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7화 (87/97)

87화

* * *

아나키엔은 천천히 허공으로 올랐다. 잠이 든 유이시엘을 두고 방을 나온 카드란이 향한 곳은 자신의 집무실, 그곳에서 그는 숨을 들이켜고 있었다.

카드란이 원하지 않아도 잠이 든다. 강제로 잠들기에 그는 이 고통을 피할 수 없었다. 물론 지금까지 그가 피한 적은 없지만 말이다.

“버텨라.”

오늘부터 조금 고통스러울 것이다. 이전에도 고통스러웠지만 이번은 더할 것이었다.

아나키엔은 마력을 담은 동그란 구슬을 카드란의 방으로 보냈다. 그리고 다른 구슬을 유이시엘의 곁으로 보냈다.

이제는 유이시엘도 알아야 할 때가 되었다.

“카드란이 어떤 꿈을 꾸는지 말이야.”

아나키엔은 유이시엘에게 고통을 줄 생각은 없었다.

단지 카드란이 유이시엘의 과거를 보고 유이시엘의 고통을 알게 되었듯, 그녀 역시 카드란이 어떤 것을 짊어지고 있는지 깨달았으면 했다.

아나키엔은 허공에서 사라졌다.

그렇게 다시 카드란에게 고통의 밤이 시작되었다.

* * *

유이시엘은 눈을 떴다.

‘여기는.’

그녀는 투명한 막에 싸여서 다가갈 수 없었다. 그런데 막 너머에 자신이 서 있었다. 제법 자란 로엘이 정원을 뛰어다녔고, 그녀는 밝게 웃고 있었다.

마치 행복한 미래를 보는 것 같았다.

‘내가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구나.’

이상하고 신기했다. 유이시엘은 멍하니 미래의 로엘과 자신을 바라보았다.

이것은 예지몽인가?

‘나를 안심시키려고 아나키엔이 보여 주는 꿈인가?’

유이시엘은 멀리서 조용히 그들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그때 한 남자가 걸어왔다. 검을 든 카드란이 서글픈 눈으로 유이시엘과 로엘을 향해 소리쳤다.

〈드디어 복수의 순간이 왔다.〉

‘여기는.’

이제야 알았다. 이곳은 카드란의 꿈속이었다. 기억을 되찾지 못해, 결국 복수를 포기하지 못한 그가 살아가는 세계였다.

「꿈에서 카드란은 류크에게 복수하기 위해 유이시엘을 유혹해서 아이를 낳아. 네가 가장 행복할 때 죽이려는 것이지.」

아나키엔의 작은 소리가 들렸다.

‘그렇다면…….’

「카드란은 지금 복수하려고 너와 로엘을 죽이러 왔어.」

손끝이 차가워졌다. 현실의 그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고 있다. 자신을 잊지 않으려고 복수마저 포기했다.

그런 남자가 이런 선택을 한다고……?

유이시엘은 아나키엔에게 소리쳤다.

‘이런 미래가 올 리가 없잖아요!’

「여기서는 실현될 수 있지.」

아나키엔은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꿈속의 카드란이 아이와 유이시엘을 보더니 검을 들었다. 유이시엘은 놀란 눈으로 그를 응시하다 결국 체념한 듯 고개를 숙였다. 로엘은 아버지 앞을 막아섰다.

하지만 카드란은 로엘을 죽이고 그다음 슬프게 웃는 유이시엘도 죽였다.

두 사람을 다 죽인 카드란. 꿈속의 카드란은 로엘과 유이시엘의 시신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복수를 했다고! 제기랄!〉

그가 소리쳤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지.」

설마…….

유이시엘은 놀란 눈으로 카드란을 바라보았다. 마치 지금 이 순간을 기다린 것 같은 목소리였다.

〈유엘……?〉

꿈속의 카드란이 기억을 되찾은 것 같았다.

‘도대체…….’

「모두를 다 죽이고 난 뒤 기억을 되찾아야 괴롭잖아」

유이시엘은 아나키엔의 잔인함에 소름이 돋았다.

카드란은 악을 쓰다 목 놓아 울었다. 처절한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가 가슴을 쥐어짜듯 누르며 검을 바라보다, 자신도 죽으려는 듯 검을 들었다.

절규하는 카드란을 보던 유이시엘은 다가가 자신은 아직 살아 있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그리고 갑자기 찾아온 어둠. 유이시엘은 어둠만이 있는 공간으로 떨어졌다.

“유이시엘.”

어둠 속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여기에 깔린 어둠보다 더 짙은, 검은 머리의 아나키엔이 허공에 떠 있었다.

“카드란도 방금 일어났어.”

“그는…….”

“아직 현실인지 아닌지 혼란스러워하지. 그렇지만 레카린이 물을 떠 줘서 그게 꿈이었다는 것을 깨달을 거야.”

유이시엘은 카드란이 임신했을 때 왜 자신을 바라보며 안도하고 울부짖었는지 알게 되었다.

매일 밤 이런 꿈을 꾸게 되면 자신도 현실과 꿈의 경계가 모호해질 것 같았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걸 보여 주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유이시엘은 아나키엔에게 물었다.

“너의 마음이 궁금해서.”

“어떤 마음이요?”

“카드란이 어떤 선택을 했을지 궁금하지 않아?”

순간 유이시엘은 말문이 막혔다.

“너라면 어땠을 것 같아?”

카드란이 오열했다. 그가 그토록 슬프고 아프게 우는 것은 처음 보았다.

그런데…… 그 감각을 매일 견뎌야 한다고?

유이시엘은 모든 것을 내려놓았을 때가 떠올랐다. 그 순간이 다가온 것 같아 숨이 막혔다.

“포기하고 싶어요.”

‘나는 다 내려놓고 싶어 할지도 몰라.’

유이시엘은 손으로 가슴을 꾹 눌렀다.

“보통은 그런데 말이야.”

아나키엔은 어깨를 들썩였다.

“일부러 강하게 꿈꾸게 했는데 그걸 또 견뎌. 포기하지 하라고 해도 안 한다고 발버둥 쳐.”

아나키엔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유이시엘, 네가 저 남자를 위해 목숨을 걸었을 때 지긋지긋할 정도로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저 남자도 만만치 않아.”

마치 아나키엔이 자신에게 희망을 가져도 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유이시엘은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저 죽어서 여기 온 거 아닌 거죠?”

“오늘도 멀쩡히 살았어.”

오늘도…….

“카드란은 괜찮은가요?”

“아니.”

아나키엔의 말에 유이시엘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돌아가게 해 주세요.”

“알았어. 그럼 다음에 또 보자고.”

공간에 빛이 생겼다. 유이시엘은 강렬한 빛에 눈을 떴다.

몸을 일으키니 새벽이었다. 옆에서 로엘이 새근새근 자는 중이었다.

유이시엘은 표정을 굳힌 뒤 잠든 로엘을 품에 안았다. 얼른 잠옷 위에 외투를 한 겹 걸치고 카드란을 만날 준비를 했다.

* * *

레카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도 들어오게 하지 말라는 카드란의 명령, 그리고 곧 이어 들린 그의 비명.

카드란은 침실에서 고통스럽게 유엘과 로엘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물을 한 모금 마신 카드란의 안색은 창백히 질려 있었다. 말수가 적은 그는 역시나 별다른 언질을 하지 않고 레카린을 내보냈다.

안에서 카드란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레카린은 주변을 서성이다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황제의 침실로 로엘을 안은 유이시엘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로엘이 추위를 타지 않도록 작은 이불에 돌돌 만 그녀의 입술은 굳게 닫힌 채였다.

“황후마마, 무슨 일이십니까?”

“폐하를 뵈러 왔어요.”

“그건…….”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했는데.

“저는 괜찮아요.”

유이시엘의 말에 레카린은 조용히 문을 열어 주었다. 황후인 유이시엘을 막을 수 없을뿐더러, 카드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는 것 같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폐하를 도와주십시오.”

레카린의 말에 유이시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 * *

침실 안에 들어선 유이시엘은 로엘을 품에 안고 카드란을 찾았다.

“누구냐,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

카드란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무언가를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 고통에 젖어 지친 사람의 목소리였다.

유이시엘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카드란이 창가 근처의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란, 저예요.”

유이시엘은 오래전의, 그리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지금은 이 이름을 불러 줘야 할 것 같았다.

유이시엘의 목소리를 들은 카드란이 바닥에서 일어났다. 땀에 젖은 채로 비틀거리던 그가 유이시엘과 로엘을 보고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것은 또 무슨 꿈이지? 유엘이 나를 란이라고 불러 줄 리가…….”

그는 유이시엘에게 다가왔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천천히 바라보던 그가 유이시엘의 머리카락을 쓸어 주었다.

“환상은 아니고…….”

“꿈을 봤어요.”

유이시엘의 말에 카드란의 손끝이 떨렸다. 미세하게 같이 흔들리는 그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유이시엘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 꿈은 현실이 아니에요.”

“유엘…….”

“당신은 복수를 포기하고 나를 선택했어요. 꿈속의 당신은 지금의 란이 아니에요!”

유이시엘은 얼른 그에게 소리쳤다. 이 말을 꼭 해 줘야 할 것 같았다.

과연 자신의 말이 카드란에 닿았을까. 그의 얼굴이 천천히 무너졌다.

“유엘, 나는…….”

그는 제 손을 바라보다 다시 주저앉았다.

“죽이고 싶지 않았어!”

카드란이 흐느꼈다.

“그런데 꿈속의 나는 어리석게도 너를 죽였어.”

“기억을 되찾고 절망했나요?”

“꿈속의 내가 죽으려고 하는데 아나키엔이 현실로 끌어당겼어. ……그만 포기할 거냐고 물었어.”

그의 말을 듣는 유이시엘은 마음이 무거웠다.

“포기하지 그랬어요?”

앞으로도 쭉 이런 고통을 계속 겪을 텐데, 차라리 포기하지.

“아니, 나는 오히려 기뻤어. 그래서 포기하지 못한다고 했어.”

“왜 기뻤어요?”

“유이시엘이, 네가 살아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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