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 * *
봄이 되면 황궁에서는 연회가 열렸다. 그 준비는 황후가 해야 했지만 황후가 없기에 누엘이 준비할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유이시엘이 돌아오면서 세간의 이목이 그쪽으로 쏠렸다.
누엘이 유이시엘을 모신다는 이야기는 다들 알고 있었다. 그 말인즉 유이시엘을 황후로 대우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어떻게 하실까요?”
“설마 봄의 연회를 황비마마께서?”
“그건 모르는 일입니다만…….”
다들 수군거렸다. 헬몬 공작인 라젤란은 차를 마시며 가만히 말을 듣고 있었다. 특히 로이체란 가문과 인연을 끊은 이들은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았다.
문이 열리고 카드란이 들어왔다. 그는 곧바로 시종들을 시켜 귀족들에게 서류를 나누어 줬다.
“이게 무엇입니까?”
라젤란의 질문에 카드란이 짧게 대답했다.
“지난 10년간 황비가 성녀로 있으면서 행사 때 쓴 경비다. 예산을 한 치도 허투루 쓰지 않았지.”
그의 말에 귀족들은 눈을 크게 뜨고 서류를 살폈다. 카드란의 말대로 정말로 유이시엘은 잘못된 예산을 집행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알다시피 나라의 재정이 넉넉한 편이 아니다. 그래서 짐은 이번 봄의 연회를 황비에게 맡기고자 한다.”
“하지만 봄의 연회는 대부분 황후마마께서……!”
“짐의 아내는 황비뿐이다.”
카드란은 귀족들에게 단호히 말했다. 그에 다들 숨을 죽이며 눈치를 봤다. 카드란은 마치 앞으로 유이시엘 로이체란을 황후로 맞이할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도대체 유이시엘 로이체란이 무슨 짓을 했기에, 황제가 푹 빠졌단 말인가.
회의가 끝나고 다들 귀족들끼리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헬몬 공작 각하, 알고 계신 것 있습니까?”
“폐하께서 황비마마를 아주 특별히 생각하는 것은 알지요. 아주 특별히 말입니다.”
헬몬 공작은 그렇게 말하고 천천히 걸어갔다.
그들은 아직 근신에게 풀리지 않은 지에렌을 떠올렸다. 가문의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근신에 들어간 그에게 지금이라도 서신을 보내야 하는 게 아닌지 고민했다.
로이체란 가문이 망할 줄 알았는데, 유이시엘이 황후가 된다면 로이체란은 다시 황실의 외척이 된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 * *
유이시엘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카드란을 보고 일어났다. 코넬과 같이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가 오자 이야기의 흐름이 깨지고 말았다.
“짐은 커피.”
카드란의 말에 코넬이 얼른 커피를 타러 갔다. 그리고 그는 유이시엘 맞은편 자리에 앉았고 유이시엘도 마찬가지로 소파에 앉았다.
“봄의 연회 준비를 해야 할 거야.”
“제가 말인가요?”
“지에렌을 위해서라면 수락할 거라 생각했어.”
그는 어릴 적에도 사람의 생각을 잘 짐작했다. 그래서 그보고 귀신같다는 말을 종종 했었다.
“폐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할게요.”
“내키지 않는 거야?”
“아니에요.”
그가 말한 대로 지에렌의 위해서라면 봄의 연회를 준비해야 한다. 그녀는 주먹을 움켜쥐었다가 그를 바라보았다.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저에게 너무 신경 안 쓰셔도 될 것 같아요. 지금까지 해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유이시엘은 직설적으로 말했다.
“더 이상 해 주면 제가 불편해요.”
“……알았다.”
코넬이 커피를 들고 와 앞에 놓았다. 카드란은 커피를 마시며 그녀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의 뜨거운 시선에 유이시엘이 고개를 돌렸다.
“유이시엘, 그날 나와 춤을 추게 될 거다.”
“그래서요?”
“허락해 줄 건가?”
“저의 의사가 필요한가요?”
유이시엘은 되물었다. 이제 와서 그런 것들이 의미가 있느냐는 듯한 말투였다.
“나에게는 의미가 있어. 네가 싫어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아.”
카드란의 말에는 기운이 없었다.
“그럼 잠깐만 춰요.”
카드란과 가까이 있는 게 어색하고 불편했다. 마음이 죽어 그런지 몰라도 그를 보면 본능적으로 멀리하고 싶었다.
“……알았다.”
카드란은 잠시 동안 유이시엘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뜨거운 열기가 눈에 담겨 있었지만 그녀에게 어떠한 접촉도 시도하지 않고 인사를 한 뒤 방을 나왔다.
그가 나오고 난 뒤 유이시엘은 잠시 제 손을 바라보았다.
15살 때 키스를 하고 난 뒤 그는 자신의 입술을 자주 탐했다. 두 팔로 자신을 끌어안고 정신없이 볼과 눈에 키스를 퍼부었다.
그때 그의 열기, 그것이 카드란의 눈에 있었다.
“나는…….”
솔직히 그와 접촉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황비라는 이유로 잠자리를 요구한다면 당연히 거부할 생각이었다.
카드란도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냥 눈으로 자신을 보는 것으로 갈증을 채우는 것 같았다.
어차피 죽을 목숨인데.
“이제 와서.”
그래, 모든 것이 다 끝난 마당에 왜 그런 눈빛을 다시 보내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 * *
유이시엘이 봄의 연회를 맡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첼은 레카린을 찾아갔다. 레카린은 소엘과 함께 차를 마시고 있었다. 카드란이 유이시엘에게 호위 기사를 더 붙여서 소엘이 시간이 남은 것이었다.
“아, 손님이 있었군요.”
기첼의 말에 소엘이 얼른 일어났다.
“아닙니다. 저 곧 나가 보려고 했어요. 어서 이야기 나누십시오, 북의 총수님.”
“고마워요.”
기첼은 소엘에게 인사했다. 소엘은 얼른 레카린과 손을 한번 꼭 잡은 뒤 나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기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형님?”
“아니, 그게 말이다.”
“배신입니다. 전 아직 혼자인데……!”
기첼은 부러운 듯 소리쳤다. 레카린은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히고 기첼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보다 무슨 일로 온 거냐.”
“황비마마께서 봄의 연회를 준비하는 거 말입니다. 그것이 어떤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지 아십니까? 로이체란 가문으로 사람들이 다시 몰리고 있어요.”
“음…….”
레카린은 기첼을 보았다. 그는 전쟁터에서 로이체란 가문 사람을 상사로 만나 죽을 고생을 했다. 그렇다 보니 로이체란 가문에 개인적인 감정이 많았다.
“하지만 폐하께서는 황비마마님을 총애하는 거지, 로이체란 가문에 힘을 실어 주시는 건 아니다. 그리고 황비마마께서 그런 일을 하실 리 없고.”
“형님, 왜 이렇게 태연하십니까?”
“황비마마는 류크와 다른 인간이야.”
레카린의 말에 기첼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도 로이체란 사람입니다.”
기첼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절대 인정할 수 없습니다.”
기첼의 말을 들으며 레카린은 조금 걱정되었다. 수하들 중에서 기첼처럼 반응을 하는 이들이 한둘이 아닐 테니 말이다.
* * *
연회장에 음악이 울렸다. 봄의 연회를 맞이해 유이시엘이 한 예산 관리는 훌륭했다. 다들 유이시엘의 실력에 감탄했다. 황제가 직접 지시한 이유가 있다고 말하며 연회장에서 담소를 나누었다.
그리고 얼마 뒤 지에렌이 연회장으로 들어왔다. 근신이 풀린 그는 연회에 참석해도 된다는 카드란의 허락을 받고 온 것이었다.
그에게 사람들이 다가갔다. 헛기침하며 안부를 묻는 이들은 모두 다 로이체란 가문을 등졌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지에렌 역시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 이야기했다.
서로의 이해가 맞아들어 가기에 아직 지낼 수 있다. 지에렌은 그들에게 서운한 감정이 없었다. 그저 귀족 사회의 인맥은 비즈니스였기에 감정을 배제하고 그들을 대했다.
“황비께서 황후가 되시면 가문의 영광이지 않겠습니까?”
넌지시 떠보는 이도 있다. 지에렌은 그들에게 딱 잘라 말했다.
“아직 결정된 것은 없어서 말이에요.”
그의 화사한 미소에 다들 지에렌이 뭔가를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다.
정국은 그렇게 돌아가고 있었다.
* * *
“로이체란 가문의 많은 비리를 스스로 드러냈고, 거기에 대한 죗값을 치른다고 현 수장님께서 말씀하셔서 반감이 많이 줄어들었다고 해요. 류크와 다른 수장이라는 이야기도 나오고요.”
코넬은 오늘 들은 이야기를 유이시엘에게 알려 주었다. 유이시엘의 머리카락을 손질하던 누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코넬의 말이 맞습니다. 다들 로이체란에 대한 반감이 예전보다 덜합니다.”
그 말을 듣고 유이시엘은 정말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라버니가 일을 잘 처리하고 있으니 자신이 조금만 도와주면 될 것이었다.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머리카락을 풀고 웨이브 지게 했다. 거기에 파란 눈동자와 잘 어울리는 푸른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했다. 목걸이와 귀걸이는 카드란이 쓰라고 내려 준 것이었다.
“황후가 대대로 했던 거군요.”
유이시엘은 무심히 대답했다. 목걸이는 아름다웠지만 감흥이 없었다.
그냥 그가 선물을 주었구나, 그 사실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그녀에게 무의미한 일이 계속되고 있었다.
“폐하께서 드십니다.”
얼마 뒤 문을 열고 카드란이 들어왔다. 카드란은 예장을 하고 유이시엘을 보았다. 한참 멍하니 있던 그가 얼른 정신을 차리고 유이시엘에게 다가왔다.
“가도록 하지.”
유이시엘이 일어났다. 하지만 그의 손을 잡지 않았고, 카드란 역시 그녀에게 손을 내미는 일은 하지 않았다.
연회장까지 가는 마차도 따로 준비되어 있었다.
“연회장에서는 서로 친한 척했으면 좋겠어.”
유이시엘이 생각하기에도 확실히 그편이 더 나을 것 같았다. 유이시엘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알았어요. 해 드릴게요.”
“지에렌 로이체란을 위해서인가?”
카드란의 질문에 유이시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것을 물으세요.”
“그렇지.”
그는 또박또박 걸었다. 마차 안에 들어간 그를 보던 유이시엘은 다음 마차에 올라탔다. 카드란과 같이 공간에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는데 그가 알아서 분리해 주었다. 그는 자신이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았다. 카드란은 그것들을 교묘히 이용해 원하는 것을 얻어 내었다.
“나도 이용하고 있지만…….”
유이시엘은 창문을 보았다.
슬픔에 잠겨 있던 얼굴은 사라졌다. 감정이 없는 무표정한 여자가 창문에 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