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유이시엘은 형식적으로 인사했다. 카드란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를 끌어안고 그리웠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은 그녀에게 닿을 자격조차 없다. 그것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조금 떨어져 그녀의 뒤를 따랐다.
유이시엘의 방으로 들어간 카드란은 숨을 들이켰다.
소파에 앉아 차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유이시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전보다 평온한 얼굴이 보기 좋았다.
“오늘은 무엇이 궁금해 오셨나요?”
“황실 지하 창고의 서류를 다 봤다. 그리고 한 가지 힌트를 얻었다.”
유이시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엇인가요?”
그녀가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
“성물 안에 성녀가 있다. 이것이 힌트라고 하더군.”
“아, 그 구절 말이군요.”
유이시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구절이 성녀의 존재를 정확히 설명해 주는 거예요.”
“무슨 의미지?”
“성녀가 성물 때문에 존재한다는 거예요. 이외의 것을 물으셔도 저는 이 말밖에 할 수 없어요.”
그녀가 애매한 말을 했다. 카드란은 그 정도로도 만족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할 말은 다 하셨나요?”
유이시엘은 건조하게 물었다.
“아니.”
카드란은 두 손으로 깍지를 끼고 말했다.
“유이시엘, 황궁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유이시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가 황궁에 오라고 하는 순간 손끝이 싸늘해졌다.
그곳으로 오라고? 이 평온한 곳을 두고 그 처참한 기억들이 있는 곳으로 오라고?
“너를 곁에 두고 싶다.”
“제가 거부하면요?”
유이시엘이 단호하게 말했다. 카드란은 잠시 말문이 막힌 듯 그녀를 바라보다 시선을 돌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가꾼 꽃들을 본 그가 말했다.
“어쩔 수 없다. 강요는 아니니까.”
“그럼 가지 않을게요.”
유이시엘은 이곳을 떠나기 싫었다.
그녀의 말에 카드란은 억지를 부리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고 말없이 그녀를 놓아주었다.
만남은 짧았다. 카드란은 오래 있지 않다가 황궁으로 떠났다.
유이시엘이 그를 배웅하고 오는데, 코넬이 옆으로 붙었다.
“폐하께서 뭐라고 하셨어요?”
“황궁으로 오래.”
“세상에…….”
“가지 않겠다고 했어.”
“잘하셨어요.”
코넬 역시 유이시엘이 황궁으로 가는 것을 반대했다. 방으로 돌아온 유이시엘은 카드란이 앉았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거절하자 그가 더 이상 밀고 나가지 않았다. 이전의 카드란을 만난 듯했다.
“내게 정말 미안해하는구나.”
그래도 그가 잘못한 것을 알아서 다행이다. 만약 그런 것조차 못 깨달았더라면 인연을 잘라 버렸을 테니까.
마음이 없기에 그에게 누구보다 더 냉정히 대할 수 있다. 만약 카드란이 강제로 끌고 가려고 했다면 그대로 잠들었으리라.
그는 그런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영리한 건 여전해.”
유이시엘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마도……방법을 찾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차라리 모르는 게 나을 텐데.
그녀는 그렇게 방법을 찾아가는 카드란을 말리지도, 도와주지도 않고 그저 지켜보았다.
* * *
카드란과 레카린, 기첼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벌써 봄이 되었다. 카드란이 황제가 된 지도 벌써 1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세월 빠르군.”
카드란은 커피를 마시며 나직이 말했다. 그러자 맞은편에 앉은 레카린과 기첼이 맞장구치며 중얼거렸다.
“벌써 폐하께서 황제가 되신 지 1년이라니.”
“곧 있으면 30이 넘으시겠습니다.”
“그런가?”
카드란은 자신의 나이를 생각했다.
그렇게나 세월이 흘렀다. 유이시엘은 자신과 동갑이니 그녀도 그 나이가 되었다.
자신은 그녀가 살려 준 덕분에 살아남았고, 그녀는 그 대가로 죽어 간다. 정말로 인정하기 싫은 현실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황후 간택은 안 하실 것입니까?”
기첼의 질문에 레카린이 얼른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렇지만 기첼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냥 둬라.”
카드란은 이 기회에 충신들에게는 말할 생각이었다.
“짐은 황비로 만족해.”
“네?”
기첼이 놀라는 걸 보고 카드란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 이외의 다른 부인을 들일 생각이 없어.”
“그럼 그분이 황후가 됩니까?”
“본인은 싫다고 하겠지만 언젠가 그리 할 생각이다. 그리고 그녀가 먼저 죽는다면 혼자 살 거다.”
그리 말한 뒤 카드란은 커피 잔을 응시했다. 커피 색이 유난히 검고 어두웠다.
“그건 황비마마께서도 바라지 않는 일일 겁니다.”
기첼이 얼른 소리쳤다.
“알아.”
카드란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지만 후계자라면 적당히 물색하면 된다. 꼭 직계로 잇지 않아도 되니 방계 혈족 중에서 똑똑한 아이로 고르면 되겠군.”
카드란은 유이시엘이 낳은 아이가 아니라면 굳이 사랑을 줄 생각도 없었다. 후계자야 적당한 사람으로 골라 주면 되니, 굳이 후계자 생산을 위해 결혼을 하고 싶지 않았다.
“황비에게는 말하지 말도록.”
카드란의 말에 기첼과 레카린은 굳은 표정을 지었다.
“사고 치지 말란 뜻이다.”
카드란은 그렇게 말한 뒤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자신의 이런 결심이 유이시엘의 귀에 들어가는 것은 원치 않았다.
그러고 기첼과 레카린이 나간 뒤 역시나 성물이 나타나 카드란 주변을 맴돌았다. 자신을 감시하는 작은 존재였다.
“왜 유이시엘에게 말하지 않는 거야? 그런 말을 하면 그녀가 죄책감을 가져서 마음을 움직일지도 모르잖아.”
성물의 질문에 카드란은 성물을 노려보았다.
“그런 짓은 못 합니다.”
그는 단호히 말한 뒤 몸을 돌렸다. 그리고 서류를 마저 정리하러 갔다. 성물은 자신과 대화를 거부하는 카드란의 뒤통수를 보고 휘파람을 불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신에게 유리한 틈새가 생기면 그것을 이용하지 않고는 못 견디는데, 저 남자는 이상했다. 복수를 위해 해서는 안 되는 짓을 했던 주제에 선을 지키려고 한다.
“스스로도 이상하다는 건 알고 있지?”
카드란은 대꾸하지 않았다. 성물은 그를 바라보다 사라졌다.
이 사실을 유이시엘에게 말하면 어찌 될까.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 * *
유이시엘은 잠을 자고 있었다. 꿈속에서 아주 그리운 사람을 만났다.
〈유이시엘.〉
셀린이 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다정하고 따뜻한 느낌에 유이시엘은 눈을 감았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
마치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는 듯했다.
〈아니에요.〉
〈힘들면 그냥 멈춰도 된단다.〉
셀린은 유이시엘이 카드란에게 가지 않은 것을 원망하지 않는 듯했다. 유이시엘은 슬픈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앞에만 서면 마음이 죽은 것을 느낀다.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이따금 슬프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마음을 살릴 수는 없다.
〈괜찮아, 유이시엘.〉
그 말을 들으며 유이시엘은 눈을 떴다. 일어나니 허공에서 성물이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신가요?”
성물은 날갯짓을 하며 다가와 그녀의 옆에 앉았다.
“카드란이 너 죽고 나면 혼자 살겠다고 하네.”
“그가요?”
“응, 유이시엘에게는 알리지 말라고 했지만.”
성물은 싱긋 웃었다.
“내가 그래서 죄책감을 이용하라고 했지. 유이시엘이라면 듣고 마음이 흔들릴지도 모른다고.”
“그는 거절했나요?”
질문을 들은 성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않았으면 알려 주지 않았을 거야.”
성물은 단호히 말한 뒤 그녀를 응시했다.
“카드란에 대해 무감각한 건 알아. 그런데 그도 좀 곤란한 일이 생겨서 말이야. 황후 책봉하라고 말들이 많거든. 지에렌의 기반이 많이 약해지기도 했고.”
유이시엘은 성물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셀린이 떠올랐다. 자신을 아껴 주고 다정히 대해 주던 카드란의 어머니. 그녀를 만나고 나니 마음이 약해진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런데 성물의 이야기를 들으니 솔직히 흔들렸다. 그가 말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하니 마음이 움직였다.
“내일 돌아간다고 카드란에게 전해 주세요.”
“정말로?”
“지에렌 오라버니를 무시할 수 없어요.”
한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울컥하지만 지에렌의 지지 기반이 완전히 무너지기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는 그래도 자신을 지켜 주려 애썼다.
그리고…… 언제까지 원망만 할 수 없다. 곧 죽는데, 그런 감정에 휘말려 죽기 전에 후회할 짓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내가 카드란에게 알려 줄까?”
“그럼 좋고요.”
편지를 쓰면 황궁으로 가는 시간이 늦어진다. 그녀의 말에 성물은 기분이 좋은 듯 미소를 지었다.
성물이 사라지고 나서 유이시엘은 쓴웃음을 지었다.
“차라리 비겁하게 나왔으면 편안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랬더라면 상대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을 텐데.
유이시엘은 가슴을 꾹 눌렀다.
그가 했던 폭언과 잔인한 행동, 그리고 지금 자신에게 하는 행동이 동시에 떠올랐다.
그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