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8화 (78/97)

78화

“그럴 필요 없어요.”

“아니, 그래야 해.”

그는 그녀에게 애원했다.

“내가 이기적이야. 내가 조금이라도 편해지려고 이러는 것은 맞아. 그렇지만 이대로 네가 죽는다면 나는 견딜 수가 없어. 그냥 미칠 것 같아. 그리고 이것만이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라서 매달리는 것인지도 몰라.”

그가 눈을 감았다. 눈물이 흘러 나왔다.

“네가 죽어 가는 것을 생각하면 미칠 것 같아. 내가 견뎌서 하루를 더 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위안이 돼. 지금까지 내가 한 짓을 받아들이고 견딜 수 있는 유일한 버팀목이야.”

유이시엘은 건조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너를…… 살리게 해 줘. 이것만은 해 줄 수 있게…….”

“나에게 아무것도 해 주지 않아도 되어요.”

“그러면 내가 견딜 수 없어.”

그의 말에 유이시엘은 속에서 뭔가가 치밀어 오름을 느꼈다. 그가 변하지 않는 것을 보며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이상하게 감정이 새어 나오는 듯했다. 눈물은 나오지 않는데 슬픔이 느껴졌다.

오늘 그가 준 목걸이를 보고 와서 그런가. 과거의 향수에 취해 이러는 걸까.

자조하던 유이시엘은 커피 잔을 내려다보았다. 검고 어두운 액체가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자신은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버틸 수 있을 만큼 버텨 봐요.”

그냥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가 본 사건들은 몇 개 되지 않았다. 자신이 겪었던 일들, 그가 했던 수많은 일들이 앞으로도 많이 남았다.

그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저를 그토록 간절히 살리고 싶다면 이제 죽여 달라고 하지 않을게요.”

유이시엘은 쓴웃음을 지었다.

카드란은 어린 시절부터 누구보다 의지가 강했다. 그가 독하게 마음먹었으니 어지간하면 지키려고 노력할 것이다.

“포기하면 나를 원망해.”

“그것은 힘들어요.”

유이시엘은 단호히 선을 그었다. 그를 원망하는 것은 그에게 희망이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다.

“희망은 저하고 어울리지 않아요.”

유이시엘은 나직이 웃었다. 카드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는 또다시 유이시엘 앞에서 울었다.

* * *

유이시엘이 떠난 뒤 카드란은 그녀가 마시던 커피 잔을 말없이 잡았다. 유이시엘의 온기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유엘.”

그녀는 모르겠지만 조금 달라졌다. 삶을 거부했던 이전과 달랐다. 살리고 싶으면 살리라고 한다. 죽여 달라는 말은 하지 않을 거라고 한다. 작은 변화가 생겼다.

“다행이야.”

그녀를 변화시킬 기회가 와서.

“살릴 거야.”

언젠가 그녀가 살아서 다행이라는 말이 나올 수 있도록. 조금은 삶에 미련을 두도록.

버티는 버팀목이 생겼다.

카드란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홀로 소리 내어 울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이후엔 울지 못했는데 유이시엘을 향한 마음이 너무 아프고, 안타깝고, 미안해서 눌려 있던 수많은 감정이 눈물로 흘러나왔다.

“유엘.”

카드란은 다시 한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 * *

마차를 타고 오며 유이시엘은 말없이 손을 폈다. 그가 타다 준 커피에서 그의 온기가 전해지는 듯했다.

“하아.”

삶에 미련이 없지만 그가 버티는 한 살겠다고 했다.

충동적인 말이었다. 자신에게 미안해하며 슬퍼하는 카드란의 모습에 마음이 흔들린 걸까?

스스로도 답을 알 수 없었기에 유이시엘은 작게 웃었다.

“추억에 미련이 생긴 걸까.”

추억은 과거일 뿐이었다. 거기에 미련을 담으면 허무해질 뿐인데.

유이시엘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카드란은 벼랑에 몰려 있다. 그런 그에게 숨은 쉬게 해 주고 싶어서 그런 것인지도.

그가 어린 시절 주었던 추억 때문에 마음이 약해진 거다.

마차가 헬몬 공작가로 향했다.

그렇게 봄이 끝나고 여름이 지나고 다시 겨울이 찾아왔다.

유이시엘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7. 생일

거리에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었다.

“그 말이 사실이야?”

“그렇다니까.”

“허허.”

“폐하께서 또 혼담을 거절하셨대.”

얼마 전 이웃 나라에서 황제에게 공주와 혼인해 달라는 청이 왔다. 그런데 카드란이 거절한 것이 화제가 되었다. 백성들은 그 사실을 안주 삼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황비마마를 잊지 못한 것 같지?”

“결혼 생활을 끝낸 지가 언젠데 아직까지?”

“그렇긴 하지?”

“그럼!”

다들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은 황제의 탄신일이었다. 폭죽이 터지며 오늘 축제의 시작을 알렸다. 거리에는 황가에서 백성들을 위해 마련한 음료수가 즐비했다. 사람들은 거리를 돌아다니며 춤을 추었다.

로윤 때와 달리 백성을 생각하는 황제를 칭송하며 다들 오늘 그가 누구와 함께 파티장에 나올지 주시하고 있었다.

한편 사람들 속에서 말없이 술잔을 기울이는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살피다 일어섰다.

“이제 돌아가시렵니까?”

옆에 있던 호위 기사가 물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갈 거예요.”

“황궁으로요?”

“아니요, 저택으로요.”

“황궁으로 가셔도 되는데…….”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냉정한 말에 호위 기사는 쓴웃음을 지었다.

마차가 다가와 그녀를 태우고 저택으로 돌아가기 위해 움직였다. 마차 안에서 로브를 벗자 그녀의 청색 머리카락이 살포시 흘러내렸다.

“생일날 다들 축하해 주는 분위기네.”

카드란은 좋은 황제였다. 그러니 다들 그를 칭송하고 파트너에 관심을 가졌다.

유이시엘, 생일 축하해.

그가 보낸 편지를 떠올리며 유이시엘은 고개를 저었다.

기억을 되찾은 그는 자신의 진짜 생일이 오늘인 것을 기억해 냈다.

그리고 그것도 떠올렸을지 모르겠다. 작년 생일날 그가 자신에게 죽기를 바란다고 말한 것을 말이다.

그것을 기억하고 편지를 보낸 것일까.

모르겠다. 이제는 상관없는 일이다.

아니, 상관이 있을까? 아직도 살아 있는 자신을 생각하면 상관이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보낸 편지에 그의 파트너로 휴이를 추천하려다 그만두었다. 그것은 자신이 할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카드란에게 여자를 소개해 주는 것은 그를 죽이는 일일지도 모르기에.

아직 자신에게 미련이 많은 그가 아닌가. 여전히 편지를 꼬박꼬박 보내고 가끔씩 꽃도 주었다.

하지만 유이시엘의 마음은 여전히 황량했다. 돌아오지 않는 마음은 자신도 어쩔 수 없다.

“파트너.”

그래, 카드란도 이제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유이시엘은 그렇게 생각하고 그에게 편지를 더 이상 보내지 말라고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가 자신에게 얽매일 필요가 없었다.

“이렇게 마음먹다가도 못 했지.”

그렇게 답장을 쓰려다가 그만두기를 몇 번인지 모르겠다. 라젤란이 그 일만큼은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었다.

‘사는 게 익숙지가 않아.’

그가 괴로움을 버틴다. 그게 몇 달이 가고 있었다.

유이시엘은 수명이 늘어난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죽을 거라 생각했던 세월을 살아가고 있다는 게 가끔 믿어지지 않았다. 현실감이 없었다.

마차가 멈추고 유이시엘이 내렸다. 라젤란과 지록스, 휴이는 모두 다 카드란의 생일 연회에 갔기에 저택은 한가했다. 호위 기사는 방으로 돌아갔고 유이시엘은 방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코넬을 만났다.

“잘 다녀오셨어요?”

“사람들이 거리에 많았어.”

“황가에서 음료수도 주고 하니, 다들 신이 났어요.”

코넬은 싱긋 웃었다.

“원래 황제의 탄신일에는 이랬었어.”

“맞아요. 저도 어린 시절 그랬던 기억이 나요.”

코넬은 맞장구치며 그녀의 외투를 받아 걸었다.

유이시엘은 의자에 앉았다. 황비 자리에서 물러났어도 성녀가 했던 일들을 여전히 하고 있었다. 다른 이로 대체하려고 했지만 다들 유이시엘이 해 주기를 원했기에 그녀는 살아있는 동안 해 주겠다고 했다.

그렇기에 일을 처리해야 한다.

“생일날은 쉬세요.”

이제 류크도 죽었고, 유이시엘이 더 이상 봄에 생일일 필요가 없다. 그렇다고 티를 내지 않았는데 카드란이 얼마 전 편지와 선물을 보내서 다들 알게 되었다.

‘코넬이 화를 냈지.’

유이시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저랑 차라도 마셔요.”

다들 유이시엘의 생일을 축하해 주고 싶었지만 오늘 카드란의 탄신 연회가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다음으로 미루어야 했다. 유이시엘은 상관없다고 했지만 라젤란은 가족끼리라도 파티를 하자고 했다.

‘좋은 사람들.’

지에렌도 그 파티에 온다고 했는데.

“그런데 생일 파티에 폐하께서도 오시나요?”

유이시엘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는 부르지 않을 거야.”

그래야만 한다. 그가 오는 것은 원치 않았다.

“아쉽네요.”

“왜?”

“그냥, 폐하께서 유이시엘 님께 꼼짝 못 하는 것을 안다면 그런 소문 따위 사라질 테니까요.”

유이시엘이 라젤란 공작가에 있으면서 그녀가 지록스의 애인이 되었다는 소문이 퍼졌다. 유이시엘은 따로 해명하지 않았기에 그 소문은 기정사실이 되는 듯했다.

“떠날 때가 되었어.”

라젤란 공작가에 너무 오래 있었다. 지록스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로이체란 가문으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혼자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자신은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그런데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카드란이 계속 버틴다면 자신은 어떻게 되는 걸까. 그를…… 그때까지 정말로 무시할 수 있을까. 그의 마음을 외면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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