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4화 (74/97)

74화

그것을 받아 들며 카드란이 중얼거렸다.

“어차피 황궁 연회에서 보게 될 남자니 미리 알아 둬서 나쁠 것은 없지.”

“황궁에서 조사해도 되잖아요?”

“……유이시엘이 알지 않았으면 한다.”

“저런.”

세안은 피식 웃었다. 유이시엘을 괴롭힐 때도 그녀에게 집착하더라니, 결국 예상한 대로 일이 돌아가고 있었다.

“폐하께서는 유이시엘 님을 강제로 황후로 만드시지는 않네요.”

세안은 줄곧 궁금한 것을 물었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카드란은 유이시엘을 사랑한다. 그리고 그녀를 놓아주었지만 마음은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하면 그녀는 나를 상대조차 하지 않을 거다. 지금보다 사이가 최악이 되겠지.”

카드란은 그렇게 말하고 어젯밤 꾸었던 꿈을 떠올렸다.

유이시엘이 홀로 밤을 지새우던 꿈이었다. 자신은 정부와 같이 있었고 그녀 방에서 성물과 이야기했다. 그러다 혼자가 되었을 때 느꼈던 씁쓸함과 체념이 밀려들어 왔다.

그녀에게 그런 감정을 느끼게 한 자신이 무슨 자격으로 황후 이야기를 꺼낸단 말인가.

“일단 하룬이 유이시엘에게 무슨 의도로 접근했는지 알아야 해.”

“알겠어요.”

세안은 그동안 하룬에 대해 조사한 것들을 카드란에게 넘겨주었다.

카드란은 서류를 살피며 그가 어린 시절 유이시엘에게 도움받았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렇다면 그 남자에게는 유이시엘이 무척이나 특별한 의미일 것이다.

유이시엘이 그에게 마음이 없다 해도 상대방은 아닐 수 있다.

어떻게 될까.

불안함이 마음속에 스며들었다. 이번 연회 때 무슨 일이 생길 듯했다.

* * *

“어떤 드레스가 좋을까요? 하늘색 드레스가 유이시엘 님하고 잘 어울리실 텐데!”

휴이는 신이 나서 드레스 책자를 들여다보며 재잘거렸다. 그러자 코넬이 옆에서 맞장구 쳤다.

“맞아요. 유이시엘 님은 하늘색이 특히 잘 어울려요!”

코넬도 책자를 바라보며 한 장 한 장 넘겼다.

코넬과 휴이는 유이시엘이 황궁 무도회에 하룬과 같이 참석한다는 말을 듣고 눈을 반짝이며 입고 갈 드레스를 고르고 있었다.

유이시엘은 조금 곤란했다. 물론 초라하게 입고 갈 생각은 아니었지만, 드레스 때문에 고심할 생각은 없었다.

하룬과 그냥 파트너가 되는 것뿐인데.

“별다른 무도회도 아닌데…….”

“아니에요! 폐하께 우리 유이시엘 님도 다른 남자와 같이 다닐 수 있다는 걸 보여 줄 회란 말이에요.”

코넬은 여전히 카드란을 싫어했다. 자신과 유이시엘을 떼어 놓은 것도 마음에 두고 있었다. 휴이 역시 공감했다.

“폐하께서 충격을 받았으면 하는 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그렇게 괴롭혔으니, 당하실 때도 되었어요.”

휴이는 흥얼거리며 드레스를 최종적으로 골랐다. 가슴골이 파이고 허리가 조인, 유이시엘이 평소 입지 않는 드레스 스타일이었다.

“이런 것은…….”

“요즘 유행하는 거예요.”

휴이는 이것을 강력 추천했다.

그렇게 유이시엘의 드레스가 결정되었고 연회 날이 다가왔다.

* * *

유이시엘의 시선이 카드란을 향했다. 행복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세안과 춤을 추는 것을 본 그녀의 마음은 슬펐지만 체념했다. 결혼식장에 정부를 데려온 남편에게 소리 한 번 지르지 않고 상처받은 마음을 안고 돌아섰다. 눈물이 나지 않았지만 슬픔은 가슴에 머물렀다.

숨이 막힐 듯한 고통이 그녀의 마음을 옥죄었다. 하지만 이미 익숙한 감정들이었기에 유이시엘은 말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세안과 비교되는 초라한 드레스를 내려 주었어도 웃으며 넘겼다. 하지만 괜찮은 것은 아니었다. 이미 마음이 많이 죽었기에 어지간한 상처는 느낄 수 없었을 뿐이다.

그런 꿈을 꾸다 눈을 뜬 카드란은 숨을 몰아쉬었다.

꿈속에서 자신은 너무나도 잔인했다. 마음을 짓밟은 것으로 모자라 상대방이 무심해 질 수밖에 없도록 몰아갔다.

슬픔이 말라붙은 그녀의 마음에 상처를 남겼다. 상처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무심해져야만 했던 그녀를 생각하며 카드란은 가슴을 부여잡았다.

심장 한구석이 아파 죽을 것 같았다.

“유이시엘.”

유이시엘은 그를 원망하지 않았다. 그만큼 자신에게 아무런 기대치가 없었다는 게 충격적이었다.

“도대체 나는…….”

유이시엘을 몰아세웠던 것은 인정한다. 그녀의 마음이 아파서 무심해지고, 결국에는 자신까지 놓아 버렸다. 마음이 죽은 것을 알고 이번 일을 감행하기로 했지만 자신이 행한 일을 마주하는 것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힘든 일이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

“그럼 그냥 도망쳐.”

말의 내용과 달리 명랑한 소리가 들렸다. 카드란은 가운을 입은 채로 일어나, 소파에 앉아서 손을 흔들고 있는 아나키엔에게 걸어갔다.

“인정하지 말고 포기하면 돼.”

아나키엔이 나직이 웃었다.

“이건 초반부야. 유이시엘에게 복수를 하겠다고 마음먹고 난 뒤 일어났던 수많은 일들의 앞부분일 뿐이지.”

이제 카드란은 천천히 자신이 했던 미친 짓들을 하나씩 유이시엘의 입장에서 겪게 될 것이다.

“포기할 거면 지금 포기해. 유이시엘은 그런다 해도 너를 원망하지 않아. 그리고 네가 견딘다고 해서 그녀가 돌아온다는 보장도 없어.”

아나키엔의 말은 잔인하지만 달콤하기도 했다.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으니 계속 이런 고생을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고대에 그런 존재가 있었다고 합니다.”

“어떤 존재?”

“말로 사람을 현혹하는 존재, 말입니다.”

“아아, 그런 것들이 있었지. 인간의 마음을 자극해서 그들이 무너지는 것을 즐겼지.”

“당신이 그런 것 같습니다.”

카드란은 그렇게 말한 뒤 커피를 찾았다. 술을 마시지 않은 지도 오래되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그런 놈이었다고 인정하기 힘듭니다. 그토록 찾고 싶었던 그녀에게 그 짓을 했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건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하지만 하기 싫은 것과 하지 않는 것은 다르죠. 인정은 오래전에 했습니다.”

카드란은 쓴웃음을 지었다.

“유이시엘에게 한 짓이 옳은 일이 아니고, 부당한 일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도망치고 싶지만 도망칠 수 없습니다.”

“그래?”

“네, 여기서 도망쳐 버리면 완전히 끝납니다. 더 이상의 기회는 없습니다.”

카드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도 사람이라, 저의 못난 점을 인정하기 싫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말을 했다만…….”

그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당신의 말을 들으니 더 못된 놈이 될 뻔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카드란.”

“감사합니다. 덕분에 다시 정신을 차렸습니다.”

유이시엘은 이 모든 것을 견뎠다. 견디고 버티다 마음이 저렇게 되어 버렸다. 그 지경이 될 때까지 입을 다물었다.

그렇기에 자신 역시 포기할 수 없었다. 유이시엘이 마음이 조금 풀려 살아 있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버텨야 했다.

그것이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 * *

파란색 드레스가 조명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드레스에 박힌 보석들이 내는 빛이 그녀의 외모를 한층 돋보이게 했다.

서글서글한 눈동자를 아름답게 해 주는 색조 화장이 눈에 들어왔다. 유이시엘은 거울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렇게 힘을 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는 되어야죠.”

휴이는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헬몬 공작가의 시녀들을 총동원해서 꾸민 보람이 있다고 해야 할까. 휴이는 유이시엘을 향해 나직이 말했다.

“다들 유이시엘 님을 볼 거예요. 유이시엘 님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힐 것이고요.”

유이시엘은 휴이가 왜 이렇게 자신을 꾸며 주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코넬하고 착 달라붙어서 열심히 옷을 고르고 시녀들까지 데려와 꾸미고.

“이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어요.”

휴이는 유이시엘의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었다. 하녀들이 해도 될 일을 자신이 하면서 아끼는 핀을 유이시엘 머리에 꽂아 주었다.

“유이시엘 님이 어떤 분인지 보여 주셔야죠. 그래야 다들 황제가 유이시엘 님을 놓아준 게 아니라, 유이시엘 님이 황제 폐하를 거절한 것임을 알죠.”

그러고 보니 세간에 황제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 돌기도 했다. 그 소문을 듣고 휴이가 화를 냈었다.

“고마워요.”

유이시엘의 말에 휴이가 웃었다. 화사한 미소가 그녀와 잘 어울렸다.

“그럼 잘 다녀오세요.”

이번 무도회는 제국의 상단을 운영하는 이들이 모인 자리였다. 그곳에 새로운 로튼 상단의 주인인 하룬이 가는 것은 당연했다.

딱히 대단한 파티는 아니었기에 유이시엘 역시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코넬과 함께 나간 뒤 휴이는 히죽 웃었다.

“폐하께서 속앓이를 하시겠어.”

사랑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와 나타난 것에 충격을 받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차라리 잘됐다. 유이시엘이 겪은 일을 생각하면 황제 역시 마음고생을 좀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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