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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화 (93/97)

93화

“내가 당신에게 했던 일은 당신이 원하는 희생이 아니었어요.”

유이시엘은 언제부턴가 깨닫고 있었지만 스스로 말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꺼냈다.

“당신이 나에게 살려 달라고 한 적 없지만 당신이 없는 세계에 나 혼자 살기 힘들어서, 란을 살렸어요. 그걸 전 희생이라는 이름을 붙여 놓고 살아왔어요.”

란이 바라지 않는 희생, 그것을 자신이 했다. 그리고 란도 자신이 바라지 않는 희생을 했다. 그렇기에 카드란이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린 자신을 살리겠다고 했을 때 그를 이해하면서도 화를 냈다.

그리고 그는 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정말로 자신을 살렸다. 오랜 기간 악몽과 싸우면서. 게다가 유이시엘이 죽고 난 뒤에도 죽지 않겠다고 했다. 그녀가 했던 희생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정말로 란은…….”

다시 눈물이 나온다.

로엘이 태어나고 감정이 복받쳤을 때의 아련한 감정이 떠올랐다.

“나에게 희망을 줘.”

마치 과거의 란을 대하듯, 그녀는 유이시엘이 아니라 유엘로 돌아가 말하고 있었다. 그러자 카드란이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유엘, 내가 했던 일들이 사라지지는 않을 거야. 그것은 바라지 않아. 그렇지만 네가 마음을 조금은 줄 거라는 희망을 가져도 될까?”

그의 물음에 유이시엘은 천천히 눈물을 흘렸다.

“모르겠어.”

이전엔 그런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지금은…… 알 수 없다.

“세안과 과거 이야기를 했어. 생각보다 담담하게 말할 수 있어서 이상했어. 덕분에 내가 조금은 과거에 벗어났다는 것을 알았어.”

유이시엘은 그때를 떠올리며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과거의 난 너무나도 힘들었는데, 어떻게 마음이 살아날 수 있었던 건지.”

그녀는 숨을 토했다. 뜨거운 숨결엔 그녀가 눌러 두었던 감정이 배어 있었다.

“나는 란에게 과거의 슬펐던 일들을 계속 말할지도 몰라. 같은 말을 반복할지 모르고, 슬펐던 기억에 울지도 몰라. 너에게 소리 지를지도 몰라.”

“이제야 그 말을 해 주는구나.”

카드란은 기뻐했다.

유이시엘이 드디어 자신을 미워하는 것을 넘어 감정을 드러냈다. 드디어 자신에게 제가 받았던 상처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감정이 살아났다는 것을 의미했다. 유이시엘이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는 뜻이었다.

“나를 이전처럼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곁에 있으면서 상처를 말하고, 조금씩 마음속의 아픔을 덜어 내. 소리치고 이야기해! 들어 주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까.”

“어리석은 란.”

유이시엘은 그를 보았다.

카드란은 자신을 포기하고 다른 여자를 만나 행복하게 사는 미래를 선택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유이시엘은 과거에 정말로 죽기를 바랐었다.

그런데 카드란은 그런 그녀를 포기하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도망가지 않았다.

만약 그가 조금 전 죽음을 선택했다면 자신은 어떤 기분을 느꼈을까.

아마도 다시 절망했을 것이다. 그런데 카드란이 그것을 막았다.

“이번에는 나를 저버리지 않았네요.”

유이시엘은 그의 품에서 상처를 한 가지 말했다. 그가 주었던 수많은 상처 중에서 가장 커다란 아픔. 그가 자신을 버렸던 그 순간에 느꼈던 감정이 살아났다.

“기회를 줄게요.”

유이시엘은 천천히 눈을 감으며 말했다.

“내가 괜찮아질 때까지 화를 내고 아픔을 토해 낼 거예요. 버텨 봐요.”

“응.”

“그것이 끝나고 나면, 내가 좀 더 괜찮아 지면 당신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직은 그를 완전히 용서하기 힘들다. 하지만 그가 자신을 계속 바라보며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괜찮지 않을까.

“고마워.”

유이시엘의 말에 카드란이 속삭였다. 그러자 지켜보던 아나키엔이 웃었다.

“유이시엘, 이제 죽고 싶지 않지?”

그가 카드란의 품에 있는 그녀에게 묻자 유이시엘이 아나키엔을 응시했다. 그리고 세안의 말을 떠올렸다.

“조금 괜찮아졌어요.”

그에 아나키엔이 미소를 지었다. 카드란에게도 다정히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악몽은 끝났어.”

아나키엔의 선언에 유이시엘과 카드란이 둘 다 당황했다.

“이제는 시시해. 너희는 계속 시험에 넘어오지 않고 서로를 위하는 바람에 정말 재미가 없어졌어. 변덕이야. 악몽을 끝내고 유이시엘을 온전히 살려 줄게.”

그의 손에서 희미한 빛이 흘러나왔다. 그 빛은 유이시엘 안으로 흡수되었다.

유이시엘은 온전히, 제힘으로 살 수 있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고마워요.”

유이시엘은 아나키엔에게 인사했다. 옆에 있는 카드란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아나키엔은 자신에게 고마워하는 둘에게 손을 흔들었다.

“가끔 놀러 올게. 너무 박대하지 말라고.”

아나키엔은 천천히 사라졌다.

유이시엘은 카드란의 품에서 크게 숨을 들이켰다.

이제 카드란이 악몽을 꾸지 않아도 된다. 자신은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다. 미래를 꿈꿀 수 있다.

카드란과 함께, 로엘과 함께.

과거의 그녀는 여전히 마음속에 있었다. 아마 아픔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계속해서 살아남아 이따금씩 끌려 올라와 카드란을 공격해 댈 것이다.

그런데 카드란은 기꺼이 받아 준다고 했다.

“카드란, 사랑했어.”

유이시엘의 말에 카드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사랑한다는 말이 나올까?”

“그건 모르겠어. 하지만 당신이 이대로 변하지 않는다면 기회는 있을 거야. 란이 하기에 달렸어.”

유이시엘의 달라진 태도에 카드란은 어깨를 들썩였다

“노력할 거다.”

“마지막 기회를 주는 거야.”

유이시엘의 말은 단호했다.

“알고 있어.”

거세게 내리던 비가 그치고 있었다. 잔잔한 빛들이 모이면서 그들이 있는 곳을 은은하게 비추었다.

새벽이 다가오는 곳에 서서 유이시엘은 카드란을 두 팔로 끌어안았다. 그러자 카드란 역시 그녀를 품에 안으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번 일로 알았다.”

“무엇을……?”

“나에게 가장 큰 악몽은 현실을 잃는 것이야. 그러니 노력해서 유엘과 함께 살아갈 거다.”

카드란은 이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그녀와의 미래를 꿈꾸었다. 과거의 자신은 그러지 못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의 말을 들은 유이시엘은 그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도 그런 꿈을 꿀 수 있을까?”

그가 지금처럼 계속 노력해 주기를. 자신의 상처를 마주 봐 주기를. 그래서 자신이 다시 그를 사랑하게 될 수 있기를.

멀지 않은 미래에 함께 웃으면서 같은 길을 걸으며, 로엘과 행복한 순간이 맞이할 수 있기를.

그리고 그 순간을 꿈꾸는 자신이 있기를 바랐다.

“내가 도와줄게.”

유이시엘은 그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았다. 이전에는 그저 무심히 넘겼다면 지금은 아니었다.

“고마워. 꼭 부탁해.”

자라난 마음이, 살아난 마음이 그녀에게 희망을 주었다.

언젠가 다가올 행복을 꿈꾸며 우리는 살아갈 것이다.

유이시엘은 그렇게 생각했다.

에필로그

싱긋 웃으며 유이시엘이 준 포장된 상자를 아나키엔이 바라보았다.

“카드란하고 같이 구운 쿠키예요.”

“이걸 왜 나한테 주는 거야?”

오랜만에 둘이 잘 사나 보러 왔는데 유이시엘이 이런 것을 마련해 놨다.

무슨 속셈일까.

“우리 여행 가기로 했어요.”

“여행?”

“카드란하고 같이 못 갔잖아요.”

아나키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이제 진정한 부부로 살아가는 이들을 보니 보기가 좋았다.

“아나키엔은 무서워요.”

“왜?”

“제 마음을 너무 잘 아셨어요.”

“음…….”

“저는 곤경에 빠진 카드란이 포기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을 카드란이 계속 깨뜨렸잖아요. 그렇게 당신은 자꾸 그에게 시련을 주고, 그가 이겨 내서 제가 결국 믿게끔 했잖아요.”

유이시엘은 처음 카드란이 자신을 살리려고 했을 때 그의 마음을 부정했다. 그리고 그가 분명 포기할 거라고 믿었다. 가끔 그를 시험하기도 했다.

그런데 언제나 유이시엘은 그에게 졌다. 그래서 무심함이 조금씩 깨져 갔다. 이윽고 그를 향해서 믿음과 희망이 생기면서 감정이 돌아왔다.

그때마다 아나키엔은 카드란을 시험하며 그의 진심을 유이시엘에게 보여 주었다.

그것을 깨닫고 나니 유이시엘은 아나키엔의 최종 목적이 궁금해졌다.

“아아, 음…….”

아나키엔은 쿠키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냥 절실한 사랑을 하는 너희가 그렇게 허무하게 깨어지는 게 싫었을 뿐이야. 변덕이지 뭐!”

그는 그렇게 말하고 쿠키를 바라보았다.

“……나도 그랬던 적이 있어서.”

아나키엔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카드란처럼 하지 못했어. 그리고 그녀를 놓아 버려야 했지.”

아나키엔은 웃으면서 손을 움켜쥐었다.

“너희는 그렇게 안 끝나기를 바랐어.”

유이시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에 아나키엔은 괜스레 뿌듯한 기분을 느끼며 말했다.

“그리고 딸도 낳아 줘.”

“그건 아직…….”

“언젠가…… 가능하지 않을까?”

그의 말에 유이시엘이 얼굴을 붉혔다.

쿠키를 받은 아나키엔은 상자의 겉면을 손으로 쓸었다.

여기에 그들의 행복이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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