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유이시엘의 말에 세안은 억눌렀던 감정을 터뜨리듯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황후마마는 너무 상냥해요.”
“아니에요.”
“아니긴요! 그 황제 폐하께서 못 놓으시는 이유를 알 것 같아요.”
자신은 과거의 카드란과 닮으려고 노력했을 뿐이었다. 어린 시절 카드란은 누구보다 다정하고 상냥했으니까.
다만 어른이 된 카드란은 세안에게 다정하게 굴지 못했다.
세안이 만났던 때의 카드란은, 운명에 짓눌려 너무나도 힘들었던 나머지 어린 시절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유이시엘은 카드란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는 자신을 보며 스스로도 조금 놀랬다.
“그 시절 황후마마께선 어딘가 힘들어 보이셨는데.”
세안은 찬찬히 유이시엘을 보았다.
“지금은 달라지셨군요.”
“어떻게 다른가요?”
“평온해지셨어요.”
그 말에 유이시엘의 손이 떨렸다.
“사실 황후마마와 친해지고 싶었어요. 빌어먹을 폐하만 아니었더라도, 다른 누군가의 정부로 있다가 화려하게 접근하는 건데.”
세안은 투덜거렸다.
마지막까지 카드란을 탓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유이시엘은 그 말을 듣고 조용히 웃었다.
* * *
“저분은 누구야?”
로엘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레카린에게 물었다.
“친구분이신가?”
유이시엘의 주변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자신과 아버지만 곁에 두던 어머니가 새로운 분을 가까이한다.
로엘은 유이시엘과 세안이 있는 마차를 힐끗힐끗 바라보았다.
“친구분이십니다.”
폐하의 옛 정부입니다, 라고 말할 수 없어서 레카린은 대충 둘러댔다. 그래도 얼마 안 가 말이 나올 테지만, 다행히 로엘은 아직 어려 정부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었다.
세안과 유이시엘이 가까워진다면 사교계가 들썩일 것이다.
유이시엘이 사교계에서 활동을 잘 안 한다고 해도 그녀는 황후였다. 그렇다 보니 그녀의 행동은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아마도 두 사람이 나들이에서 만나 동행했다는 소문도 곧 파다하게 퍼질 것이다.
그러니 카드란 역시 이 일을 알게 될 터였다.
‘소식을 들으면 곤란해하실지도.’
그나저나 폐하께서는 무사하실까.
매일 밤 악몽을 꾸시는데.
유이시엘이 곁에 있어서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로엘을 임신한 그녀가 황궁을 비웠을 때는 장난이 아니었다.
악몽을 꾸고 일어나서 한동안 홀로 멍하니 시간을 보내기도 하며, 힘겹게 스스로와의 싸움을 이어 나갔다.
레카린은 황궁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마차는 황가의 별장으로 향했다.
기사들과 로엘, 유이시엘은 별장에서 하룻밤을 묵을 계획이었다.
다만 오늘 저녁은 세안도 함께하게 될 것 같았다.
* * *
레카린은 마련해 온 나무 장작을 한곳에 모았다. 그러고는 나무 장작을 교차해 쌓아 네모 모양을 만들었다.
“어마마마, 저게 뭔가요?”
“캠프파이어를 하려고 준비 중이란다.”
“캠프파이어?”
“장작에 불을 붙이고, 타는 것을 구경하는 거야.”
유이시엘의 설명에 로엘은 신기하다는 눈으로 장작더미를 보았다. 유이시엘은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구경할 것 같은 아들의 손을 잡고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방해하면 안 돼.”
“하지만 가까이에서 보고 싶은걸요!”
“안 돼. 위험하니 멀리서 보렴.”
유이시엘의 단호한 말에 로엘이 투덜거렸다.
“이럴 때는 아바마마와 똑같으세요.”
로엘의 말에 유이시엘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카드란과 자신이 닮았다는 소리가 제게 어떤 의미인지 로엘은 모를 것이었다.
카드란과 자신은 다른 방식으로 아이를 훈육한다고 생각했는데, 로엘이 보기엔 닮은 점도 있나 보다.
이상한 느낌이었다.
“그래?”
“네, 정말로요.”
로엘의 말에 유이시엘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와 닮았다는 말에 드는 이 감정은 무엇일까.
분명 자신이 마음이건만 잘 알 수가 없었다.
유이시엘은 굳은 표정을 풀고 로엘에게 말했다.
“아바마마와 나는 많이 달라.”
“그건 그래요. 하지만 비슷한 점도 많아요.”
로엘은 그렇게 말을 덧붙였다.
* * *
불이 활활 타올랐다. 불길을 바라보며 유이시엘은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타탁타닥 소리를 내며 장작이 타고 있었다.
그때 화려한 옷으로 갈아입은 세안이 유이시엘에 다가와 속삭였다.
“이런 날 음악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음악이요?”
“제가 준비했어요.”
세안의 신호에 그녀의 일행들이 악기를 들고 왔다. 물론 술도 있었다.
“이런 날은 즐겨야죠.”
유이시엘은 술도 잘 마시지 않았고 잘 놀지도 않았다. 하지만 세안은 그녀와 달리 화려한 삶을 즐겼다. 그렇기에 나들이를 나오며 이런 것들까지 준비한 듯했다.
“불편하세요?”
세안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아니요! 절대 그렇지 않아요.”
마침 머릿속이 복잡했던 유이시엘은 차라리 시끄러운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이시엘은 세안에게 괜찮으니 마음껏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고, 세안은 신이 나서 놀 준비를 했다.
“뭐 하는 거예요?”
로엘이 세안에게 다가가 물었다.
“황자 전하, 춤을 출 거예요.”
“춤이요? 어마마마와 아바마마께서 파티장에서 추는 거요?”
“맞아요.”
세안은 그렇게 말한 뒤 자리를 잡았다. 술병이 담긴 통을 자리에 놓고 나풀거리는 천을 손에 휘감았다.
“제가 시작을 열어 보지요!”
세안의 말에 연주가 시작되었다. 악기들이 조화를 이루어 신나게 연주를 해 나갔다. 세안은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 수준급 실력에 기사단의 환호가 이어졌다. 유이시엘은 세안의 춤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었다.
〈유엘, 나와 함께 춤을 추자.〉
〈나와 함께 춤을 추겠나?〉
어린 시절 자신과 춤을 추었던 카드란, 그리고 결혼하고 난 뒤 자신과 춤을 추었던 카드란.
그가 떠오른다.
세안의 춤은 야릇하면서도 우아했다. 다들 그녀의 실력에 넋이 나갔다.
몸이 근질근질해진 일행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안은 웃으면서 경쾌하게 말했다.
“신나는 음악을 연주할 테니 다들 즐겨 주세요!”
“또 춤을 추실 겁니까?”
“물론이에요!”
세안은 그렇게 말하고 다른 춤을 추려고 준비를 했다. 곧이어 흘러나온 익숙한 멜로디에 유이시엘은 조금 놀랐다. 유이시엘도 아는 곡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유이시엘이 춤을 추는 세안의 옆으로 다가갔다.
“황후마마?”
“같이 춰요.”
원래 이 곡은 둘이서 짝을 맞춰 추는 곡이었다. 여자 둘이서 아름답게 추는 춤이었기에 인기가 많았다. 유이시엘의 등장에 다들 놀라는 듯했지만 곧 차분히 감상할 준비를 했다.
음악이 흐르고 유이시엘은 몸을 음악에 맡겼다.
레카린과 기사들은 우아한 유이시엘의 몸놀림에 감탄했다. 아무래도 성녀가 춤을 추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기에 기사들은 대부분 유이시엘의 춤을 보지 못했었다.
“솜씨가 대단하신걸요?”
세안의 말에 유이시엘은 싱긋 웃었다.
“세안이야말로 대단한걸요.”
“그런가요?”
유이시엘의 칭찬에 세안이 미소를 지었다.
유이시엘은 이내 눈을 감고 춤을 추었다. 복잡한 마음을 모두 떨쳐 버리고 싶었다.
그렇지만 춤이 끝난 뒤에도 여전히 카드란에 대해 생각하는 자신이 있었다.
* * *
춤으로 분위기를 띄우자 기사들이 가볍게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유이시엘은 자신을 호위하는 레카린을 보고 웃었다.
“레카린도 쉬어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레카린은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그의 성격을 잘 알고 있기에 유이시엘은 말없이 웃을 뿐 더 권하지는 않았다. 그러자 옆에서 세안이 싱긋 웃으며 유이시엘에게 말을 걸었다.
“황후마마께서 춤을 잘 춘다는 이야기는 소문으로 들었지만 이렇게 대단하실 줄은 몰랐어요. 제가 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었다면 당장 제자로 데려갔을 거예요.”
“고마워요.”
“로엘 전하도 몸놀림이 장난이 아니시던데.”
연주가 막바지에 다다랐을 무렵, 로엘이 유이시엘의 곁으로 다가가 춤을 같이 추었다. 로엘은 춤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몸을 열심히 움직이기는 했다. 다들 그것을 보고 유쾌하게 웃었다.
로엘은 음료수를 마시며 세안에게 말했다.
“제가 잘 추나요?”
“물론이에요.”
“춤을 배워야 할까.”
“배우고 싶니?”
유이시엘이 로엘에게 물었다. 그러자 로엘은 환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춤을 가르칠 선생님을 초빙해야겠구나. 그리고 내년에는 네 춤을 선보일 파티를 열어야겠어.”
“정말로요?”
“물론이란다.”
유이시엘은 무의식적으로 말한 뒤 잠시 고개를 숙였다.
와인 향이 혀끝으로 올라왔다.
그녀의 눈동자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내년을 자연스럽게 생각하는구나.’
자신은 살아서는 안 되는 사람인데.
죽어야 하는 운명인데.
카드란의 희생으로 이렇게 살고 있다. 그리고 그 희생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유이시엘은 술에 약간 취한 세안을 보았다.
카드란이 자신을 괴롭히던 시절 도움을 주었던 세안.
그녀라면 믿을 수 있지 않을까?
한 번쯤은 다른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