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카드란이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었다.
“꿈에서 깨니 무엇이 현실인지 꿈인지 알 수 없었어. 그래서 바닥에 주저앉고 그냥 멍하니 있었지. 일어나서 너를 만나러 가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유엘은 나를 보기 싫어하니까.”
가슴이 멘다.
“어리석은 남자…….”
유이시엘은 주저앉은 그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몸을 낮추었다.
“나, 살아 있어요. 그리고 꿈속의 란은 지금의 란이 아니에요. 란은 복수를 포기하고 나를 선택했잖아요.”
유이시엘의 조곤조곤한 말에 카드란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끌어안아도 될까?”
카드란이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절박한 그의 표정을 바라보던 유이시엘은 고개를 끄덕여 그의 바람을 허락했다.
자신을 끌어안은 카드란의 어깨가 조용히 들썩였다. 유이시엘 역시 눈물이 나왔다. 꿈속의 그가 기억나 마음이 아팠다.
매일 밤 이런 식으로 꿈을 꿔야 하는 그의 짐이 너무 무거워 보였다.
돌덩이처럼 굳었던 마음이 살아난 탓일까. 그가 애잔하고 안타까워졌다.
“꿈을 꾸고 나를 찾아와요. 싫어하지 않을게요.”
이 정도는 해 주고 싶다. 카드란은 그녀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나의 유엘…….”
마치 그녀에게 구원을 받은 듯, 그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카드란은 매일매일을 견뎌 냈다. 유이시엘은 가끔 그가 찾아왔을 때 그를 말없이 안아 주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덧 4년이 지나고 봄이 찾아왔다.
9. 희망이라는 이름
유이시엘은 욕조에서 장난치는 로엘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로엘은 물을 좋아했기에 욕조에 들어가면 헤엄을 치면서 장난을 쳤다. 특히 유이시엘이 씻겨 주는 날이면 오랫동안 물에 들어가서 그녀와 놀고 싶어 했다.
“어마마마, 좋아요.”
또래보다 발달이 빠르기에 벌써부터 말을 잘했다. 유이시엘은 손을 뻗어 로엘의 손가락을 잡았다. 아이는 싱긋 웃으며 유이시엘을 닮은 미소를 지었다.
“폐하께서 오십니다.”
문이 열리며 카드란이 들어왔다. 그는 정무가 바쁠 때도 시간을 내서 유이시엘과 로엘을 만나러 오고는 했다. 로엘이 태어나고 매일같이 와서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오늘도 평소와 같았다.
“아바마마!”
로엘은 카드란을 무척 좋아했다. 함께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유이시엘을 제일 따랐지만 카드란이 오면 방긋방긋 웃어 주었다. 로엘의 웃음을 본 카드란도 해사한 미소를 지었다.
“목욕을 너무 오래하는 거 아니니?”
“어마마마께서 뭐라고 안 하셨어요.”
“음, 유엘은 아무래도 우리 로엘에게 약해서 말이다.”
카드란은 누엘을 보았다. 그러자 수건을 들고 있던 누엘이 시계를 보고 말했다.
“들어가신 지 얼마 안 되셨습니다.”
“그런가?”
“너무 오래 있게는 안 했어요.”
카드란이 웃으며 유이시엘의 머리카락을 쓸어 주었다. 유이시엘은 그런 그를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남들이 있을 때는 다정하게 보인 것도 벌써 4년이 지나고 있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이제는 그럭저럭 익숙해졌다.
유이시엘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오늘 많이 바쁘지 않았어요?”
“바빴다. 하지만 로엘과 유엘을 보러 올 시간은 있어.”
카드란은 그리 말한 뒤 물에 푹 젖은 로엘을 빤히 바라보았다. 눈치껏 누엘이 수건을 건네주자 유이시엘은 그것으로 로엘의 몸을 닦아 주었다.
“내가 하도록 하지.”
카드란은 로엘의 옷을 입혀 주고 두 팔로 아이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로엘이 까르르 웃으며 소리쳤다.
“아바마마, 재미있어요!”
“재미있니?”
“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없던 카드란은 로엘을 정말로 자상히 대했다. 때로는 엄하기도 했지만 평소에는 다정했다. 유이시엘은 그를 보고 있을 때면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맨 처음에는 카드란과 있을 때 억지로 웃었는데 지금은 의식하지 않아도 평온한 미소가 나왔다.
누엘은 그런 그들을 바라보다 조용히 문을 닫고 나왔다. 카드란은 시간을 내서 올 때마다 남이 끼어 있는 걸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 사람만 남자 로엘이 눈을 반짝거렸다.
“아바마마도 가실 거죠?”
“아, 여행 말이냐?”
로엘과 유이시엘은 봄을 맞이해서 꽃놀이를 가기로 했다. 그런데 거기에 카드란은 동행하지 않았다.
“미안하구나.”
카드란이 슬픈 표정을 지으며 사과하자 로엘도 시무룩해졌다.
“너무 바빠 일정을 뺄 수 없었단다.”
카드란은 로엘에게 이해를 구하듯 달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로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꼭 같이 가야 해요. 저는 기다릴 거예요.”
“물론이지.”
카드란은 웃으면서 아들에게 약속했다.
그 약속을 들으며 유이시엘은 가슴을 꾹 눌렀다.
* * *
저녁이 되어서 유이시엘은 여행에 가지고 갈 짐들을 다시 한번 살폈다. 로엘의 것은 이미 챙겼고 자신만 챙기면 된다.
유이시엘은 내일 처음 떠나는 여행에 잔뜩 기대하는 로엘의 모습을 상기하며 미소를 지었다. 아들이 이렇게 여행을 좋아할 줄 알았으면 진작 떠날 걸 그랬다.
“아직 준비가 덜 끝났나?”
그때 문을 열고 카드란이 들어왔다. 유이시엘은 그를 보고 놀라 물었다.
“정무는요?”
“끝났다.”
유이시엘은 짐을 살피던 것을 그만두고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카드란이 말없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하루 단 두 번, 그는 그녀를 안을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 자러 가기 전에, 자러 난 후에, 악몽을 마주하기 전에 유시이엘을 품에 끌어안았다.
그녀가 주는 다정함이었다.
“같이 가고 싶지 않아요?”
“내가 가면 불편할 텐데?”
그러자 유이시엘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다른 이들 앞에서 다정한 척 지내고 있고, 이제는 익숙해졌다고는 하지만 그와 여행까지 가는 것은 불편하긴 할 것 같았다.
사실 이번 여행을 기획한 건,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어서이기도 했다.
다른 이들의 시선을 신경 쓰며 연기하는 거에 지친 것 같기도 하고.
로엘은 부모님의 사이가 좋은 줄 안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 서로 많이 어색했다.
다만 악몽을 꾸는 그를 두고 가자니 마음이 쓰렸다.
그래도 로엘이 자꾸 여행 가고 싶다고 졸랐고, 카드란이 괜찮으니 다녀오라고 해서 결정을 내린 거긴 했다.
“유이시엘, 가서 편지를 써 줄 수 있을까?”
“물론이에요.”
유이시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카드란은 불편하지만 어찌 되었든 로엘의 아버지였다. 좋은 아버지였기에 노골적으로 거부하고 싶지 않았다. 조금씩 다가오는 그에게 약간의 틈은 주었다.
“고마워.”
카드란은 진심으로 웃으면서 말했다.
“오늘도 잘 견딜게.”
“부탁해요.”
유이시엘의 말에 카드란이 다정한 눈을 하고 옆방으로 걸어갔다.
유이시엘은 그가 자신의 옆방에서 악몽을 꾸게 했다. 깨어난 뒤 황후의 방으로 와서 자신을 보게끔 하기 위해서였다. 카드란은 그 배려를 고마워했다.
카드란이 나가자 유이시엘은 몸을 돌려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카드란, 오늘도 부디 버텨 줘요.”
유이시엘에게 있어서 로엘은 너무 소중했다. 이 삶은 우려와 달리 힘들지 않았다. 완전히 죽었다고 생각했던 마음이 밑바닥에 조금은 남아 그를 가까이하는 것을 거부하지 않게 되었다.
그렇기에 이대로 내일을 맞이하고 싶었다.
카드란 역시 악몽을 꾸는 나날에 익숙해진 것 같았다. 힘들다고 하지만 자신이 곁에 있으면 안정이 된다며, 악몽을 꾸고도 가끔 웃으면서 자신을 보러 왔다.
〈괴로워도 유엘을 보면 힘이 나.〉
악몽을 꾼 뒤 그는 유엘을 찾는다.
유이시엘은 그때만큼은 카드란이 ‘유엘’이라고 불러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오늘도 그는 악몽을 꾸고 나서 자신에게 올 것이었다.
유이시엘은 그렇게 생각하고 내일 있을 여행을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역시나 새벽에, 카드란은 자신을 잠시 보고 갔다. 그날도 견뎌 내었기에 유이시엘은 아침에 일어날 수 있었다.
* * *
유이시엘은 일어나 다시 한번 짐을 점검했다. 로엘은 꽃놀이를 갈 생각에 신이 나 옷을 입고 모자를 쓴 채 방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드디어 떠날 시간이 되었다.
카드란과 아침 식사를 간단히 하고 마차에 올라타기 전, 카드란이 유이시엘의 손을 잡았다.
“조심해서 다녀와라.”
“레카린이 우릴 지켜 줄 거예요.”
“물론이지.”
카드란은 유이시엘이 떠나기 전 레카린을 불렀다. 카드란이 잘하라는 듯 레카린의 어깨를 꾹 눌렀고, 레카린은 고개를 숙였다.
“황후마마를 제 목숨처럼 보호하겠습니다.”
그의 말에 카드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할 때가 되자 유이시엘과 로엘이 탄 마차를 호위 기사들이 마차를 에워쌌다. 그들은 철통같은 수비로 모자를 보호할 준비를 완료했다.
마차가 출발하고 유이시엘은 창문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카드란.’
자신이 없는 그는 괜찮을까.
못내 마음에 걸렸지만 로엘이 치맛자락을 당겨 더 이상 생각을 이어 갈 수 없었다.
그렇게 유이시엘과 로엘은 카드란을 두고 처음으로 여행을 떠났다.
* * *
유이시엘과 로엘이 항한 곳은 수도 근방의 꽃나무가 한가득 피어 있는 산이었다. 예약한 손님만 들어갈 수 있다는 그곳은 꽃놀이 관광지로 유명했다. 가격도 비쌌지만 꽃이 피는 봄에 오려면 몇 달 전에 미리 예약을 해야 할 만큼 인기가 좋았다.
산의 입구에 마차가 줄지어 서 있었다. 아무래도 꽃구경을 하러 온 이들로 길이 붐비는 것 같았다. 레카린이 문을 두드리며 유이시엘을 찾았다.
“무슨 일인가요?”
“마차가 밀리는 모양입니다.”
“사람이 많긴 하네요.”
“생각한 것보다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습니다.”
그의 말에 유이시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야 괜찮았지만, 로엘이 지루해할 수 있으니 같이 놀아 줘야 할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