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1화 (81/97)

81화

아나키엔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렸다. 아나키엔은 그런 머리를 귀찮다는 듯 쓸어 올리며 카드란을 향해 웃어 보였다.

“악몽은 거의 다 끝나 가. 유이시엘의 과거를 모두 다 카드란이 봤단 말씀. 그래서 다른 고통이 필요하기도 하고, 너의 행보가 마음에 들지 않기도 했고.”

“그래서 유이시엘에게 아이를 가지라고 한 겁니까?”

“응.”

아나키엔의 말에 카드란은 주먹을 날리고 싶은 것을 참았다. 울컥 뭔가가 밀려 올라왔다.

“유이시엘이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까?”

아나키엔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있지. 없다고 한 적은 없어.”

“무엇입니까?”

“그건 말이야. 앞으로는 유이시엘의 괴로움이 아니라, 카드란 네가 가장 두려워하는 미래를 꾸게 될 거야.”

유이시엘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유이시엘이 죽는 꿈이군요.”

“단순히 죽일까? 너는 매일 밤 그녀를 찌른다. 찔러서 죽이고 후회할 거야. 그리고 일어나서 아무도 없는 곳을 바라보면 어떤 기분일 것 같아?”

유이시엘은 숨이 막혔다.

카드란이 자신을 살리기 위해 어떤 고통을 감수하는데 그것을 모조리 수포로 만들어 버니는 일을 하다니…….

“아이를 낳기 전까지 카드란이 새로운 악몽을 못 견디면 유이시엘은 아이를 낳고 죽어. 하지만 견디면 유이시엘은 아이를 낳고도 살 거야. 물론 아이를 낳고 나서도 카드란은 악몽은 꾸겠지. 매일매일 악몽을 꾸고도 포기하지 않으면 유이시엘은 살아가고. 못 하면 죽고.”

유이시엘은 절망했다.

유이시엘도 만약 카드란이 죽는 꿈을 계속 꾼다면 버틸 자신이 없었다. 카드란도 버티지 못하겠지. 꿈이 너무나도 절망스럽고 고통스러워 울지 몰랐다.

“단, 유이시엘이 임신했을 때는 내가 데려갈 거야. 그러니 카드란, 유이시엘이 없는 곳에서 혼자 견뎌.”

“그만해요…….”

유이시엘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왜 우리를 그냥 두지 않는 거에요!”

유이시엘은 아나키엔에게 소리쳤다.

“폐하도 마찬가지예요. 나를 죽게 내버려 두었더라면 이런 일 따위……!”

“맞아, 미안하다. 과거의 추억을 파괴한 것은 나 자신이니까. 그러니 화를 내는 건 당연해.”

카드란은 유이시엘의 손을 꼭 잡았다.

그녀가 화를 낸다 해도 같이 언성을 높이지 않고 부드럽게 말했다.

“과거의 나는 너를 부정하고 인정하지 않았어. 그런 것처럼 지금의 너도 그렇겠지. 그렇지만 나는 이번에도 말할게. 나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거다.”

“거짓말, 아이는 엄마가 없을 텐데.”

“꼭 살게 할 거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에 대한 기대가 크지 않았기에 유이시엘은 아이를 낳고 자신은 죽을 운명일 거라고 믿었다.

* * *

기첼은 마차 안에서 투덜거렸다. 혼자 있었으면 욕을 했을 테지만 레카린이 보고 있는 앞이기에 자제 중이었다.

“유이시엘 님이 도대체 저를 왜 보자고 하는 건지.”

“할 말이 있다고 하신다.”

레카린은 자신이 했던 말은 쏙 빼놓고 그를 끌고 나왔다.

“보나 마나 좋은 말은 아니겠죠. 쓸데없는 말이나 떠들지도 모르죠.”

레카린은 기첼의 반응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유이시엘에게 이들을 막을 키가 있을까. 카드란이 유이시엘을 만나고 나서 생각이 많은 것 같던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아무튼 협상 카드를 당장 내놓지 않는다면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었다.

그래도 유이시엘이다. 그냥 아무런 대책이 없는데 기첼을 만나게 해 달라고 하지는 않았겠지.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창문을 응시했다.

약속 장소에 거의 도착했다. 유이시엘이 먼저 온 듯 헬몬 가문의 마차가 보였다.

유이시엘은 레카린이 하루 통째로 빌린 커피숍에 앉아 있었다. 문이 열리며 기첼과 레카린이 들어왔다.

“오랜만이에요.”

유이시엘은 그들에게 인사했다. 그러자 기첼이 그녀에게 고개를 숙인 뒤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저를 보자고 하셨다고요?”

레카린이 얼른 기첼 옆에 앉았다.

“할 말이 있어서요.”

“무엇인가요?”

기첼은 차가운 눈으로 유이시엘을 응시했다. 유이시엘은 그의 눈빛에 익숙해져 있었기에 긴장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기첼 님은 로이체란 가문에 많은 피해를 입었다고 들었어요.”

“그렇죠. 아무리 로이체란 가문이 속죄의 의미로 이권을 내놓는다 해도 성에 차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기첼은 그렇게 말하고 찻잔을 들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냥 이유 없이 저를 부르신 것은 아닐 테고.”

“만약 미래의 황제 폐하 자식이 로이체란 가문에서 나온다 해도 이대로 로이체란 가문을 배척할 건가요?”

순간 레카린은 놀라 벌떡 일어날 뻔했다. 기첼은 그보다 먼저 격분하며 자리를 박찼다.

“뭐라고요! 폐하께서 그런 일을……!”

“하실 거예요.”

기첼은 잠시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유이시엘을 응시했다.

“아이가 생길 만한 일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기첼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카드란이 유이시엘을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카드란이 만약 여자를 취한다면 유이시엘이 유일할 것이었다.

“하아.”

기첼은 거친 숨을 토했다.

“정말이지, 정말로 이런 것을 준비했을 줄이야. ……뭐, 유이시엘 님이 다른 로이체란 가문의 사람들과 달랐던 것은 인정합니다. 그렇지만 전 로이체란 가문이 뼛속까지 싫습니다. 류크 그 자식이 동생을 데려가 노리개로 삼다가 죽였기 때문이죠.”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후계자가 로이체란 가문에서 나온다면…….”

기첼은 거의 노려보는 듯이 유이시엘을 응시했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고.”

그때 레카린이 끼어들었다.

“맞아. 폐하와 유이시엘 님이 얼마 전에 만나셨다.”

“정말로 무서운 분이시군요.”

기첼에게 있어 카드란은 소중한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카드란의 아이를 유이시엘이 낳고, 그 아이가 또한 후계자가 된다면 마냥 무시하지는 못할 것이었다.

유이시엘이 기첼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저에게 충성을 바칠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저에게 노골적으로 반감을 가지는 건 곤란해요. 전 후계자의 어머니가 될 테니까요.”

유이시엘이 여유롭게 웃었다.

“로이체란 가문은 다음 대 황제의 외척이에요. 그것을 알아 두세요. 물론 지에렌 오라버니가 류크 같은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그런 경우도 아니잖아요?”

조목조목 따지는 말을 듣고 기첼은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그녀가 하는 말이 모두 다 맞았기 때문이었다.

“무서운 사람이군요, 당신.”

기첼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만약 폐하의 후계자를 당신이 낳는다면, 로이체란 가문을 배척하지 않겠습니다. 물론 호감을 가지진 않겠지만.”

고개를 끄덕인 유이시엘은 기첼이 자신을 죽이려 한 전적을 들먹였다.

“저 역시 옛일을 묻지는 않을게요.”

“……좋군요.”

유이시엘은 웃으며 기첼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하얀 손을 바라보던 기첼이 허탈한 웃음을 내뱉고는 손을 잡았다.

“폐하를 닮은 후계자면 좋겠습니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유이시엘은 그렇게 말한 뒤 레카린을 바라보았다.

“오늘 밤 폐하를 뵐 거예요.”

오늘, 그와 하룻밤 잔다.

그 일을 하기 전에 기첼을 만나 수하들과 관련된 일을 정리하고 싶었다.

“네, 유이시엘 님. 폐하께서 언제나 기다리고 계십니다.”

레카린은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먼저 일어날게요.”

유이시엘은 일어났고 그녀가 떠나자 기첼이 레카린에게 소리쳤다.

“이것을 비밀로 했습니까?”

“미안하다.”

“극비라고는 하지만……!”

“나도 폐하와 유이시엘 님이 만나신 것만 알았다.”

“정말로 뒤통수 제대로 맞았잖아요!”

유이시엘을 그들을 응시하다가 문을 닫고 나왔다.

‘카드란.’

유이시엘은 말없이 가슴을 꾹 눌렀다.

과연 그에게 안길 수 있을까. 그가 자신을 안을 수 있을까.

사랑했던 남자, 그토록 원하던 남자였는데.

그녀는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꼬여 버린 운명이 너무나도 슬펐다.

“란…….”

그녀는 오래전 불렀던 그의 이름을 불렀다.

오늘은 이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 * *

유이시엘은 카드란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다가온 카드란의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카드란의 품에 안길 것을 각오했기에 그가 하려는 대로 두었다.

아나키엔은 하룻밤 만에 아이가 생기게 해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아이가 태어나는 것은 반년 뒤. 10개월이 아니라고 한다.

“저를 안아요.”

“싫으면 말해라. 억지로 하진 않을 거니까.”

“오늘이 아니면 한 번에 생기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유이시엘이 강하게 말했다.

아이를 만드는 과정은 잘 안다. 해 본 적은 없지만 이론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유이시엘을 바라보던 카드란이 말없이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댔다. 짧은 접촉에 그녀의 몸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싫은가?”

유이시엘은 긴장을 풀었다.

“싫지 않았어요.”

카드란이 기억을 되찾은 직후, 자신을 억지로 살렸을 때라면 싫었을 텐데…… 지금은 달랐다.

그가 자신을 살리고 노력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일까. 그에게 억지로 죽여 달라 하지 않겠다고 말한 뒤로 마음이 조금 달라졌다.

그리고 의무감에 억지로 참을 생각이었는데 막상 닿았을 때 싫지 않았다. 오히려 부드러운 입술에 닿으니 마음도 함께 부드러워졌다.

오래전 그와 키스했던 일이 생각나기도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