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3화 (73/97)

73화

세안과 춤을 추던 카드란이 떠올랐다.

그때는 다른 여자와 춤을 추는 그를 보며 슬펐지만 지금은 아무렇지 않았다. 이미 과거의 일이 되어 버렸기에 그런 걸까.

“쓸데없는 짓은 하지 않았으면 하는데.”

카드란이 자신에게 사과 편지를 보낼지도 몰랐다. 그런 것들은 도리어 불편했다.

“유이시엘 님, 하룬 로튼 님이 도착하셨어요.”

아나키엔이 사라지고 나면 항상 사람이 들어온다. 유이시엘은 의자에서 일어나 머리카락을 틀어 올렸다.

하룬은 10년 전 로튼 상단주의 아들로 입양되었다. 거기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치고 있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그는 입양될 당시 자신에게 편지를 쓰고 싶다고 했지만 유이시엘은 거절했다. 그가 입양된 집에서 금방 적응하기 바라는 마음에 입양된 아이들에게 편지를 받는 것은 스스로 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보육원에서 다른 곳으로 입양된 아이들이 무척이나 많았고, 그런 아이들을 모두 다 상대할 수 없었기에 그녀 스스로가 정한 선이었다.

그렇지만 이제 하룬은 더 이상 보육원의 어린 소년이 아니었다. 적응이 필요한 아이도 아니었고 상단의 어엿한 주인이었다.

대체 무슨 볼일이 있어 자신을 만나겠다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만남을 거절할 수 없었다.

유이시엘은 복도를 걸으며 과거를 회상했다. 하룬은 갈색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단정한 소년이었다.

그 모습 그대로 자랐을까?

응접실 문이 열리고 그 안에 있던 한 남자가 일어났다. 큰 키에 잘생긴 남자가 있었다. 머리에 쓴 모자를 벗은 그는 다정히 웃으며 유이시엘에게 인사했다.

“성녀님.”

유이시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 난 성녀가 아니야.”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 고민하다가 성녀님이라고 부른 겁니다.”

하룬은 그럴 것이다. 그녀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이름을 불러.”

“유이시엘 님.”

“듣기 좋네.”

성녀가 아닌 자신은 유이시엘일 뿐이다. 황비도 아니고 성녀도 아닌 그냥 자신. 어색하지만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었다.

“무슨 일로 온 거야?”

유이시엘은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사무적인 태도에 하룬이 준비한 듯 말을 건넸다.

“헬몬 공작가와 자주 거래해서, 그 김에 얼굴을 뵙고 싶어 왔습니다.”

“왜?”

“그거야…… 어린 시절 성녀님을 따랐던 기억이 나서요.”

그는 조용조용히 말했다. 나긋한 그의 목소리가 듣기 무척 좋았다.

잠시 후 코넬이 찻잔을 들고 왔다. 그녀가 타 온 차를 마시며 유이시엘은 하룬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손가락을 계속 움직이던 하룬이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긴장했어?”

“많이 긴장했습니다. 10년 만에 유이시엘 님을 만나는 거라 그런지, 말이 제대로 나오지도 않네요.”

하룬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고개를 돌려 숨을 내쉬었다. 그의 어색한 표정에 유이시엘은 싱긋 웃었다.

“괜찮아. 나도 어색해서 긴장하고 있어.”

친동생 같은 아이였다. 나이 차이도 별로 나지 않아 유난히 아꼈던 하룬. 그가 어엿한 성년이 되어 나타나니 기분이 새로웠다.

“보육원 자선 모금은 잘됩니까?”

하룬이 최근에 있었던 일을 물었다.

“그럭저럭, 잘되고 있어.”

“저도 기부하고 싶습니다.”

“얼마나?”

“필요한 만큼요.”

하룬은 로튼 상단의 가주였다. 그가 굴릴 수 있는 돈은 액수 자체가 달랐다.

그에 유이시엘이 하룬에게 선뜻 제안했다.

“보육원에 가 볼래?”

일단은 그도 보육원 사정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하룬이 기쁘다는 듯 웃었다.

“좋습니다.”

그렇게 그녀는 하룬과 보육원으로 출발했다.

* * *

유이시엘이 하룬을 만난 것은 성녀가 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누구보다 똑똑했던 하룬을 인상 깊게 본 그녀는 양아들을 원하는 상단주에게 하룬을 추천했다. 그랬기에 하룬이 고마워서 자신을 찾아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보육원에 도착한 듯 마차가 멈추었다. 하룬이 먼저 내리고 유이시엘이 그 뒤를 따랐다. 그녀가 황제가 아닌 다른 남자와 내리자 다들 시선을 집중했다. 하룬의 단정한 외모에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분은 로튼 상단의……?”

“그럼 하룬 로튼 님이신가?”

“유시시엘 님의 추천으로 양자로 들였다고 하던데?”

웅성거리는 소리에도 유이시엘은 신경 끄고 하룬을 안내했다. 하룬은 이전보다 조금 나아진 보육원 사정을 보면서 감탄했다.

로윤의 통치 아래 보육원 지원 예산이 많이 줄었다고 했다. 그때 유이시엘이 어떻게든 자금을 마련해 보육원을 유지했다는 말은 들었다.

그녀는 상냥하고 올곧고 능력이 있다. 그런 여자였기에, 마음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잠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손을 들었다가 내렸다. 그녀의 머리카락에 닿고 싶었지만 일단은 참아야 했다.

자신에게는 아직 허락되지 않은 일이었다.

* * *

유이시엘이 하룬과 같이 보육원에 나타난 일은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았다. 황제의 여자였기에 그 행동의 파장은 컸다.

“유이시엘이 다른 남자와 보육원에 갔다고?”

카드란은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다소 놀랐다. 그녀를 놓아주자마자 접근하는 남자가 생기다니.

“하룬 로튼이라 합니다.”

기첼의 보고에 카드란은 미간을 찌푸렸다.

황실 보육원 출신인데 로튼 상단주의 양자로 들어가 후계자가 된 남자였다. 로튼 상단은 규모가 컸기에 제국에서도 주시하고 있던 차였다.

“보육원 일로 온 것 같더군요.”

기첼의 말을 들으며 카드란은 손가락을 책상에 무겁게 두드렸다.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당장 행동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별일 아닐 것이다. 유이시엘에게 보육원 출신의 아이들이 종종 찾아오는 일이 없진 않았으니까.”

애써 평정을 유지하고 있지만 쉽지 않았다. 자신에게 마음이 없는 그녀였기에 불안함이 훅 치고 올라왔다.

어떻게 해야 할까…….

기첼이 나가고 카드란은 가만히 커피 잔을 바라보았다.

혹시 유이시엘에게 불순한 마음으로 접근한 것이 아닐까? 그녀를 이용하기 위해서?

“세안을 만나야겠군.”

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무척이나 썼다.

* * *

보육원을 둘러본 하룬은 며칠 뒤 헬몬 공작가를 찾아와 유이시엘에게 보육원 경비를 다 댈 테니 필요한 게 어느 정도 되는지 물었다.

“그럴 필요 없어. 무도회에서 모인 돈도 꽤 되는걸.”

“그것들은 다른 용도로 사용하면 되지 않나요?”

하룬의 말에 유이시엘은 대답을 망설였다. 사실 돈이 있으면 보육원에 사용할 곳은 많다. 돈이야 늘 넉넉한 게 낫다.

그렇지만 하룬에게 너무 많이 지원받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후원금을 내면 유이시엘 님이 관리하십니까?”

“응, 내가 어디에 쓸지 결정해.”

“그럼 더욱더 신뢰가 가지요.”

하룬의 말에 유이시엘은 조금 웃었다. 카드란 역시 자신을 괴롭혔을 때, 일에서 틈을 찾으려고 했지만 그런 것은 없었다.

그만큼 사사로운 감정을 배제하고 완벽하게 일을 처리하려 노력했다. 하룬은 그것을 알기에 자신을 신뢰하고 있었다.

다시금 카드란을 떠올린 유이시엘은 작게 중얼거렸다.

“부럽다.”

“뭐가 말인가요?”

“누군가를 믿을 수 있다는 건 대단한 거야.”

이제 자신은 카드란을 믿지 않았다. 그에 대한 기대도, 마음도 없었다. 그렇기에 죽은 거나 다름없는 삶인데, 하룬이 자신을 믿고 기부를 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나를 믿고 기부하지 말고, 서류만 믿도록 해.”

자신이 죽고 나면 그 뒤의 사람이 일을 처리할 것이다. 그 전에 일이 잘 돌아가도록 완벽하게 조치해야겠지만, 그래도 어디서 잘못될지 모를 일이었다.

유이시엘의 말에 하룬이 싱긋 웃었다.

“유이시엘 님이 맡지 않을 수도 있다는 듯이 말씀하시는군요.”

“세상일은 모르니까.”

“아, 하긴. 지금의 폐하께서 황제가 될 거라고 누가 예상했을까요.”

하룬은 이따금 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먼발치에서 보았던 카드란을 떠올렸다. 짧은 금발 머리카락에 서늘한 인상을 가진 황자는 언제나 죽음에 쫓기고 있었다. 류크가 그토록 죽이고 싶어 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데 류크가 죽고 카드란은 살아남았다. 카드란이 로이체란 가문에 벌을 내렸고, 로이체란 가문은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과거에는 절대로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유이시엘의 이야기에서 그녀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무엇이든 확실하지 않으면 정확히 이야기하지 않는 그녀가 아닌가. 지나치게 조심하는 것 같지만 그만큼 그녀가 확신하는 말에는 신뢰가 있었다.

하룬은 살며시 웃음 지으며 말했다.

“저의 후원금이 부담스럽다면 저의 고민 하나 들어주시면 어떠십니까?”

하룬의 말에 유이시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이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이 있을까?

“무도회장에 가야 하는데, 저의 파트너가 되어 주십시오.”

“무도회장?”

“네, 황실에서 여는 파티에 참석하려고요.”

유이시엘은 잠시 망설였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하룬이 파트너가 없다는 게 의아하긴 했지만 별달리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도리어 이번 일이 좋은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카드란을 단념시키는 계기가.

* * *

세안은 오랜만에 만나는 카드란을 보고 웃었다. 여전히 그는 잘생겼지만 냉정한 기운을 풍겼다. 자신에게 속삭였던 달콤한 말들은 모두 다 거짓이란 사실을 알았지만, 연기하지 않는 그를 마주고 있자니 카드란이 어떤 사람인지 확실히 상기할 수 있었다.

“무슨 일로 온 건가요?”

세안의 질문에 카드란은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의뢰를 하러 왔다.”

“하룬에 대한 조사인가요?”

그녀는 카드란이 온 용건을 정확히 짐작했다.

“조사한 자료가 있나?”

“여기저기에서 주문이 들어오고 있었어요. 그렇지만 전 황비마마와 특별한 사이는 아닌 거 같아요.”

이미 발 빠른 이들은 의뢰를 하고 있었다. 카드란은 자신이 너무 늦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유이시엘 주변에 사람을 심는 짓은 못 한다. 그녀를 감시하는 것은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니 말이다.

“그냥 그자에 대해 뭐든 알고 싶다.”

카드란의 말에 세안이 싱긋 웃으며 정리한 것들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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