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4화 (84/97)

84화

“내일이면 아이가 태어나.”

아나키엔의 말에 카드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긋지긋한 반년의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만약 유이시엘이 죽는다면 악몽은 사라져.”

그 말에 카드란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이와 유이시엘이 살려면 너는 계속 꿈속에서 유이시엘을 죽여야 해.”

아나키엔의 미소가 잔혹했다.

소중한 그녀가 죽을 때마다 자신이 무너지는 게 느껴진다.

“오늘 어떨까.”

마치 지금까지 견딘 카드란의 노력이 무너질 것을 바라듯이, 그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무튼 행운을 빌어.”

아나키엔은 곧 사라졌다.

카드란은 말없이, 멍하니 서 있었다.

* * *

이제 아이가 태어난다. 유이시엘은 정말로 무거워진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내일 아침이면 아이가 나오기에 오늘 저녁에 움직일 생각이었다.

문이 열리고 아나키엔이 등장했다.

“무슨 생각 하고 있어?”

“아이 생각요.”

이제 죽음이 다가오고 있었다. 카드란이 어떤 식으로 꿈을 꾸는지 가끔 보았기에, 그가 나날이 정신적으로 죽어 가는 것을 보았기에 자신이 살아남으리라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런 아픔을 겪는데 어떻게 버틸까.

자신도 카드란이 죽는 것을 견디지 못해 목숨을 걸지 않았던가. 그의 괴로움을 조금은 이해하고 있다.

“아이는 안을 수 있을까요?”

어머니가 바로 죽으면 아이의 운명은 어찌 될까. 어떻게 되든 카드란이 잘 키웠으면 좋겠다.

“음…….”

유이시엘의 부탁이 담긴 물음에 아나키엔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가 죽을 운명이면 아이가 태어나면 바로 죽어. 너의 생명력이 아이에게 가야 하니까. 이미 네 생명력을 내가 주고 있는 거나 다름없어서.”

아나키엔은 유이시엘의 부탁을 들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결국 아이와 함께 있는 것은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뜻이다.

“조금 슬프네요.”

“울 것 같은 표정이야.”

그렇구나…….

유이시엘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아이가 태어나고 네가 살아남아도 악몽은 사라지지 않지. 그에게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었어.”

카드란은 계속 괴로움을 겪게 된다.

‘내가 죽어야 끝이 나는구나.’

유이시엘은 아나키엔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아나키엔이 유이시엘의 얼굴을 한 번 보고 공간 이동을 했다.

그리고 그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유이시엘은 보지 못한 웃음이었다.

* * *

유이시엘이 도착한 곳은 황후궁이었다. 여름을 맞이한 황후궁엔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 있었다. 전부 젊은 시절 유이시엘이 좋아하던 꽃들이다.

어린 시절의 향수가 밀려왔다. 유이시엘은 황후궁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을 보고 놀랐다.

“유이시엘 님!”

자신에게 달려오는 코넬.

“어서 오세요.”

옷을 곱에 입은 누엘.

“아이가 정말로 생겼네요.”

신기하듯 바라보는 휴이.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인물이 있었다. 기첼이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유이시엘을 맞이하고 있었다.

“로이체란 가문은 탐탁지 않지만, 폐하의 아이 아닙니까.”

기첼은 그렇게 말하며 유이시엘에게 손을 내밀었다.

“잘 낳아 주십시오.”

그들의 환영이 좋았다.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이들의 얼굴을 보는 거다. 웃는 얼굴로 기억되는 게 나을 것 같아 환하게 웃었다.

“폐하께서는요?”

“방 안에 있어.”

아나키엔은 웃으면서 유이시엘의 등을 밀었다.

“가 봐.”

유이시엘은 천천히 걸음을 걸었다.

그가 포기를 해서 미안한 마음에 나오지 않은 걸까.

‘그를 원망하지 않아.’

여기까지 힘들게 버티었다. 이제 그가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안다.

계속 이 괴로움을 견디라니. 아마 더 하면 그는 무너질지도 모른다. 그러니 두려워 그만두었을 것이다.

유이시엘은 황후의 침실 문을 열었다. 방 안에서 창문을 향해 서 있던 카드란이 고개를 돌렸다.

‘아.’

전에 봤던 것보다 더 말랐다.

유이시엘은 천천히 그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저 왔어요.”

마치 첫날밤의 순간으로 돌아간 것처럼 가슴이 떨렸다. 그러자 카드란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살며시 웃었다.

“유엘이 오면 기분이 이상해. 마치 또 사라질 환영처럼 보여.”

카드란이 슬프게 말했다.

“우리의 아이, 곧 태어나겠지?”

“기대되어요?”

카드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낳을 때 곁에 있어 줘요.”

태어난 아이를 보고 그가 웃어 주면 그것으로 만족할 것 같다.

유이시엘의 말에 카드란은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

“그럴게.”

그는 자신이 바라는 것을 해 주고 싶어 한다.

유이시엘은 그의 품에서 감정을 갈무리하려 애썼다. 그럼에도 폭발할 것 같은 감정이 밀려왔다.

아이를 낳고 죽음을 앞두고 있으니 마음이 이전과 같아진 것 같았다. 카드란을 내려놓았던 그때와 비슷한 슬픔이 밀려왔다.

이번에는 아이를 내려놓아야 했다.

“아이를 잘 부탁해요.”

진통이 밀려온다. 아이를 낳고 나면 자신은 죽겠지.

그렇게 유이시엘은 카드란에게 유언을 남겼다.

* * *

아래가 아팠다. 아이를 낳는 그녀의 손을 카드란이 잡아 주었다.

‘아이.’

울음이 나올 듯이 감정이 밀려왔다.

‘카드란과 나의 아이.’

얼마나 사랑스러울까. 그토록 사랑했던 남자와의 사이에서 생긴 아이였기에, 자신이 반년 동안 배 속에서 키운 아이였기에 더욱더 사랑스러울 것이다.

얼굴도 보고 가지 못하는 게 슬펐다.

카드란의 얼굴도 떠올랐다. 그토록 힘들게 버텨 왔으니 괜찮다는 말도 해 줄 것을.

수많은 일들이 떠오른다.

카드란을 처음 만나고 빛을 본 날.

그에게 죽으라고 이야기를 들었던 생일날.

기억을 되찾고 추억을 부정하던 그.

그리고…… 자신에게 애원하며 울었던 란.

나의 란.

‘사랑했어요.’

마음이 무너지도록, 자신을 망가뜨리면서 그렇게 사랑했다.

죽은 마음은 결국 돌아오지 않았고, 그대로 자신은 죽게 되었다.

너무나도 슬펐다.

고통이 밀려오는 가운데 아래서 뭔가가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아이가 태어났다.

“유이시엘, 로엘이 태어났어!”

아이 이름을 짓는 건 카드란에게 맡겼는데 로엘이라고 지었나 보다.

유이시엘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땀에 젖은 얼굴엔 이제 그림자가 졌다.

이제 생명력은 아이에게 갈 것이다. 그럼 자신은…….

아아, 안식에 들고 싶지 않았다.

‘아이를 보고 싶어.’

좀 더 살고 싶다. 그런 마음이 강하게 치솟았다.

예전엔 죽음을 맞이하면 반가울 것 같았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아릿한 마음에 눈물이 나올 것 같다.

“울지 마.”

카드란이 속삭였다.

“아이는 건강해.”

이제 자신은 죽고 카드란은 혼자 아이를 키우겠지.

유이시엘은 그렇게 죽음을 기다렸다.

그런데…….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건강한 남자아이입니다.”

아이를 받은 누엘이 유이시엘에게 아이를 안아 데리고 왔다. 카드란도 벅찬 눈으로 아이를 보고 있었다.

내 아들, 로엘.

유이시엘은 고개를 돌려 아이를 보았다.

짙은 금발의 아이가 눈을 감고 있었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방 안에 퍼졌다.

소리를 들은 유이시엘은 알았다, 자신이 죽지 않을 것을.

“폐하…….”

유이시엘은 카드란을 찾았다.

“저, 살아 있어요?”

유이시엘이 질문하자 카드란이 볼을 잡았다.

“견딘다고 했다.”

유이시엘의 곁에서 그렇게 말한 뒤 카드란이 손을 꼭 잡고 키스를 했다.

“나의 유엘.”

아이, 카드란과 함께 산다.

‘이런 것은 생각도 못 했어.’

“유엘, 왜 울지?”

카드란이 당황했다.

“정말로…….”

유이시엘은 말문이 막혔다.

자신 때문에 고통받고 죽어 가는데, 망가지는 게 눈에 보이는데 한 번도 그 고통을 토로하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

이 남자를 어찌해야 할까.

“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는 그를 어찌해야 할까.

그녀의 심장이 뛰고 있다. 이제 희망을 누를 수 없었다.

“미워요.”

자신에게 헛된 마음을 품게 하는 그를 미워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희망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잔인했던 적이 또 있을까.

‘그는 몰라.’

유이시엘은 카드란에게 소리쳤다.

“희망을 주지 말아요!”

그가 철저하게 고통을 스스로 삭이며, 견디는 모습에 희망이 솟는다.

‘나도 계속 살아갈지 몰라.’

로엘을 돌보며 카드란과 함께 사는…… 그런 미래가 그려졌다. 그 기대에 마음이 눌려 버릴 것 같았다.

애써 외면하고 있던 희망이 그녀를 괴롭혔다. 이루어질 수 없는 희망을 믿으려고 하는 자신 때문에 괴로웠다.

그리고 이런 희망을 준 이는 카드란이다.

“이렇게 하고 버릴 거면서.”

줄곧 누르고 말하지 않던 감정이 떠올랐다.

그는 자신을 내려놓았다. 사랑한다고 했지만, 기억을 잠깐 찾았을 때 자신을 버렸다. 그랬는데 왜 이제 와서 희망을 주려는 걸까.

그런 유이시엘을 다들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아이가 태어나 사랑스러워하는 눈으로 보던 유이시엘이 카드란을 향해 원망을 퍼붓자 다들 이해를 못 하는 듯했다.

그렇지만 카드란은 달랐다. 그는 얼른 유이시엘을 끌어안았다.

“그래, 차라리 나를 원망해. 무심한 것보다 그게 나아.”

카드란의 말이 그녀를 더 아프게 했다.

그가 왜 나의 마음을 몰라주느냐고, 그렇게 자신을 비난하고 힐난하면 희망이 사라질 텐데. 그는 그러지 않는다.

“정말로…… 미워요.”

“희망을 믿음으로 만들어 주겠다.”

그 말을 들으니 울음이 나왔다.

늘 혼자서 몰래 울었는데, 이제는 그의 앞에서 울음이 나온다. 모두 다 사라졌다고 생각한 마음이 자랐다. 자신이 희망을 꿈꾸고 있다.

희망 따위 사라졌다고 생각한 나인데. 그런데 알지 못한 곳에서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카드란이 보여 준 태도 때문에 자라서 꽃을 다시 피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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