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외전)
* * *
목록을 정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카드란이 어떻게 정했는지 모르기에 더욱더 그랬다. 그리고 카드란하고 하고 싶은 것을 막상 적으려니 뭔가에 막힌 듯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와 영원히 평행선을 달릴 줄 알았으니까.
‘하나만이라도 적어야 해.’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성녀가 되기 전, 로이체란과 관련 없는 삶을 살아 행복했던 시절에 카드란과 주로 하던 것을 떠올렸다.
‘그도 기억하고 있겠지?’
그리고 유이시엘은 또 하나를 떠올렸다.
이것을 보고 카드란이 뭐라고 생각할까.
유이시엘은 목록을 보다 로엘을 재우고, 잠이 든 아들을 바라보며 카드란이 오기를 기다렸다.
밤이 늦어서야 카드란이 지친 몸을 이끌고 침실로 들어왔다. 그는 옆방에서 자기 전 유이시엘을 만나러 온 듯했다.
“일정이 늦었네.”
“아무래도 봄이니까, 행사들이 많아서 말이야.”
유이시엘의 물음에 카드란은 그렇게 대답하며 유이시엘 책상 위에 놓은 종이를 바라보았다.
“목록이군.”
목록에는 단 2가지만 적혀 있었다.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말하던 그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쿠키 만들기와 가족 여행 가기라.”
카드란은 목록을 소중한 것을 다루는 양 아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로엘하고의 여행이 즐거웠나 보군.”
“응, 란이랑 같이 갔으면 했어.”
“나도 많이 아쉬웠었다.”
카드란은 그렇게 말하고 유이시엘에게 작은 종이를 주었다. 거기에는 카드란이 원하는 목록이 적혀 있었다.
목록을 읽은 유이시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유이시엘이 좀 더 살아가기를 원하게 노력하기, 같이 여행 가기, 같이 이야기 나누기, 같이 웃고 울기.”
“난 그냥 너와 같이 삶을 살아갈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랐다.”
그렇게 말한 뒤 그가 눈을 감았다.
“이 순간이 언젠가는 오지 않을까, 그것을 이루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원했지.”
잔잔히 들려온 그의 말에 유이시엘은 이전의 일이 떠올라 손끝을 떨었다.
자신에게 무자비하게 폭력을 휘두르고 괴롭혔던 그. 그로 인해서 무너졌던 자신. 감정이 끊어지고 무심해져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던 시절…….
“……너무 큰 바람이었어.”
“알고 있다. 그래서 혼자만의 마음으로 생각한 거다.”
“내가 받아 주지 않았다면…….”
“말하지 않았을 거야. 이런 기대를 하는 것 자체를 너는 원치 않았을 테니까.”
카드란의 뒷말을 듣고 나서 유이시엘은 잠시 감정을 다스렸다.
“지금은 이 말을 들어도 괜찮아.”
“다행이군. 지금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까. 나의 희망 목록은 이루어졌다고 해야 하나.”
그는 유이시엘이 적은 종이와 자신이 적은 종이를 정리해 놓았다. 소중한 것을 간직하듯이 말이다.
“유엘, 하고 싶은 게 이것 말고 또 생기면 말해 줄 수 있을까? 같이하고 싶군.”
“말해 줄게.”
“그리고 목록을 적어 줘서 고맙다.”
카드란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감정이 밀려 올라오고 있었다.
“눈물이 많아졌네.”
유이시엘은 벌써부터 우는 그를 보고 웃었다. 그러자 카드란이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를 품 안에 끌어안았다.
“같이 온전히 살 수 있어서 행복하다.”
그는 그렇게 말한 뒤 유이시엘의 체향을 맡았다.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안정을 주는 그녀의 체향이 코로 흘러들어 왔다.
“유엘, 내일 쿠키 만드는 것 하자. 로엘하고 같이 반죽하고, 같이 만들어 먹고.”
“음, 다른 이들에게 선물도 해 주자.”
“누구에게 줄 건가?”
“일단은 아나키엔.”
유이시엘의 입에서 아나키엔의 이름이 나오자 카드란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의 마음을 알아차린 유이시엘이 고개를 들고 물었다.
“무슨 일이 있어?”
“그냥, 잘생긴 남자라서.”
카드란은 그리 말한 뒤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두렵군.”
“란도 참…….”
“그가 유엘과 가까운 것에 질투할 날이 올 줄이야.”
“아나키엔과는 솔직히…… 그런 사이가 될 수 없지 않을까?”
유이시엘의 말에 카드란은 잠시 침묵했다.
아나키엔. 그와 자신들은 어떤 관계일까.
친구도 아니고, 적도 아니고.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었다.
* * *
로엘은 신이 났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같이 쿠키를 굽는다는 말에 무엇을 할지 궁금했는데, 반죽하고 쿠키 모양을 만드니 너무 재미있었다.
다 구운 쿠키 모양을 본 로엘은 자신이 만든 쿠키가 가장 못난 것 같아 투덜거렸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너무 잘 만드세요!”
“우린 자주 해 봤단다.”
“아바마마께서요?”
“어렸을 때 네 어머니와 같이 자주 했지.”
그러자 로엘이 유이시엘을 바라보았다.
“정말이에요?”
“그럼.”
“와!”
로엘은 쿠키를 바라보다 자신이 만든 쿠키를 보고 싱긋 웃었다.
“저도 언젠가 잘 만들 거예요!”
“자주 만들 테니 곧 그렇게 될 거다.”
카드란은 로엘의 머리를 쓰다듬고 그렇게 말해 주었다. 로엘은 기분이 좋은 듯 싱긋 웃었고, 유이시엘과 카드란은 쿠키를 선물함에 싸서 사람들에게 나눠 줄 준비를 했다.
그렇게 첫 번째 시간을 같이 보낸 날, 유이시엘은 큰 결심을 했다.
그가 먼저 다가왔으니 이번에는 자신이 다가가고 싶었다.
카드란은 옆방에 있다. 유이시엘은 잠든 로엘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나갔다. 방에 다가서자 시종이 자신이 왔음을 알렸다.
곧 문이 열리고 잠옷을 입은 카드란이 유이시엘을 맞이했다.
“안 자고 있었나?”
“할 말이 있어서 왔어.”
유이시엘의 말에 카드란이 턱을 들었다. 그녀가 할 말을 경청할 준비를 하는 듯했다.
“오늘 쿠키 굽는 거 재미있었어.”
“그랬다면 다행이군.”
“카드란하고 시간을 보내는 게 생각보다 힘들지 않아. 자연스러웠어.”
유이시엘은 오늘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싱긋 웃었다. 그녀의 미소에 카드란도 긴장을 풀었다. 유이시엘에게 나쁜 일이 또 일어난 게 아닌가, 걱정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꽃놀이 여행을 한 번 더 갈까 해서. 목록에 적었던 여행 가기를 꽃놀이 여행으로 가자는 거야 가족 전부 다 꽃놀이를 간 적은 한 번도 없잖아.”
유이시엘의 말이 맞았다. 카드란은 주먹을 쥐었다.
“나와 같은 공간에 오랫동안…… 있어도 괜찮을까?”
“오늘도 오래 있었어.”
유이시엘의 단호한 말에 카드란은 오늘의 일을 떠올렸다.
쿠키를 만들고 굽고, 오랫동안 같이 있었지만 그녀는 힘들어하지 않았다. 나중에 친한 척 연기를 하느라 지친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정말로 괜찮은 거구나.”
“응, 나도 놀랄 만큼.”
그가 진심을 보인 만큼 자신도 변한 것 같다.
유이시엘의 잔잔한 미소에 카드란은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생각보다 그녀의 마음이 빨리 다가오고 있어 진심으로 기뻤다.
“유엘, 여행은 멀지 않은 곳으로 가자.”
카드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차는 같이 타도 될까?”
유이시엘의 대답이 없자 그가 불안해하며 얼른 말을 덧붙였다.
“곤란하면 거절해도……!”
“힘들면 이야기할게.”
유이시엘이 깔끔하게 정리해 주었다.
“괜찮을지 안 괜찮을지 나도 모르겠어. 그러니까 마차는 미리 여분을 준비하고 일단은 같이 타자.”
유이시엘이 자신에게 마음을 열어 주고 있음을 카드란은 확실히 느꼈다.
“유엘.”
그가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손을 잡고 손등에 키스를 살짝 했다. 이전이었다면 그가 이렇게 하는 걸 싫어했을 텐데.
지금은 손끝이 살짝 뜨거워졌다.
그의 방을 나오면서 유이시엘은 문을 닫았다.
마음이 설레었다.
앞으로 다가올 미래가 기대되었다.
* * *
아나키엔은 쿠키를 바라보았다.
여행을 갈 거라고 이야기하는 유이시엘의 표정은 많이 밝아 보였다. 마치 그녀가 희망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
레어로 돌아온 그는 쿠키가 든 포장지를 풀었다.
유이시엘이 만든 것과 카드란이 만든 것, 그리고 로엘이 만든 게 섞였다고 하더니 과연 잘 만든 쿠키도 있고 서툴게 만든 쿠키도 있었다. 그래도 모두 다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쿠키 1개를 손에 든 그는 살짝 맛을 보았다.
“맛있군.”
그냥 평범한 쿠키 맛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 쿠키를 먹으니 행복해지는 것 같았다.
“나도 따라가고 싶다.”
그래도 가족 여행을 떠나는 데 끼는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꼭 가고 싶었다.
고민을 오래 한 아나키엔은 결국 다음 날 카드란을 찾아갔다.
“무슨 일이십니까?”
카드란은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여행지를 고르는 듯 그의 책상에는 여행과 관련된 책자들이 놓여 있었다.
“여행 간다고 들었어.”
“맞습니다.”
“내 레어에 오는 건 어때?”
그러자 카드란은 눈을 크게 떴다.
“내 레어에 꽃들이 만발하면 무척이나 예뻐. 사람들의 출입이 금지된 곳이라 더 특별하지.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건 어떨까? 내가 안내해 줄게!”
아나키엔은 스스로도 이 핑계는 제법 그럴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하면 그들의 여행에 낄 명분이 생기니까.
고민을 하던 카드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유엘과 의논을 해 보겠습니다.”
아나키엔은 싱긋 웃었다.
“알았어.”
카드란이 반대하지 않았으니 거의 성사된 거나 다름없었다. 아나키엔의 미소에 카드란이 그를 물끄러미 보았다.
“혹시 이상한 음모를 꾸미시는 건 아니십니까?”
“이번엔 아니야.”
“아무튼 아니라고 하시니 믿겠습니다.”
카드란은 믿겠다고는 했지만 여전히 의혹을 거두지 못한 눈초리로 아나키엔을 바라보았다.
‘뭐, 내가 했던 일이 있어서 할 말은 없지만…….’
아나키엔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멋쩍게 웃었다.
다행히 유엘도 이후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렇게 그들은 여행지를 아나키엔의 레어로 정했고, 그다음 주에 로엘과 같이 호위 기사를 데리고 가기로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