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화 (68/97)

68화

* * *

유이시엘과 카드란은 말을 같이 타고 가고 있었다. 천천히 말을 모는 카드란의 시선이 유이시엘의 뒤통수에 닿았다.

“유이시엘.”

카드란의 질문에 유이시엘이 말했다.

“말씀하세요.”

“살면서 짐을 많이 원망했나?”

유이시엘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은 어땠을까. 자신에게 버림받은 그녀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자신을 원망하지 않았을까.

그런 감정들이 넘쳐흘렀다.

“아니요.”

그런데 유이시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원망한 적 없어요.”

그저 내려놓았을 뿐.

“과거를 보고 도망쳐도 이해할게요.”

유이시엘이 나직이 말했다.

어쩌면 자신은 그가 도망치기를 바라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냥 그에게 희망을 가지는 것을 포기하고 싶었기에, 아픔에서 벗어나고 싶었기에 그러는 것 같았다.

“도망치지 않는다.”

카드란은 그리 말하고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유엘, 살아.”

그토록 부르고 싶은 이름, 유엘.

언젠가 그녀를 이 이름으로 자연스럽게 부르고 싶었다.

* * *

아나키엔은 거대한 동굴 앞에 섰다. 그리고 곧바로 드래곤으로 변신했다.

“얼마 만에 봉인이 풀린 건지.”

그는 키득이며 류크를 떠올렸다.

“그곳에 이번 황제는 못 들어가는군.”

황제가 성녀를 억지로 만들면 죽을 때 영혼이 류크가 떨어진 곳으로 가게 된다. 인간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했기에 아나키엔이 영혼을 수집할 수 있는 것이었다.

아나키엔은 그들에게 그렇게 고통을 주었다.

처음 성녀를 만드는 방법을 알려 주었을 때 황제들은 거부했다. 그렇지만 계속 속삭이자 하겠다고 해 버렸고 나중엔 그게 추악한 전통이 되었다. 그런데 카드란은 진짜로 하지 않았다.

“으흠.”

사실 그냥 생명력을 줄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러면 그들의 사이는 어떻게 될까.

둘 다, 안타까운 인연인데.

“얼마나 버티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유이시엘의 고통을 카드란이 못 버틸지도 모른다. 그러면 끝나는 것이다. 보통은 그렇게 된다. 타인의 고통을 그대로 느낀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니까.

그런데 만약 정말로 오래 견딘다면?

아나키엔은 피식 웃었다.

“어디 한번 해 봐라, 카드란.”

유이시엘의 마음이 너무 죽었다. 아마도 생명력을 그냥 주었다면 유이시엘은 남은 생을 텅 빈 껍데기로 살아야 했을지 모른다.

이제 죽을 수 없으니 자살도 못 하고.

사실 자살하는 결말은 아나키엔 역시 바라지 않았다.

“행운이 그대에게 있을지 모르니.”

아나키엔은 읊조리며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5. 황비 자리에서 물러나다

따사로운 아침 햇살에 눈을 뜬 그녀는 일어나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어제와 똑같은 아침이었기에 별다른 일이 없었지만 그녀에게는 큰일이었다.

하루가 시작된다는 것은 또 하루를 살아야 한다는 것이기에.

카드란이 악몽을 꾸기 시작한 지 보름이 지났다. 그는 자신을 찾아오지 않고 편지와 사람을 통해 해야 할 일들을 챙겼다.

성물이 부서졌을 때 거대한 빛줄기가 생겼다고 한다.

성물은 너그러운 황제가 성녀를 해방해 준 덕에 성녀가 더 이상 황가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지만, 앞으로 자신이 자유로운 몸으로 성녀 없이 황가를 수호하겠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성물이 더 이상 성녀가 필요하지 않다고 세상에 알린 것이었다.

“황비마마, 아침입니다.”

누엘과 코넬이 들어와 자신을 맞이했다.

“날씨가 무척이나 화창해요.”

코넬이 웃으면서 창문을 활짝 열었다. 열린 창문으로 바람이 불어와 유이시엘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어제와 같이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인 듯했다.

어제 카드란은 무엇을 봤을까. 그는 자신의 과거의 어디에 가 있을까. 궁금하긴 했지만 묻고 싶지 않았다.

“오늘 일정은 무엇이지?”

“보육원에 가서 아이들을 돌보는 것입니다.”

코넬이 황제가 정리한 것들을 보고 읽어 주었다. 이전에 유이시엘이 하던 일들이었기에 씻고 보육원에 갈 준비를 했다.

* * *

〈배가 고파요.〉

〈이거나 알아서 처먹어!〉

바닥에 떨어진 빵이 보였다. 유이시엘은 그것을 먹으려고 얼른 걸어가 주웠다. 며칠 만에 돌아온 어머니는 어딘가 공허해 보였다.

지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노려보다 방으로 들어갔고, 유이시엘은 홀로 남아서 빵을 먹었다.

던져 준 빵은 맛이 없었지만 그래도 먹어야 산다는 것은 어린 나이지만 알고 있었다.

어머니의 무관심은 이제 익숙해졌다. 그저 뭐든 먹어서 허기를 달랠 수 있으면 되었다. 어머니에게 애정을 달라고 할 생각조차 없었다.

빵을 다 먹어도 허기가 졌다. 하지만 좀 더 달라고 하면 혼날 것을 알기에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유이시엘은 천천히 방으로 들어갔다.

“헉!”

카드란이 일어났다.

어린 시절 유이시엘이 지나가는 말로 어머니가 사랑을 주지 않았다고 한 적이 있다.

그때는 그냥 힘들었겠다며 안타까워했을 뿐인데…….

그는 두 팔로 팔짱을 꼈다. 떨림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도대체 무슨…….”

삶이 지긋지긋하다고 말했던 그녀가 떠오른다.

“유이시엘.”

“별로 좋은 기억은 아니지?”

그리고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카드란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 아나키엔이 서 있었다.

“왜 들어온 겁니까?”

“나야 너를 수호해야 하잖아.”

아나키엔의 말에 카드란은 어이가 살짝 없었다. 보나 마나 속을 긁으려고 온 것이었다.

“유이시엘이 왜 너를 맹목적으로 봐라봤는지, 그것부터 시작해야지. 그래야 그녀의 마음을 좀 더 공감하게 될 테니 말이야.”

아나키엔은 싱긋 웃었다.

“그래야 마지막에 절망해서 포기하지.”

“포기 안 할 겁니다.”

아나키엔에게 쏘아붙이듯 말을 한 뒤에 카드란은 잠시 커피를 찾았다. 빈속에 커피를 마시지 말라고 슈렌이 뭐라고 했지만 커피가 필요했다. 손이 바르르 떨리는 탓에 쓴 것을 마시고서 정신을 차리고 싶었다.

“너는 어린 시절 그런 불행한 경험을 한 적이 없잖아. 하지만 유이시엘에겐 그게 일상이었어.”

카드란은 창가로 가서 잠시 숨을 몰아쉬었다.

오늘 꿈에서 유이시엘의 나이는 대략 5살로 보였지만, 간간이 거울에 비친 모습은 그 나이 때라고 생각하기에도 무척이나 체구가 작아 보였다.

꿈이 아닌 그의 기억 속에도 유이시엘은 자신보다 작고 말랐었다. 그것이 그냥 어린 시절이기에 그렇다고만 여겼었는데, 그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녀가 배고프다고 했을 때 어머니가 안타까워하며 식사를 챙겨 준 이유가 이것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 풍족하지는 않아도 어머니의 보호 속에 행복하게 살았다. 그런데 유이시엘은 아니었다.

“내일은 아마도 너를 만나게 될 거야.”

“예고 안 해도 됩니다.”

“각오하라고.”

아나키엔은 그 말을 하고 사라졌다. 카드란은 한숨을 내쉬고 아침 샤워를 하러 갔다. 욕조에 들어가 생각을 잠긴 그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며칠 동안 아무도 오지 않는 공간에 유이시엘은 홀로 있었다.

누구도 함께해 주지 않는 어둠, 그 속에 유이시엘은 익숙하다는 듯 멍하니 있었다. 공허한 세계에 그녀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얼마나 외로웠을까.

카드란은 눈을 감았다.

어린 시절을 같이 보냈지만 그녀에 대해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정신적으로 힘들지만 그래도 일을 해야 한다.

그는 샤워를 마치고 나와 식사를 한 뒤 레카린을 불렀다. 문을 열고 들어온 레카린은 걱정 어린 눈으로 카드란을 보았다.

“괜찮으십니까?”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나?”

“폐하께서 소리를 지르셨습니다.”

카드란의 안색이 굳었다.

“뭐라고 했나?”

“어머니, 살려 주세요.”

유이시엘로 있을 때 했던 말을 그대로 한 모양이다. 카드란은 조용히 웃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레카린 옆에 서 있던 기첼이 얼른 끼어들어 소리쳤다.

“무슨 일이 있으신 거죠?”

“없다.”

카드란은 그렇게 말한 뒤 옷을 챙겨 입었다. 그런 카드란을 보던 레카린과 기첼은 굳은 표정을 지었다.

그들이 자신을 걱정하는 것을 알지만 카드란은 정말 괜찮았다. 유이시엘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그때를 생각하면 훨씬 낫다.

만약 그녀가 죽었다면 더 끔찍했을 것이다.

‘아직 기회가 있어.’

평생 자신을 바라보지 않아도 좋다.

그저 살아만 있어 준다면, 그래서 자신에게 원망이라도 한 줄기 비쳐 줄지도 몰랐다. 만약 그러지 않는다 해도…….

“살아만 있어 줘…….”

그래, 그녀가 있어 주기만 하면 된다.

그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일단은 유이시엘이 보육원에 갈 테니 가기 전에 잘 다녀오라는 편지라도 보내고 싶었다. 자신이 얼굴을 자주 내비치면 그녀가 불편해할 테니까.

유이시엘이 너무 보고 싶지만 카드란은 마음을 삭였다.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 * *

유이시엘은 보육원에서 아이들을 만났다. 이제는 성녀가 아니었지만 아이들을 만나는 건 보람찬 일이었기에 웃으면서 아이들을 대했다.

“성녀님!”

“이제 나는 성녀가 아니란다.”

“그럼 뭐예요?”

한 여자아이의 질문에 유이시엘은 말문이 막혔다.

그렇다. 자신은 이제 성녀가 아니다. 그럼 무엇일까. 황비인 걸까. 그의 여자로 있는 것일까.

하지만 우리는 이제 아무런 관계도 아닌데?

그는 복수를 멈추었고 자신을 향해 분노를 퍼붓는 것을 끝냈다. 그렇다면 우리의 관계는 어떻게 정립되는 걸까.

“황비마마.”

보육원 원장이 그녀를 불렀다.

“부탁하신 자료입니다.”

“고마워요.”

보육원의 예산이 얼마나 들어갔는지 살피던 유이시엘의 눈동자가 천천히 한곳에 머물렀다.

유이시엘 로이체란이 아닌 유이시엘 엘리시아 록센나라고 적힌 자신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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