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3화 (83/97)

83화

* * *

피를 흘리는 그녀의 모습이 생생했다.

〈유이시엘!〉

카드란은 비명을 질렀다.

결국 류크의 복수를 하기 위해 유이시엘을 찾아가 검을 휘둘렀다. 유이시엘을 사랑하면서도 검을 휘두를 수밖에 없었던 그는 죽은 유이시엘을 품에 안고 결국 울었다.

죽은 자의 몸은 여전히 따뜻했다. 사랑했던 그녀를 안고 있는 제 머릿속에 잊혔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니야!〉

그는 절망했다. 꿈속의 그는 절망했다.

타들어 가는 듯한 마음을 안고 울다가 눈을 뜨니 아침이었다.

“유엘.”

그녀를 몇 번이나 죽인 것일까. 죽일 때마다 느껴지는 그 감각에 미칠 것 같았다.

“일어났어?”

낯익은 목소리에 카드란이 고개를 돌렸다.

“멀쩡하지 않군.”

꿈속은 새로운 삶이다. 그는 매일 밤 유이시엘을 죽이고 있었다. 기억 속의 사랑하는 소녀를 죽인 것을 알았을 때의 절망감은 그의 피부에 촘촘히 박혔다.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유이시엘이 너무 보고 싶다. 살아 있는 그녀가 필요했다.

하지만 카드란은 이를 악물었다.

“유이시엘을 만나게 해 줄게.”

카드란은 아나키엔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건조하게 말하네.”

너무나도 고통을 받아서 감정이 무뎌지고 있다. 유이시엘이 그랬던 것처럼 그 역시 고통에 의해 감정이 메말라 갔다. 건조해진 그를 보던 아나키엔이 카드란에게 속삭였다.

“그만두는 건 어때?”

“무엇을 말입니까?”

“너, 서서히 죽어 가고 있잖아.”

아나키엔은 카드란의 상태를 정확히 보았다.

“마음이 죽어 가고 있어.”

“유이시엘만큼은 아닙니다.”

카드란은 단호히 부정하면서 커피를 찾았다.

“제가 망가진다 해도 그녀를 살릴 겁니다.”

그러다 카드란은 고개를 얼른 가로저었다.

“아니, 망가지는 게 아니라 멀쩡히 버텨서 유이시엘을 살릴 겁니다.”

“스스로 망가지지 않을 만큼만 괴로워하겠다는 거야?”

“망가져서 유이시엘에게 용서를 강요하는 일은 만들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아나키엔은 허를 찔린 듯 바람 빠진 소리를 냈다.

“하아?”

“제가 망가지면 상황이 유이시엘에게 용서를 강요할지 모릅니다. 제가 용서해 달라고 빌지 않아도 그녀의 마음이 흔들릴지 모릅니다. 그런 일은 없어야 합니다. 그녀가 온전히 자신의 의지로 저를…….”

용서라는 말은 차마 할 수 없다. 카드란은 그렇게 말을 끊은 뒤 웃었다.

“저녁에 데리러 올게.”

아나키엔은 그러고 카드란의 몸에 회복 마법을 걸어 주었다.

“죽는 건 곤란하니까.”

“감사합니다.”

카드란은 오늘도 유이시엘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 광경을 보고 유이시엘이 뭐라고 할까.”

아나키엔은 카드란 몰래 방금 전 일을 영상으로 유이시엘에게 전달했다. 유이시엘의 마음이 더 복잡해질 것은 알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것은 그녀가 가져가야 할 몫이었다.

* * *

영상이 켜졌다. 카드란의 모습이 보였다.

“란.”

그는 자신에게 용서를 강요하지 않는다. 그런 상황을 만들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왜 당신은 이러는 건가요.”

차라리 자신을 고통을 왜 몰라주냐고, 이렇게 고생하는데 용서하지 않느냐고 윽박지르면 정말로 버릴 수 있을 텐데.

그런데 그는 오로지 자신의 마음이 되살아나기를 바라면서 조용히 있었다. 그렇기에 그를 마지막까지 무시할 수가 없는 것이리라.

“정말이지 무서워요.”

그의 속죄가 두렵다.

흔들리는 마음을 안은 채 유이시엘은 저녁이 오지 않기를 기다렸다. 그를 만나는 것이 두려웠다.

하지만 시간은 흘러 그를 만나야 할 순간이 다가왔다.

저녁을 먹은 유이시엘은 책을 읽고 있었다. 아나키엔이 오기로 한 시간은 7시. 시간이 다가올수록 심장이 뛰었다.

자신을 보고 카드란은 뭐라고 할까. 어떤 말을 할까.

문이 열리며 아나키엔과 한 남자가 들어왔다. 유이시엘은 시선을 돌려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전보다 어딘가 야위어 보이는 카드란이었다. 그가 짧은 시간 동안 어떤 고통을 받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유이시엘.”

카드란이 천천히 다가왔다. 그녀가 앞에 있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던 그가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정말로 살아 있었어…….”

그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정말 다행이다.”

그리고 카드란은 눈물을 흘렸다.

“매일 밤 네가 죽었다. 내가 죽이고 죽여서, 어느 것이 현실이고 꿈인지 알 수 없었어. 그래서 네가 죽은 게 아닌가, 그래서 아나키엔이 포기하라고 말하는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도 했다.”

“전 살아 있어요.”

유이시엘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그의 손을 잡았다.

“아직 죽지 않아요. 죽더라도 아이는 낳고 죽잖아요.”

유이시엘의 말에 카드란이 고개를 저었다.

“죽게 하지 않아.”

그는 이를 악물었다.

“나를 믿기 어렵겠지만, 조금은 희망을 가져 줘.”

그의 말에 유이시엘이 난색을 표했다. 희망을 가지는 것은 너무나도 두렵기에 빈말이라도 그러겠다고 말할 수 없었다.

“울지 말아요.”

유이시엘은 그의 얼굴을 손으로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다 손을 자신의 배 쪽으로 가지고 갔다.

“아이가 자라고 있어요.”

그와 자신의 아이. 소중하고 예쁜 아이.

카드란은 배를 조용히 만졌다.

“정말로 생긴 것인가?”

“여름이 되면 태어날 거예요.”

유이시엘은 카드란을 일으켰다. 그다음, 그를 데리고 가서 침대맡에 앉히고 그가 자신을 품에 기대도록 했다.

유이시엘의 품에 안긴 카드란이 눈을 감았다. 그녀의 가슴에 고개를 묻은 그가 숨을 들이켰다.

“유엘, 나는 버틸 거다.”

그가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말하자 유이시엘은 말없이 머리카락을 쓸어 주었다. 그녀의 손길에 카드란이 고개를 들고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더듬었다.

그리워하는 듯이 움직이는 손길.

유이시엘 역시 싫지 않았기에 가만히 있었다.

그냥 지금은 그가 버티게 도와주고 싶었다.

* * *

유이시엘이 잠들었다. 카드란은 피곤해서 일찍 잠든 유이시엘을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나키엔이 허락한 시간은 오늘 밤까지였다. 이제 자정이 지나려 하고 있었다.

방을 나온 카드란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아나키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약속은 지키네.”

“유엘을 잘 부탁합니다.”

“음, 그런데 넌 왜 나를 원망하지 않지?”

아나키엔은 궁금한 듯 물었다.

“계속 너에게 시련을 주잖아. 유이시엘을 그냥 살려 주지도 않고, 너를 괴롭히잖아.”

카드란은 피식 웃었다.

“아나키엔, 당신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래도 당신은 저에게 유이시엘을 살릴 방법을 알려 줍니다. 그 덕분에 유이시엘이 살아 있는 것이고. 모든 일엔 대가가 있는 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이유나 방법이나 뭐든 유이시엘을 살려 주어서 감사합니다.”

카드란은 고개를 숙였다. 그의 이런 태도에 아나키엔은 허가 찔린 듯 입술을 비죽 올렸다.

“정말로 너는 이상한 사람이야.”

아나키엔은 그렇게 말한 뒤 카드란의 어깨를 다독였다. 카드란을 응원하듯이 말이다.

* * *

레카린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카드란이 손을 휘저으며 소리를 치고 있었다.

“아니야!”

처절하고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레카린은 익숙하게 뜨거운 물을 준비했다. 카드란이 매일 밤 악몽을 꾸는 것을 알기에, 그가 정신을 차리도록 물이라도 떠 놓았다.

얼마 뒤 카드란이 눈을 떴다.

“여기는…….”

“아침입니다.”

레카린이 물이 가득 담긴 잔을 내밀자 카드란이 물을 마시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현실이군.”

깨어나 물을 마시는 것으로 현실임을 깨닫는다. 그러지 않으면 현실과 꿈의 경계가 모호해져 유이시엘이 죽었다고 생각되어 너무나도 힘들다.

이 괴로움을 견디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룰이 필요했다. 그래서 카드란은 악몽을 꾸는 것을 눈치챈 레카린에게 매일 아침 물을 떠 놓으라고 시켰다.

카드란은 말없이 숨을 몰아쉬었다.

“무슨 악몽이었습니까?”

레카린의 물음에 카드란의 입가에 쓴웃음이 맺혔다.

“괴로운 꿈.”

걱정 어린 질문에도 카드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세한 사정을 알면 유이시엘을 원망하는 이들이 나타날지 모르기에 철저히 비밀로 했다.

“곧 회의가 있습니다.”

카드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하마.”

“오늘은 취소하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아니다.”

일정은 그대로 해야 한다. 그래야 다른 이들이 자신이 힘들어하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지.

카드란의 말에 레카린은 고개를 숙이고 나갔다. 홀로 남은 카드란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네가 남을 공간은 내가 만든다.”

유이시엘이 돌아오면 그녀를 반겨야 한다. 후계자를 낳은 그녀가 황후가 되었을 때 별다른 잡음이 없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최대한 태연하게 있어야 했다.

“멋진 말이야.”

그리고…… 아나키엔이 나타났다. 카드란에게 다가온 그는 카드란의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댔다.

“선물이야.”

치료 마법을 걸자 회복되는 몸.

카드란은 그를 힐끗 보았다.

아나키엔은 그가 힘들어할 때마다 치료 마법을 걸어 주었다. 가끔 유이시엘을 만나게도 해 주고.

아나키엔 역시 유이시엘이 죽는 것을 바라지 않는 것 같았다.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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