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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화 (58/97)

58화

마차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내렸다. 짧은 단발에 코트를 입은 그는 유이시엘을 보자 당황한 듯 시선을 주었다. 그녀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던 그가 물었다.

“잘 지내고 있나?”

그가 걱정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이전보다 많이 마른 그를 보며 유이시엘은 형식적인 답변을 해 주었다.

“헬몬 공작께서 신경 써 주고 있어요.”

카드란이 유이시엘에게 다가왔다.

“유이시엘…….”

눈이 그들 사이로 내렸다. 한참을 내리던 눈이 그의 말을 앗아 간 듯 그는 한참 동안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가만히 있었다.

“하실 말씀이 없다면 전 들어가 볼게요.”

유이시엘은 돌아섰다. 그러자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너는 원치 않겠지만. 나는 네가 좀 더 살기를 바란다.”

그의 말에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왜 제게 그런 말씀을 하시나요?”

“성녀가 살 수 있는 방법을 아는가?”

그의 질문에 유이시엘은 자신이 성녀가 되었을 때 들어왔던 여러 지식들을 떠올렸다. 성녀의 지식은 성물이 그대로 성녀에게 주입해 주었다. 그렇기에 누가 알려 주지 않아도 성녀에 대해서 잘 알 수 있었다.

물론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안다고 해도 말할 수 없어요.”

“왜지?”

“성녀가 그 사실을 말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어요. 그리고…… 황제도 그것을 발설하지 못해요. 모두 다 성물을 보호하기 위해서예요.”

“도대체…… 왜 그런 게 있단 말인가.”

“그만큼 성녀를 살리는 건 위험한 일이에요.”

유이시엘의 나직한 말에 카드란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녀의 말이 거짓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그래도 짐은 유이시엘, 그대를…….”

그는 말을 하려다 이를 악물었다.

“제발 살아 줘.”

그가 애원하듯 말했다. 기억을 되찾고 자신이 무심해진 뒤로 그가 처음으로 건넨 부탁이었다. 유이시엘은 자신을 잡은 그의 손을 뿌리치고 뒤로 물러났다.

“제가 사는 것을 바란다고 생각하세요?”

류크가 찾아온 이후로 그녀의 인생은 슬픔뿐이었다. 겹겹이 쌓인 슬픔은 그와 관련된 감정을 앗아 갔다.

그녀는 더 이상 그동안 겪었던 감정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이제는 멈추고 싶었다.

“살고 싶지 않아 하는 것을 알고 있다.”

카드란은 텅 빈 손으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녀가 뿌리친 손이 무척이나 아팠다.

“그렇지만 나는 널 살려야겠어, 유엘.”

지금이라도 잘못된 것을 되돌려야 한다. 유이시엘이 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렇게 해야 했다.

그녀가 죽어 버리면 모든 것이 끝이 난다. 자신은 속죄를 할 수 없다.

이기적이지만 그렇게 하기로 했다. 그것이 그녀의 화를 사는 일이라 할지라도 실행할 것임을 결심했다.

“어떤 방법인지 아시면 폐하께서도 그런 말씀을 못 하실 거예요.”

유이시엘은 몸을 돌렸다.

“전 살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폐하께서 저를 살릴 방법을 찾으시는 것은 말리지 않을 게요. 찾는다면 도리어 못 하실 거라고 생각해요.”

도대체 무슨 방법이기에 유이시엘이 저런 말을 한단 말인가.

“유이시엘.”

“들어가 볼게요.”

유이시엘은 코트를 움켜쥐고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저택의 현관문이 닫히고 유이시엘은 자리에 주저앉았다.

〈제발 살아 줘.〉

그가 그런 말을 했다. 이제 와서.

“후우.”

살아서 뭐 한단 말인가. 그의 저런 눈빛을 바라보며, 자신이 한 일이 무용지물이 된 현실만 마주하란 말인가.

도대체 그거에 무슨 의미가 있다고.

유이시엘은 쓴웃음을 지었다.

“오라버니가 틀렸어요.”

세상에는 모르는 게 나은 것도 있다. 모든 진실을 밝힐 필요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지에렌이 했던 말을 부정했다.

진실은 밝히지 않는 게 옳았다. 카드란은 방법을 알고 또다시 절망하게 될 것이었다.

“도대체…….”

그때 코넬과 소엘이 다가왔다.

“성녀님, 오래 못살아요?”

코넬의 질문에 유이시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녀의 운명이지.”

“하지만…… 어째서?”

슬퍼하는 코넬을 유이시엘이 끌어안아 주었다.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아. 코넬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너무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안식으로 떠나는 길이다. 반가운 길이었기에 유이시엘은 웃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코넬과 소엘은 눈물을 흘렸다.

* * *

록센나 제국 황궁 지하에는 비밀 서고가 있다. 황제만이 출입할 수 있도록 성물의 힘으로 보호받는 이곳에는 역대 황제들이 성물에 대해 기록해 놓은 자료들이 있었다. 그곳에 성녀를 살리는 방법이 있을 거라던 로드의 말을 기억한 카드란은 외투를 걸치고 지하실로 내려갔다.

레카린과 기첼은 카드란을 호위하며 따라왔다. 원래는 카드란 혼자 가려는 것을 레카린이 막으며 기첼을 데리고 와 같이 온 것이었다.

지하실의 문은 황금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무거운 문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성물의 인정을 받은 황제뿐이었다.

카드란이 가볍게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을 레카린과 기첼은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가 들어가고 난 뒤 기첼은 두 손으로 머리를 꾹 누르며 중얼거렸다.

“꼭 성녀를 살려야 할까요? 로이체란 사람이잖아요.”

기첼은 여전히 성녀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의 말에 레카린이 턱을 쓰다듬다가 고개를 저었다.

“폐하께서 찾으시던 분인 것 같았다.”

“정말로요?”

기첼은 이전부터 카드란이 어떤 소녀를 찾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그녀가 바로 성녀라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가 모르는 사정이 있는 것 같아.”

“그래도, 로이체란 사람인데…….”

“뭐, 성녀님은 류크와 다른 사람인 것 같긴 해.”

레카린은 카드란이 트집을 잡으려 유이시엘에 대해 온갖 조사를 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하지만 카드란은 유이시엘이 류크와 다른 사람이라고 결론을 내렸고, 레카린 역시 거기에 동의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깨끗할 리가…….”

“새롭게 실권을 잡은 로이체란 가문의 수장은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도 들고.”

“그래도 로이체란 가문이 한 짓은 사라지지 않아요.”

기첼은 로이체란 가문에 대한 반감이 아직도 굳건했다. 그를 본 레카린이 기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일단 폐하께서 황비마마를 사랑하고 계신다.”

“네…….”

이것만으로 그녀가 살아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고 레카린이 말했다. 기첼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고 카드란이 들어간 황금색 문을 바라보았다.

* * *

카드란은 길게 이어진 복도를 걸었다. 벽에 램프가 걸려 빛을 내고 있었지만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곳이기에 밖보다 어두웠다.

역대 황제들이 쓴, 성물에 대한 자료가 있는 방에 도착했다. 카드란은 문을 열고 들어가 주변을 살폈다.

카드란은 초대 황제인 라히엘의 기록을 살폈다. 라히엘은 제국을 세우고 황제가 되었는데 황후는 없이 정부만 두었고, 정부 사이에 생긴 아들을 정식 황자로 삼아 후계자로 정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일단 그의 기록부터 살펴야 할 것 같았다.

그는 가장 꼭대기에 있는 칸에 놓인 라히엘 엘리시나 록센나라고 적힌 파일을 열었다. 그곳에는 초대 황제가 죽기 전에 쓴 성물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성물이란 존재에 대한 기록을 여기에 남긴다. 후손들은 성물을 제국을 번창시키는 데 사용하라. 성물에 성녀가 있으니, 그것을 항상 잊지 말아라.

기록된 역사에 따르면 처음부터 성물의 존재가 제국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혹시 초대 황제 다음 대부터 사용한 걸까. 카드란의 예상대로 초대 황제 아들의 기록을 살피니 성물과 관련된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처음부터 없었더라면……. 성물은 사람을 현혹한다.

“어째서?”

역대 황제들의 기록에는 성물에 대해 온통 안 좋은 이야기만 적혀 있었다. 성물이니 좋은 말이 더 많아야 하는 것 아닌가?

뭔가 비밀이 있는 것일까.

카드란은 중간쯤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빨간색 글씨로 황제가 적어 둔 게 눈에 들어왔다.

성물의 입에 놀아난 나를 저주한다.

그리고 나머지는 불에 탄 것처럼 검게 그을려 있었다. 종이의 내용을 알아볼 수 없었다.

“이건 뭐지?”

카드란은 당황해하며 다음 대 황제의 것을 보았다. 그곳에도 빨간 글씨로 성물에 놀아난 자신에 대해 저주한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도대체 왜 이렇단 말인가.

“나의 잘못이 아니야.”

빛이 모이며 성물이 나타났다. 날갯짓을 하며 움직이던 성물은 황제들이 남긴 기록들을 보고 살짝 웃었다.

“인간으로서 해선 안 되는 일들을 바라 놓고, 안 들어줘서 그런 거라고.”

성물은 팔짱을 끼고 기록들을 바라보았다.

카드란은 성물이 한 말을 듣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그들이 바란 게 무엇입니까?”

“그건 비밀이지. 개인 사정들이잖아.”

성물은 자세한 내용을 말하는 것을 거절했다. 카드란은 성물을 바라보다 다시 기록들을 살폈다.

역대 황제들의 기록 중엔 성물에 대한 좋은 이야기는 하나도 없었다. 모두 다 나쁜 것만 적어 두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성물을 없애지 않았다. 아니, 없앨 수 없는 존재니까 어쩔 수 없이 그랬던 건지도 모르겠다.

카드란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성물 안에 성녀가 있다.

이 구절이 마음에 걸렸다.

마치 자신을 향해 손짓을 하는 듯 글들이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혹시 사라진 황제들의 기록을 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그는 성물을 응시했다.

“볼 수는 있는데 죽기 1달 전에 볼 수 있어.”

“어째서입니까?”

“그때 성물에 대해 기록을 할 수 있거든. 물론 갑자기 사망하는 경우에는 나의 힘으로 짧은 시간 안에 작성하게 해 줘.”

성물은 웃었다. 그 웃음이 어딘지 싸늘해 보이는 것은 착각이 아닐 것이었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그는 성물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현신해서 작은 소녀의 모습으로 있는 성물의 실체가 궁금했다.

“성물의 본체는 어디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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