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사실은…….’
지금까지의 삶이 너무나도 괴로워서, 그에게 버림받는 게 두려워서 더 이상 살기 싫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신을 다시는 버리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으니 마음을 버려 그렇게 무심함을 유지하게 되었는데, 그 건조했던 마음이 깨져 버렸다.
“아이가 사랑스러워요. 아이를 두고 난 죽을 건데, 그러면 처음부터 안 보는 게 나은데…….”
카드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뒤에 그녀를 부드럽게 다독이며 말했다.
“아니야. 아이와 다 함께 살아갈 거다.”
그는 우는 유이시엘의 눈물을 훔쳐 주고,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
“혼자 있고 싶어요.”
카드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뒤에 올게.”
그가 아들을 안고서 문을 닫고 나갔다.
홀로 남은 유이시엘은 그동안 참았던 감정을 터뜨렸다. 그녀의 오열하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 * *
카드란은 아들을 누엘에게 맡기고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얼른 빈방으로 들어갔다. 기첼과 지에렌에게 가서 후계자 탄생을 알려야 했지만 그럴 정신이 없었다.
그는 잠시 숨을 몰아쉰 뒤 레카린을 불렀다.
“아들이 무사히 태어났고 산모도 무사하다고 지에렌과 기첼에게 알려라.”
“알겠습니다.”
레카린이 문을 닫고 나갔다. 자신의 감정을 추스를 수 있도록 배려를 한 것 같았다.
“유엘.”
그녀가 자신을 미워한다. 화가 나서 소리쳤다. 그리고 아이와 함께 살아가고 싶다는 듯 말했다.
“드디어……!”
원하던 순간이 왔다. 늘 무심하고 바라던 게 없던 그녀가 아닌가. 삶의 의지가 하나도 없었던 그녀가 달라졌다. 변화를 드디어 보이고 있었다.
“축하해.”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카드란은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다. 발코니 난간에 서서 손을 흔들고 있는 아나키엔의 망토가 나부끼고 있었다.
“근데 아들이야, 딸이야?”
“아들입니다.”
아나키엔이 나타났으니 또 다른 조건이 붙을지 모른다. 카드란은 바싹 긴장했다. 그런데 아나키엔은 뜻밖의 말을 건넸다.
“1달 휴가를 주지. 결혼식도 해야 할 것이고, 준비할 게 많잖아.”
“휴가라니요? 그런 것을 고려해 주실 줄 몰랐습니다.”
“상이야.”
아나키엔은 그렇게 말한 뒤 해사한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는 제대로 된 결혼식을 올려 봐.”
과거엔 유이시엘을 괴롭히기 위해 결혼식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아이가 태어난 뒤에도 유이시엘을 죽이는 꿈을 꿀 거야. 괴로움은 반복되겠지. 그리고…… 너에겐 소중한 게 하나 더 생겼어.”
“꿈속에서 로엘도 죽겠군요.”
카드란은 그가 하지 못한 말을 대신 했다.
“영리하네.”
“상관없습니다.”
카드란은 저벅저벅 발코니 쪽으로 걸어가 밖을 바라보았다. 달빛이 환하게 그를 비추고 있었다.
“유엘이 살아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카드란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카드란, 기뻐?”
표정과 다르게 카드란의 눈에선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유엘이 미워하는데도? 그토록 고생했는데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는데?”
아나키엔이 다시 카드란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그는 언제나 어둠을 자극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카드란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제가 고생한 것은 유이시엘이 원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제가 이기적인 마음으로 그녀를 묶어 둔 겁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다릅니다. 유엘이 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제가 무언가를 함으로써 그녀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있게 됐습니다.”
카드란의 손이 떨렸다.
“여전히 용서라는 말은 용납되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유이시엘이 삶의 의지를 찾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자신의 고생에 조금의 의미는 있는 것이다.
카드란은 몸을 바르르 떨었다.
아나키엔은 그런 그를 향해 미소 지으며 어깨를 다독였다.
“악몽 속에서 살아남아. 너라면 진짜로 해낼 거야.”
그렇게 말한 뒤 아나키엔은 천천히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자리에 작은 꽃다발이 남아 있었다.
펠리치아 꽃. 아이가 태어날 때 축하의 의미로 주는 꽃이었다.
장미와 비슷하게 생긴 그 꽃을 바라보던 카드란이 말없이 들었다.
“감사합니다.”
유이시엘이 자신의 얼굴을 보는 것을 힘들어할 테니 조금 뒤에 가야겠다.
‘나를 보면 그녀가 다시 원망하겠지.’
그 생각을 하니 또 눈물이 나왔다.
그렇지만 자신의 고집, 그녀의 의사를 무시하고 진행했던 이기적인 결정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의미가 생기고 있었다.
* * *
유이시엘은 침대에 누워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이 너무나도 아팠다. 카드란을 원망하고 싶지 않았는데, 누군가에게 어떤 것도 바라는 삶을 살고 싶지 않았는데 일이 이렇게 되어 버렸다.
아이가 보고 싶다. 로엘이 보고 싶었다.
그때 문을 열고 한 남자가 들어왔다. 유이시엘은 몸을 일으켜 들어온 남자를 바라보았다.
“오라버니……?”
“아이를 낳느라 고생 많이 했다.”
지에렌은 다가와 유이시엘의 손을 잡았다.
“많이 아팠지?”
지에렌의 다정한 말에 다시 눈물이 나왔다. 유이시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늘 막혀 있던 마음이 뚫린 것 같다. 눈물이 막히지 않고 나오고 있다.
이런 감정은 어떤 말로 표현해야 할까.
지에렌은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유이시엘의 머리카락을 쓸어 주었다.
“난 류크가 나와 내 아내가 될 사람에게 패악을 부릴 것 같아서 결혼을 하지 않았단다. 그런데 너를 보니 나도 하고 싶구나. 내 조카는 얼마나 예쁠까.”
로엘이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지에렌은 아이를 볼 수 없었다.
“아이는 예뻐요. 너무나도 작고 소중했어요.”
조금만 힘을 줘도 부서질 것 같은 연약한 아이, 나의 아들 로엘.
유이시엘은 아이를 떠올리다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를 용서했니?”
지에렌이 유이시엘에게 물었다. 유이시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가 용서할 게 있을까요?”
“그럼 용서하지 않은 거란다.”
지에렌은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에 걸어 주었다.
“황후가 되지 않아도 아이는 키우게 해 주실 거다. 굳이 황후라는 굴레에 너를 묶을 필요는 없어.”
유이시엘은 이번에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이가 엄마가 없이 홀로 커 가는 것은 싫었다.
“좋은 엄마가 되고 싶어요.”
자신이 살아 있어야 가능한 일이겠지만.
“넌 될 거란다.”
카드란은 누구에게도 악몽을 꾸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고 했다. 지에렌 역시 그 사실을 몰랐다.
그러니 카드란은 정말 혼자서 모든 것을 짊어진 거였다.
“모르겠어요.”
‘제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요? 카드란은 1년, 2년은 버티겠지만 평생 버틸 리가 없잖아요!’
그녀는 소리치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그런데 그때, 문을 열고 카드란이 들어왔다. 그는 품에 로엘을 안고 있었다.
“로이체란 후작은 이제 가도록 하지?”
“만남이 너무 짧습니다.”
“다음에 만나. 유이시엘은 몸도 회복해야 해.”
카드란의 말에 지에렌은 아쉬운 듯했지만 유이시엘의 손을 놓고 나갔다. 그러자 카드란이 로엘을 그녀에게 안겨 주었다.
“마음이 진정이 되었나?”
“조금은요.”
유이시엘은 로엘을 바라보았다.
늘 자신의 어머니와 다르게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다.
“제가 황후가 되고 싶지 않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건가요?”
“그래도 유이시엘은 로엘의 엄마야. 충분히 자격을 인정해 줄 거다.”
“정말로…… 폐하가 증오스럽네요.”
유이시엘은 아이를 꼭 끌어안았다.
“정말로 폐하께서 몇 년이 아니라 평생 그 고통을 견디실 수 있을까요?”
유이시엘은 카드란에게 의문을 보냈다. 그녀의 날카로운 눈초리에 카드란은 고개를 기울였다.
“난 견딜 거다.”
그는 다시 한번 말했다. 그녀의 비난에도 그저 담담하게 말이다.
“언젠가 유이시엘이 나라면 견디리라 믿을 때가 올 거다.”
“정말로…… 희망적인 말만 하고.”
유이시엘은 한숨을 내쉬었다.
“황후가 될게요. 그게 약속이었으니까요.”
굳이 약속이 아니라도 온전한 자격을 갖춘 황후가 되어 아이를 키우고 싶었다.
* * *
아나키엔은 허공에 떠 있었다. 아주 오래전 자신을 이기겠다고 덤비던 인간, 그리고 결국 자신을 이겨서 황제가 된 남자인 록센나의 초대 황제를 떠올랐다.
“카드란은 너를 닮은 것 같다.”
인간은 언제나 양면적이다. 진창처럼 더러운 부분도 있고 빛처럼 깨끗한 부분도 있다.
카드란에게도 유이시엘에게도 그런 면이 섞여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들의 어두운 부분은 애잔했다. 그냥 보기만 해도 마음이 저리고 아팠다.
“나쁜 짓을 하는 게 취향이긴 하지만…….”
그들에게는 취향에서 벗어난 짓을 많이 하고 있었다. 오랜 세월 봉인돼 있으면서 인간들을 시험하고는 했는데, 카드란처럼 안 넘어오는 인간은 드물었다. 그리고 유이시엘처럼 한 남자를 올곧이 바라보고 목숨을 거는 이도 보기 힘들었다.
그들의 사랑이 어떻게 될까. 정말로 카드란은 자신이 원하는 순간까지 유이시엘을 지킬 수 있을까. 그리고 카드란은 유이시엘을 믿을 수 있을까.
그것은 세월이 흘러야 알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