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 * *
유이시엘은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는 하룬에게 손을 내밀었다.
“에스코트해야지.”
“아, 죄송합니다.”
하룬은 얼른 정신을 차리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천천히 걸으면서 다시 힐끗 그녀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헛기침하는 그의 볼과 귀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오늘 정말로 아름다우십니다.”
하룬의 말에도 유이시엘은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외견엔 그리 의미를 두지 않았다.
“부끄럽지 않은 파트너가 될 거야.”
“지금으로도 충분합니다.”
하룬은 유이시엘이 같이해 주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함으로 충만해짐을 느꼈다.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폐하와 만나는 게 거북하시지 않습니까?”
하룬의 말에 유이시엘은 카드란을 떠올렸다. 자신을 놓아주고 난 이후로 그와 만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립지도 않았고 딱히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만난다면 어떨까. 아마도 무덤덤하지 않을까?
“괜찮을 거야.”
유이시엘의 말에 뭔가를 생각하던 하룬이 입을 얼어 물었다.
“그분을 사랑하셨습니까?”
“사랑했었어.”
그래, 온몸을 바쳐 사랑했다. 목숨을 걸고서 그를 구하며 마음을 다했다.
“정말로 원 없이.”
마지막 말을 들은 하룬의 눈가에 슬픔이 머물렀다. 사랑했는데 그 상대에게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않게 된 그녀가 안타까웠다.
그리고 자신에겐 기회가 온 것 같았다.
“춤을 춰도 될까요?”
“물론이야. 무도회장의 파트너로 가는 거잖아.”
유이시엘은 흔쾌히 말했다. 하룬이 어떤 눈빛으로 바라보는지 전혀 짐작하지 못한 채, 파트너로서의 의무를 언급했다. 하룬 역시 그 의미를 잘 알고 있었기에 유이시엘에게 깊은 말은 하지 않았다.
마차가 천천히 출발했다.
유이시엘의 귓가에 걸린 화려한 귀걸이가 반짝거렸다. 휴이가 오늘은 꼭 빛나야 한다며 그녀에게 걸어 준 귀걸이였다.
* * *
파티장에는 수많은 이들이 몰려와 있었다. 그들은 담소를 나누면서 황제가 오기를 기다렸다. 반짝이는 샹들리에 아래에서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술잔이 오가고 있었다.
얼마 뒤에 하룬과 유이시엘이 파티장 안으로 들어왔다.
“저분은?”
“아니, 어떻게 전 황비마마와……?”
“하룬이 저분과 나타나다니!”
유이시엘의 등장에 다들 숨을 죽였다. 웨이브 진 청색 머리카락은 찰랑였고, 귀걸이는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파란색 드레스 또한 그녀를 돋보이게 했다. 그렇게 차려입으니 어떤 사람이 와도 그녀의 아름다움을 따라갈 수 없을 듯 보였다.
하룬 역시 꽤 잘생겼지만 유이시엘의 존재감에 묻히고 있었다.
“생각보다 많은 시선을 받는군요.”
하룬은 그렇게 말하며 유이시엘의 손을 잡고 파티장 안으로 들어갔다.
“늘 있는 일인걸.”
“유이시엘 님이 너무 존재감이 커서 그래요.”
“네가 유명해서 그런 거 아닐까?”
“아직 전 상단주가 된 지 얼마 안 된걸요.”
“그러니 더욱더 사람들의 이목을 끌겠지.”
유이시엘은 자신보다 하룬 때문에 사람들이 본다고 생각했다. 하룬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유이시엘은 자신이 얼마나 이목을 끄는지 스스로가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황제 폐하 드십니다.”
얼마 뒤 금색 예장을 입은 카드란이 파티장으로 들어왔다.
* * *
카드란은 무도회장으로 들어왔다. 오늘 만날 하룬에 대한 정보를 곱씹으면서 말이다.
유이시엘이 하룬을 로튼 상단의 양자로 추천한 것을 알았을 때 하룬이 어떤 마음일지 알아챘다.
덕분에 그녀에게 해를 끼칠 것 같지 않다는 판단은 들었지만, 유이시엘의 영향이 그에게 미친 것이 마음에 걸렸다.
하룬의 인생에 유이시엘이 특별한 사람일 것은 분명했기에. 너무나도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면 마음속에 그 사람이 각인되어 버릴 테니 말이다.
그리고 카드란의 예감은 적중했다.
무도회장에 아름답게 차려입은 유이시엘과 하룬이 같이 있었다. 오늘 하룬의 파트너가 유이시엘인 셈이다.
“하룬 로튼인가?”
카드란은 유이시엘의 곁을 차지하고 있는 하룬에게 먼저 다가갔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치 운명이 유이시엘을 하룬이 차지할 거라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폐하를 뵈옵니다.”
하룬은 간단히 고개를 숙인 뒤 유이시엘 곁에 섰다. 유이시엘은 하룬이 가까이 가도 별다른 거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다정한 눈으로 하룬을 봤다.
“오랜만이군.”
유이시엘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가 이내 끄덕였다.
“그러게요. 그날 이후로 처음이니까요.”
하룬을 바라볼 때와 다르게 제게는 건조한 눈빛을 보내니 마음이 아팠다. 카드란은 욱신거리는 가슴을 누르고 유이시엘에게 웃으면서 말했다.
“조금 뒤에 춤이라도 출 텐가?”
“아니요, 오늘 전 하룬의 파트너예요. 그와 춰야 해요.”
유이시엘은 카드란의 청을 거절하고 하룬과 같이 웃으면서 구석으로 걸어갔다.
무슨 말을 하고 있을까. 무엇이 그렇게 즐겁기에 유이시엘이 웃고 있는 것일까.
자신의 곁이 아닌 곳에서 환하게 웃는 그녀를 바라보는 것은 생각보다 괴로운 일이었다.
당장이라도 하룬의 곁에서 유이시엘을 떼어 내고 싶다. 마음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애써 눌렀다. 그는 얼른 이를 악물었다.
유이시엘은 하룬과 이야기하다 카드란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는 곧 냉정한 얼굴로 하룬과 함께 무도회장을 나갔다. 다른 곳으로 향하는 것 같았다.
“폐하.”
오늘 이 자리를 기획한 슈렌이 자신을 불렀다. 카드란은 그에게 시선을 돌린 뒤 굳은 표정을 풀었다.
“알고 있다.”
유이시엘을 따라갈 수 없다. 황제라는 직책이 그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남자로서 끓어오르는 마음을 죽여야 했다.
유이시엘이 자신의 마음을 언제나 죽였던 것처럼 말이다.
* * *
유이시엘은 정원으로 나와 하룬에게 웃으면서 말했다.
“여긴 내가 자주 오던 곳이야. 이곳을 보고 싶다고 했지?”
유이시엘의 말에 하룬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식물을 기르는 것을 좋아하는 그녀답게 꽃들이 많은 정원이었다.
어둠이 가라앉은 곳에서 유이시엘은 말없이 꽃들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것들을 바라보면 옛 추억이 떠올랐다. 카드란과 함께 행복했던 추억도 함께였다.
다만 현재의 그와 과거의 그를 분리하고 있기에 현재의 그는 떠오르지 않았다.
잠시 추억을 되새기던 유이시엘은 하룬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가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열기가 담긴 눈빛이었기에 유이시엘은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오래전 자신이 카드란을 바라보던, 카드란이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이었기에 익숙했다.
“하룬, 왜 그런 눈으로 나를 보는 거야?”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하룬은 고개를 숙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당신을 사랑해도 되겠습니까?”
가지고 있던 감정을 토해 내며 그가 물었다. 유이시엘은 쓴웃음을 지었다.
“미안해. 나는 누군가를 사랑하기엔 이미 늦었어.”
“유이시엘 님.”
“그냥, 이대로 평온하게 있고 싶어. 나를 사랑한다면 그냥 이대로 나를 두었으면 해.”
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하룬은 마음이 아팠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단칼에 자를 줄은 몰랐다.
“폐하 때문입니까? 그분을 아직도 사랑하는 건……?”
“그건 아니야.”
이미 그는 옛사랑일 뿐이다. 아름다운 추억은 미소 짓게 해 주지만 그렇다고 마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은 아니었다.
과거의 추억이 망가졌다고 소리치는 그를 바라본 이후 마음을 완전히 놓았다. 그 마음이 다시 살아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유이시엘은 손을 뻗어 하룬의 손을 잡았다.
“미안해.”
그녀는 그의 마음에 응답을 해 줄 수 없다.
그렇게 말한 그녀는 하룬의 손등에 입을 맞춰 주었다.
“너의 앞날에 축복이 있기를.”
“유이시엘 님.”
“파트너는 오늘만 해 줄게.”
하룬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이 아팠지만 씁쓸해 보이는 그녀에게 자신의 마음을 강요할 수가 없었다. 그저 손등에 닿은 그녀의 입술을 평생 추억으로 간직하며 살아가기로 했다.
* * *
파티장으로 돌아온 유이시엘이 하룬과 춤을 추었다. 펄럭이며 움직이는 치맛자락이 그녀의 모습을 가렸다가 치맛자락이 내려가면 그녀가 다시 보였다.
카드란은 와인을 마시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유이시엘이 춤을 추지 않겠다고 했기에 그녀에게 접근하지 못해 말없이 와인을 마시고 파티를 끝냈다.
집무실로 돌아온 그는 창문으로 걸어갔다.
오늘 파티가 끝나고도 유이시엘은 그 남자와 같이 있는 것일까. 그녀의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와인을 같이 마셔 줄까?”
소리가 들렸다. 카드란은 몸을 돌려 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휙휙 말고 있는 아나키엔이 보였다.
“저를 비웃으러 오신 겁니까?”
“아니, 그런 건 아니야.”
아나키엔은 싱긋 웃었다. 올라간 입꼬리에 알 수 없는 감정이 머물러 있었다. 카드란은 그의 감정을 알기 위해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그의 생각을 읽는 건 여전히 불가능했다.
“그냥 불쌍해 보여서.”
“제가 불쌍합니까?”
“네가 그냥 괴로워하는 게 당연한데. 그래도 오늘은 좀 불쌍해 보여.”
아나키엔은 그렇게 말한 뒤 작은 선반 위에 놓인 와인을 꺼냈다. 마개를 열고 잔에 와인을 부어 카드란에게 건넸다. 카드란은 잔을 바라보다 한 모금 마셨다.
오랜만에 마시는 술이 그의 목을 자극했다.
정신이 몽롱해질 것 같았다. 파티장에서 많이 마셔서 그런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