 카드란도 호수 주변을 둘러보며 감탄했다.

호수 근처에 커다란 배 하나가 있었다. 고대 양식으로 지어진 배는 문헌을 통해서만 알고 있던 것이었다. 유이시엘과 카드란은 신기한 듯 보았다.

“내가 직접 만든 배야.”

아나키엔의 말에 유이시엘과 카드란이 놀라워했다.

“이전에 친구들하고 종종 탔어. 뭐, 지금은 너희가 지인이니 너희가 타는 거지.”

유이시엘과 카드란을 친구라고 하기엔, 그동안 자신이 한 짓이 많은지라 아나키엔은 그냥 지인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에 유이시엘이 훅 치고 들어왔다.

“그냥 지인인가요? 애증의 지인이지.”

아나키엔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래도 어찌 되었든 지인은 맞잖아.”

그들은 배에 올라탔다.

돛이 올라가며 배가 바람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나키엔은 원하는 방향으로 바람을 일으켜 배를 움직였다.

카드란은 난간이 높아 밖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로엘을 위해 목말을 태워 주었다. 로엘은 환호성을 질렀다.

“아버지가 와서 너무 좋아요!”

“그러냐?”

“그럼요!”

로엘은 신이 났다. 아버지, 어머니와 같이 온 여행이었기에 로엘에게 더욱더 의미가 있는 듯했다.

유이시엘은 뒤에서 그들을 지켜보았다.

“가까이 가지 않아?”

아나키엔이 궁금한 듯 물었다.

“음, 아직은요.”

스스럼이 없이 카드란 옆으로 다가가는 걸 마음이 거부한다. 유이시엘의 말에 아나키엔은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마음이란 게 쉽지 않지. 받아 주었다고 해도 쉽게 회복되는 건 아니니까.”

“맞아요.”

유이시엘은 그렇게 말한 뒤 카드란과 로엘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경치가 좋네요.”

“그러니 오라고 했지.”

아나키엔는 항로를 바꾸었다.

호수에는 거대한 나무들이 자라나 있었다. 줄지어 서 있는 나무들에서 떨어진 연분홍색 꽃들이 허공에 날렸다.

로엘은 멍하니 그 풍경을 보았다. 카드란과 유이시엘도 신비스러운 광경에 넋을 놓았다.

“내가 특별할 거라고 했잖아.”

아나키엔은 뿌듯한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제 시작이야.”

아나키엔의 말은 정말로 맞았다. 호수에는 다양한 볼거리가 많았고 유이시엘과 로엘, 카드란은 정신없이 구경했다.

시간이 지나 호수 반대편에 배가 정박하고 유이시엘과 카드란, 로엘이 내렸다. 그러자 아나키엔이 그들에게 다음 일정을 말해 주었다.

“자, 이제는 꽃을 보러 갈 거야. 유이시엘이 꽃을 좋아하잖아.”

그는 그렇게 말하고 작은 원 위에 올라갔다. 유이시엘과 카드란, 로엘도 들뜬 마음으로 따라갔다.

이번에는 얼마나 아름다운 곳일까.

무척이나 설렜다.

* * *

레카린과 기사들은 카드란이 미리 준비한 모닥불을 피워 놓고 있었다. 레어 안에는 아나키엔이 사는 거대한 저택이 있었고, 그곳의 후원에서 기사들은 고기를 구워 먹고 있었다.

“정말이지.”

레카린은 쉬는 게 익숙하지 않았다. 이번에 아나키엔 레어로 온다고 해서 중간에 짐승이라도 나올지 모른다며 긴장하고 왔는데.

이곳은 평화스러웠다.

술이 한 잔 들어가고 레카린은 저택 안을 구경하기로 했다. 저택을 관리하는 아나키엔의 수하들이 둘러봐도 괜찮다고 했기에 그는 안심하고 돌아다녔다.

“응?”

그런데 저택에 한 여자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긴 청색 머리카락을 단발로 자른, 아나키엔과 같이 웃고 있는 여자였다.

“황비마마?”

초상화를 보고 먼저 이 말이 나왔다.

그 여자는 유이시엘을 정말로 많이 닮았다.

“세상에…….”

도대체 왜 그녀가 여기 있단 말인가?

그런데 자세히 보니 완전히 똑같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언뜻 보면 유이시엘이라고 착각할 만큼 비슷하게 생겼다.

“보셨습니까?”

아나키엔의 수하이자 그동안 그의 레어를 관리하고 있었던 또 다른 드래곤, 주바론의 말에 레카린이 고개를 돌렸다.

“이분은 누구십니까?”

레카린의 말에 주바론은 싱긋 웃었다.

“아나키엔 님의 연인이셨습니다.”

연인이라…….

그 남자에게도 연인이 있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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