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 * *
연회장에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샹들리에가 빛나고 음악이 잔잔히 흐르는 와중에 라젤란이 와인 잔을 들었다.
“유이시엘 님과 우리 아들은 아무런 사이가 아닙니다. 그분께서 잠시 머무는 것뿐이죠.”
라젤란은 아들에게 쏠린 소문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렇지만 다들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정말입니까?”
“전 성녀님과 그런 사이가 아니라니?”
“아쉽군요.”
그렇게 말하던 이들이 시선을 돌렸다. 카드란이 들어왔다는 소리를 들은 것이었다.
오늘 연회장엔 누구와 올 것인가.
작년에는 세안과 유이시엘이 있었지만 올해는 아니었다. 대대로 황제는 생일날 파트너를 데리고 등장했다. 그 사람은 황후일 때도 있고 총애받는 후궁일 때도 있었다.
황제가 총애하는 여자라는 사실을 알릴 때 황제의 생일 파트너만큼 좋은 자리는 없다.
그런데 카드란 옆에는 여성이 없었다. 레카린과 기첼만 있을 뿐이었다.
“저런.”
라젤란이 아쉬워했다.
“후보를 드렸는데…….”
슈렌이 옆에서 웃었다. 파트너에 적합한 귀족 아가씨 리스트를 드렸는데 한 분도 선택하지 않았다.
〈짐이 알아서 한다.〉
이 말만 하시더니, 아끼는 수하들하고 입장했다.
다들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 짐의 생일날 와 주어서 고맙군.”
카드란은 귀족들에게 인사를 했다. 다들 웃으면서 카드란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카드란이 아무런 여자도 데리고 나타나지 않았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연회장에 초대된 귀족 영애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얼마 뒤 춤을 출 시간이 되었다.
‘누구를 선택하실까.’
‘춤은 추시겠지?’
‘어떤 영애와……?’
다들 숨을 죽이며 카드란이 어떤 영애에게 춤을 신청할지 궁금해했다.
그런데 카드란은 춤을 추지 않고 수하들과 측근들에게 갈 뿐이었다.
“춤을 안 추십니까?”
다들 궁금해하는 것을 라젤란이 물었다.
“안 춘다.”
“아름다운 영애가 이렇게 많은데.”
“그들에게 헛된 꿈을 안겨 주고 싶지 않군.”
카드란의 냉정한 말에 다들 숨을 죽었다. 연회장에 있는 귀족 영애 중에서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렇군요.”
그때 휴이가 다가와 잔을 건넸다.
“춤을 추시진 않지만 잔은 받아 주시겠죠?”
카드란은 술이 든 잔을 보고 웃었다.
“센스 있군.”
“감사합니다.”
카드란은 술을 한 모금 마시며 천천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얼마 뒤 연회장을 나와 정원을 거닐었다.
작년에 유이시엘과 여기서 마주쳤지.
그때를 생각하며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오늘 생일날 꿈을 꾸었다.
자신은 유이시엘이 죽기를 바란다고 말했었다. 그것을 잊지 않고 있었지만 꿈에서 그녀의 마음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매일 밤 그녀에게 자신이 한 짓이 어떤 것인지 깨닫는다.
“정말로…….”
자신이 했던 짓들이 그런 것들이었다.
그녀의 마음을 무참히 부수고, 부수고…….
그녀가 모든 것을 내려놓을 때까지 그 짓을 반복했다. 그러니 유이시엘이 자신을 놓아 버린 것은 당연했다. 살고 싶지 않다고 하는 말을 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유이시엘.”
그녀가 보고 싶다. 하지만 유이시엘은 자신과의 만남을 원치 않았다. 그렇기에 다가갈 수 없었다.
그랬다간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유이시엘의 앞길을 가로막을지도 몰랐다. 황제가 움직이면 사람들의 시선이 따라붙으니까. 특히 유이시엘은 황비였던 적이 있었기에, 더욱더 세간의 소문에 오르내릴 수 있다.
‘그런 것은 원치 않아.’
이제 겨우 마음을 안정시키고 살아가는 그녀가 아닌가.
살아 있는 동안엔 죽지 않겠다고 했다. 이제 그 마음을 먹었는데 그녀의 주변을 또 시끄럽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겨울의 차가움이 손끝에 스며들었다.
“유이시엘.”
이름을 부르던 그가 눈을 감았다.
너무나도 과거가 그리웠다.
그녀는 이날을 잔인한 날로 기억하겠지. 그럴 것이다.
* * *
늦은 밤을 알리는 듯 별빛이 깊어졌다. 유이시엘은 말없이 방을 나와 마차에 올라탔다. 야간 근무를 하던 호위 기사 한 명이 자청하기에 그를 데리고 공원으로 향했다.
그냥 오늘 그곳이 보고 싶었다.
카드란에게 받았던 목걸이를 착용하고 공원에 가서 옛날의 추억에 잠겨 있을 생각이었다.
벌써 14년 전의 일이지만 그날이 생생히 기억났다. 그때는 카드란과 결혼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행복하게 살 거라고 믿었지.’
류크를 만나기 전이었으니까.
아나키엔의 말에 따르면 류크가 아직도 고통받고 있다고 한다. 물론 동정은 가지 않았다.
“카드란.”
그녀는 황제의 이름을 불렀다. 오랫동안 부르지 못하던 이름이기도 했다.
마차가 멈추고 유이시엘은 호위 기사와 함께 공원을 걸었다.
공원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곱게 자란 나무들. 서성이는 사람들.
14년 전 카드란에게 고백을 받았을 때 그때와 같았다.
분수대 앞에 도착했다. 그런데 거기에 로브를 쓴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아니?”
그는 유이시엘을 보고 놀란 듯했다. 유이시엘 역시 그를 보고 놀랐다.
“유이시엘?”
그가 이름을 불러 왔다.
“폐하를 뵈옵니다.”
유이시엘은 당황했지만 곧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호위 기사는 황제라는 말에 얼른 자리를 비켰다.
“여기서 만나네요.”
유이시엘이 말하자 카드란은 저벅저벅 걸어오며 물었다.
“여기는 무슨 일로……?”
“옛 추억이 생각났어요.”
유이시엘은 잔잔히 웃었다. 옛 추억은 그녀를 여전히 행복하게 해 주었다.
“그렇군.”
그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 궁금한 듯 물었다.
“지금은 평온한가?”
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긴장하는 마음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덕분에요.”
유이시엘은 쓴웃음을 지었다.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그렇군.”
카드란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추억에 잠길 수 있도록 길을 비켜 주려는 듯했다.
“오늘 만나서 좋았다.”
이 말을 남기고 유이시엘의 곁을 지나쳤다. 유이시엘은 그가 떠나는 것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숙였다.
‘카드란.’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슬픔이 끓어올라 울고 싶어졌다. 그래도 여전히 눈물이 나오지 않았지만.
‘아아.’
이제 그를 보고 슬퍼한다. 마치 마음이 조금 자라나고 있는 듯이.
유이시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더 이상 그때의 괴로움은 느끼고 싶지 않은데 이상하게 그를 만나면 감정이 다시 찾아왔다.
‘두려워.’
유이시엘은 숨을 들이켰다.
* * *
저택으로 돌아온 유이시엘은 한숨을 내쉬었다. 공원에서 느꼈던 감정들이 아직도 여운을 남겼다.
“어떻게 되려는 걸까.”
“왜 그리 복잡한 얼굴이야?”
그리고 언제나처럼 갑자기 아나키엔이 나타나 특유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장난스러워 보이는 미소에는 궁금증이 어려 있었다.
“카드란을 만났는데, 슬펐어요.”
“감정이 다시 살아난 건가?”
아나키엔의 물음에 유이시엘은 답을 못 했다. 자신이 봐도 그런 것 같았기에.
“저는 다시 고통을 느껴야 하는 걸까요?”
유이시엘은 아나키엔에게 물었다. 답을 구하는 듯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마치 그녀가 바라는 답을 해 달라는 듯이 말이다.
“어려운 질문이야.”
하지만 아나키엔은 자비로운 남자가 아니다. 유이시엘이 원하는 답을 해 주지 않았다. 그녀를 안심시켜 주는 말 따위 하지 않았다.
“그 질문의 정답은 너의 심장에 있어. 조금 더 생각해 봐.”
유이시엘은 슬픈 미소를 지었다.
“생일 축하해.”
아나키엔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사라졌다.
홀로 남은 유이시엘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그때의 고통을 이제 견딜 자신이 없다.
유이시엘은 속삭이듯 말하고 조금 고개를 숙였다.
오늘 같은 날엔 눈물이 나왔으면 좋겠다.
* * *
레카린과 기첼은 말없이 술을 들이켜고 있었다. 카드란이 혼자서 공원에 간 뒤 둘은 오늘 있었던 연회를 떠올리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폐하께서 아무래도 혼자 사실 것 같다.”
레카린의 말에 기첼이 울컥했다.
“고작 유이시엘 로이체란 때문에!”
“폐하께서 오랫동안 사랑했다고 하는 여자니 어쩔 수 없지.”
레카린은 납득하고 있었다.
“그리고 로이체란이라도 그분은 좀 낫잖아.”
“그렇지만 폐하를 받아 주지 않잖아요!”
기첼이 버럭 소리쳤다.
“고작 로이체란이면서.”
레카린이 그의 어깨를 다독이며 물었다.
“분위기는 어떠냐.”
“다들 유이시엘 님을 비난해요. 아무리 로이체란 가문이 속죄를 한다 해도, 다들 폐하를 받아 주지 않으니 원망하고요.”
기첼은 주저리주저리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레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카드란의 수하들은 로이체란 가문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다. 그렇다 보니 쉽사리 반감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물론 이전보다는 낫긴 하지만.
레카린은 기첼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카드란은 이제 슬슬 후계자를 방계 혈족이나 명문 가문 중에서 알아보겠다고 했다. 그 사실이 알려지면 난리가 날 것이다.
“후우.”
레카린의 눈빛이 냉정히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