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오늘 참았어?”
아나키엔의 질문에 카드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이시엘에게 일부러 접근하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원치 않은 것 같아서요. 춤을 거절하기도 했고.”
“그래도 유이시엘이 다른 남자와 있는 것은 괴로울 거 아냐.”
아나키엔의 물음에 카드란은 그녀가 느꼈던 감정을 떠올렸다. 세안과 자신이 춤을 추는 것을 바라보고, 씁쓸해하던 그녀의 기억이 그의 심장에 머물렀다.
아아, 자신은 아무런 말도 그녀에게 할 수 없다.
“주제 파악은 합니다.”
카드란은 술잔에 힘을 주었다.
“제가 한 짓 정도는 기억합니다.”
그렇게 말한 뒤 그는 와인을 다시 마셨다. 정신이 몽롱해져도 괴로운 감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포기할래? 유이시엘이 다른 남자에게 가는 것보다 낫잖아.”
아나키엔이 다시 카드란의 어둠을 건드렸다.
“정말로 최악의 경우의 수만 말씀하시는군요.”
“그래?”
“포기는 없습니다.”
굳은 그의 입술을 보는 아나키엔의 눈이 가늘어졌다.
“알았어.”
인간들은 힘들 때 유혹에 잘 넘어온다. 카드란은 힘들지만 자신이 처음 먹은 마음을 지키고 있었다.
카드란은 늦게까지 술을 마시다 잠이 들었다. 그런 카드란을 바라보던 아나키엔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유이시엘에게 가 볼까.”
아마 카드란은 자신이 유이시엘을 만나러 갈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할 것이었다.
* * *
“하룬 님이 고백하셨다고요?”
코넬이 깜짝 놀라서 유이시엘에게 재차 물었다.
“맞아, 그렇게 되었어.”
“수락하신 건가요?”
“거절했어.”
유이시엘의 말에 코넬이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 저는 유이시엘 님이 다른 남자도 만나 봤으면 했거든요. 좋은 분을 만나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고…….”
“그런 건 아직 모르겠어.”
그렇게 말하며 유이시엘은 자신의 처지를 생각했다. 카드란이 포기하면 죽을지도 언제든 모르는 운명이었기에 누군가를 사랑하고 가까이하는 게 허락되지 않았다.
그리고 사랑을 할 마음이 없었다. 이미 다 죽어 버린 마음은 그것을 거부했다.
화장을 다 지운 뒤 코넬이 나가고 유이시엘이 차를 마시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야.”
“오셨어요?”
유이시엘은 성물이 나타나도 놀라지 않았다. 언제나 갑자기 나타나서 자신과 카드란을 휘젓고 가는 그가 아닌가.
아나키엔은 표정이 변하지 않은 유이시엘에게 손을 흔들었다.
“오늘 다른 파트너를 데리고 왔더라.”
“보셨어요?”
“봤지. 잘생겼던데?”
“아무런 일도 없었어요.”
“그럼 재미가 없는데…….”
아나키엔은 그렇게 말한 뒤 와인을 들고 와 유이시엘에게 건넸다.
“와인이라도 마실래?”
“아니요.”
“카드란은 마셨는데.”
“전 그분이 아니에요.”
유이시엘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다 아나키엔에게 시선을 돌렸다.
“폐하께서 최근에 꾼 악몽은 무엇인가요?”
“세안과 카드란이 같이 춤을 추고 너를 무시했었지. 그때 느꼈던 너의 절망.”
“정말이지 타이밍 하나는 잘 맞추시네요.”
“의도한 것도 있고.”
아나키엔은 화사하게 웃었다.
“타이밍이 기가 막혀야 재미있잖아.”
“악취미세요.”
“그래도 포기 안 하더라고.”
아나키엔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자신이 잘못한 것을 알고 그것을 반성한다 말이야. 네가 선택했던 남자, 보통 남자는 아니야.”
“알아요.”
유이시엘은 그를 떠올렸다.
“어머니의 일만 없었더라면 누구보다 올곧았을 남자예요.”
유이시엘의 말에 아나키엔은 그녀에게 속삭였다.
“내가 네가 다른 남자에게 갈 것 같으니 포기하라고 했어. 그가 뭐라고 했을지 궁금하지 않아?”
아나키엔이 눈을 반짝이며 유이시엘의 답변을 기다렸다.
“궁금해해야 하나요? 그의 생각을 제가 알 필요가 있나요?”
하지만 유이시엘은 고개를 기울이다 조용히 웃었다. 쓴웃음을 짓던 그녀가 찻잔을 들었다.
차가 차갑게 식은 것 같다. 마시면서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알 필요가 없잖아요.”
“그런가?”
아나키엔은 유이시엘의 말에도 놀라지 않았다. 그녀가 이런 말을 할 것을 예상한 듯 다가와 속삭였다.
“네가 다음 남자에게 가는 게 괜찮진 않지만 널 살리길 포기하지는 않을 것 같더군.”
아나키엔의 말에 유이시엘은 잠시 생각했다.
카드란은 왜 자신에게 집착할까.
이유를 알고 있지만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제 그녀는 포기하면 편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도 포기하면 마음이 평온해질 텐데.
쓸데없는 집착을 하는 그를 생각하며 유이시엘이 미소를 지었다.
“그는 저를 살리는 것을 포기하기 않을지 모르지만.”
유이시엘은 자신이 모든 것을 놓았던 그때를 떠올렸다.
전쟁터에서 그를 살렸을 때, 그때의 자신을 만난다면 카드란은 뭐라고 할까.
“전쟁터에서의 일을 보여 줘요. 그럼 그가 제 마음을 더 잘 알게 되지 않을까요?”
“그때를 말이야?”
아나키엔은 유이시엘을 응시했다.
“너는 그가 포기하기를 바라는 것 같다.”
“어차피 끝이 정해져 있다면 빨리 정리되는 게 나아요.”
유이시엘의 단호한 말에 아나키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쓸데없는 기대는 희망을 주지.”
유이시엘은 카드란이 고통을 마지막까지 견딜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지 않았다. 가지기를 거부했다.
“알았어. 네가 바라는 대로 해 줄게.”
아나키엔은 그 말을 하고 사라졌다. 파란색 드레스를 벗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유이시엘은 침대로 올라가 누웠다.
폭신폭신한 이불이 그녀의 몸에 닿았다.
오늘도 잠을 자게 된다. 자신은 내일도 일어날까?
만약 마음이 불안정했으면 이런 상황을 견디지 못했을지 모르겠다. 무심하기에 견딜 수 있는 것이지.
만약 자신이 죽는다면 카드란은 어떤 마음일까?
“후회하겠지.”
유이시엘을 잃은 카드란은 자책할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평온하겠지. 그럴 거야.’
유이시엘은 눈을 감았다.
서글픔에 울고 싶은데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것이 그녀의 현실이었다.
* * *
오늘도 세안과 자신이 했던 일이 꿈에 비칠 거라고 생각했다. 카드란은 그렇게 각오하고 잠들었다.
그런데…… 전쟁터에서 유이시엘이 마차를 탔다가 병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유엘, 내가 도대체…….〉
카드란이 그렇게 말했다.
〈나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내가…… 도대체 너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그건 란의 잘못이 아니에요. 내가 잘못한 거예요. 내가 란에게 나쁜 짓을 해서 란이 이렇게 된 거잖아요.〉
〈그렇다고 해서 네가 받은 상처가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 유엘…… 내 기억, 다시 사라져?〉
〈슬프게도, 그럴 거예요.〉
〈난 복수를 할 거야. 예전처럼 유엘과 도망칠 수 없어. 널 버릴 수밖에 없어. 복수의 대상에는 너도 포함되어 있어. 기억을 잃은 내가 잔인하게 굴지도 몰라. 그러니 지금 죽게 내버려 두지 그랬어.〉
〈그래도 란이 없는 세계에선 살 수 없어요.〉
〈유엘.〉
〈오늘 일은 잊으세요.〉
〈……너를 선택하지 못해서 미안해.〉
그 말을 마지막으로 카드란은 기억을 잃었다. 다시 유이시엘을 싫어하는 카드란이 되었다.
그녀에게 서늘함을 쏟아붓는 카드란. 과거의 자신.
유이시엘은 말없이 마음을 내려놓았다. 모든 것이 끝나고 마차 안에서 유이시엘은 작별 인사를 했다.
꿈이 끝났다. 현실로 돌아온 카드란은 눈을 떴다.
“안녕.”
카드란은 그 말을 읊조리며 일어났다. 마차 안에서 말없이 울던 유이시엘이 했던 말이었다.
“하하하.”
그는 웃었다.
그녀를 버린 것은 알고 있었다. 자신은 원수를 갚아야 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선택으로 인해 유이시엘은 과거 자신과의 추억, 그리고 란이란 연인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기억이 돌아오고 나서도 자신은 유이시엘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그녀가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그녀가 무엇을 기대할까?
“모두 다 네가 한 일이야.”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성물이었던 아나키엔, 그는 현재 유이시엘과 가장 가까운 존재였다. 아나키엔이 저벅저벅 걸어와 침대에 상체를 일으킨 카드란에게 속삭였다.
“네가 저지른 일들이 이런 것들이야. 이제 알았지? 유이시엘의 절망은 오래전부터 시작되었어.”
그가 카드란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견딜 수 있겠어? 괴로웠잖아.”
“네, 괴롭습니다.”
카드란은 고개를 숙였다.
유이시엘의 절망에 함몰될 것 같았다. 그녀가 느끼는 거대한 이 감정이 자신을 어둠으로 끌고 가고 있었다.
앞으로 이런 것들을 많이 겪게 되겠지.
“‘지금이라도 포기해 주세요.’ 유이시엘의 전언이야.”
카드란은 주먹을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