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0화 (60/97)

60화

* * *

카드란은 눈을 떴다. 오늘도 지하 창고에서 밤늦게까지 서류를 보다가 잠이 든 것 같았다. 그는 일어나 머리를 쓸어 넘기고 어제 보았던 자료를 확인했다.

처음에는 역대 황제들이 성물에 대해 적어 둔 자료만 있는 줄 알았다. 죽기 직전에 유언처럼 남긴 것만 말이다. 그런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변을 살피다 비밀 통로를 하나 발견했다.

그곳에는 역대 황제들이 남겨 둔 또 다른 자료가 있었다. 강제로 성녀를 만들기 시작한 이후부터의 기록인 것 같았다.

강제로 성녀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무척이나 오래전이었다. 적어도 몇백 년은 된 듯했다.

그들은 성녀로 만들 사람을 정해 놓고 소녀들을 데려다 불에 태워 죽였다. 그리고 생명력을 정해진 사람에게 주입시켜 성녀로 만들었다.

원래 성녀의 후보는 생명력이 강하게 태어나는 사람이었다. 몇 대에 걸쳐 한 번만 나올 수도 있었고, 후보도 1명이었다. 그런데 이 방법을 사용하면서 성녀의 후보가 여럿이 되었다.

그들은 성녀를 인위적으로 만들면서 생겨난 것들을 적었다.

그런데 이 방법을 도대체 어떻게 알게 된 걸까.

의외로 성녀의 생명력을 연장하려고 했던 이들도 있었다. 성녀를 사랑했던 황제들은 그 방법을 찾아내, 생명력을 연장하려 했지만 제국을 위해서 결국 하지 못했다고 적어 두었다.

성물에게서 성녀가 나오기에……나는 방법을 알았으나 결국 실패했다.

무슨 방법인지는 글씨가 뭉개져 보이지 않았다. 불에 태운 것처럼 그 부분만 그을려 있었다. 아무래도 성물의 힘으로 가린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구절이 계속 마음에 걸리더니 다른 데에도 있었다.

“무슨 뜻인지 물어봐야 하는 것인가.”

결국 몇 달간 서류를 뒤진 결과 알아낸 것은 이 구절이 성녀를 구하는 방법과 관련이 있다는 것뿐이었다.

드래곤은 성물과의 맹약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알려 줄 수 없다고 했고, 남은 것은 유이시엘뿐이었다.

“유엘…….”

라젤란 말로는 잘 지내고 있다고 한다. 평온하게 잠도 자고, 사람들하고 나와서 같이 어울린다고.

자신이 없기에 더욱더 편안할지 몰랐다. 그녀의 평화를 깨뜨리는 건 자신이니까.

하지만 이번엔 유이시엘을 만나야 했다.

그녀가 거절한다 해도 일단 부딪쳐 볼 생각이었다.

“유이시엘에게 가는 거야?”

카드란의 생각을 읽은 듯 성물이 나타났다.

“만나러 갑니다.”

그는 그렇게 말한 뒤 서류를 정리했다. 그것을 본 성물은 카드란에게 물었다.

“여기 서류들을 다 봤네. 정말이지, 대단한걸?”

성물은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서류 양에 질려서 포기할 줄 알았는데.”

성물의 솔직한 말에 카드란은 성물을 흘겨보았다.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 말을 남기고 방을 나갔다. 카드란이 나가자 성물이 입술에 호선을 그렸다.

“너는 어떤 선택을 할까.”

성녀를 살리고자 했던 황제들은 간간이 있었다. 성녀를 사랑했던 이들도 많았다. 하지만 다들 중도에 포기하고 운명을 받아들였다.

유이시엘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고 그에게 도리어 죽여 달라고 말한 것일지도 몰랐다.

일단은 카드란이 어떤 선택을 할지 모르지만…….

“난 나대로 준비를 해야겠군.”

오랜만에 황제와 성녀가 서로 사랑한다. 그리고 황제는 성녀를 살리고자 했다. 이런 기회가 다시 오려면 얼마나 긴 시간을 기다려야 할지 몰랐다.

그렇기에 이번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되었다.

“별로 기대는 하지 않지만.”

그래도 안 해 두는 것보다 낫겠지. 이번 황제는 다른 황제와 다른 면이 많으니까.

만약 카드란이 강제로 성녀를 만들었다면 그를 그냥 놔두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번 기회를 주는 것이었다. 자신을 위한 기회였고 황제를 위한 일이었다.

“카드란 엘리시나 록센나, 너에게 희망을 걸어도 되려나.”

희망을 걸어도 늘 실패했다. 그렇기에 희망은 성물에게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기대를 안 할 수가 없었다. 혹시나 하는 가능성이 성물을 움직이게 했다.

“류크 로이체란.”

이번 일을 하는 데 아주 제격인 남자였다. 그에게 이번 일을 맡기면 아주 휼륭하게 역할을 해낼 것 같았다. 그는 카드란과 유이시엘을 모두 증오하는 남자니까.

심지어 아무도 오지 않은 탑에서 홀로 외로움이 죽어 가는 류크가 아닌가. 카드란에 대한 증오심이 극도에 달했을 것이었다.

* * *

라젤란은 유이시엘과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녀는 우아하게 머리를 틀어 올리고 나직한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들었다. 평화로운 이 시간을 진심으로 즐기고 있었다.

“페하께서 보낸 서신입니다.”

그가 준 편지를 본 유이시엘의 표정은 건조했다. 그녀는 편지를 바라보다 옆에 두었다.

“알겠어요. 차 다 마시고 볼게요.”

황제가 편지를 보냈어도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여전히 황제에게 무심한 유이시엘을 보며 라젤란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전보다 평온해진 얼굴은 보기 좋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의 상처가 낫는 것은 아니었다.

“라젤란 님.”

라젤란이 이름을 부르라고 했기에 유이시엘은 그를 그렇게 불렀다.

“말씀하십시오.”

“제가 죽으면 코넬을 부탁해도 될까요?”

유이시엘의 마지막 남은 걱정은 코넬인가 보다.

“물론입니다.”

라젤란은 싱긋 웃었다.

“휴이가 코넬을 마음에 들어 합니다. 휴이의 시녀로 삼겠습니다.”

“정말로 고마워요.”

유이시엘이 아들을 살려 주었을 때가 떠오른다. 자신의 아들을 살려 줄 테니 그 대가로 나중에 카드란을 도와 달라고 했던 유이시엘, 아마 그녀는 그때 스스로가 이렇게 무심해질 거라고 생각지 않았을 것이었다.

차를 다 마신 유이시엘이 편지를 들고 일어났다.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라젤란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자신 역시 그녀가 좀 더 살았으면 좋겠다. 그녀가 죽어 버리면 황제가 어떻게 무너질지 상상이 되기 때문이었다.

제국을 위해서도 그것은 좋지 않았다.

* * *

방으로 돌아온 유이시엘은 편지 봉투를 열었다. 그곳에는 카드란이 편지가 들어 있었다. 찬찬히 적은 편지 마지막 글귀가 보였다.

날씨가 좋아졌어. 이틀 뒤 12시쯤 보러 가겠다.

죽기 전까지 그가 오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곧 올 거라니.

그를 마주할 때마다 자신이 망가진 것을 깨달았다. 불편하긴 했지만 이젠 그것마저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더욱더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인지도 몰랐다.

“황제가 결국 편지를 보냈네.”

성물이 나타나 날개의 가루를 흩날리며 그녀의 주위를 맴돌았다.

“원래 성녀는 이맘때 거의 잠만 자는 거 알지?”

“덕분이에요.”

“1달 정도 남았어.”

성물의 말에 유이시엘의 손짓이 멈추었다.

“폐하께서도 알고 있나요?”

“알고 있지. 내가 매일 알려 주니까.”

성물이 웃었다.

“그때마다 절규하지만, 그래도 안 듣지는 않아. 자기가 한 짓이 얼마나 미친 짓이었는지 모르진 않거든.”

유이시엘은 성물의 말을 듣고 미소를 지었다.

“성물이 가장 잔인해요.”

“내가 어때서?”

“폐하를 괴롭게 하는 게 좋아요?”

성물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응, 재미있어. 그 남자도 자신이 한 짓이 어떤 것이었는지 알아야지. 그래야 좀 더 반성하지.”

“무슨 목적이세요? 이상하게 어릴 적부터 폐하께 지대한 관심을 가지셨었잖아요.”

어떻게 보면 성물은 카드란에게 집착하고 있었다. 다른 황제와 달리 카드란을 무척이나 살폈다. 말은 괴롭힌다고 하지만 그를 벼랑으로 몰아서 뭔가를 얻으려는 것 같았다.

“너무 나댔나.”

성물은 그렇게 말하고 바닥에 섰다.

“어차피 곧 알게 될 거야. 그런데 별로 관심도 없잖아.”

“그건 맞아요.”

“그럼 묻지 마.”

성물은 그리 말한 뒤 사라졌다. 자신의 목적을 들키기 싫어하는 것 같았다.

카드란을 이용해 무슨 일을 꾸미려는 걸까.

그러다 곧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차피 자신이 죽고 난 뒤의 일일 것이다. 별로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

봄이 온 듯 창문으로 들어온 햇살은 따뜻했다. 하지만 카드란을 향한 그녀의 마음은 무미건조했다.

* * *

카드란은 마차에 앉아 창문을 바라보았다. 유이시엘에게 편지를 쓴 지 이틀이 지났다. 그녀는 이번에도 자신을 무심히 대할 것이었다.

살 수 있는 기간이 1달이라고 한다.

카드란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1달 안에 무슨 일을 써서라도 그녀를 살려야 했다. 그러지 못하면 정말로 돌이킬 수 없게 된다.

마차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레카린이 문을 열어 주었고 카드란은 일단 내렸다. 햇살이 이곳을 비추어 따뜻했다. 날씨가 좋은 봄날이었다.

카드란이 도착하자 기다리고 있던 시녀들이 얼른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뒤 유이시엘이 현관문을 열고 나오더니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폐하, 어서 오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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